한국경제

기사 2024/05/18 21:53

쓰레기 신문 <한국경제>도 읽을 만한 글들이 있다.
연극, 영화, 전시, 도서와 관련한 글들은 읽을 만하다.

내가 있는 대학 공동연구실은 처음 생길 때부터 <경향신문>을 구독했는데, 재작년부터 신문 지국에서 <한국경제>를 함께 보내준다. 아마 구독을 바라는 홍보용일 텐데 이게 아직도 계속 온다. 아주 가끔 몇 개 기사를 읽는다. 문화 정보를 다루는 면을 가끔 펼쳐 보는데 오늘은 쌓여 있는 신문을 하나 집어서 펼쳐 이 글을 읽었다. 단순한 공연 정보라기에는 좀 셈세하고 비평이라고 하기에는 부족한 글이다.

>> 마침내 홀로 선 19세기 신여성 노라와 아직까지도 남아있는 '노라'들 이야기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24/05/18 21:53 2024/05/18 21:53

불현듯 든 생각들

일상 2024/05/14 21:25
살다 보면 한두 가지 예기치 않은 일이 생기는 모양이다. 나는 소년기와 청년기 시절 전혀 꿈도 꾸지 않았던 일을 평생 직업으로 갖게 된 것과 고양이를 만나 함께 살게 된 일이다.

나는 소년기에는 시인이 되고 싶었고 청년기에는 소설가와 시나리오 작가가 되고 싶었다. 대학도 관련 학과를 졸업했다. 그런데 나는 서른이 조금 지나 철학을 전공하고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치며 먹고 살고 있다. 이제 나이 오십 중반이고 대학에서 비정규직 교수로 강의하며 산 세월이 20년이니 대학을 떠나 다른 직업을 구하기는 물건너간 셈이다.

50이 되기 이전에는 자주 "이 망할 대학"을 빨리 벗어나서 다른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대학에서 짤리지 않고 정년까지 붙어 있을 수 있기를 기원하는 꼴이 되었다. 나이 탓이다. 점점 도전적이고 새로운 뭔가를 추구하지 않으려고 한다. 하고 싶은 일은 대학을 65세까지 무난히 붙어 있다 나중에 해도 된다고 위안하는 것이다.

고양이와 만나는 것은 어떻게 보면 필연적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다른 사람들은 어떤지 모르지만 감상적인 편이라 나이가 들어도 드라마를 보면 감정이 시큰해지기도 한다. 연민을 잘 느끼고 정서적으로 보수적인 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마흔 이전에는 고양이를 본 적이 없다. 관심이 없으니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 같다.

마흔이 조금 지나면서 학내에서 길에서 고양이들이 조금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마 마흔까지 나와 세계에 대한 시각이 너무 견고해서 인간이 아닌 다른 것에 마음을 두기 어려웠던 모양이다. 여튼 고양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나의 세계가 다른 세계와 접촉하고 연결되는 과정이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어떤 필연적인 계기가 작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게 된 것이다.

최근 이런 고민들이 나를 돌아보게 만든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24/05/14 21:25 2024/05/14 21:25

독립연구자라는 생소한 말을 처음 접했을 때 조금 의아했다. 독립영화라는 말은 알고 있지만 독립연구자는 처음이었다. 나는 독립영화 감독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비웃었다. 지금도 독립영화라는 말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독립영화는 거대 자본(투자자)의 투자를 받지 못하고 정부나 지방자치단체의 보조금이나 아주 적은 돈으로 만드는 영화를 말한다.

독립영화나 독립영화 감독이란 말은 자조적인 표현인 셈이다. 거대 자본의 투자를 받지 못한 무능력의 다른 말이기도 하다. 의도적으로 거대 자본의 투자를 거부하고 적은 돈으로 "독립" 영화를 만드는 사람은 없다. 지금은 독립영화 감독이지만 곧 거대 자본의 투자를 받아 상업영화를 만들고야 말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고 봐야 한다. 독립영화는 상업영화 감독이 되어 "독립"하겠다는 의지가 숨어 있는 표현이다.

그런데 독립연구자는 독립영화 감독과 사정이 좀 다르다. 독립연구자는 자본으로부터의 독립이 아니라 대학으로부터의 독립을 말한다. 대학에서 비정규직이라도 자리를 얻지 못하고 대학 바깥에서 연구를 수행하는 연구자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사실 대학 밖에서 개별적으로, 독립적으로 연구를 수행하기란 쉽지 않다. 대학에서 강의는 연구를 위한 지렛대 역할을 한다. 연구와 강의는 변증법적인 관계에 있다. 연구의 과정과 성과가 강의를 통해 표현되고(또는 강의 과정에 스며들고) 강의와 강의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그 결과가 연구 결과물로 형성된다. 물론 이 두 과정이 반드시 인과적인 것은 아니다.

대학에 적을 두고 있지 않는 독립연구자가 연구를 지속하는 것은 쉽지 않다. 연구는 어떤 면에서 자발적이라기보다 비자발적인 측면이 더 강하다. 말하자면 대학에서 연구자들은 정규직 교수든 비정규직 교수든 연구성과를 내야 하는 압박에 의해 마지못해 연구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비정규직 교수는 특히 연구 성과가 계약과 재계약의 조건이 되기 때문에 양적으로 연구 성과를 내지 않을 수 없다. 물론 대학에서 정규직 교수는 비정규직 교수와 사정이 좀 다르지만 연구 성과에 압박을 받기는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런 타율적인 연구가 오히려 연구를 촉진시키고 발전시키는 면이 크다. 보상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굳이 시간에 쫓기면서 여러 책을 읽고 다른 연구자들의 연구 논문을 읽으면서 연구 성과물을 만들 이유가 있을까? 쓰기보다 읽기가 쉽고 쓰는 것보다 읽는 편이 더 재미있다는 것을 모르는 연구자는 없다. 그래서 독립연구자들은 위대한 사람들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24/05/12 21:21 2024/05/12 2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