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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판소리 - 인당수 앞에선 우리들의 이야기 "바리데기"

  • 등록일
    2011/01/03 01:29
  • 수정일
    2011/01/03 01:29

 

 

사용자 삽입 이미지

 

 

 

.......

 

공연을 무사히 잘 마쳤다. 

 

무대에 선 정희가 행복을 느꼈다 하고,

 

관객들도 새로운 스타일을 경험했다 하니,

 

이 정도면 후회하지 않을 출발은 된 것.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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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루홈런의 꿈, 인필드플라이의 삶

  • 등록일
    2010/11/17 15:58
  • 수정일
    2010/11/17 15:59

 

과거에 썼던 글이 생각이 났다. 그가 갔으니까. 경기문화재단 홈페이지 어딘가에 먹고살자고 남이야기를 매주 써대던 시절이었던 것 같다. 

 

언젠가 찾아갔던 어느 공연에서 달빛요정이 무당 이야기를 했다. 누가 자기보고 무당이랬다고. 내 이야기인가 싶어 기분이 매우 묘했다. 하지만, 이렇듯 사소한 인연도 이젠 안녕이구나. 슬픈 일이다. 그냥 그 작은 인연을 추억하고 (또 뭔가 티를 내고) 싶어 이렇게 옛날 이야기를 새삼 다시 들추어 내본다.

 

 

= 만루홈런의 꿈, 인필드플라이의 삶 =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오랜만에 참 좋은 노래를 들었다. 노래를 듣고 있으면 입가에 웃음이 돌긴 하지만 달콤한 맛 보다는 쓴 맛이 입안을 감도는 그런 노래다. 또한 그 맛이 쓰다 한들 입에 담긴 한 방울이라도 허투루 생각지 않게 되는 좋은 약처럼 내 삶에 푸근하게 쓴소리를 던져줄 수 있는 좋은 친구같은 노래다. 가수의 이름은 오래전 박봉성의 만화에서 따왔다고 하는데 노래 분위기랑은 잘 어울리지 않는 듯하다. 이름하여 원맨 프로젝트 밴드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 프로젝트를 이끄는 원맨은 ‘신인 가수’라고 말하기는 좀 쑥스러운 73년생, 이름은 이진원이라 한다.

 

<역전만루홈런>이라는 이름에 딱 어울리게도 이 밴드의 홈페이지 대문에는 근육질의 한 남성이 야구 방망이를 꾹 움켜쥐고 마치 멋진 만루홈런이라도 후려칠 듯한 모습으로 지켜서 있다. 그러나, 대충 30대를 전후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 마치 사천왕(四天王)처럼 대문을 지키고 있는 근육질 남성의 이름이 사실은 ‘삼미’라는 것을. 너구리 장명부, 수퍼스타 감사용 등을 배출하고 프로야구사에 수많은 금자탑을, 다른 팀들이 세울 수 있도록 눈부신 활약을 펼쳤던 잊을 수 없는 그 이름 ‘삼미 슈퍼스타즈’.

 

‘삼미’를 앞세운 뮤지션이 왠 가당치 않은 <역전만루홈런>을 밴드의 이름으로 삼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반대로 거지들이 야구팀을 만든다고 해서 꼭 ‘거지스’라고 해야 하는가, 하는 의문도 꼭 그 만큼의 크기로 함께 떠올랐다. 80년대를 풍미했던 세계적인 팝 가수 프린스(Prince)의 이름과 그의 노래 스타일에서도 그렇듯, 누군가의 이름이 삶의 정체성을 규정해야 할 필요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 이름은 이름, 삶은 삶일 뿐. 아니나 다를까,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의 이름을 가진 이 프로젝트 밴드의 음반 내용은, 앨범 제목은, 허무하게도, 정말 이다지도 허무하게도 <인필드플라이Infield Fly>다.

 

인필드 플라이의 의미에 대해 간단히 설명하자면 이거다. 득점권에 주자가 가득한 긴장된 상황에서 타석에 나선다. 자신은 물론 양팀 선수들 모두 긴장하고 있다. 젖먹던 힘까지 다 해서 휘두른 배트, 야구공은 알밤까기 하듯 배트의 윗부분을 미끄러지면서 대략 80~90도 각도로 하늘높이 치솟는다. 순간 모든 이들의 긴장은 일시에 이완된다. 선수들은 공이 낙하하기도 전에 모두 제자리로 돌아와서 하품을 하거나 신발끈을 묶는다. 심판 역시 수비수가 공을 잡기도 전에 아웃을 선언한다. 홈런을 꿈꾸던 타자는 자기 편의 따가운 시선을, 상대편의 조롱 어린 시선을 뒷통수로 막아내며 덕아웃으로 들어온다. 물론 그곳마저 이미 가시덤불 같은 곳이지만, 그래도 눈을 감고 가만히 생각한다. ‘XX, 그래도 병살타 안 친 게 어디야.’

 

야구장 안에서 인필드플라이란 주로 8번이나 9번타자의 인생일 테지만 야구장 밖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필드플라이의 인생을 꾸려가고 있다. 물론 세상에는 언제나 만루홈런의 유혹이 가득하다. 로또, 경마, 대박...... 충혈된 두 눈, 긴장된 마음으로 야구빳다를 힘껏 휘둘러보지만, 그러나 결과는 언제나 내가 그랬듯이 너도 늘 인필드플라이다. 그것은 죽도록 일하고 쥐꼬리만큼 쉬는 요즘 세상 밑바닥 인생들, 노동자들의 삶의 법칙이다. 소설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의 작가가 자신의 소설을 헌사한 이들, 1할2푼5리의 승률로 살아가는 그 사람들, 바로 우리들 말이다.

 

그의 음반에는 인필드플라이의 인생, 삼미슈퍼스타즈의 인생으로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라는 어두운 과거와 미래로 가득하다. 음반의 첫 노래에서부터 ‘세상도 나를 원치 않아 / 세상이 왜 날 원하겠어 / 미친 게 아니라면’으로 시작되는 그의 이야기는 ‘스끼다시 내 인생 / 언제쯤 사시미가 될 수 있을까 / 스끼다시 내 인생’을 거쳐 ‘죽는 날까지 살겠어 / 어렵지 않아’, ‘무척 힘들었지만 / 죽을 만큼 슬프진 않아’등으로 이어지고 맺어진다. 달빛요정 스스로 가사에는 자신 있다고 했지만 읽는 이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보다 더 심난할 수가 없다. 모든 살과 영혼이 ‘응어리’로 가득한 사람만 같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의 가슴 속에도 이미 그와 ‘똑닮은 응어리’들이 한 주먹씩은 뭉쳐져 있을 게다.

 

응어리..... 그 응어리가 커지면 우리는 그걸 병이라고 부르고 병에 걸리면 우리는 병을 치료해줄 누군가를 찾는다. 누구는 병원에 가고 누구는 약국을 찾으며 누군가는 야매[暗]로 주사를 맞고 또 누군가는 굿판을 벌인다.

 

무당의 굿판이 예술이던 시절이 있었다. 뒤집어 이야기하자면 예술이란 사람들을 고통으로부터 구원해주는 굿판이기도 하다는 말이다. 굿판은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여러 방법 가운데 가장 흥겨운 방법이다. 그런 의미에서 달빛요정의 노래는 우리 시대 고통 받는 청년들의 한판 굿거리인 셈이다. 풀어헤쳐지는 응어리의 심난한 가사 내용과 달리 달빛요정의 노래들은 굿판처럼 흥겹기 때문이다. 미간이 찌푸려지기는커녕 입가에 웃음이 감돌고 그 속에서 나의 꾀죄죄한 삶을 같이 풀어놓고 흥얼거리게 만들어 준다. 고해성사를 하면 마음이 행복해지는 것처럼 꾀죄죄한 자신의 인생을 털어내는 사람은 행복해 진다. 게다가 그 사이에 웃으면 복이 온다는 그 웃음까지 더해지면 더 말해 무엇 할까.

 

장조의 선율 속에 담겨져 우리들에게 전해지는 달빛요정의 웃지못할 슬픈 인생과 그래도 웃는 그의 삶과 노래는, 슬프지만 울지는 않으려 이를 악물고 살아가면서 저마다의 소중한 삶을 가꾸고 행복한 삶을 누리고자 애쓰는 청년들의 삶이며 노래이다. 그의 음악을 듣는 것은 돼지머리가 없어 쌀 몇 알을 통해 푸닥거리를 해야 하는 가난한 이들의 푸짐한 한판 굿거리이자 골방 속 작은 축제다. 그리고 음악을 통해 그 굿판과 축제를 주관하는 달빛요정은 세상을 살아가는 고달픈 청년들의 21세기 버젼 쿨한 무당이다. 

 

- 아마, 2004년 어느날엔가, 썼을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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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권 떡밥 투척에 낚여서, 푸덕푸덕. 푸덕질.

  • 등록일
    2010/10/05 02:02
  • 수정일
    2010/10/05 02:04

저작권이란게, 이게 단어 구성이 원래 쫌 오해하기 쉬운 면이 있다.

저작권 하면 이게 마치 저작자의 권리처럼 이해하기 십상이라 그렇다. 

그러나 사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꼭 그렇지가 않아서, 대충 발로 요약하면,

저작물에 관계된 잡다구리한 권리들을 다루는 법, 정도가 될 것 같다.

 

그래서 잡다구리한 내용들을 법전 1조에 하나로 좀 간편하게 정리해 두었으니,

(지금은 좀 바뀌었던 것 같은데, 그것까지 신경쓸 여력은 없고, 하여튼,)

뭐, 저작자의 작품에 대한 권리와 대중의 향유에 대한 권리를 적절히 중재하여,

결국, 풍요로운 문화사회 창달에 이바지하는 것이 그 목적이다. 

 

그건 무슨 이야기냐면, 저작물을 저작권자의 재산권으로 바라보고,

그들의 권리를 보호하는 것이 풍요로운 문화사회를 만들지 못한다면,

그러한 권리는 보호받지 말아야 한다는 이야기에 가까운 것이다.

저작자의 권리를 보호하는 것은 대중의 행복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저작자를  보호하는 것이 구조적인 공익성을 전혀 표방할 수 없는 것이라면,

그러한 저작자의 보호는 필요가 없는 것이고, 그게 자본주의 현대사회의 원리다.

 
그러나, 재미있는 것은 저작권 강화를 통해 불편함만 가중될 뿐인 많은 이들이,
저작권 강화에 속절 없이 수긍하고, 자신이 평소 파일공유 행위를 부끄러워 하고,
그러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이다. 
 
(진중권 왈) 애국질 흔한 이 나라에서, 이러한 감성은 우리나라에 대한 부끄러움으로 이어지는데,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우리나라 정품 사용률이 얼마나 될까 물어보면,
대다수가 세계 최고라고 말하고, 뭔가 부끄러운 듯한 표정들을 짓는 일이 많다.
 
그러나,
현실이 푸에르토리코, 체코, 트리니다드토바고 등과 엎치락뒤치락 하는
한국의 국민 생활 수준을 감안해보면, 내가 대충 발로 짐작컨대,
우리나라 정품 사용률은 주제에 안 맞게 아마 소득 대비 세계 최고 수준일 것 같다.
 
 
말이 두서가 없으므로, 그냥 낚여서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3줄 요약 해보면,
 
저작권 강화가 창작의 활성화, 문화의 발전에 기여한 역사가 도대체 없다는,
우리나라는 전 세계적으로 저작권이 더럽게 강하게 인민들을 옥죄는 나라라는,
근데도, 인민들은 그걸 피학적으로 받아들이고 심지어 어떤 '투사'들은 피학을 은밀히 사랑으로 승화시키고 있다는.
 
으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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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재미있다.

  • 등록일
    2009/08/21 03:05
  • 수정일
    2009/08/21 03:05

누가 신경민 앵커 클로징 멘트로 이렇게 만들어서

음원 쫌 만들어주고 그러면 좋겠다.

내가 할까? (-_-)ㅋ

 

http://www.youtube.com/watch?v=b0OzxvClw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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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겁한 독립영화인, 비겁한 카메라

  • 등록일
    2009/03/06 16:41
  • 수정일
    2009/03/06 16:41

좌익, 진보넷, 미디액트 등과 더불어 사는 경우가 많은

우리나라 독립영화인들에게 내가 실망했던 경험은 크게 두번.

 

하나는,

영화티켓에 강제적으로 포함되었던 문예진흥기금 징수가

국민의 주머니를 부당하게 갈취하는 사실이란 것이 인정되면서

그것의 폐지를 눈앞에 두었던 시점에 한독협 홈페이지 설문게시판,

그곳에서 보았던 투표 결과였다.

 

이제 티켓값에서 제외될 이 500원을 어떻게 할 것인가, 뭐 이런거였는데,

이런 설문을 올렸다는 자체가 사실이지 무척 불쾌한 일이었다.

이들은 왜 남의 주머니돈을 갖고 이러쿵저러쿵 하는 것인가, 하는 의문.

더 허망한 것은 그 돈이 자신들의 몫이 되길 희망한다, 는 응답이 1위를 달리고 있었다는 엽기적인 사실.

 

국가도 포기한 강도짓이었지만,

뭐 그래, 세상 물정 잘 모르는 순진한 사람들이

순간 오판을 했을 수도 있겠다 싶기도 했다.

어차피 개인의 영달을 꿈꾸는 것과는 거리가 먼

대한민국 희생정신 상위 10% 정도는 될 만한 사람들이었으니. 

 

물론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들 치고

평소 그들의 카메라 워킹은 너무 강렬하다.

 

또 하나는,

뭐 그들 상당수가 좌파적인 시각을 갖는 듯 하면서도,

각종 프로그램들을 남못지 않게 어둠의 경로를 통해 사용하면서도,

자신들이 결과물을 내는 순간 거기 카피라이트를 너무나도 당당히 부착한다는 사실.

 

뭐 유통 관계 등을 고려하면 특정 작품들은 현실적으로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대다수의 경우는 뭐 그럴 필요가 있었을까, 싶은데 별로 그런 자신들에 대해

어색해해 하거나 쑥스러워하지 않는 경우가 많은 듯.

 

제도에 진출해서 카피라이트와의 긴장이 살짝 담긴 공존을 유지하는 것과

카피라이트로 형성되는 배타적인 전선에서 적대적인 칼을 앞장서 휘두르는 것과

그 차이가 전혀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는지....

 

 

사실 많이 지난 이야기, 생각들이었는데,

앞의 불만에 대한 많은 이해와 사연들이 내 안에도 있고

그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던 지난 시절동안,

나름 이해 가는 면 혹은 아닌 면들이 섞여 있어,

결과적으로 인간적으로는 넉넉히 이해가 가는 시점에,

 

굳이 이런 비난을 새삼스레 끄잡아내는 이유는,

뭐 요즘 분위기가 그렇다시피 워낭소리 제작자 때문.

 

한독협 주요 실무자인 그가 최근 세상을 향해

파일공유자들을 "디지털 악마"라며 비난했는데,

디지털대마왕들이 우글우글대고 있는

독립영화인들의 게토는 참으로 조용하시다.

 

명박이 소동은 잠깐 시끄러워 주시다가

"우리가 남이가" 식으로 서로 사랑하며 흐지부지.

 

이런 사건은 아예 입들도 다소곳하게 다물고 계시고.

생각해보니 불과 몇 년 사이에 이제는,

세상 물정에 도를 트신 듯.

 

다시 한 번,

세상 물정에 도가 튼 사람들 치고

그들의 카메라 워킹은 여전히 너무 강렬하다.

그래서 또다시 가슴 속에 새겨지는 세 번째 실망.

 

 

(아, 물론 나도 워낭소리 재미있게 봤을 따름이고. 

영화자체로는 충분히 박수쳐 드리고 싶을 뿐이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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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의 가치, 종교적 가치, 진보적 가치.

  • 등록일
    2008/02/24 12:38
  • 수정일
    2008/02/24 12:38

나도 아주 가끔은 그렇고,

진보적이라고 자처하는 많은 사람도 그렇고,

젊은 세대일수록 조금은 더 그런 편이고,

상당수는 '유명상표', '브랜드'의 환상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무척 모순된 행동들이지만 말이다.

 

'유명상표'라는 건 상당수의 경우

슬프게도 혹은 당연하게 보잘것 없는 우리들이

자신을 돋보일 방법이 없어서 찾게되는 최후의 방법이며,

자본주의의 악독한 힘을, 이미 인정, 체화하고 있다는 것의 반증이기도 하다.

체화되어 있어서 반성하기도 힘들고 끊기도 힘들다.

 

<진보>라는 단어 혹은 정체성 역시

일종의 유명상표라는 생각이 들때가 있다. 

대안, 대화, 논리보다 선언과 자기주장만이 우세할 때,

아, 진보도 그냥 자신의 존재감을 높이는,

내가 인민을 위하는 멋진 사람이라는 것을 

스스로 혹은 제 울타리에서 확인하고,

삶을 안도하는 하나의 방편일 수 있겠다,

하는 생각이 드는거다.

 

그리고 뭔가 조금 더 진정성 있는 진보 인생들이,

그런 흔한 브랜드 진보들과 어쩔수 없이 함께 해야 하는

그런 경우를 가끔씩 보곤 한다, 가 아니라 수도 없이 본다. 

슬픈 일이다.

 

요즘은 <초록>, <생태>란 말에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는 경우가 많다.

 

진보넷에서 몇몇 블로거들이 펼치는

물을 많이 쓰는 좌변기 소변 이야기도 본 적이 있고....

가끔씩은 대안생리대, 기저귀 운동이 벌어지는 것을 보기도 한다.

어떤 경우에는 생태적이고 싶은 행사에서 1회용품을 안 써보려 애를 쓰다가

결국 그 불편함을 이기지 못해 다시 그냥 좌절하는 경우도 많이 봤다.

 

초록과 생태를 지향하는 사람들에 대한 느낌은,

불편하지만 아름다운 꿈을 꾸려고 애쓰는 심성 좋은 사람들,

이라는 정도다. 물론, 그것도 대단한 것이지만,

안타까운 것은 합리적 대안을 마련한다는 느낌은,

아직은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컨대,

대안생리대, 기저귀를 쓰면 정말로,

지구의 생체시계가 늦춰지는 걸까?

편한 1회용을 쓰고 매립하는 것과,

불편하지만 대안 용품들을 쓰고 물을 쓰는 것.

더구나 더운 물을 사용하게 되는 것.

 

무엇이 더 환경에 이로울까. 잘 모르겠다.

내가 게을러서이지만, 이런 정보와 확신이

잘 흘러다니지는 않는 것 같다.

시골에 사는 아름다움을 보기도 하지만,

그건 불편함과 심심함을 이겨내는 개인적인 용기지

현대사회의 수십억의 대안은 아니리라.

 

초록, 생태의 가치는 아름다워 보이지만,

현실적으로 그렇게 대안스러워 보이지는 않는다.

내 무식에 대한 자책을 떨어 내고,

평범, 평균적인 사람의 눈높이에서 의문을 가져본다면,

 

생태, 녹색 등의 가치는 많은 경우, 현재 수준에서는,

종교적 신념에 가깝고 대안적 가치는 되지 못하는 것 같다.

 

물론 나처럼 문외한이 이렇듯 도맷금으로 넘기기에는,

너무 복잡한 과거와 현재, 미래를 품은 주제이지만,

나보다 굳이 덜 문외한일 것도 없는 사람들이,

그 가치를 손쉽게 부여잡는 것을 보면,

 

그냥 유명상표 못이기는 자본주의적 동물성과,

별로 멀지 않은 사람들일 거라는 생각이다.

그리고 그 손을 쉽게 잡는 생태와 초록도

가끔씩 동색으로 보이기는 마찬가지다.

 

뭐, 그래서 못났으니 다 조용합시다,

이런 힘빼는 이야기를 하자는 건 아니고,

크게 다르지 않으니, 아직은, 함께,

밑바닥에서 밑바닥 이야기를 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어서 드는 생각이다. 

 

진보와 대안을 말하며

남에게 무언가 전파를 하려는,

남들을 약간이라도 책임지고 싶은 사람들이,

그런 가치를 쉽게 말하는 것은 위선이라는 이야기다.

그 가치를 형성하기 위한 수많은 복잡한 배경, 과학 들을

준비하고 증명해 보이는 것이 먼저여야 한다는 이야기다.

 

물론 개인의 종교생활로 인정한다면,

그건 또 다른 문제로 충분히 존중할 수 있겠지만. 

 

제목과 주장은 선정적인데, 알토란 같은 말은 또 없다. 허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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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권이든 심상정이든 노회찬이든.

  • 등록일
    2008/01/09 02:21
  • 수정일
    2008/01/09 02:21

분당은 파국에 이르는 길이다,

라고 말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파국을 부르는 것은 분당이나 탈당이 아니라는 것.

상식을 가진 이들이라면 당연히 느끼는 거 아닌가. 그리고,

 

진정으로 파국을 부르는 것은

민노당 내의 오랜 부패와 반동,

그리고 그것의 담합과 봉합의 구조,

뭐 이런 것들 아닌가. 

 

지금 당의 책임있는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은,

너무나 자명한 진실을 눈 앞에 두고,

페인트모션을 활용한 '에둘러가기 신공',

눈물로 호소하는 '봉합신공'이 아니라,

파국의 원인, 당내의 부정과 부패를 적출하겠다는 

굳센 다짐이 아닐까.

 

단순한 반성, 혁신, 이런 추상적 구호 말고,

마치 비례대표 출마불가능자를 호명하듯,

민노당의 구체적인 부패 역사를 적시하고,

그것에 관련된 자들의 이름을 공표하고,

당원들에게 그것을 뿌리뽑겠다는 다짐을,

진심으로 보여줘야 하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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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진]의 새벽길님께 드리는 하찮은 대답.

  • 등록일
    2007/12/30 10:35
  • 수정일
    2007/12/30 10:35
새벽길님이 제게 쪽글로 주신 질문입니다.
 
전진의 대선강령이 한계가 있음을 부인하진 않겠습니다.
현실에 대해 파악하고 분석하며 여기에서 대안을 제출하려는
노력은 언제나 필요한 것입니다. 여기에 기반하지 않은 채
무엇인가 하려는 것 자체가 문제가 있는 것이지요.

전진에서 대선강령을 만들기 위해 했던 작업들이 부족한 면이 많습니다.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지금까지 이러한 작업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실 전진의 대선강령 작성이 진보진영 내에서 논의의 시발점이 되고,
이에 대한 고민이 확산되기를 희망했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다.
여기에는 님의 평가처럼 수준미달로 비춰져서일 수도 있겠지요.

지금까지 진보진영은 선거 시기 관성적으로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선거에 임했습니다. 전진의 대선강령은 거기에 방향성 같은 것을
부여해보자는 노력 중의 하나였지요. 더 추상적인 당 강령만으로
선거에 임할 수는 없는 것이니까요. 물론 그것으로 대선판을
어떻게 해보자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되지도 않았구요.

거꾸로 질문해봅니다.
이번 대선 시기에 진보진영은 어떤 국정좌표로 선거에 임했어야 할까요?

 

-------------------------------------------------------------------

 

제가 대답을 해 볼께요. 

 

국정좌표, 에 대해 물으시는데,

과연 제가 그걸 말씀 드릴수 있을까요.

어떻게 보면 저의 무식을 고백하는 일이기도 하고,

달리 보면 질문 자체의 무개념을 고발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어느 개인에게 국정좌표, 강령 등을 묻는다는 것이,

현시기 우리나라에서 그 누구에게라도 가능할까요?

이건 정말 오래 준비된 정책정당에서 강령을 손에 쥔

핵심 당직자, 대변인 같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이야기같아요.

물론, 미디어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현실 속에서,

저의 현실론 자체가 이상론일 수도 있겠죠.

대중들은 대충 선택하는거고. 어차피 그러니,

무책임하더라도 헤드라인에 어울리게 빨리 정리해서

이야기해야 하는, 정치란게 원래 그런 운명인지도 모르죠.

 

이에 대해서 제 생각의 한계는 분명한데, 죄송.

 

그럼에도 제가 전진에게 궁금한 것은

국정좌표 혹은 강령을 제시할 능력이 안 되는 것 같은 사람, 조직이

굳이 그걸 말해야 하나 하는 거죠.

자신 앞에 놓인 책임질 수 있는 최선의 범위에서

최선의 실천주제를 찾아야 하는 거 아닌가 하거든요.

 

아직 작은 동네 하나도 책임질 수 있는 정책을 내지 못하는

그런 모습으로 보이는 조직들이, 굳이 그런 강령에 대한

강박을 갖는다는 것, 그걸 우선 제출해야 할 것 같은 강박, 

 

그게 제 이야기의 핵심입니다.

 

전체 인민의 희망을 자신의 개인사적인 희망으로

대체하려는 것, 그것이 일치한다고 믿는 지적 게으름,

이것이 수구보수, 수구반동 아니냐는 것이,

제 이야기입니다.

 

그런 식의 대선강령을 왜 제출해야 했나요?

거기에 투여한 님들의 노력은,

얼만큼 인민의 행복으로 귀결되었을까요.

강령을 만들기 위해 땀을 흘린 이유가 인민에게 있나요,

아니면 어려서 배웠던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 이야기의

지적 퍼즐맞추기, 혹은 낡은 지식의 관성에 있을까요.

저는 후자라고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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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진, 종북파, 수구반동.

  • 등록일
    2007/12/28 12:50
  • 수정일
    2007/12/28 12:50

수구반동이란 호칭이 어울리는 자들은,

책임감있는 현실 분석이 결여된 채,

인민의 의지와 소망에 반하여,

자신의 꿈을 강요하고 관철하려는 세력을 말하는 것.

 

주사파가, 종북파가,

수구반동이라는 사실은,

말하는 것 자체가 시간낭비다. 

 

근데, 안타깝게도,

전진도 그로부터 멀리 있지 않은 느낌.

그놈의 대선강령, 아, 그걸 보고난 후,

이젠 옛PD들도 대체적으로 부담스럽다.

 

낡은 버릇같은 보수적 관행을 굳이 실천에 옮겨,

반동세력의 대열에 스스로 자리잡는 것이다.

자신들도 모르는 현실을

자신들의 꿈으로 대체하는 관행.

 

논문 표절도 아닌,

인민들의 생사를 건 국정좌표의 표절.

이런 건 정말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강령을 만들면서, 다른 몇몇 나라의 강령을 참고했다고

몇몇 전문가(도대체 이들이 누구일까?)의 자문을 받았다고,

무려 두달에 걸쳐 10여 차례 토론을 진행했다고...

 

정말이지 그건 우리나라, 서울시, 관악구, 봉천동, (이건 내가 얼마전까지 살던 곳-_-;)

어느 조그만 놀이방 시설을 올바로 운영하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는 데 필요한,

시간과 인력 아닌가. 아니면, 어느 대학의 한 소박한 청년이,

부산시, 영도구, 중학생들의 휴대폰 활용 특성을 알아보고,

그에 대해 조그만 박사논문 한편을 쓰기 위해, 그것도,

사전조사 하는데에만 필요한 수준의 시간과 인력 아닌가.

 

아닌가?

  

그냥, 이런 강령은 절망의 다른 말이고,

그냥, 그런 관행은 수구반동의 재현이다.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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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진 대선강령, 홈페이지. -_-

  • 등록일
    2007/12/22 11:59
  • 수정일
    2007/12/22 11:59

내 옛날 친구들중 아직도 현장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이들, 가만 보면,

주로 <전진>이라는 조직에 속해 있는 듯.

 

20년이 가까운 동안,

대학 입학때 책 몇 권으로 세운 정체성이,

이토록 강한 힘이 될 수 있는가 싶기도 하고,

하지만, 기초적인 것들을 그때 섭렵하기 때문에,

그럴 수 있는거지 싶기도 하고.

어쨌든 동창회같은 분위기도 없지는 않을 터.

 

대선이 끝나고 이제 민노당 탈당의 마지막 고민을 하는 차에,

적지 않은 미련이 있어 생전 처음으로 그들의 홈페이지를 찾아가,

 

대선강령을 보고,

홈페이지를 둘러보았고.

 

강령을 보면,

미안한 이야기지만,

이렇게 엄청난 이야기를 이렇게 대충 하나 싶은 생각.

 

홈페이지를 보면,

맑스도 레닌도 이스크라도 없는 이 시대,

비합조직이라는 게 애당초 가능하지도 않은 이 테크놀로지의 시대,

어디서 조직 활동을 하기에 홈페이지가 그처럼 방치되어 있을까 싶은 생각.

전진이 이 시대와 함께 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 혹은 비난, 다시 망설임.

 

개인적으로는 머물 곳을 찾기가 참으로 어려운 시절.

내가 스스로 만드는 것은, 물론, 정말이지 어려운 일.

그래서, 그들을 함부로 비난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피지도-_-의 입장에서 살아가는 요즘,

그들에게 의존하는 것도 가능한 일은 아니다.

 

당적 정리는 언제 할까.

 

올해 안에 깔끔하게 정리할까,

아니면, 미련하게 총선 끝나고 하자,

라고 또 스스로를 기만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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