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린 사람들은 연대를 낳고, 연대는 대동사회를 꿈꾸고...

 

전국 비정규노동자대회가 서울역광장에서 열리는 날이다. 본 대회가 열리기 전 금속노조 남부지회 기륭전자분회 소속 노조원들과 인터뷰를 할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자리를 잡고 앉기가 무섭게 얼마 되지 않아 자리를 옮겨야했다. 마트 쪽에서 경비아저씨 두 사람이 찾아오더니 자리를 비키고 나가달란다.

 

“저희 조용히 앉아서 대화 좀 하는 건데요?”

“야튼 여기서 나가주세요. 손님들한테 지장이

 

 

기륭전자 노조원들이 먼저 일어섰다. 충돌을 하면 뭐 할 건가. 티격태격하면 어쩔 건가. 그래봤자 정해진 시간 안에 인터뷰를 끝내고서 동지들한테 돌아가려면 아까운 시간만 자꾸 흐른다. 서울역 광장 쪽에서 간간히 들리는 마이크소리는 비정규노동자대회에 어서 참석하라는 재촉소리만 같아서 촌음을 아껴 써야 한다. 이래저래 대회장으로 가야할 마음이 바쁘기 때문이다.

 

 

말이라는 것이 서로 하다 보면 생각보다 시간이 꽤 많이 든다. 이유도 없이 구박하는 사람들에게 맞서 소모적인 시간을 보내기보다는 정해진 시간 안에 기륭투쟁에 대해서 더 많은 사실을 알리는 것이 유익한 일이다. 그래서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주섬주섬, 하나 둘 씩 짐을 챙기며 긴 계단을 내려간다. 그러면서도 어디가 얘기할 만 한 곳인가를 두리번거리며 마땅한 장소 찾기에 여념이 없다.

 

드디어, 마트가 있는 본 건물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후미진 건물 하나를 발견했다. 일행은 계단을 뒤로하고 그곳으로 가서 둘러앉았다.

 

기륭전자 노조는 언제 결성이 되었나요?

 정확히 2005년 7월 5일에 결성이 되었습니다. 우리 회사는 직원 300명중에서 정규직은 단 15명에 불과하고 나머지 250명이 비정규직으로 이루어진 회사였습니다. 그동안에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회사는 툭 하면 갖가지 방법으로 노동자를 해고했지요. 해고 사유를 들으면 일반 사람들은 뭐가 그래 설마? 할 정도로 우습고도 이해가 가지 않는 점이 많을 지도 몰라요.

                                    

잡담해고, 문자해고, 주말해고, 물갈이를 한다면서 20~30명을 한꺼번에 자르는 물갈이 해고도 있습니다. 전화 한마디로 통보하는 전화 해고 등 별 희한한 방법이지요. 노동자들은 하루아침에 이유도 모르는 해고를 당하면서도 창피해서 말도 못했습니다. 혼자만 앓다가 병이 나는 식이었지요.

 

위키백과에 의하면 비정규직(非正規職)이란 정규직에 속하지 않는 파트타이머, 계약직, 일용직, 임시직, 파견근로직 등의 고용 형태를 뜻하고, 고용의 유연성을 목적으로 등장했으며, 정규직에 비해서 열악한 대우 그리고 계약기간이 만료되면 더 이상 일할 수 없는, 즉, 꾸준히 일할 수 없는 고용환경 등을 이유로 노동계로부터는 비판을 받아온 제도라고 돼있습니다.

 

우로부터 김소연분회장, 윤종희, 박행란, 오석순

 

비정규직이라고 해서, 월급을 정규직의 반 밖에 못 받는다고 서러운 것이 아닙니다. 달리 그런 것이 아니라 옆 사람하고 말한 마디 했다고 해서 그 자리에서 ‘잡담해고’를 시켜버리는 비정한 행태에 서러운 것입니다. 오랫동안 몸담은 일터에서 항의 한마디 못하고 잘리는 것이 억울한 것입니다. 인간적인 모멸감도 큰 부분입니다. 관리직 직원들은 생산직 노동자들에게 인사도 밥도 같이 먹는 일이 없습니다.

 

이와 같은, 회사의 비인간적인 대우와 행태에 참다 못 한 우리들 아줌마들은 노조를 결성한 것입니다. 3개월에 걸쳐서 30여명이 노조결성을 하기 위한 준비모임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놀랍지 않습니까? 저희들이 노조를 준비하는 동안에 비밀이 누설되지 않고 지켜졌다는 것입니다.

 

드디어 조합원을 모집하는 가입원서를 받는 날이 되었습니다. 잊지 못할 그날, 바로 2005년 7월 5일입니다. 노조 이야기는 하지 않고 중요한 일이 있으니 a/s 2층 라인으로 모여 달라고 말 파발을 띄웠지요. 이 사실이 동지들에게 전달 된 것은 아침 9:30분이었습니다. 그리고 10시 쯤 잠시 쉬는 시간에 200명 가까이 모여드는 게 아이겠어요?

 

김소연 분회장의 말이 이어졌다.

 

10분 정도 제가 이야기를 했어요. 우리는 노조가 필요하다. 우리는 그동안 멋모르고 참고만 지내던 세월이었다. 우리들의 슬픔과 아픔, 분노와 망설임을 한데 묶어서 단결하여야 한다. 이제 우리도 뭉쳐서 노동자로서의 최소한의 권리를 획득해야 한다고 말했죠. 이렇게 노조의 필요성에 대해서 이야기 하자 일부 아줌마는 울기까지 했습니다.

 

“우리에게도 노조가 생기느냐? 노조 생기면 이제 해고 걱정은 안 해도 되는 거냐?”는 것이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150장의 가입원서를 받았습니다. 잠시 후 순차적으로 받은 것을 합치니 순식간에 200장이나 되는 거에요. 그 순간 저희들은 정말 힘이 솟았어요.

 

이제야 말이지, 세상에 태어나서 그 10분 만큼 가슴 졸이며 떨어본 적은 없습니다. 말 파발을 띄우고, 사람들이 얼마나 모일까. 과연 모이기나 할까. 원서를 받는 동안 이 사실을 사측에서 알고 들이닥쳐서 모든 것을 빼앗기는 것은 아닌가. 빼앗길 뿐아니라 발기발기 찟겨서 휴지조각이 될지 모른다. 물거품이 된다.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될지도 모른다. 이렇게 너무도 가슴 졸이는 시간이 지나간 겁니다. 아주 짧지만 아주 긴 순간이었던 그 시간은 그렇게 지나갔습니다.

 

퇴근 후 식당 모임에도 100여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이는 노동계에서도 획기적인 일로 받아드려질 만한 일이었습니다. 순전히, 순전히 생산직에 있는 아줌마 노동자들끼리 뭉쳐서 단 몇 시간에 이렇듯이 참여율이 높은 노동조합을 결성한 예가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노조가 결성되고서 한 달 동안에 해고자가 80명이나 생겨났습니다. 그때 우리의 월급은 시간당 1850원이었고, 한 달 실 수령액이 60만원 정도였지요. 이런 몇 푼 안 되는 월급도 제대로 받을 수 없게 사측은 걸핏하면 우리 노동자들을 해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주장한 것은 ‘해고중단’이었지요. 우리의 소박한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노조가 결성 된지 1달 반 만에 그래서 전면파업에 돌입하게 된 것이고요.

 

‘우린 더 이상 소모품이길 거부한다!’

‘우리는 당당한 노동자다!’

를 외치면서 해고를 중단하고 단체교섭으로 풀자는 것이었습니다. 3일이면 교섭이 끝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아시다시피 우리 금속노조 기륭분회는 5년여 세월을 끌어오는 장기투쟁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현재까지, 투쟁이 장기화된 이유는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덧붙여 투쟁과정에서의 소회를 말씀해주셔도 좋겠습니다.

 

저희가 노조를 결성하던 당시의 우리나라 상황에 대해서 간단히 설명하고 나서 말을 이어가죠. 당시 2005년 현재를 기점으로 우리나라는 비정규노동자가 60%였습니다. OECD 30개 회원국 중에서도 제일 높은 수치지요. 비율로 따져도 32.6%였던 거고요. 요사이는 비정규직이 850만, 퍼센트로는 70%라고 할 정도죠.

 

매월 70시간, 많게는 100시간을 일하고도 야근이다 특근이다를 다 해봐도 손에는 단돈 80만원도 제대로 쥐지 못하는 저임금 국가라는 사실 아닙니까? 복지제도가 잘 돼있는 북유럽이나 서유럽을 굳이 말하진 않겠습니다. 요즘 우리나라 유학생들이 많이 가는 호주 만 하더라도 하루 8시간 노동이 철저히 지켜지고 있다는 군요. 아침 9시에 일을 시작하여 5시만 되면 일제히 손을 놓는답니다.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너나 할 것 없이 그렇게 하니까 노동시간만이라도 평등한 거 아닙니까?

 

사실 많은 다른 나라에서는 생산직과 사무직 간에 임금차이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임금이라는 것을 고정적으로 안정되게 받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차이일뿐인거죠. 우리나라처럼 이렇게 비정규직과 정규직의 임금차별과 사람차별이 심한 나라는 드물다고 생각해요. 비정규직은 임금이 정규직의 52.75 밖에 안 됩니다. 주당 노동시간은 오히려 길지요. 일은 더 많이 하고 임금은 반절밖에 안되고....

 

거기다가 복지혜택이며 각종 상여금제도에서 불익을 당하다보니 사실적인 임금은 훨씬 적은 거 아니겠어요?  박탈감은 어떻고요.  신뢰가 얇아지니까 불신이 되더라고요. 그게 비정규노동자는 당하는 쪽이다 보니 얼마나 불안하겠어요.  

 

좋은 것은 발전하지 못하고, 같은 사내에서도 정규직 대 비정규직 거기다 파견직까지.... 새로운 말이 자꾸 생겨날 정도로 노동환경이 이상하게 발전하고 있습니다. 비정규직이라는 말이 생겨난 지가 10년 밖에 안 된 일입니다. IMF이후 고용의 유연성을 보장해달라는 사용자들의 요구가 지나치게 받아들여진 이후부터 세계적인  850만 비정규노동자 국가가 된 것이지요.

 

이게 다 돈 문제라고만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IMF 때의 문제는 문어발식 기업확장으로 인한 재벌기업의 부실 때문이었습니다. 그 재벌들이 낸 손실을 국민들이 메꿔줬습니다. 그 후 기업은 노동자들을 정규다 비정규다 파견직이다로 분열시키면서 버는 쪽쪽 자신들의 주머니를 채워나갔습니다. 혼자만 잘 사는 것도 좋지만 더불어 잘 살면 더 좋지 않겠나요.

 

그래서입니다. 경제전문가들은 말하기를 지금은 IMF 때와 사정이 다르다고 말입니다. 그 때는 문어발식으로 기업을 확장하던 몇몇 재벌놀음에 나라가 망하게 생겼었고, 그 손실은 국민이 몽땅 메꿔준 것이었다고요. 허나 지금 그들은 노동자문제에서 뒷짐을 지고 무자비한 해고의 칼날은 서슴없이 휘두르고 있습니다. 

 

노동자들의 빈주머니와 피폐화된 살림을 걱정해주는 회사는 거의 없습니다. 노동자들이 그들에게 거저 손 내밀었나요? 열심히 일할 테니까 일자리 좀 달라는 것이에요. 비정규노동자의 문제는 결국 기본적인 노동권도 무시하는 사업주를 방조하는 듯 하는 국가와 현행 노동법과 비양심적인 사측의 자세가 맞물려 있지요. 

 

작년에 단식투쟁 때 얘기 좀 해주시지요?

 

저희 기륭동지들은 노조결성 후 얼마 안 된 시점에서 8시간의 점거농성을 한 것부터 작년에 94일 단식농성까지 안 해 본 것이 없습니다. 사회의 관심을 끌기위해서 갖가지 방법을 다 해봤다는 것이지요. 점거농성도 해보고 3보 1배도 했습니다. 50리 걷기투쟁도 해보고 급기야는 고공농성은 물론 전 조합원이 참여하는 릴레이식 94일 단식농성을 한 것이지요.

 

‘1000일 전에 현장으로 돌아가자!’는 목표를 가지고 각오를 다지는 뜻에서 삭발을 하고서 다시 농성에 들어갔습니다. 작년 하이서울페스티벌 마지막 날 때부터는 여성 조합원이 35m 되는 조명탑에 올라가서 고공 농성도 했습니다. 고공농성은 2차에 걸쳐서 했습니다.

 

윤종희동지의 고공농성장면과 쓰러진 장면

 

이때 노동부 관계자가 입회하는 자리에서 ‘정규직화 합의서’가 작성되었고, 회사대표는 노조측에 말하기를 3일 만 생각할 여유를 달라고 했습니다. 그 3일이 지난 후에는 또다시 도루목이 되었습니다. 이번에야 말로 일이 잘 풀릴 줄 알았던 우리에게 돌아온 대답이 “‘직원들이 반발해서 안 되겠다는’” 이유로 합의서는 휴지조각이 된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노사정이 합의한 사항마저 휴지조각으로 변하는 것을 보고 구로역 cctv 철탑에서 다시 2차 고공농성으로 들어간 거죠.

 

투쟁의 성과를 말하기도 참 어렵게 됐네요. 여전히 기륭문제는 진행 중인데요? 김소연분회장님의 단식농성에 관한 얘기를 마저 좀 해주시죠.

 

 참 그러네요. 저의 삭발 단식농성은 94일 동안 계속되었고 그 전에 저희 고공농성이 2차에 걸쳐서 하게 된 이유도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말하자면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다 보니 윤종희 동지가 다시 구로역 cctv 철탑에 올라 간 건데 윤종희동지는 중학교 2학년인 큰딸과 9살짜리 작은 딸을 둔 주부였습니다.

 

윤종희 동지가 단식 14일차에 쓰러지고 저희는 2차 고공농성을 중단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전 조합원들의 릴레이 단식농성이 시작됐습니다. 정말 여성으로서 안 해본 거 없을 정도로 수많은 방법으로 투쟁을 했지요.

 

전 조합원들이 투쟁대오를 정비해서 릴레이 단식에 돌입합니다. 그것이 94일 째 계속된 거죠. 그 사이 권명희 동지가 암으로 숨지게 됐어요.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님 등 여러분이 오셔서 ‘죽어서 싸우지 못하는 것 보다 살아서 더 열심히 싸우자’고 설득을 하셨습니다.

 

김소연분회장                                유홍희                                    

                  

 그때 끝까지 남은 사람이 유홍희 동지와 저였지요. 저는 삭발을 한 채 들어갔었고요. 경비실 옥상에서 67일만에 내려와서 링겔을 꼽고도 94일째까지 단식을 이어갔지만 더 이상 목숨을 장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설득에 단식을 멈추게 됐지요.

 

오랜 투쟁의 결과에 비해서 정작 기륭문제는 해결됐다고 볼 수 없습니다. 그래도 성과가 있었다면 무엇인지.. 또 앞으로의 계획은 어떤 것인지요?

 

 정부의 태도와 노동법의 문제라고 봅니다. 어렵게 교섭에 성공할 뻔한적도 많습니다. 그때마다 사측에 성실히 이행하라는 말 한마디만 했어도 이렇게 장기적으로 악화되지는 않았지 싶습니다. 문제가 터졌을 때 ‘직접 고용하라!’는 노동부의 권고나 지도가 필요할 때 하도급체제로 가면 위법이 아니다 라고 피해갈 방법이나 알려주는 겁니다.

 

회사는 자본금 2천만원 하는 회사를 급조해서 기륭노동자들을 하도급 직원으로 들어오라는 큰소리나 치는 겁니다. 요사히 포장마차 하나 잘 꾸미려 해도 2천만원은 들지 않겠나요? 웬 회사가 자본금 2천만원으로 생산라인을 갖출 수 있는 회사가 어디 있단 말입니까. 유엔 산하 국제노동기구에서조차 한국의 기륭문제는 불법이라고 판정을 하는데도 국가와 사측은 마이동풍었어요.

 

불법을 저지른 측이 사과하고, 우리는 일터로 돌아가는 때가 빨리 왔으면 합니다. 그 동안의 성과라면 이땅에서 비정규 여성노동자로 살아가기가 얼마나 어려운 가 많은 분들이 공감을 해주신 것, 이것이 소중해요. 저희들에게는요.

 

앞으로의 계획을 물으셨지요? 아, 네

 

왜 평범하기만 한 아줌마들이 오늘과 같은 투사가 됐을까를 생각해봅니다. 우선 우리나라의 비정규직노동자들은 대부분이 아줌마라는 데 있습니다. 비정규노동자 10에 7이 여성노동자니까요. 일전에 민주노동당 이정희 의원실에서 조사한 게 있어요. 3년여 사이에 기륭을 떠난 아줌마 노동자들이 그동안 직장을 옮긴 횟수는 대 여섯 차례나 된다고 합니다. 그것도 3개월, 6개월짜리 일자리로만요. 기륭을 그만두고 실업자 상태로 있는 사람들이 절반을 넘고요.

 

일전에 저희 농성현장에 옛날 기륭동지 한분이 찾아오셨습니다. 50대 초반의 아줌마에요. 그분운, 하루 10시간 일하고 72만원을 받는 답니다. 그것 가지고는 생활비로 턱없이 모자라 오후 시간에는 파지를 주우러 다니고 있다고 합니다. 처음엔 창피하더니 시간이 지나니까 부끄러움도 없어지더래요. 여성 가장들의 현실이 이렇습니다. 여성이 불행한 나라치고 좋은 나라인 거 보셨나요? 노동자가 불행한 나라가 좋은 나라인가요?

 

근데, 잠시 만요. 대체 기륭은 뭘 만드는 회사에요?

 

네비게이션하고 위성라디오요. 셋업박스도 만들고요......기륭에서는 더 이상 노조는 자기회사에 걸림돌도 안된다고 큰 소리치고 있어요.

 

말씀 중에 이랜드며 다른 곳의 사업체에 대해서도 얘기하셨는데 왜 기륭의 사업주만 유독 질기고 독한가요? 너무 운 나쁜 거 아니에요? (웃음)

 

그러게요. 이랜드는 때 맞춰서 주류를 불법적으로 유통시킨다든지 하는 현장을 mbc 같은 메스컴에서 카메라 고발을 해줘서 사회여론을 유리하게 끌어가는데 일조를 했지요. 상대적으로 사업주의 부도덕성이 부각되고 말이죠. 이제는 저희도 많은 부분 마음을 비웠답니다.

 

넷? 마음을 비웠다는 것은 무슨 의미에요?

 

당면 목표는 ‘년내에 사업장으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만 해를 넘길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앞서도 말했지만 국가인식과 노동법이 제대로 되지 않는 한 이 땅에서 여성노동자로 살아가는 미래는 꿈과 희망이 없습니다. 암흑시대라고 까지 단언합니다. 기껏 3개월, 6개월 하는 비정규일자리가 대부분인 사회가 희망이 있는 좋은 사회라고는 할 수 없으니까요.

 

쌍용차 동지들도 말하지 않았습니까. '해고는 살인이다!"라고 말입니다. 저희는 일하고 싶습니다.

기륭문제, 쌍용차문제, 용산문제 등을 따져보면 다 같은 맥락에서 벌어지고 있다고 생각하니까요.

 

혹시 동지들 중에서 노조결성이나 투쟁을 원망하지는 않았습니까?

 

그런 소리는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노조가 없었을 때도 무자비한 해고가 빈번했습니다. 오히려 '하늘같은 사측에 하고 싶은 소리도 해보고 해서 분이 풀리고 ,우리도 사람이다' 라는 자존심을 가질 수 있었다는 말을 합니다.

 

저희가 현재 남은 조합원이 32명 남았고요. 활동하는 동지는 8명입니다. 그 사이 노동계에서는 ‘기륭처럼 장기간 투쟁에 들어갈 까봐서도’ 노사간 합의를 원만하게 이루려는 기운이 일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불법을 저지른 저들의 사과 없이 모든 걸 끝낼 수는 없지 않겠어요? 안그래요? 

 

아, 네..... 대체 왜 그렇대요?

 

저희의 목표는 단순하고도 확고합니다.

노동자의 자존심을 회복하고 싶습니다.

사람이 잘 먹고 잘산다는 게 무엇입니까?

 하루를 살아도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동안 기륭을 거친 수많은 노동자들의 한을 우리는 풀어야 합니다. 다른 데로 가려해도 하나 같이 똑같은 노동현실이라면 앞서 싸웠고 이미 너무 많은 시간을 달려온 우리가 해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문제를 아무 것도 해결하지 못한채 후배 비정규여성노동자들에게 그 짐을 고스란히 넘겨줄 수는 없습니다. 이 것은 우리 기륭동지들 뿐아니라 모든 노동자들의 패배니까요.

 

지금 말씀하신 것이 김소연님과 기륭동지들의 희망이라고 볼 수 있겠네요?

 

 네, 동지들과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우리끼리 하는 얘기가 있습니다.

“담근 발 빼지 말고 끝까지 가자!!”고 하는 말입니다.

 

 우리 기륭동지들은 우리나라의 모순된 노동법과 노동자들과 상생하지 않으려는 악덕 사측과

국민을 국민 취급하지 않는 비정한 국가를 상대로 피를 토하고 있는 것이에요.

 

우리 기륭동지들은 너무 많은, 너무 긴 길을 달려왔습니다.

우리 기륭동지들에게 힘을 보태주십시오.

 

우람하거나 강단있는 모습과는 거리가 좀 있다. 말소리도 그리 박력있는 타입은 아닌 것 같다. 헤어스타일은

생머리를 한데 모아 뒤로 묶었다. 보여지는 김소연씨의 모습이다. 그들은 빨간 조끼나 점퍼차림이다. 이렇게 그녀와 동료들의 옷차림은 늘 한결 같다. 오히려 이런 모습이 나름대로 더 설득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눈에 튀는 그 빨강은 많은 사람들에게 어느 덧 기륭니라는 각인효과를 주고 있었다.

 

이런 특장을 가진 김소연씨다. 그는 느릿한 말투라고 못 수 없는 빠르기로 말을 이어갔다. 지나온 세월의 역사가 고스란히 배어 있어서 인가. 무슨 말을 할까 쥐어짜는 모드는 아니다. 그저 본대로 느낀대로 행동한 대로 있었던 일을 자연스럽게 말할 뿐...... 그가 하는 말도, 말에 곁들여 하는 몸짓도 자연스럽다. 그랬다.

 

기륭분회동지들이 주는 내용과 메세지는 분명했다. 우리 사회에 던지는 화두도 결코 가볍지 않았다.

 

모진 자들은 세상에 고통을 준다. 그러나 여린 사람들은 연대를 낳고, 그 연대는 대동사회를 꿈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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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23 22:04 2010/01/23 2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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