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누에게 자유를"
우리의 삶을 불가능한 채로 둘 수는 없습니다.
- 고병권 (코뮤넷 수유너머)
미누가 활동하고 있는 MWTV는 우리, 수유너머와 함께 있습니다. 밥도 먹고 생활도 일정 부분 함께 하지요. 미누는 말 그대로 우리 식구입니다. 그런 미누가 연구실 앞에서 끌려갔다고 했을 때, 그것이 정당한 연행이었는지를 따지기 이전에, 나는, 아니 우리는 ‘우리’ 존재의 일부를 빼앗겼다고 느꼈습니다. 화가 치민 건 나중이고, 당장에는 어찌할 줄 몰라 발만 동동 굴렀습니다. 혹시 하는 마음에 인권위에 긴급 구조를 요청할 수 있는지 인권단체를 찾기도 하고, 변호사에게 전화를 걸어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냐고 묻기도 했습니다. 그날 저녁 누군가의 입에서 다음날 아침 네팔행 비행기가 있다는 말이 나와서, 늦은 밤이었지만 급히 화성 외국인 보호소에 달려가기도 했습니다. 거기 가봤자, 딱히 무슨 수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만, 우리는 그렇게 허망하게 우리 일부인 ‘미누’를 잃어버릴 수 없었기에, 문이라도 막아볼 생각이었습니다. 공항에 가는 호송차 앞에서 드러누울 생각도 했습니다.
아마도 오늘 기자회견에서 나는 학술연구자의 한 사람으로 발언하게 되어 있는 모양입니다. 그러나 나는 오늘 식구를 빼앗긴 한 사람으로서, 그 일부를 잃은 한 존재로서 이 자리에 서 있다고 말해야겠습니다. 17년, 자기 인생의 거의 절반을 이 땅에서 살아온, 그것도 성년기를 모두 여기서 보낸 한 동료의 삶이, 정책담당자의 결심에 따라, 단 하루 만에 날아가 버리는 이 사태를 논리와 법으로 사유할 수는 없습니다.
아니 이렇게 말해야 할 겁니다. 이 사태는 논리와 법이 멈춘 곳에서 일어난 것이라고. 애당초 미누의 존재, 더 나아가 소위 ‘불법체류자’라고 불리는 이주노동자들의 존재는 ‘법’의 문제가 아니라 ‘법 바깥’의 문제였습니다. 이들은 재판을 통해 ‘불법’ 여부를 심판받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재판을 받을 권리도 없지요. 이 나라에서 살지만, ‘미등록’ 상태인 사람들, 일종의 ‘치외법권 지대’에 사는 사람들입니다. 불법을 저지른 사람들이 아니라 법의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라는 뜻이지요. 따라서 ‘유죄냐, 무죄냐’는 물음은 이들 존재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단지 법 바깥에 있는 사람들을 법의 테두리 안으로 넣느냐[합법화], 존재를 부인하고 그냥 없애버리느냐[추방]의 선택이 있을 뿐이지요. 현재 당국은 후자의 길을 택하고 있고요.
하지만 지금 외국인 보호소에 갇혀 있는 미누는 유령이 아니고, 현재 한국의 수십만에 이르는 미등록 이주노동자들 또한 유령이 아닙니다. 우리가 무슨 수로 그 존재를 부인할 수 있을까요. 그 존재를 부인하면 그들과 함께 한 우리 삶, 아니 이미 ‘우리’가 되어 버린, 그 삶을 부인하는 것인데, 다시 말해서 현재의 우리 자신을 부인하는 일이 될 텐데요. 한마디로 미누를 부인하면 현재의 수유너머를 부인하는 것이 되고 말 텐데요.
게다가 세계화, 지구화가 이 나라를 포함해서 모든 나라의 존재 방식이 되었는데, 무슨 수로 이들을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문을 여는 순간 국민국가의 틀을 넘어서는 많은 것들이 들어오는 것은 당연합니다. 지구화란 당연히 개별 국민국가의 틀로 환수되지 않는 이질성이 들어온다는 걸 의미합니다. 한국이 지구화되었다면, 소위 ‘한국적’이라고 상상되어왔던 그런 인종과 법, 문화로 포섭될 수 없는 많은 이질적 요소가 들어왔다는 말입니다. 그 속도나 규모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이미 들어와 있는 사람들, 앞으로 들어올 사람들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문이 열리면 큰 이익을 노리는 대규모 투자자도 오지만, 미누와 같은 가수, 노동자도 들어오게 되어 있지요. 현재의 정부가 환대하는 사람만을 오게 할 수는 없습니다.
국민국가의 틀을 넘어서는 일, 개별 국민국가의 법이 관할 할 수 없는 요소들이 늘어난다면, 우리는 애써 부인할 것이 아니라, 그것과 함께 하는 방법을 고민해야 할 겁니다. 법 바깥 존재는 없다고 부인할 게 아니라[사실 ‘법 바깥’은 개방과 상관없이 법 자체에 내재된 것입니다만], 법 바깥을 인정하고 그 위에서 어떤 가능성을 사고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최근 미누에게는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습니다. 추석 전쯤 우리 중 몇몇이 그에게 소문을 추궁했고 그는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실토했지요. 아마 여자 친구가 생기고 결혼을 하게 되면, 국적을 획득할 수 있으니, 현재의 불안정한 지위, 소위 ‘불법체류자’라고 하는 불안정한 삶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는 바로 그 점 때문에 결혼은 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국적 취득을 위해서 결혼했다는 말도 싫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국적취득’과 ‘강제송환(단속추방)’만이 존재하는 한국의 현실을 고치고 싶다고 했지요. 어떤 나라의 국적을 갖지 않더라도 최소한 그 나라에서 살아갈 수는 있는 세상을 꿈꾼다고 했습니다. 한국이 그런 나라가 되었으면 한다고 소망하기도 했구요. 그런 결심이 선 후로 그는 부모님 상을 당했을 때도 네팔에 가지 않았습니다. 샘 차오르듯 그의 눈에 눈물이 괴더군요.
미누의 결의. 아마도 그것은 결의가 아니라 그의 존재 증명일 겁니다. 자신이 존재하고 있다고. 그것을 없는 것으로 할 수는 없다고. 그가 불러온 노래, 그가 만들어온 방송, 그가 지은 미소, 우리는 그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아니 우리는 그것들이 우리의 살과 영혼이 되어 바로 여기에 있음을 분명하게 느낍니다.
미누는 ‘우리’로 환수되지 않는, 하지만 ‘우리’를 바꾸면서 ‘우리’가 된, 우리 일부입니다. 미누는 ‘한국’에 존재하는 ‘지구’입니다. 내셔널 아이덴터티로 환원되지 않는, 그 바깥 요소 입니다. 한국이 국민국가 차원을 넘는 요소를 받아들여 자신을 새롭게 구성했다면, 미누는 한국의 국민으로 환원되지 않는, 그러나 한국 국민이 현재 존재하기 위해 반드시 그 안에 담고 있어야 하는, 이질성이고 다양성입니다.
국적을 줄 것인가, 추방할 것인가. 그러나 이 물음은 낡은 국민국가체제 아래서나 가능한 부당한 이분법입니다. 초국적인(transnational) 차원이 이미 국민국가 차원에서 불가피하게 존재한다면, 우리는 초국적 신분, 트랜스내셔널 아이덴터티를 인정해야 합니다. 이미 정부가 검토 추진하고 있는 ‘이중국적’ 문제도, 그 범위나 내용이 실망스럽기는 하지만, 이 현실을 인정하기 때문일 겁니다. 우리 안에 지구적 요소가 존재함을 인정하는 한, 전면적 권리 부여는 어렵더라도 이 나라에서 살아갈 수 있는 기본 권리는 주어져야 합니다. 세계시민권이든, 영주권이든, 노동비자든, 그 무슨 이름으로든 우리는 더 이상 우리가 부인할 수 없는 존재의 자격을 긍정해야 합니다. 지금 당장 모두에게 주는 게 어렵다면 오랫동안 여기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장기 체류 이주자들에게는 반드시 그 권리가 부여되어야 할 겁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나를 엄습하는 것은 분노보다는 슬픔과 무력감입니다. 도무지 법적으로는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다는 말을 여러 사람들에게 들었습니다. 한 사람의 17년의 삶이, 그와 함께 했던 우리 모두의 삶이, 아니 바로 어제까지 그가 목 놓아 불렀던 노래가, 정책 담당자의 결심에 따라 오늘 바로 끝장나 버릴 수 있다니. 아, 못 견딜 것 같습니다. 이 불가능성을 사유하지 않으면, 이 불가능성에 대해 행동하지 않으면, 이 불가능성을 넘어서지 않으면, 정말로 못 견딜 것 같습니다. 여러분, 불가능한 것은 논리이고 법이지 삶이 아닙니다. 미누는 우리에게 존재했고, 존재하고 있고, 존재할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는 불가능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