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리걸음’의 학교, ‘제 자리’ 박탈의 기억

2013/09/25 12:05

 

[평등예감] ‘들의 이어말하기 - “차별의 자리, 자리의 차별두 번째

 

 

제자리걸음의 학교, ‘제 자리박탈의 기억

 

난다

 

 

다들 1단원은 배웠지? 2단원부터 시작한다.”

학교도, 과목 별로 바뀌는 선생님도, 친구들도, 교실의 생김새도, 교복을 입는다는 것도. 모든 것이 새롭던 중학교 1학년을 떠올리면, 첫 번째 교과수업 시간에 이런 말을 하신 수학선생님이 가장 먼저 생각난다. 당시 나는 대구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분당이라는 신세계로 전학 온 학생이었다. 자연스럽게 쓰던 내 말투는 반 아이들 모두의 놀림감이 되었고, 나는 내가 왜 그래야 하는지도 몰랐지만, 창피하고 주눅 든 마음으로 사투리 억양을 고쳤다. 안 그래도 낯선 공간에서, 전학생인 데다가, 말투 때문에 놀림거리가 되고 있는 상황을 헤쳐 나갈, 이렇다 할 깡이 부족했던 나는 수학선생님의 그 첫 마디에도 아무 대응도 하지 못하고 그냥 넘어갔다.

확실하진 않지만 그 때 같은 반 친구들 대다수는 정말로 다들 1단원은 배운상태였다. 선행학습을 하지 않은 사람은 아마 나 하나였을 것이다. 학원에 다닌다는 건 별로 생각해본 적 없어서 집에서 혼자 1단원을 공부했다. 그리고 1학기 중간고사 수학시험 점수를 받아본 후, 본격적으로 수학이라는 과목에 손을 놔버렸던가... 그랬다.

 

2007, 고등학생이 되었다. 내가 다녔던 그 학교는 당시 많은 인문계 고등학교가 그랬듯, 3월에 입학식을 하는 바로 그 날부터 강제야자를 시켰다. 그 날의 기억이 나에겐 꽤나 충격이었던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 "미학혁명(미친 학교를 혁명하라)"라는 학생인권 집회에 참석하게 되었고, 그 날 이후 나의 삶은 아주 많이 달라졌다. 미학혁명에서 만난 이야기들은 그 동안 내가 나 혼자서만, 혹은 종종 학교 친구들과의 뒷담화로만, 꿍시렁거리던 바로 그 이야기들이었다. “두발자유”, “체벌금지”, “입시폐지같은 구호들을 나와 비슷한 또래의 사람들이 한데 모여 다양한 목소리로 외쳤던 그 장면은 그 때의 나에게 대단한 울림을 주었다. 그렇게 나는 나의 꿍시렁거림의 볼륨을 조금씩 높여갔다.

2008년에는 결국 학교 밖으로 나왔다. 가장 결정적인 계기는 휴대폰이었다. 이 이야기는 꺼내자면 좀 길어질 것 같아서 일단 생략. 학교를 나온 것을 후회하진 않느냐, 라는 질문을 지금도 종종 받는데 후회하기엔 이젠 좀 오래 지나버려서...’ 라고 반 농담 삼아 답하기도 한다. 그러다 최근 주변에 어느 활동가의 자녀분이 고등학교 자퇴를 고민하면서 상담을 요청받았는데, 오랜만에 그 때의 기억을 돌이켜볼 수 있었다. 이제 막 자퇴를 고민하고, 자퇴를 선택했던 당시에는 일부러 더 난 내 발로 나온 건데?” 라고 강하게 말했던 것 같다. 주변 사람들에게도, 나 자신에게도. 그러나 지금 다시 그 때를 곱씹어보면, 선택이면서 선택하지 않음이었다. 비좁은 교실, 40명이 넘는 학생들, 친한 친구, 안 친한 애, 허구한날 치르는 시험 때문에 시험 보는 대열(한 줄)로 자리를 배치해서 짝꿍 같은 거에 더는 큰 의미를 두지 않았던 그 때. 일등부터 꼴등까지 대놓고 공개하진 않아도, 모두가 어렴풋이 눈치 채고 있던 서로의 성적, 끝이 보이지 않는 점수 경쟁. 변비에 걸릴 지경이 될 때까지, 의자에 종일 앉아있었지만 완전한 내 자리는 없었던 교실. 제 자리를 찾지 못하고 이리저리 방황하다 진짜 삶을 찾겠다고 학교를 나왔지만, 그건 결국 학교로부터 쫓겨남과도 그리 다르지 않았다.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말이다.

그럼에도 학교 밖에서의 하루하루는 그 동안의 삶과는 많이 달랐다. ‘학교 안 다니는 애라는 시선과 마주할 때는 조금 두려웠고, 시험기간 같은 거 신경 쓰지 않아도 될 때는 그 자유로움을 만끽했다. 해방감과 불안감이 섞인 묘한 기분이 한동안 나의 일상을 채웠다. 무엇보다 늦잠을 자도 뭐라 할 사람이 없다는 게 참 좋았다. 지금도 그렇지만, 아침잠이 많아서 매일 아침 일어나는 게 고역이었다. 생각해보면 너무 이른 시간이다. 보통 12시 넘어서 잠자리에 드는데, 다음 날 무단지각하지 않는 등교를 위해서는 늦어도 6시 반에는 일어나야 했으니까. 나의 고등학교 자퇴는 여전히 내 삶에서 중요한 부분이다. ‘자발적퇴교이면서도 동시에 쫓겨남이며, 수십 년(어쩌면 더한 세월)을 한결같이 제자리걸음을 반복하는 학교와 교육현실에 대한 소심한 반항이면서도 동시에 일상의 소소한 행복을 느끼게 해준 시작점이었노라고, 새삼스레 되짚어본다.

 

어쨌거나 그 이후, 2008년부터 지금까지 청소년인권활동을 함께 하고 있다. 이것저것. 우리의 고민과 요구를 알리고 전달하면서, 우리 사회에 인권이 좀 더 단단하게 자리 잡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조금 더 많은 사람들과 함께 하고 싶었다. 내가 인권을 만났던 것처럼. 그래서 조금이나마 숨통이 트이는 듯한 기분을 느꼈던 것처럼.

보편적인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은 분명 아니다. 지금도 조금은 불안하다. 고등학교도 그만두고 대학교도 안 갔고, 정말 그냥 보면 나를 이 사회의 낙오자라고 부를 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역시 돌이켜보면 지금처럼 사는 것을 택한 걸 후회한 적은 없는 것 같다. 학교는 내 시간과 내 자리를, 박탈했지만 지금 나는 그 기억으로부터 만의 이야기가 아닌 다양한 청소년들의 삶의 이야기를 조금씩 만나고 있다. 나 같은 사람도 있고 아닌 사람도 있다. 학교와 세상으로부터 차별받고 외면당한 많은 사람들의 기억은 곳곳에 흩어져 서로 다른 방식으로 제 모습을 드러내거나 감추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자꾸만 가다보면, 언젠가는, 지금은 없는 다양한 이야기들이 좀 더 보편적이고 당연한 이야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인권을 만나는 사람들이 더 많아질 거라고, 인권의 가치를 품고 세상과 맞설 용기가 우리의 힘이 되어줄 거라고, 기대해본다. 나의 경험과 너의 경험, 나의 기억과 너의 기억이 각자의 자리에서 우리의 목소리가 되어 세상에 울려 퍼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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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들의 이어말하기에 참여하면서 썼던 글. 

나 자신의 경험에 기대어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 어쩌다보니 종종 나를 까먹고 그냥 휘청휘청 지낼 때가 있는데, 잊지 말고 되새겨주면 좋을 일인 것 같다.

잘 정돈된 느낌의 글은 아니지만, 할 말을 고르고 준비하면서 다시 나를 돌이켜봤던 기억.  

우리의 힘은, 우리의 운동은 그것으로부터 출발한다고, 지금 생각하고 있다. 

 

http://www.ad-act.net/104  (차별금지법제정연대 사이트에 올라간 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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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공부, 기억, 대한문, 을들의 이어말하기, 자리, 자퇴, 차별, 차별금지법제정연대, 청소년인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