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여행기] 10. 에필로그 - 영어를 못하면 사람이 아니다

category 홍콩 2013 | Posted by 오씨 부부 | 2013/03/31 17:49


 

손중산박물관을 등지고 왼편으로 한참 내려가면 홍콩대학교가 나온다. 돌로 된 정문에서 계단을 올라가면 도서관까지 바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가 있어 그것부터 탔다. 시간은 이미 6시가 넘었다. 관광청 책자에 근대 건축의 아름다움을 구현한 건물로 건축학도들이 반드시 방문한다는 설명이 나와 있었지만 이미 캠퍼스는 어두워지고 있었다. 대신 도서관 앞에 앉아 맞은편의 경치를 구경했다. 홍콩대학의 도서관은 6층 높이에 있는데 보통 한국 대학 도서관의 절반 크기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들어가보고 싶었지만 출입카드가 필요해 보였다. 운동장도 없는 좁은 학교지만 주차장은 마련되어 있었다. 벤츠와 BMW가 역시 즐비하다.

 

손문이 졸업한 홍콩 서양의학원은 현재 홍콩의대의 전신이다. 그래서 홍콩대학에도 손중산을 기념하는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도서관 위쪽의 높은 계단을 올라가자 런런쇼 센터가 나타났다. 홍콩 무협 영화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쇼브라더스 영화사의 후원으로 지은 건물이다. 붉은 벽돌에 금색으로 ‘RUN RUN SHAW’라고 적혀 있다. 들어가 보니 학생 자치활동 공간으로 사용되고 있는 듯 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괴롭히는 내용의 메시지를 받을 경우 신고해 달라는 벽보.
상담지를 넣은 함이 비어 있다. 대놓고 괴롭히기 보다 메시지를 통해
불쾌하게 하는 경우가 많은 모양이었다.

 

런런쇼 센터에 마침 서점이 있었다. 도서관 구경은 못 했지만 대신 서점이라도 보고 싶어서 들어갔다. 대학 서점이니 홍콩대생들이 많이 찾는 책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신자유주의에 굴복한 어느 대학이나 마찬가지겠지만 인문 사회분야의 책은 거의 드물었고 대신 심리학 책이 많았다. 서가 배치를 감안하면 철학서가 있어야 할 자리를 심리학과 실용서가 채우는 것은 다른 서점들도 비슷했다. 겉으로는 활기 넘치는 홍콩이지만 정작 서점의 눈에 잘 띄는 자리마다 심리학 책이 꽂혀있다는 것은 의미심장했다. 베스트셀러 순위를 꽉 채운 힐링서적이야말로 상처받은 사람들이 넘친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출입문 정면의 중앙 자리는 역시 법학 교과서가 차지했다. 한국 법학교과서는 헌법과 민법, 형법과 상법이 주된 자리를 차지한다. 하지만 홍콩대학 서점에서 제일 먼저 눈에 띄는 법서는 계약법과 국제법이었다. 그 다음으로 많은 책은 역시 소설이었다. 해리 포터 시리즈와 셰익스피어, 제인 오스틴, 디킨스 등 영문학의 고전들이 컬러풀한 표지를 빛내며 진열되어 있었다. 역사책은 중국에 대한 책이 제일 많았다. 한국 서점과 다른 점이라면 전기류만 따로 모아 잘 보이는 곳에 모아 놓았다는 것이었다. 달라이 라마와 아웅 산 수치의 전기가 눈에 들어왔다.

 

홍콩이 중국에 반환되면서 급격한 중국화를 예상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그러나 한 지역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가장 큰 요소가 언어라면, 홍콩의 중국화는 아직 먼 길을 가야 할 것 같다. 적어도 홍콩대학 구내서점에서 북경어 교재를 제외하고는 중국어로 쓰여진 책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일반 서점에서는 그 비율이 각각 달랐다. 대중적인 서점일수록 중국어 책이 많았고 고급 서점인 경우는 영어 책이 다수를 차지했다. 하버시티 쇼핑몰 서점은 아예 공간이 나뉘어 있었다. 대학 정문 맞은편에 있는 서점은 아예 중국어 책을 팔지 않았다.

 

홍콩에 가면 웬만하면 영어는 다 통한다지만 100% 완전히 통하는 것은 아니었다. 헐리우드 로드의 다이파이동에서도 영어가 안 통해 사진으로 음식을 주문해야 했으니 말이다. 홍콩에도 동남아권 이주노동자들이 쏟아져 들어온다. 텔레비전을 켜면 필리핀 출신 가정부를 보내주는 광고가 나올 정도다. 이미 식당 서빙 일자리는 대부분 동남아 이주여성들이 차지한 느낌이었다. 반면 홍콩 시민들은 영어를 잘 한다. 한 번은 화장실 앞에 서 있던 아주 평범한 차림의 아주머니에게 먼저 들어가라고 손짓했더니 “No, No! I was just looking for place to wash my hands!”하고 속사포처럼 쏟아내고 가버렸다. 한국 대학생 중 이렇게 기나긴(?) 문장을 몇 초 만에 쏟아낼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지 궁금하다.

 

한국에서 영어 능력이 계급을 가르는 척도로 굳어진 지 오래다. 하지만 홍콩에서 영어는 조금 다른 의미다. 일반 학교는 영어로 수업을 진행하기 때문이다. 북경어 수업이 늘어나고 있지만 광동어를 사용하는 홍콩 시민들에게 북경어는 또 다른 외국어다. 공동체의 지식을 생산하고 축적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대학에서 영어만을 사용한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당장 한국 대학에서 영어 교과서만 사용하겠다면 극심한 혼란이 일어날 것이다. 이미 영어 강의도 슬그머니 사라지고 있는 추세다.

 

홍콩에서 영어를 못한다는 것은 단지 대학에 못 가는 게 아니라 평생 밑바닥에서 몸을 움직여 일을 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런 사회가 유지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영어를 잘 하는 사람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못 하는 사람이다. 옛 이야기에 전해오는 토지신의 부인이 말했듯이 누군가 쓰레기를 치우고 음식을 나르고 땅을 파야 하기 때문이다.

 

인천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는 날 슈퍼에서 산 샌드위치로 점심을 때우기 위해 IFC 쇼핑몰 옥상에 올라갔다. IFC 몰은 아시아에서 제일 넓은 애플 매장이 입점해 있는 센트럴 최대 쇼핑몰이다. 빗물을 품은 듯 거무스름한 구름이 낀 하늘을 보며 샌드위치와 샐러드를 펼쳤다. 주변에서 동남아에서 온 듯한 젊은 여성들이 즐겁게 수다를 떨고 있었다. 차림새로 보아 여행객이 아니라 이주노동자 같았다. 아마 점심시간을 틈타 잠시의 휴식을 즐기는 것 같았고, 비싼 물가 때문에 유일하게 쉴 만한 자리가 건물 옥상밖에 없는 모양이었다. 영어는 한 마디도 들리지 않았다. 남편과 나는 시끄럽게 들려오는 여러 가지 언어를 들으면서 홍콩에서 마지막 식사를 했다. 슈퍼에서 이것저것 사온 우리와 달리 그녀들의 음식은 1.25리터짜리 코카콜라 한 병이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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