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구과 진실의 구분이 무의미해진 세상

category 감놔라 배놔라 | Posted by 오씨 부부 | 2018/08/29 17:53


 

드라마나 영화, 또는 신문 기사 등등 대중매체를 통해 접하는 역사적 사실들 중에는 우리가 어려서 읽고 배웠던 역사적 사실과는 꽤나 다른 경우들이 있습니다. 단지 해석의 관점이 다른 정도가 아니라 아예 새로운 사료의 발굴로 인해 사실 관계가 꽤나 달라져 있음을 뒤늦게 알고 당황하기도 하죠. 특히 정치사와 관련해서는 새로운 사료의 발굴과 당대의 상황에 따라 꾸준히 다시 읽기를 통해 재해석들이 가해지며 정설조차 계속 변해 옵니다.

 

역사적 사건들 뿐만이 아닙니다. 다양한 과학적 사실들도 마찬가지입니다.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맹독성 물질인 수은이 피부에 좋다고 알려져 화장품 재료로 쓰이기도 했습니다. 또 흰쌀밥은 쌀이 부족했던 1970년대에는 당뇨병의 주범이 되었다가 쌀이 남아돌게 되는 1990년대가 되자 당뇨와는 별 관련이 없다고 면죄부가 주어지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이라는 것의 대부분은 고정 불변의 객관적 지식이 아니라 당대의 사회 속에서 의미를 형성하고 영향력을 행사하는 담론일 뿐이라고까지 일컬어집니다. 구성주의자들의 관점이라고 할 수 있겠죠. 사실 수십 년 동안 뉴스에서 반복되었고 앞으로도 반복될 불멸의 레퍼토리가 있죠. 술 마시면 건강에 해로워 VS 약간의 술은 건강에 좋아 따위의 뉴스들(?)은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유명 인사와 장수자들의 경험담에서부터 과학자의 실험 결과에 이르기까지 나름의 근거를 갖고 꾸준히 회자되고 있습니다.

 

어디 술뿐이겠습니까. 99세에 쿠데타를 했다는 고구려의 명림답부 이야기에서부터 아프리카 사람들을 인간 이하로 보았던 관점에 이르기까지 오늘날의 상식으로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온갖 이야기가 공식적 역사와 과학적 증거(?)들에 의해 버젓이 당대 사람들의 마음을 휘어잡고 있습니다.

 

여기서 이런 생각을 해볼 만합니다. 뒤에 가서 뒤집어질 일들을 객관적 사실이나 과학적 진실로 의심없이 믿는 상태에서 삶을 마치게 된다면, 우리는 그 사람의 인생을 허구(≒거짓, 오류, 가짜)를 믿다가 죽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천동설을 철석같이 믿던 사람들을 오늘날 기준으로 허구를 믿은 사람으로,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렇게 따지면, 우리도 언젠가는 깨질 수많은 오류들을 진실이라 믿으며 어리석게 살아가는 게 분명합니다.

 

우리가 의심없이 믿는 사실들 중 많은 것들이 시간이 흐른 뒤 사실이 아니라고 밝혀질 겁니다. 반대로 우리가 거짓, 또는 허구라고 규정한 것들이 나중에는 진실임이 밝혀지기도 할 것입니다. 그것들은 때로는 역사적 사건의 전개 과정일 수도 있고, 과학 실험의 결과일 수도 있으며, 심지어는 많은 사람들이 지금 두 눈 시퍼렇게 뜨고 들여다 보고 있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요약하면, 우리는 사실과 허구, 그리고 그것이 뒤엉켜서 보는 입장에 따라 사실이기도 하고 허구이기도 한 것들 모두를 당대의 가치관에 따라 사실이라고도 믿고, 또는 허구라고도 믿으며 살고 있다는 뜻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과연 세계는 있는 그대로 우리에게 인식될까요?
영국 군의관 존 맥레오드의 <Narrative of a Voyage>(1817, 부제 생략)에 실린
조선인을 직접 보고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최초의 그림

 

그래서 어떤 이들은 진실과 허구를 가르는 것이 의미가 있냐며 큰 의미를 두지 않기도 하고, 그럴수록 진실을 찾으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떤 입장이 맞다 틀리다를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다만, 실제의 진실이 있으며 문학, 특히 소설은 진실이 아니라 허구라고 단정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한편으로는 진실을 가리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는 사람들을 그저 깊이가 없다는 식으로 폄훼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양쪽의 입장을 적절히 받아들이고 이해해서 경직되지 않은 사고를 하면 좋으련만 그렇지가 않더군요. 그 덕분에 논쟁이 있고 발전도 있지만, 그 와중에 적과 아군이 나뉘기도 하고 친소 관계도 정리되며 그로 인해 밀려난 개인의 밥벌이와 한 가족의 인생살이도 달라지니 참 희한하지요.

 

예수가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것이 과학적 사실이냐 아니냐를 논할들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예수의 사랑을 본받으려는 마음과 예수를 팔아 먹고 살려는 인간의 욕심이 세계사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가 중요한 것이죠. 한 자리에 앉아있던 사람들조차 자리에서 나눈 얘기를 저마다 제각각 기억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한 판에, 남겨진 기록과 유물만으로 아득한 옛일의 진위를 캐려는 역사학자들의 노력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역사적 사실의 진위를 캐어 위서를 골라내고 정사의 진실을 바로 세우려는 역사학자들도 종국에는 행간을 상상력으로 채울 수밖엔 없으니 역사(≠역사학)도 궁극엔 신화이자 이야기가 됩니다.

 

예전에 어떤 자리에서 객관적 사실과 허구와의 경계가 정말 존재하느냐는 말을 한 적이 있는데, 자리에 있던 웬 바보 같은 자가 그럼 당신이 소설을 쓰면 되겠네라며 비아냥거리더군요. 실제 벌어진 일을 연구하는 자신은 과학자인데, 왜 내앞에서 신화나 문학 따위의 허구를 말하냐는 거죠. 그런 사람이 문화를 가르치는 교수라니 하품의 인격에 교양의 수준이 어이가 없어 더 이상 대꾸를 안 했지요. 인간과 이야기, 그리고 포스트 모더니즘에 대한 이해가 없는 자들 사이에서 그런 얘기를 한 게 잘못이라면 잘못이겠습니다만.

 

아무튼 뭐든 진실이라 믿으면 진실이 되는 것, 그리고 70억의 인간이 있으면 70억 개의 우주가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무슨 사회와 문화를 가르친다는 것인지, 그런 사람한테 배우는 학생들이 불쌍히 여겨지던데, 그래서 이 나라에는 제대로 된 사회과학자가 안 나오는 듯합니다. 기억은 상상의 일부이며, 기록은 편집되기에 결국 우리 앞에 놓인 기억과 기록은 결국 선택된 상상의 산물일 뿐이라는 것, 그 수준 낮은 교수가 지금은 이해를 하고 있으려나 혼자 웃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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