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히' 스포츠를 말하다

스포츠에 대한 잡설

#1. ‘감히’ 스포츠를 말하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나는 스포츠에 대해 할 말이 별로 없다. 살아오는 동안 스포츠 를 즐겨본 적도 없고 깊이 고민해본 적은 더더욱 없다. ‘할 수 있는’ 스포츠가 별로 없으니 ‘볼 수 있는’ 스포츠에도 별로 관심을 두어본 적이 없다. 아마도 내가 ‘여성’이라는 이유가 가장 결정적일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살아오는 동안 나는 수많은 ‘스포츠’들에 부대껴왔다. 부대끼는 곳은 학교이기도 했고 텔레비전이기도, 신문, 산책로이기도 했다. 또한 그 부대낌은 짜증이거나 감격이거나 혹은 부러움, 분노, 즐거움 등 다양한 느낌을 던져놓고 사라져가곤 했다. 텔레비전 채널을 두고 아빠와 신경전을 벌이던 때 대개 승자는 ‘재미 한 개도 없는’ 권투시합중계였다. 중학교 체육시간에 단체로 갔던 수영장에서 물에 뜰 줄도 몰랐던 나는 수영선수였던 친구들의 모습이 참 부러웠다. 동네 근처의 숲으로 나가 설설 걸어보려면 줄지어 조깅하는 사람들에 쫓겨 나도 뛰어야만 할 것 같았다. 뭐 이런 것들이 자잘하게 내 기억 속에 남아있다. 그런데도 나는 늘 스포츠는 나와 거리가 먼 것이라 생각하며 한 번도 그것에 대해 이야기해본 적이 없다. 그러다가 ‘열광하는 스포츠 은폐된 이데올로기’라는 책을 읽게 되었고 넘기는 책장마다 떠오르는 기억들을 건져 한번쯤은 중얼거려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감히’ 스포츠를 말한다.

 

#2. 숨기다 또는 가리다

스포츠 하면 가장 할 말이 많은 것은 숱한 투쟁들이 가려진다는 것이다. 3S 정책에 대한 비판 류의, 국민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역할을 하는 스포츠, 라는 담론. 나에게도 가장 스포츠가 선명하게 다가왔던 것은 그런 때였던 것 같다. 88올림픽 뒤로 훨씬 ‘선정적’이며 ‘dramatic'한 ’상계동 올림픽‘이 있었고 호돌이 뒤에는 호랑이보다 더 무서운! 포돌이(뭐, 당시에는 포돌이가 아니었지만)가 있었다는 이야기는 ’국민학교‘를 다니고 있던 내가 까마득하게 몰랐던, 모를 수밖에 없던 이야기였지만 2002년 World Cup 뒤로 훨씬 ’보편적‘이며 ’우애‘로 가득찬 American Tank 가 숨었다는 것은 못견디게 불만스러운 것 중의 하나였다.

 

#3. 길들이다

그러나 각종 국제대회를 유치하고 시즌 경기를 지원하는 정책 말고도 써먹을 데가 많다. 스포츠는 훨씬 자연스러우면서도 은근하게 통제의 역할을 수행하기도 한다. 기숙사와 더불어, 교과 과정에 스포츠를 적극적으로 도입한 19세기 중반 영국의 사립 중등학교는 학생들의 방종을 막고 교사들의 권위에 복종시키기 위해 운동장 또는 체육관을 학교 안에 만들기 시작했다고 한다. 대부분의 스포츠가 오랜 역사 속에서 이루어지던 놀이문화들에 규칙을 덧붙여가면서 하나의 경기종목으로 자리잡았던 것과 달리, 완벽하게 ‘창조’된 경기인 농구를 만들도록 지시한 굴릭은 청소년 교화를 위한 운동장 설치 운동에 앞장섰다고 하며 그에게 교육의 유일한 의미는 학생을 억압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돌아가신 ‘외’할아버지에 대한 기억 중 하나는 -아마도 명절이라 ‘외’할아버지와 같은 방에서 우리 남매가 자게 되었던 것 같은데- 새벽 5시(? 6시?)에 벌떡 일어나 라디오에서 울려퍼지는 ‘국민체조’의 구령에 맞추어 열심히 맨손체조를 하시던 모습이다.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는 것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계셨고 아주 가끔씩 박정희 정권의 피비린내나는 독재에 대한 기억을 슬쩍 흘리시던 분이었지만 ‘국민체조’까지 비껴가지는 못하셨다. 그 체조의 뿌리가 일제 시대의 광범위한 국민관리정책에 있었다거나, 박정희정권 들어 더욱 강화되었다거나, 체조의 활성화 정책이 규율을 준수하는 인간형을 만들어낸다거나 하는 둥의 이야기를 '외'할아버지에 대한 기억과 함께 뱉어내야 하다니... 공이 거꾸로 날아가 나를 웃음꺼리로 만들었던 ‘국민학교’ 시절의 체력장도 박정희정권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라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참 억울한 일이다. 왜 하필 나는 윗몸 일으키기와 매달리기와 공던지기, 멀리뛰기 같은 것들로 나의 체력을 평가받아야 했던 것이냔 말이다.


#4. 모으다

올림픽 중계를 하면서 끊임없이 국가순위를 보여주고 선수의 승리를 국가의 승리로 치환하면서 우리 모두를 국가의 열렬한 추종자로 만드는 것 역시 스포츠의 작용 중 하나일 것이다. 어느 경기에서 어떤 선수가 훌륭히 경기를 치뤘는지에 대한 관심보다는 ‘우리나라’가 몇 위인지에 대한 궁금함이 더욱 보편적이다. 물론, 손기정 선수의 금메달 획득처럼 스포츠와 국가의 만남이 저항의 역할을 하는 때도 있다. 국제대회에서 과거 자신의 식민지배국이었던 국가와의 경기에 좀더 집착하고 승리의 기쁨 역시 배가 되는 것이 일반적이라 하지 않는가. 나 역시 2002년 월드컵에서 세네갈에 대해 애틋한 마음을 가지게 됐던 것 같은데. 그러나 이 역시 국가와 민족을 경계로 사람들을 묶어세운다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다.


#5. 착취하다

스포츠와 좀더 직접적으로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은 거대한 스포츠산업이다. 각종 국제대회를 성사시키고 지탱하며 그를 통해 끊임없이 상품을, 스포츠스타까지도, 만들어내는 것이 바로 스포츠산업이다. 아테네 올림픽의 개막에 때맞추어 ‘올림픽 페어플레이’라는 보고서가 나왔고 새사회연대에서 이를 번역하여 한국에 소개하였다. 이 보고서는 올림픽 헌장에서 밝힌 ‘올림픽 정신’, 즉 ‘보편적이고 기본적인 윤리 원칙의 존중...에 근거한 생활 방식의 창조를 모색하는 것’을 주요 스포츠웨어 회사들이 위배하고 있음을 밝히고 스포츠웨어 산업 전체의 변화를 촉구하고 있다. 스포츠웨어 산업의 노동자들이 처한 노동현실은 그야말로 ‘더 많이, 더 멀리, 더 빨리’ 다. 특히 제3세계의 여성노동자들을 과녁으로 삼는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이 동일한 시간에 더 많이 만들고, 상품이 더 멀리까지 팔리고, 노동자들을 더 빨리 해고할 수 있게 하려고 갖은 수단을 동원한다. 여성노동자들에게 가해지는 성희롱과 성폭력, 정당한 노동자의 권리의 박탈 역시 스포츠웨어 산업의 unfair play를 보여준다. 그러나, 그래도 운동화는 나이키가 좋다는 착각을 떨쳐버리지 못하는 나같은 인간 때문에 그런 현실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6. 순수하고 공정한?

그런데 과연 스포츠가 fair하기는 한가. 스포츠 중계를 보며 감격하게 되는 이유 중 하나는 맨몸뚱이로-그러니까 순수하게 경쟁의 장에 나서고 공정한 판결을 통해 승자가 가리워지는, 현대 사회에서 보기드문-어느 곳이나 그렇다고 여겨지지만 실제로는 보기드문- 공간이기 때문이다. 노력하는 사람이 노력하는 만큼 승리하게 된다는 각본은 실제로 노력할 기회 자체가 불평등하게 배분된다는 사실을 은폐한다. 특히, 스포츠가 갈수록 과학화하고 자본화하면서 스포츠 자체에서도 자본의 역할이 중요해진다. 올림픽에서 1위를 쉽게 내놓지 않는 국가가 미국이고 10위권 이내의 국가들이 ‘선진국’이라는 것은 이러한 사실을 잘 보여준다. 노력하는 만큼이 아니라 투자하는 만큼 승리하는 것이다. 설령, 동일한 투자가 이루어진다 치자. 그렇다면 몸의 차이에 의해 결과가 달라지는 것은 문제가 없는 것일까. 머리좋은 사람이 좋은 대학 나와 돈 많이 버는 것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것과 키큰 사람이 농구에 좀더 유리해서 승리하는 것이 당연하게 느껴지는 것이 아주 다른가. 이것까지 시비걸기는 조금 부담스럽지만 생각해볼 만하다.


#7. 헝그리 정신

순수하고 공정한 스포츠에 대한 환상은 ‘헝그리 정신’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라면이 주식’이었던 임춘애. 그녀는 ‘달려라 하니’를 통해서 영원히 재생산되는데 정육점집 아들 박지성이나 탁구장집 아들 유영민도 그녀를 따라잡을 수 없다. 아마도 앞으로 그녀를 대신할 만한 선수는 나오지 못할 것이다. 실제 스포츠에서 ‘헝그리 정신’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여전히 우리 사회는 ‘헝그리 정신’을 강요할 것이며 스포츠의 이미지는 그것을 강력하게 지지할 것이다. ‘넘버 3’의 자존심으로까지 격상한 ‘헝그리 정신’이 ‘허리띠를 졸라매’자던 정권의 선동과 일맥상통하는 것은 더 이야기할 필요가 없을 듯하다.


#8. 닮은꼴

그러나 ‘헝그리 정신’으로는 현대사회의 세련된 이윤의 논리를 다 설명할 수가 없다. 그래서일까. 현대경제연구원은 <한국 여자양궁 신화와 기업경영전략>이라는 보고서를 펴내 7가지 교훈을 제시한다. 잘하는 것에 집중하라, 시장을 지배하고 표준을 선도하라, 어떠한 환경의 변화에도 위협받지 않는 핵심역량을 갖춰라, 핵심인재 그룹을 형성하고 치열한 경쟁을 유도하라, 차세대 리더를 키우고 세대교체에 성공하라, 조직내 학습 및 연구개발에 역량을 집중하라, 내부의 적을 관리하라, 가 그것이다. 공정한 스포츠에 대한 신화는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공정한 경쟁의 신화와 닮은꼴이다. 이제는 신화를 빌려오는 것을 넘어서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전략까지 빌려오고 있다. 이 전략이, 사양산업의 노동자들을 헌신짝처럼 버려라-동대문 의류산업이 중국으로 넘어가면서 많은 노동자들은 일자리를 잃었고 남아있는 노동자들은 더욱 열악한 노동환경에 처하게 되었다- , 독점을 지향하라, 비정규직을 늘려라, 노동자들 사이에서 경쟁을 강화하라, 노동자에 대한 감시/통제를 철저히 하라는 등의 명령과 다르게 보이는가.


#9. Girl, Fight? Girl, Fight!

스포츠를 이야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바로 여성/성이다. 이번 아테네 올림픽 기간 동안 몇 번 경기를 지켜볼 기회가 있었는데 나를 가장 놀라게 했던 것은 ‘여자 마라톤’이었다. 다른 게 아니라 ‘여자 마라톤’이 너무 일찍 치뤄진다는 것이 놀라웠다. 올림픽의 대미는 ‘남자 마라톤’이 장식한다. 그것은 마라톤에서 그 기원을 찾고자 하는 올림픽대회가 고수하는 하나의 의식이다. 그러나 올림픽의 마라톤에 대한 애정은 ‘남자마라톤’만을 향해있었던 것이다. ‘여자마라톤’은 그저 매일매일 벌어지는 경기 중의 하나였을 뿐이고 중계자들의 발언은 마치 마라톤 남자선수들을 위해 실제 마라톤 코스를 점검하는 역할을 여자선수들이 하고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아마 한국이 ‘여자마라톤’에서 메달을 얻을 가능성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언제 하느냐가 사소한 문제일 수도 있지만 마라톤의 상징성이 늘 올림픽의 마지막 경기라는 데에서 확고해진다는 것을 떠올려보면 놀랄 만도 한 일이다. 그것보다 더 노골적인 것은 중계방송의 발언들이다. 텔레비전에 대한 1990년의 한 연구에 따르면 남자 테니스 경기를 중계할 때는 힘을 강조하는 어휘가 연약함을 암시하는 어휘보다 네 배나 더 많이 사용된 반면 여자 테니스 경기를 중계할 때는 두 종류의 어휘를 사용하는 비율이 거의 비슷했다고 한다. 직접 듣지는 못했지만 후배의 말에 의하면 이번 올림픽의 양궁 경기에서도 대만의 한 양궁선수를 두고 ‘남자같이 생겼다, 여성을 좋아한다는 소문도 있다’는 류의 발언이 있었다고 한다. 경기의 중계는 경기에 대한 발언들로 채워져야 한다. 경기에 출전한 선수의 장, 단점이라든지, 흥미로울 법한 관전 포인트라든지, 경기에 대한 해설 자체로 끝내도 된다. 하지만 선수의 외모나 신체에 대한 평가는 늘상 등장한다. 뭐, 그런 이야기 한두마디 할 수 있다고 치자. 그래도 그것이 여성선수에 대해서만 두드러진다면 분명 지적되어야 할 일이다. 게다가 그런 발언들에서 드러나는 편견과 차별은, 아무래도 수준 이하지 않나. 대부분의 경기가 남성성을 옹호하는 것 역시 여성선수들과 관람하는 여성들을 불편하게 하는 것 중의 하나다. 남성과 여성의 경기를 당연하다는 듯이 구분하는 것을 그저 오래된 관례겠거니 하고 넘어가더라도(이 구분은 그 자체로 남성과 여성은 비교될 수 없는 우열관계에 놓여있다는 이데올로기를 강화한다) 경기를 잘하는 것=남성성이 강한 것처럼 다루는 방식은 매우 불쾌하다. 예를 들면 이런 것. 똑같이 과감한 경기를 하더라도 ‘남자답게 과감해요’/‘여자인데도 과감해요’ 류의 발언들을 늘어놓는다는 것이다. 영화 Girl Fight는 그런 면에서 참으로 통쾌한 영화였다. 여성이 맞닥뜨리게 되는 각종 폭력-가정폭력, 성폭력, 소외, 빈곤 등-에 대해 남성에 의해 전유되었던 것들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저항한다는 것, 어쨌든 결말에서 ‘남자친구가 될 뻔했던’ 상대선수를 이기는 것 등. 사실, 여성/성에 대한 접근성의 차이와 차별뿐만 아니라 인종, 계급 등에 따른 차이와 차별도 드러난다. 글이 길어지니...


#10. 엉뚱한 상상

얼마전부터 나는 수영장에 다니기 시작했다. 30대에서 60대까지의 여성들이 포진해있는 구민회관의 수영강습을 받고 있다. 섬에서 나고 자라면서도 수영을 못하는 것에 큰 불편함이나 아쉬움을 느끼지 못했던 나는, 영화 ‘블루’를 보고나서부터 아주 강렬히 수영을 배우고 싶어하게 되었다. 줄리엣 비노쉬가 아무도 없는 수영장의 물빛을 가르며 물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장면이 왜그리 잊혀지지가 않는지. 어쨌든 그로부터 수 년이 지난 후 큰맘먹고 수영을 배웠고 얼추 물 속에서 빠져죽지는 않을 것 같은 상태가 되었다. 올해 다시 수영강습을 받는 것은 배우기 위해 다녔던 것과는 조금 다르다. 좀더 잘하고 싶은 욕심-그래서 줄리엣 비노쉬처럼 멋지게 물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욕심인 게지. 그리고 아마도 자신을, 혹은 자신의 건강을 관리하기 위해 무언가 하나쯤은 하는 것이 현대인의 기본이라고 세뇌시키는 각종 언설에 떠밀린 탓도 있을 게다. 그리고... 휴우... 나에게 스포츠는 무엇인가를 끝까지 찾아 물어보려고 하였으나 이제 지치다. 쨌든. 스포츠는 정말 다양하게 읽을 수 있는 텍스트이고 수많은 이데올로기를 은폐한 채 간직하고 있지만 분명 고정된 것은 아니다. 스포츠의 행위자/수용자에 따라서, 스포츠가 놓인 맥락에 따라서 얼마든지(사실은, 아주 약간의 차이일 듯하지만) 다른 의미를 획득할 수도 있다. 그래서 갑자기 엉뚱한 상상이 들었는데... 에구구... 이젠 팔이 저려서 더 이상 쓸 수가 없다. --;


-------------------------------------------------------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시리즈, 열광하는 스포츠 은폐된 이데올로기, 한번 읽어볼만합니다. 일다(ildaro.com)나 프레시안(pressian.com)에 읽어볼 만한 기사가 많습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4/08/31 20:47 2004/08/31 20:47
태그 :
트랙백 주소 : http://blog.jinbo.net/aumilieu/trackback/41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