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다 -2017년 2월

.28.

장지로 가는 길에 '녹슨 훈장' 얘기가 나왔다. "할아버지에게는 녹슨 훈장이 있습니다." 반공웅변대회에 나갔던 때 첫 문장이었다. 뒷 이야기는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리고 녹슨 훈장은 한번도 본 적이 없다. 할아버지가 한국전쟁 때 왜 육지까지 나갔는지 짐작되지는 않는다. 1948년을 제주 중산간 마을에서 살았던 경험 때문일까, 군인이 되면 다른 미래를 꿈꿔볼 수도 있는 시대였기 때문일까. 49년에 큰아들인 아빠를 낳고 제주를 떠났다고 한다. 육지에서 몇 년 동안 어떻게 지내셨을까. 한번도 궁금해본 적 없던 것이 궁금해졌다. 할아버지의 관은 태극기로 쌓여있었다. 국가유공자라 그랬나. 살아생전 태극기가 할아버지를 어떻게 품어주었는지는 당췌 모르겠으나 누군가의 마지막 길에 국가라는 것이 큰 울타리일 수 있겠다는 생각도 스쳤다. 어쩌면 수많은 사람들에게 태극기는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장례를 마치고 들른 할아버지 집에서, 몇 십 년 동안 쌓인 짐일지 모르는 것들이 쏟아져나오는 안방에서, 맴도는 건 사람 냄새일 뿐이던데. 할머니의 굽은 허리와. (운구차가 마지막으로 동네를 들를 때 집 앞에 소주 한 병과 제 올릴 잔을 들고 나왔던 할머니 두 분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27.

장례식장에서 손주의 역할은 부모 뒷바라지구나. 아빠가 일찍 돌아가셔서 나는 빨리 어른이 된 것처럼 착각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다는 걸 깨달을 일이 자주 있어도 마찬가지다. 

.26.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비행기표 예매를 하려고 컴퓨터 앞에 앉으니 할아버지의 죽음이 내게는 어떤 소식인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서둘러 내려갔더니 막 입관이 시작됐다고 한다. 작은할머니는 입관하는 곳으로 가보라고 했고, 먼저 온 사촌동생은 우리가 가는 데가 아니라며 어른들만 갔다고 말해줬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그냥 기다리기로 했다. 아빠 돌아가시고 입관할 때 마지막으로 본 아빠의 얼굴은 평화로웠다. 아빠의 죽음이 덜 아플 수 있었다면 그 덕분도 크다. 할아버지의 입관을 보지 않은 건 슬픔이 그만큼 덜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할아버지의 입관을 지켜보는 어른들의 슬픔까지 나눌 엄두는 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할아버지는 어제 저녁, 늘 누워있던 모습대로, 그러나 숨이 멎은 채로, 세상을 떠나셨다고 한다. 

.25.

성소수자인권포럼 세션 중 성소수자인권운동의 과제를 토론하는 자리에 토론자로 섭외됐다. 초대받은 덕분에 2017년이라는 시간을 다시 들여다볼 수 있었다. 입 밖에 내고 나면 책임져야 한다. 2017년은 해방 이후 반공주의를 거치며 희미해져버린 '평등'이라는 가치를 다시 새기기 시작하는 해가 되어야 한다. 

.24.

극심한 두통. 도대체 어찌 살라는 말입니까.  

.23.

골은 누가 메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없었던 척 새침뗄 수도 없다. 골판지 같은 그것이, 얼마나 헤졌고 좁아졌는지 직시하는 데서 방법을 다시 찾는 수밖에 없다. 구체적인 제안을 할 수 없는 게 부끄러운 건지 다행스러운 건지는 아직 모르겠다. 

.22.

말이 쏟아져나올 때가 있다. 말보다 감정이 쏟아져나올 때가 있다. 켜켜이 쌓인 서러움인지도 모르겠다. 제때 제 자리에서 나오지 못한 말들. 쏟아질 때 쏟아내지 말자. 

.21.

인권회의 전체회의 준비를 위해 모여서 기운 내고 416연대 총회 준비를 위해 모여서 고민 나누고, 또 어떤 미래를 위해 이야기 나누고. 또 어떤 미래? 

.20.

사람을 바꾸려들지 말고 관계를 바꿀 방법을 찾아라. 내 몫을 찾는 게 더 중요하다. 

.19.

2014년 '국가란 무엇인가' 물었던 사람들이 2016년 '이게 나라냐'고 묻고 있다. 이건 나라도 아니라고. 2017년 이후의 과제는 국가를 건설하는 것. 

.18.

장충체육관까지 가는 동안 선택지에는 없었는데 '남북관계' 토론에 들어갔다. 주제 선택에 후회가 없을 정도로 흥미진진했다. 통일이 되어야 한다는 명제에 의심이 없는 사람들이었지만 각자의 배경이나 이유는 모두 달랐다. 그런데 정말 통일이 되어야 할까요? 질문을 던져보고도 싶었지만 전체토론의 줄기는 아니었으므로 넘어갔다.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질문이 그것이라는 생각은 여전하다. 2017년 이후의 운동이 모두 답해야 할 질문. 통일이 되어야 하는가? 되어야 한다면 이유는 무엇이며, 통일이 아니라면 분단체제 종식의 방안은 무엇인가. 

.17.

아쉬운 것도 있고 얻은 것도 있고. 하나 분명한 것은 '개헌'에 대비해야 한다는 것. 

.16.

내상을 나눌 수 없어서 차마 하지 못하는 이야기만큼 '내상'으로부터 거리가 있어서 더 해야 하는 이야기를 만들어야 한다고. 

.15.

ㄱ에게 물어보고 나서야 알았다. 내가 종종 듣고 싶었던 질문이라는 걸. "너는 어때?" 울어도 된다고 기다려주는 사람들을 만나고 싶을 때. 

.14.

늘 비슷했던 것 같아. 다른 건 안 그런데 인권운동장 진행을 맡으면 몸과 마음과 머리가 따로 놀아. 왜 그럴까. 

.13.

"민중운동은 없어요." 단호한 평가에 당황했다. 아직 그렇게까지 말할 건 아닐 텐데, 그만큼의 위기의식 또는 부정적 인식 때문이겠지. 그러나, 그렇다면, 어떻게. 

.12.

저녁 먹을 시간이면 끝날 분위기였던 총회가 길어졌다. 2016년도 길어지고 있다. 

.11.

대행진이 뻗어나가는 기운을 느끼다가 조금 앞질러 광화문광장으로 갔다. 여수 외국인보호소 화재 참사 10주기 추모제에 예상보다 사람이 없어서 조금 당황했다. 이 정도일 줄이야. 죄스러운 마음. 

.10.

# "난 그냥 쫓아다녔을 뿐"이라는 ㄹ의 말을 들으며, 싸움에 이기는 건 결국 그런 자세 덕분인가 싶기도 했다. 쫓아다니되, 끝까지. 끈질김으로만 가능한 건 아니다. 넉넉해야. 그러나 지금 부족한 게 그것만은 아니라는 점도 분명하다. 함께 나아가려면. 

# 조직의 기운이 달라지는 건 결국 몇몇 사람에 달려 있는 것 같다. 서로 웃으며 응원하고 격려하고 결의하는 분위기에 한껏 취하다가 내가 만드는 기운을 떠올리니 시무룩해지더라. 한달 사이 후원을 해지한 사람의 숫자를 보니 정신이 번쩍 들긴 했지만. 

.9.

한해의 계획을 가늠하는 자리. 정세도 흐르고 마음도 흐르고 어디에선가 잘 만나야 할 텐데. 

.8.

운동변태라는 말은 듣기 좋은데 워커홀릭이라는 말은 듣기가 싫다. 그런데 혹시 이게 일은 하기 싫은데 운동에 대해서는 떠들고 싶어하는 거라면 정말 큰 문제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7.

간담회를 하다가 어떤 질문에 눈물이 흘러 버렸다. 질문의 내용보다 어조가 환기시키는 기억. 3년도 더 지난 일인데, 아직도 서러운가 보다. 뭐가 서러운지 몰라서 계속 서러운가 보다. 

.6.

# 가장 맛있는 안주는 풍성한 수다. 

# 만나야지 만나야지 하는 사람들 이름을 적어놓고, 연락해야지 연락해야지 하며 다이어리를 보다가, 시간이 훅 훅 간다. 

.5.

어떤 사람의 활기. 어제 만난 ㅁ처럼 움직이는 사람들과 더 가깝게 더 자주 만나며 꿈을 나누는 거, 세상을 바꾼다는 게 결국 그런 거 아닌가. 

.4.

# 지금의 촛불에 어떤 이름을 붙이든, 박근혜 체제를 넘어서야 한다는 말만큼 박근혜 체제에 대한 논의에 진전이 없는 듯하다. 박근혜라는 이름 때문인지. 박근혜-최순실이 계기가 됐지만 지금의 상황은 전세계적 위기(또는 물적 토대의 흔들림)가 한국적 조건에서 폭발한 것이다. 이 국면이 어떤 지평을 열 것인지도, 결국 그 위기와 조건을 살피는 데서 나올 것이다. 왜 이런 논쟁이 없을까. 

# 동네 친구들도 모두 2017년 시작하자! 어쩌면 2016년의 불행한 일들도 세상이 크게 흔들리다 보니 터져 나오는 일일지도. 

.3.

# 고난을 겪으며 동지가 된 것인지, 동지가 되어서 고난을 겪게 된 것인지, 의기투합하는 그/녀들의 모습이 참 보기 좋다. 하지만 정말 녹록치 않은 상황이다. 

# 중국이라는 광활한 땅. 사람의 생각이나 마음에 영향을 미치는, 자연과 역사의 힘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2.

같이 하고 싶은 사람, 어떻게 같이 할 수 있을지 잘 보이지 않는 사람. 내가 어떻게 느끼든 열쇠는 내게 있지 않다는 거. 

.1.

트럼프를 한국에서 읽기. 지금 촛불에서 더욱 필요한 일인 듯하다. 특히나 광장정치 대 광장정치로 충돌하고 있는 현재의 국면에서, 운동은 어떤 이야기들을 건네야 할지. 

 

걷다 -0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17/01/30 21:35 2017/01/30 21:35
태그 :
트랙백 주소 : 이 글에는 트랙백을 보낼 수 없습니다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