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다 -2017년 7월

.31.

# 발인은 시작의 느낌이다. 장례를 치르는 동안은 이 세계에 같이 있지만 남은 사람들은 알 수 없는 새로운 길로 출발하는 시간. 영결은 영원히 이별하는 거라는데 내게는 발인이 더 각별한 느낌이다. 배웅하는 길. ㅇ을 마주쳤다. 그녀가 굳이 일상복을 입고 왔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랬을 수 있고, 그랬다면 그 마음이 어떤 건지도 짐작은 갔다. 가족이랄 수도, 지인이랄 수도, 그런 말로 설명이 부족한 관계와 거리. 아직 떠나보내고 싶지 않은 마음이야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겠지만 그녀의 옷이 선택이었다면 사무치는 마음이었으리라. 마땅한 위로의 말을 건네지 못한 게 못내 미안하고 아쉽다. 

# 픽사 애니메이션 전시를 갔다가 알게 된 것. 각본이 나오면 세세한 그래픽 작업을 하기 전에 성우들이 먼저 녹음을 한다는 것. 영상을 따라 움직이는 목소리가 아니라 목소리를 따라 움직이는 그림이었던 것. 

.30.

오미자효소를 검색했다. 아침마다 먹기 시작한 게 사오 년은 됐는데, 두 배 가까이 비싸게 사고 있었다는 걸 확인했다. 예상하지 못했던 건 아니다. 그렇다고 일부러 찾지 않았던 것도 아니다. 그냥 한심했다. 최저임금 수준으로 활동비 받아 살면서 돈 아끼는 데 너무 게으른 것 아닌가. 그나마 아는 가게에 보탰다는 게 다행스럽다. 

.29.

# 아침에 눈을 뜨고 두 가지 생각. 술이 마시고 싶을 때는 더 정신을 차려야 한다는 것. 몇 시간 전에 바랐던 것이 내가 원하는 게 아니었다는 걸 깨달았을 때 후회하지 않을 수 있어 다행이다. 또 하나. 말뽄새를 주의해야겠다. 함께 걱정하는 것이 다그치는 것처럼 들린다면 말하는 사람의 책임이다. 차가운 사람 아닌데 따뜻한 사람이 못 된다면 그것도. 

# 1%의 의문도 없이 신뢰하는 사람, 1%의 미움도 없이 좋아하는 사람들을 떠올려봤다. 

.28.

아랫마을 식구들과 박종필 감독을 만나러 갔다. 주말을 넘기기 어려울 것 같다는 얘기를 들은 터라 나름 마음의 준비를 하고 갔지만 찾아갔을 즈음 혈압이 40/20으로 떨어졌다는 얘기를 듣고 나니 혼란스러웠다. 마지막 인사를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다. 그가 한달 여의 시간 동안 어떤 마음이었을까 짐작해보려 애썼으나 섣불리 짐작할 수도 없는 거리라는 걸 깨달았다. 뒤늦게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놀랐던 것보다 그가 더 놀랐겠구나, 두렵고 무서웠겠구나 하는 생각을 겨우 하게 됐다. 아빠가 진단을 받았던 때 그랬던 것처럼, 너무 많이 아프지 않길 바라는 것이 내가 올릴 수 있는 기도였다. 그의 시간을 그의 것으로 이해하려 노력하는 수밖에. 아직 떠나보내고 싶지 않은 마음들에 기대어. 

.27.

ㅇ과 둘이 할 때는 엄두도 못 냈을 일들. 신입 인권활동가 공동교육도 끝났고 네트워크 파티도 끝났다. 이게 어떤 시작이 될 수 있을까가 남은 숙제. 

.26.

차별금지법제정연대 전체회의가 있었고, 수술 앞둔 일란을 만났다. 길을 여는 사람들, 에 대해 생각했다. 

.25.

"많이 힘들지?" 이런 말을 듣고 싶었던 걸까. ㄹ과 차 한 잔 하려고 나서는 길에는 인권운동이 어떻게 움직여야 하나 이런 고민들을 안고 나섰는데. 힘든 건 힘든 거다 말해주는 사람들이 있어 다행이다. 

.24.

왜이리 글이 안 써질까. 재난을 묻다.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많은데. 벌써 세 번을 엎었는데도. 

.23.

# "십 년쯤 돼서 이제 그냥 일상이 돼서 소회랄 게..." 싸움을 시작할 때는 이것저것 재보기도 했지만 이제는 뭘 재기에는 너무 삶이 되어버렸다는 이야기로 들렸다. 나는 지금 어떨까.  

# "신이 이 기괴하고 작은 거푸집 속에 나를 담을 때는 어떤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다만 내게 필요한 것은 나 자신이 되기 위한 용기였다." 책을 잠시 덮었다. 지미 스콧의 노래가 너무 듣고 싶었고, 이런 문장을 옮긴 최윤필 기자가 몹시도 궁금해졌다. <가만한 당신>에 이어 <함께 가만한 당신>까지, 그냥 잘 쓴 글 좋은 책이라기에는 부족하다. 거리, 시선, 태도, 이런 것들을 짚어봐야겠는데, 일단 든든한 느낌, 묘하다.  

.22.

4.16연대 운영위원회 회의 및 워크숍. '회의'나 '워크숍'을 하는 이유에 대한 회의가 들 때, 사람들의 마음이 궁금하다. 대충 결정하는 것이 목표이지는 않을 텐데, 어떤 의견을 얼마나 듣고 얼마나 논의하고 싶은 건지 알 수가 없고. 그런 회의에 길들여진 혹은 그런 회의를 선호하는 활동가들이 꽤 많은 듯하고. 그런 활동가들은 대체로 '회의'가 아니어도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거나 관철할 기회가 많은 이들인 듯하고. 문제적인 상황.

.21.

# 일단 반대한다는 의견을 남겨놓고 회의 중에 나가는 태도, 만장일치합의를 지향하는 조직에서는 문제적이다. 언젠가는 얘기해야겠지. 그런데 이런 수고로움을 감당해야 하는 이유를 점점 모르겠다. 

# 전쟁정치 읽기모임 뒤풀이. 

.20.

차제연 회의를 하면서 하반기에 무엇을 해야 할지는 가닥이 잡힌 듯한데 어떻게 할 수 있을지는 오히려 막막해졌다. 이 분위기를 조금 더 차분하게 짚어봐야겠다. 

.19.

로렌 아이슬리, <광대한 여행>. 밀린 신문을 읽다가 횡재했다. 정혜윤의 칼럼에서 오래 동안 찾았던 책의 제목을 만나게 됐다. 누구에게 빌려줬던 건지 기억해낼 수는 없을 텐데 책 제목이라도 찾은 게 어딘가. 벌써 10년 전의 일. 인간 종이란 고작 생각할 능력 정도밖에 더 가진 게 없는, 치타처럼 빨리 달리지도 못하고 물고기처럼 물 속에서 살지도 못하는 생물종이라는 걸 깨닫고 얼마나 황홀했던지. 감정과 이성의 상호작용이나 뇌과학 같은 것들에 흥미를 느끼게 된 것도 그 이후였던 것 같다. 그것들이 인간이라는 동물의 어떤 기능일 뿐이라는 건, 인간에게 겸손의 이유이자 자긍심의 이유가 된다. 얼마나 신비로운가.  

.18.

위험이 재난참사로 이어지기까지를 설명하는 모델 중 스위스치즈 모델이 있다고 한다. 어떤 구멍들이 뚫려있었는지 설명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듯하다. 세월호 참사에서도 충분히 많은 문제들이 이미 드러나있다. 그러나 진상규명이 충분하지 않다는 것은, 어떤 문제들이 연관돼있는지 드러내는 것에 그치지 않고 구조화해야 한다는 것. 위험을 예방하기 위한 방어벽의 두께와 구멍의 크기 등에 대해서도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나열된 사실들을 어떻게 구조화할 것인가. 어쩌면 5.18을 비롯한 과거의 진상규명은, 운동을 통해 어느 정도 인식구조가 확립된 상태에서 시작되었다. 사건의 성격이나 구조에 대한 이해가 사회적으로 형성된 상태에서. 재난참사에 대한 인식구조는 얼마나 확립되었을까. 국가가 구하지 않은 사건이라는 명명에 걸맞는 진실을 구성해낼 수 있을 것인가. 운동이 더 만들어나가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17.

정말 말 한 마디 떼기가 쉽지 않다. 오늘은 상임회의가 있었고 [인권으로 읽는 세상] 프레시안 게재 건과 관련한 논의가 있었다는 정도만 기록해두자. 그리고 무슨 말을 하기가 이렇게 신경 쓰이는 상태를 지속할 수 없다는 나의 상태를 기억해두자. 

.16.

메탄올 실명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러 갔다. 운동을 하는 내 마음을 움직이는 사건이나 사람들이 리뉴얼이 안된달까, 여러 이야기를 들으며 살아야겠다는 생각 중. 그런데, 정작 이야기는 변호사와 국회의원과 기자가 다 하고, 게다가 매우 부적절하다고 느껴지는 이야기도. 아쉽네. 시작할 때 들었던 피해자와 그 가족들의 짧은 인사를 기억하기로. ㅁ과 술 한 잔 한 건 오랜만인 듯한데 오랜만에 만난 것 같지 않은 느낌 참 좋다. 

.15.

식구들과 낮술. 모두, 잘 살고 있는 것으로! 

.14.

인권운동을 평가하는 체계적인 틀이 필요하다는 류바의 토론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체계적인 틀. 그간의 평가들이 다분히 자의적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전체적인 흐름을 충분히 살피지 못한 듯도. 인권운동사 정리 작업이 수 년 걸린다는 말이 이래서 나오는구나. 

.13.

마음 꽁해지는 날. 그나마 오후에 인권있는 인권조직 만들기 워크숍 하면서 딴 생각 할 수 있게 됐다. ㄸ가 짚어주는 이야기 들으면서 모드 전환 성공. 

.12.

공사 때문에 집을 지키다가 HIV낙인지표조사 발표하는 데 다녀왔다. 가브리엘은 원로 기운이 완연. 감염인 활동가들이 훨씬 많아질 것 같은 기운도 물씬. 한 여성 감염인이 감염과 연애와 결혼을 두고 고민하는 상황을 들으며 에이즈와 젠더를 구체적으로 처음 고민해보게 되기도. 비밀 자체가 아니라 정보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쓸 수 있는 권리라는 접근이 필요하겠다는 생각도. 필요할 때 알리고 원치 않을 때 알려지지 않도록. 동시에 감염이라는 정보 자체가 부정적 효과를 내는 사회적 혐오를 근절해야. 

.11.

# 그의 이름을 들으면 고개를 절레절레 하며 말을 아끼는 사람들이 있다는 얘길 들었다. 마음이 조금 느긋해졌다. 오랜 시간이 필요한 것은 분명하고, 그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는 그의 몫. 

# 불리한 증언을 거부할 권리는, 유리한 침묵을 고집할 권리는 아니다. 

.10.

비가 쏟아졌지만 예정대로 ㅈ을 만났다. 진지하면서도 유쾌한. 그런 사람 좀 부럽다. 차별과 관련해 노동조합에서 할 수 있는 일은 훨씬 더 다채로울 듯하다. 뻔한 거 말고 다른 걸 좀 찾아봐야겠다. 

.9.

몇 가지. 인정이 많은 사람들을 만나서, 이렇게 싸운 게 행복하다는 말이 인상적이었다. 각자 쿠폰을 적을 때 누군가는 진상규명과 국가의 사과를 적을 수밖에 없는, 아직은 진행 중인, 그래서 갈등의 구조는 국가폭력의 자장 안에 있다는 것도 기억해야. 또 하나. 사례를 통해 이야기를 할 때는 감정도 문제점도 섬세하게 살펴볼 수 있다. 거리가 주는 여유 덕분일까. 또는 화해해야 한다는 부담이 없기 때문일지도. 갈등 다루기에서 쌍방을 이해하는 것은 화해를 위한 과정만은 아니다. 제대로 싸우기 위해서도 이해가 필요하다. 겉으로 드러난 문제만 보며 문제제기했을 때 겉돌기 십상인 것. 상대를 이해하는 것은 내가 원하는 것을 발견하기 위해서도 중요하다. 

.8.

3시 반에 시작된 새벽 예불. 불경 읽는 소리가 잔잔했다. 비가 내려 계곡 물은 세차게 흘렀다. 뒷문을 열어놓고 빈 방에서 잠시 책을 읽었다. 

.7.

백담사 들어가는 수심교 앞이 2차선쯤 되는 큰 길이라고 기억하고 있었다. 버스를 타고 구불구불 올라가는 길이 낯설어 혹시 내가 다녀온 것이 백담사가 아니었던 것인가 의심하기도. 수심교 앞에 닿으니 다녀왔던 기억은 분명하고, ㅇ가 아슬아슬 운전할 때 나는 자고 있었나 싶고. 이번에는 백담사 가기까지의 풍경도 기억에 넣어야겠다. 

.6.

# 여행의 윤곽이 잡혔다. 사전모임 준비도 녹녹치 않겠다. 그리고 제주를 다녀오는 여정은 여행 그 이상일 수밖에 없겠다. 괜찮은 척 하는 게 차라리 편할 수도 있지만, 괜찮은 척 하지 않아도 되는 관계들을 얻는다면 그만큼 소중한 시간도 없을 것이다. 마주하기. 

# 뒤풀이 나설 즈음 쏟아진 폭우. 뒤풀이가 일이 되어버린 시간. 

.5.

# 앞에 다른 ㅁ이 앉아있다고 생각하며 말을 해보라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입보다 심장이 먼저 짓눌리는 느낌이었다면 과장일까. 못하겠다고 했다. 잘 들리게 말해야 하는 상황에 오래 전부터 지쳤던 것 같기도. ㅎ과 ㄷ을 떠올리며 눈물이 핑 돌았던 것도, 너무 지친 우리가 안타까워서였나. 

# 인권 감수성을 키운다거나 무언가 인권의 시선에서 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인권이 역사적이고 사회적으로 형성되는 감각이라는 걸 이해하는 게 더 중요할지도 모른다. 물론 권리의 목록들은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게 하지만 정해진 권리들로 인권을 진단할 수는 없다. 살면서 부딪치는 질문을 놓치지 않는 데서 시작되는 것일지도. 표현의 자유는 뭐지? 맘대로 말할 권리? 눈치보지 않고 말할 권리? 세월호참사를 겪은 우리가 원하는 것은? 생명을 권리로 보장하고 지켜주는 사회. 국가폭력에 대해 강의하다가. 

.4.

인권운동사를 정리하는 프로젝트는 수 년을 내다보며 진행할 것이라고 한다. 오는 안식년을 잠깐 떠올렸다. 

.3.

어지러운 마음에 뒤섞인 것들. 몸도 어지럽다. 그냥 좀 놓아야겠다. 그러면서도 놓지 못하는 어지러운 마음들. 제주에서 올라온 월요일. 

.2.

"니가 하는 일이 더 고단할 것 같은데. 일은 하면 되는데, 넌 바꿔야 하니까. 바꾸려고 하는 거니까." 엄마의 말을 들으며 바꾼다는 말의 뜻을 곰곰히 새겨보았다. 응, 나는 바꾸고 싶은 거지... 알아차려주는 말, 고마운 말. 

.1.

# 개헌을 한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는 것이야 필요하지. 그런데 작동하지 않는 권리들을 작동시킬 방법은 어디에서 고민하고 있을까? 그냥,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는 자리는 왜 없을까?

# "내가 이런 데 와서 지치는 사람이 아닌데, 지치다." 그래서 오늘은 징징대볼까 했는데, 때와 곳을 가리는 건 중요하다. "이제야말로 인권운동 해야 할 때 아닌가 싶어요." 응?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니? 

 

걷다 -0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17/07/03 20:39 2017/07/03 20:39
태그 :
트랙백 주소 : 이 글에는 트랙백을 보낼 수 없습니다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