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다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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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이 병이 될 수 있다는 걸 느낀 건 처음(일까?). 근본적으로 상황이 달라지지 않는다면 뭔가 나아지기 힘들 것이라는 깨달음이 쉼이 준 선물이라니 잔인하다. 회의에 가는 발걸음이 내키지 않았던 건 회의 때문이 아니다. 앞으로 다가올 시간이 내키지 않은 마음이 엉뚱하게 평가회의로 이어졌다. 너무 즐겁고 소중한 경험이었는데 내내 마음이 꽁 했던 거, 아쉽다기보다 억울하다. 

.15.

의욕 또는 집념. 원하는 걸 이루려는 사람의 모습인가. ㅈ의 이야기를 들으며 멋있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흠칫 무섭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는데 그건 어떤 느낌일까. 무언가 '이루고 싶다'는 느낌이 내게 참 낯설었는데, 그게 낯설다는 걸 발견한 것 역시 놀라운 일. 무언가 이루고 싶은 게 낯선 인권운동가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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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지를 뒤적거리다가 만난 문장. "아내의 병을 고치겠다는 의지가 확고한 남편이 정작 아내의 말을 듣지 못하듯이, 어떤 목표에 사로잡히면 사람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문장이 채 끝나기도 전에 떠오른 한 사람이 있었지만 아직 판단하기에는 이르다고 생각했다. 내게도 물어볼 일이다. 

.13.

속초 시외버스 터미널 옆 '완벽한 날들'. 김종숙 화가의 <그 꿈들> 그림이 전면에 걸려있는 걸 보면서부터 반하기 시작. 동화와 그림책을 정성껏 책장에 배치한 작은 북카페. 게스트하우스도 운영한다니 언젠가 한 번 꼭 묵어보고 싶다. 강릉으로 넘어가서 만난 사람들과 맛난 음식들 먹으며 여행의 끝과 시작을 지었다. 

.12.

속초에서 황상기 아버님을 뵙고 이야기를 나누며, 형제자매들과 함께라서 더 그렇게 들렸을 수도 있지만, 세월호 참사 유가족인 희생학생 부모들이 진하게 겹쳐보였다. 벤젠의 허용기준에 대해 말할 때에는 선박 전문가가 되어버린 부모들이 떠올랐고, 내 말을 아무도 믿지 않을 때 가장 힘들었다는 이야기에서는 농성 초기의 부모들이 떠올랐다. 믿더라도 삼성이 망하면 나라가 망한다거나, 삼성이 얼마나 무서운 권력인데 덤비려느냐는 '충고'를 들을 때는 또 비슷한 이야기들이 떠올랐다. 지칠 때에도 다시 힘을 낼 수 있는 건, 말하면서, 끊임없이 말하면서라고 하실 때에도, 마찬가지. 형제자매들 역시 부모님들을 떠올리는 시간이기도 했다. 몸도 마음도 지쳐있으면서 목포신항을 다녀올 때면 말리기도 했지만 그 마음을 알 듯도 하다고. "이 일이 끝나면 어떤 삶을 살고 싶으셔요?" 황상기 아버님은 달리 바라는 삶 없다며 그저 택시운전을 계속 할 거라고 하셨다. 그/녀들의 부모들도 그렇겠지. 하지만 우리에겐 그게 언제쯤일지 가늠할 능력이 없다는 것, 그것이 우리를 계속 걷게 하겠지. 내게는 그 질문보다 그 질문을 자신의 부모에게도 해보고 싶었다는 마음이 더 기억에 남는다. 이야기가 힘이었다고 하신 말을 되새기며, 자신은 이야기하면서 조금씩 나아질 수 있었다는 한 친구와, 자신은 아직도 다른 사람과는 이야기하지 않는다며 고민하는 한 친구의 마음도. 우리는 조금씩 더 두터워지고 뽀송뽀송해지고 있는 것이겠지. 

.11.

무엇이든, 무언가 함께 하고 싶다는 마음. 그러나 무언가 제안하지는 않거나 못하는 상황. 곰곰이 생각해봐야지. '우리'에 대한 이 기대는 무엇일까? 아직 내 것은 아닌. 

.10.

# '슈퍼우면'이라는 말을 이제서야 떠올리다니. ㅇ가 가족에 대해 짊어진 부담이 내게로도 넘어오는 것 같아 늘 마뜩치 않았던 것 같다. 평범하지만은 않은 ㅇ의 애착 또는 분리불안을 내려놓아줬으면 하고 간절히 바라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을 '문제'가 되게 만드는 것은 ㅇ의 심리가 아니다. 한 사람이 해내기 힘든 두 개의 역할을 해내도록 만드는 환경의 문제다. 물론 둘 중 ㅇ이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찾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걸 할 수 있는 조건을 조직해내기를. 

# 질펀한 수다. 그 와중에도 정신줄을 놓지 못하는 나를 보며 씁쓸한. 

.9.

ㅎ과 이야기하다가 목이 멘 것은 세 번. 너네는 잘 지내는구나. 내가 바보같아서 이런 건가. 지금은 뭔가 얘기하질 못하겠다. 손탁커피에 가서 토론자료들을 읽었다. 그게 마음이 차라리 편하다. 

.8.

새벽에 눈을 떴으나 다시 자기로 마음을 먹었다. 누웠지만 번잡한 상념들에 잠이 쉬 오지는 않았다.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은 기분으로 잠들었다가 느즈막히 눈을 다시 뜨고 나니 몸도 마음도 조금은 가벼워졌다. 글쎄다. 여전히 불안정하다. 많은 것들이 귀찮은데 놓기도 귀찮다. 

.7.

안식주의 시작이지만 회의에 나가기로 한 후 이런저런 해야 할 일들을 모두 오늘자로 메모해두었다. 정말 소소한, 문자메시지 한 통 보내는 것까지. 다이어리 칸이 부족할 정도였으나 하루가 뻑뻑했던 건 그것들 때문은 아니다. 워크숍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며 도대체 이 이야기가 응축한 시간이 어디에서부터 어디까지일지 가늠하기 어렵다는 막막함 혹은 답답함. 마루타가 된 느낌이라는 건 진심이었는데 그 말이 들리긴 한 건지 궁금하기도. 신뢰의 부족이 문제인 것인지 과도한 기대가 문제인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그런 하루의 끝에 너는 왜 내게 성을 냈을까. 누구도 어쩌기 어려운 상황이긴 하다만, 서러움이 북받치려는 밤이었다. 

.6.

노순택 사진전 마지막날. 일단 집을 나서기로 하고 아트선재센터에 갔더니 12시부터 연다고. 동네 구경이나 좀 해야겠다 싶어 어슬렁거리며 걸었는데 구경할 동네가 아니게 됐다는 사실만 깨닫고 말았다. 시간 맞춰 다시 가니 몇몇 사람들이 벌써 들어가있었다. 노순택의 사진은 글자 많은 텍스트 같은 느낌. 하지만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를 수도 있겠다 싶기도 했다. 비상국가. 그의 카메라가 담은 국가폭력의 현장과 작년 촛불의 광장은 연결돼있으면서도 분명히 달랐다. 발터 벤야민의 문장처럼, 억압받는 이들에게 닥친 비상사태와, 진정한 비상사태의 차이일까. 하지만 그렇게 읽기엔 아직 작년의 촛불을 모르겠다. 전시의 막바지쯤 사진 속 나를 마주쳤다. 마침 같은 티셔츠를 입고 갔던 나는 풉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사진이 되는 어떤 풍경과 사진이 되지 못하는 어떤 일상들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됐다. 집에 돌아와 잠시 책상 앞에 앉았다가 노트북을 챙겨 근처 카페로 갔다. 에어컨은 더이상 편의나 편리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다운 삶의 문제라고 생각하면서. 물론 내가 월요일 회의를 앞두고 어려운 입장글의 초안을 써야 하는 상황이 아니었다면 편리의 문제로 남았을지도 모르고. 

.5.

# 날이 너무 더워 동네 카페에 갔다가 고민정의 에세이집을 봤다. 그리 흥미롭지는 않았는데 '존경하는 사람'을 만나 사랑하게 됐다는 말이 길게 남았다. 존경'받을 만한' 사람보다 존경'할 수 있는' 사람이 더 어려운 건 아닐까. 

# 지난 촛불을 통해 대한민국에서 권력의 상징이랄 수 있는 두 인물이 구속되었다. 박근혜와 이재용. 둘이 구속되기까지, 세월호와 반올림의 깊은 원한이 영향을 미쳤다는 점은 분명하지만, 그들의 구속 이유에는 세월호도 반올림도 없다. 뿌듯하면서도 착잡한 마음에 대해 물어보고 싶어졌다. 

.4.

# 영어 통역을 거쳐야 하는 강의라 집중하기 쉽지는 않았으나 3년 여에 걸친 진상규명 활동을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진상조사의 목적 중 '교훈을 얻기'에 대해 얘기할 때는 놀라기도 했다. 조사를 잘 마치고 나면 자연스럽게 교훈은 얻어지는 것으로 생각했는데, 오히려 조사를 기획하는 단계에서 중요한 것이었다. 진상조사의 목적에 대한 사회적 토론이 중요하겠구나. 1기 특조위가 어려웠던 점 중 하나. 강의가 끝나길 기다려 건넨 질문에 강사는 친절하게 답해주었다. '익숙한 길과 미답의 길 사이에서' 세월호 참사 진상조사의 전략을 세우는 게 중요한 때다. 

# ㅈ를 만났다. 8년, 9년만인가. 세상으로부터 고립된 것 같다며 사람 많은 곳에 나온 것만으로도 즐겁다고 했다. "그때 일 어떻게 생각하세요?" 언젠가 같이 모여서 얘기 나누는 시간이 있어도 좋겠다. 그때는 사람들 마음을 두루두루 살핀다고 생각했는데 지나고 보니 저마다 숨겨야 했던 상처까지 헤아리지는 못했던 것 같다. 일이 잘 해결되기만 바랐던 것은 아닐까, 내 마음은 어땠는지 모르겠다. 

.3.

아직 안심할 때는 아니나, 집에 있을 만하다. 선풍기를 틀지 않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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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사람에 대해서 생각 중이다. 나이가 적당히 많은, 깊은, 예술의 사유를 사랑하는. 특정인을 떠올리지 못하는 게 좀 아쉽다. 

# 연대체의 참여 자격 여부에 대한 고민을 나누는데 자꾸 겹쳐보이는 상황. 함께 하기 힘든 이유와 함께 할 수 없는 이유 사이의 간극. 

.1.

커피 두 잔과 이어진 수다. ㅎ과 만나 여유 있게 이야기를 나눴다. 최근 수 개월 동안 내 고민은 엇비슷한 자리를 맴돌고 있다. 조급해지다가도 느긋해지고, 귀찮아지다가도 의욕이 솟고, 이래. 진단과 고민이 비슷한 사람과의 수다는 즐겁고 편안하다. 하지만 뭔가 한 발 더 떼야 할 때인 듯도 하다. 그래서 ㅇ을 만났는지도 모르겠는데, 서 있기도 버거운 내 처지를 다시 확인. 고마운 위로와 격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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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03 15:31 2017/08/03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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