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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주의와 수정주의

 

맑스주의와 수정주의

레닌


『프롤레타리』29호, 1908년 4월 16일


  기하학의 공리가 인간의 이해관계에 영향을 미친다면 그것을 논박하려는 시도들이 일어날 것이라는 잘 알려진 속담이 있다. 신학의 낡은 편견들과 충돌했던 자연사에 관한 제이론은 가장 광적인 반대를 불러 일으켰으며, 여전히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러므로 현대 사회의 선진계급을 계몽․조직하는 데 직접적으로 봉사하며, 이 계급이 직면하는 과제들을 지시해주고, 새로운 체제에 의한 낡은 체제의 (경제적 발전에 의한) 대체를 증명하고 있는 맑스주의의 교리-이 교리가 그 성장 과정에서 일보일보 전진할 때마다 투쟁해야 했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다.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이와 같은 것은 소유계급들의 자라나는 세대의 의식을 혼미하게 하고 그들을 내외의 적들에게 적대적으로 “훈련”시키기 위해 공식 교수들이 공식적으로 가르치는 부르주아 과학과 철학에 적용된다. 이 과학은 맑스주의에 관한 것이라면 들어 보려고도 않으면서 맑스주의는 논박되어 폐기되었다고 선언하고 있다. 맑스는 사회주의를 논박함으로써 경력을 쌓고 있는 소장 학자들과 온갖 종류의 낡아빠진 “체계”의 전통을 보존하고 있는 쇠약한 노장들 양자에 의해 맹렬히 공격받는다. 맑스주의의 진보, 즉 그 사상이 노동계급 사이에 확산되고 확고하게 자리잡아 가고 있다는 사실은 불가피하게 맑스주의에 대한 이들 부르주아적 공격의 빈도와 강도를 증대시키며, 맑스주의와 공식과학에 의해 “폐기될” 때마다 그 공격은 더욱 강해지고 맹렬해진다.

  그러나 노동계급의 투쟁과 관련된 그리고 주로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에서 유행한 제교리 사이에서 조차 맑스주의는 결코 단번에 그 입지를 공고히 했던 것은 아니다. 그것이 존재한 첫 반세기(1840년대부터 계속해서)에 맑스주의는 자신에게 근본적으로 적대적인 제이론과 투쟁을 벌였다. 40년대 초 맑스와 엥겔스는 철학적 관념론의 관점에 있었던 급진적 청년헤겔파와 관계를 청산했다. 40년대 말 그 투쟁은 푸르동주의에 대항하여 경제이론 분야에서 시작되었다. 50년대에는 1848년의 폭풍의 해에 모습을 나타냈던 제당파와 이론에 대한 비판에서 이 투쟁이 완결되었다. 60년대에 투쟁은 일반이론의 분야에서 직접적인 노동운동에 더 가까운 분야, 인터내셔날에서 바쿠닌주의의 축출로 옮겨졌다. 70년대 초 독일의 무대가 잠시 프루동주의자 뮐버거에 의해 장악되었다가 70년대 말에는 실증주의자 뒤링에 의해 장악되었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양자의 영향력은 이미 완전히 무가치한 것이었다. 맑스주의는 이미 노동운동 내부의 다른 모든 이데올로기에 대하여 의심할 바 없는 승리를 획득하고 있었다.

  90년대가 되자 이러한 승리는 대체로 완결되었다. 심지어 프루동주의의 전통이 무엇보다도 오랫동안 고수되어 왔던 라틴 국가들에서조차 노동자당들은 실제로 맑스주의적 토대에 기초하여 자신들의 강령과 전술을 수립했다. 부활한 노동운동의 국제 조직-주기적인 국제 대회의 형태-은 처음부터 거의 한 번의 투쟁도 없이 모든 근본적인 점에서 맑스주의적 관점을 채택했다. 맑스주의가 자신에게 적대적인 다소 통합적인 모든 교리를 축출한 이후, 그 교리들 속에 표현되어 있었던 제경향은 다른 통로를 찾기 시작했다. 그 투쟁의 형태와 원인은 변했지만 투쟁은 계속되었다. 맑스주의가 존재한 두 번째 반세기는 맑스주의 자체 내부에서 맑스주의에 적대적인 한 경향의 투쟁과 함께(90년대에) 시작되었다.

  한때는 정통 맑스주의자였던 베른슈타인은 맑스 개정의 가장 소란스럽고 가장 고의적인 표현인 맑스주의의 수정, 즉 수정주의를 들고 나옴으로써 이 경향에 자기 이름을 부여했다. 더욱이-경제적 후진성과 농노제의 잔재에 짓눌린 농민인구의 웨 때문에-비맑스주의적 사회주의가 무엇보다도 오랫동안 근거를 갖고 있었던 러시아에서, 그것은 우리 눈앞에서 쉽게 수정주의로 넘어가고 있다. 농업문제(모든 토지의 시유화 강령)와 강령 및 전술의 일반적인 문제 양자에서 우리의 사회-나로드니끄들은 나름대로 통합적이고 맑스주의에 근본적으로 적대적이었던 자기들 체계의 사멸하고 시대에 뒤떨어진 잔재 대신 맑스주의의 “개정”을 더욱 더 도입하고 있다.

  전맑스주의적 사회주의는 패배했다. 그것은 더 이상 자기 자신의 독자적인 근거가 아니라 맑스주의의 일반적 근거 위에서 수정주의로서 그 투쟁을 계속하고 있다. 그러면 이제 수정주의의 이데올로기적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자.

  철학의 영역에서 수정주의는 교수들의 “과학”의 흔적을 쫓아 다녔다. 교수들은 “칸트로 되돌아”갔으며-수정주의자들은 자기만족적으로 웃으면서 유물론은 오래 전에 “논박되었다”고([편람] 최신호의 말 한자한자 그대로) 중얼거렸다. 교수들 자신들은 헤겔의 관념론보다 천 배는 더 조잡하고 맥빠진 관념론을 설교하면서도 헤겔을 “죽은 개” 취급하고 변증법을 비웃었고-수정주의자들은 정연된(그리고 혁명적인) 변증법을 “단순한”(그리고 정적인) “진화론”으로 대체하면서 과학의 철학적 천박화라는 늪에 빠져 버둥거렸다. 교수들은 자신들의 관념론적이고 “비판적인” 체계를 지배적인 중세 “철학”(즉 신학)에 맞게 각색함으로써 그들의 공식 봉급을 벌었고-수정주의자들은 종교를 현대의 국가와 관련된 것이 아니라 선진계급의 당과 관련되어 있는 “사적인 문제”로 만들려고 하면서 그들과 가까워졌다.

  그러한 맑스주의의 “개정”이 계급관계에서 실제로 의미했던 것은 기술할 필요도 없다; 그것은 명약관화하다. 우리는 단지 국제 사회민주주의운동에서 일관된 변증법저 유물론의 관점에서 수정주의자들의 믿기지 않을 정도의 진부함을 비판한 유일한 맑스주의자가 플레하노프였다는 정도만 지적하겠다. 플레하노프의 전술적 기회주의를 비판한다는 미명하에 낡고 반동적인 철학적 찌꺼기를 밀수입하려는 깊이 잘못된 시도들이 현재 행해지고 있기 때문에 이 점은 더 더욱 강조해야 한다.

  정치경제학으로 넘어가서, 제일 먼저 주목해야 할 점은 이 영역에서 수정주의자들의 “개정”은 훨씬 더 광범위하고 포괄적이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경제발전에 관한 신자료들”로 공중에게 영향을 미치려는 시도들도 있었다. 그들이 말한 바에 따르면, 대규모 생산에 의한 집중과 소규모 생산의 축출은 농업에서는 결코 일어나지 않으며 상업과 산업에서는 매우 서서히 진행된다. 공황이 이제는 희귀해지고 약화되어서, 카르텔이나 트러스트는 아마 자본이 공황을 완전히 제거하게 할 것이라고 그들은 말했다. 그들에 따르면 계급적대가 더 완화되고 덜 첨예하게 되는 경향 때문에 자본주의 “붕괴론”은 불건전하다. 마지막으로, 그들에 따르면 맑스의 가치이론을 뵘-바베르크에 일치하도록 교정하는 것도 잘못된 것이 아니라고 한다.

  이 문제들과 관련한 수정주의자들에 대한 투쟁은 국제사회주의에서 20년 전 엥겔스가 듀링과 벌인 논쟁만큼이나 풍성한 이론적 사유의 부활로 귀결되었다. 수정주의자들의 제논지는 사실과 수치의 도움을 받아 분석되었다. 수정주의자들은 현대의 소규모 생산을 장미 빛으로, 체계적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공업뿐만 아니라 농업에서도, 소규모 생산에 대한 대규모 생산의 기술적․상업적 우위가 반박할 수 없는 사실들에 의해 입증되었다. 그러나 농업에서 상품생산은 훨씬 덜 발전해 있으며, 대체로 현대의 통계학자들은 농업이 점차 세계경제의 교환과정 속으로 끌려 들어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특별한 농업분야(때때로 그 진행과정조차)를 선별해 내는데 별로 능숙하지 못하다. 항상적인 음식 질의 악화, 만성적인 기아상태, 노동일의 연장, 가축의 질과 관리의 악화  등, 한마디로 수공업 생산이 매뉴팩처에 대항하여 자신을 유지시켰던 바로 그 방법들에 의하여, 소규모 생산은 자연경제의 파멸위에서 자신을 유지한다. 과학과 기술의 모든 진보는 자본주의 사회에 존재하는 소규모 생산의 토대를 피할 수 없게 그리고 가차없이 잠식한다; 종종 복잡 미묘하기까지 한 이 과정의 모든 형태를 연구하여 소생산들에게 자본주의 아래에서 자기 것을 유지하는 것의 불가능성, 농민경영의 절망상태 및 농민이 프롤레타리아트의 관점을 채택할 필요성을 증명하는 것이야말로 사회주의 정치경제학의 과제이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과학적 의미에서 수정주의자들은 전체로서의 자본주의체제에 대한 언급없이 일면적으로 선택한 사실들에 기초한 피상적인 일반화라는 죄를 저질렀다. 정치적인 측면에서, 불가피하게 그들은 자신들이 원했던 농민이 혁명적 프롤레타리아의 관점을 채택하는 대신 소소유자의 태도(즉 부르주아지의 태도)를 취하게끔 조장하고 부추김으로써 죄를 저질렀다. 공황이론과 붕괴이론에 대한 수정주의의 입장은 더욱 조악하다. 아무리 짧은 시간이었을지라도, 오직 가장 시야가 좁은 사람들만이 겨우 몇 년의 산업상의 번성과 번영의 영향을 받아 맑스 이론의 토대를 재주조하려고 생각할 수 있었다. 현실은 곧 공황은 과거의 것이 아니라는 것; 즉 번영 뒤에는 공황이 온다는 것을 수정주의자들도 분명히 알게 해주었다. 특수한 제공황의 형태, 순서, 양상은 변화했지만 공황은 자본주의체제의 불가결한 구성자로서 남아있다. 생산을 통합함과 동시에 카르텔과 트러스트는 누구나 쉽게 알 수 있을 만큼 생산의 무정부성, 프롤레타리아 존재의 불안정성 및 유례가 없을 정도로 계급투쟁을 격화시키는 자본의 억압성 등을 심화시켰다. 자본주의가 몰락을 향해 치닫고 있다는 것-개별 정치․경제적 위기 및 전체 자본주의체제의 완전한 붕괴라는 의미에서-이 분명해졌으며, 바로 새로운 거대 트러스트들에 의해 대규모적으로 되었다. 많은 징후들이 보여주고 있는 임박한 산업공황을 굳이 거론치 않더라도 최근 미국의 금융공황과 전유럽을 덮친 가공할 실업의 증대-이 모든 것은 분명히 수정주의자 자신들을 포함하여 모두에게 잊혀진 수정주의자들의 최신 “이론들”로 귀결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지식인들의 동요가 노동계급에게 준 교훈은 잊혀져서는 안된다.

  가치이론에 관해 말하자면, 뵘-바베르크를 모방한 아주 모호한 암시와 탄식을 빼고 나면 수정주의자들은 전혀 아무것도 기여하지 못했으며, 따라서 과학적 사유의 발전에 어떤 흔적도 남겨 놓지 못했다.

  정치학의 영역에서, 수정주의자는 맑스주의의 토대인 계급투쟁의 교리를 진짜 수정하려고 했다. 정치적 자유, 민주주의 및 보통선거로 인해 계급투쟁의 근거가 제거되며, 노동자들에게 조국은 없다는 『공산당 선언』의 낡은 명제는 비진리로 된다고-그들은 우리에게 말했다. 그들이 말한 바에 따르면, 민주주의에서는 “다수의 의지”가 지배하기 때문에, 국가를 계급지배의 기관으로 간주해서는 안되며 또한 반동들에 대항하는 진보적이고 사회개혁적인 동맹들을 거부해서도 안된다.

  이러한 수정주의자들의 논지는 결국 상당히 균형잡힌 관점의 체계, 즉 오래되고 유명한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의 견해가 된다는 것에는 재론할 여지도 없다. 자유주의들은, 투표권과 참정권을 모든 시민이 공유하기 때문에 부르주아 의회제는 계급과 계급분화를 파괴한다고 줄곧 주장했다. 19세기 후반 유럽의 전역사와 20세기 초 러시아혁명의 전역사는 그러한 견해가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가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경제적 차별들은 “민주주의적인” 자본주의 아래에서 완화된 것이 아니라 심화되고 강화되었다. 가장 민주적인 부르주아공화국일지라도, 의회제는 그 계급억압 기관으로서의 본성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노골화한다. 이전에 정치적 사건들에 능동적으로 참여했던 사람들보다 훨씬 광범위한 주민대중을 계몽․조직하는 것을 도움으로써 의회제도는 공황과 정치혁명의 제거가 아니라 그러한 혁명 동안 내전의 최대한의 격화로 나아간다. 1871년 봄의 제사건과 1905년 겨울의 제사건은 어떻게하여 이러한 격화가 불가피하게 일어나는가를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프롤레타리아운동을 짓밟기 위해 프랑스 부르주아지는 국가 전체의 적이며 그 나라를 파괴한 외국군대와 거래했다. 의회제도와 부르주아민주주의의 불가피한 내적 변증법은-그것은 대중적 폭력에 의해 이전보다 훨씬 첨예한 논쟁의 결정으로 나아간다-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이 의회제도에 기초하여 원칙적으로 일관된 선동․선전을 수행할 수 없을 것이며, 그러한 논쟁에서의 승리를 위해 노동계급을 진정으로 준비시킬 수도 없을 것이다. 서구 혁명에서는 사회개혁론자들, 러시아 혁명에서는 자유주의적 개량주의자들(카데트)과의 동맹, 합의 및 블록의 경험은 이러한 합의가 대중들의 의식을 몽롱하게 할 뿐이며, 투사들을 전혀 투쟁할 능력이 없고 가장 동요하고 배신적인 요소들과 결합시킴으로써 대중투쟁의 실제적인 중요성을 고양하는 것이 아니라 약화한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 주었다. 프랑스의 밀레랑주의-수정주의 정치전술을 광범위하게, 진짜 전국적인 규모로 적용했던 최대의 경험-는 전세계의 프롤레타리아트가 결코 잊지 못할 수정주의에 대한 실천적인 평가를 제공해 주었다.

  수정주의의 전제 및 정치적 경향의 자연스러운 보완물은 사회주의운동의 궁극목적에 대한 그 태도였다. “운동이 전부이며, 궁극목적이란 아무것도 아니다”-이 베른슈타인의 표어는 많은 긴 논문들보다 수정주의의 본질을 더 잘 표현하고 있다. 사건 하나 하나마다 행동을 결정하고, 그날 그날의 사건들과 수시로 변하는 사소한 정치를 쫓아다니며, 프롤레타리아트의 일차적인 이익과 전체 자본주의체제 및 모든 자본주의적 진화의 기본 특징들을 잊으면서, 순간의 실제적이거나 가상적인 이익 때문에 이 일차적인 이이들을 희생하는 것-그러한 것이 수정주의의 정책이다. 이 정책의 바로 그 본성으로부터 그것이 무한히 다양한 형태를 취할 수 있으며, 그리고 모든 다소라도 “새로운” 문제, 모든 예기치 못한 사건의 전환이 있을 때마다, 그것들이 사소한 정도로 또한 아주 짧은 시기 동안만 발전의 기본노선을 변경시키기만 해도 이런저런 류의 수정주의가 불가피하게 나타나리라는 것을 불을 보듯 명확하게 알 수 있다.

  수정주의의 불가피성은 현대사회에서의 그 계급적 기원에 의해 결정된다. 수정주의는 국제적 현상인 것이다. 아무리 정보에 어둡더라도 생각하는 사회주의자라면 누구라도 독일에서 정통파와 베른슈타인파의 관계, 프랑스에서 게드주의자와 죠레스주의자(지금은 특히 부루스주의자)의 관계, 영국에서 사회민주주의연합과 독립노동당의 관계, 러시아에서 볼셰비크와 멘셰비크의 관계는 이 나라들이 처한 현 상태에서 민족적인 제조건과 역사적 요인들의 엄청난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동일하다는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현실적으로, 현재의 국제 사회주의운동 내부의 분리는 세계의 모든 나라들에서 동일한 노선을 따라 진행되고 있는데, 이것은 여러 나라들의 이질적인 제경향이 하나의 국제 사회주의운동 내부에서 투쟁했던 삼사십 년 전에 비해 거대한 진보가 이루어졌음을 증거해 주는 것이다. 그리고 “혁명적 생디칼리즘”처럼 라틴계 나라들에서 형성되어 온 “좌로부터의 수정주의” 또한 맑스주의를 “개정”하면서 맑스주의에 적응하고 있다; 이탈리아의 라브리올라와 프랑스의 라가드렐은 번번히 잘못 이해된 맑스에서 옳게 이해된 맑스에게로 호소하곤 한다.

  우리는 아직은 기회주의적 수정주의만큼 발전하지 못한 이 수정주의를 분석하는 데서 멈출 수는 없다; 그것은 아직 국제화되지 않았으며, 단 한 나라에서도 사회주의당과의 한 번의 실천적인 대전투도 겪어보지 못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위에서 묘사한 “우로부터의 수정주의”에 한정하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수정주의의 불가피성은 어디에 놓여있는가? 왜 그것은 민족적인 특이성이나 자본주의의 발전정도의 차이보다 더 뿌리깊은 것인가? 왜냐하면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프롤레타리아트와 나란히 항상 광범한 쁘띠부르주아지와 소소유자 층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소생산자에서 발생했으며,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다. 수많은 새로운 “중간층”들이 자본주의에 의해 불가피하게 생겨나게 된다(공장의 하청업체들, 가내노동, 자전가나 자동차산업과 같은 대산업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전국에 흩어져 있는 소규모 작업장들). 이 새로운 소생산자들 또한 불가피하게 프롤레타리아트의 대열로 내던져진다. 그렇기 때문에 광범위한 노동자당들의 대열 내부에서 쁘띠부르주아적 세계관이 계속해서 고개를 치켜들게 된다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에서 일어나게 될 운명의 변화에 도달할 때까지는 그럴 수밖에 없으며 항상 그럴 것이라는 것도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혁명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대다수 인구의 프롤레타리아화가 본질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심각한 오류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금 이론적인 영역, 즉 맑스에 대한 이론적 수정들에서만 겪고 있는 것; 수정주의와의 전술적 차이 또는 그것에 기초한 분열처럼 현재는 노동운동의 개별적이고 부분적인 문제들에 관해서만 등장하는 것-이것을 노동계급은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이 모든 논쟁점들을 첨예하게 하고, 대중의 행동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 가장 직접적인 중요성을 갖는 문제들에 모든 차이를 집중시킬 때, 그리고 투쟁의 열기 속에서 적과 우군을 구별하고 적에게 결정타를 먹이기 위해 나쁜 동맹자를 버리는 것이 필요하게 될 때,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규모로 경험하게 될 것이다.

  19세기 말에 수정주의에 대항하여 혁명적 맑스주의가 벌인 이데올로기 투쟁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위대한 혁명적 전투의 전주곡일 뿐이며, 프롤레타리아트는 쁘띠부르주아지의 온갖 동요와 허약함을 뚫고 그 대의의 완전한 승리를 위해 행군하고 있다.

(1908년 3월 후반과 4월 3일에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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