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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황제 보나파르트주의론 : 해제

*이 글은 혼다 노부요시 저작선 2권 해제 중에 실린 천황제 보나파르트주의론 : 일본근대국가론에 관한 비판적 각서의 해제입니다. -옮긴이


 ←혼다 노부요시 서기장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 글은 혼다 노부요시(本多 延嘉) 서기장의 독특한 천황제 보나파르트주의론을 내용으로 한다.

 이 글은 1960년 11월에 발표되었고, 1962년 1월에 짧은 머리말을 붙여 「비판과 전망」 제 2권에 다시 발표되었으며, 그 후 전진사(前進社)에 의해 1971년 2월에 노동자문고의 책으로 세 번째로 발행되었다. 두 번째 글1은 1969년 2월 게이오대학교(慶応大学)에서 이뤄진 강연을 정리한 것이다.

 혼다 서기장이 주장하는 천황제 보나파르트주의란 무엇인가? 그것은 일본공산당 스탈린주의의 전전(戰前)~전쟁 직후의 강령논쟁의 한 정점을 찍는 시가-카미야마 논쟁의 비판적 총화를 통해 전자의 불확정전략적·기회주의적 천황제 파시즘론과 후자인 천황제 절대주의론(1945년 8월 15일까지)를 함께 비판·지양해 천황제를 흉폭한 침략과 전쟁의 정치를 수행한 일본 제국주의의 통치형태로 보고 ‘근대적 국가형태(엥겔스)’로서의 보나파르트주의로 과학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점에서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독특한 광채를 발한 것이다. 동시에 이 규정은 노농파-강좌파의 사이에서 다퉈진 일본 자본주의논쟁을 철저히 지양하는 거점으로서의 의의를 지닌다. 왜냐하면 본래 전략논쟁으로 출발했을 일본 자본주의논쟁이 국가권력의 탄압(치안유지법)에 굴복했기 때문이다. 특히 노농파는 천황제를 금기어로 삼아 회피하려 하는 경제주의·합법주의의 사회경제 분석에 기초한 카우츠키적 사회주의 혁명전략으로 타락했고, 한편 강좌파도 32년테제에 의한 스탈린주의적 2단계 혁명전략의 고정화, 그 정점인 야마다 모리타로(山田 盛太郎)는 「일본자본주의분석(日本資本主義分析, 1934년)」에서 ‘봉건적 토지소유제=반농노적 영세농경’을 일본 자본주의의 ‘기초’로, ‘기초규정’으로 고정적으로 규정하는 사실상의 일본 제국주의 부정론이 되었고, 프롤레타리아 폭력혁명을 부정해 노동자계급 인민을 무장해제시키는 역할을 했다. 여기서 많은 것을 말할 수는 없지만, 간략히 말하자면 이러한 강좌파-노농파의 공통적 오류는 일본의 자본주의화가 세계사적으로는 자본주의의 제국주의 단계로의 전환시기에 이뤄졌다는 점의 파악 결여, 즉 레닌의 제국주의론의 세계사적, 계급론적 관점이 완전히 결여되어 있었다는 것이며, 이런 일국주의의 근저엔 일제의 조선, 타이완 식민지배, 중국대륙에의 침략전쟁에 대한 레닌주의적, 실천적인 입장의 폐기, 억압민족으로서의 부끄러운 타락이었다. 그리고 이 침략전쟁을 기도하고 수행한 일본 제국주의의 권력인 천황제에 대한 굴복이었다.

 카미야마 시게오(神山 茂夫)의 「천황제에 관한 이론적 문제들(天皇制に関する理論的諸問題, 1939)」은 자본주의 전쟁의 부르주아‧아카데미즘적 몰락 속에서 천황제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유일하고 예외적인 스탈린주의적 문헌이다. 전쟁 직후부터 50년대 초기에 걸친 시기에 일본의 좌익전선을 풍미한 느낌마저 있었던 카미야마의 이론은 그러나 일본공산당 스탈린주의당 내부에서 가혹한 정치적 박해를 받았고, 이론외적으로 봉살당해 결국 오늘날 역사학 연구회를 비롯한 ‘진보적 역사가’들은 압도적으로 천황제 파시즘론을 그 무내용성을 자각하지 못한 채 자기의 소설로 삼고 있는 것이다.

 혼다 서기장의 천황제 보나파르트주의론은 메이지유신 이래의 일본 자본주의의 역사적 발달과 조선, 타이완, 중국 침략과 전쟁 정치의 수행주체=천황제에 대한 투철한 마르크스주의‧레닌주의적 역사파악으로 카미야마 시게오의 천황제 절대주의론을 지양함과 함께 시가 요시오(志賀 義雄)의 천황제 파시즘론에 일격을 가한 혁명적인, 유일한 마르크스주의적 천황제 이론이다. 이 경우, 혼다 서기장이 구사한 마르크스주의‧레닌주의의 무기는 주요하게 레닌의 「제국주의론」, 「4월 테제」에서 확립된 레닌주의 혁명론의 정수이며(본서2 제1권 1, 2권 1참조), 더 말할 필요도 없이 마르크스주의 보나파르트주의 국가론이다. 전자에 대해서는 이미 언급했으므로 여기선 독자의 학습의 편의를 위해 보나파르트주의 국가론에 관한 마르크스주의의 고전적 규정을 말하고자 한다.

 혼다 서기장은 「망국의 기념일-기원절 부활과 그 배경(亡国の記念日―紀元節復活とその背景)」에서 “메이지 절대주의 정부가 자기의 생존을 위해 자본주의를 발전시킨 것, 이 과정에서 형성도는 부르주아지가 자신과 대항적으로 등장하는 프롤레타리아와 맞서기 위해 구체제와 타협하고 그것과 동맹을 맺으며 그 내부에서 절대정부를 무너뜨리고 부르주아지의 계급적 이익을 관철시켰음을 지적했습니다만, 저는 이러한 특수한 국가형태를 보나파르트주의로 규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보나파르트주의는 역사적으로 말하자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로 대표된 형태, 이어서 48년의 혁명에서 반혁명으로 전화되는 과정에서 나폴레옹 3세인 루이 보나파르트의 형태, 그리고 오늘날 드골형(形)이라 말할 만한 형태의 3가지를 전형적 형태로 들 수 있습니다. 트로츠키는 이 3가지를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보나파르트주의는 젊은 소치(所致)의 보나파르트주의다. 그리고 20세기에 등장한 보나파르트주의는 자신의 늙은 몸을 자각한 보나파르트주의’라 비교한 바 있습니다. 이러한 프랑스의 전형적인 보나파르트주의에 대해 독일에서의 카이젤주의=비스마르크주의, 러시아에서의 차르주의=스톨리핀주의, 그리고 일본의 천황제라는 3개의 경우도 보나파르트주의적 형태를 갖고 절대주의국가에서 근대 부르주아국가로 이행한 것 또는 이행하려 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본서 428-429p).”라고 간결하게 역사적 본질규정을 하였다. 이는 다음과 같은 마르크스주의적 고전적 규정에 비추어보았을 때 그 정당함이 더욱 선명해진다.

 “이것은, 프롤레타리아트가 독립된 한 계급으로서 자신의 이익과 요구를 가지고 부르주아지에 맞서 용감하가 등장하자마자 부르주아지가 프롤레타리아에게 얼마나 광적으로 복수하는가를 보여주는 최초의 일이었다. 그렇다 할지라도 1848년은 1871년의 부르주아지의 광란에 비한다면 아직 어린애의 장난 같은 것이었다.

형벌이 곧 뒤따랐다. 프롤레타리아트가 프랑스를 아직 통치할 수 없었다면, 부르주아지는 이미 통치할 수 없었다. 적어도 그 당시에는 불가능하였다. 그 당시 부르주아지의 대부분은 아직 군주주의에 호의적이었고 세 개의 왕조적 당파와 그 네 번째인 공화파로 분열되어 있었다. 부르주아지의 내부 알력을 기화로 모험가 루이 보나빠르뜨는 모든 권부―군대, 경찰, 행정 기관―를 장악하고 또 1851년 12월 2일에는 부르주아지의 최후 보루인 국민 의회를 분쇄하였다. 제2제국이 시작되었다. 정치 및 금융 모험가 도당에 의한 프랑스의 착취가 시작되었으며 그와 동시에 소수의 대부르주아지만의 배타적 지배였던 루이-필립의 협애하고 소심한 제도 밑에서는 전혀 불가능하였던 공업의 발전도 시작되었다. 루이 보나빠르뜨는 노동자에 맞서 부르주아지를 보호한다는 구실로 또 한편으로는 부르주아지에 맞서 노동자를 보호한다는 구실로 자본가들로부터 그들의 정치 권력을 빼앗았다; 그러나 그 대신 그의 지배는 투기와 공업 활동, 요컨대 부르주아지 전체의 전대 미문의 발흥과 치부를 조성하였다. 물론 엄청나게 큰 규모로 부패와 대량 절도 행위가 이루어졌으며 궁정이 그 중심으로 되어 그러한 치부 중에서 큰 몫을 떼어 냈다(프리드리히 엥겔스, 「칼 맑스의 「프랑스에서의 내전」독일어 제3판 서설」)3”. “보나빠르뜨주의는 도시에서는 고도의 발전단계 위에 있으면서도 농촌에서는 숫자상으로 소농들에게 압도당하고 있는 노동자 계급이 거대한 혁명적 투쟁에서 자본가 계급과 소부르주아 계급 및 군대에 패배한 나라에서의 필연적 국가 형태이다. 프랑스에서 벌어진 1848년 6월의 대투쟁에서 빠리 노동자들이 패배했을 때, 동시에 부르주아지도 이 승리를 거두는 데에 모든 힘을 다 써 버렸다. 두 번 다시 그러한 승리를 감당할 힘이 자신들에게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그들은 깨닫고 있었다. 그들은 명목상으로는 아직도 지배하고 있었지만, 그러나 지배하기에는 아무래도 너무 허약했다. 선두에 선 것을 진정한 승리자인 군대였는데, 이 군대는 자신의 주된 공급원이었던 계급에, 즉 요컨대 도시의 폭도들이 평온을 어지럽히는 것을 원치 않았던 소농에 지지 기반을 두고 있었다. 이 지배 형태는 말할 것도 없이 군사적 전제 정치였으며, 이 지배 형태의 당연한 우두머리는 혈통상 군사적 전체 정치의 상속자인 루이 보나빠르뜨였다.

노동자들과 자본가들에 대해 보나빠르뜨주의가 취하는 태도의 특징은, 이들 양자가 서로 공격하는 것을 방해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보나빠르뜨주의는 노동자들의 거센 공격으로부터 부르주아지를 지켜 주고 양 계급 사이의 사소한 평화적 다툼들을 조장하면서, 어쨌거나 양쪽 모두보부터 정치 권력을 모조리 빼앗아간다(프리드리히 엥겔스. 「프로이센의 군사 문제와 독일의 노동자 당」4”. “프로이센―그런데 프로이센이 지금 결정적이다―에는 여전히 강력한 대토지 보유 귀족과 나란히, 비교적 젊고 특히 매우 비겁한 부르주아지가 현존하며, 이 부르주아지는 이제까지 프랑스에서와 같은 직접적인 정치적 지배도, 영국에서와 같은 다소 간접적인 정치적 지배도 쟁취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 두 계급과 나란히, 빠르게 증가하고 있고 지적으로도 매우 발당되었으며 나날이 점점 더 잘 조직되고 있는 프롤레타리아트가 현존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에서 낡은 절대 군주제의 기본 조건인 토지 귀족과 부르주아지 사이의 균형과 나란히, 현대 보나빠르뜨주의의 기본 조건인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의 균형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낡은 절대 군주제뿐만 아니라 현대의 보나빠르뜨주의적 군주제에서도 현실의 정부권력은 특수한 장교 및 관료 카스트의 수중에 놓여 있으며, 프로이센에서 이 카스트는 일부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일부는 장자 상속 소귀족으로부터, 더 드물게는 대귀족으로부터, 극히 적은 부분은 부르주아지로부터 충원되고 있다. 사회의 외부에, 말하자면 사회 위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 카스트의 자립성은 국가에게 사회에 대한 자립성의 외관을 부여한다.

프로이센에서(그리고 프로이센의 선례를 따라 독일의 신 제국 체제에서) 모순으로 가득한 이러한 사회 상태로부터 필연적 결과로서 발전한 국가 형태는 가상적인 입헌제이다; 이 형태는 낡은 절대 군주제의 오늘날의 해체 형태일 뿐만 아니라 보나빠르뜨주의적 군주제의 존재 형태이기도 하다. 프로이센에서 1848년에서 1866년까지의 가상적인 입헌제는 다만 절대 군주제의 오랜 시일에 걸친 부패를 은폐하고 매개하였을 따름이다. 그러나 1866년 이래로, 특히 1870년 이래로, 사회 상태의 변혁과 함께 낡은 국가의 해체는 누가 보아도 분명하고도 점점 더 거대해지는 규모로 일어났다(프리드리히 엥겔스. 「주택 문제에 대하여」5”.

“산업의 급격한 발전은 부르주아들과 노동자들 사이의 투쟁이 융커들과 부르주아들 사이의 투쟁을 뒤로 밀어젖히도록 했다. 그리하여 낡은 국가의 사회적 기초는 내부적으로도 완전한 변혁을 겪었다. 1840년 이래 천천히 사멸해 가고 있던 군주제는 귀족과 부르주아지 사이의 투쟁을 기본 조건으로 하여, 그 투쟁 속에서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부르주아지의 쇄도에 대항해 귀족을 보호하는 것이 더 이상 문제로 되지 않고 노동자 계급의 쇄도에 대항해 모든 유산 계급들을 보호하는 것이 문제가 된 순간부터, 낡은 절대 군주제는 특별히 이러한 목적을 위해 만들어진 국가 형태로 완전히 이행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 보나빠르뜨주의적 군주제. 나는 프로이센의 보나빠르뜨주의로의 이러한 이행에 대해 이미 다른 곳에서 논술하였다. 거기서는 강조할 필요가 없었으나 여기에서는 매우 중요한 사실은, 이 이행이 프로이센이 1848년 이해 이룩한 최대의 진보였다는 점 (…) 보나빠르뜨주의는 어쨌든 봉건주의의 제거를 전제로 하는 현대적 국가 형태이다(프리드리히 엥겔스. 「「독일 농민 전쟁」제2판과 3판 서문」)6”.

 이것으로 다소 길지만 19세기 프랑스 및 독일의 보나파르트주의에 관한 인용을 마치기로 하자.

 이 고전적 규정을 레닌주의 혁명론을 매개삼아 20세기 제국주의 현대의 일본 천황제에 적용한다면, 혼다 서기장이 전개한 규정이 유일하게 올바른 과학적인 것임을 독자 여러분은 비교적 용이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혼다 서기장은 본서 409페이지에서 메이지 29~31년경에서 다이쇼 2~13년에 천황제 보나파르트주의로의 이행이 이루어졌다고 지적, 여기서 천황제가 일본 제국주의의 근대적 국가형태로서 일제의 국가권력구조, 무엇보다도 천황의 군대, 경찰, 방대한 관료=행정기구의 수뇌부로서 프롤레타리아 폭력혁명으로 타도되어야 할 대상인 자신을 완성했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이에 따라 프롤레타리아 일본혁명의 전략구상을 국가론적 분석=경제적, 사회구성체적 분석의 측면에서 기초화할 수 있었다. “카미야마 국가론은 레닌의 제국주의 단계론과 4월 테제를 레닌주의의 최고 도달점으로 보는 입장에서 레닌주의 혁명론을 취하는 입장에 서지 못했고, 따라서 일본 제국주의를 금융자본 지배가 확립된 자본주의적 제국주의로 파악하는 데 실패해 ‘군사적=봉건적 제국주의’로의 규정과 절대주의 군주제 규정에 발목이 잡혀, 결국 코민테른의 32년테제의 2단계 전략으로 결론으로 삼고 있는 셈이다.”

 바로 위와 같은 이유로 혼다 서기장의 천황제 보나파르트주의론은 노농파=강좌파의 사회민주주의와 스탈린주의의 해결 없는 불모의 논쟁에 마르크스주의‧레닌주의의 입장에서 혁명적 지양을 주는 유일한 거점이었으며, 전후 마르크스주의 이론전선의 최고봉이었다.

 “여기서 스탈린주의를 비롯해 학계의 통설이 되고 있는 천황제 파시즘론의 오류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전전(戰前), 전시의 천황제를 파시즘으로 규정하는 것은 파시즘을 단순한 폭정 일반이라는 무내용성으로 해소하고 마르크스주의적 국가론 논의의 토대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파시즘은 무엇보다도 혁명세력의 강대화, 전(前)혁명정세의 도래라는 혁명적 위기 아래서 금융자본 스스로가 절망과 분노에 떨어뜨리는 소부르주아 대중, 최하계층의 무리, 프롤레타리아 일부 등의 집단을 나치에서 전형적으로 볼 수 있듯, 사이비 반체제적 강령아래 조직해 공공연하게 국가권력에게 지원받은 조직적 대중운동에 의해 공연한 피범벅 내전을 통해 사이비 반혁명으로서 혁명을 분쇄하는 것으로 성립하는 정권이다. 보나파르트주의는 천황제에서 전형적으로 볼 수 있듯 계급을 초월한 권위에 의해 계급적 격돌을 억압함으로써 모든 소유계급의 이익을 지키는 것을 본질로 한다.

“보나파르트주의, 즉 군대적, 경찰적 독재에 기반한 ‘국내 평화’와 파시즘, 즉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공연한 내전 체제 사이의 사회적, 정치적 차이를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텔만은 자기 눈앞에 일어나는 일을 이해할 가능성을 스스로 빼앗고 있다(트로츠키, 「사회파시즘론 비판」)”.

 위의 규정으로 볼 때, 혁마르파야말로 현대의 파시스트임이 잘 이해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전전 천황제에 대한 혼다 서기장의 천황제 보나파르트주의론을 거점삼아 전후 천황제에 대한 명확한 국가론적 규정을 해야만 한다. 확실히 일본 제일의 재벌이자 일본 제일의 대지주의 물질적 기초는 대폭 해체‧축소되었고, 천황제 군대도 해체되었다. 그러나 이를 가지고 천황제가 해체‧소멸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아니다! 절대 아니다. 전후 천황제는 3천만 조선‧중국 인민을 학살한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전쟁, 제국주의 전쟁의 최고책임자, 전쟁범죄자로서의 천황은 완전히 면죄되었고, 헌법 제1조에 ‘일본국의 상징이며 일본 국민통합의 상징’으로 명기됨으로써 일제의 침략과 전쟁정치, 아시아 인민에 대한 일제의 민족억압적 관계는 미일안보동맹을 매개삼아 공고해졌다. 미일안보동맹과 천황제‧천황제 이데올로기의 불가분적 결합을 절대적 전제로 하여 일제의 전후 재건이 이루어졌다. 20세기 후반의 제국주의 전후세계체제의 미 제국주의를 기축국으로 한 재건의 역사적 과정에서는 패전한 제국주의 국가의 제국주의적 연명을 위해 ‘특수한 입헌군주제’로서 천황제가 존속‧재편되었는데, 이는 1967년 기원절 부활의 법제적‧이데올로기적 공격 이후 더욱 강해졌다. 오늘날 조선-아시아 침략에 한층 반동적 역할을 적극적으로 수행하려 하는 것은 명백하다. 지금 통치형태가 천황제 보나파르트주의로 바뀌려 함은 명백하다.

 일본 제국주의의 국가권력=정치적 상부구조로서 일관되게 일본 노동자계급 인민에 군림해온 일본 제국주의 부르주아와의 결합이 객체면에서의 전전과 전후의 연속성이라 한다면 상징천황제―전후 민주주의 아래서 전전 일제의 아시아 침략에의 가담을 자기비판하지 않고, 전후혁명의 패배를 충분히 교훈으로 삼지 않고, 아직도 전범천황 히로히토의 처형도 없는 일본 노동자계급인민의 존재, 패배와 굴복의 역사의 계속은 일본 노동자계급인민의 주체면에 대한 연속성이다.

 우리는 천황제를 일관되게 옹호하고 근대주의적으로 미화하는 ‘폐하의 혁마르파’를 총섬멸하고, 이 반혁명의 선혈로 우리의 몸을 씻어내 주체면에서의 연속성에 종지부를 찍는 것으로 천황제=일제 국가권력을 타도해야만 한다. 혼다 서기장의 천황제 보나파르트주의론은 이 투쟁의 가장 좋은 무기다.

 

 

1976년 3월

전진사 출판부

前進社出版部


원문: 解 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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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혼다 노부요시 저작선 제 2권 5-2: 망국의 기념일-기원절 부활과 그 배경(亡国の記念日―紀元節復活とその背景)을 가리킨다.-옮긴이텍스트로 돌아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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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 제 6권」, 박종철출판사, 326p에서 재인용. -옮긴이텍스트로 돌아가기
  4.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 제 3권」, 박종철출판사, 53p에서 재인용. -옮긴이텍스트로 돌아가기
  5.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 제 4권」, 박종철출판사, 233-234p에서 재인용. -옮긴이텍스트로 돌아가기
  6.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 제 3권」, 박종철출판사, 164p에서 재인용. -옮긴이텍스트로 돌아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