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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 또는 공놀이라는 경계선


그리 멀지 않은 시기에 작성했던 자전적인 텍스트에서 나는 한 주석에서 내 삶이 이 텍스트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요약될 수 있음을 시사했던 적이 있다. 대강 '몸으로 사는 삶이 아니었다'는 얘기였을텐데 보다 구체적으로 이는 유년기 청소년기 시절 축구를 못했다는 사실에서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다.

남성 집단에서 요구되는 덕목이 몇 가지 있다. 적당한 강도와 빈도의 욕설, 적당히 질펀한 유머, 적당한 횟수의 분노 등드르등등등.... 이 계열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운동'이다. 운동이라는 것이 결국 좋은 몸을 갖추기 위함이라는 점을 볼 때 몸이 더 결정적인 것 같지만 여기서 논의하고 싶은 시기는 20대보다도 훨씬 아래 멀게는 유치원 가까이는 중학교 정도 시절의 남성 사회다.

축구, 넓게는 공놀이 능력의 유무로 나뉘는 위계는 성적을 통한 위계만큼 공식화되어 있지 않지만 싸움을 통한 위계만큼 은밀하지는 않다. 그리고 이 공놀이 능력을 통한 위계의 중간자적 성격은 이 위계가 다른 두 위계보다 좀더 '보편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하는 핵심요인 중의 하나이다. 성적은 학생들 사이에서 매우 직접적이고 공식적인 우월감/열등감을 불러일으키는 데다가 선생님이나 어머니의 직접적인 제재를 수반한다는 점에서 뭔가 '타율적'인 가치기준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싸움은 보다 자생적(?)인, 혹은 그런 것으로 느껴지는 가치평가체계이기는 하지만 '승자'에 들어가는 사람의 비율이 매우 적은 데다가 위계 체계 전체도 성적처럼 1등부터 꼴등까지 주루룩 나온다기 보다는 20:80 식으로 상층 일부만을 부각하는 방식으로 나타나기에 보편적인 기준이 되고, 보편적인 기준으로 느껴지기에는 부적절하다.

그에 반면 축구는 우선 '자생적'이다. 축구 시간은 외부의 권력(선생님/부모님)에 '의존'하거나 '침해'받지 않으며, 오히려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데다가 때로는 "수업/자습 그만하고 축구하고 싶어요" 식으로 학생들의 집단적 자유를 요구하는 언표로서 활용되기도 한다. 그것은 '학생들의 것', '우리의 것'으로 간주된다.
  거기에다가 적지 않은 수, 그러니까 '다수'가 참여하는 것이 가능하다. 초등학교 때는 떼로 몰려다녀 공을 한번씩 건드리며, 중학교 때는 공격수/수비수/골키퍼, 고등학교 때(정확히는 월드컵 이후 고등학교 때)는 좀더 포지션을 세분화하며 형태야 어쨌든 다수가 '참여'하게 된다. 만약 팀이 이기면 자신이 골은 넣지 않았지만 승리의 '일부'가 되었다는 것에 기뻐할 수 있고, 패배하게 되면 자신의 실책에 자책감을 느끼고 다투기도 하겠지만 어쨌든 무엇의 '일부'로서 그 감정을 느끼게 된다.

그렇지만 사회 거의 모든 일이 그렇듯 여기에도 '소수'가 존재한다. 이 소수가 옳다 불쌍하다 어쨌다 덧붙이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냥 이 소수를 설명해 보고 싶다. 나 자신이 그 일부인 그 소수를. 아니 일단 그냥 돌이켜나 보자.

축구 공놀이의 위와 같은 '보편적' 성격은 이 놀이가 남성 사회에서 주류/비주류를 나누는 데 핵심적인, 보다 '근본적'인 역할을 하게 해준다. 여기에서 배제되었던 이들 중 모두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주 소수는 아닌 일부는 '비주류의 감성'이라고 할 만한 것을 익히게 된다. 그리고 그 감성은 자신만의 '공간'을 찾는 것으로 나아가게 만든다. 메탈이든, 책이든, 재패니메이션이든, 천재 드러머 요시키든, 전기기타든, 심지어 학생운동이든....

공놀이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문제는 일단 공놀이 능력을 기준으로 한 가치체계일 것이다. 그리고 이 가치체계가 효력을 발휘하는 근거는 바로 '몸'에 연결되기 때문이다. 즉, 공을 얼마나 잘 다루느냐는 몸을 자신의 몸을 얼마나 잘 다루느냐의 문제이기도 하다. 공놀이 능력은 단순한 도구활용능력이 아니라 자기통제력의 문제가 된다. 그리고 이 자기통제력의 성격은 공부나 시험같은 타율적으로 부과된(혹은 그런 것처럼 보이는) 가치체계에 순응하는 (마찬가지로) '신체적'인 실천들과 대비되며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가지게 된다. "나는 내 신체를 남이 아닌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자유롭게 움직인다. 즉, 나는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나에 대한 지배자이다."

여기에서 공을 잘 가지고 노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는 기술자와 비기술자가 아닌 마치 주권자와 노예의 형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물론 여기서의 노예가 앞서의 주권자가 아닌 다른 것에 굴복한 것으로 표상된다는 점은 유의해야 한다. 하지만 어쨌든 이것은 자유와 굴복이라는 이항대립으로 표상된다.

물론 이런 이항대립 자체는 체육시간이라는 외부의 권력에 의해 제한되어 있다는 점에서 '일시적'인 데다가 축구를 잘하는 '주권자'가 '노예'에게 노예로서의 의무를 지키도록 요구하는 '주인'은 아니라는 점에서 '가상적'이기도 하다. 하지만 주권자와 노예의 형상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어디에서? 노예의 머리 속에서. 그리고 주권자의 머리 속에서. 둘의 관념이 서로 영향을 직접 미치지는 않지만 자신의 관념에의 포획('나는 상/하층이야')과 타인의 관념에 대한 짐작('쟤는 자신이 상/하층이라는 걸 알겠지')이 결국 결과적으로는 어떤 권력이 작동하게끔 만든다. 이 권력이 폭력적인 형태를 꼭 띠는 건지는 상황에 따라 다른다. 다만, 한 가지 거의 확실한 것은 이 권력이 주체를 형성한다는 것, 다른 말로는 개인들의 자의식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꽤 오래 가는. 그리고 이 자의식은 결국 끼리끼리 모여 놀게 한다는 점에 있어서 '물질적'인 힘을 발휘하기도 한다. 나는 '진보'를 자처하는 많은 사람들 중 축구를 하지 않으며 월드컵같은 걸 미워하는 데에는 엘리트주의적 정서만이 아닌 이런 학교문화와 관련이 있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이다.

P.S) 방법론에 대한 메모 하나: 이 분석은 이 자체로는 완결되지 않았다. 학교문화/학교권력관계에 대한 분석이 완성되기 위해서는 다른 두 축인 성적과 싸움이라는 화두가 설명되어야 하며 나아가 이 세 축이 서로 어떤 관계를 맺고 있으며 어떤 복합적 양상을 띠고 나타나는지 해명되어야 할 것이다. 이를 수행하지 않아도 '축구를 통해 본 학교권력관계' 정도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는데 이는 분석적으로는 맞아도 총체적으로는 틀리기에 '사회분석'을 자임할 수준의 것이 될 수 없다. 그래서 이 글은 또 역시 자전적인 되뇌임 하나에 불과할 뿐이다. 이 말을 굳이 덧붙이는 이유는 '분석'과 '자전'의 개념적 수준을 구분해 주화입마에 빠지는 것을 스스로 방지하기 위해서이다. 이 구분이 '자전'을 포기하는 것 또는 자전과 분석이라는 두 범주를 완벽하게 분리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절대 아님은 물론이다.

P.S2) 소녀시대 애호에 대한 단상: 내가 소녀시대를 좋아하는 것도 이 맥락에서 해석이 가능하다. 그녀들의 현재 몸에 대한 시각적 즐거움, 성적 욕망이 핵심적이기는 하지만 전부는 아니다. 아이돌의 댄스라는 신체에 대한 통제력, 그리고 몸을 움직여 양적으로는 '적지 않은' 질적으로는 '자신과 가족의 삶을 책임질 수 있는' 돈을 번다는 사실, 거기서 도출되는 다른 결론 신체에 대한 통제력과 연계되는 삶에 대한 통제력. 축구를 잘했던 친구들과 달리 그녀들은 꽤 먼 거리(물리적으로 사회적으로 그리고 성적으로도(남성이라는 성적 경쟁의 대상이 아닌 여성이라는 성적 욕망의 대상))에 있기에 질투 없이 마음껏 그녀들을 응원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할 게다.
  내가 가장 감동을 받곤 하는 그녀들의 활동은 인터뷰나 라디오 방송같은 '활자의 형식'으로 이해가능한 컨텐츠라는 것은 시사적 내지 징후적이다. 나는 내가 가장 자신있는 방식 또는 내가 가장 자신없는 방식으로부터 도피하며 도달한 그 방식으로 그녀들은 가졌지만 나는 가지지 못한 그 '신체'라는 화두의 궁금증에 다가가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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