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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옹이와 흰둥이]

만화 [야옹이와 흰둥이]를 본 건 몇 년 전 디씨 힛갤에서이다. 흰 백지에 4B 연필로 그려진 야옹이와 흰둥이가 주인의 빚을 대신 갚기 위해 열심히 일하는 이야기였다. 지적이건 소재건 뭐건 특이함에 열광하던 때였지만 담백한 그림체에 뻔한 비정규직 노동자 이야기는 뻔하지 않고 뭔가 특별하게 다가왔다. 아마도 특이함에 대한 반작용으로 평범함에 눈시울을 붉힌 것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이 만화는 사실 매우 전통적인 감정이입 회로를 가지고 있다. 세상의 모짐과 그에 맞서는 착해빠진 주인공들이 있다. 게다가 그 주인공은 '동물'이다. 그것도 귀여운 고양이(야옹이)와 강아지(흰둥이)다. 동물은 판타지를 투영하기 매우 쉬운 존재다. 사람들은 종이 다른 생물체에게서 인간의 부정적인 면을 모두 걷어내고 자신이 타인에게 바라는 모든 요소들을 투사한다. 현실에서도 흔히 있는 일이며 문화적으로도 동물은 그런 위상을 지니고 있다.

 

이 작품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런 작품들과 구별되는 요소들이 있다. 우선 이 동물들은 노동을 한다. 그리고 그 노동의 현장은 바로 한국 사회이다. 저자는 초반 아이템을 한겨레의 노동 특집 기사(이후 [4천원 인생]으로 출간)에서 따왔다. 이후에 등장하는 배경들도 마찬가지다. 동네 빵집, 노점, 고급 레스토랑 알바, 호프집, 학원 마감 청소 등등. 이 작품에 등장한 공간들은 단 한 곳도 동물들의 이상적 인간상을 드러내기 위한 무대가 아니며 이런저런 사람들이 실제로 살고 있는 장소이다. 동물들의 선함은 그 배경에 그저 놓여지며 그런 성격을 가진 사람들이 겪을만한 일들을 겪는다.

 

그리고 인간 동료들이 등장한다. 인간 동료들은 주변 인물로만 등장하지 않는다. 주인공과 반대편에 서있는듯한 인물들(시식맨, 깡패)은 결국 나름의 사연이 있는 것으로 밝혀지고 결국 주인공과 같은 존재임이 드러난다. 이기적인 인간상이 동물의 선함, 그러니까 인간이 동물에 기대하는 선함과 그리 다르지 않는 것으로 드러난다. 혹은 인간이 그런 부분들을 가지고 있음이 드러난다. 같은 얘기를 내게 익숙한 어휘들로 반복하면 동물에 인간이 투사되고, 다시 그 동물에 의해 인간이 이해되거나 말없이 도움을 받으며 동화됨으로써 인간은 자신의 인간성을 회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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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생각을 전개시킬 수록 나로 돌아가는 느낌이지만, 만화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그냥 만화를 보고 문득 들었던 생각은 우리가 동료 시민들에게 얼마나 매일매일 몹쓸 일을 저지르며 살고 있는가 그런 것이었다. 물론 사람들은 이렇게 착하지 않다. 하지만 다들 그런 착한 면을 조금씩은 가지고 있다. 열심히 살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자신만의 의지로는 그게 잘 관리도 안 되며 세상에 나가서 관철되지도 않는다. 야옹이와 흰둥이는 모두에게 자신에게 그런 면을 환기시켜준다.  하지만 현실로 이뤄주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그건 네가 해야할 몫이라고 말하는 것도 아닌 그냥 항상 옆자리를 지켜줄 뿐이다. 그렇지만 두 동물이 평면적으로 보이지는 않는 이유는 둘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밖에 나가서 사람을 위로하지만 돌아와서는 서로의 고됨을 이야기하며 서로를 위로한다. 밖에서 위로받을 때도 없지는 않다.

 

이렇게 착해빠졌으면서도 전혀 순진하게만은 느껴지지 않는 만화가 완성된다. 열심히 살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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