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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에 나는 지성의 명철성을 믿으며, 그리고 지성에 대한 민중운동의 우위성을 믿는다. 왜냐하면 지성은 최고 결정기관이 아니기 때문이다. (…) 어쩄든 우리가 역사의 흐름을 바꾸는 것을 도울 수 있다는 약간의 희망을 품을 수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이런 점에서 가능하며, 오직 이런 점에서만 가능하다. (…) 여기서 우리는 정치 한가운데 서게 된다." -루이 알튀세르,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 권은미 옮김, 2008, 297쪽.
수많은 좌파 '이론가'들의 바람과는 그 어떤 외적 조건과 무관하게 '해방'을 확실하게 보증해 주는 이론이나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완벽하게 계몽된 사람들로 이루어진 합리적인 정치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 어떤 문제적 상황에도 곧바로 적용할 수 있는 규범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아무런 내적 모순이 존재하지 않는 이상적 원리라는 플라톤주의적 바람, 개념적 순수주의의 흔적을 이곳저곳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하버마스의 의사소통적 합리성, 데이비드 하비의 희망의 공간, 가라타니 고진의 자본의 축적을 발생시키지 않고 단순히 물물교환을 도울 뿐인 중립적인 통화, 자본주의의 내적 모순이 소멸된 스탈린의 사회주의, 그 사상적 기원으로서의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국가의 사멸"에 대한 옹호, 배제없는 재현/대표라는 직접적 민주주의의 오래된 환상 등등.
이 모든 개념들은 현실이 가지고 있고, 또 현실이라는 범주 자체에서 제거할 수 없는 '우연성', 노골적으로 말하면 '더러움'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 어떤 정세에서건 역사에서건 결백할 수 있는 개념을 각자 내세운다. 일단 내 지금 잠정적인 생각은 그런 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윗 개념들이 지시하는 상황은 극단적인 현실의 우연성을 통제하는 한에서만, 어떤 잘 꾸며진 '실험실' 안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그런 상태에서만 가능하다.
이런 유토피아주의적 개념들의 계열에 한 두개를 더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나는 '진리'의 핵심적 계기는 투명성, 순수성이 아니라 우연성, 우발성이라고 말하고 싶다. 민주주의는 해방의 보증수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이 개념이 어떤 구체적인 정세와 역사에서 어떤 기능을 하는지 분석하고 이를 고려해 이 개념에 내재된 해방적 가능성을 극대화시키는 것이다. 지성은 해방을 보증하지 않는다. 해방을 보증하는 것은 현실의 실천이다.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면 해방을 보증이 가능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 자체가 문제일 것이다. 해방이라는 범주는 그보다 훨씬 역동적인 범주로 우리는 이것을 보증하진 못하고 다만 활성화할 수 있을 따름이다.
헌데 이는 매우 역설적인 것처럼 보인다. 우발성을 포함한 개념을 우리는 여전히 개념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나는 여기서 극단적 상대주의, 경험주의에 빠져 자신의 지적 게으름을 개념의 무용성으로 전치시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아니다. 나는 절대로 모든 개념이나 이론의 무용성을 주장하는 것도 아니며 오히려 '개념'과 '이론'의 규정 또는 역할이 말 몇 마디로 현실을 극복하려는 시도는 아닌 다른 것은 아닐까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일례로 민주주의라는 개념을 생각해보았을 때 그것 자체가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는 만병통치약은 아니었지만 그것이 분명히 평등-자유라는 '한걸음'을 성취해낸 것은 사실이다. 민주주의는 그 이후 우리의 삶의 모든 이상들을 규정하기에 이르렀다(나는 공산주의도 이에서 자유롭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근대는 시작되었고 우리는 그 개념을 통해서만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모든 개념이 민주주의라는 말만큼의 무게를 지닐 수는 없고, 또 그러지 못한다고 해서 무용한 것은 아닐 것이다. 여기서 나는 그저 '우발성을 내포한 개념'이라는 말이 이 '한걸음'을 이해하기 위한 시도가 아닐까 질문을 던져보고 싶다. '진리'는 이렇게 철저히 현실과의 연루 속에서만 말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P.S 기본소득은 그 "한걸음"에 해당하는 개념일까? ㅎㅎ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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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것이 전형적인 "강박증"적 사고라고 봅니다. 스탈린주의란 다름 아닌 이러한 강박증의 발현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우리 안에 반혁명 분자가 있다"와 "우리 안에 플라톤주의적 순수주의가 있다"라는 발화는 얼마나 다른 것일까요. 이 병리성에서 해소되고 싶다면, 도대체 어떤 저자가 이런 개념적 순수주의와 유토피아주의에 빠져 있는지, 그리고 어떤 독자가 그러한 징후를 체현하고 있는지를 열거하고 비판해야하지 않을까요.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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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적 순수주의는 우리 '안'에 있을 수도 있겠지만 '밖'에도 있을 수 있겠죠. 리플을 읽고 다시 제 포스트를 살펴보니 "플라톤주의"를 언급한 문장의 주어에 "우리"를 써놨더군요. 특정한 집단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고 그냥 문체를 바꿔보고 싶어 이렇게 썼습니다. 어찌 됐건 플라톤주의가 우리 안에 있는지 없는지는 뭐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해서 박가분 님이 "강박증"이라는 표현을 통해 말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모르겠군요... 혹시 제가 개념의 비순수성, 개념이 자신이 처한 정세에 따라 우발적으로 규정됨을 강조하는 것이 역설적으로 ('정세'의) 순수주의로 귀착된다는 것인지요? 만약 그렇다면 예리한 지적이시긴 하다만 제 입장을 너무 경직된 것으로 평가하시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포스트에서 말했다시피 저는 개념의 '무용성'이 아니라 '비순수성'을 주장하고자 했습니다. 개념의 역할이 제한적이며 오히려 이런 제한성의 자각이 변혁적 실천의 과정 속에 자신을 더 잘 위치시키는 것이 되지 않을까하는 가능성을 제기해보고 싶었습니다. 이외에 어떤 저자가 그런 위험에 빠져 있는지에 대해서는 2번째 문단에 어느 정도 열거를 했다고 생각을 했는데요, 물론 구체적인 논변이 부재하긴 하죠. 하지만 어설프게 서술하는 것보다는 일단 메모만 남겨 놓는 게 좋겠다 싶어 이리 놔뒀습니다. 제대로 논증하지도 못할 말을 왜 했느냐는 반론이 가능하겠고 그에 대해서는 그럴싸한 대답이 없긴 합니다. 뭐 이 곳을 아직 그만한 책임이 따르는 곳이라기보다는 개인적인 메모를 기록하는 장소의 성격이 짙지 않나 싶고 혹시나 비슷한 고민을 하는 분들이 있지 않을까 싶어 공개 포스트로 해놓아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