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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새움에서 세미나를 진행하면서 "근대의 초극" 담론을 중심으로 1930~45년 일본파시즘기 이데올로기에 대해 공부하고 있는데 세미나를 진행하면 할수록 이데올로기와 대중의 관계를 외재적이 아닌 내재적으로 살펴 본다는 문제에 대해서 생각을 하게 된다. 이데올로기는 외적으로 부과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대중과의 내적 관계 속에서만 기능이 가능하다. 가라타니 고진이 『일본 근대 문학의 기원』에서 말했듯이 '영향'이란 영향을 받을 만한 조건 하에서만 전달될 수 있다. 이와 관련되어 참고할 만한 메모를 무질서하게 모아놓아 본다. 진태원 선생님의 논문 볼드 강조를 제외한 모든 강조는 나의 몫.
1. 다케우치 요시미,「근대의 초극」, 『일본과 아시아』, 소명출판, 2004.
“그러나 나는 「근대의 초극」 자체가 지식 청년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은 아니었다고 니나의 세대에게 말하고 싶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양쪽 모두 불행해진다. 「근대의 초극」에는 그런 힘이 없었다.”(70) “‘근대의 초극’은 전쟁과 파시즘의 이데올로기를 대표하는 것으로, 그것을 언급할 때는 ‘악명 높은’이라는 형용사가 붙어 다니는 것이 거의 관례화될 정도로 전쟁 후 악옥(惡玉)으로 취급되었지만, 지금 다시 읽어보면 그것이 어떻게 그토록 위세를 휘두를 수 있었을까 하는 의아심이 들 정도로 거기엔 사상적으로 아무 내용이 없다. 왜 ‘근대의 초극’이 악명을 떨쳤는가. 그것은 심포지움 자체로부터 설명되지 않는다.”(66)
“각각의 사상은 주도사상과의 관계 속에서 정립되었으며, 그것으로부터 완전히 무관한 장소에서 사색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물론 주도사상의 이면에는 도피의 공간이 있었다. 그러나 도피를 긍정하지 않는 사상 주체라면, 주도사상이야 어떻든 간에 현실 속으로 작용해 들어가기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총력전의 본성에 기인한다. 육체가 소집영장이나 징병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것처럼, 정신도 그 내면 깊은 곳까지 전쟁의 사상에 의해 점령당하는 것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상이 창조적 사상이 되기 위해서는 불 속에 들어가 쌀알을 주워오는 모험을 감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국가(國家)의 총력(總力)을 기울여" 싸운 것은 일부 군국주의자들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선량한 국민이었다. (…) 민중들의 돌에 맞아 죽을 선지자가 아니라면, 어떤 상황하에서 저항과 굴복은 거의 종이 한 장 차이이다.”(110)
"전쟁의 저변을 구체적으로 파고들지 못한다면 어떤 방향으로도 민중을 조직해 낼 수 없다. 다시 말해 사상을 형성할 수 없다는 말로서, 이것이야말로 사상의 최소한의 필요 조건인 것이다. 전쟁음을 전쟁가사라는 이유로 부정한다면 그것은 민중의 생활을 부정하는 것이 된다. 전쟁가사를 승인하되, 그 전쟁가사가 과거의 낡은 전쟁 관념에 묶여 현재 진행중인 전쟁의 본질(제국주의전쟁이라는 관념은 아니다)을 외면하고 도피하려는 태도를 비판하여, 전쟁가사를 총력전에 어울리는 전쟁가사로 만드는 데 힘을 보태고 그것을 통해 전쟁의 성질 그 자체를 바꾸어 가려고 결의하는 지점에서 저항의 계기가 성립하는 것이다. 화장실 벽에 '침략 전쟁 반대'를 써 갈기거나 '히데키[東條英機]를 타도하자'라는 식의 허무맹랑한 말을 유포하는 것은 저항이 아니라 차라리 저항을 해체하는 것이며, 사상을 풍속의 수준으로 끌어내리는 행위이다."(111)
“세 번째로 오다기리는 ‘공동사회성’이 자연히 ‘천황주의국가’로 이어진다고 보고 거기에서 ‘낭만파의 위험’을 발견한다. 나로서는 이 점도 수긍할 수 없다. ‘공동사회성’이 어떻게 ‘천황주의국가’로만 귀결되는가. 원시공산제일 수도 있고 인민공사(人民公司)일 수도 있지 않은가. 만약 그것을 역사의 교훈이라고 말한다면 그런 역사해석은 틀린 것이다. 이 부분에서 오다기리는 사상을 ‘반체제적 요소’만으로 평가하는 이데올로기적 일원론으로부터 역사를 거꾸로 놓고 ‘낭만파의 위험’이라는 피해망상을 도출하고 있는 듯하다.”(125)
2. 백승욱, 『문화대혁명』, 살림, 2007.
"둘째, 이 접근법[문화대혁명을 마오를 비롯한 최고지도부 간의 권력투쟁으로만 설명하는 접근]은 대중을 수동적이고 쉽게 동원되는 동질적인 세력으로 간주하고 있는데, 이는 특히 사회주의를 전체주의로 보는 접근법의 한계였다. 이런 접근법에서는 극단적으로 문혁시기의 대중과 독일의 나치 치하의 대중 사이에서 유사점을 찾으려 시도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렇지만 문화대혁명 시기 대중은 단일 세력이 아니었고, 내적으로 매우 이질적이고 분열되어 있었고, 시기적·지역적으로 매우 상이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러면서도 전국에 걸쳐 엄청난 규모로 운동에 참여하였는데, 단지 마오의 호소만으로 그렇게 큰 대중적 파급력이 나타났다고 설명하는 것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셋째, 이 접근법은 문화대혁명의 진행과정 중에 마오쩌둥이 통제력을 상실한 측면을 제대로 포착하지 못하고 있다. 특히 1967년에 전개된 일련의 상황에 대해 마오쩌둥은 통제력을 갖지 못하였으며, 사태가 미리 예상했던 과정을 거쳐 전개된 것도 아니었고, 마오쩌둥이 이에 대해 일관된 태도를 보인 것도 아니다. 내부적으로 분열된 대중에 대해 마오쩌둥이 통제력을 회복해 간 것은 대중에 대한 직접적 영향력을 회복한 결과라기보다는 오히려 군의 개입을 통해서였고, 이는 다시 대중 내의 상당한 분열을 초래하였다는 측면 또한 강조할 필요가 있다."(8-9)
3. 진태원, 「국민이라는 노예? 전체주의적 국민국가론에 대한 비판적 고찰」, 『민족문화연구』51호,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2009,
1) 이데올로기에서 대중의 존재론적 우위
"첫째, 이데올로기에서 대중의 존재론적 우월성이라는 관점이 필요하다. 지금까지 살펴본 논자들은 민족주의 및 국민국가를 넓은 의미에서 이데올로기적인 지배와 예속화 메커니즘으로 이해하고 있다. 문제는 그러한 지배와 예속화를 강제에 의한 것으로 이해하든, 아니면 임지현이 특히 강조하는 것처럼 일종의 자발적 예속으로 이해하든 간에(임지현 2005a, 19면), 이러한 관점은 항상 이데올로기를 지배자에 의한 피지배자의 지배와 예속화의 수단 내지 도구로 이해한다. 여기에 전제되어 있는 관점은 피지배 계급 내지 대중은 존재론적ㆍ인간학적 또는 정치적으로 항상 열등하고 수동적이라는 생각이다. 대중들이 자발적으로 동의한다고 해도, 그것은 결국 대중들은 사태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 가운데 우매하게 지배자의 이데올로기적 기만이나 술책에 말려들어간다는 식의 가치 판단을 이미 함축하고 있다. 이 경우 설명이 불가능한 것은 피지배 대중들이 자주 반역을 하고 또 어떤 경우들에는 새로운 역사적 전환 및 민주주의의 진전을 이룩한다는 점이다. 인권선언을 통해 인권과 시민권을 근대 국가의 이념적 기초로 확립한 프랑스 혁명이 그랬고 19세기의 노동운동과 20세기의 여성운동이 그랬으며, 20세기 후반 미국 및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흑인인권운동이 그랬다. 지배 세력에 의한 기만과 조작의 시도들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그 이전에 대중들의 능동적인 저항과 반역의 시도들(적어도 그 가능성)이 항상 존재하기 때문이다.
에티엔 발리바르와 자크 데리다는 각자 최근 저작에서 이 점을 강조한 바 있다. 발리바르는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에 관한 글에서 “내가 보기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히려 ‘이데올로기’의 기능작용 속에서 특권적인 능동적 역할을 피억압자들 또는 피착취자들에게 (적어도 잠재적으로) 부여하는 이유들을 설명하는 것이다.”[에티엔 발리바르, 「비동시대성: 정치와 이데올로기」, 윤소영 옮김, 『알튀세르와 마르크스주의의 전화』, 이론, 1993, 183-84면―강조는 발리바르.] 이것은 다시 말해 지배 이데올로기가 진정으로 지배적인 효과를 산출하기 위해서는 그것은 피지배대중들의 상상계에 뿌리를 두어야 하며 그러한 상상계를 자기 나름대로 구성하고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데리다는 『마르크스의 유령들』에서 유령성, 곧 이데올로기를 모든 사회적 관계가 형성되기 위한 조건으로 제시하면서 동시에 모든 이데올로기, 모든 종교 안에는 대중들의 해방에 대한 열망이 담겨 있음을 지적한다. 그가 ‘메시아주의 없는 메시아적인 것’[자크 데리다, 『마르크스의 유령들』, 진태원 옮김, 이제이북스, 2007, 322-24면 참조.]이라고 부른 것은 이처럼 계시 종교나 이데올로기 일반 안에 존재하는, 그리고 그러한 종교나 이데올로기를 가능하게 해주는 근원적인 해방의 열망, 해방의 경험의 형식을 가리킨다. 이 두 사람이 주장하듯이 이데올로기에서 피지배자 또는 대중의 존재론적 우월성이라는 관점을 택할 경우에만 우리는 국민국가 및 민족주의의 강고한 지배 구조를 해명한다는 구실 아래 국민국가 전체를 전체주의로 획일화하는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다.
4. 자크 랑시에르, 『불화』, 2장 "잘못/왜곡: 정치와 치안" 중
"치안은 그 본질에서 볼 때, 부분들의 몫 내지 몫의 부재를 정의하는─일반적으로는 암묵적으로 남아 있는─법이다. 하지만 이러한 몫이나 목의 부재를 정의하기 위해서는 우선 부분들이 각자 기입되어 있는 감각적인 것의 형세를 정의해야 한다. 그리하여 치안은 무엇보다 행위 양식들과 존재 양식들 및 말하기 양식들 사이의 나눔을 정의하는 신체들의 질서이며, 이 질서는 신체들이 그것들의 이름에 따라 일정한 장소에서 일정한 과제를 부여받도록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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