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1.
블로그의 좋은 점은 굳이 형식을 엄격히 갖추지 않아도 그때그때 떠오르는 생각들을 적어나갈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이고, 나쁜 점은 바로 그 좋은 점 덕분에 생각들을 기록해야 된다는 강박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마구마구 밀리다 보면 그래도 뭔가 찔끔 써보게 되는데 주기적으로 쓰는 이런 메모 포스트와 얼마 전에 쓴 [
Belive와 Trust]라는 게시물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EM님의 포스트를 보고 뭔가 느낀 바가 있어서 정리해 보려고 했는데 결론은 조금은 약간의 우스꽝스럽게 trust가 장수에 유용하다는 데로 나아갔다. 이건 결론이 글의 형태로 명확하지 않은 상태에서 나름 글을 마무리짓기 위해 친 '유머'였는데 과연 이걸 유머로 봐준 사람이 있을지...EM님이 여기에 트랙백을 달아주셨는데 그 때 포스트를 보고 느낀 것들에 대한 명확한 표현을 얻은 것 같아 감사하다.
2.
어제 새움에서는 새사연의 김병권 부소장의 강의가 있었다. 강의의 구성은 한국경제든 세계경제든 현대 경제를 설명하는 데 있어 부채, 그러니까 '빚'이 개념으로서 유용한지를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사태를 통해 논한 뒤, 한국 경제를 (IMF로 인해 친숙한) 국가부채가 아닌 가계부채의 관점에서 설명하는 것이었다. 가끔 강의의 명쾌함과 논의의 성숙함 두 마리 토끼를 잡은 강연을 간혹 볼 수 있는데 어제의 강의가 그러했다. 특히 마지막에 가정을 중심으로 한 십자도를 그리고 기업/국가/자산시장(나머지 한 항이 기억이 안 난다...)과의 관계 아래에서 가정경제를 설명하는 대목은 정말 깔끔했고 지금까지 경제에 대해서 들었던 이런저런 주장들(이를테면 김광수경제연구소의 [위험한 경제학]과 같은)을 머릿속에서 맵핑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지극히 현실적인 견지에서 한국경제의 미래를 설명하는 대목이나, 소득보장과 고용보장을 나눠 요즘 진보적 세력에서는 전자 쪽에 논의가 집중된 것 같다(기본소득을 포함하여)고 평하는 대목도 도움이 많이 되었다. 다만 소득보장과 고용보장의 관계를 너무 독립적으로 보는 게 아닌가 싶었는데 그 부분은 시간이 모잘라 따로 질문을 드리지는 못했다.(이런 코멘트를 할 때 나는 김원태 씨의 주장에 근거하고 있다. 김원태 씨는 [새로운 노동시간정치를 위하여: 총체적 노동시간단축으로서의 기본소득]에서 파업과 같은 고용보장을 위한 기존의 투쟁전략들이 유효성을 가지기 힘들게 된 자본주의의 신자유주의-포스트포드주의 단계에서 기본소득과 같은 소득보장 전략이 고용보장을 위한 노동자들의 투쟁력을 강화시킬 수 있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이 논문에 대한 간략한 정리와 논문 본문에 대한 문의는
여기를 참조하길 바란다.)
이 날의 강연은 현재 녹취 및 정리 작업 중에 있다. 아쉬운 것은 역시나 그리 많은 사람들이 강연에 오지는 않았다는 사실. 기존의 공부와 관련해서 느낀 것은 경제학적 설명이 경제주의적 결정론으로 곧바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것. 어제 강의에서 나는 경제적 구조뿐만 아니라 그 안에서 사는 사람들의 행위나 이데올로기에 대해서 상상해볼 수 있는 소스(source)를 매우 많이 얻을 수 있었다. 어쩌면 이데올로기론 공부에서보다 많이, 그리고 보다 현실적인(주변 사람들의 삶을 떠올리며 납득을 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관점에서.
3.
또 최근에 이론적 편견을 불식시켜 주는 몇몇 텍스트들을 접할 수 있었다. 성실한 이론史 연구들을 볼때마다 느끼지만 많은 경우 내가 가지고 있던 이론적 적대("나는 ...주의적 입장에 반대한다"는 말로 이어지는)는 당파적인 차이에서 비롯된다기보다는 해당 텍스트 자체에 대한 부주의에 기인하는 경우가 많고, 또 내가 지금 열심히 하고 있는 (그리고 마치 역사 속에서 이런 고민을 한 게 내가 처음인 것 같은) 고민들은 이미 이전에 어느 정도 정교한 형태로 진행되었던 경우가 많다. 공자 님의 가르침 대로 읽는 과정과 고민하는 과정은 항상 같이 다녀야 할 필요가 있다.
해당 텍스트들 중 하나만 언급하면 김원태 씨의 서울대 사회학과 석사 논문 [현대 자본주의와 노동패러다임의 재구성-안토니오 네그리를 중심으로]이 그러했다. 나는 '다중'의 개념으로 유명한 네그리는 진지한 사회분석을 결여한 비과학적이고 낙관적인 주체성의 이론가로 주로 인식하고 있었다. 이런 인식에는 비판적인 시선이 전제된 것으로 '우리는 모두 예속의 운명에 처해 있다'식의 비관주의와 엮어서 역사와 사회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일의적인 성격을 부여하거나 평가할 뿐이지 사회 자체의 동학을 기능적으로 설명하지는 못하지 않나 하고 생각도 해보았다. 물론 이런 인식에는 나름 네그리 자신이 후기에 그러한 텍스트적 근거를 제시한다는 데에서, 그리고 한국 사회에서의 네그리 수용이 촛불시위 논쟁에서 볼 수 있듯이 그렇게 받아들여졌다는 데에서 근거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네그리에게는 다른 생산적인 측면이 존재하는데 이 논문은 여기에 초점을 맞추어 네그리의 이론을 노동해방(노동 안에서의 해방 +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이론의 구체화를 위해 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여기서 제시되는 테제들, 이를테면 자본주의 분석에 있어 노동자의 우선성이나 계급구성론이 기술결정론적 노동소멸론에 대해 가지는 비판적인 함의들, 자본의 삶시간을 노동시간화 전략 같은 부분들은 스스로가 너무 앞질러 나갔었구나하는 반성을 하게끔 하는데 충분하고도 남았다. 철학자로서의 네그리가 아니라 사회분석가로서의 네그리라고 해야 되려나...
여튼 이론적 편견을 불식하는 데 있어서나 사회문제들에 대한 이론적 관점을 좀더 분명하게 하는 데 있어서나 큰 도움이 된 논문이었다. 개인적으로는 여기서의 네그리론에 기대어서 촛불논쟁에서의 조정환 씨나 [자유의 의지, 자기계발의 의지]에서 서동진 씨의 네그리론에 대해서 비판을 전개하고, 또 이를 통해서 해당 논자들의 주된 논지 자체가 놓치고 있는 이론적 지점들을 짚어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렇게 또 하나의 포스트가 기약없이 예고되는군...
4.
어제 학생인권조례 관련뉴스에서 고등학교 때 제목만으로 울분을 대신해줬던 책 [인권은 교문 앞에서 멈춘다]의 저자 배경내와 학생인권운동을 한다던 친구의 모습을 보았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분노와 변함없는 그들에 대한 부끄러움과 응원심이 동시에 떠올랐다. 딱히 좁은 의미에서의 (공장)노동자의 자식도 아니었고, 이론적으로 다양한 것을 경험한 뒤 진보적 학문을 공부하자 의식적으로 택하지도 않은 내가 '진보' 비슷한 것들에 친화성을 가지게 된 것은 고등학교 때 교사들의 대화를 거부하는 태도(나아가 학생과 함께 이유와 논거를 따지는 합리적 대화를 한다는 것 자체를 도전과 수치로 여기는 태도)에서 느낀 모욕감과 RATM같이 있어보이는 밴드들을 들었던 데에서 기인한다. 더이상 다른 사람들이 그런 모욕감을 겪지 않았으면 좋겠다. [관련 기사 하나 "무식한 '조중동' 덕에 우리가 떴습니다" [
링크]]
5.
가끔 내가 쓴 글을 다시 보고 당연하게도 '야 이렇게 생각이 나와 잘 맞다니'라고 신기하거나, 나라는 인물이 어떤 일관성을 그래도 가지고는 있구나 하면서 안도하는 때가 있다. 방금 본 지갱프의 소개글이 그런 경우 중 하나이다. [
링크] 중간에 인문학 담론의 자족적 경향과 웹문화의 변화를 연결하는 대목은 너무 간략히 다뤄진 것 같아 아쉽지만 이런저런 일들을 겪은 1년 이상의 기간동안 내 생각은 어떤 핵심을 유지하고는 있는 것 같다.
최근 댓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