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9일]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감시 : 사회철학적 논의를 중심으로 (엄기호) _녹취록

 

감시사회 대강연회 제4강(엄기호) 녹취록

 

□ 일시 : 2011년 5월 19일(목) 저녁 7시

□ 장소 : 여의도 이룸센터 교육실

□ 사회 : 장여경

□ 강사 : 엄기호

장여경

(앞부분 누락) 아마 인권영화제 관심 있으신 분들은 인권영화제로 많이 가신 것 같고요. 밖에서 식사하시는 분도 있습니다. 들어오시겠죠? 우리가 첫 강의에서는 사찰 문제, 사찰 문제, 두 번째 강의에서는 이명박 정부의 문제,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 주변에 특히 이제 국가의 감시 문제에 대해서 살펴볼 수 있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강의, 지난주 강의가 많은 분들이 흥미로워 하셨던 주제였는데 구글이나 페이스북이나 요즘에 인기 있는 상업적인 서비스들의 감시 문제에 대해서 살펴볼 수 있는 시간을 가졌고요.

오늘부터는 조금 이론적이고 어떻게 보면 좀 어렵다고 할 수 있는 저희가 봤을 때는 준비하는 사람들 입장에서 봤을 때 좀 본격적인 논의에 들어가게 됩니다. 특히 이제 감시 문제를 사회철학적 관점에서는 어떻게 설명을 하고 있는지, 그리고 지난 강의 기억하시는 분들 있으시겠지만, 마지막 질문하신 분들이 그런 질문 하셨거든요. 왜 사람들이 감시를 환영하는 것처럼 보이는가? 우리가 감시를 이렇게 우리 사회에 불러들이는 우리의 욕망도 있지 않을까? 그런 얘기를 질문하셨어요. 질문하신 분 안 오셨는데. 그래서 오늘은 그런 문제에 대해서도 좀 살펴보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오늘 사람들이 많진 않지만 우리 엄기호 선생님 박수로 모시겠습니다. (박수)

 

엄기호

예. 다 들리시죠? 꼭 마이크로 해야 할 이유 없죠? 제가 마이크 뭐 하는 걸 별로 안 좋아해가지고. 안녕하세요? 저는 엄기호라고 하고요. 제 전공이 철학이 아니라 가지고 사회철학 전공이라고 되어 있는데 저는 뭐 사회철학적인 것 보다는 약간 사회학이랑 문화인류학 쪽에서 얘기된 것들 중심으로 해가지고 좀 말씀을 드리려고 해요. 다음 시간에 홍성수 선생님이 법적인 관점에서 프라이버시와 이런 문제들을 다루실 거라서 그것의 인문학적인 배경으로서 프라이버시라는 게 왜 중요하게 대두가 되었는지, 그리고 그 중요하게 대두된 프라이버시라는 게 지금에 와 가지고 왜 갑자기 모두가 나의 프라이버시는 별로 안 중요하다, 대신에 나를 좀 안전하게 해 달라, 하는 논의로 이렇게 확 바뀌어버렸는가 하는 것에 대해서 좀 말씀을 드리려고 해요.

우리가 인권이라는 말을 많이 쓰잖아요, 그죠? 그런데 사실 한나 아렌트라고 하는 유대계 독일 출신의, 미국에서 주로 활동을 했었던 한나 아렌트라는 철학자가 있는데, 사회철학자가 있는데 정치철학을 하신 분이에요. 이 양반이 인권이라는 말에 대해서 가장 신랄한 냉소를 날렸던 정치철학자 중에 한 사람이시거든요. 이 사람이 뭐라 그랬냐 하면 결론적으로 얘기하면 세상에 인권 따위라는 건 없다는 거예요. 왜 인권이 없냐면 이 인권이라는 것에서 사람을 의미하는데 사람이 타이틀이 없이 순수한 인간이 되었을 때 그 인간은 아무런 권리를 누릴 수가 없다, 라는 게 그 사람이 발견한 통찰이었어요. 예를 들면은 제가 남자고 대한민국 국민이고 무슨 무슨 대학을 졸업했고 무슨 무슨 학교에서 강의를 하고 있고 이런 타이틀이 제가 죽 있잖아요, 그죠? 이런 타이틀이 있을 때에만 우리는 그 타이틀에 걸맞는 어떤 권리를 가질 수가 있다는 거예요. 만약에 저한테서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국적을 박탈하고 학교 강사라는 신분도 박탈하고 남자라는 것도 박탈하고 다 박탈해 버리고 그냥 순수한 인간, 이것을 발가벗은 인간, 벌거벗은 인간이라고 표현하거든요. 영어로 이제 베어 라이프(bare life)라고 그러는데. bare life, 완전히 헐벗은 인간이 되었었을 때 그 인간에게 무슨 권리가 있느냐, 라는 게 한나 아렌트가 발견한 거죠. 그 당시만 하더라도 이 벌거벗은 인간의 전형이 바로 난민인 거죠. 사실 여러분들 난민촌 가보시면 알겠지만은 난민촌에 무슨 권리가 있어요? 그 사람들 뭐, 유엔 인권선언이라든가 이런 데서 이런 권리 저런 권리 막 다 있다고 이야기를 하지만 그 사람들 뭐 거주 이전의 자유가 있는 것도 아니고 정치 결사의 자유가 있는 것도 아니고 거의 아무런 권리가 없거든요. 다만 이 사람들은 우리가 인권의 주체다, 뭐 이런 막 미사여구와 수사와 이런 걸 얘기를 하지만 사실 이 사람들을 주로 돌보고 있는 데는 유엔에서도 인권이 아니라 인도주의 유엔 난민위원회, 에이치씨알(HCR)이라든가, HCR 맞나, 맨날 헷갈려서, 어쨌든 난민위원회에서 다루고 있거든요. 거기에서는 인권을 중심으로 해서 다루는 게 아니라 인도주의, 휴머니테리언 어시스턴트(humanitarian assistant)라고 하는 인도주의적 도움을 주로 주는 거죠. 인도주의적 도움이란 게 뭐, 아주 기초적인 생활을 유지하게 하는 것이잖아요, 그죠? 그런 기초적인 생활이라고 하는 걸로 보면 난민들이 가지고 있는 겨우 목숨만 부지할 수 있는 요 정도 수준의 삶을 유지하는. 근데 이건 사실 아주 신랄하게 얘기하더라도 이게 무슨 인권이냐 이게 동물들의 권리지, 라고 얘기를 하는 거예요. 인권이라고 그랬을 때 인간의 고상함, 우아함, 존엄함 이거 하고는 아무 상관없고 다만 동물로서의 권리만, 생명만 유지하는 이런 권리를 가지고 있다, 라고 하는 게 한나 아렌트가 발견했던 통찰 중의 하나였어요. 그러면서 인권이라는 것은 결국은 시민권이다, 시민권이 아닌 인권이라는 게 어디 있냐, 라고 하는. 즉 시민이 되는 경우에만 권리를 가질 수가 있다는 거죠. 사실은 참 맞는 얘기죠. 한국 국민이기 때문에 대한민국 국민이고 대한민국 시민이기 때문에 우리가 대한민국이라는 헌법이 보장하는 테두리 안에서 권리를 가질 수가 있는 거고. 대한민국이라고 하는 이 국체가, 국가정체, 정치체, 이 국체가 다른 나라들하고 맺은 협약으로서의 국제법, 그 국제법의 보호를 받을 수가 있게 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제 인권이란 말은 사기다, 한마디로 표현하면, 이런 식으로까지 좀 극단적으로 얘기하면 말씀드릴 수가 있는 거예요. 그렇다면 시민으로서의 권리라고 봐야 되는데 그럼 이 시민으로서의 권리가 뭐냐? 해서 제일 중요한 게 누가 시민이냐는 거거든요. 이게 아주 핵심적인 얘기가 될 수밖에 없는. 오늘 우리가 얘기하는 감시사회라고 하는 것과 관련해 가지고 그냥 직결해 가지고 바로 얘기하면 시민권의 출발이 어떻게 보면은 프라이버시에 대한 권리라고 얘기를 할 수가 있는 거예요.

우리가 뭐 시민권이라고 하면 정치에 참여할 권리, 무슨 권리, 무슨 권리 이렇게 얘기하지만 애초에 출발 자체를 좀 확대해 가지고. 제 얘기가 아니라 프라이버시의 권리라고 하는 책을 쓰신 이진우 선생님이라든가 이런 분들의 주장에 따르면, 애초에 이게 프라이버시에 대한 권리였다는 거예요. 이게 왜 그렇게 되는 거냐 하면 시민이 무엇인가, 했었을 때 이 시민의 핵심은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사람이라는 거예요.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개인이죠.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개인, 자기의 생각을 가지고 판단을 하고 그 판단을 가지고 어떤 정치에 참여하거나 아니면 나한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결정하거나 어떤 사람들하고 협상을 하거나 할 수 있는 사람 있잖아요? 그런 사람들. 이런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개인이라고 하는 게 시민의 전제가 되어져 있어요. 만약에,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투표하러 가 가지고 누가 돈 줘 가지고 돈 받아 가지고 가서 투표하면 안 되잖아요, 그죠? 왜 안 되냐 하면 내가 돈 받아 가지고 투표한다는 건 타율적인 거잖아요? 썩은 거잖아요? 썩었다라고 표현을 하잖아요. 전혀 자율적이지도 않고 독립적이지도 않다는 거예요. 대전제가, 우리가 말하는 인권, 시민권이라고 하는 것에서 대전제가 뭐냐 하면 바로 이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개인이라는 것. 이게 전제가 돼야 되는. 이게 전제가 되기 위해서는 다른 이 신분제도가 철폐될 수밖에 없었던 거예요. 신분제도 하에서는 모두가 다 시민이 아니라 신민이었죠, 그죠? 왕국의 신민이었다, 라고 얘기를 한단 말이에요. 그래서 이 신민들 모두가 시민이 되는 조건 하에서만 사실은 인권이든 시민권이든 이런 개념이 성립할 수가 있었던 거죠. 그래서 그러면 이 시민들이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개인이 된다는 건 무슨 말이냐 하면, 이것과 관련해 가지고 굉장히 재미있는 미시사를 전공했던 인드부르크(Carlo Ginzburg)라든가 이런 사람들이 쓴 재미있는 책들이 있어요. 영화로도 있는데 <마틴 기어의 귀향>(Le Retour De Martin Guerre)이라는 영화가 있거든요. 그게 그 프랑스의 미시사 전공하는 사람이 쓴 책 제목이에요, <마르탱 게르의 귀향>(The Return of Martin Guerre)이라고. 그거라든가 아니면 <구더기와 치즈> 이런 책들을 보면 비로소 그 이전까지는 세상이 어떤가, 이런 거에 대해서 내가 마음대로 생각할 자유가 없었어요. 그런데 그 <치즈와 구더기>를 보면은 되게 재밌는 게 그 방앗간인가 그 주인이 마녀재판에 회부되어 가지고 마녀재판을 당하거든요. 나중에 결국은 죽는데. 그 사람이 뭐라고 주장을 하냐 하면은 우주는 치즈 안에서 치즈가 부글부글 끓어 가지고 구더기가 생기는 것처럼 그런 식으로 우주가 탄생했다, 라는 것을 이 종교재판관들 앞에서 계속 주장을 해요. 근데 이건 이제 그리스도교 율법이라든가 교리라든가 정면으로 어긋나는 일이잖아요, 그죠? 그런 식으로 이전에는 교회가 이렇다, 이렇다, 라고 애기하면은 맹목적으로 전혀 자율적이지도 독립적이지도 않게 무조건 받아들여야 됐던 거죠. 근데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개인이 된다고 하는 거는 내 인생에 대해서 또는 우리 사회에 대해서 크게는 이 우주에 대해서 자기 나름의 판단을 가진다는 뜻이 되는 거예요. 근데 이 마녀재판을 당하면서도 이 사람이 전혀 교회가 가르쳐주지 않았던 그런 뭐 치즈 안에서 구더기가 끓어가지고 끊는 것처럼 우주가 만들어진다, 라는 자기 나름의 독창적인 우주관, 이걸 주장할 수가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이제 그 재판관이 너는 도대체 어디로부터 그런 생각을 했냐, 이러면서 끊임없이 배후가 누군가를 캐물어요. 우리 왜 끌려가면 도대체 배후가 누구냐, 이런 식으로 캐묻는 것처럼. 대부분 그렇게 끊임없이 캐묻는데 이 사람이 뭐라 그러냐면, 아니 나는 그냥 이 책 보고 저 책 보고 하다보니까 내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는 거예요. 그 당시 이제 출판물들이 많이 돌아다니고. 그런 것들을 보고 자기 나름대로 우주에 대한 관을 가지게 된 거죠. 마찬가지로 이 <마르탱 게르의 귀향>도 보면 별로 이렇게 친하지 않은 남편인데 남편이 실종이 돼요. 군대를 갔나 어쩌고 실종이 됐는데. 딴 놈이 나타나 가지고 내가 네 남편이다, 라고 주장을 해요. 알고 보니, 나중에 추측하기로는 부인이 이 사람이 자기 남편이 아니라는 걸 알아요. 아는데 같이 살아요. 같이 살다가 나중에 진짜 남편이 돌아오거든요. 그래가지고 재판이 벌어져요. 그런데 이 여자가 난 몰랐다, 난 사기 당했다, 이렇게 주장을 해요. 근데 이게 근대 사회에서 되게 중요한 자료로 쳐 지는 게 뭐냐 하면 여자가 처음으로 자기의 인생을 선택한 걸로 나온다는 거죠. 그 이전에는 여자가 자기 삶을 기획한다는 게 불가능하잖아요, 그죠? 그런데 저 놈이 내 남편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 그쪽 남편도 이 남편이라고 주장하는 사기꾼이 굉장히 능글능글하면서, 뭐 기록에 보면은 되게 잘해줬대요. 그러니까 진짜 남편이 아니면 어떠냐, 나한테 잘해주는데. 이래가지고 같이 산 것처럼 되거든요. 그게 무슨 말이냐 하면 삶이라고 하는 것을 비로소, 이전에는 운명이라고 받아들였었는데 사람들이, 이건 운명이잖아요, 지금. 내가 방앗간집 딸로 태어났으면 옆집 방앗간집 아들과 결혼해야 되는 것, 이게 운명인데 그런 운명으로 삶을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내가 기획할 수 있는 어떤 것으로, 인생이라고 하는 게 드디어 기획의 대상이 되어 버린 거잖아요. 그 기획의 주체가 누구냐 하면 개인, 나인 거죠. 그런데 이 나가 인생을 이렇게 기획을 하려면 반드시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존재가 되어야지만 내 인생을 기획할 수가 있는 거잖아요, 그죠? 자기 인생을, 이걸 우리가 이제 생애사라고 그러는데, 생애사적 기획을 인간들이 하기 시작을 하는 거예요. 자, 이렇게 생애사적 기획을 하려면 어때요? 나의 판단이 있어야 되겠죠, 그죠? 내 판단 없이 남이 시키는 대로 했었을 때 그거를 우리가 자기 기획이라고 얘기를 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러다 보니까 이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개인이라고 하는 존재는 어떤 처지에 있냐 하면, 이게 세계 내지는 외부라고 합시다. 외부가 있고 나, 이 개인이죠?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개인이라고 하는 나가 있으면은. 이전에는 교회가 이거 뭐 교회라고 치면은 교회가 시키는 대로 다 받아들여 가지고 생각을 해야 되잖아요, 이건. 그런데 자율적이고 독립적이라는 건 뭐예요? 얘가 시키는 대로 안하는 거잖아요, 그죠? 그렇게 되면 나는 이 세계와 항상 어떤 상태에 빠져야 되냐면 불화 상태에 빠져 있어야 돼요. 내가 이 세상이 시키는 대로 막 따라하는 건 중세 때에는, 중세 때의 교양이라고 하는 건 교양 있는 사람, 우아한 사람, 고상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사회가 시키는 대로 사회의 윤리, 사회의 에티켓, 그걸 그대로 받아들인 사람 있잖아요? 이런 사람을 고상한 사람이라고 했는데. 헤겔도 그런 얘기를 하지만은. 오히려 근대에 넘어와 가지고 이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주체가 되려면 끊임없이 의심을 해야 되는 거예요. 저것들이 나한테 무슨 지금 사기를 치려고 하는 것은 아닌가? 쟤가 지금 뭐 인간은 이렇다, 라고 얘기 하는데 그게 정말 인간이 그런 건가, 저 새끼가 지금 나한테 사기를 치고 있는 건 아닌가, 이런 식으로 끊임없이 의심하고 불화해야 되는. 이 의심이 그 유명한 데카르트가 말한 의심하는 주체,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있잖아요? 거기에서 방법적 회의니 뭐니 하는 이 의심이라는 게 필연적으로 나올 수밖에 없는 거죠. 의심하지 않는 사람은 주체가 아니에요.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주체가 아닌 거죠. 시키면 네, 하고 쫓아가고. 우리 왜 그 또 중고등학교 때 선생님 시키는 대로 다 하는 애들 제일 재수 없어 하잖아요. (웃음) 저 새끼 저거는 선생님 시키는 대로 다하고 앉아 있고. 똘마니, 꼬붕이라고 불렀던 것 중에 하나가 주체가 아니라는 거죠. 오히려 반항하는 애들, 이런 애들 약간 좀 멋있어 하고 <말죽거리 잔혹사>에 나오는 그런 애들 보면 되게 멋있어 하는 이유도 우리가 그걸 굉장히 중요한 미덕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가능한 이야기가 되는 거거든요. 그래서 항상 이렇게 불화상태에 빠져 있어야 돼요. 이렇게 내가 불화상태에 빠져 있을 때 비로소 내가 뭐가 되냐면 진정한 인간이 되는 거예요. 우리 되게 좋아하는 진정성 있다, 이번에 학생들하고 <나는 가수다>를 가지고 이제 토론을 쭉 하고 있는데 왜 <나는 가수다>에 열광을 하냐, 했더니 애들 학생들 중에 그렇게 얘기하는 애들 있어요. 자기 막 <나가수> 볼 때 몰랐는데 다 보고 났더니 옆에 휴지가 이만큼 쌓여 있더래요. 감동 받아 가지고 너무 울면서 계속 이렇게 휴지로 눈물을 닦았는데 몰랐대요, 완전히 몰입을 해 가지고. 그래서 나중에 보니까 휴지가 이만큼 쌓여 있더라면서 어쩌구저쩌구 하는데. 걔네들이 이 <나가수>에 나오는 임재범이라든가 이런 사람들의 노래 있잖아요? 그걸 보고 정말 이제까지 내가 듣던 건 노래가 아니었다, 아이돌 노래가 그것도 노래냐, 쓰레기다, 막 이런 식으로 글을 쓰면서 임재범이야말로 진짜 진정한 노래다, 라고 말 할 때 진정한 노래라고 하는 그 진정성 있잖아요. 이게 어떻게 만들어지는 거냐, 이 진정성이라는 게. 오로지 세상과 불화할 때만. 세상에 너무 이렇게 딱 달라붙어 사는 사람을 우리가 진정한 존재라고 안 부르죠? 그런 존재를 속물이라고 하잖아요, 속물. 속물이라고 한단 말이에요. 세상에 너무 막 그대로 하는 사람들을. 속물이 아니라 진정한 존재가 된다는 것은 이렇게 끊임없이 불화 상태에 빠져 있을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근데 약간 여담이기는 한데 정말로 진정한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진정성이라고 하는 걸 극단까지 밀어붙이는. 자살할 수밖에 없어요. 세상과 끝끝내 불화하게 된다면 숨 쉬는 것도 사실은 일종의 타협이잖아요. 저도 뭐 지금 여기 지갑 있잖아요? 자본주의랑 타협하고 있는 증거잖아요? 그지 않아요? 제가 지금 아이폰 쓰고 있는데 이거 우리 스티브 잡스의 감시 네트워크에 제가 제 발로 종속되어 가지고 그냥 살아간다는 증거. 제가 나중에 죽어 가지고 심판 날에 가서 너는 어떻게 살았느냐 하면, 보니까 너는 뭐 다 항복하고 살았네. 잡스한테 항복하고 자본주의에 항복하고 감시사회에 항복하고. 항복하고 살았다는 증거물 밖에 안 되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진정한 존재가 된다, 라고 하면 이건 죽을 수밖에 없어요. 죽는 것도 맞아 죽는 게 아니라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때 우리가 비로소 진정한 존재가 되는 거예요. 사실 여러분들이, 이 진정한 존재의 대표 어떤 사람들이 있어요? 7~80년대의 열사들. 그 다음에 그 누구냐, 가수 중에 요절한 애. 김현식. 그런 사람들 볼 때 인생이 어떻고 삶에 대해서 새롭게, 어떤 카타르시스가 느껴지는 비장함, 이런 것들이 있잖아요. 그 누구지? 집 떠나와, 노래 부른 사람. 김광석. 이런 요절한 사람을 볼 때 우리가 갑자기 옷깃이 여미어지고, 이런 것 중에 하나가 우리가 그 안에서 뭘 보느냐 하면 진정성이란 걸 보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런데 이 진정성은 다시 말하지만 어디로부터 나오느냐 하면 이 세상과의 불화라고 하는 걸로부터 나올 수밖에 없는 거죠.

근데 그러면 이것이 왜 프라이버시 문제와 연결이 되는가, 하면 이 진정성의 공간은 세상 안에 있을 때는 도저히 찾아질 수가 없는 거예요. 아까 말씀드린 것, 세상 안에 있는 동안에 저 주민등록증, 국가와 타협했죠. 신용카드, 자본과 타협, 금융자본 그냥 자본도 아니라 금융자본과 타협했죠. 오만 것들이랑 타협했다는 증거물들만 여기 다 가지고 있는 거잖아요, 그죠? 그렇기 때문에 세상 안에 들어가 가지고는 우리는 끊임없이 타협하고 협상하는 존재가 될 수밖에 없어요. 숨 쉬고 살아가려면. 그런데 그게 아니라 정말로 진정한 존재, 내가 불화하기 위해 가지고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물러나야 되는, 그죠? 완전히 물러나야 되는 거죠. 진짜 완전히 물러나면 가시는 거고, 그 정도까지 가는 게 아니라 물러나야 되는데. 물러나서 내가 정말 누구인가, 그리고 나는 정말 무엇을 내 인생에서 어떻게 살아가고자 하는 것인가, 하는 걸 생각하는 그 공간, 그 공간을 내면이라고 부르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속물들, 내면이 없는 인간들을 우리가 제일 경멸하잖아요, 그죠? 이 사람 만나면, 아 이것도 맞는 예기네, 저 사람 만나면 그것도 맞는 얘기네, 저 사람 만나면 또 그것도 맞는 얘기네. 이건 둘 중에 하나죠. 속물 아니면 진짜 득도한 사람. 별로 이게 진짜 득도한 사람일 가능성은 별로 없는 관계로 속물에 가깝겠죠, 그죠? 그렇게 우리가 내면이라고 하는 것을 대단히 중요시 여기는 거고 시민이 된다는 것의 핵심,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개인이 된다는 것의 핵심이 뭐냐면 내면을 가지고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이 내면이 다른 말로 하면 프라이버시에요. 이게 왜 프라이버시냐 하면 내가 막 대단히 도를 닦고 영성이 충만하고 고도의 인내력을 가지고 이러면 예를 들면 제가 국민학교 3학년 때까지 단칸 셋방에 살았는데, 단칸 셋방에 살면서도 ‘옴’ 하면서 앉아 있으면 제 내면의 세계를 찾을 수가 있겠죠. 그런데 그게 아니라 그냥 내가 애초부터 그런 데서 태어났다 하면, 한 방에 요만한 방에 다섯 명 여섯 명 살면서 거기서 내면의 세계를 찾기가 과히 쉽지는 않잖아요, 그죠? 그렇기 때문에 이 내면의 세계를 가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뭐가 필요하냐 하면 자기만의 공간이 필요해요. 그리고 이 자기만의 공간은 나의 왕국이에요. 거기선 내가 왕이죠, 그죠? 여러분들 이제 집에 가 가지고 각자 방들이 만약에 있으시다면 그 방에 들어가는 순간 여기는 제 방이죠, kingdom of 기호, 기호의 왕국인거죠. 아무도 아무도 간섭을 할 수 없고 간섭을 해서도 안 되고. 거기에 뭐 이명박 아니라 이명박 할아버지가 온다고 그러더라도 니 뭔데 남의 집에 이렇게 함부로 기어 들어오느냐, 라고 내가 버럭 화를 낼 수가 있는 거잖아요, 그죠? 그건 왜 그러냐 하면 이 자기만의 공간이라고 하는 즉 내면이 있기 위해서는 이거의 물질화된 형태가 이 자기만의 공간이거든요. 자기만의 공간은 나의 왕국이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사실 우리가 공화제 국가를 살아간다고 하지만 공화제 국가라고 하는 건 아주 잘게 쪼개 보면 개인들의 왕국의 연합체에요, 일종의. 시민이라고 하는 각각의 왕국, 자기 방 안에 있는 왕국들이 나의 왕국을 지키기 위해 가지고 그래 너도 왕이구나, 나도 왕이다. 너도 집에 가면 네가 왕, 나도 집에 가면 내가 왕. 그러니까 이 왕국들을 지키기 위해서 서로 서로가 왕국을 간섭하고 개입하지 못하는 룰로 하려고 하다보니까 우리를 막 다 간섭하는 왕, 걔는 없어져야 되겠거든요. 확 죽여 버리고 공화제라고 하는 걸 만들어 놓은 거죠.

자, 그런 것처럼 자기만의 공간이 있을 때만이 우리가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개인이 될 수 있고 그럴 경우만 시민이 될 수가 있는 거고 이 시민이 아까 이 시민이란 게 인권의 기본적인 정체가 되는 거예요. 이렇기 때문에 근대 초창기에는 소유가 없는 사람들에게 투표권을 안줬어요. 너무 당연한 귀결이었어요. 왜냐하면 소유가 없다는 건, 그 소유는 특히 부동산이거든요, 집. 다른 말로 인두세 내고 이런 것 있잖아요. 소유가 없으면 자기만의 공간도 없는 사람이고 자기만의 공간이 없는 사람은 내면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누가 돈 주고 투표하라 그러면, 감사합니다, 고무신 두 켤레, 막걸리 몇 개 이런 걸로 부정투표 있잖아요, 하는 것처럼 타락하기 쉬운 인간들이라고 생각한 거죠. 오로지 자기 소유가 있는 사람만이 그 소유를 지키기 위해서 정치를 할 자격이 있다, 이렇게 바라본 것이거든요. 이런 식으로 본다면 우리가 생각하는 인권이라고 하는 것, 시민권의 핵심은 결국은 뭐냐 하면 내 내면을 지키기 위해서 그 누구도 나의 프라이버시라고 하는 것을 침해해서는 안 된다, 이런 걸로 귀결이 되는 거예요. 이것은 진보적인 사람이건, 진보적인 사람이라고 해서 권리의 문제를 다 소유의 문제로 돌리고 하는 것에 대해서 반감을 가진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근대인권의 대전제로 설정이 되어져 있는 거예요. 그래서 결국은 자율적이고 개인적인 독립적인 존재가 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 이게 프라이버시인 거고. 프라이버시라고 하는 건 가장 핵심적인 것은 영역의 문제가 있는 거예요. 우리 방, 내 집, 또는 또 하나가 뭐예요? 정보. 내 고등학교 때 성적, 뭐 내가 어저께 어디를 갔는가 하는 거 있잖아요. 가장 중요한 건 이 영역과 정보라는 것이 내 허락 없이 아무나 함부로 액세스하거나 함부로 침해해서는 안 된다, 라는 게 가장 기본적인 겁니다. 이게 우리가 뭐 인권 되게 고상하게 어쩌고저쩌고 얘기하지만 이거를 떠나 가지고는 설명을 할 수가 없어요. 그렇기 땜에 약간 좌파적인 분들은 기분 나쁘겠지만. 인권의 핵심은 소유권이에요. 프라이버시 권리의 핵심도 소유권이에요. 이게 내 소유이기 때문에 내 모든 내 소유인 거고, 내 기록들은 나의 소유이기 때문에 내 소유를 딴 놈들이 딴 사람들이 함부로 침해해서는 안 된다는 뜻을 가지고 있거든요. 그래서 사실 좀 급진적인 인권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소유권 바깥에서 인권이라고 하는 것, 권리라고 하는 것, 어떻게 재정의할 것인가, 하는 게 굉장히 중요한 문제로 나설 수밖에 없습니다.

자, 그런데 이 프라이버시라고 하는 것이 이렇게 중요해가지고 죽 전개해져 왔죠, 왔는데. 여기에 대대적인 변화를 가하는 사건들이 벌어지기 시작하는 거예요. 자, 그게 뭐냐 하면 사람들이 갑자기 내가 프라이버시가 되게 중요하다, 라고 생각을 하죠, 그죠? 프라이버시가 중요하다고 생각을 하면서도 이 프라이버시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 내 프라이버시가 무너질지도 모른다, 라고 하는 공포감에 시달리게 되는 거예요. 그 전에 잠깐 말씀 더 드리면 프라이버시를 침해하는 국가권력이란 게 두 종류의 국가권력이 있을 수 있어요. 하나는 조지오웰의 <1984>나 <동물농장> 이런 데서 나오는 것처럼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전체주의. 즉 프라이버시 자체를 말살해 버리는 거죠. 아예 프라이버시 자체를 완전히 말살. 게슈타포라든가 아니면 뭐 비밀경찰 이런 사람들이 아무데나 막 들어가지고 마구 마구 내 권리를 침해하게 되는 거 있잖아요. 이런 게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전체주의 정권이에요. 그런데 대부분 이 전체주의 정권의 이런 그 프라이버시 말살 정책은 실패하는 경우가 많아요. 왜 실패 하냐 하면 사람들이, 이게 되게 재미있는 일이 벌어지는 건데, 이렇게 전체주의적으로 침해하게 되면 사람들이 아, 예, 하는 경우가 많아진다는 거예요. 대표적으로는 이런 식으로 볼 수가 있어요. 우리 집이, 이거 되게 유명한 얘긴데, 독일에서 우리 집이 식료품점을 한다고 생각해봐요. 우리 집의 벽을 동독의 구호로 도배해 버리는 거예요. 사회주의는 위대하다 자본주의는 물러가라, 이런 것 있잖아요. 막 도배를 해 놓으면 사람들이 참 충실한 공산주의자시군요, 이러면서 간섭을 안 한다는 거예요. 그 안에 들어가서 그 사람을 보고 사회주의가 뭐예요, 라고 이렇게 물어보면, 사회주의가 뭐냐 물어보면 저, 관심 없는데요, 라고 얘기하는 거죠. 그럼 왜 이렇게 붙여 놨느냐, 물어보잖아요. 물어보면 뭐라 그러냐 하면 아, 이러면 안전하기 때문에 붙여 놓는 거다, 라고 얘기를 해요. 이러면서 전체주의적으로 프라이버시를 공격했을 경우에 아주 대표적으로 나타나는 게 뭐냐 하면 공적영역과 사적영역이 완전히 이원화해버리는 현상이 벌어지는 거죠. 그러면서 많은 사람들이 공적영역에서 뭘 하느냐 하면 연극을 하기 시작해요. 거기서 완전히 충실한 이 사회주의자인 것처럼 내지는 충실한 나치인 것처럼 막 하고. 이것도 예를 들면 이슬람 무슬림 같은 경우도 어떻겠어요? 이란 같은 경우가 되게 심각한 문제가 있거든요, 이런 문제. 밖에 가서 알라 알라 하면서 이렇게 살아요. 그래서 얼마 전에 제가 인류학회에서 발표하는 데를 갔는데 너무 재미있었는데. 밖에서 알라 알라 알라 이러다가 집에만 오면 홀딱 벗고, 그 젊은 애들이 뭐냐 이, 파티를 하는데 거의 헐벗어서 파티를 하고 있더라고요. 빤스만 입고 다 막, 술 먹고 난장판이에요. 그리고 근데 그 난장판을 벌이다가 떴다 이러면, 온 몸을 그냥 차도르로 휙휙 감아 가지고 다니는 거죠. 자, 이런 식으로 사실 동독에서도 그러고 소련에서도 그러고 지금 이란에서도 그러고 이런 식으로 공과 사라는 것이 이분화 되어 버리면 이 사적영역을 공적영역이 침해하기가 굉장히 힘들어요. 왜냐면 이 사람들이 알거든요. 공적영역에서는 어떻게 움직여야 되는가. 그러다 보니 초창기에 요번에 2년 전에 이란에서 대통령선거 있었잖아요 대통령선거 때 그 반대파들, 개혁파들이 데모할 때 외쳤던 구호가 신은 위대하다예요. 그 어떻게 잡아가겠어요, 알라는 위대하다는데. 그게 신정국가의 모토잖아요. 신정국가에서 사람들이 데모하면서 외치는 구호가 신은 위대하다. 그리고 너네 모여서 데모하지 마, 그러면 집에 다 흩어져 가지고 집 안에 앉아 가지고 한 집에서 알라는 위대하다, 그러면 옆집에서 받아서 알라는 위대하다, 그러고 계속 알라는 위대하다, 알라는 위대하다, 그런 식으로 데모를 했다고 그러거든요. 그러니까 이건 잡아가려고 하면 알라가 위대하다고 그러는데 왜 나를 잡아 가냐, 라고 얘기하는데. 그 알라는 위대하다는 그 말속에 담겨 있는 함의가 완전히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는. 이게 전체주의적인 방식.

두 번째 방식이 뭐냐 하면 완전한 투명사회를 만드는 거예요. 이 투명사회라고 하는 게 민주주의에요. 권력을, 권력이 움직이는 것을 완전하게 투명하게 만들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국가권력이나 이런 걸 감시를 철저히 하고 어쩌구저쩌구 하면은 이게 국가가 우리의 프라이버시를 침해하지 못할 거다, 라고 생각을 했었는데. 사실은 지난 시간에 최철웅 씨가 판옵티콘이랑 이런 저런 얘기를 아마 했을 거예요. 이 투명한 사회, 민주주의의 결과가 뭐로 귀결이 되는가 하면 판옵티콘으로 귀결이 되는 거죠. 왜냐하면 걔네들이 안 보이면서 국민의 자발적인 동의를 받아 가지고. 우리도 왜 씨씨티비(CCTV) 엄청나게 깔려 있잖아요, 그죠? 이런 식으로 CCTV를 깔기 시작하면 이거는 전체주의와는 완전히 다른 양상으로 이야기가 전개가 되기 시작하는 것이거든요. 이거는 싸워가지고 없애기가 되게 쉬워요. 그런데 얘는 굉장히 힘든데. 왜냐면 우리 스스로가 자발적으로 헌납해 버린 것이거든요. 왜 이런 식으로 이런 역설, 투명한 사회를 만들고 민주주의를 만들고 이러면은 당연히 우리 프라이버시가 더 보호될 줄 알았는데 이게 더 투명해지면서 문제가 만들어지는 이런 역설이 벌어졌는가, 하는 것을 아주 잘 보여주는 게, 제가 사실 이 단어를 되게 싫어하는, 쓰기 싫어하는데 어쩔 수 없이 사용할 수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이런 정치제도를 설명하는 거기 때문에. 그냥 신자유주의라고 하는 이 체제의 등장과 함께 이게 아주 가속화되기 시작을 하거든요.

자, 이 신자유주의라고 하는 걸 이해하기 위해서 신자유주의 이전을 아셔야 하는데 신자유주의 이전의 자본주의를 케인즈주의, 대부분은 이제 복지국가, 내지는 케인즈주의라고 얘기를 할 수가 있어요. 케인즈주의와 신자유주의 이후에 국가의 역할이라고 하는 게 180도로 달라지거든요. 저의 얘기가 아니라 지그문트 바우만이라고 영국의 사회학자가 하는 말인데요. 케인즈주의 때에는 국가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일자리를 만드는 거였어요. 그리고 일자리를 가지지 못한 사람들 일자리로부터 탈락한 사람들 있잖아요? 그 사람들을 위해 가지고는 복지제도를 제공하는 게 가장 중요한 국가의 기능, 그리고 역할이었거든요. 이거를 다른 말로는 어떻게 표현하느냐 하면 국가의 가장 큰 역할은 시장으로부터 시민을 보호하는 것이었어요. 시장이라는 것이 기본적으로 규제가 되지 않으면 일자리를 더 만들려고 하지도 않고 복지를 더 하려고 하지도 않고 그러잖아요, 그죠? 그러니까 국민들을 보호하고 국민들을 무엇으로부터 보호하려고 하는가 하면 시장으로부터 보호해야겠다. 그래서 시장을 규제하고 시장에 여러 가지 제약을 걸고 이러 이러한 역할들을 하는 게 그 케인즈주의의 역할이었다고 볼 수가 있어요. 그런데 이건 뭐 역사시간이나 이런 게 아니니까요, 중간과정 생략. 여차여차여차 해 가지고 케인즈주의가 위기를 겪게 되거든요. 케인즈주의가 위기를 겪게 되면서 신자유주의로 넘어오는데 신자유주의는 다른 말로 하면 우리 지금 이명박정권이 전형적인 신자유주의 정권이라고 보실 수, 전형적이지도 않아요, 아주 천박한 진짜 그 신자유주의 정권인데. 신자유주의라는 말이 민망할 정도로 무식한 정권이에요. 꼭 이런 토를 달아야 돼요. 안 그러면 사람들이 진짜 그 신자유주의인줄 착각을 하기 때문에. 이건 다른 말로 하면 시장 근본주의에요. 뭐든지 시장의 자유에 맡겨야 된다, 라고 주장을 하거든요. 시장근본주의라는 건, 여기에서 제일 중요한 게 뭐겠어요? 여기는 시장으로부터 시민을 보호하는 거잖아요. 여기는 시장을 보호하는 게 가장 중요한 과제가 돼요. 시장 자체를 보호하는 게 중요한 것이지 시장으로부터 시민을 보호하는 게 중요한 과제가 아니게 되는 거죠. 자, 그러면 이렇게 시장을 보호하는 체제가 되다 보니까 원래 국가와 시민이라는 둘 사이의 관계는 어떻게 설정해야 될 것인가, 이게 되게 애매하잖아요, 그죠? 그죠? 그러다보니까 국가가 왜 필요하냐, 도대체 이 국가가 왜 필요하냐, 해가지고 국가를 축소해야 된다, 시장주의자들 중심으로 해가지고 이제 이러저러한 얘기들을 되게 많이 하게 되는 거죠.

이때쯤 되어 가지고 국가가 자기 밥그릇을 새로 찾기 시작해. 이전에는 국가의 밥그릇이 뭐였어요? 일자리와 복지 만드는 거, 이게 국가의 밥그릇이었잖아요, 그죠? 이제 이 상태로 넘어가니까 국가가 새로운 밥그릇을 찾아야 되는데, 그 밥그릇의 이름이 뭐냐 하면 안보에요. 우리 사회가 위기에 처해 있다, 그리고 여러분 각자 각자의 삶이 지금 위험과 위기에 처해있다, 그렇기 때문에 저 적들로부터 우리를 보호해야 된다, 그죠? 이러한 이데올로기와 이러한 생각이 유포되기 시작하죠. 자, 여러분들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들 불안하지 않으세요, 사는 것. 이게 아예 그 바닥에 내려가면 불안하지도 않아요. 어차피 세상 그렇지 뭐, 이러고 사는데. 지금 대학생들은, 대학생들 취직이 안 되잖아요. 대학생들은 대학생들대로, 제가 농담처럼 이런 얘기를 하는데. 유치원 다닐 때는 초등학교 좋은 초등학교로 가기 위해 가지고 유치원 다니는 애들도 위염 걸리고. 국민학교 가면은 국제중학교 가야 되기 때문에 경쟁하다가 위염 걸리고. 국제중학교 가고 나면은 특목고를 가야 되기 때문에 위염 걸리고. 특목고 가면 서울대를 가야 되니까 위염 걸리고. 서울대 가면 정규직이 되기 위해서 위염 걸리고. 정규직이 되면 어떻게든 명예퇴직을 안 당해야 되기 때문에 위염 걸리고. 이런 식으로 우리는 생애사 전체가 위험과 이런 것에 노출되어져 있잖아요, 그죠? 너무 재밌는 게 과학기술이라는 게 우리 시대만큼 발달한 때가 없었겠죠? 인류의 역사에서. 그런데 이 횡행하고 있는 이 재난 영화들. 자연재해. 이걸 보면서 엄청 삶이라는 게 불안하다고 생각을 하고 있잖아요? 아시는 것처럼 이번에 일본에 왔던 쓰나미, 지진이 얼마였죠? 지진강도가? 9.2인가 그랬잖아요? 작년에 일본에서 영화가 지진과 관련된 영화가 하나 만들어졌는데 그 영화가 8.0이 오는 걸 전제로 해가지고 영화를 하나 만들었어요. 그래서 그 영화 개봉되고 나서 일본에서 어떤 평가를 받았느냐면 이보다 더 리얼할 수는 없다, 진정한 재난영화의 상륙, 뭐 이제 이런 식으로 광고를 했대요. 1년 만에 9.2가 진짜 이렇게 찾아와 가지고 사람들이 뭐라고 평가를 하느냐 하면 언제나 현실은 사람들의 상상력보다 더 상상력을 가져다 준다, 라는 얘기를 하거든요. 자, 그런 것처럼 자연재해, 아니면 자연재해건 아니면 또 묻지마 살인, 이런 것 불안하잖아요? 여기 여성분들 같은 경우에는 밤에 한 12시나 이런 때 집에 들어가기 굉장히 불안하죠? 학교는 또 어때요? 제가 볼 때는 여자아이를 자녀로 가지고 있는 분들 같은 경우는 온 세상이 흉기라고 생각하기 딱 좋잖아요, 그죠? 그런 식으로 우리 삶 전체가 이전에는 뭐였었냐 하면, 제가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개인의 최고 목표가 뭐였어요, 생애라고 하는 걸 기획하는 거였잖아요? 자, 삶을 기획하기 위해서, 이게 아주 핵심적인 건데, 삶을 기획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게 뭐냐 하면 삶이 계획이 되어야 된다는 거예요. 기획이 되려면 계획이 되어야 된다는 거예요. 우리 삶을 계획하려면 가장 필요한 게 뭐냐 하면 삶이 예측 가능해야 돼요. 인간의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존재가 되는 근거는 우리의 삶이라고 하는 게 우리의 미래라고 하는 게 예측 가능할 때만 그 예측되는 거에 따라 가지고 내가 내 삶을 기획할 수가 있겠죠? 이렇게 예측 가능할 때 우리 삶, 내 삶이라고 하는 건 지속가능한 상태가 되는 거예요. 요게 한 묶음이에요. 기획 가능한 것, 계획 가능한 것, 예측되어야 되는 것, 지속가능한 것, 이게 한 묶음으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에 인간이 나라는 걸 제외하고 나머지 바깥을 무조건 어떻게 하려고 하냐 하면 바깥, 자연이든 사회든 누구든 권력이든 통제하려고 하는 거예요. 우리가 인공위성 띄워 가지고 자연 흐름 이런 것 보고 하는 것들도 다 뭘 하기 위한 거예요? 예측하기 위한 거잖아요, 그죠? 예측을 해가지고 뭘 하려고 하는가? 통제를 하겠다는 거예요. 그렇게 통제가 되어야지만 우리 인간의 삶이라고 하는 게 지속성을 가질 수 있다, 라고 생각을. 바로 이 통제, 내 삶을 예측 가능하게 만들기 위해서 우리가 띄워 놓은 이 통제라고 하는 것이 신자유주의에 들어와 가지고 급속도로 확산이 되는 거죠. 다른 한편에서는 왜 그러냐 하면 신자유주의 이후가 되면 이제 더 이상 시장으로부터 국가가 나를 보호해주는 게 아니라 국가가 시장을 보호하기 시작하잖아요? 그렇다 보니 정규직 없어지고 비정규직 되고 어쩌구저쩌구. 이런 일들이 벌어지다 보니까 우리 삶이 어때요, 예측 가능하지가 않죠, 그죠? 이렇게 되니까 우리는 전반적으로 이 불안이라고 하는 거에 빠져들 수밖에. 우리 한국사람들 뿐만 아니라 전 세계 사람들의 정서를 한 마디로 정리하라고 하면 다 불안상태에 있잖아요. 오죽하면 <불안증폭사회>라는 책이 나왔겠습니까? 그리고 불안이라고 하는 주제로 책이 엄청나게 나오거든요. 재밌는 건 이 불안에 대한 감정이 증폭되면 증폭될수록 반대편에서 불안해하지 말고 살아야 된다는 산업이 급속도로 발달을 할 수 밖에 없어요. 불안해 하니까 네가 지금 성공하지 못하는 거다, 불안해 하니까 네 삶이 지금 비참한 거다, 그러니까 불안해하지 말고 긍정적으로 사고해라. 이거를 위기를 기회로 삼아라, 이런 얘기를 끊임없이 하게 되는 거잖아요. 그래서 이번에 나왔던 아주 훌륭한 책이 <긍정의 배신>이라고. 그렇게 긍정적으로 사고한다는 것이 어떻게 너를 지금 배신하고 우리의 삶을 배신하고 있는가 하는 게 나오거든요. 아시는 것처럼 이렇게 이 상황이 되니까 긍정적으로 살아라, 해가지고 나오는 게 뭐에요? 유명한 책. 그 많던 치즈는 누가 다 옮겼을까, 아니 내 치즈는 누가 옮겼는가 거기도 보면은 생쥐 한 마리는 치즈 옮겨지고 난 다음에 뭐야, 어느 놈이 훔쳐갔어, 하고 불평불만만 하고 있고 다른 놈은 새로운 치즈를 발견하기 위해 떠난다, 이런 거고. <시크릿> 그 책 뭐, 전 세계적으로 천만부인가 몇만부인가 팔렸다는 책인데, <시크릿> 같은 경우도 긍정적으로 사고하라고 하는. 그렇게 긍정적으로 사고하라는 얘기가 많은 것의 이면이 뭐냐 하면 우리가 그만큼 불안하다는 얘기에요. 불안하니까 더 이상 예측이 안 되고 계획이 안 되고 삶이 지속적이 안 되고. 이러니까 어떤 상태로 우리가 가게 되냐 하면 이거를 인간의 운명으로 받아들이든가, 이 불안한 것 있잖아요, 이걸 인간의 운명으로 받아들이든가, 아니면 이 불안을 없애야 되잖아요. 불안을 없애기 위해서는 더 많은 통제가 필요하다고 생각을 할 수 밖에 없는 거죠. 그런데 이 더 많은 통제를 불러들이기 시작한 것, 이게 신자유주의에서 이전에는 이 불안의 근원, 케인즈주의나 이쪽에서는 그 불안의 근원이 무엇 때문에 그랬냐 하면 기본적으로 시장이 가지고 있었던 불안정성, 거기로부터 우리 삶의 불안이 온다, 이렇게 생각을 했다면 지금은 시장은 보호해야 되기 때문에 다른 데서 우리 불안의 근거를 찾아야 되는 거죠. 그래서 우리가 더 많은 통제를 불러야만 하는 거죠. 우리 삶에 더 많은 통제가 있으면 우리 삶이 혹시 안전해질지도 모른다, 이렇게 생각을 하게 되는.

그러면 누구를 통제할 것이냐, 무엇을 통제할 것이냐, 이것에 있어서 좌파들이 1970년대부터 케인즈주의가 붕괴하기 시작하면서 좌파들이 어떤 생각을 하게 됐느냐 하면 좌파들은 저때 완전히 무능력했어요. 아무런 대응을 하지를 못하고 우왕좌왕하기만 하던 상황에서 저 부분을 확실하게 치고 들어갔던 게 바로 신자유주의자들이 되었던 거거든요. 그들이 주장했던 게 우리 사회가 위기에 처해 있다는 구호였어요. 우리 사회는 그럼 누구에 의해 가지고 어떻게 위기에 처하게 되었는가, 하는 걸 이들이 뭐라고 처음에 주장하게 되었냐면 이주노동자들 때문이다, 노동조합 때문이다, 학생들 때문이다, 학교가 학생들을 방치하기 시작했다, 이제 이렇게 얘기를 하면서 사회 안에서 더 이상 시장을 통제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게 아니라 우리 사회를 위기에 처하게 만든 세력들 있잖아요? 이들을 색출하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영국 같은 경우에서는 아주 대표적으로 타겟팅이 되었던 게 청소년. 우리 사회가 지금 돌아가는 거랑 아주 비슷해요. 우리도 왜 작년 재작년 재재작년 해가지고 애들 졸업식 뒷풀이하는 거 갖고 우째 이런 일이, 막 이런 식으로 해가지고 엄청 난리들 쳤잖아요, 그죠? 청소년들이 조금만 잘못하면 우째 이런 일이, 하면서 <조선일보>, <동아일보> 막 대서특필하면서 말세가 온 것처럼 이렇게 하는데. 정확하게 30년 전에 영국에서 똑 같은 일이 벌어졌었어요. 영국에서도. 양상은 더 심각했죠. 영국에서는 제일 많이 걸고 넘어졌던 게 마약 문제였었거든요. 청소년들이 마약을 많이 한다. 이런 식으로 되면 어때요? 우리 머릿속에 우리 관념 속에 청소년 하면 뭐 미래의 주인공, 우리 사회의 주역, 이런 생각들을 한참 할 수 밖에 없잖아요. 근데 그렇게 되면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게 되느냐 하면 우리의 미래가 위기에 빠져 있다, 라고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죠. 지금 현재만 위기에 빠져 있는 게 아니라 우리 미래가 위기에 빠져있다, 그러니까 학교에서 아이들을 더 쪼아야 된다, 더 강제해야 된다, 규율을 더 강하게 불러들여야 된다, 이제 이런 식으로 생각을 하게 되는 거고. 또 60년대부터 해가지고 60년대, 70년대 되게 많이 활발하게 됐던 게 여성운동, 성소수자들의 운동, 이런 것이었잖아요? 그런 운동들에 의해 가지고 가족이라는 가치, 이게 위기에 처해 있다. 가족이 붕괴하고 있다. 우리 사회가 붕괴하고 있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이런 가족이라든가 이전에 우리 전통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훌륭한 덕목들 있잖아요, 가치들, 이런 게 붕괴하고 있다, 이렇게 또 주장을 하기 시작하고. 이주노동자들이 유입이 되어서 들어오니까 이주노동자들이 일자리만 앗아간다고 생각을 하는 게 아니라 이주노동자들이 우리 사회의 가치, 영국다움, 영국인의 가치, 이런 것들을 무너뜨리고 있다, 이런 식으로 얘기를 하게 되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제가 여러분들에게 나눠드린 글에서 보면은 요렇게 제가 써놨는데요. 그렇기 때문에 이 통제를 통해 가지고 사회의 붕괴를 막아야 되겠다고 했었을 때 이거는 사법적인 차원만 얘기하는 게 전혀 아니라는 거예요. 이때 우리가 더 많은 통제 있잖아요. 이걸 불러들일 때 항상 그 적들, 우리 사회를 붕괴하려고 하는 청소년부터 시작해서 기타 등등들 있잖아요. 이 적들을 무엇의 적으로 어떠한 적으로 가정을 하느냐 하면은 그냥 법률적인 면에서의 적이 아니라 도덕적 적이라고 규탄을 하게 되는 거예요. 여성운동가들은 우리나라에서 여성운동가, 꼴페미들, 이대 나온 꼴페미들, 이런 식으로 얘기를. 꼴페미들이 가족의 가치를 붕괴시킨다, 라고 얘기를 하잖아요? 동성애자들, 성소수자들의 운동, 군대를 말아먹으려고 앉아 있다, 요번에 헌법재판소 판결난 것처럼. 그리고 가족의 가치를 붕괴시킨다. 이런 것 있고. 요번에 한겨레신문에 이틀 전에 <나는 무슬림이다>, 해가지고는 연재하고 있잖아요. 거기에 보면 굉장히 파격적인 사례가 하나 나와요. 한국 사람인데 미국에 유학을 가 가지고 무슬림이 되어서 한국에 돌아와 가지고 파키스탄인이랑 결혼했는데 둘째 부인이에요. 첫째 부인은 따로 있고, 둘째 부인으로 결혼했는데. 한국에서는 일부일처제이기 때문에 허용이 안 되잖아요, 그죠? 그런 사건일수록 밑에 보면 사건 자체 보다는 저는 주로 문화학을 하니까 댓글을 열심히 읽는데 댓글을 보면 대단한 댓글들이 많이 달려 있어요. 한국년이 처첩이 되다니. 하나는 처고 하나는 첩이잖아요? 처첩이 되다니 말세다, 이런 식으로 비판을 하는 거죠. 그래서 우리의 어떤 가치와 세계관과 언어와 이런 것들 있잖아요? 이런 거를 파괴하려고 온 적이기 때문에 사회의 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동시에 도덕의 적이 되는 거예요. 근데 이렇게 무엇이 도덕의, 여러분들이 청소년에 대한 <조선일보>나 <중앙일보>나 <동아일보>나 이런 데서 청소년 사건 터질 때마다 적어놓은 걸 보시면 사회 얘기보다 도덕 얘기 되게 많아요. 이래 가지고 도덕이 무너지고 있다, 우리 사회 기본적인 질서 있잖아요? 이게 무너지고 있다, 라는 식으로 얘기를 하는 거예요.

이런 식으로 얘기를 하는 것에 의해 가지고 집권을 한 게 대처와 레이건이에요. 그렇게 대처와 레이건이 집권을 해가지고 신자유주의적으로 많이 바꿨단 말이에요. 근데 이렇게 되고 나서 완전히 종지부를 찍어버렸던 사건, 우리 내부에 적이 있구나, 우리 사회가 붕괴될지도 모르겠다는 이 공포 있잖아요? 이 공포에 종지부를 찍었던 사건이 무엇이죠? 지금 얘기했던 도덕의 적, 사회의 적, 이랬던 것 있잖아요? 이게 진짜다. 이게 9.11이에요. 9.11이 터짐과 동시에 이렇게 얘기했었던 게 사실은 소소한 인간들이었고 언제 내가 테러당해서 죽을지 모른다, 그리고 그 테러리스트는 어디에서 활동하는지 아무도 모른다는 거 있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이 테러리스트들이 활동하는 것에서 나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더 이상 적이 바깥에 있지 않잖아요, 그죠? 적이 안에 있단 말이에요. 이전에도 마약하는 애들 어쩌고저쩌고, 꼴페미들 어쩌고저쩌고, 다 우리 사회 안에 있다고 생각을 했었는데. 그 안에 있었다고 생각하는 애들의 그 전체의 전형적인 얼굴, 대표자의 얼굴, 그게 오사마 빈 라덴입니다. 그리고 그들 모두가 뭘로 보이기 시작하냐 하면 테러리스트로 보이는 거죠. 아시는 것처럼 이 9.11 이후에 그렇기 때문에 사회운동이라든가 뭘 하든가 뭐 하기만 하면 다 테러리스트로 분류가 되잖아요, 그죠? 그래가지고 용산에서 싸우던 분들도 도심 테러리스트라고 불렀죠, 그죠? 그리고 그 이후에 보면 세계사적으로 보면 굉장히 재미있었던 것 중에 하나가 그 이전에는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었던 국가들끼리 그렇게 협력을 잘할 수가 없어요.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중국과 미국이 짝짜꿍이 되고 미국과 소련이 짝짜꿍이 되고 파키스탄과 인도, 뭐라 그래야 되나요, 불구대천의 원수지간이거든요. 이 인도랑 파키스탄 같은 경우에는. 파키스탄이랑 인도가 테러와의 전쟁 하면 똑같은 얘기를 해요. 그러면서 어떤 얘기를 하게 되냐 하면 우리 사회에 뭐가 더 필요하냐 하면 통제가 더 필요하다는 거예요. 저 테러리스트들과 맞서 싸우기 위해 가지고는 우리가 통제를 해야 된다, 라고 그렇게 주장을 하는 거죠. 그런데 이 통제를, 그리고 우리 모두가 거기에 대해서 수긍을 하는 거죠. 통제를 해야, 그래, 안전해지고, 안전이라고 하는 게 담보가 되고, 이 안전이 담보가 돼야 그 다음에 뭐가 돼요. 나의 프라이버시라고 하는 것이 지켜질 수 있다, 이게 그래야 비로소 내가 내면이라는 것을 처음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내면이라는 것을 지킬 수 있다, 이렇게 얘기하는 거예요. 근데 문제는 뭐냐 하면 이 통제를 해야 된다, 라고 하는 것에서 우리가 다 자발적으로 해서 뭐 애국법이니 뭐니 해서 다 반납을 했죠. 반납을 하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근대사회, 근대국가의 터전이 뭐였냐 하면 이거였거든요. 그러니까 이거를 영원히 파괴한다, 라고는 얘기할 수가 없는 거예요, 국가 같은 경우에도. 그러다 보니까 어떤 식으로 처리를 하게 되느냐 하면 이 통제, 이 프라이버시를 제한하고 통제하는 이것, 이것을 규범화할 수는 없었던 거예요, 그죠? 그러니까 예를 들면 이 통제를 완전히 규범화해버리면 어떻게 되겠어요? 헌법 없애버리는 것과 똑같은 효과인거죠. 헌법이라는 것 자체가 국민을 보호하는 법이잖아요, 그죠? 이거는 규범화할 수는 없어요. 대신에 끊임없이 뭐라고 주장하냐 하면 이것이 예외라고 주장을 하는 거죠. 반테러법안도 그렇고 그 법안들 소개할 때마다 항상 그런 거 같아요. G20을 성공적으로 해야 하니까 소개한다, 뭘 해야 하니까 소개한다, 그래서 항상 예외적이거나 또는 한시적 법률의 형태로 소개가 되는 거예요. 절대적 규범화해가지고 하지는 않아요. 왜냐하면 규범화하는 중간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자유민주주의라고 하는, 미국도 마찬가지이고 한국도 마찬가지이고 영국도 마찬가지이고, 그 토대 자체가 붕괴해 버리기 때문에 절대 이거를 그 자체로 규범화하지는 않고 예외화하고 한시적인 걸로 만들어요. 그런데 아주 간교한 방법이 하나 있어요. 예외는 예외죠, 그죠? 한시는 한시인거잖아요. 저거를 규범처럼 가져가려고 하면 어떤 방식을 쓰면 될까요? 끝나고도 계속 활용할 수 있으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게 법률로 만드는 건데 아주 정상적인 법률로 만드는 건 아니거든요. 계속 하는 거겠죠, 그죠? 그래서 이걸 두 가지로. 예외를 일상화하는 거예요. 그리고 예외를 영구화하는 거예요. 우리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사회는 어떤 사회라고 볼 수 있냐 하면 예외가 영구화된 사회. 이게 말로는 한시적인데 언제까지 한시적인 건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죠. 그 법이 철폐가 되고 나면 다른 법이 또 소개가 되는 거고. 그러면 이렇게 예외가 계속 항구화되기 위해 가지고는 끊임없이 무엇이 항구화됐을 때만 이 예외가 항구화될 수 있겠어요? 뭐가 항구화가 되어야지 이 예외적인 입법조치들, 한시적인 입법조치들이 항구화가 될 수 있겠어요? 이게 바로 위기의 항구화인 거예요. 우리는 끊임없는 이 위기 상황인 거예요. 그래서 위기가 항구화될 때마다 예외가 항구화가 될 수 있는 거죠.

이 때 등장하는 개념이 법과 질서 중심의 사회에요. 이명박이 그렇게 좋아하는 법치주의, 노무현이 그렇게 좋아하는 법치주의, 그 이전에 김대중 대통령이 그렇게 좋아하던 법치주의 있잖아요? 이 법치주의라고 하는 게 사실은 우리나라에서도 법치주의라고 얘기를 하지만은 영국의 대처가 집권하면서 썼던 개념이 법과 질서 중심의 사회였었고, 그 다음에 레이건이랑 레이건 전에 닉슨인가가 또 썼던 개념이 법과 질서 중심의 사회인 거예요. 법과 질서 중심의 사회라고 하면서 우리 사회에 이제 뭐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냐 하면 질서가 필요한 거겠죠, 그죠? 이 사회로 가고 여기에서 나오는 게 바로 제로 톨러런스(zero tolerance), 무관용 원칙입니다. 근데 이 무관용 원칙이라고 부르는 게 굉장히 재미있는 표현이거든요. 왜 그러냐 하면 그 이전에는 그러면 그게 시민의 정당한 정치적 활동이었다고 본 게 아니라 봐 준거에요. 그 전에는 봐 주다가 이제는 너네가 이렇게 움직이는 것 때문에 사회가 위험해졌기 때문에 더 이상 안 봐주겠다는 거거든요. 이렇게 무관용원칙이라고 언어를 딱 붙여버리니까 원칙은 누구한테 있는 거예요? 우리한테 원칙이 있는 게 아니라 걔네들한테 원칙이 있는 거고, 이제까지는 걔네들이 원칙을 유보하면서까지 우리를 봐준 것인 것처럼 얘기가 되는 것이죠. 그러니까 이 무관용원칙이라는 게 법과 질서, 엄정한 법질서를 수립해서 살겠다고 하는 게, 이때 도대체 이 법이 뭐냐라는 것 있잖아요? 이 법이 뭐냐라는 걸 보면은 이게 바로 한시적이고 예외적인 것이 영구화되어져 있는, 항구화되어져 있는 바로 그게 되는 거죠. 만약에 예외가 이렇게 항구화되어 버리면 그 다음부터 우리는 어떤 상황에 빠지게 되느냐 하면요, 우리가 이제까지 소위 정상이라고 배웠던 것 있잖아요? 규범이라고 배웠던 것 있잖아요? 이것과 우리가 이제까지 예외라고 배웠던 것 있잖아요? 이 두 개가 정확하게 반대편 포지션으로 가게 되는 거예요. 정상이 예외화가 되고 예외가 정상화가 되는 거예요. 이것의 최종적인 도달점이 바로 예외의 정상화예요. 그렇게 되면 우리는 더 이상 예외라고 하는 걸, 곧 끝나겠지, 예외적이지, 라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예외 자체를 우리가 정상적인 걸로 규범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고 규범적인 것을, 당연히 시민이라면 이러 이러한 게 있지 않느냐, 라고 생각하는 것들 있잖아요? 이걸 예외적인 것으로 사고하게 되는 거죠. 이게 신자유주의에 의한 또는 법과 질서 중심에 의한 것의 최종 도착 지점이 되는 거예요. 바로 이렇게 되기 때문에 이 통제, 이게 지금 우리가 다루던 주제인 감시사회 있잖아요? 저게 감시, 통제라는 말이 감시라는 말과 같은 걸로 받아들일 수가 있겠죠, 그죠? 감시를 우리 삶 속에 우리 스스로 불러들이고 인정하고 허용하고 하게 되는 기본적인 과정 내지는 메커니즘이 될 수 있는 것이거든요. 이런 식으로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가 구성되어져 있는 거예요.

자, 그럼 이런 상황이 되니까 많은 사람들이 또 패닉(panic)에 빠져요. 그지 않겠어요? 도대체, 제가 <개인의 죽음>이라는 책이 있는데요, 그 책에 나오는 예를 들어보면 이런 거예요. 에이(A)라는 여성이 늘 자기는 도로나 이런 데 CCTV 깔리고 이래 가지고 되게 좋다, 안전해졌다, 라고 생각해서 룰루랄라 룰루랄라 하면서 되게 좋아하는 것. 되게 좋아하다가 어느 날 집에 들어와서 샤워를 하고 이제까지 안 보던, 무심코 안 보던 데를 한번 딱 봤더니 앞집 아파트 꼭대기에 뭐가 하나 달려 있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해가지고 교통통제국에 알아봤더니 교통상황 통제하려고 달아 놓은 카메라인 거예요. 그 카메라가 교통을 통제하겠죠. 근데 대부분 그런 카메라들에는 줌이 달려 있고 그리고 리모트 콘트롤이 되기 때문에 만약에 경관이나 이런 애들이 심심하면 그 여자 이제 볼 수도 있는, 맨날 발가벗고 샤워도 하고 이랬겠죠, 그죠? 그걸 보려고 한다면 얼마든지 볼 수도 있는 거고 그건 뭐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닌 거잖아요, 그죠? 그러면서 이 여성이 개인의 죽음에 대해서 너무 소름끼친다, 나에게 프라이버시라는 게 있느냐, 라는 얘기를 하거든요. 근데 그런 것처럼 이 통제 내지는 감시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안전을 위해서 불러들이고 난 다음에 이것이 편재한다, 라고 얘기하는데 곳곳에 번져 있겠죠. 이런 것이 나를 안전하게만 하는 게 아니라 나의 프라이버시도 완전히 침해하는 이런 걸로 작동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다보니까 우리 모두가 또 다 패닉에 빠져 있어요. 이 부분에 대해 가지고. 시간이 돼 가지고 요 반대편 이야기, 이게 반이 있고 나머지 절반이 대중소비사회가 만들어 놓은 게 있거든요. 어쨌든 제가 초스피드로 간단하게 말씀을 드리면은 그렇게 되다보니까 이 프라이버시를 지킬 수 있는 권리라고 하는 게 과거에는, 아까 제가 말씀드렸던 이 내면과 이것 있잖아요? 프라이버시를 지킬 권리라고 하는 건 한마디로 표현하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어요. 안 보일 권리에요. 내가 숨을 권리거든요. 내가 철저히 나를 안 드러낼 권리를 프라이버시에 대한 권리로서, 완전히 물러날 권리에요. 사회로부터 내가 물러날 권리인 거거든요. 그래서 내 내면의 세계에 침잠할 수 있는, 그래서 내 생각을 할 수 있고 내 판단을 할 수 있는 어떤 시공간으로 내가 완전히 물러날 수 있는 권리 있잖아요? 이게 프라이버시 권리에서 가장 중요한 건데 지금은 프라이버시의 권리를 어떤 식으로만 해석을 하고 있냐 하면 나의 사생활을 돈벌이가 되기 위해서 누가 사용할 것인가, 에서 나는 사용할 수 있다, 그걸 너가 사용하고 싶다면은 너는 나한테 허락을 받아야 된다, 즉 소유권의 문제로 완전히 전환이 되어버린 거죠. 이 반대편에 있었던 얘기가 바로 대중소비사회에 대한 얘기. 한편에서는 프라이버시가 언제든 침해될 수 있는 것에 대한 공포가 있고 다른 한편에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스스로가 뭐 트위터니 페이스북이니 뭐니 뭐니 여러 가지가 좍 발달했잖아요? 발달하다보니까 어떤 공포가 있느냐 하면 내가 끊임없이 누구한테 인정을 받아야 되고 누구랑 커뮤니케이션을 해야 되는 거죠. 이건 뭐 복잡한 얘기니까 뺄게요, 시간이 없으니까. 빼고 말씀 드리면은 그러니까 요새는 아주 노골적으로 얘기하면 밥 먹으러 가 가지고도 맛있는 걸 먹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거 사진 찍어 가지고 올려야 되잖아요. 블로그든 뭐든 어디든 계속 어디다가 올려놔야 되잖아요. 우리 스스로가 우리 삶을 중계방송하고 있어요. 우리 스스로가 우리 삶을 중계방송하고 내 사람을 다 딴 사람들한테 보여주고 있는 거죠. 더 이상 우리가 어딘가로 물러나고 은폐하고 숨고 사라지고 이런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끊임없이 나를 드러내야 되는 건데, 일거수일투족이라고 하는 것을. 이것과 이 둘 사이에 엄청난 충돌이 벌어지는 거죠. 한편에서는 내가 인정받기를, 사회적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나를 계속 드러내야 하는데 다른 한편에서는 드러내면 드러낼수록 나의 프라이버시는 침해가 되는 거잖아요, 그죠? 그렇기 때문에 이 두 가지 충돌 속에서 우리 현대인들, 한국사람들이 선택한 게 뭐냐 하면 나를 숨기고 사라지는 권리 있잖아요? 그것으로서의 프라이버시를 내가 공개해 놓은 나의 자료들과 나의 정보들과 나의 이야기를, 사실은 다 보고 있거든요, 다 보고 있는데 그걸 상업적으로 이용할 때는 무조건 내 허락을 받아야 된다, 라고 하는 걸로. 저는 이게 틀렸다는 말이 아니에요. 이건 맞는 얘긴데. 이게 이런 소유권에 대한 문제 있잖아요? 소유권에 대한 문제가 이것을 완전히 대치해 버린 게 지금 우리의 상황인거죠. 더 이상 우리가 프라이버시라는 것을 숨을 권리, 사라질 권리로 인식을 하는 게 아니라 내 꺼를 내가 사용할 권리 있잖아요? 이걸로 생각을 하게 된다는 거예요. 그러다보니까 이게 뭐겠어요? 내가 만들어놓은 내 영역, 제가 제 트위터에다가 한마디 무슨 멋있는 말을 했어. 그런데 다음날 신문을 봤더니 한겨레신문에서 허락도 안 맡고 그걸 인용을 했다. 그랬을 때 제가 인제 발끈하잖아요? 왜 나한테 허락 안 맡고 남의 글을 함부로 쓰느냐. 이런 식의 문제로 프라이버시에 대한 얘기가 전환이 돼 버린 거예요. 그걸 안 써도 되고 내가 아는 사람들하고만 공유할 수 있는 권리로서 그 프라이버시라는 거 있잖아요. 이걸 인식하는 게 아니라. 그걸 누가 쓰는가, 안 쓰는가. 그러다 보니까 우리 스스로도 국가가 우리를 감시하는 게 아니라 국가나 사회가 우리를 감시하는 게 아니라 어느 놈이 내 꺼를 함부로 퍼 나르고 있는가, 막 쓰고 있는가, 이걸 감시하는 걸로 우리 스스로도 바뀌게, 바뀌어지고 지금 있는 상황. 저는 이게 훨씬 더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을 하고 있어요. 왜냐하면 이렇게 되면 될수록 우리 삶 속에서 사회적인 것은 사라지게 돼 있거든요. 더 이상 말하는 것, 글 쓰는 것, 이게 사회적 행위라고 우리가 인정을 하는 게 아니라 다 재산이라고 바라보는 거죠. 남이 침범해서는 안 되는 어떤 재산이라고 이렇게 바라보기 시작하는 거거든요. 이 재산이라고 하는 걸 기가 막히게 자본주의, 요걸로 제 말은 끝내도록 할게요, 이게 재산이다, 라는 걸 가지고 기가 막히게 자본주의가 하나의 다른 권리로 이름을 확 만들어버린 게 있어요. 그게 지적재산권이에요. 우리가 지적재산권이라고 하는 걸 모든 것을 우리가 지적 재산의 문제로 바라보기 시작하는 거죠. 예를 들어 장여경 선생이 자기 블로그에다가, 제주도 가가지고 놀러갔다 왔는데 뭐 어떻게 되게 좋은 사진을 하나 찍었어요. 그랬는데 제가 마침 제주도에 관한 책을 내는 데 예를 들면 제주도에 관한 책 하나를 내는데 이전에 장여경 선생이 찍은 걸 보고 나 혼자 개인적으로 쓸 생각으로 일단 다운을 받아 놨어요, 내 컴퓨터에다가. 사진이 너무 좋아. 그 다음에 그걸 쓰겠다고 생각을 한 거예요. 책을 낼 때쯤 되니까 이게 시간이 오래 흘렀으니까 알 수가 없잖아요, 이게 누가 찍은 사진일까 하는 걸. 알 수가 없어 가지고 막 찾다가 도저히 모르겠는 거예요. 모르겠어서 에이 모르겠다, 그냥 출판하자, 그래가지고 그 사진을 실었어요. 나중에 장여경 선생이 바르르 떨면서 내 사진을 왜 허락도 안 맡고 쓰냐. 저는 이렇게 항의하는 게 틀렸다는 얘기를, 틀렸다는, 되게 지금 오해하시면 안 되는데. 틀렸다라고 얘기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이해하는 프라이버시는 딱 거기에 고착되어져 있다는 거죠. 다른 것으로서의 프라이버시 있잖아요? 아주 원론적인 의미에서, 근원적인 의미에서의 프라이버시 이건 우리가 더 이상 사유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러다보니까 굉장히 재미있는 현상이 지금 나타나고 있는데. 제가 전공이, 어떤 인류학자는 전혀 인정을 해주지 않고 있지만. 제 지도교수가 인류학을 전공한 사람이라 가지고 인류학을 하고 있는데.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이제 인류학이라는 학문은 불가능해져요. 왜냐하면 내가 이제 장여경씨를 인터뷰하잖아요? 인터뷰한 것 가지고 분석해 가지고 쓰는 게 인류학 논문이에요. 그런데 그렇게 막 하는데 장여경 씨가 와가지고 아니 내 얘기를 당신이 왜 마음대로 인용해 가지고 논문 쓰냐? 이러면 끝나 버리거든요. 그러니까 이제 그것도 우리가 일일이 허락을 맡아야 되는 거예요. 제가 지난번에 경험했던 걸로 보면 제 박사 논문을 재판을 가지고 쓸 생각을 하고 있었거든요. 재판 자료들을 이렇게 죽 봐야 되는데, 한국의 법에 의하면 재판 자료를 가지고 논문을 쓰려면 재판 당사자 전원의 동의를 받아야지만 재판 자료를 쓸 수가 있어요. 그런데 보통 학문윤리규정 이런 게 있어가지고 재판자료를 쓸 때는 실명으로 안하고 못 알아보게끔 해야 되는, 스크리닝 작업을 해야 되거든요. 그렇게 하더라도 못하는 거죠. 그래서 지금 어떤 일군의 사람들은 더 이상 이런 식으로 간다면 모든 문제를, 프라이버시의 문제를 지적재산의 문제 있잖아요? 재산권의 문제로 돌려버린다면 학문은 불가능하고 아마 예술은 불가능해질 거다, 이런 얘기를 하는 거죠.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대표적인 게 사진예술 같은 건데. 여러분들 아시는 되게 유명한 사진들 있잖아요? 그거 다 허락 안 맡고 찍은 거거든요. 허락 맡고 찍은 게 연출사진 말고 어디 몇 개 있겠어요? 전쟁터 가 가지고 찍은 사진, 그거 허락 맡고 찍겠어요? 아니면 여러분이 잘 아시는 베트남전에 네이팜탄 떨어질 때 여자애 하나가 벌거벗고 절규하며 뛰어오는 사진 있잖아요? 그거 잠깐, 한 다음에 가가지고 내가 너 사진 찍어도 되겠니, 라고 허락 맡은 다음에 찍어 가지고는 그게 안 나오는 거죠. 이게 실제로 문제가 돼 가지고 캐나다에서 소송이 한번 걸렸어요. 그래 가지고 그 사진작가가 길거리 돌아다니면서 시위를 퍼포먼스로 했었는데. 돌아다니면서 제가 당신의 사진을 찍어도 될까요, 이렇게 허락 맡고 하는. 이게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굉장히 고유한 어려움이에요. 프라이버시에 대한 권리를 강조하는 것은 좋은데 어떠한 방식으로 우리가 프라이버시를 주장할 것인가? 이 프라이버시를 주장하는 것을 지금의 방식대로 계속 이렇게 재산권의 문제, 특히나 지적재산권의 방식 있잖아요? 이러한 방식으로 강조하는 것이 과연 사회적인 것을 옹호하고 사회적인 것을 강화하는 방식이냐, 아니면 이것이 마치 감시와 통제에 맞서는 것 같지만 사실은 다른 한편에서는 이 자본주의의 새로운 돌파구로 지금 만들어져 있는 지적재산권의 문제 있잖아요, 이것을 더 강화하는 형태가 될 것이냐. 이거에 대해서 우리가 굉장한 큰 어려움이 있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제가 처음 시작을 프라이버시라는 게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는가, 원래의 그 취지가 뭐였는가, 라고 하는 것, 이거로부터 출발을 한 거였던 거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근본적으로 프라이버시라는 게 무엇인가? 나는 프라이버시를 무엇이라고 생각을 하고 어떻게 지키고 싶은 것인가에 대한 생각을 했을 경우에만 우리가 이 자본의 논리와 감시와 통제라고 하는 국가의 논리 있잖아요. 이 두 가지를 다 벗어나서 돌파할 수 있는 어떤 길을 모색할 수 있는 게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고. 저는 그런 의미에서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가 근본적으로 프라이버시라는 것을 내 소유와 재산의 문제가 아니라 사라질 권리 있잖아요, 보이지 않을 권리, 약간 죽은 권리 같은 식이기도 해요. 그런 사라질 권리로서의 프라이버시라고 하는 걸 우리가 새롭게 사유해 봐야 되는 게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 얘기는 이걸로 마치고. 감사합니다.

 

장여경

박수 한번 주세요. (박수) 되게 재밌지 않았어요? 저는 되게 재밌었어요. 되게 충격적인 얘기도 많았던 것 같아요. 일단 뭐 질문, 예, 질문 먼저 해주시죠.

 

청중

만약에 예를 들어서 기차표를 샀어요. 샀는데 기차표에 뭐라고 표시가 돼요. 장애인이면 장애이라고 표시가 돼요. 그거를 내가 보여주지 않을 권리도 있잖아요. 기차표 샀는데 거기에 승무원이 확인을 할 거란 말이죠. 지네만 알 수 있는 걸로도 확인이 가능할 거란 말이죠. 뭐 기호나 사인이나 그렇게 해도 확인이 가능한데. 그걸 도구화된 글자로 글자 표시를 하면은 그게 프라이버시권 침해일까요, 아닐까요? 정말 이런 거는 묻고 싶어요. 예전에 한번 물어서 장애인을 ‘장’자로 바꾼 적이 있는데. 숨을 권리가 있는 거잖아요.

 

엄기호

그거는 제가 권리라는 걸, 법적인 관점에서 접근을 하는 게 아니어서요.

 

청중

아니 아니 법적인 관점이 아니라요. 정말 프라이버시권이 인권이라면 프라이버시권이 인권이라면 나는 그게 나타나지 않아야 된다고 생각을 하는 거거든요. 바코드에서 지네가 알아서 확인할 수 있으면 되는 거잖아요. 근데 그걸 굳이 표시를 해줄 필요가 있을까 싶어서요.

 

엄기호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청중

국가인권위원회에서는 그걸 ‘장’자로만 표시해도 프라이버시권 침해가 아니라고 하더라고요. 인권의 가치가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을지에 대해서.

 

엄기호

글쎄요. 그거는 좀. 국가인권위원회가 왜 그렇게 이야기하는 지는. 뭐.

 

청중

이전에 이 정부 탄생하기 전에 진정 넣은 건데. 그렇게 얘기를 하더라고요.

 

엄기호

국가인권위가 뭔가 좀 잘못 생각하는 거 같은데요.

 

장여경

일단 선생님 강의 내용으로 돌아와서. 강의 내용 중에 거론하셨던 내용이랑 관련해서 질문 있으신 것 좀 받을까 합니다. 일단 뭐 처음에 얘기 시작하셨던 것부터 복기를 해보면 저는 되게 역설을 느꼈는데요. 사실은 나의 영역에 대한 어떻게 보면 근대주의적인 소유권의 개념, 나의 영역에 대한 안전, 나의 영역에 대한 프라이버시 주장, 이게 인제 결론적으로 보면은 오늘날 우리가 더 많은 통제를 불러들이면서 우리의 프라이버시가 오히려 축소되는 경향으로 이어진다는 거죠. 되게 역설적인 상황인 것 같아요. 특히 인제 CCTV 같은 경우도 그런 것 같아요. CCTV 같은 경우도 예를 들어 자기 주거에 대한 안전이라든지 내가 일상적으로 왔다 갔다하는 공간에 대한 안전, 이런 것을 보호받기 위해서 오히려 자기 프라이버시를 포기하거나 양도하면서 감시 시스템을 불러들이는 거잖아요? 그런 의미에서는 고민이 있는 거죠. 프라이버시에 관심 있는 인권활동가로서 이게 더 이상 프라이버시권이 은닉할 수 있는 권리를 주장하는 것만으로는 사실 근본적인 역설구조가 지금 생겨버린 상황에서 내가 혼자 있고 싶다고 주장을 한다 그래서 혼자 있는 걸로 멈출 수 없는 상황, 그런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할지.

 

엄기호

우리가 프라이버시 문제와 관련해 가지고, 사실은 여러분들의 프라이버시를 감시하고 있는 내지는 제한하고 있는, 있잖아요, 대다수의 매체들 내지는 방법들은 전쟁 시기에 만들어진 게 되게 많아요. 그러니까 첩보위성, 사실 CCTV 이 정도는 아주 약과인 거고 우리 전체를 감시하고 있는 건 첩보위성들이랑 이러저러한 매체들이잖아요. 이게 대부분 전쟁 때 적의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 가지고 이렇게 만들어 놓은 거고. 이걸 규제하기가 힘들어지는 이유 중의 하나가 국가권력의 바깥에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아요. CCTV나 이런 건 국가권력에서 하는 거잖아요. 다른 한편에서 보면 인공위성은 영공 위에 있거든요. 영공 보다 더 위에 있잖아요, 그죠? 구글이나 이런 걸 보고 우리가 되게 황당할 수 밖에, 그걸 통제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거예요. 우리 하늘에서 찍지 마라, 라고 얘기하면 너네 하늘이 아니라 우주인데. 이런 식의 것을 가지고 하는 거죠. 한편에서는 CCTV나 이런 것처럼 국가권력이 우리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있잖아요, 이렇게 하는 거고. 다른 한편에서는 국가도 아닌 초국가적인 어떤 것들이 연합이 되어 가지고 우리를 감시하고 있는 거거든요. 자, 근데 여기에서 그렇게 되면 이 두 가지를 저는 나누어서 생각해 봐야 된다고 생각을 해요. 하나는 국가가 하는 것은 그럼 우리가 어떻게 개입을 할 것인가. 그게 아니라 초국가적인 데서 첩보위성처럼 있잖아요, 이렇게 하고 있는 건 우리가 어떻게 그거를 대처를 해야 될 것이냐, 이 두 개는 얘기가 달라질 수밖에 없거든요.

그런데 국가 같은 경우에는 우리가 아주 냉정하게 생각해 봐야 하는 게 바로 이 위험의 문제예요. 아까 제가 말씀드렸던 것처럼 우리가 감시라고 하는 걸 우리 일상으로 불러들인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가 위험이라고 하는 게, 위기라고 하는 게 일상화되어져 있고 항상적인 것이고 또 그 위험은 엄청나게 큰 것이다, 라고 우리가 지금 생각하고 있잖아요? 다른 측면에서 바라본다면, 이건 좀 약간 위험한 얘기일 수 있어요, 제가 지금 드리는 말씀이. 그리고 이건 아주 조심스럽게 말씀을 드리는 건데 우리가 이렇게 위험이라고 하는 걸 극대화하고 극대화할수록 우리 사회는 내 삶이 마치 괴물들에 의해 둘러싸여 있는 것 같은 사고를 우리가 하게 되는 거죠. 그러다보니까 모든 성폭력범들은 다 조두순이라거나, 아니면 이런 인간들 있잖아요? 인간들이라고 생각을 하는 거예요. 그러다보니 오히려 우리가 정말 찾아내야 되고 민감하게 받아들여야 되는 어떤 성폭력들, 성희롱들 있잖아요? 이거는 지금 거의 다 빠져나가고 있다고, 성폭력상담소나 이런 사람들이 얘기를 하거든요. 국가권력은 신나는 거예요. 제가 1년 전인가 2년 전에 성폭력상담소 가 가지고 토론회를 하는데 그 토론회에서도 나오는 얘기가, 제일 신나는 게 검사에요. 왜냐하면 아까 제가 국가가 할 일이 없는데 할 일이 잔뜩 생겼다고 했었잖아요. 그러니까 오히려 성폭력상담소 소장님이 그 검사한테 뭐라고 얘기하냐 하면, 제가 여기서 상담을 오래 했는데 저는 그런 괴물을 만나본 적이 없는데요, 라고 얘기를 하시는 거죠. 지금 어떤 맥락인지 아시겠죠? 이런 식으로 우리가 위험이라고 하는 것, 위험을 일으키는 사람들을 끊임없이 괴물화하고 있는 것, 이것을 멈추지 않는다면 이것에 대해서 문제제기를 하지 않는다면 솔직히 우리 동네 길거리에 CCTV 만들어지는 정도가 아니라 우리 안방에 CCTV가 들어와도 사람들 다 찬성하는 형태로 될 거고, 실제로 그렇게 하잖아요. 되게 유명한 게 미국에서나 이런 데서 왜 그 내니(nanny)들, 애기 봐주는 사람들 감시한다고 해 가지고 눈알에다가 초소형 카메라 달아 가지고 감시하고 하는 것들 있잖아요? 그렇게 돼버리는 거죠. 그러니까 어느 정도까지 우리가 이 위험이라고 하는 걸 정말 위험이라고 생각할 것인가에 대한 걸 우리가 생각하지 않으면서. 제가 가끔 가다가는, 재난이라든가 위험이라든가 이걸 우리가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마치 지금. 영화도 그렇고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마치 종말의 세계를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얘기를 하는 경우가 되게 많이 있잖아요, 그죠? 이 괴물화. 히트 친 것도 <괴물>이라는 영화였었고. 저는 이거는 정말 좀 다르게 생각을 해봐야 되는 것 같아요.

두 번째로 이 초국적 위성이라든가 이런 것에 의한 감시 같은 경우에는 초국적 기업 제재해야 되는 거랑 똑같은 논리와 똑같은 방법이 필요한 거죠. 완전히 지네 마음대로 하고 있잖아요. 구글 같은 경우에도. 아주 대표적인 게 구글인 거고, 또 얘도 마찬가지잖아요. 되게 문제 됐었잖아요. 자발적으로. 그런데 이걸 통제할 수 있는 법, 글쎄 저는 이게 법으로 통제가 될까라는 생각이 들죠.

 

청중

제가 질문을 하나 하겠습니다. 제가 이번 강연을 들으면서 가장 공감했던 부분이 인제 어떻게 보면 프라이버시의 지적재산권화 문제인데요. 공히 우리가 이제 헌법에서 프라이버시권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이야기할 수 있는데 개인정보자기결정권으로 얘기하잖아요. 자기가 자기 것을 통제할 권리가 자기한테 있다. 동의의 문제 아까 말씀하셨는데요. 그러면 이제 그렇게 동의의 관점으로 지금 모든 게 이루어지잖아요? 프라이버시, 동의 받으면 되는 것 아니냐로 모든 것이 다 이용되고 있는 상황에서 그것을 정말 프라이버시냐의 문제를 제기하셨잖아요? 그럼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엄기호

저도 참 그게 난감하기 짝이 없는 현상 중에 하나인 건데요.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이게 그, 잠깐만 조금 제가 길게 설명을 드리면, 그게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데. 인간이란 기본적으로 사회적 동물이란 말이에요. 아리스토텔레스가 얘기한 것처럼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란 말이에요. 사회적 동물로서 인간에게 반드시 필요한 게 타자에요. 다른 사람. 나 혼자 살 때 그걸 우리가 인간이라고 얘기하지 않거든요. 인간은 다른 사람이 있을 때만 인간이 될 수가 있거든요. 그래서 제가 쓴 책에도 있었는데 영어에 말할 권리라는 게 right to speak이라고도 하지만 right to be heard라고 해서 들릴 권리라는 표현을 하거든요. 이게 진짜 인권인 거예요. 내가 산에 가 가지고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다, 라고 외치는 것 있잖아요? 이건 표현의 자유가 아닌 거거든요. 표현의 자유는 딴 사람한테 내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다, 라고 얘기하고 제 이 말을 누군가가 들었을 때 언론의 자유, 표현의 자유, 이렇게 표현할 수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타자가 반드시 필요해요. 이런 것 때문에 인간이 기본적으로, 헤겔이나 이런 애들이 주장하는 게, 우리는 기본적으로 인정투쟁을 하고 살아간다는 거예요. 다른 사람한테, 아주 무식하게 얘기하면, 다른 사람한테 인정을 받는 게 되게 중요한 거죠. 그리고 그 사람에게 인정받은 내 모습이 내가 되는 거거든요.

자, 근데 이 인정투쟁이라는 게 지금 제가 우리 사회에 이게 완전 전면화되어져 있어요. 왜 그러냐 하면 사실 이 인정투쟁의 영역이 사회의 영역이고 한다면 프라이버시라고 하는 건 여기에서 물러나는 거거든요. 아까 얘기한 것처럼 이건 내면의 세계가 되는 거잖아요, 그죠? 이렇게 물러나야 되는데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는 여기에서 여기로 물러나는 순간에 나란 존재는 사라져버려요. 그러다보니까 내가 이 사회 안에서 생존하기 위해 가지고는 이 사회 안에서 인정받으면서 살아가려면 지금은 이 내면마저도 완전히 다 까발려가지고 여기에서 보여줘야, 그잖아요? 여기에서 보여줘야 비로소 내가 상품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거예요. 왜냐하면 지그문트 바우만이나 이런 사람들이 했던 표현대로 한다면 더 이상 인간이 생산의 주체가 아닌 시대로 우리가 넘어왔잖아요. 사람마다 판단은 좀 다르지만. 청년실업 문제니 이런 것들이 벌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 중의 하나가 인간이, 바우만이 쓴 전문용어로 얘기하면, 쓰레기가 된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이걸 요새 애들이 쓰는 걸로 잉여죠 잉여. 잉여로 이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에 사회에서 내가 사회적 존재로 인정받기 위해 가지고는 뭐까지 해야 되냐 하면 절대 이전에는 내놓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었던, 인간의 자존의 근거였고 인간의 존엄의 근거였던, 있잖아요, 이 내면, 아까 다른 말로 프라이버시인 거잖아요. 이것도 다 상품으로, 상품, 다른 말로 구경거리로 가공을 해가지고. 이걸 구경거리 사회라고 그러거든요. 구경거리 사회로 가공을 해서 이쪽에 내 놔서 인정을 받아야지만 겨우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 된 거예요. 그러다보니까 예를 들면 꿀벅지 사건 같은 것 있잖아요. 그 꿀벅지 같은 경우는 이거는 인간의 가장 내밀한 내 몸뚱이에 대한 얘긴데 딴 인간들이 내 몸뚱이를 보고 훔쳐본 거고, 그 몸뚱이에 대해 이름을 붙인 거잖아요, 그죠? 이건 정말 프라이버시 침해인 거거든요. 꿀벅지다, 맛있어 보인다, 이런 표현을 했었을 때 더 이상 우리는 그거를 내 자존에 대한 모욕, 내 프라이버시에 대한 침해 있잖아요? 이렇게 얘기할 수가 없는 거예요. 오히려, 유이였죠, 아마 걔가? 유이도 그렇고 다른 친구들도 뭐라 그랬냐면 오히려 그렇게 불러준다는 것이 나의 상품가치를 인정해주는 거거든요. 구경거리로서의 나의 존재를 인정해 주는 게 되는 거예요. 그렇게 인정이 되었을 때 비로소 내가 인정투쟁에서 성공한 거고, 나한테 비로소 타자가 나타난 거고 내가 사회적 존재로 인정을 받을 수 있게 되는 거거든요. 그 일 있고 난 다음에 얼마 있다가 송중국인가, 주몽으로 나온 애 있잖아요? 주몽으로 나온 애가, 제가 본 건 아니고 어디서 본 건데 들은 얘긴데, 걔가 무슨 예능티비에 나와서 그렇게 얘기했대요. 제 허벅지는 말벅지인데 못 보여 드려서 죄송하다고. 그러니까 다 보여줘야 되는 거죠. 걔가 꿀벅지면 나는 말벅지고. 그래서 이게 막 상품가치가 있고 구경거리로서의 가치가 있다, 있잖아요? 이렇게 보여줘야 되는. 이게 지금 우리를 가장 안타깝고 난처하게 만드는 게 내면, 그딴 게 어딨냐? 내면은 보여주지 않기 때문에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는 것이다, 이랬을 때만이 우리가 얘기하는 프라이버시 있잖아요? 이게 성립할 수 있는 건데 이 내면조차도 구경거리로 내놔야지만 생존할 수 있는, 살아남을 수 있는, 있잖아요? 이런 세상이 되다보니까 프라이버시라고 하는 것은, 프라이버시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건 이걸 가지고 돈 버는 놈이 다른 놈이면 안 되고 나여야 된다는 것. 지금 말씀하신 것처럼 다른 놈이 이걸 상업적으로 이용할려고 한다면 내가 동의를 해줘야 한다는 것. 그러니까 동의만 되면 다 된다, 있잖아요? 이런 식으로 얘기가 될 수밖에 없는 거죠.

이걸 어떻게 타개할 수 있을까? 저도 잘 모르겠어요. 왜냐하면 이거는 우리 존재양식이 지금 바뀌어버린 거라 가지고. 그러니까 저는 정말 어떤 의미에서는 제가 아까 말씀드린 이 내면의 탄생이라고 하는 거는 소위 말하는 근대가 출발하면서부터 만들어진 거거든요. 소위 근대사회라고 하는 게 만들어지면서 이게 출발을 하는 것인데. 만약에 이게 고착이 된다면 우리가 다시 이 시대로 있잖아요? 돌아가지 못한다면. 그걸 뭐 탈근대라고 부를지 후기근대라고 부를지 새로운 중세라고 부를지 말세라고 부를지 그건 제가 잘 모르겠어요. 어떻게 부르더라도 더 이상 이건 가능하지 않은 프로젝트가 되는 거죠. 저는 이게 가능하지 않은 프로젝트가 되면서 사람들이 선택하는 게 귀농한다거나 아니면 내 삶을 디디지털라이즈(dedigitalize) 있잖아요? 해버리는, 그리고 아무에게도 동의하지 않는, 내 꺼 가지고 쓰는 거 절대 나는 동의 안 한다, 라는 삶의 형태 있잖아요? 이걸로 돌아가는 이유 중에 하나가 이것에 대한 대응이라는 것이 그렇게 개인적으로 결단 내리는 것 있잖아요? 이거 말고는 가능하지 않는 시대가 되고 있기 때문인 것 같아요. 참고로 말씀드리면 그래서 인터넷 사이트 중에서 디지털 수어사이드(suicide) 사이트도 있어요. 사이버 자살이라고 해가지고. 네덜란드랑 일본인가? 맞죠? 거기에 만들어진 사이트가 있는데 그 사이트에 가입해 가지고 자살하시겠습니까, 이래가지고 예, 저는 자살하겠습니다, 해 가지고 이제 사이버 수어사이드를 딱 하잖아요? 그러면 제가 알기로는 그동안 내가 쓴 구글처럼 쓴 글 막 검색을 해가지고 내가 여기저기에 써 놓은 글 있잖아요? 그거를 찾아가지고 다 없애버리는 거예요. 그게 어떻게 보면 프라이버시적인거죠. 그렇게 하는데 구글이 그 사이트 막아버렸어요. 검색이 안 되게. 사실 구글이 막아버리면 뭐 자살해봤자 자살이 안 되는 거, 자살해봤자 자살이 안 되는 거죠. 지금 상황이라고 하는 게. 이게 어느 정도 심각하느냐 하면요, 제가 이틀 전에 끔찍한 일을 당했는데. 제가 인제 수업하는 친구들이랑, 연대에서 강의를 하나 하고 덕성여대에서 강의를 하거든요. 연대는 자기네들 사이트가 좀 잘 만들어져 있어요. 사이버 사이트가. 거기서 수업을 진행하고 있는데. 덕성여대 사이트가 좀 후져가지고. 그게 저의 실수였죠. 네이버에다 카페를 만들어가지고, 수업 카페를 만들어가지고 거기에다 글을 쓰는데. 그게 저는 당연히 내가 동의를 해야지만 다른 사람이 검색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저는 인제 뭐 제가 쓴 글이 아니라 한 학생이 글을 올리면서, 동의가 어떤 식으로 되어 있느냐 하면 검색을 하는 것을 거부하시겠습니까, 예, 해야 되는 거예요. 그냥 올리면 검색이 되는 시스템이더라고요. 저도 몰랐는데, 이번에 처음 알았는데. 하필이면 그게 <나는 가수다> 있잖아요? 그거에 대한 애들이 리포트를 올리는 거였는데 걔가 <나는 가수다>에 대해서 되게 비판적인 글을 써가지고 올렸는데. 네이버에서 ‘나는 가수다’ 치면 카페에서 제일 먼저 뜨는 글이 된 거예요, 그게. 왜냐하면 가장 최근에 쓴 글. 이게 완전히 노출이 되어 버렸는데. 얘가 또 습관적으로 그 리포트를 쓰면서 거기에 이름이랑 학번, 전화번호까지 다 써져가지고. 이게 그대로 노출이 되어 버린 거예요. 얘도 몰랐죠. 나는 검색할 일 없으니까 카페로 바로 들어가니까 몰랐는데 걔가 쪽지를 받았대요. 다행히 좋은 사람이 보내가지고 당신 알고 있냐, 당신 글 다 검색되고, 이것 저것 학번이나 이런 것 저런 것 다 된다, 그러면서 나는 당신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다. 제가 <나가수>에 대해서 되게 비판적으로 썼다고 그랬잖아요. 자기가 쓴 리포트에 대해서 그 사람 교수도 아닌데 강사도 아닌데 코멘트 이만큼 달아가지고. 오늘 수업 갔던 애가 선생님 그렇게 해 놓으시면 어떡해요, 라고 저한테 얘기를. 내가 한 거 아니라고 했더니 다른 한 학생이 그렇게 얘기를 해주더라고요. 지금 이 자본이 움직이는 방식 있잖아요? 그게 그 동의라고 하는 게 내가 동의를 했을 때에만 공개를 한다, 이게 아니라 우린 당연히 내가 그냥 글 올릴 대 그거 네가 물어봐야 된다, 라고 생각을 하잖아요. 근데 지네가 물어보는 방식이 아니라 우리가 알아가지고 해야 되는 방식 있잖아요? 이런 식으로 굉장히 교묘하게 만들어 놨어요. 그래서 당장 그 카페를 폐쇄를 해야 되느냐. 왜냐하면 우리 학생들이 굉장히 좀 비판적인 친구들이 많이 들어가지고. <나가수> 이런 건 잘못했다간 진짜 이거 테러당할, 신상 털리고 막 인제 이러면 골치 아파지는 거죠. 지금 말씀하신 것처럼 동의라고 하는 게 굉장히 악용되는 경우들이 있는 것.

 

청중

어떤 책에서 읽어봤는데 기준을 잘못 만들어 놓은 거네요. 한 마디로 얘기해서. 한 마디로 얘기해서 기준을 잘못 만들어서 교묘하게 지네 이득 방식으로.

 

청중

프라이버시 얘기한 것, 오늘 말씀하신 게 굉장히 중요한 이슈가 되고 있는데. 감시와 억압, 불안을 통해서 설명할 수 있고. 제가 이해하기로는 선생님 오늘 큰 담론을 얘기하시기 때문에 프라이버시에 대해서도 하나의 개념, 하나의 데피니션(definition)이 나올 수 있는 것에서 이야기를 전개하시다보니까 이것을 어떻게 해야 되는가에 관해서도 고민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이 되는 것이, 프라이버시를 얘기할 때 항상 문제가 되는 게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 프라이버시를 맥락이나 문맥상으로 결정지으면서 접근이 되는 학파가 있잖아요. 선생님 얘기하시는 것에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이 드는데요. 예를 들면 페이스북에 뭔가를 올린다고 할 때 그것에 대해 자기 자신의 내면이나 이런 게 다 드러나게끔 올려지고 올리지 않으면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을 수 없는 사회 분위기 때문에 사실 우린 상품화로 설명할 수 있는데. 작년쯤엔가 미국에 <뉴욕타임즈>에 그런 글이 올라오기 시작했었고 그것이 편집처럼 이것을 이용하고 또 다른 자신의 어떤 디지털 자아를 보여주고자 하는 그러한 욕망과 연결이 되는. 특히 젊은 애들이. 어떤 일상적으로 하지 않는 행동, 사실은 가까이 안 가면서, 평상시에는. 자주 가는 것처럼 사진을 찍고 글을 올리고. 이런 식으로 트위터나 페이스북에 터뜨려서 또 다른 자아를 만들고 보여주면서 또 다른 식의 인정을 얻어내는 그런 기제로 사용할 수도 있는 그런 면들도 있고. 아까 말씀하실 때 유이 같은 경우도 사실은 거기 나와서 그런 얘기를 했을 때는 팔려야 사는 아이돌 가수로서의 그런 아이덴티티(identity)를 가지고 그런 말을 한 거지, 한 명의 여자로서 그런 말을 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을 하거든요. 그래서 제가 생각할 때는 프라이버시라고 하는 것도, 인간은 어차피 다중적인 정체성을 가진 사람이고, 맥락과 상황에 따라서 뭐 하나씩 꺼내 쓰는 사람이고, 그때마다 프라이버시가 나타나는 규정이나 내용도, 그리고 사실 보호받고자 하는 프라이버시의 내용도 달라질 수가 있어요. 선생님 얘기하시는 것보다 조금 탄력적으로 볼 필요도 있지 않을까 생각을 했거든요.

엄기호

그렇죠. 왜냐하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아이덴티티라는 게 지금 이게 점점 더 복잡해지는 문제 중에 하나가 제가 아까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개인이라고 했잖아요. 그 개인이라고 하는 게 하나의 아이덴티티를 가지고 있는 존재가 아니라 여러 가지의 아이덴티티를 가지고 있다면, 그것도 동시적으로 여러 가지 아이덴티티를 가지고 있다면, 그 아이덴티티 중에서 무엇이 프라이버시에 문제가 되는 것이고 무엇이 연극에 문제가 되는 것인가가 되는 거거든요. 예를 들면 지금 말씀하신 것처럼 사이버공간 가 가지고 갑자기 내가 막 여자인척 하면서 이상한 짓을 한다, 이런다면 그건 제가 연극을 하는 거잖아요? 그에게 프라이버시라고 하는 게 있는가? 이 문제랑 내가 이 현실세계 속에서 내가 갖고 있는 프라이버시 있잖아요? 그것의 복제로서 이 사이버공간에서 내가 가지고 있는 다른 아이덴티티. 이거는 내 현실하고 맞닿아져 있는 것 있잖아요. 이것이 연루되어 있고, 프라이버시에. 이게 되게 달라서 지금 말씀하신 것처럼 얘기를 할 수 밖에 없죠. 근데 문제는 저는 이런 건 거 같아요. 약간 좀 저는 개인적으로 제가 어떤 해답을 주거나 뭐 정책을 만들거나 이런 것과는 아주 거리가 먼 인간이고 저는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라고 생각을 하거든요. 이렇게 되었을 때는 어떤 것이 문제가 되는가, 어떤 걸 우리가 더 생각해 봐야 하는가, 라는 질문을 던지는 게 제 포지션이지 저는 문제 해결하고는 아무 상관없는 인간이에요, 사실은. 그래서 저보고 해답이나 이런 걸 물으시면 저는 할 말이 없는데요, 라는 말 말고는 말씀을 못 드리는데. 문제가 뭐냐 하면 하나가 바로 우리가 아이덴티티를 가진다고 했었을 때 이 장소와 공간의 문제가 있는 거예요. 예를 들면 내가 어디 맛있는 데 가 가지고 먹고 와 가지고. 그게 뭐 사이버 공간이든 내 주변 사람들 만나 가지고 그 집 되게 맛있더라, 먹어봐라, 라고 제가 충분히 얘기할 수 있잖아요, 그죠? 이게 디지털라이즈(digitalize) 되기 전에는 내 주변 사람들한테 내가 얘기하는 것이란 말이에요. 이거는 충분히 내 바운더리 안에서 내가 통제 가능한 사람들 안에서 얘기가 되는 것이잖아요, 그죠? 누군가가 딴 데 가 가지고 뭐라 그러면 너 어떻게 그럴 수 있냐, 이딴 식으로 시킬 수가 있단 말이에요. 즉 이게 뭐냐면 이걸 장소라고 보는 거예요. 장소라고 하는 건 되게 물리적인 개념이에요. 우리 인간이라고 하는 게 장소에 속해져 있는 거죠. 근데 공간이라고 하는 건 이건 훨씬 더 장소가 가지고 있던 물리적인 이런 개념 보다는 훨씬 더 사회학적인 개념이거든요. 이게 사이버 이후에 세계화 이후에 이 장소와 공간을 다루고 있는 많은 사회학자들이 뭐라고 우리가, 어떤 세상에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다고 얘기를 하냐 하면 비장소적 공간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표현을 하고 있는 거예요. 이게 뭐냐면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요번에 미국이랑 영국인가에서 애들 사이버에 글 올리는 것 관련해서 다른 걸 뭐 하나 만들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렇게 만드는 이유 중에 하나가 우리가 비장소적 공간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특히 이 사이버 공간이 이런 공간이잖아요, 페이스북이나 뭐나. 제가 얼마 전에 봤던 되게 재미있는 예를 하나 들면 트위터 있잖아요? 트위터에 보면은 내가 끌 수도 있는데 안 끄면은 처음 세팅이 아마 자동으로 거의 자동으로, 예, 예, 예, 예, 예, 하고 누르다보면 내가 트위터 하는 장소 표시가 되잖아요, 그죠? 밤에 집에 들어와 가지고 심심해 가지고 우리 아파트에도 누가 트위터 하나 해가지고. 저는 제 꺼 꺼놓고, 제 프라이버시를 중요시 여기기 때문에. 주변에 트위터 이렇게 딱 하면 좌좌좌좌작 뜨잖아요? 딱 뜨는데 옆 동 아파트에 한 명이 있더라고요. 걔 트위터를 들어갔다가 깜짝 놀랐어요. 왜냐하면 걔 트위터를 들어갔더니 얘가 여자를 꼬시고 있는 중이었는데, 섹스하자고. 여자를 꼬시고 있는 중이었는데. 지금 이게 많은 사람들이 트위터 이거를 거의 문자 대용으로 쓰고 있잖아요, 그죠? 문자인 것처럼. 걔는 잘 몰랐던 것 같아요. 누가 가르쳐주지 않았으니까. 그러니까 뭐, 섹스는 해보셨나요, 이런 대화가 있잖아요, 자기 트위터에 줄줄줄줄 올라가 있는 거예요. 그게 지금 얘기하는 비장소적 공간으로서의, 걔는 우리 옆 동에 살지만 비장소적 공간으로서의 사이버에 올라갔었을 때 이거는 무한대로 내가 통제할 수 있는 범위 바깥의 문제가 되는 거죠.

이게 첫 번째고. 두 번째가, 이런 식으로 정리가 되는 게 첫 번째고 두 번째가 또 우리 그 디시인사이드 이런 데서 훌륭하게 활동하고 계신 분들이 한번 마음 작정하고 털기 시작하시면 모든 신상을 다 털어 주시잖아요, 그죠? 신상털기범들. 중국에서는 인육사냥이라고 얘기하는데 그분들이 한번 출동하셔서 털면 제 것도 다 털리는 거죠. 이게 뭐 장소에 있건 어디에 있건. 아까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질문하신 것처럼 여러 가지 다른 아이덴티티를 가지고 내가 활동을 하는데 이 신상털기범들한테 잘못 걸리면 죽 엮여 가지고 한 번에 바닥에 있는 물리적인 나 있잖아요? 이까지 다 털리잖아요? 그러다보니까 몇몇 사이버 연구하는 사람들이나 이런 사람들이 하는 얘기가 도대체 다중적인 아이덴티티를 가진다고 한다는 게 이게 얼마나 프로자일한가, 깨지기 쉬운 것인가, 있잖아요? 털리기 쉽고 깨지기 쉬운 것인가, 이런 얘기도 나오는 거죠. 특히 어린이, 중고등학생들 같은 경우에는 이게 재밌거든요. 문제의 핵심은 이게 되게 재밌으니까. 질문하신 것과 조금 다른 맥락인데 하나 말씀을 드리면 제가 학교폭력 문제 이걸 가지고 고민을 좀 많이 해요. 책도 보고 뭐 조사도 하고 하는데. 학교 폭력 문제를 보면 지금 거의 말세라고 지금 되죠, 우리나라 중고등학교가 말세가 된 것처럼 얘기를 하는데. 제가 이렇게 얘기를 듣거나 이렇게 보면 사실상 옛날이나 지금이나 별로 다르진 않아요. 근데 결정적으로 뭐가 다른가 하면은, 제가 그래서 아까 프라이버시 문제를 대중 인정투쟁 있잖아요, 그거랑 결합을 시켜서. 옛날에는 중계방송을 안 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이걸 다 중계방송을 하고 있는 거예요. 여기에서 바뀌어버린 감수성이 뭐냐 하면 옛날에는 얘가 제가 마음에 안 들잖아요. 야, 너 따라와, 이래 가지고 어디서 패냐 하면 화장실 뒤편에서 패요. 즉 안 보이는 데서. 폭력을 휘두른다는 것, 때린다는 것, 이거는 어지간한 경우가 아니면 교실에서 보다는 안 보이는 데 가 가지고 하는 거죠. 지금은 때리는 것도 그렇고 죽이는 것도 그렇고 어떤 것도 그렇고 어지간하면 동영상 찍어 가지고 올리죠. 저는 그게 더 큰 문제라고 생각해요

 

장여경

선생님 얘기하는 걸 듣다 보면 넋을 놓게 되는데. 지금 우리가 이 공간을 9시까지 비워드려야 해서요, 사실은 듣고 싶은 게 굉장히 많은데 마무리해야 할 것 같아요. 선생님께 너무 질문 드리고 싶은 것들 중에 하나가 누구로부터의 불안이냐, 누구로부터의 안전이냐. 거기서 바우만이 올드 빅브라더와 뉴 빅브라더의 가장 다른 점은 올드 빅브라더는 시민을 감시하는 빅브라더지만 뉴 빅브라더는 시민들이 스스로 호출한, 자신이 아닌 다른 타자들에 대한 감시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이런 얘기를 했거든요. 선생님 중간에 문제 학생 얘기라든지 범죄자 얘기라든지 하실 때 그런 말씀 하시고자 했던 게 아닌가 싶어요.

 

엄기호

한마디로 정리하면 이거에요. 우리는 우리 스스로 지금 정권, 정권이라고 얘기, 권력에 속아가지고, 이걸 이렇게 표현하거든요, 타자의 악마화 현상에 우리 스스로가 완전히 지금 매몰되어져 있죠. 등장하는 모든 타자들을 악마로 만들고 있거든요. 언론노조들이나 이런 걸 보시면 더 잘 아시겠지만 모든 타자는 다 악마의 얼굴로 나타나고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제가 이 프라이버시 문제라든가 이걸 역설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 하나의 전략을 말씀드리고 끝을 맺을게요. 예를 들면 성폭력 문제를 가지고 얘기해봅시다. 옛날에 우리가 서울대 우조교 사건이라고 안 하고 신정휴 사건이라고 불렀어요, 그죠? 처음에 사람들이 우조교 사건이라고 불렀었을 때 우조교 사건이라고 부르면 안된다, 라고 얘기했던 맥락이 피해자를 왜 폭로하냐, 이 프라이버시의 문제가 되는 거죠, 그죠? 우조교라고 했을 때 우조교라고 하면 사람만 나타내지 어느 새끼가 이 짓을 했는가, 라는 가해자가 드러나지는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가해자를 폭로하는 방식으로 우리가 얘기를 해야 되고 그렇게 폭로했을 때 프라이버시가 지켜진다, 이런 식으로 얘기를 했단 말이에요.

그런데 지금은 이때와는 다르게 바로 이 타자의 악마화라는 현상이 대두가 되기 시작하면서, 이건 뭐 공식적인 건 아니에요. 저라든가 몇몇 페미니스트들 중에서 급진적으로, 급진적 페미니스트라고 불리는 친구들이 요즘 어떤 주장을 하고 있냐 하면, 이번에 조두순 사건 있잖아요? 이것도 우리가 조두순 사건이라고 기억하지, 나영이였나 이름이? 가명인데, 나영이 사건이라고 안 불렀는데, 이거 아주 자동빵으로 생각을 했거든요. 그랬는데 이거에 대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심각한 문제의식이 뭐냐 하면 오히려 이거는 이제부터는 조두순 사건이라고 불러선 안 된다, 나영이 사건이라고 불러야 된다, 라는 얘기를 해요. 이걸 조두순 사건이라고 부르는 순간부터 이 모든 범죄는 누가 저지르는 게 되냐 하면 괴물들이 저지르는 걸로, 대단히 예외적인 사건으로. 근데 그 예외적인 괴물들이 우리 주변에 넘쳐나고 있다, 라면서 위험을 증폭시키고 불안을 증폭시키는 거 있잖아요? 이런 매체에 우리 스스로가 농락당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동시에 지금 보도가 되고 있는 이 프라이버시든 뭐든 있잖아요? 여기에서 제일 크게 우리가 문제 삼고 있는 건 이게 괴물화 되는 현상과 동시에 뭐가 사라져 버리냐, 하면 피해자의 고통은 아무도 지금 얘기하지 않아요. 피해자가 어떤 맥락에서 어떤 고통을 겪었고 그 다음에 그 고통 속에서 그는 어떻게 그걸 극복하고 있느냐는, 피해자의 서사, 피해자의 이야기 있잖아요? 이건 굉장히 낮은 수준에서의 프라이버시를 보호해줘야 된다, 라는 이름 속에서 이거는 사라져버리고 있는 거죠. 이게 우리가 지금 굉장히 황당해 하고 있는 거예요. 점점 가면 갈수록 우리의 진보진영 내지는 인권의 담론 속에서 피해자의 이야기는 가려져 벼리고, 그죠? 피해자의 눈물, 피해자의 뭐 이런 것들, 이거는 가려져 버리고 괴물들만 전면에 등장하는 이런 식이 되는 거죠. 아시다시피 나영이는 실명도 아니고 가명이었거든요. 그러니까 이런 부분에서 오히려 몇몇 래디컬한 페미니스트들이나 저 같은 인간들이나 이런 인간들이 네이밍하는 방식에서부터 우리가 다시 뭔가를 생각해봐야 된다, 그때 그러면 그 프라이버시라고 하는 건 뭐냐? 이런 질문들을 우리가 던져야 된다고 생각을 하는 겁니다.

 

장여경

선생님이 오늘 저희한테 굉장히 많은 질문을 던져 주신 것 같아요. 선생님이 뭐, 본인은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라고 이렇게 얘기하셨는데 다음 시간에 우리가 모실 선생님은 홍성수 선생님이에요. 이 선생님은 법과 인권의 관점에서 이제 프라이버시 문제를 접근을 하실 예정이고. 저희 기대로는 오늘 선생님이 던지신 질문에 일부를 그 분이 해답을 주시겠지요. 그런 의도로 의논을 했는데 과연 그렇게 될지. 개인정보에 대한 자기결정권이 소유권 아니냐고 묻기 시작하면 참 쉽지 않은 답이 되겠죠? 어쨌든 다음 시간에도 오늘 오신 분들 꼭 다시 뵙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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