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관용> 판매 인세는, 전액 <팔레스타인 평화연대> 활동 후원금으로 보냈습니다. 혹시 작년 샤를리 엡도 사건과 관련한 논쟁으로 책을 접하고 구매하신 분들 중 이 블로그에 들어오시는 분들이 있을까 하여, 참고하시라고 여기에 기록 남겨둡니다. 앞으로도 <관용>과 관련된 인세는 피지배 무슬림들과 연대 활동을 전개하는 각종 단체들의 활동 후원금으로 보탤 생각입니다. 감사합니다.
말씀하신 논문을 찾아 훑어봤는데, 참고문헌에는 빠져있지만 각주에는 제 논문이 한 번 언급이 되네요. 아마 실수로 참고문헌 목록에서는 빠진 게 아닌가 싶습니다. 저자가 제 논문을 참조한 듯한 흔적은 눈에 띄지만, 제 논문 자체가 드보르의 논의를 정리한 것이다보니 딱히 그 주장들에 대해 제 권리를 주장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좀 더 정확하고 꼼꼼히 출처를 밝혀줬으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은 남지만, 석사학위논문이다 보니 악의가 있었다기보다는 배워가는 연습과정의 실수라고 생각합니다. 나중에 혹시라도 저자 분과 연이 닿게 되면 제가 한 번 물어볼께요ㅎㅎ
관심가지고 알려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제 논문이 지금 하시는 공부에 도움이 되었다니 기분도 좋구요. 이 블로그가 어찌될지 알 순 없지만, 기회가 되면 온라인 상에서라도 종종 뵈요~ 그럼.
감사합니다. 오랜만이네요! :) 오디세우스보다는 헤라클레스를 갈망한다는 게 무슨 말씀이신지 알 것도 같지만ㅎㅎ 아무래도 이슬람 문제가 제가 실천적으로 연루되지 않은 영역의 이야기이다보니 정치적 관점을 분명히 드러내기는 조심스러워지네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학계의 논의 소개 정도이고, 나머지는 훌륭한 활동가분들이 많이 계시니 그 분들께 기대해 봅니다 :)
승철아 글 재미있게 잘 읽었어. 링크해준 사람의 글은 제대로 읽지 못했고, 형광색으로 색칠되어 있는 부분만 훑어 봤어. 그런데 읽으면서 드는 생각은 그냥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이라고 하면 될 것을 왜 인적 자본론에 대한 비판이라고 이야기하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네.
사실 인적 자본론은 경제학에서 가장 근간이 되는 모형 혹은 개념 가운데 하나인데, 이걸 비판하겠다고 나서는 건 경제학 자체를 비판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어. 그렇다면 실제 경제학에서 인적 자본론이 어떻게 쓰여지고 있는지를 좀 염두에 두고 비판이 이뤄져야 할 것 같은데, 링크해준 글에서 그런 부분은 없는 것 같네.
내 생각으론 현실을 단순화 시킨 모형을, 그것이 실제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지 고려하지 않은 채, 이데올로기적인 성격을 지적하는 건 너무 무리한 비판인 것 같아. 그리고 이걸 학문으로 인적 자본론이 아니라, 담론으로 인적 자본론에 대한 비판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링크해준 글을 쓴 사람의 의도가 그건 아닌 것 같구.
실제 경제학에서 인적자본론 혹은 균형을 통한 논의들은, 경제학자들의 사회현상에 대한 해석에서 근간을 이루고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은 이 모형이 현실에서 그대로 관철된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물론 예외도 있어), 여러 마찰적인 요인들에 의해서 다른 결과가 나타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어. 인적자본론에서 주로 다루는 대상인 교육(일반적인 인적자본), 일자리(직무를 통한 인적자본), 건강에 대한 투자나 의사결정 같은 경우도, 단순히 모형에서 다루는 균형이 그대로 나타난다고 보기보다 현실에서 정보의 비대칭성, 예산제약, 외부성( 혹은 동료효과), 행동경제학에서 다루는 선호의 문제 등에 의해서 여러 결론이 나타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구. 그리고 무엇보다도 실증적인 분석을 통해서 인과관계가 어떻게 나타나는 것인지 밝히려고 노력하고 있어.
경제학에서 인적 자본론을 비롯한 모형들은, 모형 자체가 밝히고 있는 내용들도 중요하지만, 어떤 조건들 하에서 이런 결과가 나타나며, 이런 조건들이 충족되지 않을 경우 결과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점을 밝힌다는 부분이 정말로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해.(사실 이런 부분은 복잡한 수학이 이용되는 경우가 많아서, 잘 전달되지 못한다는게 문제라고 생각되지만) 이런 세부적인 부분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내 생각으로는 신자유주의에 비판적인 견해를 지닌 경제학자들에게도 링크와 같은 인적자본론에 대한 비판은 진지하게 받아들여지기 어려울 것 같아.
혹시 지금의 경제학이, 인적자본론이나 인간 행위의 최적화 같은 모형들을 바탕으로 실제 어떤 연구를 하고 있는지가 궁금하다면, 아래에 링크한 Raj Chetty의 짧은 컬럼을 한 번 읽어주길 부탁할께. 그리고 좀더 여유가 된다면, 국내에서도 번역된 “가난한 사람이 더 합리적이다”(원제: poor economics)를 한번 읽어주길 부탁하고. 그럼 또 좋은 글 부탁할께.
응. 자세한 코멘트 고마워~ 근데 링크된 글의 하이라이트는 내가 한 게 아니라서 그 부분만 읽었을 때는 글이 어떻게 읽히는지 잘 모르겠네.. 내가 Feher를 읽은 방식은 너랑 좀 다른데, Feher는 인적자본론을 "비판"하고 있는 건 아닌 것 같아. 오히려 인적자본이 현시대의 지배적인 주체성이 되었다는 신자유주의적 조건을 인정embrace하고, 그 위에서 너가 언급한 예처럼 환경적 변인들에 개입함으로써 다른 방식의 선택이 가능한 조건을 "좌파적 입장에서" 고려해보자는 거지. 그런 점에서 (기존의 휴머니즘적 신자유주의 비판자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도발적인 주장인 거고.
물론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글에서 지적했지만 논의가 도식적인 데다가 너 말대로 실제 인적자본론이 현실 속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 혹은 경제학 쪽에서 어떻게 수용되고 있는지에 대한 논의는 많이 부실하지. 기본적인 포지션이 문화연구자인 저자의 한계이기도 하겠지만, 아마도 저자의 비판 포커스가 인적자본론 쪽이라기보다는 기존의 "자유로운 노동자"나 도덕 및 사회 개념에 기반한 신자유주의 비판흐름에 있기 때문이지 않을가 싶어.
내가 Feher에게 동의하는 부분은,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은 시장에 대립되는 도덕과 사회라는 가치에 의존하곤 하는데, 이 때 가정되는 도덕과 사회가 불변의 것이 아니라 신자유주의적 조건에 의해 이미 변화하고 있다면 어떡할 것인가?"란 질문 자체야. 이러한 변화가 최근에 사회적 경제 영역을 들여다 보면서 내가 보고자 하는 부분이기도 하고.. 그런데 그 해결책으로 페허가 제시하는 입장은 글에서도 표현했지만 그다지 동의하지 않아. (이 부분은 좀 더 고민해야 할 부분이니 나중에 만나서 함 이야기해보세~)
소개해 준 책은 재밌어 보이네. 잘 읽어볼께- 그런데 인적자본론 쪽이 너 박사논문주제하고 연결되어 있는거야? 아무튼 건강하고, 조만간 한국에서든 미국에서든 봅세-ㅎㅎ
- 예. 말씀하신 바가 그런 맥락에서 일거라고 생각했고, 문제의식에도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문제는 말씀하신대로 어떠한 방식으로 시장환상을 넘어설까에 대한 입장차겠죠.
이 부분에는 좀 복잡한 경제인류학 내부의 논의가 있는데, 모스 이후 많은 인류학자들이 선물-교환(사회) vs. 상품-교환(시장)의 단순한 이분법에 문제제기해왔죠. 그리고 모스주의 인류학자들은 이 도전에도 (다소 일반화하자면) 근본적으로는 이 구분을 유지해왔구요. 폴라니 같은 경우는 "이중운동"이라는 표현을 쓰면서, 시장과 사회를 마치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개별적인 행위자처럼 그리기까지 합니다.
제가 불만을 가진 부분은 이 부분이고, 사실 푸코적 관점에서나 (제가 이해하는) 맑스적 관점에서나 이건 받아들일 수 없는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문제는 오히려 시장과 사회가 자본주의 생산양식에서 어떻게 얽혀들어가면서 계급적대를 통치하느냐(그리고 그럼에도 적대와 모순이 어떻게 이 체계 전체를 가로지르느냐)의 문제일텐데, 모스주의적 관점에서는 사회와 시장이 각각 물신화되어 등장하는 느낌이 있어요. 이건 어떤 독립된 자율적 영역으로 가정되는 시장환상이 다시 들어올 뒷문을 열어주는 격이라고 생각하구요. (오늘날 윤리적 자본주의 논의에서 모스나 폴라니의 논의가 동원되는 이유라고도 생각합니다. 자본주의 자체를 문제삼기보다는 시장에 윤리와 사회를 외부적으로 접붙인다는 아이디어는 훨씬 간편하니까요.)
- 예. 말씀하신대로, 모스 자체가 선물 교환이 생산하는 사회적 관계의 이중성-평등한 연대와 수직적 권력 관계-을 지적한 바 있으니, 부르디외의 논의가 완전히 모스로부터 떨어진 것은 아니지요. 다만 이 이중적 관계에서 어떤 면을 더 강조할 것인가에 대한 오랜 논쟁들이 있어왔고, 평등한 연대에 초점을 맞추는 모스주의 인류학자들의 반대편 예로 부르디외를 제시한 것 뿐입니다. "원시공산제" 논의야 잘 아시겠지만 그 가정 자체가 워낙 논쟁적이어서.. (맑스주의에서 뿐 아니라 인류학에서도요..)
- 갑자기 예전에 세미나 같이 하던 기억이.. ㅎㅎ 덕분에 저도 생각이 한 번 더 정리됐네요. 이스탄불 오실 생각있으면 한 번 연락주세요. 시간 맞춰가 보면 좋죠ㅋ
- 적당한 타협이 아니라 정확한 분석인 것 같은데요ㅋ 저도 사실 말씀하신 (좌파) 경제인류학에 기반한 논의들에 굳이 그리 가혹할 필요가 있나란 생각도 드는데, 몇 년 전부터 한국에서 유행하는 (우석훈, 홍기빈씨 류의) watered-down된 버전의 모스나 폴라니 논의가 가져오는 정치적-담론적 효과들을 보면 많이 답답할 때가 있어서요. 이번 여름에 한국 갔다가 느낀 점도 많구요. 뉴욕에서는 또 그레이버가 스피커 역할을 했던 occupy 운동을 보면서 느꼈던 기대와 실망도 있고ㅎㅎ 그래서 이런 입장들에 대해선 좀 각잡고 논의해야 겠다는 강박이 좀 생긴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