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의 정치적 입장 혹은 과오를 떠나, 인간 노무현과 그의 진정성 만은 존경한다"에 대한 비판은 마치 저를 향해 보내진 편지처럼 느껴지는군요.ㅎㅎ노무현을 한국식 보나파르티즘의 원형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어떻게든 고인에 죽음에 안타까워해야 할 것만 같아서 '수치심'이라는 도덕적('윤리적'이라는 시크한 용어로 비판을 피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덕목을 강조하는 쪽으로 생각을 하고 있던 차였습니다. 사실 제가 이런 식의 태도를 취해봤던 데에는 먄약 노무현의 죽음에 슬퍼하지 않는다면 제 자신이 냉소주의자가 되지 않을까하는 두려움이 작용했던 것 같습니다. 지젝이 언젠가 "Why cynic are wrong?"이라는 글이 말했던 것처럼 결론적으로는 정치와 무관한 관조적 분석가의 입장에 자리잡아 공부로 '소일'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두려움말입니다.
어쨌든 중요한 건 그의 죽음이 오늘날의 정치적 지형 내에서 어떠한 변화를 이끌어나갈 수 있느냐는 물음일텐데 확실히 긍정적인 답을 내리기는 어려운 질문같습니다. 그와 함께 정치적 도덕주의도 종언을 고한 것이 아닐까요. 그리고 나면 세속주의/실용주의가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도 괜히 앞질러 가는 것이 아닌가 싶군요. 발리바르가 90년대 초반에 유럽의 상황에서 일찍이 진단했던 내셔널리즘적 반동이 일어나지 않을까 싶기도 하구요. 동아시아라는 지리적 위치에서 도덕주의라는 대용물도 잃은 정치적 정체성의 공백이 어떤 정세적 효과를 낳을지에 대한 논의가 긴급하게 요구되는 이론적 과제가 아닌가 싶습니다.
하지만 아직 시간이 충분히 지나지 않았기에 분석에 곤란이 따르는 위의 어려운 문제는 일단 차지하고서라도 저는 브라운의 주장과 관련하여 이 포스트에 다른 리플을 남겨보고 싶습니다. 제 질문은 "정치적 도덕주의"의 등장이 과연 대중의 실제적 곤란을 묘사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진보정치를 고민하는 좌파진영의 곤란에 태어난 담론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즉, 브라운은 현재의 자신(과 동료들의) 정치적 곤란을 강조하기 위해 과거의 사회 일반에 어떤 '정치의 계절'이 있었다고 낭만주의적 환타지를 품고 있는 게 아니냐는 것이죠. 정리본만을 보고 이런 주장을 무리하게 덧붙이려는 욕심의 근저에는 브라운에 대한 불만보다는 최근 저 자신의 정치에 대한 생각에 대한 반성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20대 초반의 제 자신이 어쩌면 제 세대(혹은 그저 저 자신)가 경험하지 못했던 (사회적 모순에 대한 지각이 뚜렷한 상태로 명확한 정치적 방향성을 가진)진보적 대중운동이라는 것이 실제 당시의 시점에서는 그렇게 뚜렷한 자각을 가진 채 진행되었던 것만은 아닌가 싶더군요. 오히려 그러한 '완벽한 대중운동' 자체가 사후적으로 환타지로서 구성된 것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자신의 정치적 무력감을 그 환타지를 향유하며, 사실 이상적 운동이란 없으며 도덕주의든 감상주의든 뭐든 불안정하고 비합리적인 방식으로 분출되는 것 자체가 '정치'의 본질이라는 걸 인텔리적 감각 아래에서 '부인'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구요. 이는 윗 리플에서 말한 지젝의 글을 읽으며 느낀 두려움과 연관되어 있을 것입니다. 특히 랑시에르의 민주주의론을 듣다보니 이런 생각이 보다 더 강하게 들더군요. 그리고 이런 개인적인 반성의 논리들은 대중의 수동성 혹은 탈정치성을 강조하는 일련의 '포스트히스토리'담론들(이런 거친 일반화의 대상이 과연 무엇인지 의문시할 수도 있겠습니다만)에 적어도 '혐의'로서는 적용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정치적 도덕주의'에 대한 담론 자체가 전과는 딱히 다를 게 없는 '몰반성적'인 대중을 더 이상 이끌어나갈 자신감을 상실한 좌파 진영의 곤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냐는 것이지요. 만약 그렇다면 보다 정치해지고 있는 포스트히스토리 담론 자체가 분석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습니다만 대중을 향한 '생떼'에 불과한 것은 아닌지 하는 조금 과도한 의심을 해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중의 혁명적 성격을 물신화하고 자신의 책임을 모두 방기하는 봉기주의가 이런 입장과 교묘히 짝을 이루는 '정치로부터의 회피'라는 동전의 뒷면이 아닌가하는 생각도 드는군요. 그렇다고 포스트히스토리담론들이 actuality를 상실한 사변적 구성물이라고까지는 말하고 싶지는 않고 또 그렇게 말할 능력도 되지 않는다만, 담론 자체의 당파성이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 것인지에 대한 반성과 자각이 뒤따르면 더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덧붙여 봅니다.
이 문제는 따로 글을 남기지 않고 댓글로 답변 드리겠습니다.^^ 몇가지 지점들이 섞여 있어서 정리하면서 얘기드릴께요.
1.아마도 포스팅에서 언급한 웬디 브라운이든 누구든, 정치의 한 본질이 비합리성 혹은 반이성이라는 것을 부정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정치의 본질로서 "신화"를 이야기한 소렐은 말할 것도 없구요.^^ 말씀하신 부분은 오히려 하버마시안들에게 어울리는 지적이 아닐까 싶습니다. 노통에 대한 추모의 물결에서 보듯이, 공식적으로는 이해관계에 따른 합리적 선택일 뿐이라는 투표 행위에조차 "끈적한 어떤 것"은 항상 붙어다니기 마련입니다. 이런 부분을 단지 탈정치성으로 간과한다면 "정치공학"이 아닌 "정치"에 대한 담론은 불가능하겠죠. 하지만 문제는 이러한 비합리성의 계기적 중요성을 이야기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비합리성이 발현되고 코드화되는 "형식"에 대한 분석입니다. 아마도 이 부분이 웬디 브라운의 고민이 아닐까 싶군요.
2.웬디 브라운의 일차적인 분석 대상은, "정치라는 것"을 둘러싼 정치철학적 담론들입니다. 물론 말씀하셨다시피 그렇다고 이것이 현실에서 작동하는 정치에 대한 상상력과 무관한 것은 아닙니다. 학자들의 정치담론이라는 것도, 결국 현실 속의 입장을 좀 더 세련된 언어와 좀 더 정교한 체계로 구성한 것일 뿐이고, 또 아카데믹 담론과 현실 담론은 순환하기 마련이니까요.
3.포스트-히스토리 담론의 혐의로 지적한 부분에는 동의합니다. 개인적으로는 포스트-히스토리 담론이 당파성을 가지기 위한 핵심은 시간의 불균등성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지금도 역사를 살고 있는 이들이 존재한다는 것 혹은 역사의 생기가 지금도 가능하다는 것을 가정하지 않으면, 포스트-히스토리 담론은 후쿠야마 주장의 좌파적 뒤집기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선 나중에 좀 더 이야기를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네요. 잠이 와서 댓글이 좀 두서가 없군요.ㅎ
여러가지 논점이 뒤섞인 리플에 깔끔한 정리답플에 감사드립니다. "시간의 불균등성의 인정" 부분은 정말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읽었습니다. 발터 벤야민이 해방될 후손들에 대한 기대보다는 오늘날의 지배적 서사와는 다른 방식으로 전개될 수도 있었던 과거의 사건, 가능성들에 중점을 둔 것도 대중의 혁명적 잠재력에 대한 가정(믿음)이라는 맥락에서 이해해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포스트히스토리를 인정하는 동시에 세밀한 관점에서 역사의 종말의 불가능성, 그리고 동물화의 불가능성을 지적하는 작업이 이루어져야 되지 않나 싶군요. 개인적으로는 발리바르의 텍스트에서 그런 작업들이 이뤄지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이름붙이기의 이론적인 유혹을 경계하고 거기에서 아포리아를 찾아내는 그의 작업은 '동물의 시대'라는 개념으로 현 정세를 투명하고 정적인 방식으로 규정하는 히로키와 대비했을 때 방법론적인 덕목을 갖추고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히로키 자신이 교수신문 인터뷰에서 그 점에 대해 흔히 '오해'받고 있다고 말한 것 같습니다만 일단 제가 아는 한에서의 히로키는 위의 혐의를 벗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