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원 씨의 글을 보면서 나눌 수 없는 것을 나누고 있다는 인상을 막연히 가지고 있었는데 캐즘 님의 지적을 보니 갈증이 확 풀리는군요ㅎㅎ지젝의 논의도 이렇게 적용해서 들으니 새롭구요. 스스로의 태도를 다시금 반성해보게 됩니다. 그리고 이건 캐즘 님이 설명하실 부분이라기보다는 지젝의 몫이겠지만 '분석'과 '행위'와 대립하지 않는다는 점에 인정한다해도 양자 사이의 불투명한 간극이 없다고 말을 하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그리고 분석의 자족적 성격에 대한 두려움이 나오는 것이고요. 리플과 포스트 모두 감사히 너무도 잘 읽었습니다. 아 그리고 논문도 잘 읽었습니다ㅎㅎ덕분에 생각을 진척시켜나가는데 있어 큰 도움을 얻었습니다.
너의 글의 나오는 표현을 빌리면 나는 아마도 (1)에 속할 것 같다. 인간 노무현과 정치인 노무현을 구분할 생각을 하지는 않았지만, 인권변호사 시절의 일종의 정치적인 실천가 노무현을 포함하여 정치인 노무현'들'을 역사적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거슬러 올라가 추출한 모습을 현재의 다른 사안들에 어떻게 접속을 시킬 수는 없을까라는 생각을 꽤 했는데(그의 죽음이 슬퍼서 그런 것은 아니고, 현상이 나타나니까 나름대로 생각을 해 본다는 것이......), 어쩌면 말이 '역사적'일 뿐 결국에는 '탈역사적'인 생각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 될 수도 있겠구나(노무현'들'이라는 표현이 가능하다면, 노무현'들'을 잘 구분해 내는 분들도 있을 수 있겠지만 나는 자신이 없어지는군......(^-^;)). 최악의 경우에는 MBC 같은 방송에서 과거의 노무현으로부터 시작해 죽음을 맞이한 노무현까지 연속해서 보여 주는 것과 별반 다를 바가 없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고. 덕분에 좋은 생각을 얻었어(^-^)-
그런데 궁금한 것이 있는데...... 이를테면 데리다의 논의에 기대어 애도를 이야기하면서 복수의 노무현을 이야기하면서, 그 복수의 노무현을 하나씩 분리하는 작업도 너의 구분 방식을 빌리면 (1)과 어느 정도 겹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렇게 전개되는 애도도 결국 '탈역사-탈정치'의 효과를 불러일으키게 된다고 할 수 있는 건가? 거슬러 올라가는 과정을 통하여 애도를 하는 작업이 반드시 '원형'을 '발굴'하여 고인의 좋은 점을 계승하고 발전시키자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것인지라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야. 물론 네가 분석한 것은 애도의 담론 자체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노무현의 죽음을 둘러싼 애도의 담론이지만, 글을 읽다보니 궁금한 것이 생겨서 말이야(^-^).
음. 좀 뒤늦게 답글을 달자면.. 일단 무연도 말했듯이 이 글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은 죽음이나 애도 전반에 관한 문제는 아니야.(사실 5월이 가기 전에 한번쯤 91년 5월을 다루며, 죽음과 정치의 문제에 대해 글을 써보고 싶었는데.. 어느새 6월이네.^^;; 내년엔 반드시..ㅎ) 사실 노무현에 대한 부분도 포스트-히스토리에 대한 글을 쓰다 생각나 덧붙인 성격이 강해서 좀 더 정리가 필요할 것 같아.
일단 데리다는 잘 모르기에 조심스럽지만, 추측하자면 데리다가 말한 복수의 대상에 대한 애도라는 말은, 애도의 대상이 어떤 동일성으로 환원되는 것에 문제제기하고자 했던 게 아닐까? 그런데 사실 여기서 더 나아가자면, 우리가 누군가의 죽음을 애도한다는 것은, 그의 복수성을 인정하는데서 더 나아가, 애도의 대상이 되는 이조차 모르고 있던, 그의 것이었으나 동시에 그에게 속하지 않은 무엇을 애도하는 것일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드네.(애도의 대상은 이미 없기에 애도라는 행위는 언제나 남겨진 주체의 몫이거든.) 그렇게 따지자면 노무현의 죽음에 대해서도 우리는 노무현 그 이상을 애도해야 하는 것이겠지.
사실 이러한 탈중심화는 애도를 하는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인 것이, 누군가의 죽음은 내 안에 있지만 나도 미처모르는 어떤 부분, 즉 나와 타자와의 기존엔 인식하지 못했던 연결성과 '나'의 취약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주는 사건이기에, 결국 애도란 건 되돌려줄 수 없는 타자의(그러나 송신자에게 귀속되지 않은) 어떤 메세지와 나도 모르는 나의 외밀한 어떤 부분의 불가능한 단락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닐까?(물론 반농담이고, 나는 이런 공허한 말장난을 그리 좋아하지 않아..^^)
단지 내가 흥미로운 건, 이런 모호한 감정을 정리하는 애도사가 그 대상에게 어떤 자리를 배정해 주는가와 관련된 지점이야. 이는 동시에 애도의 주체가 차지하는 자리를 배정하는 것이기도 하지. 마치 한국 사회 운동의 담론에서 애도의 대상을 "열사"로 지칭할 때, 애도의 주체는 자연스레 "전사"의 위치를 차지하는 것처럼...
무연의 말처럼, 노무현의 원형을 거슬러 올라가 발견해 애도하는 방식이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애도사가 어느새 집권자로서의 노무현의 위치를 은밀히 삭제하고, 노무현에게 반민주화 세력에 의해 희생된 "희생자"의 위치를 배정하고 있기 때문이야.(그렇다면 이 때 애도의 주체들에게 배정되는 주체-위치는 어디일까?) 그리고 이러한 방식은, 내가 보기에, 소위 민주화운동 세력이 지난 집권 기간 동안 지속적으로 민주화담론을 활용한 방법과 정확히 일치하지. 즉, 김대중-노무현 정권동안 이들은 자신이 이미 "지배계급의 분파"임에도, 자신들의 지배적 위치를 은밀히 삭제한 채 자신들이 지속적으로 한국 사회의 가장 "보편적" 적대인 "민주화투쟁"을 전개하고 있다고 "믿었거든". 그간 민주화담론이 여타의 사회적 적대들을 전치시키는 텅 빈 담론으로서 기능했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이런 부분을 염두에 둔 것인데, 난 사실 지난 대선에서 "민주 대 반민주" 담론이 무력화되면서 이러한 환상이 이제 소멸단계라고 생각했었던 것 같아.
노무현의 죽음을 통해 확실해진 것은, 이러한 텅 빈 "민주화"라는 전선이 다시금 생명력을 얻을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는 것이고, 불행히도 난 이러한 부활을 그다지 환영할 수 없어. 오히려 이 부활한 "민주화"라는 거대한 비이야기가 좀 더 급진적인 목소리들이 나올 수 있는 공간을 협소하게 만들거나 구체적인 사회적 적대들을 다시 한번 재흡수하는 기능을 할까봐 걱정하는 편이지. 암튼 술먹고 쓰니 주저리주저리 말이 많군. 나머지 얘기는 다음에 만나 해보자. 그나저나 메일이나 다시 보내달라니까..-.-;
오랜만입니다. 캐즘님의 글이 제가 요즘을 갈등을 느끼고 있는 지점을 정확히 지적하고 있어서...한켠으로 뜨끔합니다. 제가 살고 있는 곳은 80-90년대 초반 사회과학 담론들을 통해 형성된 구체적 적대의 지점들을 추출해내기 힘든 곳입니다. 흔히들 이민자들의 정치적 정서는 그들이 이민을 결정한 시기 고향의 정서와 정확히 일치한다고 하죠. 70년대 박통시절 이민온 교포들의 정치적 정서와 90년대 이후 운동의 접점이 분화한 이후 시기에 성장한 유학생들의 정서가 보수와 진보의 엉성한 이분 구도를 형성하고 있는 곳이 이 곳 이민사회입니다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당연히 찾을 수 없기에--표류하고 있는 민족주의자들이 간혹 있기도 합니다만). "인간 노무현"에 대한 애도가, "분석" 과 "대응"을 포기한 대중들이 자신의 짜증과 무기력을 분출해 내고 있는, 깊이를 찾기가 민망한 "사건"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대중이 목말라 하는 것이 싸움과 전복이 아니라 단순한 감정의 분출구라는 것을 2000년대 이후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잘 알고 있죠. 노무현을 애도하는 대중의 정서는 월드컵에 열광하던 대중의 정서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을거라 생각합니다. 하긴 저 자신 또한 몇주째 우울하고 참담한 심정으로 살고 있으며 추모회까지 마련한 장본인이니, 이렇게 쿨한 척 하면서 말할 주제가 안됩니다만), 그나마 MB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는 목소리들이 그의 죽음을 통해 "들리기" 시작한 즈음의 교민사회에 어떻게 개입해야 하나, 혹은 그저 지켜 봐야 하나, 저는 그것이 고민입니다. 제 자신의 냉소주의와, 무기력과, 실속주의가 서로 다투며 머리를 시끄럽게 하고 있네요. 지젝식으로 말하자면 이 우울의 증후, "기만 적인 스펙타클" (애초에 가져 본 적이 없는 숭고한 영웅을 그리워하는, 말하자면, 결핍이 상실처럼 전이되는 과정을 겪고 있는) 이면에 어떤 욕망의 대상 원인이 숨어 있는가 분석해내는 것이 최우선이라 생각합니다. 우선 제 자신의 욕망 부터요.
오랜만이네요. 봄나물님^^ 노무현의 죽음이 참 여러 사람 머리를 복잡하게 하네요. 저도 얼마 간 이래저래 일이 손에 안 잡혀, 머리 속을 좀 정리해보고자 쓴 글입니다. 그리고 봄나물님이 마지막에 말씀하신 내용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런데 혹시 봄나물님 지금 계신 곳이 독일인가요? 얼마 전 독일에서 공부하는 선배에게 비슷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서.. 어쩌면 이민사회는 어디든 비슷할지도 모르겠군요..
아. 전에 소개해주신 버틀러의 precarious life를 재밌게 봤고, 이번 상황을 보면서 생각을 정리하는데에도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감사합니다.:) 조만간에 michel de certeau의 도시공간에 대한 사유를 주제로 논문을 하나 쓰게 될 것 같은데, 혹시 이메일 주소 남겨주시면, 부끄럽지만 나중에 보내드릴께요. 봄나물님의 관심사와 직접적으로 일치할 것 같지는 않지만, 예전에 세르토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하신 말이 기억나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