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저도 막 모스를 읽으면서 비슷한 생각들 하고 있었는데 ㅎ 사실 캐즘이 링크 걸어놨었던 중대신문 기획 "사회적인 것"...글들 하나 하나 보려고 하고 있어요. 대충 분위기 파악하려고. 근데 기획하면서 들어가는 짧은 말에 역시 모스와 뒤르껨식으로 "사회" "사회적인 것"을 일종의 성스러운 것으로 동일시하는 것이며 신자유주의에 오염 내지 위협받는 성스러운 공간으로 처리하는 것 (그러면서 신자유주의를 일종의 물질만능주의에서 더나아가 반사회적 혹은 "속"의 기획으로 처리하고, 사회를 그것으로부터 보호해야 한다는 식의...) 흥미롭게 봤슴. 물론 이와 같은 처리는 특히 진보/좌파라고 하는 공간에서 너무 자주 발견되는 도덕적 비판이긴 하지만요...어쨌던 이 문제와 관련해서는 너무나 많은 이야깃거리가 있어서 중략하고.... 현지조사 이야기와 윤리의 금융화라는 관찰 재밌는데요?
근데 전 이제 슬슬 오메가 쓰리 말고 진짜 마약을 먹어야 하나 하고 있는 중인데 벌써 정관장 홍삼엑기스라니 진도가 빠르군요 ㅋ;;;;
예. 지금 블로그가서 글 읽고 왔어요. 안그래도 논문 쓰면서 바따이유-끌라스트르-데리다같은 반-모스적 사상가들을 많이 써먹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지요.(어떻게 쓸 지는 아직 모르지만ㅎ) "윤리의 금융화"는 한번 밀어볼까 생각 중인데^^ 지도교수 왈, "금융을 끼워넣는 순간 읽어야 될 문헌 수가 엄청 뛸텐데?" 안그래도 지금 bibliography 작성 중인데 이건 뭐 끝도 없이 나오네요.. 휴..
그나저나 홍삼엑기스와 커피 강추함. 어제 룸메이트한테 임상실험도 했는데, 오늘 하루종일 korean ginseng의 위대함에 대해 함께 찬양하고 있음요.ㅎㅎ 조만간 논문 다 읽고 또 연락 드릴께요~
화이팅 입니다! 압박을 더해드리려는 것은 아니지만 캐즘님의 논문이 무척 기대된다는 마음을 숨길 수가 없네요. 캐즘님께서도 이미 잘 알고 계시다시피 요즘은 캠퍼스 내에서도 예컨대 SIFE와 같은 사회공헌 비지니스 동아리들 (http://enactus.org/, http://www.koreasife.org/index.php)이 금융투자동아리들과 더불어 제일 핫하게 잘나간답니다.
특정 시기 자본주의 주체화 양식의 역사적 양태로서의 '자산'이라는 문제설정이라고 이해해도 될까요?ㅎㅎ 워낙 돈에 관심이 없이 지내다보니 자산이라는 말의 의미와 무게가 대학 졸업할 때 즈음에 와서야 다가오더군요.
노동소득(임금)보다는 자산의 축적/관리가 주요한 계급유지/상승의 수단으로 사용되어온 한국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 단어의 정의를 경제적 관점이 아닌 일련의 사고체계, 주체화 메커니즘으로 보려는 시각이 유효성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단상을 해보았습니다. 박해천 씨의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의 기획도 이런 관점에서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도덕적 공동체를 대안으로 내세우는 모스주의 인류학자들(예컨대, 그레이버)이 데리다의 모스 비판에 적대적으로 반응"이라는 부분에서 학술동향 업데이트에 있어 도움을 얻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객지에서 그래도 몸 건강히 계시는 것 같아 다행이군요. 먼젓번에 뵈었을 때 전혀 살이 찌지 않으셨던 것 같은데 먹는 걸로 스트레스를 푸는 스타일이라고 하시니 뭔가 부럽고 그렇습니다ㅎㅎ 건강히 지내시길!!
사실 한국 자본주의뿐 아니라, 부가 노동의 결과물로 상상되던 (발전주의적 멘탈리티?) 사회에서 돈이 돈을 벌며 자가 증식하는 (재현의 위기?) 사회로 변화했을 때, 자신과 부, 자신과 세상, 자신과 사회가 관계맺는 에토스 전반이 완전히 변할 수 있겠죠.
당연히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고, 볼탄스키나 바우만 등이 모두 한 얘기이긴 합니다. 방금 읽은 아티클에도 이런 문구가 있네요. "Finance, by constituting a primary frame of interpellation of subjectivity, becomes a primary 'technology of the self." 하하;;
그냥 지금까지 제가 이 문제를 도덕-사회적인 것 vs. 정치적인 것의 대립구도를 중심으로 이해해왔는데, 경제적인 것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자칫 공허할 수 있겠다고 느낀 거라고 보시면 됩니다. 지도교수의 우려는 너무 판 크게 벌리는 거 아니냐란 거구요. 이런저런 이유로 프로젝트는 좀 수정될 것 같네요.
시간이 참 안갈텐데.. 그렇다고 너무 스트레스 받지는 마시고 다음에 뵐 때까지 건강 잘 챙기시길 빕니다..
- 윤리적 자본주의를 어느 정도까지 규정하느냐에 달린 일이 아닐까요? 이 논의가 단순히 윤리적 소비, 투자, 자선의 문제라면, 설마 이것들이 현 자본주의 위기극복의 프로젝트가 될 수 있다고 믿을정도로 제가 순진하겠습니까? (아시면서..ㅎㅎ) '윤리적 자본주의'로 제가 궁극적으로 염두에 두고 있는 건, 무-적대적 공간으로 물신화된 사회를 시장의 하위파트너로 끌어들이면서 시장만능주의를 '교정'한다고 이야기하는, 말하자면 벤 파인이 '포스트-워싱턴 컨센서스' 신자유주의라고 부르는 흐름이에요. 경제학으로 치자면 조지프 스티글리츠부터 아마티아 센까지 이르는 스펙트럼.. 사회적기업이나 착한소비는 이러한 흐름에서 돌출되어 나오는 관찰용이한 현상들일 뿐이구요.
이건 사실 프로젝트라기보다는 이미 도래한 현실(전 김대중-노무현의 정책도 금융부분을 제외하면 포스트-워싱턴컨센서스 신자유주의에 가깝다고 봐요)이라고 보는데, 이런 흐름에 대한 정치한 비판들이 없다는 게 아쉬운 거죠. 워낙 협소한 담론 지형이다보니 시장의 불완전성과 "사회"의 필요성만 얘기해도 (이미 20여년 전부터 월드뱅크 총재도 이런 건 순순히 인정하는데!) 진보 담론으로 둔갑되는 현실이니까요. 지금까지도 그랬고 앞으로도 이 영역이 좌파적 기획과 담론을 흡수해버리는 블랙홀이 될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보구요. 그 동네도 Merkel의 '공식' 이데올로기는 어디까지나 "Neuen Sozialen Marktwirtschaft"아닌가요?
- 저는 모스-폴라니-M.A.U.S.S 그룹-그레이버로 이어지는 소위 모스주의 인류학이 가진 비판성에 회의적이라서요. 들여다볼수록 이들이 생각하는 "자본주의"개념의 얄팍함과 이들이 자본주의의 모순을 어떻게 은밀히 "시장"과 "사회(혹은 공동체)"의 모순으로 전치시키는지가 눈에 밟혀서ㅎㅎ 할 얘기는 태산같지만 댓글로 하기엔 부적절할 것 같고. 모스가 뒤르켐이랑 대비된다고 보신 건 놀랍네요. 사실 모스 인류학은 뒤르켐의 연대주의 사회학 확장버전이라고 봐야할테고, 모스 본인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을 듯 싶은데.. 물론 뒤르켐을 파슨스의 선조 정도로만 한정짓자면 대비시키는 것도 가능하겠으나..
데리다의 환대론은 워낙 watered-down 버전이 정식 해석처럼 돌아다니고 있어서요. 뭐. 활동가들이 그렇게 쓰는거야 나름의 정치적 효과를 가질테니 관대하게 생각하는 편이지만, 이론 공부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쓰는 건 잘 이해를 못 하겠더라구요. 아마 데리다의 환대론은 나중에 얘기할 기회가 있을 것 같아요. 사실 어쩌다보니 제가 미국와서 지금까지 제일 많이 읽은 게 데리다라;;;; (한국에 있을 땐 한자도 안 봤는데. 사실 지금도 그리 좋아라하진 않는다는ㅎ)
- 조금씩 추워지는데 건강 조심하시구요. 얼마전에 기본소득 논의를 들여다볼 기회가 있어서 예전 논문찾아 다시 읽었다는..ㅎ 재밌었어요! 박사논문도 그 쪽으로 계속 작업하시는 건가요? 내년 여름에 혹시 어디에 있을 예정이신가요?
- 말씀하신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윤리적 자본주의는 앞의 두 축적체제와 같은 레벨에 있는 건 아닌게 맞겠죠. 그렇다고 단순한 이데올로기적 포장이라보기보다는, 굳이 조절이론 쪽 용어들을 계속 쓰자면, 앞의 두 축적체제의 조절양식 정도로 보는게 맞을 것 같은데요. 국가가 아닌 윤리적으로 활성화된 사회와 시민들이 체제 재생산과 계급 투쟁의 조절을 담당하는.. 말씀하신 네오케인즈주의가 기존 케인즈주의와 다른 부분이기도 할 거구요. 그런데 최근 맑스주의 쪽에서 녹색자본주의나 네오케인즈주의를 쫓아가고 있는 논의가 있으면 소개 좀 해주세요. 독어말고 영어로 ㅎ
- 음... 그런 식으로 보면 대립시킬수도 있겠지만, 우선 모스는 생산과 노동에 대해 이야기한 바가 없어요. 증여론을 봐도 뒤르켐이 분업과 직업집단에 했던 도덕적 작업의 연장선상에서 자기 작업을 이해하고 있어요. 제가 제대로 기억하고 있나 싶어 해당 페이지를 찾아봤더니 다음과 같이 적혀 있네요.
"In the liberal professions of our great nations to some extent a morality and an economy of this kind already flourish. For them honour, disinterestedness, corporate solidarity are not vain words, nor do they run counter to the necessities of work. Let us humanize in the same way other occupational groupings and improve them still further. This will represent great progress, as Durkheim has often advocated."(71)
저는 사실 모스의 논의가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준다고는 생각하지만, 모스 본인의 사회적 스탠스나 이론적 지향 자체를 뒤르켐식의 "(사회적) 자유주의" 이상으로 생각하는 건 무리라고 봐요. (물론 그레이버는 동의하지 않겠죠ㅎ) 호네트가 모스를 뒤르켐과 대비시키고 싶어한다면, 그건 아마도 최근의 에나프가 인정투쟁의 틀을 빌어 재해석한 모스가 아닐까 싶네요.
- 말씀하신 대로 경제인류학의 논의, 특히 그레이버의 논의가 많은 예들을 제공해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이 투명한 것처럼 사용하는 예들 중에 상당수가 서양 인류학자들이 "원시사회"에 가서 제대로 보기는 했나 싶은 검증이 필요한 논의들이 많다는 점이 일단 함정이구요.
맑스주의적 관점에서 보자면 선물 교환은 그냥 상품 물신 이전의 인간 자체가 물신화된 현상일 뿐이지 않을까요? 젊은시절 부르디외가 모스를 비판하면서, 상품교환을 상징폭력의 형태로 보고 시장과 국가 제도가 발전하기 이전의 지배관계 재생산 장치라고 주장한 이유이기도 하지요. (관심이 있으시면 Outline of a Theory of Practice를 보세요.) 자본주의가 피와 오물을 뒤집어 쓰고 등장한다는 게, 전-자본주의 사회가 피와 오물로 뒤덮인 사회가 아니었다는 의미는 아니라는 것. 몇몇 모스주의적 논의는 스스로는 부정해도 궁극적으로는 전-자본주의에 대한 낭만적 가정과 그 속에서 자본주의 비판 가능성을 찾겠단 루소적 전제 하에 작업하는 것들이 꽤 있지요.
아. 오랜만에 한글로 이런 논의하니까 재밌네요ㅎㅎ 저 내년 여름에 이스탄불과 그리스 방문 예정인데, 오셔서 지중해나 함께 보심이 어떠실지.. 논문은 기대하고 있을께요!
- 예. 말씀하신 바가 그런 맥락에서 일거라고 생각했고, 문제의식에도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문제는 말씀하신대로 어떠한 방식으로 시장환상을 넘어설까에 대한 입장차겠죠.
이 부분에는 좀 복잡한 경제인류학 내부의 논의가 있는데, 모스 이후 많은 인류학자들이 선물-교환(사회) vs. 상품-교환(시장)의 단순한 이분법에 문제제기해왔죠. 그리고 모스주의 인류학자들은 이 도전에도 (다소 일반화하자면) 근본적으로는 이 구분을 유지해왔구요. 폴라니 같은 경우는 "이중운동"이라는 표현을 쓰면서, 시장과 사회를 마치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개별적인 행위자처럼 그리기까지 합니다.
제가 불만을 가진 부분은 이 부분이고, 사실 푸코적 관점에서나 (제가 이해하는) 맑스적 관점에서나 이건 받아들일 수 없는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문제는 오히려 시장과 사회가 자본주의 생산양식에서 어떻게 얽혀들어가면서 계급적대를 통치하느냐(그리고 그럼에도 적대와 모순이 어떻게 이 체계 전체를 가로지르느냐)의 문제일텐데, 모스주의적 관점에서는 사회와 시장이 각각 물신화되어 등장하는 느낌이 있어요. 이건 어떤 독립된 자율적 영역으로 가정되는 시장환상이 다시 들어올 뒷문을 열어주는 격이라고 생각하구요. (오늘날 윤리적 자본주의 논의에서 모스나 폴라니의 논의가 동원되는 이유라고도 생각합니다. 자본주의 자체를 문제삼기보다는 시장에 윤리와 사회를 외부적으로 접붙인다는 아이디어는 훨씬 간편하니까요.)
- 예. 말씀하신대로, 모스 자체가 선물 교환이 생산하는 사회적 관계의 이중성-평등한 연대와 수직적 권력 관계-을 지적한 바 있으니, 부르디외의 논의가 완전히 모스로부터 떨어진 것은 아니지요. 다만 이 이중적 관계에서 어떤 면을 더 강조할 것인가에 대한 오랜 논쟁들이 있어왔고, 평등한 연대에 초점을 맞추는 모스주의 인류학자들의 반대편 예로 부르디외를 제시한 것 뿐입니다. "원시공산제" 논의야 잘 아시겠지만 그 가정 자체가 워낙 논쟁적이어서.. (맑스주의에서 뿐 아니라 인류학에서도요..)
- 갑자기 예전에 세미나 같이 하던 기억이.. ㅎㅎ 덕분에 저도 생각이 한 번 더 정리됐네요. 이스탄불 오실 생각있으면 한 번 연락주세요. 시간 맞춰가 보면 좋죠ㅋ
- 적당한 타협이 아니라 정확한 분석인 것 같은데요ㅋ 저도 사실 말씀하신 (좌파) 경제인류학에 기반한 논의들에 굳이 그리 가혹할 필요가 있나란 생각도 드는데, 몇 년 전부터 한국에서 유행하는 (우석훈, 홍기빈씨 류의) watered-down된 버전의 모스나 폴라니 논의가 가져오는 정치적-담론적 효과들을 보면 많이 답답할 때가 있어서요. 이번 여름에 한국 갔다가 느낀 점도 많구요. 뉴욕에서는 또 그레이버가 스피커 역할을 했던 occupy 운동을 보면서 느꼈던 기대와 실망도 있고ㅎㅎ 그래서 이런 입장들에 대해선 좀 각잡고 논의해야 겠다는 강박이 좀 생긴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