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캐즘님.
요 위에 스캔 님도 계시네요. 여기서 뵙게 되다니 반갑습니다. ㅎㅎ
우연인지 몰라도, 캐즘님 하신 말씀은 저도 요즘 나름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 부분이기도 해요. 다만 저는 헤겔과 (초기) 맑스를 중심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게 (그리 크지 않을 지도 모르겠지만) 차이라면 차이겠네요. 아.. 여기에 덧붙여, 최근 저의 개인적인 경험도 크게 한몫 하고 있고요.
암튼 이런 글을 보게 되니 무지 반갑네요. 가까이 있다면 이거.. 만나서 소주라도 한잔 하면서 말씀 나누고 싶을 정도로 말이죠. ^^;;
이야.. 이거 늘 블로그에 글 올라올 때마다 감탄하게 됩니다.^^ 뭐하는 분이실까 궁금하기도 하구요^^ 이번 글도 아주 동감이 갑니다.
그런데 약간 다른 생각이 있다면, "동일성의 해체"를 논하는 철학이 띄게 되는 정조가 반드시 그렇게 '어두움', '죽음'이어야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오히려 동일성을 붙드는 철학이야말로 니체식으로 말하면 새로운 '자식(?)'을 낳지 못하는 불임의 철학이요, 죽음의 철학이 아닌런지요.
동일성의 '해체'가 해체이가만 한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생성의 과정일 수도 있다면, 그것은 죽음과 어두움의 정조라기보다는 오히려 기쁨과 생명의 정조가 아닐까 합니다.^^
Scanplease/
앗. 스캔플리즈님이시군요. 저도 님 블로그에 종종 가고 있습니다. 앞으론 댓글도 좀 남길게요.ㅎ 그리고.. 듣고보니 스캔플리즈님의 표현이 더 정확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드네요.
EM/
역시 저의 팬 EM님이시군요.^^ 소주 한 잔 좋지요, 근데 물건너 멀리 계시잖아요.ㅎ
헤겔과 초기 맑스의 사상을 중심으로 최근의 현상들을 분석하는 것도 의미있을 것 같아요. (둘에 대해 자신있게 말할 수준은 아니지만)사실 헤겔이나 맑스는 결코 "넘어설 수 없는" 사상가들 아니겠습니까. 핵심은 누굴 공부하느냐가 아니라 어떤 문제의식에서 공부하느냐인 것 같아요. 제가 푸코나 지젝을 더 공부한 건 최신 유행을 좋아하는 제 얄팍한 취향 때문이라는..-.-;
김강/
반가워요 김강님. 글에도 썼지만 전 그냥 공부하는 사람이에요. 지금은 잠시 사정상 다른 일을 하고 있지만, 그래도 스스로는 항상 공부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 김강님의 말처럼 동일성의 해체는 고통의 과정일 뿐 아니라 기쁨과 열락의 과정이기도 하지요. 푸코도 동일성의 외부가 가진 치명적인 유혹적 성격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했고, 정신분석학에서도 자신의 욕동에 충실할 때의 주이상스에 대해서 강조하지요.
제가 글에서 동일성의 해체가 가진 어두운 성격을 강조했던 건, 일종의 막대 구부리기라고나 할까요?^^ 최근들어 자신의 동일성의 해체가 가진 생성과 창조의 과정에 초점이 더 맞춰지면서, 그 파괴적 성격 혹은 적어도 그 양가적 성격은 잊혀지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그런 점에서 개인적으론 한국에서 타자의 철학이 크게 보자면 들뢰즈의 생성의 철학, 특이성의 철학으로 수렴해가고 있는 것에 의심의 눈길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언젠가 포스팅할 기회가 있겠지요.)
물론이죠. 누굴 공부하느냐가 여기서 중요한 거라 보진 않습니다. 저 개인적으론, 그런 식으로 단순하게 편가르기(?) 하는 시대는 지났다고 봅니다. 그래서 저도 괄호 안에 "그리 크진 않겠다"고 쓴 거고요. 단순히 소심함(?)의 표현은 아닌 셈이죠 ^^a
레디앙에 있던 진중권의 글에 달린 레비나스라는 아이디에 이끌려 여기까지 왔습니다. 뭐, 한윤형이란 분의 블로그를 거쳐서 오긴 했지만요...
레디앙에서의 댓글을 봐서는 자율주의 쪽인듯이 보였고, 자율주의가 지젝과 접합될 때, 그와 같은 파괴력을 보여줄 수 있겠구나 싶기도 했습니다.
폭력과 사랑은 동일한 "형식"을 지닌다라고 말할 수 있을 듯합니다. 즉, 경계의 무너짐이라는 형식... 그리하여, "사랑은 내가 갖지 않은 것을 주는 것"이라는 라캉의 사랑의 정의를 폭력과 사랑이라는 것과 관련해 생각해 볼 수 있을 듯합니다. 즉, "내가 갖지 않은 것을 준다"는 형식은 갖지만, 내가 갖지 않은 남근, 즉 환상을 주는 것은 폭력일 터이고 텅빈, 벌거 벗은 나를 주는 것은 사랑이겠다 싶습니다. 그리하여, 폭력을 어두운 철학이라 한다면, 사랑을 밝은 철학이라 부를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본문에서, 경계 경험limit experience라고 쓰신 것은, 푸코가 썼던 방식을 고려해서, 경계와 경험 사이에 하이픈을 넣어서, limit-experience라고 쓰셔도 좋을 듯합니다. 그의 광기의 역사의 삭제된 서문에서 그가 그렇게 쓰고, 이후의 인터뷰에서 그렇게 쓰듯이 말입니다.
<<푸코의 맑스>>에서 인용하셨던 글은 원문 제목이 무엇인지 여쭈어봐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아. 청학님의 댓글을 보고 대체 무슨 일인가해서 레디앙을 거쳐 한윤형씨의 블로그까지 가 봐서야 사태를 파악했네요.
일단 저 글을 쓴 "레비나스"는 제가 아니구요. "레비나스"님이 자신의 글인 것처럼 이 블로그를 소개한 모양인데(일부러는 아니라고 믿습니다만), 그 부분은 심히 불쾌하여 항의 댓글을 달고 왔습니다. (이렇게라도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혹 제가 레비나스인 줄 알고 댓글을 달아 주신거라면 실망시켜 드려 죄송합니다.^^)
<<푸코의 맑스>>에서 인용한 부분은 "선악을 넘어서"라는 제목의 푸코와 고등학생들 간의 대담입니다. 책의 각주를 보니 불어 제목은 "선악을 넘어서"가 맞네요. 영문 제목은, "Revoultionary Action"이란 제목으로 Language, Counter-Memory, Practice에 실려 있답니다. 이 책도 푸코의 인터뷰와 짧은 글들을 모아놓은 책이지요. 이 대담은 꽤 초기에 영어로 번역되는 바람에, 과격한 무정부주의자라는 영미권의 푸코에 대한 첫인상에 많은 영향을 미친 바 있습니다.
타자에 대한 관용이 자신에 대한 관용의 남용으로 치환되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는 아주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하지만 뒤이어지는 논의의 현실성이 상당히 의아합니다.
"" 휴머니스트들은 범죄자 뒤에 있는 인간성이나 영혼을 찾기 위해 노력했지만, 나는 무죄와 유죄 사이에 놓여있는 깊은 경계를 지워버리는 것을 목표로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요르단에서 팔레스타인인들에 의해 발생한 비행기 납치 사건에 대해 장 쥬네Jean Junet가 제기한 문제였습니다. 언론에서는 사막 한 가운데 명확한 이유도 없이 붙잡혀 있었던 불운한 관광객과 그 판사의 운명에 대해 슬퍼했습니다. 반면에 쥬네는 다음과 같이 말했지요. "그렇지만 이런 식의 여행을 할 만한 충분한 돈을 갖고 있는 미국인 여성과 판사는, 과연 무죄일까요?""(229)"
아주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그저 예시에 불과할 뿐이니 너무 기분 나쁘게 받아들이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가령 캐즘님이 EM님과 함께 포장마차에 앉아서 소주를 마시고 있는데, 다섯 발자국 뒤에 떨어져서 누워있던 노숙자가 소주병으로 두 분의 머리통을 후려쳤다고 해봅시다. 그렇다면, 가령 꼼장어와 같은 안주를 시켜놓고 술을 마실 수 있을만큼 돈이 많은 캐즘님과 EM님은 과연 무죄일까요?
타자에 대한 관용이 윤리적 방어 기제로 작동하는 과정을 폭로하는 것까지는 좋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도덕 상대주의를 넘어 선악 자체를 '해체'하는 경지에 다다르는 것이 과연 합당한 일일지에 대해서는 별도의 논의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지금이야 급진적인 철학자들이 '상징적인 죽음'을 운위하며 말도 안되는 범죄마저도 옹호하고 들 수 있겠지만, 그것이 '실제적인 죽음'과 잇닿게 되었을 때마저도 그런 식으로 '타자'를 존중할 수 있을까요? '타자'등의 어휘를 강조하는 현대철학이 결국 관념적인 수준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저는 이런 곳에서 찾고 있습니다.
노정태님은 이 글을 어떻게 읽었는지 모르겠지만, 블로거님이 던지는 질문에 다소 빗겨난 문제를 던지신것 같습니다. 블로거님의 의도는 그런게 아니거든요.. 만약 노정태님이 예로드신 상황에 마땆드린다면 블로거님을 비롯한 누구든지 적절한 반응을 할거라는 것에 10만원 겁니다^^ 그게 폭력이든 뭐든 말입니다. 그건 매우 자연스러운 반응 아닙니까. 그렇지만 블로거님의 주장이나 지젝의 비판들은 이데올로기 즉 우리가 가지고 있는 환상, 관념들에 관한 것들입니다.
똘레랑스나 진중권식 합리론은 이론이라는 측면과 얼마 만큼 벗어나 있나요? 디빠 비판 문제들은 순전히 이론이나 관념에 대한 해석들의 문제이고, 디빠들이 그짓을 하는 것도 지젝적 관점에서 환상에 메몰되어 있는 주체의 형태라고 읽힙니다. 또한 블로거님의 예로드신 것도 관념을 깨고 동일성을 타파하자는 이야깁니다.
예를들어 소주병으로 머리를 내리치는 것들은 주체에게 피부가 벗겨지는 상처만 낼뿐이지, 타자들이 우리의 동일성에 위협을 가하는 방식, 즉 우리의 상징적 믿음들(돈, 자본이라는 물신주의)에 교란을 하는 붕괴를 가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것과 이것은 차이가 있지요. 하지만 노숙자가 가지는 계급론에 대해서 우리가 감내해야 하는 희생은 대단히 어려운것 같습니다. 계급론은 한 사람을 때려잡아서 희생으로 되는건 아닌것도 같고요..
노정태님은 현대철학이 어떻게 보이실런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제가 봤을때 현대철학은, 우리가 익히알고 있는 포스트모던은 후기 자본주의의 세상과 유비적으로 대비해봐야 한다고 생각하네요. 관념론이 아니라 현실을 매우 극명하게 반영하는 문제들이 있습니다. 예를들어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같은 것들 말이죠. 철학이나 문화들은 항상 현실을 반영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것에 대한 돌파구 틈새들에 대한 언어들인게 아닙니까..
우리가 현실에서 행동을 제어하고 하는 모든것들은 관념이 들어있고, 환상이 들어있습니다. 그러므로 지젝의 환상에 대한 개입은 어떻게보면 소주병으로 머리를 치는것보다 더 근본적으로 주체에게 충격을 주며, 권력에 분열을 보여줍니다. 부디 골방좌파라고 무시하지 마시길 ㅎㅎ
청학/
청학님이 미안해하실 건 없죠.ㅎ 그저 고즈넉하던 블로그가 잠시 복작대서 놀랐을 뿐입니다.(술 한잔 하고 집에 왔더니 리플이 주르륵..;;) 뭐. 복작대는 것도 나쁘진 않네요.:-)
노정태/
길고 진지한 댓글을 달아 주셨으므로 그에 대해서도 길고 진지하게 댓글을 다는 게 예의일 것 같네요. 사실 제가 인용한 푸코의 발언은 이 글의 주제인 타자와 폭력의 문제와 정확히 맞아 떨어지는 발언은 아닙니다. 글에서도 밝혔듯이 푸코가 저 발언을 한 배경은, 제가 서술한 글의 문제의식과는 다른 맥락이었거든요. 다만 이 글을 쓰던 당시 저 책을 다시 본지 얼마 되지 않아 머리에 남아있던 구절이었고, 똘레랑스식 사유와 대립되는 '푸코식 사유'의 특징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는 생각이 들어 인용했을 뿐입니다. 지금이라면 다른 인용문을 선택했을 것 같긴 하지만, 어차피 제가 낳은 자식이니 그와는 상관없이 노정태씨의 질문에 답변을 드려야겠지요.:-)
일단 노정태님의 질문에 답하기 전에, 노정태님이 제 글에 반론을 제기한 '질문’이야말로 제가 이 글을 통해 비판하고자 했던 입장들에게 하고 싶은 질문이라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노정태씨는 저의 관용에 대한 비판이 적절한 선을 넘었다고 말씀하시면서, (실질적 생명을 위협할 정도의) 타자의 폭력적 출현 앞에 우리가 어느 정도 선까지 타자를 ‘존중’할 수 있겠느냐를 질문하셨습니다. 제가 보기에 이 질문은 오히려 제가 이 글에서 비판하고 있는 입장, 즉 타자에 대한 인정과 똘레랑스를 주장하고 있는 이들에게 그대로 돌려줘야 하는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와 ‘타자’의 고정된 실체를 전제로 논의를 시작하는 똘레랑스 담론에서 언제나 문제가 되었던 것은 똘레랑스와 앵똘레랑스의 경계 설정, 다시 말해 나와 그들의 거리 설정의 문제였으니까요. 이 글은 그와는 전혀 다른 입장에서 동일성과 타자의 문제에 접근해보고자 하는 것이었으므로, 이러한 질문을 제 글에 던지는 건 가능하기는 하지만, 그리 적절하지는 않다고 봅니다.
앞서도 밝혔지만 제가 조금은 막 나가는 듯한;;; 푸코의 발언을 직접 인용했던 것은, 그것이 기존의 똘레랑스 논의의 초점을 다른 방식으로 바꿔볼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가능성을 저는 크게 두 가지 차원에서 찾았던 것 같습니다.
먼저 이미 글에서 밝혔지만, 푸코가 든 예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고정된 자아와 타자의 위치가 아니라 그 위치 자체에 대한 불인정의 가능성은 없겠느냐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여기서 자아와 타자의 위치는 당연한 것이 아니라 질문되어야 하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즉, 푸코가 던지고자 하는 질문은 나는 왜 범죄자가 아닌가라는 질문입니다.(더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왜 범죄자가 아니다라고 스스로 생각하는가의 문제겠죠.) 이 질문은 희생자인 나와 범죄자인 타자를 전제한 후, 타자의 행위를 용인할 것인가 혹은 용인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이런 표현이 가능하다면, 똘레랑스식)질문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작동하는 질문입니다. 여기서 해명되어야 할 것은, 나라는 동일성에 작용하고 있는 역사와 권력의 문제입니다. 푸코식 질문에서는 핵심적인 문제가 되는 이 부분을 똘레랑스 담론에서는 고정된 실체이자 전제로 처리하고 넘어가고 있는 것이지요.
둘째, 푸코의 예는 나와 타자의 위치뿐만 아니라 이 둘이 맺는 관계에 대한 고정적 해석에 문제제기하고 있습니다. 푸코가 이야기하는 사건 속에서 개인들 간의 관계는 선과 악의 범주에 의해 해석됩니다. 테러리스트는 가해자이자 악이고, 이들의 인질은 불행한 피해자이겠죠. 하지만 이러한 인식이 피상적이지는 않습니까? 테러리스트들가 존재하게 만들어온 그러한 체제는 선입니까, 악입니까? 체제의 모순을 알면서 부인해온 이들은 과연 단순히 불행한 피해자입니까? 이들의 관계는 피해자와 가해자 혹은 선과 악이라는 범주에 의해 의미화되어야하는 그러한 관계입니까? 푸코 식으로 말하자면, 이런 식의 물음은 선과 악의 범주 자체를 해체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선과 악이라는 우리의 개념 자체가 역사적으로 형성되어온 것이며, 권력과 무관한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따라서 우리가 선과 악이라는 범주에 대해 말하려면 어쨌든 역사와 권력이라는 이 모호한 지대를 통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꾸어 말하면, 이러한 범주를 사용한 나와 타자의 관계에 대한 분석 역시 역사와 권력의 모호한 지대를 통과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주체의 고정성에 대한 문제제기 그리고 주체 간의 관계 맺음의 고정성에 대한 문제제기는 실은 서로 얽혀있는 두 측면입니다. 주체들의 관계에 대한 고정적 해석은 주체들의 위치를 생산해내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가 선과 악의 문제로 특정한 문제를 바라볼 때, 가해자와 피해자의 주체 위치가 생산됩니다. 관용/불관용의 문제로 특정한 문제를 바라볼 때 우리는 관용의 능력을 갖춘(합리적인/서구적인/문명화된) 주체와 관용 혹은 불관용의 대상이 되는 (근본주의적인/비서구적인/야만적인) 주체의 위치가 가시화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점들이 제가 생각하는 푸코 식의 사유와 똘레랑스에 대한 사유가 가지는 차이점입니다. 푸코 식으로 말하자면, 역사와 권력에 대한 분석이 들어가야 할 자리에 똘레랑스의 사유는 자연화된 차이와 경계를 채워넣습니다. 저는 이러한 대립점을 분명히 하고 싶었고, 그래서 마지막에 논지의 약간의 비약을 감행하면서도 푸코의 말은 직접 인용했던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반복이 될 것 같긴 하지만, 다시 노정태님의 질문으로 돌아와 봅시다. 노정태님이 질문에서 든 예와 관련하여, 제가 제기하고 싶은 문제는 우리가 이러한 행위를 관용해야하느냐 말아야하는냐가 아니라, 이러한 사건을 우리가 수용하고 의미화하는 방식 그리고 그를 통해 가시화되는 주체의 위치입니다. 이러한 사건을 둘러싸고 우리는 다양하고 서로 경쟁적인 형태의 의미화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혹자는 이 사건을 자신의 잘못에 대한 업보로 여길 수도 있을 테고 혹은 그 자체로 수용해야 할 삶의 부조리를 보여주는 사건이었다고 평가할 수도 있을 것이며, 노정태님의 말처럼 나의 신체에 대한 타자의 침범으로 인식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실제로는 이 몇 가지 입장들이 뒤섞여 나타나겠죠.) 혹은 (반-농담이지만) 이 사건은 ‘특정한 문맥’ 속에서는 계급 투쟁의 한 형태로 논의될 수는 없겠습니까? 이 질문들을 ‘그래야 한다’로 오해하시지 않기를 빌겠습니다. 이러한 질문들은 다만 이 사건을 ‘폭력’의 문제로 그리고 이로 인해 생산되는 그 폭력의 ‘피해자’와 폭력의 ‘가해자’라는 위치의 문제로 특권화해서 볼 절대적인 필연성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조금 억지스럽다면 좀 더 쉬운 문제를 보죠. 오늘날 왜 흡연 문제를 타자의 ‘폭력’이라는 의미틀을 통해 접근하는 입장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을까요? 불과 한 세대 전만해도 흡연이 건강에 안 좋다는 인식은 존재했어도 흡연이 타자에게 폭력이 될 수 있다는 식의 담론은 우리에게 굉장히 낯선 것이지 않았습니까? 이러한 예들에서 드러나듯이, 특정한 문제의 서술을 둘러싼 범주들은 전혀 자명하거나 중립적이지 않습니다. 제가 글을 통해 던지고자 했던 질문은 오늘날 다른 방식으로 접근될 수 있는 다양한 사회 문제들(예컨대, 해방이나 적대, 평등 같은 범주로 논의될 수 있는 문제들)이 왜 ‘폭력’과 ‘똘레랑스’라는 이름 하에 논의되고 있는냐는 질문이었던 것이고, 이에 대한 대답은 이러한 의미화과정 이면에는 사회 전반에 만연한 어떤 욕망이 존재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욕망을 일종의 나르시즘적 욕망, 자신의 동일성을 유지하려는 욕망으로 개념화하려고 했던 것이구요.
그래서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제가 글에서 제기하는 물음은, 노정태님이 저에게 질문하신 내용, 즉 타자를 어디까지 관용할 것인가의 문제와는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제가 제기하려던 질문은, 오히려 ‘타자에 대한 관용이 어디까지 이루어질 수 있겠느냐?’는 노정태님의 질문을 조건짓고 있는 담론의 방식, 즉 '타자’의 개념화, ‘관용’의 의미화의 이면에 놓인 문제가 무엇인가에 관련된 것이었으니까요.
아. 술에 취해 말이 주저리주저리 길어졌네요. 마지막으로 하나만 덧붙일께요. 비꼬는게 아니라 정말 부담스러워서 그런데, 제 글에서 현대철학의 한계까지를 읽으실 필요는 없습니다.^^ 전 철학전공자도 아니고 앞으로도 철학을 전공할 생각은 없으니까요. 다만 제가 가지고 있던 물음을 좀 더 명확히 하기 위해 지젝이나 푸코의 사유를 ‘부분적으로’ 끌어들인 게 맞겠지요. 아마도 노정태님이 지적하신 문제는 (대상이 불분명한) 현대철학의 문제라기보다는 제 사유의 한계일 겁니다.:-)
레비나스/
신속한 댓글 수정 감사합니다. 앞으로 그런 식의 제 블로그 홍보는 자제해주시길 빕니다.;;; 사실 한윤형님 블로그에도 글 남겼지만 전 레비나스님 글이 말하고자하는 바는 대충 알겠는데 글 전체를 잘 이해하지는 못하겠어요. 언제 기회가 된다면, 레비나스님이 잘 정리하신 글을 읽어보고 싶군요.(특히 지젝을 정치 쪽에 적용해보겠다는 야심(?)을 가지셨다니. 환영의 감정과 함께 우려도 드네요. 개인적으로 지젝의 논의는 그가 말하는 ‘행위’의 사회적 차원과 집단적 차원을 명확히 하지 못하는 한 정치철학이나 정치비평에는 적용 가능해도 정치학(politics)에 적용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회의를 가지고 있는지라.)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캐즘 님의 글들을 다 읽진 않았지만-딱 5개 읽었습니다-,일관성이 느껴집니다. "모든 담론들 혹은 이데올로기는, 탄생의 순간에, 탄생과 동시에 '게토'-이걸 알리바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습니다-를 만든다." 어찌보면 굉장히 알튀세적인 음모론으로 읽히는데, 이런 방식의 비판이 악무한적 순환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닌지 하는 쓸데없고 진부한 걱정을 해봅니다.^^; 이를테면, 이 1. 담론의 전략은 뭐냐, 2. 이 담론의 전략을 지적하는 담론의 전략은 뭐냐...3. 이 담론의 전략을 지적하는 담론의 전략을 지적하는 담론의 전략은 뭐냐...그리고 1,2,3번 중에서 왜 1번만을 택해야하느냐 등등.
캐즘님이 푸코의 저 언급을 인용하면서 노린 효과는 어떤 언행, 폭력에 대해 유죄와 무죄의 경계를 정하는 법, 그 법을 생산케 했던 역사와 권력의 문제 이겠죠.
푸코의 저 언급은 서구가 자행해온 폭력에 대한 테러리스트들의 반폭력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싶구요.
님이 예로든 한 노숙자의 폭력과는 다른 양상의 폭력을 예로 들 수 있겠네요. 아무 상관 없는 사람의 머리를 후려갈길 것이 아니라, 서울 시청에 가서 그곳을 점거해 버리는 겁니다. 뭐 지금도 무단으로 이곳 저곳을 점거하고 있긴 하지만요. 공공의 공간을 폭력적인 방식으로 사적으로 점거하는 것이죠. 이걸 무죄라고 해야 할까요, 유죄라고 해야할 까요?
푸코가 제기하고 싶은 것은, 저와 같은 무죄성/유죄성의 경계, 즉 폭력이냐 아니냐의 경계를 확정하는 법, 이것이 생산된 역사와 권력을 문제 제기 하는 것이지 않나 싶습니다.
캐즘님이 지적하신 바와 같이, 제 문제제기는 사실 완벽하게 정확한 지점을 짚고 있지는 않습니다. 푸코의 문제의식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어느정도 공감을 할 수 있고요. 하지만 그것을 위해 엄연한 범죄행위를 두둔한다거나, 그 범죄로 인해 피해를 받은 이들을 도덕적으로 매도하는 것은, 적어도 저로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입니다. 도를 지나친 레토릭이 가져오는 폐단에 대해 생각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철학은 펑크록 밴드가 내뱉는 구호가 아닙니다. 섹스 피스톨즈가 영국에서 무정부주의를 실천하자고 하는 것과, 미쉘 푸코가 프랑스에서 정부를 해체하자고 말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입니다. 담론을 생산하는 자에게는 그만한 책임이 따르고, 그렇기에 극단적인 주장은 그것을 뒷받침할만한 엄밀한 이론적 성찰과 함께해야 하는 것입니다. 캐즘님이 인용하신 푸코의 말을 굳이 뒤집었던 이유는 그런 우려 때문이었습니다.
덕분에 호기심이 생겨 [푸코의 맑스]를 도서관에서 빌렸습니다. 읽어보도록 하지요. 종종 방문하겠습니다.
쟁가/
반갑워요, 쟁가님. 제 글을 좋게 보셨다니 감사합니다.:-) 젱가님의 코멘트에 대해서 생각해봤는데, '이데올로기가 게토를 만든다'나 '알튀세적인 음모론'(알튀세와 음모론이라니. 제 생각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합으로 보이는데요.^^) 같은 표현은 어떤 의미인지 와닿지 않네요. 언제 기회가 되시면 좀 풀어써 주시는 게 좋을 듯 합니다.
제기하신 반성의 문제는, 투명하고 객관적인 메타담론의 존재를 거부하는 상황에서, 당연히 받아들여야하는 윤리적 요청이겠지요. 그걸 굳이 악무환적 순환이라는 부정적 의미로 해석할 필요가 있을까 싶습니다. 굳이 따지자면, 오늘날 문제는 담론의 이면에 놓인 의도와 효과가 무엇인가를 묻는 질문들이 너무 적다는 데 있는 것이지, 그것이 너무 많은 데 있는 것은 아닐텐데요.
게다가 사실 그러한 반성의 과정이 악무한적 반복까지 이르지는 않습니다. 담론이 단순한 말장난이 아닌 이상, 현실의 어떤 지점에 정박점을 가질 수 밖에 없으니까요.(저로서는 차라리 메타담론의 부재 명제를 무한 순환이라는 해석학적 역설과 곧바로 등치시키려는 몇몇 철학자들의 호들갑스러운 반응들이 가진 의도가 더 미심쩍어 보입니다. 오히려 이들의 입장이야말로 담론과 현실의 연결고리를 부정하는 입장이 아닐까요?) 이 문제에 대해선 나중에 한 번 더 포스팅을 할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군요.
그래서 말이지만, 전 1,2,3번 중에 1번만 택한 적은 없습니다. 담론의 전략을 투명하게 분석할 수 있는 메타적 위치가 있다는 데에도 당연히 동의하지 않구요. 다만 제 당파적인 입장을 정식화할 장과 내공의 부재로 1번의 문제에만 주목했는지는 모르겠네요.:-) 아무튼 좋은 문제제기 감사합니다.
청학/
청학님처럼 압축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문제를 너무 길게 썼네요.ㅎ 감사합니다.:-)
노정태/
사실 노정태님의 문제제기에 어떤 진지함과 진심어린 우려가 있음을 이해합니다. 그래서 저 긴 댓글을 단 것이기도 하구요. 하지만 어떤 사건을 지배적 유형과 다른 관점에서 검토해보자는 것이, 엄연한 범죄행위를 두둔한다거나 범죄의 피해자들을 도덕적으로 매도하는 행위와 동일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네요.
섹스 피스톨즈의 팬인 저로서는 피스톨즈의 담론과 푸코의 담론이 다르다는 노정태님의 말에, "정말?"이라고 반문하고 싶지만;;; 자신의 담론에 대한 책임감과 엄밀한 이론적 성찰의 필요성이라는 노정태님의 주장에는 동의하므로 그만 두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엔, 그런 책임감을 펑크록밴드에게까지 요구하는 게 더 올바른 해결책이 아닐까 싶네요.:-)
캐즘/ 음모론 어쩌구 한 것은 별로 중요한 얘긴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악무한적 순환이라는 말을 굳이 사용한 것은, 먼저, 담론의 실제 효과와 담론의 전략(혹은 의도)을, 제 생각에는 캐즘님께서 특별히 구분하지 않고 다소 불분명하게 사용하시는 것은 아닌지 해서이구요. 또 하나는 악무한을 벗어나 현실의 어떤 지점에 담론을 정박시킬 것인가, 왜 하필 그 지점에 정박해야하는가에 대해서 (객관적이란 표현을 쓰지 않더라도)일관된 기준은 있어야하지 않는가 해서 입니다.
사실 이것도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사실 말씀하신대로 담론의 의도를 묻는 질문이 너무 적은 것이 문제라는 데 저도 동의하기 때문입니다.
아, 읽으면서 짧은 탄성이 나오네요. 너무 잘 읽었습니다. 글을 읽으면서 계속 지난 1여년 동안 제가 제 후임을 바라보았던 시선, '위안부'와 재일조선인의 문제에 대한 접근 방식의 어려움 그리고 미카엘 하케네의 <히든>을 보면서 했던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올랐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