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can.com에 올라 온 글이었군요. 영화 <<300>>을 보질 않아서, 이 영화에 관한 글을 볼 생각을 하지 않았더니 지젝이 이런 글을 썼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어요(게다가 깔끔한 번역까지(^.^). 마오와 로베스피에르 선집의 지젝 서문은 제가 찾아서 읽어 보아야지요. 후후후).
(아도르노가 말러의 음악에 관해서 말했던 것처럼) 세상과 어설프게 화해하느니 차라리 자폭하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겠지만, 저는 지젝의 혁명에 관한 사유가 (그가 들뢰즈를 비판했던 것처럼 오히려) 그의 이론적 곤궁의 다른 표현은 아닐까라는 의심이 들 때가 있어요. (캐즘님께서 저보다 훨씬 잘 아시겠지만) 지젝의 방식이라면 현실 정치에서 혁명가와 알-카에다가 어떻게 구분이 될 수 있는지도 미심쩍고요. 과연 지젝의 글을 읽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적대를 인식하는 것을 넘어서, 적대의 지점에서 안티고네 식으로 투쟁을 할 수 있을지...... 지젝의 글을 읽으면 속이 시원한 것을 넘어서 아주 가끔은 피가 끓기도 하는데 말이죠(그래도 "규율과 희생정신에 그 자체로 "파시즘적인 것은 없다"라는 말은 전혀 틀린 말은 아니지만 좀 무섭기는 해요(^.^;)).
하여튼 덕분에 지젝 글 잘 읽고 갑니다. 캐즘님께서 링크해 주신 다른 사이트도 들어가 보아야겠어요. 아- 그나저나 비가 오니, 김치전이나 파전에 막걸리 한 잔 했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하네요(^.^)-
아앙 ㅠㅠ 삼백 되게 보고싶었는데;ㅁ; 글을 읽으니까 혼자 가서 볼 걸 후회막심이에요 나중에 비디오를 볼 때 이 글을 생각하게 되겠죠 어떤 영화일지 너무너무너무 기대됩니다>ㅅ<
글구 번역문 감사해요>ㅆ< 1년 가까이 지젝의 글을 읽지 않았는데 간만에 봐도 흥미진진합니다'ㅁ' 아직까지 해체/재구성에 이렇게 새로운 사람은 못 봤어요 내가 돼야지
무한한 연습/ 어쩌면 지젝이 가진 약점은, '법' 외부에서 사유하려는 이들이 가지는 공통적인 약점인 것 같기도 해요. 들뢰즈 역시 파시즘적 사유라는 비판에서 완전히 자유롭진 못하잖아요.
하지만 지젝에 한정지어서 무한한 연습님의 말처럼 지젝의 혁명에 관한 사유가 그의 이론적 곤궁의 다른 표현으로 볼 수 있다면, 그 이론적 곤궁이 어디에서 기인하는가가 또 다른 논쟁의 영역이 될 수 있겠죠. 손쉬운 답변으로는, 링크한 글에서 샤비로가 슬쩍 흘리는 것처럼, 지젝 본인이 새로운 자본주의 정신이 가진 양가적 속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겠군요. 하지만 좀 더 근원적인 차원에서 이 문제에 접근할 필요가 있을 것 같긴 하네요.
링크한 사이트들은 모두 유용한 사이트들이니 혹시 모르셨다면 참고하시면 좋을 거에요. 특히 첫번째 링크한 샤비로의 사이트에는 좋은 글들이 꽤나 올라와서 종종 들르는 곳이죠. 그나저나 파전에 막걸리라니 정말 조만간 무한한 연습님을 오프에서 한 번 뵈야겠네요.^^
덩야핑/ 영화 자체는 너무*3 기대할만한 영화는 아니지 않나 싶어요.^^ 물론 영화의 미학에 대한 지젝의 설명은 정확해요. 영화 전체가 굉장히 인공적인 느낌이 들거든요. 그 느낌만으로도 한 번 볼만한 영화인 것 같긴 합니다. 그리고.. 꼭 되십시오.하하.
지젝에게 혁명이란 고집 그 자체다. 죽음 충동을 거론하지 않아도 지젝이 호출하는 혁명적 주체란 고집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너무나 명백하게 우리는 이런 고집을 테러리즘에서 분리할 수 있지 않을까? 예컨데 민간인에 대한 테러가 마치 알카에다의 전유물이라고 했을때, 누군가 알카에다 내부에서 그런 테러를 지양하자고 주장하고 그 주장을 핍박을 넘어서 고집하려고 한다면 그거야말로 지젝이 말하는 혁명성이 아닌가. 그러므로 우리는 필연적으로 테러리즘과 지젝적 주체의 비교를 삼가해야 한다. 기실 지젝이 300을 다룬면서 이야기 했던 영웅들은 내외의 여러 지점에서 행위의 차원을 막는 상징계의 억압을 뚫어내는 행위 자체였으니까. 그러므로 혁명의 과격함은 기실 어떤 행위도 서슴치않는 스탈린식 사회주의나 탈레반식 자살 폭탄같은 실재의 열망이 담긴 폭력성이 아닌 더 그것보다 멀리 나아간다. 그런것들은 사실 주체성이 상실된 것들이니 말이다. 더 나악 우리가 그것들을 지젝의 주체로 호명했을때 일본 제국주의의 폭력적 형태인 카미가제또한 긍정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그렇지만 지젝은 이미 국내 강연에서 이런것들과 결별하고 있다.
예컨데 지젝적 혁명론은 손쉽게 국내 CF에서 사용되지 않았던가? 모두가 no를 외쳤을때 yes를 외쳤다는.. 안티고네가 고집했던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좌파적인 계급론이 아니라 오빠의 장례를 치뤄야한다는 가족중심주의가 아니었겠는가. 그것은 아마 오늘날의 정치적 스펙트럼에 의하면 우파에 가까울텐데, 요는 그런 고집이 상징계 내에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냐가 아닐까? 그런 고집은 좌파와 우파의 상식을 넘어서 상징계의 분열을 몸소 보여준다.
예를들어 우리는 민주주의라는게 텅비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헌법에서 인권을 이야기 했을때 우리 사회는 쉽게 그것을 무시하고 있지 않는가. 현실이라는 초자아의 모습으로. 그렇지만 민주주의를 의심하는 들뢰즈 주의자들과 다르게 우리가 만약 그 텅빈 민주주의, 즉 국민이 주인이 되는 형식 자체를 고집하게 된다면 어떤 역경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이뤄낸다면 그것이야 말로 혁명인게 아닐까? 예수의 경우도 그러한게 아닌가. 믿음과 고집. 그것이 상징계내의 어떤 구멍과 변화를 가져오는게 그것이다. 주체의 출현도 그런식으로 나타나지 않는가. 실재와 상징계의 중간지점. 그것이 주체의 자리다.
그러므로 내가 봤을때 지젝에게 민간인을 목표로한 자살 테러는 가장 손쉬운 해결책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자기 존재를 그대로 무엇엔가 내맡겼기 때문이다. 그것보다 우리는 진정한 영웅들을 근대 우리 독립운동에서 너무나 많이 발견하고 있다.
레닌등을 거론하는 것도 그가 그것을 고집하게 되는 제스춰 그 자체에 있을 것이다. 지젝은 레닌의 철학 따위에 관심이 없다. 명백히 쓰레기라고 말하고있지 않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알카에다 테러리즘과 지젝의 이론 사이의 변별점을 이해하고 있어야한다. 알카에다의 민간인 자살 테러가 실재의 열망에 기초한 임상적으로 주체성이 상실된 정신병에 가깝다면, 지젝이 호출하는 주체는 상징계의 법을 그 자체로 부정성으로 이미 겪고 그것이 텅비어있다는 실재를 겪고난 후에, 실재에 내맡겨 버리라는 것또한 부정하는 제스춰를 취하는 주체가 아닐까? 데카르트의 철학이 그러하듯말이다.
이런 주체는 일본의 재난 만화의 대표겪인 생존게임의 주인공에서도 발견된다. 주인공은 대재앙으로 폐허가 되버린 일본에서 남겨진 생존자다. 그렇지만 남은 생존자들은 힘을 합치기보다 인륜이 없어진 사회 그 자체, 도덕과 윤리가 잠정적으로 사라진 홉스가 말하는 만인에 대한 민인의 투쟁으 여실히 보여주고 있지 않는가. 그런 실재에 빠진 사회에 있어서 주인공은 너무 상투적으로 인간다움을 끝까지 유지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것이 곧 그의 생존의 근거가 되니, 고집 자체가 어떻게 교묘하게 억압적인 상징계와 냉소적인 초자아를 비켜나가는지 명백히 알 수 있다. 고집은 대상을 이루려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끊임없는 행위 자체이기 때문이다.
반갑습니다.:-) 사실 규율과 관련해 지젝이 바디우를 인용한 데 대해선 논란이 좀 있지요. 바디우의 경우, 군사적 규율과 구분되는 새로운 규율 형태를 창안해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수학적 규율?), 지젝이 강조하는 규율의 모습은 어느 정도는 전통적인 모델에 기반해 있는 것 같아요. "규율"이라는 개념이 둘 간에 엄밀히 합의되고 있는 것 같진 않습니다.
홈페이지 가봤는데, 공부하시랴 잡지 내시랴 바쁘시겠네요. 외국 잡지 중에서도 Blackwell 출판사에서 나오는 constellations란 잡지가 있지요. 저도 종종 들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