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 읽어보고 싶네요. 공지영은 그 시대의 젊은 여성들이 겪어야 했던 상처와 모순들을 처연하게 그려낸 것같아 많이 공감되지만, 본인이 운동하며 느꼈던 고뇌에 대해서는 겉핥기식에 단편적인 인물설정을 통해서 드러내고 (멋지고 치열한 남자선배, 순수하지만 감상적인 여자주인공), 김영하는 유쾌하고 재기발랄하지만 사실 공지영만큼의 진지성이라도 있을까 싶기도 하고요. 후일담 소설이 현재의 목소리를 없얘버리고 과거에 대한 향수로 화석화시키는... 그걸 넘어설 순 없을까 싶네요.
예전에 후일담 소설에 빠졌던 때가 있었는데, 운동에 대한 기억만 있고 운동에 대한 이야기는 없는 그 이야기들에 곧 신물이 났었습니다. 그 이야기들은 여전히 운동을 하고 있고, 그리고 새롭게 운동을 시작하는 사람들이 존재할 공간을 뺏어버리니까요. 캐즘님이 쓰신 것처럼 부인의 욕망이 작동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방현석의 소설은 어떻게 평하시는지 궁금하네요. <존재의 형식>보다 좀 더 노골적인 후일담인 <당신의 왼편>같은 소설을 김영하나 공지영의 후일담과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요? 저는 뚜렷한 이유도 없이 그래도 방현석 껀 볼만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문학에 대한 글도 다른 글들처럼 아주아주 읽을 만 한 것 같습니다. 주님의 힘으로 그 동안 숨겨뒀던 글들이 차례차례 올라오길 바래야 겠네요ㅎㅎ
라임/ 방현석씨는 97년쯤엔가 후일담 문학을 비판하는 글을 <말>지에 실은 적이 있지요. 꽤 거친 단어들을 사용한 강한 비판이어서 이래저래 둘러싼 말들이 많았던 걸로 기억합니다.(아마 <랍스터를 먹는 시간> 마지막에 실린 "겨울미포만"이란 작품이 이 때쯤 쓰여진 게 아닌가 싶어요. 소설 자체에서 후일담을 의식하고 쓴 소설이란 게 팍팍 느껴집니다.:)
그 때의 기억이 강해선지 저도 왠지 방현석은 김영하나 공지영과 다르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라임님의 말처럼 뚜렷한 이유를 댈 수는 없지만, 그의 삶의 궤적이나 거기서 묻어나는 작품의 형식도 앞서 두 명과는 차이가 있으니까요. "존재의 형식"만 해도, 창은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대신 베트남의 레지투이를 통해 할 말은 다하고 있잖아요^^
아직까지 활동하고 있는 80년대 소설가들의 80년대 작품과 현재의 작품을 동시에 실은 <소설 80년대>란 -편집과 기획의도 만으로도 흥미로운- 책을 봤는데, 재밌는 현상이 발견되더라구요. (물론 출판사의 편집의도가 개입되었겠지만) 2000년대에 쓰여진 그들의 작품은 고통의 역사를 다루되 한국이 아닌 다른 곳이 배경인 곳이 많아요. 예컨대, 이 책에 실린 소설들에서 방현석은 베트남을, 김인숙은 중국을, 정도상은 북한을 그 배경으로 삼고 있지요. 이것이 문제의식의 확장이냐 도피냐를 떠나서, 저는 이러한 자리바꿈이 2000년대의 한국 사회에서 80년대의 모습을 돌아보는 것이 작가 개인에게 가지는 무게감과 힘겨움을 반영하는 것은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어요. 즉, 2000년대의 이들은 80년대와 당시의 문제의식을 돌아보되 베트남을 통해서, 중국을 통해서 혹은 북한을 통해서 보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하는...
제가 방현석에게서 갖는 느낌은, 그가 표면적 제스처와는 달리 아직 80/90년대를 뼈아프게 돌아보지는 못할만큼 여린(;;;) 심성을 가진게 아닌가 하는 거에요. 아마도 징징대는 후일담이 가진 한계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서 일수도 있고, 자신의 존재기반이 다른 작가들보다는 더 80년대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일수도 있죠.("랍스터를 먹는 풍경"에 나오죠. 랍스터와는 달리 자기 꼬리를 자르지 못하는 사람..) 그래서인지 아무튼 방현석 자신은 80/90년대의 한국 사회의 풍경을 어느정도는 공식적인 내러티브로 기억하려고 노력하는 것 같다는 느낌도 들구요. 전 방현석도 좋아하지만, 왜 아픈가를 붙잡고 계속 상처를 똑바로 쳐다보려는 정혜주의 이 소설은 그래서 방현석의 소설들과는 또 다른 의미를 가지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