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지하다시피, 오타쿠의 어원은 "집"을 뜻하는 "宅"이다.
제가 알기로는 집을 뜻하기도 하고 동시에 상대방(2인칭)을 높여 부르는 것으로도 알고 있습니다.
"당신은 그렇다면 초호기의 첫 투입시점이 언제인지 알고 있습니까?"
"녜. 그렇다면 당신은 루크의 포스수치가 요다보다 얼마나 높은지 알고 있습니까?"
이런 식으로 -_-... 오타쿠들 사이에서 '너'대신에 '당신(오타쿠お宅)'이라는 대명사를 통한 대화가 이루어지고 결국 오타쿠라는 단어가 특정인들을 지칭하는 보통명사로 바뀌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음... 위키를 비롯해 각종 검색을 해 보니 다양한 설이 많네요. 녜. ㅠㅠ)
이 글에서 "집 - AT Field - 오타쿠의 존재근거/방어선 - 오타구:집"이라는 회전의 흐름을 가져가려 한다면, 단어의 형태적 기원뿐만이 아니라 의미-사회적 기원에 대해서도 보강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글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풀리지 않던 에반게리온의 의문을 풀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모친살해"의 모티브는 무엇에서 나올까요? 어미와의 부적절한 관계를 아비에게 들키지 않기 위한 모친살해? 자아를 계속 유년상태로 머물게 하는 모친을 살해? -_-... 에반게리온 다시 봐야겠네요. ^^
카운터 스트라이크나 레드 오케스트라 같은 게임들을 즐기는 저로서는 신경계 정지에 가까운 충격이군요. 너무나 정확해서 말입니다.그런데 멋진 비유에도 불구하고, 헤세의 데미안에 나온 비유처럼, 결국은 껍질을 깨고 나와야만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을 떠올려볼때, 결론은 약간 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namunnib/ 저번 아즈마 히로키 책을 소개하면서도 썼지만, 오타쿠들은 단지 독특한 하위 문화 집단이라기보다는, 첨단 소비자본주의의 뉴타입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2000년대 들어 일본이 "쿨의 제국"이라 불리면서 주목받는 원동력이기도 하구요.
Thomas Lamarre같은 문화연구가는 오타쿠를 네그리와 하트의 multitude와 연결시키기도 하는데, 이건 좀 순진한(혹은 멍청한) 생각인 거 같아요.:-)
laron/ 예. 우리 말로 "댁은..."이라고 할 때처럼, 상대방과 약간의 거리를 둘 때 쓰는 존칭표현이기도 하죠. 아시겠지만, 그래서 오타쿠 연구자들은 그 단어에서 자신만의 집을 가지고 타자와 내밀한 관계를 맺지 않으려는 오타쿠들의 본질적 욕망을 읽어내기도 합니다.(그런데 "오타쿠"라는 단어의 기원은 한 칼럼리스트가 처음 사용해 미야자키군 사건으로 완전 정착되었다는 게 정설 아닌가요?)
모친 살해의 부정성이 어디서 나오는 걸까요? 사실 저도 그게 궁금합니다. <에바>에서는 모친에 대한 욕망도 그를 살해하려는 욕망도 "인간이 근본적으로 불완전해서"라고 이야기하는군요.:-)
흠/ 그 약간 뻔한 결론이, <에반게리온>의 대중성의 근거겠지요. 저 개인적으로는 아이와 기존의 어른을 대비시켜서 성장의 필요성을 이야기하려는 생각은 없습니다. 아사다 아키라의 분석에서 전제되는 것처럼, 주체성의 변환은 개인의 성장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체제의 문제라고 생각하거든요.
저는 오시이 마모루의 <이노센스>에서 <공각기동대>의 여전사 쿠사나기가 <이노센스>에서는 수호천사로 불리며, 바토가 자신의 애완견을 매우 아끼는 모습등을 보면서, 이것역시 다른 모습의 모성에의 회귀같은게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수호천사는 더이상 성적 결합은 불가능할지 모르지만, 영화속의 대사, "네가 나의 네트에 접속할때는 나는 늘 너와함께할것" 처럼, 서로 하나됨을 암시?하고 있다고 보여지기도 하고말이죠.. <에바>를 꼼꼼히 보지못했지만, 상징계로 진입하는것을 거부하고, 억압된 것이 감춰진 상태,상상계?에 머문다해도, 지금의 사회에서는 전혀 문제될게 없을뿐 아니라, 오히려 자잘한 이익들, 이를테면 소소한 일상의 기쁨같은것으로 곧잘 표현되는, 그런것들을 향유할 수 있기도 하고 말이죠... 애완견에 대한 애정도 그렇고요. 암튼, <이노센스>를 보면서, <공각기동대>보다 보수적인 색채가 강해진게 아닐까 생각을 했었더랩니다.... <에바>에 대한 글을 읽으며 이런 뜬금없는 댓글을 달고 있군여.-.-
음.. 사실 일본 사회를 일종의 모성 사회(maternal society)라는 관점에서 해석하는 건 그리 새로운 관점은 아닙니다. 이미 일본문화론 쪽에서 상당한 연구들이 나와있고, 더 거슬러올라가자면 일본에서 천황이 갖는 의미가, 유럽에서의 아버지-군주의 의미와는 달리 일종의 모성적 존재와 같은 것이었다는 주장도 일반적으로 제기되고 있으니까요.
흥미로운 건 이러한 일본 사회의 모성적 성격으로 꼽히는 특성들(텅빈 중심, 약한 초월성, 강한 네트워킹, 정동 노동, 유아적 주체, 생권력의 절대적 작동)이 오늘날 첨단 자본주의의 지배적 모델이 되고 잇다는 것이죠. 농담이지만, 코제브가 예언한 전세계의 일본화가 이런 것이었나란 생각도 듭니다.:-)
말씀하신 <이노센스>의 장면을, 저는 오시이 마모루의 지속적인 테마, 즉 인간과 동물의 경계,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에 대해 묻기 위한 장치 중 하나로 봤는데, 산책님처럼 해석할 수도 있겠네요. 분명한 건 오시이 마모루는 앞서말한 일본 사회의 특징들을 누구보다 정확히 꿰뚫어보면서 작업하는 사람 중 하나라는 것 정도겠죠.
이론의 이해에 있어서나 그를 통해 얻은 시각을 지금-여기에 다시 재맥락화하시는 센스에 대해서나 올 때마다 일련의 자괴감과 함께 탄복하게 되는군요. 글을 읽고 나니 『까다로운 주체』에서 지젝의 다음과 같은 언급이 떠올랐습니다.
"부성적 권위의 이런 붕괴는 두 개의 측면을 갖는다. 한편으로 상징적 금지적 규범들은 점차로 (사회적 성공이라든가 멋진 육체와 같은) 상상적 이상들에 의해 대체된다. 다른 한편으로 상징적 금지의 결여는 사나운 초자아 형상들의 재출현에 의해 보충된다. 따라서 우리는 극도로 나르시시즘적인 주체를 갖는다. 그는 모든 것을 자신의 불확실한 상상적 균형에 대한 잠재적 위협으로서 지각한다(희생양 논리의 보편화를 예로 들어보자. 다른 인간과의 모든 접촉은 잠재적 위협으로서 경험된다. 타인이 담배를 피우면, 타인이 탐욕스럽게 나를 쳐다보면, 그는 이미 나에게 상처를 주고 있는 것이다). 이런 나르시시즘적 자기-폐쇄는, 교란되지 않은 균형 속에서 자유롭게 부유할 수 있게 해주기는커녕, 초자아의 즐기라는 명령의 부드러운 (것만은 아닌) 자비에 주체를 내맡긴다.(598쪽)"
이 글을 쓸 때, 지젝의 '세 아버지론'(혹은 '두 아버지론')을 염두에 둔 건 사실입니다.:)
사실은 이 글은 확장판이 있는데, http://www.a-act.net/act/act.html 에 실린 "우리, 포스트모던 동물들!"이란 글이 포스팅 처음에 언급된 아즈마 히로키 책의 서평입니다. 작년 이 맘때 기고한 글인데, ACT 웹진 오픈이 계속 미뤄지면서 이제야 인터넷에 업로드 됏네요. 허허;;;; 비슷한 내용이긴 하지만, 이 글이 마음에 드셨다면 혹시 관심이 있으실까 덧붙입니다.
주소 감사합니다. 덕분에 다소 막연하게만 생각해왔던 주제들에 대해서 보다 명료하게 생각을 정리할 수 있게 되었네요. 정말 딱 제가 공부하고자 하는 주제들에 대해서 다뤄주셨네요. 감사합니다. 이 글은 <A.C.T> 2호에 실리는 건가요? 비슷한 고민을 가진 보다 많은 벗들과 인쇄물로 나눠볼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작년에 기고할 때 ACT 1호(창간호가 0호였으니 엄밀히 말하면 1호겠죠)에 실릴 것을 염두에 두고 기고한 글입니다.(웹진에 실릴 줄 알았으면 분량을 줄였을 텐데요;;) 다만 이후 경제위기 등 몇가지 요인(자세한 사정은 모릅니다)으로 ACT의 오프라인 잡지 발간 계획이 중단되고 웹진으로 발간하는 길을 택한 걸로 압니다. 올해 안에 오프라인 ACT 재발간 계획이 있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어떻게 될지는 아직 모르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