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책 다 재밌게 읽히는 책들이라 휴가지에서 읽기에도 좋아요. 전 이번 여름 휴가는 큰 맘 먹고 제주도로 스쿠터 여행을 갔다 왔어요. 스쿠터타고 가다가 경치 좋은 곳 만나면 놀다가, 밤엔 책보면서 쉬고.. 덕분에 통장잔고가 바닥이라 다음달 한 달은 책 구매 불가 상태임.:-)
저한테는 어려서 본 김기영의 <이어도> 때문인지 제주도 자체가 그로테스크하고 귀기어린 땅의 이미지인데, 그래서인지 저런 책이 유독 잘 읽히더군요.:-)
여담이지만 요즘 2008년 판 <전설의 고향>을 두고, '전설'이 '공포'스럽지 않다는 기사들도 많고 사람들도 예전 같지 않다고 하죠. 전설=공포인 것이 아니고, 과거 <전설의 고향>도 대부분이 귀신담이 아니었지만, 사람들의 (만들어진) 기억이란 공포물로 자리매김하더군요. 저도 다른 것보다 <전설의 고향>을 귀신 공포물로 기억하는데, <전설의 고향>뿐만 아니라 <여곡성>이나 <월하의 공동묘지>같은 한국산 공포물이 전달하는 귀괴감과 무서움은 아직도 생생합니다. 농담삼아 90년대 아시아산 공포영화와 소설, 가령 <링>과 <검은 물밑에서>나 각종 괴담류의 일본산, <여고괴담>과 <폰> 등으로 다시 번창한 한국산 공포물, <셔터>나 <샴> 같은 태국산 영화들은 적어도 저한테는 가끔 충격적이기는 했으나, 무섭지는 않았어요(미쿡산은 제외하고). 게다가, 지금 <귀곡성>을 봐도 그렇고 리메이크한 <전설의 고향>을 봐도 마찬가지에요. 왜 무섭지 않을까를 두고 사람들과 노가리를 푼적이 있는데, 무서움을 느끼는 요소가 변했다는 평범한 결론, 짧게 말해 농촌문화에서 도시문화로의 이행이라고나 할까요. 그런면에서 보면, 도시산업화의 모순을 탁월하게 응축한 김기영의 <하녀>가 정말 무서운 공포인 셈이고, 공권력이 무능력한 일상에서 삶을 버텨내야 하는 <살인의 추억>도 탁월한 공포인 것인데, 과거에 비해서 일반적인 공포를 전해주지는 못하는 것 같아요. 위에 글에서 언급한 것을 원용하자면, 가족이든 국가든 자본이든 어디에서 비롯하든 간 그리고 재포섭하든 간에 자리잡지 못하는, 목에 걸려 있는 것에서 비롯되는 공포같은거요. 어쩌면 한국 사회에서 무서움의 코드가 변화하고 분화되었는데, 소위 공포영화나 판타지소설은 그것을 잡아내지 못하는 것 같아요. 기껏 CG로 치장을 하면, 그래서 판타지적 리얼리티를 추구하는 정도인데. 반면에 오늘날의 대표적인 통속극은 무엇보다도 <사랑과 전쟁>인데, 예전에는 원한으로 여럿 죽어 나가는 공포물로 승화했겠지만 이제는 법정에서 4주 간 숙려기간을 부여하거나, 아니면 SBS의 <SOS...>처럼 정신과와 상담전문가에게 맡게 지니까요. 무섭지 않게 처리하는 거죠. 그런데, 직간접적으로 겪어보신 분은 알겠지만 <사랑과 전쟁>이나 <SOS...>의 단골메뉴들은 정말로 무섭습니다. 합리성이 딱 멈춰버리거든요 ㅋ. 쓰다보니 길어졌네요. ㅋ.
(그냥 깜짝 놀라게 하는 것 말고) 제대로 된 공포는 확실히 사회적인 코드를 갖춘 것 같아요. 프랑코 모레티같은 경우는, 잠깐 지나가면서 "복지국가적 공포"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하는데, 그러면 "신자유주의적 공포"같은 개념도 억지는 아닌 셈이죠.:) 그런 면에서 최근 한국 공포 소설에 소재로 자주 사용되는 해리성 인격장애나 신체 훼손의 코드 같은 경우, 단순한 유행을 넘어 자아와 신체에 대한 관념의 변화를 반영하는 하나의 사회적 징후로도 볼 수 있겠죠.
그나저나 <사랑과 전쟁>이 공포물이라는 사실에는 저도 동감입니다. 특히 결혼에 대한 공포를 심어주는 것 같아요.ㅎ
저는 커니의 On Stories만 읽었는데, 거기서도 비슷한 문제점이 발견되더군요. 그양반 왜 그리 해결책을 제시하고 싶어하는지 모르겠어요. 암튼, "타자에게 적절한 자리를 재배정해줄 수 있는 서사의 붕괴가 우리의 시대적 조건"이라는 캐즘님의 말씀에 동의합니다. 혹은 애도가 형식적인 정치세레모니로 전락하고만 우리 현실을, "애도의 실패" 라는 형태로 영화가 반영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에요. 다끝난 잔치처럼 회자되는 광주가 한 예가 될 수도 있겠구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오히려 "애도"로 해결 될 수 없는 그 어떤 것, 피해자에게도 가해자에게도 악몽처럼 되풀이되는 불확실한 상실과 분노를 주시하며 오히려 "melancholy"를 끊임없이 우리의 자의식을 괴롭히는 반성의 모드로서, 정치적 감수성을 자극하는 의식의 모드로서 제시하는 Judith Butler의 주장이 훨씬 설득력 있게 들립니다.
그건 그렇고...오랜만에 들러서 뒷북 치네요. 잘 지내시나요? 새해 복많이 베푸시고 받으세요!
봄나물님 오랜만이에요.:-) 저는 잘 지내요. 엄동설한에 뜻하지않게 이사를 하게 돼 요새는 이래저래 블로그를 할 시간이 없네요. 봄나물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melancholy에 대해 말씀하신 부분은 저도 동감입니다. 저로서는 버틀러를 잘 모르기에, 저에겐 좀 더 친숙한 벤야민의 "알레고리적 멜랑콜리"의 예를 들었던 거구요. 이래저래 어설픈 애도의 몸짓과 post-history화가 난무하는 한국 사회에서, melancholy가 퇴행이 아니라 계속해서 재생산되는 반성과 의식의 모드가 될 수 있는 조건에 관심이 가네요. 최근에 <젠더 트러블>이 번역되었던데, 연말엔 버틀러라도 읽어봐야할까봐요.:-)
번역이 아마도 안되었을것 같긴 하지만...9/11 이후에 쓴 Precarious Life: The Powers of Mourning and Violence 에서는 <젠더트러블>에서 제기한 젠더멜랑콜리를 일반정치(?) 영역으로 확대합니다.
그보다 훨씬 먼저 쓴 The Psychic Life of Power에서는 좀더 철학적인 문제제기를 하고 있구요. 두권 다 재미있을 거에요. 다만 버틀러가 꿈꾸고 있는 "global community"는 좀 거시기합니다만...제게는 벤야민의 "알레고리적 멜랑콜리"가 친숙하지 않은데요. 추천하실 만한 책이 있을까요?
추천 감사합니다.^^ The Psychic Life of Power는 푸코 부분만 찔끔 들춰봤는데 이번 기회에 완독을 해볼까봐요.ㅎ
벤야민의 개념들이 대부분 그렇듯, 알레고리적 멜랑콜리에 대한 벤야민 자신의 "체계적인" 정리는 드물지만, 최근 번역된 <독일 비애극의 원천>이 알레고리와 멜랑콜리에 대한 개념을 잡는데 도움이 될 거에요. 이차 문헌이긴 하지만, 애도에 반대하는 벤야민의 역사에 대한 입장은, Martin Jay의 "Walter Benjamin, Remebrance, and the First World War"에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아마도 인터넷에서 쉽게 찾으실 수 있을 거에요.:-)
감사합니다!
얼마 전 멜랑콜리와 신비주의에 관한 소논문을 하나 발표 했었는데, 이번엔 멜랑콜리와 문화정치 영역에 관한 글을 하나 쓰려고, 어디 부터 시작할까 고민하고 있던 중이었어요. 캐즘님의 글이 제게 많이 도움이 되었네요. 언제 뵈면 술이라도 한잔 사야 할까봐요. :)
오. 재밌는 주제로 논문 쓰시네요. 완성되면 저한테도 살짝 보여주심이.:-) 세상 좁고 학계 자체가 그닥 넓지 않으니 언젠가 뵙겠죠.(그런데 서로 오프라인 이름을 몰라 그냥 지나칠지도..;;;) 그 때 같이 술이나 한 잔 해요~ (뭐. 사실 그 전에라도 메일만 주시면 언제라도 가능해요.ㅎ) 새해 복 많이 받으시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