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에 대한 관용이 자신에 대한 관용의 남용으로 치환되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는 아주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하지만 뒤이어지는 논의의 현실성이 상당히 의아합니다.
"" 휴머니스트들은 범죄자 뒤에 있는 인간성이나 영혼을 찾기 위해 노력했지만, 나는 무죄와 유죄 사이에 놓여있는 깊은 경계를 지워버리는 것을 목표로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요르단에서 팔레스타인인들에 의해 발생한 비행기 납치 사건에 대해 장 쥬네Jean Junet가 제기한 문제였습니다. 언론에서는 사막 한 가운데 명확한 이유도 없이 붙잡혀 있었던 불운한 관광객과 그 판사의 운명에 대해 슬퍼했습니다. 반면에 쥬네는 다음과 같이 말했지요. "그렇지만 이런 식의 여행을 할 만한 충분한 돈을 갖고 있는 미국인 여성과 판사는, 과연 무죄일까요?""(229)"
아주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그저 예시에 불과할 뿐이니 너무 기분 나쁘게 받아들이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가령 캐즘님이 EM님과 함께 포장마차에 앉아서 소주를 마시고 있는데, 다섯 발자국 뒤에 떨어져서 누워있던 노숙자가 소주병으로 두 분의 머리통을 후려쳤다고 해봅시다. 그렇다면, 가령 꼼장어와 같은 안주를 시켜놓고 술을 마실 수 있을만큼 돈이 많은 캐즘님과 EM님은 과연 무죄일까요?
타자에 대한 관용이 윤리적 방어 기제로 작동하는 과정을 폭로하는 것까지는 좋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도덕 상대주의를 넘어 선악 자체를 '해체'하는 경지에 다다르는 것이 과연 합당한 일일지에 대해서는 별도의 논의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지금이야 급진적인 철학자들이 '상징적인 죽음'을 운위하며 말도 안되는 범죄마저도 옹호하고 들 수 있겠지만, 그것이 '실제적인 죽음'과 잇닿게 되었을 때마저도 그런 식으로 '타자'를 존중할 수 있을까요? '타자'등의 어휘를 강조하는 현대철학이 결국 관념적인 수준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저는 이런 곳에서 찾고 있습니다.
아. 청학님의 댓글을 보고 대체 무슨 일인가해서 레디앙을 거쳐 한윤형씨의 블로그까지 가 봐서야 사태를 파악했네요.
일단 저 글을 쓴 "레비나스"는 제가 아니구요. "레비나스"님이 자신의 글인 것처럼 이 블로그를 소개한 모양인데(일부러는 아니라고 믿습니다만), 그 부분은 심히 불쾌하여 항의 댓글을 달고 왔습니다. (이렇게라도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혹 제가 레비나스인 줄 알고 댓글을 달아 주신거라면 실망시켜 드려 죄송합니다.^^)
<<푸코의 맑스>>에서 인용한 부분은 "선악을 넘어서"라는 제목의 푸코와 고등학생들 간의 대담입니다. 책의 각주를 보니 불어 제목은 "선악을 넘어서"가 맞네요. 영문 제목은, "Revoultionary Action"이란 제목으로 Language, Counter-Memory, Practice에 실려 있답니다. 이 책도 푸코의 인터뷰와 짧은 글들을 모아놓은 책이지요. 이 대담은 꽤 초기에 영어로 번역되는 바람에, 과격한 무정부주의자라는 영미권의 푸코에 대한 첫인상에 많은 영향을 미친 바 있습니다.
레디앙에 있던 진중권의 글에 달린 레비나스라는 아이디에 이끌려 여기까지 왔습니다. 뭐, 한윤형이란 분의 블로그를 거쳐서 오긴 했지만요...
레디앙에서의 댓글을 봐서는 자율주의 쪽인듯이 보였고, 자율주의가 지젝과 접합될 때, 그와 같은 파괴력을 보여줄 수 있겠구나 싶기도 했습니다.
폭력과 사랑은 동일한 "형식"을 지닌다라고 말할 수 있을 듯합니다. 즉, 경계의 무너짐이라는 형식... 그리하여, "사랑은 내가 갖지 않은 것을 주는 것"이라는 라캉의 사랑의 정의를 폭력과 사랑이라는 것과 관련해 생각해 볼 수 있을 듯합니다. 즉, "내가 갖지 않은 것을 준다"는 형식은 갖지만, 내가 갖지 않은 남근, 즉 환상을 주는 것은 폭력일 터이고 텅빈, 벌거 벗은 나를 주는 것은 사랑이겠다 싶습니다. 그리하여, 폭력을 어두운 철학이라 한다면, 사랑을 밝은 철학이라 부를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본문에서, 경계 경험limit experience라고 쓰신 것은, 푸코가 썼던 방식을 고려해서, 경계와 경험 사이에 하이픈을 넣어서, limit-experience라고 쓰셔도 좋을 듯합니다. 그의 광기의 역사의 삭제된 서문에서 그가 그렇게 쓰고, 이후의 인터뷰에서 그렇게 쓰듯이 말입니다.
<<푸코의 맑스>>에서 인용하셨던 글은 원문 제목이 무엇인지 여쭈어봐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글 즐겁게 읽었습니다^^ 정치적 입장에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최소한 스타일 면에서 저는 캐즘님이 정리하신 '푸코'가 더 마음에 드는 것 같습니다. 저항의 경계의 '재설정'이라는 생각이 흥미로운 것 같아요. 저는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인데... 그리고 서발턴에 대한 문제의식도 전 스피박에게 '호감'이 가더군요. 왠지 윤리적으로 더 철저한 것 같아 보여서; (이런 거 잘 모아다가 예/아니오 줄타기 만들어도 재밌을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