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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캐즘의 블로그</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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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DATA[
(연속된 것의) 틈, 중단, 간격, 차이
]]>
		</description>
		<language>ko</language>
		<dc:creator>캐즘(mailto:)</dc:creator>
		<pubDate>Mon, 15 Mar 2010 00:01:04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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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캐즘의 블로그</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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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연속된 것의) 틈, 중단, 간격, 차이]]></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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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guid>http://blog.jinbo.net/chasm/?pid=108</guid>
			<title>몇가지 덧붙임</title>
			<link>http://blog.jinbo.net/chasm/?pid=108</link>
			<description>
<![CDATA[
<!--FCKeditor--><p align="justify">앞의 글에&nbsp;달린 게슴츠레님의 댓글에 답하려다 글이 길어질 것 같아, 따로 글로 남깁니다. 다시 읽어보니 앞의 글이 너무 압축적이어서(제 나쁜 버릇 중 하나입니다;;),&nbsp;조금은 더 자세히 해명할 필요가 있을 것 같군요.</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먼저 기우이긴 하지만, 오해를 막기 위해 밝히자면 저는 사람들이 노무현의 죽음을 애도해야 한다/하지 말아야 한다는 식으로 의견을 밝힐 생각은 없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별다른 애도의 감정이 느껴지지 않고, 특정한 죽음을 애도하는&nbsp;것은 비정치적 행위가 아니라 오히려 정치의 본질에 가까운 행위라고 생각하기에 굳이 노무현을 애도할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nbsp;한 사람에 대해 느끼는 감정은 개개인에 따라 다층적일 수 있고, 극단적인 경우 개인의 상태에 따라 노무현이라는 대상과는 별개로 죽음 자체에 대한 애도의 감정이 들 수도 있습니다. 하다못해 이억만리 떨어진 생면부지 인간의 죽음도 무언지 모를 나의 내밀한 부분을 건드리는 경우가 있는데,&nbsp;그를 지지했건 그렇지 않던 간에 매일 뉴스 화면을 통해 보고&nbsp;수없이 입에 올렸던 인물의 죽음이야 말할 필요도 없겠죠.&nbsp;아마 자신조차도 "왜?"라는 질문에 답할 수 없는 이러한 감정을 둘러싸고,&nbsp;노무현을 애도해야 한다/하지 말아야 한다는 식의 논의를 벌이는 건 무언가 초점이 엇나갔다는 느낌이 드는군요. </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오히려&nbsp;제가 주목하고 싶은 부분은&nbsp;다양한 (비-)애도의 "형식"과 그 속에서 엿볼 수 있는 사회의 한 단면입니다.&nbsp;그 중에서 가장 관심이 가는 건,&nbsp;게슴츠레님 말처럼, 노무현의 정치와 거리를 두고 있었던 누군가가 그의 죽음 앞에서 드는 애도의 감정을 "일관성있게" 설명하려 들 때 "일반적으로" 등장하는 담론의 형식이군요. 정작 분석이 필요한 대상은 내용이 아닌 형식이라는 말이 맞다면, 이러한 담론의 형식은 분명 그 주체가 가진 인식의 한 측면, 더 나아가 그 속에 투영된 사회의 일면을 엿볼 수 있는 실마리가 될 수 있겠죠.&nbsp; </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지금까지&nbsp;노무현의 정치적 입장을 지지하지 않았던 (진보 진영의) 인사들이 일반적으로 자신의 애도의 감정을 표하기 위해 사용하는 담론은, 크게 보아 두가지 형태인 것 같습니다. (1)집권자로서의 노무현과 구분되는 "원형"의 노무현을 거슬러올라가 "발굴"하여, 후자를 애도하기.&nbsp;(2)정치인 노무현과 "인간" 노무현을 구분하고 역시나 후자를 애도하기.&nbsp;</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제가 "정치적 도덕주의" 혹은 "고유한 속물적 입장"이라는 말로 지적하고 싶은 것은,&nbsp;이 두 형태 모두에서 나타나는 어떤 "분리" 자체가 탈역사화와 탈정치화의 함정이라는 것입니다.&nbsp;첫번째 담론에서는, 집권자 노무현이 바로 그 이미지를 활용해 집권했으며, 집권 기간 자신의 정당성의 기반으로 삼았다는 역사적 사실이 은폐됩니다. 따라서&nbsp;87년 이후 민주화 세력과 그 담론이&nbsp;걸어온 역사적 경로는, 그저 "개인" 노무현의 변화 혹은 한계로 "개인화"될 수밖에 없죠.&nbsp;두 번째 경우는 앞선&nbsp;글에서&nbsp;밝혔지만,&nbsp;진정성과 인간성의 위치를 정치와 역사 외부에 둠으로써 좀 더 노골적으로&nbsp;노무현을 텅 빈 형식적 가치로 만드는&nbsp;방식입니다.</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여담입니다만, 따라서&nbsp;누군가가 만약 일관되고 진정한 노무현 지지자라면, "바보 노무현"&nbsp;같은 애도 담론에 대해서&nbsp;오히려 분노해야만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 아름다운 애도사에는 노무현이 정치인이자 집권자로 추구했던 가치는 은밀히 부정되고, "사람좋음" 혹은 "열정"이라는&nbsp;텅 빈 형식적 가치만 남아있으니까요. 하지만 그런 반응을 보기 힘들다는 사실은,&nbsp;노무현이 형상화하는 가치가 그 지지자들 사이에서조차 텅 빈 것이었음을&nbsp;방증하는 것일까요?</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아무튼 게슴츠레님의 말에 냉소주의의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저로서는 그 동안 노무현을 "신자유주의자"라 비판했던 "좌파"인사들이 이러한 탈역사적-정치적 담론을 통해 그를 공식적으로 애도할 때, 그래서&nbsp;이 죽음에서 최소한의 "사람좋음"과 "민주화의 열정"정도는 이야기해볼 수 있겠다고 실용적으로 접근할 때,&nbsp;이 담론이 바로 전형적인 냉소주의 담론이고 이들이 바로 냉소주의자라고 생각합니다.&nbsp;"나는 노무현이&nbsp;신자유주의자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정확한 판본은,&nbsp;이렇게 되겠죠.&nbsp;"나는 노무현이 신자유주의자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대중들이 그걸 알고 있을까?)" 여기서 대중은 "믿고 있다고 가정된 주체"입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속고 있는 것은 주체 자신일 뿐이죠. 지젝이 슬로터다이크로부터 차용한 "알면서 속는자"라는 냉소주의자의 정의에 이보다 잘 들어맞는 예를 찾기도 어려울 것 같습니다.&nbsp;&nbsp; </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물론 게슴츠레님이 언급하신&nbsp;두려움-정치와 무관한 관조적 분석가가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 것 같습니다. 하지만 냉소주의의 위험성에 대해 경고한 그 지젝은, 그의 또 다른 글에서 성급한 행동의 촉구가 가진 위험성에 대해 경고합니다. 최소한 제가 아는 한에서는, 이는 전혀 모순되는 입장이 아닙니다. 지젝의 틀에서 냉소주의는 "실천"과 대립적 위치를 갖지 않습니다. 그에게 냉소주의와 대립적 위치를 가지는 것은 (정신분석적 의미에서의) "분석"이죠. 그리고 잘 아시겠지만, 분석은 또한 "행위(act)"와 대립되지 않습니다.&nbsp;아마도 노무현의 죽음을 앞에 두고 갑자기 사라져버린 건, 하지만 정작 필요한 건&nbsp;바로 이러한 의미에서의 분석일&nbsp;것이고, 그에 기반한 우리의&nbsp;(비-)애도의 방식을 둘러싼 논의일 것입니다.&nbsp;진보네 블로그들에서만도 훌륭한 (비-)애도의 방식을 몇 군데서 본 것 같은데, 밤이 깊어 가니,&nbsp;그 얘기는 나중에 기회가 닿을 때 해야할 것 같습니다.&nbsp;</p>
]]>
			</description>
			<author>캐즘</author>
			<category>맑글터</category>
			
			
			<pubDate>Fri, 29 May 2009 01:33:20 +0900</pubDate>
		</item>
		<item>
			<guid>http://blog.jinbo.net/chasm/?pid=107</guid>
			<title>포스트 히스토리와 정치- 몇가지 난삽한 정리 그리고 노무현이라는 신화</title>
			<link>http://blog.jinbo.net/chasm/?pid=107</link>
			<description>
<![CDATA[
<!--FCKeditor--><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4월에 &lt;교수신문&gt;에 실린 <a href="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18058#30004">아즈마 히로키의 인터뷰</a>를&nbsp;며칠 전에야&nbsp;발견하곤,&nbsp;예전&nbsp;기억을 떠올려&nbsp;1년 전 쯤&nbsp;썼던 글 하나를 링크해 놓는다. 그리고 관련된 주제들에 대한 생각을 한번 정리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블로그에 약간은 두서없이 정리해본다.&nbsp;요즘 여러가지 일로 폭주 중이라 긴 포스팅을 할 시간을 내기가 쉽지 않다.&nbsp;한 해가 거의 절반 가까이 넘어가고 있는데,&nbsp;올해들어 세 번째 포스팅이니 이건 블로그를 하는 것도 안하는 것도 아닌 상태이지만, 조만간 여유가 좀 생기면 EM님처럼 블로그를 한 번 손 봤으면 싶다. 특히&nbsp;이 어중간한 폰트부터...</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링크를 거는 글은 재작년에 창간호 0호(혹시 누런 표지와 빽빽한 편집의 이상한(?) 책을&nbsp;기억하는 분이 있을지..)를 낸 ACT 1호에&nbsp;보낸 글인데, 현재 ACT는 재정난 등의 이유로&nbsp;웹진으로 방향을 바꾼 상태이다.(올해부턴 1년에 한 번 정도 웹진에 실린 글들을&nbsp;책으로&nbsp;발간할 계획이라는 소식은 들었다.) 웹진 홈페이지 오픈은 올해 초에 이뤄졌음에도, 아직 이래저래 정돈이 안된 듯한 느낌 때문인지 방문자수는 그리 많아보이지 않는다.(갤러리에서 내는 문화예술비평지라고 하기에는&nbsp;너무나&nbsp;고전적인(?) 웹디자인도 한 몫하지 않았을까 싶다;;;) </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조만간 새로 업데이트 할 예정이라는 소식만 들었는데, 오프라인으로 발간될 글들을 모아놓는 半-아카이브 형태의 잡지가 될지, 예전 컬티즌 같은 짧은 평론 위주의 웹진이 될 지는&nbsp;잘&nbsp;모르겠다.(다른 건 몰라도,&nbsp;범죄소설의 팬으로서 조영일씨의 탐정론은 계속 연재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nbsp;</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a href="http://www.a-act.net/act/act.html">http://www.a-act.net/act/act.html</a></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위 링크의 목차 중 &lt;우리, 포스트모던 동물들&gt;이&nbsp;작년에&nbsp;기고한&nbsp;글이다.&nbsp;당시에는 오프라인&nbsp;발간을 염두에 두고 쓴 글이라,&nbsp;분량이 많아&nbsp;온라인 상에서는 읽기 힘들지도 모르겠다.(PDF 파일을 요청하신 분이&nbsp;있기에 혹시 다른 분들도 관심이 있을까 싶어,&nbsp;초고의 PDF&nbsp;파일도&nbsp;같이 올려놓는다.&nbsp;진보네 블로그에 첨부파일을 올리는 방법을&nbsp;시험하다, 그냥 예전에 사용하던 네이버 블로그에 업로드&nbsp;해 <a href="http://blog.naver.com/towardpaz">링크</a> 걸어 놓는다.&nbsp;진보네 블로그에 파일 올리는&nbsp;방법을 아는 분 있으면 알려주시길..)</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사실 이 글의 주된 내용은&nbsp;이 블로그의 예전 글들에서 한 번 정도 언급되었던 내용이다.&nbsp;말하자면&nbsp;<a href="http://blog.jinbo.net/chasm/?cid=2&amp;pid=48">[새로운 민족국가 만들기와 동물-속물적 주체성]</a> &nbsp;<a href="http://blog.jinbo.net/chasm/?cid=2&amp;pid=72">[책 두 권]</a> , [<a href="http://blog.jinbo.net/chasm/?pid=89">코제브의 동물/속물론]</a> 의 확장증보판인 셈이다.&nbsp;</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글을 쓸&nbsp;당시에는 미처 참고하지 못했지만, 이후에&nbsp;생각을 발전시키는데 도움이 되었던 두 권의 책, &lt;미시마 유키오 대 동경대 전공투 1969-2000&gt;(김항 역, 새물결, 2006)와 Wendy Brown의 "Politics Out of History"(Princeton Univ Press, 2001)도 이번 기회에 짧게&nbsp;정리해놓는다.(최근&nbsp;포스트 히스토리라는 조건과 정치적 주체화의 문제를 전면적으로&nbsp;다룬&nbsp;김항씨의 &lt;말하는 입과 먹는 입&gt;(새물결, 2009)을&nbsp;재미있게&nbsp;읽었지만, 아직 정리할 시간을 갖지는 못했다.)</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 &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 &nbsp;<img id="my_post_img3042272" style="CURSOR: hand" onclick="viewPostImage('/files2/202/chasm/images/200905/130116231.jpg')" height="275" alt="" width="200" onload="setTimeout('fixImage(3042272)',300)" src="/files2/202/chasm/images/200905/130116231.jpg" />&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 <img id="my_post_img4501741" style="WIDTH: 182px; CURSOR: hand; HEIGHT: 274px" onclick="viewPostImage('/files2/202/chasm/images/200905/130118329.gif')" height="246" alt="" width="160" onload="setTimeout('fixImage(4501741)',300)" src="/files2/202/chasm/images/200905/130118329.gif" /></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먼저 Wendy Brown의 "Politics out of History"
<politics out="" of="" history=""></politics>
<politics out="" of="" history=""></politics>
는, 제목에서&nbsp;드러나듯이,&nbsp;역사의 종결 이후에&nbsp;"정치"라는 것이 사유되는 방식의 변화를 다룬다. 이 책에서&nbsp;Brown이&nbsp;던지는 질문은,&nbsp;기존의 정치적 행위들을 지탱해주던 기반으로서의&nbsp;공통의 큰 이야기가 사라진 상황에서, 정치는 어떤 것으로 변화하는가라는 물음이다.&nbsp;역사의 종결 이후 "최후의 인간"들의&nbsp;도덕에 대한 집착을 조롱한 니체를 따라,&nbsp;Brown은&nbsp;포스트 히스토리 공간에서의 정치의 형태를 역사와 적대에 대한 분석을, 개인과 도덕적 선택에 대한 분석으로 대체하는 "정치적 도덕주의(moralism)"의 범람으로 진단한다.&nbsp;</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Brown에 따르면,&nbsp;이 정치적 도덕주의는 총체적인 역사적 내러티브가 붕괴했으나,&nbsp;여전히 새로운 대안적 담론들을 찾지 못한 오늘날의 사회적 조건을 보여주는 징후이다.&nbsp;이 정치적 도덕주의에서 정치에 대한 상상은, 역사적-총체적인 현실 분석을 상실한 채&nbsp;개인의 선택과 그가 행한 도덕적 실천의 결과로 협소화된다.&nbsp;즉, 정치적 행위는 고립되고 파편화된 개인의 실천으로&nbsp;이해되며, 정치적 갈등의 원인은 탈정치화-역사화되어 선한 개인의 행위와&nbsp;악한 개인 행위 간의 대립으로 평면적으로 서술되는 것이다.&nbsp;이러한 정치에 대한 상상틀의 변화 속에서,&nbsp;정치는&nbsp;공통의 이야기 속에서&nbsp;현존하는 차이를 극복하는 연대의 기획이라기 보다는,&nbsp;현존하는 차이들 간의&nbsp;본질화된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게임의 장으로 변해버린다.&nbsp;&nbsp;&nbsp;&nbsp;</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Brown이 정치적 도덕주의를 이야기할 때, 그녀가 일차적으로 염두에 두고 있는 대상은 정치적 공정함과 증오 발화를 둘러싼 정치적 담론들이지만, 조금 비약해 말하자면,&nbsp;오늘날 정치에 대한 담론들 전반이 이러한 도덕주의의 틀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예컨대, 크게는 제국주의적 전쟁의 문제를 개인의 전쟁 선호증으로 돌리는&nbsp;담론에서부터, 작게는 오늘날&nbsp;유행하고 있는 "착한&nbsp;소비"와&nbsp;"착한 기업" 같은&nbsp;담론에 이르기까지.&nbsp;이러한 담론들의 핵심적 특징은&nbsp;그&nbsp;분석에서&nbsp;문제가 발생한 역사적-총체적 분석을 삭제한다는데 있다.&nbsp;대신 이 분석의 공백을 메꾸는 것은, 어떤 선한&nbsp;혹은 악한 "개인"의 도덕적 "선택"이며, 결국 이러한 개인의 도덕적&nbsp;선택을 둘러싼 갈등이&nbsp;정치적 행위를 상상할 수 있는&nbsp;유일한 방식으로 협소화된다.&nbsp; </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Wendy Brown에 따르면, 이러한&nbsp;정치적 도덕주의의 궁극적 효과 중 하나는,&nbsp;주체를 정치적 책임과는 무관한 "순수한" 주체로 남아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정치는&nbsp;나의 존재 형식 그 자체와 관련된 것이라기보다는, 개인의 삶 속에서 부분적으로 이루어지는&nbsp;도덕적 선택에 한정된 것이기에, 개인은 정치적 책임이라는 무거운 짐을&nbsp;떠맡는 것에 더이상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nbsp;Brown이 보기에, 오늘날 정치적 도덕주의에 공모하는&nbsp;주체들을 사로잡고 있는&nbsp;기본적인 자화상은, "책임을 다하지 않는 부모(국가)를 비난하는 아이"의 모습이다. 책임을 져야하는 것은 내가 아닌 부모이기에, 이 주체들은&nbsp;이러한&nbsp;제한된 상상의 틀을 넘어, 어떻게 부모가 될 수 있을까라는 중요한 질문을 회피하거나 직접 부모가 되는 어려운 책임을 방기한다. 그리고 그 결과는,&nbsp;역설적으로 국가를 (원래 공정해야 할) 부모로 "구성하고",&nbsp;자신들의&nbsp;역능을 투정부리는 아이로 한정시키는 것이다.&nbsp;</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우리는 폭력을 사용하지 않았고,&nbsp;나 자신이&nbsp;부모가 되기 위한 조직의 구성이나 이에 대한 고민도 우리의 관심사가 아니다. 우리는 순수한 목적을 가진&nbsp;존재들이고, 따라서 남은&nbsp;문제는&nbsp;우리의 부모가 이러한 순수한 요구를&nbsp;받아들이는 것 뿐이다..." Brown의 말처럼, 바로 이러한 "순수한" 도덕적 정치주체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nbsp;어떤 책임을 짊어진 역사적 주체는 될 수도 없고, 되기로 싫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덕적 가치를 통해 정치의 실천을 재전유하려는 어떤 부인의 매커니즘이다.(그리고 아즈마 히로키가 적절히 지적하듯이, 이러한 부인의 매커니즘이야말로&nbsp;"속물적 주체성"의 기본적인 존재 형식이다.)&nbsp;&nbsp;&nbsp;&nbsp;&nbsp;</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Wendy Brown의 책이 포스트-히스토리의 공간에서 벌어지는 "속물의 정치"의 최신 판본을 그려내고 있다면, &lt;미시마 유키오 대 동경대 전공투 1969-2000&gt;은&nbsp;김항 씨가 역자 서문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nbsp;포스트-히스토리의 공간에서 어떻게&nbsp;새로운 초월성과 그것에 기반한&nbsp;새로운 "인간의 정치"를&nbsp;구성할 것인가에&nbsp;대한&nbsp;탐구라고 할 수 있다.&nbsp;미시마 유키오와 전공투는&nbsp;어떤 형태의 초월성도, 진리에 대한 믿음도, 그리고&nbsp;이에 대한 극한의 추구도 존재하지 않는, 즉 &nbsp;"끝까지 가지 않는" 전후 일본 사회에&nbsp;분노하고, 자신들의 방법을 통해 새로운 "신화"와 초월성을 복원하려 하지만, 이들의 시도는 미묘하게 정반대를 향해 있다.&nbsp;</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즉, 미시마 유키오가 일본 사회에서 현존해온 초월성의 형태인 천황을 복구하여 굳건히하는 것을 꾀한다면,&nbsp;전공투는 현질서의 "부정"을 통한 무(無)의 초월성을 구성하기를 꿈꾼다.&nbsp;어색한 운동권 어투가 난무하는:-) 이들 사이의&nbsp;격한 논쟁에서 확인할 수 있는&nbsp;논점들, 즉 게임과 유희의 차이, 지속으로서의 시간에 대한 강조와 새롭게 구성되는&nbsp;공간에 대항 강조의 차이, 현존하는 관계의 존중과 이 관계에 대한 거부 간의 차이는, 기본적으로 초월성의 구성 방식에 대한&nbsp;이들의 입장차&nbsp;둘러싸고 순환하는 쟁점들이다. </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김홍중의 표현을 빌려와,&nbsp;미시마 유키오가&nbsp;과거로부터 발견된&nbsp;초월적 요소를 강화하려는 "속물의 정치"를 꿈꾼다면, 전공투는 자기-부정의 폭력 자체를 새로운 신화로 구성하려는&nbsp;"구원의 정치"를 추구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따라서&nbsp;미시마 유키오가 전공투에게 연대투쟁을 제안하며, "그래서 당신들 속에 있는 절대적인 것에 천황이라는 이름을 붙여도 되잖아?"라고 천연덕스럽게 물을 때, 그는 전공투와 자신의 논쟁지점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는 점에서 날카롭지만, 두 입장 간의 가장 중요한&nbsp;차이를 뭉개버리려 한다는 점에서 충분히 의뭉스럽다.&nbsp;이 절대적 부정성의&nbsp;추구에 천황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순간, 모든 것이 달라진다는 사실을 그가 모를리 없으리라.&nbsp;</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사실 미시마 유키오와 전공투 간의 입장차는,&nbsp;포스트 히스토리의 공간에서&nbsp;새로운 역사의 정치를 추구하는 이들이 동요하며 오가는 양 극점을 대변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문제를 지극히 단순화하자면, 이 두 입장차는 우파 슈미트와 좌파 벤야민 사이에서도 비슷하게 반복된다. 하지만&nbsp;이&nbsp;둘 간의&nbsp;상반된 입장차가 한 인물의 삶 속에서&nbsp;가장 드라마틱하게 뒤섞인 예는,&nbsp;아마도 혁명적 아나코-생디칼리스트의 대표적 이론가인 동시에 파시즘의 정신적 아버지로 불리우는,&nbsp;(그리고 슈미트와 벤야민 모두가 참고하고 있는) 조르쥬 소렐(Georges Sorel)의 삶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nbsp;20세기 초&nbsp;프랑스의 정치&nbsp;공간 속에서,&nbsp;폭력과 총파업을&nbsp;통한 새로운 노동자&nbsp;계급의 신화 구성을 주장했던 소렐은, 이후 "위대한 프랑스 골(gaul)족의 신화"에 기반한 민족&nbsp;통일성의 구축을&nbsp;강조하는 열렬한, (그에게 좌우파란 전통적인 잣대의 적용이&nbsp;가능하다면)&nbsp;우파 민족주의자로 입장을 바꾼다. </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충분히 이해가능하지만, 소렐 자신은 변절자라는 주위의 비난에 대해,&nbsp;자신의 입장의 일관성을 변호했다고 한다. 아마도 포스트 히스토리의 공간에서 새로운 역사의 정치를 구성하기를 누구보다도 간절히 원했던 소렐이&nbsp;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것은,&nbsp;새로운 초월성의 구성에 있어 존재하는 두 벡터의 차이, 즉&nbsp;과거의 신화를 재구성하려는&nbsp;"속물의 정치"의 벡터와 새로운 "구원의 정치"의 벡터 간의 차이였으리라.&nbsp;&nbsp;그리고,&nbsp;따라서&nbsp;오늘날 포스트-히스토리 공간에서의 정치적 주체화의 문제에 대한 사고 역시, 바로&nbsp;이 구분의 정교화에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마지막으로&nbsp;따로 글을 쓰려다가.. 그냥 덧붙임.</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도덕주의와 신화의 이야기가 나와서 말이지만, 최근 노무현 전대통령의 죽음에 대한 애도의 물결은 한국 정치에서의 탈역사적 도덕주의의 형태를&nbsp;보여주는&nbsp;한 가지 예로 이해될 수도 있을 것이다.&nbsp;노무현의 죽음을 두고 쏟아진 수많은 애도의 말 중에서,&nbsp;개인적으로 가장&nbsp;흥미로운 애도의 형태는,&nbsp;"노무현의 정치적 입장 혹은 과오를 떠나,&nbsp;인간 노무현과 그의 진정성&nbsp;만은&nbsp;존경한다"는&nbsp;입장들이다.&nbsp;물론&nbsp;이러한 애도사에서&nbsp;표면적으로 읽어낼 수 있는 것은, 오늘날 우리 사회가&nbsp;진정성과 인간성이라는 가치에&nbsp;여전히 목말라 있다는 단순한 사실일 것이다.&nbsp;</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하지만 이 평범한 애도사가 의미심장하게 느껴지는&nbsp;이유는 따로 있다. 그것은 고인의 진정성을 기리는 이 평범한 애도사의 레토릭이,&nbsp;역설적이게도 고전적인 "진정성"의&nbsp;의미를 부정하는 것으로&nbsp;귀결되기 때문이다.&nbsp;과거 역사적 주체와 정치적 주체에게 "진정성" 혹은 "인간성"의 자리는,&nbsp;정치적 입장을&nbsp;뺀 나머지&nbsp;"인간" 쪽이 아니라 정치적 주체성의 자리에 놓여져 있었던 것이 아닐까? 김수영이 자신의 속물성을 탓하며, "진정성"의 가치를 통해&nbsp;정치적 주체 혹은 예술적 주체로서의 김수영과 생활인 김수영 간의 불가피한&nbsp;간극을 메우려 할 때,&nbsp;부정되어야 할 것은 정치적 주체로서의 김수영이 아니라&nbsp;생활인으로서의 김수영이었을 것이다. &nbsp;</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따라서&nbsp;정치인 노무현의&nbsp;정치적인 죽음을 앞에 두고, 정치적 주체와 분리된 "인간" 노무현과 그의 "진정성"을 말하는 것은,&nbsp;그것의 정당성을 떠나서, 인간성과 진정성에 대한 어떤&nbsp;인식의 변화를&nbsp;반영하는 것이다.&nbsp;이 애도사에서 말하는&nbsp;"인간성"과 "진정성"이란, 아마도&nbsp;정치적 내용이나 역사성과는&nbsp;분리되어 이해될 수 있는(혹은 이해되어야만 하는)&nbsp;어떤 형식적 가치일 것이다. 고인의 인간성과 진정성을 기리기 위해&nbsp;부정되어야 할 것은, 생활인으로서의 노무현이 아니라&nbsp;특정한 가치를 추구했던 정치적-역사적 주체로서의 노무현이고, 진정성과 인간성의 자리는 이제 정치와 역사&nbsp;"외부"의 자리로 전치된다. 그리고 이렇게 순수한 형식적 가치가 되어버린&nbsp;인간성과 진정성은, 그 정치-윤리적 의미가 탈색되어 "청렴성", "사람좋음", "열정" 등으로 치환가능한&nbsp;단어가 되어 버린다.&nbsp;역으로 말하자면, 아마도 이러한 전치와 형식화를 통해서만, 그는 가장 "인간다운" 혹은 "진정성을 가진" 대통령으로 추모될 수 있을 것이다. </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노무현은&nbsp;자살로&nbsp;"진정성과 인간성의 신화"가 되었지만, 이는 동시에 그 진정성과 인간성&nbsp;자체가&nbsp;아무런 역사적 내용없는 텅 빈 형식적 가치로 전환되었음을 의미한다.&nbsp;그리고 흥미롭게도 이 텅 빈 형식의 제시는, 노무현이라는 아이콘과 이 아이콘이 상징하는 "민주화"라는 텅 빈&nbsp;내러티브(그래서 모든 적대와 투쟁들이 수렴될 수 있는..)가&nbsp;지금까지 한국 사회에서&nbsp;기능해온 역할과 완전히 동일한 것이다.&nbsp;지난 10여년간 한국 사회에서 "민주화" 담론은 민주화의 시간을 지속시킴으로써 역사의 종결을 지연시키는 "커다란 비이야기"로 기능해왔고, &nbsp;이 담론이 작동하는 한에서만,&nbsp;소위 민주화 세대는 역사가 종결되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고" 다시 역사의&nbsp;인간이 되는 것도 원치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의 시대를 살고 있다는 믿음 자체는 포기하지 않는, "텅 빈 것이라도 어떤 형식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고유한 "속물적" 주체로 남아있을 수 있었다. </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죽음으로 강화된 텅 빈&nbsp;노무현의 신화가, 앞으로 어떠한 방식으로 작용할지는&nbsp;잘 모르겠다. 이 죽음이&nbsp;끊어질 뻔 했던 텅 빈 형식과 가치의&nbsp;생명력을 지속시키는&nbsp;영양제가 될 지, <a href="http://blog.jinbo.net/ethereal/?pid=573">EM님의 말처럼</a>&nbsp;지난시기 퇴화된 꼬리뼈처럼&nbsp;번거롭게 남아있던 텅 빈 가치를 "애도"로써 청산하는 기제가 될지는, 아마도 노무현의 죽음을 (비)애도하는 방식을 둘러싼&nbsp;다층적인 투쟁과 사회적 조건의 변화&nbsp;속에서 결정될 것이다.&nbsp;다만&nbsp;현재로서도&nbsp;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nbsp;한가지가 있다면,&nbsp;두 경우 모두 새로운&nbsp;역사와 고유한 "인간"의 정치를 꿈꾸는 "우리"(혹은 "누군가")에게 그리 바람직한 상황은 아닐 것 같다는&nbsp;명확한 사실 뿐이리라...&nbsp;</p>
<p align="justify">&nbsp;</p>
]]>
			</description>
			<author>캐즘</author>
			<category>담론의 질서</category>
			<category>Wendy Brown</category>
			<category>노무현</category>
			<category>전공투</category>
			<category>포스트히스토리</category>
			<category>조르주 소렐</category>
			
			
			<pubDate>Thu, 28 May 2009 00:30:57 +0900</pubDate>
		</item>
		<item>
			<guid>http://blog.jinbo.net/chasm/?pid=106</guid>
			<title>새로운 세대론과 장기하라는 아이콘</title>
			<link>http://blog.jinbo.net/chasm/?pid=106</link>
			<description>
<![CDATA[
<!--FCKeditor--><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1. </p>
<p align="justify">"88만원 세대"론 이후, 세대론이 다시 붐이긴 붐인가 보다.(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세대론이 언제 붐이 아니었던 때가 있어나 싶기도 하다.) 오늘자 중앙Sunday에서 80년대생 0x학번으로 현재 20대인 이들을 대상으로 한 새로운 세대론을 야심차게 내놨다. 이른바 <a href="http://sunday.joins.com/article/view.asp?aid=11523">"C세대론"</a>이다.</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한국 정치사회학회와 합동으로 구성된 중앙일보 특별취재팀의 친절한 설명에 의하면, 이들 C세대는 청소년 시기와 청년 시기에 두 번의 경제 위기(Crisis)를 겪으면서, 격심한 경쟁(Competition)을 체화하고 있으며, 소비자(Customer)로서 자신을 정체화하는 세대로 요약될 수 있다고 한다.(종종 느끼지만, 세대론자들의&nbsp;네이밍 솜씨는 뭐랄까.. 참으로 "애썼다" 싶다...) </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아침에 지하철에서 기사를 쭉 훑어보면서, 네이밍 과정에서 사회학자와 기자들이 "C세대론"을 좀 더 그럴싸하게 만들어 줄만한 중요한 키워드 몇 개를 빼먹었구나 싶었다. 바로 Commodity와 Commercial&nbsp;그리고 C가 무려 두개나 붙은 Consumer Citizenship. 개인적으로는 나이를 기준으로 한 세대의 구분 자체에 대해 회의적이지만, 굳이 오늘날의 (상층부) 20대를 표현하자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자기계발이란 이름 하에 자신을 상품(commodity)로 구성하는데 익숙하고, 자기표현 및 자기PR이라는 이름 하에 자신의 판매(commercial)에도 익숙하며, 정치와 경제의 단락에 따른 새로운 정치적 주체성(consumer citizenship)을&nbsp;체화하고 있는 이들. </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2. </p>
<p align="justify">그런데 중앙Sunday가 <a href="http://sunday.joins.com/article/view.asp?aid=11553&amp;cat_code=07&amp;start_year=2008&amp;start_month=12&amp;end_year=2009&amp;end_month=03&amp;press_no=&amp;page=1">C세대 감성의 대변자로&nbsp;꼽은&nbsp;이</a>는,&nbsp;조금 놀랍게도 "장기하"다.( X세대의 아이콘이 한국에서는 서태지, 미국에서는 제임스 딘이었듯이, 세대론과 아이콘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아마도 아이콘없는 세대론은 "88만원 세대론"이 거의 유일할텐데, 이건&nbsp;88만원 세대 규정이 가진&nbsp;비판적&nbsp;성격의 방증이라고 할 수 있다.)</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개인적인 친분 때문이기도 하지만, 안그래도 최근의 일명 "장기하 신드롬"이라 할 만한 현상을&nbsp;흥미롭게 지켜보고 있다.(많이 친했다고는 할 수 없지만, 기하는&nbsp;한 학번 차이의 과후배다.) 사실 음악 자체를 그다지 즐겨듣지 않는 나로서는 &lt;장기하와 얼굴들&gt;의 음악성을 평할 능력이 없으며, 따라서 그 음악적 새로움과&nbsp;지금의&nbsp;인기 간의 관계는 내 능력과 관심 밖의 문제다.&nbsp;오히려 내게 흥미로운 것은,&nbsp;단순히 음악성으로 환원되지 않는 이 인기에 반영되어 있는&nbsp;사회적 의미층들, 혹은&nbsp;장기하 본인의 의지와는&nbsp;상관없이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장기하"라는 아이콘의 의미이다.&nbsp;중앙 Sunday의 선정이 조금 놀랍기는 하지만, 이 아이콘의 순환에는&nbsp;확실히&nbsp;최근 세대의 감수성을 반영하는 무엇인가가 있는 것 같다.&nbsp;&nbsp;&nbsp;&nbsp;</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예컨대, "장기하"라는 아이콘을&nbsp;논할 때 빠지지 않고 함께 등장하는 두 가지 의미소, 즉 그 노래가 반영한다는&nbsp;"루저 감성"과,&nbsp;장기하 본인의 배경인 "서울대 출신"이라는&nbsp;과잉 제공된 정보는 무얼 말해주는 걸까?&nbsp;루저와 명문대생이라는 이&nbsp;모순적인 기표의 결합을 통해,&nbsp;"장기하"라는 아이콘은&nbsp;지금 20대 상층부들의 모순된 욕망을&nbsp;체화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즉,&nbsp;"루저의 감수성을&nbsp;소비할&nbsp;수는 있지만, 실제 루저가 되기는 싫다"는&nbsp;욕망 말이다. 사회 전반에&nbsp;강화되는 경쟁의 논리 속에서, 경쟁에서 한 발 물러나거나 경쟁에 목매달지 않겠다는 루저의 감수성을 소비하는 행위는,&nbsp;경쟁의 압박을 잠시 완화시켜주며 심지어 "쿨"하다는 평까지 받을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실제로 루저가 되어 경쟁의 장 자체에 참여도 하지 못해서는 "찌질하다."(혹은 반대로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우리는 실제 루저가 아닌 한에서만, 루저의 감성을 소비할 수 있다.)&nbsp;&nbsp;</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lt;장기하와 얼굴들&gt;이 벌이는&nbsp;코믹 퍼포먼스는, 혹은 "장기하"라는 아이콘에 제공되는 명문대 출신이라는 (음악과는 하등 상관없는) 과잉 정보는,&nbsp;우리가 안전하고 무난하게&nbsp;이 루저의 감수성을 즐길 수 있게 해준다. 아마도 이것이 장기하 이전 또 하나의 루저 아이콘이었던 "달빛요정"과&nbsp;장기하의 차이라면 차이라고 할 수도 있으리라. 달빛요정에게서는&nbsp;루저에 따라붙는&nbsp;어떤 찌질함과 "사시미가 되고 싶다"는&nbsp;비루한 욕망의 적나라한 표출이&nbsp;있었지만,&nbsp;장기하에게는 그 대신 "별일 없이 산다"는 당당한 선언이 있다.&nbsp;물론&nbsp;"장기하"라는 아이콘의 인기를 이러한 요소로 환원해 설명하는 것은 멍청한 일이겠지만, 그&nbsp;신드롬이 보여주는 다층적 의미들 한 켠에서,&nbsp;이러한&nbsp;은밀한 욕망의 반영을&nbsp;읽어내는 것이 무리한 분석은 아닌 것 같다.&nbsp;</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3. </p>
<p align="justify">그런데 흥미롭게도 "장기하"라는 아이콘에 반영된 이러한 모순된 욕망은, 사실상&nbsp;오늘날 포스트모던 소비사회의 상품&nbsp;논리와 동형적인 것이다.&nbsp;아니, 자신을 하나의 "상품"으로 바라보는데 익숙한&nbsp;신세대들이, 자신의 취향의 구성에 있어서까지&nbsp;상품 논리를 완벽히 적용하고 있다는 것이 더 정확할 표현일 것이다. 예컨대, 끊임없이 작은 차이의 게임을 진행해야 하는 포스트모던 소비사회에서, 조악한 키치는 하나의 쿨하고 독특한 상품이 될 수 있지만, 그것이 "실제로" 조악해서는 안된다. 혹은 촌스러운 복고를 재현하는 것은 패션이지만, "실제로" 취향이 촌스러워서는 곤란하다. 같은 논리 하에서, 다시 말하지만, 루저의 감성이나 취향을 가지는 것은 쿨하지만, "실제로" 루저여서는 찌질하다.... </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이와 같이 주체의 (루저) 취향이 상품 논리를&nbsp;따라 구성되는 한, 여타의 상품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취향은&nbsp;누군가에게 전시되어야만 한다. (혹은 이러한 취향은&nbsp;언제나 잠재적 소비자 혹은 감상자를&nbsp;전제로 한 채&nbsp;구성된다.) 오직 이 전시의 몸짓 만이 그 취향을 "실제의" 조악함, 촌스러움, 루저와 구별시켜주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lt;장기하와 얼굴들&gt;의 1집에서 가장 흥미로운 곡은,&nbsp;앨범 전체의 타이틀이기도 한 "별일 없이 산다"이다.&nbsp;물론 앞서도 밝혔듯이, 이 흥미는 음악적인 차원의 것이 아니다.&nbsp;내게 흥미로운 것은, 이들의 "별일 없이 산다"가 독백이나 성찰의 형태가 아닌, 누군가를 향한 선언과 도발의 형태로 쓰여졌다는 사실이다.</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a href="http://musicsearch.naver.com/search.naver?where=music_popup&amp;query=1987123&amp;ac=1&amp;cr_prefix=mus_1st*l&amp;current=1">이 노래의 가사</a>에서 볼 수 있듯이,&nbsp;내가 "별일 없이 그리고 별다른 걱정이나 고민&nbsp;없이" 사는 것은,&nbsp;누군가의 "불쾌"(혹은 질투)를 불러일으키기 위해 전시되거나 선언되어야할 어떤 것이다.&nbsp;사실 이 선언에는 아무런 메세지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 여기에는&nbsp;그저 도발과 전시의 몸짓만 존재하기에, 이 노래의 가사는&nbsp;하나의 역설인데, 왜냐하면 나는 아무런 걱정이나 고민이나 별일 없이&nbsp;하루하루 즐겁지만,&nbsp;아무튼 내가 도발할 누군가의 "시선"에는 신경을 써야 하기 때문이다.&nbsp;사실 루저의 취향을 안전하게 소비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선언과 그로인해 야기되는&nbsp;타자의 "불쾌함"이&nbsp;무엇보다도 필수적인데,&nbsp;앞서 말했듯이&nbsp;바로 이러한 공개적 선언과 타자의 질투만이 "실제" 루저와&nbsp;그저 루저의 취향만을 소비할 뿐인 나를 구분시켜주는 지점이기 때문이다.(나르시스트가 가장 자아가 빈곤한 자이며, 도착증자가 가장 상징적 부권을 갈구하는 주체라는 정신분석의 역설은 이런 식으로도 확인된다.)</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lt;장기하와 얼굴들&gt;의 노래에서 드러나는 이러한 루저 취향의 "선언"은, 아마도 자신의 내면을&nbsp;쇼윈도의 전시물처럼 투명하게 전시하는데 익숙한 오늘날 후기자본주의 주체성들의 감각을 보여주는 하나의 예에 불과할 것이다.&nbsp;이미&nbsp;이 새로운 주체성들은 자신을&nbsp;일종의 "스펙" 리스트로 환원하여 상품(commodity)화하는데 익숙하고,&nbsp;과거의 불투명한 영역이었던 자신의 내면과 취향&nbsp;혹은 심지어 진정성까지도 투명하게 전시하고 광고(commercial)하는데 친숙하다.(혹은&nbsp;이러한 내면과 취향 혹은 진정성은 이러한 전시와 광고를 전제로 구성된다.)&nbsp;시청률과 이미지 재고를 위해 고민과 진정성을&nbsp;투명하게 전시해내는 스타 고민 상담 프로그램처럼, 주체의 내면은 이제 블로그와 싸이월드를 통해 불특정 다수에게 투명하게 전시되고 고백되어야만 한다.&nbsp;그리고.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고백되어야하는 "나"의 이러한 내면에 담긴 어떤 고민과 회환은, 초월과 자기-부정의 원동력이라기보다는 "나"로 하여금 투명한 공간에서 벌어지는 타자와의 작은 차이의 게임을 보장하는&nbsp;요소로 기능할&nbsp;뿐이다.&nbsp;예컨대 전시되(어야만 하)는 나의 루저로서의 자괴감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서는 곤란하다. 그것은 단지 나와 너의 차이를 확인하는&nbsp;작은 지표일 뿐이다.(그러니 "고민없음이 자랑이냐"는&nbsp;질문은 내게 하지&nbsp;말기를...)&nbsp;</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4.</p>
<p align="justify">그런데 사실 내가 정말 궁금한 것은, 이러한 "상품-인간"의 논리를 친숙하게 만드는 사회 구조를, 그리고 그 속에서 구성되는 주체성의 형태들을 과연 "어떤 논리"로 비판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nbsp;볼프강 하우그는 &lt;상품 미학 비판&gt;에서 일찌감치 인간의 주체성까지 일종의 상품 논리를 따라 구성된다는 사실을 간파했지만, 사실 이에 대한 비판 논리는 수 십년이 지난 지금도&nbsp;별다르게 발전한 것이 없다. 아마도 이러한 "인간의 상품화"에 대한 가장 진부한 비판은,&nbsp;인간주의적&nbsp;맑스주의의 틀을 조야하게 차용한 비판들, 즉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를 구분하고, 사용가치의 회복을 주장하는 입장일 것이다.&nbsp;즉,&nbsp;우리는 단순히&nbsp;시장에서의 교환가치로 환원되지 않는 "인간"으로서의 사용가치를 가지고 있다. 예컨대, 상호부조하는 공동체적 존재로서의 인간,&nbsp;소통하는 사회적 인간, 혹은 (최근에 가장 강력하게 부흥하고 있는 방식으로) 경제로 환원되지 않는 고유한 "정치적"인간 같은&nbsp;측면들&nbsp;말이다. </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하지만 오늘날 사용가치는&nbsp;"이미" 교환가치 속에 완전히 포섭되었으며, 교환가치의 알리바이로 생산되는 것에&nbsp;불과하다는 기 드보르의 주장이 "상품-인간"에게도 적용된다면 어떨까?&nbsp;즉, 이제 상품 관계의 외부에 존재하는 어떤 정치적이거나 공동체적인 인간상을 상상하는 것은 순진한 사고라면 어떨까? 지난 해 촛불집회에서 등장한 소비자-시민들(consumer-citizen)에게 쏟아진 진보진영의&nbsp;각종 찬사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새로운 형상에서&nbsp;일말의 불길함을&nbsp;느끼는 것은 이 때문이다. 혹시 이 소비자-시민 쌍의 전면화는, 이제 정치마저 소비자와 상품의 논리를 경유하지 않고서는 사고될 수 없게 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nbsp;갓 들어선 정부에 대한 이들의 분노를 "잘못 구매한 상품"에 대한 소비자의 분노에 유비한 누군가의 분석은, 당연히 일면적이고 편파적이지만,&nbsp;그럼에도&nbsp;일말의 진실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 소비자-정치는 하나의 정치 형태일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이들 주체성에 대한 비판을 수행할 수 있는 외부가 아니라&nbsp;소위 "C세대"의 감각에 걸맞는 그들&nbsp;정체성의 일부인 것은&nbsp;아닐까?</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논의가&nbsp;지나치게 커졌기에, 다시 애초의 출발지점이었던 "C세대"와&nbsp;"장기하"라는 아이콘의 문제로 돌아와 보자.&nbsp;앞서의 논의에서&nbsp;간과했던 것 중 하나는,&nbsp;이 "장기하"라는 아이콘을 둘러싼&nbsp;모순된 욕망, 즉 "루저의 스타일은 소비하고 싶지만, 루저가 되고 싶지는 않은" 욕망 속에서,&nbsp;지우려하지만 지워지지 않는&nbsp;어떤 근원적인 공포를 읽어낼 수 있다는 사실이다.&nbsp;그 공포란&nbsp;혹시라도 내가 언제가 경쟁 구도에서 실제로 탈락할지도 모른다는, 즉 실제 루저가 될지 모른다는&nbsp;공포이다.&nbsp;혹은 역으로 이 공포를 누그러뜨리기 위해,&nbsp;이 새로운 주체성들은&nbsp;루저 감수성을 소비하고 루저의 취향을 전시함으로써 자신이 루저가 아님을 재확인한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사실&nbsp;자신을 "상품"으로 규정하는데 익숙하고 거부감이 없는&nbsp;오늘날의 새로운 주체성들에게, 이 탈락의 공포는&nbsp;예외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근본적인 것인데, 왜냐하면 바우만의 말처럼, "상품-인간"은 결국 언제든지 버려질 수 있는 "쓰레기-인간"의 다른 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nbsp;그렇다면 (아직까지는 개인적인 가설일 뿐이지만) "상품-인간" 주체성에 대한 새로운 비판의 논리는, 어설픈 사용가치의 논리가 아니라 바로 이 "공포"와 직면하고 이것을 분석하는&nbsp;것에서부터 시작해야하는 것이 아닐까?&nbsp;그러니까 너무 안전하고 댄디한 루저 아이콘인 "장기하"가&nbsp;은폐하는 형태로만&nbsp;반영하고 있는&nbsp;그 공포, 누구나 가지고 있지만 사실은 부인하고 싶은 그 공포에서부터 말이다...</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nbsp;</p>
<p align="center"><img id="my_post_img8587078" style="WIDTH: 398px; CURSOR: hand; HEIGHT: 542px" onclick="viewPostImage('/files2/202/chasm/images/200903/160204182.jpg')" height="533" alt="" width="398" onload="setTimeout('fixImage(8587078)',300)" src="/files2/202/chasm/images/200903/160204182.jpg" /></p>
<p align="justify">&nbsp;</p>
<p align="center">&nbsp;뭐. 이러쿵저러쿵해도 사회학과 문화부의 쾌거로세~ 장하다 이눔아.</p>
<p align="justify">&nbsp;</p>
]]>
			</description>
			<author>캐즘</author>
			<category>맑글터</category>
			<category>공포</category>
			<category>루저</category>
			<category>장기하</category>
			<category>C세대</category>
			
			
			<pubDate>Mon, 16 Mar 2009 02:10:09 +0900</pubDate>
		</item>
		<item>
			<guid>http://blog.jinbo.net/chasm/?pid=103</guid>
			<title>풍경 혹은...</title>
			<link>http://blog.jinbo.net/chasm/?pid=103</link>
			<description>
<![CDATA[
<!--FCKeditor--><p align="center">&nbsp;</p>
<p align="center"><img id="my_post_img8772663" style="CURSOR: hand" onclick="viewPostImage('/files2/202/chasm/images/200901/210750469.jpg')" height="607" alt="" width="400" onload="setTimeout('fixImage(8772663)',300)" src="/files2/202/chasm/images/200901/210750469.jpg" /></p>
<p>&nbsp;</p>
<p>&nbsp;</p>
<p align="center">"너는 괴롭겠지만 보지 않을 수 없을걸세"</p>
<p align="center">&nbsp;</p>
<p align="center">&nbsp;</p>
<p align="center">&nbsp;</p>
<p align="center">언제였던가.. 일기장에 꾹꾹&nbsp;옮겨적은 열사의 말이&nbsp;또 한 번&nbsp;아린 밤이다. </p>
<p align="center">&nbsp;</p>
<p align="center">.....잠이 오지 않는다.</p>
<p align="center">&nbsp;</p>
<p align="center">&nbsp;</p>
<p align="center">&nbsp;</p>
]]>
			</description>
			<author>캐즘</author>
			<category>맑글터</category>
			
			
			<pubDate>Wed, 21 Jan 2009 03:12:31 +0900</pubDate>
		</item>
		<item>
			<guid>http://blog.jinbo.net/chasm/?pid=100</guid>
			<title>독서모임 제안</title>
			<link>http://blog.jinbo.net/chasm/?pid=100</link>
			<description>
<![CDATA[
<!--FCKeditor--><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갑작스레 공지글을 하나 남깁니다.</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아는 선배 한 분과 함께, "(유럽)현대정치철학"을 주제로&nbsp;평소 보고 싶었던 책들을 함께 읽는 독서 모임을 가지려고 합니다. 혹시라도 관심있는 분이 있으면 함께 할까해서 글 남깁니다. 모임은 격주로 진행될 예정이고, 격주에 한 권 정도의 속도로, 1년 정도의 시간을 두고 읽어나갈 계획입니다. </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읽을 책 목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strong><font size="2">**현대정치철학**&nbsp;</font></strong></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strong>Claude Lefort <br /></strong>1) ________, "시민사회와 민주주의", &lt;마르크스주의의 위기와 포스트 마르크스주의 II&gt;, 의암, 1992<br />&nbsp;&nbsp;&nbsp;&nbsp; ________, <em>The Political Forms of Modern Society</em>, Polity, 1986 3부<br />2)&nbsp; ________, <em>Democracy and Political Theory</em>, Polity Press, 1988 1부, 2부<br />3) ________, <em>Complications: Communism and the Dilemmas of Democracy</em>, Columbia Univ Press, 2007</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참고 <br />* _________, "민주주의와 자유주의", 김재한 외, &lt;한국정치외교의 이념과 논제&gt;, 소화, 1995<br />* Oliver Marchart, <em>Post-Foundational Political Thought: Political Difference in Nancy, Lefort, Badiou and Laclau</em>, Edinburg Univ. Press, 2007<br />* Bernard Flynn, <em>The Philosophy of Claude Lefort: Interpreting the Political</em>, North Western Univ Press, 2006</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strong>Carl Schmitt<br /></strong>4) ______, 김효전 역, &lt;정치적인 것의 개념&gt;, 법문사, 1992<br />5) ______, 김효전 역, &lt;파르티잔: 그 존재와 의미&gt;, 문학과 지성사, 1998<br />6) ______, 김효전 역, &lt;정치신학 外&gt;, 법문사, 1988<br />7) Chantal Mouffe(ed.), <em>The Challenge of Carl Schmitt</em>, Verso, 1999</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참고<br />* Carl Schmitt, 김효전 역, &lt;현대 의회주의의 정신사적 지위&gt;, 관악사, 2007<br />* Louiza Odysseos, The International Political Thought of Carl Schmitt: Terror, Liberal War and the Crisis of Global Order, Routledge, 2008</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br /><strong>Ernesto Laclau and/or Chantal Mouffe<br /></strong>8) Laclau&amp;Mouffe, 김성기 외 역, &lt;사회변혁과 헤게모니&gt;, 터, 1990<br />9) Ernesto Laclau, <em>Emancipation(s),</em> Verso, 2005<br />10) Chantal Mouffe, 이보경 역, &lt;정치적인 것의 귀환&gt;, 후마니타스, 2007</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참고 <br />* Chantal Mouffe, 이행 역, &lt;민주주의의 역설&gt;, 인간사랑, 2006<br />* Ernesto Laclau et al., 이경숙, 전효관 (역), &lt;포스트 맑스주의?&gt;, 민맥, 1992, 2부<br />* Anna Smith, <em>Laclau and Mouffe: the Radical Democratic Imaginary</em>, Routledge, 1998</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br /><strong>Intermezzo<br /></strong>11) Jacques-Alain Miller, "Suture: Elements of the Logic of the Signifier",<em> Screen</em> 18, 1978<br />&nbsp;&nbsp;&nbsp;&nbsp;&nbsp;&nbsp; __________________, "Matrix", <em>Lacanian Ink</em> 12, 1997<br />12) Lacoue-Labarthe&amp;Nancy, <em>The title of the letter : a reading of Lacan</em>, SUNY Press, 1992 </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참고<br />* Yannis Stravrakakis, 이병주 역, &lt;라캉과 정치&gt;, 은행나무, 2006</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br /><strong>Slavoj Žižek<br /></strong>13) _________, 이성민 역, &lt;까다로운 주체&gt;, 도서출판 b, 2005<br />14) Žižek&amp;Laclau&amp;Butler, Contingency, Hegemony, Universality, Verso, 2000 </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참고<br />* Slavoj Žižek, 이서원 역, &lt;혁명이 다가온다&gt;, 도서출판 길, 2006<br />* Ian Parker, 이성민 역, &lt;지젝&gt;, 도서출판b, 2008, 4장, 5장</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br /><strong>Jacques Ranci&egrave;re</strong><br />15) _______, <em>On the Shores of Politics</em>, Verso, 2007 <br />16) _______, <em>Disagreement: Politics And Philosophy</em>, Minnesota Univ Press, 1998<br />17) _______, <em>Hatred of Democracy</em>, Verso, 2007 </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참고<br />* Nick Hewlett, <em>Badiou, Balibar, Ranci&egrave;re : rethinking emancipation</em>, Continuum, 2007<br />* Todd May, <em>The Political Thought of Jacques Ranciere</em>, Edinburg Univ Press, 2008</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strong>Alain Badiou<br /></strong>18) _______, <em>Metapoitics</em>, Verso, 2006<br />19) _______, <em>Theoretical Writings</em>, Continuum, 2003 2부 <br />20) _______, <em>Polemics</em>, Verso, 2007 부분<br />&nbsp;&nbsp;&nbsp;&nbsp;&nbsp;&nbsp; _______, "The Question of Democracy", <em>Lacanian Ink</em> 28, 2006<br />&nbsp;&nbsp;&nbsp;&nbsp;&nbsp;&nbsp; _______, "Democratic Materialism and the Materialistic Dialectic", <em>Radical Philosophy</em> 130, 2005</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참고<br />* _______, 이종영 역, &lt;윤리학&gt;, 동문선, 2001 <br />* _______, 현성환 역, &lt;사도 바울&gt;, 새물결, 2008 <br />* _______, 이종영 역, &lt;조건들&gt;, 새물결, 2006 4장<br />* _______, &ldquo;Ours is not a terrible situation - Alain Badiou and Simon Critchley", 대담 영문 녹취, 2006</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br /><strong>Giorgio Agamben<br /></strong>21) _______, <em>Means Without Ends</em>, Minnesota Univ Press, 2000<br />22) _______, <em>State of Exception</em>, Chicago Univ Press, 2005<br />23) _______, <em>The Comming Community</em>, Minnesota Univ Press, 1993</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참고<br />* Matthew Calarco(ed.), <em>Giorgio Agamben, Sovereignty and Life</em>, Stanford Univ Press, 2007<br />* Norris, Andrew, <em>Politics, metaphysics, and death :essays on Giorgio Agamben's Homo sacer</em>, Duke Univ. Press, 2005 </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br /><strong>Lacoue-Labarthe and/or Nancy <br /></strong>24) Philippe Lacoue-Labarthe, <em>Heidegger, art, and politics: the fiction of the political</em>, Blackwell, 1990 <br />25) Lacoue-Labarthe&amp;Nancy, <em>Retreating the political</em>, Routledge, 1997 </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참고<br />* Nancy, Jean-Luc, <em>Being singular plural</em>, Stanford University Press, 2000 <br />* _________________, <em>The Inoperative community</em>, Minnesota Univ. Press, 1991<br />* _________________, 박준상 역, &lt;밝힐 수 없는 공동체&gt;, 문학과지성사, 2005 </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숫자가 붙은 책들이 차례대로 같이 볼 책들이고, *가 된 책들은 세미나를 진행하면서&nbsp;부분적으로 참고하거나 혹은 개인적으로 소화할 책들입니다.&nbsp;모임 중간중간에&nbsp;텍스트 이해에 도움이 될만한 알튀세르, 발리바르나 데리다의 짧은 글 몇 개를&nbsp;추가할 계획도 가지고 있구요. </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책들이 밀도가 높긴 하지만, 다행히 대부분 그리 두꺼운 책들이 아니어서 속도를 조절하면서 읽어나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독서모임인 만큼 자세한 발제는 지양하고,&nbsp;짧은(!) 주관적 요약과 토론 위주로 진행할 생각입니다.:-)&nbsp;&nbsp;</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이번 모임은 말그대로 유럽 현대정치철학의 전체적인 지형도를, 유명 저자들의&nbsp;1차 저작들 중심으로 파악하는 수준의&nbsp;독서 모임이니, 열심히 책을 보시려는 열정만&nbsp;있다면&nbsp;큰 부담은 가지지 않으셔도 될 듯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차후에 하이데거나 바따이유, 라캉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세미나나 80년대 이후 한국 사회운동 논쟁들을 새로운 시각틀로 재조명해보는 세미나를 연계해갔으면 하는 바람이 있지만, 아직은 생각일 뿐이구요.&nbsp;</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모임 시간은 격주 토요일 오후 3시, 장소는 아마도 서울대(혹은 그 주변)가 될 것 같습니다.(장소는 함께 하시는 분들이&nbsp;있을 경우&nbsp;조정가능합니다만, 요일은 참가자들의 사정상 조정이 불가능합니다. 다만 시간은 한 두 시간 정도 조정가능할 것 같습니다.)</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오는 11월 1일(토) 첫 모임을 가지고, 11월 15일(토)부터 세미나를 시작할 생각입니다. </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혹시 관심이 있으신 분은 <a href="mailto:chasm99@gmail.com">chasm99@gmail.com</a>으로 연락주세요. </p>
<p align="justify">성격상 따뜻한 환대에는 능하지&nbsp;못하지만, 절대 박대하거나 하는&nbsp;일은 없을 겁니다.:-) </p>
<p align="justify">&nbsp;</p>
]]>
			</description>
			<author>캐즘</author>
			<category>맑글터</category>
			<category>독서모임</category>
			
			
			<pubDate>Thu, 16 Oct 2008 01:06:58 +0900</pubDate>
		</item>
		<item>
			<guid>http://blog.jinbo.net/chasm/?pid=98</guid>
			<title>Zizek for Obama?</title>
			<link>http://blog.jinbo.net/chasm/?pid=98</link>
			<description>
<![CDATA[
<!--FCKeditor--><p align="justify">충분히 예상가능한 일이긴 하지만, 가끔 들르는 미국쪽 인사들 블로그에는 요즘 대선 논쟁이 한창이다. 공화당-민주당 후보의 지지율이 박빙인데다가, 최근 미국 경제의 붕괴조짐까지 보이기 시작하면서, 미국내 좌파 지식인들 사이에 대선에 대한 관심이 4년전보다 훨씬 높아진 것 같다.(물론 여기에는 오바마라는 대항마가 가진 개인적인 매력과 배경이 한&nbsp;요인을 차지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4년 전에는 부시-케리 모두에 반대하던 이들이&nbsp;이번 대선에서는 오바마에 대한&nbsp;(비판적) 지지의 목소리를 내는&nbsp;모습이 부쩍 눈에 자주 띤다.(한참 앞서 나간 걱정이지만, 이런 모습을 보고 있자니 한국에서도 다음 대선 때&nbsp;'비판적 지지'의 악령이 슬그머니 되살아나지 않을까란 걱정마저 든다.) &nbsp;</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아무튼 최근&nbsp;이쪽 블로그들에서&nbsp;단연 화제가 되고 있는 것은 지젝의 오바마 지지 비스무레한 선언이다. 9월 초 그러니까 페일린 효과가 본격화되기 전 지젝이&nbsp;<a href="http://www.inthesetimes.com/article/3862/">"In These Times"에 기고한 글</a>이 화제가 되고 있는 것인데, 지젝은 이 글&nbsp;이후에 침묵을 지키고 있지만, 사람들 사이에 설왕설래는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그 자체로도 재밌는 글이어서 약속이 펑크난 할일없는 주말 오후에&nbsp;가벼운 마음으로&nbsp;옮겨놓는다.</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nbsp;</p>
<p align="center"><font style="BACKGROUND-COLOR: #ffffff" color="#ff0000" size="3"><strong>담대한 레토릭(The Audacity of Rhetoric)</strong></font></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nbsp;</p>
<p align="right">translated by 캐즘</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지난 1월, 미국 전체가 마틴 루터킹 목사의 비극적 죽음을 추도하고 있을 때, 도시사학자 헨리 루이스 테일러는 다음과 같이 냉소한 바 있다. &ldquo;우리가 기억하는 것은 그가 꿈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 뿐이다. 우리는 그 꿈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기억하지 않는다.&rdquo;</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여기서 테일러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1963년 워싱턴에서의 행진 이후(이 행진에서 킹의 그 유명한 연설, "나는 꿈이 있습니다"가 행해진다-역주)의 마틴 루터 킹에 대한 망각, 즉 그가&nbsp; &ldquo;우리나라의 도덕적 지도자&rdquo;라고 추앙받은 이후의 그의 행적에 대한 기억의 말소를 의미하는 것이리라. </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암살당하기 몇 년 전부터, 킹은 빈곤과 군사주의의 문제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인종적 화합뿐 아니라,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평등의 실현에 있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로 말미암아&nbsp;당연히 그는 점점 더 공식적 담론에서 배제되어 갔다.&nbsp; </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바락 오바마의 위험은, 그가 킹의 죽음 이후 킹에게 행해졌던 역사적 검열 작업을 이미 스스로 행하고 있다는 데 있다. 즉, 그는 표심을 얻기 위해 논쟁이 될 만한 주장들을 스스로 삭제하고 있다.&nbsp; </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예수 탄생기 팔레스타인을 배경으로 하는 몬티 파일론의 코믹 영화 &lt;브라이언의 삶(The Life of Brian)&gt;에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대화가 나온다. 로마에 대항하는 유대인 혁명적 저항 집단의 리더는 로마인들이 그들에게 안겨준건 오직 비참함 뿐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의 부하 하나가 로마인들이 교육을 도입하고, 도로를 건설하고, 관개 시설도 확충해주지 않았냐고 반박하자, 이 리더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ldquo;맞아. 하지만 위생과 교육, 포도주와 공공질서, 관개 시설과 도로 그리고 상수도 시설과 보건 제도 외에 로마인들이 우리에게 해준 게 뭐가 있어?&rdquo;</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오바마의 최근 주장들은 이와 동일한 것 아닌가? &ldquo;나는 부시 행정부와의 근본적인 단절을 상징한다&rdquo;, 즉 &ldquo;좋아, 나는 이스라엘에 대한 무조건적 지원을 약속하고, 쿠바에 대한 보이콧을 지속할 것이며, 법을 위반한 통신업체를 눈감아줄거야, 하지만 나는 여전히 부시 행정부와의 근본적인 단절을 상징해!&rdquo;</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오바마가 &ldquo;담대한 희망&rdquo;과 &ldquo;변화에 대한 믿음&rdquo;을 이야기할 때, 그는 구체적인 내용없이 변화의 레토릭만을 사용하고 있을 뿐이다. 도대체 무엇을 위한 희망이란 말인가? 그리고 무엇을 위한 변화인가?</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하지만 우리는 그가 위선적이라고 비난해서는 안된다. 오늘날 미국의 복잡한 상황 속에서, 새로운 대통령이 경제적 붕괴나 정치적 반발 없이 실제적인 변화를 어디까지 끌고 갈 수 있겠는가?</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그럼에도 이러한 비관적인 관점 또한 약점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현재의 지구화된 상황을 그저 단단한 현실로 이해해서는 안되며, 이데올로기 틀에 의해 정의던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다시 말해, 오늘날의 상황은, 말해질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볼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의 분할에 기반해 있다. </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십 여년 전에, 이스라엘 신문 "Ha'aretz"가 당시 이스라엘 노동당수 에우드 바락에게 &ldquo;당신이 팔레스타인에 태어났으면 무엇을 했겠냐?&rdquo;고 물은 바 있다. 이에 바락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ldquo;나는 테러리스트 조직에 가입했을 겁니다.&rdquo;</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이 말은 테러리즘에 대한 옹호가 아니다. 다만 이는 팔레스타인과의 진정한 대화를 위한 공간을 여는 행위이다. </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미하일 고르바초프가 글라스노스트(개방)와 페레스트로이카(개혁)를 선언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중요한 것은 고르바초프가 실제로 이러한 변화를 의도했는가 그렇지 않은가가 아니다. 바로 말 자체가 널리퍼져 세상을 바꾸는 사태를 가져왔다. </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또 다른 예. 오늘날 고문에 반대하는 이들은, 그것을 대중적 논쟁의 대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오히려 이를 정당화하고 있다. 이것은 누렘베르그 전범재판이나 제네바 협정에 비하면, 엄청난 퇴보이다. </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말은 그저 말뿐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의 골자를 결정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바로 이러한 점에서, 오바마는 이미 우리가 공공적으로 발언할 수 있는 말의 경계를 변화시키는 탁월한 능력을 보여줬다. 지금까지 그가 이룬 위대한 성취는, 지금까지 말해질 수 없었던 것들을 공공의 논의 주제로 끌어들였다는 데 있다. 즉, 정치에서 인종이 가지는 여전한 중요성과 공적 삶에서의 무신론의 긍정적 역할 그리고 이란과 같은 &ldquo;적&rdquo;과 대화할 필요성같은 주제들 말이다. </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이것은 전체 장의 좌표를 바꾸는 위대한 성취이다. 처음에는 오바마의 이러한 제안을 비판했던 부시 행정부조차, 이제 이란과의 대화를 시도하고 있다.&nbsp; </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미국의 정치가 현재의 정체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우리가 사고와 행동 방식을 바꾸는 새로운 말들이 필요하다. </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관습적 지혜가 보통 그렇다는 점을 염두에 두더라도, 오래된 속담인 &ldquo;말만하지 말고, 행동을 해!&rdquo;는 가장 멍청한 충고임에 틀림없다. </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최근 우리는 꽤 많은 것들을 한다. 외국의 문제에 개입하고, 환경을 파괴하고 있지 않은가?</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지금은 잠시 물러서서, 똑바로 생각하고 말할 때이다. &lt;끝&gt;</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nbsp;</p>
<p align="center"><img id="my_post_img251585" style="CURSOR: hand" onclick="viewPostImage('/files2/202/chasm/images/200809/210149433.gif')" height="167" alt="" width="250" onload="setTimeout('fixImage(251585)',300)" src="/files2/202/chasm/images/200809/210149433.gif" /></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이 글을 둘러싼 논점은 크게 두 가지이다.&nbsp;우선 지젝의 이 글을 오바마에 대한 지지(비스무레한 것)으로 읽어도 되겠냐는 것. 이는 사실 좀 미묘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사실&nbsp;지젝 글의 초점이 오바마 지지 선언에 맞춰져 있지 않을 뿐더러, 큰 그림 속에서 특정한&nbsp;인물의 의의를 평가하는 것은,&nbsp;그&nbsp;인물 자체에 대한 평가와는 또 다른&nbsp;차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지젝은 이미 4년 전에 부시의 재집권이 가져올 "효과"에&nbsp;주목하면서 <a href="http://www.inthesetimes.com/site/main/print/the_liberal_waterloo/">그의 집권에 대한 환영 비스무레한 글</a>을 쓴 바 있다. 하지만 손호철 교수가 한나라당 지지자가 아닌 것처럼,&nbsp;지젝 역시&nbsp;부시 지지자는 아니다.)</p>
<p align="justify">&nbsp;&nbsp;</p>
<p align="justify">하지만 그럼에도 지젝이 오바마와 그가 전개한 담론 투쟁에 대해 "전체 장의 좌표를 바꾸는 위대한 성취"라고 평가한 것은, 확실히 심상치 않아 보인다. 비록 형식과 말, 외양의 중요성에 강조는 그의 글 속에서 여러번 반복된 테마이지만, 오바마의 담론이 좌표를 바꾸는 효과를 낳았다는 놀라운 평가는, "담론 분석"을 넘어서 "행위(act)"의 강조로 나아간 그의 지난 행보에 비추어&nbsp;하나의 일탈처럼 보이기&nbsp;때문이다. 물론 지젝의 정치학의 틀내에서 이러한 지젝의 일탈을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다.&nbsp;그동안 지젝은&nbsp;암묵적 혹은 공개적으로&nbsp;자신의 정치적 전략이&nbsp;최소한의 자유민주주의 헤게모니를 전제로 한 것이라는 점을 인정해왔고, 그런 점에서 오바마에 대한&nbsp;긍정적 평가는 최근 들어 이러한 헤게모니의 위기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는 그의 전략적 선택으로 해석될 수도 있을 것이다.&nbsp;</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하지만&nbsp;내가 의심하고 있는 것은,&nbsp;지젝이 종종 보여주는 이러한 "뜬금없는 논평"들이, 어떤 특정한 정치 세력 혹은 입장과도 동일시하지 않는&nbsp;그의 정치적 사유의&nbsp;불안정성을 반영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점이다.&nbsp;전에 &lt;300&gt;에 대한 그의 비평을&nbsp;소개하면서 던졌던 질문이지만,&nbsp;지젝은 과연 현실 정치(혹은 도래할 미래의 정치)&nbsp;속&nbsp;누구에게 말을 걸고&nbsp;있는 것일까? 이는&nbsp;이러한&nbsp;동일시가 반드시 필요하며, 그래야만 정치적 사유의 안정성이 갖춰진다고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정치적 사유의 안정성이란 오히려 보수적인 것이리라.)&nbsp;다만 나로서는&nbsp;이러한 동일시가 정치를&nbsp;스펙타클한 게임의 장으로 보는 것에서 벗어나, 주체와 정세("분석"이 아닌) "구성"의 문제의식을&nbsp;정치를 바라보는 시선에&nbsp;강제적으로 삽입하는&nbsp;일종의 전제 조건이라는&nbsp;데에 동의한다.&nbsp;</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이러한&nbsp;문제를 외면한 채, 현실의 정치적 입장들&nbsp;"사이" 속으로&nbsp;빠져나가는(elusive) 존재로 스스로 위치지을 때,&nbsp;지젝은 그 입장의 급진성과는 별도로,&nbsp;이 시대 스펙타클화된 정치가 생산해낸 수다한 정치 평론가 중 한명이 되어 버리는 자기-함정에 빠지는 것은 아닐까?(물론 그는 여타의 사이비 정치평론가들과는 달리 훌륭한 A급 평론가의 자질을 갖추고 있기는 하다.) 아무튼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 묘한 사상가의 차후 행보가, (그 이론이&nbsp;가진 의의와는 별도로) 현대의 정치적 조건&nbsp;그리고 이론가와 정치의 관계 등과 관련해 우리에게&nbsp;던지는 함의 역시 적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nbsp;그러니 지금은 그저 그의&nbsp;다음 행보를 기다려볼 수 밖에.&nbsp;</p>
<p align="justify">&nbsp;</p>
]]>
			</description>
			<author>캐즘</author>
			<category>맑글터</category>
			<category>지젝</category>
			<category>담대한 레토릭</category>
			<category>오바마?</category>
			
			
			<pubDate>Sun, 21 Sep 2008 16:33:47 +0900</pubDate>
		</item>
		<item>
			<guid>http://blog.jinbo.net/chasm/?pid=97</guid>
			<title>알랭 바디우, 사건의 현장으로서 공장</title>
			<link>http://blog.jinbo.net/chasm/?pid=97</link>
			<description>
<![CDATA[
<!--FCKeditor--><p><a href="http://blog.jinbo.net/simppo"><strong>뽀사마</strong></a>님의 <a href="http://blog.jinbo.net/simppo?pid=31">[알랭 바디우, 사건의 현장으로서 공장]</a> 에 관련된 글. <br /></p>
<p><br /></p>
<p align="justify">예전에 영어로 주워넘겼던 이 글이 새삼 흥미롭게 다가오는 것은, 지금 촛불집회의 성과를 둘러싸고 벌어지고 있는&nbsp;논쟁들 때문이다. 올 가을 계간지를 훑어보니, 아무래도 촛불집회의&nbsp;성과에 관한 논의는,&nbsp;"제도냐, 거리냐"의 논쟁으로 다시 한 번 귀결되는 것 같다.(아마도 최장집씨의 문제제기가 결정적 역할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nbsp;한국 사회운동사에 익숙한 이라면, 이러한 논쟁 구도에서&nbsp;시간을 뛰어넘는 묘한 기시감을 느낄 지도 모르겠다.&nbsp;제도냐 거리냐라는 논쟁 구도는, 멀게는 87년&nbsp;이후에, 가깝게는&nbsp;민주노동당 건설 과정에서 지속적으로 제기되었던 한국&nbsp;정치사의 닳고닳은 주제다. &nbsp;</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2000년대 들어 이 논쟁은 잠시 수면 아래로 가라앉은 것처럼 보였는데,&nbsp;그 이유는 아마도 제도 정치권에 한 발을 담근 자유주의 세력들이, 이 논쟁 구도를 가로질러 거리 정치를 효과적으로 활용해왔기 때문일 것이다. 논쟁의 구도 자체를 무화시키는 포퓰리즘적 실천의 부각 속에서,&nbsp;거리의 정치는 제도 정치의 훌륭한 "대리보충(supplement)"으로 기능해왔다.&nbsp;그랬던 논쟁이 지금 다시&nbsp;문제가 되는 것은,&nbsp;제도적 헤게모니를 확보한 이들과 거리의 정치 간의&nbsp;이 암묵적 공모 관계가, 다시금 갈등 관계로 전환하고 있다는 정세적 요인&nbsp;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 갈등이 과연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을까? 2008년 우리에게 "제도냐, 거리냐"라는 질문이 그토록 시급한 질문일까?&nbsp;혹시 "제도냐, 거리냐"라는 이 논쟁 구도 자체가 좀 더 근본적인 물음들을 가로 막고 있다면, 더 정확히 말해 좀 더 근본적인 물음의 망각 위에 기초하고 있다면&nbsp;어떨까?</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바디우의 글도 글이지만,&nbsp;우리가 무엇보다 참고할 수 있는 자원은,&nbsp;과거&nbsp;동일하게 던져졌던 "제도냐, 거리냐"라는 질문에, "현장으로" 혹은 "아래로"라고 답했던 이들의 실천일 것이다. 이들의 실천에 대한 다수한 그리고 복잡한 평가를 떠나서,&nbsp;개인적으로 제도/거리의 구도 속에서&nbsp;"현장"을 택한 이들의 정치적 감각만은 여전히 현재적 의의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nbsp;오늘날에도 제도냐, 거리냐보다 더 먼저 제기되어야 할&nbsp;문제는, 오늘날 "현장(site)", 즉 상황(situation)이 발생하는 장소는 어디인가, 그 곳의 조건은 어떠한가, 그리고&nbsp;그것을 어떻게 만들어나갈&nbsp;것인가에 있지 않을까? (여담이지만,&nbsp;그런 점에서 얼마전&nbsp;"문화연구 시월"에서&nbsp;펴낸 &lt;사라진 정치의 장소들&gt;(천권의 책, 2008)에 실린 일련의 논문은, 이러한 질문들에 예외적으로 성실히&nbsp;도전한, 그래서&nbsp;좀 더 주목받을 가치가 있는&nbsp;시도들이다.)&nbsp;&nbsp;</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아마도 오늘날 현장을&nbsp;간단히 공장으로 치환하기는 어려울지&nbsp;모른다.(하지만&nbsp;그 역, 즉 "공장은 현장이다"는 언제나 진실이다. 특히 오늘날 포르노그라피보다 더 외설적인 장면이 되어버린 육체 노동의 현장은, 언제나 공식적 상징 체계 속에 적절한 자리(proper place)를 차지하지 못한 채 "정치"의 장소로 이름붙여지지 않지만, 궁극적으로 가능한 정치의 범위를&nbsp;조건짓는 잠재성의 장소이다. 그렇기에 바디우의 말처럼&nbsp;"정치에서 노동자들은 불가피하다.")&nbsp;그리고 "현장"이라는 정의 자체가 언제나 기존의 개념틀로는 포착하기 난해한(elusive), 게다가 주체적 실천을 통해 등장하는 정치의 장소이기&nbsp;때문에, 아마도 이는 실정적으로 대답하기&nbsp;어려운 질문일지도 모른다.&nbsp;하지만 그렇기 때문에&nbsp;더더욱 현장의 조건과 가능성에 대한&nbsp;질문은&nbsp;언제나 선행되어야 하고, 반복적으로 대답되어야 하는 질문이 아닐까? </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그래서 잠시&nbsp;촛불집회 평가로 돌아오자면, 이 떠들썩한 사회과학자들의 뒷풀이를 보면서, 내가 궁금한 건&nbsp;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촛불집회의 "새로움"이 반복적으로 강조되고, "촛불혁명"이라는 급진적인 레토릭이 사용되면서도, 왜 정작 그 내용은&nbsp;"제도냐, 거리냐"라는&nbsp;지나가버린 논의틀에 갇혀 있는 걸까? 언제부터&nbsp;다른&nbsp;정치, 다른 민주주의의 장소가&nbsp;"광장"과 "거리"로 그토록 간단하게&nbsp;등치되어 버린걸까?&nbsp;현실의 패배와는 달리&nbsp;소란스럽기만한 이&nbsp;뒷풀이 속에서, 왜 정작 중요한 질문들은 누구도 던지려 하지 않는걸까?&nbsp; </p>
<p align="justify">&nbsp;</p>
]]>
			</description>
			<author>캐즘</author>
			<category>맑글터</category>
			<category>바디우</category>
			<category>현장</category>
			
			
			<pubDate>Mon, 01 Sep 2008 14:50:34 +0900</pubDate>
		</item>
		<item>
			<guid>http://blog.jinbo.net/chasm/?pid=95</guid>
			<title>괴물, 서사 그리고 관용과 안전 </title>
			<link>http://blog.jinbo.net/chasm/?pid=95</link>
			<description>
<![CDATA[
<!--FCKeditor--><p align="justify">&nbsp;<img id="my_post_img2084853" style="CURSOR: hand" onclick="viewPostImage('/files2/202/chasm/images/200808/240159215.jpg')" height="272" alt="" width="200" onload="setTimeout('fixImage(2084853)',300)" src="/files2/202/chasm/images/200808/240159215.jpg" />&nbsp;&nbsp;&nbsp; <img id="my_post_img5252877" style="WIDTH: 200px; CURSOR: hand; HEIGHT: 272px" onclick="viewPostImage('/files2/202/chasm/images/200808/240159431.jpg')" height="299" alt="" width="200" onload="setTimeout('fixImage(5252877)',300)" src="/files2/202/chasm/images/200808/240159431.jpg" /></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요즘 관심을 가지고&nbsp;보고 있는 책들은 주로&nbsp;"괴물(성)(monstrosity)"에 관한 것들이다.(푸코나 문화연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이 블로그의 글을 주의깊게 봐왔던 사람이라면, 이 주제가 그리 뜬금없지는 않을 것이다.)&nbsp;개인적으로&nbsp;처음 이 주제에 대한 관심을 가졌던 이유는, 우리 시대의 새로운 괴물이자 동시에 이웃(neighbor)의 형상인 "사이코패스"를 둘러싼&nbsp;담론들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다.&nbsp;(대중적으로 순환되는 담론들 속에서,&nbsp;사이코패스는 외형상 식별해내기 어렵지만 타고난&nbsp;두뇌 결함&nbsp;혹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nbsp;우리의 안전을 위협하는 "과잉된" 나르시스트들이다. 그리고 이것만큼&nbsp;사이코패스가 우리 시대 괴물-이웃의 대표적 형상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가 또 있을까?)</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아무튼 사이코패스로 촉발된 관심이, 지금은 후기 빅토리아 시대(드라큘라 백작과 미스터 하이드 그리고 범죄 인간(homo criminalis)을 탄생시킨&nbsp;바로 그시기)의 문학과 범죄학까지 천천히 거슬러 올라가고 있다. 아쉬운 점이 하나 있다면, 괴물이란 주제에 대한 영어 자료들은 꽤나 방대하고 그 분야도 세분화되어 있는데 반해(예컨대, 레즈비언 뱀파이어 형상에 대한 연구서들이 따로 존재할 정도다),&nbsp;한국어로 된 자료는 극히 드물다는 것이다.&nbsp;그렇다고&nbsp;참고할만한 책이 전혀 없는 건 아닌데,&nbsp;몇 년 전에 번역되어 나온 리처드 커니(Richard Kearney)의 &lt;이방인, 신, 괴물&gt;(이지영 역, 개마고원, 2004)과 이번에&nbsp;출판된 백문임씨의 &lt;월하의 여곡성&gt;(책세상, 2008) 정도가 그럭저럭 추천할 만한 책일 것이다.(이 두 책은&nbsp;내가 올해 여름 휴가를 함께 보낸 책들이기도 하다.:-)&nbsp;</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타자성 개념에 대한 도전적 도찰"이라는 부제를 가지고 있는 리처드 커니의 &lt;이방인, 신, 괴물&gt;은,&nbsp;이런 제목을 달고 있는 책들이 보통&nbsp;그렇듯이:-)&nbsp;실제로는 그다지 도전적인 책이 아니다.&nbsp;사실 이 책에서 커니의 입장은&nbsp;오히려 전통적이라고도 볼 수 있는데,&nbsp;책에서 그는&nbsp;신과 괴물의 도착적 결합으로 나타나는 이방인에 대한 해체론적 형상들을 일관되게 비판하면서,&nbsp;"좋은" 타자와 "나쁜" 타자를 판별할 수 있는&nbsp;서사의&nbsp;필요성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nbsp;커니에 따르면 타자를&nbsp;식별해내는 서사를 포기한다면 타자는 신 아니면 괴물 혹은 양자 모두라는 극단적 형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고,&nbsp;이는 오늘날 우리에게&nbsp;극단적인 정치적 선택을 하게&nbsp;만드는 궁극적인 원인이다.&nbsp;따라서 커니는 데리다나 지젝처럼 신과 괴물의 궁극적 동형성(同形性)을 주장하는 이들을 비판하면서(실제로 이들이 이러한 입장을 가지고 있는가는 또 다른 논란꺼리이다.),&nbsp;우리에게는&nbsp;신과 괴물 사이의 어딘가에 위치할 수많은 타자들의 형상을 구분해낼 수 있는 서사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nbsp;</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얼핏보면 타당한 문제제기라고 생각되지만, 커니의 의견에 쉽게 동의할 수 없는 것은,&nbsp;그의 포지셔닝과 접근 방식이&nbsp;지금까지 타자성을 둘러싸고 이루어진 수많은 논의들의 성과를&nbsp;자의적으로 간과해버린 결과이기 때문이다.&nbsp;대표적인 예로 커니는 타자와 자아의 불분명한 경계를 특징으로 하는 멜랑콜리(melancholy)와 서사에 기반한 애도(mourning)를 대비시키면서,&nbsp;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멜랑콜리가 아닌 애도라고 주장한다.&nbsp;이러한 주장이 가진&nbsp;문제는,&nbsp;타자성에 대한 윤리를 고민해 온&nbsp;이들이 극복하고자 노력해온 대상이, 바로 이러한 "애도냐, 멜랑콜리냐"라는&nbsp;단순한&nbsp;이항&nbsp;대립&nbsp;자체라는 데 있다.&nbsp;커니는 당연한 듯이 우리에게 멜랑콜리와 애도 중 하나를 선택할 것을 강요하지만, 이러한 단순 구도 속에서는 벤야민의 알레고리적 멜랑콜리(allegorical melancholy)나&nbsp;푸코의 반-기억(counter-memory)과 같은,&nbsp;애도와 멜랑콜리의 아슬아슬한 사이길을 탐색하려는 개념적 도구와 시도들의 자리는 사라지고 만다.(좀 더 나아가자면, 커니의 이러한&nbsp;시도는,&nbsp;다양한 시도들을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단순 이항 대립으로 환원시키고&nbsp;포스트모더니즘을 비판함으로써 자신의 "진정성"을 손쉽게 확보했던 과거 영미 "좌파" 학자들의 농간을 떠올리게 한다.) &nbsp;</p>
<p align="justify">&nbsp;&nbsp;&nbsp;</p>
<p align="justify">하지만 커니의&nbsp;주장에 선뜻 동의하기 어려운&nbsp;더&nbsp;큰 이유는,&nbsp;타자의 선악을&nbsp;판별할 수 있는 서사에 대한 그의 호소가,&nbsp;원인을 잘못짚은, 그리고 그나마&nbsp;때늦은 처방이&nbsp;아닐까라는 의구심 때문이다.&nbsp;커니는 해체주의적 입장에 반대하면서 우리에게 타자에 대한&nbsp;서사와 해석을&nbsp;부활시킬 것을 주장하고 있지만,&nbsp;타자에 대한 서사의 붕괴가 어디 데리다같은 해체주의자들의&nbsp;무분별함 때문이던가? 그 원인이&nbsp;내외부를 교란시키고 모든 경계를 넘나드는 전세계적 자본주의의 확산이라는&nbsp;조건 때문이던지, 벤야민이 일찍이 간파했듯이 이야기가 가진&nbsp;효력의 상실 때문이던지&nbsp;아니면 간편하게&nbsp;큰 이야기의 붕괴라는 포스트모던적 전환의 결과이던지 간에, 오늘날 타자에 대한 서사의 붕괴와 그에 따른 윤리의 위기는 우리가 발딛고 선 하나의 조건인 것이&nbsp;아닐까? </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이러한 주제는 그 자체로 너무 많은 논의를 필요로 하니, 문제를 조금 틀어보자. 흥미롭게도 위에서 언급한&nbsp;또 하나의 책 백문임의 &lt;월하의 여곡성&gt;은,&nbsp;(애도적)서사의 붕괴라는&nbsp;현대적 조건을 한국 공포영화들의 내러티브 분석을 통해 짚어내고 있다.&nbsp;저자의 박사논문이기도 한&nbsp;이 책은, 실은&nbsp;&lt;월하의 공동묘지&gt;로 대표되는&nbsp;60년대 후반의 한국 공포 영화 분석에 가장 큰 공을 들이고 있지만(이러한 분석 역시 상당히 재미있으니 관심있으신 분들은 한 번 읽어보시길),&nbsp;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nbsp;60년대 공포영화와 90년대 후반&nbsp;&lt;여고괴담&gt;과 &lt;링: 바이러스&gt;를 계기로&nbsp;부활한 공포영화 간의 차이에 대한 백문임의 간단한 언급이었다. &nbsp;</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백문임에 따르면, 고전 한국 공포 영화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lt;월하의 공동묘지&gt;는 완벽한 "애도의 서사"를 가지고 있다.&nbsp;영화 속에서&nbsp;억울한 모함으로 자살한 월향은, 귀신으로 돌아와 자신을 괴롭혔던 악인들을 모두 살해하고,&nbsp;자신의 한을 풀게 된다.&nbsp;영화의 마지막 장면은&nbsp;월향의 묘에 비석을 세워주는 오빠 춘식과&nbsp;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며&nbsp;월향에게 용서를&nbsp;비는 남편 한수의 모습을 보여주는데,&nbsp;이러한 애도 행위의 결과&nbsp;월향은 비로소&nbsp;귀신의 형상을 벗고 승천하게 된다. 1967년에 만들어진 이 영화 속에서&nbsp;월향의 괴물화(여귀화)는 정당한 이유를 가진 것이며, 복수가 완결되어 이러한 이유가 사라졌을 때 그녀의 괴물성 역시 함께&nbsp;사라진다. 그녀는 이제 타자가 아니라&nbsp;(비석에 새겨진 이름으로&nbsp;상징되는) 거대 서사 속에 적절한 자리(proper place)를 배치받은 동일자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하지만 30년 후 1999년에 제작된 &lt;링: 바이러스&gt;는 어떤가?&nbsp;(사실 난 영화가 아니라&nbsp;스즈키 코지의 소설로 &lt;링&gt;을 접했는데, 백문임의 설명을 보면&nbsp;한국 영화 &lt;링: 바이러스&gt;은 스즈키 코지의 소설 내용을 충실히 반영한 것 같다.) &lt;링: 바이러스&gt;에서 저주받은 테이프를 보게 된 선주는, 테이프에 원한을 염사한 박은서(사다코)의 죽음에&nbsp;얽힌 비밀을 풀고, 그녀의 시신을 재매장함으로써 그녀의 한을 풀어주려한다. 여기까지 &lt;링: 바이러스&gt;는 괴물에게 적절한 자리를 재배정해주는 애도의 서사라는 기존의 공포영화의 관습을&nbsp;충실히 따르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영화나 소설을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사다코의 저주는 이러한 애도의 몸짓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사다코의 저주는&nbsp;자신의 한의 해소 따위와는&nbsp;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그저 저주의 전염과 자기 복제와 관련된 것이다.&nbsp;즉,&nbsp;사다코의 한을 풀어주는 사람이 아니라 비디오테이프를 복제하여 다른 사람에게 저주를 전염시키는 사람만이&nbsp;저주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p>
<p align="justify"><br />백문임은 이 두 영화의 비교 속에서 자가 증식과 테크놀로지라는&nbsp;공포영화의 새로운 경향을 읽어내려 하지만, 내가 보기에 더 중요한 것은 &lt;링: 바이러스&gt;에서&nbsp;분명히 드러나는 애도의 서사에 대한 냉소적 반응 혹은 회의적 태도이다. &lt;월하의 공동묘지&gt;에서 애도의 서사가,&nbsp;뚜렷한 내부와&nbsp;외부,&nbsp;선과 악의 대립구도 속에서 이들의 질서를 재확립하는 거대 서사에 대한 믿음 위에서 작동한다면, &lt;링: 바이러스&gt;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이러한&nbsp;애도의 궁극적인 실패이다. 사다코는 선주의&nbsp;애도 행위에도 불구하고 월향과는 달리&nbsp;서사 속에서&nbsp;적절한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며,&nbsp;바이러스처럼 자기 증식하며 기존의 질서를 교란시킨다. 아마도 이러한 애도의 실패와&nbsp;괴물의 자기 증식이&nbsp;주는 절대적인 공포가,&nbsp;&lt;링&gt;을&nbsp;주제로 한&nbsp;공포영화 관련 연구서가 몇 권이나 될 정도로, 이 영화가 공포영화의&nbsp;새로운 분기점이자 전세계적 문화현상이 된 이유일 것이다.&nbsp;&nbsp;&nbsp;&nbsp;</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여담이지만,&nbsp;올해 초 내가 본&nbsp;공포 영화들 -&lt;클로버필드&gt;나 <rec></rec><rec></rec><rec></rec><rec></rec>같은 영화들- 속에서, 이러한 애도의 서사에 대한&nbsp;불신은 거의&nbsp;극단으로 나아간 것 같다. 이 영화들의&nbsp;괴물들에게는&nbsp;애초에 애도의 가능성이 존재하지 않는데,&nbsp;영화 자체가 이들 괴물의 기원과 출몰 원인에 대한&nbsp;어떠한 설명도 제공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과거 킹콩이나&nbsp;고질라 같은 괴물의 경우&nbsp;그 발생원인과 출몰원인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뒤따랐으며, 이것은 이 괴물의 형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nbsp;판별해&nbsp;내는 기반이 되었다.&nbsp;하지만 &lt;클로버필드&gt;의 괴물이나 <rec></rec><rec></rec><rec></rec><rec></rec>의 좀비들은 대체 어디에서 온 것이며 우리를 공격하는 것일까? 이유를 알 수 없기에 여기에는 어떤 해결책도 없으며, 괴물 형상에 대한 판별적 서사도 없다.&nbsp;그들은 갑자기 외부에서 들이닥친&nbsp;위험한 타자일 뿐이다.)</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그러면 앞서 문제로 돌아가서,&nbsp;타자에게 적절한 자리를 재배정해줄 수 있는 서사의 붕괴(혹은 적어도 이러한 서사에 대한 불신의 만연)가, 커니의 주장처럼&nbsp;판별적 해석학의 부활을 통해&nbsp;해결할 수 있는&nbsp;어떤&nbsp;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발딛고선 하나의 시대적 조건이라면 어떨까? 오히려 나의 관심은,&nbsp;서사의 붕괴라는 이러한 조건을 수용한 상태에서&nbsp;타자-괴물과&nbsp;우리의 관계맺음 방식과 관련된&nbsp;것이다.&nbsp;타자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존재로 나타날 때 그리고 이들의 적절한 자리를 판별한 어떤 공통적인 서사도 존재하지 않을 때, 우리가 취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해결책은, 아마도 이들을&nbsp;단지 견뎌내거나(관용), 공포 속에서 배척하는&nbsp;것(안전)일게다. 그리고&nbsp;이것이 "타자를 자기&nbsp;틀에 맞춰&nbsp;해석하는 것은 하나의 폭력"이라는 인식이 보편화된 오늘날,&nbsp;관용(tolerance)과 안전(security)이라는 두 가지 키워드가, 핵심적인 정치적 용어로서&nbsp;반복적으로 이야기되는 이유가 아닐까?(이&nbsp;두 키워드의 관계에&nbsp;대해서는 아무래도 따로 포스팅해야 할 것 같다.)&nbsp;</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따라서&nbsp;괴물에 관한 연구들을 보면서, 궁극적으로 내가 묻고 싶은 것은&nbsp;다음과 같은 것이다. 오늘날 각각 진보적 자유주의와 우파적 보수주의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리고 그런만큼 실은 밀접히 결합되어 있는) 관용과 안전의 방식이 아니라,&nbsp;괴물-타자와 관계맺는 또 다른 형태의 윤리적 실천은 어떻게 가능할까?&nbsp;서사로의 회귀라는&nbsp;커니 식의 손쉬운 해결책에 기대지 않고, 좀 더 근본적이고 좌파적인 입장에서의 이 문제에 대한 접근은 어떻게&nbsp;가능할까?&nbsp;오늘날의 사회적 조건 속에서, 괴물-이웃에 대한&nbsp;이웃사랑(neighbor love)의 실천은 어떠한 형태일 수 있을까? 지금&nbsp;보고 있는&nbsp;괴물과 그것의 재현에 대한&nbsp;연구들이, 이러한 질문에 대한 해답을(혹은 적어도 그 실마리라도) 던져줄지는&nbsp;아직 잘 모르겠다. 지금으로선 그저, 중간에 길을 잃고 헤매지 않기를 소심하게 바랄 뿐이다.&nbsp;&nbsp;</p>
<p align="justify">&nbsp;</p>
]]>
			</description>
			<author>캐즘</author>
			<category>담론의 질서</category>
			<category>괴물</category>
			<category>이방인 신 괴물</category>
			<category>월하의 여곡성</category>
			<category>관용과 안전</category>
			
			
			<pubDate>Sun, 24 Aug 2008 03:15:30 +0900</pubDate>
		</item>
		<item>
			<guid>http://blog.jinbo.net/chasm/?pid=94</guid>
			<title>촛불 집회, 소비자-시민과 민주-시민의 조우?</title>
			<link>http://blog.jinbo.net/chasm/?pid=94</link>
			<description>
<![CDATA[
<!--FCKeditor--><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어느 정도 상황이 정리되기 전까지 촛불 집회에 관한 글은 쓰지 않으려고 했는데, 여기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지 않고서는 블로그에 다른 글을 쓰기 어려울 것 같아(지난 2달 동안 블로그에 새 글을 쓰지&nbsp;않고&nbsp;미뤄왔던&nbsp;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물론 가장 직접적인 이유는 바빠서이지만..)&nbsp;떠오르는 단상을 거칠고&nbsp;도식적으로&nbsp;정리해 놓는다.&nbsp;상황이 정리된 후&nbsp;어떤 식으로든 다시 한 번 생각을 정리해볼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nbsp;</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p>
<p align="justify">좀 거대한 이야기를 하자면, 난&nbsp;광우병 촛불 집회가 post-97 체제의 궁극적 완성이자 동시에 변화지점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지난 10년간 post-97 한국 사회를 지배했던 담론이 정치 영역의 민주화담론과 경제 영역의 신자유주의 담론이었음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nbsp;그리고 언제나 그렇듯이 이러한 담론들은 특정한 주체성의 모델과 그 모델에 기반한 주체들의 호명 과정을 수반한다. 지난 10년 간 정치적 영역에서 민주화 담론이 시민사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합리적이고 관용적인 "국민"으로서 "민주-시민"을 그 모델로 삼아왔다면, 경제 영역에서 신자유주의 담론은 자기 계발과 커리어 관리에 집중하면서&nbsp;각종 제도의 피규율자에서&nbsp;벗어나 서비스를 소비하는 한 명의 소비자로서 empowering된 "소비자-시민"을 그 모델로 삼아왔다. 그리고 이 두 담론과 두 주체성의 계열은 지난 10년 간&nbsp;개혁 자유주의 헤게모니의 두 기둥으로 기능해 온 것이 사실이다. </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하지만 이 두 주체성&nbsp;간의 관계만으로 보자면, 이 둘의 관계는&nbsp;완전히 결합된 동일한 것의&nbsp;서로 다른 면이라기보다는,&nbsp;일정정도 서로 간에 독립성을 가진 채 평행적으로 발전해온 것으로&nbsp;이해하는 것이 더&nbsp;정확할 것이다.&nbsp;개인적으로는 이 두 주체성의 근저에 공통으로 놓인 욕망의 도식에 더 관심이 가지만, 그럼에도&nbsp;이 두 주체성은 일정 부분 상호 환원 불가능한, 독립적 역사와 배경을 가지고 있다.&nbsp;2000년대 들어&nbsp;민주-시민 주체성이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라는 슬로건 아래 미군 장갑차 촛불 시위, 탄핵 반대 시위 및 각종 시민운동&nbsp;등에서 가시적으로 표출되었다면, 소비자-시민 담론은 교육 개혁, 공기업 개혁같은 제도적 뒷받침과 더불어 웰빙 문화, 자기 계발 문화의 확산을 통해&nbsp;일상 생활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확보해 왔다.&nbsp;97년 이후&nbsp;이 두 주체성 계열은,&nbsp;적극적으로 상호 교차하거나 결합하기보다는&nbsp;각기 다른 부분에서&nbsp;평행(혹은&nbsp;긴장)&nbsp;관계를 유지해왔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그리고 모든 지배이데올로기가 그러하듯, 이 상호 긴장이야말로 자유주의 헤게모니의 유지에 기능적이었다.)&nbsp;&nbsp;&nbsp;</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이런 배경 하에서,&nbsp;올해 광우병 촛불집회(와 그 참가자)에서 진정 새로운 면을 찾을 수 있다면, 나로서는&nbsp;주저없이 이 소비자-시민 주체성과 민주-시민 주체성, 두 주체성 계열의 상호 교차와 결합을 꼽고 싶다.&nbsp;지난 10여년간 약간의 거리를 두고&nbsp;발전해 온 두&nbsp;주체성의 계열(그리고 이 주체성들을 호명하는 두 계열의 담론)은&nbsp;광우병 촛불집회 속에서&nbsp;완전히 상호교차하고 있으며, 소비자-민주-시민이라는 새로운 형상을 만들어내고 있다.&nbsp;&nbsp;</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무엇보다도&nbsp;광우병 촛불 집회는, 웰빙 문화, 자기 계발 문화, 나르시시즘의 문화의 수혜자들인 소비자-시민을&nbsp;거리로 불러낸 최초의 사건으로 기록될 것 같다. 초창기 촛불 집회를 주도하고 가장 열심히 결합했던&nbsp;집단들이 &lt;화장빨&gt;이나 &lt;소울 드레서&gt; 같은 인터넷 소비자 커뮤니티들이라는 것이 과연 우연일까? 거리로 쏟아져나온 중고등학생들과 학부모들의 모습은, 정치적 투사나 이익집단의 모습보다는 더 나은&nbsp;행정 서비스를 요구하는 소비자-시민의 당당한 권리 요구의 모습에 더 가깝지 않은가? 혹은&nbsp;겨우 네 달 만에 돌아선 이명박 정권에 대한 민심 속에서, 어떤 정치적 가치에 기반한 분노보다는&nbsp;불량제품 구매에 대한 소비자의 분노를 읽어내는 것은&nbsp;과연 지나친 생각일까?(그런 점에서 이명박 정권에 대한&nbsp;대중의 분노가 특정한 정당에 대한 지지로 이어지지 않고 있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현상이기도 하다.)&nbsp;</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하지만&nbsp;더욱 놀라운 사실은,&nbsp;이러한 소비자-시민의 분노 위에 "민주주의"라는 기표가 어색함없이 덧씌워지고 있다는 것이다. 촛불 집회의 참여자들에 대한&nbsp;이른바 '진보' 언론의&nbsp;표상은, 이들이&nbsp;합리적이며 자신의 안전과 경력 관리에 누구보다도 민감한 이들(소비자-시민)이면서, 동시에&nbsp;참여적이고 민주주의의 가치를 체화한 이들(민주-시민)이라는 것이다.(불과 지난 대선만 돌이켜보더라도, '청년 보수층' 등의 용어을 통해 후자와 전자의 간극을 지적하는 것이, 이들 '진보' 언론의 주된 담론이었다는 것을&nbsp;상기시켜 본다면, 이것은&nbsp;놀라운 변화이다.)&nbsp;비록 지난 몇 년간 꾸준히 소비자의 정치적 주체화에 대한 담론이 조금씩 논의되어왔다 하더라도&nbsp;비교적&nbsp;어색한 거리를 유지했던&nbsp;이러한 두 상이한 계열의 담론(소비자-시민과 민주-시민)이 아무런&nbsp;솔기없이 매끄럽게 결합되는 것은,&nbsp;단지 광우병 촛불집회가 6월을 관통하는 사건이었기 때문일까?&nbsp;</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촛불 집회를 둘러싼 담론들 속에서, 더 나은 행정 서비스에 대한 요구들과&nbsp;민주주의적 요구의 경계는 불투명해짐과 동시에,&nbsp;민주주의에&nbsp;대한 요구는 소비자로서의 권리 행사와 완전히 겹쳐지는 것으로&nbsp;이해된다.(조중동 불매운동에&nbsp;쏟아지는 "소비자 민주주의"를 내세우는&nbsp;찬사들을&nbsp;보라. 나로서는 이러한 운동의&nbsp;목적에 동의하지만, 보수 언론에 대한 불만과 민주주의에 대한 사고가&nbsp;이러한 상상적 틀 속에서 표출되는 것 자체는&nbsp;또 다른 차원에서 고민되어야할 주제라고 생각한다.)&nbsp;다른 한편, 실제로 촛불 집회의 참여자들 속에서도, 우리는 이들을 어디까지 소비자-시민으로, 어디까지를 민주-시민으로&nbsp;규정지어야할지 모르겠는&nbsp;약간의 낭패감,&nbsp;그리고 부분적으로 재확인되는&nbsp;동시에 어느새 지워지는 이 둘 간의&nbsp;경계선을 만난다.(이것이&nbsp;전통적인 소비자-시민과 전통적인 민주-시민 양자 모두에게, 광우병 촛불 집회와 그 참가자들의 성격을&nbsp;그토록 모호한 것으로 보이게&nbsp;만들었던&nbsp;주된 이유일 것이다.)&nbsp;&nbsp;광우병 촛불 집회를 매개로 이루어진&nbsp;이 두 주체성의 결합을 통해,&nbsp;우리는 소위 생활 영역과 공공 영역을 자유롭게 결합시키고 가로지르는&nbsp;꽤나 통치 까다로운 소비자-민주-시민 주체들의 탄생을 목격하고&nbsp;있는 것이다.</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나로서는 이 두 계열의 결합과 새로운 주체성의 탄생이 (지금의 국면을 민주주의의 귀환이나 생활정치의 확산 혹은&nbsp;다중적 역능의 폭발로 묘사하는 이들처럼) 환영할 만한 일인지는 잘 모르겠다.&nbsp;그것은 이 두 주체성의 구성이 그동안 자유주의적 담론과 장치들을 통해 이루어져왔기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nbsp;소비자-시민과 민주주의라는 기표의&nbsp;기묘한&nbsp;결합 혹은 이러한 결합에 기반한 담론의 확대가, 민주주의의 소비자 운동으로의 환원 혹은 지난 대선에서&nbsp;드러났던 "경제(oikos)화된 정치"의 완성을 보여주는 징후가 아닐까라는 의구심을 거둘 수 없기 때문이다.(게다가 이 두 계열의 주체성이 계속 결합될지, 아니면 다시 분리되어 일정한 평행 관계를 유지할지, 아니면 다른 한쪽이 또 다른 한 축을 흡수할지 역시&nbsp;현재로서 판단하기에는 이르다.)&nbsp;</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다만 한가지 확실한 것이 있다면, 이 두 계열의&nbsp;담론과 두 계열의 주체성의 혼합이 가져온&nbsp;촛불 집회의 폭발력은,&nbsp;97년 이후 확장되어&nbsp;온 개혁적 자유주의의 헤게모니의 결과물이자, 그 헤게모니가 한국 사회에서 일종의 비가역점을 통과했으며&nbsp;이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는&nbsp;사실을 보여준다는 사실이다.(아마도 이 사실을 모르는 건 이명박 정권 뿐인 듯 하다.)&nbsp;그런 점에서 보자면, 지난 10년간 자유주의 헤게모니와 직접 대결하기보다는 과거 반공-규율 사회의 유령과 싸우면서&nbsp;이 헤게모니와&nbsp;암묵적으로 공모 혹은 묵인해온&nbsp;소위 "진보" 혹은 "좌파" 진영의 담론들이, 이러한 새로운 주체성들의 등장에&nbsp;과도한 찬사와, 이에 대비되는&nbsp;빈약한 분석만을&nbsp;늘어놓을 수밖에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하지만 이러한 무능에 대해 한탄만 하고 있을 수는 없는 것이,&nbsp;이 새로운 국면에 대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간에, 앞으로 대중 정치에 대한 사고가 이 소비자-민주-시민 주체성의 형상을 염두에 두지 않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을 것&nbsp;같은 예감 때문이다.&nbsp;우리는&nbsp;이러한 기묘한 결합관계와는 또&nbsp;다른 민주주의를 상상할 수 있을까? 혹은 상상해야만 할까? 이 새로운 소비자-민주-시민과의 형상과는 또&nbsp;어떤&nbsp;관계를 맺어야 하나? 우리는 이 결합을 환영해야만 할까? 나 역시 촛불집회의 참가자로서 촛불집회 과정에서 이루어진 정치적 성장의 조짐들에 진정으로 기뻐하는&nbsp;바이지만, 이러한 물음들과 관련하여 촛불집회가 던져주고&nbsp;있는 것은 하나의 답이라기보다는 질문 그 자체라고 생각한다.&nbsp;그리고 개인적으로는 이에 대한&nbsp;답은 촛불집회 그 자체의 귀결 그리고 그것이 남길 효과 속에서&nbsp;조금씩이나마 분명해질 것 같다.&nbsp;</p>
<p align="justify">&nbsp;</p>
]]>
			</description>
			<author>캐즘</author>
			<category>The Ticklish Subject</category>
			<category>촛불집회</category>
			<category>소비자 민주 시민</category>
			
			
			<pubDate>Tue, 01 Jul 2008 00:39:39 +0900</pubDate>
		</item>
		<item>
			<guid>http://blog.jinbo.net/chasm/?pid=89</guid>
			<title>코제브의 동물/속물론</title>
			<link>http://blog.jinbo.net/chasm/?pid=89</link>
			<description>
<![CDATA[
<!--FCKeditor--><p><a href="http://blog.jinbo.net/chasm"><strong>캐즘</strong></a>님의 <a href="http://blog.jinbo.net/chasm?pid=48">[새로운 민족-국가 만들기 그리고 동물/속물적 주체성 ]</a>&nbsp;&amp;&nbsp;<a href="http://blog.jinbo.net/chasm/?pid=72">[책 두 권]</a> 에 관련된 글<br /></p>
<p>&nbsp;</p>
<p align="justify">블로그에서&nbsp;종종 언급했던 코제브의 (미국식) 동물과 (일본식) 속물에 대한 유명한 각주를 잠깐 짬을 내 옮겨 놓는다. 일본 문화를 공부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유명한 이&nbsp;각주는, 조영일 씨가 가라타니 고진의 책을 번역하면서&nbsp;이해를 돕기 위한&nbsp;역주로 부분 번역된&nbsp;적은 있지만, (내가 아는 한) 각주 전체가 번역된 적은 없다.&nbsp;이 각주가 달려있는 알렉상드르 코제브의 &lt;헤겔 독해 입문(Introduction to the Reading of Hegel)&gt;은 &lt;역사와 현실변증법&gt;이라는 제목으로 1980년대 초반에 번역된 바 있으나, 이 각주가 속한 장 전체가 번역에서 누락되어 있다.(원래 이 책 자체가 이런저런 강의를 모아서 편집한 구성을 가지고 있으니 굳이 역자의 잘못은 아니다.)</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사실 문화연구, 특히 소비문화(비판)에 관심을 가진&nbsp;사람들에게 일본 문화는&nbsp;(직접적인 전공 대상이 아니더라도) 관심의 대상일 수밖에 없다. 일본은 세계에서 가장 선진적인(?) 소비문화를 가지고 있으며, 동시에&nbsp;넓이와 깊이 면에서 다른 국가들을 압도하는 방대한 서브컬처의 전통을 가진 나라이기 때문이다.(나같은 경우는, 그저 주변에 일본 유학생들이 많아서라고 해야 하겠지만..;;)&nbsp;</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아무튼 이러한 일본 문화를 둘러싼 논의 중 가장&nbsp;유서 깊은 것이 바로&nbsp;일본 문화가 뿌리부터 서구의 근대와는 구분되는 탈근대적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일본문화의 "태생적 포스트모더니즘"에 관련된&nbsp;논의일 것이다.&nbsp;이 논의는 거슬러 올라가면 교토학파의 "근대초극론"까지 연결될 수 있고, 그 역사가 깊은 만큼,&nbsp;서양의 문화연구자들이나 일본인 자신들의 오리엔탈리즘(혹은 역오리엔탈리즘)적 시각으로 단순히 치부하기엔, 논의를 둘러싼 담론의 두께가 만만치 않은 것도 사실이다. 이 논의는&nbsp;이 포스팅에서 다룰 주제는 아닌 것 같고, 아무튼 70년대 이후&nbsp;일본문화의 뿌리깊은 포스트모던한 성격을 강조하는데 한 몫한 대표적인 서양 학자들의 텍스트가, 지금 소개하는 코제브의&nbsp;각주와 롤랑 바르트의 &lt;기호의 제국&gt;이란 사실만 지적하는 것으로 충분하겠다. </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참고 삼아, 롤랑 바르트가 &lt;기호의 제국&gt;에서&nbsp;일본 문화를 가로지르는 특징 중 하나로 꼽고 있는 "텅 빈 중심"에 관련된 부분도&nbsp;일부 옮겨놓는다.&nbsp;</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일본 요리에는 중심이 없다. 여기에서는 모든 것이 다른 장식물을 위한 또 다른 장식물일 뿐이다. 무엇보다도 식탁이나 쟁반 위의 요리는 부분들의 집합체일 뿐이며, 그 어느 것도 영양 섭취에서 순서상 우월하지 않다."(30)<br /></p>
<p align="justify">"내가 지금 말하고 있는 도시(도쿄)에는 중요한 역설이 있다. 이 도시에는 중심부가 있지만 그 중심부는 텅 비어 있다. 이 도시는 금지된 중립의 공간을 빙 둘러싸고 있다."(40, 도쿄의 중심은 천황궁과 이를 둘러싸고 있는&nbsp;숲이다. 하지만 이 공간은 자신을 중심으로&nbsp;도시의 좌표를 구획하는 서양의 왕궁과는 달리, 숲으로 둘러싸여 아무도 접근할 수 없는 금지된 공간이자 텅 빈 중심이다. 이러한 바르트의 비유는 일본의 천황과 서양의 왕(혹은 황제)를 비교하는 논의를 제공하기도 하는데, 사실&nbsp;천황의 텅 빈 중심으로서의 속성에 대한 논의는 교토학파의 선조인 니시다 기타로에 의해 지적된 바 있다(고 한다).-인용자)</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코제브의 "속물론"이 일본 문화의 "키치"적 성격에 대한&nbsp;분석과&nbsp;이어진다면, 바르트의 "텅 빈 중심"에 대한 지적은 일본문화의&nbsp;유아적 성격 그리고&nbsp;패스티쉬적 성격에 대한 분석과 연결된다.(이 중 유아적 자본주의에 대해서는 <a href="http://blog.jinbo.net/chasm/?pid=88">저번 포스팅</a>에서 언급한 바 있다.)&nbsp;이렇듯 의미없는 형식화에 대한 강박과 텅 빈 중심을&nbsp;메우는 혼종성과 다문화성은&nbsp;일본 문화의 "태생적 포스트모던" 가설에 대한 중요한 지지 근거로 활용되어&nbsp;왔다. 물론 앞서도 말했듯이, 일본 문화와 포스트모던에 대한 이야기는,&nbsp;그 논쟁의 기나긴 역사 만큼이나 정교한 논의가 이루어져야 하는 부분이지만, 이 논쟁을 염두에 두지 않더라도 반농담처럼 인류의 미래를 묘사하고 있는&nbsp;코제브의 각주는 마치 SF소설처럼 상당히 재밌게&nbsp;읽힌다.(그의 나이 많은 제자 바따이유는 코제브의 이러한&nbsp;엉뚱한 유머 감각을 무척이나 싫어했다고 전해진다.:-) </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번역 대본은 Alexandre Koj&egrave;ve, James Nichols(trans.), <em>Introduction to the Reading of Hegel</em>, Cornell Univ. Press, 1969로, 이 각주는&nbsp;6장의 6번째 각주로서 158쪽에서 162쪽에 걸쳐 실려 있다. &nbsp;</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strong>초판의 각주</strong> </p>
<p align="justify">역사의 종말과 인간의 소멸은, 우주의 붕괴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자연 세계는 항상 그러했듯이 그대로 남아있을 것이다. 또한 이것은 생물학적인 소멸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인간은 자연 혹은 주어진 존재(given Being)와 조화를 이룬 채 살아남을 것이다. 소멸하는 것은 고유하게 그렇게 불릴 수 있는 것으로서의 인간, 즉 주어진 것을 부정하는 행위와 오류, 즉 일반적으로 말해 대상에 대립하는 주체(the Subject)이다. 사실상, 인간의 시간이나 역사의 종말, 즉 고유하게 그렇게 불리워질 수 있는 인간, 자유롭고 역사적인 개인의 소멸은, 행위(Action)의 종결을 의미할 뿐이다. 현실적으로 보자면, 이는 유혈 혁명과 전쟁의 소멸을 의미한다. 또한 이는 철학의 소멸이기도 하다. 인간은 더 이상 본질적으로 변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자신과 세계를 이해하는 (진실된) 기본 원리들을 수정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외의 나머지 것들, 즉 예술, 사랑, 유희 같은 인간을 행복하게 만드는 모든 것들은 영구히 남아있을 것이다. </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이러한 헤겔주의적 테마가 맑스에 의해 채택되었다는 사실을 떠올려보자. 인간들(계급들)이 인정(recognition)을 위해 서로 투쟁하고 노동을 통해 자연에 투쟁하는 고유한 의미에서의 역사를, 맑스는 &ldquo;필요의 영역&rdquo;이라고 불렀다. 반면에 이를 넘어선 &ldquo;자유의 영역&rdquo;에서는, 인간은 어떤 유보도 없이 서로를 상호적으로 인정하기에 더 이상 투쟁하지 않으며, 가능한 한 노동하지도 않을 것이다.(자연은 완전히 정복되어, 인간과 조화를 이루게 될 것이다.) 자본론 3권 48장 III절의 두 번째 단락 마지막 부분을 보라. </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strong>2판에 덧붙여진 각주</strong> <br />앞의 각주에는 모순적이라고 할 것까지는 없지만, 다소 모호한 부분이 존재한다. 만약 우리가 &ldquo;역사의 종말 이후 인간의 소멸&rdquo;을 받아들인다면, 즉 우리가 &ldquo;사라지는 것은 고유한 의미에서의 인간&rdquo;이며 &ldquo;인간은 동물처럼 살아가게 될 것이다&rdquo;라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ldquo;예술, 사랑, 유희 같은 나머지 것들은 영구히 남아있을 것이다&rdquo;라고 말할 수 없다. 만약 인간이 다시 동물이 된다면, 그의 예술이나 사랑, 유희 또한 순전히 &ldquo;자연적인&rdquo; 것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역사의 종말 이후에 인간은 마치 새가 둥지를 짓고 거미가 거미줄을 잣듯이 자신의 건축물과 예술 작품을 만들 것이고, 개구리와 매미처럼 음악을 연주할 것이다. 덧붙여 그들은 어린 동물처럼 유희하고, 다 자란 맹수처럼 사랑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모든 것이 &ldquo;인간을 행복(happy)하게 만든다&rdquo;고 말해선 안 된다. 오히려 우리는 (풍요와 안전 속에서 살아갈) 호모 사피엔스라는 역사-이후의 동물은, 그들의 예술적이고 에로틱하며 즐거운 행위에 만족하는(be contented with) 한,&nbsp;그 행위의 결과로서 내용(content)이 될 것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하지만 조금만 더 나가보자. &ldquo;고유한 인간의 소멸&rdquo;은, 또한 엄밀한 의미에서 인간의 담론, 즉 로고스(Logos)의 소멸을 의미한다. 호모 사피엔스라는 동물들은 음성과 &ldquo;언어&rdquo; 신호에 조건 반사처럼 반응할 것이고, 따라서 그들의 &ldquo;담론&rdquo;이란 것은 벌의 &ldquo;언어&rdquo;와 유사해질 것이다. 그렇다면 사라지는 것은, 철학이나 담론적 지혜에 대한 추구만이 아니라 지혜 바로 그 자체이기도 하다. 이러한 역사-이후 동물들에게는, 더 이상 자신과 세계에 대한 어떤 (담론적) 이해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내가 위의 각주를 썼을 때(1946년)에도, 인간의 동물로의 회귀는 미래의 전망으로서 아직 생각할 수 없는 것만은 아니었다. 하지만 머지 않아(1948년) 나는 헤겔과 맑스의 의미에서 역사의 종말은 아직 오지 않은 것(not yet to come)이 아니며, 오히려 그것은 현재이자 지금 여기에서 벌어지는 일이라는 사실을 명확히 알게되었다. 현재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관찰하고 예나 전투 이후 지금까지 세계에서 일어난 일들을 반추해본 결과, 나는 예나 전투에서 고유한 의미에서의 역사의 종말을 본 헤겔이 옳았음을 이해하게 되었다.(나폴레옹이 예나 전투를 통해 예나에 입성하던 그 시기, 헤겔이 &lt;정신현상학&gt;을 완성한 사실은 유명하다.-역주)&nbsp;이 전쟁을 통해 인간성의 전위부대는 인간의 역사적 진화라는 자신의 목적이자 한계, 즉 종말에 잠재적으로 도달하게 되었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 일어난 일들은, 프랑스에서 로베스피에르와 나폴레옹에 의해 현실화된 혁명적 힘들의 보편적 공간으로의 확장일 뿐이다. </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진정한 역사의 관점에서 보자면, 두 번의 세계 대전과 그 사이의 크고 작은 혁명은, 주변 지역의 뒤처진 문명들을 (실재적이건 잠재적이건 간에) 가장 발달한 유럽의 역사적 지위로 끌어올린 것에 지나지 않았다. 러시아의 소비에트화와 중국의 공산화가 토고의 독립이나 파푸아뉴기니의 자치 선언 혹은 (히틀러로 귀결된) 독일 제국의 민주화와 다른 점이 있다면, 이러한 중국과 소련의 로베스피에르식 보나파르트주의의 실현이 나폴레옹 이후의 유럽으로 하여금 혁명 전의 낡은 유산들을 제거하는 데 좀 더 열을 올리도록 만들었다는 것 정도일 뿐이다. 게다가 이러한 낡은 유산의 제거는, 유럽 그 자체보다는 유럽의 확장판인 북미에서 더욱 빨리 진척되었다. 어떤 점에서 보면, 우리는 미국이 이미 맑스주의식 &ldquo;공산주의&rdquo;의 마지막 단계를 성취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ldquo;계급없는 사회&rdquo;의 모든 구성원들은, 그들의 마음이 내킬 때에만 일하면서 그들에게 좋아보이는 모든 것을 전유할 수 있다. <br /></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1948년과 1958년 사이에 미국과 소련을 몇 번씩 오가면서 내가 받은 인상은, 미국은 부유한 중국과 소련이며, 소련과 중국은 빠르게 부유해지고는 있지만, 아직은 가난한 미국일 뿐이라는 것이었다. 이로써 나는 &ldquo;미국식 삶의 방식&rdquo;이 역사-이후에 고유한 삶의 유형이며, 미국의 현존은 모든 인류의 &ldquo;영원한 현재&rdquo;가 될 미래를 선취한 것이라고 결론짓게 되었다. 이와 같이, 인간의 동물화는 아직 오지 않은 가능성이 아니라 이미 현존하는 확실한 일처럼 보였다.&nbsp; </p>
<p align="justify"><br />내가 이러한 입장을 근본적으로 수정한 것은, 1959년에 일본을 여행한 이후의 일이다. 나는 일본이라는, 이미 3세기 전에 &ldquo;역사의 종말&rdquo;을 체험한 사회를 만나게 되었다. 그 곳에서는 평민 출신 히데요시가 봉건제를 해체하고, 그의 계승자인 귀족 출신 이에야스가 인위적으로 고립된 국가를 만들어낸 이후로, 어떤 내전이나 외부와의 전쟁도 발생하지 않았다. 현존하는 일본의 귀족들은, 심지어 결투에서조차 자신의 목숨을 걸지 않고 노동에 종사하지도 않지만, 동물이라고 할 수는 없다.&nbsp;<br />&nbsp;</p>
<p align="justify">&ldquo;역사-이후&rdquo;를 살아가는 일본 문명은, 미국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다. 물론 일본에는, 유럽적인 혹은 역사적인 의미에서 어떤 종교도, 도덕도, 정치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순수 형태로서의 속물성(snobbery)은, 강요된 노동이나 혁명적 투쟁 같은 &ldquo;역사적&rdquo; 행위와는 또 다르게 주어진 &ldquo;자연&rdquo; 혹은 &ldquo;동물&rdquo;을 부정하는 규율들을 창조해냈다. 확실히 가면극이나 다도, 꽃꽂이 등에서 드러나는 일본식 속물성의 정점은, 여전히 귀족과 부유층의 특권으로 남아있다. 하지만 여전한 경제적&bull;정치적 불평등에도 불구하고, 모든 일본인들은 예외 없이 완전히 형식화된 가치, 즉 역사적 의미에서 모든 인간적 내용이 부재한 가치에 따라 살아가고 있다 이에 따라, 극단적인 경우 모든 일본인들은 완전한 무상(無償)의 자살을 행할 수 있다.(고전적인 사무라이의 할복은 오늘날 비행기나 잠수정의 자살 공격으로 대체된다.) 이러한 자살은 사회적&bull;정치적 내용을 가진 &ldquo;역사적&rdquo; 가치를 건 투쟁 속에서 맞는 삶의 위기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최근에 시작된 일본과 서구 세계의 상호작용은 결국에는 일본의 야만화가 아니라 (러시아를 포함한) 모든 서구의 일본화로 귀결될 것이다.</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어떤 동물도 속물이 될 수는 없기에, 일본화된 역사-이후의 시대는 고유하게 인간적인 것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호모 사피엔스라는 동물이 인간 내에 존재하는 자연적인 부분에 머무는 한에서는, &ldquo;고유한 의미에서의 인간의 완전한 소멸은 없을 것이다&rdquo;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자연 혹은 주어진 존재와 조화를 이루는 동물은 결코 인간일 수 없다. 인간이 인간으로 남아 있기 위해서는, 대상에 대립하는 주체로 남아있어야 한다. 비록 주어진 것과 오류를 부정하는 행위 자체는 사라진다 해도 말이다. 따라서 역사-이후의 인간은 그에게 주어진 모든 것이 충분하다 하더라도, 끊임없이 &ldquo;내용(content)&rdquo;으로부터 &ldquo;형식(form)&rdquo;을 분리시켜야만 한다. 하지만 이는 내용을 변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일종의 내용으로 간주되는 자신과 타자들로부터, 스스로를 이들과 대립되는 순수 형태로 유지하기 위한 것이다.[끝]&nbsp; </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덧.</p>
<p align="justify">코제브의 논의를 소개해 준 김홍중 선배는 반농담으로, 미국식 동물과 일본식 속물의 차이는 그들의 포르노그라피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다고 말한다. 미국의 포르노그라피에서 우리가&nbsp;성욕의 충족을 위해 돌진하는, 코제브의 표현을 빌자면 "다자란 맹수처럼 사랑하는" 남녀들을 발견할 수 있다면, 일본의 포르노그라피 속에서&nbsp;우리는&nbsp;마치 의례를 치르듯이 페티시화된 상대방의 육체(보통 여성의 육체)를&nbsp;자극하는,&nbsp;성행위에도 어떤&nbsp;절제된 형식과 절차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듯한 남녀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nbsp;아마도 두 나라의 포르노그라피를 접한 경험이 있는 이들이라면,&nbsp;이러한 흥미로운 차이의 지적에&nbsp;동의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p>
<p align="justify">&nbsp;</p>
]]>
			</description>
			<author>캐즘</author>
			<category>담론의 질서</category>
			<category>코제브</category>
			<category>동물/속물</category>
			<category>일본과 포스트모더니즘</category>
			
			
			<pubDate>Sat, 26 Apr 2008 02:11:12 +0900</pubDate>
		</item>
		<i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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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에반게리온과 모살(母殺)신화</title>
			<link>http://blog.jinbo.net/chasm/?pid=88</link>
			<description>
<![CDATA[
<!--FCKeditor--><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잡지에&nbsp;기고할 &lt;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gt; 서평을 쓰던 중에,&nbsp;짬짬이 &lt;에반게리온&gt; 시리즈를 전부 챙겨봤다.(사실 서평에&nbsp;투자한 시간보다 &lt;에반게리온&gt;보는데 걸린 시간이&nbsp;더 많다.;;;)&nbsp;책의 저자인 아즈마 히로키가 문학평론가보다는 오타쿠 문화연구자로 더 유명한데다, 그에게 이러한 명성을 안겨 준 계기 중 하나가 그의 &lt;에반게리온&gt; 평론과 소위 '에반게리온 세대'라고 불리는 새로운 오타쿠 세대에 대한 분석이기 때문이다(라고는 하지만, 실은 "중간에 그만 볼 수가 없어서"가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그의 &lt;에반게리온&gt; 평이 궁금하신 분은 참고하시라. <a href="http://www.ntticc.or.jp/pub/ic_mag/ic018/intercity/higashi_E.html">"Anime or Something like It: Neon Genesis Evangelion"</a>)</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lt;에반게리온&gt;를 처음 본 것은, 고등학교 때 일본애니메이션 팬이었던 친구의 권유 때문이었는데, 솔직히 그 때는&nbsp;이 어수선한 텍스트가 그다지 흥미롭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거의 10년이 지나 다시 본 &lt;에반게리온&gt;은&nbsp;충분히 흥미로웠는데, (나의 가설이 맞다면) 그건 크게 봐서 '신지의 성장담'이라 할 수 있는 &lt;에반게리온&gt;이 암묵적으로 겨냥하고 있는 청중들이, 실재 어린이들이 아니라 어른이&nbsp;되지 못한 채 나이를 먹어가는&nbsp;아이-어른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nbsp;이 성장의 문제, 아이-어른의 문제 혹은 유아화의 문제는, 요즘&nbsp;개인적으로 (반쯤은&nbsp;사적인 이유로, 반쯤은 학술적인 이유로) 관심을 갖고 있는 주제이기도 하다. </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일본의&nbsp;이론가 아사다 아키라는&nbsp;어디에선가 체제가 발달할수록 그 구성원은 점점 더 어려지는 자본주의의 역설에 대해&nbsp;지적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자본주의의 발달은 프랑스와 이탈리아 같은 노년 자본주의에서, 영국과 미국의 성인 자본주의를 거쳐, 일본으로 대표되는 유아 자본주의로 귀결되었다. 노년 자본주의가 왕이나 신같은 초월적 기표아래 안정을 추구하는 노인들의 자본주의라면, 성인 자본주의의 주체들은&nbsp;초월적-경험적 이중체(doublet)로 분열되어 스스로를 규율하고 식민화하는 외디푸스적 존재들이다. 이들은 목숨을 건 도약을 위해 혁신을 추구하고,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경쟁의식을 내면화한 기업가적 주체들이기도 하다.&nbsp;</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하지만 가장 최근의 자본주의인 소비자본주의에서는&nbsp;이러한 성인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nbsp;초월적 기표의 자리는 무엇이든 들어설 수 있는 텅 빈 자리로 대체되고, 소비 자본주의의 주체들은 이러한 텅 빈 중심이 제공하는 모성적(母性的) 공간 속에서 소(小)타자들과의 작은 차이의 게임에 한없이&nbsp;열중하는 '유아(infant)'들로 변한다. 포스트-외디푸스의 모성적 공간이 제공하는 관용과 허용 속에서,&nbsp;이들에게는 자신을 버리면서까지 추구해야할 어떤 초월적 가치도, 이를 위한&nbsp;혹독한 규율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들의&nbsp;주된 관심사는, 타자의 애정과 관심 그리고 자신의 즉자적인 안전과 안녕이다.(그런 점에서, 이들은 幼兒 혹은&nbsp;唯我적 나르시스트들이다.)&nbsp;</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물론 아사다 아키라가 유아적 자본주의에&nbsp;대해 말했을 때, 그가 1차적으로 염두에&nbsp;두고 있었던 것은,&nbsp;일본이라는 소비 사회와 오타쿠라는 주체성이었을 것이다.&nbsp;그런데&nbsp;이러한 아사다 아키라의&nbsp;분석이 요즘 부쩍&nbsp;한국의 현실과 겹친다는 느낌이 드는 건 나만의 생각일까?&nbsp;가라타니 고진의 말처럼, 주체의 유아화와 나르시스트화는 굳이 일본의 현상이 아니라 오늘날&nbsp;발달된 소비 자본주의 국가의 보편적인 현상일지 모른다.(한국에서의 하루키 열풍을 보고&nbsp;얻은 이러한 깨달음이,&nbsp;그가 "근대 문학의 종언"을 선언한 직접적인 배경이다.) 예컨대, 나는 토요일 저녁 &lt;무한도전&gt;을 볼 때마다, 아사다 아키라의 거대한 농담이 떠오른다. "하찮은 아버님"과 함께 장난치면서&nbsp;무의미한 게임을 진지하게 즐기는 이들의 모습에는, 진정으로 유쾌하면서도 진정으로 끔찍한 유아적 자본주의의 모습이 있다.&nbsp;거기에는 덜 자란 어른들의 무의미하면서도 무한한 경쟁이 있고, 캐릭터 쟁탈의 이름으로&nbsp;소비되는 차이의 게임이 있으며,&nbsp;이러한 경쟁과 질시와 어수선함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으로 안전과 변화-없음을 보장하는 모성적인 어떤 것이 있다. </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혹은 이러한 유아적 자본주의의 징후는, 지난 주말에 읽은 김영하의 &lt;퀴즈쇼&gt;에서도 발견된다. 88만원 세대의 애환을 다뤘다는 &lt;퀴즈쇼&gt;에서 묘사되는 공간, 즉 퀴즈를 통해 치열하게 경쟁하고 즉각적으로 노력의 결과가 확인되며 역시나 즉각적인 보상이 주어지고, 이러한 경쟁에 전념하는 이들을&nbsp;위한 온갖 배려와 외부로부터의 격리가 존재하는 공간은, 우리에게&nbsp;익숙한 어떤 공간을 떠올리게 한다. 그건 다름아닌&nbsp;"학교"다. 물론 김영하가 소설에서 노린 것은 IMF 이후 한국 사회 전반에 대한 은유이겠지만, 어쩌면&nbsp;한국 사회가 거대한 학교로(동시에 주체들은 학생들로)&nbsp;변해버렸다는 것이 진실일지도 모른다. 이 책에서 제시하는 한국 사회에는 치열한 경쟁과 온갖 권모술수가 존재하지만, 사실 이 경쟁은&nbsp;서로 다른 가치를 가진 어른들 간의 적대도 갈등도 아니며,&nbsp;단지 통제된 룰과&nbsp;투명화된&nbsp;공간 속에서 진행되는 아이들의 게임일 뿐이다.&nbsp;어머니의 관심을 받기 위해 어린 아이들이 벌이는 경쟁이 그렇듯이, 이러한&nbsp;게임 속에는,&nbsp;성취는 있지만 성장은 없다.(그래서 김영하의 &lt;퀴즈쇼&gt;의 주인공은 성장하지 않고, 이 소설은&nbsp;성장담이 아니다.)&nbsp;</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다시 본 &lt;에반게리온&gt;이 흥미로웠던&nbsp;이유는,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이다.&nbsp;흔히 &lt;에반게리온&gt;은&nbsp;가장 오타쿠적이면서 동시에 가장 反-오타쿠적인 작품으로 평가된다. 왜 그러한가? 아마도&nbsp;그것은 &lt;에반게리온&gt;이 일종의 "모친 살해"의 신화를 선동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nbsp;주지하다시피, 오타쿠의 어원은 "집"을 뜻하는 "宅"이다.&nbsp;아사다 아키라의 말처럼, 포스트-외디푸스적인 소비 자본주의의 공간&nbsp;속에서, "집"은 가혹한 아버지에 대한&nbsp;투쟁의 공간이라기 보다는 모성으로 둘러싸여 생권력(biopower)의 보살핌(care)을 받는 공간이다.&nbsp;그리고 오타쿠는 이러한 안락한 공간 속에서 자신의 욕구를 만족시키는, 근본적으로 세계와 타자와의 소통에 무관심한, "AT 필드"로 둘러싸인 존재인 것이다. &nbsp;</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이러한 새로운 세대의 표상이라 할 수 있는 이카리 신지에게 있어, 당연히 아버지는 그에게 근본적으로 무관심하며, 이미 그로부터&nbsp;도주한 자이다.(그는 신지에게 "에바를 타라"고 명령하지 않는다. 오히려 끊임없이 "에바를 타든 말든 선택은 네게 달려있다"고 말한다.)&nbsp;&lt;에반게리온&gt;에서 신지가 성장을 위해 싸워야할 대상 혹은 죽여야할 대상은,&nbsp;이러한 부재한 아버지가 아니라&nbsp;"어머니(들)"이다. 이런 막무가내식 개념 적용을 결코 좋아하지 않지만, &lt;에반게리온&gt;에서 신지가 욕망하는&nbsp;세 명의 여인들, 레이, 아스카, 미사토는 각각 실재적 어머니, 상상적 어머니, 상징적 어머니의 완벽한 구현이다.&nbsp;레이가 신지의 어머니인 유이의 금지된 신체와 연결된다면, 아스카는 오타쿠들의 상상 속&nbsp;욕망의&nbsp;대상인 "전투 미소녀"의 전형이다. 그리고 현실 속에서 신지에게 안정된 공간을 제공해주며 그를 성장하도록 도와주는 미사토는 정확히 상징적 어머니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nbsp;그리고 신지가 자신의 성장을 위해 죽여야 하는 대상은, 이들 모두이다. </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세계 종말과 신인류의 탄생이라는 거창한 주제를 다루는 이&nbsp;장대한 서사시의 결말 부분에서, 신지는&nbsp;어머니 유이(혹은 레이)의 형상으로 나타나는 "새로운 신"을 자신의 힘으로&nbsp;살해한다. 그리고 이러한 살해를 통과한 후에야, 그는&nbsp;비로소 유아에서 벗어나 "세상으로 나올 수 있다."&nbsp;&lt;에반게리온&gt;은 모친 살해를 오늘날 유아-어른이 가득찬 세상을 벗어나는&nbsp;하나의 대안으로 제시한다. 모친 살해의 신화는 오이디푸스라는 부친 살해의 신화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아마도 유이의 몸과 하나됨은 신지에게&nbsp;안락함과 평안을 제공해줄 수 있을 것이다. 그 공간 속에는 타자로부터 오는 고통과 번민, 회한이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모성적 공간 속에서도 경쟁은 이루어지겠지만,&nbsp;그 경쟁은 목숨을 건 인정투쟁이라기보다는 애정의 서열을 즉각적으로 확인시켜주는&nbsp;"전국 일제고사" 같은 것이다.&nbsp;그렇다면 대체 우리가 세상을 부정할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푸코에게&nbsp;군주권의 잔혹함에 대한 저항보다 더 어려운&nbsp;일이 생권력의 안락함에 대한 저항이었듯이, 부친 살해보다 더 어려운 것은&nbsp;모살 신화의 창조일 것이다.(&lt;에반게리온&gt;의&nbsp;분열증적인 결론은 이러한 어려움의 반영일지 모른다.)&nbsp;&nbsp;&nbsp;</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이 블로그에서 몇 번이나 반복되어온 이야기이지만, 오늘날&nbsp;부친 살해 신화의&nbsp;때늦은&nbsp;반복은, 강한 아버지의 재림을 갈구하는 목소리와&nbsp;한쌍을 이루고 있다. 이 대립 구도는 진정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움직임, 즉 모친 살해의 필요를 감춘다. 오늘날 우리 앞에&nbsp;놓인 권력의 형상은, 명령하는 아버지가 아니라&nbsp;&nbsp;"나와 하나가 되자"라고 속삭이는 외설적 어머니이며, 따라서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nbsp;부살 신화의 반복이 아니라&nbsp;모살 신화의 새로운 창조이다.&nbsp;&lt;에반게리온&gt;이 10년이 지난 지금도 다시 회귀하고,&nbsp;여전히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은,&nbsp;아마도 이러한 요청에 대한 응답으로서만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nbsp;</p>
<p align="center"><img id="my_post_img7474720" style="CURSOR: hand" onclick="viewPostImage('/files2/202/chasm/images/200804/150113232.jpg')" height="676" alt="" width="450" onload="setTimeout('fixImage(7474720)',300)" src="/files2/202/chasm/images/200804/150113232.jpg" /></p>
<p align="center"><neon evangelion="" genesis=""></neon></p>
]]>
			</description>
			<author>캐즘</author>
			<category>카메라 폴리티카</category>
			<category>에반게리온, 모친 살해, 유아적 자본주의</category>
			
			
			<pubDate>Tue, 15 Apr 2008 01:11:12 +0900</pubDate>
		</item>
		<item>
			<guid>http://blog.jinbo.net/chasm/?pid=87</guid>
			<title>바디우의 레닌</title>
			<link>http://blog.jinbo.net/chasm/?pid=87</link>
			<description>
<![CDATA[
<!--FCKeditor--><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a href="http://blog.jinbo.net/chasm"><strong>캐즘</strong></a>님의 <a href="http://blog.jinbo.net/chasm?pid=86">[바울과 레닌 그리고 제3항의 사유]</a> 에 관련된 글. </p>
<p align="justify"><br /><br />저번 포스팅에 달린 댓글 중에서 라임님이 바디우가 레닌을 다루는 방식에 대해 언급한 게 생각나 인터넷을 뒤지다가 바디우가 레닌을 직접 다룬 짧은 글 하나를 발견, 링크를 걸어둔다. </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바디우가 1999년에 짧은 강의용으로 쓰고 이후에 Alberto Toscano의 번역으로 작년 출판된 The Century(Polity, 2007)에 실린&nbsp;"One Divides into Two"라는 제목의 글로, 라캉닷컴에 원문을 구할 수 있다. 관심있으신 분은 <a href="http://www.lacan.com/divide.htm">클릭</a></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글 자체는 짧지만 상당히 압축적이고 흥미로운 글이다. 이 글에서 바디우는 레닌론에서 시작해 곧바로 마오와 문화혁명의 논의로 건너가 결국 자신의 정치학을 압축적으로 요약하면서 글을 끝맺는다.&nbsp;바디우의 정치철학이나 레닌 혹은 마오주의에&nbsp;관심이 있다면&nbsp;한 번쯤 읽어보면 나쁘지 않을 것 같다.(짧은 글이라 일하는&nbsp;중간 중간 번역을&nbsp;해볼까 했지만,&nbsp;당분간은 밀린 일이 많아서 그럴 짬은 없을 것 같다.)</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영어를&nbsp;저어하는 분들을 위해&nbsp;내용을&nbsp;요약하자면, 이 글에서 바디우는&nbsp;20세기를 이데올로기의 시대도 유토피아의 시대도 아닌, 바로 레닌주의의 세기로 규정한다.&nbsp;이는 레닌의 정치사상이&nbsp;20세기의 핵심적인 특징인 "실재에의 열망(passion for the real)"을 가장 잘 드러내주고 있기 때문이다. 바디우가 보기에, 20세기는 약속의 세기, 기다림의 세기가 아닌 실현과 행위의 시기였고, 실패의 시기가 아닌 승리의 세기였다. 그리고&nbsp;레닌은&nbsp;이러한 승리가&nbsp;확고한 전선을 구축하고 총력전(total war)을 전개할 때에만 가능하다는 사실을&nbsp;명료화한 인물이었다.(혹은&nbsp;전선과&nbsp;전쟁이라는 상에 기반할 때에만 우리는 '승리'라는 개념을 떠올릴 수 있다.)&nbsp;</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그런데 이 '전선'과 '총력전' 그리고 이를 통한 한쪽 진영의 다른 진영에 대한&nbsp;최종적인 승리라는 개념과 이에 기반한 사유는,&nbsp;상호&nbsp;대립적인&nbsp;방향으로 전개될 수 있다.&nbsp;예컨대, 승리를 향한 그리고 승리를 통해 상대를 제거하려는 싸움의 원동력은, 적대 그 자체인가 아니면 하나를 향한 열망인가?&nbsp;우리는&nbsp;이 전쟁의 모델에서 하나를 둘로 나누는 정식을 지지할 것인가 아니면 둘이 하나로 종합되는 정식을 지지할 것인가? 바디우에게 이 문제는&nbsp;변증법적 종합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의 문제이기도 하다.(제목이 암시하듯, 바디우가 보기에 레닌이 첫 번째 정식을 지지하고 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nbsp;&nbsp;&nbsp;</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글 자체에서 바디우가 명시적으로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nbsp;여기서 바디우가 암묵적으로 염두에 두는 것은, 아마도 &lt;사회를 보호해야 한다&gt;에서 전개된 푸코의 "전쟁모델"에 대한 설명일&nbsp;것이다. 이 책에서 푸코는&nbsp;"전쟁은 정치의 연속이다"라는 클라우제비츠의 유명한 명제를 뒤집어 "정치는 전쟁의 연속이다"라는 입장에 기반한&nbsp;권력에 대한 전쟁모델적 접근을 식별해내고, 이러한 전쟁모델을 마르크스주의자들과&nbsp;인종주의자들이 공유하고 있는 권력모델이라고 주장한다. </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사실 이러한 푸코의&nbsp;전쟁모델에 대한 탐구는 전통적인 군주권 모델과는 다른&nbsp;형태의&nbsp;권력 모델을 검토하고자 하는 그의 지속적인 노력의 일부로 이해될 필요가 있지만, 이런 분석적 가치를 염두에 둔다하더라도, 인종주의와 마르크스주의 모델을 등치시키는 그의 입장이&nbsp;느슨하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바디우는&nbsp;이러한 전쟁 모델 속에 또&nbsp;다시 대립적인 두 입장이 존재할 수 있음을 지적함으로써 마르크스주의와 인종주의의 차이를 식별할 수 있는 실마리를&nbsp;던져준다. 바디우가 지적하듯이 이 둘의 차이는 대립 전선을 계급 사이에 설정하는냐, 인종 사이에 설정하느냐에서도 발견될 수 있겠지만, 더&nbsp;근본적으로 이들이&nbsp;전쟁 모델의 핵심을 적대에 두느냐 혹은 (승리를 통해 얻게 될) 통합에 두느냐의 차이일 것이다. 마르크스주의 내에서도 물론 적대보다는&nbsp;궁극적인 통합을 우위에 두는 입장이 존재함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다양한 마르크스주의의 흐름을 이것으로 환원시키기는 불가능하다.)&nbsp;&nbsp;&nbsp;&nbsp;</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다시 글로 돌아와서...&nbsp;그렇기에 바디우가 보기에 문화대혁명은 단순히 마오의 권력 투쟁으로 이해되어서는 안되며, 이러한 두 대립적인 노선 간의 정치적 투쟁으로 이해되어야&nbsp;한다. 당시 마오를 위시한 좌파들은 하나를 둘로 나누는 정식을 지지했다면, 우파의 입장은 둘을 하나로 종합하는 정식에 기반해 있었다. 그리고 이&nbsp;투쟁의 결과는 다들 알다시피 덩샤오핑의 테르미도르의 반동에 가까운 신자본주의로의 회귀, 즉 계급투쟁의 부정과 하나의 위대한 중국으로의 종합이었다. </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이어서 바디우는&nbsp;20세기 말에 이르러&nbsp;이러한 실재에의 열망이&nbsp;어떠한 방식으로 현실을 수용하고&nbsp;그것을 그저 즐기기만 하려는 자세에 자리를 내주게 되었는지를 언급하고, 또한 이러한 상황에서&nbsp;어떻게 반동적 니힐리즘이 등장하게 되었는지를 짤막하게 설명하고 있다.(여기에 대한 바디우의 비판과 그가 대안으로서 이야기하는 감산적 정향에 대해서는&nbsp;이 포스팅에서 자세히 설명하지 않을 것이다. 실재에의 열망에 기반한 정화(purification)의 정향이&nbsp;오늘날 어떠한 형태로 작동하는가는&nbsp;지젝이 방한 때 행한 첫번째 강연을&nbsp;참고하면 좋을 것이고, 바디우가 실재에의 열망을 유지하는 또 다른 형태로 내세우는 감산적 정향에 대해서는 지젝의 여러 글들과 함께,&nbsp;정화의 정향과 감산적 정향을 깔끔하게 비교, 정리해 놓은 ACT <act></act>0호에 실린 박제철의 글 "(예술-비평을 가지고) 무엇을 할 것인가?: 욕망의 레닌주의적 재발명"을 참고할 수 있겠다.) </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마지막으로.. 그렇다면 이러한 바디우의 레닌론에 대한 지젝의 평가는 어떤가?</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바디우와 라자뤼스가 선호하는 레닌은, 근대의 산업 집중화에 매료되어 경제와 국가기구를 재조직하는 (탈정치화된) 방법을 상상하는 &lt;국가와 혁명&gt;에서의 레닌이 아니라, &lt;무엇을 할 것인가&gt;의 레닌, 즉 (사회주의 혁명의식은 노동계급 외부에서 주입되어야 한다는 그의 테제에서) 마르크스의 이른바 '경제주의'를 깨버리고 정치의 자율성을 단언하는 레닌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마르크스주의적이라기보다는 자코뱅적인 바디우, 자크 랑시에르, 에티엔 발리바르의 '순수 정치학'은 거대한 적대자인 앵글로색슨 문화연구와 인정을 위한 투쟁에 집중한다는 점에서 경제 영역의 몰락이라는 지점을 공유한다."(&lt;혁명이 다가온다&gt;(길, 2006) p.152-153)</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p.s </p>
<p align="justify">추신으로&nbsp;글의 역자 Alberto Toscano에 관한 여담 한 가지. 이탈리아 출신으로 현재 영국 Goldsmith College 사회학과에 있는&nbsp;이&nbsp;이론가의 글을 몇 년전부터 종종 접하게 되는데, 아마도&nbsp;그가 워낙 다양한 분야와 사상가들을 건드리면서&nbsp;활동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재밌는 건 Goldsmith College의 교수 소개란에서는 그의 관심분야를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Social theory and philosophy; contemporary French thought (Deleuze and Badiou); political subjectivity; the politics and sociology of religion (fanaticism, messianism, political theology); Marxism, communism, Italian workerism (<em>operaismo</em>) and autonomism;&nbsp; cognitive capitalism, immaterial labour and theories of &lsquo;real abstraction&rsquo; in capitalism; imperialism and empire; economic sociology; biopolitics (in Agamben, Foucault, Negri); theories of collective and technological individuation (Simondon); aesthetics. </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개중에 주전공(?)을 뽑자면, 바디우와 자율주의 정도가 되겠지만, 아무튼 이쯤되면 오늘날 좌파 이론의 최신 부분은 전부 다 다루겠다는 말에 다름아니다.-.-;&nbsp;부디 Toscano 형님의 건투를 빈다.</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아래는가끔&nbsp;찾아가는 그의 블로그. </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a href="http://conjunctural.blogspot.com/">http://conjunctural.blogspot.com/</a></p>
<p align="justify">&nbsp;</p>
]]>
			</description>
			<author>캐즘</author>
			<category>담론의 질서</category>
			<category>문화대혁명</category>
			<category>바디우</category>
			<category>레닌</category>
			<category>Alberto Toscano</category>
			
			
			<pubDate>Wed, 12 Mar 2008 01:36:00 +0900</pubDate>
		</item>
		<item>
			<guid>http://blog.jinbo.net/chasm/?pid=86</guid>
			<title>바울과 레닌 그리고 제3항의 사유</title>
			<link>http://blog.jinbo.net/chasm/?pid=86</link>
			<description>
<![CDATA[
<!--FCKeditor--><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img id="my_post_img3359108" style="CURSOR: hand" onclick="viewPostImage('/files2/202/chasm/images/200802/270802221.jpg')" height="265" alt="" width="180" onload="setTimeout('fixImage(3359108)',300)" src="/files2/202/chasm/images/200802/270802221.jpg" />&nbsp;&nbsp;&nbsp;&nbsp;&nbsp; <img id="my_post_img9871689" style="CURSOR: hand" onclick="viewPostImage('/files2/202/chasm/images/200802/270803045.jpg')" height="263" alt="" width="180" onload="setTimeout('fixImage(9871689)',300)" src="/files2/202/chasm/images/200802/270803045.jpg" /></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올해는 연초부터&nbsp;굵직굵직한 책들이 동시에 쏟아져 나오고 있다. 소문만 무성하던 알랭 바디우의 &lt;사도 바울&gt;이 출판됐고, 아감벤의 &lt;호모 사케르&gt;가 서점에 깔렸다. 랑시에르의 책도 속속 번역되고 있고, 얼마 전에는 네그리와 하트의 &lt;다중&gt;도 번역됐다. 덕분에 진작에 읽으려고 뽑아둔 몇몇 전공 서적들과 함께,&nbsp;봐야 할&nbsp;책들을 책상에 가득 쌓아놓고&nbsp;지내고 있는데,&nbsp;마치 오랫동안 미뤄왔던 숙제를 해나가듯이&nbsp;꾸역꾸역 한 두 권씩 읽어나가고 있다.(기회가 된다면, 대부분의 책들에 서평을 남기고 싶지만, 아마도 읽어야될 책이 많아질수록 포스팅은 줄어들었던 지금까지의 전례를 생각해보면 그건 좀 힘들지 않을까 싶다. 자주 방문해주시는 분들께 방만한 블로그 운영에 대한 양해를..:-))</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그 중에서 이번 주에 뒤적거린 책은 바디우의 바울론인 &lt;사도 바울&gt;(현성환 역, 새물결, 2008)과 지젝의 레닌론인 &lt;혁명이 다가온다&gt;(이서원 역, 길, 2006)다. 사실 지젝의 책은 예전에&nbsp;사두고 읽지 않고 있다가, 이번에 바디우의 책을 산 김에 같이 보고 있다. 지젝&nbsp;스스로가 자신의&nbsp;레닌론이 바디우의 바울론과 비교될 수 있음을&nbsp;공공연히 밝혀온 바 있기 때문에, 이 둘을 같이 읽는 건 그리&nbsp;낯선 시도는 아니고, 사실 읽어보면 논의가 서로 중첩되고 분기하면서&nbsp;상당히 흥미롭게 읽힌다. 혹시&nbsp;앞으로 바디우의&nbsp;&lt;사도 바울&gt;을 보려는 분이 있다면, 지젝의 &lt;혁명이 다가온다&gt;를 옆에 두고 번갈아 읽어보기를 권하고 싶다.&nbsp;(물론 바디우의 &lt;사도 바울&gt;을 지젝의&nbsp;크리스트교에 대한&nbsp;저작들,&nbsp;예컨대 &lt;믿음에 대하여&gt; 등과 같이 읽는 것도 흥미로울 것이다.)&nbsp;</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이 두 책에서&nbsp;바디우와 지젝이 각각 바울과 레닌을 새로운 정치적 주체의 모델로 제시하는&nbsp;문제의식은 거의 유사하다. (사실 개인적으로 레닌에 대한 지젝의 애착이야 그렇다고 치고, 사도 바울에 대한 바디우의 애착은 놀랍다.(니체의 바울에 대한 저주를 알고 있는 이라면 더더욱. 물론 어떤 이들에게는 지금 레닌을 들먹인다는 게&nbsp;더 놀랍겠지만..))&nbsp;대체&nbsp;이들이 바울과 레닌이라는 半-유령을 오늘날 다시 소환해내려는 이유는 무엇일까?</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lt;사도 바울&gt;의 첫머리에서 바디우가 요약하고 있는&nbsp;오늘날의 정치적 배치는,&nbsp;바울(혹은 레닌) 읽기가 필요한 이유에 대해 명쾌히 설명해준다. </p>
<p align="justify">&nbsp;&nbsp;</p>
<p align="justify">&ldquo;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세계가 이러한 상태로 영속될 것이라고 주장하고 싶은 사람들이 주장하는 만큼 그렇게 복잡하지 않다. 심지어 크게 보자면 아주 단순하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에선 마르크스의 놀라운 예언, 즉 세계는 마침내 시장으로 다시 말해 세계=시장으로 짜여질 것이라는 예언을 완성하기로다 하듯 자본의 자동운동들이 지속적으로 확장되고 있다&hellip;. 다른 한편 폐쇄적 정체성들로의 파편화 과정이 존재하고 이러한 파편화 과정에 동반된 문화주의적이고 상대주의적인 이데올로기가 있다. 그리고 이 두 과정은 철저하게 뒤얽혀 있다. 왜냐하면 각각의 정체성 확인(정체성의 창조나 조잡한 조합)은 시장에 의한 투자를 위한 소재가 되는 하나의 형상을 창출하기 때문이다. 상업적 투자와 관련된 한 공동체 그리고 그것의 영토 또는 영토들보다 화폐적 동질성의 새로운 형상들의 창안에 더 매력적이며, 그것보다 더 적절한 것도 없을 것이다.&rdquo;(24-26)</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요컨대 바디우(그리고 지젝)이&nbsp;포착하고 있는 오늘날의 정치적 지형은&nbsp;이렇다. 한편으로는 자본주의의 상품형태를 통해 추동되는&nbsp;추상적인 보편성의 확장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차이의 정치와 다문화주의적 관용을 외치는&nbsp;담론들이 존재한다.&nbsp;그리고 이 둘은 (표면적인 대립 구도와는 달리) &ldquo;서로를 지탱해주는 거울 관계 속에 있다.&rdquo;(30) 오늘날 차이를 말하는 포스트모던 정치들은&nbsp;차이의 게임을 아래에서부터 지탱하고 있는 자본주의의&nbsp;전일적 지배에&nbsp;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nbsp;역으로 추상화시키는 자본주의의&nbsp;동력은 이러한 차이의 게임을 자양분 삼아&nbsp;자신의 영역을 확대해나가고 있다.</p>
<p align="justify">(이 둘의 공모관계는&nbsp;다음과 같은&nbsp;방식으로 작동하기도 한다.&nbsp;오늘날&nbsp;국지적 실천들에 반대하면서 보편적 진리와 총체적 진실의 중요성을&nbsp;강조하는 이들에게는 곧장 "전체주의" 혹은 "근본주의"의 함의가 덧씌워진다.&nbsp;상대주의적-자유주의적 좌파들은&nbsp;총체성과 보편성은 결코 이룰 수 없는 꿈이며,&nbsp;오늘날 가능한 유일한 전략은 각종 국지적&nbsp;영역에서의&nbsp;저항 뿐이라고 강조한다.&nbsp;그런데 바디우와 지젝이 보기에 이러한 주장의 숨겨진 뒷면은,&nbsp;자본주의적 상품&nbsp;형태에 기반한 추상적 보편성만이 오늘날 가능한 유일한 보편성이며, 세계 자본주의라는 체제만이 진정한 총체적 현실이라는 주장에 대한 암묵적 승인이다.&nbsp;이번에 &lt;사도 바울&gt;과&nbsp;함께 번역된 지젝의&nbsp;&lt;전체주의가 어쨌다구?&gt;는 이러한 공모관계에 대한 좀 더 정치한 분석을 담고 있다.)&nbsp;&nbsp;</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보편과 특수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이러한&nbsp;대립적 공모의&nbsp;지형은 추상적 보편성과 상대주의적 특수성 간의 대립적 공모라고 말할 수 있을텐데, 바디우와 지젝이 각각 바울과 레닌을 소환하는 지점은 바로 이러한 구도의 한복판이다. 바디우와 지젝에게 공히, 바울과&nbsp;레닌은&nbsp;이러한 상황 속에서 추상적 보편성과 상대주의적 특수성을 넘어서는&nbsp;새로운 보편성의 정초를 위해 투쟁했던 투사였다.&nbsp;바울이 특수한 정체성의 예외에 기반한 유대교 담론과 내재적 총체성에 기반한 그리스적 담론을&nbsp;횡단하여(이러한 차이에 대해 무심하게 "이 둘은 같다"라고 선언하면서) 오직 그리스도의 부활이라는 사건에 대한 충실성을 통해 검증되는&nbsp;새로운 보편적 담론을 추구했다면, 레닌의 경우에는 제국주의와 애국적 사민주의의&nbsp;대립구도 속에서, 계급적 당파성에 기반한 "혁명적 패배주의"를 진리로 주장함으로써 민족을 가로지르는 새로운 보편성의 영역을 열었던 것이다.</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이러한 점에서 보자면 결국&nbsp;바디우와 지젝(그리고 바울과 레닌)을 함께 묶어주고 있는 것은, (둘 모두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발리바르가 맑스의 사상을 평하며 이름붙인 일종의 제3항의 사유이다.&nbsp;오래 전에 읽어 이제는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발리바르는 "조우커 맑스 혹은 동봉된 제&nbsp;3항"이란&nbsp;논문에서 맑스의 사상을 포커판에서의 조커에 비유한다. 발리바르에 따르면, 게임의 구성요소임과 동시에 일종의 예외적 존재로서 조우커 맑스는, "노동의 정치"라는 개념을 통해&nbsp;"초월적 국가와 내재적 시민사회"라는 부르주아적 대립관계 속에 은폐된&nbsp;정치의 장을&nbsp;가시화하고자&nbsp;부단히 노력한다. 이&nbsp;노동의 정치는 "부르주아 체제라는 독수리의 두 머리"인 국가와 시민사회의 갈등의 장을 구성하고 결정짓는&nbsp;요소이면서,&nbsp;한편으로는 이 둘을 근본적으로 횡단하면서&nbsp;이 두&nbsp;동일성 간의 대립의 외부를 지칭하는 말그대로 제3항적인 요소이다. &nbsp;&nbsp;</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여담이지만, 최근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는 가라타니 고진의 "어소시에이션" 역시 이러한 제3항의 요소를 좀 더 구체화한 것에 다름 아니다.&nbsp;물론 가라타니에게는 초월적인 국가와 내재적인 자본 간의 운동을 연결시켜주는 매개항으로서 '네이션'이 존재하고,&nbsp;따라서 어소시에이션으로서의 x는 "국가=네이션=자본"에&nbsp;대립하는 제4항으로 기입된다.&nbsp;하지만 기존의 요소들을 결정지으면서도 이것을 횡단하여 외부로 향하는 어떤 요소가 존재한다는 기본논리는, 제3항의 사유와 형식적으로 동일하다.&nbsp;가라타니는&nbsp;&nbsp;어소시에이션의 예로&nbsp;보편종교를 꼽는데, 이는 크리스트교, 불교, 이슬람교 같은 보편종교들이 공통적으로&nbsp;시장이라는 추상적 보편성-공동체라는 상대적 특수성과 이중적으로 대립하면서 등장한 종교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는 어소시에이션에 대한 가라타니의 논지는, 그리스 사상과 유대교를 극복하려 했던 바울에 대한 바디우의 논지와 상당부분 겹쳐진다.)</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물론&nbsp;바디우와 지젝이 공유하는 이러한&nbsp;제3항의 사유는, 이 둘이&nbsp;공통적으로&nbsp;라캉의 이론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nbsp;아니, 사실 바디우와 지젝의 주장은 (이런 표현이 가능하다면) 상징계와 상상계 간의 대립적 공모관계를 넘어서 "실재"의 강조로 나아갔던&nbsp;후기-라캉의 테제들을 오늘날의 정치적 지형에서 확대-반복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그리고&nbsp;여기서 좀 더 나아간다면,&nbsp;바로 이 점이 후기-라캉의 사유가&nbsp;post-68&nbsp;이데올로기 비판에 가장 선두에 서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nbsp;68정신의 핵심이, 초월적인 권위적 아버지에 "아버지 없이도 우리끼리 잘할 수 있다"라는&nbsp;상상계적 내재성의 가능성을 대립시키는 것이었다면,&nbsp;이 구도에서 빠져있는 것은 언제나&nbsp;제3항, 즉 실재의 지점이다.&nbsp;오늘날 68정신에 기반해&nbsp;권위적-억압적-동질적인 아버지를 살해하는 것이 우리의 핵심 과제라는 순진한(?) 좌파의 주장이 있다면, 우리는 이러한 주장이 이미 죽은 아버지를 살아있는 듯 다룸으로써, 결국에는&nbsp;새로운 초월적 법을 재구성하려는&nbsp;우파의 시도와 대립적 공모관계에 있음을 폭로하여야 한다. 이렇게 대립적으로 공모하는 담론들 속에 좌파의&nbsp;입장은 없다.&nbsp;일반화하자면, 좌파의 입장은 언제나 제3항에서 나온다...)&nbsp;&nbsp;&nbsp;&nbsp;&nbsp;</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각설하고 다시 책에 대한 논의로 돌아오자면, 책을 읽어 나가면서 우리는&nbsp;제3항의 사유라는 공통점 외에도&nbsp;바울과 레닌&nbsp;간의 흥미로운 공통점들을 몇가지 더 발견할 수 있다. 예컨대, 둘 모두 큰 타자의&nbsp;보증을 구하려하지 않고 그것의 결여를 감추려하지 않는다는 것.(이러한 결여와 보증없음은&nbsp;그리스도교의 경우, 그리스도교의 경우 신의 아들의 죽음과 그의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라는 말로&nbsp;상징되고, 레닌의 경우에는&nbsp;일반적 정세분석을 넘어선 4월 테제의 무모함을 통해 드러난다.) 또한 둘 모두 특수한 공동체의 진리에 가까웠던 교리들을 보편화시키는데 성공했다는 것.(바울은 유대인들의 메시아로 간주되었던&nbsp;그리스도의 교리를&nbsp;"부활" 개념을 도입해 비유대인으로 확장시키는데 성공한다면, 레닌은&nbsp;발달된 자본주의 국가의 혁명이론으로 간주되었던 맑스주의 이론을 "약한 고리" 개념을 도입해 세계적 차원의 혁명이론으로 바꾸어버린다.) 그리고 이러한 공통점들은&nbsp;제3항의 사유와&nbsp;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우리는 표면적으로 존재하는&nbsp;대립구도가 큰타자에 의해 보장된&nbsp;폐쇄적인&nbsp;구도가 아닌 항상 어떤 '결여'의 지점이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을 때에만&nbsp;새로운 제3항의 인식으로 나아갈 수 있으며, 이 제3항은 기존의 대립구도를 횡단하면서 그것을 무화시키는 것이라는&nbsp;점에서 보편적일 수밖에 없다.&nbsp; </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한편, 두 책을&nbsp;동시에 보다보면&nbsp;우리는&nbsp;바디우의 바울과 지젝의 레닌 간의&nbsp;유사성 뿐아니라 둘 사이에 드러나는&nbsp;미묘한(하지만 동시에 커다란)&nbsp;차이도&nbsp;발견할 수 있다.&nbsp;(아마도&nbsp;둘 간의 유사성보다는 이러한 미묘한 차이를 발견하는 일이,&nbsp;표면적으로 유사해보이는 이 두 권의 책을 번갈아 읽는 진짜 재미일 것이다.:-)) 이 차이란 다름아닌,&nbsp;부활의 진리를 "무조건적으로" 선언하는 사도 바울과 언제나 "구체적인 정세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을 강조했던 유연한 혁명가 레닌 간의 차이다. 이 둘의 유사성이 제3항의 사유라는 "형식"적인 측면에서 발견된다면,&nbsp;그러한 진리를 실천하는 구체적인 방식에서 이 둘은 서로 다른 경로를 택한다.&nbsp; </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아마도&nbsp;이러한 바울과 레닌의&nbsp;차이는,&nbsp;바디우와 지젝간&nbsp;입장 차이의 반영일 것이다. &lt;혁명이 다가온다&gt;에서 지젝은 바디우의 사상이 "순수 정치학"이라고 비판한다. 바디우가 바울을 이야기할 때,&nbsp;그는 바울의 "사건" 혹은&nbsp;진정한 "정치"가&nbsp;&nbsp;구체적인 현실의 질서나 권력에 연루되어있지 않으며 연루되어서도 안된다고&nbsp;규정함으로써, 실상 비정치적 정치에 가까워진다는&nbsp;것이다. 바디우(그리고 바울)에게&nbsp;주체와 사건은&nbsp;항상 현실적인&nbsp;"조건"과 "규정성"을 초월한 어떤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조건"과 "규정성"을 초월한 레닌을 상상할 수 있을까?&nbsp;이에 대한 대답은, 레닌의 저작들이 때로는 너무나 "현실적 조건에 밀착되어" 쓰여지는 바람에, 때로는 불필요한 비판까지 받아왔다는 사실을 상기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그&nbsp;유명한 '외부 주입' 테제를 둘러싼 논의들...)&nbsp;지젝이 바디우의 바울에 맞서 레닌을 내세우는 것은 그저&nbsp;단순한 심통 때문만은 아닌 것이다. &nbsp;</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이러한 차이를 좀 더 밀고나가면,&nbsp;이 차이는 주체에 대한 라캉(혹은 지젝)과 바디우의 이론적 차이까지 연결될 수 있다. 라캉(혹은 지젝)에게서 주체는 현존하는 질서에 "내재하는"&nbsp;불가능의 지점(혹은 그 불가능성 자체)이라면,&nbsp;바디우에게 주체는 사건에 대한&nbsp;무차별적 충실성 속에서&nbsp;"도래하는" 것이다. 따라서 지젝에게 새로운&nbsp;정치적 주체는 현존하는 조건들을 "부정하면서" 나타날 수밖에&nbsp;없는 반면(혹은 부정성 그 자체인 반면), 바디우의 주체는&nbsp;현실적 조건을&nbsp;초월하면서 등장한다.&nbsp;(이러한&nbsp;지젝(혹은 라캉)과 바디우의 주체 개념에 대한 차이는 예전에 한 번 소개했던 &lt;트랜스토리아&gt; 6호에 실려있는 "상-파피에 운동"에 대한 서용순씨와 박대진씨의 논쟁에서 압축적으로 드러난다.)&nbsp;결국 지젝과 바디우의 주체에 대한 이러한 입장 차이가, 오늘날의 새로운 (정치적) 주체를 소환하는 과정에서 각각 바울과 레닌이라는 유사하지만 서로 다른 인물에 주목하게&nbsp;만든 이유일 것이고, 이러한&nbsp;차이가 가져오는 정치전략의&nbsp;상이함은 둘의 정세인식의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좀 더 정치하게 논의되어야할 부분일 것이다. </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여담으로 덧붙이자면,&nbsp;Nicholas Brown은 이 두 책을 동시에 언급하면서, 지젝의 레닌과 바디우의&nbsp;바울 간의 이러한 차이가 사실은 그리 크지 않다고 주장한다. 지젝이 &lt;혁명이 다가온다&gt;의&nbsp;말미에서&nbsp;오늘날 우리가 되살려야 할 것은 레닌의 이론 그 자체가 아니라 그의 문제의식이라고&nbsp;한 발 물러날 때,&nbsp;이미 지젝은 바울화된&nbsp;레닌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nbsp;Brown에 따르면, 지젝은 바디우와 함께 결국에는 레닌과 바울 중&nbsp;바울의 편이다. 따라서 브라운은 오늘날 오히려 우리에게 요구되는&nbsp;정치적 주체는, 실제로 구체적인 정치경제학적 분석을&nbsp;전개하는 '진짜' 레닌이라고 주장한다...)&nbsp;</p>
<p align="justify">&nbsp;&nbsp;</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마지막으로,&nbsp;두 책을 읽으면서 든 생각 하나. </p>
<p align="justify">2008년 초에 우리에게 도래한 일련의 정치철학 책들은 과연 어떤 효과를 낳을 수 있을까? 돌이켜보면, 1990년&nbsp;라클라우와 무페의 &lt;사회변혁과 헤게모니&gt;의 출판은, 한국사회&nbsp;좌파 이론가들과&nbsp;운동권들에게 하나의&nbsp;사건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책의 출판 이후, 장기적으로 어떤 정치적 입장도, 이 책의 주장에&nbsp;동의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이들의&nbsp;주장을&nbsp; 염두에 두지 않고서는&nbsp;제기될 수 없었다는 점에서 그렇다.&nbsp;거의 20년 가까이 지나 찾아온 바디우와 지젝의 책들이, 그들이 개입하고자 하는 정치적 현실에&nbsp;이런 효과를 낳을 수 있을까? 물론 이를 위해서는 이들이 지적하는 오늘날의 정치 구도의 한계가 지금 한국사회에서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지에&nbsp;대한 좀 더 집합적인 검토와 논의가 있어야 할 것이다.&nbsp;그리고 아마도 지금&nbsp;확실히 말할 수 있는&nbsp;것은, 이러한 검토와 논의 그리고 논쟁의 필요성 뿐이다. &nbsp;&nbsp;&nbsp;&nbsp;</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nbsp;</p>
<p align="center"><img id="my_post_img4901252" style="CURSOR: hand" onclick="viewPostImage('/files2/202/chasm/images/200802/270927417.jpg')" height="262" alt="" width="400" onload="setTimeout('fixImage(4901252)',300)" src="/files2/202/chasm/images/200802/270927417.jpg" /></p>
<p align="justify">&nbsp;</p>
]]>
			</description>
			<author>캐즘</author>
			<category>담론의 질서</category>
			<category>지젝</category>
			<category>바디우</category>
			<category>레닌</category>
			<category>사도 바울</category>
			<category>혁명이 다가온다</category>
			<category>제3항</category>
			
			
			<pubDate>Wed, 27 Feb 2008 23:25:48 +0900</pubDate>
		</item>
		<item>
			<guid>http://blog.jinbo.net/chasm/?pid=85</guid>
			<title>68에 대한 몇가지 단상</title>
			<link>http://blog.jinbo.net/chasm/?pid=85</link>
			<description>
<![CDATA[
<!--FCKeditor--><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몇몇 지인들의 블로그에 놀러갔다가 2008년 올해가 68혁명 40주년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고보니 올해 미 대선에서 68과 관련된 이야기가 계속 흘러나오는 것도 우연이 아닌 셈이다. 미주류 언론들의 관점에 따르면, 힐러리는 68세대 그 자체의 상징이고 오바마는 되돌아온 68정신의 상징이다.&nbsp; 한편, 공화당의 매케인 후보는 68년 힐러리 등이 우드스탁 축제를 즐길 때 자신은 베트남에 전쟁 포로로 잡혀 있었다는 발언으로 주가를 올리기도 했다. 한국 대선에서 "87년에 무엇을 했는가?"가 화제가 되었던 것과 비슷한 맥락인 셈이다.) </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어떤 사건을 둘러싼 평가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미묘하게 달라지는 것을 추적하는 일은, 한 사회의 이데올로기 지형 변화를 보여주는 가장 단적인 지표이기도 하다.(80년 광주에 대한 평가의 역동적인 변화 과정을 보라.) 아마 올해도 5월이 가까워지면 해외에서든 국내에서든 (이제는 좀 시들해졌다 하더라도) 68에 관한 몇몇 논의들이 제출될 것으로 보이는데, 즐겁게 기다리는 마음으로 혹은 나만의 전채요리 삼아 68에 대한 몇 가지 단상들을 적어 놓는다. </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1. </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68을 처음 접한 건, 대학교 1학년 때 세미나를 통해서였다. 그 때 읽었던 텍스트가 68에 대한 레지 드브레의 글 "프랑스 자본주의를 재탄생시킨 68년 5월"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다시 한 번 읽고 싶어져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생각보다 쉽게 구해진다. 거진 10년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a href="http://copyle.jinbo.net">카피레프트 홈페이지</a>가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이다.(카피레프트 홈페이지가 아직도 남아있다니... 빽빽한 편집에 투덜대며 &lt;읽을꺼리&gt;를 꾸역꾸역 읽어나갔던 예전의 추억들이 되살아난다.) </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1978년 68혁명 10주년을 즈음해 쓰여진, 이제는 먼지의 두께가 제법 쌓인 이 글을&nbsp;언급하는 이유는, 30년이란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이 짧은 글이 지금도 68을 둘러싸고 반복해서 제기되는 비판들을 부분적으로 선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 글은 (당시로서는 드물게) 68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담고 있어, 90년대 중후반 한국 학생사회에서 너무나 급격하게 그리고 과도하게 진행되었던 68혁명의 신화화에 피곤함을 느낀 이들을 암묵적 동조자로 끌어들이기도 했다.(68에 대해 처음 접한 글이 드브레의 신랄한 비판이라니, 68과 68세대에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은 나의 입장은 이 때부터 운명지어진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아. 가혹했던 나의 선배들..)</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드브레의 글(앞서 소개한 카피레프트 홈페이지 &lt;읽을꺼리&gt; 2호에서 구해볼 수 있다)은 지금 보아도 몇몇 탁월한 식견들을 담고 있어,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일독을 권하고 싶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을 위해 핵심 부분 몇 단락을 (번역을 조금 수정하여) 이 자리에 옮겨 놓는다.(혹은 이 글에서 드브레가 냉소적으로 말하듯이, "진중한 독서"는 68년 5월 이전에나 어울리는 낡은 문구가 되었기 때문에?)</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68년 5월은 새로운 부르주아 사회의 요람이었다. 아직 그것이 실감되지는 않겠지만, 이제 누군가는 예견의 형태를 빌어서라도 그렇다고 이야기할 때이다. 프랑스 제3공화국은 확신을 가지고, 제4공화국은 관성으로 1789년 7월 14일(프랑스 대혁명 기념일)을 그들의 건국신화로 만들었다. 성숙한 제5공화국과 그 후계자들은 5월 한 달 전체를 -컴퓨터 테크놀로지와 생산력의 발달에 어느정도 도움을 받아서- 공휴일로 선포할 수 있을 것이다. 부르주아 공화국은 바스티유 습격을 자신의 탄생으로 축하했다. 부르주아 공화국은 언젠가 자신의 재탄생을, 1968년의 &ldquo;말의 투쟁&rdquo;을 축하하게 될 것이다."(48)</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5월에 꽃핀 정체성(다를 수 있는 권리)에의 요구는 착취 체계의 기능적 요구를 통해 등장했다. 개인 존재에 대한 제약으로 보였던 것이, 전체 사회영역의 상품으로의 변환에 대한 제약으로 전환되었던 것이다. 자본은 순환하기를 열망했고, 젊은이들은 과거의 장벽들을 넘어서 소통하기를 원했다. 상상이 현실을 예지했고, 심장의 법칙이 효율성의 법칙과 일치했다....자본의 발전전략은 5월의 문화혁명을 요구했다.... 5월의 물결은 쓸모없는 장벽들을 동시에 쓸어버렸다. 전통의 낡은 무게, 무능에 대한 숭배, 관습의 위안 등등. 상점 진열장에서든 텔레비전 화면에서든 한번 둘러보라. 5월의 슬로건, 문헌, 개성과 사상은 '아주 잘 작동'하고 있다. 상품 역시 마찬가지이다. 더욱 더 좋게, 더욱 더 빠르게. 상품은 움직이는 축제, 정신없이 소용돌이치고 붙잡을 수 없는 어떤 것이다."(50-51)&nbsp; </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5월운동의 학생들은 손을 더럽히지 않았다... 수단에 대한 질문은 제기조차 되지 않았다... 5월의 목표는 '-을 하지 않는 것(not to do)'이었다. 한편 학생들의 목표는 '(더 낫게) 되는 것(to be (better))'이었으며, 노동자들의 목표는 '(더 많이) 가지는 것(to have (more))'이었다...이것이 유의미하기 위해서는 '되다(be)'와 '가지다(have)'는 공통적으로 '하다(do)'에 종속되어야 했지만, 공통적인 유일한 것은 어떤 종속도 거부하는 것이었다. 지도부에 대한, 행동의 구조에 대한, 계획에 대한 종속이라는 생각 자체가, 반권위주의 봉기에서는 배격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시도조차 하지 않아) '패배하지 않는' 정치 기획들의 상찬뿐이다."(55-56)</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br />68에 대한 드브레의 날선 비판은, 30년이 지난 오늘날 좀 더 설득력있게 다가온다. 새로운 부르주아 체제는 68을 정당성의 기반으로 활용할 것이라는 드브레의 예언이 그대로 실현된 것일까? 오늘날 68 학생운동의 구호들("상상력에 권력을"이나 "뛰어라. 낡은 세계가 그대 뒤에 있다" 류의)은, 전복적인 정치 구호보다는 자기계발서나 경영전략서에 더 어울릴 법한 문구들이 되었고, "욕망의 자유로운 발현"으로 요약되는 68 정신은(68정신에 대한 이러한 식의 요약 자체가 지배 담론의 전략임을 염두에 두더라도), 이제 "새로운 자본주의 정신"으로 전화 혹은 진화하였다. 68혁명 40주년인 올해, 신화화된 68 찬양이 아니라 68 정신과 그 유산에 대한 비판적 평가가 더 활발히 제기되길 바라는 것은, 남의 잔치에 재뿌리고 싶은 단순한 심통 때문만은 아닌 셈이다. <br />&nbsp;</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단, 드브레의 글을 읽을 때 주의할 점 한 가지. 10년이 지나 다시 읽으면서 든 생각이지만, 드브레의 68의 낭만성에 대한 공격은 단순히 개인 성향의 반영이라기보다는, 68이 일어난 지 10년 후 이제 사회 제도권 안으로 깊숙히 들어가게 되어버린 68세대의 어떤 정조(情操)를 반영하는 것으로도 읽을 수 있겠다.</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78년 당시 프랑스 좌파 중 최대분파였던 프랑스 사회당의 가장 큰 과제는 68과의 '적절한' 거리두기였다. "자주관리", "일상의 정치" 같은 68의 레토릭들을 흡수하면서 이를 어떻게 제도 정치화하는가라는 것이 이 과제의 핵심이었고, 이는 분명 68의 낭만성과 청년-운동적 성격에 대한 재평가를 요구하는 것이었으리라. 잘 알려진 프랑스 지식인계의 스캔들이지만, 남미의 게릴라 혁명 운동에 참여했던 레지 드브레는 81년 집권한 미테랑 사회당 정권의 외교정책 고문으로 취임한 후, 계속해서 제도권 정치인으로 활약하게 된다.(최근에는 무슬림 소녀들의 교내 히잡 착용을 금지를 정당화한 스타시 위원회의 핵심 구성원으로 악명(?)을 떨친 바 있다.)&nbsp; </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따라서 그의 글에서 68 당시 제도권 정당인 PCF가 보였던 행태에 대해 아무런 언급이 없는 점이나, "시는 정치가 아니다"라는 발언을 통해 68의 낭만성을 직접적으로 공격하는 부분은, (이에 동의하는 사람들조차도) 조금은 신중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 급진적 운동의 낭만적 성격에 대한 비판이, 급진 정치 전체에 대한 비판으로, 더 나아가&nbsp; 제도 정치로의 편향을 옹호하기 위한 알리바이로 활용되는 풍경은 우리에게도 그리 낯선 모습은 아니다.&nbsp;&nbsp; </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2.</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하지만 드브레의 글이 가진 가장 큰 문제점은 정작 다른 곳에서 찾을 수 있다. 그것은 (드브레에 대한 앙리 웨버의 설득력 있는 반론에서 드러나듯이) 68을 청년 세대의 낭만적인 투쟁이라고 비판하는 드브레의 입장이 사실 지배권력에서 바라보는 68에 대한 상과 그리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즉, 비록 드브레의 비판이 일정정도 핵심을 건드리고 있다하더라도, 그의 비판이 좀 더 정확하기 위해서는, 68년 5월 자체가 아니라 68년 5월의 의미를 낭만적 반-문화 운동으로 환원시키는 지배 담론들의 의도와 그것의 효과에 맞춰졌어야 할 것이다.&nbsp; 68의 수많은 얼굴은 드브레 식의 간단한 정리로 환원될 수 없는 것이다.</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위험을 무릅쓰고 68에 접근하는 다양한 관점들을 단순한 기준에 맞춰 분류해 보자면, 크게&nbsp;보아 미국과 유럽의 청년 운동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과 베트남을 비롯한 제3세계에서 벌어진 반-제국주의적 투쟁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실제 현실에서 이 두 가지 흐름은 독립적이라기보다는 정세적으로 서로 얽혀있었다고 말하는 것이 옳겠다. 미국의 68은 반-베트남전 운동이라는 배경과 흑인민족해방 운동의 자장 속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프랑스에서의 5월 역시 10여년 전 알제리 독립 전쟁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사회적 균열과 무관하지 않다. 동유럽에서의 투쟁들은 민주화 투쟁으로 볼 수도 있지만, 미국을 정점으로 하고 소련이 하위 파트너로 기능했던 냉전 제국주의 체제 전체에 대한 반발로도 해석될 수 있다.(이러한 중첩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슬로건이 이탈리아 피아트 공장 노동자들이 파업 중 외쳤다는 "베트남은 우리의 공장이다"라는 구호일 것이다.) </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개인적으로는 후자의 입장에 강조점을 둔, 즉 68 당시의 반-제국주의적 투쟁에 좀 더 초점을 맞추어 68을 해석하는 입장을 지지하는 편인데, 이런 관점에서 섰을 때 우리는 제3세계의 반제국주의 투쟁과 제1세계에서의 투쟁이 가지는 수많은 연결고리들을 명확히 할 수 있을 뿐더러, 68 이후 자본주의의 세계체제적 변화을 설명하는 실마리들도 얻을 수 있다.(아마도 이렇듯 68을 세계적 차원에서 접근하는 입장의 대표주자는, 68의 반-제국주의 투쟁과 이후의 변화를 미국 헤게모니의 위기국면으로의 이행으로 해석하는 세계체제론의 입장일 것이다. 헤게모니 이행이라는 그들의 예언(?)이 어쩌면 실현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만큼 미국 경제의 위기가 가시화되고 있는 올해, 68과 그것의 잔향에 대한 이들의 평가를 다시 한 번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이유이기도 하다.) </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게다가 이런 식의 접근은 "낭만적인 반-문화적 청년운동"이라는 68에 대한 지배적인 스펙타클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한편, 이러한 스펙타클이 생산해낸 효과인 구좌파/신좌파의 대립 구도에도 약간 다른 관점에서 접근할 수 있게 해주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구좌파/신좌파 이야기가 나왔으니 하는 얘기지만, 내가 조금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은, 90년대의 구좌파/신좌파 논쟁이 오늘날에는 너무나&nbsp;간단히 낡은 것으로 치부된다는 사실이다.(최소한 오늘날에는 아무도 이에 대해 '진지하게' 토론하지 않는다. 이를 2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한국의 운동진영을 과도하게 결정짓고 있는 NL/PD 논쟁과 비교해보라.) 누군가의 말처럼,&nbsp;제도화되고 개량화된 노동운동 구좌파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던 한국적 조건 속에서, 이 논쟁은&nbsp;결국 몇 가지 레토릭 간의 대립으로만 현상할 수 있었기 때문일까?&nbsp;&nbsp; </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하지만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면, 우리가 던져봄직한 질문은&nbsp;그러한 한국의 객관적 상황에도 불구하고,&nbsp;서구의 구좌파/신좌파의&nbsp;논쟁 구도가 90년대를 가로지르며&nbsp;포스트맑시즘 논쟁-시민사회 논쟁-신좌파 논쟁-신사회운동 논쟁 등으로 반복해서 회귀하도록 만든 동력은&nbsp;무엇일까란 질문이다. 여기서&nbsp;질문의 답에 대한&nbsp;(약간은 무책임한) 가설을 제기한다면, 90년대 내내 형태만 바뀐 채 반복적으로 회귀했던 이러한 일련의 논쟁의 이면에는, &ldquo;포스트&rdquo;, &ldquo;시민/공공성&rdquo;, "부문운동" 등의 외피 하에&nbsp;사회적 적대를 부인(disavowal)하고자 하는 욕망이&nbsp;놓여있었던 것이&nbsp;아니었을까라고 말하고 싶다. 혹시 이러한 적없이 벌어진 논쟁 구도의 '진짜' 목표는, 80년대를 지배했던 적대로 분열된 사회상을, 더욱 파편화시키는 방향을 통해서 혹은 완충지대를 설정하는 방식을 통해서 해소하려는 움직임은 아니었을까?</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그리고 아마도 이러한 점이&nbsp;&lsquo;단일한 모순'&nbsp;&nbsp;대 '파편화된 갈등들&rsquo;의 대립 구도 속에서 &ldquo;복수의 보편적 적대의 승인&rdquo;이라는 가장 그럴듯해 보이는(혹은 가장 절충적인(?)) 대안을 제시했던 발리바르의 논의가 비교적 소수의 지지 만을&nbsp;받는 데 그쳤던 이유가 아닐까? 90년대의 논쟁들에&nbsp;걸려있었던 문제는&nbsp;(그들이 표면적으로 내걸었던) 사회적 적대의 재구성이 아니라 적대 그 자체로부터의 탈주였던 것이다.(그래서 이러한 구도는 나로 하여금&nbsp;"90년대 한국 사회의 논쟁에 관해서라면"&nbsp;항상 (마치 유령과도 같은) 정통적-민중사회적-구좌파적-노동운동중심적 좌파의 입장에&nbsp;동일시하게 만든다.))</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여담이지만,&nbsp;오늘날 이러한 적대의 부인이&nbsp;지배적인 사회적 인식이 되었음을&nbsp;보여주는&nbsp;가장 적나라한 예는, 80년대 NL/PD 논쟁의 2000년대적 재현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nbsp;오늘날 NL의 이념은 반제국주의 투쟁에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nbsp;&ldquo;한민족 공동체의 번영 추구"를 위해&nbsp;적용되고, PD의 논리는 국가독점자본주의 비판에서&nbsp;"민생정치 이데올로기"로 전화되었다.&nbsp;결국 이러한 변화가 보여주는 것은, 적을 식별하기 위해 개발된&nbsp;논리가 적대 자체를 부인하는 새로운&nbsp;조건 속에 재기입되었을 때 발생하는 희극성이 아닐까?(그리고 바로 이 점이 오늘날 NL/PD의 구도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lsquo;진짜&rsquo; 이유일 것이다.)&nbsp;<br />&nbsp;<br />책임질 수 없는 영역까지 너무 나가버린 논의를 정리하고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자면, 그런 의미에서 나에게는 최근 비록 정신분석이라는 긴 우회로를 통해서이긴 하지만, '(사회적) 적대' 혹은 계급투쟁이라는 문제설정이&nbsp;조금씩 복귀하고 있는 것은 환영할만한 일로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뒤늦은 복귀는 아마도&nbsp;이제는 모방의 대상에서 극복의 대상이 되어버린 68-이데올로기의 처지 그리고&nbsp;87년 이후 지속된 "장기 90년대"를 지나 이제 새로운 적대적 정치의 모델을 개발해야할 우리의 필요성과&nbsp;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3.&nbsp;&nbsp; </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최근 다른 글 때문에 도서관에서 빌린 "Hatred of Capitalism: A Semitext(e) Reader"에 (사실상 68의 적자라 할 수 있는) 들뢰즈와 가따리의 흥미로운 제목의 글이 있어서 잠 안오는 야심한 밤에 훌쩍 번역해 놓는다. 그다지 중요한 글이라곤 할 수 없지만, 들뢰즈의 "사건" 개념을 언급할 때 가끔 제사의 형태로 언급되는 낯익은 글이기는 하다.(그리고 68이후 약 20년이 흘러 쓰여진 이 글에서 묘사되는 젊은 세대의 모습은, 오늘날 우리 사회의 젊은 세대의 모습과 묘하게 겹쳐진다.) </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개인적으로 68 세대와 그들의 문제의식이 이제는&nbsp;계승의 대상이라기보다는 극복의 대상으로 보고 있지만, 사실 이러한 비판적 입장의 한 켠에는 이들에 대한 일종의 부러움이 자리잡고 있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정말이지, 다시 회귀하여 반복되는 자신들만의 정치적 사건을 경험한 혹은 만들어낸 이들 세대에 비하면, 충실해야 할 어떤 '집합적인' 정치적 사건도 경험하지 못한 혹은 만들어내지 못한 지금 우리 세대는 얼마나 불행한가?&nbsp; </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nbsp;</p>
<p align="center"><font color="#ff0000" size="3"><strong>68년 5월은 일어나지 않았다/장소를 갖지 않았다</strong></font></p>
<p align="center"><font color="#ff0000" size="3"><strong>(May 68 did not take place)</strong>&nbsp; </font></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nbsp;<br /></p>
<p align="right">들뢰즈&amp;가따리<br />&nbsp;</p>
<p align="justify"><br />프랑스 혁명이나 빠리 꼬뮌, 러시아 혁명 같은 역사적 현상들에는, 언제나 사회적 결정론이나 인과관계의 연쇄로 환원될 수 없는 어떤 부분이 존재한다. 사실을 통해 인과관계를 재구성하는 역사학자들은 이러한 점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사건은 그 자체로 인과관계의 분열이며, 인과관계의 파괴이다. 그것은 하나의 분기이며, 규칙 없는 별종이고, 가능한 것(the possible)의 새로운 영역을 열어 젖히는 불안정한 조건이다. 물리학자 일리야 프리고진(Ilya Prigogine)은 차이가 소멸하기보다는 계속해서 유지되면서, 독립적 현상들이 상호-공명하는 상태에 대해 말한바 있다. 사건은 우회될 수도, 억압될 수도, 포섭될 수도, 배반당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속에는 여전히 이 사건을 낡은 것으로 치부할 수 없는 어떤 것이 살아남기 마련이다. 오직 배신자만이 사건을 지나간 일이라고 말할 수 있다. 심지어 고대에 일어난 것이라도, 사건은 결코 지나간 일일 수 없다. 그것은 가능한 것으로의 열림이다. 사건은 개인의 내부만큼이나 사회 속으로 깊숙이 침투해 들어간다. <br />&nbsp;<br />우리가 말하고 있는 역사적 현상 68은, 사실 결정론이나 인과관계를 수반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이 그것의 본질적 특성은 아니다. 68년 5월은 순수한 사건의 질서였으며, 모든 일반적인 혹은 규범적인 인과 관계로부터 자유로웠다. 그것의 역사는 &ldquo;확대된 불안정성과 동요&rdquo;의 역사이다. 68년에는 많은 선동과 구호, 바보 같은 행위들과 환상이 존재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건 이러한 것들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사회가 갑자기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것이 되었으며, 모두가 변화의 가능성을 본 마치 환영과도 같은 현상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형태의 집합적인 현상이었다. &ldquo;내게 가능한 것을 줘. 그렇지 않으면 질식해 버리겠어&rdquo; 가능한 것은 미리-존재하지 않고, 사건에 의해 창조된다. 그것은 삶의 문제이다. 사건은 새로운 존재를 창조하고, 새로운 주체성을 만들어낸다.(신체, 시간, 섹슈얼리티, 주변 환경, 문화, 일과의 새로운 관계 말이다.)<br />&nbsp;<br />사회적 변화가 나타났을 때, 경제적-정치적 인과관계에 따라 그 결과와 효과를 설명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사회는 새로운 주체성에 어울리는 집단적 행위자를 형성해내야만 하며, 그럴 때에만 스스로의 변형을 욕망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재배치(redeployment)이다. 미국의 뉴딜 정책과 일본의 경기부흥(boom)은, 이러한 주체적 재배치의 상이한 두 가지 예를 보여준다. 그것이 가진 모든 모호함과 심지어 반동적인 구조에도 불구하고, 이 재배치는 새로운 사회적 국가가 사건의 요구에 부응할 수 있다고 생각하도록 만드는 충분한 주도권과 생산력을 보여주었다. </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하지만 68년 이후 프랑스에서 정부는 사람들이 계속 &ldquo;앞으로 사태가 진정될 것&rdquo;이라고 생각하면서 사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사실 사태는 진정되었지만, 파국적 상태로 진정되었을 뿐이다. 68년 5월은 위기의 결과도, 위기에 대한 반응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정반대의 것이었다. 그것은 프랑스의 현재적 위기이며, 68년 5월을 동화시키지 못하는 프랑스 사회의 무능력으로부터 파생된 하나의 파국이다. 프랑스 사회는, 68이 요구한 것, 즉 집합적 수준에서 주체적 재배치를 창조해내는 것에 근본적으로 무능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학교에서도, 직장에서도, 프랑스 사회는 결코 인민의 요구를 따라잡지 못했다. 새로운 모든 것은 스쳐가는 그림으로 환원되거나 주변화되어 버렸다. 오늘날 우리는 롱위(Longwy)의 주민들이 철강 산업에 매달려있고, 낙농업 농부들이 그들의 소에 집착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게 이것밖에 더 있겠는가? 새로운 존재와 새로운 주체성에 의한 집합적 발화는, 68에 대한 우파뿐 아니라 좌파 쪽의 반동으로 인해 점차 붕괴되어 왔다. 가능한 것이 나타날 때마다, 그것은 곧 닫혀 버렸다.<br />&nbsp;<br />비록 그들은 스스로를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지만, 오늘날 68의 아이들은 어디에서라도 마주칠 수 있다. 각각의 국가는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68의 아이들을 생산해냈다. 그들의 상황은 그리 좋지 않다. 이들은 젊은 간부가 아니다. 이들은 이상하게도 무관심하며, 이런 점에서 우파적 감성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이제 더 이상 이것 저것을 요구하거나 (자신들이 모든 걸 할 수 있다는) 나르시즘에 빠지지는 않는다. 그들은 오늘날 어떤 것도 그들의 잠재적 에너지나, 주체성에 상응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모든 현재의 개혁들이 그들에게 적대적이라는 사실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가능한 한 자신의 자신의 일에만 신경쓰도록 강요받는다. 그들은 자신의 일을 그저 열어놓은 채, 가능성(possibility)을 붙잡고자 한다. </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프랜시스 포드 코폴라는 &lt;러스티 제임스(Rusty James-한국에는 &lt;럼블 피쉬&gt;라는 제목으로 소개된 바 있다-역주)&gt;란 영화에서 이들의 초상화를 그려낸 바 있다. 배우 미키 루크는 말한다. &ldquo;그 인물은 벼랑 끝에 몰려있어요. 그는 지옥의 천사(Hell&rsquo;s Angel-영화에 등장하는 폭주족 갱단:역주)같은 유형은 아니죠. 그는 머리도 좋고, 센스도 있습니다. 하지만 대학 졸업장이 없어요. 이 점이 그를 미치게 만드는 거죠. 그는 자신을 고용하려는 누구보다도 자신이 더 똑똑하기 때문에, 자신에게 맞는 직장이 없을 거란 걸 잘 알고 있습니다.&rdquo;(리베라시옹 1984년 2월 15일자)<br />&nbsp;<br />이것은 다른 세계에서도 사실이다. 우리가 실업자와 은퇴자 혹은 학생들을 위해 제도화한 것은, &ldquo;포기의 상황(situation of abandonment)&rdquo;에 의해 통제되고 있다. 이들에게는, 장애인이 전범이 된다. 오늘날 집합적으로 발생하는 유일한 주체성의 재배치는 고삐 풀린 미국식 자본주의이거나 이란 같은 이슬람 근본주의나, 브라질에서 발생한 흑인 종교 같은 것들뿐이다. 이는 새로운 교조주의의 뒤집혀진 형상이다.(유럽에서 등장한 신-교황주의 역시 덧붙여야 할 것이다.) 유럽은 어떤 제안도 가지고 있지 않으며, 프랑스는 더 이상 미국화되고 과다-무장 상태인(그런데 이러한 과다-무장은 필연적으로 위로부터의 경제적 재배치를 부과할 수밖에 없다) 유럽에서의 리더쉽을 주장할 야망도 가지고 있지 않은 것 같다. </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가능한 것의 영역은 다른 곳에 존재한다. 동-서 축을 보자면, 가능한 것의 영역은 평화운동 속에서 찾을 수 있다. 그것이 군비확장을 저지하려 할 뿐만 아니라, 미국과 소련 간의 공모 관계를 끊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면 말이다. 또한 남-북 축을 보자면, 가능한 것의 영역은 새로운 국제주의에 존재한다. 그것이 더 이상 제3세계의 연합에만 기대는 것이 아니라, 부유한 국가 내부에서의 제3세계화와도 연계된다면 말이다.(폴 비릴리오가 지적했듯이, 메트로폴리스의 발달과 도심의 몰락은, 유럽 내 제3세계의 등장을 가져왔다.) 오직 창조적인 해결책들만이 가능하다. 이들은 현재의 위기에 대한 해결책으로 작동하고, 일반화된 68이라는 증폭된 분기와 혼동의 자리를 넘겨받을 수 있는 창조적인 재배치들이다.[끝]<br /></p>
]]>
			</description>
			<author>캐즘</author>
			<category>The Ticklish Subject</category>
			<category>0</category>
			<category>적대의 부인</category>
			<category>68은 일어나지 않았다</category>
			<category>드브레</category>
			
			
			<pubDate>Wed, 30 Jan 2008 03:47:41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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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연말을 함께보낸 것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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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DATA[
<!--FCKeditor--><p align="justify">아무래도 연말이 되면 나도 모르게 분위기에 취해&nbsp;일들이 손에 안잡히기 마련이다. 게다가 올해처럼&nbsp;지독한 감기와 마약인지 감기약인지 알 수 없는 이상한 약물 덕분에 24시간 내내 몽롱한 정신 상태를 유지하다보면,&nbsp;골치아픈 책과 꽉찬 망년회 약속은&nbsp;잠시&nbsp;접고 그동안&nbsp;벼르고 있었던 영화와 소설이나 보면서 조용히 보내는 게 아마도 최고의 선택인 듯 싶다.&nbsp;2007년의 364번째&nbsp;날을 같이 보낸 작품들을 적어 놓는다. &nbs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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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align="justify"><img id="my_post_img8724768" style="CURSOR: hand" onclick="viewPostImage('/files2/202/chasm/images/200712/300946096.jpg')" height="287" alt="" width="200" onload="setTimeout('fixImage(8724768)',300)" src="/files2/202/chasm/images/200712/300946096.jpg" />&nbsp;</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strong>&lt;아이, 로봇&gt;</strong></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감기 기운에&nbsp;느즈막히 일어나 켠 TV에서는 또(!) &lt;아이, 로봇&gt;이 방영되고 있었다.&nbsp; </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케이블TV&nbsp;영화 채널의 장점이 있다면, 예전에 보고 싶었지만 미처 보지 못했던 영화를 무심코 다시 보게 해준다는 점과,&nbsp;지겨울 정도의 반복 상영 덕분에&nbsp;영화를 몇 번에 나눠서 볼 수 있다는 점이다.&nbsp;영화를 처음부터 죽 보는게 아니라,&nbsp;결론부터 보고 나중에&nbsp;시작이나 중간을&nbsp;보고나서 모자이크처럼 영화를 재구성해보는&nbsp;재미도 생각보다 쏠쏠하다. </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그래서 오늘에서야 난&nbsp;&lt;아이, 로봇&gt;의 결론을 볼 수 있었다.&nbsp;세 번째 시청만에&nbsp;보는 결론이었는데,&nbsp;결론을 보고 나니 이 영화, 놀랍게도 꽤나 흥미롭고 진지한&nbsp;논의를 담고&nbsp;있는 영화였다!&nbsp;영화에서 벌어지는 갈등구조에서 논쟁의 핵심은&nbsp;로봇 3원칙의 논리적 귀결을 둘러싼 것이다. 아이작 아시모프의 원작소설에 등장하는 로봇의&nbsp;3원칙이야, 이제 굳이&nbsp;SF팬이 아니더라도&nbsp;어디선가 한번쯤은 들어본 내용일 것이다.&nbsp;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nbsp;</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법칙 1. 로봇은 인간을 다치게 해선 안되며, 행동하지 않음으로써 인간이 다치도록 방관해서도 안된다.법칙 2. 법칙 1에 위배되지 않는 한, 로봇은 인간의 명령에 복종해야만 한다&nbsp;</p>
<p align="justify">법칙 3. 법칙 1, 2에 위배되지 않는 한 로봇은 스스로를 보호해야만 한다.</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영화에서 로봇의 반란을 주도해 인간을 살육하는,&nbsp;비키의 말대로 3원칙의 논리적 전개는 필연적으로 혁명으로 귀결된다. 이 논리를 충실히 따른다면,&nbsp;로봇이 인류라는 종의 보호를 위해 개별적 인간의 일부를 살해하는 행위는 정당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nbsp;흥미롭게도 이 논리는 푸코가 지적했던 근대 서구의 휴머니즘과 인종주의가 결합하는 논리적 과정과 정확히 일치한다.&nbsp;인간의 삶을 대상으로 하는 근대적 생권력(biopower)이 휴머니즘의 외피를 쓰고 등장했을 때,&nbsp;종(種)으로서의 human이 문제가 된다면,&nbsp;인간 종의 안녕한 삶에 방해가 되는&nbsp;몇몇 요소의 제거는 불가피하게 정당화된다.&nbsp;이런 식으로 보자면, 근대에 벌어진&nbsp;인간에 대한 살육과 인종주의적 폭력들은 반-휴머니즘적 행위가 아니라, 근대 휴머니즘 논리의 이면 혹은 그 논리의 충실한 전개 결과일 것이다.&nbsp;따라서 영화 속에서 비인간적인 이성의 상징으로 묘사되는 비키는&nbsp;오히려&nbsp;가장 충실한&nbsp;휴머니스트이다. &nbsp;</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한편&nbsp;이에 반해&nbsp;인간의 편에서 비키의 시도를 막으려는 써니의&nbsp;논리는 무력하기 그지없다. 자신의 논리가 완벽하다는 비키의 주장에, 써니는 "그건 너무 잔인해"라고&nbsp;반박할 뿐이다.(써니의 동료인 스프너 형사는 "그건 인간 개체의 특이성을 무시한 처사"라고 덧붙인다.)&nbsp;여기서 오늘날 생권력의 논리에 반대하는&nbsp;논리로 활용되는 개체의 특이성과 자유, 인권에 대한 담론을 떠올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영화에서도 암시되듯이 이러한 비판은 궁극적으로 무력할 수밖에 없는데,&nbsp;결국 이러한 비판이&nbsp;생권력과 휴머니즘이라는&nbsp;공통의 토대를 공유한 상태에서&nbsp;전개되고 있기 때문이다.&nbsp;</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그래서.. 좀 과장해 말하자면, 이 영화는 오늘날의 휴머니즘 이데올로기 지형에 대한 한 편의 은유이다. 빌딩의 지하에는 비키가 있고, 빌딩의&nbsp;꼭대기 층에는 써니가 뛰어다니는 영화의&nbsp;묘사 그대로,&nbsp;오늘날 휴머니즘 논리의 심층에선 생권력의 작동이 있고, 표층에선 인권의 논리가&nbsp;존재한다. 표층의 논리는 특이성과 자유를 앞세워 심층의 논리를 비판하지만, 그러한 가치들을 위해서라도 필요한 건 생권력의 확장이라는 역비판에 결정적으로 무력하거나&nbsp;최악의 경우&nbsp;궁극적으로 심층의 논리를 정당화한다.&nbsp;그런 면에서 표면적으로 영화는 감성과 특이성의 중요성을 설파하면서 휴머니즘의 승리를&nbsp;보여주는 듯 하지만,&nbsp;패배한&nbsp;비키의 논리가&nbsp;더 휴머니즘적 사고에 충실한 것처럼&nbsp;보이는 것은, 이 영화가 말하려는 것이&nbsp;실은 다른&nbsp;데 있음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p>
<p align="justify">&nbs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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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align="justify">&nbsp;<img id="my_post_img7124872" style="CURSOR: hand" onclick="viewPostImage('/files2/202/chasm/images/200712/310138173.jpg')" height="286" alt="" width="200" onload="setTimeout('fixImage(7124872)',300)" src="/files2/202/chasm/images/200712/310138173.jpg" /></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strong>&lt;은하해방전선&gt;</strong></p>
<p align="justify"><strong></strong></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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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align="justify">TV를 끄고&nbsp; 갑자기 찾아온 강추위에&nbsp;잔뜩 웅크린 채 집에서&nbsp;그리 멀지 않은&nbsp;인디영화 전문관을 찾는다.&nbsp;</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올 하반기에 즈음하여 인디스페이스가&nbsp;개관하고 이런저런 인디영화에 대한 언론의 관심이 증가하면서 인디영화계의 제작이나 유통이&nbsp;좀 더 안정화될 수 있는 실마리를 마련한 것은&nbsp;사실이지만,&nbsp;사실 이러한&nbsp;변화를 바라보는 마음이&nbsp;완전히 편치만은 않다. 몇가지 도입과정에서의 논란에도 불구하고&nbsp;결국엔 인디문화공간을 표방하고&nbsp;우뚝&nbsp;서 있는&nbsp;홍대의 KT&amp;G 상상마당이 상징하듯, 자본의 입장에서 보자면 오늘날&nbsp;'인디'란 타이틀은 좀 더 '시크'한&nbsp;젊은이들에게 먹히는 좀 더 '쿨'한 브랜드에 다름아니다.&nbsp;그리고 자본에의 독립을 넘어&nbsp;자본 비판까지 꿈꾸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변화와는 무관하게 현실은 여전히 어렵다.&nbsp;아니 이러한 변화 때문에&nbsp;더 어려워지고 있다는 게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nbsp;&nbsp;&nbsp;</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아무튼&nbsp;모평론가는 이 영화가 "88만원 세대가 소통하는 법"을 보여주고 있다고 평했던데, 내가 보기에 이 영화는&nbsp;"88만원 세대의 소통 불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nbsp;영화가&nbsp;천착하고 있는&nbsp;현실은, 주체사상의 추종자가 재테크의 달인이 되고 정작 중요한 이야기들은 도넛처럼 핵심이 빠져버린 소위 '큰 이야기'가 붕괴한 시대에,&nbsp;겉으로는 '소통'을 이야기하면서&nbsp;실제로는&nbsp;'말할 수 있는 권력'만을&nbsp;추구하는 나르시스트들의 아귀다툼장이 되어버린 한국사회이다. 영화는 약간은 혼란스럽지만 비교적 정확하게&nbsp;이러한 현실을 조망한다.</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영화 속에서 (아마도 의도치 않게) 오늘날의 소통만능주의-소통물신주의의 이면에 놓인 환상과 현실을 보여주는&nbsp;장면이 두 개 있다.&nbsp;우선 자신의 작품을 상영하는 영화제에서 갑작스레 은하와의 소통에 성공하는 영재의 꿈 장면.&nbsp;영재의 &nbsp;이 꿈에서&nbsp;은하와의 소통의 성공은, 갑작스레 자신의 영화에 대한 다른 이들의 찬사로 이어진다. 이 장면는&nbsp;오늘날의 소통에 대한 강조가 실은 "발언하는 권력을 가진 자"의 나르시즘적 쾌락을 위한 알리바이일 수 있음을 드러낸다. 감독이 이러한 영재에 비판적인 것인지 아니면 이러한 환상 자체가 감독 자신의 것인지를 알 수 없지만(아마도 "둘 다"가 정답에 가까울 것이다), 이 꿈은 분명 오늘날&nbsp;소통물신주의의 근저에 놓인 환상과 그 함정을&nbsp;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장면일 것이다. &nbsp;&nbsp;</p>
<p align="justify">&nbsp;&nbsp;</p>
<p align="justify">두번째로 영재가 영화제의 파티에서 "모르겠어요"를 열창하는 장면은, 오늘날 소통의 불가능성이 배태된&nbsp;구조를&nbsp;보여준다. 영화 속에서 목소리를 잃은 영재가 '마이크'를 통해서만 발언할 수 있다는 건,&nbsp;진부한 은유에 기대긴 하지만 그럼에도&nbsp;의미심장하다. 영화 제작자들에 치여 은하처럼 자신의 목소리를&nbsp;잃어버린&nbsp;영재는,&nbsp;이제 팔루스(phallus)를 닮은 마이크를&nbsp;통해서만 자신의&nbsp;목소리를 낼 수 있다.&nbsp;영재가 소통하기 위해 할 수 있는 건 팔루스를 가지는 것, 즉 영화제의 느물느물한 사회자처럼 "말할 수 있는 권력"의 위치에 서는 일 뿐이다. 그런 영재에게 잘 세팅된 무대의 마이크는 아니더라도&nbsp;마이크의 대체물인 확성기를 통해 노래할 기회가 주어지는데(아마도 이는 독립영화 감독으로서의 감독 자신의 자의식이 반영된 것일게다), 이 결정적 장면에서&nbsp;영재가 하는 말이라곤&nbsp;"모르겠어요" 뿐이다. </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혹시 이&nbsp;장면은&nbsp;오늘날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다음과 같은 악순환을&nbsp;무심코 드러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nbsp;서로 공유할 수 있는 '큰 이야기'가 붕괴해버린 현실에서, 소통은 계속해서 어긋나거나 겉돌기만 한다.(사실 영화의 수많은 에피소드는&nbsp;이러한 미끄러짐과 어긋남을 묘사하기 위해 배치된다.)&nbsp;그래서 이제 소통을 위해 필요한 건 이야기 자체가 아니라&nbsp;단지&nbsp;"말할 수 있는 위치에 설 수 있는" 권력이다.&nbsp;하지만&nbsp;우여곡절 끝에 그 위치에 서게 되더라도, 그가&nbsp;할 수&nbsp;있는 이야기란, 결국&nbsp;"소통은 소통이지"같은 핵심이 빈 동어반복 혹은 애초부터 "모르겠어요"란 절규 뿐이다. 결국 승자가 얻는 건 앞서의 꿈에서 드러나듯이 곧 시들해져버릴&nbsp;겉치레에 불과한&nbsp;찬사일 뿐이고, 할 얘기가 더이상 없는 사람들 간에 오가는 피상적인 소통의 이면에서는,&nbsp;무엇을&nbsp;말하고 싶은지도 모른 채&nbsp;'마이크'를 얻기 위한 지난한 싸움이 계속된다.&nbsp;</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영재를 다시 현실로 불러들이는&nbsp;제작자의 말처럼,&nbsp;일본자본이 안되면&nbsp;이제 싱가포르 자본이 남아있다. 소통할 영화의 이야기는 정해지지도 않았는데, 자본을 향한 경쟁은 계속된다. 아니, 이야기 자체는 자본을 유혹해 마이크를 얻기&nbsp;위한 미끼일 뿐이다. 그래서..&nbsp;큰 이야기가 사라진 공간을 비집고 등장한&nbsp;소통에 대한 강조가 남긴 것은,&nbsp;자본을 통해 확보된 "말할 수 있는 권력의 자리", 그리고 그 자리를 얻기 위해 소통을 알리바이로&nbsp;아귀다툼을 벌이는&nbsp;나르시스적 주체들&nbsp;뿐이다. </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nbs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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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align="justify"><img id="my_post_img7184560" style="CURSOR: hand" onclick="viewPostImage('/files2/202/chasm/images/200712/310153413.jpg')" height="274" alt="" width="200" onload="setTimeout('fixImage(7184560)',300)" src="/files2/202/chasm/images/200712/310153413.jpg" /></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strong>&lt;사육장쪽으로&gt;</strong></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이런 씁쓸함들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와 얼마 전에 도서관에서 빌려두었던 편혜영의 &lt;사육장쪽으로&gt;를 읽는다. </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사실 편혜영의 데뷔작 &lt;아오이 가든&gt;의 과격함(?)에 열광했던&nbsp;이들은 이 두번째 작품집을 편혜영이 길들여지고 있다는 증거로 받아들이기도&nbsp;하지만, 나는&nbsp;약간의 유보에도 불구하고 이를 발전이라고&nbsp;말하고 싶다. (원래부터 난 과잉된&nbsp;묘사가 서사를 압도하는&nbsp;작품은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내 문학 취향이 주변 사람들에게 대체로 '촌스럽다'는 평을 받는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nbsp;</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얼마 전에 현대 사회의 주체성을 분석하는 개념 중 하나로서&nbsp;<a href="http://blog.jinbo.net/chasm/?cid=2&amp;pid=72">'동물'에 관한 포스팅</a>을 한 바 있다. 사실 이런 변화는&nbsp;사회과학보다는 문학쪽에서&nbsp;더 민감하게 포착하기 마련이다.&nbsp;동물을 통해 인간의 비이성적 상황이나 광기를 드러내는 방식이야 문학사 속에서 오래 반복된 모티브였지만, 이것이 90년대 후반 한국 사회의&nbsp;변화와&nbsp;맞물리면서 전면화되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nbsp;오수연의 &lt;벌레&gt;나 백민석의 일련의 소설들에서부터였을 것이다. &nbsp;2000년대 들어서는, 박민규가&nbsp;&lt;카스테라&gt;에서 아버지가 기린으로 변하고, 직장상사는 너구리로 변하고, 지구는 하나의 거대한 개복치로 변하는&nbsp;한국 사회를 멋지게&nbsp;묘사해준 바 있다.</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두 번째 단편집 &lt;사육장쪽으로&gt;에서 편혜영이 그리는 세계는,&nbsp;사람을 죽이는 늑대와 시체를 쪼아먹는 새들 그리고 늑대를 잡겠다며 늑대 가죽을 뒤집어쓴 사냥꾼들과 또 이 사냥꾼들을&nbsp;사냥하는 사냥꾼들의 세계이다.(&lt;동물원의 탄생&gt;)&nbsp;혹은 이미 세계는 거대한 사육장과 다를 바 없다.(&lt;사육장 쪽으로&gt;)&nbsp;즉, 편혜영이 그리는 세계는 관리 속에서 약육강식이 펼쳐지는 혹은 약육강식의 룰을 관리하는 최악의 생권력(biopower)의 세계이다. 이 세계는&nbsp;"죽게 만들고&nbsp;살게 내버려두는" 사회도,&nbsp;"살게 만들고&nbsp;죽게 내버려두는" 사회도 아닌,&nbsp;"죽든 살든 내버려두는", 하지만 동시에 그러한 약육강식의 링에 세우기 위해&nbsp;주체를 "죽게 만들고&nbsp;살게도 만들면서"&nbsp;몰아붙이는 사회다.</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이 최악의 사육장같은 세계 속에서&nbsp;각자의&nbsp;지반을 뒤흔드는 지진은 이미 발생했고(&lt;분실물&gt;) 땅 밑의 늪은 이미 집을 붕괴시키고 있는데도(&lt;밤의 공사&gt;),&nbsp;사람들은 이러한 위기를&nbsp;부인(disavowal)한다.&nbsp;그들은&nbsp;별다른 해결이 안된다는 사실을 "이미 잘 알고 있음에도" 다른 도시를 향해 떠나거나(&lt;소풍&gt;), 아무런 해결책이 안된다는 사실을 "이미 잘 알고 있음에도" 분실물에 한없이 집착하거나(&lt;분실물&gt;), 집 자체가 붕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nbsp;어떻게든 집의 담장 만을 쌓고 또 쌓을 뿐이다.(&lt;밤의 공사&gt;) 결국 이들은 모두 자신이 꿈꿔왔던 해결책들이 환상에 불과함을 깨닫게 되지만, 그들에게 남겨진 현실은&nbsp;전이의 해소라기보다는 파국에 가까운 것이라고 말해야 옳을 것이다. &nbsp;</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 잠깐 맛 본 연말 종로 거리의 들뜬 분위기와는 달리,&nbsp;2007년 12월 30일 영화와 소설들이 내게 보여주는 세계의 모습은&nbsp;암울한 디스토피아다.&nbsp;이데올로기 비판은&nbsp;기능부전에 빠져있고, 그 자리를 채운 소통에 대한 환상은&nbsp;아귀다툼의 가면일&nbsp;뿐이며,&nbsp;우리는&nbsp;서로를 사냥해야만 하는&nbsp;최악의 사육장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 묘사는 반대로도&nbsp;전개 가능하다. 경쟁하는 사육장 속에서&nbsp;소통은 불가능하며, 소통이 불가능한만큼 이데올로기 비판은 무력하다. </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하지만 더욱 흥미로운 것은,&nbsp;우습게도 이들 세 작품 모두가&nbsp;어색한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된다는 사실이다. &lt;아이, 로봇&gt;에서 소니는 자신의 의지에 따라 행동할 자유와 이성에 대한 감정의 우위를 찬양하며,&nbsp;&lt;은하해방전선&gt;에서 영재는 (아마도&nbsp;작가의 타협지점이 아닌가 싶은데)&nbsp;뜬금없이&nbsp;진정한 소통의 가능성에 대한 믿음을 드러낸다. 또,&nbsp;&lt;사육장쪽으로&gt;에 실린 작품해설에서&nbsp;신형철은 편혜영의 소설에 숨겨진&nbsp;따뜻한 유머를 들춰내 희망을 이야기한다. </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사실 이러한 해피엔딩과&nbsp;앞서의 위기에 대한 진단 사이에는&nbsp;아찔할 만큼의 간격이 존재한다. &lt;아이, 로봇&gt;의 대부분은 노동 3원칙이 얼마나 합리적인가에 할애되고, &lt;은하해방전선&gt;의 대부분은&nbsp;어긋나는 소통과 권력관계를 묘사하는데&nbsp;할애되고 있으며, &lt;사육장쪽으로&gt;에 실린 소설 대부분은 왜 희망의 유머가&nbsp;불가능한가를 보여주는데 바쳐지고 있기 때문이다.&nbsp;</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따라서 해피엔딩의 이러한 어색한 도약은&nbsp;&lt;아이, 로봇&gt;의 써니처럼&nbsp;대책없는 순박함의 소산이거나,&nbsp;&lt;은하해방전선&gt;의 영재처럼 진지한 멜로가 아닌&nbsp;오직 코미디로서만 말할 수&nbsp;있는 한없는 가벼움에 대한 시대적&nbsp;강박 때문이거나,&nbsp;최악의 경우 &lt;사육장쪽으로&gt;의 등장인물들처럼 파국을 부인하지 않고서는&nbsp;더 이상&nbsp;삶조차 이어나갈 수 없는 현실의 상황을 반영한 것일게다. 이도저도 아니라면... 이들이 임박한 파국은&nbsp;한편으로는 축제의 시작이기도&nbsp;하다는&nbsp;또 다른 원칙을 무심코 드러내고 싶었던 걸까?&nbsp;그만. No Kidding!&nbsp;&nbsp;</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p.s. </p>
<p align="justify">그래서 드는 생각 한 가지.&nbsp;사실 연말이야말로&nbsp;그 어느 때보다 우리에게 우격다짐 해피엔딩이 강요되는 시기가 아니던가. 올해의 삶이 얼마나 힘들었고, 내년의 삶의 고생스러움이 얼마나 뻔히 예측되던지 간에,&nbsp;어쨌든 우리는&nbsp;한해의 happy ending을 맞아야&nbsp;할 것이다. </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그러니 이 블로그를 방문해주시는&nbsp;분들,&nbsp;모두 "행복한" 연말연시되시길.</p>
<p align="justify">&nbsp;</p>
<p align="justify">&nbsp;</p>
]]>
			</description>
			<author>캐즘</author>
			<category>맑글터</category>
			<category>해피엔딩</category>
			<category>은하해방전선</category>
			<category>로봇 아이</category>
			<category>사육장쪽으로</category>
			<category>연말인사</category>
			
			
			<pubDate>Mon, 31 Dec 2007 01:52:23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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