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공산주의 운동https://blog.jinbo.net/communism/세계 공산주의 운동, 국제조직들, 이론, 논쟁, 기관지 등2023-05-05T08:38:04+09:00Textcube 1.8.3.1 : Secondary Dominant트로츠키-이행의 강령 앞 부분 1-3장얼치기 공산주의자https://blog.jinbo.net/communism/832013-06-13T00:48:49+09:002013-05-30T07:39:01+09:00<p class="소제목" style="text-align: center">
자본주의의 죽음의 단말마와 제4 인터내셔널의 임무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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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장악을 준비하기 위하여 대중들을 이행의 요구들 주위로 투쟁으로 조직하기</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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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행의 강령</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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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츠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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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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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객관적인 필요조건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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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정치정세는 전체적으로 주로 프롤레타리아트의 지도부의 역사적 위기라는 특징이 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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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을 위한 경제적 필요조건은 자본주의 하에서 도달될 수 있는 최고의 실현 지점을 전반적으로 이미 성취하였다. 인류의 생산력들은 지체되고 있다. 새로운 발명들과 개선들은 이미 물질적 부의 수준을 올리지 못한다. 전체 자본주의 체제의 사회적 위기라는 조건들 하에서의 위급한 위기들이 어떤 때보다도 더 막중한 약탈들과 고통들을 대중들에게 가한다. 증가하는 실업도 또한 국가의 금융위기를 심화시키고 불안정한 통화 시스템들을 침식한다. 파시스트들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적 정권들도 하나의 파산으로부터 또 다른 파산으로 비틀거리고 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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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주아지 계급 그 스스로가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있다. 이미 파시즘이라는 카드에 자신의 마지막을 걸지 않을 수 없었던 나라들에서, 부르주아지 계급은 이제 경제적, 군사적 파국을 향하여 눈을 감은 채 미끄러져 내려간다. 역사적으로 특권을 지닌 나라들에서는, 즉 부르주아지 계급이 여전히 국가적 축적들을 희생시키는 대가로 특정 기간 동안 민주주의라는 사치를 스스로에게 허용할 수 있는 나라들(영국, 프랑스, 미국 등)에서는, 모든 자본의 전통적인 정당들은 거의 의지의 마비상태라고 할 만한 난국에 처해 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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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의 첫 번째 시기의 과장된 결연함에도 불구하고, 부르주아지 계급이 무한량의 부를 축적하는데 성공한 나라에서나 단지 가능한 “뉴딜”은 특수한 형태의 정치적 난국을 의미할 뿐이다. 자신의 코스를 완주하였기는커녕, 현재의 위기는 “뉴딜” 정책들이 프랑스에서의 인민전선 정치처럼 경제적 막다른 골목으로부터 어떠한 새로운 출구도 열지 못한다하는 것을 보여주는데 이미 성공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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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관계들은 보다 좋은 어떠한 그림도 보여주지 않는다. 자본주의 분열이라는 증가하는 긴장 하에서, 제국주의적 적대들은 개별적인 충돌들과 지역의 유혈 소동들(이디오피아, 스페인, 극동, 중부유럽)이 세계적 규모의 대화재로 필연적으로 병합될 수밖에 없는 정도의 막다른 골목에 도달해 있다. 물론 부르주아지 계급은 새로운 전쟁이 의미할 자신의 지배에 대한 치명적인 위험을 알고 있다. 그러나 저 계급은 1914년의 전야 때보다도 전쟁을 피할 수 있는 능력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모자란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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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조건들이 사회주의를 위하여 아직은 “무르익지” 않았다는 취지에 대한 모든 발언은 무지 내지는 의식적 속임수의 산물이다.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을 위한 객관적 필요조건들은 단지 “무르익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것들은 일정정도 썩기 시작했다. 사회주의 혁명이 없다면, 그것도 바로 다음 역사상의 시기에 혁명이 없다면, [닥쳐 올-해석자의 첨가] 파국이 인류의 문명 전체를 위협한다. 이제는 프롤레타리아트, 즉 주요하게는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전위의 차례이다. 인류의 역사상의 위기가 혁명적 지도부의 위기로 바뀐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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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레타리아트와 프롤레타리아트의 지도부</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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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주아지 계급의 경제, 국가, 정치와 그들의 국제관계들은 사회의 준혁명적 국면의 특징인 사회적 위기에 의하여 완전하게 파괴된다. 준혁명적 국면의 혁명적 국면으로서의 변형의 길에 있는 주요한 장애물이 프롤레타리아트 지도부의 기회주의적 성격, 즉 대부르주아지 계급 앞에서의 그들의 소부르주아지적 비겁함과 죽음의 단말마적 고통에 처해있는 데도 대부르주아지 계급과 맺는 그들의 배신적 커넥션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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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나라들에서 프롤레타리아트는 심한 불안으로 고통 받는다. 수백만의 대중들이 다시 또 다시 혁명의 길로 들어선다. 그러나 그들은 매번 그들 자신의 보수적 관료 기구들에 의하여 막힌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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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프롤레타리아트는 1931년 4월 이래로 자신의 수중에 권력을 장악하고 사회의 운명을 통치하기 위한 일련의 영웅적 시도들을 해왔다. 하지만, 그들 자신의 정당들 (사민당, 스탈린주의자들, 무정부주의자들, POUM주의자들)이 각자 자기 자신의 방법으로 제동장치로서 행동했으며, 그리하여 프랑코의 승리들을 준비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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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에서는, 특히 1936년 6월 동안, “점거” 파업들의 거대한 물결이 프롤레타리아트가 자본주의 체제를 타도를 위하여 진정으로 준비되어 있음을 드러내 주었다. 하지만, 인민전선이라는 꼬리표 하의 지도적 조직들(사회주의자들, 스탈린주의자들, 생디칼리스트들)은 적어도 일시적으로는 혁명적 물결을 방향을 돌려 가두는데 성공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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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CIO)에서의 전례가 없는 점거 파업들과 산업 노동조합주의의 놀라울 정도로 급속한 성장은 역사에 의하여 그들에게 과하여진 임무들의 수준으로 그들 스스로를 끌어올리기 위한 미국 노동자들의 본능적 분투의 가장 논란의 여지가 없는 표현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또한 새롭게 창립된 CIO를 포함하는 지도적인 정치적 조직들은 대중들의 혁명적 압력을 저지하고 무력화하기 위하여 가능한 모든 것을 한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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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민테른의 부르주아지적 질서의 편으로의 명백한 넘어감, 전 세계에 걸친, 특히 스페인, 프랑스, 미국과 기타 “민주주의적” 나라들에서의 코민테른의 냉소적으로 반혁명적인 역할이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에게는 예외적인 추가적 어려움들을 만들어냈다. 10월 혁명의 기치 하에서 “인민 전선”에 의하여 실행되던 협조주의적인 정치들이 노동계급에게 무기력을 선고하고, 파시즘을 위한 길을 깨끗하게 한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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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레타리아트 혁명에 맞서는 투쟁에서, 한편으로는 “인민 전선들”, 다른 한편으로는 파시즘이라는 제국주의의 최후의 정치적 자원들이 있다. 하지만, 이들 자원들 모두는 역사적 관점에서 미봉책들이다. 독일에서 나찌의 십자가 문양 간판 하에서와 마찬가지로 프랑스에서는 프리지아 모자라는 간판 아래에서 자본주의의 쇠퇴는 계속된다. 부르주아지 계급의 타도에 미치지 못하는 어떠한 것도 출로를 열지 못한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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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들의 방침은 쇠퇴하는 자본주의라는 객관적 조건들에 의하여 우선, 그리고 구 노동자 조직들의 배신적인 정치에 의하여 두 번째로 결정된다. 이들 요소들 중에서 당연히 첫 번째 것이 결정적인 것이다. 즉 역사의 법칙들이 관료 기구들보다 강력하다. 블룸의 “사회적” 입법으로부터 스탈린의 사법적 모함들에 이르기까지, 사회적 배신자들의 방책들이 아무리 다르더라도, 그들은 결코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의지를 깨뜨리는데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역사의 바퀴를 저지하려는 그들의 필사적인 노력들은 인류 문명에서의 위기가 되어 온 프롤레타리아트 지도부의 위기는 오직 제4 인터내셔널에 의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을 대중들에게 보다 분명하게 증명해 줄 것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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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소강령과 이행의 강령</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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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시기의 전략적 임무는 (준혁명적 시기의 선동, 선전, 그리고 조직) 객관적인 혁명적 조건들의 성숙과 프롤레타리아트와 그 전위의 미성숙(고참 세대의 혼란과 실망, 보다 젊은 세대의 경험 부족) 사이의 모순을 극복하는 것에 있다. 대중들이 일상투쟁의 과정에서 현재의 요구와 혁명이라는 사회주의 강령 사이의 가교를 찾도록 돕는 것이 필수적이다. 이 가교는 오늘날의 정세와 현재 노동계급의 폭넓은 층의 의식으로부터 출발하여 하나의 최종적인 결론,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한 권력의 장악으로 이끄는 <span style="font-style: italic">이행의 요구들</span>이라는 체계를 포함해야 한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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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가 진보적이었던 시대에 작동하던 고전적 사회민주주의는 자신의 강령을 부르주아지 사회의 틀 내에서의 개혁들에 스스로를 제한했던 <span style="font-style: italic">최소강령</span>과 정해지지 않는 미래에 자본주의를 사회주의로 대체할 것을 약속했던 <span style="font-style: italic">최대강령</span>이라는 각기 독립적인 2개의 부분들로 나누었다. 최소강령과 최대강령 사이에는 어떠한 가교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정말이지 사회민주주의는 그러한 가교가 필요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span style="font-style: italic">사회주의</span>라는 단어가 단지 휴일 연설용으로나 사용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구조적인 사회개혁과 대중의 삶의 수준을 끌어올리는 것에 대한 논의가 불가능한 때이며, 프롤레타리아트의 모든 진지한 요구, 그리고 심지어 소부르주아지의 모든 진지한 요구가 불가피하게 자본주의 소유관계와 부르주아지 국가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에 이르는 때인 쇠퇴하는 자본주의의 시대에 코민테른은 사회민주주의의 길을 따를 것을 분명히 해왔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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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 인터내셔널의 전략적 임무는 자본주의의 개혁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타도에 있다. 제4 인터내셔널의 정치적 목표는 부르주아지에 대한 몰수라는 목적을 위한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한 권력의 장악이다. 그러나 심지어 작고 부분적인 것들까지 포함하여 전술에 관한 모든 문제들에 대한 가장 신중한 고려가 없이 이 전략적 임무의 성취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프롤레타리아트의 모든 부문들, 프롤레타리아트의 모든 층, 직업, 그룹들이 혁명적 운동 속으로 인입되어야 한다. 현재의 시대는 이 시대가 일상활동으로부터 혁명정당을 자유롭게 한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일상활동이 혁명의 실제 임무들과 분리되어 수행될 수 없도록 한다는 점에서 특징적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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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 인터내셔널은 과거의 “최소“요구의 강령들이 적어도 그것들의 결정적인 위력의 부분을 보유해온 한에서는 “최소“요구의 강령들을 버리지 않는다. 제4 인터내셔널은 끊임없이 민주적 권리들과 노동자들의 사회적 성과들을 방어한다. 그러나 제4 인터내셔널은 이 일상활동을 올바르고 실제적인, 즉, 혁명적 전망의 틀 내에서 수행한다. 대중들의 과거 부분적인 “최소의“ 요구들이 쇠퇴기에 접어든 자본주의의 파괴적이고 퇴락한 경향들과 충돌하는 한(이것은 매 단계마다 발생하고 있다), 제4 인터내셔널은 이행의 요구들이라는 체계를 제기하며, 그것들이 어느 때 보다도 더 공공연하고 결정적으로 부르주아지 통치의 기초 그 자체에 맞서는 방향으로 향할 것이라는 사실에 <span style="font-style: italic">이행의 요구들</span>의 본질이 있다. 과거의 “최소강령“은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을 위한 대중의 체계적인 조직화를 임무로 하는 <span style="font-style: italic">이행의 강령</span>에 자리를 내주게 된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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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의 교훈</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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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경고</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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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츠키 1937년 말</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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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의 멘셰비키주의와 볼셰비키주의</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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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군 참모들은 거대한 미래의 전쟁을 준비하면서 에티오피아, 스페인, 그리고 극동에서의 군사작전에 관하여 면밀하게 연구하고 있다. 혁명의 참모들도 다가오는 세계혁명의 뜨거운 번개 섬광과도 같은 스페인 프롤레타리아트의 전투들을 면밀하게 연구해야 한다. 이러한 조건에서, 그리고 이러한 조건에서만 오로지 우리는 다가오는 사태들로부터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기습을 당하지 않게 될 것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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멘셰비키주의, 볼셰비키주의, 그리고 무정부주의라는 서로 다른 힘을 가진 3개의 이데올로기들이 소위 공화 진영에서 투쟁했다. 부르주아지 공화 정당들에 관하여 말자하면, 그들은 독립적인 사상이나 독립적인 정치적 중요성 어떤 것도 없었으며, 단지 개량주의자들과 무정부주의자들의 등에 올라타는 것을 통해서만 스스로를 유지할 수 있었다. 또한, 스페인 무정부주의-생디칼리즘의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주의(主義)를 거부하고, 그것의 중요성을 실질적으로 무(無)로까지 축소시키기 위하여 최선을 다했다고 말하는 것은 과장이 아니다. 실제로는 멘셰비키주의와 볼셰비키주의라는 2개의 주의(主義)가 스페인 공화 진영에서 투쟁했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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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자들과 스탈린주의자들, 다시 말해 첫 번째와 두 번째 멘셰비키들에 따르면, 스페인 혁명은 단지 자신의 "민주주의적" 임무들만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그것을 위하여 "민주적인" 부르주아지와의 공동전선은 필수 불가결한 것이었다. 이러한 관점으로부터는, 부르주아지 민주주의의 한계를 넘어서고자 하던 프롤레타리아트의 모든 시도들, 어떠한 시도들도 성숙되지 못한 것뿐만 아니라 치명적인 것이기도 했다. 게다가, 아젠다에는 혁명이 아니라 반란에 나선 프랑코에 맞서는 투쟁이 있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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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파시즘은 봉건적 반동이 아니라 부르주아지적 반동이다.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의 세력들과 방책들을 가지고서만 오직 부르주아지적 반동에 맞서는 성공적인 투쟁을 수행할 수 있다. 그 자체로 부르주아지 사상의 일부인 멘셰비키주의는 이러한 사실들을 인식하지 않으며, 인식할 수도 없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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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제4 인터내셔널의 청년 지부들에 의해서만 명확하게 표현되는 볼셰비키의 관점은 반(半)봉건적 토지소유의 청산과 같은 순전히 민주주의적인 문제들조차도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한 권력의 장악 없이는 해결될 수 없으며, 이 점이 이번에는 사회주의 혁명을 일정에 올리게 된다고 하는 영구혁명의 이론을 자신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더욱이, 혁명의 바로 첫 번째 국면 동안에, 스페인 노동자들은 실천적으로 스스로에게 단지 민주주의적 문제들뿐만 아니라 순전히 사회주의적인 문제들까지 제기했다. 부르주아지 민주주의의 경계를 넘어서서는 안 된다는 요구는 실천적으로 민주주의 혁명에 대한 방어가 아니라 민주주의 혁명에 대한 거부를 의미한다. 농경적 관계에서의 전복을 통해서만 오로지 인구의 절대다수였던 농민은 파시즘에 맞서는 강력한 보루로 바뀔 수 있었다. 그러나 지주들은 상업 부르주아지, 산업 부르주아지, 그리고 은행 부르주아지, 그리고 이들에 의지하는 부르주아지 지식인들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프롤레타리아트의 당은 농민대중들과 함께 나아갈 것인가 혹은 자유주의 부르주아지와 함께 나아갈 것인가의 선택에 직면하게 되었다. 농민과 자유주의 부르주아지를 동시에 같은 연합에 포함하키는 것에는 오직 한 가지 이유만이 있을 수 있을 것인데, 그것은 부르주아지가 농민을 속여서 노동자들을 고립시키는 것을 돕고자 함이다. 농민혁명은 오로지 부르주아지에 대항해서만, 따라서 오로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라는 대중들을 통해서만 성취될 수 있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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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의 관점에서, 스탈린의 스페인 정책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레닌주의의 가나다에 대한 전적인 무시이다. 수십 년 후에 - 정말이지 수십 년! - 코민테른은 멘셰비키주의의 교조를 완전하게 복권시켰다. 그것에 더해서, 코민테른은 멘셰비키주의 교조를 더욱 "일관적으로" 표현했고, 이 측면에서 멘셰비키주의 교조를 더욱 우스꽝스럽게 표현했다. 1905년이 시작되던 짜르 시대 러시아에서는 어쨌든, 1937년 스페인에서보다 비교할 수 없이 많은 "순전히 민주주의적 혁명"의 정식에 관한 논쟁들이 있었다. 현대의 스페인에서 멘셰비키주의라는 "자유주의적 노동자 정책"이 스탈린주의라는 반(反)노동자 정책으로 바뀌었다는 것은 거의 놀라운 일이 아니다. 동시에, 맑스주의에 대한 어설픈 모방이라는 멘셰비키들의 교조가 그 스스로에 대한 어설픈 모방으로 변했던 것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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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전선이라는 "이론"</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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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스페인에서의 코민테른의 정치들이 이론적 "실수"로부터 기인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순진한 것일 것이다. 스탈린주의는 맑스주의 이론, 이 측면에서는 어떠한 이론에 의해서도 지배되지 않으며, 소비에트 관료의 경험적 이해관계들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소비에트의 냉소적인 사람들은 자신들의 절친한 써클들 내부에서는 디미트로프의 인민전선의 "철학"을 조롱한다. 그러나 그들은 대중을 속이기 위이기 위하여 이 신성한 정식에 대한 선전가들, 충실한 자들과 사기꾼들, 얼간이들, 그리고 허풍쟁이들이라는 중핵을 자신들의 수중에 보유하고 있다. 무지하면서 잰 체하는, 그리고 조야한 합리주의자이면서 혁명에는 전적으로 귀를 막고 있는 로이스 피셔(Louis Fischer)가 이 매력 없는 형제들의 가장 불쾌한 대표이다. "진보세력 단결!", "인민전선 사상의 승리!" "반파시스트 대오의 단결에 대한 트로츠키주의자들의 공격!" .. 누가 공산당선언이 90여 년 전에 쓰였다고 믿겠는가?</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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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전선의 이론가들은 본질적으로 산수의 첫 번째 규칙, 즉 덧셈을 넘어서지 않는다. "공산주의자" 더하기 사회주의자 더하기 무정부주의자 더하기 자유주의자는 각자 고립되었을 때의 개별 숫자들 보다 더 큰 총합을 만든다. 이것이 그들 지혜의 모두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산수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적어도 기계적인 것 또한 필요하다. 힘의 평행사변형 법칙이 정치에도 적용된다. 그러한 평행사변형에서, 힘을 구성하고 있는 부분이 서로에게서 더욱 벌어질수록 합력은 더욱 작아진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만약 정치적 동맹세력들이 정반대의 방향으로 당길 때, 그 결과는 0이 됨이 증명된다.[해석자의 첨가 - 벡터의 합에 관한 공식. 방향이 서로 다른 두 힘에 해당하는 평행사변형의 이웃하는 두 변의 길이가 길어도, 두 변 사이의 각이 커질수록 합력에 해당되는 평행사변형의 대각선의 길이는 더 짧아지게 되며, 방향이 정반대인 두 힘의 합력은 힘의 크기가 같다면 0이 되어 버린다. 줄다리기에서 양쪽 팀의 힘이 같은 경우 각 팀이 아무리 힘을 크게 주어도 줄은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 있게 된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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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다양한 노동계급의 정치적 그룹들의 블럭이 공동의 실천적 문제들의 해결을 위하여 꼭 필요한 때가 있다. 특정 역사적 환경들에서, 그러한 블럭은 자신들의 이해관계가 프롤레타리아트의 이해관계에 근접해 있는 피억압 소부르주아지 대중들을 끌어당길 수 있다. 그러한 블럭의 합력은 각자의 힘의 합계보다 훨씬 더 강력한 것으로 판명될 수 있다. 반대로, 현 시기에 기본적인 문제들에 있어서 180도 다른 이해관계를 가지는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지 사이의 정치적 동맹은 일반적으로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힘을 무력화시킬 수 있을 뿐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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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거벗은 압제의 힘이 거의 효과가 없는 내전에서는, 참가자들에게 최고의 자기희생의 정신이 요구된다. 노동자와 농민들은 자기 자신의 해방을 위한 투쟁을 수행할 때에만 오로지 승리를 보장할 수 있다. 이러한 조건들 하에서, 프롤레타리아트를 부르주아지의 지도하에 종속시키는 것은 사전에 내전에서의 패배를 분명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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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간단한 진리들은 순전한 이론적 분석의 결과가 결코 아니다. 반대로, 그것들은 적어도 1848년으로부터 시작되는 역사 속에서의 전체 경험으로부터 나온 이론의 여지가 없는 추론을 의미한다. 현대 부르주아지 사회의 역사는 온갖 종류의 인민전선, 즉 노동인민들을 속이기 위한 가장 다양한 정치적 조합들로 가득하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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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주아지의 그림자와의 동맹</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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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으로 가장 충격적인 사실은 실제로 스페인 인민전선에는 힘의 평행사변형조차 부족했다는 것이다. 부르주아지의 자리는 그들의 그림자에 의해 장악되었다. 스탈린주의자, 사회주의자, 그리고 무정부주의자들이라는 매개를 통하여, 스페인 부르주아지는 인민전선에 참여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조차 없이 프롤레타리아트를 자기 자신들에게 종속시켰다. 모든 정치적 색조의 착취자들의 압도적 다수가 프랑코 진영으로 넘어갔다. '영구 혁명'에 대한 어떠한 이론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스페인 부르주아지는 처음부터 혁명적 대중운동은 그것이 어떻게 시작되든 간에 토지와 생산수단에 대한 사적 소유에 대항하는 방향이 될 것이며, 민주주의적 방책들로는 이 운동을 다루는 것이 완전히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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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소유계급들 중에서 오직 하찮은 떨거지들(아자나(Azana)씨와 그 외의 부르주아지가 아닌 부르주아지의 정치적 대리인들)만이 공화 진영에 남아 있었던 이유이다. 군사적 독재에 모든 것을 걸면서, 동시에 소유계급들은 '공화국' 영토의 대중들의 사회주의 운동을 무력화시키고, 해체하고, 결국 교살시키기 위하여 과거의 그들의 대표자들을 활용할 수 있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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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곱만큼도 스페인 부르주아지를 대변하지는 않았지만, 좌익 공화주의자들은 여전히 노동자와 농민들을 보다 덜 대변했다. 그들은 그들 자신 이외의 누구도 대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동맹자들인 사회주의자, 스탈린주의자, 그리고 무정부주의자들 덕택에, 이들 정치적 유령들이 혁명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어떻게? 아주 간단하게. "민주주의 혁명", 즉 사적소유의 신성불가침의 원칙을 실현함으로써.</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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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전선의 스탈린주의자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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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인민전선과 그것의 내부 기제들의 등장의 이유는 더할 나위 없이 명확하다. 좌익 부르주아지의 일선에서 물러난 지도자들의 임무는 대중들의 혁명을 저지하는 것과 착취자들이 스스로 잃어버린 자신감을 회복시키는 것에 있었다. "우리, 공화주의자들이 똑같은 일을 할 수 있는데 당신들은 왜 프랑코를 필요로 하는가? 이러한 중심적인 지점에서, 아자나와 컴패니스(Companys)의 이해관계는 "무질서"에 맞서 "질서"를 보존할 수 있는 자신의 능력을 실천으로 증명함으로써 프랑스와 영국의 신뢰를 획득할 필요가 있던 스탈린의 이해관계와 완전히 일치했다. 스탈린은 노동자들 앞에서의 위장막으로서 아자나와 컴패니스가 필요했다. 즉, 물론 스탈린 자신은 사회주의를 지지하지만, 공화파 부르주아지를 축출하지 않도록 주의해야만 한다! 아자나와 컴패니스는 무기를 공급했던 고매하고 강력한 외국의 후원자라는 것 때문이 아니라 감히 노동자들을 공격하겠다는 것 때문에 혁명적 시기의 권위를 가지는 경험 있는 사형집행자로서의 스탈린을 필요로 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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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에 계급투쟁의 경로에서 이탈했던 제2 인터내셔널의 고전적 개량주의자들이 모스크바의 지원 덕분에 새로운 확신의 물결을 느끼기 시작했다. 첨언하면, 이 지원은 모든 개량주의자들에게 주어졌던 것이 아니라 가장 반동적인 개량주의자들에게만 주어졌다. 카발레로(Caballero)가 노동자 귀족들을 향해 돌아섰던 사회당의 얼굴을 대표했다. 네그린(Negrin)과 프리에토(Prieto)는 항상 부르주아지에 기대를 걸었다. 네그린은 모스크바의 도움으로 카발레로를 획득했다. 인민전선의 포로였던 좌익 사회주의자들과 무정부주의자들은 구할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 민주주의를 구하기 위하여 애썼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이 인민전선의 헌병들에 맞서 감히 대중을 동원하려하지 않았던 까닭에, 결국 그들의 노력은 비탄과 울부짖음으로 바뀌었다. 이렇게 해서 스탈린주의자들은 사회당의 공공연한 극우 부르주아 세력과 동맹을 맺었다. 그들은 POUM, 무정부주의자, "좌익"사회주의자들과 같은 좌익, 다시 말해 가장 관계가 먼 정도이기는 했지만 혁명적 대중의 압력을 반영하기는 했던 중도주의 조직들에 대한 억압을 지휘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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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자체로 굉장히 중요했던 이 정치적 사실은 동시에 마지막 몇 해 동안 코민테른의 퇴행의 척도를 제공한다. 나는 한때 스탈린주의를 관료적 중도주의로 정의했고, 사태들이 이 정의의 올바름에 대한 일련의 확증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오늘날 이것은 명백하게 쓸모없는 것이다. 보나파르트적 관료의 이해관계는 더 이상 중도주의적 망설임, 동요와 조화를 이룰 수 없다. 부르주아지와의 화해를 추구하는 스탈린주의 도당은 국제 노동 귀족들 중에서 가장 보수적인 조직들과의 동맹만을 맺을 수 있을 뿐이다. 이것이 국제적인 영역에서 스탈린주의의 반혁명적 성격을 확실히 고착시켜왔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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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주의의 반혁명적 우월함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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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어떻게 그리고 왜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했던 사회주의자들과 무정부주의자들의 조직들에도 불구하고 수적으로 보잘 것 없었고, 지도부도 능력이 없었던 스페인 공산당이 모든 권력의 지배권을 자신의 수중으로 모을 수 었었던 것으로 판명되었는가라는 수수께끼의 답으로 거의 다가서게 한다. 단순히 스탈린주의자들이 권력을 위하여 소비에트 무기들을 거래했다는 평범한 설명은 지나치게 피상적인 것이다. 무기의 대가로 모스크바는 스페인의 금을 받았다. 자본주의 시장의 법칙에 따르면, 이것으로 모든 것이 커버된다. 그러면 스탈린은 어떻게 물건을 팔면서 권력 장악을 획책했을까?</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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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에트 정부가 군사적 지원을 제공함으로써 대중들의 입장에서 권위를 올리면서 자신들의 "협조"의 조건으로 혁명가들에 대항하는 철저한 방책들을 요구했고, 그렇게 해서 자신의 길로부터 위험스러운 반대파들을 제거했다는 것이 흔한 대답이다. 이 모든 것이 논쟁의 여지는 없지만, 이것은 사물의 한 측면, 그리고 가장 덜 중요한 측면일 뿐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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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에트의 지원이 만들어주었던 "권위"에도 불구하고, 스페인 공산당은 작은 소수파에 머물렀고, 노동자들 쪽에서 어느 때보다도 커지는 증오에 직면했다. 반면, 모스크바로서는 조건을 만들어내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발렌시아가 그 조건들에 동의해야만 했다. 이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자모라(Zamora), 컴패니스, 네그린뿐만 아니라 수상으로 재직하던 동안의 카발레로 또한 모두가 얼마간은 모스크바의 요구들에 기꺼이 동의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왜였을까? 왜냐하면 이들 신사양반들 스스로가 혁명을 부르주아지적 한계 내에서 유지하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모든 노동자들의 혁명적 공세를 극도로 두려워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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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와 궁극적으로는 반혁명적 원리의 소유자였던 스탈린은 이들 모든 조직들의 구원자였다. 그들의 희망처럼, 스탈린은 그들에게 프랑코에 대한 군사적 승리를 보증해주었고, 동시에 혁명의 경로에 대한 모든 책임을 면해 주었다. 그들은 모스크바가 자신들을 위하여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재수립한 이후에 사용할 요량으로 자신들의 사회주의, 무정부주의 가면들을 서둘러 옷장 속에 넣었다. 이후 자신들의 안락함에 대한 대미를 장식하면서, 이들 신사양반들은 스탈린과의 군사적 협약의 필요성을 가지고 노동자들에 대한 자신들의 배신을 정당화할 수 있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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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이러한 폭넓은 관점으로부터만, 우리는 아자나, 네그린, 컴패니스, 카발레로, 가르시아 올리버(Garcia Oliver) 등과 같은 정의와 자유의 옹호자들이 GPU의 범죄에 대하여 보여주었던 천사와도 같은 관용에 대한 분명한 그림을 얻을 수 있다. 만약 그들이 확언하듯이 그들에게 다른 선택이 없었다면, 그것은 그들이 혁명가들의 머리와 노동자들의 권리 이외에는 비행기와 탱크를 지불할 수단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순전히 민주주의적", 즉 반사회주의 강령이 테러 이외의 방책으로는 실현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노동자와 농민들이 공장과 부동산들을 점거하고, 과거의 주인들을 내쫓고, 지방에서 권력을 장악하면서 혁명의 길에 들어서자, 민주주의자, 스탈린주의자 혹은 파시스트까지 부르주아지 반혁명에게는 거짓말과 속임수에 의해 보충을 받는 피비린내 나는 압제를 통하는 것 말고는 이 운동을 저지할 다른 방책이 없었다. 이 길에서 스탈린주의 도당들의 우월함은 아자나, 컴패니스, 네그린, 그리고 다른 좌익 동맹들을 넘어서는 방책들을 즉각적으로 적용할 수 있던 그들의 능력에 있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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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이 자기 자신의 방식으로 영구혁명의 이론의 정확성을 확증하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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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해서 스페인 공화국 영토에서는 2개의 화해 불가능한 강령들이 서로 대결했다. 한편으로,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프롤레타리아트로부터 사적 소유를 지켜내고, 프랑코로부터 가능한 많은 민주주의를 지켜내기 위한 강령과 다른 한편으로,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한 권력장악을 통하여 사적소유를 폐지하고자 했던 강령[이 그것들이다.-해석자의 첨가]. 첫 번째 강령은 노동귀족, 최고의 소부르주아지 부위들, 그리고 특히 소비에트 관료라는 매개를 통하여 자본주의의 이해관계를 표현했다. 두 번째 강령은 완전하게 의식적이지는 않았지만 강력했던 혁명적 대중운동의 경향들을 맑스주의의 언어로 바꾸었다. 혁명을 위해서는 불행하게도, 한 줌의 볼셰비키와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에 인민전선이라는 반혁명적 장벽이 서 있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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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인민전선이라는 정책은 결코 무기 제공자로서의 스탈린의 공갈에 의해 결정되지 않았다. 물론 적지 않은 공갈이 있었다. 그러나 이 공갈의 성공 이유는 혁명의 내부적 상태 그 자체에 본래적으로 있었다. 6년 동안, 혁명의 사회적 환경은 반(半)봉건적 부르주아지 소유관계의 정권에 대한 증가하는 대중의 공세였다. 가장 극단적인 방책으로 이 소유관계를 지켜야 할 필요성이 부르주아지를 프랑코의 품으로 내 던졌다. 공화파 정부는 "민주적" 방책으로 소유를 방어하겠다고 부르주아지에게 약속했지만, 1936년 7월에 특히 자신의 완전한 파산을 드러냈다. 소유 전선에서의 상황이 군사 전선에서의 상황보다 훨씬 더 위협적으로 되자, 무정부주의자들을 포함하는 모든 색조의 민주주의자들은 스탈린 앞에 조아렸다. 그리고 스탈린은 자신의 병기고에 프랑코의 방책들 말고는 없다는 것을 알았다. "트로츠키주의자들", POUM주의자들, 혁명적 무정부주의자들, 그리고 좌익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박해, 추악한 중상비방, 가짜 서류들, 스탈린주의자들의 감옥에서의 고문들, 습격에 의한 살인들, 이런 모든 것들이 없었다면 공화국 깃발 아래의 부르주아지 정권은 채 2달도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GPU가 이 정세의 지배자임을 증명했는데, 그것은 GPU가 다른 누구보다도 단호하게, 다시 말해 가장 비열하게 그리고 가장 피에 굶주린 채,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항하여 부르주아지의 이해관계를 방어했기 때문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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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 혁명에 맞서는 투쟁 속에서, "민주적" 케렌스키는 처음에는 코르닐로프의 군사독재에 대한 지지를 보냈고, 나중에는 전제주의 장군 크란스노프(Kransnov)의 화물열차로 페트로그라드에 들어가려고 했다. 반면, 볼셰비키들은 민주주의 혁명을 완전하게 수행하기 위하여 "민주적" 허풍쟁이들과 수다쟁이들의 정부를 타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군사(혹은 "파시스트") 독재에 대한 모든 종류의 시도를 끝장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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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혁명은 다시 한 번 파시스트 반동의 방책에 맞서 민주주의를 방어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증명했다. 그리고 거꾸로 말하면,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의 방책을 통하는 것 말고는 파시즘에 맞서는 진정한 투쟁을 수행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스탈린은 GPU의 보나파르트적 방책들을 가지고 민주주의를 파괴하면서, "트로츠키주의"(프롤레타리아트 혁명)에 대항하는 전쟁을 벌였다. 이것은 다시 한 번 단호하게 코민테른에 의해 수용된 민주주의 혁명과 사회주의 혁명은 시간적으로 서로 별개인 2개의 독립적인 역사의 장들로 바뀐다는 과거의 모든 멘셰비키 이론을 논박한다. 모스크바의 사형 집행자들의 활동은 자기 자신의 방식으로 영구혁명의 이론의 올바름을 입증한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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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정부주의자들의 역할</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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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혁명에서 무정부주의자들은 어떠한 종류의 독립적인 입장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들이 했던 모든 것들은 볼셰비키주의와 멘셰비키주의 사이에서의 동요였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무정부주의 노동자들은 (1936년 7월 19일과 1937년 5월의 나날들에서) 본능적으로 볼셰비키의 길에 들어서고자 열망했던 반면 그들의 지도자들은 반대로 자신들의 모든 힘을 다해서 대중들을 인민전선, 즉 부르주아지 정권으로 강제했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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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정부주의자들은 스스로를 자기 자신의 노동조합에, 즉 평화적 시기라는 일상에 지배적인 조직들에 제한하기 위하여 애씀으로서, 그리고 노동조합의 틀 밖에서, 대중들 사이에서, 정치적 정당들 사이에서, 그리고 정부 기구에서 벌어지는 것들을 무시함으로서 혁명의 법칙과 임무에 대한 치명적인 이해의 부족을 드러냈다. 무정부주의자들이 혁명가들이었다면, 그들은 무엇보다도 결코 노동조합에 합류하지 않았던 가장 억압받던 계층을 포함하여 도시와 지방의 모든 노동인민들의 대표자들을 통합시키는 소비에트의 수립을 호소했을 것이다. 혁명적 노동자들이 자연스럽게 이들 소비에트들에서 지배적인 지위를 장악했을 것이다. 스탈린주의자들은 하찮은 소수로 남아있게 되었을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자기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무적의 힘에 대하여 확신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부르주아지 국가기구는 허공에 매달린 신세가 되었을 것이다. 한번의 강력한 타격으로도 이들 기구를 박살내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사회주의 혁명이 강력한 추진력을 받았을 것이다. 프랑스 프롤레타리아트가 레온 블룸이 오랫동안 피레네 산맥 너머의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을 봉쇄하도록 허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모스크바 관료들도 스스로에게 그러한 사치를 허용하지 못했을 것이다. 가장 힘든 문제들이 소비에트가 등장하면서 해결되었을 것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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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정치"로부터 노동조합 속에 숨고자 애쓰던 무정부주의-생디칼리스트들은 전 세계와 그들 자신에 대단히 놀랍게도 부르주아지 민주주의라는 수레의 5번째 바퀴인 것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그리 오래지 않아 5번째 바퀴는 불필요해진다. 가르시아 올리버와 그의 동류들이 스탈린과 그의 똘마니들이 노동자들로부터 권력을 빼앗는 것을 도와준 이후, 무정부주의자들 자신이 인민전선 정부로부터 쫓겨났다. 그리고 나서조차 그들은 승리자를 지지하면서 그들에게 자신들의 헌신적인 애정을 확인해주는 것 이외에는 하지 않았다. 그들은 대 부르주아지 앞에서의 소 부르주아지의 두려움, 대(大)관료 앞에서의 소관료의 두려움을 (희생자와 사형 집행자들 사이의) 공동전선의 신성함과 자기 자신의 것을 포함하여 어떠한 종류의 독재도 허용할 수 없음에 대한 애절한 표현들로 덮어 가렸다. "결국, 1936년 7월에 우리가 권력을 잡을 수 있었는데..." "결국, 1937년에 우리가 권력을 잡을 수 있었는데..." 무정부주의자들은 자신들의 혁명에 대한 배신을 이해하고 칭찬해 달라고 스탈린-네그린에게 애원했다. 구역질나는 장면!</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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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을 장악할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권력을 장악하지 않았는데, 이것은 우리가 모든 종류의 독재에 반대했기 때문이었다"는 등의 자기 정당화에는 완전히 반혁명적인 이론으로서의 무정부주의에 대한 결정적인 비난이 본래적으로 포함되어 있다. 권력의 장악을 비난하는 것은 그 권력을 휘두르는 자들, 즉 착취자들에게 자발적으로 권력을 남겨두는 것이다. 모든 혁명의 본질은 새로운 계급이 권력을 장악하여 자기 자신의 강령을 현실에서 실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에 있었고, 그러한 것에 있다. 전쟁을 수행하면서 승리를 거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권력장악을 준비하는 것 없이 대중들을 봉기로 이끄는 것은 불가능하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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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도 권력 장악 이후에 무정부주의자들이, 물론 그들의 강령이 실현 가능한 것이라고 가정하면서, 자신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종류의 정권을 수립하는 것을 막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무정부주의 지도자들 스스로가 그것에 대한 신념을 잃었다. 그들은 권력으로부터 숨었는데, 그것은 그들이 "모든 종류의 독재"를 반대하기 때문이 아니라(실제로는 그들은 투덜대고 푸념하면서도 스탈린-네그린의 독재를 지지했고, 여전히 지원한다), 그들이 만약 그들이 가지고 있었다면 어떤 것이건 원칙과 용기를 완전히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들은 "고립", "개입", "파시즘" 모든 것들을 두려워했다. 그들은 프랑스와 영국을 두려워했다. 무엇보다도 이들 빈말꾼들은 혁명적 대중들을 두려워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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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 장악에 대한 포기는 필연적으로 모든 노동자 조직들을 개량주의의 늪으로 내 던지고, 그 조직들을 부르주아지의 노리개로 바꾼다. 계급적 구조를 가지는 사회라는 관점에서 이것은 다른 것이 될 수 없다. 권력의 장악이라는 목적에 반대하던 무정부주의자들은 결국에는 혁명이라는 수단에 반대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CNT와 FAI의 지도자들은 1936년 7월에 부르주아지가 계속해서 권력의 그림자를 붙들 수 있도록 도와주었을 뿐만 아니라, 한번의 타격에 의해서 그들이 잃어버렸던 것들을 조금씩 복구할 수 있도록 그들을 도와주었다. 1937년 5월에 CNT와 FAI의 지도자들은 노동자들의 봉기를 사보타지했고, 그럼으로써 부르주아지의 독재를 구원해주었다. 따라서 단지 반(反)정치적이기를 원했던 무정부주의는 실제로는 혁명에 반대하는 것으로 드러났으며, 보다 결정적인 순간에는 반(反)혁명적이었던 것으로 드러났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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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37년에 있었던 커다란 시험 이후에도 크론슈타트에 관한 과거의 반동적 난센스를 되풀이하며, "스탈린주의는 맑스주의와 볼셰비키주의의 필연적 귀결임"을 단언하는 무정부주의 이론가들은 이것으로 간단하게 자신들이 혁명을 위해서는 영원히 쓸모가 없음을 드러낸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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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주의는 본래적으로 타락했고, 스탈린주의는 그것의 합법적인 후계자라고 말하는가? 그러나 우리 혁명적 맑스주의자들은 왜 전세계적으로 스탈린주의와의 생사를 건 투쟁을 벌이고 있는가? 왜 스탈린주의 깡패집단은 트로츠키주의에서 최고의 적을 발견하는가? 왜 우리의 관점이나 우리의 실천의 방책들에 대한 모든 접근(두루티(Durruti), 안드라데(Andres), 닌(Nin), 랜도(Landau) 등등)이 스탈린주의 깡패들로 하여금 피비린내 나는 보복에 의존하도록 강제하는가? 반면, 왜 스페인 무정부주의자들의 지도자들은 GPU에 의해서 모스크바와 마드리드에서의 범죄가 자행되던 동안에 부르주아지와 스탈린의 하인으로서, 카발레로-네그린 하에서 장관으로 복무했는가? 왜 심지어 지금도 파시즘에 맞선 투쟁을 핑계로 무정부주의자들은 파시즘에 맞선 투쟁에서 자신들의 무능력을 증명했던 혁명에 대한 사형집행자인 스탈린-네그린의 자발적 포로로 남아 있는가?</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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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정부주의자들은 크론슈타트와 마크노(Makhno)의 뒤에 숨는 것으로는 아무도 속이지 못할 것이다. 크론슈타트 사건과 마크노와의 투쟁 속에서, 우리는 농민 반혁명으로부터 프롤레타리아트를 방어했다. 스페인 무정부주의자들은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으로부터 부르주아지 반혁명을 방어했고 계속해서 방어하고 있다. 어떠한 궤변도 스페인 혁명에서 무정부주의와 스탈린주의가 바리케이드의 같은 쪽에 있었던 반면, 혁명적 맑스주의자와 함께 노동 대중들은 바리케이드의 다른 쪽에 있었다는 사실을 역사의 연보로부터 지우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프롤레타리아트의 의식 속에 영원히 남아 있게 될 진실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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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UM의 역할</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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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UM에 관한 기록이 그렇게 나은 것은 아니다. 이론의 측면에서, 확실히 POUM은 영구혁명의 정식에 스스로를 기초하려고 노력했다(이것이 스탈린주의자들이 POUM주의자들을 트로츠키주의자들로 불렀던 이유이다). 그러나 혁명은 이론적 언명들에 만족하지 않는다. 무정부주의자들을 포함하는 개량주의 지도자들에 대항하여 대중을 동원하기는커녕, POUM은 자본주의에 대한 사회주의의 우월성에 대하여 이들 신사양반들을 확신시키려고 노력했다. 이런 소리굽쇠가 POUM 지도자들의 모든 기사들과 발언들에서 울렸다. 무정부주의 지도자들과 논쟁하기 않기 위해서 그들은 CNT 내부에서 자기 자신들의 중핵을 형성하지 않았으며, 일반적으로 그곳에서 어떠한 종류의 활동도 수행하지 않았다. 격렬한 분쟁을 피하기 위하여 그들은 공화 진영의 군대에서 혁명적 활동을 수행하지 않았다. 대신에 그들은 "그들 자신의" 기구들을 지키거나, 전선에서 "그들 자신의" 구역을 장악했던 "그들 자신의" 노동조합을, "그들 자신의" 민병대를 건설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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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급으로부터 혁명적 전위를 고립시킴으로서, POUM은 전위를 무기력하게 했고 계급을 지도부가 없는 상태로 내버려두었다. 정치적으로 POUM은 내내 볼셰비키주의 보다는 자신들이 그 좌익세력에게 가리개를 제공해 주었던 인민전선에 훨씬 더 가까운 채로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POUM이 피비린내 나고 비열한 억압의 희생자로 전락했다는 것은 인민전선이 자가 자신의 좌익을 조각조각 잘라내는 것을 제외하고는 스스로의 임무를 수행하지 못한 것, 즉 사회주의 혁명을 교살시킨 것에서 기인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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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자신의 의도들과는 반대로, 결국 POUM은 혁명정당 건설의 길에 있는 최고의 걸림돌이었던 것으로 판명되었다. 어정쩡한 방식으로, 우유부단하고 분명하지 않은 방식으로, 간단히 말해서 중도주의적으로 POUM을 감정적으로 지지했던 네덜란드 혁명적 사회주의 노동자 당 지도자 스니블리에트(Sneevliet)와 같은 제4 인터내셔널의 이상주의적이고 책략에 능한 지지자들에게 가장 큰 책임이 있었다. 혁명은 중도주의를 혐오한다. 혁명은 중도주의를 폭로하고 절멸시킨다. 내친걸음에 혁명은 중도주의의 동지들과 대리인들에게 치욕을 준다. 이것이 스페인 혁명의 가장 중요한 교훈들 중의 하나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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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장의 문제</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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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칙적으로 그리고 의식적으로 모스크바의 무기에 대한 지불의 필요성으로 스탈린에 대한 자신들의 굴종을 정당화하려고 애쓰는 사회주의자들과 무정부주의자들은 간단히 말해서 능숙하지 못한 거짓말쟁이들이다. 물론 그들 중 다수는 살인이나 누명과의 인연을 끊는 쪽을 선택했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목적은 그에 상응하는 수단을 필요로 한다. 1931년 4월로부터 시작하여, 즉 모스크바의 군사적 개입보다 훨씬 더 전부터, 사회주의자들과 무정부주의자들은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을 방해하기 위하여 모든 노력을 다했다. 스탈린은 그들에게 이러한 작업을 어떻게 끝까지 수행하는지를 가르쳤다. 그들이 단지 스탈린과 정치적으로 생각을 같이 했다는 이유 때문에, 그들은 스탈린의 범죄의 공범이 되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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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무정부주의 지도자들이 조금이라도 혁명가들을 닮았더라면, 그들은 모스크바로부터의 첫 번째 공갈에 대하여 사회주의적 공세를 지속하는 것뿐만 아니라 세계 노동계급 앞에 스탈린의 반혁명적 조건들을 폭로하는 것으로 답했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사회주의 혁명과 프랑코 독재 사이에서 공개적으로 선택하도록 모스크바 관료들 강제했을 것이다. 테르미도르 관료들은 혁명을 두려워하고 증오한다. 그러나 그들은 또한 파시스트의 밧줄에 교수형 당하는 것 또한 두려워한다. 이외에도 테르미도르 관료들은 노동자들에 의존한다. 아마도 모스크바가 보다 합리적인 가격으로 무기를 공급하도록 강제되었을 것이라는 징후가 농후하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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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세상이 스탈린주의 모스크바의 주변을 도는 것은 아니다. 1년 반의 내전 동안, 스페인 전쟁산업은 몇 개의 민간 공장들을 전쟁 생산으로 바꾸는 것을 통해서 강화되고 발전될 수 있었고 그래야 했을 것이다. 이 작업은 오로지 스탈린과 그의 스페인 동맹들이 공히 노동자 조직의 주도성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수행되지 않았다. 강력한 전쟁산업은 노동자들의 수중에 있는 강력한 기구가 되었을 것이다. 인민전선의 지도자들은 모스크바에 의존하는 것을 택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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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하게 이 문제에 관하여 인민전선의 배신적인 역할이 아주 충격적으로 폭로되었다. 인민전선은 스탈린의 부르주아지와의 배신적인 거래에 대한 책임을 노동자들의 조직들에 강제로 떠넘긴다. 무정부주의자들이 소수파로 남아 있었던 한, 당연히 그들은 그것이 무엇이건 지배 블럭이 모스크바와 모스크바의 지배자들인 런던과 파리를 기쁘게 할 책임을 떠맡는 것을 막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전선에서 최고의 투사들이기를 멈춤이 없이, 그들은 배신과 배신자들로부터 공개적으로 자신들을 분리할 수 있었을 것이고 그랬어야 했을 것이다. 그들은 대중들에게 실제 상황을 설명하고, 대중들을 부르주아지 정부에 대항하여 조직하며, 결국에는 권력을 장악하기 위하여 자신의 세력을 확대하고, 그것을 가지고 모스크바의 무기를 장악할 수 있었을 것이고, 그랬어야 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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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만약 인민전선이 없는 가운데 모스크바가 무기를 제공하는 것을 완전히 거부해야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리고 우리는 이것에 대하여 만약 소련이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면 이라고 대답한다. 혁명들은 이때까지 승리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결코 혁명들에 무기를 공급했던 고매하고 강력한 외국의 후원자들 덕분이 아니었다. 일반적으로는 반혁명이 외국의 후원의 덕을 본다. 우리가 반드시 소비에트에 대항했던 프랑스, 영국, 미국, 일본, 그리고 기타 군대들의 개입의 경험을 다시 상기해야만 하는가?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트는 외부의 군사적 도움이 없이 국내의 반동과 외국의 개입세력들을 패퇴시켰다. 혁명은 첫째로 영토에 있던 무기를 장악할 가능성과 적들의 무기를 파괴할 가능성을 대중들에게 제공했던 강력한 사회적 강령의 도움으로 성공했다. 적군은 프랑스, 영국, 미국 군대의 장비들을 장악했고, 외국 파견 군대를 바다로 내 몰았다. 진정으로 이것을 잊었단 말인가?</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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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무장한 노동자와 농민들의 선두에, 소위 공화국 스페인의 선두에 비겁한 부르주아지의 대리인들이 아니라 혁명가들이 있었다면, 무장의 문제는 결코 주요한 것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식민지 모로코인들과 무쏠리니의 병사들을 포함하는 프랑코의 군대는 결코 혁명의 역병에 대한 면역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에 군대와 군사적 "천재들"이 부족했던 것이 아니다. 부족했던 것은 혁명적 정당이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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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를 위한 조건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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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취자들의 군대에 맞서는 내전에서 대중들의 승리를 위한 조건들은 그 본질에서 매우 단순하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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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혁명군대의 투사들은 과거의 ("민주주의적") 착취의 양식의 재수립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완전한 사회적 해방을 위해서 투쟁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어야만 한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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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혁명군대의 후방뿐만 아니라 적의 후방에 있는 노동자와 농민들도 똑같은 것을 알고 이해하고 있어야만 한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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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자기 자신의 전선뿐만 아니라 적의 전선, 그리고 양 진영의 후방에서의 선전은 사회혁명의 영감으로 완전히 충만해야만 한다. "우선 승리, 이후 개혁들"이라는 슬로건은 성서주의적 왕들로부터 스탈린에 이르기까지 모든 억압자와 착취자들의 슬로건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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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정치는 투쟁에 참여하는 계급들과 계층에 의해 결정된다. 혁명적 대중들은 자신들의 의지를 직접적으로 그리고 즉각적으로 표현하는 국가 기구를 가져야만 한다. 오로지 노동자, 병사, 그리고 농민의 대표들의 소비에트들만이 그러한 기구로 기능할 수 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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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혁명군대는 그들에 의해 획득된 지방들에서 사회혁명의 보다 긴급한 방책들을 선포해야만 할뿐만 아니라 현실에서 즉각적으로 실현해야만 한다. 당장 있는 식량, 공산품들, 그리고 다른 비축물의 몰수와 이것들의 궁핍한 사람들에게로의 이양, 노동인민들과 특히 전투원들의 가족들의 이해관계에 입각한 숙소와 주거의 재분배, 농민의 이해관계에 입각한 토지와 농경 물품의 몰수, 과거 관료를 대신하여 노동자 통제와 소비에트 권력의 재수립.</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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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민주주의자", "공화주의자", "사회주의자" 그리고 "무정부주의자"로 위장했을 지라도, 사회주의 혁명의 적들, 즉 착취분자들과 그들의 대행자들은 군대로부터 가차없이 쫓겨나야만 한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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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각각의 군 단위의 수장에는 혁명가로서 그리고 병사로서 이론의 여지가 없는 권위를 가지는 인민위원들이 배치되어야만 한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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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각각의 군 단위에는 노동자 조직에 의해 추천 받은, 굳건하게 단련된 가장 자기 희생적인 중핵이 있어야만 한다. 이 중핵의 성원들은 단지 하나의 특권만을 가지는데, 그것은 적들의 포화에 맞서 선두에 서는 것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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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지휘부대는 처음에는 어쩔 수 없이 전체 성원들 중에서 이질적이고 신뢰할 수 없는 인자들을 포함한다. 그들에 대한 검증과 재검증, 그리고 가려냄은 전투경험, 위원들의 추천들, 그리고 일선 병사대오의 증언에 기초해야만 한다. 이와 동시에 혁명적 노동자들로부터 뽑힌 지휘관들에 대한 치열한 훈련이 진행되어야만 한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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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내전의 전략은 군사적 기예의 법칙들을 사회혁명의 임무들과 결합시켜야만 한다. 선전에서뿐만 아니라 군사 작전에서도 역시 적의 다양한 군사 단위들의 사회적 구성(자발적으로 지원한 부르주아지, 동원된 농민들, 혹은 프랑코의 경우에서처럼 식민지 노예들)을 고려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작전의 노선을 정함에 있어서, 해당되는 지역들의 사회 체계(산업지역, 농민지역, 혁명적 혹은 반혁명적, 억압받는 민족들의 지역 등등)를 엄격하게 고려해야 할 필요가 있다. 간단히 말해, 혁명의 정책이 [내전의-해석자의 첨가] 전략보다 우위에 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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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혁명정부와 노동자와 농민들의 집행위원회는 모두 어떻게 군대와 노동인민들의 완전한 신뢰를 획득하는지 알고 있어야만 한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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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외교 정책은 전 세계의 노동자, 피착취 농민들, 그리고 피억압 민족들의 자각을 자신의 주요한 목적으로 가져야만 한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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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은 패배의 조건을 보장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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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보듯이 승리를 위한 조건들은 아주 분명하다. 전체로서 이것들은 사회주의 혁명이라는 이름을 지니고 있다. 스페인에는 이것들 중 어느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다. 기본적인 이유는 혁명적 정당의 부재이다. 스탈린이 정치국, 인민위원, 세포, GPU 등등의 볼셰비키주의의 외견상의 관행들을 스페인의 토양에 이식하려고 시도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이들 형식들의 사회적 내용을 비워버렸다. 그는 볼셰비키 강령을 거부했고, 그것으로 대중들의 혁명적 주도성을 위해 필수적인 형식으로서의 소비에트들을 거부했다. 그는 볼셰비키주의의 기능을 부르주아지적 소유에 유용하게 배치했다. 자신의 관료적 편협함으로부터 그는 "인민위원들" 그 자체가 승리를 보장할 수 있다고 상상했다. 그러나 사적소유의 인민위원들은 단지 패배를 보장할 수 있었을 뿐이었음이 드러났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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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프롤레타리아트는 최고의 군사적 자질들을 보여주었다. 나라의 경제생활과 정치적 문화적 수준에서의 특별한 무게감으로 인해, 스페인 프롤레타리아트는 혁명의 첫 번째 날에 1917년의 시작에서의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보다 낮은 곳이 아니라 높은 곳에 서 있었다. 승리를 향한 길에서, 그 자신의 조직들이 주요한 걸림들로 서 있었다. 자신들의 반혁명적 기능과 일치하게, 스탈린주의의 지도적 도당은 돈으로 고용된 자들, 출세주의자들, 낙오한 인자들, 그리고 전반적으로 모든 종류의 사회적 인간쓰레기들로 구성되었다. 구제불능의 개량주의자들, 무정부주의 허풍쟁이들, POUM의 가망 없는 중도주의자들을 포함하는 다른 노동자 조직들의 대표자들은 투덜거리면서, 괴로워하면서, 동요하면서 책략을 부렸으나, 결국에는 스탈린주의자들에 순응했다. 그들의 합동 실천의 결과 노동자와 농민들의 사회혁명 진영은 부르주아지에, 혹은 보다 정확하게 부르주아지의 그림자에 종속되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사회혁명 진영은 짜내질 대로 다 짜내졌고, 그것의 성격은 파괴되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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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들 차원에서의 영웅적 자질과 개인적인 혁명가들 차원에서의 용기가 부족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대중들은 자기 자신의 자원들에 버려졌던 반면, 혁명가들은 강령도 없고 실천의 계획도 없이 분열된 상태로 있었다. "공화파" 군 지휘관들은 군사적 승리를 획득하는 것 보다 사회 혁명을 분쇄하는 것에 더 신경을 썼다. 병사들은 자신들의 지휘관에 대한 신뢰를 잃었고, 대중들은 정부에 대한 신뢰를 잃었다. 농민들은 옆으로 비껴 섰다. 노동자들은 지치게 되었다. 패배가 패배의 뒤를 이었다. 사기저하가 급속하게 증가했다. 이 모든 것을 내전의 시작부터 예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자본주의 정권을 구출하는 임무를 스스로에게 설정함으로서, 인민전선은 스스로에게 군사적 패배의 운명을 선고했다. 볼셰비키주의를 거꾸로 돌림으로서, 스탈린은 혁명의 무덤을 파는 자의 역할을 수행하는데 완벽하게 성공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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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의 경험이 다시한번 스탈린은 10월 혁명이나 러시아 내전을 이해하는데 완전히 실패했다는 것을 증명한다는 것을 부연해야 하겠다. 그의 느림보와 같은 조야함은 1917-21년에 있었던 사태들의 폭풍우와 같은 행진에 절망적으로 뒤쳐졌다. 그가 자신의 생각을 표현했던 1917년의 그의 연설들과 글에서, 이후 그의 테르미도르 "주의"가 완전하게 착상되었다. 이 측면에서, 1937년 스페인에서의 스탈린은 볼셰비키의 1917년 3월 대회의 스탈린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1917년에 그는 단지 혁명적 노동자들을 두려워했을 뿐이었지만, 1937년에 그는 노동자들을 목졸라 죽였다. 기회주의자가 사형집행자가 되었던 것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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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방에서의 내전"</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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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결국 카발레로와 네그린 정부들에 대한 승리는 공화파 군대 후방에서의 내전을 수반했을 것이다! - 민주주의적 속물이 공포에 질려 외친다. 이것과는 별도로 마치 공화국 스페인에서 내전, 그것도 가장 비열하고 배신적인 내전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노동자와 농민에 대항하는 소유자와 착취자들의 전쟁도 없었을 것이라는 것처럼. 이 계속되던 전쟁은 혁명가들에 대한 체포와 살해, 대중운동의 파괴, 노동자에 대한 무장해제, 부르주아지 경찰의 무장, 전선에 있던 무기도 없고, 도움도 받지 못하던 노동자 부대들에 대한 포기, 그리고 최종적으로 전쟁산업의 발전에 대한 인위적인 제한에서 발견된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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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각각은 전선에 대한 잔혹한 타격, 부르주아지의 계급적 이해에 의해 지시되는 직접적인 군사적 배신으로 기능 한다. 그러나 스탈린주의자, 사회주의자, 그리고 무정부주의자들을 포함하는 "민주주의적" 속물들은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항하는 부르주아지의 내전을, 심지어 전선에 가장 인접한 지역들에서조차, "인민전선의 단결" 보호를 자신의 임무로 가지는 자연스럽고 피할 수 없는 전쟁으로 간주한다. 반면, 똑같은 속물들의 눈에는, "공화주의적" 반혁명에 맞서는 프롤레타리아트의 내전은 "반파시스트 세력들의 단결"을.... 파괴하는 범죄적인 "파시스트"적인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전쟁이다. 노만 토마스(Norman Thomas), 메이저 아틀리(Major Atlee), 오토 바우어(Otto Bauer), 지롬스키(Zyromsky), 말록스(Malraux), 그리고 듀란티(Duranty)와 로이스 피셔(Louis Fischer)와 같은 거짓말쟁이 소인배들이 전 세계적으로 이 비열한 격언을 퍼뜨린다. 그 동안 인민전선 정부는 마드리드로부터 발렌시아로, 발렌시아에서 바르셀로나로 움직인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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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들이 증명하듯이, 만약 사회주의 혁명만이 파시즘을 분쇄할 수 있다면, 다른 한편으로 프롤레타리아트의 성공적인 봉기는 지배계급들이 가장 커다란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에만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민주주의적 속물들은 프롤레타리아트 봉기의 예민함에 대한 증거로서 정확하게 이러한 어려움을 인용한다. 만약 프롤레타리아트가 민주주의적 속물들이 자신들에게 해방의 시간을 말해주기를 기다린다면, 프롤레타리아트는 영원히 노예로 남아 있을 것이다. 모든 가면을 뒤집어 쓴 반동적 속물들을 인식하고, 가면과 무관하게 속물들을 경멸하도록 노동자들을 가르치는 것이 혁명가들의 첫 번째요 가장 중요한 임무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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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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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 진영에 대한 스탈린주의자들의 독재는 본질적으로 오래가지 못한다. 만약 인민전선이라는 정치로부터 발생하는 패배들이 스페인 프롤레타리아트를 다시한번 혁명적 공세로 나아하게 한다면(이번에는 성공적으로), 스탈린주의 도당은 철 빗자루로 쓸려나갈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쪽의 가능성이 높은데) 스탈린이 혁명의 무덤을 파는 자로서의 작업을 끝까지 수행하는데 성공한다면, 그는 이 경우에도 감사의 말을 듣지는 못할 것이다. 스페인 부르주아지는 사형집행인으로서 스탈린을 필요로 하지만, 그를 후원자나 혹은 스승으로서 필요로 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한편으로 런던과 파리, 다른 한편으로 베를린과 로마는 모스크바 보다 훨씬 더 용해력이 있는 국가들이다. 스탈린 자신이 최종적인 파국 이전에 스페인에서의 자신의 흔적들을 덮어 가리기를 원할 수도 있다. 그래서 스탈린이 패배에 대한 책임을 자신의 가장 가까운 동맹들에게 지우려 하지 않기를 바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리트비노프(Litvinov)가 외교적 관계의 재수립을 프랑코에게 간청하게 될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은 우리가 여러 번 보아온 것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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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장군 프랑코에 대한 소위 공화 군대의 완전한 군사적 승리조차 "민주주의"의 승리를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노동자들과 농민들은 1931년 4월과 1936년 2월에 부르주아지 공화주의자들과 그들의 좌익 대행자들을 2번에 걸쳐 권력에 앉혀 주었다. 2번 모두, 인민전선의 영웅들은 인민들의 승리를 부르주아지의 가장 반동적이고 가장 진지한 대표자들에게 갖다 바쳤다. 인민전선의 장군들에 의해 획득되는 3번째 승리는 노동자와 농민들의 등에 올라 탄 파시스트 부르주아지와의 필연적인 협정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한 정권은 아마도 군주 없는, 그리고 카톨릭 교회의 공공연한 지배가 없는 군사독재의 형식과 전혀 다르지 않을 것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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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공화주의자들의 부분적 승리가 투쟁하고 있는 진영들을 화해시키기 위하여 "이해관계가 없는" 영국과 프랑스의 조정자들에 의해 활용될 가능성이 있다. 이런 여러 경우에, "민주주의"의 마지막 잔재들은 장군 미아자(Miaja)(공산주의자!)와 장군 프랑코(파시스트)의 우호적인 포옹 속에서 질식되어 죽에 될 것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다시한번 반복하도록 하자. 승리는 사회주의 혁명이나 혹은 파시즘에게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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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마지막 순간에 비극이 희극에게 양보를 할 수도 있다는 것이 배제되지는 않는다. 인민전선의 영웅들이 자신들의 마지막 밑천을 소진해야만 할 때, 배와 비행기를 타기 전에, 아마도 인민들에게 "좋은 기억"을 남기기 위하여 일련의 "사회주의적" 개혁들을 선포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무 것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세계의 노동자들은 영웅적인 혁명을 파괴했던 정당들을 증오하면서 경멸적으로 기억할 것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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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의 비극적 교훈은 세계의 모든 선진노동자들에 대하여 선언되는, 더 큰 사태들에 앞선 끔찍한(아마도 마지막) 경고이다. 맑스는 "혁명들은 역사의 기관차들이다"라고 말했다. 혁명들은 반정도 혹은 4분의 1정도 혁명적인 정당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빨리 움직인다. 뒤에 처지는 자는 누구라도 기관차의 바퀴로 떨어지며, 결과적으로 (그리고 이것이 가장 큰 위험인데) 기관차 자체도 또한 희귀하게는 파괴된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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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의 문제를 끝까지, 그것의 궁극적인 구체적인 결론으로까지 숙고할 필요가 있다. "인민" 전선, 그리고 기타 모든 종류의 전선으로 부르는 피상적인 소부르주아지 그룹들의 편견과 두려움이 아닌 전투 중에 있는 계급들의 운동, 즉 혁명의 기본적인 법칙들에 정책을 맞출 필요가 있다. 혁명 중에 최소저항의 노선은 최대의 재앙의 노선이다. 부르주아지로부터의 "고립"을 두려워하는 것은 대중으로부터의 고립을 초래하는 것이다. 노동귀족의 보수적인 편견들에 순응하는 것은 노동자와 혁명에 대한 배신이다. 과도한 "신중함"은 신중함의 가장 치명적인 부족이다. 이것이 스페인에서 중도주의 POUM이라는 이름의 가장 순수한 정치 조직의 파괴의 중요한 교훈이다. 런던 사무국의 정당들과 조직들은 바로 직전의 역사의 교훈으로부터 필요한 결론들을 도출하고 싶어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할 수도 없는 것이 분명하다. 이것으로 그들은 스스로에게 사망선고를 내리는 것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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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대한 보상으로, 현재 새로운 세대의 혁명가들이 패배의 교훈을 통해서 교육을 받고 있다. 이 세대는 제2 인터내셔널의 굴욕적인 평판을 실천으로 입증했다. 이 세대는 제3 인터내셔널의 추락의 깊이를 측정했다. 이 세대는 아나키스트들을 그들의 말이 아니라 그들의 행동으로 어떻게 판단할 것인지를 배웠다. 이것은 수많은 투사들의 피로 값을 치른 헤아릴 수 없이 값진 훌륭한 학교이다! 이제 혁명적 중핵들은 오로지 제4 인터내셔널의 기치 아래에만 집결하고 있다. 패배의 울부짖음의 한가운데에서 태어난 제4 인터내셔널은 노동인민들을 승리로 이끌 것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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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끝 -</p><div class="buttons-bottom center jinboblog-i-like-this-buttons"><a class="button-jinboblog" href="javascript:void(0);" title="스크랩으로 글 링크를 저장하세요" onclick="recommend('1454',82,'/communism','');"><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mini_chuchon.png" alt="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a><a class="button-twitter" href="http://twitter.com/home?status=https%3A%2F%2Fblog.jinbo.net%2Fcommunism%2F82+%22%ED%8A%B8%EB%A1%9C%EC%B8%A0%ED%82%A4_%EC%8A%A4%ED%8E%98%EC%9D%B8%EC%9D%98%20%EA%B5%90%ED%9B%88%3A%20%EB%A7%88%EC%A7%80%EB%A7%89%20%EA%B2%BD%EA%B3%A0%22" target="_blank" title="트위터로 리트윗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twitter.png" alt="트위터로 리트윗하기" /></a><a class="button-facebook" href="http://www.facebook.com/sharer.php?u=https%3A%2F%2Fblog.jinbo.net%2Fcommunism%2F82&t=%ED%8A%B8%EB%A1%9C%EC%B8%A0%ED%82%A4_%EC%8A%A4%ED%8E%98%EC%9D%B8%EC%9D%98%20%EA%B5%90%ED%9B%88%3A%20%EB%A7%88%EC%A7%80%EB%A7%89%20%EA%B2%BD%EA%B3%A0" target="_blank" title="페이스북에 공유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facebook.png" alt="페이스북에 공유하기" /></a><a class="button-delicious" href="http://delicious.com/save" onclick="window.open('http://delicious.com/save?v=5&noui&jump=close&url=https%3A%2F%2Fblog.jinbo.net%2Fcommunism%2F82&title=%ED%8A%B8%EB%A1%9C%EC%B8%A0%ED%82%A4_%EC%8A%A4%ED%8E%98%EC%9D%B8%EC%9D%98%20%EA%B5%90%ED%9B%88%3A%20%EB%A7%88%EC%A7%80%EB%A7%89%20%EA%B2%BD%EA%B3%A0','delicious','toolbar=no,width=550,height=550'); return false;" title="딜리셔스에 북마크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delicious.png" alt="딜리셔스에 북마크" /></a></div><p><strong><a href="https://blog.jinbo.net/communism/82?commentInput=true#entry82WriteComment">댓글 쓰기</a></strong></p>플레하노프, 레닌 그리고 트로츠키에 의하여 예견된 바로서의 러시아 혁명의 성격얼치기 공산주의자https://blog.jinbo.net/communism/812013-05-16T09:47:59+09:002013-05-16T09:47:59+09:00<p>
<strong> [http://www.marxists.org]</strong></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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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ong>플레하노프</strong><strong>, 레닌 그리고 트로츠키에 의하여 예견된 바로서의 러시아 혁명의 성격</strong></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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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ong> 트로츠키</strong></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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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ong> 1940년</strong></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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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혁명은 “1917년의 총 연습”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모든 러시아의 정치사상 그룹들이 등장했고, 러시아 맑스주의 내부에 있는 모든 경향들과 명암들이 모양을 갖추거나 윤곽을 갖추었던 실험실이기도 했다. 러시아 혁명의 역사적 성격과 발전 경로들에 관한 문제들이 자연스럽게 논쟁들과 차이들의 중심을 차지했다. 그 자체로, 그리고 자연히 이 개념들과 예측들의 전쟁은 그 속에서 독립적인 부분을 차지하지 않았던 스탈린의 전기에 직접적으로 연관되지는 않는다. 그 주제에 관하여 스탈린이 썼던 몇 안 되는 선전 기사들은 가장 사소한 이론적 흥미조차도 없는 것들이다. 수십 명의 볼셰비키들이 똑같은 사상들을 대중화했고, 그것을 훨씬 더 정교하게 했다. 본질적으로 볼셰비키주의의 혁명적 개념에 대한 비판적 설명이 레닌의 전기 속으로 들어가야 했다. 하지만, 이론들은 그들 자신의 운명을 가지고 있다. 혁명적 교의들이 만들어지고 현실화되었던 첫 번째 혁명의 기간 동안과 그 이후 1923년까지의 기간 동안에 스탈린이 어떠한 독립적 입장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1924년부터는 상황이 갑자기 달라진다. 관료적 반동과 과거에 대한 격렬한 평가의 시대가 열린다. 혁명의 필름이 거꾸로 돌아간다. 과거의 교의들은 새로운 평가들과 새로운 해석들에 굴복한다. 한눈에 봐도, 매우 예상외로 “트로츠키주의”라는 모든 대 실책의 근원으로서의 “영구혁명”의 개념이 관심의 중심을 차지한다. 그 이후 수년 동안, 이 개념에 대한 비판이 스탈린과 그의 협조자들의 이론적[sit venio verbo] 작업의 주요한 내용을 구성한다. 이론적 지평에서 본다면 전체 스탈린주의가 1905년에 정식화되었던 것과 같은 영구혁명의 이론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성장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정도까지, 멘셰비키와 볼셰비키의 이론들과 구별되는 것으로서의 이 이론에 대한 설명이 부록의 형식으로이기는 하지만 이 책 속으로 들어가지 않을 수 없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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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ong> 러시아의 결합발전</strong></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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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발전은 후진성에 의하여 무엇보다도 특징지어진다. 하지만, 역사적인 후진성은 단지 한 두 세기의 지연 속에서의 선진국들의 발전의 단순한 재생산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봉건적, 전(前)봉건적 야만주의라는 관계들을 변형시키고, 그것들을 복종시키는 가운데, 그리고 계급들 사이의 특이한 관계를 창출하는 가운데 자본주의적 기술과 구조의 가장 최근의 획득물들이 스스로를 그것들 속으로 뿌리를 내리는, 완전히 새로운 “결합된” 사회의 형성을 야기한다. 사상의 영역에서도 똑같은 것이 적용된다. 정확하게 러시아의 역사적 더딤 때문에, 러시아는 교의로서의 맑스주의와 당으로서의 사회민주당이 부르주아지 혁명 이전에 조차 강력한 발전을 획득했던 유럽의 유일한 나라로 판명되었다.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과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 사이의 상호관계의 문제가 가장 심오한 이론적 분석에 정확하게 따르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일 뿐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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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로 나로드니크들이었던 이상주의적 민주주의자들은 임박한 혁명을 부르주아지적인 것으로 인정하는 것을 미신에 사로잡혀 거부했다. 중립적인 정치공식으로 혁명의 사회적 내용을 다른 사람들로부터 뿐만 아니라 그들 자신으로부터도 덮어 가리고자 하면서, 그들은 임박한 혁명에 “민주주의적”이라는 딱지를 붙였다. 그러나 나르드니크주의에 맞선 투쟁에서, 러시아 맑스주의의 창시자인 플레하노프는 지난 세기 80년대 초나 될 정도로 오래 전에 러시아는 다른 “불경스러운” 나라들처럼 다른 우선통행권을 가진 발전의 경로를 예측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으며, 자본주의라는 일시적인 고단함을 뚫고 나아가야만 할 것이며, 정확하게 이 경로를 따라서 사회주의를 위한 프롤레타리아트의 더한 투쟁에 필수불가결한 정치적 자유를 획득하게 될 것이라는 점을 확고히 했다. 플레하노프는 하나의 임무로서의 부르주아지 혁명을 그가 특정할 수 없는 미래로까지 미루었던 사회주의 혁명으로부터 떼어놓았을 뿐만 아니라 이들 각각을 위하여 전혀 다른 세력들의 조합들을 그려냈다. 정치적 자유는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지 계급과 연합한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하여 성취되어야 하고, 수십 년이 지난 후 그리고 더 높은 자본주의적 발전의 단계에서야 비로소 프롤레타리아트는 부르주아지 계급에 맞서는 직접적인 투쟁 속에서 사회주의 혁명을 수행하게 될 것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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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지식인들에게 있어서, 우리의 혁명을 부르주아지적인 것으로 인정하는 것은 항상 그것을 더럽히는 것이요, 그것을 격하시키는 것이며, 그것을 천박하게 만드는 것처럼 보인다... 프롤레타리아트에게는, 부르주아지 사회에서의 정치적 자유와 민주주의 공화국을 위한 투쟁은 단순히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투쟁에서 필요한 단계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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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1905년에는 다음과 같이 썼다. “맑스주의자들은 러시아 혁명의 부르주아지적 성격에 대하여 절대적으로 확신한다”고 썼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러시아를 위하여 필수불가결한 것이 되어 온 그러한 민주주의적 변형들이 그 자체로 그리고 자연스럽게 자본주의의 침식을, 부르주아지 지배의 침식을 의미하지 않고, 반대로 그것들이 처음으로 그리고 진정한 방식으로 폭넓고 신속한, 아시아적인 것이 아닌 유럽적인 자본주의의 발전을 위한 토양을 개척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들이 처음으로 계급으로서의 부르주아지 계급의 지배를 가능하게 만들 것이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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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우리는 러시아 혁명의 부르주아지 민주주의적 틀을 넘어설 수 없지만, 이 틀을 엄청난 정도로 확장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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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말해서, 우리는 프롤레타리아트의 미래의 투쟁을 위한 훨씬 더 우호적인 조건들을 부르주아지 사회 내부에서 만들어 낼 수 있다. 이들 한계들 내에서 레닌은 플레하노프를 따랐다. 혁명의 부르주아지적 성격은 러시아 사회민주당의 두 분파들에게 그들의 출발점으로서 복무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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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조건들 하에서, 코바(스탈린)가 자신의 선전에서 볼셰비키뿐만 아니라 멘셰비키의 공통의 성질을 구성하고 있는 이들 대중적인 공식을 넘어서 나아가지 않았다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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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1905년 1월에 “평등, 직접, 그리고 비밀 보통선거의 기초에서 선출되는 제헌의회 - 현재 우리가 투쟁해야만 하는 것은 이것을 위한 것이다! 오로지 사회주의를 위한 우리의 투쟁을 위하여 우리에게 그렇게도 긴급하게 필요한 이 의회만이 우리에게 민주주의 공화국을 줄 것이다“라고 썼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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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적 목적을 위하여 지속되는 계급투쟁을 위한 장으로서의 부르주아지 공화국, 그러한 것이 전망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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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즉 페테르스부르크와 해외 양쪽 모두의 신문에서의 무수히 많은 토론들 이후, 그리고 첫 번째 혁명의 경험 속에서 이론적 예측들에 대한 진지한 검증 이후에, 스탈린은 다음과 같이 썼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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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혁명이 부르주아지적이라는 것, 혁명이 반드시 자본주의 질서가 아니라 봉건 질서를 파괴하는 것으로 귀결되어야만 한다는 것, 혁명은 오로지 민주주의 공화국에 의해서만 성취될 수 있다는 것 - 이것에 관하여는 우리 당내 모두가 동의하는 것으로 보인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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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은 혁명이 무엇을 가지고 시작되는지에 관하여가 아니라, 그것이 무엇으로 끝나는 지에 관하여 말했으며, 그는 미리 그리고 매우 명료하게 “오로지 민주주의 공화국”으로 혁명을 제한했다. 우리가 그의 글에서 민주주의적 전복과 연결되는 사회주의 혁명의 어떠한 전망에 대한 암시조차도 찾으려 한다면 그것은 헛된 일이 될 것이다. 이것은 1917년 2월 혁명의 시작에서 레닌의 페테르스부르크 도착 때까지 그의 입장으로 남아 있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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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ong>멘셰비키의 관점</strong></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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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하노프, 악셀로드, 그리고 멘셰비키주의의 지도자들에게는 전반적으로 부르주아지적인 것으로서의 혁명의 사회학적 성격이 무엇보다도 정치적으로 가치가 있었는데, 이것은 그것이 사회주의의 망령으로 부르주아지 계급을 도발하지 못하게 했고, 부르주아지 계급을 반동 진영으로 “쫓아버리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사회적 관계들은 오직 부르주아지 혁명을 위해서만 무르익었다”고 멘셰비키의 최고 전술가인 악셀로드는 통합대회에서 말했다. “우리나라에서의 정치적 권리의 전반적인 박탈을 앞에 두고, 정치권력을 위한 프롤레타리아트와 다른 계급들 사이의 직접적인 전투에 관한 이야기는 있을 수조차 없다... 프롤레타리아트는 부르주아지적 발전의 조건들을 위하여 투쟁하고 있다. 객관적인 역사적 조건들이 공동의 적에 맞서는 투쟁에서 부르주아지 계급과 어쩔 수 없이 협력하는 것을 우리 프롤레타리아트의 운명으로 만든다.” 그래서 러시아 혁명의 내용은 미리 자유주의 부르주아지 계급의 이해와 관점들과 양립하는 그러한 변형들로 제한되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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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분파들 사이의 기본적인 불일치가 시작되는 것이 정확하게 바로 이 지점이다. 볼셰비키주의는 러시아의 부르주아지 계급이 자기 자신의 혁명을 끝까지 지도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을 절대적으로 거부했다. 레닌은 플레하노프보다 무한히 거대한 힘과 일관성을 가지고 러시아에서의 민주주의적 전복의 중심적인 문제로서 경작지 문제를 제기했다. 그는 “러시아 혁명의 급소는 경작지(토지) 문제이다. 혁명의 승리나 패배와 관련되는 결론들은 ... 토지를 위한 투쟁에서 대중들의 조건에 대한 계산에 기초해야만 한다”고 반복했다. 플레하노프와 함께, 레닌은 농민을 소부르주아지 계급으로 바라보았으며, 농민 경작지 강령을 부르주아지적 진보의 강령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통합대회에서 “국유화는 부르주아지적 방책이다. 그것은 자본주의 발전에 자극을 줄 것이며, 계급투쟁을 첨예하게 할 것이며, 토지의 동산화를 강화할 것이며, 자본의 농업으로의 유입을 야기할 것이며, 곡물의 가격을 인하할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농지 혁명의 의심의 여지가 없는 부르주아지적 성격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의 부르주아지 계급은 부동산의 몰수에 적대적인 채로 남아 있으며, 정확하게 이 이유 때문에, 프러시아 식의 입헌군주제와의 타협을 위하여 애쓴다. 프롤레타리아트와 자유주의 부르주아지 계급 사이의 동맹이라는 플레하노프의 사상에 대하여, 레닌은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 사이의 동맹이라는 사상을 대치시켰다. 이들 두 계급들의 혁명적 협력의 임무는 러시아에서 봉건적 잡동사니를 급진적으로 청소하고, 자유로운 농민들의 체제를 창출하며, 프러시아 노선들이 아니나 미국의 노선을 따른 자본주의의 발전을 위한 길을 깨끗하게 하는 유일한 방책으로서의 “민주주의 독재”를 수립하기 위한 것이라고 그는 선포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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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즉각적으로고 긴급하게 변형들을 성취할 필요가 있고, 농민이 지주들, 대(大)부르주아지 계급, 그리고 짜르주의의 필사적인 저항을 유발할 것이기 때문에”, 혁명의 승리는 “오로지 독재에 의해서만” 성취될 수 있다. “독재가 없이는, 혁명은 저항을 깨뜨리고 반혁명적 시도들을 격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물론 이것은 사회주의 독재가 아니라 민주주의 독재일 것이다. 그것은 (혁명적 발전의 일련의 이행의 국면들 전체가 없이는) 자본주의의 기초들을 건드릴 수 없을 것이다. 최선의 경우에, 그것은 농민들을 위한 토지 재산의 급진적 재분할을 현실화하고, 공화국을 성립하는 것까지의 일관성 있고 완전한 민주정치를 도입하며, 농촌의 일상생활로부터 뿐만 아니라 공장으로부터도 모든 아시아적이고 봉건적인 요소들을 뿌리 뽑고, 노동자들의 조건들과 그들의 생활수준의 상승의 중대한 개선이 시작되도록 하고, 마지막으로는 혁명적 대 화재를 유럽으로 옮길 수 있을 것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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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ong> 레닌의 입장의 취약성</strong></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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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의 개념은 그것이 헌법적 개혁들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혁명의 중심적 과제로서의 농지 전복으로부터 기인하는 한 엄청난 전진을 의미했으며, 혁명의 성취를 위한 사회 세력들의 유일하게 현실적인 조합을 뽑아낸 것이었다. 하지만 레닌의 개념의 약점은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민주주의 독재”라는 내부적으로 모순되는 생각이었다. 그 독재를 공공연하게 부르주아지적인 것이라고 불렀을 때, 레닌 스스로가 이 “독재”의 근본적인 한계를 강조했다. 이것으로 레닌은 농민과의 동맹을 지키기 위하여 프롤레타리아트는 다가오는 혁명에서 사회주의적 임무들의 직접적인 제기를 선행해야만 할 것이라고 말 하려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문제의 요지는 비록 노동자들의 참여가 있기는 하지만, 농민의 독재를 포함했다. 어떤 경우에는 레닌은 단지 이것만을 이야기 했다. 예를 들면, 스톡홀롬 대회에서, 권력 장악이라는 “유토피아”에 반대했던 플레하노프를 논박하면서 레닌은 이렇게 말했다. “무슨 강령이 토론되고 있는가? 농민. 이 강령 하에서는 누가 권력을 장악하는 것으로 가정되어 있는가? 혁명적 농민. 레닌은 이 농민과 프롤레타리아트의 권력을 뒤섞고 있는가?” 레닌은 스스로를 참조하면서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사회주의 권력을 농민의 부르주아지 민주주의 권력과 날카롭게 구별한다. 그는 “그러나 혁명적 농민에 의한 권력의 장악이 없이 어떻게 농민 혁명의 승리가 가능한가?”라고 다시 외친다. 이 논쟁적인 정식에서, 레닌은 그의 입장의 취약성을 특별히 명료하게 드러낸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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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은 주요한 접합점들이 도시들인 광대한 나라의 표면에 걸쳐 흩어져 있다. 각각의 지구마다 이해관계가 다르게 나타나기 때문에, 농민 스스로는 자기 자신의 이해관계를 정식화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주(州)들 사이의 경제적 연결은 시장과 철도들에 의하여 만들어지지만, 시장과 철도들은 도시의 수중에 있다. 농촌이라는 제한조건들로부터 스스로를 떼어 놓고, 자기 자신의 이해관계를 일반화하기 위하여, 농민은 어쩔 수 없이 도시에 대한 정치적 의존에 빠져들게 된다. 결정적으로, 농민은 그들의 사회적 관계에서도 이질적이다. 즉, 쿨락 계층은 도시 부르주아지와의 동맹으로 흔들리는 반면, 농촌의 다른 계층은 도시 노동자들 쪽으로 당겨진다. 이러한 조건들 하에서, 농민은 그 자체로 권력을 장악하는 것이 완전히 불가능하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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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중국에서 혁명들이 농민을 권력에 앉혔거나, 혹은 보다 정확하게는 농민 봉기의 군사 지도자들을 권력에 앉혔다는 것은 그대로 사실이다. 이것은 매번 토지의 재분할과 새로운 “농민” 왕조의 수립으로 귀결되었고, 그 후에는 새로운 폭리의 집중과 새로운 봉기라는 역사가 처음부터 다시 시작된다. 혁명이 자신의 순전히 농민적 성격을 보존하는 한, 사회는 이들 희망 없고 사악한 순환들로부터 빠져나올 수 없다. 이것이 고대 러시아 역사를 포함하는 고대 아시아적 역사의 기초였다. 중세의 종결과 함께 시작되는 유럽에서는, 각각의 승리한 농민 봉기가 농민 정부가 아니라 좌익 도시 정당들을 권력에 앉혔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농민 봉기는 정확하게 도시민의 혁명적 부위의 지위를 강화하는데 성공했던 정도만큼만 승리하는 것으로 끝이 났다. 20세기의 부르주아지적 러시아에서는, 이것들이 혁명적 농민에 의한 권력의 장악에 관한 화제조차 될 수 없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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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ong>자유주의에 대한 태도</strong></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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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했던 것처럼, 자유주의 부르주아지 계급에 대한 태도는 사회민주주의자들의 대오에서 혁명주의자들과 기회주의자들 사이의 구분의 시금석이었다. 러시아 혁명은 얼마나 더 나아갈 수 있을까? 미래의 혁명적 임시정부의 성격은 무엇이 될 것인가? 혁명적 임시정부는 어떤 임무들과 대면하게 될 것인가? 그리고 무슨 질서에서? 모든 그것들의 중요성을 지니는 이 문제들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책의 근본적인 성격이라는 기초 위에서만 올바르게 제기될 수 있었고, 이 정책의 성격은 이번에는 무엇보다도 자유주의 부르주아지 계급에 대한 태도에 의하여 결정되었다. 플레하노프는 프롤레타리아트가 독립적 세력으로서 앞으로 나설 때마다 부르주아지는 반혁명 진영으로 옮겨 간다는 19세기의 정치역사의 근본적인 결론에 대하여 명백하게 그리고 완고하게 눈을 감았다. 대중투쟁이 더욱 대담할수록, 자유주의의 반동적 퇴행이 더 빨라진다. 아직까지 누구도 계급투쟁의 법칙의 효과들을 무력화시킬 방책들을 발명하지 못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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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혁명의 몇 해들 동안에 플레하노프는 “우리는 비-프롤레타리아트 정당들의 지지를 소중히 해야만 하며, 감각 없는 행동들로 그들을 우리로부터 쫓아내지 말아야만 한다”고 반복했다. 이런 종류의 단조로운 설교로, 그 맑스주의 철학자는 사회의 살아있는 동학들이 자신에게는 도달하기 어려운 것이라는 점을 보여주었다. “감각 없음”이 예민한 개별 지식인을 쫓아버릴 수 있다. 계급들과 정당들은 사회적 이해관계에 의하여 끌어당겨지거나 밀쳐내 지거나 한다. 레닌은 “자유주의자들과 지주들은 수백만 번의 ‘감각 없는 행동’에 대하여 당신을 용서할 것이지만, 땅을 빼앗으려는 설교에 대해서는 당신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고 플레하노프에 응답했다. 그리고 지주들뿐만이 아니다. 부르주아지 계급의 최 상층부들은 소유를 위한 이해관계에 따른 단결, 그리고 보다 좁게는 은행 시스템에 의하여 지주들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소부르주아지 계급과 인텔리겐챠의 최고 상층부들은 대규모와 중간 규모의 재산가들에 물질적으로 도덕적으로 의존한다. 즉, 그들은 모두 독립적인 대중운동을 몹시도 두려워한다. 반면, 짜리즘을 타도하기 위해서는 영웅적이고, 자기부정의, 그리고 어떠한 것에도 멈추지 않을 구속되지 않은 혁명적 공세로 수백만의 피억압 인민들을 세워내는 것이 필요했다. 오로지 그들 자신의 이해관계라는 기치 하에서만, 그리고 그 결과로서 지주에서 시작되는 착취 계급들을 향한 비타협적인 적개심의 영감 속에서만, 대중들은 봉기로 일어설 수 있다. 따라서 반대파 부르주아지 계급의 혁명적 노동자들과 농민들로부터의 “반발 작용”은 혁명의 내재적 법칙 그 차체였으며, 외교나 “센스 있는” 방책으로는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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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마다 레닌의 자유주의에 대한 평가가 확증되었다. 멘셰비키들의 최선의 희망과는 반대로, 카데트들은 “부르주아지” 혁명의 선두에 있는 자신들의 자리를 차지할 준비를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반대로 그들은 혁명에 맞서는 투쟁 속에서 더욱 더 그들의 역사적 임무를 발견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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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봉기의 분쇄 이후, 하루살이 듀마 덕분에 정치적 주목의 대상을 차지했던 자유주의자들은 자신들의 모든 힘을 다하여 군주 앞에서 스스로를 정당화하려고 시도했고, 위험이 “문화”의 가장 신성한 소품을 위협했던 1905년 가을에 있었던 그들의 충분히 적극적이지 않았던 반혁명 행위에 양해를 구한다. 겨울 궁전과의 무대 뒤 협상들을 했던 자유주의자들의 지도자 밀류코프는 1905년 말에는 카데트들이 대중들 앞에 스스로를 드러낼 수조차 없었다는 점을 신문에서 매우 정확하게 증명했다. “당시 트로츠키주의라는 혁명적 환상들에 맞서는 집회를 잡는 것으로 항의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지금 (카데트) 당을 꾸짖는 사람들은 ... 간단히 말해서, 당시 집회의 민주주의적 공공 모임들에서 지배적이었던 분위기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기억하지 못한다”라고 그는 썼다. “트로츠키주의라는 환상들”로 인하여, 그 자유주의 지도자는 도시들의 가장 아래 계층들, 병사와 농민, 그리고 모든 피억압 인민들의 호의들을 소비에트들로 끌어 당겼으며, 이로 인하여 “교육받은 사회층”을 쫓아버렸던 프롤레타리아트의 독립적 정책을 이해하였다. 멘셰비키들의 진화는 평행선을 따라서 전개되었다. 자신들이 1905년 10월 이후 트로츠키와의 블록에 있었던 것이 드러났기 때문에, 그들은 더욱 더 자유주의자들 앞에서 스스로를 정당화해야만 했다. 대중들의 “혁명적 환상들”에 대하여 양보들 할 필요가 있었다는 멘셰비키들의 유능한 출판가인 마르토프의 설명들이 여기에 해당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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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ong> 논쟁에서 스탈린 쪽</strong></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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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플리에서는 페테르스부르크에서와 똑같은 원칙적인 기초에서 정치 그룹들이 모양을 갖추었다. 코카시안 멘셰비키들의 지도자인 조르다냐는 “반동을 분쇄하고, 헌법을 쟁취하여 지탱해 내는 것 - 이것은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지 계급 세력들 편에서의 하나의 목표를 위한 의식적인 통일과 열정에 달려 있을 것이다 ... 농민이 운동에 기초적인 성격을 부여하는 가운데, 그 속으로 인입될 것이라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농민 운동은 두 개의 계급들의 방앗간에 곡물을 추가해주게 될 것인 반면, 결정적인 역할은 이들 두 개의 계급들에 의하여 수행될 것이다”라고 썼다. 레닌은 부르주아지 계급에 대한 화해 불가능한 정책은 노동자들을 무기력하게 할 것이라는 조르다냐의 두려움을 조롱했다. 조르다냐는 “민주주의적 전복에서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있을 수 있는 고립의 문제를 토론하고는 농민에 관해서는 ... 잊어버린다! 그가 알고 있는 프롤레타리아트의 가능한 모든 동맹들 중에서 그는 지주-자유주의자들에게 반해버린다. 그리고 그는 농민에 관해서는 모른다. 그리고 코카서스에 있는 농민을!” 본질에서 올바른 한편으로, 레닌의 논박들은 문제를 한 가지 지점 위에 단순화 한다. 레닌 그 자신의 암시로부터 추론될 수도 있는 것처럼, 조르다냐는 농민에 관해서 “잊어버리지” 않았으며, 당시 농민이 멘셰비키들의 기치 하에서 폭풍처럼 들고 일어나고 있었던 코카서스에서 농민에 관하여 잊었을 가능성은 없다. 하지만, 조르다냐는 농민을 프롤레타리아트와 동맹 속에서 부르주아지 계급에 의하여 활용될 수 있고, 또 그렇게 되어야 하는 역사적인 공성망치만큼의 정치적 동맹으로 보지는 않았다. 그는 농민이 혁명에서 지도적인 혹은 심지어 독립적인 세력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또한 프롤레타리아트가 승리를 위하여 농민 봉기를 지도할 수 있다는 것을 믿지도 않았다. 그리고 이 속에 그의 치명적인 실수가 있었다. 프롤레타리아트의 부르주아지 계급과의 동맹이라는 멘셰비키의 사상은 실제로는 노동자들과 농민들 모두의 자유주의자들에 대한 굴복을 의미했다. 이 강령의 반동적 이상주의는 계급들의 보다 심화된 분할이 미리 혁명적 요소로서의 부르주아지 계급을 무력화시켰다는 사실에 의하여 결정되었다. 이 근본적인 문제에서, 올바름은 온전하게 볼셰비키주의 쪽에 있었다,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지 계급과의 동맹을 좇는 것은 어쩔 수 없이 노동자들과 농민들의 혁명적 운동에 사회민주당을 대치시키게 될 것이다. 1905년에 멘셰비키들은 “부르주아지적” 혁명이라는 그들의 이론으로부터 모든 필요한 결론들을 도출할 용기가 여전히 부족했다. 1917년에 그들은 그들의 사상들을 그것들의 논리적 결론으로까지 끌어내고는 그들의 머리를 부숴 버리고 말았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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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의자들에 대한 태도의 문제에서, 스탈린은 첫 번째 혁명의 여러 해 동안에는 레닌의 편에 있었다. 이 기간 동안에는 부르주아지 계급 반대파 세력에 관계되는 주제들에서 심지어 평조직원 멘셰비키들의 다수조차 플레하노프 보다는 레닌에 더 가까왔다는 것을 말해두어야만 한다. 자유주의자들에 대한 경멸적인 태도는 지적 급진주의의 문필적 전통이었다. 하지만, 코바로부터 이 문제에 대한 독립적인 기여, 코카시아의 사회적 관계들에 대한 분석, 새로운 주장들, 혹은 심지어 오래된 주장들에 대한 새로운 정식화를 찾으려고 한다면 그것은 헛된 일일 것이다. 코카시안 멘셰비키들의 지도자인 조르다냐가 스탈린이 레닌과의 관계에서 그랬던 것 보다 훨씬 더 플레하노프와의 관계에서 독립적이었다. 1월 9일 이후에 코바는 “자유주의자들께서는 헛되이도 위기에 놓인 짜르의 권좌를 헛되이도 구하려고 한다. 그들은 헛되게도 원조의 손길을 짜르에게로 뻗치고 있다”고 썼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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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떨쳐 일어선 인민 대중들은 혁명을 준비하고 있지, 짜르와의 화해를 준비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 그렇다, 신사양반들, 당신들의 노력들은 헛된 것들이다. 러시아 혁명은 불가피하며, 해가 어쩔 수 없이 떠오르는 것만큼이나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당신들은 떠오르는 해를 멈출 수 있는가? 그것이 문제로다!” 그리고 기타 등등. 코바는 이것보다 더 위로는 오르지 않았다. 2년 반이 지난 후, 거의 글자 그대로 레닌을 반복하면서, 그는 “러시아의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지 계급은 반혁명적이다. 그들은 동기를 부여하는 세력일 수 없을 뿐 아니라 혁명의 지도자일 수는 더더군다나 없다. 그들은 공공연한 혁명의 적이며, 그들에 맞서 불굴의 투쟁이 수행되어야만 한다”고 그는 썼다. 하지만, 스탈린은 정확하게 이 근본적인 문제에 있어서 10년 후에 완전한 탈바꿈을 해야 했고, 이미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지 계급과의 동맹의 열성적인 지지자로서, 그리고 이에 따라서 하나의 당으로의 멘셰비키들과의 통합을 주장했던 자로서 2월 혁명을 마주해야 했다. 오로지 외국에서 돌아오는 레닌만이 자신이 맑스주의를 우롱하는 것으로 불렀던 스탈린의 독립적 정책을 급작스럽게 끝을 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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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ong> 농민의 역할에 대하여</strong></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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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로드니크들은 노동자들과 농민들 속에서 단순히 사회주의에 모두 동일한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는 “일하는 사람들[toilers]”과 “피착취자”를 보았다. 맑스주의자들은 농민을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농민이기를 멈추는 한에서만 오직 사회주의자가 될 수 있는 소부르주아지로 간주했다. 그들에게 특이한 감상주의를 지닌 나로드니크들은 이 사회학적 성격묘사에서 농민에 맞서는 도덕적 치욕을 감지했다. 두 세대 동안, 이 노선을 따라서 러시아의 혁명적 경향들 사이의 주요한 투쟁이 발생했다. 스탈린주의와 트로츠키주의 사이의 미래의 논쟁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맑스주의의 모든 전통에 따라서 레닌은 결단코 한 순간도 농민을 프롤레타리아트의 사회주의적 동맹으로 간주하지 않았다는 것을 다시한번 강조해야 할 필요가 있다. 반대로,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혁명의 불가능성은 정확하게 농민의 엄청난 수적 우세로부터 그에 의하여 추론되었다. 이 사상은 농업문제를 직간접적으로 다루는 그의 모든 글들을 관통한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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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9월에 레닌은 “우리는 농민 운동이 혁명적 민주주의 운동인 정도까지는 농민운동을 지지한다. 우리는 농민 운동이 반동적, 반(反)프롤레타리아트 운동으로서 앞으로 나서게 되는 정도까지는 (지금 당장, 그리고 즉각적으로) 그 것과의 투쟁을 준비하고 있다”고 썼다. 맑스주의의 전체 요점이 이 이중적 임무에 놓여 있다. 레닌은 서구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분적으로는 러시아의 반(半)프롤레타리아트 인자들 속에서 사회주의의 동맹을 보았지, 농민 속에서는 결코 아니었다. 그는 자신에게 특유한 일관성을 가지고 “시작부터 우리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몰수에 이르기까지 끝까지 지주에 대항하여 농민 일반을 지지하며, 나중에 우리는 농민 일반에 대항하여 프롤레타리아트를 지지 한다”라고 반복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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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 3월에 그는 “농민은 부르주아지 민주주의 혁명에서 승리할 것이고, 이것을 가지고 그들은 농민으로서의 자신들의 혁명적 영감을 완전히 소진하게 될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는 부르주아지 민주주의 혁명에서 승리할 것이고, 이것을 가지고 그들은 그들에게 고유한 사회주의 혁명적 정신을 실제로 전개할 뿐이다”라고 섰다. 같은 해 5월, 그는 “농민 운동은 타(他)계급의 운동이다. 이것은 자본주의의 근본들에 대항하는 투쟁이 아니라 봉건주의의 모든 잔재들을 일소하는 운동이다”라고 반복했다. 이 관점은 하나하나의 글들에서, 모든 해, 모든 책 속에서 레닌의 예를 따른다. 언어와 예들은 다양해도, 기본적인 사상은 동일한 채 남는다. 다른 어떤 것일 수가 없다. 만약 레닌이 농민 속에서 사회주의적 동맹을 보았다면, 그는 혁명의 부르주아지적 성격을 주장하고,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독재”를 순수하게 민주주의적 임무들에 제한하는 것을 위한 가장 사소한 근거도 가지지 않았을 것이다. 레닌이 이 책의 저자가 농민을 “과소평가” 한다고 비난했던 그 경우들에 있어서, 그는 농민의 사회주의적 경향들에 대한 나의 비인정을 염두에 두었던 것이 결코 아니라, 반대로, 농민의 부르주아지 민주주의적 독립성, 농민 자신의 권력을 수립하고, 그리하여 프롤레타리아트의 사회주의 독재의 수립을 방해할 농민의 능력에 대한 (레닌의 관점으로부터의) 불충분한 인정을 염두에 두었던 것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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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제에 관한 가치들의 재평가는 테르미도르 반동의 몇 해 동안이 되어서야 비로소 개시되었는데, 테르미도르 반동의 시작은 레닌의 질병과 죽음과 얼추 동시에 벌어졌다. 그 때부터 러시아 노동자들과 농민들의 동맹은 그 자체로 그리고 자연히 복구의 위험들에 대항하는 충분한 보증이며, 소련의 국경 내에서 사회주의의 실현의 불변의 맹세임이 선포되었다. 일국에서의 사회주의 이론으로 국제혁명의 이론을 대체하면서, 스탈린은 “트로츠키주의”가 아니고는 다른 아무것도 아닌 것을 농민에 대한 맑스주의적 평가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더욱이 그는 현재와 관련해서뿐만 아니라 전체 과거와 관련해서도 그렇게 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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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농민에 대한 고전적 맑스주의 관점이 잘못 된 것으로 증명되었는지 아닌지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가능하다. 이 논제는 우리를 현재의 재검토라는 한계들 훨씬 너머로 우리를 이끈다. 여기서는 맑스주의는 절대적이고 고정적인 성격을 가지는 비사회주의적 계급으로서 농민에 대한 자신의 예측들을 결코 내리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맑스 자신이 농민은 미신들뿐만 아니라 이성(理性)에 대한 능력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변화하는 상황들 속에서, 농민 그 자신의 성격이 변화한다.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통치 양식은 농민에 영향을 미치고, 농민을 재교육 할 매우 폭넓은 가능성들을 열어주었다. 이들 가능성들의 한계들은 아직까지는 역사에 의하여 소진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련에서 증가하는 국가 압제의 역할은 러시아 맑스주의자들을 나로드니크들과 구별해주었던 농민에 대한 태도를 근본적으로 논박하는 것이 아니라 확증해 주었음이 이미 현재로서 분명하다. 하지만, 이러한 측면에서 오늘 이후 20년이 지난 후의 새로운 통치 체제에서의 상황이 어떻든 간에, 10월 혁명까지 혹은 보다 정확하게 1924년까지는 맑스주의 진영에서 누구도 농민 속에서 사회주의적 발전의 요소를 보지 않았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채 남아 있다 - 특히 레닌이 가장 그렇지 않을 것이다. 서구에서의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의 도움이 없다면, 러시아에서의 복구는 어쩔 수 없다고 레닌은 반복했다. 그는 실수하지 않았다. 그리고 스탈린 관료집단은 단지 부르주아지적 복구의 첫 번째 국면에 불과하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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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ong> 트로츠키가 세 번째 입장을 취하다</strong></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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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위에서 러시아 사회민주당의 두 기본적인 분파들의 이탈의 지점들을 분석했다. 그러나 그것들과 나란히, 첫 번째 혁명의 새벽에 이미, 세 번째 입장이 정식화 되었는데, 이 입장은 당시에는 거의 어떠한 인지도 받지는 못했으나, 이 개념이 1917년의 사건들 속에서 확증되었기 때문뿐만 아니라 특히 10월 혁명으로부터 7년이 지나 뒤죽박죽이 된 이후에 스탈린과 소비에트 관료집단 전체의 정치적 진화에 관하여 완벽하게 예언적 역할을 시작했기 때문에, 우리는 여기에 꼭 필요한 완벽함으로 이 입장을 적어두어야 한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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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벽두에, 트로츠키가 쓴 한 팜플렛이 제네바에서 출판되었다. 이 팜플렛은 1904년 겨울에 전개되었던 정치정세를 분석했다. 글쓴이는 자유주의자들에 의한 간청들과 연회들이라는 독립적인 캠페인은 자신의 모든 가능성들을 소진했고, 자유주의자들에게 자신들의 희망들을 걸었던 급진적 지식인들은 자유주의자들과 함께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으며, 농민운동은 승리를 위한 우호적인 조건들을 창출하고 있으나 그것을 보장할 수는 없으며, 오로지 프롤레타리아트의 무장봉기를 통해서만 결정이 이루어질 수 있으며, 이 경로의 다음 국면은 총파업이 될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 팜플렛은 페테르스부르크에서의 피의 일요일 전에 쓰였기 때문에, “1월 9일 이전”이라는 제목이 붙었다. 이 날 이후 거대한 파업 물결을 보충해 주었던 최초의 무장 충돌과 함께 찾아왔던 강력한 파업의 물결은 이 팜플렛의 전략적 예측에 대한 명쾌한 확증이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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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팜플렛에 대한 서문은 그때 즈음 저명한 독일 작가가 되는 것에 성공했던 러시아 망명인 파르부스가 썼다. 파르부스는 다른 사람들의 사상들에 영항을 받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사상들로 다른 것들을 풍부하게 만들 수 있는 예외적인 창조적 개성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사상가와 작가로서의 능력의 값어치만큼의 기여를 노동운동에 제공하기 위한 활동에 대한 내부적 평형과 충분한 사랑이 부족했다. 나의 개인적 발전에 있어서, 그는 우리의 시대에 대한 사회 혁명가의 이해와 관련하여 특히 의심의 여지가 없는 영향을 미쳤다. 우리의 첫 번째 만남 몇 년 전에, 파르부스는 독일에서의 총파업 사상을 정열적으로 방어했지만, 독일은 이후 긴 산업 호황을 통과하고 있었고, 사회민주당은 호엔졸레른가의 통치체제에 순응했고, 외국인의 혁명적 선전은 풍자적 무관심 이외에는 어떠한 것도 만나지 못했다. 페테르스부르크에서의 유혈사태들 이후 두 번째 날에 나의 팜플렛을 잘 알게 되면서, 파르부스는 후진국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트가 수행할 운명의 예외적 역할에 대한 사상에 매료되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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뮌헨에서 함께 보냈던 그 몇 일은 우리 모두에게 좋은 교류임이 분명했던, 그리고 우리를 개인적으로 서로 더욱 가깝게 이끌었던 대화들로 가득 채워졌다. 팜플렛을 위하여 당시 파르부스가 썼던 서문은 굳건하게 러시아 혁명의 역사 속으로 들어갔다. 몇 쪽들 속에, 그는 이전에 알려졌지만(이것은 사실이다) 누구도 그것들로부터 필요한 결론들을 도출하지는 못했었던, 후진적인 러시아의 사회적 특수성들을 조명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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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부스는 다음과 같이 썼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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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럽의 정치적 급진주의는,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주로 소부르주아지 계급에 기초하고 있다. 이들은 수공업 노동자들과, 일반적으로, 산업의 발전을 뒤쫓아 왔으나 동시에 자본가 계급에 의하여 밀려난 부르주아지 계급의 일부이다 ... 러시아에서는 전(前) 자본주의 시대 동안에, 도시들은 유럽 노선보다는 중국의 노선을 따라서 발전했다. 도시들은, 그 성격에서, 가장 사소한 정치적 중요성도 가지지 않는 순전히 기능적인 행정적 중심들이었던 반면, 경제적 관계라는 점에서는, 그것들은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지주와 농민을 위한 무역 중심들, 시장들로서 복무했다. 그것들의 발전은 이후 자기 자신의 방식으로 대도시들을, 예를 들면 공장 도시들과 세계 무역의 중심들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던 자본주의적 과정들에 의하여 중단되었을 때까지도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 소부르주아지 민주주의의 발전을 방해했던 바로 똑같은 것이, 즉 생산의 수공업적 형태의 미약한 발전이 러시아에서는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의식에 도움이 되도록 복무했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즉각적으로 공장들에 집중되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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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들은 어느 때보다도 더 큰 대중들로 운동 속으로 인입 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단지 나라에서의 정치적 무정부 상태를 증가시킬 수 있을 뿐이고, 이 방식으로, 정부를 허약하게 할 수 있을 뿐이지, 그들은 강력하게 결합된 혁명적 군대를 만들어 낼 수는 없다. 따라서 혁명의 발전과 함께, 어느 때보다도 더 많은 양의 정치적 역할이 프롤레타리아트의 몫으로 떨어지게 될 것이다. 이것과 함께, 프롤레타리아트의 자기-의식은 확장될 것이고,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적 에너지가 성장할 것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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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민주당은 임시정부에 대한 책임을 짊어질 것인지, 노동자 운동으로부터 비켜설 것인지에 대한 딜레마에 봉착할 것이다. 노동자들은 사회민주당이 자기 자신을 어떻게 지도하는 지에 관계없이 자신들의 것으로 간주할 것이다 ... 러시아에서의 혁명적 전복은 오직 노동자들에 의해서만 성취될 수 있다. 러시아의 혁명적 임시정부는 노동자 민주주의 정부일 것이다. 만약 사회민주당이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운동을 이끈다면, 이 정부는 사회민주주의적인 것일 것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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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민주주의 임시정부는 러시아에서 사회주의적 전복을 성취할 수 없지만, 전제를 청산하고, 민주공화국을 수립하는 바로 그 과정은 정치적 활동을 위한 풍성한 토양을 그것에 제공할 것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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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가을의 혁명적 사태들의 한 가운데에서, 이번에는 페테르스부르크에서 나는 다시 한번 파르부스를 만났다. 양쪽 분파 모두로부터 조직적인 독립성을 유지하는 가운데, 우리는 대중적 노동자 신문인 <strong>러스코예 슬로보</strong>[Russkoye Slovo]를 그리고 멘셰비크들과 연합하여 큰 정치 신문인 <strong>나챨로</strong>[Nachalo]를 공동으로 편집했다. 영구혁명의 이론은 보통 “파르부스와 트로츠키”의 이름들과 연결되었다. 이것은 단지 부분적으로만 옳았다. 파르부스의 혁명적 최고조의 시대는 소위 “수정주의”, 즉 맑스의 이론에 대한 기회주의적 왜곡에 대항하는 투쟁의 선두에서 그가 행진할 때인 지난 세기 말에 속해 있다. 독일 사회민주당을 보다 단호한 정책들의 경로로 밀어붙이기 위한 시도들의 실패가 그의 낙관주의를 침식했다. 서구에서의 사회주의 혁명의 전망을 향하여, 파르부스는 점점 더 많은 유보조건들을 붙여 반응하기 시작했다. 당시 그는 “사회민주주의 임시정부는 러시아에서의 사회주의적 전복을 성취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간주했다. 그러므로 그의 예측들은 민주주의 혁명의 사회주의 혁명으로의 변형이 아니라, 단지 러시아에서의 농민체제의 기초 위에 부르주아지 통치체제의 틀을 넘어서지 않는 노동자 정부가 처음으로 등장했던 오스트리아 형태의 노동자 민주주의 정치체제의 수립만을 지적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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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결론을 공유하지 않았다. 오스트리아의 민주주의는 새로운 대륙의 처녀지로부터 유기적으로 성장했고, 한때 보수적 성격을 취했으며, 스스로를 젊지만 매우 특권적인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복종시켰다. 반대로 러시아의 민주주의는 그것[혁명적 전복]의 동학들이 노동자 정부가 부르주아지 민주주의의 틀 내에 있도록 결코 허용하지 않을 웅장한 혁명적 전복의 결과로서만 오직 생겨날 수 있었다. 1905년 혁명 직후에 시작되었던 우리의 차이들은 전쟁이 시작되면서 파르부스(그의 내부에 있던 회의(懷疑)가 이 혁명가를 완전히 죽였다)가 독일 제국주의의 편에 있음이 드러나고, 나중에는 독일 공화국의 첫 번째 대통령 에버트의 고문과 그에게 영감을 불어 넣어 주는 자가 되면서 우리 사이의 완전한 결별로 귀결되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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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ong>영구혁명 이론</strong></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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팜플렛 <strong>1</strong><strong>월</strong><strong>9</strong><strong>일 이전</strong>에서 시작하여, 나는 영구혁명 이론의 발전과 정당성으로 2번 이상 되돌아 왔다. 나중에 이 이론이 이 전기의 영웅의 이데올로기적 진화에서 획득했던 중요성을 고려하여, 나의 1905-06년 글들을 그대로 인용하는 형태로 여기에 제출하는 것이 필요하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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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화된 도시, 최소한 경제-정치적으로 중요한 도시들의 인민의 핵심은 임금노동자라는 첨예하게 차별화된 계급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의 혁명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도록 운명 지어져 있는 것은 대 프랑스 혁명 동안에 본질적으로 알려졌던 정확하게 이 계급이다 ... 경제적으로 더 후진적인 한 나라에서, 프롤레타리아트는 선진 자본주의 나라에서보다 먼저 권력에 오를 수도 있다. 한 나라의 기술적 힘들과 자원들에 대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일종의 자동적인 의존성에 대한 가정은 극단적으로 지나치게 단순화된 “경제적” 유물론으로부터 발생하는 편견이다 ... 미국에서의 생산력들은 우리 것들의 10배가 넘지만,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적 역할, 나라의 정치에 대한 영향력, 그리고 세계 정책들에 대한 향후 영향력의 가능성은 미국 프롤레타리아트의 역할과 중요성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높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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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관점에 따르면, 러시아 혁명은 아마도 (그리고 혁명의 승리와 함께 반드시) 권력이 부르주아지 자유주의 정치인들이 자신들의 정치가다운 천재적 재능을 완전하게 발전시킬 기회를 갖기 전에 프롤레타리아트의 수중으로 넘어갈 수도 있는 조건들을 창출할 것이다 ... 러시아의 부르주아지 계급은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모든 혁명적 지위들을 내어주고 있다. 그들은 농민에 대한 혁명적 지도력도 마찬가지로 포기해야만 할 것이다. 권력을 잡은 프롤레타리아트는 농민에게 그들을 해방시켜주는 계급으로서 나타날 것이다 ... 농민에 스스로를 기초하는 프롤레타리아트는 농촌의 문화적 수준을 끌어올리고, 농민들 속의 정치의식을 발전시키기는 일에 자신의 모든 힘을 쏟을 것이다 ... 그러나 아마도 농민 스스로가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들이닥쳐 프롤레타리아트의 자리를 점령하겠는가? 이것은 불가능하다. 역사의 모든 경험이 이러한 가정에 저항한다. 농민은 <em>독립적인</em> 정치적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완전히 불가능하다는 것을 역사의 모든 경험이 보여 준다 ... 상술한 것처럼, 우리가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독재’라는 사상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는 분명하다. 요체는 우리가 그것을 원칙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것으로 여기는지 여부가 아니라, 우리가 이러한 형태의 정치적 제휴를 ‘열망하는지’ 여부이다. 우리는 적어도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의미에서 이것은 실현 불가능한 것이라고 여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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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제출된 개념이 “부르주아지 혁명을 건너뛰는” 것이라는 주장(나중에는 끊임없이 반복되었던)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는 이미 앞의 상술이 증명한다. 당시에 나는 “러시아의 민주주의적 혁신을 위한 투쟁은 온전하게 자본주의로부터 성장해왔고, 자본주의의 기초 위에서 전개되는 세력들에 의하여 수행되고 있으며, <em>직접적으로 그리고 무엇보다도</em>자본주의 사회의 발전의 길에 있는 봉건적 멍에에 맞서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고 썼다. 하지만, 문제는 다음과 같았다. 단지 무슨 세력들과 방책들이 이들 장애물들을 제거할 수 있는가?</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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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우리의 혁명은 그것의 객관적 목적들에서, 그리고 그러므로 그것의 불가피한 결과들에서 <em>부르주아지적인</em>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혁명의 문제들을 제한할 수 있을 지도 모르며, 그래서 우리가 이 부르주아지 혁명의 주요한 행위자가 프롤레타리아트라는 것과, 혁명의 전체 경로가 프롤레타리아트를 권력을 향하여 밀어붙일 것이라는 사실에 눈을 감고 있는지도 모른다 ... 동지들은 러시아의 사회적 조건들이 아직은 사회주의 경제를 위해서 무르익지 않았다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달랠지도 모르고, 그래서 일단 권력을 장악한 프롤레타리아트는 자신의 상황의 전체 논리에 의하여 어쩔 수 없이 국가에 의하여 작동되는 경제를 도입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을 거부할지도 모른다 ... 무기력한 인질들로서가 아니라 지배 권력으로서 정부에 들어가면서, 프롤레타리아트의 대표들은 바로 이러한 실천들로 최소강령과 최대강령 사이의 경계를 파괴, 즉<em>집산주의를 일정에 올리게 될 </em>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가 이 방향 속의 어느 지점에서 멈춰질 것인지는 세력관계에 달려 있는 것이지, 프롤레타리아트 정당의 원래 의도들에 달려 있는 것이 전혀 아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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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다음과 같은 물음을 제기하는 것이 지금 너무 이른 것은 아니다: 이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는 부르주아지 혁명의 틀에 맞서다 불가피하게 박살날 것인가? 혹은 만약 그렇지 않다면, 주어진 <em>세계</em><em>-역사적 기초들</em>위에서, 이 제한된 틀을 박살냄으로써 성취되어야 하는 승리의 관점을 스스로의 앞에 펼칠 것인가? ... 한 가지는 분명하게 말 할 수 있다: 유럽 프롤레타리아트로부터의 직접적인 국가적 지원이 없다면, 러시아의 노동계급은 권력에 남아있을 수 없으며 자신의 일시적 지배를 장기간 지속되는 사회주의 독재로 바꿀 수 없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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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것으로부터 비관적인 예측이 나오는 것은 전혀 아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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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노동계급이 지도하는 정치적 해방은 이 지도자를 전례가 없는 역사적 높이로 끌어올릴 것이며, 거대한 힘들과 자원들을 그들의 수중으로 옮길 것이고, 그들을 세계적 자본주의 청산의 선구자로 만들 것이다. 역사가 그들을 위하여 모든 필요한 객관적인 전제조건들을 창출해 왔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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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사회민주주의가 자신의 혁명적 임무를 완수할 수 있음을 판명할 수 있는 정도에 관하여, 나는 1906년에 다음과 같이 썼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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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적 경험을 담고 있는 조직으로서 그들 자신의 보수주의를 각자 실천해 온 유럽의 사회주의 정당들, 무엇보다도, 그들 중에서 가장 강력한 독일 정당이 어느 특정 순간에 노동자와 부르주아지 반동 사이의 공공연한 투쟁의 경로에 있는 직접적인 장애물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 하지만, 나는 다음과 같은 확신을 표현하는 것으로 내 분석의 결론을 맺었다. “점점 더 많은 대중들이 사회주의로 집결하면서, 동방의 혁명이 서구의 프롤레타리아트에게 혁명적 이상주의의 영감을 불어넣을 것이며, 서구의 프롤레타리아트 속에 ‘러시아인’ 속에 있는 그들의 적에게 말할 열망이 생겨나게 할 것이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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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ong> 세 가지 관점에 대한 총괄</strong></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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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괄해보자. 나로드니크주의는 슬라브인 숭배자들을 따라서 러시아의 발전의 절대적으로 고유한 길과 관련한 환상으로부터 나아갔고, 자본주의와 부르주아지 공화국을 옆에서 환영했다. 플레하노프의 맑스주의는 러시아와 서구의 역사적 경로들의 원칙적 동일성을 증명하는데 집중되고 있었다. 이것으로부터 나온 프로그램은 러시아의 사회구조와 러시아의 혁명적 발전에 관한 신비적인 것이 결코 아닌 온전하게 현실적인 특수성들을 무시했다. 일시적인 덮어 가리기들과 개인적 일탈들을 특징으로 하는 멘셰비키의 혁명에 대한 태도는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러시아 부르주아지 혁명의 승리는 오직 자유주의 부르주아지 계급의 지도하에서만 생각할 수 있으며, 반드시 그들에게 권력을 넘겨주어야만 한다. 민주주의 통치체제는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트가 지금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훌륭하게 성공적으로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의 길에서 그들보다 더 오래된 서구의 형제들을 따라잡는 것을 허용할 것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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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의 관점은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뒤늦은 러시아의 부르주아지 계급은 자기 지신의 혁명을 끝까지 지도할 수 없다.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민주주의 독재”라는 매개를 통한 혁명의 완전한 승리는 나라의 봉건주의를 일소할 것이고, 미국의 템포로 러시아 자본주의의 발전을 추진할 것이며, 도시와 농촌의 프롤레타리아트를 강화할 것이고,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의 확대된 가능성들을 열어젖힐 것이다. 다른 한편, 러시아 혁명의 승리는 서구에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강력한 자극을 제공할 것이며, 후자는 러시아를 복구의 위험들로부터 막아낼 뿐만 아니라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가 상대적으로 짧은 역사적 기간에 권력의 장악에 이르도록 허용할 것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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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구혁명의 전망은 다음의 말들로 총괄 될 수 있을 것이다: 러시아에서의 민주주의 혁명의 완전한 승리는 그 자신을 농민에 기초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의 형식에서가 아니라면 생각할 수 없다. 불가피하게 민주주의적 임무들뿐만 아니라 사회주의적 임무들까지도 일정에 올리게 될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는 국제 사회주의 혁명에 강력한 자극을 제공할 것이다. 오직, 서구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승리만이 러시아를 부르주아지적 복구로부터 막아 줄 것이며, 러시아로 하여금 사회주의적 건설을 그것의 결론으로까지 가져가게 할 가능성을 보장해 줄 것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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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간결한 정식화는 자유주의-멘셰비키주의자들의 전망과는 화해할 수 없이 모순을 빚고 있는 마지막 두 개의 개념들의 동일성뿐만 아니라 사회성격의 문제와 혁명으로부터 성장해야 하는 “독재”의 임무들에 관한 그것들의 극단적으로 본질적인 서로간의 차이도 똑같은 명료함으로 드러내준다. 1905년에는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강령이 “시기상조”였다는 취지에 대한 현재의 모스크바 이론가들의 자주 반복되는 반대는 완전히 내용이 부족하다. 경험적 측면에서,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민주주의 독재의 강령은 동일하게 “시기상조”였던 것으로 판명되었다. 첫 번째 혁명의 시대의 불리한 역관계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혁명 그 자체의 승리를 불가능하게 했다. 한편 모든 혁명적 경향들은 완전한 승리에 대한 희망들로부터 나아갔는데, 그러한 희망이 없었다면, 구속받지 않는 혁명적 투쟁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차이들은 혁명의 일반적 전망들과 그로부터 이어지는 전략에 영향을 끼쳤다. 볼셰비키주의의 전망은 완전한 것이 아니었는데, 그것은 투쟁의 일반적인 방향을 올바르게 가리켰으나 그것의 단계들을 올바르게 특징짓지는 못했다. 볼셰비즘의 전망의 불충분함은 1905년에는 드러나지 않았는데, 그것은 오로지 혁명 그 자체가 더 이상의 발전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917년 초에 레닌은 당의 최고참 중핵들과의 직접적인 투쟁 속에서 그 전망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되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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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예측은 천문학적 예측과 같은 정확함을 주장할 수 없다. 만약 그것이 발전의 일반적 노선의 올바른 방향을 제공한다면, 그리고 그 속에서 기본적인 노선이 불가피하게 오른쪽 혹은 왼쪽으로 움직여지는, 사태들의 실제 경로에서 태도를 분명히 하는 것에 도움이 된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이런 의미에서, 영구혁명의 개념은 역사의 검증을 완전하게 통과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 소비에트 통치체제의 첫 몇 해 동안, 이것은 누구에 의해서도 부정되지 않았으며, 반대로, 이 사실은 수 개의 공식 출판물들에서 인정을 받았다. 그러나 침묵 속의 경화된 소비에트 사회의 꼭대기들에서 10월에 대항하는 관료적 반동이 시작되자, 바로 그 시작부터 관료적 반동은 역사 속에서 첫 번째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을 다른 어떤 것 보다 더 완벽하게 반영했던, 그리고 동시에 그것의 불완전하고 제한적이며 부분적인 성격을 분명하게 드러냈던 이 이론에 대항하였다. 이렇게 해서, 이런 식으로 스탈린의 기본적인 교조인 일국에서의 사회주의 이론이 기원하였다. 1939년 여름.</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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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온 트로츠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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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에트 국가의 계급적 성격</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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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츠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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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10월 1일</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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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문제가 제기되는가?</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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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 인터내셔널과의 분리와 새로운 인터내셔널을 향한 방침은 소련의 사회적 성격에 관한 문제를 새롭게 제기해왔다.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붕괴는 동시에 10월 혁명으로부터 등장했던 그 국가의 붕괴를 또한 의미하는 것은 아닌가? 참으로 여기 이 두 가지 경우들 모두에서, 하나의 똑같은 지배의 조직, 즉 스탈린주의 기구가 관련된다. 스탈린주의 기구는 국제적 영역에서와 동일한 방책들을 소련 내부에서 실행해왔다. 우리 맑스주의자들은 스탈린주의자들의 정책들은 소련 내에서는 비난의 여지가 없지만, 소련의 경계 밖에서는 파멸적이라는 브란들러 패거리들의 이중장부 체계의 옹호자들이 결단코 아니었다.그들은 양쪽의 경우 모두에서 동일하게 파멸적이라는 것이 우리의 신념이다. 만약 그렇다면, 소련에서의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청산과 동시에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이 붕괴할 것이라는 것을 인정할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닌가?</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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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눈에 보기에, 그러한 추론은 논박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오류이다. 비록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의 방책들이 모든 측면들에서 동질적이기는 하지만, 이들 방책들의 객관적인 결과들은 외부적 조건들 혹은 공학적 언어를 사용한다면 물질의 저항력에 달려있다.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은 자본주의 체제의 타도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수립을 목적으로 하는 기구를 의미했다. 소비에트 정부는 이미 성취된 전복의 성과물들의 보존을 위한 기구를 의미한다. 서구의 공산당들은 유산으로 물려받은 자산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들의 강점(실제로는 그들의 약점)은 그들 자신들의 내부, 오직 그들 자신들의 내부에 있다. 스탈린주의 기구의 강점의 10분의 9는 그들 자신들 내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승리한 혁명에 의해 이루어진 사회적 변화들에 있다. 여전히 이러한 고려 하나로 문제가 결정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은 커다란 방법론적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어떻게 그리고 왜 스탈린주의 기구가 국제적인 혁명적 요소로서의 자신의 의미를 완전하게 탕진하고도,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의 사회적 정취들의 문지기로서의 자신의 진보적인 의미를 아직까지 일부 보존할 수 있었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덧붙여 말한다면, 이 이중적 지위는 그 자체로 역사발전의 불균등성의 발현들 중의 하나임을 의미한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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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 국가의 올바른 정책들은 일국적 경제건설 하나로만환원되지 않는다. 만약 혁명이 프롤레타리아트의 나선을 따라서 국제적 영역으로 확장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어쩔 수 없이 일국적 틀거리 속에 있는 관료적 나선을 따라서 축소되기 시작할 수밖에 없다. 만약 프롤레타리아트 독재가 유럽의 것, 그리고 세계적인 것이 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 자신의 붕괴를 향해가지 않을 수 없다. 이 모든 것은 폭넓은 역사적 관점에서 완전히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모든 것은 구체적인 역사적 시대의 주위를 맴돈다.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의 정책들이 노동자 국가의 일소로 이미 나아갔다고 말할 수 있는가? 지금 이것이 문제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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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그리고 무엇보다도, 맑스주의의 중요한 방법론적 입장이 노동자 국가는 이미 명백하게 일소되었다는 주장에 대항하여 제기된다.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는 정치적 전복과 3년 동안의 내전에 의하여 수립되었다. 사회에 대한 계급 이론과 역사적 경험이 공히 평화적 방법을 통하여, 즉 무기를 손에 든 거대한 계급 전투들이 없이 프롤레타리아트의 승리가 불가능함을 입증한다. 그러한 사례에서, 어떻게 감지할 수 없는, “점진적인” 부르주아지의 반혁명을 생각할 수 있는가? 이제까지, 어떤 경우에도, 부르주아지의 반혁명들뿐만 아니라 봉건적인 반혁명들도 결코 “유기적으로” 발생하지 않았으며, 그것들은 항상 군사적 수술이라는 개입을 필요로 했다. 결국, 개량주의가 일반적으로 이론의 경지에 도달한 한에서, 개량주의 이론들은 계급적 적대가 심원하며, 화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이해할 능력이 없음에, 따라서 자본주의로부터 사회주의로의 평화적 이행의 전망에 언제나 기초한다. 한 계급의 수중으로부터 다른 계급의 수중으로의 권력의 이행의 파국적 성격과 관련한 맑스주의 논제는 역사가 미친 듯이 전진하는 혁명적 시기들에 뿐만 아니라, 사회가 뒤로 후퇴하는 반혁명의 시기들에도 적용된다. 소비에트 정부가 프롤레타리아트의 그것에서 부르주아지의 그것으로 점진적으로변해왔다고 주장하는 자는 소위 개량주의의 필름을 거꾸로 돌리고 있을 뿐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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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반대하는 자들은 이것이 일반적인 방법론적 명제라는 것을 부정하고, 그것 자체가 아무리 중요하다 할지라도, 그것은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너무나도 추상적이라고 선언할지 모르겠다. 진리는 언제나 구체적이다. 우리의 분석에서는 계급 모순들의 화해불가능성이라는 논제가 우리를 지도해야 하고, 그렇게 해야만 하지만, 그 결과들을 대체하지는 못한다. 역사적 과정 그 자체의 물질적 내용들 속으로 깊이 탐구해야만 한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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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방법론적 주장이 그 문제를 남김없이 모두 논하지 않는 다는 것이 사실이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에 있어서도, 그것은 증명이라는 부담을 상대편으로 넘긴다. 스스로를 맑스주의자로 여기는 비평가들은 3년 동안의 투쟁 속에서 권력을 잃었던 부르주아지가 어떤 방식으로 어떠한 전투들도 없이 이 권력을 다시 차지할 수 있었는지 밝혀야만 한다. 하지만, 우리를 반대하는 자들이 어떠한 종류의 진지한 이론적 표현을 소비에트 국가에 대한 그들의 평가에 투자하려고 시도하지 않는 관계로, 여기서 우리는 그들을 위하여 이 작업을 하려고 시도할 것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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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독재”</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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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소비에트 국가의 비(非)프롤레타리아트적 성격에 찬성하는 가장 널리 퍼진, 인기 있는, 그리고 일견 논박의 여지가 없는 주장은 프롤레타리아트의 기관들의 자유에 대한 교살과 관료집단의 전능한 힘에 대한 언급에 기초한다. 단 한사람의 독재로 귀결되었던 하나의 기구의 독재를 하나의 계급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와 동일시하는 것이 실제로 가능한 것인가?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가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독재에 의하여 배제되고 있다는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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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매혹적인 추론은 현실에서 전개되고 있는 것으로서의 현상의 경과에 대한 유물론적 분석에 기초해서가 아니라, 순수한 관념론적 도식인 칸트주의적 규범에 기초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혁명의 어떤 고상한 “친구들”은 자기 자신들에게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매우 찬란한 개념을 마련해 두었는데, 모든 그 자신의 계급적 야만주의의 유산을 가지고 있는, 모든 자신의 내부 모순들을 가지고 있는, 지도부의 실책들과 범죄들을 가지고 있는 실제의 독재가 그들이 제공해왔던 번드르한 이미지를 닮는데 완전하게 실패한다는 사실에 직면하여 완전히 의기소침해 있다. 그들의 가장 아름다운 감정들에 있는 미몽을 깨우치자, 그들은 소련에 등을 돌린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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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에서, 무슨 책들 속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를 위한 무오류의 처방을 발견할 수 있는가? 한 계급의 독재는 국가의 운영에 그 계급 전체 대중이 항상 참여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이것을 소유계급들의 경우에서 보아왔다. 귀족은 자신들이 무릎을 꿇는 군주제를 통하여 지배를 했다. 부르주아지의 독재는 지배계급이 두려워 할 것이 없는 자본주의의 상승이라는 조건들 하에서만 오직 상대적으로 발전된 민주주의적 형태들을 띠었다. 우리 자신의 눈앞에서, 독일에서는 모든 전통적인 부르주아지의 정당들이 작은 파편들로 분쇄되면서 히틀러의 독재에 의하여 민주주의가 대체되었다. 오늘날 독일의 부르주아지는 직접적으로 지배하지 않는다. 정치적으로 그들은 히틀러와 그의 패거리에 대한 완전한 복종 하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르주아지의 사회적 헤게모니라는 모든 조건들이 보존되어 왔고, 강화되어 왔기 때문에, 독일에서는 부르주아지의 독재가 손상 받지 않은 채 남아 있다. 히틀러는 정치적으로 부르주아지를 몰수함으로써, 비록 일시적이기는 하지만, 부르주아지를 경제적 몰수로부터 구원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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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다음의 비판을 예상하면서, 우리를 반대하는 자들은 비록 착취하는 소수로서의 부르주아지는 파시스트 독재를 통하여서도 역시 자신의 헤게모니를 보존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는 프롤레타리아트는 정부의 임무들 속으로 어느 때 보다도 광범위한 인민 대중들을 직접적으로 끌어 들이면서 자신의 정부를 스스로 운영해야만 한다고 서둘러 논박할 것이다. 그것의 일반적인 형식에서, 이 주장은 논쟁의 여지가 없지만, 주어진 경우에 있어서는 이 주장은 단지 현재의 소비에트 독재는 병든 독재라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고립되고 후진적인 나라에서의 사회주의 건설이라는 엄청난 어려움들이 지도부의 잘못된 정책들과 결부되어, 관료집단이 자기 자신의방책들로 사회적 성취들을 지켜내기 위하여 프롤레타리아트를 정치적으로 몰수한 것으로 귀결되었다. 사회에 대한 면밀한 분석은 그 사회의 경제적 관계들에 의하여 결정된다. 10월 혁명으로 창출된 소유의 형태가 타도되지 않는 한, 프롤레타리아트는 여전히 지배계급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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훨씬 더 깊은 분석, 즉 관료적 지배의 사회적 뿌리들과 계급적 한계들에 대한 명확한 설명이 없는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관료집단의 독재”에 관한 논문들은 멘셰비키들 사이에서 너무나도 극도로 인기가 있는 과장된 민주주의적 문구들로 요약될 뿐이다. 소비에트 노동자들의 절대 다수가 관료집단에 만족하지 않고 있으며, 결코 최악은 아니지만, 상당한 부위가 관료집단을 증오한다는 것을 의심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이 불만족이 격렬한 대중적 형태들을 띠지 않는다는 것이 단순히 억압 때문은 아니다. 노동자들은 만약 자신들이 관료집단을 타도한다면, 자신들이 계급의 적이 마음 놓고 활동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될 것이라는 것을 두려워한다. 관료집단과 계급 사이의 상호관계들은 그것들이 천박한 “민주주의들”에 대하여 나타나는 것보다 실제로는 훨씬 더 복잡하다. 만약 다른 전망들이 그들 앞에 열렸다면, 서구의 지평선이 파시즘의 갈색이 아니라 혁명이라는 붉은색으로 불타올랐다면, 소비에트 노동자들은 기구의 전제에 복수를 했을 것이다. 이러한 일이 벌어지지 않는 한, 프롤레타리아트는 이를 악문 채 관료집단을 견디어 내고(“관대하게 대하고”), 이러한 의미에서 관료집단을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담지체로서 인정한다. 그러나 노동자들 중 단 한 명도 반혁명이 이미 벌어졌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소비에트 국가의 척추이다. 그러나 통치의 기능이 무책임한 관료집단의 수중에 집중되어 있는 한, 우리는 우리의 앞에 명백하게 병든 국가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 국가는 치료가 될 수 있을까? 치료를 위한 더 이상의 시도들은 성과도 없이 소중한 시간을 낭비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가? 문제가 심각하게 제기된다. 우리는 치료들을 세계 혁명적 운동과 분리되는, 그리고 별도의 모든 종류의 인위적인 방책들이 아니라 맑스주의 기치 하에서의 한층 더한 투쟁이라고 이해한다.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에 대한 가차 없는 비판, 새로운 인터내셔널의 중핵들을 훈련시키는 것, 세계 프롤레타리아트 전위의 투쟁력을 부활시키는 것, 이것이 “치료”의 본질이다. 이것은 역사적 진보의 근본적은 방향과 일치한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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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몇 년 동안, 상당히 충분한 우리를 반대하는 자들이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코민테른을 치료하는 것에 종사시킴으로써 “헛되이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고 수차례 말해왔다. 우리는 누구에게도 우리가 코민테른을 치료하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다. 우리는 단지 결정적인 테스트 때까지는 그 병이 사망에 이르렀거나 혹은 가망이 없는 병이라고 선언하는 것을 거부했을 뿐이다.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치료하는 것”으로 단 하루도 낭비하지 않았다. 우리는 혁명적 중핵들을 형성했고, 똑같이 중요한 새로운 인터내셔널의 근본적인 이론적, 강령적 입장들을 준비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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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념론적 규범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트 독재</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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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주의” 사회학자 여러분들은(우리는 칸트의 그림자에게 사과한다) 종종 “진정한”, 즉 그들의 관념적 규범들에 적합한 독재는 단지 파리 코뮨의 나날들, 혹은 브레스트-리토프스크의 평화까지나, 기껏해야 NEP까지의 10월 혁명의 첫 번째 시기 동안에만 존재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정말로 정확한 사격이다. 손가락으로 하늘을 겨냥하고 소의 눈을 가격한다! 만약 맑스와 엥겔스가 파리 코뮨을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라고 불렀다면, 그것은 단지 가능성들의 힘이 그 속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코뮨은 그 자체로 아직은프롤레타리아트 독재가 아니었다. 권력을 장악했지만, 파리 코뮨은 어떻게 그것을 사용해야 하는지 거의 알지 못했다. 공세를 취하는 대신에, 기다렸다. 코뮨은 파리라는 동그라미 안에서 고립된 채 남아 있었다. 코뮨은 국가 은행을 건드릴 엄두를 내지 못했다. 코뮨은 권력을 전국적 규모에서 행사하지 않았기 때문에, 전복을 소유관계들과 연결시키지 않았고, 참으로 그렇게 하지 못했다. 이것에 심지어 운동의 지도자들조차 코뮨을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로 완전하게 이해하는 것을 막았던 블랑키주의적 일면성과 푸르동주의적 편견들이 추가되어야만 한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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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혁명의 첫 시기에 관한 언급은 더 이상 상서로운 것이 아니다. 브레스트-리토프스크의 평화까지는 물론 심지어 1918년 가을까지도, 혁명의 사회적 내용은 소부르주아적 농경에서의 전복과 노동자들의 생산에 대한 통제에 제한되었다. 이것은 혁명이 자신의 실천들 속에서 아직은 부르주아적 사회의 경계들을 넘지 않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첫 시기 동안에, 병사들의 소비에트들이 노동자들의 소비에트들과 나란히 지배했고, 종종 노동자들의 소비에트들을 팔꿈치로 밀어 제쳤다. 단지 1918년 가을로 향해가면서, 소부르주아적 병사-농경적 요소가 가장자리로 약간 후퇴하였고, 노동자들이 생산수단의 국유화와 함께 앞으로 전진 했다. 오직 이 때로부터 진정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시작에 관하여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조차도, 분명한 많은 유보조항을 두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한 초기 몇 해 동안에, 독재는 지리적으로 구 모스크바 공국에 제한되었고, 모스크바로부터 그 주위 지방에 이르는 모든 반경을 따라서 3년간의 전쟁을 수행해야만 했다. 이것은 1921년까지 정확하게 신경제정책까지 진행되었던 것은 아직까지는 전국적 차원에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수립하기 위한 투쟁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사이비 맑스주의 속물들의 견해 속에서는 독재가 신경제정책의 시작과 함께 사라졌는데, 이것은 일반적으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가 존재한 적이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들 신사양반들에게는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는 단순히 계량할 수 없는 개념, 우리의 죄 많은 지구에서는 현실화될 수 없는 관념적 규범이다. 이런 종류의 “이론가들”이 독재라는 바로 그 단어를 싸잡아 비난하지 않은 한도에서, 독재와 부르주아 민주주의 사이의 화해 불가능한 모순을 깎아 내리려 애쓰는 것은 별로 이상할 것이 없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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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공산주의적 민주주의자들”(소바린[Souvarine]과 그 일당) 종파는 정치적 관점에서가 아니라 실험실의 관점에서 극단적으로 특징적이다. 이름 바로 그것이 이미 맑스주의와의 결별을 암시한다. 맑스는 자신의 고타강령비판에서, 사회민주주의이라는 명칭이 혁명적 사회주의 투쟁을 민주주의라는 형식적인 통제 아래에 둔다는 사실에 비추어 이 명칭을 거부했다. “공산주의적 민주주의자들”과 “사회주의적 민주주의자들”, 좀 더 정확하게 사회 민주주의자 사이에는 원칙에서의 어떠한 차이도 없다는 것이 너무도 명백하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사이에는 단단하고 고정된 구분이 없다. 오직 하나의 운동으로서 혹은 하나의 국가로서의 사회주의와 공산주의가 계급투쟁의 실제 경로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 역사 진행의 물질적 조건들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에 맞서 부르주아지의 독재에 복무하는 자기방어의 무기인, 초사회적이고 초역사적인 추상인 “민주주의”에 종속될 때에만 파계는 시작된다. 만약 고타강령(1875)의 시대 동안에 사회민주주의라는 단어 속에서 단지 건강한 영감을 가진 프롤레타리아트의 당에게는 정확하지도 않고 과학적이지도 않은 명칭만을 보는 것이 여전히 가능했다면, 계속되었던 부르주아지 민주주의와 “사회”민주주의의 역사 전체는 “민주주의적 공산주의(?)”라는 기치를 철저한 계급 배신의 기치로 바꿔버린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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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나파르티즘</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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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르반스 유형의 반대자는 아직까지 부르주아 계급 정권의 복구가 진정으로 있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노동자 국가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즉 현재의 소비에트 정권은 초계급적인 혹은 계급간의 보나파르트적 정권이라고 말할 것이다. 당시에 우리는 이 이론을 청산했다. 역사적으로 보나파르티즘은 부르주아 계급 사회의 위기의 시기들 동안의 부르주아지의 정부였으며, 부르주아지의 정부로 남아있다. 부르주아지 혁명의 순전히 자본주의적 성취들을 강화하는 “진보적” 보나파르티즘과 자본주의 사회의 쇠퇴의 보나파르티즘, 우리 시대의 경련을 일으키는 보나파르티즘(폰 파펜, 슈라이허, 돌퍼스, 그리고 네덜란드 보나파르티즘의 후보인 콜리진 등)을 구분하는 것이 가능하며 그렇게 할 필요가 있다. 보나파르티즘은 항상 계급들 사이의 정치적 방향 전환을 암시한다. 그러나 보나파르티즘 하에서는, 그것의 모든 역사상의 윤회에서, 하나 그리고 동일한 사회적 기초, 즉 부르주아 소유가 보존된다. 보나파르티스트의 계급들 사이에서의 비틀거림이나 보나파르트시트 깡패집단의 “초계급적” 지위로부터 보나파르트적 국가의 무계급적 성격이라는 결론을 도출하는 것 보다 더 터무니없는 짓은 없다. 엄청나게 터무니없는 짓거리! 보나파르티즘은 자본가의 헤게모니의 변종들 중의 하나일 뿐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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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우르반스가 현재의 소비에트 정권 또한 포함시키기 위하여 보나파르트 정권의 개념을 확장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소비에트 “보나파르티즘”의 사회적 내용이 필요한 명확성을 가지고 정의된다는 하나의 조건 하에서 그러한 확장된 해석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소비에트 관료집단 스스로의 지배가 국내는 물론 국제적인 계급세력들 사이에서의 우왕좌왕이라는 토양에서 건설되었다는 것은 절대적으로 옳다. 스탈린의 사적인 투표를 통한 통치가 관료적 우왕좌왕을 절정에 이르게 해 온 이상, 소비에트 보나파르티즘을 말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보나파르트들[프랑스 황제들]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그들의 애처로운 아류들이 부르주아 정권의 기초 위에서 발전해왔고, 발전하고 있음에 반해, 소비에트 관료집단의 보나파르티즘은 그 자신의 밑에 소비에트 정권이라는 토양을 가지고 있다. 용어상의 혁신들이나 역사에 기인하는 유추들은 분석을 위한 이런 저런 방식에서의 편리함으로써 복무할 수는 있지만, 이러한 것들이 소비에트 국가의 사회적 성격을 변화시킬 수는 없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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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자본주의”</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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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최근의 시기 동안에, 우연하게도 우르반스는 소비에트의 경제 구조가 “국가자본주의”의 변종인 것으로 보인다는 새로운 이론을 발명해 냈다. 우르반스가 정치적 상부구조의 영역에서의 자신의 용어상의 활동으로부터 경제적 기초로 하강했다는 것에 “진척”이 있다. 아뿔싸, 하지만 이 하강은 그에게 이롭지가 않았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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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르반스에 따르면, 부르주아 정권의 가장 최신의 자기 방어의 형태가 국가자본주의다. 이탈리아, 독일, 그리고 미국의 집단적 “계획” 국가를 한 번 둘러보면 된다. 거칠 것 없는 의사표시에 익숙해진 우르반스는 이것들 속에 소련도 집어 던진다. 이것에 관해서는 뒤에서 말하게 될 것이다. 문제가 자본주의 국가들을 건드리는 한, 우르반스는 스스로를 우리 시대의 중요한 현상에 관여하게 한다. 훨씬 이전에 독점 자본주의는 생산수단에 대한 사적 소유와 일국적 경계들을 넘어서 성장해왔다. 하지만 자기 자신의 기관들에 의하여 무력화된 노동계급은 그들의 자본주의적 족쇄들로부터 사회의 생산력을 제 때에 해방시킬 수 없었다. 이렇게 해서 일정기간 계속되는 경제적, 정치적 경련의 시대가 등장한다. 생산력은 사적 소유와 일국적 경계들이라는 장벽을 사정없이 두들긴다. 부르주아 정부들은 경찰 곤봉을 가지고 그들 자신의 생산력의 폭동을 진정시켜야만 한다. 이것이 소위 계획경제를 구성하는 것이다. 국가가 자본주의적 무정부 상태에 제복을 입히고, 그것을 통제하려고 시도하는 한, 이것을 조건적으로 “국가자본주의”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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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우리는 원래 맑스주의자들은 국가자본주의를 국가 그 자체의 독립적인 경제적 기업들만으로 이해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개량주의자들이 과거에 없던 많은 수의 운송과 개별 기업들에 대한 지방자치 도시화나 혹은 국유화를 통하여 자본주의를 극복하고자 하는 꿈을 꾸었을 때, 맑스주의자들은 이것은 사회주의가 아니라 국가자본주의라고 논박하면서 응답하곤 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 개념이 보다 폭넓은 의미를 획득했고, 경제에 대한 국가의 모든 형태의 개입에 적용되기 시작했다. 프랑스 사람들은 이러한 의미에서 국가화라는 단어를 사용한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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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우르반스는 “국가 자본주의”의 노고들에 관하여 상술할 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그 자신의 방식에 따라서 평가한다. 그를 이해하는 것이 전반적으로 가능한 한, 그는 “국가 자본주의”의 정권이 필요한 것이라고, 그리고 더 나아가, 마치 기업 집단들이 본질적으로 다른 기업들에 비교되는 것과 같은 의미에서, 사회의 발전에 있어서 진보적인 단계라고 선언한다. 자본주의적 계획을 평가함에 있어서 너무나도 근본적인 오류가 그것이 무엇이건 어떠한 접근도 묻어버리기에 충분하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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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정한 정치적 전제조건들 하에서, 전쟁이 그 종지부를 찍었던 자본주의 상승의 시대 동안에는 다양한 형태의 국가화를 진보적인 표현으로 보는 것이 가능했던 반면, 다시 말해 국가자본주의가 사회를 앞으로 나아가도록 이끌기 위하여 활동하며, 미래의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경제와 관련된 일을 촉진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 가능했던 반면, 현재의 “계획 경제”는 철두철미하게 반동적인 단계로 바라보아야만 한다. 즉, 국가자본주의는 노동의 전 세계적 분할로부터 경제를 분리하려고, 생산력을 국민 경제라는 프로크러스틴의 침대에 맞추려고, 일부 부문들에서는 생산을 인위적으로 축소시키고, 이와 마찬가지로 인위적으로 다른 부문들은 이윤도 남기지 못하는 엄청난 지출을 통하여 만들어 내려고 애쓴다. 고대 중국적 유형에 있는 관세장벽에서 시작하여 히틀러의 “계획경제” 하에서 기계사용에 대한 금지라는 에피소드로 끝이 나는 현재의 국가의 경제 정책들은 국민 경제의 쇠퇴를 야기하고, 세계 관계들에서의 혼란을 야기하고, 사회주의적 계획에 아주 많이 필요하게 될 통화체계를 완전히 붕괴시키는 대가로 불안정한 규제를 획득한다. 현재의 국가자본주의는 사회주의 국가가 미래에 할 일들을 준비하거나, 그 업무들을 경감시키기는커녕, 반대로 사회주의 국가에 엄청난 추가적인 어려움들을 만들어낸다. 프롤레타리아트는 권력 장악을 위한 일련의 좋은 기회들이 지나가 버리게 했다. 이것을 통하여, 프롤레타리아트는 정치에서는 파시스트 보나파르티즘을 위한 조건들을, 경제에서는 “국가자본주의”의 파괴적 활동을 위한 조건들을 창출했다. 권력 장악 이후에, 프롤레타리아트는 자신의 정치적 실책들에 대하여 경제적으로 대가를 치러야만 할 것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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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의 경제</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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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분석의 한계들 안에서 우리에게 관심을 가장 많이 끄는 것은 우르반스가 “국가자본주의”라는 용어 아래에 소련의 경제 또한 포함시키려고 시도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면서 그는 레닌을 언급하는데, 이것은 거의 믿을 수 없는 일이다! 이러한 언급을 설명하는 오직 한 가지 길이 있다. 즉, 한 달에 새로운 이론 하나를 발명해내는 불멸의 발명가로서, 우르반스에게는 자신이 언급하는 책들을 읽을 시간이 없는 것이다. 레닌은 실제로 “국가자본주의”라는 용어를 적용했지만, 전체로서의 소비에트 경제에 적용했던 것이 아니라 정부 통제하의 영업 허가를 받은 외국기업(foreign concession), 공상(工商) 혼합 기업들, 부분적으로 농민과 대개는 쿨락[부농] 기업들과 같은 소비에트 경제의 특정한 부위에 대해서만 그렇게 했다. 이들 모두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자본주의의 요소들이지만, 이것들이 국가에 의하여 통제되기 때문에, 그리고 심지어 국가의 직접적 참여를 통하여 혼합 기업들로서 기능하기 때문에, 레닌은 이들 경제적 형태들을 조건적으로, 혹은 레닌 자신의 표현에 따르면 “인용부호들 속에” 넣어서 “국가자본주의”라고 불렀다. 하지만, 프롤레타리아트 국가가 사적 자본을 허용하고, 사적 자본으로 하여금 명백한 제한들 속에서 노동자들을 착취하도록 허용했던 한, 프롤레타리아트 국가는 자신의 날개들 중의 하나 아래에 부르주아지적 관계들을 보호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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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은 자신이 영업 허가를 받은 기업들과 “혼합 기업들”, 즉 국가와 사적 자본의 상호관계에 기초한 기업들이 순수한 국가 기업집단들과 신디케이트들과 나란히 소비에트 경제에서 주요한 지위를 차지하게 될 것이라고 미리 예상했던 신경제정책으로의 이행의 시기에 이 용어를 제출했다. 레닌은 정부의 허가를 받은 기업들 등과 같은 국가자본주의 기업들과 구별하여, 소비에트 기업집단들과 신디케이트들을 “변함없는 사회주의적 형태의 기업들”로 정의했다. 레닌은 국가자본주의와 순수 국가기업들 사이의 경쟁으로서의 소비에트 경제의, 특히 선업에서의 계속되는 발전을 구상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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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우르반스로 하여금 유혹에 이끌리게 했던 이 용어를 레닌이 어떤 제한들 속에서 사용했는지가 분명하다고 믿는다. “레닌(!)동맹”의 지도자의 이론적 파국을 마무리하기 위하여, 우리는 레닌의 원래의 예측들과는 반대로 정부의 허가를 받은 기업들도 혼합 기업들도 소비에트 경제의 발전에 있어서 어떠한 분명한 역할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상기해야만 한다. 현재에는 일반적으로 이들 “국가자본주의” 기업들은 전혀 남아 있지 않다. 반면에, 신경제 정책의 초기에는 그 운명이 너무나도 음울했던 소비에트 기업집단들은 레닌 사망 이후 몇 년 동안에 거대한 발전을 경험했다. 따라서, 만약 누군가가 레닌의 용어를 의식적으로, 그리고 사물에 대한 일정한 이해를 가지고 사용하고자 한다면, 그 사람은 소비에트의 경제적 발전은 완전히 “국가자본주의”의 단계를 넘어섰으며, “변함없는 사회주의적 형태”의 기업들이라는 경로를 따라 전개되었다고 말해야만 할 것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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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또한 이번에는 정반대 성격의 어떠한 가능한 오해들도 미리 예방해야만 한다. 레닌은 자신의 용어들을 꼼꼼하게 선택했다. 그는 기업집단들을 지금 스탈린주의자들이 딱지를 붙이는 것처럼 사회주의적기업들이라고 불렀던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적 형태”의 기업들이라고 불렀다. 레니의 문장에서, 이 미묘한 용어상의 차이는 기업집단들이 형태가 아니라, 경향이 아니라, 지방의 경제가 혁명화된 이후, 도시와 시골 사이의 모순이 파괴된 이후, 인류가 모든 인류의 욕구를 완전하게 만족시키는 것을 배운 이후, 즉 진정한 사회주의 사회가 국유화된 산업과 집산화된 지방 경제의 기초 위에서 등장하게 된 이후에 그것들의 진정한 내용에 따라서 사회주의적인 것으로 불릴 권리를 가게 될 것이라는 것을 의미했다. 레닌은 이러한 목적의 성취는 2개나 혹은 3개 세대의 계속되는 활동들, 더 나아가 국제혁명의 발전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 속에 있는 활동들을 필요로 하게 될 것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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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해보면, 단어의 엄격한 의미에 있어서 우리는 부르주아지 자신의 책임 하에서 부르주아지 국가에 의한 산업이나 다른 기업들에 대한 운영이나 혹은 사적 자본주의 기업들의 활동에 대한 부르주아지 국가의 “규제하기” 개입으로 국가자본주의를 이해해야만 한다. “인용 부호 속에서”의 국가자본주의에 대해서, 레닌은 사적 자본주의 기업들과 관계들에 대한 프롤레타리아트 국가의 통제라는 뜻으로 말했다. 이들 개념들 중 어떤 것도 어떤 측면으로부터도 현재의 소비에트 경제에 적용되지는 않는다. 어떤 구체적인 경제적 내용을 우르반스 자신이 소비에트 “국가자본주의”에 대한 자신의 이해 속에 넣었는지는 깊은 비밀로 남는다. 분명하게 말해서, 그의 최신 이론은 전부 잘못 읽은 인용문에 기초하여 만들어진 것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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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료집단과 지배계급</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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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소비에트 국가의 “비-프롤레타리아트적” 성격에 관한, 훨씬 교묘하고, 훨씬 신중하지만, 더 이상은 진지하지 않은 또 다른 이론이 있다. 블룸의 동료이며 소바린의 스승인 프랑스 사회민주당원 루시엔 로래트[Lucien Laurat]는 지금까지는 부르주아지 계급의 몫으로 떨어졌던 잉여가치를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는 관료집단은 정치적으로 프롤레타리아트를 지배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 프롤레타리아트를 착취하지도 않기 때문에, 프롤레타리아트도 부르주아지도 아닌 소비에트 사회는 절대적으로 새로운 유형의 계급 조직이라는 관점을 방어하는 책자를 썼다. 로래트는 자본론의 육중한 공식들을 가지고 자신의 의외의 사실들 발명하며, 이러한 방식으로 자신의 피상적이고 순전한 서술 “사회학”에 심오함의 외관을 부여한다. 그의 전체 이론이 착취하는 관료집단의 명령을 내리는 지위들을 위한 희생양으로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정의하기 위하여 10월 혁명과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을 기다리지 않았다는 면에서 자신을 저속하게 하는 프랑스인보다 더 뛰어났던 러시아-폴란드 혁명가 마크하이스키에 의하여 단지 보다 많은 불꽃과 광채만을 지닌 채 30년 전에 정식화되었었다는 것을 편집자는 모르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마크하이스키조차 엄지손가락으로부터 그의 이론을 흡수하지는 않았는데, 그는 단지 국가사회주의에 반대하는 무정부주의적 편견들에 사회학적으로, 그리고 경제학적으로 “의존했을” 뿐이다. 그런데, 마크하이스키 또한 맑스의 공식들을 활용했지만, 로래트의 경우보다 훨씬 더 일관된 방식으로 그렇게 했다. 마크하이스키에 따르면, 자본론의 저자는 그의 재생산의 공식들(2권)에서 사회주의 인텔리겐챠(관료집단)가 게걸스럽게 먹어치우게 되는 잉여가치의 몫을 사악한 사전 고려 하에 덮어 가렸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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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착취자 맑스에 대한 폭로는 없었지만, 소련에서는 사회적 관료집단이라는 새로운 계급이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대체했다고 선포했던 미야스니코프가 우리 시대에 이런 종류의 “이론”을 방어했다. 십중팔구 로래트는 현학적으로 “학문적인” 냄새만을 부여하는 가운데 미야스니코프로부터 자신의 이론을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차용했다. 로래트가 로자 룩셈부르크의 모든 실수들(그리고 오로지 실수들만), 심지어 그녀 자신조차 단념했었던 실수들을 흡수했음이 또한 완벽을 기하기 위하여 추가되어야 한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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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론” 그 자체를 보다 면밀하게 검토해보자. 맑스주의자에게 있어서 계급은 예외적으로 중요하며, 더 나아가 과학적으로 제한된 의미를 가진다. 계급은 단지 국민소득의 분배에 대한 참여에 의해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경제의 일반적 구조에서의 독립적인 역할, 그리고 사회의 경제적 기초 안에 있는 독립적인 뿌리에 의하여 정의된다. 각각의 계급(봉건 귀족, 농민, 소부르주아 계급, 자본가 부르주아지 계급, 그리고 프롤레타리아트)은 그 자신의 특수한 소유 형태들을 만들어낸다. 관료집단은 이들 모든 사회적 특징을 결여하고 있다. 관료집단은 생산과 분배의 과정에서 어떠한 독립적인 지위도 가지고 있지 않다. 관료집단은 어떠한 독립적인 소유의 뿌리들을 가지고 있지 않다. 관료집단의 기능들은 기본적으로 계급 지배의 정치적 기술과 관련된다. 다양한 형태를 가지며, 구체적인 비중이 다른 관료집단의 존재는 저마다의계급적 통치를 특징짓는다. 관료집단의 권력은 반영되는 성격의 것이다. 경제적 지배계급의 사회적 뿌리들을 자신들의 자양분으로 하며, 경제적 지배계급과 함께 스스로를 유지하고, 그들과 함께 몰락하는 관료집단은 경제적 지배계급과 떼려고 해도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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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급적 착취와 사회적 기생주의</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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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래트는 관료집단이 필요한 정치적, 경제적, 그리고 문화적 기능들을 수행하는 한, 그들의 노동에 대한 대가를 받는 것에 “반대하지 않는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국민소득의 절대적으로 불균형적인 부분에 대한 통제되지 못하는 전유이다. 정확하게 이 의미에서, 관료집단은 “착취 계급”으로 보인다. 하지만, 논박의 여지가 없는 사실들에 기초한 이 주장이 관료집단의 사회적 특징을 변화시키지는 않는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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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그리고 모든 사회조직에서, 관료집단은 잉여가치의 적지 않은 부분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운다. 예를 들어, 이탈리아와 독일의 파시스트 메뚜기들이 국민소득의 얼마나 많은 부분을 먹어치우는지를 계산하는 것이 시시한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 자체로 중요하지 않은 것이 아닌 이 사실이 파시스트 관료집단을 독립적인지배계급으로 바꾸어 내기에는 전적으로 부족하다. 파시스트 관료집단은 부르주아지 계급의 청부업자들이다. 이 청부업자가 주인의 목 위에 걸터앉아, 때때로 가장 맛있는 조각들을 주인의 입으로부터 빼앗고, 게다가 그의 주인의 대머리에 침을 뱉는다는 것이 사실이다. 무슨 말을 한다고 해도 가장 거북한 청부업자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지 청부업자일 뿐이다. 그가 없다면, 부르주아지 계급과 부르주아지 계급의 사회조직은 절대적으로 파멸하고 말 것이기 때문에, 부르주아지 계급은 그를 감수한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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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뀌어야 할 것을 바꾼다면, 위에서 말했던 것은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에게도 또한 적용될 수 있다.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은 국민소득의 상당한 비율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우고, 낭비하며, 착복한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이들의 경영에 대하여 높은 값을 치른다. 소비에트 사회에서, 스틸린주의 관료집단은 정치적, 행정적 특전들을 가진다는 의미에서뿐만 아니라, 엄청난 물질적 이점들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에서도 극도로 특권화된 지위를 장악하고 있다. 그럼에도, 가장 큰 아파트들, 가장 맛있는 스테이크들, 그리고 심지어 롤스 로이스들 조차도 관료집단을 독립적인 지배계급으로 변형시키기에는 충분하지 않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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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불평등, 게다가 그렇게 심한 불평등은 절대적으로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공식적인, 그리고 절반은 공식적인 거짓말들과는 반대로, 현재의 소비에트 사회조직은 사회주의가 아니라 이행의 사회조직이다. 현재의 소비에트 사회조직은 여전히 자본주의의 기괴한 유산, 특히 관료집단과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관료집단 자신의 내부와 프롤레타리아트의 내부에 있는 불평등을 여전히 자신의 내부에 지니고 있다. 주어진 단계에서, 특정한 한계들 내에서는 불평등이 여전히 남아 있다. 차별적인 임금, 보너스 등 사회주의적 진보의 부르주아지적 방편들이 경쟁을 위한 자극들로 사용된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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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체제의 이행적 성격이 불평등을 설명하기는 하지만, 그것이 관료집단의 통제받지 않는 지도자들이 남용해 온 그러한 기괴하고, 공공연하며, 비밀스러운 특권들을 결단코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좌익반대파는 그 모든 모습들 속에서 관료집단이 소비에트 사회의 도덕적 타이 로드[해석자: 자전거 바퀴의 살에 해당되는 장치]를 분해하고 있고, 대중들 사이에서의 첨예하고 정당한 불만을 야기하고 있으며, 거대한 위난들을 위한 기초를 준비하고 있다고 선언하기에 앞서, 우르반스, 로래트, 소바린, 그리고 시몬 웨일등의 누설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료집단이 하나의 “계급”으로서 그들에게 고유한 어떠한 특수한 관계로부터가 아니라, 10월 혁명에 의해 수립되었고, 근본적으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에 적절한 그러한 소유관계들로부터 자신들의 특권들을 획득하기 때문에, 관료집단의 특권들 하나만으로는 소비에트 사회의 기초들을 변화시키지 못한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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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히 하자면, 관료집단이 인민들에게 강도질을 하는 한(그리고 이것은 모든 관료들에 의하여 다양한 방식으로 행해진다), 우리는 단어의 과학적 의미에서 계급착취가 아니라, 비록 매우 거대한 규모에서라고 하더라도 사회적 기생주의로 다루어야만 한다. 중세 시대 동안에, 성직자 집단은 그들의 지배가 토지소유와 강제노역이라는 특수한 체제에 기초했던 한, 하나의 계급이나 신분을 구성했다. 오늘날의 교회는 착취하는 계급이 아니라 기생적 자치단체를 구성한다. 미국의 성직자 집단을 하나의 특수한 지배계급이라고 실제로 말하는 것은 분별없는 짓이 될 것이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다양한 색조들과 교파들의 성직자들이 잉여가치의 거대한 부분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운다. 그것의 기생주의의 특징들 속에서, 성직자뿐만 아니라 관료집단도 마찬가지로 잘 알려져 있다시피 하나의 독립적인 “계급”을 의미하지 않는 룸펜 프롤레타리아트와 비슷하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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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가지 전망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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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우리가 통계 수치 속에서가 아니라 역동적인 단면 속에서 문제를 취한다면, 문제는 우리 앞에서 보다 더 뚜렷이 부상하여 두드러지게 될 것이다. 국민소득의 엄청난 부분을 비생산적으로 낭비하면서 동시에 소비에트 관료집단은 자신들의 바로 그 기능으로 인하여 나라의 경제적, 그리고 문화적 성장에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다. 국민소득이 높을수록, 그들의 특권의 축적 또한 더 풍부해진다. 동시에, 소비에트 국가의 사회적 기초 위에서의 노동 대중들의 경제적, 문화적인 향상은 관료적 지배의 기반들 바로 그것을 침식하는 경향이 있을 수밖에 없다. 이 행운의 역사적 이형(異形)에 비추어 볼 때, 관료집단은 단지 사회주의 국가의 기구(나쁘고 값비싼 기구)인 것으로 판명된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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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국민소득의 전례가 없이 큰 부분을 낭비함으로써, 그리고 경제의 기본적인 비례들을 파괴함으로써(이것은 논박 속에서 다루어 질 것이다), 관료집단은 나라의 경제적, 그리고 문화적 성장을 방해한다. 절대적으로 옳다! 관료주의의 방해받지 않는 더 이상의 발전은 필연적으로 경제적, 그리고 문화적 성장의 중단으로, 끔찍한 사회적 위기로, 그리고 전체 사회의 급격한 하락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붕괴를 의미할 뿐만 아니라 관료적 지배의 종말을 의미하기도 한다. 노동자 국가의 자리에 “사회적 관료제적” 관계들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관계들이 찾아 올 것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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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의 계급적 성격에 대한 논쟁을 완전히 탐구 할 수 있게 될 것이라는 전망 속에서 한번만 이렇게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우리가 소비에트 정권의 더 이상의 성공이라는 경우의 수를 취하건, 혹은 반대로 소비에트 정권의 붕괴라는 경우의 수를 취하건, 관료는 독립적인 계급으로 판명되는 것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에 붙어 있는 사마귀로 판명된다고 우리는 믿는다. 종양은 엄청난 규모로 커질 수 있고, 심지어 생명체를 교살시킬 수는 있지만, 종양이 하나의 독립적인 생명체가 될 수는 절대로 없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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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적으로, 완벽한 명확성을 위하여 우리는 다음을 추가해야 할 것이다. 만약 오늘날 소련에서, 맑스주의 당이 권력을 장악하고 있다면, 그들은 정치적 사회조직 전체를 쇄신할 것이다. 그들은 관료집단을 재편하고 숙청하여 관료집단을 대중들의 통제하게 있도록 할 것이다. 그들은 모든 행정적 업무들을 변형하여 경제의 운영에 있어서 일련의 중대한 개혁들을 시작할 것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그들은 소유관계들에서의 전복, 즉 새로운 사회혁명을수행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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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혁명의 가능한 경로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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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료집단은 지배계급이 아니다. 그러나 관료체제의 더 이상의 발전은 유기적으로 퇴행을 통해서가 아니고 반혁명을 통하여 새로운 지배계급의 발단으로 귀결될 수 있다. 우리는 스탈린주의 기구가 정확하게 이중적 역할을 수행하기 때문에 그들을 중도파라고 부른다. 더 이상은맑스주의 지도부가 없고, 아직까지는곧 등장하는 지도부도 없는 오늘날, 스탈린주의 기구는 자기 자신의 방식들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에 의존한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들은 내일적의 승리를 촉진하는 그런 것들이다. 소련에서 스탈린주의의 이러한 이중적 역할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누구라도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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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 사회는 국가 없이 영위될 것인 것처럼, 정당도 없이 영위될 것이다. 이행의 시대라는 조건 하에서는 정치적 상부구조가 결정적인역할을 한다. 프롤레타리아트의 발전되고 안정적인 독재는 당이 스스로 행동하는 전위로서 지도적 역할에서 기능하는 것, 프롤레타리아트가 노동조합들 통하여 서로 결합되어 있는 것, 노동인민들이 소비에트 체제를 통하여 국가에 분리될 수 없도록 결합되어 있는 것, 그리고 최종적으로 노동자국가가 인터내셔널을 통하여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와 함께하는 투쟁단위로 배치되어 있는 것을 전제로 한다. 한편, 관료집단은 당과 노동조합, 소비에트, 그리고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을 목 졸라 죽여 왔다. 프롤레타리아트 사회조직의 퇴행에 대하여 얼마나 많은 죄가 만국의 사회민주당에게 있는지에 관하여는 여기서 설명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여기에 로래트도 또한 속한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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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역사적 책임의 실제 배분이 어떨지라도, 그 결과는 똑같다. 당, 소비에트들, 그리고 노동조합들에 대한 교살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적 원자화를 의미한다. 사회적 적대들은 정치적으로 극복되기는커녕 행정적으로 억압된다. 정치적 자원들이 사회적 적대들을 정상적으로 해결하기 위하여 소실되는 것과 똑같은 만큼 사회적 적대들은 억압 아래에 모인다. 외부의 혹은 내부의 첫 번째 사회적 충격이 원자화된 소비에트를 내전으로 내던지게 될지도 모른다. 국가와 경제에 대한 통제를 상실해온 노동자들은 자기 방어의 무기로 대중파업들에 의존할지도 모른다.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규율은 깨지게 될 것이다. 노동자들의 맹공격 하에서, 그리고 경제적 난관들의 압력 때문에, 기업집단들은 초기의 계획화를 중단하지 않을 수 없게 되고, 서로간의 경쟁에 돌입하게 될 것이다. 사회조직의 붕괴는 자연스럽게 촌락에서 그 폭력적인, 그리고 무정부적인 메아리를 발견하게 될 것이며, 필연적으로 군대 속으로 던져지게 될 것이다. 사회주의 국가는 자본주의 사회조직, 혹은 보다 정확하게 자본주의적 무정부상태에 자리를 내 주면서 붕괴하게 될 것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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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스탈린주의 언론은 우리의 경고적 분석을 반혁명적 예언이나 혹은 심지어 트로츠키 도당의 표출된 “욕망”으로 재발행할 것이다. 그 기구의 신문을 거드는 자들에 대하여, 우리는 오래 전부터 경멸의 침묵 말고는 다른 감정을 가져보지 않았다. 우리 의견으로는, 상황이 위험스럽기는 하지만, 희망이 없는 것은 전혀 아니다. 어떤 경우에라도, 가장 위대한 혁명적 전투가 전투에 앞서, 그리고 전투도 없이 패배 당했다고 선언하는 것은 실로 지독하게 비겁하고, 직접적인 배신의 행위가 될 것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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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적으로” 관료집단을 제거하는 것은 가능한가?</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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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관료집단이 모든 권력과 모든 수입들을 자신의 수중에 있는 권력으로 집중해왔다는 것이 사실이라면(그리고 이것은 사실이다), 중요한 문제가 제기된다. 소비에트 국가의 재조직화는 어떠할 것인가? 그리고 이 임무를 평화적인 방식들로 해결할 수는 있는 것인가?</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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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도 우리는 이 임무는 오로지 혁명적 당에 의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을 불편의 공리로 규정해야만 한다. 근본적인 역사적인 임무는 과거 당의 건강한 인자들과 청년들 사이로부터 소련에서 혁명적인 당을 건설하는 것이다. 차후에, 우리는 임무가 해결될 수 있는 조건들을 다루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당이 이미 존재한다고 가정해보자. 그 당은 어떤 길들을 통하여 권력을 장악할 수 있겠는가? 일찍이 1927년 스탈린은 반대파에 관하여 연설하면서 “현재의 관료집단은 오로지 내전을 통해서만 제거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 영감에서 보나파르트적인 이 도전은 좌익반대파가 아니라 당에 대하여 행해졌어야 했다. 자신의 수중에 모든 지렛대를 집중하고서는, 관료집단은 자신들은 프롤레타리아트가 그들의 머리를 치켜드는 것을 더 이상은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선포했다. 연이은 사태들의 경로가 이 도전에 거대한 부담을 추가해왔다. 지난 몇 년간의 경험들 이후,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이 당 대회나 혹은 소비에트 대회를 통하여 제거될 수 있다고 가정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볼셰비키 당의 실질적인 마지막 대회인 12차 당 대회는 1923년 초에 개최되었다. 이후의 모든 대회들은 관료적인 퍼레이드였다. 오늘날에는 심지어 그러한 대회들마저도 버려져왔다. 지배도당을 제거하기 위한 어떠한 정상적인 “합헌적” 방식들도 남아 있지 않다. 관료집단은 오로지 힘에 의해서만 프롤레타리아트 전위의 수중으로 권력을 양도하게 강제될 수 있을 뿐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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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인들 모두가 즉각적으로 합창하여 울부짖는다. 카우츠키와 마찬가지로 “트로츠키 도당”도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에 맞서는 무장봉기를 설교하고 있다. 그러나 지나치자. 권력 장악의 문제는 오직 새로운 당이 스스로의 주변으로 노동계급의 다수를 공고하게 결합시켰을 때에만 실질적인 문제로서 제기될 것이다. 역관계에 있어서의 그러한 급진적인 변화의 과정에서, 관료집단은 더욱더 고립될 것이고, 더욱더 분열될 것이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관료집단의 사회적 뿌리들은 프롤레타리아트, 비록 적극적인 지지는 아닐지라도 어찌되었건 프롤레타리아트의 “관용”에 놓여 있다. 프롤레타리아트가 행동으로 떨쳐 일어선다면, 스탈린주의 기구는 공중에 매달려 진채로 있게 될 것이다. 스탈린주의 기구가 여전히 저항하고자 시도한다면, 프롤레타리아트는 내전의 수단이 아니라 경찰적 성격의 수단들을 관료집단에 대항하여 적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어떤 경우에도, 필요하게 될 것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에 맞서는 무장봉기가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에서의 유해한 종양의 제거일 것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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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내전은 스탈린주의 관료집단과 봉기에 나선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에서가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와 적극적인 반혁명 세력들 사이에서 전개될 수 있을 것이다. 2개의 대중적 진영들 사이에서의 공공연한 충돌의 사태 속에서는 독립적인 역할을 하는 관료집단에 관한 이야기는 있을 수조차 없다. 관료집단의 극(極)면들은 바리케이드의 서로 다른 면들로 내동댕이 처질 것이다. 이후 계속되는 사태전개의 운명은 물론 투쟁의 결과에 의하여 결정될 것이다. 어떤 경우에라도 혁명적 진영의 승리는 반혁명에 대한 승리로 자연스럽게 권력으로 상승하게 될 프롤레타리아트 당의 지도부 하에서만 생각할 수 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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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에서의 새로운 정당</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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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료주의에 의하여 약화되어온 소비에트 권력의 붕괴의 위험과 10월의 유산을 구해낼 수 있는 새로운 당의 주변으로 공고하게 결합된 프롤레타리아트의 시간 중 어느 것이 더 가까운가? 그러한 질문에 대한 선험적인 대답은 없다. 투쟁이 결정하게 될 것이다. 아마도 전쟁이 될지도 모르는 주요한 역사적 테스트가 세력관계를 결정할 것이다. 어떤 경우에라도, 세계 프롤레타리아트 운동의 한층 더한 쇠퇴와 파시스트 지배의 한층 더한 확장 속에서는, 내부 세력들만으로는 조금 동안이라도 소비에트 권력을 유지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소비에트 국가에 대한 오직 근저에서의 개혁을 위한 근본적인 조건은 세계 혁명의 승리적인 확산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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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에서는 심지어 당이 없이도 혁명적 운동이 되살아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혁명적 운동은 당의 지도하에서만 오직 정복할 수 있다. 사회혁명의 시대 전반을 통하여, 즉 수십 년 동안, 국제 혁명정당이 역사적 진보의 기본적인 기구로 남아 있어 왔다. “오래된 형식들”은 시대에 뒤쳐진 것이며, 뭔가 “새로운” 것(정확하게 무엇인가?)이 필요하다는 슬로건을 제기함으로써 우르반스는 자신이 빠져 있는 ... 다소 오래된 형식들 속의 혼란만을 폭로할 뿐이다. “계획화된” 자본주의라는 조건 하에서의 노동조합 활동, 그리고 파시즘과 임박한 전쟁에 맞서는 투쟁은 명백하게 투쟁기관들의 새로운 방식들과 형태들을 만들어내는 것으로 귀결될 것이다. 브란들러 도당처럼 비합법 노동조합들에 관한 환상에 탐닉하는 대신, 사람들은 노동자들 자신들의 주도권을 잡으면서, 그리고 그것을 확장하고 일반화하는 가운데 투쟁의 실제 경로를 세심하게 학습해야만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러한 작업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당, 즉 프롤레타리아트 전위의 정치적으로 결합된 중핵이 필요하다. 우르반스의 입장은 주관적이다. 그는 자기 자신의 “당”을 파괴하여 파멸로 이끄는데 성공한 이후, 그 당에서 환멸을 느끼게 되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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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신을 주장하는 자들 가운데 몇몇은 자신들이 “오래 전”에 새로운 당들이 필요하다고 말했으며, 결국에는 이제 “트로츠키 도당”도 또한 그 주변에 오게 되었고, 조만간 그들도 또한 소련이 노동자 국가가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게 될 것이라고 선언한다. 실제의 역사적 과정을 탐구하기는커녕, 이 사람들은 천문학적인 “발견들”을 만들어 내기에 바쁘다. 일찍이 1921년에, 고르터[Gorter] 종파와 독일 “공산주의 노동자당”은 코민테른은 운이 다했다고 결정했다. 그때 이후로 그러한 선언들은 계속 있어왔다(로리아트[Loriot], 코르쉬[Korsch], 소바린 등등). 하지만, 그들은 단지 써클들과 개인들의 주관적인 환멸만을 반영했을 뿐, 역사적 과정의 객관적인 요구들을 반영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이들 “진단들”로부터는 절대적으로 아무것도 드러난 것이 없다. 소란스러운 혁신을 주장하는 자들이 지금 현재 옆으로 비켜서 있게 된 것은 정확하게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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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태들의 경로는 미리 정해진 길을 따르지 않는다. 코민테른은 개인들이 아니라 대중들의 목전에서 이루어졌던 파시즘에 대한 자신의 굴종으로 인하여 스스로를 파괴했다. 그러나 심지어 코민테른의 붕괴 이후에 조차, 소비에트 국가는 자신의 혁명적 권위를 크게 깎아내린 채로 여전히 존재하고 있으며, 이것은 사실이다. 사람들은 사실들을 실제의 사태전개에 의하여 그들에게 주어진 것으로서 취해야만 하지, 사이먼 웨일[Simone Weil]처럼 변덕스러워서도 안 되고, 자신의 입술을 찡그려서도 안 된다. 사람들은 역사에 대하여 불쾌해 하거나 역사에 등을 돌려서는 안 된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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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정당들과 새로운 인터내셔널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신뢰할만하고, 원칙적인, 그리고 우리 시대의 수준에 의거하는 기초들이 필요하다. 우리는 볼셰비키-레닌주의자들의 이론적 창고 속에 있는 부족함과 실책들에 관하여 환상을 가지고 있지 않다. 하지만, 그들의 10년 동안의 활동은 새로운 인터내셔널의 건설을 위한 근본적인 이론적, 그리고 전략적 필요조건들을 준비해왔다. 우리의 새로운 동맹자들과 함께, 우리는 이들 필요조건들을 발전시키고, 투쟁의 실제 과정 속에서 비판의 기초 위에서 그것들을 구체화할 것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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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 인터내셔널과 소련</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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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에서 새로운 당, 실제로 새로운 조건들 하에서 되살아난 볼셰비키 당의 중핵은 볼셰비키-레닌주의자들의 그룹이 될 것이다. 지난 몇 달 동안의 소련의 공식 보도조차 우리의 지지자들이 용감하게 자신들의 활동을 수행해오고 있으며, 그것이 성공적이지 않았던 것은 아님을 증언해왔다. 그러나 여기서 환상은 금물이다. 혁명적 국제주의의 당은 국제 프롤레타리아트 전위가 다시 한 번 세계적 규모에서 투쟁하는 세력으로 등장하는 경우에만 오직 자국 관료집단의 부패한 영향력으로부터 노동자자들을 해방시킬 수 있을 것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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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주의 전쟁의 시작부터, 그리고 10월 혁명 이후에는 발전된 형식으로, 볼셰비키 당은 세계의 혁명적 투쟁에서 지도적 역할을 수행했다. 오늘날 이 지위는 완전히 상실되었다. 이것은 비단 당의 공식적인 캐리커쳐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러시아 볼셰비키-레닌주의자들이 활동하는 극단적으로 어려운 조건들이 국제적인 규모에서 그들이 지도적 역할을 수행할 가능성을 배제시킨다. 이것보다 더, 소련의 좌익반대파는 새로운 인터내셔널의 성공적인 형성과 성장의 결과로서만 새로운 당으로 발전할 수 있다. 혁명적 무게중심이 당건설의 즉각적인 가능성들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더 큰 서구로 명백하게 이동해왔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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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몇 년 동안의 비극적 경험들의 영향력 하에서, 분명한 호소와 흠 없는 기치를 기다리는 모든 나라들의 프롤레타리아트 내부의 많은 수의 혁명적 인자들이 모여들었다. 코민테른의 경련들이 거의 모든 곳에서 노동자들의 새로운 층이 사회민주당을 향해 나아가도록 강제해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경각된 대중들의 쇄도는 정확하게 개량주의에게는 치명적인 위험이 되었다. 개량주의는 경계 지점들에서 터지고 있으며, 분파들로 분열되고 있고, 모든 곳에서 혁명적 세력들을 축출하고 있다. 이러한 것들이 새로운 인터내셔널을 위한 즉각적인 정치적 전제조건들이다. 초석은 이미 놓여졌다. 그 초석은 4개 조직들에 의한 원칙선언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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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의 계급적 성격을 포함하는 세계정세에 대한 정확한 평가가 더 이상의 성공을 위한 조건이다. 이러한 노선을 따라서, 새로운 인터내셔널은 그 존재의 첫 번째 날들부터 시험을 받게 될 것이다. 새로운 인터내셔널은 소비에트 국가를 개혁할 수 있기 전에, 스스로 소비에트 국가의 방어에 나서야만 한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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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의 “비-프롤레타리아트적” 성격을 핑계로 소련에 대하여 낙담하여 손을 젓는 모든 정치적 경향은 제국주의의 수동적인 도구가 될 위험을 무릅쓰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관점에서는, 당연히 관료집단에 의하여 약화된 최초의 노동자 국가가 자신의 내부와 외부의 적들의 공동의 타격들로 인하여 파괴될 비극적 가능성이 배제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가능한 최악의 경우의 사태에서는, 파국에 대한 범죄자들은 어디에있는가?라는 문제로 인하여 이후 지속되는 혁명적 투쟁의 경로가 엄청난 중요성을 띨 것이다. 혁명적 국제주의자들에게는 단 한 점의 죄목도 떨어지지 않을 것임에 틀림없다. 치명적인 위험의 시간에, 그들은 틀림없이 마지막 바리케이드에 남아 있는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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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소련에서의 관료적 평형상태의 파열은 거의 틀림없이 반혁명 세력들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다. 하지만 진정한 혁명적 인터내셔널이 있다면, 스탈린주의 사회조직의 불가피한 위기가 소련에서 부활의 가능성을 열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기본적인 경로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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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믈린의 대외 정책들은 매일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새로운 타격들을 가한다. 대중으로부터 표류하는 스탈린주의 지도부 하의 외교 관료들은 무엇보다도 소련 그 자신의 가장 큰 피해를 주면서 모든 나라들의 노동자들의 가장 기초적인 혁명적 감정들을 유린한다. 그러나 이 속에 예기치 못했던 것은 하나도 없다. 관료집단의 대외 정책들은 국내 정책을 보충한다. 우리는 대외 정책에 맞서 투쟁하는 것만큼이나 국내 정책에 맞서서도 투쟁한다. 그러나 우리는 노동자 국가를 방어한다는 입장에서 우리의 투쟁을 수행한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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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나라들에서는 부패하고 있는 코민테른의 관료들이 소련에 대한 그들의 충성을 계속해서 맹세한다. 이들 맹세들 위에 무엇인가를 세운다는 것은 용서받지 못할 바보짓일 것이다. 이들 사람들의 다수에게는, 소련에 대한 소란스러운 “방어”는 신념이 아니라 공언이다. 그들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위해 투쟁하지 않는다. 그들은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의 흔적을 닦는다.(예를 들어, l'Humanite를 보시오). 위기의 시간에, Barbussized 코민테른은 자신이 히틀러에게 제공했었던 지지, 즉 반대파보다 더 많지 않은 지지를 소련에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혁명적 국제주의자들은 그렇지 않다. 10년 동안 관료집단에 의하여 불명예스럽게 박해를 받았던 그들은 노동자들에게 지칠 줄 모르게 소련에 대한 방어를 호소한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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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인터내셔널이 러시아 인민들에게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그리고 새로운 인터내셔널 혼자만이 노동자 국가에 대한 방어를 찬성한다는 것을 증명하게 될 때, 소련 안에서 볼셰비키-레닌주의자들의 지위는 24시간 안에 바뀔 것이다. 새로운 인터내셔널은 공동의 적에 맞서는 공동전선을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에게 제안할 것이다. 그리고 만약 우리의 인터내셔널이 하나의 세력을 대표한다면, 관료집단은 위험의 순간에는 공동전선을 회피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여러 해 동안의 거짓말과 비방의 껍데기에 무엇이 남겠는가?</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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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전쟁의 경우에도, 스탈린주의 관료집단과의 공동전선은 제국주의 대소동의 시간 동안에 인민들을 보다 잘 속이기 위하여 상호 비판을 금지하는 부르주아지 정당들과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의 방식을 따르는 “신성동맹”을 의미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 심지어 전쟁의 경우에도, 우리는 관료적 중도주의에 대하여 비판적인 화해불가능성을 고수할 것이며, 이것이 진정한 혁명적 전쟁을 지도하기 위한 관료의 무능력을 덮어 가리는 것이 불가능하게 할 것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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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뿐만 아니라 세계혁명의 문제는 하나의 그리고 똑같은 간단한 공식으로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제4 인터내셔널.</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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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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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반당한 혁명</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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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츠키, 1936년</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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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ong>제</strong><strong>9</strong><strong>장 소련에서의 사회적 관계</strong></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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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ong>아직은 역사에 의하여 결정되지 않았다</strong><strong>.</strong></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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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에서, 생산수단에 대한 국가소유는 거의 보편적으로 우세하다. 농업에서는 경작되는 토지의 10%가 넘지 못하는 부분을 포함하는 소비에트 농장들에서만 절대적으로 우세하다. 집단농장들, 협동조합 혹은 그룹 소유 농장들에서는 다양한 비중으로 국가소유와 사적 소유가 혼합되어 있다. 토지는 법적으로는 국가에 속해있음에도 불구하고 "영구적인" 사용을 목적으로 그룹 소유와 별반 다르지 않은 공동체들에 이전되어 왔다. 트랙터들과 정교한 기계류는 국가에 속해 있고, 작은 장비들은 공동체들에 속해 있다. 집단 농장의 농민 각자는 점점 더 많이 개별 농경을 수행한다. 결과적으로 10% 보다 많은 농민들이 개별 농부들로 남아 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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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의 통계조사에 따르면, 인구의 28.1%가 국가 기업과 기관들의 노동자들이거나 피고용자들이었다. 그들의 가족을 제외한 산업과 건축 노동자들이 1935년에는 750만을 헤아렸다. 집단농장 농민들과 협동조합 기능공들이 통계조사 당시에 인구의 45.9%를 차지했다. 도합, 인구의 74%가 "사회주의적 부문"에 속했으며, 나라의 기초자본의 95.8%가 이들 74%의 몫으로 떨어졌다. 개별 농민들과 장인들이 1934-35년에 여전히 22.5%를 차지하였지만, 그들은 전국 자본의 4% 보다 약간 더 많이 소유하고 있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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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 이후로는 통계조사가 없었다. 다음 번 통계조사는 1937년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명백하게도 지난 2년 동안에는 사적 기업부문이 "사회주의적인 것"에 훨씬 더 우호적으로 줄어들었다. 공식적인 경제학자들의 계산에 따르면, 개별 농민들과 장인들은 이제 인구의 10% 정도, 즉 1700만 명을 구성한다. 그들의 경제적 중요성은 그들의 숫자보다도 훨씬 더 낮게 떨어졌다. 중앙위원회 서기인 안드레예프는1936년 4월에 "1936년 우리나라의 사회주의적 생산의 상대적 비중이 98.5%에 이르고 있음이 확실하다. 즉, 1.5% 같은 하찮은 어떤 것이 여전히 비사회주의적 부문에 속해 있다."고 선언했다. 이들 낙관적인 수치들은 일견 사회주의의 "최종적이고 되 돌이킬 수 없는" 승리의 반론의 여지가 없는 증거처럼 보인다. 그러나 숫자놀음 뒤에 있는 사회적 현실을 보지 못하는 자에게 화가 미칠지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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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치들자체가약간과장되어있다. 집단농장들과 나란히 사적으로 분할 대여된 농지들이 "사회주의적" 부문으로 편입되어 있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하지만, 이것이 문제의 요점이 아니다. 경제에서 국가와 집단 농장의 엄청나고도 전체적으로 의심의 여지가 없는 우월성이 그것이 비록 미래에는 중요할지라도, 농업에서뿐만 아니라 산업에서도 "사회주의적" 부문 그 자체 내에서의 부르주아지 경향들의 힘이라는 또 다른 그리고 그 문제만큼이나 중요한 문제인, 농업에서뿐만 아니라 산업에서도 "사회주의적" 부문 그 차체 내에서의 부르주아지 경향들의 힘이라는 문제를 제거하지는 않는다. 이미 성취된 물질적 수준은 증가된 수요를 모두 일깨우기에는 충분하지만 그것들을 만족시키기에는 전적으로 부족하다. 그러므로 경제적 진보의 역동성 바로 그것이 농민들과 "지적"노동의 대표자들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의 상층부들 사이에서도 소부르주아지적 욕구의 자각에 영향을 끼친다. 개인 소유자들과 집단 농장들 사이의, 사적 숙련공들과 국가 산업들 사이의 있는 그대로의 대비는 나라의 경제 전체를 물들이고 있으며, 각자 그리고 모든 사람이 사회에는 가능한 적게 주고 사회로부터는 가능한 많이 받고자 하는 열망 속에서 일반적으로 스스로를 표현하는 이들 소부르주아적 욕구들의 폭발성 있는 힘에 대한 눈곱만큼의 아이디어도 제공하지 않는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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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어의 보다 적절한 의미에서 사회주의 건설에 쓰여지는 것만큼이나 많은 에너지와 재능이 화폐 축적자와 소비자의 문제들을 푸는 것에 쓰여지고 있다. 이렇게 해서 부분적으로는 극도로 낮은 사회적 노동생산성이 도출된다. 국가는 이들 원심력이라는 분자적 행위와의 계속적인 투쟁 속에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는 반면, 지배 그룹 자신은 합법적, 불법적인 개인적 축적들의 주요한 저수지를 형성한다. 새로운 법률상의 규범들과 함께 있는 것처럼 가면을 쓰고 있는 소부르주아지 경향들은 물론 통계적으로 쉽게 측정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의 경제생활에서의 실질적인 우월성은 극악무도한 <strong><em>형용모순</em></strong>이며, 기괴하고도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사회적 왜곡이고, 다시 사회 안에서의 유해한 성장들의 근원이 되는, "사회주의적" 관료세력 그 자신에 의하여 일차적으로 증명된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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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보게될것처럼, 관료세력을 국가와 동일시하고, 국가를 인민과 동일시하는 것에 전적으로 기초하고 있는 새 헌법은 "... 국가소유 즉, 전체 인민의 소유들"이라고 말한다. 이 동일시는 관료적 교조의 근본적인 궤변이다. 맑스 그 자신에서 시작하여, 맑스주의자들이 노동자 국가와 관련하여 <strong><em>국가 소유</em></strong><strong><em>, </em></strong><strong><em>전인민적</em></strong><strong><em>[national] </em></strong><strong><em>소유</em></strong><strong><em>, </em></strong><strong><em>그리고 사회주의적 소유</em></strong>라는 용어들을 단순한 유의어들로 사용해왔다는 것은 전적으로 사실이다. 폭넓은 역사적 규모에서, 이러한 방식의 발언은 어떠한 특별한 불편함들을 수반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천박한 실수들의 근원이 된다. 새로운 사회의 첫 번째의 그리고 여전히 불확실한 발전의 단계들, 더욱이 고립되어 있으며 자본주의 국가들보다 경제적으로 뒤쳐지고 있는 새로운 사회에 적용될 때에, 이것은 천박한 실수들과 명백한 사기의 근원이 된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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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소유가되기위해서는, 나비가 되기 위해서 유충이 반드시 번데기 단계를 거쳐야 하는 것처럼, 사적 소유는 불가피하게 국가의 단계를 거쳐야만 한다. 그러나 번데기가 나비는 아니다. 무수한 번데기들이 나비가 되지 못하고 사라진다. 국가소유는 사회적 특권과 차별, 그래서 국가의 필요성이 사라지는 정도까지만 오직 "전체 인민"의 소유가 된다. 즉, 국가소유는 그것이 국가소유이기를 멈추는 것에 비례하여 사회주의적 소유로 전환한다. 그리고 반대도 사실이다. 소비에트 국가가 인민들 위로 더 높이 솟아오를수록, 그리고 소비에트 국가가 재산을 지키는 자로서 스스로를 재산을 낭비하는 자로서의 인민에 대하여 더욱 적대적일 수록, 소비에트 국가는 이 국가소유의 사회주의적 성격에 반함을 입증한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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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 언론은 도시와 농촌, 지식노동과 육체노동 사이에 여전히 존재하는 차별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우리는 계급의 <strong><em>완전한</em></strong> 철폐로부터 아직 멀리 떨어져 있다"고 고백한다. 이 순전히 아카데믹한 인정은 "지식"노동이라는 영광스러운 직위 아래 관료세력의 수입을 감추는 것을 허용하는 이점을 가지고 있다. 플로톤이 진실보다도 훨씬 더 친애하는 그 "친구들" 또한 과거의 불평등의 부활에 대한 아카데믹한 승인에 자신들을 한정한다. 실제로는 상당히 겉치레한 "부활들"은 소비에트 현실을 설명하기에 전적으로 불충분하다. 어떤 측면들에서 도시와 농촌의 차이들이 완화되어 왔지만, 다른 측면들에서는 도시들과 도시 문화, 즉 도시 소수자를 위한 안락의 예외적으로 급속한 성장 덕분에 그 차이들이 상당히 심화되어 왔다. 아래로부터의 신규 인입자들로 과학 중핵들을 채웠음에도 불구하고, 육체노동과 지식노동 사이의 사회적 차이가 최근 몇 해 동안 감소하지 않고 증가되어 왔다. 품위 있는 도시인과 거친 무지크, 과학의 마법사와 하루벌이 노동꾼과 같이 모든 측면들에서 각각의 인간의 삶을 정의하는 수천 년이 된 신분의 장벽들은 단지 다소간 완화된 형식으로 과거로부터 보존만 되어 온 것이 아니라, 상당한 정도로 새롭게 태어났으며 점점 더 대담한 성격을 띠고 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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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부들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악명 높은 구호는 스탈린 그 자신이 원하는 것 보다 훨씬 더 솔직하게 소비에트 사회의 성격을 특징짓는다. 간부들은 바로 그 본질에서 지배와 명령의 기관들이다. "간부들"에 대한 숭배는 무엇보다도 관료세력, 관료제, 기술 귀족에 대한 숭배를 의미한다. 다른 것들에서와 마찬가지로, 간부들을 중시하고 발전시키는 것에 관해서, 소비에트 정권은 여전히 선진 부르주아지들이 자신들의 나라들에서 오래 전에 해결했던 문제들을 풀어야만 하는 스스로를 발견한다. 그러나 소비에트 간부들이 사회주의의 기치 아래에서 앞으로 나서기 때문에, 그들은 성스러운 존경과 지속적으로 인상되는 봉급을 요구한다. 이렇게 해서 부르주아지적 불평등의 재탄생이"사회주의적" 간부들의 발전에 수반된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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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수단에있어서의소유의관점으로부터, 장군과 하인 소녀, 기업의 수장과 일용직 노동자, 인민위원의 아들과 노숙하는 아이 사이의 차이들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자들은 위엄 있는 아파트에 살며, 나라의 곳곳에 있는 여러 개의 여름용 별장들을 향유하며, 자신들 뜻대로 할 수 있는 최고급 자동차들을 가지고 있고, 자신들의 구두를 어떻게 닦아야 할지 오래 전에 잊어버렸다. 후자들은 칸막이도 없는 나무로 된 헛간들에 살며, 반쯤 굶으면서 살고, 맨발로 다니기 때문에 자신들의 구두를 닦을 필요가 없다. 관료들에게는 이 차이가 관심을 둘만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일용직 노동자들에게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으로 보이며, 이러한 것에 이유가 없는 것 아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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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천박한 "지식인들"은 부의 분배는 부의 생산 다음 요소라고 스스로를 위로할 수 있다. 하지만, 상호작용의 변증법이 여기서 자신의 모든 힘을 유지한다. 국가로 몰수된 생산수단의 운명은 결국에는 개별 존재에서의 이들 차이들이 한 방향 혹은 다른 방향으로 발전하는 것에 따라서 결정될 것이다. 만약 하나의 배가 집단적 소유로 선포되지만, 승객들은 계속해서 1등, 2등, 그리고 3등 칸으로 나뉘어져야 한다면, 3등 칸 승객들에게는 삶의 조건들에서의 차이들이 소유권에서의 법적인 변화보다 무한대로 더욱 중요성을 갖게 될 것이라는 점이 명백하다. 반면, 1등 칸의 승객들은 자신들의 커피와 시가와 함께 집단적 소유가 모든 것이지, 안락한 객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제출할 것이다. 이것으로부터 증가하는 적대들이 불안정한 집단적 소유를 당연하게도 폭발시켜 버릴 것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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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에트신문은모스크바동물원에서"저 코끼리는 누구의 것이냐?"라는 자신의 질문에, 한 어린 소년이 어떻게 답하는 가에 대하여 만족스럽게 보도한다. "국가의 것"이라는 대답은 "그것은 또한 조금은 나의 것입니다"라는 즉각적인 추론을 했다. 하지만, 코끼리가 실제로 나누어진다면, 값비싼 상아는 선택받은 자들의 몫이 될 것이고, 몇 안 되는 소수는 코끼리 고기 햄에 기뻐할 것이며, 다수는 발굽들과 내장들과 함께 할 것이다. 자신들의 몫을 빼앗긴 소년들은 국가 소유를 그들 자신의 소유와 거의 동일시하지 않는다. 동물원 정원에 있던 어린 "사회주의자"는 필시 "짐은 곧 국가다"라는 공식으로부터 추론들을 도출하는데 친숙한 어떤 저명한 관료의 아들이었을 것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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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 만약 우리가 사회주의적 관계들을 시장의 언어로 번역한다면, 우리는 시민을 국가의 부를 소유하고 있는 회사 속의 주식 소유자로 표현해 볼 수 있겠다. 만약 부[副]가 모든 인민들에게 속해 있다면, 이것은 "주식들"의 공평한 분배, 그리고 결과적으로 모든 "주식 소유자들"의 똑같은 배당금에 대한 권리를 추정한다. 하지만, 시민들은 인민기업에 "주식 소유자들"로서 참여할 뿐만 아니라 생산자로서도 참여한다. 우리가 사회주의로 부르기로 합의한 공산주의의 낮은 단계에서는, 노동에 대한 지급들이 여전히 부르주아지적 규범, 즉 숙련도, 강도 등에 따라서 이루어진다. 그래서 각각의 시민의 이론적 수입은 두 개의 부분들, a+b 즉 자신의 몫 더하기 임금으로 구성된다. 기술이 더 높을수록, 그리고 산업 기관이 더욱 완벽할수록, b에 대하여 a가 차지하는 자리가 더 커지며, 노동의 개인적 차이들의 생활수준에 대한 영향력은 점점 더 적어진다. 소련에서의 임금 격차가 자본주의 나라들에서보다 적지 않고, 더 많다는 사실로부터, 소비에트 시민의 주식들은 공평하게 분배되지 않으며, 시민들의 수입에서 임금 지급뿐만 아니라 주식에 대한 배당금도 공평하지 않다는 것이 추론될 수밖에 없다. 비숙련 노동자는 비슷한 조건에서 자본주의 기업에서 그가 받게 되는 최저임금인 b만을 받는 반면, 스타하노프 운동원이나 관료는 2a+b, 혹은 3a+b 등을 받으며, 한편으로 b 역시나 이번에는 2b, 3b 등이 될 수도 있다. 다시 말해, 수입에서의 격차들은 개인적인 생산성의 차이들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타인의 노동 생산물의 위장된 착복에 의해서도 결정된다. 주식 소유자들의 특권화된 소수가 빼앗기는 다수의 희생으로 살고 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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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독자들이소비에트의비숙련 노동자가 비슷한 수준의 기술과 문화적 조건에서 자본주의 기업들에서 그가 받게 될 것보다 더 많이 받는다고, 즉 그가 여전히 소주주라고 가정한다면, 그의 임금은 a+b와 같다고 간주하는 것이 필요하다. 보다 높은 범주들의 임금들은 3a+2b, 10a+15b 등의 공식으로 표현될 것이다. 이것은 비숙련 노동자들은 1주를, 스타하노프 운동원은 3주를, 전문인은 10주를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게다가, 보다 적절한 의미에서 그들의 임금들은 1:2:15의 비율이 된다. 이러한 조건들 하에서는, 신성한 사회주의적 부에 대한 찬가들이 평조합원 노동자나 집단농장 농민에게보다 관리인이나 스타하노프 운동원들에게 더욱 설득력 있는 좋은 소리로 들린다. 하지만, 평조합원 노동자들이 사회의 압도적 다수이다. 사회주의가 고려에 두고 있었던 것은 새로운 귀족이 아니라 그들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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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노동자는 임금노예가 아니며 노동력이라고 불리는 상품의 판매자가 아니다. 노동자는 자유로운 노동인민이다"(프라우다). 현재의 시대에, 이 번지르한 정식은 허용될 수 없는 허풍이다. 공장의 국가로의 이전은 단지 법적으로만 노동자의 상황을 바꾸었다. 실제로는, 그는 궁핍 속에 살고, 일정한 임금을 위하여 일정한 수의 시간을 일하도록 강제된다. 노동자가 이전에 당과 노동조합에 대하여 가지고 있던 희망들을, 혁명 후에는 자신에 의해 창조된 국가로 옮겼다. 그러나 이 기구의 순기능은 기술과 문화의 수준에 의해 제한되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새로운 국가는 이 수준을 올리기 위하여 노동자의 근육과 신경에 대한 압력이라는 과거의 방식들에 의존했다. 노예 감시자 집단이 성장했다. 산업의 경영이 초관료화 되었다. 노동자들은 공장의 경영에 대한 모든 영향력을 잃었다. 성과급제, 물질적 생존의 힘겨운 조건들, 자유로운 이동의 부족, 모든 공장의 삶을 침투하고 있는 엄혹한 경찰 억압이라는 조건에서, 노동자가 스스로를 "자유로운 노동인민"으로 느낀다는 것은 정말이지 힘든 일이다. 노동자는 관료에게서 경영자를, 국가에게서 고용주를 본다. 자유로운 노동은 관료적 국가의 존재와 양립할 수 없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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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요한변경을가한다면, 위에서 언급된 내용은 시골에도 또한 관련된다. 공식적인 이론에 따르면, 집단농장적 소유는 사회주의적 소유의 특별한 형태이다. 프라우다는 집단농장들은 "본질적으로 이미 국가기업들과 같은 형태이며 결론적으로 사회주의적"이라고 쓰지만, 즉각적으로 농경의 사회주의적 발전에 대한 보장은 "볼셰비키 당이 집단농장을 관리하는" 상황에 달려 있다고 추가한다. 프라우다는 우리로 하여금 경제로부터 정치를 참고하도록 한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아직은 사회주의적 관계가 사람들 사이에서의 실제 관계들에서 구현된 것이 아니라 당국자들의 자비로운 가슴 속에 머물고 있음을 의미한다. 만약 노동자들이 그 가슴을 주의 깊게 바라본다면, 그들은 매우 잘 해낼 것이다. 실제로는 집단농장들은 개인경제와 국가경제 사이의 반쯤에 위치하며, 집단농장들 내부에서의 소부르주아지적 경향들이 빠른 속도로 성장하는 사적으로 분할된 토지 혹은 그 구성원들에 의해 수행되는 개인적 경제들로부터 감복할 정도로 도움을 받고 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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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산화된1억 8백만 핵타아르 비교하여, 개별 경작 토지가 겨우 4백만 핵타아르, 즉 4% 미만에 이르렀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이 토지에 대한 집약적이고, 특히 시장에 내다 팔기 위한 경작 덕분에, 이 토지는 농민가족에게 가장 중요한 소비재들을 제공해 주었다. 대부분의 뿔 달린 소, 양, 그리고 돼지들은 집단농장이 아니라 집단농장의 농민들 소유이다. 농민들은 종종 이윤을 만들어 낼 수 없는 집단농장들을 후순위로 밀어내면서, 자신들의 개인경작 농장들을 필수적인 농장으로 뒤바꾼다. 반면, 노동일에 대한 지불이 후한 집단농장들은 더 높은 사회적 지위로 올라가고 있으며, 부자 농민들이라는 부류를 만들어 내고 있다. 아직 분권적인 경향은 죽어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더욱 강력하게 성장하고 있다. 어떠한 경우에도, 집단농장들은 아직까지는 나라에 있는 경제적 관계의 법률상의 형태들만을, 특히 소득의 분배 방식들을 바꾸는 데는 성공해왔지만, 오래된 오두막집과 집 안마당 채소밭, 헛간 앞마당에서의 잡일, 반복되는 농민들의 과중한 노동은 거의 바꾸지 않은 채 내버려 두어왔다. 상당한 정도로, 집단농장들은 국가에 대한 오래된 태도 또한 그대로 남겨두었다. 분명하게 국가는 더 이상 지주나 혹은 부르주아지를 위하여 복무하지는 않지만, 도시들의 혜택을 위하여 너무나 많은 것을 농촌들로부터 취하며, 너무나도 많이 탐욕적인 관료들을 품고 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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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1월 6일 있게 되어 있는 인구조사를 위하여, 노동자, 사무직 노동자, 집단농장의 농민, 개별 농민, 개별 기능공, 자유업 종사자들, 종교 성직자, 기타 비노동 인자들로 사회적 범주들의 목록을 선정했다. 공식적인 논평에 따르면, 이 인구조사 목록은 다른 어떤 사회적 지표들도 포함하고 있지 못하는데, 이것은 소련에는 계급이 없이 때문이다. 실제로는 특권화된 상부계층과 혜택 받지 못한 더욱 낮은 밑바닥을 감추려는 직접적인 의도를 가지고 만들어진 것이다. 솔직한 인구조사의 도움으로 쉽게 폭로되어야 하며, 그렇게 될 수도 있는 소비에트 사회의 실제 분열들은 다음과 같다. 부르주아지의 상태로 살고 있는 관료, 전문직 등의 우두머리들, 소부르주아지 수준에 있는 중간과 하위 계층, 대략 똑같은 수준에 있는 노동자와 집단농장의 귀족들, 중간 정도의 노동인민, 집단농장 농민들의 중간층, 개별 농민들과 기능공들, 룸펜 프롤레타리아트로 넘어가고 있는 하층 노동자와 농민계층, 집 없는 아동들, 성매매 종사자들 등.</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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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헌법이소련에서는"인간에 의한 인간에 대한 착취의 철폐"가 확보되었다고 선언한다면, 이것은 진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사회적 분화가 가장 야만적인 형태, 즉 개인적인 서비스를 위하여 돈을 내고 인간을 노예가 되게 하는 형태로 인간에 대한 착취의 부활을 위한 조건들을 창출해왔다. 새로운 인구조사를 위한 항목들에는 개인적인 하인들은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분명히 으들 하인들은 "노동자들"이라는 일반적 그룹으로 용해되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에 관한 많은 의문들이 있다. 사회주의 시민이 하인들을 보유하고 있으며, 몇 명(가정부, 요리사, 유모, 여성 가정교사, 운전기사)이나 보유하고 있는가? 그는 자신의 의지대로 처분할 수 있는 자동차를 가지고 있는가? 그는 몇 개의 방이나 가지고 있는가? 등등. 이들 항목들 중에는 소득의 규모에 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다! 만약 다른 사람의 노동에 대한 착취가 그들로부터 정치적 권리를 빼앗는 지배가 부활한다면, 다소 뜻밖에도, 이것은 지배집단의 최상층부가 소비에트 헌법의 범위의 외부에 있다는 것으로 판명 나게 될 것이다. 다행히도, 그들은 하인과 주인을 위한 ... 완전한 권리의 평등을 수립해왔다! 소비에트 정권의 밑바닥으로부터 두 개의 정반대의 경향들이 성장하고 있다. 쇠퇴하는 자본주의와는 반대로 생산력을 발전시키는 것만큼, 사회주의의 경제적 기초를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상층 계층의 이익을 위하여 점점 더 극단적인 표현으로 분배의 부르주아지적 규범들을 수행하는 만큼, 자본주의 복구를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소유의 형태와 분배의 규범들 사이의 이 현저한 차이는 무한히 성장할 수 없다. 부르주아지적 규범이 이런저런 형태로 생산수단으로 확산되어야만 하거나, 혹은 분배의 규범들이 사회주의적 소유체제와 조응하지 않을 수 없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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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료집단은이러한양장택일이폭로되는것을두려워한다. 신문에서, 연설들에서, 통계에서, 자신의 문학 소설들에서, 시의 시구들에서,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새로운 헌법의 문구들에서, 어디서건, 언제나 관료집단은 사회주의 사전에 있는 추상적 개념들을 가지고 도시와 시골 모두에 있는 실제관계들을 공들여 덮어 가린다. 이것이 공식 이데올로기가 모두 그렇게도 생동감 없고, 무능력하며, 잘못되어 있는 이유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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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ong>1. </strong><strong>국가 자본주의</strong></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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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종종익숙하지않은현상들로부터의구원을익숙한용어들속에서찾는다. 소비에트 정권을 "국가 자본주의"라고 부르는 것으로 소비에트 정권이라는 수수께끼를 덮어 가리려는 하나의 시도가 있어왔다. 이 용어는 아무도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지 못하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원래 "국가 자본주의"라는 용어는 부르주아지 국가가 운송수단이나 혹은 산업기업들에 대한 직접적인 책임을 떠맡을 때 발생하는 모든 현상을 명명하기 위하여 등장했다. 그러한 방책들의 필요성, 바로 그것이 생산력이 자본주의를 넘어서 성장했으며, 실제로 자본주의를 부분적인 자기부정으로 몰아가고 있다는 표시들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낡아빠진 체제는 자기부정의 요소들과 나란히 자본주의 체제로서 계속해서 존재한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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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주아지 전체가 국가를 수단으로 전체 민족경제를 관리하는 하나의 주식회사로 스스로를 구성하는 상황을 상상하는 것은 이론적으로 분명히 가능하다. 그러한 정권의 경제법칙들은 어떠한 불가사의함도 드러내지 않을 것이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개별 자본가는 자기 자신의 기업의 노동자들에 의하여 직접적으로 창출된 잉여가치 부분이 아니라 나라전체를 통해 창출된 결합된 잉여가치의 몫을 자기 자신의 자본의 양에 비례하여 이윤의 형태로 받는다. 통합된 "국가 자본주의" 하에서는, 이러한 균등비율 이윤의 법칙이 우회적인 통로, 즉 서로 다른 자본들 사이의 경쟁에 의해서가 아니라 즉각적으로 그리고 직접적으로 국가회계를 통하여 실현될 것이다. 하지만, 재산소유자들 자신들 사이의 심원한 모순들 때문에, 자본주의적 재산의 보편적 저장소로서의 국가의 자격으로 인해, 국가가 사회 혁명을 위한 너무도 유혹적인 대상이 될 것이기 때문에 더욱 더, 그러한 정권은 결코 존재한 적이 없으며, 결코 존재하지도 않을 것이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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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특히 파시스트 경제에서의 실험들 동안에, "국가 자본주의"라는 용어는 가장 자주 국가 개입과 규제의 체제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프랑스인들은 이것을 위한 훨씬 더 적절한 용어인 <strong><em>국가주의</em></strong>를 사용한다. 국가 자본주의와 "국가-주의" 사이에 접촉지점들이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만약 체제들로서 고려된다면 그것들은 같은 것이라기보다는 정반대의 것이다. 국가 자본주의는 사적 소유의 국가 소유로의 대체를 의미하며, 바로 그 이유로 인해 그 성격상 부분적인 것으로 남아 있다. 무쏠리니의 이탈리아, 히틀러의 독일, 루즈벨트의 미국, 혹은 레옹 블룸의 프랑스, 어디에서건 국가-주의는 사적소유를 보존하려는 목적을 가지는, 사적소유의 기초 위에서의 국가 개입을 의미한다. 정부의 강령이 무엇이건, 국가주의는 쇠퇴하는 체제의 피해의 강한 어깨로부터 약한 어깨로의 이전으로 불가피하게 귀결된다. 국가주의는 대소유의 보존을 위해 소소유의 존재가 필요한 정도까지만 소소유자들을 완전한 파멸로부터 "구출한다". 국가주의의 계획의 방책들은 생산력 발전의 요구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적 소유에 대하여 반란을 일으키는 생산력을 희생하여 사적소유를 보존하려는 관심에 의하여 명령 받는다. 국가주의는 생존 불가능한 기업들을 지원하고 기생적인 사회계층을 영속화하는 가운데, 기술의 발전에 제동을 거는 것을 의미한다. 한마디로, 국가주의는 그 성격에서 완전히 반동적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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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업과 농업에서, 이탈리아 경제의 4분의 3이 국가의 수중에 있다."(1934년 5월 26일)는 무쏠리니의 말은 글자그대로 받아들여져서는 안 된다. 파시스트 국가는 기업의 주인이 아니라 단지 기업의 주인들 사이에 있는 중재자일 뿐이다. 이들 둘은 같은 것이 아니다. 이 주제에 관하여 Popolod'Italia는 "기업화한 국가가 경제를 지도하고 통합하지만, 그것을 운영하지는 않는데, 만약 기업화한 국가가 생산을 독점한다면, 그것은 집산주의에 불과할 것이다."(1936년 6월 11일) 농민과 소소유자 전반을 향하여, 파시스트 관료집단은 위협하는 귀족과 주인의 태도를 취한다. 자본가 실력자들에 대하여는, 수석 전권대사의 태도를 취한다. 이탈리아 맑스주의자 페로치는"기업화된 국가는 독점자본의 판매사원에 불과하다.... 무쏠리니는 착취의 이윤은 산업가들에게 남겨주면서, 기업들의 모든 위험은 국가가 떠안게 한다."고 올바르게 쓰고 있다. 그리고 이 측면에서 히틀러는 무쏠리니의 행보를 따른다. 계획의 원칙의 한계뿐만 아니라 그것의 실제 내용도 파시스트 국가의 계급의존성에 의해 결정된다. 이것은 사회의 이해관계에 따른 자연에 대한 인간의 힘을 증대시키는 것의 문제가 아니라, 소수의 이해관계에 따른 착취 사회의 힘을 증대시키는 것의 문제이다. 무쏠리니는"만약 내가 이탈리아에 국가 자본주의나 혹은 국가 사회주의를 수립하고자 열망한다고 하면(그런 일은 결코 벌어지지 않았는데), 나는 필요하고도 충분한 모든 객관적 조건들을 가지고 있음에 틀림없다."고 떠벌인다. <strong><em>자본가 계급에 대한 몰수</em></strong>하나만 빼고 모두다. 이러한 조건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파시즘은 바리케이드의 다른 쪽으로 넘어가야만 할 것인데, 무쏠리니의 경솔한 확신을 인용하자면, 이런 일은 실제로 벌어지지도 않았으며, 물론 앞으로도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자본가들에 대한 몰수는 다른 세력들, 다른 중핵들, 그리고 다른 지도자들을 필요로 할 것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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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에서발생한첫번째의국가의수중으로의생산수단의집중은국가기업화의방식으로자본가들에의해서가아니라, 사회혁명의 방식으로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하여 성취되었다. 우리의 짤막한 분석만으로도 자본주의적 국가-주의를 소비에트 체제와 동일시하려는 시도들이 얼마나 터무니없는가를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전자는 반동적이고, 후자는 진보적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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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ong>2. </strong><strong>관료집단은 하나의 계급인가</strong><strong>?</strong></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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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급들은사회의경제체제에서의지위, 그리고 무엇보다도 생산수단에 대한 관계에 의하여 성격 규정된다. 문명화된 사회들에서는, 소유관계들이 법에 의하여 정당함이 인정된다. 토지, 산업생산수단, 운송, 그리고 교환의 국유화가 외국무역의 독점과 함께 소비에트 사회구조의 기초를 구성한다. 우리의 관점에서는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에 의하여 수립된 이들 관계들을 통하여, 프롤레타리아트 국가로서의 소련의 성격이 기본적으로 정의된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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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조정자적이고 규제적인 기능에서, 사회적 지위를 고수하고자 하는 염려에서, 그리고 개인적 목적들을 위하여 국가기구를 이용하는 것에서, 소비에트 관료집단은 다른 관료집단, 특히 파시스트와 유사하다. 그러나 소비에트 관료집단은 또한 대단히 다르기도 하다. 다른 어떤 정권에서도 관료집단은 지배계급으로부터의 그러한 정도의 독립성을 확보하지 못했다. 부르주아지 사회에서, 관료집단은 수없이 많은 자신의 뜻대로 할 수 있는 벌어지는 일들에 대한 통제수단을 가지고 있는 교육받은 소유계급의 이해관계를 대변한다.소비에트 관료집단은 빈곤과 맹목으로부터 거의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지배나 명령의 전통을 가지고 있지 않은 한 계급의 위로 솟아나왔다. 파시스트들이, 그들 스스로가 권력에 있음을 발견할 때, 공동의 이해, 친분, 결혼 등등의 결속력으로 대부르주아지와 단결하는 반면, 소비에트 관료집단은 민족 부르주아지를 자신의 옆에 두지 않은 채 부르주아지적 관례를 흉내 낸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소비에트 관료집단이 하나의 관료집단 이상의 어떤 것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소비에트 관료집단은 그 단어의 완전한 의미에서 소비에트 사회에 있는 유일한 특권을 가진 명령을 내리는 계층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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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다른차이점도마찬가지로중요하다. 소비에트 관료집단은 사회적 정복들을 방어하기 위하여 자기 자신의 방식에 따른 명령으로 프롤레타리아트를 정치적으로 몰수했다. 그러나 주요한 생산수단이 국가의 수중에 있는 한 나라에서 관료집단의 정치권력의 전유라는 바로 그 사실이 관료와 그 나라의 부자들 사이의 새로운, 지금까지는 알려져 있지 않은 관계를 만들어 낸다. 생산수단은 국가에 속해있다. 그러나 국가는 소위 관료집단에 "속해 있다". 노동자들로부터의 저항을 받건, 그렇지 않건 간에, 만약 아직까지는 완전히 새로운 이들 관계들이 강화되고, 규범이 되고, 합법화된다면, 이러한 것들은 결국에는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의 사회적 정복들에 대한 완전한 청산으로 귀결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적어도 시기상조이다. 프롤레타리아트가 자신의 마지막 발언을 아직은 하지 않았다. 관료집단이 특별한 형식의 소유형태로 자신의 지배를 위한 사회적 지지기반을 아직은 창출하지 않았다. 관료집단은 자신의 권력과 자신의 수입의 원천으로서의 국가소유를 방어하지 않을 수 없다. 관료집단의 행동의 이러한 측면에서, 관료집단은 아직까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무기로 남아 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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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에트 관료집단을 "국가 자본가들"의 계급을 의미하는 것으로 하려는 시도는 비판으로부터 견디어 내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 관료집단은 주식이나 채권을 가지고 있지 않다. 관료집단은 그들 자신의 어떤 특별한 소유관계와는 무관하게 행정적 계급제도의 방식으로 충원되고, 보충되며, 갱신된다. 개별 관료는 국가기구의 이용에 있어서의 자신의 권리를 자신으로부터 상속받을 자들에게 넘겨줄 수 없다. 그들은 자신들의 수입을 감춘다. 그들은 존재하지도 않는 특별한 사회적 그룹인 것처럼 행세한다. 국가수입의 광대한 부분에 대한 관료집단의 전유는 사회적 기생주의의 성격을 가진다. 이 모든 것들이 소비에트 지배계층의 지위를, 그들의 권력의 완전함과 그것을 덮어 가리는 아첨이라는 연막에도 불구하고, 최고로 모순적이고, 모호하며, 품위 없게 만든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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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주아지 사회는 자시의 역사의 과정에서 그 사회적 기초들을 변화시키지 않은 채 많은 정치적 정권들과 관료적 계층들을 쫓아내왔다. 부르주아지 사회는 자신의 생산방식에서의 우월성을 가지고 봉건적이고 길드적인 관계들의 복구에 맞서 스스로를 보존해왔다. 국가권력은 자본주의적 발전에 협력하거나 혹은 그것에 제동을 걸 수 있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사적소유와 경쟁의 기초 위에서, 생산력은 그 자신의 운명을 결정해 오고 있다. 이것과는 반대로, 사회주의 혁명으로부터 출발했던 소유관계들은 그것들의 저장소로서의 새로운 국가와 불가분으로 결합되어 있다. 소부르주아지적 경향들에 대한 사회주의적 경향들의 우세는 경제의 무의식적 활동에 의해서가 아니라 독재에 의해 취해지는 정치적 방책들에 의하여 보장된다. 따라서 전체적인 경제의 성격은 국가권력의 성격에 달려 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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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에트정권의붕괴는불가피하게계획경제의붕괴로귀결될것이고, 그래서 국가소유의 폐지로 귀결될 것이다. 트러스트와 공장들 사이에 있던 강제적 결속이 떨어져 나갈 것이다. 보다 성공적인 기업들이 독립의 길에 출현하는데 성공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를 주식회사로 바꾸거나, 혹은 예를 들면 노동자들이 이윤에 참여해야 하는 소유의 다른 이행적 형태를 찾을 것이다. 동시에 집단농장들은 해체될 것이며, 훨씬 더 쉽게 그렇게 될 것이다. 이리하여, 만약 현재의 관료적 독재가 새로운 사회주의 권력에 의해 대체되지 않는다면, 현재의 관료적 독재의 붕괴는 산업과 문화에서의 처참한 쇠퇴를 동반하는 자본주의적 관계로의 복귀를 의미하게 될 것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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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만약사회주의적정부가여전히계획경제의보존과발전을위해여전히절대적으로필요하다면, 현재의 소비에트 정부가 누구에 의지하고 있는지, 그리고 현재의 소비에트 정부의 정책의 사회주의적 성격이 어떤 방책들 속에서 보장되는지의 문제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1922년 3월 11차 당 대회에서 레닌은 당에 실질적으로 작별인사를 하면서 지도적 그룹들에 대하여 "역사는 모든 종류의 이행들을 알고 있다. 확신, 헌신, 그리고 다른 훌륭한 고상한 자질에 의지하는 것은 정치에서는 진지하게 고려되어서는 안 된다."고 연설했다. 존재가 의식을 결정한다. 지난 15년 동안, 정부는 자신의 사상보다 더 깊게 그 사회적 구성을 변경시켜왔다. 소비에트 사회의 모든 계층 중에서 관료집단은 자기 자신의 사회적 문제를 가장 잘 해결해왔고, 현재의 상황에 완전히 만족하기 때문에, 그것이 무엇이건 자신의 정책의 사회주의적 방향에 대한 어떠한 주체적인 보장도 제공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관료집단은 단지 그들이 프롤레타리아트를 두려워하는 만큼만 국가소유를 계속해서 보존한다. 이 유보적인 두려움은 부르주아지적 반동으로 포화상태가 된 테르미도르 관료집단에 반대하는 사회주의적 경향들의 가장 의식적인 표현인 볼셰비키-레닌주의자들의 비합법 정당에 의해 자양분을 받고 있으며, 지탱이 되고 있다. 의식적인 정치세력으로서 관료집단은 혁명을 배신해왔다. 그러나 승리한 혁명은 다행히도 강령과 기치, 정치적 기구들일뿐만 아니라 사회적 관계의 체제이기도 하다. 그것을 배신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당신들은 그것을 타도해야만 한다. 10월 혁명은 지배계층에 의하여 배신당해왔지만, 아직까지 타도되지는 않았다. 10월 혁명은 수립된 소유관계, 프롤레타리아트의 살아있는 세력, 프롤레타리아트의 최고인자들의 의식성, 세계자본주의의 난관, 그리고 세계혁명의 불가피성과 함께하는 거대한 저항의 힘을 가지고 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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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ong>3. </strong><strong>역사에 의해 아직 결정되지 않은 소련의 성격에 관한 문제 </strong></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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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소련의 성격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하여, 소련의 미래에 관한 2가지 다른 가정을 해보자. 소비에트 관료가 구 볼셰비키의 모든 특성을 가지고 있으며, 최근 시기의 세계적 경험에 의하여 더욱 강화된 혁명적 정당에 의하여 타도된다고 가정해보자. 그런 정당은 노동조합과 소비에트에 민주주의를 복구하는 것으로 시작하게 될 것이다. 그러한 정당은 소비에트 정당들의 자유를 복구할 수 있을 것이고, 그래야만 할 것이다. 대중들과 함께, 그리고 대중들의 선두에서, 그러한 정당은 국가기구에 대한 가차 없는 정화를 수행할 것이다. 그러한 정당은 계급과 훈장들, 모든 종류의 특권들을 철폐할 것이며, 노동에 대한 지불에서의 불평등을 경제와 국가기구의 생존에 반드시 필요한 만큼으로까지 제한할 것이다. 그리고 청년들에게 독립적으로 생각하고, 배우고, 비판하고, 성장할 자유로운 기회를 줄 것이다. 그러한 정당은 노동자와 농민대중들의 이해관계와 의지에 따라서 국민소득의 분배에서의 심원한 변화들을 도입할 것이다. 그러나 소유관계들에 관한 한, 새로운 권력은 혁명적 방책들에 의존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새로운 권력은 계획경제의 실험을 유지하고 더욱 발전시킬 것이다. 정치혁명, 즉 관료집단에 대한 축출 이후에, 프롤레타리아트는 또 다른 사회혁명이 아니라 경제에서의 일련의 매우 중요한 개혁들을 도입해야만 할 것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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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가정을 받아들이기 위하여, 만약 부르주아지 정당이 소비에트 지배계층을 타도하게 된다면, 그들은 현재의 관료, 행정가들, 기술자들, 감독직에 있는 자들, 당 서기들과 일반적인 특권화한 상층 부위들에서 적지 않은 수의 종복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물론, 이 경우에도 국가기구에 대한 정화가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부르주아지의 복귀는 아마도 혁명적 정당의 경우보다 더 적은 수의 사람들을 숙청해야만 할 것이다. 새로운 권력의 주요 임무는 생산수단에 있어서 사적 소유를 복구하는 것일 것이다. 무엇보다도, 새로운 권력은 허약한 집단농장들로부터는 강력한 농민들의 발전을 위한, 그리고 강력한 집단농장들은 부르주아지 타입의 생산자 조합으로, 농경 주식회사로 바꾸기 위한 조건을 창출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산업의 영역에서는, 탈 국유화가 경공업과 식품생산 산업들에서 시작되게 될 것이다. 이행의 기간 동안에 계획의 원칙은 국가권력과 개별 "기업들"(즉, 산업의 소비에트 수장들, 과거 망명했던 소유자들과 외국 자본가들 사이에 있는 잠재적인 소유자들) 사이의 일련의 절충으로 바뀌게 될 것이다. 소비에트 관료집단이 부르주아지의 복귀를 준비하는 방향으로 많이 나아갔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정권은 소유의 형식과 산업의 방식의 문제에 있어서 사회혁명이 아니라 개혁을 도입해야만 할 것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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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적정당도반혁명적정당도권력을장악하지못하는3번째 경우를 가정해 보자. 관료집단은 계속해서 국가의 꼭대기에 있게 된다. 심지어 이러한 조건들 하에서도, 사회적 관계들은 정해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사회적 평등을 위하여 관료집단이 평화적으로 그리고 자발적으로 스스로를 포기하는 것을 기대할 수 없다. 만약 현재 관료집단이 그렇게 하는 것의 너무도 명백한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계급과 훈장들을 도입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여겼다면, 미래의 국면들에서 그들은 불가피하게 소유관계에서 그 자신들을 위한 지지대를 찾아야만 할 것이다. 대관료는 만약 지배적인 소유형태들이 자신에게 필요한 수입을 보장해 주기만 한다면, 지배적인 소유형태들이 무엇인지 거의 신경을 쓰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이 주장은 관료 자신의 권리들의 불안정성뿐만 아니라 그의 자손들의 문제를 무시한다. 가족에 대한 새로운 예찬이 구름으로부터 떨어진 것이 아니다. 특권은 만약 그것들이 자신의 자식들에게 이전되지 못한다면 단지 절반의 가치밖에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유언의 권리는 소유의 권리와는 분리될 수 없다. 기업집단의 관리가 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주식 보유자가 될 필요가 있다. 이 결정적인 영역에서 관료집단의 승리는 새로운 소유계급으로의 그들의 전화를 의미하게 될 것이다. 반면, 관료집단에 대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승리는 사회주의 혁명의 부활을 보증해 줄 것이다. 세 번째의 경우는 결과적으로 명확하게 하고 단순하게 하기 위하여 우리가 준비했던 첫 번째의 두 가지 경우로 우리를 되돌아가게 한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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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에트 정권을 이행적이거나 혹은 중간적인 것으로서 정의하는 것은 자본주의(그리고 이것과 함께 "국가 자본주의")로서 혹은 또한 사회주의로서의 완성된 사회적 범주들을 포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 자체로 완전히 불충분한 것과는 별도로, 그러한 개념은 현재의 소비에트 정권으로부터는 단지 사회주의로의 이행만이 가능하다는 잘못된 사상을 만들어낼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는, 자본주의로의 퇴보가 전적으로 가능하다. 보다 완전한 개념은 필연적으로 복잡하고 다루기 힘을 것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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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은자본주의와사회주의의중간에있는모순적사회이다. 그 사회는 ⒜ 생산력이 국가소유에 사회주의적 성격을 부여하기에 충분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 ⒝궁핍에 의해 창출된 시초 축적을 향한 경향이 계획 경제의 수없이 많은 털구멍들을 뚫고 나온다. ⒞ 사회의 새로운 분화의 기초에 부르주아지적 성격을 보존하고 있는 분배의 규범들이 있다. ⒟ 경제적 성장은 노동인민들의 상황을 천천히 좋아지게 만들고 있는 반면, 특권계층의 급속한 형성을 촉진한다. ⒠ 관료집단은 사회적 적대를 활용하면서 스스로를 사회주의와는 동떨어진 통제 불가능한 계층으로 변화시켜 왔다. ⒡ 지배정당에 의해 배신당한 사회혁명은 소유관계와 노동대중들의 의식성 속에 여전히 존재한다. ⒢ 축적되고 있는 모순들의 더한 발전은 사회주의로 귀결될 수도 있고, 자본주의로 귀결될 수도 있다. ⒣ 자본주의로 가는 길에서, 반혁명은 노동자들의 저항을 분쇄해야만 할 것이다. ⒤ 사회주의로 가는 길에서, 노동자들은 관료집단을 타도해야만 할 것이다. 최종적으로, 문제는 일국적, 그리고 세계적 무대 모두에서 살아 있는 사회세력들의 투쟁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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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조주의자들은분명히이러한가설적정의에만족하지않을것이다. 그들은 예면 예, 아니오면 아니오와 같은 분명한 공식들을 좋아할 것이다. 만약 사회현상들이 항상 완성된 성격을 가진다면, 사회학적 문제들은 분명히 더욱 간단할 것이다. 하지만, 오늘 당신들의 계획에 위배되고, 내일 그것을 완전히 뒤집어엎을 요소들을 논리적 완결성을 위하여 현실 바깥으로 집어던지는 것 보다 더 위험스러운 것은 없다. 우리의 분석에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어떠한 선례나 비슷한 사례도 없었던 역동적인 사회형태들을 거스르는 것을 피해 오고 있었다. 과학적 과제뿐만 아니라 정치적 정치적도 또한 아직 끝나지 않은 과정에 완성된 정의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의 모든 국면들을 따라가고, 그것의 반동적 경향들로부터 진보적 경향들을 분리하며, 그것들의 상호관계를 드러내고, 그 진전의 가능한 다양한 경우들을 예견하고, 이러한 예견 속에서 실천을 위한 기초를 마련하는 것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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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반당한 혁명</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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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츠키, 1936년</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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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ong>제</strong><strong>3</strong><strong>장 사회주의 그리고 국가</strong></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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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ong>1. </strong><strong>이행의 사회조직</strong></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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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 당국자들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소련에서 사회주의가 이미 실현되었다는 것이 사실일까? 그리고 꼭 그런 것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성취된 성공들이, 세상의 다른 곳에서의 사태들의 경로와는 상관없이, 민족적 경계 내에서 사회주의의 실현을 확인해 준 것은 아닌가? 소련 경제의 주요 지표들에 대한 앞 선 비판적 평가가 이 질문에 대한 올바른 답변을 위한 출발 지점을 우리에게 제공해 주는 것이 당연하지만, 특정한 예비적인 이론적 참고 지점들이 또한 우리에게 필요할 것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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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주의는 진보의 근본적인 용수철로서의 기술 발전으로부터 출발하며, 생산력의 동학 위에 공산주의 강령을 수립한다. 만약 동지들이 우리 행성을 파괴하게 될 아주 가까운 미래의 어떤 우주적인 재앙을 상상한다면, 물론 동지들은 다른 많은 것들과 함께 공산주의적 전망을 거부할 것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아직 문제가 되고 있지 않는 위험으로서의 이러한 것을 제외하고는, 우리의 기술적인 생산의 가능성과 문화적 가능성들에 미리 어떠한 한계를 설정하는 것을 위한 눈꼽만큼의 과학적 근거도 없다. 맑스주의는 진보에 대한 낙관주의로 충만해 있으며, 한편으로 이것 하나만으로도 맑스주의가 종교에 화해 불가능하게 대립되도록 한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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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경제력의 발전이 충분히 높아서 부담이 되는 것을 멈춘 생산적인 노동에 어떠한 양몰이용 막대기도 필요 없으며, 계속적인 풍요 속에 있는 생활용품들의 분배가 현재 어떠한 부유한 가족이나 "어지간한" 기숙시설에서와 같이 교육, 습관, 그리고 사회여론에 관한 것을 제외한 어떠한 통제도 요구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 공산주의의 물질적 전제이다. 솔직히 말해서, 그렇게 진정으로 소박한 전망을 "유토피아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아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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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는 기술, 과학과 프롤레타리아트라는 사회혁명을 위한 조건들과 세력들을 준비했다. 하지만, 공산주의적 구조가 즉각적으로 부르주아지 사회를 대체할 수는 없다. 과거로부터의 물질적 문화적 유물은 그것과는 완전히 독립적인 것이다. 그 첫 번째 발걸음들에서, 노동자국가는 아직까지는 모든 사람들에게 "능력에 따른", 즉 사람들이 할 수 있고 하고 싶은 만큼의 노동을 허용할 수 없으며, 사람들이 수행하는 노동과 무관하게 모든 사람들에게 "필요에 따라서" 보수를 지급할 수도 없다. 생산력을 높이기 위하여, 임금 지급이라는 관습적인 규범들, 즉 개별 노동의 양과 질에 비례하여 생활용품들을 분배하는 것에 의존할 필요가 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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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는 이 새로운 사회의 첫 번째 국면을 결핍이라는 마지막 유령과 함께 물질적 불평등이 사라지게 될 가장 높은 단계와 구별하여 "공산주의의 가장 낮은 국면"이라고 불렀다. 이러한 의미에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는 새로운 사회의 보다 낮은 국면과 보다 높은 국면으로 자주 대비된다. "물론 우리는 <strong><em>완전한</em></strong> 공산주의를 성취하지는 못하고 있지만, 사회주의, 즉 공산주의의 <strong><em>가장 낮은</em></strong> 국면은 이미 성취했다"고 현재의 공식적인 소비에트 독트린은 말한다. 이것에 대한 증거로, 그들은 산업에서의 국가 트러스트, 농경에서의 집산 농장들, 상업에서의 국가 기업들과 협동조합들의 지배를 제시한다. 언뜻 보기에 이것은 <strong><em>앞서 언급된</em></strong>, 또한 그래서 가설적인 맑스의 도식과의 완전한 조응을 제공한다. 그러나 정확하게 맑스주의자들에게는 성취된 노동생산성과 무관한 소유양식에 대한 고려에 의해 이 문제가 소진되지는 않는다. 맑스는 시작 그 자체로부터 가장 발전된 자본주의보다 그것의 경제적 발전에 있어서 더 높이 있는 사회라는 뜻으로 공산주의의 가장 낮은 국면을 말했다. 이론적으로 이러한 개념은 하자가 없는데, 왜냐하면 세계적 차원에서 고려할 때 공산주의는 심지어 그것의 첫 번째 시작 국면에서조차도 부르주아지 사회의 그것보다 더 높은 발전 단계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맑스는 프랑스 사람들이 사회혁명을 시작하게 될 것이고, 독일 사람들이 그것을 계속 이어갈 것이며, 영국 사람들이 그것을 끝낼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리고 러시아 사람들에 관해서는, 맑스는 훨씬 뒤쪽에 놓아두었다. 그러나 이 개념상의 순서는 사실들에 의하여 뒤집어 졌다. 지금 맑스의 보편적인 역사적 개념을 주어진 발전 단계의 소련의 특수한 경우에 기계적으로 적용하려고 시도하는 사람들은 누구라도 즉시 절망적인 모순들에 빠지게 될 것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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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는 자본주의의 사슬에서 가장 강력한 고리가 아니라 가장 약한 고리였다. 현재의 소련은 세계경제 수준보다 위에 있지 않고, 그저 자본주의 국가들을 따라잡기 위해 애쓰고 있다. 만약 맑스가 자기 시대의 가장 발전된 자본주의의 생산력에 대한 사회화의 기초 위에 형성되어야 하는 사회를 공산주의의 가장 낮은 국면으로 불렀다면, 분명히 오늘날 여전히 기술, 문화, 그리고 삶의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들에서 자본주의 국가들보다 상당한 정도로 궁핍한 소련에는 이러한 명칭을 적용할 수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그 자신의 모든 모순들을 고려할 때 현재의 소비에트 체제는 사회주의 체제가 아니라 자본주의로부터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예비적 체제로 이름 붙이는 것이 더 진실일 것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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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어상의 정확함을 위한 이러한 염려에는 조금의 현학적인 것도 없다. 체제의 강력함과 안정성은 결국에는 그 체제들의 상대적인 노동생산성에 의해 결정된다. 자본주의 보다 우월한 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사회주의 경제는 불행하게도 소비에트 경제에 관해서 그렇게 말하는 것이 여전히 매우 불가능한 사회주의적 발전을 진정으로 확실하게, 즉 자동적으로 보장받게 될 것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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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상태의 소련에 대한 천박한 방어자들의 다수는 대략 다음과 같은 이유를 대는 경향이 있다. 비록 당신들은 현재의 소비에트 체제가 아직은 사회주의적이지 않다는 것에 대하여 인정하지만, 현재의 기초 위에서 생산력의 더 한 발전은 곧 사회주의의 완전한 승리로 귀결될 것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단지 시간이라는 요소만이 불확실할 뿐이다. 그리고 이것에 대하여 떠들면서 소란을 피울 가치가 있는가? 역사상의 과정들이 문제가 될 때에, 시간은 부차적인 요소가 결코 아니다. 문법에서보다 정치에서 현재시제와 미래시제를 혼동하는 것이 훨씬 더 위험하다. 웨브[Webb]와 같은 천박한 진화론자들이 상상하는 것처럼 진화는 존재하는 것들의 끊임없는 축적과 지속적인 "개선"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진화는 그것의 양질전화들, 위기들, 도약들, 그리고 뒤쪽으로의 도약들을 가진다. 발전이 조화롭게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모순 속에서 진행되는 것은 소련이 아직은 균형 잡힌 생산과 분배의 체제로서의 사회주의의 첫 번째 국면을 성취한 것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경제적 모순들이 사회적 적대들을 만들어내고, 이번에는 사회적 적대들이 생산력의 더한 성장을 기다리지 않고 자기 자신의 논리를 확장시킨다. 우리는 진화적으로 사회주의로 "성장"하고 싶어하지 않았던, 그리고 관료세력과 그들의 이론가들에게 놀랍게도 새로운 보충적 혁명을 요구했던 쿨락의 예에서 이것이 얼마나 진실인지를 방금 목격했다. 권력과 부를 자신들의 수중에 집중하고 있는 관료세력 자신들은 사회주의로 보다 평화적으로 성장하고 싶어 할 것인가? 이것에 관해서는 의문이 분명하게 허용될 수 있다. 어떤 경우에도, 그들의 말을 믿는 것은 경솔한 짓일 것이다. 현재로서는 소비에트 사회의 경제적 모순들과 사회적 적대들이 향후 3년, 5년 혹은 10년의 과정에서 어떤 방향으로 발전할 것인지에 관하여 최종적으로 되돌이킬 수 없도록 대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결과는 일국적 차원에서가 아니라 국제적 차원에서의 살아 있는 사회 세력들의 투쟁에 달려 있다. 따라서 모든 새로운 국면에서, 실제의 관계들과 경향들에 대한 그것들의 연관과 지속적인 상호작용 속에서의 구체적인 분석이 필요하다. 우리는 국가의 경우에 있어서 그러한 분석의 중요성을 이제 확인하게 될 것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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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ong>2. </strong><strong>강령과 현실</strong></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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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와 엥겔스를 따르는 레닌은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이 착취자들을 착취하는 가운데, 사회의 위로 올라 선 관료기구, 그리고 무엇보다도 경찰과 상비군의 필요성을 철폐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 속에서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의 첫 번째로 구분되는 특징을 보았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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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style="margin-left: 15pt">
레닌은 1917년 권력을 장악하기 2달 전에 다음과 같이 썼다. "프롤레타리아트는 국가를 필요로 한다. 모든 기회주의자들이 동지들에게 이것을 말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들, 기회주의자들은 프롤레타리아트는 단지 사멸하는 국가, 즉 즉시 사멸을 시작하고 사멸하지 않을 수 없는 방식으로 건설되는 국가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첨가하는 것을 잊고 있다."(국가와 혁명)</p>
<p style="margin-left: 15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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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당시 이 비판은 러시아 멘셰비키들, 영국 페이비언 등과 같은 형태의 개량주의적 사회주의자들을 향한 것이었다. 이것이 이제는 눈꼽 만큼도 "사멸"할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은 관료국가라는 자신들의 우상과 함께 하는 소비에트 우상숭배자들을 배가된 힘으로 공격한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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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관료에 대한 사회적 요구는 첨예한 적대가 (언제나 특권을 가진 자들, 소유자들에게 이롭게, 그리고 언제나 관료 그 자신에게 이롭게) "순화되고", "조정되고", "규제되"어야 할 필요가 있는 모든 상황에서 발생한다. 그래서 그것이 아무리 민주적이었다 하더라도, 모든 부르주아지 혁명을 통해서 관료기구의 강화와 완성이 발생해왔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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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style="margin-left: 15pt">
레닌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관료주의와 상비군, 이것은 부르주아지 사회라는 몸뚱아리에 있는 '기생충', 이 사회를 찢어 내고 있는 내부 모순들에 의해 창출된 기생충, 그러나 살아있는 구멍들을 틀어막는 기생충에 불과하다."</p>
<p style="margin-left: 15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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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1917년 초부터, 즉 권력의 장악이 실천적인 문제로서 당에 직면해 있었던 순간부터 레닌은 계속해서 이 "기생충"을 일소할 것에 대하여 몰두했다. 착취 계급 타도 이후에, 프롤레타리아트는 과거의 관료 기구를 박살내고, 피고용자들과 노동자들로부터 자기 자신의 기구를 만들어 낼 것이라고 레닌은 <strong><em>국가와 혁명</em></strong>의 모든 장에서 반복해서 설명한다. 그리고 프롤레타리아트는 자신들의 기구가 관료로 변질되는 것에 맞서는 방책들을 취할 것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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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p style="margin-left: 15pt">
"맑스와 엥겔스에 의하여 자세하게 분석되었던 방책들: ⑴ 선출뿐만 아니라 언제든지 가능한 소환 ⑵ 노동자의 임금보다 높지 않은 보수 ⑶ 모든 사람이 통제와 감독의 기능을 수행하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잠시동안 '관료'가 되며, 그래서 누구도 관료가 될 수 없는 체제로의 즉각적 이행"</p>
<p style="margin-left: 15pt">
</p>
<p>
동지들은 레닌이 10년의 문제들에 관하여 말하고 있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다. 이것은 "우리가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을 성취한 것에 기초하여 시작해야 하고, 그렇게 해야만 하는" 첫 번째 발걸음이었다.</p>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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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권력 장악 1년 반 후에, 강령의 군대에 관한 부분을 포함하는 볼셰비키 당의 강령 속에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국가에 관한 이와 똑같은 분명한 관점이 더할 나위 없이 표현되었다. 관료가 없는 강력한 국가, 직업적인 무장 집단이 없는 무장 권력! 방어의 임무가 군 관료와 국가 관료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계급구조가 방어의 기관 속으로까지 미치게 된 것이었다. 군대는 사회적 관계들의 복사본에 다름 아니다. 물론, 다른 국가들에서와 마찬가지로 노동자 국가에서도, 외부의 위험에 맞서는 투쟁은 특수화된 군사적 기능 조직을 필요로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특권화된 장교층을 필요로 하지는 않는다. 당 강령은 무장한 인민들에 의한 상비군의 대체를 요구한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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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체제는 그 시작에서부터 인민의 다수를 자신에게 복종시키는 것을 유지하기 위한 특수한 기구라는 단어의 과거의 의미에서의 "국가"이기를 멈춘다. 무기들과 함께 물질적인 힘은 직접적이고 즉각적으로 소비에트들과 같은 노동자 기관들로 넘어간다. 관료적 기구로서의 국가는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첫 번째 날부터 사멸을 시작한다. 이것이 현재까지 취소되지 않은 당 강령의 목소리이다. 이상한 것은 이것이 무덤에서 나오는 유령의 목소리처럼 들린다는 것이다.</p>
<p>
</p>
<p>
동지들이 현재의 소비에트 국가의 성격을 어떻게 해석하든, 한가지는 분명하다. 그것의 20년 동안의 존재 끝에, 소비에트 국가는 사멸하기는커녕 "사멸"을 시작하지도 않았다. 이보다 더 좋지 않은 것은, 소비에트 국가가 이제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강제의 기구로 성장했다는 것이다. 관료주의는 대중들에게 자신의 자리를 내어 주면서 사라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대중을 지배하는 통제 불가능한 세력으로 변했다. 군대는 무장한 인민들에 의하여 대체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사령관으로 즉위한 특권화된 장교 계층을 낳았고, 한편으로 "무장한 독재의 수행자들"인 인민들에게는 소련에서 심지어 비폭발성 무기조차 가지고 다니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 맑스, 엥겔스, 그리고 레닌에 따른 노동자 국가에 관한 개요와 스탈린이 지배하는 현재의 실제 국가 사이에 존재하는 것 보다 더 충격적인 모순을 상상하는 것은, 상상력을 극대화시키더라도, 힘든 일이 될 것이다. (분명히 검열에 의한 발췌와 왜곡과 함께) 레닌의 저작들을 계속해서 출판하는 가운데, 현재의 소련과 그들의 이데올로기적 대변자들은 강령과 현실 사이의 심한 상이함의 원인에 관한 문제를 제기하는 것조차 하지 않는다. 우리가 그들을 위해서 이 일을 하고자 할 것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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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ong>3. </strong><strong>노동자국가의 이중적 성격</strong></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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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는 부르주아지 사회와 사회주의 사회 사이에 있는 하나의 다리에 불과하다. 따라서, 바로 그 본질에서, 임시적 성격을 가진다. 독재를 현실화하는 국가의 임시적이지만 매우 핵심적인 임무는 자기 자신의 해체를 준비하는 것에 있다. 이 "임시적인" 임무의 실현의 정도가, 어느 정도까지는, 계급이 없는, 그리고 물질적 모순이 없는 사회의 건설이라는 독재의 근본적인 임무의 수행에서의 성공의 척도이다. 관료제도와 사회적 조화는 상호 반비례한다.</p>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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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엥겔스는 자신의 듀링에 대한 유명한 통박에서 아래와 같이 썼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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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p style="margin-left: 15pt">
"계급지배와 생산에서의 현재의 무정부 상태에 의해 창출된 개인적 생존을 위한 투쟁과 함께, 이 투쟁으로부터 야기되는 갈등과 잔혹한 행위가 사라질 때, 이 때 이후로는 억압할 것이 없을 것이며, 억압의 특수한 기구, 즉 국가의 필요성이 없게 될 것이다."</p>
<p style="margin-left: 15pt">
</p>
<p>
<strong>속</strong>물은 경관[警官]을 영구적인 기관으로 간주한다. 실제로는, 경관은 단지 인간이 자연을 완전하게 제어하게 될 때까지만 인류를 제어하게 될 것이다. 국가가 사라지기 위해서는, "계급 지배와 개인적 생존을 위한 투쟁"이 사라져야만 한다. 엥겔스는 이 두 가지 조건을 하나로 모으는데, 그것은 사회체제를 변화시킨다는 전망에서는 몇십 년은 양적으로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혁명의 짐을 짊어지는 세대들에게는 사물이 달리 보인다. 자본주의적 무정부상태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만들어낸다는 것은 진실이지만, 생산수단에 대한 사회화가 "개인의 생존을 위한 투쟁"을 자동적으로 제거하지는 않는다 것이 곤란한 점이다. 이것이 문제의 요점이다!</p>
<p>
</p>
<p>
가장 선진화된 자본주의에 기초한 미국에서조차 사회화된 국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각자가 원하는 만큼 공급할 수 없을 것이며, 따라서 가능한 한 많이 생산하도록 모든 사람들을 독려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러한 환경들에서 독려하는 임무는 자연스럽게 국가에게로 떨어지게 되는데, 국가는 이번에는 다양한 변화와 완화를 가하는 가운데 자본주의에 의해 실시되는 노동에 대한 지불이라는 수단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 맑스가 1875년에 아래와 같이 썼던 것은 이런 의미에서였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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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style="margin-left: 15pt">
"... 자본주의 형식 안에서 오랜 산고 끝에 자본주의로부터 생겨나는 공산주의 사회의 첫 번째 국면에서는 부르주아지 법이 불가피하다. 법은 결코 경제적 구조와 그 구조에 의해 조건 지워지는 사회의 문화적 발전보다 상위에 있을 수 없다."</p>
<p style="margin-left: 15pt">
</p>
<p>
이들 주목할만한 내용들을 설명하면서, 레닌은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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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p style="margin-left: 15pt">
"물론, 소비재들의 분배와 관련된 부르주아지 법은 불가피하게 부르주아지 국가를 가정하는데, 왜냐하면 법이란 자신의 규범들에 대한 준수를 강제할 수 있는 기구가 없다면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전히 레닌을 인용하고 있다) 부르주아지 법뿐만 아니라 부르주아지가 없는 부르주아지 국가도 또한 공산주의 하에서 일정기간 동안 생존하게 될 것이다!"</p>
<p style="margin-left: 15pt">
</p>
<p>
현재의 공식 당국자들로부터 완전히 묵살되고 있는 이 고도로 중요한 결론은 소비에트 국가의 성격에 대한 이해, 혹은 보다 정확하게는 그러한 이해를 향한 첫 번째 접근에 있어서 결정적인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 사회주의적 이행의 임무를 지고 있는 국가가 강제라는 수단으로 불평등, 즉 소수의 물질적 특권을 방어할 수밖에 없는 한, 그 만큼 그 국가는 또한 부르주아지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부르주아지" 국가로 남아 있는 것이다. 이러한 말들은 칭찬이나 비난 어떤 것도 포함하지 않는다. 이 말들은 사물의 진정한 이름을 가지고 사물에 이름을 붙인 것이다.</p>
<p>
</p>
<p>
물질적 힘의 성장을 촉진함으로써, 분배의 부르주아지적 규범이 사회주의적 목적들에 복무해야만 하지만, 단지 최종적으로 그래야 한다. 국가는 직접적으로, 그리고 바로 시작 그 자체로부터 이중적 성격을 갖는다: 생산수단에서 사회적 소유를 방어하는 한 사회주의적인, 생활용품들의 분배가 가치라는 자본주의적 측정수단과 그것으로부터 발생하는 모든 결과들을 통해 이루어지는 한 부르주아적인. 그러한 모순적인 성격규정은 교조주의자들과 현학자들을 공포에 빠뜨릴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들에게 단지 조의를 표할 수 있을 뿐이다.</p>
<p>
</p>
<p>
노동자 국가의 최종적인 성격은 노동자 국가의 부르주아지적 경향과 사회주의적 경향 사이의 변화하는 관계들에 의하여 결정될 수밖에 없다. 후자의 승리는 바로 그 사실로 인하여 경관의 최종적인 일소, 즉 국가의 자치사회로의 용해를 의미할 것임에 틀림없다. 이것 하나 만으로부터도 소비에트 관료주의의 문제가 그 자신과 하나의 체제로서 얼마나 무한히 중요한 것인지 충분히 분명하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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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이 미래의 어려움의 근원을 밝혀 냈던 것은, 비록 그가 자신의 분석을 끝까지 수행하는데 성공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모든 지적인 기질에 따라서 맑스의 개념을 극도로 예리하게 표현했기 때문이다. "부르주아지가 없는 부르주아지 국가"는 진정한 소비에트 민주주의와는 조화를 이룰 수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국가의 이중적 기능은 국가의 구조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이론이 분명하게 예측할 수 없었던 것을 경험이 드러내 주었다. 부르주아지 반혁명에 맞선 사회화된 소유의 방어를 위해서는 "무장한 노동자들의 국가"가 완전히 적절했었다면, 소비의 영역에서 불평등을 규제하는 것은 매우 다른 문제였다. 소유하지 않은 사람들은 소유를 창조하고, 방어하려 하지 않는다. 다수는 소수의 특권에 스스로를 관련시킬 수가 없다. "부르주아지 법"의 방어를 위하여, 노동자 국가는 "부르주아지적인" 형태의 기구, 즉, 비록 새로운 제복을 입었지만, 과거와 똑같은 경관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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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해서 우리는 볼셰비키 강령과 소비에트 현실 사이의 근본적인 모순을 이해하는 것을 향한 첫 번째 발걸음을 딛었다. 만약 국가가 사멸하지 않고, 점점 더 전제적으로 성장한다면, 노동 계급의 전권을 위임받은 자들이 관료화된다면, 그리고 관료가 새로운 사회의 위로 솟아오른다면, 이것은 과거의 심리학적 유물 등과 같은 부차적인 이유들 때문이 아니라, 새로운 사회가 진정한 평등을 보장할 수 없는 한, 특권을 가진 소수를 만들어내고 그들을 지탱하는 냉혹한 필요성의 결과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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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국가들에서 노동자 운동을 목 졸라 죽이는 관료주의 경향들은 심지어 프롤레타리아트 혁명 이후에조차 스스로를 모든 곳에서 드러낼 것이다. 그러나 혁명으로부터 시작하는 사회가 가난할수록, 이 "법칙"의 표현이 더욱 준엄하고 적나라할 것이며, 관료주의가 취하는 형태가 더욱 노골적일 것이며, 관료주의는 사회주의적 발전에 있어서 더욱 위험스러울 것이다. 소비에트 국가는 스탈린의 벌거벗은 경찰 독트린이 선포하는 것처럼, 구 지배계급들의 "유물들" 때문에 사멸을 방해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관료적 기생충들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키지도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데, 왜냐하면 그러한 유물들은 그 자체로 아무런 힘이 없기 때문이다. 소비에트 국가는 물질적 궁핍, 문화적 후진성, 그리고 그 결과로서 인간의 개인적 생존을 보장하는 관심사, 모든 인류에 가장 즉각적으로, 그리고 가장 첨예하게 영향을 미치는 것들에서 "부르주아지 법"의 지배와 같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강력한 요소들에 의하여 방해받고 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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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ong>4. "</strong><strong>일반화된 궁핍</strong><strong>"</strong><strong>과 경관</strong></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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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ong><em>공산주의자 선언</em></strong>보다 2년 전에, 청년 맑스는 다음과 같이 썼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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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력의 발전은 [공산주의의] 절대적으로 필요한 실천적인 전제인데, 왜냐하면 생산력의 발전이 없다면 궁핍이 일반화되고, 궁핍과 함께 필수품을 위한 투쟁이 다시 시작되며, 이것은 과거의 모든 배설물들이 되살아나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p>
<p style="margin-left: 15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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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는 이러한 사상을 직접적으로 발전시키지 않았었는데, 이것은 어떤 우연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후진국에서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을 결코 예견하지 않았다. 레닌 또한 그것에 관하여 결코 깊이 고려하지 않았고, 이것 또한 우연은 아니었다. 그는 소비에트 국가의 그렇게도 오랫동안의 고립을 예견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지 맑스의 추상적 구문이며, 반대로부터의 추론에 불과한 이 인용문은 소비에트 체제의 모든 구체적인 어려움들과 질병에 대한 없어서는 안될 이론적 열쇠를 제공해 준다. 제국주의 전쟁과 내전으로 인한 파괴에 의해 더욱 악화된 궁핍이라는 역사적 기초 하에서, "개인의 생존을 위한 투쟁"은 부르주아지의 타도 바로 다음날 사라지는 것이 아니며, 이어지는 몇 해 동안에 줄어드는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반대로 때로는 예전에 없던 잔인함을 띤다. 두 번이나 러시아의 몇몇 지역들이 사람을 먹는 지경으로까지 갔던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겠는가?</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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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르주의 러시아를 서구로부터 분리시키는 거리는 오늘날에 와서야 비로소 진정으로 평가될 수 있다. 최상의 조건, 즉 내부적 혼란과 외부적 재앙들이 없는 조건에서라면, 가장 먼저 태어난 자본주의 문명의 수세기에 걸친 경제적, 교육적 성취들을 완전히 동화시킬 수 있기 위해서 5개년이라는 기간들이 여러 번 필요할 것이다. 전(前)사회주의적 문제들의 해결을 위한 사회주의적 방책들의 적용, 이것이 현재 소련에서의 경제적, 문화적 활동의 핵심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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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현재의 소련도 맑스 시대의 가장 선진화된 나라들을 생산력에서 앞서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첫째, 두 체제의 역사적 경쟁에서는 상대적 수준보다는 절대적인 수준이 문제가 된다. 소비에트 경제는 바스마르크, 팔머스톤 혹은 아브라함 링컨이 아니라 히틀러, 볼드윈, 그리고 루즈벨트의 자본주의와 대비된다. 그리고 둘째, 인류의 수요의 영역 자체가 세계의 기술 성장과 함께 근본적으로 변한다. 맑스 시대의 사람들은 자동차, 라디오, 동영상, 비행기들에 대하여 알지 못했다. 하지만, 사회주의 사회는 이들 재화들에 대한 자유로운 향유 없이는 상상할 수도 없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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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의 용어를 사용하자면, "공산주의의 가장 낮은 국면"은 가장 선진화된 자본주의가 거의 다가간 수준에서 시작된다. 하지만, 다가오는 소비에트의 5개년 계획의 실제 프로그램은 "유럽과 아메리카를 따라잡기 위한" 것이다. 소련이라는 무한한 공간에 자동차 도로와 아스팔트 고속도로 망의 건설은 아메리카로부터 자동차 공장들을 이식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과 물질을 필요로 할 것이다. 모든 소비에트 시민이 도중에 어려움 없이 휘발유를 다시 채우면서, 자신이 선택하는 어떤 방향으로 건 자동차를 이용할 수 있기 위해서는 몇 년이나 필요하겠는가? 야만의 사회에는 타는 사람과 걷는 사람이 두 개의 계급을 구성했다. 자동차는 승용말 만큼이나 사회를 분화시킨다. 심지어 소박한 "포드" 조차 소수의 특권으로 남아 있는 한, 부르주아지 사회에 고유한 모든 관계들과 관습들이 살아남게 된다. 그리고 불평등의 후견인인 국가가 이것들과 함께 남아있게 된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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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의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이론에 스스로를 완전하게 기초하는 가운데, 레닌은, 우리가 언급했듯이, 이 문제(<strong><em>국가와 혁명</em></strong>)에 집중되었던 그의 주요한 작업에 성공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당의 강령에서, 그 나라의 경제적 후진성과 고립으로부터 나오는 국가의 성격에 관하여 필요한 모든 결론들을 도출하는 것에 성공하지는 못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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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들이 행정에 생소하다는 점과 전쟁으로부터 귀결되는 난관들로부터 관료주의의 부활을 설명하는 가운데, 강령은 모든 전권을 위임받는 자들에 대한 선출과 언제든지 이루어지는 소환, 물질적 특권의 폐지, 대중들에 의한 적극적인 통제 등과 같이 단지 "관료적 왜곡들"의 극복을 위한 정치적 방책들을 처방할 뿐이다. 이러한 길을 따라서 관료는 우두머리로부터 단순한, 그리고 더욱이 일시적인 기능적 대리인으로 변모할 것이며, 국가는 점차적으로, 그리고 감지할 수 없을 정도로 무대에서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가정되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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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령이 완전히 국제적 관점에 기초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닥쳐오는 난관들에 대한 이 명백한 과소평가를 설명해준다. "러시아에서 10월 혁명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실현시켰다... 세계 프롤레타리아트 공산주의 혁명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것들이 강령의 서문의 내용이었다. 강령의 저자들은 "일국에서 사회주의"의 건설이라는 목적을 스스로에게 설정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당시에는 누구도 이러한 생각을 하지 않았다), 만약 20년 동안이나 고립된 상태에서 선진 자본주의가 오래 전에 해결했던 경제적, 문화적 문제들을 해결하도록 강요된다면, 소비에트 국가가 어떠한 성격을 띠게 될 것인지에 관한 문제를 건드리지도 않았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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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戰後) 혁명적 위기가 유럽에서 사회주의의 승리로 귀결되지 않았다. 사회민주주의가 부르주아지를 구원했다. 레닌과 그의 동료들에게 짧은 "숨쉴 수 있는 기간"처럼 보였던 기간이 역사상의 한 시대 전체로 늘어났다. 소련의 모순적인 사회구조, 그리고 소련 국가의 초(超)관료주의적 성격은 이 유일무이하고 "예견되지 못했던" 역사의 멈춤의 직접적인 결과인데, 이것은 동시에 자본주의 나라들에서는 파시즘이나 전(前)파시즘적 반동으로 귀결되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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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료주의가 일소된 국가를 수립하려던 첫 번째 시도는 첫째로 자치정부에 대한 대중들의 생소함, 사회주의에 헌신적인 자질을 갖춘 노동자들의 부족 등과 충돌했던 한편, 즉각적인 난관들은 그 직후에 더욱 심오한 것들과 맞닥뜨렸다. 당 강령에 의해 요구되었던, 강제 기능의 지속적인 축소와 함께 하는 "회계와 통제"의 기능으로의 국가의 축소는 적어도 전반적인 만족이라는 상대적인 조건을 가정했다. 단지 이 필요한 조건이 부족했다. 서구로부터는 어떠한 도움도 오지 않았다. 민주주의적 소비에트의 권력은 당시의 임무가 방어를 위하여, 산업을 위하여, 기술과 화학을 위하여 그 존재가 필요했던 특권화된 집단들을 수용하는 것이 되자, 심지어 견딜 수 없을 정도의 경련을 일으키고 있음이 밝혀졌다. 10명으로부터 취하여 1명에게 주는, 이 결정적으로 "사회주의적"이지 않은 작동 속에서, 이것들이 분배에서 강력한 전문가들의 계층을 구체화하고 발전시켰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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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어떻게 그리고 왜 근자의 거대한 경제적 성공들이 불평등의 완화가 아니라, 이와는 반대로 첨예화로, 그리고 동시에 "왜곡"이었던 것으로부터 이제는 행정의 체계가 될 정도의 관료주의의 보다 더한 성장으로 귀결되었는가? 이 의문에 답하려고 시도하기 전에, 소비에트 관료집단 당국의 지도자들이 자기 자신들의 체제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들어보도록 하자.</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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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ong>5. "</strong><strong>사회주의의 완전한 승리</strong><strong>"</strong><strong>와 </strong><strong>"</strong><strong>독재의 강화</strong><strong>"</strong></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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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몇 년 동안에 "계급으로서의 쿨락의 일소"와 관련하여 특히 분명한 형태를 취하는 소련에서의 사회주의의 "완전한 승리"에 대한 몇 가지 발표들이 있어왔다. 1931년 1월 30일 프라우다는 스탈린의 한 연설을 설명하면서, "제2차 5개년 계획 기간 동안에, 우리 경제의 <em>마지막</em> 자본주의적 요소의 <em>유물</em>이 일소될 것이다"(이탤릭체는 우리의 것)라고 말했다. 이러한 전망의 관점에서 보면, 국가는 똑같은 시간 동안에 최종적으로 사멸해야 하는데, 이것은 자본주의의 "마지막 유물들"이 일소된 곳에서는 국가가 할 일이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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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주제에 관하여 볼셰비키 당의 강령은 "계급으로의 사회의 분열, 그리고 이와 함께 모든 국가권력이 완전하게 사라지지 않은 한, 소비에트 권력은 국가의 계급적 성격의 불가피성을 인정한다."고 말한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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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참을성 없는 모스크바의 특정 이론가들이 의심 없이 자본주의의 "마지막 유물들"의 일소로부터 국가의 사멸을 추론하려고 시도하자, 관료집단은 즉각적으로 그러한 이론들은 "반혁명적"이라고 선포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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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적인 전제나 결론 중 어디에 관료집단의 이론적 실수가 있는 것일까? 양쪽 모두에 있다. "완전한 승리"에 대한 첫 번째 발표에 대하여, 좌익반대파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당신들은 근본적인 기준인 생산력 수준을 제거하면서, 시기상조이고 모순적인 관계들의 사회와 관련한 법률적 형태에 당신들 자신을 제한해서는 안 된다. 법률적 형태 그 자체는 기술수준의 정도에 따라서 본질적으로 다른 사회적 내용을 가진다. "법은 경제구조와 경제구조에 의해 조건 지워지는 문화적 수준보다 결코 상위에 있을 수 없다."(맑스) 경제 생활의 모든 영역들로 이식된 미국의 가장 현대화된 기술이 성취한 것에 기초한 소유의 소비에트적 형태, 정말이지 이것이 사회주의의 첫 번째 국면이 될 것이다. 낮은 노동생산성을 가진 소비에트 형태는 단지 역사가 아직까지는 최종적으로 그 운명을 가늠하지 않은 이행적인 체제를 의미할 뿐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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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1932년 3월에 다음과 같이 썼다. "기괴하지 않은가?" "그 나라는 재화의 부족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 모든 단계에서 공급의 장애가 있다. 어린이들에게 우유가 부족하다. 그러나 관료적 현자들은 '그 나라는 사회주의의 시대로 진입했다!'고 선언한다. 사회주의의 이름을 더 사악하게 더럽히는 것이 가능하기는 한 것일까?" 현재 소비에트 지배 집단의 저명한 선전가[영어 역자의 주 - 소비에트 지도자들에 대한 테러 음모라는 죄목으로 1936년 8월에 칼 라데크가 체포되기 전에 쓰여졌음]인 칼 라데크는 소련을 집중적으로 다루었던 독일의 자유주의적 신문인 Berliner Tageblatt의 특별호(1932년 5월)에서, 불후의 명언이 될 자격이 있는 아래의 말들로 이러한 언급들을 회피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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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style="margin-left: 15pt">
"우유는 사회주의가 아니라 소가 생산하는 것이다. 그리고 한 나라가 인민대중들의 물질적 상태에서의 어떠한 괄목할 만한 상승이 없이도 잠시 동안 보다 높은 발전 단계로 상승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려 하지 않기 위해서는 실제로 당신들은 우유가 흐르는 강이 있는 나라의 이미지와 사회주의를 혼동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p>
<p style="margin-left: 15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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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내용들은 그 나라에서 끔찍한 기근이 위세를 떨치고 있을 때에 쓰여졌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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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는 인간의 욕구의 최상의 만족을 위한 계획의 구조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사회주의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는 것이다. 만약 소들이 사회화되었으나, 소가 거의 없거나, 소들이 너무도 빈약한 젖통을 가지고 있다면, 우유의 불충분한 공급으로부터 분쟁 - 도시와 농촌 사이의, 집산 농장들과 개인 농부들 사이의, 서로 다른 처지의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의, 전체 노동대중과 관료집단 사이의 분쟁 -이 생겨난다. 사실은 소의 사회화가 농민들에 의한 대량의 소 도축을 야기했던 것이다. 궁핍에 의하여 창출된 사회적 갈등들은 이번에는 "모든 과거의 배설물"의 부활로 이어질 수 있다. 본질에 있어서, 이러한 것이 우리의 대답이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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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 8월 29일의 한 결의문에서,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제7차 대회는 국유화된 산업들의 성공들, 집산화의 성과, 자본주의적 요소들의 축출, 계급으로서의 <em>쿨락</em>의 일소의 총합 속에서, "사회주의의 최종적인, 그리고 되 돌이킬 수 없는 승리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전방위적 강화가 소련에서 성취된다."는 점을 엄숙하게 확인했다. 분명한 어조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이 증언은 완전히 자기 모순적이다. 만약 원칙으로서가 아니라 살아 있는 사회체제로서 사회주의가 "최종적으로 되 돌이킬 수 없게" 승리했다면, 독재의 새로운 "강화"는 명백히 터무니없는 말이다. 그리고 반대로, 만약 체제의 현실적 요구가 독재의 강화를 불어온 것이라면, 이것은 사회주의의 승리는 아직 멀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맑스주의자 뿐만 아니라 어떤 현실주의적인 정치 사상가라도 독재, 즉 정부 강제의 "강화"의 필요성 바로 그것은 계급이 없는 조화로움의 승리가 아니라 새로운 사회적 적대의 성장을 증언한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의 근저에는 무엇이 있을까? 낮은 노동생산성으로부터 기인하는 생존수단의 부족.</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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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레닌은 사회주의를 "소비에트 권력 더하기 전기화[電氣化]"로 특징지었다. 당시의 선전 목적 때문에 한쪽으로 치우쳤던, 이 풍자는 적어도 자본주의 수준의 전기화를 최소한의 출발점으로 가정했다. 현재 소련에는 한 사람 당 선진국들의 3분의 1만큼의 전기 에너지가 있다. 만약 소비에트가 그 동안 대중들로부터 독립된 정치기구들에 자리를 내주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은 사회주의는 관료적 권력 더하기 자본주의 전기화의 3분의 1이라고 선언하는 수밖에는 없을 것이다. 이러한 정의는 사진을 찍은 듯이 정확한 것이겠지만, 사회주의를 위해서는 이것으로는 아주 불충분하다! 1935년 11월에 스타하노프 운동가들에 행한 연설에서 스탈린은 의외로 그 대회의 경험주의적 목적에 맞추어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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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style="margin-left: 15pt">
"사회주의는 왜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정복할 수 있고, 정복해야하며, 반드시 정복하게 될 것인가? 왜냐하면 사회주의가 보다 높은 노동생산성.... 을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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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개월 전에 똑같은 문제에 대하여 채택되었던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결의안과 자기 자신이 종종 반복했던 선언들 역시 우연히 거부하면서, 여기서 스탈린은 미래시제로 사회주의의 "승리"에 관하여 말한다. 그는 사회주의가 노동생산성에서 자본주의를 앞지르게 될 때, 사회주의는 자본주의 체제를 정복할 것이라고 말한다. 보는 바와 같이, 동사의 시제뿐만 아니라 사회적 표준들이 시시때때로 변한다. 소비에트 시민들에게는 "총노선"을 따라가는 일이 틀림없이 쉬운 일이 아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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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3월 1일 로이 하워드와의 대화에서, 마침내 스탈린은 소비에트 체제의 새로운 정의를 내놓았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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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style="margin-left: 15pt">
"아직은 완전히 완성되는 않았지만, 그 뿌리에서는 사회의 사회주의적 기관인 우리가 창출해 온 그 사회기관을 아마도 소비에트 사회주의 기관으로 불러도 될 것입니다."</p>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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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이의도된모호한정의속에는거의그속에있는단어의개수만큼이나많은모순들이있다. 사회적 기관이 "소비에트 사회주의적"인 것으로 불리지만, 소비에트는 국가의 형태이고 사회주의는 사회 체제이다. 이들 명칭들은 같은 것들이 아닐 뿐만 아니라, 우리의 관심사의 관점에서 적대적이기까지 하다. 사회적 기관이 사회주의적이 되어온 이상, 소비에트는 빌딩이 완성된 후의 비계처럼 떨어져 나가야 한다. 스탈린은 사회주의는 아직은 완전히 완성되지는 않았다고 수정을 가한다. "완전히.. 않은"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5 퍼센트 만큼인가 75 퍼센트 만큼인가? "그 뿌리에서 사회주의적인" 사회의 기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에게 말해주지 않는 것처럼, 그들은 이것에 대하여도 우리에게 말해주지 않는다. 그것들은 소유의 형태를 의미하는 것일까, 혹은 기술을 의미하는 것일까? 하지만, 정의의 모호함 바로 그것이 1931-35년의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더욱 분명한 정식으로부터의 후퇴를 의미한다. 같은 길을 따라서 더 나아가는 발걸음은 모든 사회적 기관의 "뿌리"는 생산력이며, 소비에트의 뿌리는 인류의 복지인 사회주의적 기둥과 잎들을 위하여 충분히 강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될 것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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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끝-</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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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ong>트로츠키의 영구혁명</strong></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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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ong>제</strong><strong>7</strong><strong>장 민주주의 독재라는 슬로건은 오늘날 동양에서 무엇을 의미하는가</strong><strong>?</strong></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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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단계들'이라는 스탈린주의적 (진화적이고 속물적이며 혁명적이지 않은) 개념에서 길을 잃은 라데크는 이제 또한 동양 전체에 대하여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민주주의 독재라는 슬로건을 신성시 하기 위해 애쓴다. 레닌이 개별 나라의 발전 경로에 따라서 적응시켰으며, 변화시키고 구체화시켰고, 어떤 국면에서는 버려 두었던 볼셰비키주의라는 '작업 가설'로부터, 라데크는 초역사적 도식을 만들어낸다. 이 점에서 그는 자신의 글들에서 아래 인용문을 계속해서 반복한다.</p>
<p style="margin-left: 15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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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style="margin-left: 15pt;">
"이 이론과 이 이론으로부터 도출되는 전술 또한 과거로부터 이어져 온 정치사회적 형식들이 유산으로서 뒤에 남겨 둔 문제를 부르주아지가 일소하지 못한 초기적 자본주의 발전을 이룬 모든 나라들에 적용될 수 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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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식에 대하여 잠깐 생각해보라. 이것은 1917년 카메네프의 입장에 대한 경건한 정당화가 아닌가? 2월 혁명 이후에 러시아 부르주아지는 민주주의 혁명의 문제들을 '일소'했는가? 아니다. 민주주의 혁명의 문제들 중에서 가장 중요했던 농업문제를 포함하여, 민주주의 혁명의 문제들은 해결되지 못한 채 남아 있었다. 어떻게 레닌은 과거의 슬로건이 여전히 '적용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을 수 있을까? 왜 그는 이 문제를 거두어 들였을까?</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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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데크는 앞에서 이 문제들은 이미 '성취되었'기 때문이라고 이 점에 관하여 우리에게 대답했다. 우리는 이 대답을 조사해왔다. 이것은 전혀 지지받을 수 없으며, 과거의 레닌주의 슬로건의 본질은 권력의 형식에 있는 것이 전혀 아니고,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협력에 의한 농노제도의 일소에 있는 것이라는 관점을 유지하고 있는 라데크의 말에 의하면 2배나 더 그러하다. 그러나 정확하게 케렌스키주의가 만들어내지 않았던 것이 이것이다. 이것으로부터 당시의 가장 첨예한 문제였던 중국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우리의 과거에 대한 라데크의 참견이 모두 말도 안된다는 것이 도출된다. 이것은 1905년에 트로츠키기 이해했거나 혹은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것은 조사되어야 한다)이라기 보다는, 1917년 2월-3월에 스탈린, 몰로토프, 그리고 특히 리코프와 카메네프가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당시 라데크의 입장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하여 나는 모른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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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문에 만약 어떤 사람이 민주주의 독재가 이중권력 기간에 중심 슬로건의 즉각적인 변화를 필요로하는 정도로까지 현실화되었다고 믿는다면, 그 사람은 중국에서의 '민주주의 독재'는 더욱 완전하게 그리고 완벽하게 국민당 정권을 통해서, 즉 담평산을 부가물로 하는 장개석과 왕칭웨이의 지배를 통해서 현실화 되었음을 인정해야만 한다.) 장개석은 국민당 우익의 지도자이고, 왕칭웨이는 좌익의 지도자이다. 담평산은 중국에서의 스탈린과 부하린의 노선을 실행하면서 공산주의자 장관으로 복무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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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중국에서 슬로건의 변화는 더욱 더 필요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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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결국, '과거로부터 이어져 온 정치사회적 형식들 이라는 유산'이 중국에서는 아직 일소되지 않았는가? 그렇다. 그것은 아직 일소되지 않았다. 그러나 레닌이 '고참 볼셰비키들'의 상층 부위 전체에 대한 전쟁을 선포했던 1917년 4월 4일 러시아에서는 이것들이 일소되었는가? 라데크는 스스로를 절망적으로 반박하며, 갈피를 못잡고 이러저리 휘청거린다. 이와 관련하여, 라데크가 '형식들이라는 유산'과 같은 복잡한 표현을 사용하면서, 그 속에 있는 뜻의 다양함을 가지고 장난을 치면서 '봉건주의 혹은 농노제도의 잔재'라는 더욱 분명한 용어를 분명하게 회피하고 있음을 언급해두도록 하자. 왜일까? 라데크는 오직 어제에만 이들 잔재들을 가장 결정적으로 부정했고, 그래서 민주주의 독재라는 슬로건을 위한 모든 기초를 없애 버렸기 때문이다. 공산주의자 대학에서 그의 보고에서 라데크는 아래와 같이 말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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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style="margin-left: 15pt;">
"중국 혁명의 원천은 1905년 우리 혁명의 원천들 만큼이나 깊었다. 중국은 2개의 계급들에 맞서는 방향이 아니라 오직 하나의 계급, 부르주아지에 맞서는 쪽으로 될 것이라는 간단한 이유 때문에, 노동계급의 농민과의 동맹은 1905년의 우리 때의 것보다 중국에서 더욱 강력할 것이라고 확신을 가지고 주장할 수 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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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간단한 이유 때문'이다. 프롤레티라아트가 농민과 함께 자신의 투쟁을 하나의 계급, 부르주아지에 맞서는 (봉건주의의 잔재들에 맞서는 것이 아니라 부르주아지에 맞서는) 쪽으로 향하게 할 때, 만약 괜찮다면, 이런 혁명은 무엇이라 불러야 하는가? 아마도 민주주의 혁명? 라데크가 이 말을 1905년이 아니라, 심지어 1909년도 아니라, 1927년 3월에 했다는 것을 상기하라.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매우 간단하다. 1927년 3월에 라데크 역시 올바른 길로부터 이탈했던 것이다. 단지 또 다른 하나의 방향에서. 반대파는 중국 문제에 관한 자신의 테제들에서 당시 라데크의 일면성에 대한 가장 중대한 바로잡음을 가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용된 단어들 안에 진실의 핵심이 있었다. 중국에는 지주의 재산이 거의 없다. 지주들은 짜르 러시아에서 보다 훨씬 더 자본가들과 긴밀하게 엮여 있었고, 중국에서의 농업문제의 특정한 비중은 짜르 러시아에서보다 훨씬 더 적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민족해방의 문제는 굉장히 그 중요성이 컸다. 따라서, 중국의 민주주의적 혁신을 위한 독자적인 혁명적 정치 투쟁을 위한 중국 농민의 능력은 러시아 농민들의 그것보다 더 클 수가 없다. 이러한 것은 다른 것들 중에서도 1925년 이전뿐만 아니라 3년간의 중국 혁명 기간에도 자신의 기치에 농업혁명을 새긴 나로드니크(민중주의적) 정당이 등장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나타난다. 이 모든 것들이 이미 1925-27년의 경험을 자신의 뒤로 가지고 있는 중국에게 민주주의 독재라는 정식은 2월 혁명 이후 러시아에서 보다 훨씬 더 위험한 반동적 올가미를 의미한다는 것을 증명한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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훨씬 더 지난 먼 과거에 대한 라데크의 또 다른 간섭 역시 잔인하게 그에게 반대되는 것으로 드러난다. 이번에는 1850년 맑스가 제기했던 영구혁명 슬로건의 문제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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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style="margin-left: 15pt;">
"라데크는 '맑스에게는 민주주의 혁명이라는 슬로건이 없었던 반면, 1905년부터 1917년까지의 레닌에게 그것은 정치적 축이었으며, 초기적[?] 자본주의 발전을 이룬 모든[?!] 나라들에서의 혁명이라는 그의 개념의 한 구성부분을 이루었다."라고 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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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으로부터의 몇 줄에 자신을 기초하면서, 라데크는 독일혁명의 중심적 과제는 <em>민족 통일</em>이었던 반면, 러시아에서는 <em>농업혁명</em>이었다는 사실로 이러한 입장들의 차이를 설명한다. 만약 이러한 대비가 기계적으로 이루어지 않고, 비중이라는 의미가 유지된다면, 이것은 어느 정도까지는 올바르다. 그러나 그렇다면 중국에서는 무엇이 문제인가? 반식민지 나라인 중국에서 민족문제의 특정한 비중은 농업문제와 비교하여 심지어 1848-50년 독일에서 보다도 이루헤아릴수 없이 훨씬 더 크다. 중국에서는 이것이 통일의 문제이면서 동시에 해방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맑스는 독일에서 왕의 모든 권좌가 굳건하게 유지되었고, 융커들이 토지를 보유했으며, 부르주아지의 지도자들은 단지 정부의 대기실에 있는 것만 묵인되었던 때 그의 영구혁명이라는 전망을 정식화했다. 중국에서는, 1911년 이래로 왕조가 없었고, 독립적인 지주 계급이 없으며, 민족부르주아지인 국민당이 권력에 있으며, 농노제라는 관계들은 소위 부르주아지 착취와 화학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이렇게 해서 라데크가 했던 맑스와 레닌의 입장들 사이의 대비는 중국에서 민주주의 독재라는 슬로건에 전적으로 반대되는 것임을 말해준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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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라데크는 단지 우연히 일시적으로 <em>맑스가 농민을 여전히 소부르주아지 도시 민주주의의 자연적 동맹으로 간주했던</em>1850년의 순환에 자신을 한정하는 가운데, 맑스의 입장을 진지하게 취하지 않는다. 당시 맑스는 독일에서 독자적인 민주주의 혁명의 단계, 즉 농민의 지지를 받는 도시 소부르주아지 급진주의자들에 의한 일시적인 권력 장악을 예상했다. 여기에 문제의 요점이 있다! 하지만, 이러한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우연으로도 이런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지난 세기 중반에 이미, 소부르주아지 민주주의는 자기 자신의 독자적인 혁명을 수행할 능력이 없음을 스스로 보여주었다. 그리고 맑스는 이 교훈에 대하여 고려했다. 1856년 4월 16일, 즉 언급된 시기로부터 6년 후에, 맑스는 엥겔스에게 다음과 같이 썼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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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에서 모든 것은 2번째 판의 농민전쟁이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의 후위를 보위할 가능성에 달려 있습니다. 그렇다면 일은 대성공일 것입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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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데크가 완벽하게 잊고 있는 이 놀랄만한 말들이 10월 혁명뿐만 아니라 현재 우리를 점령하고 있는 모든 문제에 대한 진정으로 소중한 완전한 열쇠를 제공한다. 맑스는 농업혁명을 건너뛰었는가? 아니라. 우리가 알고 있듯이 그는 농업혁명을 건너뛰지 않았다. 맑스는 다가오는 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협력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했는가? 그렇다. 맑스는 그 혁명에서 농민에 의한 지도적, 혹은 심지어 단지 독립적인 역할의 가능성을 부여했는가? 아니다. 그는 그러한 가능성을 부여하지 않았다. 맑스는 독자적인 민주주의 혁명에서 (농민의 잘못이 아니라 부르주아지 민주주의의 잘못 때문에) 부르주아지 민주주의를 지지하는데 성공하지 못했던 농민들이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트를 지지하는 입장에 있을 것이라는 사실로부터 나아갔다. '그렇다면 일은 대성공일 것입니다.' 분명히 라데크는 이것이 정확하게 10월에 벌여졌던 일이고, 불행하게도 당시에는 벌어지지 못했던 일이라는 것을 보고 싶어하지 않는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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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으로부터 중국에 관하여 도출되는 결론들은 매우 분명하다. 논쟁은 동맹으로서 농민의 결정적인 역할에 관한 것이 아니며, 농업혁명의 거대한 중요성에 관한 것도 아니며, 독자적인 농업 민주주의 혁명이 중국에서 가능한지 여부 혹은 '2번째 판의 농민 전쟁'이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지지할 것인지 여부에 관한 것이다. 이것이 문제가 되고 유일한 것이다. 이것을 다르게 이해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고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으며, 단지 중국 혁명을 혼란스럽게 하고 중국 혁명을 올바른 길에서 이탈시키는 자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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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의 나라들의 프롤레타리아트가 승리를 향한 길을 열도록 하기 위하여는, '국면들(stages)'과 '단계들(steps)'에 관한 스탈린과 마르티노프의 현학적인 반동적 이론은 처음부터 완전히 제거되어야만 하며, 제껴져 있어야만 하며, 박살나야 하고 빗자루로 쓸어버려져야 한다. 볼셰비키주의는 이러한 천박한 진화주의에 맞선 투쟁 속에서 성숙하게 성장했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적응시켜야만 하는 것은 선험적으로 그어진 행군 줄이 아니라 현실의 계급투쟁 경로이다. 다양한 수준의 발전을 이룬 나라들에게 서로 다른 정도의 혁명을 위한 카드를 돌려서 계속되는 순서를 고정하는 사상인 스탈린과 쿠시넨의 사상을 거부해야 한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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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레닌은 특히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조직화에 관하여 지난 시기의 결론들을 통합하고 그것들을 어느 때 보다 더 완성된 이론적 정식화를 제공하면서, 케린스키주의와 10월의 경험을 아래와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이미 고도로 높은 계급 적대를 가지는 부르주아지 사회에는 공개적이건 혹은 위장된 형식으로건 부르주아지 독재나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중에 하나만이 있을 수 있다. 중간적인 정권에 대한 어떠한 이야기도 있을 수 없다. 가장 후진적인 유럽 나라인 러시아의 경험이 자신의 부르주아지 혁명의 시대, 예를 들면 '민주주의 독재'에 가장 우호적인 시대에 보여준 바와 같이, 어떠한 민주주의, 어떠한 '민주주의 독재'(반어적인 인용부호들은 레닌의 것이다)도 오로지 부르주아지 지배를 위한 장막일 뿐이다. 오직 2월과 10월 혁명들의 경험의 총합으로서 만들어진 민주주의에 대한 그의 테제들을 위한 기초로서 레닌은 이러한 결론을 내렸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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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다른 사람들 처럼, 라데크 또한 민주주의의 문제를 민주주의 독재의 문제로부터 기계적으로 분리한다. 이것이 가장 커다란 실수들의 근원이다. '민주주의 독재'는 혁명 동안에 부르주아지의 위장된 지배가 될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우리의 1917년 '이중권력'으로부터 뿐만 아니라 중국에서 국민당의 경험으로부터도 이것을 배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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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류들의 절망은 그들이 심지어 지금도 민주주의 독재를 부르주아지 독재뿐만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와 대비하려고 시도한다는 사실에서 가장 지독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이것은 민주주의 독재가 중간적인 성격의 것임에 틀림없으며, 즉, 소부르주아지적 성격을 갖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연에서는 다양한 계급 노선들의 산술적인 평균으로서의 그러한 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민주주의 독재에 대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참여로 사태가 바뀌지는 않는다. 만약 그것이 부르주아지의 독재도 아니고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도 아니라면, 소부르주아지가 <em>단호</em>하고 <em>결정적인</em> 역할을 해야만 한다는 것이 된다. 그러나 이것은 3번의 러시아 혁명들과 2번의 중국 혁명들에 의해서 실천으로 대답되었던 바로 그 똑같은 문제로 우리를 되돌아가게 한다: 제국주의의 세계 지배라는 조건 하에서, 오늘날 소부르주아지가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심지어 이것이 자신들의 민주주의적 임무들의 해결에 여전히 직면해 있는 후진국가의 문제라고 하더라도, 지도적인 혁명적 역할을 할 수 있는가?</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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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낮은 층의 소부르주아지가 자신들의 혁명적 독재를 수립할 수 있었던 시대들이 있었다. 우리는 그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당시의 프롤레타리아트 혹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선구자가 아직은 소부르주아지로부터 분화되지 않았지만, 발전되지 않은 스스로의 조건에서 반대로 소부르주아지의 투쟁하는 중핵을 이루고 있었던 시대들이었다. 오늘날은 확연히 다르다. 프롤레타리아트가 이미 스스로를 소부르주아지부터 분리했고, 소부르주아지를 가치가 없는 존재로 운명지으면서 농민으로 하여금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에서의 불가피한 정치적 선택에 직면하게 하는 자본주의 발전이라는 기초에서 대부르주아지에 대하여 적대적으로 맞서 있는 한, 소부르주아지가 비록 후진적일지라도 오늘날의 부르주아지 사회의 삶을 지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우리는 말할 수 없다. 농민은 표면적으로 소부르주아지인 것처럼 보이는 정당에 유리하게 결정할 때는 언제나, 실제로는 금융자본을 위한 버팀목으로서 자신들의 등을 제공한다. 첫번째 러시아 혁명의 기간, 혹은 첫번째 2개의 혁명들 사이의 기간에는 민주주의 혁명에서 농민과 소부르주아지의 <em>독자성의 정도</em>(그러나 단지 정도!)에 관하여 다른 의견들이 여전히 존재할 수 있었던 반면, 이제 이 문제는 지난 12년의 사태들의 전체 경로에 의해 결정되었으며, 바뀔 수 없게 결정되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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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10월 이후에 많은 나라들에서, 모든 가능한 형식들과 조합들 속에서 실천적으로 새롭게 제기되었고, 똑같은 방식으로 정리되었다. 케렌스키주의의 경험에 뒤따르는 근본적인 경험이 이미 언급하였듯이 국민당 경험이었다. 그러나 무장한 소부르주아지가 자신들의 지도자들을 통하여 금융과두제에게 권력을 즉각적으로 이양하기 위하여 구 부르주아지 정당들로부터 권력을 찬탈했던 이탈리아 파시즘의 경험도 덜 중요하지 않다. 필수드스키 운동이 반동적 부르주아지 지주 정부에 직접적으로 맞서는 것을 목표로 했고, 소부르주아지 대중들과 심지어 폭넓은 프롤레타리아트의 희망을 반영했던 폴란드에서 똑같은 문제가 제기되었다. 구 폴란드 사민당의 바르스키가 '농민에 대한 과소평가'가 두려워 필수드스키 혁명을 '노동자와 농민의 민주주의 독재'와 동일시했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만약 내가 불가리아의 경험, 즉 스탐불리스키의 타일 정당을 향한 콜라로프스와 카바크치에프스의 수치스럽게 혼란스럽던 정책, 혹은 미국의 농민-노동자 당과의 부끄러운 실험, 혹은 라디크에 대한 지노비에프의 로맨스, 혹은 루마니아 공산당의 경험, 그리고 등등 끝도 없이 많은 경험들을 여기서 분석하려 한다면, 그것은 우리는 너무나 멀리까지 나아가는 것일 것이다. 이들 사실들의 일부는 나의 <strong>공산주의 인터내셔널 강령 초안 비판</strong>에서 본질적으로 분석되어 있다. 이들 모든 경험들의 근본적인 결론은 10월의 교훈들 즉, 농민을 포함하는 소부르주아지가 반동적인 시대들에서 만큼이나 혁명적인 시대들에서 비록 후진적이라 할지라도 현대 부르주아지 사회에서 지도자의 역할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완전하게 확증하고 강화한다. 중간적인 형식들은 비틀거리기 시작했거나 혼란 이후에 아직 일어서지 못한 부르주아지의 독재(케렌스키주의, 파시즘, 필수드스키 정권)를 위한 위장일 뿐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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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은 부르주아지나 혹은 프롤레타리아트를 따를 수 있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트가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자신을 따르지 않고 있는 농민과 함께 행진하려고 시도할 때, 프롤레타리아트는 실제로는 금융자본의 뒤를 좇고 있는 것임이 드러난다: 1917년 러시아에서 조국을 지키는 자들로서의 노동자들; 중국에서 국민당에 있던 공산주의자들도 또한 포함하는 노동자들; 폴란드 사회당의 노동자들, 그리고 또한 어느 정도까지는 1926년 폴란드의 공산주의자들 역시, 등등.</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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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것을 끝까지 생각해내지 못한 사람이나, 자신들이 뒤에 남겨둔 생생한 흔적으로부터 사태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누구라도 혁명적 정치에는 관여하지 않는 편이 좋았을 것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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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과 10월 혁명들의 교훈들로부터 레닌이 철저하고도 포괄적으로 도출했던 근본적인 결론은 '민주주의 독재'라는 사상을 완전하게 거부한다. 아래의 내용은 1918년 이후 레닌에 의해 한 번보다 더 많이 반복되었던 것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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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누군가 19세기 전반을 관통하는 정치경제 전체, 혁명의 역사 전체, 정치적 발전의 역사 전체로부터 무엇이라도 배웠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농민은 노동자나 혹은 부르주아지를 따른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만약 이유를 모른다면, 나는 그런 시민들에게 ... 18, 19세기의 위대한 혁명들 중 어떤 것이라도, 19세기의 어떤 나라의 정치적 역사라도 생각하라고 ... 말하겠다. 그것들이 이유를 말해줄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경제적 구조는 그 사회에서 지배세력들은 오로지 자본이 될 수 있거나 혹은 자본을 타도하는 프롤레타리아트가 될 수 있거나 하는 그런 사회이다. 그런 경제적 구조의 사회에는 다른 어떠한 세력들도 없다."(XVI, 217) 자유와 평등 슬로건에 의한 인민에 대한 사기, 1919년 5월, 4판, XXIX, 338쪽. 영어판은 리틀 레닌 도서관에서 팜플렛의 형식으로 1934년에 출판되었다. 이 팜플렛의 34-35쪽을 보시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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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잉글랜드나 독일이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다. 어느 하나라도 18세기 혹은 19세기의 위대한 혁명들의, 즉 <em>후진적인 </em>국가들에서의 <em>부르주아지</em> 혁명들의 교훈들에 기초하여, 레닌은 오로지 부르주아지의 독재 혹은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만이 가능하다는 결론에 이른다. '민주적인' 즉 중간적인 독재는 있을 수 없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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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알고 있듯이 라데크의 이론적, 역사적 간섭은 부르주아지 혁명은 반드시 사회주의 혁명과 구별되어야만 한다는 다소 얄팍한 경구로 요약된다. 이 '단계'로까지 내려온 라데크는 곧바로 자신의 하나 밖에 없는 자원, 즉 '상식'으로부터 나아가는 가운데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라는 슬로건이 선진 국가들과 후진 국가들 모두에서 제기될 수 있다는 것이 있을 것 가지 않은 것으로 간주하는 쿠시넨을 향해 손가락을 뻗는다.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의 순수함으로 쿠시넨은 트로츠키가 1905년 이후로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다고 트로츠키의 유죄를 선언한다. 쿠시넨을 따라서, 라데크 또한 아이러니칼 해진다: 트로츠키에게 '중국과 인도 혁명들의 특수성은 정확하게 중국과 인도 혁명들은 서구 유럽의 혁명들과 전혀 구분되지 않으며, 따라서 그 혁명들의 첫번째 단계들[?!]에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로 나아가야만 한다는 사실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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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데크는 이와 관련하여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는 서유럽 국가에서 현실화되었던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 후진적인 동유럽 국가에서 현실화되었다는 한 가지 사소한 사항을 잊고 있다. 역사의 진행이 러시아의 '특수성'을 간과했던 것이 트로츠키의 잘못인가? 라데크는 부르주아지, 보다 정확하게는 발전의 정도, 사회 구조, 전통 등등에서 모든 다양성을 지닌, 즉 모든 자신들의 '특수성들'을 지닌 <em>모든</em> 자본주의 국가들에서는 부르주아지, 보다 정확하게는 금융자본이 지배한다는 더 많은 것을 잊고 있다. 여기서 다시, 이러한 특수성에 대한 고려의 부족은 결코 트로츠키로부터가 아니라 역사적 발전에서 기인한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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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선진 국가들과 후진 국가들 사이의 차이는 어디에 있는가? 차이는 크기는 하지만, 여전히 자본주의적 관계들의 지배라는 한계 내에 머물러 있다. 부르주아지의 지배의 형식과 방식들은 서로 다른 나라들에서 매우 다르다. 한 극에서는 그 지배가 완전하고도 절대적인 성격을 가진다: <em>미국</em>. 다른 한 극에서는, 그것들을 자신에게 종속시키고, 그것들에 자기 자신의 방책들을 강요함으로써 금융자본이 스스로를 아시아적 봉건주의라는 오래된 제도들에 스스로를 적응시킨다: <em>인도</em>. 그러나 양쪽 모두에서 부르주아지가 지배한다. 이것으로부터,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또한 사회적 기초, 정치적 형식들, 즉각적인 임무들, 그리고 다양한 자본주의 나라들에서 활동의 속도에 따라서 매우 다양한 성격을 가지게 될 것이라는 것이 도출된다. 그러나 제국주의자들, 봉건주의자들, 그리고 민족 부르주아지의 동맹에 대한 승리로 인민 대중을 지도하는 것은 오로지 권력장악 이후 스스로를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로 이행시키는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헤게모니 하에서 이루어질 수 있을 뿐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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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데크는 자신이 인류를 사회주의 독재를 하기에 '성숙한' 그룹과 민주주의 독재만을 하기에 '성숙한' 또 다른 그룹, 이렇게 2개의 그룹들로 나누었을 때, 나와는 반대로 이것 하나만으로 자신이 개별 나라들의 '특수성'으로 추정되는 것에 대하여 고려했다고 상상한다. 실제로는, 그는 공산당들이 특정 나라의 특수성에 대한 진정한 연구를, 예를 들면 그 나라의 역사적 발전의 다양한 단계와 국면들에 대한 살아 있는 해석을 하지 못하도록 방해 밖에는 하지 못하는 생명력 없는 고정관념을 드러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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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민주주의 혁명을 성취하거나 완수하지 못한 나라의 특수성들은 대단히 중요하여 프롤레타리아트 전위의 강령을 위한 기초로서 고려되어야만 하는 것들이다. 오로지 이러한 민족적 강령의 기초에서만 공산당은 부르주아지와 그들의 민주주의 대리인들에 대항하는 노동계급과 일반적인 노동인민들의 다수를 위한 자신의 실제적이고 성공적인 투쟁을 발전시킬 수 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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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 투쟁에서 성공의 가능성은 많은 정도로 그 나라 경제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역할에 의해, 그리고 결과적으로 그 나라의 자본주의 발전 정도에 의해서 결정된다. 하지만, 이것이 유일한 표준인 것은 결코 아니다. 그 나라에 존재하는 그것의 해결에 나라의 다수가 관심을 가지며, 그것의 해결을 위해서는 가장 단호한 혁명적 방책들이 필요한, '인민들에게' 광범위하고도 긴요한 문제들이 같은 정도로 중요하다. 이러한 종류의 문제들 중에 농업 문제와 민족 문제들이 다양하게 조합된 상태로 있다. 식민지 국가들의 첨예한 농업 문제와 참을수 없는 민족적 억압을 지닌 젊고 상대적으로 적은 프롤레타리아트가 순수하게 <em>사회주의적</em> 기초 위에 있는 선진국가의 프롤레타리아트보다 먼저 <em>민족 민주주의</em> 혁명의 기초 위에서 권력에 이를 수 있다. 10월 이후에는 이것을 더 이상 증명해야 할 필요가 없는 것 처럼 보였다. 그러나 수 년 동안의 사상적 반동과, 아류들의 이론적인 악행을 통하여, 혁명의 기본적인 개념들이 너무나도 천박해지고, 타락하고, 쿠시넨화되어서 매 번 완전히 다시 시작해야만 한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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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했던 것으로부터 오늘날 세상의 모든 나라들이 이미 이런 혹은 저런 방식으로 사회주의 혁명을 위하여 성숙되어 있다는 것이 도출되는가? 아니다. 이것은 문제를 제기하는 잘못된, 죽은, 학자연하는, 스탈린주의-부하린주의적 방식이다. 전체 세계 경제는 사회주의를 위하여 의문의 여지없이 성숙해 있다. 그러나 이것이 특정의 모든 나라가 따로 따로 성숙해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중국, 인도 등의 다양한 후진 국가들에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는 어떻게 될 것인가? 우리는 이것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답한다: 역사는 순서대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어떤 나라는 독자적인 사회주의의 건설을 위해 성숙하기 전에, 또한 심지어 광범위한 사회화 방책들을 위해서 성숙되기 전에 조차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위해 '성숙'해질 수 있다. 사회 발전의 사전에 예상된 조화로부터 나아가서는 안된다. 스탈린의 융숭한 이론적 환영에도 불구하고, 불균등 발전의 법칙은 여전히 살아 있다. 이 법칙의 힘은 국가들 사이의 관계에서뿐만 아니라 하나의 똑같은 나라 내부에서의 다양한 과정들의 상호작용들에도 작용한다. 경제와 정치의 불균등한 발전들의 조화는 오직 세계적 차원에서만 얻어질 수 있다. 특히, 이것은 중국에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문제는 중국 경제와 중국 정치라는 한계 내에서 배타적으로 고려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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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여기서 우리는 영구혁명이라는 국제혁명의 이론과 일국에서의 사회주의라는 민족개량주의 이론이라는 2개의 상호 양립할 수 없는 관점들에 직면한다. 후진적인 중국에서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세계 어떤 나라도 자기 자신의 민족적 한계 내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할 수 없다: 충분히 발전되지 못한 생산력들이 국유화에 그렇게 하듯이, '민족적 경계들을 넘어서 성장한 고도로 발전한 생산력들이 이것에 저항한다. 예를 들면 영국에서의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는 사실 성격에서는 다르지만 중국에서의 프롤레타리아트 독재가 직면하게 될 어려움들과 모순들보다 아마도 더 가볍지는 않을 어려움들과 모순들에 봉착하게 될 것이다. 오로지 국제 혁명이라는 길에 의해서만 양 쪽 모두의 경우에서 이들 모순들을 극복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은 사회주의적 이행을 위한 중국의 '성숙'과 '미성숙'의 문제를 위한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여기서 논쟁의 여지가 없게 남아 있는 것은 중국의 후진성이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임무들을 극도로 어렵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역사는 순서대로 만들어지지 않는 것이며 중국 프롤레타리아트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점을 반복한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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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적어도 대부분의 후진적 식민지 나라를 포함하는 모든 나라가 만약 사회주의가 아니라면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위해서는 성숙해 있음을 의미하는가? 아니다. 이것은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아니다. 그렇다면 일반적으로 그리고 특히 식민지들에서 민주주의 혁명은 어떻게 되는가? 이 문제에 대하여 또 다른 질문으로 답하겠다. 모든 식민지 국가가 자신의 민족민주주의 임무들의 즉각적이고 온전한 해결을 위하여 성숙해 있다고 어디에 쓰여져 있는가? 다른 측면으로터 문제에 접근해야만 한다. 제국주의 시대라는 조건들 하에서, 민족민주주의 혁명은 오로지 그 나라의 사회적, 정치적 관계들이 프롤레타리아트를 인민 대중의 지도자로서 권력에 올려놓을 정도로 성숙해 있을 때에만 승리적인 귀결로 수행될 수 있다. 만약 이런 경우가 아직은 아니라면? 그렇다면 민족해방을 위한 투쟁은 단지 전체적으로 노동 대중에 반(反)하는 매우 부분적인 결과들 만을 만들어 낼 것이다. 1905년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트는 자신의 주변에 농민 대중을 통합시키고 권력을 장악하기에 충분히 강하다는 것을 증명하지 못했다. 바로 이 이유로 인하여, 혁명은 중도에서 멈추었고 그리고 나서 더욱 더 낮게 가라 앉았다. 예외적으로 우호적인 정세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지도부가 중국 프롤레타리아트가 권력을 위한 투쟁을 하지 못하게 했던 중국에서는, 민족적 임무들이 국민당 정권 내에서 파괴되고 불안정하며 불충분 채 해결되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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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그리고 어떤 조건들 하에서 식민지 국가가 자신의 농업과 민족 문제들의 진실로 혁명적인 해결을 위하여 성숙하게 될 것인지 미리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지금 우리는 중국뿐만 아니라 인도도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통해서만 오직 진정한 인민의 민주주의, 즉 노동자와 농민의 민주주의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분명한 확신을 가지고 주장할 수 있다. 그 길에는 많은 국면들(stages), 단계들(steps), 그리고 국면들(phases)이 여전히 있을지도 모른다. 인민대중의 압력 하에서, 부르주아지는 여전히 좌익을 향한 행보를 할 것인데, 이것은 나중에 그들이 인민들을 어느 때 보다 더 무자비하게 공격하기 위해서이다. 이중권력의 기간들이 가능하고, 아마도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존재하지 않을 것, 존재할 수 없는 것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가 아닌 진정한 민주주의 독재이다. '독자적인' 민주주의 독재는 단지 노동자와 농민들에 전적으로 적대하는 쪽으로 이끌렸던 국민당과 같은 형태일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처음부터 이것을 이해해야만 하며, 추상적인 정식들의 뒤에 계급 현실들을 감추는 것 없이 대중들에게 이 점을 가르쳐야만 한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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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과 부하린은 제국주의의 멍에 덕분에 중국에서는 부르주아지가 민족 혁명을 수행할 수 있다고 설교했다. 시도는 되었다. 결과는 무엇이었는가? 프롤레타리아트가 감독관의 도끼 아래로 보내졌다. 그리고 그들은 민주주의 독재가 다음에 올 것이라는 말을 듣는다. 소부르주아지 독재는 자본의 위장된 독재일 뿐이라는 것이 드러났다. 우연히? 아니다. '농민은 노동자나 혹은 부르주아지를 따른다' 첫번째 경우에는 프롤레타리아트 독재가 등장한다. 다른 경우에는 부르주아지의 독재가 등장한다. 비록 먼 곳으로부터 연구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교훈은 충분히 분명한 것으로 보인다. 누군가 '그렇지 않다. 그것은 단지 성공적이지 못한 실험이었다. 우리는 전면적으로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할 것이고 이번에는 "진정한" 민주주의 독재를 세울 것이다'라고 대답한다. '어떤 수단으로'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협력이라는 사회적 기초에서.' 이 마지막 발견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사람이 라데크이다. 그러나, 만약 허용된다면, 국민당은 노동자와 농민이 부르주아지 때문에 불 속에서 밤을 주워내기 위하여 '협력하였던' 바로 그 똑같은 기초에서 등장했다. 이 협력의 정치적 역학이 무엇처럼 보일 것인지 우리에게 말해 달라. 무엇으로 국민당을 대체할 것인가? 어떤 정당들이 권력에 있을 것인가? 적어도 대충은 그것들을 지시해 달라! 적어도 그것들을 설명해 달라! 이에 대하여 라데크는 오직 결딴이 난 사람들만이, 맑스주의의 복잡성에 대하여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만이 어떤 계급이 말이 되고 어떤 계급이 기수가 될 것인지와 같은 그런 부차적인 기술적 문제에 관심을 가질 수 있는 반면 볼셰비키는 자신의 관심을 계급 기초에 집중하는 가운데, 정치적 상부구조로부터 스스로를 '추상'해야만 한다고 (1928년에!) 대답했다. 아니다. 말 좀 하자. 당신은 이미 웃음거리가 되는 짓들을 해왔다. 당신은 이미 충분히 '추상했다'. 충분한 정도 이상으로! 중국에서, 당신은 계급 협조가 정당 문제에서 스스로를 어떻게 표현했는지의 문제로부터 당신 스스로를 '추상했다'. 당신은 프롤레타리아트를 국민당 속으로 끌고 들어갔다. 당신은 당신의 감각들을 잃는 지점까지 국민당에 혹해 있었다. 당신은 국민당으로부터의 철수에 맹렬하게 반대했다. 당신은 추상적 정식들을 되풀이 하면서 투쟁의 정치적 문제들로부터 꽁무니를 뺐다. 그리고 부르주아지가 프롤레타리아트의 두개골을 아주 분명하게 박살 낸 이후에, 당신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것을 제안했다: 완전히 다시 시작하자; 그리고 정당들과 혁명적 권력의 문제들로부터 우리 스스로를 다시 한번 더 '추상하'는 것으로 시작하자. 아니다! 이것들은 아주 한심한 짓거리들이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뒤로 끌려가도록 하지 않을 것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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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지각한 바와 같은 이들 모든 아슬아슬한 재주부리기들은 노동자들과 농민들의 동맹의 중요성에 표현되어 있다. 라데크는 농민에 대한 과소평가에 대하여 반대파에 경고하며 멘셰비키들에 대한 레닌의 투쟁을 인용한다. 종종, 사람들은 레닌으로부터의 인용이 무엇이 이루어지고 있는 가를 보면서, 인간의 사유의 존엄에 대한 그런 위배들에 대하여 심하게 분개한다. 그렇다. 레닌은 농민의 혁명적 역할을 부정하는 것이 멘셰비키들의 특징이라고 한 번 보다 더 많이 말했다. 그리고 이것은 옳다. 그러나 이들 인용문들에 첨가하여, 멘셰비키들이 사회주의 혁명가 당과의 블럭을 깨지 않으면서 2월 혁명과 10월 혁명으로 분리되었던 8개월을 보냈던 1917년이 또한 있었다. 그 시기에 사회주의 혁명가당(SRs)은 혁명에 의해 각성된 농민의 절대적 다수를 대변했다. SRs와 함께, 멘셰비키들은 스스로를 혁명적 민주주의로 불렀고, 자신들이 노동자들과 농민들(병사들)의 동맹에 스스로를 기초했던 바로 그 사람들이었다고 우리를 질책했다. 이렇게 해서, 2월 혁명 이후에 멘셰비키들은 소위 노동자와 농민의 동맹이라는 볼셰비키의 정식을 빼앗았다. 볼셰비키들은 농민으로부터 프롤레타리아트 전위를 분리시켜 혁명을 망치려고 한다는 비난을 들었다. 다시 말해서, 멘셰비키들은 레닌이 농민을 무시한다고, 혹은 적어도 과소평가한다고 비난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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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에 반대했던 카메네프, 지노비에프 등등의 비판은 멘셰비키들의 비판의 메아리에 불과했다. 라데크의 현재의 비판이 이번에는 카메네프의 비판의 뒤늦은 메아리일 뿐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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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데크의 정책을 포함하여 중국에서 아류들의 정책은 1917년 멘셰비키의 허구를 지속시키고 더욱 발전시키는 것이다. 공산당이 국민당에 잔류했다는 사실은 노동자들과 농민들의 동맹의 필요성에 대한 똑같은 언급으로 라데크뿐만 아니라 스탈린에 의해서도 방어되었다. 그러나 국민당이 부르주아지 정당이라는 것이 '우연히' 폭로되었을 때에는 '좌익' 국민당에서 그 시도가 반복되었다. 결과들은 마찬가지였다. 그 결과,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와 구분되는 민주주의 독재라는 추상이 높은 희망들을 실현시키지 못했던 이런 유감스러운 현실 위로 올려져 숭배되었다(우리가 이미 했었던 것의 생생한 반복). 1917년에 우리는 체리텔리, 단, 기타 등등으로부터 '우리는 이미 혁명적 민주주의의 독재를 가지고 있지만, 당신들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향해, 즉 파멸을 향하여 질주하고 있다'는 소리를 100번은 들었다. 진실로 사람들의 기억력은 짧다. 스탈린과 라데크의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는 체리텔리와 단의 '혁명적 민주주의의 독재'와 전혀 다르지 않다. 그리고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이 정식은 코민테른의 모든 결의안들에 흐르고 있을뿐만 아니라 코민테른의 강령 속에도 침투했다. 이 보다 더 비열한 허구, 그리고 동시에 1917년 볼셰비키주의가 멘셰비키주의에 퍼부었던 모욕들에 대한 멘셰비키주의의 이 보다 더 통렬한 복수를 상상하는 것은 힘든 일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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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동양의 혁명가들은 여전히 선험적인 과거의 인용문들에 기초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들과 정치적 경험에 기초하여 '민주주의 독재'의 성격에 관한 문제에 대하여 분명한 답을 요구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 '민주주의 독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스탈린은 동양에서 그것은 대략 '1905년 혁명과 관련하여 레닌이 생각했던 것과 같은 것이다.'라는 정말로 고전적인 대답을 반복해서 해왔다. 이것은 어느 정도까지는 공식적인 정식이 되었다. 중국, 인도, 혹은 폴리네시아를 위한 책들과 결의안들에서 이것을 발견할 수 있다. 혁명가들은 <em>미래의</em>, 한편으로는 오래 전에 <em>과거의</em> 일들이 되어버린 사태들에 관련한 레닌의 '개념들'을 찾는다. 그리고 여기에 더하여 레닌의 가설적 '개념들'은 이런 저런 방식으로는 해석되지만, 결코 레닌 자신이 사태들 이후에 그것들을 해석했던 방식으로는 해석되지 않는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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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style="margin-left: 15pt;">
'좋다, 우리는 당신의 말에 따라서 혁명 이전에 레닌이 그것에 관하여 생각했던 것과 정확하게 똑같이 그것을 생각하려고 노력할 것이오. 그러나 이 슬로건이 실제에서는 무엇으로 보일 것인지 제발 말해주지 않겠소? 그것이 당신의 나라에서는 어떻게 현실화되었소?'라고 동양의 공산주의자가 고개를 숙이면서 말한다.</p>
<p style="margin-left: 15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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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style="margin-left: 15pt;">
'우리 나라에서 그것은 이중권력 시기에 케렌스키주의의 형태로 현실화되었소.'</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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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style="margin-left: 15pt;">
'민주주의 독재의 슬로건이 우리 나라에서는 우리 민족의 케렌스키주의라는 형태로 현실화될 것이라고 우리의 노동자들에게 말할 수 있겠소?'</p>
<p style="margin-left: 15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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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style="margin-left: 15pt;">
'아니! 아니! 전혀 그렇지 않소! 어떤 노동자도 그런 슬로건을 수용하지 않을 것이오. 케렌스키주의는 부르주아지에 굴종하고 노동인민을 배신하는 것이오.'</p>
<p style="margin-left: 15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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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style="margin-left: 15pt;">
'그러나 그렇다면 우리의 노동자들에게 무엇을 말해야만 하오?' 동양의 공산주의자가 낙담한 채 말한다.</p>
<p style="margin-left: 15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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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style="margin-left: 15pt;">
책임을 맡고 있는 쿠시넨이 즉각 대답한다. '당신은 그들에게 민주주의 독재는 레닌이 미래의 민주주의 혁명과 관련하여 생각했던 것이라고 말해야만 하오.'</p>
<p style="margin-left: 15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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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만약 동양의 공산주의자가 제정신이라면, 그는 아래와 같이 대꾸하려 할 것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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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p style="margin-left: 15pt;">
'그러나 레닌은 민주주의 독재는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수립했던 10월 혁명에서야 오직 자신의 진짜로 진실되게 현실화되었다고 1918년에 설명하지 않았소? 당과 노동계급을 정확하게 이러한 전망으로 이끄는 것이 더 좋지 않겠소?'</p>
<p style="margin-left: 15pt;">
</p>
<p style="margin-left: 15pt;">
'어떠한 환경에서도 안되오. 그런 것은 감히 생각조차 하지 마시오. 왜냐하면, 그것은 여-----엉구 혀------억명이기 때문이오! 그것은 ㅌ-------트로츠키주의이란 말이요!</p>
<p style="margin-left: 15pt;">
</p>
<p>
이런 호된 질책이 있은 후, 동양의 공산주의자는 히말라야의 가장 높은 산꼭대기에 있는 눈보다 더 하얗게 질려서 더 이상의 어떠한 지식을 위한 열망도 포기한다. 무엇이 건 일어나도록 내버려 두라, 무엇이건 일아나도록!</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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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p>
그리고 결과들은? 우리는 그 결과들을 잘 안다: 장개석 앞에서의 경멸스러운 굴종이거나 영웅적인 모험들.</p>
<p style="margin-left: 15pt;">
</p>
<p>
- 끝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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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텔리겐챠와 사회주의</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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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츠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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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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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 혹은 6-7년 전에만 해도, 러시아의 주관적 사회학풍을 방어하던 자들('사회주의 혁명가 당')이 오스트리아 철학자인 막스 아들러1)의 최근 팜플렛을 자신들의 목적에 맞게 성공적으로 활용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난 5-6년 동안, 우리는 너무도 철저한 객관적 '사회학풍'을 겪어 왔고, 그것의 교훈들이 우리의 몸뚱아리들에 너무도 분명한 상채기들로 쓰여져 있어서, 가장 신성시되는 고귀한 지식인, 심지어 아들러의 '마르크스주의' 문사(文士) 조차도 러시아의 주관주의에는 어떠한 도움도 되지 못할 것이다. 반대로, 우리의 러시아 주관주의자들의 운명은 막스 아들러의 주장들과 견론들에 반대되는 가장 중대한 논거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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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팜플렛의 주제는 지식인과 사회주의 사이의 관계이다. 아들러에 대해서 말하자면, 이것은 단지 이론적 분석일 뿐만 아니라 의식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는 확신시키고 싶어 한다. 학생 사회주의자들 청중에 대한 연설에 기초하고 있는 아들러의 팜플렛은 열정적인 확신으로 가득차 있다. 새로움을 자처하지 않는 사상들에 대한 특별한 뉘앙스를 풍기는 이 작은 작업은 변절의 영감으로 충만하다. 그의 팜플렛에서는 자신의 이상으로 인텔리겐챠를 획득하고 어떠한 댓가를 치르고서라도 그들의 지지를 얻어내고자 하는 이 정치적 열망이 사회분석을 완전히 압도하는데, 이 정치적 열망이 팜플렛이 가지고 있는 기이한 색조를 보여주며, 그것의 약점을 증명하고 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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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텔리겐챠는 무엇인가? 물론 아들러는 이 개념에 윤리적인 정의가 아니라 사회적 정의를 부여한다: 인텔리겐챠는 역사적 서약에 의해 함께 묶여 있는 계층이 아니라 각종 '두뇌 노동'의 직업을 포괄하는 사회계층이다. 비록 '손'노동과 '두뇌'노동 사이의 경계선을 그리는 것이 힘들지는 몰라도, 인텔리겐챠의 일반적인 사회적 성격들은 더 이상 상세하게 나아가지 않더라도 충분히 분명하다. 인텔리겐챠는 부르주아지 사회의 틀 내에 존재하고 있는 하나의 온전한 계급이다. 아들러는 인텔리겐챠를 계급간 그룹으로 부르지만 본질적으로 다른 점은 없다. 그리고 아들러에게 있어서 문제는 다음과 같다. 도대체 누가 혹은 무엇이 이 계급의 영혼에게 보다 나은 권리를 부여하는가? 무슨 이데올로기가 이들의 사회적 기능이라는 바로 그 성격의 결과로서, 내적으로 이들에게 필수적인가? 아들러는 집산주의 이데올로기라고 대답한다. 유럽의 인텔리겐챠들이 집산주의 사상에 직접적으로 적대적이지는 않은 한에는, 이들이 노동 대중들의 삶과 투쟁으로부터 열정적이지도 않고, 냉담하지도 않은 채 멀리 떨어져 서 있다는 것은 사실이고 아들러는 이 사실에 눈을 감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는 이에 대한 충분히 객관적인 지점들이 없는 것 같지는 않다고 말한다. 아들러는 사회주의를 향한 인텔리겐챠의 대중운동이 발생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일반적 조건들의 존재를 부정하는 마르크스주의자들에 단호하게 반대한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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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자신의 머리말에서 '비록 순수하게 경제적인 영역이 아니라 또 다른 영역으로부터 도출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심지어 그들의 프롤레타리아트와 같은 삶의 상황과는 별도로, 그들이 사회주의 노동자 운동에 참여하도록 할 충분한 동기들로서 전체 인텔리겐챠 대중들에게 영향을 끼칠 수있는 충분한 요인들이 존재한다. 인텔리겐챠들이 이 운동의 본질적인 성격과 그들 자신의 사회적 위치에 관하여 알고 있도록 하는 것이 필요한 전부이다.'고 선언한다. 이들 요인들은 무엇인가? 아들러는 '영적 관심의 자유로운 발전의 신성불가침성과 무엇보다도 그 가능성이 인텔리겐챠의 삶의 본질적인 조건들 중의 것들이기 때문에, 이론적 관심은 인텔리겐챠들이 염려하는 경제적 이해와 완전히 동렬의 것이다. 이렇게 해서 만약 사회주의 운동에 합류하는 인텔리겐챠의 기초들이 원칙적으로 경제적 영역의 바깥 쪽에서 찾아진다면, 이것은 사회주의의 경제적 내용에 의해서 만큼이나 정신노동의 존재라는 특정한 이데올로기적 조건들에 의해서도 설명할 수 있다'고 말한다(7쪽). 전체 운동의 계급적 성격으로부터 독립적으로(결국, 이것은 단지 길일 뿐이다!), 매일매일의 당의 정치적 이미지로부터 독립적으로(결국 이것은 단지 수단일 뿐이다!), 하나의 일반적인 사회적 이상으로서의 사회주의는 그것의 본질에서 사회-역사적인 족쇄와 한계로부터 모든 형태의 정신노동의 해방을 의미한다. 이러한 전제와 이러한 전망이 유럽의 인텔리겐챠들이 사회민주주의 진영으로 넘어갈 수 있고, 넘어갈 수 밖에 없는 이론적 다리를 제공해 준다.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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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아들러의전체팜플렛이정렬을쏟고있는것을전개시키는것에대한그의기본적인입장이다. 바로 눈에 띄는 이것의 근본적인 오류는 이것의 비-역사적인 성격이다. 아들러가 기대고 있는 인텔리겐챠의 집산주의 진영으로의 진입을 위한 사회적 기초들은 아주 오랫동안 존재해 왔다. 그리고 아직까지는 사회민주주의를 향한 인텔리겐챠에 의한 어떠한 대중적인 움직임의 흔적이 단 하나의 유럽 국가에서도 없다. 물론 아들러도 우리 만큼이나 이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아들러는 인텔리겐챠가 사회주의를 이해하지 못하는 환경 속에서 노동계급 운동으로부터 인텔리겐챠의 소외를 위한 이유를 찾는다. 어떤 특정한 의미에서는 이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 경우, 많은 다른 극도로 복잡한 사물들에 대한 그들의 이해와 동시에 존재하는 이러한 한결 같은 이해의 부족은 무엇을 설명하는가? 분명히, 이것은 그들의 이론적 논리의 취약함이 아니라 그들의 계급 심리학에 있는 불합리적인 요인들의 힘이다. 자신의 팜플렛 중에서 가장 훌륭한 장의 하나인 '[사물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부르주아지의 한계'라는 장에서 아들러 그 자신이 이것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그러나 만약 유럽 사회민주주의가 인텔리겐챠들과 자신과의 관계라는 논리를 재수립하는 경우에만 유럽 사회민주주의는 두뇌 노동자들의 정신세계의 비합리적인 요인들을 극복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럴 것이라고 희망하며, 그럴 것이라고 확신한다. 인텔리겐챠들은 사회주의를 이해하지 못하는데, 이것은 인텔리겐챠들에게 사회주의가 나날이 그것의 일상적인 모습에서 다른 여러가지 정당들, 다른 정당들과 그냥 똑같은 정치적 정당으로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사회주의가 전세계적인 문화적 운동으로서 자신의 본래 모습을 인텔리겐챠들에게 보여준다면, 인텔리겐챠들은 사회주의 속에서 자신들의 최고의 희망과 열망들을 인식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아들러는 이렇게 생각한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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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까지 우리는 하나의 계급으로서의 인텔리겐챠에 관련되는 한, 순수한 문화적 필요조건들(기술, 과학, 예술의 발전)이 가족, 학교, 교회, 그리고 국가로부터 나오는 계급적인 시사들이나 혹은 물질적 이해의 목소리 보다 실제로 더욱 강력한지 여부에 관하여 조사하지 않은 채로 왔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논쟁을 위하여 이것을 인정한다고 해도, 만약 우리가 무엇 보다도 부르주아지 사회와의 사회주의적 단절이 문화의 이해에 복무하는 최선의 길이라는 것을 지금까지는 단지 이해하지 못했을 뿐인 문화의 사도의 집단을 인텔리겐챠 속에서 찾는 것에 동의한다고 해도, 서유럽의 사회민주주의가 인텔리겐챠들에게 이론적으로 그리고 윤리적으로 자신이 지금까지 그들에게 제공해왔던 것보다 더 강력한 확신과 더 강력한 매력을 제공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이 여전히 강력하게 남는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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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산주의는 이미 수십년 동안 자신의 투쟁의 목소리로 세상을 채워오고 있다. 수백만명의 노동자들이 이 기간 동안에 정치 조직, 노동조합, 협동조합, 교육 및 기타 조직으로 단결해왔다. 전체 계급이 스스로를 삶의 깊은 바닥으로부터 스스로를 끌어올렸고, 지금까지는 재산 소유 계급의 사적인 보유물로서 여겨졌던 정치라는 가장 신성한 곳으로 자신의 길을 강제해왔다. 매일 매일 사회주의 신문이 부르주아지의 가치들을 크고 작게 새로운 세상의 관점으로부터 재평가한다. 여기에 사회주의가 부르주아지 사회의 관점에 대하여 자신의 관점을 대비시켜오지 않았던 사회적, 문화적 삶에 관한 문제(혼인, 가족, 가정교육, 학교, 교회, 군대, 애국주의, 위생, 성매매)는 하나도 없다. 그들은 전적으로 문명화된 인류의 언어들로 말한다. 서로 다른 성향과 다양한 기질의 서로 다른 과거, 사회적 연관들과 삶의 습관들을 가진 사회주의 운동 인민들의 대오 속에는 활동과 투쟁이 있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텔리겐챠들이 사회주의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리고 이것들 모두가 그들이 이 세계적 운동의 문화-역사적 중요성을 이해하도록 그들을 강제할 수 있기에 충분하다면, 이러한 치명적인 이해의 부족의 원인들이 매우 심오하며, 문헌적 이론적 방법으로 이것을 극복하기 위한 시도들은 애초부터 희망이 없는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지 말아야 하는가?</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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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사상은 역사에 비추어 볼 때 훨씬 더 충격적으로 드러난다. 지식인들의 사회주의 운동으로의 가장 커다란 유입은 당이 아직 유아기에 있을 때인 첫번째 기간에 발생했다. 그리고 이것은 유럽의 모든 나라들에 적용된다. 이 첫번째 물결이 인터내셔널의 가장 뛰어난 이론가들과 정치인들을 동반했다. 유럽의 사회민주당이 성장할수록, 당 주변으로 단결되었던 노동자 대중의 규모가 더 커질수록, 인텔리겐챠 출신의 새로운 인자들의 유입은 (상대적으로뿐만 아니라 절대적으로도) 더욱 약해지게 되었다. Leipziger Volkszeitung3)은 오랫동안 신문 광고를 통해서 대학에서 훈련을 받은 편집국 활동가를 구했으나 헛된 일이었다. 여기서 아들러와는 완전하게 반대되는 다음과 같은 하나의 결론이 나올 수 밖에 없다. 사회주의가 자신의 내용을 보다 분명하게 드러내면 낼수록, 사회주의의 역사 속에서의 임무를 모든 사람들이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되면 될 수록, 인텔리겐챠들은 보다 단호하게 사회주의로부터 물러나 왔다. 이것이 인텔리겐챠들이 사회주의 그 자체를 두려워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럽의 자본주의 나라들에서, 대학인들과 노동자들 사이의 친화를 방해해 왔으며, 동시에 노동자들의 사회주의 혁명으로의 인입을 촉진해왔던 것으로서의 사회의 전면적인 변화가 발생해왔음에 틀림없음은 분명하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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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것들은 무슨 종류의 변화들이었는가? 프롤레타리아트의 가장 지적인 개인들, 그룹들 그리고 계층들이 사회민주당에 합류해왔으며, 합류하고 있다. 산업과 운송의 성장과 집중은 그저 이러한 과정을 촉진시키고 있을 뿐이다. 완전히 다른 형태의 과정이 인텔리겐챠와 관련된 부분에서 진행되고 있다. 지난 20년 동안의 거대한 자본주의 발전이 이 계급으로부터 크림을 의문의 여지없이 걷어냈다. 최고의 재능을 가진 주도력과 사고의 도약을 확보한 지식인 세력들이 조직적 활동에 대하여 환상적인 급여를 지불하는 자본주의 산업에 의해, 기업집단들, 철도회사 은행들에 의해 흡수되어 왔다. 오로지 2류들만이 국가 서비스와 정부 사무소들에 남아 있으며, 모든 경향들의 신문 편집국에도 마찬가지이며, '사람' 부족에 대하여 불평한다. 자신들의 종속적이고 물질적으로 불안정한 삶의 길로부터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거대한 문화의 메카니즘에서 파편적이고, 2류에 해당하는 기능을 하며, 큰 매력적 기능을 하지 못하는, 전에 없이 증가하고 있는 반(半)프롤레타리아트 인텔리겐챠의 대표자들에 대해서 말하자면, 아들러가 호소하는 문화적 관심들이 독립적으로 그들의 정치적 호의를 사회주의 운동으로 돌리는데에는 충분할 수가 없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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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산주의 진영으로 넘어가는 것이 심리학적으로 전혀 불가능한 어떠한 유럽의 인텔리겐챠도 실천적으로 프롤레타리아트 정당들의 대오 내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개인적 영향력의 지위를 획득할 희망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환경이 여기에 추가된다. 그리고 이 문제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노동자는 자신의 계급을 따라서 전체의 한 부분으로서 사회주의로 다가오며,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전망을 그는 가지고 있지 않다. 그는 심지어 대중들과 자신의 윤리적인 통합의 느낌에 기뻐하기까지 하며, 이것이 그를 더욱 확신에 차고 강력하게 만든다. 하지만 지식인은 자신의 계급적 탯줄과 단절하면서, 하나의 개인으로서, 그리고 개별 인자로서 사회주의에 다가오며, 필연적으로 개인으로서의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시도한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서 그는 장애물들에 직면한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장애물들은 더욱 커진다. 사회민주주의 운동이 시작되던 때에는, 비록 평균보다 위에 있지 않았더라도, 합류했던 모든 지식인들이 노동계급 운동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지위를 획득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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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서유럽 나라들에서는 모든 신참들이 이미 존재하고 있는 거대한 노동계급 민주주의의 구조를 발견한다. 자신들의 계급으로부터 자동적으로 동기유발된 수천명의 노동자 지도자들이 굳건한 기구를 구성하고 있으며, 그 기구의 가장 높은 자리에는 명예로운 고참들이, 인정받는 권위의 앞자리에는 이미 역사가 되어 있는 인물들이 포진하고 있다. 이러한 환경에서는 오로지 예외적인 능력을 지닌 사람만이 스스로의 힘으로 지도적인 지위를 획득할 희망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사람은 자신에게는 생소한 진영 속으로 심연을 가로질러 도약하는 대신에, 최소저항의 노선을 따라서 산업이나 국가업무의 영역 속으로 이끌린다. 이렇게 해서 인텔리겐챠와 사회주의 사이에는 다른 모든 것에 더하여 마치 분수령 처럼 사회민주당의 기구 조직이 놓여있다. 당 기구 조직이 사회주의에 대한 호감을 가지고 있는 인텔리겐챠 성원들 사이에서 불만을 일으키고, 당 기구는 (가끔은 그들의 '기회주의'와 관련하여 그리고 가끔은 반대로 그들의 지나친 '급진주의'와 관련하여) 이들로부터 규율과 자기 절제를 요구하며, 그들이 무정부주의와 민족주의적 자유주의 사이에 존재하는 자신들의 호감들 속에서 동요하는 불평을 늘어놓는 구경꾼의 역할을 하도록 만든다. Simplicissimus4)가 그들의 최고의 이론적 기치이다. 여러가지 변화와 함께 다양한 정도로 이 현상은 유럽의 모든 나라들에서 반복된다. 이 사람들은 가장 심금을 울리는 자신들의 영혼을 장악하기 위한 사회주의의 문화적 의의에 대하여 드러내는 것에 대하여 다른 어떤 그룹보다도 더 무감하고, 소위 냉소적이다. 오로지 지극히 소수의 '이론가들'만[이 단어를 좋은 의미와 나쁜 의미 양자 모두로 사용하자면]이 자신들의 출발지점으로서의 순수한 이론적 사유의 자극 하에서, 혹은 안톤 멩거5)의 경우에서 처럼, 법칙에 대한 요구들을 통해서, 혹은 아틀린티쿠스6)의 경우에서 처럼, 기능에 대한 요구를 통해서 사회주의에 대한 확신에 이를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듯이, 이런 사람들 조차도 대개는 실질적인 사회민주주의 운동으로까지 다다르지 못하며, 그들에게 사회주의와의 내적 연관 속에서의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투쟁은 7개의 봉인으로 밀봉된 책으로 남아 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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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각적인 물질적 획득이라는 프로그램을 가지고 인텔리겐챠를 집산주의로 획득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고려함에 있어서 아들러는 절대적으로 옳다. 그러나 여전히 이것은 인텔리겐챠를 획득하는 것이 결코 불가능하며, 즉각적인 물질적 이해관계들과 계급적 속박들이 사회주의에 의해 제공되는 모든 문화-역사적 전망들 보다 더 설득력있게 인텔리겐챠들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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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우리가 노동자의 의사들, 변호사들 등등과 같은 직접적으로 노동 대중들에게 복무하는 인텔리겐챠의 층(일반적으로 이들 직업에서 덜 재능을 가진 자들의 층)을 제외한다면, 인텔리겐챠의 가장 중요하고 영향력 있는 부위가 자신의 생계를 산업적 이윤으로부터의 지불, 토지 임대, 국가예산에 의존하며, 그래서 이들은 직접적으로 혹은 간접적으로 자본가계급이나 자본주의 국가에 의존한다는 것을 알게된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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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상적으로 생각한다면, 이러한 물질적 의존성은 일자리를 제공해주는 계급과 관련하여 단지 반(反)자본주의 대오에 있는 전투적인 정치적 실천만을 배제시킬 뿐, 정신적 해방은 배제시키지 않는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정확하게 인텔리겐차가 하는 활동의 '정신적' 성격이 그들과 소유계급들 사이의 정신적 동맹을 형성하게 한다. 노동자들에 맞서서 자본의 이해를 더 받들어야 하는 관리의 책임을 맡는 공장 매니저와 기능공들은 필연적으로 자신들이 노동자들과 항상적인 적대관계에 있음을 안다. 결국 그들이 수행하는 기능이 그들의 생각하는 방식과 그들의 의견들을 그것 자체에 적응시켜야만 한다는 것은 자명하다. 의사와 변호사들은 그들의 활동의 보다 독립적인 성격에도 불구하고 필연적으로 그들의 고객들과 심리학적으로 연결되어 있어야만 한다. 전기공은 매일 매일 장관들, 은행가들, 그리고 그들의 여주인들의 사무실에 전기배선을 할 수 있지만, 이러한 것에도 불구하고 그 자신대로 남아 있을 수 있는 반면, 이들 인간들의 느낌과 취미에 부합할 자신의 마음과 표현 속에 있는 음악을 찾아야만 하는 의사에게 있어서는 문제가 달라진다. 더욱이 이런 종류의 접촉은 필연적으로 부르주아지 사회의 최고 꼭대기에서만 벌어지는 것이 아니다. 런던의 여성참정권론자들은 자신들을 방어하기 위하여 참정권을 지지하는 변호사를 고용한다. 베를린에 있는 거물들의 마누라들이나 비엔나에 있는 '기독교-상류사회의' 상점주인들의 마누라를 치료하는 의사나 그들의 아버지, 형제, 그리고 남편들의 일을 처리하는 변호사는 집산주의에 대한 문화적 전망에 대한 열정이라는 사치를 그 스스로에게 거의 허용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이 모든 것들이 작가, 예술가, 조각가, 예능인들에게 그렇게 직접적으로, 즉각적으로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덜 냉혹하지도 않게 적용된다. 그들은 자신들의 활동이나 개성을 공중(公衆)에 제공하며, 공중의 찬성과 자금에 의존하며, 그래서 공개적이건 혹은 감추어진 방식으로건 그들은 자신들의 창조적 성취를 그들이 부르주아지 강도라고 그렇게도 경멸적으로 부르는 '거대한 괴물'에게 종속시킨다. 여담이지만, 현재 이미 꼭대기에서 그 층이 보다 얇아지고 있는 독일 '청년' 작가 그룹의 운명은 다른 어떤 것 만큼이나 이것의 진실을 보여준다. 그가 성장했던 시대의 조건들에 의해 설명되는 고리키의 예는 단지 법칙을 증명하는 하나의 예외일 뿐이다. 인텔리겐챠의 반혁명적 퇴행에 그 자신을 적응시키지 못함으로써 그는 자신의 '인기'를 급속하게 잃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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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두뇌노동과 육체노동이라는 조건들 사이의 심오한 사회적 차이가 한번 더 폭로된다. 비록 공장노동이 근육을 노예화시키고 몸뚱아리를 소진시킴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노동자의 마음을 자신에게 종속시키는데는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러시아에서와 마찬가지로 스위스에서도 노동자의 마음에 대한 통제를 확보하기 위하여 시도되었던 모든 방책들이 공히 아무런 성과가 없었던 것으로 증명되었다. 두뇌노동자는 육체적 점에서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더 자유롭다. 작가는 경적 소리가 울릴 때 일어날 필요가 없고, 의사의 뒤에는 감독이 서 있지 않으며, 변호사가 법정을 떠날 때 그의 호주머니를 뒤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대신에 그는 단지 노동력이나 자신의 근육의 긴장만을 파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그의 모든 인간성을 팔며, 이것은 두려움을 통해서가 아니라 의식을 통해서이다. 그 결과, 이들 인간들은 자신들의 훌륭한 예복이 평범한 것보다 잘 만들어진 죄수복이라는 것을 보려하지 않으며 볼 수도 없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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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아들러 그 자신이 인텔리겐챠와 사회주의 사이의 상호관계에 대한 자신의 추상적이고 본질적으로 이상주의적인 정식에 만족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자기 자신의 선전물에서, 실제로 그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특정한 기능들을 수행하고 있는 두뇌 노동자들의 계급이 아니라 자신들의 미래의 역할을 준비하는 단계에 있을 뿐인 두뇌 노동자들의 젊은 세대, 학생들에게 말한다. 이것에 대한 증거는 '비엔나 자유 학생 조합'에 대한 헌사에서 뿐만 아니라 이 팜플렛 연설의 성격 그 자체, 그것의 열정적인 선동적이고 설교하는 톤으로도 드러난다. 교수, 작가, 변호사, 의사들로 이루어진 청중들 앞에서 이러한 태도로 자신을 표현하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한 연설은 처음 몇 마디 만에 말하기 거북해지게 될 것이다. 이렇게 해서, 아들러 자신이 그 스스로가 같이 활동하고 있음을 알고 있는 인적 자원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의존하는 것에 자신의 임무를 제한한다. 정치인들은 이론가들의 정식을 바로잡는다. 결국 이것은 <strong>학생들</strong>에 대한 영향력을 위한 투쟁의 문제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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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이 소유계급과 지배계급의 자식들에 대한 국가에 의해 조직되는 교육의 마지막 단계인 것 처럼, 병영은 노동자와 농민의 젊은 세대를 위한 마지막 교육 기관이다. 병영들은 이후 계속해서 수행되어져야 할 종속적인 사회적 기능들에 적당한 복종과 규율이라는 심리적 습관들을 조장한다. 원칙적으로 대학은 운영, 지도력, 정부를 위해 훈련한다. 이러한 각도에서는, 독일의 학생 계층이 부모의 자식 세대를 통합하며 민족적 존엄을 강화하며 부르주아지를 위한 환경에 필요한 기질들을 심어주며, 결국 어떤 사람이 지배계급에 속한다는 각인으로서 복무하게 될 코나 귀 밑에 있는 자국을 공급하기 때문에, 독일의 학생들은 유용한 계급기구들이다. 물론 아들러의 당에게는 대학을 나오는 인적 자원보다 병영을 경험하고 나오는 인정자원이 비교할 수 없도록 더욱 중요하다. 그러나, 특정한 역사적 환경에서는, 즉 독일의 경우에서 처럼, 급속한 산업의 발전과 함께 군대가 그 구성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일 때에는, 당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나는 애써 병영에 들어가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시작 때까지 청년 노동자들을 보고, 그가 다시 나오면 그를 만나는 것[주요한 것]으로 나에게는 충분하다. 그는 나를 떠나지 않을 것이며, 나의 것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7)그러나 대학에 관한 한, 만약 당이 인텔리겐챠에 대한 영향력을 위한 독립적인 투쟁을 수행하고자 한다면, 당은 정확하게 다음과 같이 거꾸로 말해야만 한다. '청년들이 어느 정도 자신의 가족으로부터 자유로운 때인, 그가 아직은 사회에서 자신의 지위의 포로가 되지 않은 때인, 오로지 여기, 그리고 현재에만, 나는 우리의 대오로 그를 끌어당길 것을 기대할 수 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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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들 사이에서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차이는 순전히 나이일 뿐이다. 인텔리겐챠들 사이에서는 이것이 단지 나이의 차이만이 아니라 사회적 차이이기도 하다. 청년 노동자들과 그 자신의 아버지와는 반대로 학생은 아무런 사회적 기능을 수행하지 않으며, 자본이나 국가에 대한 직접적인 의존성을 느끼지 않으며, 어떠한 책임에 의해서도 속박되어 있지 않으며(주체적으로가 아니라면 적어도 객관적으로는), 옳고 그름에 대한 그의 판단에서 자유롭다. 이 기간에는 그의 내부에 있는 모든 것들이 들끓고 있으며, 그의 계급적 선입견들은 그의 이데올로기적 관심들 만큼이나 무정형이며, 의식의 문제가 그에게는 매우 중요하며, 위대한 과학적 일반화들에 처음으로 그의 마음이 열리고 있으며, 그에게는 항상 예외적인 것이 심리학적으로 필요하다. 만약 집산주의가 그의 마음을 지배할 수 있게 된다면, 지금이 그 순간이며, 단조로운 '밥 먹는' 문제로서가 아니라, 참으로 그 기초의 고결한 과학적 성격과, 그 목적들의 포괄적인 문화적 내용을 통해서 집산주의가 그의 마음을 지배하게 될 것이다. 이 마지막 지점에서 아들러는 절대적으로 올바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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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여기서 다시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사실 앞에서 잠시 멈출 수 밖에 없다. 전체로서의 유럽의 인텔리겐챠뿐만 아니라 그들의 자식들인 학생들도 또한 사회주의에 어떠한 이끌림도 단호하게 보여주지 않는다. 노동자 당과 학생 대중들 사이에는 벽이 존재한다. 이 사실을 단지 올바른 각도에서 인텔리겐챠에 접근할 수 없었던 불충분한 선동 작업으로 설명하는 것은, 이것이 아들러가 그것을 설명하려고 애쓰는 방식이데, 학생과 '인민' 사이의 관계의 전체 역사를 간과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것은 학생에게서 사회 역사의 산물보다는 지적이고 윤리적인 카데고리를 추구함을 의미한다. 사실, 학생들의 부르주아지 사회에 대한 물질적 의존성은 그들의 가족들을 통해서 단지 불명료하게 학생들에게 영향을 끼칠뿐이며, 그래서 약화된다. 그러나, 이것에 대한 반대로서, 학생들이 충원되는 계급들의 일반적인 사회적 이해관계들과 필요성은 비록 공명기 속에서 이기는 하지만 학생들의 감정들과 의견들에서 완전하게 반영된다. 그들 역사 전체를 통해서, 완전한 윤리적 붕괴의 시기에서와 같은 가장 극적인 순간들에 기껏해야, 유럽의 학생들은 부르주아지 계급들의 민감한 지표에 불과했다. 부르주아지 사회가 혁명 이외에는 출구를 가지고 있지 못했을 때, 학생들은 인민들과 진지하고 영광스럽게 친교를 맺으면서 초(超)혁명적이 되었다. 1848년 비엔나에서 벌어졌던 일 처럼, 학생들은 부르주아지 민주주의 세력들의 정치적 무능함이 그들로 하여금 혁명의 혁명의 선두에 서는 것을 막았을 때 사실상 이들 세력의 자리를 차지했다. 그러나 학생들은 같은 해 6월 파리에서, 부르주아지와 노동자들이 바리케이드의 반대편에 있음을 발견했을 때, 노동자들에게 총을 쏘기도 했다. 비스마르크의 전쟁이 독일을 통일 시키고, 부르주아지 계급들에게 유화 정책을 쓴 후에, 독일 학생들은 빠르게 항상 맥주를 먹어 똥배가 나온 거만한 모습으로 프러시아의 군인들과 함께 풍자적인 신문에 등장하는 인물이 되었다. 오스트리아에서는, 정부에 대한 영향력을 두고 이 나라의 다른 민족들 사이의 분쟁이 날카로와 지는 것에 비례하여 학생들이 민족적 배타성과 전투적인 배외주의의 기수가 되었다. 그리고 비록 이 모든, 심지어 가장 불쾌한, 역사적 변형들을 통해서, 학생들은 정치적 예리함과 기꺼운 자기희생, 그리고 전투적인 이상주의를 보여주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아들러는 그 양에 너무도 많이 의존한다. 비록 30이나 40의 평범한 속물은 '명예'에 관한 어떠한 가설적 범주들을 위해서도 자신의 얼굴에 먹칠을 할 위험을 감수하지 않을 것이지만, 그의 아들은 열정적으로 그렇게 할 것이다. 르포프 대학에 있는 우크라이나와 폴란드 학생들은 최근 민족적, 혹은 정치적 경향을 어떻게 끝까지 수행할 것인지뿐만 아니라 어떻게 권총의 총구에 자신들의 가슴을 들이댈 것인지도 자신들이 알고 있음을 다시 한번 보여주었다. 작년에, 프라하의 독일 학생들은 독일 공동체로서 자신들의 존재할 수 있는 권리를 거리에서 보여주기 위하여 폭도들의 모든 폭력에 기꺼이 맞섰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의 계급이나 하나의 사상이 아니라 하나의 연령그룹의 성격인, 종종 싸움 닭의 그것과 같은, 전투적 이상주의를 확인한다.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이상주의의 정치적 내용은 학생들의 출신 게급과 학생들이 복귀할 계급들의 역사적 영감에 의해 전적으로 결정된다. 그리고 이것은 자연스럽고 불가피한 것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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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모든 소유 계급들은 자신의 자식들을 대학에 보내고, 만약 대학에 있는 동안의 학생들이 사회주의가 자신의 메세지를 적을 수 있는 백지상태라면, 계급적 유산은 무엇이 되며, 가엾은 낡은 역사적 결정주의는 무엇이 되는가?</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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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아들러를 지지하기도 하고, 반대하기도 하는 문제의 다른 측면을 분명히 해야할 일이 남아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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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러에 의하면, 인텔리겐챠를 사회주의로 끌어 당기기 위한 유일한 길은 운동의 궁극적 목적을 전면적으로 전면으로 가져가는 것이다. 그러나 물론 아들러는 산업의 집중의 진전, 중간층의 프롤레타리아트화, 그리고 계급적대의 격화에 비례하여 이러한 궁극적 목적이 더욱 분명하게, 더욱 완전하게 보인다는 것을 인정한다. 정치 지도자들의 의지와 국가의 전술에서의 차이와는 독립적으로, 독일에서는 오스트리아나 이탈리아에서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한 명료함과 즉각성을 가지면서 '궁극적인 목적'이 전면에 서 있다. 그러나, 이 매우 똑같은 사회적 과정, 노동과 자본 사이의 투쟁의 격화가 인텔리겐챠로 하여금 노동자의 당 진영으로 넘어오는 것을 방해한다. 계급들 사이의 가교들은 끊어져 있고, 그것을 건너기 위해서는 매일 매일 깊어지는 심연을 가로질러 건너뛰어야만 한다. 이렇게 해서, 객관적으로 인텔리겐챠가 집산주의의 본질을 이론적으로 이해하기가 보다 수월해지도록 만드는 조건들과 나란히, 인텔리겐챠의 사회주의 군대로의 정치적 합류의 길에서의 사회적 장애물들이 점점 커지고 있다. 사회적 삶이 존재하는 어떠한 선진국에서라도 사회주의 운동에 합류하는 것은 투기적 행위가 아니라 정치적 행위이며, 여기서는 사회적인 것이 이론을 세우는 이유를 압도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결국 이것은 과거보다 현재에 인텔리겐챠를 획득하는 것이 더 힘들며, 오늘보다는 내일 이것이 더욱 어려울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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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과정에는 또한 '점진성의 파괴'라는 것이 있다. 우리가 사회주의 운동의 성장 그 자체에 따라서 증가하는 소외로서 표현했던 사회주의에 대한 인텔리겐챠의 태도는 근본적인 방식으로 사회세력의 균형이 이동하게 될 객관적인 정치적 변화의 결과로서 결정적으로 바뀔수 있으며 바뀔수 밖에 없다. 아들러의 주장들 중에서, 인텔리겐챠는 그들이 부르주아지 계급들에 물질적으로 의존하는 한, 직접적으로 혹은 무조건적으로가 아니라 부르주아지 계급들을 통해서 단지 불명료하게만 자본주의적 착취의 유지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만큼까지는 진실이다. 집산주의의 <strong>즉각적인</strong> 승리가 가능한 것으로 보여질 이유가 주어진다면, 만약 집산주의가 인텔리겐챠들 앞에 다른, 동떨어진, 그리고 친숙하지 않은 계급의 이상으로서가 아니라 가까운 실체적인 현실로서 떠오른다면,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것이 가장 덜 중요한 것은 아닌데, 만약 부르주아지와의 정치적 결별이 별도로 검소한 물질과 윤리적 결과를 감수한 개별 두뇌 노동자들을 위협하지 않는다면, 인텔리겐챠는 집산주의 쪽으로 넘어갈 수도 있을 것이다. 유럽의 인텔리겐챠들을 위한 이러한 조건들은 오로지 새로운 사회계급의 정치적 지배에 의해서만, 어느 정도까지는 이러한 지배를 위한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투쟁의 기간에 의해서만 성립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 대중들로부터의 유럽 인텔리겐챠의 소외가 무엇이었건 간에, 그리고 이러한 소외는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발칸 국가들과 같은 특히 보다 젊은 자본주의 국가들에서는 더욱 증가할 것인데, 위대한 사회 재건의 시대에 인텔리겐챠는 아마도 또 다른 중간계급보다는 새로운 사회를 지키는 세력 쪽으로 넘어갈 것이다. 사회적 노동의 문화적 부문들과의 직접적인 연계, 이론적 일반화의 능력, 사고의 유연성과 기동성, 간단히 말해서 인텔리겐챠의 <strong>지적인 능력</strong>과 관련하여, 상업 소부르주아지, 산업 소부르주아지, 그리고 농민과 구별되는 인텐리겐챠의 사회적 특질들로 인해 인텔리겐챠는 커다란 역할을 할 것이다. 전체 사회기구의 새로운 세력으로의 이전이라는 돌이킬 수 없는 사실에 직면하여, 유럽의 인텔리겐챠들은 조성된 조건들이 자신들을 심연으로 떨어뜨리지는 않을 것이며, 반대로 기술적, 조직적, 그리고 과학적 힘의 응용을 위한 무한한 가능성을 그들 앞에 펼쳐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새로운 정권이 거대한 기술적, 사회적, 그리고 정치적 어려움들을 극복해야만 할 첫번째, 가장 결정적인 시기에서 조차 자신들의 대오로부터 이러한 힘들을 전면으로 내세울 수 있을 것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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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만약 실제 사회기구의 장악이 유럽 프롤레타리아트 당으로의 인텔리겐챠의 <strong>사전</strong> 유입에 의존한다면, 집산주의의 전망들은 참으로 불행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위에서 보여주기 위하여 애썼듯이, 부르주아지 정권의 틀 내에서 사회민주당으로의 인텔리겐챠의 유입은 막스 아들러의 모든 기대와는 반대로,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가능성이 없어지기 때문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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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끝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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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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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 기관인 'Wiener Arbeitraeitung'의 편집인 - 번역</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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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 시기에, 사회민주당은 1차 세계대전 동안과 이후에 배신의 길을 택했던 자들을 의미하는 것없이 사회주의 정치운동에 대하여 언급한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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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독일사회민주당 신문</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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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뮌헨에서 발행되었던 풍자 신문 - 번역</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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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오스트리아 법학자 - 번역</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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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라트비아-독일게 경제학자 칼 발로드[Karl Ballod]의 필명 – 번역</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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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이 태도는 독일 사회민주당의 태도였으며, 물론 혁명적 관점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것이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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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중에 있는 소련
독소조약과 소련의 성격
독소조약의 체결 이후의 소련을 노동자 국가로 간주하는 것이 가능한가? 소비에트 국가의 미래가 다시 또 다시 우리 사이에서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우리의 앞에 있는 역사상 최초의 노동자 국가에 대한 시도이기에 이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과거 어느 때에도, 어떤 다른 곳에서도 이 현상에 대한 분석이 가능했던 적이 없다. 소련의 사회적 성격에 관한 문제에서, 우리가 과거에 말해왔듯이 역사적 사실을 강령적 규범으로 대체하는 것으로부터 오류들이 흔하게 발생한다. 구체적인 사실은 규범으로부터 벗어난다. 그러나 이것이 구체적 사실이 규범을 뒤집어엎는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으며, 오히려 그 반대의 측면을 재확인해왔다. 우리가 확인하고 설명하였던 최초의 노동자 국가의 퇴행은 노동자 국가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특정한 역사적 조건들 속에서 무엇이 될 수 있으며 무엇이 될 것인가에 관하여 더욱 사실적으로 보여주었을 뿐이다. 구체적 사실과 규범 사이의 모순은 우리에게 규범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혁명적 수단으로 그것을 위해 투쟁하도록 강제한다. 소련에서 다가오는 혁명의 강령은 한편으로 객관적인 역사적 사실로서의 소련에 대한 우리의 평가에 의해서,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자 국가라는 규범에 의해 결정된다. 우리는 "모든 것을 잃었다. 우리는 완전히 다시 시작해야만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우리는 주어진 국면에서 구제되고, 보존되며, 더욱 발전될 수 있는 노동자 국가의 그러한 요소들을 분명하게 지적한다.
요즘, 독소조약이 소비에트 국가에 대한 우리의 평가를 변경시킨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애쓰는 자들은 본질적으로 코민테른의 입장에 그들의 기준을 두고 있다 - 좀더 정확하게 말해서 코민테른의 과거의 입장에. 이 논리에 따르면, 노동자 국가의 역사적 임무는 제국주의적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이다. 민주주의자들의 파시즘의 이익을 위한 "배신"은 소련으로 하여금 노동자 국가로 간주될 수 없게 한다. 사실의 측면에서, 히틀러와의 조약에 서명하는 것은 소비에트 관료의 퇴행의 정도와 소비에트 관료의 코민테른을 포함하는 국제 노동계급에 대한 경멸의 정도를 측정하기 위한 또 다른 척도를 제공할 뿐이지, 소련에 대한 사회학적 평가에 대한 재평가를 위한 기초를 제공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차이들은 정치적인 것들인가 아니면 용어상의 것들인가?
소비에트 국가의 성격에 관한 문제를 추상적-사회학적 기반에서가 아니라 구체적-정치적 임무들의 기반에서 제기하는 것으로 시작해보자. 관료가 새로운 "계급"이며 소련의 현 정권이 계급 착취의 특수한 체제라는 것을 잠시동안 인정해 보도록 하자. 이들 정의들로부터 어떠한 새로운 정치적 결론들이 도출되는가? 오래 전에 제4 인터내셔널은 노동인민들의 혁명적 봉기로 관료를 타도할 필요성을 승인했다. 관료가 착취하는 "계급"이라고 주장하는 자들은 어떤 다른 것도 제안하지 않고 있으며, 제안할 수도 없다. 관료의 타도를 통해 성취해야할 목표는 관료를 소비에트들로부터 축출하는, 소비에트 지배의 재수립이다. 좌익 비평가들은 어떤 다른 것도 제안할 수 없으며, 제안하지도 않고 있다. 세계 혁명과 사회주의 사회의 건설에 협력하는 것이 쇄신된 소비에트들의 임무이다. 그러므로 관료의 타도는 국가 소유와 계획 경제의 보존을 전제한다. 이 속에 전체 문제의 핵심이 있다.
계획이 관료의 이해관계가 아니라 생산자들 스스로의 이해관계에 의해 결정될 때, 경제의 다양한 부문들 사이에서의 생산력의 분배와 일반적으로 계획의 전체 내용은 두 말할 필요도 없이 철저하게 바뀔 것이다. 그러나 기생적인 소수 독재자들을 타도하는 문제가 여전히 국유화된 (국가) 소유를 보존하는 것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미래의 혁명을 정치[혁명-해석자의 삽입]이라고 말했다. 우리를 비판하는 자들 중 특정인들은(Ciliga[실리가], Bruno[브루노] 등) 무엇이 오건 간에 미래의 혁명을 사회[혁명-해석자의 삽입]이라고 부른다. 이 정의를 인정해보도록 하자. 이것이 무엇을 본질적으로 바꾸는가? 이것은 우리가 일일이 열거해왔던 혁명의 과제들에 어떠한 것도 부가하지 않는다.
우리를 비판하는 자들은 우리가 오래 전에 확립했던 사실들을 전반적으로 수용한다. 그들은 관료와 노동인민들의 지위에 대한 평가나 혹은 국제 영역에서 크레믈린의 역할에 관한 평가에 절대적으로 어떠한 본질적인 것도 부가하지 않는다. 이 모든 측면에서 그들은 우리의 분석에 도전하는 것에 실패할 뿐만 아니라, 반대로 그들 스스로를 완벽하게 우리의 분석에 기초하고 있으며 심지어 그들 스스로를 우리의 분석에 완전히 한정하기조차 한다. 우리에 반대하여 그들이 제기하는 유일한 비난은 우리가 필요한 "결론들"을 도출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분석을 해보면, 이들 결론들은 순전하게 용어적인 성격의 것으로 판명된다. 우리를 비판하는 자들은 퇴행화된 노동자 국가를 노동자 국가로 부르기를 거부한다. 그들은 전체주의 관료를 지배계급으로 불러야 한다고 요구한다. 만약 우리가 그들에게 이들 용어상의 양보들을 허용하게 된다면, 그들 스스로가 그들의 순전히 용어상의 승리를 가지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는 까닭에, 우리가 우리를 비판하는 자들을 아주 어려운 입장에 놓이게 하는 꼴이 될 것이다.
다시 한번 우리 스스로를 점검해보자
그러므로 소련의 사회학적 성격의 문제와 관련하여 우리의 것과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는 동지들과 분리하는 것은 한낱 엽기적인 넌센스가 될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순전하게 이론적인 그리고 심지어 용어상의 차이들을 무시하는 것은 우리 쪽에서의 무분별함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진전의 과정에서 그것들이 피와 살을 획득하고 정반대의 정치적 결론들로 귀결될 것이기 때문이다. 거미줄과 쓰레기가 쌓이는 것을 결코 허용하지 않는 깔끔한 주부들처럼, 혁명적 정당은 명료함의 결여, 혼란과 애매함에 관용적일 수 없다. 우리 집은 반드시 깨끗하게 유지되어야만 한다!
실례를 들기 위해 테르미도르의 문제를 회상해보도록 하자. 오랫동안 우리는 소련에서 테르미도르는 단지 준비되고 있을 뿐이지 아직까지 완성되지는 않았다고 주장했다. 차후에, 보다 더 자세하고, 면밀한 성격의 분석을 하면서 우리는 테르미도르가 이미 오래 전에 발생되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우리 자신의 실수에 대한 이 공개적인 교정은 우리 대오 내에서 가장 작은 당혹스러움도 야기하지 않았다. 왜인가? 우리가 반동의 성장에 관하여 매일매일 공동으로 연구했던 것처럼, 우리 모두가 소련에서 진행되는 것들의 본질에 관하여 동일한 평가를 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그것은 역사적 유추에 보다 엄밀성을 부여하는 문제에 불과했지 그 이상 아무 것도 아니었다. "소련에 대한 방어"의 문제 - 이 문제는 곧 다룰 것이다. - 에 관한 차이를 들추어내고자 하는 일부 동지들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나는 오늘 여전히 우리 자신의 사상들에 보다 엄밀성을 부여함으로써 우리가 제4 인터내셔널 강령의 기초 위에서 의견일치를 유지할 수 있기를 원한다.
암적인 종양인가 아니면 새로운 기관인가?
우리를 비판하는 자들은 현재의 소비에트 관료는 자본주의 사회의 부르주아지나 혹은 노동 관료와 거의 닮지 않았으며, 파시스트 관료들보다 훨씬 더 한 정도로, 새롭고 훨씬 강력한 사회층을 의미한다고 수차 주장해왔다. 이것은 참으로 올바르며, 우리는 결코 이것에 눈을 감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가 소비에트 관료를 "계급"으로 간주한다면, 우리는 즉각적으로 이 계급이 과거에 우리에게 알려졌던 어떤 소유계급들과도 비슷하지 않다는 것을 선언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결과 우리의 성과는 보잘것없게 된다. 그들의 폐쇄적 성격, 그들의 전횡적 지배, 그리고 자신의 선조는 브라만의 신성한 입술에서 나온 반면, 인민 대중들은 브라만 신체의 구역질 나는 부분들로부터 생겨났다고 생각하는 지배층의 오만함을 강조하면서, 우리는 빈번하게 소비에트 관료를 계층[카스트]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런 정의조차도 엄격하게 과학적인 성격을 갖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것의 상대적인 우월성은, 누구도 모스크바의 독재자들을 흰두교의 브라만 계층을 가지고 정의하려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이 용어의 임시 변통적 성격이 모두에게 분명하다는 것에 있다. 과거의 사회학적 용어학은 진화(퇴행)의 과정에 있으며 안정정식 형식을 획득하지 못한 새로운 사회적 사건들을 위한 이름을 준비하지 않았으며 준비할 수도 없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그것의 역사적 특수성들에 대하여 주의를 게을리 하지 않으면서 소비에트 관료를 관료로 계속 부른다. 우리 의견으로는 당분간 이것으로 족할 것이다.
이 문제는, 순전히 용어상의 문제로서가 아니라, 과학적, 정치적으로 다음과 같이 제기된다: 관료는 사회기관의 일시적 성장을 의미하는가, 혹은 이 성장이 이미 역사적으로 불가항력적인 기관으로 이미 변형되었는가? 사회적 종양들은 역사적 환경들에 대한 "우연적인" (예를 들면, 일시적이고 예외적인) 곤란들의 산물일 수 있다. 사회적 기관(그리고 이것은 착취계급을 포함하는 모든 계급이다)은 생산 자체의 뿌리 깊은 내적 필요성들의 결과로서만 형성된다. 만약 우리가 이 문제에 답을 하지 않는다면, 모든 논쟁은 쓸모 없는 말장난으로 후퇴할 것이다.
관료의 초기의 퇴행
모든 지배계급을 위한 역사적 정당성은 그것이 이끌고 있는 착취의 체제가 새로운 단계로 생산력의 발전을 끌어올렸다는 것에 있었다. 한 점 의심도 없이, 소비에트 정권은 경제에 커다란 충격을 가했다. 그러나 이 충격의 근원은 생산수단의 국유화와 계획의 시작들이었지 결코 관료가 경제에 대한 통제권을 찬탈했다는 사실이 아니었다. 반대로, 제도로서의 관료주의는 국가의 기술적, 문화적 발전에 최악의 제동장치가 되었다. 소비에트 경제가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의 기술과 조직을 이식하고 학습하는데 20년의 세월이 걸렸다는 사실이 이것을 일정기간 덮어 가렸다. 더 좋은 쪽으로 건 더 나쁜 쪽으로 건 차용과 모방의 기간 동안 여전히 모든 자발적이고 창조적인 힘을 질식시키는 것과 같은 관료적인 기계적 활동을 위한 여지가 있었다. 그러나 경제가 더 성장할수록, 필요조건들이 더욱 복잡해졌고, 관료 정권의 장애물이 더욱 더 견딜 수 없는 것이 되었다. 그것들 사이의 지속적으로 강화되는 모순은 중단 없는 정치적 격동들로, 활동의 모든 측면에서 가장 현저하게 창조적인 인자들에 대한 구조적 제거로 이어진다. 그래서, 관료가 그 자신으로부터 "지배 계급"을 산출하는 것에 성공할 수 있기 전에, 관료는 발전의 요구들과의 화해 불가능한 모순을 겪게 되었다. 이것에 대한 설명은 관료는 스스로에게 특수하고 자기 자신이 없이는 불가능한 새로운 경제체제의 담지체가 아니고, 노동자 국가의 기생적 종양이라는 사실에서 정확하게 발견된다.
관료의 절대권력과 몰락의 조건들
소비에트 독재자들은 구 지배계급의 모든 악폐들을 가지고 있지만 그 지배계급들의 역사적 사명은 결여하고 있다. 소비에트 국가의 관료적 퇴행에서, 발견되는 것은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까지 현대 사회의 일반적인 법칙들이 아니라, 단지, 자본주의 환경 속에서의 후진적인 혁명적 국가라는 조건하에서 이들 법칙들의 특수하고 예외적이며 일시적인 굴절의 표현이다. 소비재의 결핍과 그것들을 획득하기 위한 총체적인 투쟁은 분배의 기능을 남용하는 경찰관을 만들어낸다. 외부로부터의 적대적인 압력이 그 경찰관에게 국가의 "수호자" 역할을 부여하고, 그에게 나라 전체에 걸친 권위를 부여하며, 그가 국가를 이중으로 약탈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
그러나 국가의 후진성과 제국주의적 환경이라는 관료의 절대권력을 위한 두 가지 조건들 모두는 일시적이고 이행적인 성격을 가지며 세계 혁명의 승리와 함께 사라질 수밖에 없다. 심지어 부르주아 경제주의자들 조차 계획 경제를 가지고 미국의 년 국민생산을 급속하게 2000억 달러로까지 끌어올려서 온 국민에게 단지 자신들의 일차적인 필요들에 대한 만족뿐만 아니라 실질적인 안락을 보장할 수 있다는 것을 계산했다. 다른 한편으로, 세계 혁명은 관료화의 추가적 요인으로서의 외부로부터의 위험을 제거할 것이다. 군비에 국민 소득의 엄청난 부분을 소모할 필요성의 제거가 대중들의 삶과 문화의 질을 더욱 더 높여줄 것이다. 이러한 조건들에서, 경찰 분배자에 대한 필요성 자체가 사라질 것이다. 거대한 협동조합으로서의 행정기관[소비에트-해석자의 첨언]이 빠르게 국가 권력을 대신할 것이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사이에 위치하는 새로운 지배계급을 위한 공간이나 새로운 착취 정권을 위한 공간은 없을 것이다.
만약 사회주의 혁명이 성취되지 않는다면 그럼 무엇인가?
자본주의의 붕괴는 구 지배계급의 붕괴와 같은, 궁극의 한계들에까지 이르렀다. 이 체제의 더 이상의 생존은 불가능하다. 생산력들이 계획에 조응하여 조직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누가 이 임무를 완수할 것인가? 프롤레타리아트인가 아니면 정치인들, 행정가들 그리고 기술자들과 같은 "공산당 위원들"이라는 새로운 계급인가? 특정 합리주의자들의 의견에 따르면, 프롤레타리아트에게 희망을 품을 수 없다는 것을 역사적 경험이 증명한다고 한다. 당시에 이미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물질적 전제조건이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프롤레타리아트는 지난 제국주의 전쟁을 막아낼 "능력이 없음을" 증명했다[고 한다-해석자의 첨가]. 전쟁 이후의 파시즘의 성공들이 다시 한번 자본주의 사회를 막다른 골목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도록 이끌 "능력이 없음"의 결과였다[고 한다.-해석자의 첨가]. 소비에트 국가의 관료화가 이번에는 프롤레타리아트 스스로가 민주주의적 기제를 통하여 사회를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이 없음"의 결과였다[고 한다. -해석자의 첨가]. 스페인 혁명은 파시즘과 스탈린주의 관료들에 의해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바로 눈앞에서 교살되었다. 결국, 이 체인의 마지막 연결 고리는 세계 프롤레타리아트 측에서의 완전한 무기력과 함께 아주 공개적으로 준비되고 있는 새로운 제국주의 전쟁이다. 만약 이 개념이 수용된다면, 즉 만약 프롤레타리아트가 사회주의 혁명을 성취할 수 있는 힘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면, 생산력의 국유화라는 긴급한 임무는 분명하게 다른 사람들에 의해 성취될 것이다. 누구에 의해서? 세계적 규모에서 새로운 지배계급으로서 쇠퇴한 부르주아지를 대체하게 될 새로운 관료에 의해서. 이것이 용어들에 관한 논쟁에 만족하지 않는 그러한 "좌익들"이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하는 방식이다.
당면한 전쟁과 현대사회의 운명
사태들의 진전에 의해서 이 문제가 현재 아주 구체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2차 세계 대전은 시작되었다. 이것이 사회는 더 이상 자본주의에 기초해서는 생존할 수 없다는 사실을 논쟁의 여지가 없게 입증한다. 그것으로 이것은 프롤레타리아트를 새롭고 아마도 결정적인 시험에 들게 한다.
만약 우리가 굳게 믿는 것처럼 이 전쟁이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을 고무한다면, 필연적으로 소련에서 관료의 타도와 1918년에서 보다 훨씬 높은 경제적, 문화적 기초에서 소비에트 민주주의의 부활로 귀결될 것임에 틀림없다. 이 경우, 스탈린 관료가 "계급"인가 혹은 노동자 국가의 암 덩어리였는가에 대한 문제가 자동적으로 해결될 것이다. 모든 사람들에게 세계 혁명의 발전의 과정에서 소비에트 관료는 단지 일시적인 퇴보였다는 것이 분명해 질 것이다.
그러나, 당면한 전쟁이 혁명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의 쇠퇴를 촉진할 것이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다른 길이 있게 된다: 독점자본주의 쇠퇴의 심화, 독점 자본주의의 국가화의 융합의 심화, 그리고 민주주의가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모든 곳에서 전체주의 정권에 의한 민주주의의 대체. 사회의 지도력을 자신의 손아귀에 취할 수 없는 프롤레타리아트의 무능력이 이러한 조건들 하에서 실제로 보나파르티스트 파시스트 관료로부터 새로운 착취 계급의 성장을 낳을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징조들에 따르면, 이것은 문명의 파멸의 전조가 되는 쇠퇴의 정권일 것이다.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선진자본주의 국가들의 프롤레타리아트가 권력을 유지할 수 없음이 드러나고, 소련에서처럼 권력을 특권화된 관료에게 넘겨야만 하는 경우에 비슷한 결과가 발생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관료적 퇴보의 이유가 국가의 후진성과 제국주의의 포위에서 기원하는 것이 아니라 지배계급이 될 수 없는 프롤레타리아트의 태생적 무능력에서 기원한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할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의 소련이 그것의 근본적인 특성에서 국제적 규모에서의 새로운 착취정권의 전조였다는 것을 되돌아보면서 입증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소비에트 국가의 명칭에 대한 용어상의 논쟁으로부터 상당히 멀리 벗어났다. 그러나 우리를 비판하는 자들이 항의하지 못하도록 해두자; 필요한 역사적 전망을 취함으로써, 하나의 사회적 통치의 다른 것으로의 대체와 같은 문제에 관하여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다. 그 종착지까지 가져간다면, 스탈린 정권이 부르주아지 사회로부터 사회주의 사회로의 이행의 과정에서의 증오스러운 퇴보이던가 혹은 스탈린 정권이 새로운 착취 사회의 첫 번째 국면이던가 라는 역사 속의 양자택일이 된다. 만약 두 번째 예측이 올바른 것으로 판명된다면, 당연히 관료는 새로운 착취계급이 될 것이다. 두 번째 전망이 아무리 부담스럽더라도, 만약 발전에 따라서, 세계의 프롤레타리아트가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수행할 수 없음이 실제로 증명된다면, 자본주의 사회의 국제적 모순들에 기초한 사회주의 강령이 유토피아로 종결되었다는 것을 단지 인정하는 것 이외에 다른 어떤 것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전체주의 관료 사회의 노예들의 이해관계를 방어하기 위한 새로운 "최소"강령이 요구된다는 것이 자명하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사회주의 혁명의 전망을 포기하도록 강요하는 논쟁의 여지가 없는 혹은 인상적이기라도 한 객관적 자료가 있는가? 이것이 문제가 되고있는 전부이다.
“관료적 집산주의”의 이론
히틀러가 권력을 장악한 직후, 독일 "좌익 공산주의자" 휴고 우르반스는 자본주의를 대신하여 "국가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역사적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는 이 정권의 첫 번째 예들로 이탈리아, 소련, 독일을 들었다. 그러나 우르반스는 그의 이론의 정치적 결론들을 도출하지는 않았다. 최근에 과거에 제4 인터내셔널에 들러붙었던 이탈리아 "좌익공산주의자" 브루노 알[Bruno R.]은 "관료적 집산주의"가 자본주의를 막 대체하려고 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새로운 관료는 계급이며 노동인민들에 대한 관료의 관계는 집합적 착취이고 프롤레타리아트들은 전체주의적 착취자들의 노예로 바뀐다.
브루노 알은 소련에서의 계획경제, 파시즘, 국가사회주의 그리고 루즈벨트의 "뉴딜"을 동일시한다. 이들 모든 정권들은 의심의 여지없이 최근의 분석에서 현대 경제의 집산적인 경향들에 의해 결정되는 공통의 특징들을 가지고 있다. 10월 혁명 전에 레닌조차 제국주의 자본주의의 주요한 특수성들을 다음과 같이 공식화했다: 생산력의 거대한 집중, 독점자본주의와 국가의 융합의 심화, 이 융합의결과로서의 벌거벗은 독재를 향한 계통적 경향. 중앙화와 집산화의 특징들은 혁명의 정치와 반혁명의 정치를 모두 결정한다; 그러나 이것은 혁명, 테르미도르, 파시즘 그리고 미국의 "개량주의"를 동일시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결코 의미하지 않는다. 브루노는 집산화의 경향이 노동계급의 정치적 쇠약의 결과 "관료적 집산주의"의 형태를 띤다는 사실에 집착해왔다. 현상 그 자체는 논쟁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어디에 그것의 한계가 있고, 무엇이 그것의 역사적 중요성인가? 우리가 이행기의 기형화, 사회적 과정에서의 다중 요소들의 불균등 발전의 결과로서 받아들이는 것을 부르노 알은 관료가 지배계급이 되는 독립적인 사회구조로 여긴다. 어쨌든 브루노 알은 용어상의 습자책 실습이라는 배타적 집단으로부터 주요한 역사적 일반화의 수준으로 이행하려고 애쓰고 있다는 장점은 가지고 있다. 이것이 그의 오류를 폭로하기 더 쉽게 해준다.
많은 극좌들처럼, 브루노 알은 스탈린주의를 본질적으로 파시즘으로 정의한다. 한편에서 소비에트 관료는 파시즘의 정치적 방책들을 수용했다; 다른 측면에서 아직까지 스스로를 국가 개입의 "부분적인" 방책들에 한정하고 있는 파시스트 관료가 경제의 완전한 국유화로 향하고 있으며 곧 거기에 도달할 것이다. 첫 번째 주장은 절대적으로 옳다. 그러나 파시스트의 "반자본주의"가 부르주아지에 대한 몰수에 도달 할 수 있다는 브루노의 주장은 완전하게 잘못되었다. 국가개입과 국유화의 "부분적인" 방책들은 개량이 혁명과 다른 것처럼 계획화된 국가 경제와 실제로 다르다. 무쏠리니와 히틀러는 단지 자산 소유자들의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있으며 자본주의 경제를 "통제"하고 있을 뿐이며, 더욱이 무엇보다도 전쟁의 목적을 위하여 그렇게 하고 있다. 크레믈린의 소수 독재는 다시 한번 뭔가 다른 무엇인가 이다: 크레믈린의 소수 독재는 러시아의 노동계급이 역사상 소유관계의 가장 위대한 전복을 성취했다는 사실 때문에만 오직 하나의 기관으로서 경제를 관리할 기회를 가진다. 이 차이를 잊어서는 절대 안 된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정반대의 양극의 스탈린주의와 파시즘이 언젠가 하나에, 동일한 형태의 착취사회(브루노 알의 용어에 따르면 "관료적 집산주의")에 도달 할 것이라는 것을 인정한다고 해도, 여전히 이것이 인류를 막다른 골목으로부터 구원할 수 없을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의 위기는 사적 소유의 반동적 지배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그것만큼이나 국가적 소유의 반동적 역할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비록 여러 파시스트 정부들이 국내에서 계획 경제의 체제를 수립하는데 성공한다고 해도, 긴 안목에서 보면 어떤 계획에 의해서도 예견되지 못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불가피한 혁명적 운동들은 제쳐두고 세계 지배를 위한 전체주의 국가들간의 투쟁이 계속될 것이며, 심지어 격화될 것이다. 전쟁이 계획경제의 과실을 집어삼킬 것이며, 문명의 기초들을 파괴할 것이다. 이것은 사실인데, 버트란트 러셀은 일부 승리한 국가가 전쟁의 결과 하나의 전체주의적 바이스[vise/강제, 혹은 힘-해석자의 주]에 온 세상을 통일하게 될지 모른다. 그러나 매우 미심쩍지만, 그런 가정이 현실화된다고 하더라도, 군사적 "통일"은 바르세이유 조약만큼이나 불안정할 것이다. 민족단위의 봉기와 그것의 평정이 문명의 무덤이 될 새로운 세계 전쟁에서 극에 달할 것이다. 우리의 주관적인 희망들이 아니라 객관적인 현실이 인류가 [문명의 몰락으로부터-해석자의 첨가]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세계 사회주의 혁명이라는 것을 웅변하고 있다. 다른 길이 있다면 그것은 야만주의로의 퇴보이다.
프롤레타리아트와 프롤레타리아트의 지도부
우리는 곧 계급과 그 지도부 사이의 관계의 문제에 관한 별도의 글에 진력할 것이다. 이곳에서 우리는 가장 필수적인 것들에 우리 스스로를 한정할 것이다. 정치가 경제의 단순한 그리고 직접적인 "반영"이라고 생각하는 천박한 "맑스주의자들"만이 지도부는 계급을 직접적이고 단순하게 반영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실제로, 피억압 계급 위에 올라섰던 지도부는 불가피하게 지배계급의 억압에 굴복한다. 예를 들면, 미국 노동조합들의 지도부는 그들이 부르주아지를 "반영"하는 것만큼 프롤레타리아트를 "반영"하지는 않는다. 부르주아지의 억압을 견디어 낼 수 있는 진정으로 혁명적인 지도부의 선출과 교육은 엄청나게 힘든 임무이다. 특정 역사적 조건하에서 가장 후진국인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트가 가장 멀리 내다보며 용맹스러운 지도부를 세웠다는 사실에서 역사적 과정의 변증법은 스스로를 가장 훌륭하게 표현했다. 반대로, 가장 오래된 자본주의 문화의 국가인 영국의 프롤레타리아트는 오늘날에조차 가장 아둔하고 비굴한 지도부를 가지고 있다.
1914년 7월에 공개적인 성격을 띠었던 자본주의 사회의 위기는 전쟁의 바로 첫 번째 날로부터 프롤레타리아트 지도부에 강력한 위기를 만들어냈다. 그 당시로부터 25년이 경과하는 동안,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의 프롤레타리아트는 아직 우리 시대의 임무들의 수준으로까지 상승할 수 있는 지도부를 창출하지 못했다. 그러나 러시아의 경험이 그러한 지도부가 창출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물론 이것이 그 지도부가 퇴행에 대하여 면역력을 갖출 것이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문제는 다음의 것들에 있다: 객관적인 역사적 필연성이 결국에는 노동계급의 전위의 의식에 스스로 길을 놓을 것인가?: 즉, 이 전쟁과 전쟁이 일으킬 수밖에 없는 그러한 깊은 충격들의 과정에서, 프롤레타리아트를 권력의 장악으로 이끌 능력이 있는 진정으로 혁명적인 지도부가 형성될 것인가?
제4 인터내셔널은 강령의 문구들을 통해서 뿐만 아니라 자신의 존재라는 바로 그 사실을 통해서 이 문제에 긍정적으로 답해왔다. 모든 다양한 형태의 환멸적이고 두려움에 떠는 사이비 맑스주의 대변자들은 지도부의 파산이 단지 자신의 혁명적 임무를 수행할 수 없는 프롤레타리아트의 무능력을 "반영할" 뿐이라고 억측하면서 반대로 나아갔다. 우리의 반대자 모두가 이러한 생각을 분명하게 표현한 것은 아니지만 그들 모두가 - 스탈린주의자들과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극좌, 중앙주의자들, 무정부주의자들이 - 패배의 책임을 자신들로부터 프롤레타리아트의 어깨로 전가한다. 그들 중 누구도 정확하게 어떤 조건들에서 프롤레타리아트가 사회주의적 전복을 성취할 수 있는지에 대하여 지적하지 않는다.
만약 우리가 패배들의 원인이 프롤레타리아트 자체의 사회적 능력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사실로 인정한다면, 현대 사회의 상황이 희망이 없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쇠퇴하고 있는 자본주의라는 상황하에서, 프롤레타리아트는 수적으로 뿐만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성장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프롤레타리아트가 혁명적 임무들의 수준으로까지 언젠가는 상승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근거가 없다. 피비린내 나는 자본주의적 혼란으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키고자 하는 계통적이고 근본적이며 극복할 수 없는 노동인민들의 충동과 수명을 다한 노동 지도부의 반동적이고 애국주의적이며 전적으로 부르주아적인 성격 사이의 깊은 적대감을 진심으로 명확하게 해 온 사람에게 위의 주장은 완전히 다른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이들 두 가지 화해 불가능한 주장들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
전체주의 독재 - 심각한 위기의 상태 그리고 불안정한 정권
10월 혁명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래 전에 예측되었다. 사태들이 이 예견을 확증했다. 퇴행이 예견을 논박하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맑스주의자들은 러시아의 고립된 노동자 국가가 영구히 스스로를 유지할 수 있다고는 결코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는 소비에트 국가의 퇴행보다는 파괴를 예상했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우리는 이들 두 가지 가능성들 사이를 분명하게 구별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두 가지 가능성들은 상호간에 전혀 모순적이지 않다. 퇴행은 특정 단계에서 필연적으로 붕괴로 귀결될 것임에 틀림없다.
스탈린주의적인 것이건, 파시스트적인 것이건 전체주의 정권은 그것의 본질상 단지 일시적인 이행적 정권이 될 수 있을 뿐이다. 역사 속에서, 일반적으로 벌거벗은[노골적인] 독재는 특히 심각한 사회적 위기의 산물이며 증상이었으며, 안정적인 정권은 전혀 아니었다. 심각한 위기는 어떤 사회의 영구적인 상태일 수 없다. 전체주의 국가는 특정 기간 동안 사회적 모순을 억누를 수 있지만, 영구히 그렇게 할 수는 없다. 소련에서의 어처구니없는 숙청들은 소비에트 사회가 근본적으로 관료의 배설을 향하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에 대한 가장 설득력 있는 증언들이다.
브루노 알이 오직 지배계급만이 그렇게 대규모로 그러한 방책들을 사용할 수 있다는 자신의 의견에 입각하여 스탈린주의의 숙청들에서 정확하게 관료가 지배계급이 되었다는 사실의 증거를 발견한다는 것은 놀라운 것이다. 그러나 하나의 "계급"이 아니었던 짜르주의 역시 상당히 큰 규모의 숙청이라는 방책들을, 게다가 정확히 자신의 종말이 임박하였던 시기에 사용했다는 것을 잊고 있다. 다가오는 죽음의 단말마의 전조를 보여주는 숙청이라는 무차별적이고 터무니없는 사기로 스탈린은 관료가 스스로를 안정적인 지배계급으로 이행시킬 수 없다는 것 외에 다른 아무 것도 입증하지 않는다. 만약 우리가 불명예스러운 붕괴를 불과 수년 혹은 수개월을 앞둔 보나파르티스트 독재에 새로운 지배계급이라는 명칭을 붙인다면, 우리가 얼간이 같은 입장에 서지 않게 되는 것일까? 우리 의견으로는 이 문제를 정확하게 제기하는 것만이 동지들을 용어상의 실험이나 경솔한 일반화들을 피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세계 혁명에 대한 방침과 소련의 소생
25년의 세월은 세계 프롤레타리아트 전위의 혁명적 재무장을 위해서는 너무 짧은 기간이었으며, 고립된 후진국에서 소비에트 체제를 고스란히 보존하기에는 너무도 긴 기간이었음을 보여주었다. 인류는 이제 새로운 제국주의 전쟁으로 그 값을 치르고 있다; 그러나 우리 시대의 기본적인 임무가 해결되지 않았다는 간단한 이유 때문에, 그 임무는 변하지 않았다. 세계 프롤레타리아트 부대들의 하나가 그 임무가 어떻게 해결되어야만 하는가를 실천으로 증명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지난 25년의 거대한 자산과 미래를 위한 무한한 가치를 지니는 담보가 된다.
제2차 제국주의 전쟁은 해결되지 못한 임무를 보다 높은 역사적 국면에서 제기한다. 제국주의 전쟁은 현존하는 정권들의 안정성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대체하기 위한 프롤레타리아트의 능력을 새로이 시험한다. 의심의 여지없이, 이 시험의 결과들은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의 시대로서의 현대 사회에 대한 우리의 평가를 위하여 결정적인 중요성을 가질 것이다. 만약 모든 가능성들과는 반대로, 임박한 전쟁의 과정 동안 혹은 그 직후에 10월 혁명이 어떠한 선진 국가들에서도 그것의 계속성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그리고 만약, 반대로, 프롤레타리아트가 모든 곳에서 모든 전선들에서 격퇴된다면, 우리는 의심의 여지없이 현 시대와 그것의 추진력에 대한 우리의 개념을 수정하는 문제를 제기해야만 할 것이다. 이 경우에, 이것은 소련이나 스탈린주의 갱에 관한 비망록을 획 던져버리는 것이 아니라 수세기는 아닐지라도 다음 수십 년 동안 세계의 역사적 전망을 재평가하는 문제가 될 것이다: 우리는 세계 혁명과 사회주의 사회의 시대에 들어섰는가 아니면 반대로 전체주의 관료의 쇠퇴하는 사회의 시대에 들어섰는가?
첫째, 소련 정권을 이미 최종적으로 수립되어 온 것으로 선언함으로써, 그리고 소련 정권을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사회 사이의 시간적으로 길게 늘어진 이행기 국가라고 선언함으로써, 휴고 우르반스와 브루노 알같은 도식주의자들은 이중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그러나 만약 우리 시대 전체의 경험과 현재의 새로운 전쟁의 결과로 국제 프롤레타리아트가 사회의 주인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준다면, 사회주의 혁명을 위해 지금보다 더 좋은 조건들을 예상할 수 없기 때문에 이것은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모든 희망이 무너지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 절대적으로 자명하다; 어떻든 현재 누구도 그렇게 예견하지 않다. 혹은 아무도 그렇게 성격규정하지 못하고 있다. 맑스주의자들은 프롤레타리아트가 자신의 혁명적 가능성을 상실했으며 즉각적으로 다가오는 시대에서 헤게모니에 대한 모든 열망을 포기해야만 한다는 결론을 도출할 조금의 권리도 가지고 있지 않다(만약 환멸과 피로가 "권리"로 간주되지 않는다면). 그것이 경제적 문화적 체제의 가장 심원한 변화들의 문제에서 역사의 잣대로 25년은 인간의 삶에서 한 시간에도 미치지 못한다. 한 시간이나 하루 동안에 있었던 실패들의 경험들 때문에 자신의 이전의 모든 삶 속에서의 경험과 분석에 기초하여 자신을 위해 세운 목표를 포기하는 사람이 무엇에 쓸모가 있는가? 1907년에서 1917년까지의 러시아의 최악의 반동의 세월 동안 우리는 1905년에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해 드러났던 혁명적 가능성들을 우리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세계 반동의 세월 동안, 우리는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가 1917년에 보여주었던 혁명적 가능성들로부터 계속 나아가야만 한다. 제4 인터내셔널은 우연히 사회주의 혁명의 세계정당으로 스스로를 부르지 않았다. 우리의 길은 바뀌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세계 혁명을 향하여, 그리고 바로 그 힘으로 노동자 국가로서의 소련의 소생을 향하여 우리의 진로를 잡는다.
대외 정책은 국내 정책의 연속이다
우리는 소련에서 무엇을 방어하는가? 소련이 자본주의 국가들과 닮아 있는 부분이 아니라 정확하게 그것들과 다른 부분[을 우리는 방어한다.-해석자의 첨가]. 독일에서도 역시 우리는 지배 관료에 맞서는 봉기를 주창하지만, 오로지 즉각적으로 자본주의 소유를 타도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다. 소련에서 관료의 타도는 국가 소유의 보존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오직 이러한 의미에서만 우리는 소련에 대한 방어를 주장한다.
소비에트 노동자들이 관료라는 기생세력에 대항해서뿐만 아니라, 예를 들면, 집단농장[kolkhoz-소련의 집단농장]의 귀족 세력에게 있는 사적 소유를 향하는 경향들에 대항해서도 역시 국가소유를 방어해야 한다는 것을 의심하는 자는 우리 중에 한 명도 없다. 그러나 결국, 대외정책은 국내 정책의 연속이다. 만약 국내 정책에서 우리가 10월 혁명의 성과들에 대한 방어를 관료에 맞서는 화해불가능한 투쟁과 관련시킨다면, 우리는 대외정책에서도 역시 똑같은 것을 해야만 한다. 모든 측면에서 "관료적 집산주의"가 이미 승리했다는 사실로부터 앞으로 나아가면서, 브루노 알은 분명하게 히틀러(그리고 체임벌레인?)가 스탈린만큼이나 국가소유를 보존하는 것에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아무도 국가 소유를 위협하지 않는 게 확실하다고 주장한다. 슬프게도, 브루노 알의 확신에 찬 주장들은 바보 같은 것들이다. 승리할 경우 히틀러는 십중팔구는 독일 자본가들로부터 몰수했던 모든 재산을 그들에게 되돌려주는 것을 요구하는 것부터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나서 그는 소련의 희생의 대가로 영국, 프랑스, 그리고 벨기에와의 합의에 도달하기 위하여 그들을 위한 비슷한 소유의 회복을 보장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그는 독일 군사 기구의 이해관계에 입각하여 독일을 소련에 있는 가장 중요한 국유기업들에 대한 계약자로 만들 것이다. 바로 지금 히틀러는 스탈린의 동맹이며 동지이다; 그러나 만약 스탈린의 도움으로 히틀러가 서부전선에서 승리하게 된다면, 그는 승리 직후 자신의 총을 소련을 향하여 돌릴 것이다. 결과적으로 체임벌린도 또한 비슷한 조건들에서 히틀러와 전혀 다르지 않게 행동할 것이다.
소련에 대한 방어와 계급투쟁
소련에 대한 방어의 문제에서의 오류들은 "방어"의 방책들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서 가장 흔하게 비롯된다. 소련에 대한 방어가 크레믈린 관료와의 친교나 그들의 정책들에 대한 수용, 혹은 소련의 동맹들의 정치와의 화해를 의미하는 것이 전혀 아니다. 다른 모든 것들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문제에서 우리는 온전하게 국제 계급투쟁의 기반에 서 있다.
프랑스의 소규모 정기간행물 무엇을 할 것인가[Que Faire]는, "트로츠키주의자들"이 프랑스와 영국과 관련하여 패배를 주장하는 자들이기 때문에, 그들은 소련에 대해서도 역시 패배를 주장하는 자들이라고 최근 말했다. 즉, 만약 당신들이 소련을 방어하고자 한다면, 당신들은 소련의 제국주의 동맹국들과 관련하여 패배를 주장하는 것을 멈추어야만 한다[고 말했다-해석자의 첨가]. Que Faire는 "민주주의자들"이 소련의 동맹국들일 것이라고 계산했다. 이제 이들 현명한 자들이 무엇을 말할 것인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들의 바로 그 방책이 썩었기 때문에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는 거의 중요하지 않다. 소련이 현재 가맹하고 있거나 아니면 조만간 가맹하게 될 제국주의 진영과 관련하여 패배를 주장하는 것을 포기하는 것은 전쟁 상대국 진영의 노동자들을 그들의 정부 편으로 밀어 부치는 것이다; 이것은 패배주의 노선 일반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회주의 혁명에 대한 거부와 동일한 의미를 가지는 제국주의 전쟁 상황에서 패배주의에 대한 폐기는 - "소련에 대한 방어"의 이름으로 혁명을 포기하는 것 - 소련에 대하여 최종적인 해체와 사망을 선고하게 될 것이다.
과거의 "파시즘에 맞서는 투쟁"처럼, 코민테른에 의해 해석된 "소련에 대한 방어"는 독립적인 계급 정치에 대한 폐기에 기초하고있다. 프롤레타리아트는 - 다양한 환경들에서 다양한 이유 때문에, 그러나 항상 그리고 변함없이 - 하나의 부르주아지 진영에 맞서는 다른 하나의 부르주아지 진영의 보조세력으로 변형된다. 이것과는 구별되게, 우리 동지들 중 일부는 스탈린과 그의 동맹국들의 도구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소련에 대한 방어를 포기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으로 그들은 단지 그들의 "방어"에 대한 이해가 기회주의자들의 이해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것을 증명할 뿐이다; 그들은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자적인 정치에 관하여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가 몇몇 제국주의 정부들에 맞서서 다른 일부 제국주의 정부들을 지원함으로써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메트로폴리탄 중심지들에서뿐만 아니라 식민지들에서도 국제 계급 투쟁의 방책으로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것처럼, 실제에 있어서 우리는 식민지들을 방어하듯이 소련을 방어한다.
우리는 정권을 장악하고 있는 당이 아니다; 우리는 자본주의 국가들에서뿐만 아니라 소련에서도 화해를 거부하는 반대당이다. 우리는 부르주아 정부라는 매개를 통해서도 아니며, 소련 정권을 통해서는 더더욱 아니라 선동을 통한 대중들에 대한 교육을 통해서만, 그리고 노동자들에게 그들이 무엇을 방어해야 하는지, 그들이 무엇을 타도해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을 통해서만 우리의 정책들, 그 중에서도 "소련에 대한 방어"를 현실화한다. 그러한 "방어"는 즉각적인 기적적 결과들을 낳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더더욱 기적을 행하는 자들인 척하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 우리는 혁명적 소수파이다. 우리의 작업은 우리가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노동자들이 사태들을 정확하게 평가하고, 기습을 허용하지 않으면서,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임무들을 혁명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총체적 계급성을 준비할 수 있도록 향해져야만 한다.
우리에게 소련에 대한 방어는 세계 혁명의 준비와 일치한다. 오직 혁명의 이해관계와 상충하지 않는 그러한 방책들만이 허용된다. 소련에 대한 방어의 세계 사회주의 혁명에 대한 관계는 전략적 임무에 대한 전술적 임무의 관계와 같다. 전술은 전략적 목표에 종속되며, 어떠한 경우에도 전술이 전략적 목표에 상충될 수 없다.
점령지에 대한 문제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중에도, 적군 점령지에 대한 문제는 여전히 불분명하다. 해외의 급전들은 양 당사자들의 무성한 거짓말들 때문에 서로 모순된다; 그러나 현장에서의 실제 관계들은 여전히 대단히 불안정한 게 확실하다. 대부분의 점령지들은 의심의 여지없이 소련의 일부가 될 것이다. 어떤 형식으로?
히틀러와의 조약에 따라서 모스크바 정부가 점령 지역들에 있는 사적 소유의 권리들을 건드리지 않고 내버려두며, 파시스트 양식을 그대로 이어서 "통제하는 것"에 스스로를 제한한다고 잠시만 생각해보자. 그러한 양보는 근본적인 원칙적 성격을 가지며 소비에트 정권의 역사에서 새로운 장을 위한 출발점이 될 것이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소비에트 국가의 성격에 대한 우리 쪽에서의 새로운 평가의 출발점이 될 것이다.
그러나 소련의 일부가 될 예정으로 있는 영토들에서, 모스크바 정부는 대지주에 대한 몰수와 생산수단의 계급화[원문은 Stratification으로 되어 있으나 문맥상 국유화(statification)의 오기로 보임. 따라서 국유화로 해석하는 것이 올바른 것으로 판단됨-해석자의 의견]를 성취하게 될 가능성이 더 크다. 이러한 전화가 가장 가능성이 있는데 이것은 관료가 사회주의 강령에 충실하기 때문이 아니라, 관료가 권력과 그것에 수반하는 특권들을 점령지들에 있는 구 지배계급들과 공유하고자 하지도 않으며 그렇게 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이 시점에서 하나의 유추가 글자그대로 저절로 나온다. 첫 번째 보나파르트는 군사 독재를 통해서 혁명을 정지시켰다. 그러나, 프랑스 군대가 폴란드를 침공했을 때, 나폴레옹은 "농노제는 철폐되었다"라는 법령에 서명했다. 이러한 조처는 농민에 대한 나폴레옹의 동정에 의한 것도 아니었으며 민주주의적 원칙들에 의한 것도 아니었고, 보나파르티스트 독재가 봉건주의가 아니라 부르주아 생산관계에 기초하고 있었던 것에서 기인했다. 스탈린의 보나파르티스트 독재가 스스로를 사적소유가 아니라 국가소유에 기초하기 있기 때문에, 사건의 성격상 적군에 의한 폴란드 침공은 점령지의 정권이 소련의 정권에 일치될 수 있도록 사적 자본가 소유의 폐지로 귀결될 것이다.
그 성격에서 혁명적인 이 조처는 -"착취자에 대한 착취" - 이 경우에 군사적-관료적 방식으로 성취된다. 새로운 영토들에 있는 대중들 쪽에서의 독립적인 실천에 대한 호소는 -비록 극도로 조심스럽게 표현되더라도 그러한 호소가 없이는 새로운 정권을 세우는 것이 불가능하다 - 자각한 혁명적 대중들에 대한 관료의 우위를 보장하기 위한 잔혹한 경찰 조처들에 의해 의심의 여지없이 곧바로 억압될 것이다. 이것이 사물의 한 측면이다. 그러나 다른 측면이 있다. 히틀러와의 군사적 동맹을 통하여 폴란드를 점령할 가능성을 얻기 위하여, 오랫동안 크레클린은 소련과 세계의 대중들을 속였고 계속해서 속이고 있으며, 그래서 자기 자신의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대오의 완전한 혼란을 야기했다. 우리에게 있어서 첫 번째의 정치적 기준은 아무리 그것이 자체로 중요하다고 해도, 이런 혹은 저런 지역에서의 소유관계의 변형이 아니라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의식과 조직에서의 변화와 그들의 과거의 성과들을 방어하고 새로운 것들을 성취할 가능성을 높여내는 것이다. 이와 같은 그리고 유일한 결정적인 입장으로부터 전체적으로 보자면, 모스크바의 정치는 자신의 반동적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세계 혁명으로 가는 길에서 주요한 장애물로 남아있다.
그러나 크레믈린과 코민테른에 관한 우리의 일반적인 평가가 점령지들에서의 소유의 국유화가 그것 자체로 진보적인 조처라는 특수한 사실을 바꾸지는 않는다. 우리는 이것을 공개적으로 인정해야만 한다. 만약 곧 히틀러가 동부 폴란드에서 "법과 질서"의 회복을 위하여 동쪽으로 자신의 군대를 보낸다면, 선진노동자들은 보나파르티스트 소비에트 관료에 의해 수립된 이들 새로운 소유형태들을 히틀러에 맞서서 방어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방향을 바꾸지 않는다
우리가 말했듯이 생산수단의 국유화는 진보적인 조처이다. 그러나 그것의 진보성은 상대적이다; 그것의 특수한 비중은 다른 모든 요소들의 총합에 달려있다. 그래서 우리는 제일 먼저 "사회주의" 조처들이라는 외투를 걸친 관료적 독재와 기생주의에 의해 지배되는 영토의 확장이 크레믈린의 신망을 증대시킬 수 있으며, 관료적 책략에 의한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의 대체의 가능성과 관련하여 환상을 야기할 수 있다는 것 등을 입증해야만 한다. 이 해악은 폴란드에서의 스탈린주의 개혁들의 진보적인 내용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소련 내에서뿐만 아니라 점령된 지역들에서의 국유화된 소유가 진정으로 진보, 즉 사회주의적 발전의 기초가 되기 위해서는 모스크바의 관료를 타도하는 것이 필요하다. 따라서 우리의 강령은 모든 타당성을 가지고 있다. 사태들이 우리를 기습하지는 않았다. 단지 그 사태들을 올바로 해석하는 것만이 필요하다. 소련의 성격 속에, 그리고 소련의 국제적 지위에 포함되어 있는 날카로운 모순들을 분명하게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노동자 국가"이다 "노동자 국가가 아니다"라는) 용어상의 교묘한 속임수의 도움을 받아서는 이러한 모순들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것이 불가능하다. 우리는 사실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만 한다. 우리는 현실의 관계들과 모순들을 우리의 출발점으로 취함으로써 우리의 정책을 세워만 한다.
우리는 크레믈린에 어떠한 역사적 임무도 부여하지 않는다. 우리는 크레믈린에 의한 새로운 영토의 점령을 반대했고 여전히 반대한다. 우리는 소비에트 우크라이나의 독립을 지지하며, 만약 그들이 원한다면 소비에트 벨로루시의 독립을 지지한다. 동시에 적군에 의해 점령된 지구에서, 제4 인터내셔널의 투사들은 지주와 자본가들에 대한 몰수에서, 농민에 대한 토지의 분배에서, 소비에트와 노동자 위원회를 건설하는 등의 활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해야만 한다. 그렇게 하는 한편으로 그들은 반드시 그들의 정치적 독립성을 보존해야만 하며, 소비에트들과 공장위원회에 대한 선거 동안에 관료로부터 소비에트들과 공장위원회의 완전한 독립을 위하여 투쟁해야만 하며, 그리고 혁명적 선전을 크레믈린과 그들의 지역 대리인들에 대하여 불신하고 있는 사람들 속에서 수행해야만 한다.
그러나 히틀러가 자신의 무기들을 동쪽으로 돌려서 적군에 의해 점령된 영토들을 침략한다고 가정해보자. 이러한 상황에서, 제4 인터내셔널의 투사들은 크레믈린 독재에 대한 그들의 태도에서의 어떠한 변화도 없이 히틀러에 대한 군사적 저항을 목전의 가장 긴급한 임무로서 가장 앞에 제출할 것이다. 노동자들은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우리는 히틀러가 스탈린을 타도하는 것을 허용할 수 없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임무이다." 히틀러에 대항하여 군사적으로 투쟁하는 동안, 혁명적 노동자들은 적군의 일반 병사 대오와 가능한 가장 가까이 동지적인 관계를 맺으려고 노력할 것이다. 손에 쥔 무기로 히틀러를 타격하는 한편, 동시에 볼셰비키 레닌주의자들은 다음의 그리고 아마도 매우 가까운 단계에서의 스탈린 타도를 준비하면서 스탈린에 대항한 혁명적 선전을 수행할 것이다.
이런 종류의 "소련에 대한 방어"는 마치 하늘이 땅과 다른 것처럼 "조국을 위하여, 스탈린을 위하여!"라는 슬로건 하에서 현재 수행되고 있는 공식적인 방어와 태생적으로 다를 것이다. 우리의 소련에 대한 방어는 "사회주의를 위하여! 세계 혁명을 위하여! 스탈린 타도를 위하여!"라는 슬로건 하에서 수행된다. 이 두 종류의 "소련에 대한 방어"가 대중들의 의식에서 혼란스럽게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구체적인 정세에 조응하는 슬로건들을 어떻게 정식화하는가에 관하여 분명하게 그리고 자세하게 알고 있을 필요가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단지 우리가 무엇을 방어하고 있는가, 단지 우리가 어떻게 그것을 방어하고 있는가, 누구에 맞서서 우리는 그것을 방어하고 있는가에 대하여 명확하게 입증할 필요가 있다. 오직 우리 스스로가 우리의 임무들에 대한 분명한 개념을 가지고 있지 않는 경우에만, 우리의 슬로건은 대중들 사이에서 혼란을 야기할 것이다.
결론들
우리가 소련과 관련하여 우리의 원칙적 입장을 바꿔야 할 어떠한 이유도 현재 존재하지 않는다.
전쟁은 다양한 정치적인 진전을 가속화한다. 전쟁이 소련의 혁명적 소생의 과정을 촉진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전쟁은 소련의 최종적인 퇴행의 과정 또한 가속화할지도 모른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가 제때에 그것들을 설명할 수 있도록 전쟁이 소련의 내부 삶에 가져다주는 이들 변화들을 성실하고 편견 없이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점령된 영토들에서 우리의 임무들은 기본적으로 소련 내부에서의 그것과 동일하다; 그러나 사태들이 그것들을 고도로 날카로운 형태로 제기하기 때문에, 그만큼 더 소련과 관련된 우리의 일반적 임무들을 명료하게 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준다.
우리는 반드시 노동자들이 우리가 소련에서 무엇을 방어하고 있는지(국가소유와 계획경제), 그리고 누구에 대항하여 우리가 가열찬 투쟁을 수행하고 있는지(기생적 관료와 그들의 코민테른)를 분명하게 볼 수 있는 방식으로 우리의 슬로건들을 정식화해야만 한다. 우리에게는 소비에트 관료를 타도하는 것에 대한 문제가 소련에서 생산수단에서의 국가 소유를 보존하는 것에 대한 문제에 종속되며, 소련에서 생산수단에서의 국가 소유를 보존하는 문제가 세계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의 문제에 종속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한순간이라도 잊어서는 안 된다.
1939년 9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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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
레닌 이후의 제3 인터내셔널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강령 초안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
서문
앞으로 여러 해 동안 코민테른의 전체 활동을 결정하게 될 기초적인 문서인 강령 초안이 5차 대회 이후 4년만에 열릴 예정인 대회의 소집 수주일 전에야 출판되었다. 첫 번째 초안이 이미 5차 대회 이전에 출판되었다는 사실에 대한 언급으로 때늦은 이번 출판이 정당화될 수 없는데, 이것은 그때 이후 수년이 흘려버렸기 때문이다. 두 번째 초안은 무엇보다도 그것의 전체 구조에서 다르며, 지난 수년 동안의 발전들을 총괄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사전에 신문에서의 어떠한 진중하고 과학적 비판이나 혹은 코민테른[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모든 정당들에서의 폭넓은 토론 없이, 명백하게 조급하고 심지어 부주의한 작업을 드러내고 있는 이번 초안을 6차 대회에서 채택한다는 것은 더 없이 분별없고 경솔한 짓일 것이다.
초안을 받고 이 편지를 보내는 사이 며칠 동안, 우리는 강령에서 반드시 다루어져야 하는 몇 가지 가장 중요한 문제들에 관하여만 생각할 수 있었을 뿐이다.
시간이 부족한 관계로, 우리는 지금 당장 초미의 문제는 아니지만 미래에는 예외적으로 중요해질 수 있는 초안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몇 가지 가장 중요한 문제들에 관하여 깊이 생각하지 못하고 완전히 내버려둘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그것들을 비판하는 것이 현재의 작업이 집중하고 있는 초안의 다른 부분들을 비판하는 것보다 덜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또한 우리는 반드시 필요한 정보를 획득하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새로운 초안에 대한 작업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추가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강령의 첫 번째 초안조차 구할 수 없었으며, 초안을 다루는데 있어서, 그리고 2-3가지 다른 경우들에서 우리의 기억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언급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모든 인용들은 원문으로부터의 것들이며 신중하게 검사된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Ⅰ. 국제 혁명의 강령인가 한 국가에서의 사회주의의 강령인가?
6차 대회의 아젠다에 관한 가장 중요한 문제는 강령의 채택이다. 채택된 강령의 본성이 오랫동안 인터내셔널의 특색을 결정하고 확정시킬 것이다. 강령의 중요성은 강령이 일반적인 이론적 개념들을 정식화하는 방식에 그다지 많이 있지 않다. 강령의 중요성은 지난 기간의 세계 경제적 그리고 정치적 경험들의 평가를 수행하는 문제, 특히 많은 사태들과 실수들이 있었던 지난 5년 동안의 혁명적 투쟁의 경험들에 대한 평가를 수행하는 문제에 훨씬 더 많은 정도로 있다. 앞으로 몇 년 동안,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운명은 글자 그대로의 의미로 이들 사태들, 실수들, 그리고 논쟁들이 강령에서 어떻게 해석되고 판단되는가에 달려 있다.
1. 강령의 일반적 구조
제국주의 시대, 즉 금융자본의 헤게모니하에 있는 세계 경제와 세계 정치의 시대인 우리 시대에는 어떤 하나의 공산당도 유일하게 혹은 주로 자기 자신의 나라의 발전 조건들과 경향들로부터 나아가는 것으로는 자신의 강령을 수립할 수 없다. 이것은 또한 소련의 국경 내부에서 권력을 휘두르고 있는 당에게도 완전하게 타당하다. 1914년 8월 4일, 단일 국가적 강령들의 영원한 죽음의 조종이 울렸다.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당은 스스로를 자본주의의 최고 발전과 붕괴의 시대인 현재의 시대의 성격에 조응하는 국제적 강령에만 오로지 기초할 수 있었다. 국제 공산주의 강령은 단일 국가적 강령들의 총합이나 공통 부분들의 합성물이 결코 아니다. 국제 강령은 각각 별개의 부분들의 적대적인 상호 의존성을 가지는 모든 연관들과 모순들 속에서 하나의 전체로서 취해진 세계 경제와 세계 정치 체제의 상태와 경향들에 대한 분석으로부터 직접적으로 나아가야만 한다. 현재의 시대에는 과거보다 훨씬 더 많은 정도로 프롤레타리아트의 민족적 방침은 오직 국제적 방침으로부터만 나와야하고 그렇게 될 수 있을 뿐이지, 그 역은 아니다. 바로 여기에 공산주의적 국제주의와 모든 형태의 민족주의적 사회주의의 기본적이고 일차적인 차이가 있다.
이러한 고려들에 기초하여, 우리는 올해 1월에 "우리는 코민테른 강령 초안 작업을 시작해야만 한다(부하린의 강령은 코민테른의 민족주의적 부문의 나쁜 강령이며 세계 공산주의 당의 강령이 아니다.)"라고 썼다.) 프라우다, 1928년 1월 15일
우리는 미국에 관한 문제가 세계 정치의 가장 엄밀한 의미에서 유럽 정치의 문제로서 가장 활발하게 제기되었을 때인 1923-24년이래 이러한 고려들을 계속해서 주장해왔다.
새로운 초안을 추천하면서, 프라우다는 공산주의 강령은 "그것의 중심적인 원리의 실체에서뿐만 아니라 그것의 구조의 국제주의적 성격에서도 국제사회민주주의의 강령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프라우다 1928년 5월 29일
고 썼다.
이 다소 애매한 정식화에는 우리가 위에서 언급했던 그리고 과거에는 완강하게 거부되었던 사상이 명백하게 표현되어 있다. 사람들은 단지 심지어 진중한 의견 교환도 유발하지 않았던 그리고 그 문제에 관하여는 의견교환을 위한 어떠한 기초도 제공하지 않았던 부하린이 발표했던 첫 번째 초안과의 결별을 환영할 수 있을 뿐이다. 첫 번째 초안은 하나의 관념상의 국가의 사회주의를 향한 발전에 관한 매우 도식적인 설명을 제공했던 반면, 개별 부분들의 운명을 결정하기 위한 기초로서 하나의 전체로서의 세계 경제를 다루고자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리고 우리가 보게 될 것처럼 일관성도 없고 성공적이지도 않았다.
각기 다른 발전 수준에 있는 나라들과 대륙들을 상호 의존적이고 적대적인 하나의 체제로 연결하면서, 그들의 발전의 다양한 단계들을 고르게 하면서, 동시에 즉각적으로 그들 사이의 차이를 늘리면서, 그리고 무자비하게 한 나라를 다른 한 나라에 대치시키면서, 세계 경제는 개별 국가들과 대륙들의 경제적 삶을 지배하는 강력한 현실이 되었다. 이 기본적인 사실 하나만으로도 국제 공산당에게 최고의 현실성을 부여한다. 초안이 그 서문에서 아주 정확하게 언급하고 있듯이, 전체로서의 세계 경제를 사적 소유의 기초에서 달성 가능한 최고의 발전 단계로 이끌면서 제국주의는 "세계 경제의 생산력 성장과 민족 국가적 국경들 사이의 모순을 극단의 긴장으로까지 악화시킨다."
지난 제국주의 전쟁 중에 처음으로 인류에 생생하게 드러났던 이 명제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는, 우리는 세계 정치와 혁명적 투쟁의 주요한 문제들의 해결을 향하여 일보도 내딛을 수 없다.
유일하게 올바른 입장인 이것을 완전히 반대 성격을 가지는 경향들과 화해시키기 위한 노력이 초안을 그것의 근본적인 측면에서 문제에 접근하는 새로운 방식의 원칙적인 중요성을 완전히 무효화하는 가장 비참한 모순의 영역으로 바꾸는 것으로 귀결되었다는 사실만 아니라면, 새로운 초안에 있는 강령의 축 그 자체의 근본적인 변화를 환영할 수 있을 뿐이다.
2. 미국과 유럽
다행스럽게도 폐기가 되었던 첫 번째 초안을 성격 짓기 위해서는 우리가 기억하는 한 미국이라는 이름이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첫 번째 초안에서는 시대 성격 그 자체 때문에 그것들의 추상적이고 이론적인 면에서뿐만 아니라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측면에서도 검토되어야만 하는 제국주의 시대의 본질적인 문제들이 자본주의적 국가 "일반"이라는 생명력 없는 도식으로 용해되었다. 그러나, 새로운 초안은 이제 - 분명히 이것은 중대한 일보 전진인데 - "세계 경제의 중심의 미국으로의 이동"과 "'달러 공화국'의 세계 착취자로의 이행"에 관하여, 그리고 마침내 북미와 유럽 자본주의, 일차적으로 영국 자본주의 사이의 경쟁(초안은 막연하게 "분쟁"이라고 말하고 있다)에 관하여 말한다. 세계 정세의 이들 기초적인 사실들과 요소들에 대한 명확하고 적확한 정의를 담고 있지 않는 강령은 국제 혁명정당의 강령과 어떠한 공통점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은 오늘날 이미 아주 분명하다.
불행하게도, 우리가 방금 언급했던 현대 시대의 세계 발전의 가장 중요한 사실들과 경향들이 초안의 내용에서는 단지 이름만 언급되고 있을 뿐이며, 마치 초안의 전체 구조와 어떠한 내부적 연관도 가지지 않는, 그리고 전망이나 전략에 관한 어떠한 결론으로도 귀결되지 않는 것처럼 이론적으로 결론으로부터 출발하여 구체적인 사실로 나아가는 방식으로 초안에 이식되어 있을 뿐이다.
1923년 독일 공산당의 굴복과 독일 프롤레타리아트의 패배 이후 유럽에서 미국의 역할은 전혀 평가되고 있지 않은 채 있었다. 사회민주주의의 "소생"뿐만 아니라, 유럽의 "안정화", "정상화", 그리고 "화해"의 기간이 유럽에 대한 미국의 개입의 첫 번째 발걸음과의 긴밀한 물질적, 이데올로기적 관련 속에서 진행되었다는 것에 관하여 설명하려는 시도가 전혀 없었다.
게다가, 불가피하게 더욱 더 전개될 미국의 팽창과 유럽 시장 자체를 포함하는 유럽 자본 시장의 축소가 과거의 모든 격변과는 비교되지 않을 최고의 군사적, 경제적, 그리고 혁명적 격동을 수반한다는 것이 지적되지 않았다.
다시, 미국의 더욱 냉혹한 압력이 세계 경제에서 자본주의 유럽을 항구적으로 더욱 제한된 몫으로 떨어뜨릴 것이라는 것이 분명하게 제시되지 않았다. 물론 이것은 유럽에서의 국가간 관계의 완화가 아니라 반대로 군사적 분쟁의 격렬한 격발에 수반되는 국가간 관계의 거대한 격화를 의미하는데, 이것은 계급들뿐만 아니라 국가들도 풍부하고 증가하는 몫을 위해서 보다는 불충분하고 감소하는 몫을 두고 더욱 격렬하게 투쟁하기 때문이다.
초안은 유럽에서의 국가간 적대라는 초기의 혼란이 변함없이 더욱 중앙집중화된 북미 공화국에 대한 어떤 종류의 중대하고 성공적인 저항을 제공하는 것도 가망 없게 한다는 것을 설명하지 않는다. 유럽 합중국을 통한 유럽의 혼란의 해결이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의 첫 번째 임무들 중의 하나라는 것을 설명하지 않는다.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은 (정확하게 국경의 존재 때문에) 미국에서 보다 유럽에서 훨씬 더 가까이 와 있으며, 따라서 필시 북미 부르주아지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해야만 할 것이다.
다른 한편, 세계 전체의 화약고, 즉 모든 동양과 서양 사이의 적대, 구 유럽에서의 계급투쟁, 식민지 대중들의 봉기들, 그리고 모든 전쟁과 혁명들을 미국 사회구조의 기초 속에 포함하도록 강제하는 것이 미국의 국제적인 힘과 이것으로부터 발생하는 저항할 수 없는 미국의 팽창이라는 사실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그리고 이 사실은 똑같은 세계 문제의 국면만큼 중요한 것이다. 한편으로, 이것은 미국자본주의를 변함없이 지구 전체 모든 구석에서의 "질서" 유지에 더 큰 관심을 가지는 현대의 근본적인 반혁명적 세력으로 변형시켰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이것은 이미 지배적이고 여전히 팽창하고 있는 이 세계 제국주의 열강에서 거대한 혁명적 폭발을 위한 기초를 준비한다. 세계 관계들의 논리는 이 폭발의 시간이 유럽에서의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의 폭발보다 그렇게 많이 뒤쳐지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미국과 유럽 사이의 상호관계에 관한 우리의 변증법적 설명은 유럽의 모순들의 존재에 대한 평화주의적 거부로, 카우츠키의 초제국주의 이론의 수용으로 우리를 비난하는 등 우리를 가장 다각적인 비난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여기에서는 기껏해야 실제 사태의 전개와 그것들에 대한 우리의 입장에 대한 완전한 무지에서 비롯된 이러한 "비난들"에 관하여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문제에 대한 우리의 정식화에 반대하는 그들의 작은 투쟁에 (우연하게도 강령 초안의 저자들에 의해서) 허비된 것보다 이 가장 중요한 세계 문제를 혼란스럽게 하고 망쳐버리는데 더 많은 노력을 허비하기는 힘들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우리의 정식화는 사태의 전개에 의하여 완전히 확증되었다.
심지어 최근에는 미국에서 닥쳐오고 있는 상업과 산업 위기를 언급함으로써 미국의 헤게모니의 중요성을 최소화하기 위한 (서류상의) 노력들이 공산주의의 지도적 기관들에서 이루어져왔다. 우리는 여기서 미국 위기의 존속기간과 위기의 가능한 심각성에 관한 특별한 문제에 대한 검토에 들어갈 수 없다. 이것은 강령의 문제가 아니라 상황의 문제이다. 우리의 의견으로는 위기의 불가피성에 의심의 여지가 없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리고 현재 미국 자본주의의 세계적 규모를 고려할 때, 우리는 바로 다음의 위기가 극도로 심각할 것이며 격렬할 것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으로부터 북미의 헤게모니가 제한되거나 혹은 약화될 것이라고 결론 내리려는 시도는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 그러한 결론은 최대의 전략적 오류들로 귀결될 수 있을 뿐이다.
사태는 정확하게 반대가 될 것이다. 위기의 기간에 미국의 헤게모니는 호황 때보다도 더 완벽하게, 더 공공연하게, 그리고 더 가차없이 작용할 것이다. 미국은 희생이 아시아, 캐나다, 남미, 호주, 혹은 유럽 자신에게서 벌어지건 상관없이, 혹은 희생이 평화적으로 벌어지건 아니면 전쟁을 통해서 벌어지건 상관없이 일차적으로 유럽을 희생시켜 자신의 어려움과 병폐를 극복하고 이것들로부터 벗어나려고 할 것이다.
만약 첫 번째 미국 개입의 기간이 유럽에서의 안정화와 평화의 효과를 거두었었고, 이것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상당한 정도로 유효하며, (특히 프롤레타리아트의 새로운 패배들의 경우에) 일시적으로 되살아나고 더 강령해지기도 하겠지만, 특히 미국 자신의 경제적 어려움과 위기의 시기에, 미국의 일반적 정책 노선은 유럽에서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최악의 격동을 야기할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분명하게 이해해야만 한다.
이것으로부터 우리는 향후 10년 동안에도 지난 10년에 버금가는 혁명적 정세가 있을 것이라는 중요한 결론을 도출한다. 이것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발전의 주요 동기들의 움직임에 낚아채이지 않도록 그것들을 올바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이유이다. 지난 10년 동안에 혁명적 정세의 주요한 원천이 제국주의 전쟁의 직접적인 결과들에 있었다면, 전후 두 번째 10년 동안에는 혁명적 격변의 가장 중요한 원천은 유럽과 미국의 상호관계일 것이다. 미국에서의 주요한 위기가 새로운 전쟁들과 혁명들을 위한 경보를 울릴 것이다. 반복하건대, 혁명적 정세의 부족은 없을 것이다. 전체 문제는 국제 프롤레타리아트의 당, 코민테른의 성숙성과 투쟁력, 그리고 코민테른의 전략적 입장과 전술적 방책들의 올바름에 달려있다.
코민테른의 강령초안에서는 이러한 경향의 사상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세계 경제 중심의 미국으로의 이동" 처럼 굉장히 중요한 사실을 가벼운 잡지기사와 같은 언급으로 둘러대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공간의 부족으로 이것을 정당화하는 것은 완전히 불가능한데, 만약 근본적인 문제가 아니라면 무엇 때문에 강령 속에 공간이 허용되어야 하는가? 이외에, 만약 강령에서 제외된다면 강령의 적어도 3분의 1을 줄일 수 있을 만큼의 일반적인 문구의 느슨함과 수많은 반복들은 말할 필요도 없고, 강령에서 너무나 많은 공간이 2차적이고 3차적인 중요성을 가지는 문제들에 투여되었다는 것이 부언 되어야 한다.
3. 유럽 소비에트 합중국 슬로건
다소 시간을 끌었던 투쟁 이후 1923년에 코민테른에 의해 채택되었던 슬로건인 유럽 소비에트 합중국 슬로건의 새로운 강령 초안으로부터의 누락은 정당화될 수 없다. 혹은 아마도 초안의 저자들이 이 문제에 관하여 정확하게 1915년 레닌의 입장으로 "되돌아가"고 싶어하는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그들은 우선 반드시 그것을 올바르게 이해해야만 한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레닌은 유럽 합중국 슬로건에 관하여 전쟁 초기에는 주저했다. 슬로건은 원래 사회민주주의(당시 당의 중앙기관)의 테제들에 포함되었고 나중에 레닌에 의해 거부되었다. 이것은 그 자체로 여기에서 관련된 문제는 슬로건의 일반적인 수용에 관한 원칙상의 문제가 아니라 단지 슬로건에 대한 전술적 평가, 즉 주어진 정세의 관점으로부터 슬로건의 긍정적이고 부정적인 측면들을 평가하는 문제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레닌이 자본주의적인 유럽 합중국이 현실화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부인했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이것은 또한 내가 유럽에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가능성 있는 국가 형태로서 단독으로 유럽합중국 슬로건을 제기했을 때 문제에 대한 나의 접근이었다.
당시 나는 "자본주의 정권들 사이의 합의를 통하여 위로부터 성취된 유럽의 다소간 완전한 경제적 통합은 유토피아이다. 이런 방식을 따라서는 일들이 부분적 화해와 어정쩡한 정도로까지 밖에 진행되지 못한다. 그러나 생산자와 소비자 양쪽 모두에게 그리고 전체적으로 문화의 발달에 엄청난 이점을 발생시킬 유럽의 경제적 통합은 제국주의적 보호주의와 제국주의의 군사주의 기관에 대항하는 투쟁에서 유럽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임무가 되고 있다.") 트로츠키, 평화강령, 저작집 3권 part 1, 85쪽, 러시아어 판
고 당시 썼다.
여기에 더해서 "유럽 합중국은 무엇보다도 유럽에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형식 -유일하게 생각할 수 있는 형식- 을 의미한다.") 같은 책 92쪽
고 썼다.
그러나 당시 레닌은 문제에 대한 이런 정식화에서조차 분명한 위험을 인식했다. 단 한 개의 국가에서도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경험이 전무한 가운데, 그리고 당시 사회민주주의 좌익에게서조차 이 문제에 관한 이론적 명확성이 부재한 가운데, 유럽 합중국의 슬로건은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이 동시에 혹은 적어도 유럽 대륙 전체에서 시작되어야만 한다는 사상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었다. 바로 이러한 위험에 대하여 레닌은 경고를 발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점에 관하여 레닌과 나 사이에 어떠한 미미한 차이도 없었다. 당시 나는 다음과 같이 썼다. "어떤 나라도 자신의 투쟁에서 다른 나라들을 '기다려'서는 안 된다. 이러한 기본적인 사상을 반복하는 것은 국제적인 실천의 부재에 대한 영합이 국제적인 공동의 실천을 대체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하여 유용하며 필요하다. 다른 나라들을 기다릴 것 없이, 우리는 우리의 선도적인 실천이 다른 나라들에서의 투쟁에 대한 자극을 제공할 것이라는 완전한 확신을 가지고 민족국가적 단위에서의 투쟁을 시작하고 계속해야만 한다.") 같은 책 89-90쪽
그리고 나서 스탈린이 코민테른 중앙집행위원회 7차 대회간 회의에서 "트로츠키주의"의 가장 사악한 표현으로서, 즉 혁명의 내적인 힘에 대한 "신념의 부재"와 아무 것도 없는 것으로부터의 원조에 대한 희망이라고 주장했던 나의 표현들이 나온다. "그리고 만약 이것[다른 나라들에서의 혁명의 발전-트로츠키 자신의 주]이 발생하지 않는다면, 예를 들면 혁명 러시아가 보수 유럽에 직면하여 버티어낼 수 있다는 것, 혹은 사회주의 독일이 자본주의 세계에서 고립된 채 남아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할 가망이 없을 것이다.") 같은 책 90쪽
주장에 따르면 이 "근본적인 문제"에 관하여 천착하고 있었다는 7차 대회간회의에 의하여 "트로츠키주의"에 반대하여 선언되었던 "레닌주의와는 어떠한 공통점도 없는" 입장이라는 비난은 이 인용과 다른 2-3개의 비슷한 인용들에 기초하고 있다. 그러므로 잠깐 멈추고 레닌 자신으로부터 들어보도록 해보자.
1918년 3월 7일 레닌은 브레스트-리토프스크 평화에 관하여 "이것은 우리에게 교훈인데, 그것은 독일에서의 혁명이 없이는 우리는 사라질 것이라는 것이 절대적인 사실이기 때문이다.") 레닌, 저작집 15권 132쪽, 러시아어[구]판
일주일 후에 그는 "세계 제국주의는 승리하여 전진하는 사회주의 혁명과 나란히 공존할 수 없다.") 같은 책 175쪽
고 말했다.
몇 주가 지난 4월 23일에 레닌은 "우리의 후진성이 우리를 앞으로 나서게 했으며, 만약 우리가 다른 나라들의 봉기에 나선 노동자들의 강력한 지원을 만날 때까지 버티지 못한다면 우리는 사라질 것이다.") 같은 책 187쪽
[트로츠키의 강조]
그러나 아마도 이것은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위기의 특별한 영향하에서 언급된 것은 아닌가? 그렇지 않다! 1919년 3월에 레닌은 다시 "우리는 단순히 하나의 국가에서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국가들의 체제에서 살고 있으며, 그 시간의 길이와 무관하게 제국주의 국가들과 소비에트 공화국의 나란한 병존은 생각할 수 없다. 종국에는 둘 중에 하나가 승리할 것임에 틀림없다.") 저작집 16권 102쪽
일년이 지난 후인 1920년 4월 7일에 레닌은 "만약 국제적인 규모에서 생각한다면 자본주의는 심지어 현재에조차 군사적으로뿐만 아니라 경제적 의미에서도 소비에트 권력보다 더 강력하다. 우리는 이러한 근본적인 고려로부터 진행해야 하며, 이것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고 되풀이했다.) 저작집 17권 102쪽
1920년 11월 27일에 양보의 문제를 다루면서 레닌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이제 전쟁의 장을 지나서 평화의 장으로 넘어왔으며, 전쟁이 다시 올 것이라는 것을 결코 잊지 않고 있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나란히 존재하는 한, 우리는 평화롭게 살아갈 수 없다 - 둘 중의 하나가 종국에는 승자가 될 것이다. 부고를 알리는 노래가 세계 자본주의의 죽음에 대하여 혹은 소비에트 공화국의 죽음에 대하여 울릴 것이다. 현재 우리는 전쟁 중에 잠깐의 휴식을 취하고 있을 뿐이다.") 같은 책 398쪽
그런데 아마도 소비에트 공화국의 계속적인 존재가 레닌으로 하여금 "그의 실수를 인정'하도록 강제하고, 그의 10월 혁명의 "내부적 힘에 대한 신념의 부재"에 관하여 비난하고 있는 것인가?
1921년 7월 코민테른 3차 대회에서 레닌은 러시아 공산당의 전술에 관한 테제에서 "비록 극단적으로 불확실하고 불안정함에도 불구하고, 물론 장기간 동안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 공화국이 자본주의의 포위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해주는 균형이 창출되었다."고 선언했다.
다시 1921년 7월 5일에 레닌은 대회의 회의들 중 하나에서 노골적으로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국제적인 세계 혁명으로부터의 원조가 없다면,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의 승리는 불가능하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명백했다. 혁명 이후뿐만 아니라 심지어 혁명 전에도, 우리는 다른 후진국들과 보다 선진화된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즉각적으로 혹은 적어도 매우 빠른 시일 안에 혁명이 역시 발발할 것이며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확신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떠한 환경 하에서도 어떠한 대가를 치러서라도 소비에트 체제를 보존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국제 혁명을 위해서 실천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저작집 18권 part 1 321쪽
그 단순함에서 뛰어나고 국제주의 영감으로 충만한 이들 문구들이 원조보다 못한 아류들의 현재의 그럴듯한 날조에서는 얼마나 많이 제거되었는가!
어쨌든, 우리는 이들 모든 레닌의 언급들이 러시아에서 다가오는 혁명 혹은 다가오는 사회주의 독일이 만약 혼자서 "자본주의 세계 속에서 고립된다면" 버틸 수 없을 것이라던 1915년 당시 나의 신념과 어떤 점에서 다른가?라고 물어볼 권리가 있다. 시간적으로 나 자신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레닌의 예측들에서 단정되었던 것과 다를 뿐이지, 근저에 있는 사상은 심지어 오늘날, 아마도 주어진 순간에 과거 어느 때 보다도 더 완벽한 위력을 가지고 있다. 7차 코민테른 중앙집행위원회 대회간 회의가 부적절하고 파렴치한 연설에 기초하여 했던 것처럼 이 사상을 비난하기는커녕, 이것은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강령에 포함되어야 한다.
유럽 소비에트 합중국의 슬로건을 방어하면서, 1915년 우리는 다른 국가들과 대륙들에서의 역사적 발전의 불균등성은 그 자체로 불균등하기 때문에, 불균등 발전의 법칙은 그 자체로 이 슬로건에 반대되는 주장이 아니라고 지적했다. 유럽 국가들은 서로 불균등하게 발전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검토되고 있는 역사 시대 동안에는, 이들 국가들 중에 어느 하나도 미국이 유럽을 앞서 나갔던 것처럼 다른 국가들과의 관계 속에서 더 멀리 앞서갈 수 없는 운명이라는 것은 절대적인 역사적 확실성을 가지고 고수될 수 있다. 아메리카 쪽에는 한 규모의 불균등성이 있고 유럽에는 또 다른 불균등성이 있는 것이다. 지리적으로 그리고 역사적으로, 조건들이 그 긴밀한 결합으로부터 유럽 국가들을 떼어놓을 방도가 없는 긴밀한 구조적인 결합을 미리 예정했다. 유럽의 현대 부르주아지 정부들은 하나의 카트에 묶여 있는 살인자들과 같다. 이미 이야기되었던 것처럼, 유럽에서의 혁명은 결국 미국에게도 결정적으로 중요할 것이다. 그러나 직접적으로, 역사의 즉각적인 경로에서, 독일에서의 혁명은 미국보다 프랑스에게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의 중요성을 가질 것이다. 이 역사적으로 발전된 관계로부터 정확하게 유럽 소비에트 연합이라는 슬로건의 정치적 생명력이 도출된다. 우리는 그것의 상대적인 생명력을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이 연합이 소련이라는 거대한 가교를 지나 아시아로 확대될 것이며, 이후 세계 사회주의 공화국들의 연합으로 귀결될 것이라는 것이 사리에 맞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제국주의 시대라는 두 번째 시대 혹은 그 다음의 거대한 장을 이룰 것이며 우리가 그것에 보다 가까이 다가가게 될 때, 우리는 그것을 위해 조응하는 정식들을 또한 발견할 것이다.
유럽 합중국의 문제를 둘러싼 1915년 레닌과 우리의 차이가 제한적이고 전술적이며 그 본질에 있어서 일시적인 성격이었다는 것은 더 많은 인용들을 가지고 어렵지 않게 증명될 수 있지만, 사태의 이후 경로가 이것을 가장 잘 증명해준다. 1923년,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은 논란의 여지가 있는 슬로건을 채택했다. 지금 초안의 저자들이 주장하고자 하는 것처럼, 유럽 합중국의 슬로건이 1915년에는 원칙적인 측면에서 받아들여질 수 없는 슬로건이라는 것이 사실이라면,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은 아마도 그것을 채택할 수 없었을 것이다. 불균등 발전의 법칙은 당시에는 유효성이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위에서 개괄했던 바와 같이 문제들에 대한 전체 정식화는 하나의 전체로서 고려되는 혁명적 과정의 동학으로부터 도출된다. 국제 혁명은 그것의 모든 구체성에서, 그리고 즉 그것의 발생 순서에서 예측하는 것이 불가능한 상호연관된 과정으로서 고려되지만, 이것은 그것의 일반적인 역사적 개형에서는 절대적으로 명확하다. 일반적인 역사적 개형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올바른 정치적 방침은 완전히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의 국가에서 발생하고 있고 심지어 완성되고 있는 사회주의적 발전으로부터 나아간다면 문제는 크게 달라진다. 오늘날 우리는 하나의 국가에서 사회주의를 완전하게 건설하는 것이 가능하고 그 국가의 자본주의 세계와의 상호관계가 세계 부르주아지를 "중립화"하는 것에 기초하여 성립될 수 있다는 "이론"(스탈린)을 접한다. 만약 이 본질적으로 민족-개량주의적이고 혁명적 국제주의의 관점이 아닌 관점이 채택된다면, 유럽 합중국 슬로건의 필요성은 사라지거나 혹은 적어도 줄어든다. 그러나 우리의 관점에서는 이 슬로건은 중요하고 반드시 필요한데, 그것은 이 슬로건 속에 고립적인 사회주의적 발전이라는 사상에 대한 논박이 있기 때문이다. 국제적 연대라는 추상적인 동기들로부터가 아니라 국제혁명으로부터의 시기 적절한 원조가 없다면 우리는 버틸 수 없을 것이라고 레닌이 말 그대로 수백 번을 정식화했던 그 절대적으로 필요한 동기들 때문에 무기를 들고 혁명을 이웃 국가들로 확산시키고 그곳에서의 봉기를 지원하는 것이 모든 유럽 국가의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소련의 프롤레타리아트에게는 보다 더욱, 가장 필수적으로 필요한 것일 것이다. 소비에트 합중국 슬로건은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의 동학에 조응하는데, 이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은 모든 국가들에서 동시에 발발하지는 않지만, 한 국가에서 다른 국가로 확산되며 유럽에서 특히 가장 강력한 적들에 맞서 방어하기 위한 관점과 경제 건설에 대한 관점 모두를 가지고 있는 이들 국가들 사이의 가장 긴밀한 결합을 필요로 한다.
분명히, 유럽합중국 슬로건의 채택을 위한 최근의 자극을 제공했던 루르 위기의 시기에 뒤이어, 이 슬로건이 유럽 공산당들을 위한 선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았고, 즉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고 주장하면서 반대를 제기하려고 시도할 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것은 노동자 국가, 소비에트 등과 같은, 즉 혁명적 시기 이전 시기의 모든 슬로건들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진실이다. 1923년 말 이후, 5차 대회의 잘못된 정치적 평가에도 불구하고 유럽대륙에서 혁명적 운동이 쇠퇴했다는 사실이 이것을 설명해 준다. 그러나 이것이 단지 그 시기 동안에 받았던 인상들에 전체적으로 혹은 부분적으로 강령을 기초하는 것이 치명적인 이유이다. 모든 편견들에도 불구하고 혁명적 폭발이 독일에서 예견되었고, 유럽에서의 국가간 상호관계의 문제가 극도로 중요한 성격을 가졌던 때인 1923년에 정확하게 소비에트 유럽 합중국 슬로건이 채택되었던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다. 유럽과 참으로 세계 위기의 모든 새로운 악화가 주요 정치 문제들을 전면으로 이동시키기에, 그리고 유럽 합중국의 슬로건에 매력적인 힘을 부여하기에 충분하게 뚜렷하다. 따라서 이 슬로건을 거부하지는 않으면서 침묵 속에 강령에서 빼먹는 것, 즉 "비상용으로" 쓰기 위하여 어딘가에 보관해두는 것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원칙의 문제들이 관련되어 있을 때에는 유보조항을 두는 정책은 무익하다.
4. 국제주의의 기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초안은 그 구성에서 세계 경제의 관점과 그것의 내부적 경향들로부터 나아가려고 하는데, 이것은 인정할만한 시도이다. 우리와 민족주의적 애국주의 사회민주주의와의 사이의 원칙에서의 기초적인 차이가 여기에 있다고 프라우다가 말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올바르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세계정당의 강령은 오로지 자신의 개별 부분들을 지배하고 있는 세계경제가 출발점으로 고려될 때에만 만들어질 수 있다. 그러나 정확하게 세계 발전의 주요한 경향들을 분석함에 있어서, 초안은 위에서 이미 지적된바와 같이 초안의 가치를 평가절하 시키는 불충분함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총체적으로 한쪽으로 치우쳐있으며 이것이 초안으로하여금 중대한 큰 실수를 저지르도록 한다.
초안은 자본주의의 불균등 발전의 법칙을 자본주의 발전의 주요하고도 거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법칙으로서 몇 번이고 언급하는데, 언제나 적절한 자리에서 그렇게 하는 것도 아니다. 하나의 근본적인 오류를 포함하여 초안에 있는 수개의 실수들은 불균등 발전의 법칙에 대한 한쪽에 치우친 그리고 잘못된 비맑스적이고 비레닌주의적인 해석에 이론적으로 기초하고 있다.
첫 번째 장에서, 초안은 "경제와 정치 발전의 불균등성은 자본주의의 무조건적인 법칙이다. 이 불균등성은 제국주의 시대에 더더욱 두드러지고 심해진다."고 말한다.
이것은 옳다. 이 정식화는 부분적으로 문제에 대한 스탈린의 최근 정식화를 논박하는데, 스탈린의 정식화에 따르면 맑스와 엥겔스 모두가 레닌에 의해 최초로 발견되었다고 하는 불균등 발전의 법칙을 인식하지 못했다. 1925년 9월 15일에 스탈린은 엥겔스가 "자본주의 국가들의 불균등한 발전의 법칙에 대한 지식에 관하여는 한마디 말도 있을 수 없었던 때"에 글을 썼기 때문에, 트로츠키는 엥겔스에 관하여 무엇이라도 언급할 근거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썼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안의 저자들 중의 하나인 스탈린은 그들을 한번 이상 반복한다. 우리가 보았던 것처럼, 초안의 문구는 이 측면에서 일보 전진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이러한 기초적인 실수에 대한 정정을 제쳐둔다면, 불균등 발전의 법칙에 관하여 초안이 말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한쪽에 치우쳐있고 불충분한 채로 있다.
우선, 인류 역사 전체가 불균등 발전의 법칙에 의해 지배된다고 말하는 것이 더 올바른 것이었을 것이다. 자본주의에서는 각자 자신의 심오한 내적 모순들을 가지고 있는 다른 발전 단계에 있는 인류의 다양한 부문들이 발견된다. 획득된 수준에서의 극도의 다양성과 다양한 시대 동안에 인류의 서로 다른 부문들의 발전의 정도에서의 예외적인 불균등성이 자본주의의 출발점으로서 기능한다. 자본주의는 그것을 깨뜨리고 바꾸면서, 자가 자신의 수단과 방식을 그것에 적용하면서 단지 점차적으로 물려받은 불균등성에 대한 지배를 획득한다. 자본주의에 선행했던 경제 체제와는 반대로, 자본주의는 본성적으로 그리고 항구적으로 경제적 팽창, 새로운 영역으로의 침투, 경제적 차이들의 극복, 자기 충족적인 지역적이고 민족국가적인 경제들의 금융적인 상호관계의 체제로의 변경을 목적으로 한다. 이를 통해 자본주의는 그들의 친교를 발생시키고, 가장 선진적인 나라와 가장 후진적인 나라들의 경제적, 문화적 수준을 고르게한다. 이 주요한 과정 없이, 우선 영국과 유럽, 그리고 나서 유럽과 미국의 상대적인 평준화를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식민지의 산업화, 인도와 영국 사이의 차이의 감소,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강령뿐만 아니라 코민테른의 존재 그 자체가 기초하고 있는 열거된 과정들로부터 발생하는 모든 결과들을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국가들을 서로간에 경제적으로 보다 가까이 끌어당김으로써, 그리고 그들의 발전의 단계들을 평준화함으로써, 자본주의는 자기 자신의 방식으로, 즉 스스로의 활동을 항구적으로 침해하는 무정부적인 방식으로 작동하며, 세계 경제의 일부는 발전시키는 한편으로 다른 일부의 발전은 방해하고 저지하면서 한 국가를 다른 국가에 대치시키고, 산업의 한 영역을 다른 영역에 대치시킨다. 오로지 자본주의의 성격으로부터 발생되는 이들 두 가지 근본적인 경향들의 상호관계가 역사적 과정의 생생한 본질을 우리에게 설명해준다.
보편성, 침투성, 기동성, 그리고 엄청난 속도의 제국주의의 추진력으로서의 금융자본의 형성으로 인해 제국주의는 이들 경향들에 힘을 불어넣는다. 제국주의는 개별 민족국가들과 대륙적 단위들을 서로에 대하여 가장 가깝게 그리고 가장 긴요하게 의존하게 하면서, 그리고 그들의 경제적 수단들, 사회적 형식들, 그리고 발전의 수준을 보다 동일하게 하면서 하나의 통일체로 비교할 수 없이 빠르게, 그리고 깊게 연결시킨다. 동시에, 제국주의는 적대적인 방식들, 호랑이의 도약, 후진적인 국가와 지역들에 대한 습격을 통해서 이 "목적"을 성취하는데, 제국주의 자신이 낳은 세계 경제의 통합과 평준화가 이러한 방책들에 의해 선행했던 시대들 보다 훨씬 격렬하고 격동적으로 전복된다. 불균등 발전의 법칙에 대한 순전히 기계적인 이해가 아닌 이러한 변증법적인 이해만이 6차 대회에 제출된 강령 초안이 피할 수 없었던 근본적인 오류들을 피할 수 있도록 해준다.
우리가 불균등발전의 법칙에 대하여 한쪽에 치우쳐 있다는 초안의 성격을 지적한 바로 다음에, 강령 초안은 아래와 같이 말하고 있다:
따라서 국제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은 반드시 하나의, 동시적인, 그리고 보편적인 행위 등으로서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사회주의의 승리는 몇 개의, 혹은 심지어 한 개의 고립된 자본주의 국가에서 승리할 수 있다."
프롤레타리아트 국제 혁명이 동시적인 행위가 될 수 없다는 것에 관해서는 역사적 필요라는 압력 하에서 적어도 선진국들의 프롤레타리아트가 "전선으로 나오는 것조차" 기다리는 것 없이 후진국의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해 성취되었던 10월 혁명을 경험한 성인들 사이에서는 당연히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이들 한계들 내에서, 불균등 발전의 법칙에 대한 언급은 절대적으로 올바르고 매우 적절하다. 그러나 사회주의의 승리가 "한 개의 고립된 자본주의 국가"에서 가능하다고 하는 공허한 주장을 하고 있는 결론의 마지막 절반에 관해서는 완전히 다르다. 자신의 요점을 증명하기 위하여 강령 초안은 "그러므로 ... 이러저러하게 된다."라고 간단히 말한다. 사람들은 이것이 불균등 발전의 법칙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라는 느낌을 받는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전혀 반대되는 어떤 것이 "나오게 된다". 만약 역사 과정이 일부 국가들이 불균등하게 뿐만 아니라 각자로부터 고립된 채 서로 독립적으로 발전한다는 것과 같은 것이라면, 불균등발전의 법칙으로부터 하나의 자본주의 국가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할 가능성이 의심의 여지없이 나올 것이다. 가장 먼저 가장 선진화된 국가에서 그리고 후진국들이 성숙하게 되면서 보다 후진국들에서. 이런 것은 통상적인 것이며, 즉 전쟁 이전 사회민주주의 대오 내부의 사회주의로의 이행에 관한 평균적인 생각이었다. 이것은 정확하게 사회애국주의의 이론적 기초를 만들었던 사상이다. 물론, 강령초안은 이러한 관점을 유지하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그쪽으로 기울어 있다.
초안의 이론적 오류는 초안이 불균등 발전의 법칙으로부터 법칙이 의미하지 않는 어떤 것, 법칙이 의미할 수 없는 어떤 것을 추론하려고 한다는 사실에 있다. 다양한 국가들의 불균등하고 산발적인 발전은 4년 동안의 지옥과 같은 살육 바로 직후에 석탄, 빵, 석유, 화약과 suspenders를 교환하도록 강제되는 그런 국가들 사이의 증가하는 경제적 결합과 의존성을 뒤집기는 하지만 결코 제거하지는 않는다. 이점에서, 초안은 마치 역사 발전이 산발적인 도약들의 기초에서만 진행되는 것처럼 문제를 단정하는 한편, 이러한 도약을 있게 하는 경제적 기초는 초안의 저자들에 의해 시선에서 완전히 사라진 채 있거나 혹은 강제적으로 제거된다. 그들은 방어될 수 없는 일국에서의 사회주의 이론을 방어하기 위한 단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이렇게 한다.
이것을 듣고 나서는, 문제에 대한 유일하게 올바른 정식화라면 심지어 제국주의 시대 이전에 맑스와 엥겔스가 한편으로 뷸균등성, 즉 산발적인 역사발전이 그 과정에서 국가들이 하나씩 혁명의 홍수에 젖게 될 전체 시대에 걸쳐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이 이어지도록 하며, 다른 한편으로 노동에 대한 국제적 분할을 향해 발전하는 몇몇 국가들의 유기적 의존성이 일국에서의 사회주의 건설 가능성을 배제한다는 결론에 도달했었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이것은 사회주의 혁명은 오직 민족국가적 기초에서 시작될 수 있는 반면, 일국에서의 사회주의 건설이 불가능함을 단정하는 맑스의 이론이 무엇보다도 제국주의가 이 두 가지 적대적인 경향들을 발전시키고, 심화시키며, 격화시켜 온 현대 시대에 이중 삼중으로 진실되게 표현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점에서, 레닌은 단지 이 문제에 대한 맑스 자신의 정식과 맑스 자신의 답을 발전시키고 구체화했을 뿐이다.
우리의 당 강령은 10월 혁명과 사회주의 건설의 기초가 되는 국제적 조건들에 완전히 기초하고 있다. 이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우리는 우리 강령의 전체 이론적 부분을 옮겨 쓰기만 하면 된다. 여기서 우리는 단지 우리 당의 8차 대회 동안에 고 보드벨스키가 강령의 일부 정식화가 러시아에서의 혁명에 대한 언급만을 가지고 있다고 넌지시 말했을 때, 레닌은 당 강령 문제에 관한 그의 결론적인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답했다(1919년 3월 19일)는 것을 지적하는 것으로만 한정할 것이다.
"포드벨스키는 현안의 사회 혁명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 문단에 대하여 반대를 제기했다.... 그의 주장은 명백하게 사실 무근인데 이것은 우리의 강령이 세계적 규모에서의 사회혁명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저작집 16권 131쪽
거의 동시에 레닌이 우리 당이 국제 혁명의 당이라는 것을 더욱 강조하기 위하여 러시아 공산당에서 공산당으로 이름을 변경해야 한다고 제안했다는 것을 여기서 지적하는 것이 부적절한 것은 아닐 것이다. 중앙위원회에서 레닌의 제안에 찬성표를 던진 사람은 내가 유일했다. 그러나, 레닌은 제3 인터내셔널이 창립될 것이라는 전망 속에서 대회로까지 이 문제를 가져가지는 않았다. 이와 같은 입장이 당시에 일국에서의 사회주의에 대한 어떤 암시조차 없었다는 사실에 대한 증거이다. 이것이 당 강령이 이 "이론"을 비난하지 않고 단순히 배제하는 유일한 이유이다.
그러나 2년 후에 채택되었던 청년 공산주의 동맹의 강령은 국제주의의 영감으로 청년들을 훈련시키기 위하여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에 대한 문제에 있어서의 세상물정 모르는 순박한 착각과 민족주의적인 편협함에 대한 직접적인 경고를 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차후에 우리는 이점에 관하여 더 많은 이야기를 하게 될 것이다.
코민테른의 새로운 강령 초안은 문제를 매우 다르게 제기한다. 1924년 이후 초안의 저자들의 수정주의적 진화와 조화를 이루는 가운데, 우리가 보았듯이 초안은 직접적으로 반대의 길을 선택한다. 일국에서의 사회주의에 관한 문제가 설명되는 방식이 전체 초안의 성격을 맑스주의적 문서인지 아니면 수정주의적 문서를 결정한다.
물론 강령초안은 문제에 대한 공산주의적 정식화와 개량주의적 정식화 사이의 차이에 관하여 세심하게, 고집스럽게, 그리고 개별적으로 표현하고, 강조하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들 보증들이 문제를 해결하지는 않는다. 수많은 맑스의 기구들과 장치들이 장착된, 심지어 과도하게 장착된 배가 있는데, 그 배의 가장 큰 돛대의 돛은 정작 모든 수정주의적이고 개량주의적인 바람에 의해 의도적으로 부풀어오르도록 올려져 있는 상황이 이 상황과 비슷할 것이다.
지난 30년 동안의 경험으로부터, 그리고 특히 최근 중국에서의 예외적인 경험으로부터 교훈을 얻은 사람은 누구든지 계급 투쟁과 강령적 당 문서들의 강력한 변증법적 상호 의존성을 이해할 수 있으며, 새로운 수정주의적 항해가 맑스주의와 레닌주의라는 안전장치의 모든 것을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릴 수 있음을 이해할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오랫동안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발전과 운명을 결정하게 될 이 초미의 문제에 관하여 훨씬 더 자세하게 고민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5. 당의 이론적 전통
전술한 인용에서 강령초안은 자신의 원문과 일국에서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는 문제에 관한 논쟁 동안에 범죄적으로까지는 아니더라도 너무나도 무자비하게 잘못 활용되었던 레닌의 1915년 글 사이의 외적이고 순전히 어구상의 유사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일국에서 사회주의의 승리"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초안은 다른 곳에서도 하나의 확증으로서 레닌의 어구들을 "조회"하는 똑같은 방식에 의지한다. 이러한 것이 "초안의 과학적 방법론"이다.
레닌이 말했고, 썼으며 그가 했던 모든 것들을 직접적으로 무시하면서, 당강령과 청년공산주의 동맹의 강령을 무시하면서, 모든 당 지도자들이 이 문제가 분명하게 제기되었을 때(얼마나 분명했었나!)인 10월 혁명의 시대 동안에 예외 없이 주장했던 의견들을 무시하면서, 강령의 저자인 스탈린과 부하린 스스로가 1924년까지 말했던 것을 무시하면서, 수많은 맑스의 문헌과 레닌 저작의 보고 중에서 레닌으로부터 나왔던 2개의 인용들, 즉 1915년의 유럽합중국에 관한 글과 1923년에 썼으나 사후에 출판된 미완성 저작으로부터의 인용들이 1924년 말 혹은 1925년 초에 소위 "트로츠키주의"에 반대하는 투쟁의 긴급성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만들어졌던 민족주의적 사회주의의 이론을 지키기 위하여 사용되어왔다. 각각 몇 줄에 불과한 이 두개의 인용구들과 모순되는 모든 것들이, 맑스주의와 레닌주의 전체가 간단하게 한쪽으로 치워졌다. 이들 인위적으로 추출되고, 총체적으로 그리고 아류적으로 잘못 해석된 2개의 인용들이 그것의 정치적 중요성이라는 관점으로부터 자유로운 새로운 그리고 완전히 수정주의적 이론의 기초로서 활용된다. 우리는 맑스의 줄기에 완전히 생소한 가지를 이식하려는 노력들을 목격하고 있는데, 만약 이식된다면 이것은 나무 전체를 냉혹하게 중독시켜 죽일 것이다.
코민테른 중앙집행위원회 7차 대회간 회의에서 스탈린은 "일국에서 사회주의 경제 건설의 문제는 1915년으로 거슬러 올라가 레닌에 의해 처음으로 당에서 제기되었다") Minutes, 코민테른 중앙집행위원회 7차 대회간회의, 14쪽
고 선언했는데 이때가 처음은 아니었다.
이렇게 해서 여기서 1915년 이전에는 일국에서의 사회주의에 관한 문제가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는 것이 승인된다. 어고[Ergo], 스탈린, 그리고 부하린은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의 국제적 성격의 문제에 관하여 맑스주의와 당의 전통 전체를 침해하려는 모험을 하지는 않는다. 이것을 새겨두도록 하자.
그러나, 레닌이 맑스, 엥겔스, 그리고 레닌 자신이 과거에 말했었던 것과 모순되게 1915년에 처음으로 무슨 말을 했는지 보자.
1915년에 레닌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불균등한 경제적, 그리고 정치적 발전은 자본주의의 절대적인 법칙이다. 따라서, 사회주의의 승리는 우선 몇 개의 혹은 심지어 한 개의 자본주의 국가에서 가능하다. 자본가들을 몰수하고 그들 자신의 사회주의적 생산을 조직한 이후에, 그 국가의 승리한 프롤레타리아트는 다른 나라들의 피억압 계급들을 자신의 대의로 이끌면서, 이들 국가에서 자본가에 맞서는 봉기를 선동하면서, 그리고 필요한 경우 착취계급과 그들의 국가들에 대항하여 무장력을 사용하면서까지 세상의 나머지 자본주의 세계에 대항하여 일어설 것이다.") 저작집 13권 133쪽, 1915년 8월 23일
레닌은 무엇을 염두에 두고 있었을까? 레닌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수립이라는 의미에서 사회주의의 승리가 하나의 국가에서 우선 가능하며, 바로 이 사실 때문에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국가는 자본주의 세계와 대치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공격에 저항할 수 있기 위하여, 그리고 그 자신의 혁명적 공세를 취할 수 있기 위하여 프롤레타리아트 국가는 우선 "국내에서 사회주의적 생산을 조직"해야만 할 것인데, 다시 말해 프롤레타리아트 국가는 자본가들로부터 몰수한 공장의 운영을 조직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전부이다. 살펴본 바와 같이 이러한 "사회주의의 승리"는 러시아에서 처음으로 성취되었으며 세계 [자본주의의] 개입에 맞서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하여 최초의 노동자 국가는 무엇보다도 "국내에서 사회주의적 생산을 조직"해야만 했거나 혹은 "일관되게 사회주의적 형태"의 기업을 설립해야만 했다. 따라서 레닌은 일국, 그리고 후진국에서의 사회주의의 승리라는 것을 가지고 자급자족의 사회주의 사회라는 환상을 품었던 것이 아니라 훨씬 더 현실적인 어떤 것 즉, 최초의 존재 시기에 우리 나라에서 10월 혁명이 성취했던 것을 소중히 했다.
아마도 증거가 필요할까? 너무도 많은 증거들이 예시될 수 있어서, 그 중에 가장 좋은 것을 고르는 것이 어려울 뿐이다.
그의 전쟁과 평화에 관한 테제(1918년 1월 7일)에서, 레닌은 "러시아에서 사회주의의 승리를 위해서는 일정 기간, 적어도 수개월의 시간이 필요하다...") 저작집 15권, 64쪽
고 말했다.
1918년 같은 해 초에, "좌익의 유아성과 소부르주아지 경향들에 관하여"라는 제목의 글에서 레닌은 "이를테면, 만약 국가자본주의가 6개월 안에 우리 나라에서 수립될 수 있다면, 그것은 엄청난 성취가 될 것이며 1년 안에 사회주의가 확실하게 수립될 것이며, 사회주의는 불가침의 것이 될 것이다.") 저작집 15권 2부, 263쪽
라면서 부하린을 겨냥했었다.
어떻게 레닌은 "사회주의의 명백한 수립"을 위하여 그렇게도 짧은 기간을 설정할 수 있었을까? 그는 이들 문구들 속에 어떤 필수적인 생산적, 그리고 사회적 내용을 넣었을까?
1918년 4월 29일에 레닌이 소비에트 정부 전 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에 대한 그의 보고에서 "보다 고도로 발전하게 될 우리의 다음 세대들이 사회주의로의 완전한 이행을 성취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매우 힘들다.") 같은책, 280쪽
고 말했다는 것을 다시 생각해 본다면, 이 문제는 곧바로 달라지게 된다.
1919년 12월 3일, 지방자치체와 협동조합 대회[Congress of Communes and Artels]에서, 레닌은 "우리는 우리가 현시점에서 사회주의적 질서를 수립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만약 우리 다음 세대, 그리고 아마도 그 다음 세대들이 사회주의적 질서를 수립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이 더 좋을 것이다.") 저작집 16권, 398쪽
라고 훨씬 더 퉁명스럽게 말했다.
레닌은 이 두 가지 경우 중에서 어디에서 옳았는가? 12개월 안에 "명백한 사회주의의 수립"에 관하여 말했을 때가 옳았는가, 아니면 "사회주의적 질서의 수립"을 우리 다음 세대가 아니라 그 다음 세대에 남겨두었을 때인가?
두 가지 경우 모두에서 레닌은 옳았는데, 이것은 그가 두 개의 완전히 다른, 그리고 동일한 척도로는 측정할 수 없는 사회주의 건설의 단계들을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첫 번째 경우의 "명백한 사회주의의 수립"에 관해서는, 레닌은 1년 혹은 심지어 "수개월"이라는 기간 이내의 사회주의 사회의 건설을 의미했던 것이 아니라, 즉 레닌은 계급이 사라질 것이라는 것, 도시와 농촌 사이의 모순이 제거될 것이라는 것을 의미했던 것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 국가의 수중에 있는 제분소와 공장에서 생산의 복구와 이렇게 해서 도시와 농촌 사이의 생산물의 교환 가능성의 확보를 의미했다. 기간의 짧음 바로 그 자체가 전체 전망의 이해를 위한 분명한 핵심이다.
물론, 이런 기초적인 임무를 위해서조차, 1918년 초에는 너무도 짧은 기간이 설정되었다. 레닌이 코민테른 4차 대회에서 "당시 우리는 지금의 우리보다 더 바보 같았다."라고 말했을 때 레닌이 조소했던 것이 이 순전한 실천적인 "오측"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일반적인 전망에서는 올바른 관점을 가지고 있었으며 한 순간도 12개월의 과정에서, 그리고 후진국에서 완전한 '사회주의적 질서'를 수립할 수 있다고 한 순간도 믿지 않았다." 사회주의 사회의 건설이라는 이 주요하고도 최종적인 목적의 성취를 레닌은 3대, 즉 우리 자신의 세대, 우리의 다음 세데, 그리고 그 다음 세대에게 남겨 두었다.
1915년 레닌의 글에서 "사회주의적 생산"의 조직화가 사회주의 사회의 건설이 아니라 소련에서 우리가 이미 현실화시켰던 이루 헤아릴 수 없이 기초적인 임무를 의미했다는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 그렇지 않다면, 레닌에 따르면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프롤레타리아트 당은 혁명적 전쟁을 3번째 세대까지 "연기"한다는 말도 안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것이 1915년에 대한 인용과 관련되어 있는 한 새로운 이론의 주요한 논거의 빈약한 입장이다. 그러나 더욱 슬픈 것은 레닌이 이 글을 러시아에 적용하기 위하여 쓰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는 러시아에 대비시켜 유럽에 관하여 말하고 있었다. 이것은 유럽합중국 문제에 집중하고 있는 인용된 글의 내용으로부터 뿐만 아니라, 당시 레닌의 전체 입장으로부터도 도출되는 것이다. 몇 달 후인 1915년 11월 20일에 레닌은 러시아에 관하여 특별히 아래와 같이 썼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임무는 이 실제 상황으로부터 명백하게 도출된다. 이 임무는 왕조에 맞서는 용감하고, 영웅적이며 혁명적인 투쟁(1912년 1월 총회의 슬로건들-3 마리 고래들의 것), 모든 민주주의적 대중들, 즉 무엇보다도 농민들을 끌어당길 투쟁이다. 동시에, 배외주의에 대항하는 무자비한 투쟁, 유럽의 프롤레타리아트와 동맹하여 유럽에서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투쟁이 수행되어야만 한다. 전쟁의 위기가 농민을 포함하는 소부르주아지를 좌익 쪽으로 향하게 하는 경제적, 정치적 요소를 강화해왔다. 이 속에 러시아에서의 민주주의 혁명 승리의 절대적인 가능성의 객관적인 기초가 있다. 서유럽에서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객관적 조건들이 완전히 성숙했다는 것은 모든 선진적인 국가들의 모든 영향력 있는 사회주의자들에 의해 전쟁 전에 인식되었다.") 저작집 13권, 212쪽
이렇게 해서, 1915년에 레닌은 러시아에서의 민주주의 혁명과 서유럽에서의 사회주의 혁명에 관하여 분명하게 말했다. 내친김에 레닌은 마치 자명한 어떤 것을 말하는 것처럼 러시아와는 달리, 러시아와는 대비되게 서유럽에서는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조건들이 "완전히 성숙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새로운 이론, 즉 강령초안의 저자들은 마치 그들이 레닌의 모든 저작들을 무시하는 것처럼, 정면으로 그리고 직접적으로 러시아에 관하여 언급하는 이 인용문(많은 것들 중에 하나)을 간단하게 무시한다. 그들은 이것을 주목하기는커녕, 우리가 보았듯이, 서유럽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는 또 다른 문구를 낚아채고는, 그것이 포함할 수도 없고, 포함하고 있지도 않은 의미를 그것에 부여하며, 이렇게 부여된 의미를 그 문구가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는 러시아에 가져다 붙이고는, 이것을 "기초"로 해서 그들의 새로운 이론을 정립한다.
10월 혁명 직전 이 문제에 대한 레닌의 입장은 무엇이었을까? 1917년 2월 혁명 후 스위스를 떠나면서, 레닌은 스위스 노동자들에게 한 장의 편지를 낭독했는데, 그 속에서 레닌은 아래와 같이 선언했다.
"러시아는 농민 국가이며 유럽에서 가장 후진적인 국가들 중의 하나이다. 사회주의는 러시아에서 즉각적으로 승리할 수 없지만, 봉건 귀족과 지주들의 수중에 있는 거대한 토지를 가지고 있는 국가의 농민적 성격이 1905년의 경험의 기초 위에서 러시아에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에 대한 거대한 진전을 제공하며 우리의 혁명을 세계사회주의 혁명에 대한 전조, 그것을 위한 일보로 만든다...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는 스스로의 힘만으로는 승리하여 사회주의 혁명을 완수할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은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가장 우호적인 정세들의 창출과 어떤 의미에서는 사회주의 혁명의 시작과 같은 특징을 러시아 혁명에 부여할 수 있다. 이것은 러시아 혁명의 주요한 그리고 가장 믿을만한 동맹인 유럽과 아메리카의 사회주의 프롤레타리아트 쪽에서의 결정적인 전투 돌입을 위한 문제들을 촉진할 수 있다.") 저작집 11권 2부, 407쪽
문제의 모든 요소들이 이 몇줄 속에 포함되어 있다. 만약 전쟁과 반동의 시기였던 1915년에 레닌이, 그들이 지금 우리를 납득시키려고 시도하는 것처럼,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트가 부르주아지 국가에 대한 전쟁을 선언할 수 있을만큼 스스로의 힘으로 사회주의를 건설할 수 있다고 믿었다면, 러시아가 이러한 작업을 완수한 이후인 1917년 초 2월 혁명 이후에 레닌은 후진적인 농민 국가인 러시아가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것이 불가능함에 관하여 그렇게도 분명하게 말할 수 있었을까? 사람들은 적어도 어느 정도는 논리적이어야만 하며, 어느 정도는 레닌을 존경해야만 한다.
더 많은 인용들을 추가하는 것은 불필요할 것이다. 사회주의 혁명의 국제적 성격에 의해 결정되는 레닌의 경제적, 정치적 관점들의 완전한 윤곽을 제공하는 것은 많은 주제들을 다루는 하나의 독립적인 작업을 필요로 할 것이지만, 한 개의 국가에서 자족적인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한다는 주제는 아닐 것인데, 이것은 레닌이 이런 주제에 관하여 알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레닌의 또 다른 한 글인 '협동조합에 관하여'에 관하여 고찰해봐야 할 의무감을 느끼는데, 이것은 강령 초안이 이 레닌 사후에 출판된 글을 폭넓게 인용하고 있으며, 즉 이 글의 일부 표현들을 이 글과는 완전하게 어울리지 않는 목적을 위하여 활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소비에트 공화국들의 노동자들이 "사회주의의 완전한 건설을 위한.... 모든 필요하고 충분한 물질적 선행조건들을 보유하"고 있다고 선언하는 강령초안의 5장을 염두에 두고 있다.
만약 레닌이 병을 앓고 있을 때 레닌에 의해 구술되고 그의 사후에 출판된 글이 정말로 소비에트 국가가 완전한 사회주의의 독립적인 건설을 위한 모든 필수적이고 물질적인, 즉 무엇보다도 생산성의 선행조건을 보유하고 있다고 말했다면, 레닌이 구술을 시키면서 얼떨결에 틀렸거나, 혹은 속기사가 자신의 속기문을 옮겨 쓰다가 실수를 했다고 단지 생각해야만 할 것이다. 두 가지 상황 모두가 어쨌든 레닌이 두 번의 갑작스런 발작 속에서 맑스주의와 자기 자신의 평생의 가르침을 포기했다는 것보다는 더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이러한 설명을 해야할 조금의 필요도 없다. 이 글 만큼이나 훌률한 레닌의 마지막 시기의 다른 글들과 사상의 통일성으로 결합되어 있는 비록 완성되지는 못했지만 훌륭한 글인 협동조합에 관하여는 정확하게 서양과 동양에서의 연쇄적인 혁명들 속에서 10월 혁명이 차지하고 있는 지위를 다루고 있는 미완성 책의 한 장을 구성하고 있다. 협동조합에 관하여라는 이 글은 레닌주의에 대한 수정주의자들이 그렇게도 경솔하게 레닌주의에 속한다고 말하는 것들에 관하여는 전혀 말하고 있지 않다.
이 글에서 레닌은 "상거래" 협동조합들이 노동자 국가에서는 자신들의 사회적 역할을 완전히 바꿀 수 있으며 바꾸어야만 하며, 올바른 정책에 의하여 그들이 사회주의적 경로를 따라서 사적 농민의 이해관계와 전체 국가의 이해관계를 융합시키게 될 것이다라고 설명한다. 레닌은 이 논쟁의 여지가 없는 생각을 다음과 같이 구체화한다.
"사실상, 모든 대규모 생산 수단에 대한 국가권력의 지배, 프롤레타리아트의 수중에 있는 국가권력, 수백만 소소유 농민들과 프롤레타리아트의 동맹, 농민에 대한 관계에서 프롤레타리아트 지도력의 확보 등이 우리가 이전에 단순히 상인들로서 취급했으며, 어떤 관점에서는 현재의 신경제정책 하에서도 여전히 그렇게 취급할 권리를 가지고 있는 협동조합, 협동조합 하나만을 위해 필요한 전부가 아닌가? 이것은 사회주의 사회의 건설은 아직 아니지만, 이러한 건설을 위해 필요하고도 충분한 모든 것이다.") 저작집 18권 2부, 140쪽
"협동조합 하나만"(?)이라는 미완성의 문구를 포함하고 있는 인용문의 본문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 구술되어 쓰여진 수정되지 않은 초안이라는 것을 반박의 여지가 없게 증명한다. 글의 전체적인 사상을 취하고자 시도하는 것보다는 내용의 몇 안되는 분리된 단어들에 매달리는 것은 더더욱 수용될 수 없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인용된 구절의 형식과 내용 모두가 누구에게도 이것을 강령초안의 저자들에 의해 오용되고 있는 것처럼 오용할 권리를 부여하고 있지 않다. "필요하고도 충분한" 선행조건들에 관하여 말하면서, 레닌은 자신의 주제를 이 글 속에 엄격하게 한정한다. 그 속에서, 레닌은 우리가 우리의 기초로서 소비에트 통치라는 선행조건을 보유하면서 새로운 계급 격변 없이 원자화되고 흩어져 있는 농민 기업들을 통하여 사회주의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과 수단들에 관한 문제를 다루고 있을 뿐이다. 이 글은 전체적으로 소규모 사적 상품경제로부터 집산화된 경제로의 이행의 사회조직적 형식들에 집중하고 있지, 그러한 이행을 위한 물질적-생산 조건들을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유럽의 프롤레타리아트가 오늘날 승리를 증명하고, 자신의 기술을 가지고 우리를 돕기 위해 온다면, 사적이고 사회적인 이해관계들에 조응하는 사회조직적 형식으로서 레닌에 의해 제기되었던 협동조합이라는 문제는 그것의 중요성을 더욱 완전하게 유지하게 될 것이다. 협동조합은 일단 소비에트 통치가 존재한다면, 전기를 포함하는 선진화된 기술이 수백만의 농민 기업들을 재조직하고 통합할 수 있는 길을 지적한다. 그러나 협동조합은 기술을 대체할 수 없으며 그러한 기술을 창출하지 않는다. 레닌은 단순히 일반적으로 필요하고 충분한 선행조건에 관하여 말하고 있지 않고 우리가 보았던 것처럼 분명하게 그것들을 열거한다. 그것들은 ⑴"모든 대규모 생산수단에 대한 국가권력의 지배"(완결되지 않은 문구) ⑵ "프롤레타리아트 수중에 있는 국가권력" ⑶ "농민에 대한 관계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지도력의 확보"이다. 레닌은 이들 순전히 정치적인 조건들을 열거한 이후에서야 비로소 "이것"(즉 모든 전술한 것들)이 "사회주의 사회의 건설을 위해 "필요하고 충분한 모든 것이다."라는 자신의 결론에 도달한다. "정치적 수준에서 필요하고 충분한 모든 것", 그러나 그 이상은 아니다. 그러나 레닌은 바로 그 다음에 "이것은 아직 사회주의 사회의 건설은 아니다."를 첨가한다. 왜 아닌가? 정치적 조건들 하나만으로는, 비록 그것들이 충분하다고 할지라도 문제를 풀지 못하기 때문이다. 문화의 문제가 여전히 남는다. 레닌은 우리가 부족한 선행조건들의 막대한 중요성을 보여주기 위하여 "오직"이라는 단어를 강조하면서 "오직" 이것이라고 말한다. 우리뿐만 아니라 레닌도 문화가 기술과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문화적이 되기 위해서는 특정한 물질적 기초가 필요하다."면서 레닌은 수정주의자들을 현실세계로 불러들인다.) 같은책, 185쪽
레닌이 부수적으로, 의도적으로 국제사회주의 혁명의 문제에 연결시켰던 전기화의 문제를 언급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만약 쇠퇴기에 있으나 기술적으로는 강력한 세계 자본주의에 맞서서 후진국이라는 기초에서 사회주의 사회의 건설에 착수한 국가의 부단하고, 화해할 수 없는 경제적, 정치적, 군사적, 그리고 문화적 투쟁의 문제가 아니라면, 주어진 "필요하고 충분한" 정치적(그러나 물질적인 것은 아닌) 선행조건들 하에서 문화를 위한 투쟁이 우리의 모든 노고들을 흡수하게 될 것이다.
"[레닌은 이 글의 말미에 특별한 강조점을 둔다] 만약 국제적 규모에서 우리의 현재의 상태를 위해 투쟁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가 아니라면, 우리의 무게중심은 문화적 작업으로 이행하게 될 것이다라고 기꺼이 선언한다.") 같은책, 144쪽
만약 우리가 심지어 거의 모든 다른 저작들을 따로한 채, 협동조합에 관하여라는 글을 분석한다고 해도, 이러한 것이 레닌의 진짜 생각이다. 이것은 단지 우리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며, 우리가 "국제적 규모에서 우리의 현재의 상태를 위한" 우리의 투쟁, 즉 국제 프롤레타리아트 혁명과 관련하여 반드시 성취해야할 것이라고 말하면서, 레닌이 분명하게 물질적 선행조건들에 관하여 괄호 속에서 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의도적으로 우리가 "필요하고 충분한" 선행조건들을 보유하고 있음에 관한 레닌의 어구들을 취하여 그것들을 기초적인 물질적 선행조건들에 가져다 붙이는 강령초안의 저자들의 정식을 왜곡이 아니라면 어떻게 달리 부를 수 있는가? 이것이 새로운 이론의 두번째이자 마지막 인용구의 모습이다.
우리는 여기에서는 레닌이 세계 혁명의 승리 없이는 우리가 실패할 운명이라는 것, 하나의 국가에서 특이나 후진국에서 경제적으로 부르주아지에 승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는 임무는 바로 그 본질상 국제적인 임무라는 것을 주장하고 가장 분명하게 반복하고 있는 1905년부터 1923년까지의 수많은 글들과 연설들에 관하여는 의도적으로 다루지 않았다. 레닌은 이것들부터 새로운 민족주의적인 반동적 유토피아를 선포한 자들에게는 "비관적"일지 모르지만 혁명적 국제주의의 관점으로부터는 충분히 낙관적인 결론들을 도출했다. 여기서 우리는 초안의 저자들 스스로가 자신들의 유토피아를 위한 "필요하고 충분한" 선행조건들을 만들어 내기 위하여 선택해온 문구들에만 우리의 주장을 집중하도록 한다. 그리고 그들의 전체 구조가 손을 대는 순간 부서지는 것을 본다.
그러나, 우리는 논란이 되고 있는 문제에 관하여 어떠한 코멘트도 필요하지 않은, 그리고 어떠한 잘못된 해석도 허용하지 않을 레닌의 직접적인 선언들 중에서 최소한 하나를 적절한 자리에 보여주려고 생각한다.
"우리는 러시아 상황이 선진화된 자본주의 국가들의 상황과 같지 않다는 것과 러시아에서는 우리가 소수의 산업 노동자들과 압도적 다수의 소농경민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우리의 모든 연설들, 그리고 우리의 모든 매체 등 우리의 많은 저작들에서 강조해왔다. 이러한 나라에서 사회 혁명은 오직 두개의 조건에서만 최종적으로 승리할 수 있다. 첫째, 하나 혹은 그 이상의 선진국에서의 사회혁명에 의한 시기 적절한 지원을 받는 조건..... 둘째, 독재를 수립하거나 혹은 국가권력을 자신의 수중에 장악하고 있는 프롤레타리아트와 다수의 농민 사이에 합의가 있는 ...
"우리는 다른 나라들에서의 혁명이 도래하지 않는 한, 농민과의 합의만이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혁명을 지켜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저작집 18권 1부, 137쪽
우리는 이 구절이 충분히 교훈적이기를 희망한다. 우선, 레닌 그 자신이 이 구절에서 자신에 의해 제기된 사상들이 "우리의 많은 저작들에서, 모든 우리의 연설들에서, 그리고 우리의 모든 매체에서" 발전되었다는 것을 강조한다. 둘째, 이러한 전망은 10월 혁명 2년 전인 1915년에 레닌에 의해 구상된 것이 아니라, 1921년 10월 혁명 4년 후에 구상되었다.
레닌과 관련되는 한, 우리는 문제는 충분히 분명하다고 감히 생각한다. 의문이 남는다. 현재 우리 앞에 있는 기초적인 문제에 관한 강령초안의 저자들의 과거 의견은 무엇이었을까?
이 점에 관하여 1926년 11월에 스탈린은 "당은 한 나라에서의 사회주의의 승리는 그 나라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할 가능성을 의미하며, 이 임무가 하나의 국가의 힘으로 완수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사상을 언제나 출발점으로 삼았다.") 프라우다, 1926년 11월 12일
고 말했다.
우리는 이미 당이 이러한 사상을 결코 출발점으로 삼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반대로, 레닌이 말한 것처럼, "우리의 많은 저작들에서, 우리의 모든 연설들에서, 그리고 우리의 모든 매체에서" 당은 반대 방향으로부터 나아갔으며, 이것은 소련공산당의 강령에서 그 최고의 표현에 도달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적어도 스탈린 그 자신은 "항상" "사회주의가 하나의 국가의 힘으로 건설될 수 있다"는 잘못된 관점으로부터 나아갔다고 상상할지 모르겠다. 한번 점검 해보자.
우리는 1905년 혹은 1915년 이 문제에 관한 스탈린의 관점이 무엇이었는가에 관하여 결코 알 수가 없는데, 이것은 이 주제에 관한 어떠한 문서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1924년에 스탈린은 아래와 같이 사회주의의 건설에 관한 레닌의 관점을 개괄했다.
"일국에서의 부르주아지 권력의 타도와 프롤레타리아트 정부의 수립은 아직은 사회주의의 완전한 승리를 보장해주지 않는다. 사회주의적 생산의 조직화라는 사회주의의 주요한 임무는 여전히 미래를 향해 남아 있다. 수 개의 선진국 프롤레타리아트의 공동의 노력 없이 일국에서 이 임무가 완수되고 사회주의의 최종적 승리가 쟁취될 수 있는가? 아니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부르주아지를 타도하기 위해서는 일국의 노력으로는 충분하다. 우리의 혁명의 역사가 이것을 입증한다. 사회주의의 최종적인 승리를 위해서는, 사회주의적 생산의 조직화를 위해서는, 일국, 특히 러시아와 같은 농민국가의 노력으로는 불충분하다. 이것을 위해서는 수개의 선진국 프롤레타리아트의 노력이 필요하다...
"전체적으로 이러한 것이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에 관한 레닌주의 이론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스탈린, 레닌과 레닌주의, 40쪽, 러시아어 판, 1928년
사람들은 "레닌주의 이론의 전형적인 특징"이 여기서 아주 정확하게 개괄되었음을 인정해야만 한다. 스탈린 책의 나중에 나온 판에서는 이 구절이 정확히 반대 방향으로 바뀌었으며, "레닌주의 이론의 전형적인 특징"은 1년이 안되어... 트로츠키주의로... 선포되었다. 코민테른 중앙집행위원회 7차 대회간회의는 1924년 판에 기초해서가 아니라 1926년 판에 기초해서 이 결정을 통과시켰다.
이것이 스탈린이 한 짓이다. 어떠한 것도 더 통탄스러울 수는 없을 것이다. 만약 코민테른 중앙집행위원회 7차 대회간회의에 관해서 그렇게도 통탄스럽지 않다면, 분명히 우리는 이것을 단념하고 받아들일지 모르겠다.
적어도 강령초안의 실제 저자인 부하린은 일국에서 사회주의의 현실화 가능성으로부터 "항상 나아갔다"는 한 가지 희망이 남아있다. 한번 확인해보자.
여기에 부하린이 1917년에 이 주자에 관하여 썼던 것이 있다.
"혁명은 역사의 기관차이다. 심지어 후진국 러시아에서조차, 이 기관차의 대체할 수 없는 엔지니어는 오로지 프폴레타리아트일수 밖에 없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트는 부르주아지 사회의 소유관계의 틀 내에는 더 이상 남아 있을 수 없다. 프롤레타리아트는 권력을 향해, 그리고 사회주의를 향해 진군한다. 그러나 러시아에서 '일정에 올라 있는' 이러한 임무는 '민족국가의 경계 내에서는' 성취될 수 없다. 여기서 노동계급은 국제 노동자 혁명이라는 공성망치에 의해서만 오직 파괴될 수 있는 극복할 수 없는 장벽[주목:"극복할 수 없는 장벽"-트로츠키]과 만난다.") 부하린, 러시아에서의 계급투쟁과 혁명, 3쪽, 러시아어 판, 1917년
그는 그 자신을 이 보다 더 분명하게 표현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것이 1915년 소위 레닌의 "변화" 2년 후인 1917년에 부하린이 견지하고 있던 관점이다. 그러나 아마도 10월 혁명이 부하린을 다르게 가르쳤치지는 않았을까? 다시 한번 검토해보자.
1919년에, 부하린은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이론적 기관에서 러시아에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와 세계혁명이라는 주제에 관하여 아래와 같이 썼다.
"현재 존재하고 있는 세계 경제와 그 구성부분들 사이의 관계 하에서, 다양한 민족 국가적 부르주아지 그룹들의 상호 의존성으로 인해 일국에서의 투쟁은 수개의 문명화된 다른 국가들의 결정적인 승리 없이는 끝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당시 이것은 심지어 "자명하기"까지 했다. 그는 아래와 같이 계속한다.
"맑스주의 문헌에서, 그리고 전쟁 이전의 유사 맑스주의 문헌에서, 사회주의의 승리가 일국에서 가능한가 여부에 관한 문제가 여러 차례 제기되었다. 대부분의 저자들은 이 문제에 관하여 부정적[1915년에 레닌은 어떠했는가?-트로츠키]으로 답했으며, 이것으로부터 사람들은 일국에서 혁명을 시작하고 권력을 장악하는 것이 불가능하거나 허용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지는 않았다."
정확하게 그렇다! 똑같은 글에 아래와 같은 내용이 있다.
"생산력 상승의 시대는 수개의 주요 국가들의 프롤레타리아트의 승리와 함께야만 시작될 수 있다. 그러므로 세계 혁명의 전면적인 발전과 산업 국가들의 소비에트 러시아와의 강력한 경제적 동맹의 형성이 필요하게 된다.") 부하린, 러시아에서의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와 세계 혁명,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5호, 614쪽, 1919년
생산력 상승 즉, 진정한 사회주의적 발전은 유럽의 선진국들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승리 이후에야만 비로소 우리 나라에서 시작될 것이라는 부하린의 주장은 코민테른 중앙집행위원회 7차 대회간회의에서의 고발을 포함하여 "트로츠키주의"를 고발하는 모든 조항들의 기초로 사용되었던 주장들과 참으로 아주 똑같은 것이다. 유일하게 기이한 것은 자신의 짧은 기억력에서 자구책을 찾고 있는 부하린이 기소자의 역할을 하면서 더 나아간다는 것이다. 이 우스운 상황과 나란하게 또 다른 하나의 비극적인 것이 있는데, 즉 고발당한 사람들 가운데에는 아주 똑같은 기초적인 사상을 수십 차례나 표현했던 레닌도 있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레닌의 소위 1915년 변화로부터 6년 후, 그리고 10월 혁명 4년 후인 1921년에, 레닌이 지도했던 중앙위원회는 부하린에 의해 지도되었던 위원회에 의해 입안되었던 청년공산주의동맹의 강령을 승인했다. 이 강령의 4번째 문단은 다음과 같다.
"소련에서 국가권력은 이미 노동계급의 수중에 있다. 세계 자본주의에 맞서는 3년 동안의 영웅적인 투쟁의 과정에서, 프롤레타리아트는 자신의 소비에트 정부를 고수하고 강화했다. 비록 엄청난 천연자원을 보유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는 산업의 관점에서는 소부르주아지가 우세한 후진국이다. 러시아는 우리가 현재 돌입해 있는 발전의 시대인 세계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을 통해서만 오직 사회주의에 도달할 수 있다."
청년공산주의동맹의 강령(우연한 글이 아니라 강령!)에 있는 이 하나의 문단이 당이 "항상" 일국에서, 그리고 더 나아가 정확하게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사회의 건설이 가능함을 고수했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초안 저자들의 시도들을 어리석고 정말로 수치스럽게 만든다. 만약 "항상" 그랬다면, 왜 부하린은 청년공산주의동맹의 강령에 그런 문단을 정식화했는가? 당시 스탈린은 어디를 보고 있었는가? 어떻게 레닌과 전체 중앙위원회는 그러한 이단을 승인할 수 있었는가? 어떻게 당내에서 아무도 이것이 "하찮은 일"이라는 것을 눈치챘거나 혹은 이것에 반대하는 의견을 제기하지 않았는가? 이것이 당, 당의 역사, 그리고 코민테른에 대한 노골적인 조롱으로 바뀌고 있는 사악한 농담으로 보이지는 않는가? 이것을 그만둘 적당한 때는 아닌가? 수정주의자들에게 감히 레닌과 당의 이론적 전통의 뒤에 숨지 말라고 말할 적당한 때는 아닌가!?
코민테른 7차 중앙집행위원회 대회간회의에서, 짧은 기억력 밖에 믿을 것이 없는 부하린은 "트로츠키주의"를 비난하는 결의안을 위한 기초를 제공하기 위하여 아래와 같이 주장했다.
"트로츠키 동지의 영구혁명의 이론에는, 그리고 트로츠키 동지는 이 이론을 오늘날까지도 제출하고 있는데, 우리의 경제적 후진성 때문에 우리는 세계 혁명이 없다면 불가피하게 사라질 수밖에 없다는 주장 또한 발견된다.") Minutes, 115쪽
7차 대회간회의에서 나는 1905-1906년에 내가 정식화했던 영구혁명의 이론에 있는 결함에 관하여 말했다. 그러나 물론 이것이 근본적이었고, 내가 레닌에게로 가까이 가도록 했으며, 내가 오늘날의 레닌주의에 대한 수정주의를 완전히 받아들일 수 없도록 만들었던 이 이론에 있는 어떠한 것도 결코 포기하도록 하지 않았다.
영구혁명의 이론에는 두개의 근본적인 명제들이 있다. 첫째, 러시아의 역사적 후진성에도 불구하고, 혁명은 선진국의 프롤레타리아트가 권력을 장악할 수 있기 전에,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의 수중으로 권력을 이전시킬 수 있다는 명제이다. 둘째, 자본가 적들의 세계에 둘러싸인 후진국에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발생시킬 모순들들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세계 혁명의 장에서 발견될 것이다라는 명제이다. 첫 번째 명제는 불균등 발전의 법칙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 기초하고 있다. 두 번째 명제는 자본주의 국가들 사이의 경제적, 정치적 결합의 확고불변함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 기초하고 있다. 오늘날에조차 내가 이들 2개의 영구혁명 이론의 기본적인 명제들을 고수하고 있다고 말하는데 있어서는 올바르다. 오늘날, 과거 어느 때보다도 더. 왜냐하면, 내 의견으로는, 그것들이 이론에서는 맑스와 레닌의 저작들에 의해서, 실천에서는 10월 혁명의 경험에 의하여 완전하게 입증되고 증명되었기 때문이다.
6. "사회민주주의적 일탈"은 어디에 있는가?
예증으로 든 인용들은 과거와 현재의 스탈린과 부하린의 이론적 입장들을 특징짓기에 충분한 것 이상이다. 그러나 그들의 정치적 방책들의 성격을 결정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스탈린과 부하린이 그들 자신이 1925년까지는 (이 경우 레닌에 완전히 동의하여) 했던 것들과 절대적으로 유사한 선언들을 반대파가 썼던 문서들로부터 골라내면서, 이들 인용구들에 기초하여 우리의 "사회민주주의적 일탈"의 이론을 만들어냈다는 것을 상기해야만 한다. 10월 혁명과 국제 혁명 사이의 관계의 중심적인 문제에 있어서 반대파가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건설의 가능성을 수용하지 않는 오토 바우어와 똑같은 관점을 고수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람들은 정말 인쇄 매체가 1929년에야 비로소 발명되었으며, 그 이전에 발생했던 모든 것들은 잊혀질 운명이라고 생각할 지도 모르겠다. 판에 걸고 있는 모든 것이 짧은 기억력뿐이다!
그러나, 10월 혁명의 성격의 문제에 관하여, 코민테른은 4차 대회에서 오토 바우어와 기타 제2 인터내셔널의 속물들과는 모든 것을 청산했다. 중앙위원회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은 신경제정책과 세계혁명의 전망에 관한 나의 보고에서, 오토 바우어의 입장은 당시 우리의 중앙위원회의 관점을 표현했던 방식으로 평가되었고, 대회에서 어떠한 반대도 없었으며, 나는 이것이 오늘날에도 완전하게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부하린 그 자신과 관련되어 있는 한, "레닌과 트로츠키를 포함하여 많은 동지들이 이미 그 주제에 관하여 말했"기 때문에 그 문제에 대한 정치적 입장을 분명히 할 것을 정중히 거절했는데, 달리 말해서 당시 부하린은 나의 연설에 동의했다. 아래에 내가 4차 대회에서 오토 바우어에 관하여 말했던 것이 있다.
"한편으로는 자신들의 한가로운 글들에서 자본주의는, 특히 유럽에서 자신의 유용성을 잃었으며 역사발전의 걸림돌이 되었다고 인정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소비에트 러시아의 발전은 불가피하게 부르주아지 민주주의의 승리로 귀결된다는 신념을 표현하는 사회민주주의 이론가들은 이들 멍청하고 젠체하는 혼동스러워하는 자들에게 완전히 어울리는 가장 처량하고 진부한 모순에 빠진다. 신경제정책은 한정된 특정한 시간과 장소라는 조건을 위하여 계획된 것이다. 신경제 정책은 자본주의의 포위 속에 존재하고 있으며, 유럽의 혁명적 발전에 기대를 걸고 있는 노동자 국가의 책략이다... 시간과 같은 요소는 정치적 타산에서의 고려로부터 버려질 수 없다. 만약 우리가 자본주의가 유럽에서 향후 100년 혹은 50년을 계속 실제로 존재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소비에트 러시아가 자신의 경제 정책에서 그것을 수용할 수밖에 없다면, 문제는 저절로 풀리게 되는데, 이것은 이 것을 허용함으로써 우리가 유럽에서의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의 붕괴와 자본주의의 부활의 새로운 시대의 등장을 전제로하기 때문이다. 어떠한 기초에서 이것이 허용되어야 하는가? 만약 오토 바우어가 오늘날 오스트리아의 삶 속에서 어떤 기적적인 자본가들의 부활의 노래를 발견했다면, 만약 유럽 부르주아지가 수십년 동안 권력을 유지할 수 있다면, 오늘날 세계 정세 하에서 그것은 새로운 자본주의의 만개가 아니라 유럽의 경제적 침체와 문화적 쇠퇴를 의미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이러한 과정이 소비에트 러시아를 심연으로 끌어당기게 될 것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렇다면 러시아가 '민주주의'의 단계를 통과해야 할 수밖에 없는가 혹은 다른 어떤 형태로 붕괴할 것인가는 가장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스펭글러의 철학을 수용해야 할 어떤 이유도 알지 못한다. 우리는 명백하게 유럽에서의 혁명적 발전을 기대한다. 신경제정책은 단지 그 발전의 속도에 맞추기 위한 것이다.") 트로츠키, 사회민주주의적 비판에 대하여, 코민테른 5년, 491쪽
문제의 이러한 정식화는 우리를 우리가 강령초안에 대한 평가를 시작했던 지점 즉, 제국주의 시대에는 자신의 모든 민족국가적 특수성들을 가진 개별 국가가 그 속에 포함되는 그리고 개별 국가가 그것에 종속되는 전체로서의 세계 발전의 경향들을 출발점으로서 취하는 것 이외의 다른 방법으로 한 국가의 운명에 접근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으로 되돌아가게 한다. 제2 인터내셔널의 이론가들은 세계의 단위와 제국주의 시대로부터 소련을 제외하며, 하나의 고립된 국가로서의 소련에 대하여 경제적 "성숙"이라는 단조로운 기준을 적용하며, 소련은 독립적으로 사회주의를 건설할 만큼 성숙하지 않았으며, 이렇게 해서 노동자 국가의 자본주의적 퇴행의 불가피성이라는 결론을 도출한다.
강령초안의 저자들은 똑같은 이론적 근거를 받아들이며, 사회민주주의 이론가들의 형이상항적 방법론 전부를 물려받는다. 그들은 또한 존재하는 세계와 제국주의 시대로부터 "추상한다." 그들은 고립적인 발전이라는 허구로부터 나아간다. 그들은 세계 혁명의 민족국가적 단계에 단조로운 경제적 기준을 적용한다. 그러나 그들이 내리는 유죄평결은 다르다. 초안 저자들의 "좌익주의"는 그들이 사회민주주의적 평가를 뒤집는다는 사실에 있다. 그러나, 제2 인터내셔널 이론가들의 입장은. 그것이 개조되더라도, 아무런 가치가 없는 채로 있다. 사람들은 유치원 실습과도 같은 바우어의 평가와 예측을 간단하게 제거하는 레닌의 입장을 택해야만 한다.
이것이 "사회민주주의적 일탈"에 관한 실제 이야기이다. 우리가 아니라 초안의 저자들이 그들 스스로가 바우어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에 관하여 생각해야 한다.
7. 세계 경제에 대한 소련의 의존성
현재 민족국가적 사회주의 사회를 제창하는 자들의 선구자는 다름이 아닌 헤르 폴마르[Herr Vollmar]였다. 자신의 글인 고립된 사회주의 국가라는 제목의 글에서 독일에서의 독립적인 사회주의 건설의 전망과 독일의 프롤레타리아트는 선진화된 영국의 프롤레타리아트 보다 훨씬 더 발전되었음을 서술하면서, 폴마르는 1878년에 분명하고 매우 명백하게 몇 군데에서 스탈린에 따르면 맑스와 엥겔스가 잘 모르던 불균등발전의 법칙에 관하여 언급한다. 이 법칙을 기초로 해서 폴마르는 1878년에 논박의 여지가 없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미래에도 역시 자신들의 힘을 유지하고 있을 지배적인 조건하에서, 모든 문명화된 국가들에서의 동시적인 사회주의의 승리는 절대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 예견될 수 있다."
폴마르는 이 사상을 더욱 발전시키면서 "그래서 비록 유일하게 가능한 길은 아니지만, 가장 가능성 있는 것으로 내가 증명했다고 희망하는 고립된 사회주의 국가에 도달하게 되었다."로 말한다.
우리가 여기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하에 있는 국가라고 이해할지도 모르는 "고립된 국가"라는 용어에 관한 한, 폴마르는 맑스와 엥겔스에게 잘 알려진, 그리고 레닌이 1915년의 위에서 인용된 글에서 표현했던 논박의 여지가 없는 생각을 표현했다.
그러나 그리고 나서는 뭔가 폴마르 자신의 사상이 뒤따르는데, 아무튼 이것은 우리의 일국에서의 사회주의 이론의 후원자들의 정식화만큼 한쪽으로 치우치고 잘못 정식화되지는 않았다. 자신의 글 속에서, 폴마르는 훨씬 더 발달한 기술과 훨씬 낮은 생산비용을 동시에 보유하고 있다는 이점을 가지고 있는 사회주의 독일이 활발하게 세계 자본주의 경제와의 경제적 관계를 가질 것이라는 명제를 출발점으로서 잡았다. 이러한 구상은 사회주의 체제와 자본주의 체제의 평화공존의 전망에 기초하고 있다. 그러나 사회주의가 진보하면서 부단하게 자신의 거대한 생산적 우월성을 드낼 것이 틀림없기 때문에, 세계 혁명의 필요성 자체가 사라진다. 사회주의는 시장에 보다 값싼 상품을 파는 것으로 자본주의에 승리할 것이다.
첫 번째 강령초안의 저자이며 두 번째 초안의 저자들 중 하나인 부하린은 자신의 일국에서의 사회주의라는 그의 구상에서 전적으로 고립된 자족적인 경제로부터 나아간다. 궤변에 의해 배가된 스콜라주의의 최후의 변인 우리 혁명의 성격과 소련에서 성공적인 사회주의 건설의 가능성에 대하여) 볼셰비크, 19-20호, 1926
라는 제목의 부하린의 글에서는 모든 추론이 고립된 경제라는 한계 내에서 이루어진다. 유일하게 원칙적인 주장은 아래와 같다.
"우리가 사회주의의 건설을 위해 '필요하고 충분한 모든 것'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따라서 사회주의 건설이라는 바로 그 과정에, 사회주의의 더욱 진전된 건설은 불가능할 것이라는 것과 같은 점은 있을 수 없다. 만약 우리가 우리 나라 내부에 전년에 비하여 우리 경제의 사회주의적 부문의 더욱 큰 우위를 확보하면서 우리가 나아가고 있으며, 우리 경제의 사회화된 부문들이 사적 자본주의적 부문보다 빨리 성장하는 힘의 조합을 보유하고 있다면, 우리는 힘의 우위에 바탕하여 계속해서 새로운 해를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이 논거는 흠잡을 곳이 없다. "우리가 필요하고 충분한 모든 것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따라서 우리는 그것을 가지고 있다. 증명해야만 하는 지점으로부터 출발하면서, 부하린은 그것으로 들어가는 어떠한 입구나 그것으로부터 나오는 출구도 없는 자족적인 사회주의 경제의 완전한 체제를 건설한다. 스탈린뿐만 아니라 부하린도 외부환경 즉 세계 전체에 대해서는 개입이라는 각도로부터만 그것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부하린이 자신의 글에서 국제적 요소로부터 "추상할" 필요성에 관하여 말할 때, 그는 세계 시장을 고려하는 것이 아니라 군사적 개입을 고려하고 있다. 부하린은 세계 시장으로부터 추상할 필요가 없는데, 이것은 그가 간단하게 그의 체계 전반에서 그것에 관하여 잊고 있고 있기 때문이다. 이 도식과 조화를 이루어, 부하린은 14차 러시아 당대회에서 만약 우리가 개입에 의해 방해받지 않는다면 우리는 "비록 거북이의 속도일지라도" 사회주의를 건설할 것이다라는 생각을 주장했다. 두 체제 사이의 부단한 투쟁의 문제, 사회주의는 최고의 생산력에만 오직 기초할 수 있다는 사실, 한마디로 성장하는 생산력에 기초하여 한 사회적 형식의 다른 것으로의 대체라는 맑스주의적 동학, 이 모든 것들이 완전히 제거되었다. 혁명적, 그리고 역사적 변증법이 낮은 기술에 기초한, 민족국가적 국경 내부에서 "거북이의 속도"로 발전하는, 외부 세계와는 오로지 개입이라는 공포에 의해서만 연결되어 있는 자족적인 사회주의라는 인색한 반동적 유토피아에 의해 대체되었다. 맑스와 레닌의 이론에 대한 이 비참한 모방을 채택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 "사회민주주의적 일탈"로 선언되었다. 인용된 부하린의 글에는, 우리 관점에 대한 이러한 성격 규정이 처음으로 일반적으로 제기되고 "구체화되었다." 역사는 우리가 폴마르의 일국에서의 사회주의 이론의 더욱 저열한 재탕을 채택하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에, 우리가 "사회민주주의적 일탈"로 빠져들었다고 적을 것이다.
만약 러시아가 세계 경제의 사슬 - 가장 약한 고리지만 그래도 하나의 고리이다 - 속에 있는 고리에 있지 않았다면, 짜르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트는 10월에 권력을 장악하지 못했을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한 권력의 장악은 결코 소비에트 공화국을 자본주의가 창출한 노동의 국제적 분할의 체제로부터 제외시키지 않았다.
오직 황혼에만 나는 현명한 부엉이처럼, 일국에서의 사회주의의 이론은 과거 고정 자본을 어느 때보다도 많은 비율로 소진하고, 고정 자본의 3분의 2에서 세계 산업에 대한 의존성이 구체화되어 있는 우리 산업이 그것의 소생과 세계 시장과의 연결 확대의 긴급한 필요성의 징후를 드러내고 있었을 때, 대외무역의 문제가 우리 경제 지도자들 앞에 최고로 부각되었던 순간에 느닷없이 나타났다.
레닌이 당에서 발언할 기회를 가졌던 마지막 대회인 11차 당대회에서 그는 당이 또 다른 시련을, 즉 "... 러시아와 우리가 종속되어 있고, 우리가 연결되어 있으며, 우리가 벗어날 수 없는 세계시장이 우리에게 제기하는 시련"을 견뎌야만 할 것이라는 시기 적절한 경고를 발했다.
우리의 대외무역 지수들이 가장 최근에 우리 경제계획 지수의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는 단순한 사실이 고립적인 "완전한 사회주의"의 이론에 최대의 치명타를 날린다. 우리 산업을 포함하여 우리 경제에서 "가장 신통치 않은 지점"이 수입인데, 이것은 우리의 수출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그리고 사슬의 저항력은 항상 그것의 가장 약한 고리로 측정되기 때문에, 우리의 경제계획의 규모는 우리의 수입 규모에 적합하게 만들어진다.
우리는 잡지 계획경제(국가계획위원회의 이론적 기관)에 있는 계획의 체제를 위한 글을 알고 있는데, 이 글에는 "... 올해 우리의 통제 수치들을 도출하면서 우리는 방법론적으로 우리의 수출과 수입을 전체 계획을 위한 출발점으로 잡아야만 했다. 그리고 우리는 다양한 산업 부문들을 위한, 그리고 결과적으로 산업 전반을 위한, 그리고 특히 새로운 산업기업의 건설을 위한 우리의 계획을 그것에 맞추어야만 했다,") Jan. 1927년 27쪽
등이 있다.
국가계획위원회의 이 방법론적 접근은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진 모든 이들에게, 우리가 더욱 강해지면서 고립이라는 그릇된 순환으로부터 벗어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통제위원들이 우리 경제 발전의 방향과 속도를 결정은 하지만, 이들 통제 위원들이 세계 경제에 의해 이미 통제되고 있다고 딱 잘라 선언한다.
자본주의 세계는 자신이 군사적 개입과는 다른 종류의 도구를 가지고 있음을 수출과 수입 지수들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준다. 노동생산성과 전체로서의 사회체제의 생산성이 가격의 상호관계에 의해 시장에서 측정되는 한, 소비에트 경제에 대한 가장 즉각적인 위협을 구성하는 것은 군사적 개입보다는 아마도 보다 값싼 자본주의 상품들의 개입일 것이다. 이것 하나로도 단순히 "자기 자신의" 부르주아지에 대한 개별적인 경제적 승리의 문제가 결코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세계 전체에 임박해 있는 사회주의 혁명은 결코 단순히 자기 자신의 부르주아지에 대한 개별 국가의 프롤레타리아트의 승리에 있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관련되어 있는 것은 후진적인 생산력에 기초하여 이제 막 건설을 시작한 하나와, 오늘날 여전히 헤아릴 수 없이 강력한 생산력에 기초하고 있는 다른 하나라는, 두 사회 체제 사이의 경쟁과 생사를 건 투쟁이다.
세계 시장에 대한 우리의 의존성을 수용하는 것에 있어서 (레닌은 세계시장에 대한 우리의 종속에 관하여 퉁명하게 말했다) "비관주의"를 드러내는 사람은 누구라도, 그것에 의해서 세계 시장에는 아랑곳하지 않는 자기 자신의 지엽적인 소부르주아지적 소심함과 세계 경제로부터 피하여 풀 숲 뒤에 숨어 자기 자신의 자원으로 어떻게든 해나가기를 원하는 세상 물정 모르는 낙관주의라는 가엾은 특징을 드러낸다.
새로운 이론은 소련이 군사적 개입에 의해 사라질 수 있지, 자신의 경제적 후진성 때문에는 결코 사라질 수 없다는 이상한 사상을 주장했다. 그러나 사회주의 사회에는 자기 국가를 방어하기 위한 노동 대중들의 준비가 그 국가를 공격하기 위한 자본주의의 노예들의 준비보다 훨씬 클 것이 틀림없기 때문에, 왜 우리가 군사적 개입으로부터 파멸의 위협을 받아야 하는가?라는 의문이 생긴다. 왜냐하면 적이 공업기술에서 한정 없이 강력하기 때문이다. 부하린은 그들의 군사 기술적 측면에서만 생산력의 우위를 인정한다. 그는 포드에서 만든 트랙터가 크뢰조[Creusot]가 만든 총만큼이나 위험스럽다는 것을 이해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총은 가끔씩 기능을 할 수 있지만, 트랙터는 항상적으로 우리에게 가해지는 압력을 행사한다는 하나의 차이만을 가진다. 게다가 트랙터는 최후의 수단으로서의 총이 자신의 뒤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는 최초의 노동자 국가이며,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한 부분이며,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와 함께 세계 자본에 의존하고 있다. "결합"이라는 무관심하고, 중립적이며, 관료적으로 거세된 단어가 이들 "결합"의 극단적으로 부담스럽고 위험스러운 성격을 덮어 가리기 위한 목적만을 가진 채 유포된다. 만약 우리가 세계 시장의 가격에 생산을 하고 있다면, 우리의 세계 시장에 대한 의존성은 의존성이기를 멈추지는 않으면서 현재보다 훨씬 덜 심할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우리의 대외무역 독점 그 자체가 우리의 의존성의 격심함과 위험한 성격에 대한 증거이다. 우리의 사회주의의 건설에서 독점의 결정적인 중요성은 정확하게 우리에게 우호적이지 않은 세력들의 현존하는 상호관계의 결과이다. 그러나 우리는 대외무역의 독점은 단지 세계 시장에 대한 우리의 의존성을 통제할 뿐이지, 그것을 제거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한 순간도 잊어서는 안된다.
"[레닌은 말한다] 우리의 소비에트 공화국이 전체 자본주의 세계에 둘러싸여 고립된 국경의 땅에 남아 있는 한, 우리의 완전한 경제적 독립과 우리가 처해 있는 위험들의 소멸에 관하여 생각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어리석은 공상과 이상주의일 것이다.) 저작집 17권 409쪽
우리에게 적대적인 자본주의 경제 속에 있는 "고립된 국경의 땅"으로서의 소련의 객관적인 지위로부터 결과적으로 주된 위험들이 발생한다. 그러나 이러한 위험들은 감소하거나 증가할 수 있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우리의 사회주의의 건설과 다른 한편으로는 자본주의 경제의 발전이라는 두 가지 요소의 작용에 달려있다. 최종적으로 두 번째 요소, 즉 전체로서의 세계 경제의 운명이 물론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결국은 필연적으로 사회주의 공화국의 멸망으로 귀결될, 우리의 사회주의 체제의 생산성이 자본주의 체제의 생산성에 계속해서 뒤쳐지는 일이 벌어질 수 있을까? 그리고 어떤 특별한 경우에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을까? 만약 우리가 견줄 데 없이 높은 지도력을 가지고 산업적 기초를 독립적으로 창출할 필요가 있게 되는 이 새로운 국면에서 우리 경제를 훌륭하게 운영할 수 있다면, 우리의 노동 생산성은 증가할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국가 혹은 보다 정확하게 지배적인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노동 생산성이 우리나라에서보다 더 빨리 성장할 것이라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인가? 이 문제에 대한 분명한 대답 없이는 우리의 속도("거북이의 속도"라는 황당한 철학은 고사하고)는 "그 자체로" 충분하다는 김빠진 주장을 위한 어떠한 근거도 없다. 그러나 두 체제의 경쟁이라는 문제에 대한 대답을 제공하기 위한 바로 그 시도가 세계 경제와 세계 정치, 즉 소비에트 공화국을 포함하는 혁명적 인터내셔널의 활동과 결정의 장으로 우리를 이끌며, 가끔씩 인터내셔널의 지원을 확보하는 자족적인 소비에트 공화국으로는 결코 이끌지 않는다.
소련의 국가경제에 관하여 말하면서 강령 초안은 소련의 국가경제는 "자본주의 국가들에서의 발전 속도를 능가하는 속도로 대규모 산업을 발전시키고 있다"고 말한다. 두 가지 속도를 병렬하기 위한 이 시도는 강령의 저자들이 분명하게 우리의 발전과 세계의 발전 사이의 비교 상수의 문제 자체를 거부했던 것에 비하면 원칙적으로 일보전진 했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스탈린은 "국제적인 요소들을 밀어 넣을"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부하린은 "비록 거북이의 속도일지라도" 사회주의를 건설하자고 말했다. 정확하게 이 노선을 따라서, 수년 동안에 걸쳐 원칙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 형식적으로는 우리가 이 노선을 따라서 승리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경제 발전의 속도들 사이의 비교를 내용 속에 삽입하지 않고, 문제의 뿌리를 통찰한다면, 초안의 다른 부분에서 자본주의 세계에 대한 어떠한 관계도 없이, 오직 국내적 관계만을 출발점으로 삼으면서 "충분한 산업의 최소한"에 관하여 말하는 것이 허용될 수 없음이 명백해질 것이다. 또한 결정을 통과시키는 것뿐만 아니라 특정 국가가 사회주의를 독립적으로 건설하는 것이 "가능한가 아니면 불가능한가"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조차 마찬가지로 허용될 수 없다는 것이 명백해질 것이다. 그 문제는 두 체제 사이의, 두 계급 사이의 투쟁의 동학에 의해서 결정되며, 이 투쟁에서는 우리의 회복 시기의 높은 성장 상수와 무관하게 아래와 같은 하나의 명백하고 기본적인 사실이 남게 된다.
"만약 국제적 규모에서 생각해본다면, 자본주의는 비단 군사적 의미에서뿐만 아니라 경제적 의미에서도 현재 소비에트 권력보다 강하다. 우리는 이 근본적인 고려로부터 나아가야 하며 이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레닌 저작집 17권 102쪽
서로 다른 발전 속도들 사이의 상호관계의 문제는 미래를 향해 공개적인 의문을 남긴다. 이것은 진정으로 "스키츄카[smychka-노동자와 농민, 도시와 농촌의 경제 협력]을 성취하기 위한, 곡물 수집을 보장하기 위한, 우리의 수출과 수입을 늘리기 위한 우리의 능력에, 즉 당연히 이 투쟁에서 대단히 중요한 요소들인 우리의 내부적 성공에 달려있을 뿐만 아니라 세계 자본주의의 운명에, 세계 자본주의의 침체와 성장과 붕괴, 즉 세계 경제와 세계 혁명의 경로에도 달려있다. 결과적으로, 문제는 민족국가적 틀 내부에서가 아니라 세계 경제적 그리고 정치적 투쟁의 장에서 결정된다.
8. "일국에서 사회주의"라는 반동적인 유토피아적 이론의 원인으로서의 생산력과 민족국가적 경계 사이의 모순
우리가 본 것처럼, 일국에서의 사회주의의 이론을 위한 기초는 한편에서의 레닌의 몇 구절에 대한 궤변적 해석과 다른 한 편에서의 "불균등 발전"에 대한 형식적인 해석으로 요약된다. 문제에 관한 인용문들뿐만 아니라 역사 법칙에 대한 올바른 해석을 제공함으로써 우리는 완전히 반대의 결론 즉, 1925년까지의 스탈린과 부하린을 포함하여 맑스, 엥겔스, 레닌, 그리고 우리 모두가 도달했던 결론에 도달한다.
자본주의의 불균등하고 산발적인 발전으로부터 비동시적인, 불균등한, 그리고 산발적인 사회주의 혁명의 성격이 도출되며, 각자에 대한 여러 국가들의 상호의존성의 극도의 긴장으로부터 일국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것에 대한 경제적인 불가능성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불가능성이 도출된다.
이런 각도에서 다시 한번 강령의 내용을 좀더 자세하게 검토해보자. 우리는 서문에서 이미 아래의 내용을 읽었다.
"제국주의는.... 예외적인 정도로까지 세계 경제의 민족국가적 생산력의 성장과 민족국가적 국경 사이의 모순을 악화시킨다."
이 명제가 인터내셔널 강령의 핵심이거나 혹은 핵심이라는 것을 의미했다고 이미 말했다. 그러나 일국에서의 사회주의의 이론을 반동적 이론으로서 선험적으로 배제하고, 거부하며 일소해버리는 것이 정확하게 이 명제인데, 그것은 일국에서의 사회주의의 이론이 생산력의 발전의 근본적인 경향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이 발전에 의해 이미 달성된 물질적 결과에 대해서도 화해할 수 없이 반대되기 때문이다. 생산력들은 민족국가적 경계들과 양립할 수 없다. 이 사실에서 대외무역, 인력과 자본의 수출, 영토의 장악, 식민지 정책과 최근의 제국주의 전쟁뿐만 아니라 자족적인 사회주의 사회의 경제적 불가능성이 도출된다. 자본주의 국가들의 생산력은 훨씬 더 전에 민족국가적 국경을 돌파했다. 그러나 사회주의 사회는 가장 선진화된 생산력에 기초해서만, 농경을 포함하는 생산의 과정에 대한 전기와 화학의 적용에 기초해서만, 현대 기술의 최고의 요소들의 융합, 일반화, 그리고 이것들을 최고의 발전으로 이끄는 것에 기초해서만 건설될 수 있다. 맑스 이래로, 우리는 자본주의는 자신이 낳았고, 1914년의 전쟁이 보여주었던 것처럼 부르주아지의 사적 소유권의 외피뿐만 아니라 부르주아지 국가의 민족국가적 테두리까지 갈기갈기 찢는 신기술의 활기에 대처할 수 없다는 것을 부단히 반복해오고 있다. 그러나 사회주의는 자본주의로부터 최고로 발전된 생산력을 물려받아야만 할뿐만 아니라 즉각적으로 그것을 진전시키고, 더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고, 자본주의하에서는 알려져 있지 않았던 발전의 단계를 제공해야만 한다. 의문이 생긴다. 어떻게 사회주의가 자신이 자본주의하에서 타도하려고 격렬하게 애썼던 민족국가의 경계 안으로 생산력을 되돌릴 수 있는가? 혹은, "억제할 수 없는" 생산력에 비하면, 민족국가적 경계들뿐 아니라 결과적으로 일국에서의 사회주의의 이론의 경계들도 역시 너무나 협소하며, 이를테면 우리 자신을 억제되고 국내화된 생산력들에, 즉 경제적으로 후진적인 공업기술에 제한하기 때문에, 아마도 우리가 "억제할 수 없는" 생산력이라는 사상을 포기해야만 하는가? 만약 그렇다면, 많은 산업 부문들에서 우리는 지금 당장 발전을 멈추고 현재 부르주아지 러시아가 분리할 수 없는 결합력으로 세계경제에 연결되도록 했고, 부르주아지 러시아를 국경을 넘어 성장했던 생산력을 위하여 자신의 영토 확장하기 위한 제국주의 전쟁의 소용돌이로 몰아넣도록 했던 우리의 가엾은 정도의 현재 기술 수준보다도 더 낮은 수준으로 후퇴시켜야 할 것이다.
이들 생산력들을 물려받고 복구해오면서, 노동자 국가는 수입과 수출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강령 초안이 현대 자본주의적 기술의 민족국가적 경계들과의 양립불가능성이라는 테제를 자신의 내용 속으로 기계적으로 삽입하고는 마치 이 양립불가능성에 관해서는 어떠한 문제도 없는 것처럼 주장을 진행하는 것이 문제이다. 본질적으로 초안 전체는 맑스와 레닌으로부터 취해진 이미 혁명적인 테제들의 조합이며, 이들 혁명적인 테제들과는 절대적으로 양립할 수 없는 기회주의적이고 중도주의적 결론들의 조합이다. 이것이 초안에 포함되어 있는 분리된 혁명적 정식들에 낚이지 않고, 초안의 주요한 경향들이 어디로 귀결되는가를 관찰하는 것이 필요한 이유이다.
우리는 이미 "하나의 고립된 자본주의 국가에서" 사회주의의 승리의 가능성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 첫 번째 장의 그 부분을 인용했다. 이 사상은 4장에서 아래와 같이 훨씬 더 노골적이고 날카롭게 정식화된다.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는 오직 개별 국가들에서의 사회주의의 승리[?]의 결과들로서만 현실화될 수 있으며, 이것은 새롭게 형성된 프롤레타리아트 공화국들이 이미 존재하고 있는 프롤레타리아트 공화국들과 연맹을 수립하게 될 때이다."
만약 우리가 "사회주의의 승리"를 단순히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위한 또 다른 표현으로 해석한다면, 우리는 논박이 불가능하고, 덜 다의적으로 정식화되어야 할 일반적인 선언에 도달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초안의 저자들이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 사회주의의 승리는 권력의 장악과 생산수단의 국유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국가에서의 사회주의 사회의 건설을 의미한다. 만약 우리가 이 해석을 수용한다면, 우리는 노동의 국제적 분할에 기초한 세계 사회주의 경제가 아니라 무정부주의 풍의 더없이 행복한 자족적인 사회주의 공동체들의 연맹을 획득하게 될 것인데, 여기서 유일한 차이는 이들 공동체들이 현재의 민족국가들의 크기로 확대될 것이라는 것이다.
과거의 관습적인 공식들로 새로운 정식화를 덮어 가리기 위해 심히 애를 쓰면서, 강령초안은 아래의 테제에 의지하고 있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완전한 세계적 승리와 프롤레타리아트 세계 권력의 공고화 이후에만 오직 세계 사회주의 경제의 일사불란한 건설이라는 장기간의 시대가 이어질 것이다."(4장)
이론적 방패로 사용되고 있는 이 가정은 실제로는 단지 기본적인 모순을 폭로하는데 기여할 뿐이다. 만약 우리가 이 테제를 진정한 사회주의 건설의 시대가 적어도 몇 개의 선진국들에서의 프롤레타리아트의 승리 이후에만 시작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한다면, 이것은 간단히 일국에서 사회주의 건설의 이론에 대한 거부이며, 맑스와 레닌의 입장으로의 복귀이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강령초안의 여러 부분에 숨어 있는 스탈린과 부하린의 새로운 이론으로부터 우리의 출발점을 잡는다면, 우리는 어린아이들이 이미 만들어진 블록으로 어떤 모양을 만들어내는 방식과 같이,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완전한 세계적 승리까지는, 몇몇 개별 국가들이 각자의 국가에서 완전한 사회주의를 건설하고, 계속해서 이들 사회주의 국가들로부터 세계 사회주의 경제가 건설 될 것이라는 전망을 획득하게 된다. 사실, 세계 사회주의 경제는 민족국가적 사회주의 경제의 총합이 결코 아닐 것이다. 세계 사회주의 경제는 그 근본적인 측면에서 자본주의의 모든 선행한 발전이 창출한 노동의 세계적 분할이라는 토양에서 형성될 것이다. 본질적으로, 이것은 몇개의 개별 국가들에서 "완전한 사회주의"의 건설 이후가 아니라, 수 십년이 요구되는 세계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이라는 폭풍과 사나운 비바람 속에서 수립되고 건설 될 것이다. 최초의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국가들의 경제적 성공은 그들의 자족적인 "완전한 사회주의"에 대한 그들의 근접 정도에 의해서가 아니라 독재 자체의 정치적 안정성에 의해서, 그리고 미래의 세계 사회주의 경제의 요소들을 준비하는 데 있어서 성취된 성공들에 의해서 측정될 것이다.
이 수정주의적 사상은 자신들이 왜곡했던 레닌 사후에 출판된 글 중의 1줄 반 뒤에 숨어서 초안의 저자들이 소련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선언하고 있는 5장에서 훨씬 더 명확하게, 그리고 그래서 훨씬 더 총체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소련은] ..... 자신의 내부에 봉건적 지주들과 부르주아지의 타도뿐만 아니라 사회주의의 완전한 건설을 위한 필요하고 충분한 물질적 선행조건들을 보유하고 있다."
환경이 가지고 있는 것 덕분에, 우리가 그런 예외적인 역사적 이점을 확보했는가? 우리는 초안의 2번째 장에서 이 점에 대한 대답을 발견한다.
"제국주의 전선은 그것의 가장 약한 고리인 짜르 러시아에서 깨졌다."
이것은 레닌의 빛나는 공식이다. 이것의 의미는 러시아가 모든 제국주의 국가들 중에서 가장 후진적이며 경제적으로 약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국가의 불충분한 생산력에 감당할 수 없는 부담을 지우게 되면서, 러시아의 지배계급들이 가장 먼저 붕괴했던 이유이다. 이렇게 해서 불균등하고 산발적인 발전이 가장 후진적인 제국주의 국가의 프롤레타리아트로 하여금 최초로 권력을 잡지 않을 수 없게 했다. 이전에 우리는 권력을 장악하는 것이 더욱 어렵지만, 우리가 우리의 후진성을 극복하기 훨씬 전에 권력을 장악하여 우리를 앞서갈 뿐만 아니라 세계 최고의 기술과 노동의 국제적 분할에 기초한 진정한 사회주의 건설의 지점을 향하여 우리를 이끌기 위하여 우리와 함께 나아갈 선진국의 프롤레타리아트와 비교해서, "가장 약한 고리"의 노동계급은 사회주의를 향한 진보에서 가장 커다란 어려움에 직면하게 될 것인데, 이것은 정확하게 바로 위와같은 이유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가 10월 혁명을 감행했을 때 우리의 사상이었다. 당은 이 사상을 수십번 아니 수천번 언론 매체에서, 모임들에서 정식화했으나, 1925년 이후에는 단지 반대의 사상으로 대체하기 위한 시도들이 있어왔다. 이제 우리는 구 짜르 러시아가 "가장 약한 고리"였다는 사실이 짜르 러시아의 모든 허약함을 물려받은 소련의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더도 덜도 없이 "사회주의의 완전한 건설"을 위한 자기 자신의 민족국가적 선행조건들을 보유할 수 있는 이루헤아릴 수 없는 이점을 부여한다는 것을 배운다.
불운한 영국은 이런 이점을 가지고 있지 않은데, 이것은 필요한 원자재를 공급하고, 자신의 상품을 처분하기 위하여 거의 모든 세상을 필요로 하는 영국의 생산력의 과도한 발전 때문이다. 만약 영국의 생산력이 보다 "적당"하고, 그것들이 산업과 농경에서 상대적인 균형을 유지했다면, 영국 프롤레타리아트는 분명히 자신의 군사력에 의해 외국 개입으로부터 보호 받으면서, 자기 자신의 "고립된" 섬에서 완전한 사회주의를 건설할 수 있을 것이다.
4장에서, 강령초안은 자본주의 국가들을 3개의 그룹으로 나눈다.
1. "고도로 선진화된 자본주의 국가들(미국, 독일, 영국, 등)"
2. "중간 수준의 자본주의 발전을 이룬 국가들(1917년 이전의 러시아, 폴란드 등)"
3. "식민지와 반식민지 국가들(중국, 인도, 등)"
"1917년 이전의 러시아가 오늘날의 미국보다 오늘날의 중국에 훨씬 가까왔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만약 초안의 다른 부분들과 관련하여 이 부분이 잘못된 결론의 근원으로서 복무한다는 사실만 아니라면, 이 도식적인 분류에 대한 어떠한 진지한 반대도 삼갈 것이다. 초안에는 "중간 수준의" 국가들이 독립적인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충분한 산업적 최소치들"을 보유하고 있다고 선언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이 높은 자본주의 발전을 이룬 국가들에게는 더욱 더 진실이다. 외부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국가들은 오로지 식민지와 반식민지 국가들뿐이다. 이후에 보게 되는 것처럼, 이것이 강령초안의 또 다른 장에서 이들이 성격규정되는 방식이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국가의 천연자원, 국가 내부의 산업과 농경 사이의 관계, 세계 경제 체제에서 그 국가의 지위와 같은 다른 조건들을 빼면서, 이러한 기준만을 가지고 사회주의 건설의 문제들에 접근한다면, 우리는 새로운 총체적인 오류와 모순에 빠질 것이다. 우리는 조금 전에 영국에 관하여 말했다. 일고의 의심도 없이 고도로 발달한 자본주의 국가인 영국은 정확하게 이러한 이유 때문에[고도로 발전한 자본주의 때문에] 자기 자신의 섬이라는 한계 내에서 성공적으로 사회주의를 건설할 기회를 가지고 있지 않다. 영국은 만약 봉쇄가 된다면 몇 달이 지나지 않아 간단하게 목졸려 죽을 것이다.
분명히, 모든 다른 조건이 같다면, 보다 고도로 발달한 생산력은 사회주의 건설의 목적을 위한 엄청난 이점이다. 고도로 발달한 생산력은 전쟁 동안의 부르주아지 독일에 의해 증명된 것처럼, 봉쇄의 고리에 의해 둘러싸여 있을 때조차도 경제적 삶에 예외적인 유연성을 부여한다. 그러나 민족국가적 기초에서 사회주의의 건설은 이들 선진화된 국가들에게 총체적인 쇠퇴, 생산력의 대규모 감소, 즉, 사회주의의 임무들에 정확하게 반대되는 어떤 것을 의미할 것이다.
한편으로는 낮은 생산력은 일국에서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기초로서 복무하기에 불충분한 반면, 정반대의 이유 때문에 일국에서의 사회주의 건설의 기초는 고도로 발달한 생산력에 부적당한 것으로 증명될 것임에도 불구하고, 강령초안은 현재의 생산력과 민족국가적 경계들 사이의 양립불가능성이라는 근본적인 주제를 망각하고 있는데, 이것으로부터 고도로 발달한 생산력이 일국에서의 사회주의 건설에 대하여 낮은 생산력 보다 결코 작은 장애가 아니라는 것이 이어진다. 불균등발전의 법칙이 정확하게 그것이 가장 필요하고, 가장 중요한 지점에서 망각되고 있다.
사회주의의 건설의 문제는 단지 한 국가의 산업적 "성숙"이나 "미숙"에 의해서 결정되지는 않는다. 이 성숙은 그 자체로 불균등하다. 소련에서는, 산업의 일부 영역은 가장 기초적인 국내적 요구를 만족시키기에도 극단적으로 불충분하며 (특히 기계 건설), 반대로 다른 영역들은 현상태에서는 광범위하고 증가하는 수출 없이는 발전할 수 없다. 농경은 말할 것도 없고, 목재, 석유, 그리고 망간과 같은 가장 중요한 영역들이 후자에 속한다. 반면, 심지어 "불충분한" 영역들조차 만약 (상대적으로) "남아도는" 것들이 수출될 수 없다면, 제대로 발전할 수 없다. 유토피아나 아틀란티스에서가 아니라 우리의 땅위에 있는 경제라는 구체적인 지리적, 역사적 조건들에서 고립적인 사회주의 사회 건설의 불가능성은 다양한 국가들에게 다른 방식으로, 일부 영역의 불충분한 발전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다른 영역의 "과도한" 발전에 의해서도 역시 결정된다. 전체적으로, 이것은 현대의 생산력이 민족국가적 경계와는 양립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제국주의 전쟁은 무엇이었는가? 이것은 소유에 대한 부르주아지적 형식에 대한, 그리고 자본주의 국가들의 경계들에 대한 생산력의 반란이었다. 제국주의 전쟁은 생산력이 민족국가라는 경계들 속에 견딜 수 없게 속박되어 있다는 사실을 표현했다. 우리는 항상 자본주의는 자기 스스로가 발전시키는 생산력을 통제할 수 없으며, 오직 사회주의만이 자본주의 국가들의 경계를 넘어서 성장한 생산력을 보다 높은 경제적 실재 속으로 통합시킬 수 있다는 것을 주장해왔다. 고립된 국가로 되돌아가는 것으로 귀결되는 모든 길은 막혀 있어 왔다...") Minutes, 코민테른 중앙집행위원회 7차 대회간회의, 트로츠키의 연설, 100쪽
일국에서의 사회주의의 이론을 증명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강령초안은 이중, 삼중, 사중의 실수를 저지른다. 강령초안은 소련에서의 생산력을 과장한다. 강령초안은 산업의 다양한 영역에서의 불균등한 발전의 법칙에 대하여 눈을 감는다. 강령초안은 노동의 국제적 분할을 무시한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강령초안은 제국주의 시대에 고유한 가장 중요한 모순인 생산력과 민족국가적 경계 사이의 모순을 망각한다.
단 하나의 분석되지 않은 주장도 남겨두지 않기 위하여 우리에게는 새로운 이론을 지키기 위한 부하린의 또 하나의 명제, 그리고 더욱 일반화된 명제를 상기하는 일이 남아 있다.
부하린은 세계적 차원에서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 사이의 상호관계는 소련에 존재하고 있는 것보다 더 이상 우호적이지 않다고 말한다. 결론적으로, 만약 후진성이라는 이유 때문에 소련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세계 경제의 차원에서도 마찬가지로 현실화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이 주장은 변증법에 관한 모든 교과서에 형식적인 사고의 고전적인 예로서 포함될 만하다.
우선, 세계적 차원에서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 사이의 힘의 상호관계가 소련 내부에서의 상호관계와 굉장히 많이 다르다는 것은 매우 그럴듯하다. 그러나 세계 혁명은 결코 산술적 평균의 방식에 따라서 성취되지 않으며, 민족국가 단위의 혁명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10월 혁명은 노동자와 농민의 상호관계가 전체 러시아의 평균에 조응하는 지역을 선택하지 않고 프롤레타리아트의 페트로그라드에서 우선 발생했고 스스로를 견고히 했던 것이다. 페트로그라드 그리고 나중에 모스크바가 혁명정부와 혁명군대를 수립한 이후에, 이들은 수년에 걸쳐 외곽 지역에 있는 부르주아지를 타도해야만 했다. 그리고 혁명이라고 불리는 이 과정의 결과로서만 오직, 소련의 경계 내부에서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 사이의 현재와 같은 상호관계가 수립되었다. 혁명은 산술적 평균의 방식에 따라서 발생하지 않는다. 혁명이 보다 덜 우호적인 부문에서 시작될 수 있지만, 민족국가적 영역과 세계적 영역 모두의 결정적인 영역들에서 스스로를 견고히 할 때까지는, 자신의 완전한 승리에 관하여 말하는 것은 받아들여질 수 없다.
둘째, "평균적인" 기술 수준이라는 조건에서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 사이의 상호관계는 문제의 해결을 위한 유일한 요소가 아니다.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지 사이의 계급 전쟁이 추가적으로 존재한다. 소련은 노동자와 농민들의 세계로 둘러싸여 있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세계에 의해서 둘러싸여 있다. 부르주아지가 전세계적으로 타도된다고 해도, 이 사실이 그 자체로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 사이의 상호관계를 여전히 바꾸지 않으며, 소련 내부에서 그리고 전체 세계에서의 평균적인 기술 수준을 변경시키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련에서의 사회주의의 건설은 즉각적으로 완전히 다른 가능성들과 다른 비중들을 획득하는데, 이것은 현재의 가능성들과 비중들과는 절대적으로 양립이 불가능하다.
셋째, 부하린에 따르면, 만약 모든 선진국의 생산력이 어느 정도까지 민족국가적 경계를 넘어서 성장했다면, 그래서 모든 국가들의 생산력이 우리 지구의 한계를 넘어서 성장한 것이고, 결과적으로 사회주의가 태양계의 규모로 건설되어야만 한다는 것으로 귀결되어야 한다.
우리는 노동자와 농민의 평균적인 비율로부터 나오는 부하린의 주장이 모든 정치 입문서에 포함되어야만 한다고 반복했다. 이제는 당연히 일국에서의 사회주의의 이론을 방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도식적인 궤변과 맑스주의적 변증법 사이의 완전한 양립불가능성의 증거로서 포함되어야 한다.
9. 문제는 세계 혁명의 장에서만 오직 해결될 수 있다
새로운 이론은 개입만 없다면 사회주의가 민족국가적 기초에서 건설될 수 있다고 선포한다. 이것으로부터 개입을 피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는 외국 부르주아지를 향한 화해정책이 나올 수 있으며, 나올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이것이 사회주의 건설을 보장할 것이며, 즉 주요한 역사적 문제를 해결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코민테른에 있는 당들의 임무는 보조적인 성격을 띠게 되며, 그들의 임무는 개입으로부터 소련을 방어하는 것이지 권력의 장악을 위한 투쟁이 아니게 된다. 물론 이것은 주체적인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 사고의 객관적인 논리의 문제이다.
"관점에서의 차이는 당이 이들 [내부적] 모순들과 가능한 대립들이 우리 혁명의 내부적 힘에 기초하여 완전히 극복될 수 있는 것으로 간주하는 반면, 트로츠키 동지와 반대파는 이들 모순들과 대립들이 '오직 국제적 규모에서, 전세계적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의 장에서만' 극복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사실에 있다"고 스탈린은 말한다.) 프라우다 262호, 1926년 11월 12일
그렇다. 이것이 정확하게 그 차이이다. 사람들은 민족주의적 개량주의와 혁명적 국제주의 사이의 차이를 더 잘 그리고 더 정확하게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만약 근본적으로 세계적 모순의 반영인 우리의 내부적 어려움들, 장애물들, 그리고 모순들이 "전세계적인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의 장"으로 진입하는 것 없이, "우리 혁명의 내부적 힘"에 의해 단순히 해결될 수 있다면, 인터내셔널은 그것의 대회가 4년마다, 10년에 한번, 혹은 아마도 전혀 열리지 않아도 될 부분적으로는 보조적이고, 부분적으로는 장식용 기구가 될 것이다. 비록 우리가 다른 국가들의 프롤레타리아트가 군사적 개입으로부터 우리의 건설을 보호해야만 한다고 추가한다고 해도, 이 도식에 따르면 인터내셔널은 평화주의적 기구의 역할을 해야만 한다. 세계 혁명의 기구의 역할인 인터내셔널의 주요한 역할은 불가피하게 뒤로 밀려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반복하건대, 이것은 어떤 사람의 계획적인 의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반대로, 강령 속에 있는 다수의 요지들이 강령 저자들의 의도를 가장 잘 입증한다), 최악의 주관적인 의도 보다 1000배나 더 위험스러운 새로운 이론적 입장의 내부적 논리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사실상, 코민테른 중앙집행위원회 7차 대회간 회의에서조차, 스탈린은 아래의 사상을 발전시키고 방어할 만큼 과감했다.
"우리 당은 노동계급을 우롱할[!] 권리가 없다. 우리 당은 우리나라에서 사회주의 건설의 불가능성에 있어서의 확신[!]의 부족이 권력의 포기와 지배 정당으로서의 우리 당의 입장으로부터 야당의 입장으로 우리 당을 넘겨주는 것으로 귀결된다고 공공연하게 선언해야 한다." ) 저작집 2권 10쪽
이것은 우리가 민족국가적 경제의 불충분한 자원들에 대하여 확신할 권리만 있지, 국제 프롤레타리아트라는 무진장한 자원에 대해서는 감히 어떠한 확신을 해서도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우리가 국제 혁명이 없는 가운데 진행해나간다면, 권력을 포기하고 국제 프롤레타리아트의 이해에 따라서 정복했던 10월의 권력을 포기하는 것이다. 여기에 만약 우리가 핵심에서 잘못된 정식화로부터 나아간다면 도달하게 될 말하자면, 이론적 붕괴가 있다!
강령 초안은 소련의 경제적 성공들이 전세계적인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의 분리될 수 없는 한 부분을 구성한다고 말하면서 논쟁의 여지가 없는 사상을 표현한다. 그러나 새로운 이론의 정치적 위험성은 세계 사회주의의 두 가지 목적성취를 위한 방편들, 즉 우리의 경제적 성취들이라는 방편과 전세계적인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이라는 방편에 대한 잘못된 상대적 평가 속에 있다.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의 승리 없이, 우리는 사회주의를 건설할 수 없을 것이다. 유럽 노동자들과 전세계 노동자들은 이것을 분명하게 이해해야만 한다. 경제 건설이라는 방책은 엄청나게 중요한 것이다. 올바른 지도부가 없다면,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는 약화될 것이다. 그리고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붕괴는 국제 혁명에 타격을 입힐 것이며, 이 타격으로부터 국제혁명은 여러 해 동안 회복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회주의 세계와 자본주의 세계 사이의 중요한 역사적 투쟁의 결론은 두 번째 방책, 즉 세계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에 달려있다. 소련의 거대한 중요성은 소련이 세계 혁명의 기초라는 것에 있지, 소련이 세계 혁명과는 독립적으로 사회주의를 건설할 수 있다는 가정에 있는 것이 전혀 아니다.
부하린은 최고로 거만한 어조로 우리에게 두 번 이상 완전히 근거도 없는 아래와 같은 질문을 했다.
"만약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작업에서 선행조건들, 출발점들, 충분한 기초, 그리고 심지어 일정한 성공들이 존재한다면, 그것을 넘어설 때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 되어버릴' 한계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런 한계는 없다.") Minutes, 코민테른 중앙집행위원회 7차 대회간회의, 116쪽
이것은 역사적 변증법이 아니라 저열한 기하학이다. 그러한 "한계"는 있을 수 있다. 국제적인 한계뿐만 아니라 내부적인 한계, 경제적 한계뿐만 아니라 정치적 한계 등 몇 가지 그러한 한계들이 있다. 가장 중요하고, 가장 비참한 "한계"는 세계 자본주의의 중대하고 오랜 기간 동안의 안정화와 새로운 호황인 것으로 판명될 수 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문제는 정치적으로, 그리고 경제적으로 세계의 무대로 이동한다. 부르주아지가 자본주의 성장과 권력이라는 새로운 시대를 스스로 확보할 것인가? 자본주의가 그 자신이 그 속에 있음을 발견하게 될 "절망적인 형세"를 기대하면서, 단순히 그러한 가능성을 부인하는 것은 단지 혁명적 군말일 뿐이다. "절대적으로 절망적인 정세는 없다"(레닌). 유럽 국가들에서 현재의 불안정한 계급적 균형은 정확히 그것의 불안정성 때문에 무한정 계속될 수 없다.
스탈린과 부하린은 현재의 노동대중의 호의가 우리를 개입으로부터 보호해주기 때문에, 소련이 다른 나라들의 프롤레타리아트의 "국가"적 도움, 즉 다른 나라들의 프롤레타리아트의 부르주아지에 대한 승리 없이 나아갈 수 있다고 말할 때, 그들은 그들의 원칙적인 실수의 전체 지류들에서 드러나는는 것과 똑같은 무지를 드러낸다.
사회민주주의가 부르주아지에 반대하는 유럽 프롤레타리아트의 전후 봉기들을 방해했던 이후, 노동대중의 적극적인 호의가 소비에트 공화국을 구해주었다는 것은 절대적으로 명백하다. 이 동안에, 유럽의 부르주아지는 노동자 국가에 대한 대규모 전쟁을 수행할 수 없다는 것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이러한 세력들의 상호관계가 여러해 동안 계속될 것이라고, 즉 소련에서 사회주의가 건설될 때까지 계속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발전의 전체 곡선을 그것을 이루는 한 작은 조각으로 판단하려고 하는 것과 같이 완전히 근시안적인 것이다. 너무도 불안정하여 부르주아지는 자기 집의 주인이라는 것을 충분히 느끼지 못하는 반면, 프롤레타리아트는 권력을 장악할 수가 없는 정세는 한가지 혹은 다른 방식으로, 즉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에 우호적인 방식이거나 아니면 인민대중의 등짝 위에서, 식민지 인민들의 뼈 위에서, 그리고 아마도 자기 자신의 뼈 위에서 이루어지는 중대하고 오랜 기간 동안의 자본주의의 안정화에 우호적인 방식으로 갑작스레 해결될 것임에 틀림없다. "절대적으로 절망적인 정세는 없다!" 유럽의 부르주아지는 프롤레타리아트의 패배와 혁명적 지도부의 실책들을 통해서만 오직 자신의 중대한 모순들로부터 벗어나는 영속하는 길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역도 마찬가지로 진실이다. 프롤레타리아트가 혁명의 길에서 현재의 불안정한 균형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발견할 수 있게 되는 경우에만 오직 (물론, 위대한 격변의 새로운 시대라는 전망과 함께) 세계 자본주의의 새로운 호황은 없을 것이다.
"이제는 혁명적 정당들이 충분히 의식적이고 조직되어 있으며, 피착취 대중들과의 충분한 접촉을 가지고 있으며, 성공적이고 승리적인 혁명을 위하여 위기를 활용할 수 있는 결단력과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혁명적 정당들의 실천활동으로 '증명할' 필요가 있다.") 저작집 17권 264쪽
고 레닌은 1920년 7월 19일 2차 세계 대회에서 말했다.
그러나 유럽과 세계의 투쟁 추세에 직접적으로 달려 있는 우리의 내부적 모순들은 맑스주의적 예지에 기초한 올바른 정책으로 합리적으로 규제되고 완화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들 모순들은 계급 모순들이 극복될 때에만 오직 최종적으로 극복될 수 있으며, 이것은 유럽에서의 혁명의 승리가 없이는 불을 보듯 뻔하다. 스탈린이 옳다. 차이는 정확하게 이 지점에 있으며 이것이 민족주의적 개량주의와 혁명적 국제주의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이다.
10. 사회애국주의적 대실수의 연속으로서의 일국에서의 사회주의 이론
일국에서의 사회주의의 이론은 극복되어야만 하는 어려움에 대한 과소평가와 획득된 성취들에 대한 과장으로 귀결된다. 사람들은 "소련에서 사회주의가 이미 90% 현실화되었다"라는 취지의 스탈린의 선언보다 더 반사회주의적이고 반혁명적인 주장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이 선언은 특히 독선적인 관료들을 위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하여 사람들은 노동 대중들의 관점에서는 사회주의 사회라는 사상을 절망적으로 불신할 수 있다. 소비에트 프롤레타리아트가 성취한 성공들이 획득되어 온 조건들과 소비에트 프롤레타리아트가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낮은 문화적 수준을 감안할 때, 소비에트 프롤레타리아트는 웅대한 성공을 성취했다. 그러나 이들 성취들은 사회주의의 이상의 규모에서는 극히 미량을 이루고 있다. 혁명 11년째 되는 해에 가난, 비참함, 실업, 빵을 위해 늘어선 줄들, 문맹, 집없는 아이들, 알콜중독, 그리고 성매매가 그들 주변에서 줄어들지 않았음을 알고 있는 노동자, 농경 노동자, 빈농들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달콤한 거짓말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가혹한 진실이 필요하다. 사회주의가 90% 현실화되었다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그들에게 우리의 경제적 수준, 우리의 사회적, 그리고 문화적 상황들이 사회주의에 보다는 자본주의에, 그리고 후진적이고 비문명화된 자본주의에 훨씬 더 가깝다고 말해야만 한다. 우리는 그들에게 우리는 오직 최선진국들의 프롤레타리아트가 권력을 장악했을 때에야만 비로소 진정한 사회주의 건설의 길에 들어서게 될 것이라고 말해야만 한다. 그리고 이것을 위하여 우리의 내부적인 경제적 노력들이라는 짧은 방책과 국제 프롤레타리아트 투쟁이라는 긴 방책 두 가지 모두를 사용하면서 끊임없이 활동해야할 필요가 있다.
간단히 말해서, 90%가 이미 성취되었다는 사회주의에 관한 스탈린주의적 문구들 대신에, 우리는 그들에게 레닌의 아래의 문구들을 말해야만 한다.
"만약 우리가 모든 비관주의와 미사여구를 떨쳐버린다면, 만약 우리가 이를 악물고 우리의 모든 힘을 모으고 모든 신경과 근육을 꽉 죈다면, 만약 우리가 구원은 우리가 진입했던 국제 사회주의 혁명의 길과 함께 할 때에만 오직 가능하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빈곤의 땅) 러시아는 그러한 땅 (풍요의 땅)이 될 것이다.") 저작집 15권 165쪽
코민테른의 최고 지도자로부터 우리는 당연히 일국에서의 사회주의의 이론은 근거가 없다는 주장과, 힘든 조건에서 애를 쓰고 있는 러시아 노동자들에게 전망을 제공하며 용기를 주는 그런 주장을 들었다. 강령 속에서 자신들의 계급 방침을 위한 과학적 기초가 아니라 정신적인 위안을 추구하는 자들의 이론적 붕괴의 깊이를 측정하는 것은 힘든 일이다. 사실들에 모순되는 위안을 주는 이론들은 과학이 아니라 종교의 영역에 적합하다. 그리고 인민에게 종교는 아편이다.
우리 당은 일국에서의 사회주의가 아니라 국제 혁명을 향한 강령을 가졌던 영웅적 시기를 거쳐왔다. 후진적인 러시아 혼자서, 러시아의 힘만으로는 사회주의를 건설하지 못할 것이라는 강령적 기치하에, 청년공산주의동맹은 내전, 기아, 추위, 힘든 주말노동, 전염병, 부족한 배급에 대한 배려들, 그리고 모든 전진의 발걸음을 위해 바쳐졌던 수많은 희생들을 거쳐왔다. 당과 공산주의청년동맹의 조직원들은 전선에서 투쟁했거나 기차 역에 침목용 나무를 날랐는데, 이것은 그들이 이들 침목들로부터 민족국가적 사회주의를 건설하고 싶었기 때문이 아니라 소비에트라는 요새를 지켜내는 것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만들었던 국제혁명의 대의에 복무하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하나 하나의 모든 침목이 소비에트 요새를 위해 중요하다. 이것이 우리가 문제에 접근하기 위해 사용했던 방식이다. 시대가 변했고 세상이 바뀌었지만 (그렇게 철저하게는 아니지만), 원칙적인 접근은 현재에조차 완전한 위력을 가지고 있다. 노동자, 빈농과 유격병, 그리고 청년 공산주의자는 새로운 복음이 처음으로 선포되었을 때인 1925년까지의 그들의 모든 실천으로 그들은 새로운 복음이 필요 없음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높은 곳에서 대중들을 내려다보는 관리들, 방해받고 싶어하지 않는 소행정가, 모든 것을 구원하고 위안하는 정식이라는 덮개 아래에서 지배하고자 하는 기관 종사자들이 새로운 복음을 필요로 했다. 무지한 인민들은 "좋은 소식"을 필요로 하며, 위안을 주는 이론들 없이는 인민들을 다룰 수 없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그들이다. "90% 사회주의"에 관한 잘못된 문구들을 들어올리는 자들이 그들인데, 이것은 이 정식이 그들의 특권화된 지위, 지배하고 명령할 수 있는 권리, "회의적"인 자들과 "신념이 부족한"자들 쪽에서의 비판을 제거하기 위한 그들의 필요성을 허용해주기 때문이다.
일국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할 가능성에 대한 부정이 기를 꺾고 열정을 죽인다는 취지의 불평과 비난들은 비록 완전히 다른 조건에서 기원함에도 불구하고, 이론적으로 그리고 심리학적으로 개량주의자들이 항상 혁명주의자들에게 퍼부어 온 비난들과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다. 개량주의자들은 "당신들은 그들이 자본주의 사회의 틀 내에서 자신들의 몫을 진실로 개선할 수 없다고 노동자들에게 말하고 있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당신들은 노동자들의 투쟁하고자 하는 동기를 죽인다."고 개량주의자들은 말한다. [그러나] 참으로 노동자들이 진정으로 경제적 성취들을 위하여, 의회적 개혁을 위하여 투쟁했던 것은 혁명주의자들의 지도하에서 였을 뿐이다.
세계 자본주의라는 지옥 속에 있는 오아시스와 같은 사회주의적 파라다이스를 건설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이해하는 노동자, 그리고 소비에트 공화국의 운명과 그래서 그 자신의 운명이 국제 혁명에 전적으로 달려 있음을 이해하는 노동자는 우리가 이미 보유하고 있는 것이 90% 정도의 사회주의라는 것을 듣는 노동자 보다 훨씬 더 정력적으로 소련에 대한 자신의 임무를 수행할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사회주의를 향하여 투쟁할 가치가 있는가? 여기서도 역시 개량주의적 방책이 언제나 처럼 혁명을 위해서가 아니라 개량을 위해서 작동한다.
이미 인용되었던 유럽합중국 슬로건을 다루고 있는 1915년에 쓰여진 글에서, 우리는 아래와 같이 썼다.
"민족국가적 경계 내부에서 사회혁명의 전망에 접근하는 것은 사회애국주의의 본질을 이루고 있는 똑같은 민족주의적 편협함에 희생되는 것이다. 베이앙[Vaillant]은 그의 말년까지 프랑스를 사회혁명의 약속된 땅으로 생각했는데, 이것은 정확하게 그가 끝까지 민족국가에 대한 방어를 지지했던 이런 관점으로부터 였다. 렌쉬[Lensch]와 그 도당은 (일부는 위선적으로, 그리고 다른 자들은 진지하게) 독일의 패배가 무엇보다도 사회혁명의 기초의 파괴를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일반적으로 사회애국주의에는 가장 천박한 개량주의와 나란하게, 자신들의 산업적 수준 때문이건 혹은 '민주주의적' 형식과 혁명적 성취들 때문이건, 자기 자신의 민족국가가 사회주의를 향하여 혹은 '민주주의'를 향하여 인류를 이끄는 것이 요구된다고 생각하는 민족주의적인 혁명적 메시아주의가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만약 하나의 보다 발전된 국가의 경계 내에서의 혁명의 승리를 실제로 생각할 수 있다면, 민족국가에 대한 방어의 강령과 함께 이 메시아주의는 일정정도 상대적인 역사적 정당성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사실상 이것은 생각할 수 없다. 프롤레타리아트의 국제적 결합을 침해하는 방식으로 혁명의 민족국가적 기초를 보존하기 위하여 투쟁하는 것은 실제로 혁명 그 자체를 침식하는 것을 의미하며, 이것은 민족국가적 기초에서 시작될 수는 있지만, 일찍이 현재의 전쟁 동안만큼 강제적으로 폭로된 적이 결코 없었던 유럽 국가들의 현재의 경제적, 군사적, 그리고 정치적 상호의존성 하에서 민족국가적 기초에서는 완수될 수 없다. 직접적으로 그리고 즉각적으로 혁명에서 유럽 프롤레타리아트 쪽에서의 공동 실천을 필요로 할 이 상호의존성은 유럽합중국 슬로건으로 표현될 수 있다.") 저작집 3권 1부 90? 쪽
1915년 논쟁에 대한 잘못된 해석으로부터 나아가면서, 스탈린은 내가 레닌을 "민족주의적 편협함" 하에 있다고 넌지시 비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여러 번 애썼다. 레닌과 나의 논쟁에서, 나는 항상 공개적으로 논쟁을 했는데, 이것은 내가 오직 이데올로기적 고려에만 따랐기 때문이었다. 레닌은 위의 경우에 전혀 관련되어 있지 않았다. 그 글은 그것이 비난을 가하는 자들의 이름 즉, 베이앙, 렌쉬 등을 언급한다. 1915년이라는 해는 사회애국주의적 법석의 해였고 그것에 맞서는 우리의 투쟁이 그것과 충돌하던 해였다는 것을 상기해야만 한다. 이것이 모든 문제를 위한 우리의 시금석이었다.
전술되었던 문단에서 제기되는 근본적인 문제는 의심의 여지없이 올바르게 정식화되었다. 즉, 일국에서 사회주의의 건설의 개념은 사회애국주의 개념이다.
독일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애국주의는 제2 인터내셔널에서 가장 강력한 당인 그들 자신의 당에 대한 본격적인 애국심으로서 시작되었다. 고도로 발달한 독일의 공업기술과 독일 인민들의 우월한 조직적 특성에 기초하여, 독일 사회민주주의는 자기 "자신의" 사회주의 사회의 건설을 준비했다. 만약 강력해진 관료들, 출세주의자들, 의회적 사기꾼들, 그리고 일반적으로 정치적 도둑놈들을 제쳐둔다면, 사회민주당 평당원의 사회애국주의는 정확하게 독일 사회주의 건설에 대한 믿음으로부터 나온다. 수십만 명의 사회민주당 평당원들(수백만의 평조합원 노동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이 호엔졸레른가나 혹은 부르주아지를 방어하고자 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니다. 그들은 사회주의를 위한 "필요하고 충분한" 민족국가적 선행조건들로서의 독일 산업, 독일 철도와 고속도로, 독일의 공업기술과 문화, 특히 독일 노동계급의 조직들을 보호하고자 했다.
비슷한 과정이 프랑스에서도 역시 벌어졌다. 게드[Guesde], 베이앙, 그리고 그들과 함께 수천 명의 평당원들, 그리고 수십만 명의 평범한 노동자들은 혁명적 전통과 영웅적인 프롤레타리아트, 고도로 문명화되고, 유연하며 능력을 갖춘 인민들을 보유하고 있는 프랑스가 정확하게 사회주의의 약속된 땅이라고 믿었다. 고참 게드와 파리코뮨의 베이앙, 그리고 그들과 함께 수십만 명의 진지한 노동자들은 은행가들과 대부업자들을 방어하기 위해 투쟁하지 않았다. 그들은 진지하게 자신들이 미래 사회주의 사회의 땅과 창조적 힘을 방어하고 있다고 믿었다. 그들은 완전히 일국에서의 사회주의의 이론으로부터 나아갔으며, 이 사상의 이름으로 그들은 그 희생이 "일시적"인 것이 라고 믿으면서 국제적 연대를 희생시켰다.
물론 사회애국주의자들과의 이러한 비교에 대하여 소비에트 국가에 대한 애국주의는 혁명적 임무인 반면 부르주아 국가에 대한 방어주의는 배신이라는 주장이 답으로 돌아올 것이다. 사실이다. 성숙한 혁명가들 사이에 이 문제에 대한 논쟁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우리가 말하게 될 것처럼, 이 논쟁의 여지가 없는 가정이 교묘한 거짓말을 위한 형식적인 차단막으로 점점 더 변모한다.
혁명적 애국주의는 계급적 성격만을 가질 수 있을 뿐이다. 이것은 당 조직에 대한 충성심, 노동조합에 대한 충성심으로서 시작되어 프롤레타리아트가 권력을 장악하게 되면 국가에 대한 충성심으로 상승한다. 권력이 노동자들의 수중에 있는 때는 언제나, 애국주의는 혁명적 임무이다. 그러나 이 애국주의는 혁명적 국제주의의 분리될 수 없는 한 부분이어야만 한다. 맑스주의는 항상 노동자들에게 심지어 임금인상과 노동시간 단축 투쟁조차도 만약 국제적 투쟁으로서 수행되지 않는다면 성공적일 수 없다고 가르쳤다. 그리고 현재 느닷없이 사회주의 사회가 민족국가적 힘만으로도 성취될 수 있다고 하는 이상이 등장한다. 이것은 인터내셔널에 대한 치명적인 타격이다.
근본적인 계급적 목적은 민족국가적 수단을 가지고서는 혹은 민족국가적 경계 내에서는 현실화될 수 없으며, 부분적 목적들을 위해서는 더욱 더 그렇다는 것에 대한 꺾을 수 없는 확신이 혁명적 국제주의의 심장을 이룬다. 그러나 만약 궁극적인 목적이 민족국가단위의 프롤레타리아트의 노력을 통하여 민족국가적 경계 내부에서 현실화된다면, 국제주의의 중추가 깨어지는 것일 것이다. 일국에서 사회주의의 현실화 가능성의 이론은 승리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애국주의와 부르주아지 국가들의 프롤레타리아트의 패배주의 사이의 내부적 연결을 파괴한다.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의 프롤레타리아트는 여전히 권력을 향한 길에 있다.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의 프롤레타리아트가 어떻게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권력을 향해 나아갈 것인가는 전적으로 프롤레타리아트가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는 임무를 민족국가적 임무로 여기는가 아니면 국제적 임무로 여기는가에 달려있다.
만약 일국에서 사회주의를 현실화는 것이 조금이라도 가능하다면, 사람들은 권력장악 이후뿐만 아니라 권력장악 이전에도 이 이론을 믿을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사회주의가 후진적인 러시아라는 민족국가적 경계 내부에서 현실화될 수 있다면, 무엇보다도 사회주의가 선진화된 독일에서 현실화될 수 있다는 것을 믿을 만한 근거가 있을 것이다. 내일 독일 공산당 지도자들은 이 이론을 제출하려고 시도할 것이다. 강령 초안이 그들이 그렇게 할 권한을 부여할 것이다. 다음 날에는 프랑스 당의 차례가 될 것이다. 이것이 코민테른의 사회애국주의 노선에 따른 분열의 시작이 될 것이다. 특정 국가가 "완전한 사회주의 사회"의 독립적인 건설을 위한 "필요하고 충분한" 선행조건들을 갖추고 있다는 사상으로 고취될 어떠한 자본주의 국가의 공산당도,역시 노스케에서 시작하지는 않았으나, 1914년 8월 4일에 결정적으로 바로 이 똑같은 문제에 관하여 실책을 저질렀던 혁명적 사회민주주의와 본질적인 어떠한 측면에서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노동자 공화국과 관련하여 애국주의는 혁명적 임무이기 때문에, 소련의 존재 자체가 사회애국주의에 맞서는 보증이라고 선언될 때, 올바른 사상의 이러한 일면적인 적용에는 민족주의적 편협함이 표현되어 있다. 세계 전체의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하여는 눈을 감은 채, 그렇게 말하는 자들은 오직 소련만을 염두에 두고 있다. 이 중심적인 문제에 관하여 강령 속에 있는 국제주의적 방침에 의해서만 오직, 그리고 아직까지는 가려져 있지만, 레닌의 인터내셔널의 강령 속에 스스로 이론적 둥지를 틀려고 하는 사회애국주의에 대한 가차없는 거부를 통해서만 오직 부르주아지 국가와 관련하여 패배주의의 입장으로 프롤레타리아트를 지도하는 것이 가능하다.
맑스와 레닌의 길로 복귀하는 것이 아직 너무 늦은 것은 아니다. 이러한 복귀는 진보를 향한 유일하게 생각할 수 있는 길을 열어제치는 것이다. 우리는 구원이 존재하는 이러한 복귀의 현실화를 가능하게 만들기 위하여 코민테른 6차 대회에 강령초안에 대한 이 비판을 제출한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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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츠키
1939년 5월
국가에 관한 보나파르트적 철학
스탈린에 의해 선포되었던 국가에 관한 새로운 이론이 모스크바에서 있었던 18차 당대 회에서 스탈린의 보고의 중심적인 것들 중의 하나였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스탈린이 이렇게 위험한 모험을 감행한 것은 어떤 선천적인 기질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필요성 때문이었다. 불과 얼마 전에, 둘 다 정통 스탈린주의자들인 법학자 클리렌코와 파슈카니스가 사회주의란 국가의 점차적 소멸을 의미한다는 취지로 맑스, 엥겔스, 그리고 레닌의 사상을 반복했다는 이유로 분쇄되고 제거되었다. 이 이론은 크레믈린 지배자들로서는 수용할 수 없는 것이었다. 뭐라고, 소멸한다고? 그렇게도 빨리? 관료는 이제 삶을 시작하고 있다. 클리렌코와 파슈카니스는 분명하게 "파괴자들"이다.
소비에트 삶의 현실들
오늘날 소비에트 삶의 현실을 과거 이론의 파편들에 조차 일치시키는 것은 참으로 거의 가능하지 않다. 노동자들은 공장에 묶여 있고, 농민은 집산 농장들에 묶여 있다. 여권이 다시 도입되었다. 이동의 자유가 완전하게 제한되어 왔다. 일에 지각하는 것은 주요한 범죄행위가 되었다. 스탈린에 대한 어떠한 비판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지도자" 앞에 네발로 기어야 할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 것조차 반역으로 처벌될 수 있다. 국경은 발도 들여놓을 수 없는 정도로 국경 순찰대와 경찰견들에 의해 전대미문의 규모로 방비되고 있다. 어떠한 의도나 목적으로건 떠날수도 없고 들어갈 수도 없다. 과거에 국가로 들어왔었던 외국인들은 체계적으로 제거되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민주적인" 소비에트 헌법의 요점은 모든 시민은 스탈린이나 그의 대행인들에 의해 지명된 단일 후보를 위해 투표하기 위하여 사전 예약을 해야한다는 정도에까지 이른다. 언론, 라디오, 모든 선전, 선동, 전국적인 교육 기관들이 완전하게 지배 도당의 수중에 있다. 공식적인 통계에 따르면, 지난 5년 동안 50만 명 이상의 당원이 당으로부터 쫓겨났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총살 당하고, 감옥과 강제 수용소에 보내지거나 혹은 시베리아로 추방당했는지, 우리는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그러나 수십만 명의 당원들이 수백만 명의 비당원 인민들과 운명을 공유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스탈린주의 국가가 소멸하고 있다는 사상을 이들 수백만의 사람들, 그들의 가족, 친지, 그리고 동료들에게 주입시키는 것은 엄청나게 힘들 것이다. 대신에 이것은 국가를 인류역사상 전대미문의 난폭함으로 몰아갔다.
그러나 사회주의가 실현되었다는 것이 공식적인 포고이다. 공식적인 문구에 따르면, 나라는 완전한 공산주의로 향하고 있다. 베라가 의심을 품는 자들의 어리석음을 깨우쳐 줄 것이다. 그러나 여기 주요한 어려움이 스스로 현상한다. 맑스, 엥겔스, 그리고 레닌을 믿는다면, 국가는 계급 지배의 기관이다. 맑스주의는 국가에 대한 다른 모든 정의들은 착취자의 이해관계를 덮어 가리는데 복무하는 이론적 왜곡이라는 것을 오래 전에 폭로했다. 그런데 "계급이 파괴된" 나라에서 국가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크레믈린의 현자들은 이 문제에 관하여 적어도 한번은 고민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물론, 그들은 처음에는 국가에 관한 맑스의 이론을 상기시키는 모든 사람들을 체포하는 것으로 나아갔다.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스탈린주의적 절대주의에 대한 이론적 설명의 외관을 제공하는 것이 필요했다. 그러한 설명은 두 번에 걸쳐 나오고 있다. 5년전 17차 당대회에서 스탈린과 몰로토프는 경찰 국가가 구 지배계급들의 "잔재들"과 특히 트로츠키주의 "분열주의자들"에 맞서는 투쟁을 위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그들은 이들 잔재들과 분열주의자들은 확실히 비중이 크지 않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들이 극단적으로 "광포하기" 때문에, 이들에 맞서는 투쟁은 최고의 주의와 무자비함을 요구했다. 이 이론은 예외적으로 바보 같은 것이다. 소비에트 민주주의가 지배계급 그 자체를 타도하기에 충분함을 완전히 증명했다면, 왜 전체주의 국가가 "무기력한 잔재들"에 맞서 투쟁해야 있는가? 대답이 없다.
그러나 설사 그렇다고 해도, 17차 당대회 당시의 이 이론은 폐기되어야만 한다. "트로츠키주의 분열주의자들"을 파괴하는데 지난 5년의 상당부분을 보냈다. 당, 정부, 군대, 그리고 외교단들이 짜낼 대로 짜내지고 머리가 잘렸다. 사태가 너무나도 나아가서, 스틸린이 자기 자신의 기구들을 달래기 위하여 앞으로는 더 이상의 대대적인 숙청을 동원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해야만 했다. 물론 이것은 거짓말이다. 보나파르트 국가는 앞으로도 지난 때와 마찬가지로 사회를 육체적으로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집어삼켜버리도록 강제될 것이다. 이것은 스탈린에 의해 수용될 수 없다. 그는 숙청이 다시 있지 않을 것이라고 맹세한다. 만약 그렇다면, 그리고 만약 구 지배계급의 "잔재들"과 함께 트로츠키주의 "분열주의자들"이 완전히 파괴된다면, "누구에 반대하여 국가가 필요한가?"라는 문제가 생긴다. 스탈린은 이번에는 "국가의 필요성은 자본주의에 의한 포위와 이 곳으로부터 사회주의의 땅으로 흘러 들어오는 위험들 때문에 발생한다."고 대답한다. 자신에게는 너무나도 익숙한 종교학을 공부하는 학생과 같은 변하지 않는 태도로, 스틸린은 이런 생각을 다음과 같이 반복해서 재탕할 것이다. "국가 내부에서의 군사적 압력의 기능은 감소하고 사라졌다.... 외부 공격으로부터 국가에 대한 군사적 방어의 기능은 완전하게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우리의 군대, 형벌기관, 정보기관에 관해서는, 그들의 가시가 더 이상 국가 내부로 향해 있는 것이 아니라 외부의 적을 향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스탈린이 자신의 과거 이론을 논박하다
논쟁을 위하여 이 모든 것들이 실제 사실이라고 해보자. 중앙집중화된 관료 기구를 보존하고 강화해야할 필요성이 오로지 제국주의의 압력으로부터만 생긴다고 해보자. 그러나 국가는 바로 그 성격상 인간에 대한 인간의 지배이다. 반면 사회주의는 모든 형태의 인간에 대한 인간의 지배를 청산할 것을 목적으로 한다. 만약 국가가 점점 더 사나와 지면서 보존될 뿐만 아니라 강화되기까지 한다면, 이것은 사회주의가 아직은 성취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만약 특권화된 국가 기구가 자본주의의 포위의 산물이라면 이것은 자본주의의 포위 속에서는, 고립된 국가에서는, 사회주의가 불가능함을 의미한다. 자신의 꼬리를 위험에서 빼내려고 하던 스탈린이 주둥이를 잡혔다. 자신의 보나파르트적 지배를 정당화하면서, 내친김에 스탈린은 일국에서 사회주의 건설이라는 자신의 주요한 이론을 논박한다.
그러나 스탈린의 새로운 이론은 자신의 과거 이론을 논박하는 부분에서만 오직 올바르다. 다른 모든 곳에서 그의 이론은 완전히 가치가 없다. 제국주의로부터의 위험에 맞서는 투쟁을 위하여 노동자 국가는 자연스럽게 군대, 지휘관, 정보기관 등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것이 노동자 국가가 자신의 지위에 상응하는 수입과 특권을 가진 령관급, 장성급, 사령관들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용맹스럽고 엄격했던 적군이 아직까지는 특별 장교 부대도 없었던 때인 1920년 10월 31일에 군대와 관련하여 발표된 한 포고에 "군대 조직 내부에 몇 가지 경우에는 완전히 이해할 수 있고 심지어 피할 수 없는 불평등이 있기는 하지만, 다른 경우 절대적으로 불필요하고, 과도하며 심지어 범죄적인 불평등이 있다"는 내용이 발표되었다. 이 포고의 결론 부분은 다음과 같다. "군대 내에 있는 모든 특전들을 즉각적으로 제거한다는 성취 불가능한 임무를 제기하지 않으면서, 우리는 체계적으로 이들 특권들을 최소한으로까지 줄이기 위하여, 그리고 군사적 기예로부터는 전혀 발생되지 않고, 적군 병사들 사이의 평등의 감정과 전우애를 침해하기만 할 수 있을 뿐인 이들 모든 특권들을 가능한 빨리 제거하기 위하여 진정으로 노력해야만 한다." 이것이 당시 소비에트 정부의 근본적인 노선이었다. 현재의 정책은 정확하게 반대 방향을 향하고 있다. 오늘날 군대와 시민 계층의 성장과 강화는 누구에게 죄가 있건, 그것이 외국 제국주의자들이건 혹은 국내의 보나파르티스트들이건 상관없이 사회주의의 이상으로부터 사회가 멀어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스탈린이 국가를 이루는 핵심요소로 바라보고 있는 정보기관에도 똑같은 것이 적용된다. GPU 요원들이 거의 다수를 첨하고 있던 대회에서, 스탈린은 "정보기관은 외국의 정보기관들이 우리 나라로 침투시킨 간첩들, 암살자들, 그리고 파괴자들을 체포하고 징벌하기 위하여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연했다. 물론 제국주의의 침략에 맞서기 위한 정보기관의 필요성을 부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의 핵심은 소비에트 시민 자신들과 관련하여 이들 정보기관의 조직들이 차지하고 있는 지위에 있다. 계급이 없는 사회는 내부적인 연대라는 결속과 따로 떼어낼 수 없다. 스탈린 자신의 보고에서 여러번 이러한 연대를 언급했고 이것을 "하나가 된 것과 같"다고 칭찬했다. 스탈린을 믿는다고 쳐도, 쇠퇴하는 부르주아지 사회에서는 벌어지지 않는 범죄들이 소련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혹은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간첩들과 분열주의자들이 어떻게 사회주의 사회에서 정부의 일원으로서 그리고 심지어는 수장으로서, 정치국의 성원으로서, 그리고 군대의 최고 성원으로서의 지위를 차지할 수 있는가? 결국, 만약 사회주의 사회가 내부적으로 융통성이 너무도 부족하여, 그 사회주의 사회를 구하기 위해서는 모든 권력을 가지는, 전면적인 전체주의적 정보기관에 의지해야만 한다면, 총살당한 야고다나 불명예스럽게 축출 당한 에죠프 같은 깡패들이 정보기관의 수장으로 등장한다면 문제는 굉장히 나빠질 것임에 틀림없다. 그럼 의지할 만한 사람은 있는가? 베리야? 그에게도 역시 곧 조종이 울릴 것이다!
GPU가 간첩들이나 제국주의 대행인들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지배 도당의 정치적 반대파를 파괴한다는 것은 사실상 잘 알려져 있다. 스탈린이 시도하고 있는 모든 것은 음모를 "이론"의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것이다. 그러나 관료가 자신의 진짜 목적을 덮어 가리고 자신에 대한 혁명적 반대파들을 외국 간첩의 딱지를 붙이도록 강요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제국주의의 포위는 이러한 음모들을 설명하지 못한다. 그 이유는 소비에트 사회의 구조 그 자체로부터 발생되는 내부적 성격 때문임이 분명하다.
스탈린 자신의 입술로부터 보충적인 증거를 찾아보기 위해 시도해보자. 나머지 자신의 보고와의 어떠한 연관도 없이, 그는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국부를 도적질하는 자들, 착복하는 자들에 맞서 강제의 역할이 아니라 사회주의적 소유를 방어하는 역할을 국가에 명백하게 했다." 이렇게 해서 국가는 외국 간첩들에 맞서서 뿐만 아니라 국내의 도적들에 맞서서 또한 존재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들 도적들의 지배가 너무나도 커서, 이것이 전체주의적 독재의 존재를 정당화해주며, 심지어 국가에 대한 새로운 철학의 기초를 제공해준다. 만약 사람들이 서로간에 도적질을 한다면, 도적질로 유도하는 잔혹한 빈곤과 명백한 불평등이 사회를 여전히 지배하고 있다는 것이 지극히 분명하다. 이제 우리는 사태의 뿌리까지 더욱 가까이 파헤쳤다. 사회적 불평등과 빈곤은 그 자체가 국가의 존재를 설명해주는 매우 중요한 역사적 요소들이다. 불평등은 언제나 경비를 필요로 하고, 특권은 언제나 보호를 요구하며, 상속권이 없는 자들의 경제적 침해는 징벌을 필요로 한다. 이것이 정확하게 역사 속에서의 국가의 역할이다!
스탈린이 침묵하고 있는 것
"사회주의" 사회의 구조와 관련하여, 스탈린의 보고에서 중요한 것은 그가 말한 것이 아니라 그가 침묵을 통해서 넘어간 것이다. 그에 따르면, 노동자와 민간 피고용인의 수가 1933년 2천2백만에서 1938년 2천 8백만 명으로 증가했다. 위에서 말한 "피고용인들"의 범주에는 협동조합 상점의 점원뿐만 아니라 인민위원회 성원도 포함된다. 노동자들과 피고용인들이 여기서는 한꺼번에 합산되는데, 이것은 소비에트 통계들에서 항상 그러하듯이, 관료가 수적으로 얼마나 많은가, 얼마나 빨리 성장하고 있는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관료의 수입이 얼마나 급속하게 증가하고 있는가를 드러내지 않기 위함이다.
지난 두 번의 당대회가 경과했던 5년 동안에 노동자와 피고용인들의 연간 임금 액수가 스탈린에 따르면 350억에서 960억으로 거의 3배(만약 우리가 루블의 구매력 변화를 감안하지 않을 때) 증가했다. 그러나 이 960억의 돈이 다양한 노동자와 피고용인들 사이에서 어떻게 나쥐어졌을까? 이것에 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다. 스탈린은 우리에게 오직 "1933년에 1513루블이었던 산업 노동자의 연평균 임금이 1938년에는 3447루블이 되었다"는 것만을 말할 뿐이다. 놀랍게도 여기서의 언급은 노동자들에게 대한 것만이다. 그러나 노동자와 피고용인들 양자에 관해서라면 문제가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스탈린이 언급했던 노동자와 피고용인들의 연간 임금 총액 960억 루블을 얻기 위해서는 연소득(3477루블)을 노동자와 피고용인 숫자(2천8백만명)을 곱하기만 하면 된다. 노동자들의 지위를 윤색하기 위하여, "지도자는" 이렇게 가장 의식이 낮은 부르주아 글쟁이도 부끄러워했을 가장 천박한 속임수를 쓰고 있다. 결론적으로 만약 우리가 화폐의 구매력에서의 변화를 제껴둔다면, 3447 루블의 연평균 임금은 단지 만약 비기능직, 기능직 노동자, 스타카노비스트들, 기능공들, 기업의 감독들, 산업의 인민위원들의 임금이 모두 합산한다면, 우리는 일인당 3500루블에 미치지 못하는 평균 임금을 얻게 된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지난 5년 동안의 노동자, 기능공들, 그리고 최고 직위에 있는 개인에서의 증가는 어떠했는가? 이것에 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다. 임금과 수입 등에 관한 평균적인 통계는 가장 저질의 부르주아지 옹호자들이 의지해온 것들이다. 문명화된 나라들에서는 이러한 방법은 더이상 누구도 속일 수 없기 때문에 아주 충분히 폐기되었다. 그러나 사회주의가 성취되고, 모든 사회적 관계들이 그것들의 분명한 명확성을 특징으로 하는 땅에서는 가장 즐겨 사용하는 방법이 되었다. 레닌은 "사회주의는 회계이다"라고 말했다. 스탈린은 "사회주의는 허세를 부려 속이는 것이다"라고 가르친다.
다른 어떤 것보다도, 스탈린이 인용했던 위의 평균적인 합계들이 지배계층과 같은 최고위층의 "피고용인들"의 모든 수입을 포함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가장 적나라한 종류의 대 범죄이다. 실제로 소위 책임감 있는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공식적인 상대적으로 작게 잡은 봉급 외에 중앙이나 혹은 지방의 재무 위원회로부터 비밀 봉급을 추가로 받는다. 그들은 자기 자신의 자동차("책임감 있는 노동자들"의 용도를 위하여 최상의 자동차를 만들어내는 특별 공장들이 존재하기조차 한다), 훌륭한 아파트, 여름 별장, 요양원, 병원을 가지고 있다. 모든 종류의 "소비에트 궁전들"이 그들의 필요와 허영을 위하여 세워진다. 그들은 최고의 교육기관, 극장 등을 거의 독점한다. 이들 모든 엄청난 소득의 원천들은 물론 스탈린이 언급했던 960억에 포함되지는 않는다(이것들은 국가의 비용이다). 그러나 아직 스탈린은 이들 합법적인 임금 총액(960억)이 어떻게 노동자와 피고용인들 사이에서, 비기능직 노동자들과 사타카노피스트들 사이에서, 피고용인들의 상층과 하층 사이에서 분배되는지의 문제에 대해서는 감히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다. 공식적인 임금 상승의 최고의 혜택은 스타카노비스트들에게, 그 다음은 기능공들에게 가는 식일 것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 정확함의 수치로 신뢰를 주지도 못하는 평균수치를 가지고 장난을 하면서, 노동자와 피고용인들을 하나의 범주로 합산하면서, 관료의 최고위층을 피고용인들과 합해버리면서, 수백 억의 은밀한 액수에 관해서는 침묵으로 지나가면서, 피고용인들에 관하여 언급하는 것은 "잊으면서", 오직 "평균임금"을 결정하는데 있어서만 노동자를 언급하면서, 스탈린은 노동자를 속이고, 세상을 속이고, 특권화된 계층의 어느 때보다도 광대한 증가를 감추려는 단순한 목적을 추구한다.
도적들과 약탈자들을 위한 기관
"도적들과 재산 착복자들에 맞서는 사회주의적 소유에 대한 방어"는 그래서 열에 아홉은 인민들 중의 비특권화된 부분에 의한 모든 침해에 맞서는 관료의 수입에 대한 방어를 의미한다. 만약 사회주의의 원칙에서도 국가의 법적 측면에서도 기초가 없는 관료의 은밀한 수입을 추가하는 것이 괜찮다면, 이것은 도적질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다. 이들 합법화된 도적질 이외에도 도적놈들이 스탈린의 가장 강력한 지지자들이기 때문에, 그가 눈을 감을 수밖에 없는 불법적인 엄청난 도적질이 있다. 국가의 보나파르티스트 기구는 그래서 국부에 대한 관료적 도적들과 약탈자들을 방어하기 위한 기관이다. 이 이론적 정식화가 훨씬 더 진실에 가깝다.
스탈린은 자신이 노동자들의 임금에 관하여 거짓말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국가의 사회적 성격에 관하여 거짓말을 하도록 강제된다. 양쪽 경우 모두에서 스탈린은 특권화된 기생충들의 대변인으로서 전면에 나선다.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을 완수했던 땅에서, 대중들을 거짓말의 홍수와 어느 때보다도 거대한 억압을 대중들에게 가함으로써 불평등을 조장하고, 귀족층을 만들어내고, 특권들을 축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관료 수입의 주요한 원천인 착복과 도적질은 용어의 과학적 의미에서 착취의 체제를 구성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민대중의 이해관계와 입장에서는 이것은 어떠한 "조직적인" 착취보다도 한없이 더 나쁘다. 관료는 용어의 과학적 의미에서 소유계급이 아니다. 그러나 관료는 그 자체 안에 소유계급의 모든 악의 10배를 포함하고 있다. 관료는 정확하게 명확한 계급 관계가 없으며, 국가 기구의 작동에 그렇게도 결정적인 성격을 부여했던 10월 혁명의 사회적 기초 위에 서 있는 것이 불가능하다. 관료의 체계적인 도적질을 영구화하기 위하여, 관료기구는 조직적인 강도질에 의지하도록 강제된다. 이 모든 것들의 총합이 보나파르트 깡패주의의 체제를 구성한다.
이 국가가 평화적으로 "소멸"할 것을 믿는 것은 이론적인 망상의 세계에 사는 것이다.
보나파르트 계층은 반드시 타도되어야만 하고, 소비에트 국가는 반드시 소생해야만 한다. 그렇게 되어야만, 국가의 소멸이라는 전망이 열리게 된다.
레온 트로츠키
1939년 5월 1일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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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10월 18일
'맑스주의를 지키기 위하여'[In Defense of Marxism]의 일부분
다시 또다시 소련의 성격에 관하여
정신분석학과 맑스주의
과거의 토론들과 제4 인터내셔널의 결정들을 잊어오고 있는 어떤 동지들 혹은 브루노 알과 같은 과거의 동지들은 나의 소련 국가에 대한 평가를 정신분석학적으로 설명하려고 시도한다. "트로츠키가 러시아 혁명에 참여했기 때문에, 그가 노동자 국가에 관한 사상을 접는 것이 힘든데, 이것은 그가 그의 전체 인생의 대의를 포기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매우 총명했던 노년의 프로이드였다면 이와 같은 종류의 정신분석학자들의 귀를 손바닥으로 살짝 때렸을 것이다. 천성적으로 나는 나 스스로 감히 그런 행동을 취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관성과 감정주의는 내 쪽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 쪽에 있다는 것을 나를 비판하는 자들 앞에 감히 확인한다.
비열함과 냉소의 모든 한계를 넘어선 모스크바의 행위는 모든 프롤레타리아트 혁명가들 내에서 쉽게 반감을 불러일으킨다. 반감은 거부의 필요성을 발생시킨다. 즉각적인 행동을 위한 세력들이 존재하지 않을 때, 참을성 없는 혁명가들은 인위적인 수단들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예를 들면, 개인적 테러의 전술이 나타난다. 강력한 표현들, 모욕들, 그리고 저주에 더욱 자주 호소한다. 우리와 관련되어 있는 경우, 특정 동지들은 명백하게 "용어상의" 테러를 통한 보상을 추구하는 쪽으로 기울어 있다. 그러나 심지어 이런 관점으로부터도 관료를 하나의 계급으로 부른다는 단순한 사실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 만약 보나파르티스트 잡동사니가 하나의 계급이라면, 이것은 보나파르티스트 잡동사니가 역사의 죽어서 태어난 아기가 아니라 신생아라는 것을 의미한다. 마약 관료의 도적질과 같은 기생이 용어의 과학적 의미에서 "착취"라면, 이것은 관료가 주어진 경제 체제에 필수적인 지배계급으로서 역사적 미래를 보유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우리는 참을성 없는 반감이 맑스주의 원칙과 관계를 끊게 될 때 그것이 어디로 귀결되는가를 알게되었다.
예를 들어 범죄집단이 거친 도로를 달려 경찰 추격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이용했던 자동차에서 프레임이 휘어지고 바퀴 정렬에 문제가 있고 모터가 부분적으로 손상된 것을 본 격한 감정의 기술자가 있다고 치자. 이 기술자가 "이건 자동차가 아니다.... 악마는 이게 뭔지 알 것이다!"라고 말할지 모르는데, 이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이러한 추측은 기술적이고 과학적인 가치는 부족하지만, 범죄집단이 했던 짓에 관해서는 정당한 반응을 표현하는 것이다. 하지만, 똑같은 이 기술자가 자신이 "악마는 이게 뭔지 알 것이다"라고 했던 그 자동차를 수리해야 한다고 가정해보자. 이 경우, 그는 자신의 앞에 있는 것이 망가진 자동차라는 이해에서 출발할 것이다. 그는 어떻게 일을 시작할 것인지 결정하기 위하여 어떤 부분은 여전히 괜찮고 어떤 부분은 수리할 수 없는지를 결정할 것이다. 계급 의식적 노동자는 소련에 대하여서도 똑같은 태도를 가질 것이다. 그는 관료 범죄집단이 노동자 국가를 "악마는 이게 뭔지 알 것이다"의 상태로 변형시켰다고 말할 완전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가 이런 격한 반응으로부터 정치적 문제의 해결로 넘어가게 될 때, 그는 자신의 앞에 있는 것이 경제의 모터는 손상되었지만, 여전히 돌아가고 있으며 일부 부품의 교체로 완전히 수리될 수 있는 손상된 노동자 국가라는 것을 인정하도록 강제된다. 물론 이것은 하나의 유추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해 볼만한 가치가 있다.
"반혁명적 노동자 국가"
일부에서 "만약 소련을 노동자 국가로서 계속 인정한다면, 우리는 반혁명적 노동자 국가라는 새로운 범주를 만들어야만 할 것이다."라고 외친다. 이런 주장은 훌륭한 강령적 규범을 비참하고, 궁핍하며, 모순적이기까지한 현실에 대치시킴으로써 우리의 상상에 충격을 주고자 하는 시도이다. 그러나 우리가 1923년이래 매일 매일 소비에트 국가가 국제적 영역에서 점점 더 반혁명적인 역할을 해온 것을 바라보지 않았는가? 우리가 중국 혁명, 1926년 영국의 총파업, 그리고 최종적으로 스페인 혁명이라는 최근의 경험에 대하여 잊고 있었는가? 세상에는 두 개의 완전히 반혁명적인 노동자 인터내셔널이 있다. 이들 비판자들은 명백하게 이 "범주"를 잊고 있었다. 프랑스, 영국, 미국, 그리고 다른 나라들의 노동조합들은 자가 자신들의 부르주아지의 반혁명적 정치들을 완전하게 지지한다.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그것들을 노동조합으로 명명하는 것을 막지는 않으며, 그들의 진보적인 발걸음들을 지지하고 부르주아지에 맞서 그것들을 방어하는 것을 막지는 못한다. 왜 반혁명적 노동자 국가에 대해서는 똑같은 방식이 적용될 수 없는가? 결국 노동자 국가는 권력을 장악한 노동조합이다. 이 두 경우에서의 태도 차이는 노동조합은 긴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우리가 그것들을 현실로서 생각하지 단순히 우리 강령 속에 있는 "범주들"로서는 생각하지 않는데 익숙해져 있다는 단순한 사실로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노동자 국가와 관련하여서는 스스로를 우리의 강령에 종속시켜오지 않은 실제의 역사적 사실로서 그것에 접근하는 것을 배우는데 있어서의 무능력이 증명되고 있다.
제국주의라고?
현재의 크레믈린의 팽창을 제국주의라고 부를 수 있을까? 무엇보다도 우리는 이렇게 부르는데 있어서 사회적 내용을 포함하는 무엇인가를 만들어야만 한다. 역사 속에서는, 노예 노동에 기초를 두었던 로마 국가의 "제국주의", 봉건적 지주의 제국주의, 상품과 산업 자본의 제국주의 등이 알려져 있다. 모스크바 관료의 이면에 있는 추진력은 의심의 여지없이 자신의 권력, 명성, 수입을 확대하려는 경향이다. 과거의 모든 군주들, 독재자들, 지배계층들, 중세의 신분들, 그리고 계급들의 소유가 가장 폭넓은 의미에서의 "제국주의"의 요소이다. 그러나 현재는, 적어도 맑스주의 문헌에서는, 제국주의는 매우 분명하게 제한된 경제적 내용을 가지는 금융자본의 팽창정책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하는 것 없이, 크레믈린의 외교 정책에 "제국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양자 모두가 팽창을 위하여 군사력을 사용한다는 것에 기초하여 단순히 보나파르티스트 관료의 정책을 독점 자본주의의 정책과 동일시하는 것을 의미한다. 혼란만을 유포할 수 있을 뿐인 이러한 동일시는 맑스주의자들에게 보다는 소부르주아지 민주주의자들에게 훨씬 더 적절한 것이다.
짜르 제국주의 정책의 연속
크레믈린은 폴란드에 대한 새로운 분할에 참여하고, 발틱 국가들에 손을 뻗치고 있으며 발칸, 페르시아, 아프가니스탄으로 향하고 있다. 즉, 크레믈린은 짜르 제국주의의 정책을 계속하고 있다. 이 경우에 있어서, 우리는 크레믈린의 정책 그 자체를 제국주의로 규정할 권리가 없는가? 이 역사적이고 지리학적인 주장도 다른 것들만큼이나 설득력이 없다. 짜르 제국의 영토에서 발생했던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은 바로 그 시작부터 발틱 국가들을 정복하려고 했고 한동안 정복했으며, 루마니아, 페르시아로 침투하려고 시도했으며 한때 바르샤바(1920년)를 공격하기도 했다. 혁명적 팽창의 노선은 짜리즘의 그것과 같은데, 이것은 혁명이 지리적인 조건들을 바꾸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이 멘셰비키가 당시에 이미 짜르 외교 전통으로부터 차용된 것으로서의 볼셰비키 제국주의에 관하여 말했던 이유이다. 소부르주아지 민주주의는 심지어 현재에서조차 이런 주장에 기꺼이 기대고자 한다. 반복하지만, 우리는 이곳에서 그것들을 모방할 이유가 전혀 없다.
제국주의의 대행자?
그러나, 소련의 팽창정책을 평가하는 방식과는 별도로, 모스크바에서 베를린의 제국주의 정책에 제공하고 있는 도움에 관한 문제가 남아 있다. 이 점에 있어서는 무엇보다도 세계 제국주의 관계의 사슬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특정 조건하에서는 심지어 완전하게 건강한 노동자 국가라도 특정 정도까지는 그리고 특정한 형태로 이런 혹은 저런 제국주의를 지원하는 것이 불가피함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브레스트-리토프스크 평화[조약]은 의심의 여지없이 독일을 프랑스와 영국에 대하여 일시적으로 강화시켰다. 고립된 노동자 국가는 적대적인 제국주의 진영들 사이에서 책략을 쓰지 않을 수 없다. 책략은 그들 중 하나에 반대하여 다른 하나를 일시적으로 지원하는 것을 의미한다. 두 진영 중 누구를 지원하는 것이 특정 순간에 더 도움이 되고 덜 위험한가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은 원칙의 문제가 아니라 실천적인 계산과 예측의 문제이다. 하나의 부르주아지 국가에 반대하여 다른 하나의 부르주아지 국가를 제한적으로 지지하는 것의 결과로서 발생되는 불가피한 약점은 고립된 노동자 국가가 그렇게 해서 자신의 존재를 유지할 가능성을 부여받는다는 사실에 의해 커버되고도 남는다.
그러나 세상에는 책략에 또 책략이 있다. 브레스트-리토프스크에서, 소비에트 정부는 노동자 국가를 구하기 위하여 우크라이나의 민족적 독립을 희생시켰다. 아무도 우크라이나에 대한 배반에 관하여 말할 수 없을 것인데, 왜냐하면 모든 계급 의식적 노동자들이 강요에 의한 것이라는 이 희생의 성격을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폴란드에 관해서는 완전히 다르다. 크레믈린은 결코 폴란드를 희생시키는 것이 불가피했던 것처럼 문제를 말하지 않았다. 반대로, 크레믈린은 세계 전역의 피억압계급과 인민들의 가장 기본적인 민주주의적 감정들을 모욕하고, 그래서 소련의 국제적 상황을 극단적으로 약화시키는 언사만을 냉소적으로 떠벌였다. 피점령 지역들에서의 경제적 변형들은 이것을 10분의 1 만큼도 보상해주지 못한다!
크레믈린의 전체 외교정책은 일반적으로 "절친한" 제국주의라는 불한당 같은 장식에 기초하고 있고, 그래서 부차적이고 불안정한 이익들을 위하여 세계 노동자 운동의 근본적인 이해관계를 희생시키는 것으로 귀결된다. 5년동안 "민주주의의 방어"를 위한 슬로건으로 노동자들을 속인 후, 이제 모스크바는 히틀러의 약탈의 정책을 덮어가리는데 열중하고 있다. 이것 자체로는 여전히 소련을 제국주의 국가로 바꾸지 못한다. 그러나 현재 스탈린과 그의 코민테른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제국주의에게 최고로 가치있는 대행자이다.
만약 크레믈린의 외교 정책을 정확하게 정의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이것을 제국주의 포위 속에 있는 퇴행화된 노동자 국가의 보나파르트 관료의 정책이라고 말해야만 한다. 이 정의는 "제국주의 정책" 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짧거나 부르기 좋은 것은 아니지만, 더욱 정확한 것이다.
"차악"
적군에 의한 동부 폴란드의 점령은 나찌 군대에 의한 점령과 비교한다면 분명히 "차악"이다. 그러나 히틀러가 더 큰 악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차악이라는 성격을 획득하는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집에 불을 지르거나 집에 불을 지르는 것을 도와주고 나서, 그 집에 있던 10명 중 5명을 구해주고 자신의 준-노예로 만들었다면, 이것은 10명 전체를 불태우는 것보다는 덜한 악인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 방화범이 인명 구조 때문에 상을 받는 것은 의아스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이 상을 받게 된다면, 그는 빅토르 휴고의 한 소설에 나오는 영웅의 경우에서처럼 그 이후 즉시 처형되어야 할 것이다.
"무장한 선교사"
로베스피에르는 사람들은 총검으로 무장한 선교사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것으로 그는 군사적 폭력을 통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혁명적 사상과 기구들을 강요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이 올바른 생각은 물론 혁명에 협력하기 위하여 다른 나라들에 대하여 군사적 개입을 하는 것을 허용할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혁명적 국제 정책의 일환으로서의 그러한 개입은 반드시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한 이해를 구해야만 하며 혁명적 군대가 진입하는 나라의 노동 대중들의 열망에 부응하는 것이어야만 한다. 일국에서의 사회주의의 이론이 유일하게 무장 개입을 준비할 수 있고 정당화 할 수 있는 실천적인 국제 연대를 만들어 낼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하다. 크레믈린은 다른 모든 자신의 정책과 관련된 문제에서와 마찬가지로 국제 노동 계급의 사상과 감정으로부터 절대적으로 독립적인 것으로서 군사개입의 문제를 제기하고 해결한다. 이것 때문에, 크레믈린의 최근의 외교적 "성공"은 소련의 [명예를] 더럽히고,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대오 속에 극심한 혼란을 야기한다.
두 개의 전선에서의 봉기
그러나 일부 동지들이 말하는 것처럼 만약 문제가 구체화된다면, 소련과 피점령지역에 대한 방어에 관하여 말하는 것은 적절한가? 구 폴란드의 양쪽 모두에 있는 노동자와 농민에게 히틀러뿐만 아니라 스탈린에 대항해서도 일어설 것을 요구하는 것이 더 올바르지 않은가? 당연히 이것은 굉장히 매력적이다. 만약 혁명이 새롭게 점령된 지역들을 포함하여 독일과 소련에서 동시에 발생한다면 이것은 한방에 많은 문제들을 해결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정책은 가장 우호적이고 가장 행복한 환경에만 기초할 수 없다. 따라서 문제는 히틀러가 혁명에 의해 분쇄되기 전에 혁명이 스탈린을 분쇄하기 전의 우크라이나를 공격한다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이 경우 제4 인터내셔널의 투사들은 그들이 스페인에서 프랑코에 맞서 싸우던 공화당 군대의 대오에서 투쟁했던 것처럼, 히틀러의 군대에 맞서 투쟁 할 것인가? 우리는 완전히 그리고 충심으로 (히틀러뿐만 아니라 스탈린으로부터도 독립한) 독립 소비에트 우크라이나를 지지한다. 그러나 이러한 독립을 획득하기 전에 히틀러가 스탈린 관료의 지배하에 있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장악을 시도한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 제4 인터내셔널은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우리는 히틀러에 반대하여 스탈린에 의해 노예화된 우크라이나를 방어할 것이다.
"소련에 대한 무조건적인 방어"
"소련에 대한 무조건적인 방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우리가 관료에 대한 어떠한 조건도 제기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만약 소련의 사회적 기초가 제국주의에 의해 위협받는다면, 전쟁의 동기와 대의와 무관하게 우리가 소련의 사회적 기초를 방어함을 의미한다.
일부 동지들은 "그리고 만약 적군이 내일 당장 인도를 침공하고 그곳에서 혁명적 운동을 억압하기 시작한다면, 이 경우 우리는 소련을 지지할 것인가?"라고 말한다. 이런 방식으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전혀 일관성이 없다. 무엇보다도 왜 인도가 관련되었는지 분명하지 않다. 만약 적군이 소련의 관료에 반대하는 노동자들의 파업과 농민들의 항의를 위협한다면, 우리는 이것을 지지할 것인가 아닌가? 라고 묻는 것이 더 간단하지 않은가? 외교 정책은 국내 정책의 연속이다. 우리는 보나파르티스트 관료의 수중에 있는 가구인 적군의 모든 행동을 지지한다고 약속하지 않았다. 우리는 오로지 노동자 국가로서의 소련, 그리고 소련 내부에 있는 노동자 국가에 속해 있는 것들만을 방어한다고 약속해왔다.
교묘한 궤변론자는 적군이 수행하는 "역할"의 성격과 무관하게 만약 적군이 인도의 봉기에 나선 대중들에 의해 두들겨 맞는다면, 이것은 소련을 약화시킬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에 대하여 우리는 적군의 작전으로 인한 인도에서의 혁명적 운동의 분쇄는 인도에서의 적군의 반혁명적 부대들의 우연적 패배와는 비교할 수 없는 소련의 사회적 기초에 대한 커다란 위험을 의미할 것이다라고 대답한다. 모든 경우에, 제4 인터내셔널은 언제 어디서 적군이 단지 보나파르티스트 반동의 기구로서만 행동하는지를, 그리고 어디에서 소련의 사회적 기초를 방어하는지를 어떻게 구분할 것인지를 알 것이다.
반동적 협잡꾼들이 지도하는 노동조합은 흑인 노동자들이 특정 산업 영역에 등록하는 것에 반대하여 파업을 조직한다. 우리가 이러한 수치스러운 파업을 지지해야 할까? 물론 아니다. 그러나 사장들이 파업을 이용하여 노동조합을 분쇄하고 노동자들의 조직화된 자기 방어를 총체적으로 불가능하게 하기 위하여 시도한다고 생각해보자. 이 경우, 당연히 노동조합의 반동적 지도부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노동조합을 방어할 것이다. 왜 똑같은 정책이 소련에 대해서는 적용될 수 없는가?
근본적인 규칙
4제 인터내셔널은 모든 제국주의 국가들에서, 그들이 소련과의 동맹에 있는가 아니면 소련에 적대적인 진영에 있는가와 무관하게, 프롤레타리아트 당들은 전쟁 기간 동안에 권력 장악을 목적으로 하는 계급 투쟁을 발전시켜야만 한다는 것을 굳게 확립했다. 동시에, 제국주의 국가들의 프롤레타리아트는 소련에 대한 방어(혹은 식민지 혁명에 대한 방어)의 이해관계에서 눈을 떼지 않아야 하며 실제로 필요한 경우에는 예를 들면 파업, 사보타지 등과 같은 가장 결정적인 실천을 동원해야만 한다, 제4 인터내셔널이 이 공식을 정식화한 이후 열강들의 구도가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규칙 그 자체는 유효성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다. 만약 내일 당장 영국과 프랑스가 레닌그라드나 모스크바를 위협한다면, 영국과 프랑스의 노동자들은 군대와 군수품을 보내는 것을 막아내기 위하여 가장 결정적인 방책들을 취해야 한다. 만약 히틀러가 상황의 논리에 의해 스탈린에게 군수품을 보내야만 하게 된다면, 반대로 독일 노동자들은 이 구체적인 경우에 파업이나 사보타지를 조직할 이유가 전혀 없을 것이다. 누구도 다른 어떠한 해결책도 제안하지 않을 것이라고 희망한다.
"맑스주의에 대한 수정"?
일부 동지들은 내가 나의 글(전쟁 중에 있는 소련)에서 "관료적 집산주의"를 이론적 가능성으로서 언급했던 것에 놀랐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들은 이것에서 심지어 맑스주의에 대한 완전한 수정을 발견했다. 이것은 명백한 오해이다. 역사적 필연에 대한 맑스주의적 이해는 숙명론과는 어떠한 공통점도 없다. 사회주의는 "저절로" 현실화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세력들, 계급들, 그리고 그들의 정당들의 투쟁의 결과이다. 이 투쟁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결정적인 잇점은 프롤레타리아트가 역사적 진보를 대변하는 반면 부르주아지는 반동과 쇠퇴를 대표한다는 사실에 있다. 정확하게 이 속에 우리의 승리에 대한 확신의 근원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만약 반동 세력이 정복한다면 사회는 어떤 성격을 띠게 될까""라고 우리 스스로에게 물어볼 완전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
맑스주의자들은 수도 없이 많이 사회주의인가 아니면 야만주의로의 복귀인가라는 양자택일을 정식화해왔다. 이탈리아에서의 "경험" 이후에, 우리는 공산주의인가 아니면 파시즘인가를 수천번 되풀이했다. 사회주의로 가는 진정한 경로는 일반적인 역사적 도식에서 예견되어지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이 더욱 복잡하며 이질적이고 모순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맑스는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와 미래의 그것의 소멸에 관하여 말했지만 독재의 관료적 퇴행에 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우리는 처음으로 그런 퇴행의 경험을 관찰하고 분석해왔다. 이것이 맑스주의에 대한 수정인가?
사태의 진전이 사회주의 혁명의 지연이 고질적인 실업, 소부르주아지의 빈곤화, 파시즘, 최종적으로는 어떠한 새로운 길도 열지 못하는 학살전쟁과 같은 명백한 야만주의 현상들을 발생시킨다는 것을 증명하는데 성공해왔다. 만약 우리가 인류는 사회주의로 스스로를 발전시킬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이론적으로 수용한다면, 새로운 "야만주의"는 어떤 사회적, 그리고 정치적 형식을 취할까? 우리는 맑스보다 더 구체적으로 이 주제에 관하여 우리 스스로를 표현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한편에서 파시즘과 다른 한편에서 소비에트 국가의 퇴행이 새로운 야만주의의 사회적, 그리고 정치적 형식의 윤곽이다. 사회주의인가 아니면 전체주의적 노예상태인가라는 양자택일적 대안은 이론적 이해관계만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선동에서도 역시 엄청난 중요성을 가지는데, 그것은 이것 자체에서 사회주의 혁명의 필요성이 가장 명료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맑스에 대한 수정에 관하여 말한다면, 이 수정은 실제로는 "부르주아지가 아닌" 그리고 "노동자도 아닌" 새로운 형태의 국가를 제출하는 동지들 쪽에서의 수정이다. 내가 전개한 대안이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논리적 귀결점까지 그들 자신의 생각을 끌어내도록 하기 때문에, 자신들의 이론의 결론에 깜짝 놀란 일부 이들 비판자들은 내가 .... 맑스주의를 수정한다고 비난한다. 나는 이것을 그저 친근감 있는 농담으로 생각하련다.
혁명적 낙관주의의 권리
나는 나의 글 '전쟁 중에 있는 소련'에서 노동자도 부르주아지도 아닌 착취사회나 혹은 "관료적 집산주의"의 전망이 완전한 패배의 전망이며 국제 프롤레타리아트를 몰락시키는 가장 심오한 역사에 대한 비관주의의 전망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애썼다.
이런 전망을 위한 진짜 논거들이 있기는 한가? 우리의 계급 적들에게 이것에 관하여 물어보는 것도 필요 없는 일은 아닐 것이다.
저명한 주간신문 파리 수아르[Paris-Soir] 1939년 8월 31일자에, 8월 25일에 있었던 프랑스 대사 쿨롱드르와 히틀러 사이의 마지막 인터뷰였던 굉장히 교훈적인 대화가 보도되었다. (정보의 출처는 의심의 여지없이 쿨롱드르 그 자신이다.) 히틀러는 자신이 스탈린과 맺은 ("현실주의적인 조약")에 관하여 침을 튀면서 큰소리로 지껼이고, 독일과 프랑스가 피를 흘리게 될 것이라며 "한탄했다".
쿨롱드르는 "그러나 스탈린은 표리부동함을 드러냈다. (전쟁의 경우에) 진정한 승자는 트로츠키가 될 것이다. 이것에 관하여 생각해보았는가?"
그 영도자[히틀러]는 "알고 있다. 그러나 왜 프랑스와 영국은 폴란드에게 완전한 행동의 자유를 주었는가"라고 답한다. 등등.
이들 신사양반들은 혁명의 망령에게 개인적인 이름을 주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나 물론 외교적 관계가 깨졌던 바로 그 순간에 이것은 이 극적인 대화의 본질은 아니다. "전쟁은 필연적으로 혁명을 유발할 것이다"라면서 제국주의 민주주의의 대표 그 자신이 등꼴까지 오싹해지게 그의 적을 놀라게 한다.
히틀러는 마치 그것이 오래 전에 결정되었던 문제인 것처럼, "알고 있다"고 답한다. "알고 있다." 놀랄만한 대화.
쿨롱드르와 히틀러 모두가 유럽에 밀어닥친 야만주의를 대표한다. 동시에 그들 중 누구도 자신들의 야만주의가 사회주의 혁명에 의해 정복될 것이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현재 세계 모든 자본주의 나라들의 지배계급들이 이것을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완전한 사기저하는 계급 역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들 중의 하나이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역사가 짧고 여전히 유약한 혁명적 지도부를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부르주아지의 지도부는 발끝에서부터 썩어 있다. 이들 신사양반들은 자신들로서는 피할 수 없는 전쟁의 시작과 함께 자신들의 통치가 붕괴할 것이라는 것을 미리 확신하고 있다. 이 사실 하나가 우리에게는 무적의 혁명적 낙관주의의 원천임에 틀림없다!
1939년 10월 18일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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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스탈린주의적 퇴행의 20년
이 글의 제목에서 제기되는 문제에 정확하게 대답하기 위하여는, 무엇보다도 10월 혁명의 기본적인 성취, 즉 국유화된 소유와 현재의 정부에 의해 추구되고 있는 정책 사이의 차이를 입증할 필요가 있다. 혁명적 소유양식과 테르미도르, 즉 반동적인 정책 사이에는 모순이 있다. 그러나 현재까지는 테르미도르적인 정책이 혁명적 소유양식을 아직까지는 타도하지 못했거나 감히 하려고 하지 않았거나 혹은 그렇게 하는데 성공하지 못했다. 현 정부의 경향들은 볼셰비즘의 강령과는 정반대이다. 그러나 혁명에 의해 수립된 기관들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한, 관료는 볼셰비즘의 오래된 원칙들에 자신의 경향들을 외견상 적응시키도록 강제된다. 관료는 계속해서 10월의 성스러운 약속으로 맹세하며, 프롤레타리아트의 이해를 불러일으키며, 변함없이 소비에트 체제를 사회주의로 언급한다. 인류 역사상 현재의 소비에트 관료만큼의 거짓과 위선의 정부는 결코 없었다고 말하는 것이 큰 실수를 저지르는 것은 아닐 것이다.
계획경제의 도움으로 생산력의 급속한 발전을 획득하는 것을 허용하기 때문에, 생산수단에 대한 국가소유의 보존은 그 자체로, 그리고 그 자체 안에 거대한 진보적 중요성을 가진다. 참으로, 관료에 의해 발표된 경제 통계들은 전혀 신뢰할만 하지 않다. 이 통계들은 체계적으로 실패는 덮어가리는 반면 성공에 대해서는 과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지어 오늘날 소련의 생산력이 여전히 세계의 다른 어떤 나라들에서도 없었던 속도로 발전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다. 누구라도 소비에트 정권을 파시즘과 동일시하면서, 예를 들면 막스 이스트만 처럼, 이러한 측면을 보는 것을 거부하는 자는 독일 속담 처럼 더러운 목욕물과 함께 아기까지 함께 던져버리는 자이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힘을 증가시킴이 없이, 인간에 대한 인간의 지배를 파괴하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다. 사회주의는 후진성과 빈곤에서 수립될 수 없다. 사회주의를 기술적인 전제는 지난 20년 동안 소련에서 거대하게 진보했다.
그러나 이것은 관료의 공적이 결코 아니다. 반대로, 지배 계층은 생산력 발전에 대한 가장 커다란 브레이크로 변형되었다. 본질적으로 사회주의 경제는 생산자의 이해관계와 소비자들의 필요를 자신의 가이드로 삼아야만 한다. 이들 이해관계와 필요는 생산자와 소비자들의 만개한 민주주의라는 매개를 통해서만 완전한 표현을 찾을 수 있다. 이것만이 오직 사회주의 경제체제를 준비하고 그것을 삶에서 현실화시키기 위하여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메카니즘이다.
정치적으로 모든 것을 빼앗긴 노동자들
현재의 지배 도당은 소비에트, 당, 노동조합, 그리고 협동조합의 민주주의를 관료의 지배로 대체해왔다. 그러나 천재들로 구성되어 있더라도 관료는 자신의 사무실에서 경제의 모든 부문 사이의 필요한 비율들, 즉 생산과 소비 사이의 필요한 조화를 확보할 수 없다. 스탈린의 정의의 사전이 "사보타지"로 정의하는 것은 실제로는 관료적 지배방식의 사악한 결과의 하나이다. 꾸준히 증가하고 있는 불균형, 낭비, 그리고 혼란에 대한 선언들이 계획경제의 기초 자체에 대한 잠식을 위협한다. 관료는 변함없이 "죄인"을 찾는다. 대부분의 경우, 사보타지하는 자들에 대한 소비에트 재판의 숨은 의미가 바로 이것이다.
스탈린의 개인적인 "권력욕"에서 현재 정권에 대한 설명을 찾는 것은 너무나도 피상적이다. 스탈린은 개인이 아니라 한 계층의 상징이다. 권력은 실체가 없는 어떤 것이 아니다. 권력은 사람들에게 물질적 가치를 처분하고 전유할 수 있도록 해준다. 당연히 완전한 평등은 한번의 도약으로 달성될 수 없다. 노동에 대한 지불에서의 특정한 차별화는 주어진 상황에서 노동 생산력을 증가시키려는 목적으로 이루어된다. 그러나, 사회가 평등의 방향으로 진행하고 있는가 아니면 특권의 방향으로 진행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이 사회의 성격을 분석함에 있어서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어떠한 의구심을 위한 공간도 남겨두지 않는다. [소비에트] 사회의 차별화는 경제적 필요성의 한계를 넘어선지 오래다. 관료의 물질적 특권이 빙하처럼 증가해왔다. 대중으로부터 엄청나게 고립되어 있는 관료는 스타카노비즘이라는 기치하에 새로운 노동귀족과 콜차크 귀족층을 만들어내고자 한다.
국민소득의 분배가 이번에는 정치적인 통치를 결정한다. 지배계층은 생산자와 소비자의 민주주의를 허용할 수 없는데, 이것은 관료계층이 생산자와 소비자 모두를 무자비하게 약탈한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다. 관료가 당연히 거주장소, 식품, 의류, 수송과 통신 수단뿐만 아니라 교육기관, 언론, 문학, 스포츠, 영화, 라디오, 극장, 박물관 등까지 고려하여 전국적으로 소비되는 자금의 절반 이상을 삼켜버린다는 것을 확립된 사실로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비록 관료가 여전히 10월 혁명의 기관들과 전통들에 스스로를 적응시키도록 강제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의 이해관계를 표현하는 관료의 정책이 인민의 이해관계, 그리고 사회주의의 이해관계와는 정반대라는 것을 완전히 정당하게 말할 수 있다.
소비에트 관료의 역할
똑같은 기본적인 모순이 국가, 군대, 가족, 학교, 문화, 과학, 예술 등과 같은 사회적 삶의 모든 영역에서 확인될 수 있다.
맑스주의의 관점에서, 국가는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지배하는 장치이다.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는 노동인민들이 착취자들의 저항에 대처하고 착취를 분쇄하기 위하여 반드시 필요한 단지 일시적인 기구이다. 계급이 없는 사회에서 강제의 기구로서의 국가는 점차적으로 사라져야만 하고 생산자와 소비자들의 자유로운 자기행정에 의해 대체되어져야만 한다. 그러나 우리는 현실에서 무엇을 보고 있는가? 혁명 이후의 20년만에 소비에트 국가는 가장 중앙집중화되고 독재적이고 잔인한 억압과 강제의 기구가 되었다. 따라서 소비에트 국가의 진화는 볼셰비키 강령의 원칙들과는 완전히 모순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이것의 이유는 이미 말했었던 사회가 사회주의를 향하여 진화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모순들을 부활하는 쪽으로 진화하고 있다는 것에서 발견된다. 만약 그 과정이 이런 방향으로 계속해서 진행된다면, 불가피하게 계급의 부활, 계획경제의 청산, 그리고 자본주의적 소유의 복구로 귀결될 것임에 틀림없다. 국가의 통치는 이 경우 필연적으로 파시스트가 될 것이다.
10월 혁명은 자신의 임무들 중의 하나로 군대의 인민속으로의 해체를 선포했다. 이것은 무장 군대들이 민병대의 원칙에 기초하여 건설됨을 가정했다. 오로지 인민들을 그들 자신의 운명의 무장한 주인으로 만들어내는 이런 유형의 군대 조직만이 사회주의의 성격에 조응한다. 첫 10년 동안에, 병영 군대의 민병대로의 이행을 위한 체계적인 준비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관료가 노동계급의 독립성에 대한 모든 표현을 분쇄하는데 성공하는 순간으로부터, 관료는 공공연하게 군대를 자기 자신의 지배 기구로 변형시켰다. 민병대 체계는 완전히 파기 되었다. 현재 2백만의 군대가 그 성격상 순수한 병영 군대이다. 장군과 사령관과 같은 장교 계층이 다시 만들어졌다. 군대는 사회주의적 방어의 기관에서 관료 특권에 대한 방어의 기관으로 변형되었다. 그러나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원래는 방어과 관련한 문제에 집중되었던, 소규모의 스탈린 도당과 보다 권위적이고 능력있는 군 지도자들 사이의 투쟁이 적군의 목을 자르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여성의 지위는 사회의 통치와 국가 정책을 평가하는 가장 극적이고 현저한 지표이다. 10월 혁명은 자신의 기치에 여성의 해방을 명시했고, 결혼과 가족에 관한 가장 진보적인 법률을 만들어냈다. 물론 이것이 소비에트 여성들이 즉각적으로 "행복한 삶"을 살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진정한 여성 해방은 경제와 문화의 성장없이, 소부르주아지적 경제의 가족이라는 단위의 파괴없이, 사회화된 식품 준비의 도입과 교육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 한편, 자신의 보수적인 본능에 이끌리는 관료는 가족의 "분해"를 경계했다. 관료는 여성에게 노예적인 가사노동을 의미하는 가정에서의 저녁식사와 가정에서의 빨래에 대한 찬양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이것에 쐐기를 박기 위하여 관료는 공식적으로 여성의 지위를 짐 싣는 동물의 지위로 되돌리면서 낙태를 범죄로 처벌하는 것을 복구했다. 공산주의의 ABC와는 정반대로 지배 계층은 소부르주아지 가족과 같은 가장 반동적이고 악질적인 계급통치의 핵심을 복구했다.
생생한 지표
상황은 문화의 영역에서는 훨씬 더 좋지 않다. 생산력의 발전이 새로운 문화를 위한 물질적 전제를 창출했다. 그러나 문화의 발전은 비판없이, 더듬거림과 오류없이, 독립적인 창조적 활동없이, 즉 인간 개성의 자각 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 그러나 관료는 단 하나의 창조적 활동에서도 독립적인 생각을 용인하기를 거부한다. 그리고 이것은 관료의 측면에서는 올바른 것인데, 예술이나 교육의 영역에서 비판이 살아난다면, 이것은 필연적으로 관료에 대한 반대로, 관료의 특권에 대한 반대로, 관료의 무지와 전횡적인 지배에 대한 반대로 향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당에서 시작되었던 "숙청"이 이후에 예외없이 모든 영역의 사회 생활 속으로 침투했던 사실에 대한 설명이 이 속에 있다. "트로츠키주의"라는 이유로 GPU는 시인, 천문학자, 교육학자, 그리고 음악가들을 숙청했고, 이와함께 최고의 두뇌들이 총구의 위협에 처했다. 이러한 조건하에서 "사회주의적" 문화에 관한 이야기를 생각할 수 있는가?
일상적 문학의 영역에서 성공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수천만의 인민들이 읽고 쓰기를 배웠다. 그러나 이것과 동시에, 인민들은 자신의 관점을 표현할 권리와 출판된 글자라는 매개를 통하여 자신들의 관심을 표현할 권리를 박탈당했다. 언론은 오로지 관료를 위해서만 복무했다. 소위 "사회주의적" 시인들은 스탈린에 대한 찬송만을 쓸 권리가 있었다. 산문 작가들에게도 똑같은 권리만이 주어졌다. 인민들은 의무적으로 이것들을 읽어야 했다. 똑같은 일들이 영화, 라디오, 극장 등등에서 벌어졌다. 상을 받은 러시아 역사에 관한 새로운 교과서 하나가 최근 학교에 소개되었다. 이 교과서가 오로지 왜곡으로만 구성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도 과장은 아닐 것인데, 이 책의 목적은 관료의 폭정과 스탈린의 개인독재를 정당화하는 것이다. 바티칸의 허가를 받아 출판된 카톨릭 교회의 역사에 관한 교과서 조차 소련의 스탈린화된 교과서와 비교하면 과학적 양심성의 모델이 된다. 수천만의 어린이들의 머리가 이런 저속한 글에 영향을 받고 중독되고 있다.
10월 혁명은 모든 민족의 독립적인 문화적 발전뿐만 아니라 국가의 분리에 관한 권리를 선포했다. 관료는 소련을 사실상 새로운 인민들의 감옥으로 변형시켰다. 개별 민족의 언어와 개별 민족의 학교들이 계속 존재하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 영역에서 가장 포악한 학정도 진화의 바퀴를 더 이상 뒤로 돌릴 수는 없다. 그러나 다양한 민족들의 언어는 그들의 독립적인 발전의 기관이 아니라 그들에 대한 관료적 지배의 기관이다. 개별 민족 공화국 정부들이 자연스럽게 모스크바에 의해서 지명되거나 보다 정확하게는 스탈린에 의해서 지명되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50여개의 이들 정부가 갑자기 "인민의 적들"과 외국 정부의 앞잡이들로 구성되어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는 것이다. 스탈린과 비쉰스키의 입술에서 무례하고 바보스럽게까지 지나치게 울려대는 이러한 비난의 뒤에는, 실제로 개별 민족의 공화국에서 관료들, 심지어 크레믈린에 의해 지명된 자들 조차 지역적 상황과 분위기에 의존하게 되고 점차적으로 짓누르는 모스크바의 중앙집중주의에 반대하는 반대파의 영감의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이 숨어 있다. 그들이 "사랑하는 지도자"를 대체할 것에 관하여, 그리고 강철같은 촉수를 느슨하게 할 것에 관하여 꿈을 꾸거나 이야기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소련의 모든 개별 민족 공화국들이 최근에 목이 잘렸던 진짜 이유이다.
스탈린판 배외주의
반유태주의로 채색되지 않은 반동의 예를 역사 속에서 찾기란 많이 힘들다. 이 특이한 역사 법칙은 오늘날의 소련에서 완전하게 확인된다. 모스크바에서 여러 해를 보냈던 오이겐 리옹스[Eugene Lyons]는 그의 흥미롭지만 심오하지는 않은 책, 유토피아에서의 임무에서 관료가 자신의 지배를 굳히기 위하여 비록 은밀하게 일 지라도 어떻게 반유대적 편견을 체계적으로 활용하는 지에 관하여 말했다. 그리고 그렇지 않고는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겠는가? 관료적 중앙집중주의는 배외주의 없이는 생각할 수도 없고, 한편 반유태주의는 언제나 배외주의와 관련해서는 저항을 최소화하는 노선이었다.
외교 정책의 영역에서, 지난 20년 동안, 국내 정책들에서 만큼이나 철저한 전환이 있었다. 오로지 타성에 빠진, 혹은 마음속에 감추어진 생각을 가진 부르주아지 반동만이 스탈린을 세계 혁명을 고취하는 자로서 계속해서 비난한다. 사실상, 크레믈린은 보수적 법과 질서의 기둥들 중의 하나가 되었다. 모스크바 정부가 소비에트 공화국의 운명을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운명과, 그리고 동양의 억압받는 인민들의 운명과 결합시켰던 시대는 이미 오래전에 지나갔다. "인민전선"의 정책이 좋은가 혹은 나쁜가에 관한 문제와는 별도로, 이것은 공교롭게도 레닌이 평생을 바쳐 반대하여 투쟁했었던 멘셰비즘의 전통적인 정책이었다. 이것은 보수적인 부르주아지 민주주의를 위한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의 폐기를 의미한다. 모스크바의 지배계층은 오늘날 하나, 오직 하나만을 추구하는데, 이것은 모든 지배계급들과 평화롭게 지내는 것이다.
10월 혁명과 테르미도르 관료 사이의 모순은 볼셰비키의 고참 세대를 절멸시킨 것에서 가장 극적인 표현을 찾았다. 비쉰스키, 예조프, 트로이야노프스키, 마이스키, 코민테른과 GPU의 앞잡이들, 드위안티-루이스 피셔 형태의 저널리스트들, 프리트 형태의 검사들은 세계 여론을 속이지 못할 것이다. 어떠한 진중한 사람이라도 이제는 더 이상 수백명의 고참 혁명가들, [짜르주의] 비합법 상황 하에서의 볼셰비키 당 지도자들, 내전의 지도자들, 혁명적인 소비에트 외교관들, 적군의 군사 지도자들, 30개의 개별 민족 소비에트 공화국의 지도자들이 모두 한꺼번에 파시즘의 고위 첩자가 되었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비난의 여지가 없고 공평한 사람들로 구성된 뉴욕 조사위원회가 9개월의 활동 후에 모스크바 재판이 인류 역사상 최고의 조작이라는 것을 찾아냈다.
오늘날 문제는 지노비에프, 카메네프, 스미르노프, 피야타코프, 세레브리야코프, 소콜니코프, 라데크, 라코프스키, 크레스틴스키, 투카체프스키 그리고 다른 수백명이 흉계의 희생자로 전락했다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증명되었다. 지금 문제가 되는 것은 어떻게 그리고 왜 크레믈린 도당이 그렇게도 엄청난 흉계를 자행할 위험을 감수할 수 있었는가이다. 이것에 대한 대답은 전술했던 모든 것들로부터 나오게 된다.
해결할 수 없는 모순
권력과 수입을 위한 투쟁 속에서 관료는 과거와 관계되어 있는, 10월 혁명의 강령을 알고 기억하는, 그리고 사회주의라는 임무에 진심으로 헌신하는 그룹들을 자르고 난타하도록 강요된다. 고참 볼셰비키들과 중간 나이와 가장 젊은 세대 사이에 있는 사회주의 인자들에 대한 계획적인 살인은 반 10월 혁명의 사슬에서 반드시 필요한 고리이다. 이것이 재판의 원고이면서 검사가 과거 백색 근위대 출신 비쉰스키의 사람들 안에서 나왔었던 이유이다. 이것이 워싱턴에서 소련이 과거 백색 근위대 트로이야노프스키에 의해 대표되고, 런던에서는 과거 콜챠크 장관인 마이스키에 의해 대표되는 이유이다. 그리고 기타 등등. 필요한 사람들이 필요한 자리에 올라가게 된다.
최근의 모스크바 선거라는 연극에 속을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히틀러와 괴벨이 똑같은 방식으로 똑같은 짓을 한번 이상 했었다. 스탈린의 "성공"의 비밀을 풀기 위해서는 히틀러의 국민투표들과 관련하여 소비에트 언론 스스로가 무엇을 썼던가를 읽을 필요가 있다. 전체주의적 의회 실험은 단지 일단 자기 자신의 당을 포함하여 모든 당들을 분쇄하고, 노동조합들을 목졸라 죽이고, 언론, 라디오, 그리고 영화를 게시타포나 혹은 GPU에 종속시키고, 빵과 직장은 유순하고 침묵하는 사람에게만 주는 반면, 모든 유권자들의 관자놀이에 총구를 겨누고 나면, "만장일치의" 선거를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할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만장일치는 영원하지도 안정된 것도 아니다. 10월 혁명의 전통들은 공식적인 영역에서는 사라졌지만, 이 전통들은 대중의 기억 속에서 계속 살아 있다. 법률상의 그리고 선거를 통한 흉계들의 덮개 아래에, 모순들이 계속해서 깊어지고 있으며, 이 모순들은 폭발로 귀결되지 않을 수 없다. 반동적 관료는 타도되어야만 하며, 타도될 것이다. 소련에서의 정치혁명은 불가피하다. 이 정치혁명은 권력을 찬탈하고 있는 관료의 멍에로부터 새로운 사회 요소들의 해방을 의미할 것이다. 오로지 이러한 조건이 주어질 때에만, 소련은 사회주의의 방향으로 발전할 수 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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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이행의 강령 중에서
소련과 이행의 시대의 문제들
소련은 10월 혁명으로부터 노동자 국가로서 등장했다. 사회주의적 발전의 필수적인 전제조건인 생산수단의 국가소유가 생산력의 급속한 증가의 가능성을 열었다. 그러나 동시에 노동자 국가 기구가 완전한 퇴행을 겪었다. 국가기구는 노동계급의 무기에서 점점 더 노동계급에 대한 관료적 폭력의 무기로, 국가 경제에 대한 사보타지의 무기로 변했다. 후진적이고 고립된 노동자 국가의 관료화와 관료의 모든 권력을 장악한 특권계층으로의 변형은 이번에는 이론이 아니라 실천적으로 일국에서의 사회주의에 대한 가장 설득력 있는 논박이다.
이렇게 해서 소련은 끔찍한 모순을 체현하고 있다. 그러나 소련은 여전히 퇴행화된 노동자 국가로 남아 있다. 이것은 사회적 진단이다. 정치적 예측은 관료가 노동자 국가에서 어느때보다도 세계 부르주아지의 기관으로 되면서 새로운 소유양식을 타도하고 국가를 자본주의의 수렁으로 빠뜨리거나 혹은 노동계급이 관료를 타도하고 사회주의로의 길을 열거나 둘 중에 하나라는 양자택일적 성격을 갖는다.
제4 인터내셔널의 지부들에게 모스크바 재판은 놀라움과 크레믈린 독재자의 개인적 광기의 결과로서가 아니라 테르미도르의 정통 자손으로서 다가왔다. 그들은 소비에트 관료 그 자신 사이에서의 견딜수 없는 분쟁으로부터 성장했는데, 이 분쟁들은 다시 관료와 인민들 사이의 모순들뿐만 아니라 "인민" 자신들 사이에서의 깊어가는 적대를 반영했다. 재판의 피비린내 나는 "터무니없는" 성격은 모순의 강도의 정도를 제공해주며, 바로 이러한 이유로 그 결말에 대한 실마리를 예측하게 해준다.
모스크바로의 귀환을 거부했던 전 크레믈린 외국 대표단들의 공개적인 발언들은 관료들 사이에서 진정한 볼셰비키주의(이그나서 라이스)로부터 완전한 파시즘(부텐코)까지 모든 종류의 정치적 사고들이 발견될 수 있음을 나름의 방식으로 논쟁의 여지없이 확인해준다. 단지 작은 규모의 소수에 불과한 관료 내부의 혁명적 인자들은 사실이기는 하지만 소극적으로 프롤레타리아트의 사회주의적 이해관계를 반영한다. 방해받지 않고 성장하고 있는 반동적 파시스트 인자들은 훨씬 더 큰 일관성을 가지고 세계 제국주의의 이해를 표현한다. 이들 나라를 팔아먹을 후보자들은 새로운 지배계층이 "서구 문명" 즉 자본주의와의 동일화의 이름으로, 국유화, 집산화와 외국 무역의 독점을 거부하는 것을 통해서만 오직 그들의 특권적 지위를 보장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들 두 개의 반대쪽 극의 사이에 부르주아 민주주의로 이끌리는 중간적이고 집중되어 있지 않은 멘셰비키-사회주의혁명당-자유주의 경향들이 있다.
소위 "무계급" 사회의 대오 내부에, 관료 내부에 있는 것과 정확하게 흡사하지만 단지 덜 명확하게 표현되고 비례관계에서 반대에 있는 그룹들이 분명하게 존재하고 있는데, 이 의식적인 자본가 경향들은 집산농장(kolkhozi)의 부유한 부분에서 두드러지며 단지 인구의 작은 소수라는 특색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 층은 스스로에게 일반적 소유의 비용으로 개인적 부를 축척하는 소부르주아지 경향을 위한 폭넓은 기초를 제공하며, 관료에 의하여 의식적으로 조장되고 있다.
오늘날 대부분 스탈린 도당으로 환원되는 테르미도르 독재는 사회적 균형을 어느때보다도 많이 침해하면서 폭력적인 방책들에 의해 증가하는 적대의 이 체제 꼭대기에 매달려 있다. 최근의 사법상의 흉계들은 좌익에 대한 타격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것은 우익 반대파의 지도자들에 대한 일소에 대해서도 역시 사실인데, 이것은 관료의 이해관계와 경향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과거 볼셰비키 당의 우익 그룹이 좌익화할 위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부텐코 형태과 같은 자기 자신의 우익 동맹자들에 대한 두려움에서와 마찬가지로, 보나파르티스트 도당이 자기보존이라는 이해관계 속에서 고참 볼셰비키 세대를 거의 절멸시키도록 강제되었다는 사실이 대중들 사이에서의 혁명적 전통뿐만 아니라 그들의 점증하는 불만의 생명력에 대한 두말할 나위없는 증언을 제공해준다.
어제까지만 해도 모스크바 재판을 섞이지 않은 순수한 금으로 평가해왔던 서구의 소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은 이젠 "소련 내부에는 트로츠키주의도 트로츠키주의자도 없다"고 집요하게 되풀이한다. 그러나 그들은 모든 숙청들이 정확하게 이들 위험과의 투쟁이라는 기치 하에서 수행되었는지에 관하여 설명하지 못한다. 만약 우리가 "트로츠키주의"를 끝장난 강령으로서 진단한다면, 심지어 조직적인 측면에서도 끝장난 것으로 진단한다면, 의문의 여지없이 "트로츠키주의"는 소련에서 굉장히 허약할 것이다. 그러나 트로츠키주의의 파괴될 수 없는 힘은 트로츠키주의가 혁명적 전통을 표현할 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러시아 노동계급의 실질적인 반대를 표현하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생겨난다. 사회적 증오, 즉 크레믈린 도당의 관점에서 "트로츠키주의"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 관료에 반대하는 노동자들에 의해 축적되었다. 관료는 노동자들의 뿌리 깊기는 하지만 분명하지 않는 분노와 제4 인터내셔널 조직 사이의 결합을 죽음과도 같은 완전한 두려움을 가지고 무서워한다.
고참 볼셰비키와 중간, 청년 세대들의 혁명적 대표자 세대들의 절멸은 전국적으로 관료의 우익, 부르주아지 세력들과 그 동맹자들에게 훨씬 유리하게 사회적 균형을 깨뜨렸다. 그들 즉 우익으로부터 우리는 소련의 사회주의적 성격을 수정하고, 그 틀에서 파시스트 형식의 "서양 문명"에 더 가깝게 하려는 어느때보다도 단호한 노력을 예측한다.
이러한 전망으로부터, 구체성에 대한 강제가 "소련에 대한 방어"의 문제로 넘어가게 된다. 만약 내일 부르주아 파시스트 집단, 소위 "부텐코 분파"가 권력 장악을 시도한다면, "라이스 분파"는 불가피하게 자신을 바리케이드의 반대진영에 두게 될 것이다. 비록 "라이스 분파" 스스로가 스탈린과의 연합이 일시적이라는 것을 인식함에도 불구하고, 이 연합은 보나파르티스트 도당이 아니라 소련의 사회적 기초, 즉 자본가들로부터 몰수되어 국가 소유로 변형된 소유를 방어하게 될 것이다. 만약 "부텐코 분파"가 히틀러와 동맹하게 되는 것으로 드러나면, "라이스 분파"는 국가 내부에서 뿐만 아니라 세계적 영역에서 군사적 개입으로부터 소련을 방어할 것이다. 다른 어떤 방침도 배신이 될 것이다.
자본주의 반혁명의 공공연한 공격에 맞서, 비록 엄격하게 한정된 경우에, 관료의 테르미도르 부문과의 "통일전선" 가능성을 미리 부정하는 것은 허용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소련에서의 주요한 정치적 임무는 여전히 이 똑같은 테르미도르 관료의 타도로 남아 있다. 테르미도르 관료 지배의 하루하루가 경제의 사회주의적 요소의 파괴를 돕고 있으며 자본주의 복구의 기회를 증가시킨다. 정확하게 이 방향으로 코민테른은 스페인 혁명을 교살시키고 국제 프롤레타리아트의 사기를 저하시키는데 있어서 스탈린주의 도당의 대행인이면서 공범으로서 움직이고 있다.
파시스트 국가들에서 처럼, 관료의 주요한 힘은 관료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대중들의 환멸과 새로운 전망의 부재에 있다. 보다 난폭한 야만을 빼고는 스탈린의 정치 기구들과 다르지 않은 파시스트 국가들에서 처럼, 오늘날 소련에서는 단지 예비적인 선전활동만이 가능하다. 오늘날 국제적 영역에서 코민테른에 반대하는 투쟁은 스탈린주의 독재에 반대하는 투쟁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코민테른이 GPU에 직접적인 기반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코민테른의 붕괴는 보나파르티스트 도당과 테르미도리안 관료 전체의 붕괴를 예비할 것이라는 표시들이 많이 있다.
소련에서 혁명의 새로운 고조는 의심의 여지없이 사회적 불평등과 정치적 억압에 반대하는 투쟁의 기치 아래에서 시작될 것이다. 관료의 특권을 타도하라! 스타카노비즘을 타도하라! 소비에트 귀족과 그들의 지위와 체제를 타도하라! 모든 형태의 노동에 대하여 보다 평등한 임금을!
노동조합과 공장위원회의 자유를 위한 투쟁, 집회와 출판의 권리를 위한 투쟁이 소비에트 민주주의의 부활과 발전을 위한 투쟁속에서 전개될 것이다.
관료는 히틀러-괴벨의 방식으로 평등선거권이라는 허구로 계급기관으로서의 소비에트를 대체했다. 소비에트의 민주적 형식뿐만 아니라 계급적 내용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한때 부르주아지와 쿨락이 소비에트에 참여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던 것 처럼, 이제는 관료와 새로운 귀족을 소비에트로부터 몰아내야 한다. 소비에트에는 오로지 노동자, 평신분의 집산 농장의 농민들과 적군 대표를 위한 자리밖에는 없다.
소비에트의 민주화는 소비에트 당에 대한 합법화 없이는 불가능하다. 노동자와 농민은 자신들의 자유투표로 어떤 당을 그들이 소비에트 당으로서 인정할 것인가를 지시할 것이다.
생산자와 소비자의 이해관계에 따라서 계획경제에 대한 총체적인 수정을! 공장위원회가 생산통제권을 다시 잡아야 한다. 민주적으로 조직된 소비자 단체가 상품의 질과 가격을 통제해야 한다.
관련된 노동자들의 의지와 그들의 이해관계에 따른 집산농장의 재조직화를!
반동적인 관료의 국제정책은 프롤레타리아트 국제주의의 정책으로 대체되어야 한다. 크레믈린의 모든 외교 서한들이 출판되어야 한다. 비밀외교를 타도하라!
테르미도르 관료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는 모든 정치재판은 완전한 공표와 논쟁의 공개 및 정직성의 관점에서 재검토되어야 한다. 오로지 억압받는 대중들의 혁명적 봉기의 승리만이 소비에트 통치를 되살릴 수 있으며 소비에트의 사회주의로의 발전을 담보할 수 있다. 제4 인터내셔널의 당만이 소비에트 대중을 봉기로 지도할 수 있는 유일한 당이다!
가인과 같은 스탈린의 관료 집단을 타도하라!
소비에트 민주주의 만세!
국제사회주의 혁명 만세!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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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온 트로츠키
1937년 11월
다시 한번
소련과 소련에 대한 방어에 관하여
크레이포는 맑스주의의 원칙적인 가르침을 잊고 있다.
크레이포 동지는 다시 한번 소비에트 관료가 그 자체로 하나의 계급이라고 우리를 설득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에게는 이것이 순수 "사회학적" 문제가 아니다. 그렇다. 우리가 보게 될 것처럼, 그가 원하는 모든 것은 오로지 그 나름의 국제주의, 하지만 안타깝게도 전혀 자신이 없는 국제주의로 향하는 뻥 뚫려있는 곧은길을 찍는 것이다. 만약 관료가 계급이 아니라면, 만약 소련이 여전히 노동자 국가로서 인식될 수 있다면, 전쟁 중에 소련을 방어할 필요가 있다. 만약 자기자신의 정부가 소련과 동맹을 맺고 있다면, 어떻게 자기 자신의 정부에 대하여 단호한 반대의 입장에 있을 수 있는가? 바로 이 지점에서 당신들은 사회 애국주의로 떨어질 수 있는 무서운 유혹을 받고 있다! 아니다, 전장을 급진적으로 일소하는 편이 훨씬 더 좋을 것이다. 스탈린주의 관료는 착취 계급이며, 전쟁의 경우에 우리는 소비에트와 일본을 구분할 필요가 거의 없다.
불행하게도, 이 용어상 급진주의는 사물을 그렇게 많이 진전시키지 못한다. 마르크스주의 사회학의 관점에서 관료가 정말 하나의 계급이라는 것을 잠시 인정해보자. 그러면, 우리는 봉건사회와도 자본주의 사회와도 동일하지 않는,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들에 의해 결코 예견되지 않았던 새로운 형태의 계급사회를 갖게 된다. 이러한 발견은 약간 더 주의 깊은 분석의 가치가 있다.
왜 자본주의 사회는 막다른 골목에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가? 선진국들에서나 후진국들에서 자본주의 사회가 더 이상 생산력을 발전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세계 제국주의의 사슬은 자신의 가장 약한 고리, 러시아에서 깨졌다. 이제 우리는 부르주아지 사회의 자리에 새로운 계급사회가 수립된 것을 알게된다. 크레이포는 아직까지 이것에 대하여 이름을 붙이거나 혹은 이것의 내적 법칙들에 관하여 분석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소유" 계급이 국유화된 소유의 기초에서 세계 역사에서 비견될 수 없는 생산력 발전을 담보했던 새로운 사회가 자본주의와 비교하여 진보적이라고 인식하는 것을 막지는 못한다. 맑스주의는 우리에게 생산력이 역사 진보의 근본적인 요소임을 가르쳐준다. 경제력의 성장을 담보할 수 없는 사회는 여전히 분배의 양식이 무엇이건 상관없이 노동 대중들의 복지를 담보할 수 없다. 봉건주의와 자본주의 사이의 적대와 자본주의의 쇠퇴는 자본주의가 생산력 정체의 새롭고 거대한 가능성들을 열었다는 사실에 의해 구체적으로 결정되었다. 소련에도 똑같은 것이 적용된다. 소련의 착취의 양식이 무엇이건, 이 새로운 사회는 바로 그 자신의 성격으로부터 자본주의 사회이다. 여기서 당신은 맑스주의 분석으로부터의 이탈의 진정한 지점을 가지고 있다 !
이 근본적인 요소, 즉 생산력은 또한 이론적 영역에서 자신의 반영을 가지고 있다. 자본주의 국가들의 경제 생활이 정체와 쇠퇴의 다른 형태들 외에는 더 이상 아무 것도 가르쳐주지 않게 된 반면, 소련의 국유화된 계획경제는 인류 전체에 보다 나은 미래에 대한 열망을 심어주는 가장 위대한 학습장이다. 이러한 차이에 눈감을 수는 없다!
일본과 독일을 한편으로 하고, 소련을 다른 한 편으로 하는 전쟁에서는 분배에서의 평등의 문제나 프롤레타리아트 민주주의의 문제, 혹은 비신스키의 정의의 문제 등이 관련되는 것이 아니라 국유화된 소유와 계획경제의 운명이 관련될 것이다. 제국주의자들의 승리는 소련에서의 새로운 착취"계급"뿐만 아니라 새로운 형태의 독재의 붕괴 역시 의미할 것이며, 새로운 형태의 독재의 붕괴는 소비에트 경제 전체를 후진적이고 제국주의의 반식민지적 상태로 전락시킬 것이다. 이제 나는 크레이포에게 묻겠다. 우리가 모두가 계급 국가[이것을 인정해보자]지만, 한쪽은 제국주의적 정체를 대변하고 다른 하나는 거대한 경제적 진보를 대변하는 두 국가 사이의 투쟁에 직면한다면, 우리는 반동적 국가에 반대하여 진보적인 국가를 지지하지 말아야 하는가? 그렇게 해야하는 가, 아닌가?
그의 전체 테제에서, 크레이포는 최대한 다양한 것들에 관하여 그리고 주제로부터 최대한 멀리 있는 것들에 관하여 말하지만, 맑스주의 사회학의 결정적인 요소, 즉 생산력의 발전에 관하여는 단 한 차례도 언급하지 않는다. 이것이 정확하게 그의 전체 구조가 허공에 매달려 있게되는 이유이다. 그는 현실에 착목하지 않고 용어학적 환영들("계급", "무계급")을 가지고 요술을 부린다. 인류의 역사적 진보에서 새로운 사회가 어떤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가를 분석할 필요성을 회피하기 위하여 관료에 "계급"이라는 용어를 붙이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그는 믿는다. 생산력을 속박하고 심지어 파괴하기까지 하기 때문에 완전히 반동적인 사회와 경제에서의 거대한 발전을 담보해왔던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사회 사이의 차이에 관하여 우리가 구분하지 못하게 강제하려는 희망을 가진 크레이포는 우리에게 반동적인 "중립"의 정책을 강요한다. 그렇다. 크레이포 동지, 반동적인!
하지만 관료가 하나의 계급인가?
독자들은 전술한 내용들로부터 우리가 이 이론적 문제, 즉 크레이포를 열중케하고 있는 문제이자 그 자체로 전쟁의 시기에 우리의 정책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과는 거리가 먼 문제를 다시 분석하는 수고를 아주 잘 덜 수 있었다는 것을 알게된다. 그러나 관료의 사회적 성격은 무엇보다도 보다 일반적인 관점에서 매우 중요하며 이 수준에서 우리는 크레이포에게 조금의 양보도 할 이유가 없다고 본다. 우리의 비판은 그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면서 그의 주장들을 변경시킨다. 이번에는 그가 "모든 생산수단은 국가에 속하며 국가는 일정정도 관료에 속한다"는 취지의 '배반당한 혁명'에 있는 구절로부터 자신의 강력한 주장을 도출해낸다(강조한 부분은 트로츠키의 강조). 크레이포는 환호한다. 만약 생산수단이 국가에 속하고 국가가 관료에 속한다면, 관료가 생산수단에 대한 집단적 소유자가 되는 것이며, 이 하나로 인하여 관료는 소유계급이면서 착취계급이 된다. 나머지 크레이포의 주장은 성격상 거의 순전히 문필적이다. 그는 다시 한번 나를 논박하는 어조로 우리에게 테르미도르 관료는 악이며, 탐욕스럽고 반동적이라는 등등을 말한다. 진정한 폭로! 그러나, 우리는 스탈린주의 관료가 고결하다고 결코 말하자 않았다! 우리는 단지 맑스주의적 관점에서의 계급의 성격, 즉 생산수단의 소유와 관련하여 그것을 부정했을 뿐이다. 크레이포는 그러나 내가 관료가 국가를 자신의 소유인 것처럼 다룬다는 것을 인정했으니, 나 자신과 절연할 것을 강요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수수께끼에 대한 답이다." 이런 과도하게 단순화된 주장으로 인하여 크레이포는 자신의 변증법적 인식의 절망적인 부족을 드러낸다. 나는 스탈린주의 관료가 절대군주제나 혹은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관료와 동일하다고 결코 말하지 않았다. 국유화된 경제는 관료에게 완전히 새로운 상황을 창출했고 새로운 가능성, 진보적인 가능성뿐만 아니라 퇴행의 가능성까지 열어주었다. 우리는 심지어 혁명 이전에 이것에 관하여 다소간 알고 있었다. 소비에트 관료와 파시시트 국가의 관료를 비교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우리가 흥미를 가지고 있는 관점상 훨씬 더 좋다. 파시스트 관료는 마찬가지로 국가를 자신의 소유인 것처럼 다룬다. 이들은 사적 자본에 대한 엄한 제한을 강요하며, 사적 자본 내부에서의 격변을 종종 유발한다. 우리는 논리적인 주장의 방식으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만약 파시스트 관료가 자본가들의 효과적인 저항을 받지 않고 점점 더 자신의 규율과 자본가들에 대한 제제를 강제하는 데 성공하게 된다면, 이 관료는 소비에트 관료와 절대적으로 흡사하게 점차적으로 스스로를 새로운 지배 "계급"으로 변형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파시스트 국가는 "일정정도"(위의 인용을 보라)만 관료에 속한다. 이 일정정도가 크레이포가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있는 단어이다. 그것들은 심지어 결정적이기까지 하다. 그것들은 양질전화라는 변증법적 법칙의 필수적인 부분이다. 만약 히틀러가 국가를 전유하려고 시도한다면, 그리고 그렇게 해서 "일정정도"만이 아니라 사적 소유를 완전하게 전유하려고 시도한다면, 그는 자본가들의 격렬한 반대에 직면할 것이며, 이것은 노동자에게 거대한 혁명적 가능성을 열어줄 것이다. 그러나 크레이포가 소비에트 관료에 적용하는 논거를 파시스트 관료에 적용하고 파시시트와 스탈린주의 정권들을 동일시하는 초좌익들(일부 독일 스파르타시시트들, 휴고 우르반스, 특정 무정부주의자들 등)이 있다. 우리는 우리가 크레이포에게 했던 다음과 같은 말을 그들에게도 해왔다. 그들의 오류는 사회의 기초가 혁명이나 반혁명이 없이 변할 수 있다고 믿는 것에 있다. 그들은 개랑주의의 필름을 거꾸로 돌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환호하고 있는 크레이프는 소비에트 관료와 관련하여 '배반당한 혁명' 으로부터 "만약 이들 관계들이 어떠한 저항 없이, 혹은 노동자들의 저항에 반하여 안정화되고, 합법화되고, 규범이 된다면, 그것들은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의 성취들의 완전한 청산으로 끝나게 될 것이다."라는 또 하나의 구절을 인용한다. 그리고 크레이포는 "그래서 트로츠키 동지는 노동자 국가로부터 자본가 국가로의 군사적 개입(?)이 없는 (미래의) 변화의 가능성을 예견하고 있다. 1933년에 그것은 개량주의의 필름을 거꾸로 돌리는 것으로 불려지곤 했다."고 결론 내린다. 그것은 1937년에도 똑같이 불려진다. 나에게는 순전히 논리적인 주장을 크레이포는 역사적 예측으로 간주한다. 내전에서의 승리 없이 관료는 새로운 지배계급을 낳을 수 없다. 이것이 내 생각이었고 여전히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 외에, 현재 소련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은 관료에 의해 시작된 단지 예방되고 있는 내전일 뿐이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모든 퇴행과 왜곡에도 불구하고, 생산력의 유례가 없는 발전을 담보하는 혁명에 의해 창출된 국가의 경제적 기초까지는 닿아있지 않다.
누구도 특히, 장기간의 세계적인 쇠퇴의 경우에, 관료로부터 탄생한 새로운 지배계급의 복원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았다. 국가를 통해서 "일정정도" 자신의 수중에 생산력을 장악하고 있는 관료의 현재 사회적 지위는 이러한 이행의 과정으로부터의 극도로 중요한 이탈의 지점이다. 그러나 이것은 역사적 가능성의 문제이지 이미 벌어진 사실은 아니다.
계급은 경제적 원인의 산물인가 아니면 정치적 원인의 산물인가?
'배반당한 혁명' 에서 나는 현재의 소비에트 정권에 대하여 정의를 내리려고 시도했다. 이 정의는 9개의 문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나는 이 일련의 서술적이며 신중한 공식들이 그다지 과학적으로 정연하지는 않다는 것에 동의하겠다. 그러나 이것은 현실에 대하여 솔직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이것은 항상 모험이다. 크레이포는 이 정의에 관하여는 언급하지 않는다. 그는 그것에 대하여 다른 것을 가지고 반대하지 않는다. 그는 만약 새로운 착취 사회가 과거의 것에 비하여 우월한지 아니면 열등한지 말하지 않으며, 이 새로운 사회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의 필연적인 국면인지 혹은 이것이 단순히 역사적인 "우연"인지에 관하여 스스로에게 물어보지 않는다. 그러나, 맑스와 엥겔스의 "공산주의 선언"에서 정식화되었던 것과 같은 우리의 일반적인 역사적 전망의 관점에서, 관료에 대한 사회학적 정의는 대단히 중요하다.
부르주아지는 선천적으로 새로운 생산양식의 인자로서 세상에 등장했다. 부르주아지는 새로운 생산양식이 자신의 가능성을 소진하지 않는 한 역사적 필요성을 가지고 있다. 노예소유주들, 봉건영주들, 중세의 기능공들 등 과거의 모든 사회적 계급들과 관련해서도 똑같은 주장이 가능하다. 그들의 시대에, 그들은 인류의 진보에서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생산체제의 대표였고 지도자들이었다. 그러나, 크레이포는 "관료계급"의 역사적인 위치를 평가하고 있는가? 그는 이 결정적으로 중요한 문제에 관하여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크레이포 자신의 도움을 받아 여러 번 소비에트 국가의 퇴행은 세계 혁명 즉, 소위 정치적인, 그리고 "정세적인[conjunctural]" 원인의 결과라고 여러 번 반복했다. 새로운 "정세적인" 계급에 관하여 말할 수 있는가? 나는 진정으로 의심스럽다. 만약 크레이포가 사회적 정권들의 역사적 연속의 관점으로부터 나온 그의 다소 조급한 개념을 증명하는 것에 동의한다면, 분명히 그는 스스로가 관료에게 소유계급의 이름을 붙이는 것이 용어상 남용일뿐만 아니라, 더욱이 우리의 역사적 전망에 대한 완전한 일탈로 귀결될 수 있는 커다란 정치적 위험을 가지고 있음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크레이포가 이 중대한 문제에 관하여 맑스주의 개념을 수정할 만한 충분한 이유들을 인식하고 있을까? 나 자신에 관해서 말하자면, 나는 전혀 그렇지 않다. 이것이 내가 크레이포를 뒤따르는 것을 거부하는 이유이다.
그러나, 우리는 소비에트 관료가 소유계급의 어떠한 "미덕"(조직적 안정성, 특정한 도덕적 규범 등)도 가지고 있지 않은 채 소유계급의 모든 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할 수 있어야 하며, 말해야만 한다. 노동자 국가는 여전히 국가, 야만적 과거의 산물이며, 후진적이고 고립된 국가에서는 두배로 야만적이며, 비우호적인 조건하에서는 승인할 수 없는 지경으로 퇴행화될 수 있으며, 소생을 위하여는 보충적인 혁명을 필요로 할 수도 있음을 경험으로부터 배워왔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자국가는 우리의 길에서 필연적인 국면으로 남아 있다. 이 국면은 국제 프롤레타리아트의 영구혁명에 의해서가 아니면 극복될 수 없다.
그리고 변증법은 어디에 있는가?
나는 크레이포 동지의 모든 주장을 하나 하나 따를 수 없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전체 맑스주의 개념 전체를 개괄해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크레이포가 사실을 사실대로 분석하지 않고 미리 생각한 주제에 유리하게 주장 논리들을 모은다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은 본질적으로 반 변증법적이며, 그래서 반 맑스주의적인 것이다. 이것에 관한 몇 가지 예를 들겠다.
a)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는 오래 전에 정치권력에 대한 모든 희망을 잃었다...." 크레이포는 정확하게 언제인지에 관하여는 신경 쓰지 않는다. 그는 단순히 우리 경향이 "오랫동안" 환상을 키워왔다는 인상을 만들어내고자 한다. 그는 1923년에 관료가 심대히 흔들렸으며, 독일의 패배와 그 뒤를 이었던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의 사기저하만이 그들의 지위를 안정화시켰다는 것에 관하여 말하는 것을 망각하고 있다. 중국 혁명(1925-27년) 동안에, 위기가 비슷한 국면으로 반복되었다. 1차 5개년 계획과 히틀러의 정권장악(1931-33)을 예비했던 독일에서의 거대한 격동이 다시 한번 관료의 지배를 위협했다. 결국, 만약 스페인 혁명이 승리했더라면, 그리고 만약 프랑스 노동자들이 그들의 1936년 5-6월 공세를 결론으로까지 발전시킬 수 있었다면,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가 용기와 전투성을 회복하고 최소한의 노력으로 테르미도르 정권을 타도했을까라고 우리가 잠깐 생각해 볼 수 있을까? 오로지 세계 전역에서의 가장 처참하고 의기소침하게 하는 패배의 연속만이 스탈린 정권을 안정화시켰다. 크레이포는 그 자체로 매우 모순적인 결과와 그것을 낳은 과정과 이 과정의 반영이었던 우리의 정책을 대비시킨다.
b) 관료가 국가 자원을 극단적으로 불안정한 하나의 집단으로서만 처리하고 있으며, 고립된 관료들은 국가소유를 자유롭게 처분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주장을 논박하기 위하여, 크레이포는 "부르주아지(?)는 생산수단에 대한 소유의 권리를 자신의 후손들에게 전해줄 수 있기까지 오랜 기간을 기다려야만 했다. 길드 초기에, 우두머리는 동료들에 의하여 선출되었다 ..." 등등으로 대답한다. 그러나 크레이포는 정확하게 "길드 초기에", 길드는 아직 계급으로 나뉘지 않았으며 현대의 관점에서 우두머리는 "부르주아지"가 아니었다는 하찮은 것은 치워두고 있다. 양질전화라는 것이 크레이포에게는 존재하지 않는다.
c) "사적 소유가 부활했고, 상속이 부활되었다 ..." 그러나 크레이포는 이것이 개인적 사용 목적의 재산에 관한 일이며, 생산수단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말하는 것을 회피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그는 관료가 심지어 높은 지위에 있는 관료들조차 개인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것이 그들의 지위로 인해 그들에게 열려있는 물질적 자원들과 비교하면 아무 것도 아니며, 펜놀림 하나로 수많은 관료의 가족들이 최악의 빈곤으로 내던져지는 정확하게 현재의 "숙청"이 관료 자신들과, 그들의 가족은 물론이고, 국가소유 사이의 고리가 전체적으로 얼마나 깨지기 쉬운 것인지를 증명한다는 것을 언급하는 것을 잊고 있다.
d) 현재의 지배도당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는 예방되고 있는 내전이 지배도당은 혁명적 세력에 의해서 말고는 타도될 수 없음을 다시 증명한다. 그러나 이 새로운 혁명은 국가소유와 계획경제의 기초에서 발전해야만 하기 때문에, 우리는 관료의 타도를 1917년의 사회혁명과는 달리 정치혁명으로 규정했다. 크레이포는 이러한 구분이 "궤변의 영역에 있음"을 발견한다. 그런데 그렇게도 통렬한가? 왜냐하면 동지가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한 권력의 재장악이 또한 사회적 중요성을 가지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1830, 1848, 그리고 1870년 9월의 부르주아지 정치혁명들 또한, 그것들이 전국적인 소득의 분리를 중대하게 변화시켰던 한 사회적 중요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의 크레이포 동지, 이 세상 모든 것은 상대적이며 초좌익 형식론자들의 창출물이 아니다. 그 자체로 중대했던 소위 정치혁명에 의해 유발되었던 사회적 변화들은, 특히 뛰어난 부르주아지 사회 혁명이었던 위대한 프랑스 혁명과 비교하면 정말이지 부차적인 것으로 드러난다. 크레이포 동지에게 부족한 것은 비율에 대한 감각과 상대성의 개념이다. 우리의 젊은 동지는 양질전화의 법칙에 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다. 그런데 이것이 변증법의 가장 중요한 법칙이다. 부르주아지 학문의 세계의 권위자들은 변증법 그 자체가 "궤변의 영역"에 있다고 알고 있다는 것은 진실이다.
e) 크레이포가 M. Yvon의 사회학에 영감을 받았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Yvon의 개인적인 관찰들은 정직하고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그가 La Revolution proletarienne의 작은 천국에서 안식처를 발견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Yvon은 "경제", 푸르동의 용어로 "작업장"에 관심이 있었지 "정치" 즉 일반화된 경제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는 형식상 푸르동주의 학파에 속한다. 이것이 정확하게 그가 좌익반대파와 관료사이의 투쟁 중에 중립을 지키도록 해주었다. 1937년 오늘날에(!) 사회적 경향을 구분하는 것 없이 "레닌으로부터의 유산"을 위한 투쟁에 대하여 그가 말해야 하는 것이 그의 완전히 경멸적이고 전혀 혁명적이지 않는 소부르주아 개념을 폭로한다. 계급이라는 관념은 Yvon에게는 추상인데 그는 이것을 "현장"이라는 추상의 상위에 둔다. 크레이포가 다른 어떤 이론적 영감의 원천을 발견하지 못하는 것은 진정으로 슬픈 일이다!
소련에 대한 방어와 사회애국주의
불행하게도 매우 깨지기 쉬운 이 사회학적 골격은 통째로, 우리가 말했듯이, 크레이포가 전쟁 중에 소련과 제국주의 국가들 사이의 구분의 필요성으로부터 도망치도록 도와줄 뿐이다. 이 주제를 다루고 있는 그의 논문의 마지막 두 문단이 특히 [이것을] 알려주고 있다. 크레이포는 우리에게 "유럽과 세계의 모든 전쟁이 우리 시대에는 제국주의 분쟁들에 의해 시작되었으며, 오직 스탈린주의자와 개량주의 바보들만이, 예를 들면, 미래의 전쟁 위험은 파시스트 정권이나 민주주의 정권에게 있을 것이라는 것을 믿을 수 있을 뿐이다."라고 말한다. 이 권위 있는 테제를 잘 표시해 둬라. 이번에는 맑스주의의 무기로부터 차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일정정도 단순화한다면 이것은 진실이다. 이것 이후 즉시, 소련을 "제국주의 전쟁의 옹호자"로서 규정하고 비난하기 위하여 크레이포는 우리에게 "베르사이유 조약 진영에서, 현재 이것의(소련의) 외교는 반대 진영의 히틀러의 외교처럼 똑같은 도발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것을 받아들여 보자. 그러나 전쟁의 제국주의적 성격이 파시스트 외교의 도발적인 역할에 의해 결정되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오직 스탈린주의자나 개량주의 바보들만이 그것을 믿을 수 있다." 그리고 나는 우리 다른 사람들이 소비에트 국가에 대하여 똑같은 비판을 적용하지 않기를 희망한다. 일부 "침략자들"을 징벌하기를 열망하기 때문이 아니라 사적 소유의 정권을 분쇄하고자 하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은 제구주의 국가들에서 패배주의자이다. 그렇지 않은가? 소련에 대한 독일의 전쟁에서 그것은 제국주의자들이 스탈린과 리트비노프를 징벌하는 것에 관하여 신경 쓰지 않는 한, 소련의 경제적 기초를 바꾸는 것이 문제가 될 것이다. 그런 다음에는? 크레이포는 오로지 즉각적으로 반대의 길을 택하기 위하여만 그의 기본적인 테제를 확립해왔다. 그에 따르면 위험, 진정한 위험은 모든 사회애국주의자들이 새로운 배신을 위한 구실로서 소련에 대한 방어를 택할 것이라는 것에 있다. "그러한 상황에서, 우리의 태도에 있어서의 어떠한 모호함도 치명적인 것이 될 것이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현재는 소련에 대한 '무조건적인 방어' 즉(!!!) 우리 나라와 소련에서 혁명에 대한 사보타지나 혹은 패배주의와 혁명 중에서의 선택이 필요하다"
거기에 우리가 있다. 크레이포에 따르면 노동자 국가에 대한 방어는, 심지어 노동자 국가가 가장 진정한 노동자 국가일 때조차도, 동맹을 맺고 있는 제국주의 국가의 프롤레타리아트가 자신의 부르주아지와의 신성한 단결을 체결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이것은 소련의 사회적 성격에 관한 문제가 전혀 아니다. 뭐가 문제인가?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말하듯이, 여기에 수수께끼의 열쇠가 있다. 크레이포는 자본 W와 함께 하는 전쟁에서, 프롤레타리아트는 그것이 독일, 소련에 반대하는 것인가, 혹은 반란 중에 있는 모로코에 반대하는 것인가 여부에 관심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믿는데, 이것은 이 모든 경우에 사회애국주의의 지배로부터 탈출할 유일한 가능성으로서 "군소리 없는 패배주의"를 선포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우리는 아주 명료하게 초좌익주의는 자기 자신을 두려워하며 자신의 깃발에 진실로 남아있게 될 절대적인 보증을, 즉 존재하지도 않는 보증들을 요구하는 기회주의라는 것을 확인한다. 이런 유형의 비타협성은 화가 나서 자기 친구들에게 "나 좀 말려 줘, 뭔가 엄청난 짓을 할 꺼야"라고 말하는 소심하고 유약한 인간형을 생각나게 한다. 나에게 신비롭게 밀봉된 테제를 주고 나의 눈에 불투명한 가리개를 덮어주시오, 혹은 다른 어떤..... 내가 뭔가 엄청난 일을 할 것이오! 진정으로 우리는 수수께끼에 대한 열쇠를 찾았다!
그러나 예를 들면 크레이포는 어떤 경우에도 1918년과 1923년 사이, 혹은 초좌익들 양보를 하기 위하여 적어도 1918년과 1921년 사이의 소비에트 국가의 프롤레타리아트적 성격을 의심하는가? 이 기간에 소비에트 국가는 국제적으로 정책을 전환했으며 일시적인 동맹을 추구했다. 동시에, 패배주의가 "적들" 뿐만 아니라 일시적인 "동맹국들"에서도 모든 제국주의 국가 노동자들의 임무가 된 것이 정확하게 이 기간이다. 소련에 대한 방어의 임무는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자신의 부르주아지에게 신뢰의 표를 제공하는 것을 결코 의미하지 않았다. 전쟁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입장은 평화시기에 프롤레타리아트의 입장의 연속이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소련을 자신의 혁명적 정책에 의하여 방어하지, 결코 부르주아지에 굴복하지 않지만, 언제나 구체적인 환경들을 수용했다. 이것은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첫 4번의 대회의 가르침이었다. 크레이포는 이들 가르침을 소급하여 수정할 것을 요구하는가?
항상 금융자본의 명령에 복종하면서, 불성실한 "비개입"을 주장하는 대신에 만약 블룸[Blum]이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자들인 카발레로와 네그린을 지지했었더라면, 크레이포는 "인민전선" 정부에 대한 자신의 단호한 반대를 포기했겠는가? 혹은 스페인에서 투쟁하고 있는 두 진영 사이를 차별화할 의무를 단념하고 자신의 정책을 이러한 차별에 순응시켰겠는가?
똑같은 것이 극동에도 적용된다. 만약 잉글랜드를 따르는 장개석이 내일 일본에 대하여 전쟁을 선포한다면, 크레이포는 중국을 돕기 위하여 신성동맹에 참여할 것인가? 아니면 반대로 크레이포에게는 중국과 일본 사이에는 자신의 정책에 영향을 끼칠만한 어떠한 차이도 없다고 선포할 것인가? 크레이포의 대안은 이렇다. 신성동맹을 맺는 것을 통한 소련, 이디오피아, 스페인 공화국, 식민지 중국 등에 대한 방어인가 아니면 신비롭게 밀봉되고 전망적으로 질서 정연한 온전한 패배주의를 통한 방어인가. 이 근본적으로 잘못된 대안은 실제 사태의 첫 번째 테스트에서 가루로 부서질 것이며 가장 어리석은 종류의 사회애국주의에 문을 활짝 열게 될 것이다.
크레이포는 "전쟁에 대한 우리 자신의 테제들이 이 문제에 대한 어떠한 모호함으로부터도 면제되어 있는가?"라고 묻는다. 불행하게도 그렇지 않다! 패배주의의 필요성을 분석하면서, 그것들이 "전쟁에서의 구체적인 정세에 의해 야기되는 구체적인 실천의 성격에서의 중대한 차이들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고 묻는다. 예를 들면, 소련과 일본 사이의 전쟁의 경우에 우리는 "소련으로 군수품을 보내는 것을 사보타지 하지 말아야"만 하며, 결과적으로 우리는 군수품 공장 등을 사보타지 하는 파업을 선동하는 것을 피해야만 한다고 테제는 지적한다. 우리 눈을 믿을 수 없다. 사태들이, 특히 프랑스에서, 이 점에 관한 우리의 테제를 확연하게, 논쟁의 여지가 없게 확증해주었다. 수개월 동안의 노동자 집회들이 "스페인에 비행기를!"을 외쳤다. 블룸이 약간의 [비행기를] 보낼 것을 결정했다고 잠깐 상상해보라. 이 특정한 순간에 항만 노동자들이나 선원들의 파업이 진행중이라고 상상해보라. 크레이포는 무엇을 했을까? 그가 "스페인을 위해 비행기를"이라는 외침에 반대했을까? 그가 파업중인 노동자들에게 이번 비행기들에 대해서 예외를 적용하자고 설득했을까? 그러나 소련은 실제로 비행기를 보냈다(내가 매우 잘 아는데, 매우 비싼 가격으로, 그리고 자본가 정권에 대한 지지라는 조건을 달고). 볼셰비키-레닌주의자들은 소비에트 노동자들이 이 선적을 사보타지할 것을 주장해야 하는가? 그런가 그렇지 않은가? 만약 내일 프랑스 노동자들이 두 척의 군수품을 실은 배가 프랑스를 떠나 한 척은 일본으로 그리고 다른 한 척은 중국으로 갈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크레이포의 입장은 무엇일까? 나는 그가 장개석에 대한 그의 입장을 숨기지 않고, 그리고 차우템프스에 대한 조금의 신뢰도 표현하지 않으면서 노동자들에게 도꾜로 가는 배는 선적을 거부하고 중국으로 향하는 배는 내보낼 것을 요구할 만큼 충분한 혁명가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정확하게 우리의 테제가 "전쟁에서의 구체적인 정세에 의해 야기되는 구체적인 실천의 성격에서의 중대한 차이들이 있을 수 있다"로 말하는 것이다. 테제 초안이 출판되었을 때에는 이 정식화와 관련하여 의구심들이 여전히 있을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이디오피아, 스페인, 그리고 중일전쟁을 경험하고 난 이후에는 우리 테제의 모호함에 대하여 말하는 자는 나에게는 아무 것도 배우고자 하지 않고 아무 것도 잊으려고 하지도 않는 초좌익 보본[Bourbon]인 것으로 보인다.
크레이포 동지, 모호함은 전적으로 당신 쪽에 있다. 당신의 글은 모호함으로 가득차 있다. 이제 진정으로 그것들을 없애야 할 때이다. 나는 동지가 동지의 오류에도 불구하고 테르미도르 관료의 억압에 대한 혁명적 분노를 가지고 있음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감정만으로는, 그것이 아무리 정당하다고 할지라도, 객관적인 사실들에 기초한 올바른 정책을 대체할 수는 없다. 프롤레타리아트에게는 뼛속으로부터 부패해 있는 스탈린주의 관료를 타도하고 몰아낼 충분한 이유가 있다. 그러나 정확하게 이것 때문에 히틀러나 미카도에 대한 임무를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방기할 수는 없다. 노동자들에 의한 스탈린 타도는 사회주의를 향한 거대한 전진이다. 제국주의의 스탈린 분쇄는 반혁명의 승리이다. 이것이 소련에 대한 우리의 방어의 엄밀한 의미이다. 세계적 규모에서 우리의 이러한 관점은 민족적 규모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우리의 방어와 비슷하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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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중에 있는 소련
독소조약과 소련의 성격
독소조약의 체결 이후의 소련을 노동자 국가로 간주하는 것이 가능한가? 소비에트 국가의 미래가 다시 또 다시 우리 사이에서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우리의 앞에 있는 역사상 최초의 노동자 국가에 대한 시도이기에 이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과거 어느 때에도, 어떤 다른 곳에서도 이 현상에 대한 분석이 가능했던 적이 없다. 소련의 사회적 성격에 관한 문제에서, 우리가 과거에 말해왔듯이 역사적 사실을 강령적 규범으로 대체하는 것으로부터 오류들이 흔하게 발생한다. 구체적인 사실은 규범으로부터 벗어난다. 그러나 이것이 구체적 사실이 규범을 뒤집어엎는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으며, 오히려 그 반대의 측면을 재확인해왔다. 우리가 확인하고 설명하였던 최초의 노동자 국가의 퇴행은 노동자 국가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특정한 역사적 조건들 속에서 무엇이 될 수 있으며 무엇이 될 것인가에 관하여 더욱 사실적으로 보여주었을 뿐이다. 구체적 사실과 규범 사이의 모순은 우리에게 규범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혁명적 수단으로 그것을 위해 투쟁하도록 강제한다. 소련에서 다가오는 혁명의 강령은 한편으로 객관적인 역사적 사실로서의 소련에 대한 우리의 평가에 의해서,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자 국가라는 규범에 의해 결정된다. 우리는 "모든 것을 잃었다. 우리는 완전히 다시 시작해야만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우리는 주어진 국면에서 구제되고, 보존되며, 더욱 발전될 수 있는 노동자 국가의 그러한 요소들을 분명하게 지적한다.
요즘, 독소조약이 소비에트 국가에 대한 우리의 평가를 변경시킨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애쓰는 자들은 본질적으로 코민테른의 입장에 그들의 기준을 두고 있다 - 좀더 정확하게 말해서 코민테른의 과거의 입장에. 이 논리에 따르면, 노동자 국가의 역사적 임무는 제국주의적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이다. 민주주의자들의 파시즘의 이익을 위한 "배신"은 소련으로 하여금 노동자 국가로 간주될 수 없게 한다. 사실의 측면에서, 히틀러와의 조약에 서명하는 것은 소비에트 관료의 퇴행의 정도와 소비에트 관료의 코민테른을 포함하는 국제 노동계급에 대한 경멸의 정도를 측정하기 위한 또 다른 척도를 제공할 뿐이지, 소련에 대한 사회학적 평가에 대한 재평가를 위한 기초를 제공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차이들은 정치적인 것들인가 아니면 용어상의 것들인가?
소비에트 국가의 성격에 관한 문제를 추상적-사회학적 기반에서가 아니라 구체적-정치적 임무들의 기반에서 제기하는 것으로 시작해보자. 관료가 새로운 "계급"이며 소련의 현 정권이 계급 착취의 특수한 체제라는 것을 잠시동안 인정해 보도록 하자. 이들 정의들로부터 어떠한 새로운 정치적 결론들이 도출되는가? 오래 전에 제4 인터내셔널은 노동인민들의 혁명적 봉기로 관료를 타도할 필요성을 승인했다. 관료가 착취하는 "계급"이라고 주장하는 자들은 어떤 다른 것도 제안하지 않고 있으며, 제안할 수도 없다. 관료의 타도를 통해 성취해야할 목표는 관료를 소비에트들로부터 축출하는, 소비에트 지배의 재수립이다. 좌익 비평가들은 어떤 다른 것도 제안할 수 없으며, 제안하지도 않고 있다. 세계 혁명과 사회주의 사회의 건설에 협력하는 것이 쇄신된 소비에트들의 임무이다. 그러므로 관료의 타도는 국가 소유와 계획 경제의 보존을 전제한다. 이 속에 전체 문제의 핵심이 있다.
계획이 관료의 이해관계가 아니라 생산자들 스스로의 이해관계에 의해 결정될 때, 경제의 다양한 부문들 사이에서의 생산력의 분배와 일반적으로 계획의 전체 내용은 두 말할 필요도 없이 철저하게 바뀔 것이다. 그러나 기생적인 소수 독재자들을 타도하는 문제가 여전히 국유화된 (국가) 소유를 보존하는 것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미래의 혁명을 정치[혁명-해석자의 삽입]이라고 말했다. 우리를 비판하는 자들 중 특정인들은(Ciliga[실리가], Bruno[브루노] 등) 무엇이 오건 간에 미래의 혁명을 사회[혁명-해석자의 삽입]이라고 부른다. 이 정의를 인정해보도록 하자. 이것이 무엇을 본질적으로 바꾸는가? 이것은 우리가 일일이 열거해왔던 혁명의 과제들에 어떠한 것도 부가하지 않는다.
우리를 비판하는 자들은 우리가 오래 전에 확립했던 사실들을 전반적으로 수용한다. 그들은 관료와 노동인민들의 지위에 대한 평가나 혹은 국제 영역에서 크레믈린의 역할에 관한 평가에 절대적으로 어떠한 본질적인 것도 부가하지 않는다. 이 모든 측면에서 그들은 우리의 분석에 도전하는 것에 실패할 뿐만 아니라, 반대로 그들 스스로를 완벽하게 우리의 분석에 기초하고 있으며 심지어 그들 스스로를 우리의 분석에 완전히 한정하기조차 한다. 우리에 반대하여 그들이 제기하는 유일한 비난은 우리가 필요한 "결론들"을 도출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분석을 해보면, 이들 결론들은 순전하게 용어적인 성격의 것으로 판명된다. 우리를 비판하는 자들은 퇴행화된 노동자 국가를 노동자 국가로 부르기를 거부한다. 그들은 전체주의 관료를 지배계급으로 불러야 한다고 요구한다. 만약 우리가 그들에게 이들 용어상의 양보들을 허용하게 된다면, 그들 스스로가 그들의 순전히 용어상의 승리를 가지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는 까닭에, 우리가 우리를 비판하는 자들을 아주 어려운 입장에 놓이게 하는 꼴이 될 것이다.
다시 한번 우리 스스로를 점검해보자
그러므로 소련의 사회학적 성격의 문제와 관련하여 우리의 것과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는 동지들과 분리하는 것은 한낱 엽기적인 넌센스가 될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순전하게 이론적인 그리고 심지어 용어상의 차이들을 무시하는 것은 우리 쪽에서의 무분별함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진전의 과정에서 그것들이 피와 살을 획득하고 정반대의 정치적 결론들로 귀결될 것이기 때문이다. 거미줄과 쓰레기가 쌓이는 것을 결코 허용하지 않는 깔끔한 주부들처럼, 혁명적 정당은 명료함의 결여, 혼란과 애매함에 관용적일 수 없다. 우리 집은 반드시 깨끗하게 유지되어야만 한다!
실례를 들기 위해 테르미도르의 문제를 회상해보도록 하자. 오랫동안 우리는 소련에서 테르미도르는 단지 준비되고 있을 뿐이지 아직까지 완성되지는 않았다고 주장했다. 차후에, 보다 더 자세하고, 면밀한 성격의 분석을 하면서 우리는 테르미도르가 이미 오래 전에 발생되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우리 자신의 실수에 대한 이 공개적인 교정은 우리 대오 내에서 가장 작은 당혹스러움도 야기하지 않았다. 왜인가? 우리가 반동의 성장에 관하여 매일매일 공동으로 연구했던 것처럼, 우리 모두가 소련에서 진행되는 것들의 본질에 관하여 동일한 평가를 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그것은 역사적 유추에 보다 엄밀성을 부여하는 문제에 불과했지 그 이상 아무 것도 아니었다. "소련에 대한 방어"의 문제 - 이 문제는 곧 다룰 것이다. - 에 관한 차이를 들추어내고자 하는 일부 동지들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나는 오늘 여전히 우리 자신의 사상들에 보다 엄밀성을 부여함으로써 우리가 제4 인터내셔널 강령의 기초 위에서 의견일치를 유지할 수 있기를 원한다.
암적인 종양인가 아니면 새로운 기관인가?
우리를 비판하는 자들은 현재의 소비에트 관료는 자본주의 사회의 부르주아지나 혹은 노동 관료와 거의 닮지 않았으며, 파시스트 관료들보다 훨씬 더 한 정도로, 새롭고 훨씬 강력한 사회층을 의미한다고 수차 주장해왔다. 이것은 참으로 올바르며, 우리는 결코 이것에 눈을 감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가 소비에트 관료를 "계급"으로 간주한다면, 우리는 즉각적으로 이 계급이 과거에 우리에게 알려졌던 어떤 소유계급들과도 비슷하지 않다는 것을 선언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결과 우리의 성과는 보잘것없게 된다. 그들의 폐쇄적 성격, 그들의 전횡적 지배, 그리고 자신의 선조는 브라만의 신성한 입술에서 나온 반면, 인민 대중들은 브라만 신체의 구역질 나는 부분들로부터 생겨났다고 생각하는 지배층의 오만함을 강조하면서, 우리는 빈번하게 소비에트 관료를 계층[카스트]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런 정의조차도 엄격하게 과학적인 성격을 갖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것의 상대적인 우월성은, 누구도 모스크바의 독재자들을 흰두교의 브라만 계층을 가지고 정의하려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이 용어의 임시 변통적 성격이 모두에게 분명하다는 것에 있다. 과거의 사회학적 용어학은 진화(퇴행)의 과정에 있으며 안정정식 형식을 획득하지 못한 새로운 사회적 사건들을 위한 이름을 준비하지 않았으며 준비할 수도 없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그것의 역사적 특수성들에 대하여 주의를 게을리 하지 않으면서 소비에트 관료를 관료로 계속 부른다. 우리 의견으로는 당분간 이것으로 족할 것이다.
이 문제는, 순전히 용어상의 문제로서가 아니라, 과학적, 정치적으로 다음과 같이 제기된다: 관료는 사회기관의 일시적 성장을 의미하는가, 혹은 이 성장이 이미 역사적으로 불가항력적인 기관으로 이미 변형되었는가? 사회적 종양들은 역사적 환경들에 대한 "우연적인" (예를 들면, 일시적이고 예외적인) 곤란들의 산물일 수 있다. 사회적 기관(그리고 이것은 착취계급을 포함하는 모든 계급이다)은 생산 자체의 뿌리 깊은 내적 필요성들의 결과로서만 형성된다. 만약 우리가 이 문제에 답을 하지 않는다면, 모든 논쟁은 쓸모 없는 말장난으로 후퇴할 것이다.
관료의 초기의 퇴행
모든 지배계급을 위한 역사적 정당성은 그것이 이끌고 있는 착취의 체제가 새로운 단계로 생산력의 발전을 끌어올렸다는 것에 있었다. 한 점 의심도 없이, 소비에트 정권은 경제에 커다란 충격을 가했다. 그러나 이 충격의 근원은 생산수단의 국유화와 계획의 시작들이었지 결코 관료가 경제에 대한 통제권을 찬탈했다는 사실이 아니었다. 반대로, 제도로서의 관료주의는 국가의 기술적, 문화적 발전에 최악의 제동장치가 되었다. 소비에트 경제가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의 기술과 조직을 이식하고 학습하는데 20년의 세월이 걸렸다는 사실이 이것을 일정기간 덮어 가렸다. 더 좋은 쪽으로 건 더 나쁜 쪽으로 건 차용과 모방의 기간 동안 여전히 모든 자발적이고 창조적인 힘을 질식시키는 것과 같은 관료적인 기계적 활동을 위한 여지가 있었다. 그러나 경제가 더 성장할수록, 필요조건들이 더욱 복잡해졌고, 관료 정권의 장애물이 더욱 더 견딜 수 없는 것이 되었다. 그것들 사이의 지속적으로 강화되는 모순은 중단 없는 정치적 격동들로, 활동의 모든 측면에서 가장 현저하게 창조적인 인자들에 대한 구조적 제거로 이어진다. 그래서, 관료가 그 자신으로부터 "지배 계급"을 산출하는 것에 성공할 수 있기 전에, 관료는 발전의 요구들과의 화해 불가능한 모순을 겪게 되었다. 이것에 대한 설명은 관료는 스스로에게 특수하고 자기 자신이 없이는 불가능한 새로운 경제체제의 담지체가 아니고, 노동자 국가의 기생적 종양이라는 사실에서 정확하게 발견된다.
관료의 절대권력과 몰락의 조건들
소비에트 독재자들은 구 지배계급의 모든 악폐들을 가지고 있지만 그 지배계급들의 역사적 사명은 결여하고 있다. 소비에트 국가의 관료적 퇴행에서, 발견되는 것은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까지 현대 사회의 일반적인 법칙들이 아니라, 단지, 자본주의 환경 속에서의 후진적인 혁명적 국가라는 조건하에서 이들 법칙들의 특수하고 예외적이며 일시적인 굴절의 표현이다. 소비재의 결핍과 그것들을 획득하기 위한 총체적인 투쟁은 분배의 기능을 남용하는 경찰관을 만들어낸다. 외부로부터의 적대적인 압력이 그 경찰관에게 국가의 "수호자" 역할을 부여하고, 그에게 나라 전체에 걸친 권위를 부여하며, 그가 국가를 이중으로 약탈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
그러나 국가의 후진성과 제국주의적 환경이라는 관료의 절대권력을 위한 두 가지 조건들 모두는 일시적이고 이행적인 성격을 가지며 세계 혁명의 승리와 함께 사라질 수밖에 없다. 심지어 부르주아 경제주의자들 조차 계획 경제를 가지고 미국의 년 국민생산을 급속하게 2000억 달러로까지 끌어올려서 온 국민에게 단지 자신들의 일차적인 필요들에 대한 만족뿐만 아니라 실질적인 안락을 보장할 수 있다는 것을 계산했다. 다른 한편으로, 세계 혁명은 관료화의 추가적 요인으로서의 외부로부터의 위험을 제거할 것이다. 군비에 국민 소득의 엄청난 부분을 소모할 필요성의 제거가 대중들의 삶과 문화의 질을 더욱 더 높여줄 것이다. 이러한 조건들에서, 경찰 분배자에 대한 필요성 자체가 사라질 것이다. 거대한 협동조합으로서의 행정기관[소비에트-해석자의 첨언]이 빠르게 국가 권력을 대신할 것이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사이에 위치하는 새로운 지배계급을 위한 공간이나 새로운 착취 정권을 위한 공간은 없을 것이다.
만약 사회주의 혁명이 성취되지 않는다면 그럼 무엇인가?
자본주의의 붕괴는 구 지배계급의 붕괴와 같은, 궁극의 한계들에까지 이르렀다. 이 체제의 더 이상의 생존은 불가능하다. 생산력들이 계획에 조응하여 조직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누가 이 임무를 완수할 것인가? 프롤레타리아트인가 아니면 정치인들, 행정가들 그리고 기술자들과 같은 "공산당 위원들"이라는 새로운 계급인가? 특정 합리주의자들의 의견에 따르면, 프롤레타리아트에게 희망을 품을 수 없다는 것을 역사적 경험이 증명한다고 한다. 당시에 이미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물질적 전제조건이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프롤레타리아트는 지난 제국주의 전쟁을 막아낼 "능력이 없음을" 증명했다[고 한다-해석자의 첨가]. 전쟁 이후의 파시즘의 성공들이 다시 한번 자본주의 사회를 막다른 골목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도록 이끌 "능력이 없음"의 결과였다[고 한다.-해석자의 첨가]. 소비에트 국가의 관료화가 이번에는 프롤레타리아트 스스로가 민주주의적 기제를 통하여 사회를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이 없음"의 결과였다[고 한다. -해석자의 첨가]. 스페인 혁명은 파시즘과 스탈린주의 관료들에 의해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바로 눈앞에서 교살되었다. 결국, 이 체인의 마지막 연결 고리는 세계 프롤레타리아트 측에서의 완전한 무기력과 함께 아주 공개적으로 준비되고 있는 새로운 제국주의 전쟁이다. 만약 이 개념이 수용된다면, 즉 만약 프롤레타리아트가 사회주의 혁명을 성취할 수 있는 힘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면, 생산력의 국유화라는 긴급한 임무는 분명하게 다른 사람들에 의해 성취될 것이다. 누구에 의해서? 세계적 규모에서 새로운 지배계급으로서 쇠퇴한 부르주아지를 대체하게 될 새로운 관료에 의해서. 이것이 용어들에 관한 논쟁에 만족하지 않는 그러한 "좌익들"이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하는 방식이다.
당면한 전쟁과 현대사회의 운명
사태들의 진전에 의해서 이 문제가 현재 아주 구체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2차 세계 대전은 시작되었다. 이것이 사회는 더 이상 자본주의에 기초해서는 생존할 수 없다는 사실을 논쟁의 여지가 없게 입증한다. 그것으로 이것은 프롤레타리아트를 새롭고 아마도 결정적인 시험에 들게 한다.
만약 우리가 굳게 믿는 것처럼 이 전쟁이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을 고무한다면, 필연적으로 소련에서 관료의 타도와 1918년에서 보다 훨씬 높은 경제적, 문화적 기초에서 소비에트 민주주의의 부활로 귀결될 것임에 틀림없다. 이 경우, 스탈린 관료가 "계급"인가 혹은 노동자 국가의 암 덩어리였는가에 대한 문제가 자동적으로 해결될 것이다. 모든 사람들에게 세계 혁명의 발전의 과정에서 소비에트 관료는 단지 일시적인 퇴보였다는 것이 분명해 질 것이다.
그러나, 당면한 전쟁이 혁명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의 쇠퇴를 촉진할 것이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다른 길이 있게 된다: 독점자본주의 쇠퇴의 심화, 독점 자본주의의 국가화의 융합의 심화, 그리고 민주주의가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모든 곳에서 전체주의 정권에 의한 민주주의의 대체. 사회의 지도력을 자신의 손아귀에 취할 수 없는 프롤레타리아트의 무능력이 이러한 조건들 하에서 실제로 보나파르티스트 파시스트 관료로부터 새로운 착취 계급의 성장을 낳을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징조들에 따르면, 이것은 문명의 파멸의 전조가 되는 쇠퇴의 정권일 것이다.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선진자본주의 국가들의 프롤레타리아트가 권력을 유지할 수 없음이 드러나고, 소련에서처럼 권력을 특권화된 관료에게 넘겨야만 하는 경우에 비슷한 결과가 발생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관료적 퇴보의 이유가 국가의 후진성과 제국주의의 포위에서 기원하는 것이 아니라 지배계급이 될 수 없는 프롤레타리아트의 태생적 무능력에서 기원한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할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의 소련이 그것의 근본적인 특성에서 국제적 규모에서의 새로운 착취정권의 전조였다는 것을 되돌아보면서 입증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소비에트 국가의 명칭에 대한 용어상의 논쟁으로부터 상당히 멀리 벗어났다. 그러나 우리를 비판하는 자들이 항의하지 못하도록 해두자; 필요한 역사적 전망을 취함으로써, 하나의 사회적 통치의 다른 것으로의 대체와 같은 문제에 관하여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다. 그 종착지까지 가져간다면, 스탈린 정권이 부르주아지 사회로부터 사회주의 사회로의 이행의 과정에서의 증오스러운 퇴보이던가 혹은 스탈린 정권이 새로운 착취 사회의 첫 번째 국면이던가 라는 역사 속의 양자택일이 된다. 만약 두 번째 예측이 올바른 것으로 판명된다면, 당연히 관료는 새로운 착취계급이 될 것이다. 두 번째 전망이 아무리 부담스럽더라도, 만약 발전에 따라서, 세계의 프롤레타리아트가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수행할 수 없음이 실제로 증명된다면, 자본주의 사회의 국제적 모순들에 기초한 사회주의 강령이 유토피아로 종결되었다는 것을 단지 인정하는 것 이외에 다른 어떤 것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전체주의 관료 사회의 노예들의 이해관계를 방어하기 위한 새로운 "최소"강령이 요구된다는 것이 자명하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사회주의 혁명의 전망을 포기하도록 강요하는 논쟁의 여지가 없는 혹은 인상적이기라도 한 객관적 자료가 있는가? 이것이 문제가 되고있는 전부이다.
"관료적 집산주의"의 이론
히틀러가 권력을 장악한 직후, 독일 "좌익 공산주의자" 휴고 우르반스는 자본주의를 대신하여 "국가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역사적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는 이 정권의 첫 번째 예들로 이탈리아, 소련, 독일을 들었다. 그러나 우르반스는 그의 이론의 정치적 결론들을 도출하지는 않았다. 최근에 과거에 제4 인터내셔널에 들러붙었던 이탈리아 "좌익공산주의자" 브루노 알[Bruno R.]은 "관료적 집산주의"가 자본주의를 막 대체하려고 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새로운 관료는 계급이며 노동인민들에 대한 관료의 관계는 집합적 착취이고 프롤레타리아트들은 전체주의적 착취자들의 노예로 바뀐다.
브루노 알은 소련에서의 계획경제, 파시즘, 국가사회주의 그리고 루즈벨트의 "뉴딜"을 동일시한다. 이들 모든 정권들은 의심의 여지없이 최근의 분석에서 현대 경제의 집산적인 경향들에 의해 결정되는 공통의 특징들을 가지고 있다. 10월 혁명 전에 레닌조차 제국주의 자본주의의 주요한 특수성들을 다음과 같이 공식화했다: 생산력의 거대한 집중, 독점자본주의와 국가의 융합의 심화, 이 융합의 결과로서의 벌거벗은 독재를 향한 계통적 경향. 중앙화와 집산화의 특징들은 혁명의 정치와 반혁명의 정치를 모두 결정한다; 그러나 이것은 혁명, 테르미도르, 파시즘 그리고 미국의 "개량주의"를 동일시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결코 의미하지 않는다. 브루노는 집산화의 경향이 노동계급의 정치적 쇠약의 결과 "관료적 집산주의"의 형태를 띤다는 사실에 집착해왔다. 현상 그 자체는 논쟁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어디에 그것의 한계가 있고, 무엇이 그것의 역사적 중요성인가? 우리가 이행기의 기형화, 사회적 과정에서의 다중 요소들의 불균등 발전의 결과로서 받아들이는 것을 부르노 알은 관료가 지배계급이 되는 독립적인 사회구조로 여긴다. 어쨌든 브루노 알은 용어상의 습자책 실습이라는 배타적 집단으로부터 주요한 역사적 일반화의 수준으로 이행하려고 애쓰고 있다는 장점은 가지고 있다. 이것이 그의 오류를 폭로하기 더 쉽게 해준다.
많은 극좌들처럼, 브루노 알은 스탈린주의를 본질적으로 파시즘으로 정의한다. 한편에서 소비에트 관료는 파시즘의 정치적 방책들을 수용했다; 다른 측면에서 아직까지 스스로를 국가 개입의 "부분적인" 방책들에 한정하고 있는 파시스트 관료가 경제의 완전한 국유화로 향하고 있으며 곧 거기에 도달할 것이다. 첫 번째 주장은 절대적으로 옳다. 그러나 파시스트의 "반자본주의"가 부르주아지에 대한 몰수에 도달 할 수 있다는 브루노의 주장은 완전하게 잘못되었다. 국가개입과 국유화의 "부분적인" 방책들은 개량이 혁명과 다른 것처럼 계획화된 국가 경제와 실제로 다르다. 무쏠리니와 히틀러는 단지 자산 소유자들의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있으며 자본주의 경제를 "통제"하고 있을 뿐이며, 더욱이 무엇보다도 전쟁의 목적을 위하여 그렇게 하고 있다. 크레믈린의 소수 독재는 다시 한번 뭔가 다른 무엇인가 이다: 크레믈린의 소수 독재는 러시아의 노동계급이 역사상 소유관계의 가장 위대한 전복을 성취했다는 사실 때문에만 오직 하나의 기관으로서 경제를 관리할 기회를 가진다. 이 차이를 잊어서는 절대 안 된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정반대의 양극의 스탈린주의와 파시즘이 언젠가 하나에, 동일한 형태의 착취사회(브루노 알의 용어에 따르면 "관료적 집산주의")에 도달 할 것이라는 것을 인정한다고 해도, 여전히 이것이 인류를 막다른 골목으로부터 구원할 수 없을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의 위기는 사적 소유의 반동적 지배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그것만큼이나 국가적 소유의 반동적 역할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비록 여러 파시스트 정부들이 국내에서 계획 경제의 체제를 수립하는데 성공한다고 해도, 긴 안목에서 보면 어떤 계획에 의해서도 예견되지 못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불가피한 혁명적 운동들은 제쳐두고 세계 지배를 위한 전체주의 국가들간의 투쟁이 계속될 것이며, 심지어 격화될 것이다. 전쟁이 계획경제의 과실을 집어삼킬 것이며, 문명의 기초들을 파괴할 것이다. 이것은 사실인데, 버트란트 러셀은 일부 승리한 국가가 전쟁의 결과 하나의 전체주의적 바이스[vise/강제, 혹은 힘-해석자의 주]에 온 세상을 통일하게 될지 모른다. 그러나 매우 미심쩍지만, 그런 가정이 현실화된다고 하더라도, 군사적 "통일"은 바르세이유 조약만큼이나 불안정할 것이다. 민족단위의 봉기와 그것의 평정이 문명의 무덤이 될 새로운 세계 전쟁에서 극에 달할 것이다. 우리의 주관적인 희망들이 아니라 객관적인 현실이 인류가 [문명의 몰락으로부터-해석자의 첨가]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세계 사회주의 혁명이라는 것을 웅변하고 있다. 다른 길이 있다면 그것은 야만주의로의 퇴보이다.
프롤레타리아트와 프롤레타리아트의 지도부
우리는 곧 계급과 그 지도부 사이의 관계의 문제에 관한 별도의 글에 진력할 것이다. 이곳에서 우리는 가장 필수적인 것들에 우리 스스로를 한정할 것이다. 정치가 경제의 단순한 그리고 직접적인 "반영"이라고 생각하는 천박한 "맑스주의자들"만이 지도부는 계급을 직접적이고 단순하게 반영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실제로, 피억압 계급 위에 올라섰던 지도부는 불가피하게 지배계급의 억압에 굴복한다. 예를 들면, 미국 노동조합들의 지도부는 그들이 부르주아지를 "반영"하는 것만큼 프롤레타리아트를 "반영"하지는 않는다. 부르주아지의 억압을 견디어 낼 수 있는 진정으로 혁명적인 지도부의 선출과 교육은 엄청나게 힘든 임무이다. 특정 역사적 조건하에서 가장 후진국인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트가 가장 멀리 내다보며 용맹스러운 지도부를 세웠다는 사실에서 역사적 과정의 변증법은 스스로를 가장 훌륭하게 표현했다. 반대로, 가장 오래된 자본주의 문화의 국가인 영국의 프롤레타리아트는 오늘날에조차 가장 아둔하고 비굴한 지도부를 가지고 있다.
1914년 7월에 공개적인 성격을 띠었던 자본주의 사회의 위기는 전쟁의 바로 첫 번째 날로부터 프롤레타리아트 지도부에 강력한 위기를 만들어냈다. 그 당시로부터 25년이 경과하는 동안,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의 프롤레타리아트는 아직 우리 시대의 임무들의 수준으로까지 상승할 수 있는 지도부를 창출하지 못했다. 그러나 러시아의 경험이 그러한 지도부가 창출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물론 이것이 그 지도부가 퇴행에 대하여 면역력을 갖출 것이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문제는 다음의 것들에 있다: 객관적인 역사적 필연성이 결국에는 노동계급의 전위의 의식에 스스로 길을 놓을 것인가?: 즉, 이 전쟁과 전쟁이 일으킬 수밖에 없는 그러한 깊은 충격들의 과정에서, 프롤레타리아트를 권력의 장악으로 이끌 능력이 있는 진정으로 혁명적인 지도부가 형성될 것인가?
제4 인터내셔널은 강령의 문구들을 통해서 뿐만 아니라 자신의 존재라는 바로 그 사실을 통해서 이 문제에 긍정적으로 답해왔다. 모든 다양한 형태의 환멸적이고 두려움에 떠는 사이비 맑스주의 대변자들은 지도부의 파산이 단지 자신의 혁명적 임무를 수행할 수 없는 프롤레타리아트의 무능력을 "반영할" 뿐이라고 억측하면서 반대로 나아갔다. 우리의 반대자 모두가 이러한 생각을 분명하게 표현한 것은 아니지만 그들 모두가 - 스탈린주의자들과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극좌, 중앙주의자들, 무정부주의자들이 - 패배의 책임을 자신들로부터 프롤레타리아트의 어깨로 전가한다. 그들 중 누구도 정확하게 어떤 조건들에서 프롤레타리아트가 사회주의적 전복을 성취할 수 있는지에 대하여 지적하지 않는다.
만약 우리가 패배들의 원인이 프롤레타리아트 자체의 사회적 능력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사실로 인정한다면, 현대 사회의 상황이 희망이 없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쇠퇴하고 있는 자본주의라는 상황하에서, 프롤레타리아트는 수적으로 뿐만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성장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프롤레타리아트가 혁명적 임무들의 수준으로까지 언젠가는 상승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근거가 없다. 피비린내 나는 자본주의적 혼란으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키고자 하는 계통적이고 근본적이며 극복할 수 없는 노동인민들의 충동과 수명을 다한 노동 지도부의 반동적이고 애국주의적이며 전적으로 부르주아적인 성격 사이의 깊은 적대감을 진심으로 명확하게 해 온 사람에게 위의 주장은 완전히 다른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이들 두 가지 화해 불가능한 주장들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
전체주의 독재 - 심각한 위기의 상태 그리고 불안정한 정권
10월 혁명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래 전에 예측되었다. 사태들이 이 예견을 확증했다. 퇴행이 예견을 논박하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맑스주의자들은 러시아의 고립된 노동자 국가가 영구히 스스로를 유지할 수 있다고는 결코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는 소비에트 국가의 퇴행보다는 파괴를 예상했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우리는 이들 두 가지 가능성들 사이를 분명하게 구별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두 가지 가능성들은 상호간에 전혀 모순적이지 않다. 퇴행은 특정 단계에서 필연적으로 붕괴로 귀결될 것임에 틀림없다.
스탈린주의적인 것이건, 파시스트적인 것이건 전체주의 정권은 그것의 본질상 단지 일시적인 이행적 정권이 될 수 있을 뿐이다. 역사 속에서, 일반적으로 벌거벗은[노골적인] 독재는 특히 심각한 사회적 위기의 산물이며 증상이었으며, 안정적인 정권은 전혀 아니었다. 심각한 위기는 어떤 사회의 영구적인 상태일 수 없다. 전체주의 국가는 특정 기간 동안 사회적 모순을 억누를 수 있지만, 영구히 그렇게 할 수는 없다. 소련에서의 어처구니없는 숙청들은 소비에트 사회가 근본적으로 관료의 배설을 향하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에 대한 가장 설득력 있는 증언들이다.
브루노 알이 오직 지배계급만이 그렇게 대규모로 그러한 방책들을 사용할 수 있다는 자신의 의견에 입각하여 스탈린주의의 숙청들에서 정확하게 관료가 지배계급이 되었다는 사실의 증거를 발견한다는 것은 놀라운 것이다. 그러나 하나의 "계급"이 아니었던 짜르주의 역시 상당히 큰 규모의 숙청이라는 방책들을, 게다가 정확히 자신의 종말이 임박하였던 시기에 사용했다는 것을 잊고 있다. 다가오는 죽음의 단말마의 전조를 보여주는 숙청이라는 무차별적이고 터무니없는 사기로 스탈린은 관료가 스스로를 안정적인 지배계급으로 이행시킬 수 없다는 것 외에 다른 아무 것도 입증하지 않는다. 만약 우리가 불명예스러운 붕괴를 불과 수년 혹은 수개월을 앞둔 보나파르티스트 독재에 새로운 지배계급이라는 명칭을 붙인다면, 우리가 얼간이 같은 입장에 서지 않게 되는 것일까? 우리 의견으로는 이 문제를 정확하게 제기하는 것만이 동지들을 용어상의 실험이나 경솔한 일반화들을 피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세계 혁명에 대한 방침과 소련의 소생
25년의 세월은 세계 프롤레타리아트 전위의 혁명적 재무장을 위해서는 너무 짧은 기간이었으며, 고립된 후진국에서 소비에트 체제를 고스란히 보존하기에는 너무도 긴 기간이었음을 보여주었다. 인류는 이제 새로운 제국주의 전쟁으로 그 값을 치르고 있다; 그러나 우리 시대의 기본적인 임무가 해결되지 않았다는 간단한 이유 때문에, 그 임무는 변하지 않았다. 세계 프롤레타리아트 부대들의 하나가 그 임무가 어떻게 해결되어야만 하는가를 실천으로 증명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지난 25년의 거대한 자산과 미래를 위한 무한한 가치를 지니는 담보가 된다.
제2차 제국주의 전쟁은 해결되지 못한 임무를 보다 높은 역사적 국면에서 제기한다. 제국주의 전쟁은 현존하는 정권들의 안정성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대체하기 위한 프롤레타리아트의 능력을 새로이 시험한다. 의심의 여지없이, 이 시험의 결과들은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의 시대로서의 현대 사회에 대한 우리의 평가를 위하여 결정적인 중요성을 가질 것이다. 만약 모든 가능성들과는 반대로, 임박한 전쟁의 과정 동안 혹은 그 직후에 10월 혁명이 어떠한 선진 국가들에서도 그것의 계속성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그리고 만약, 반대로, 프롤레타리아트가 모든 곳에서 모든 전선들에서 격퇴된다면, 우리는 의심의 여지없이 현 시대와 그것의 추진력에 대한 우리의 개념을 수정하는 문제를 제기해야만 할 것이다. 이 경우에, 이것은 소련이나 스탈린주의 갱에 관한 비망록을 획 던져버리는 것이 아니라 수세기는 아닐지라도 다음 수십 년 동안 세계의 역사적 전망을 재평가하는 문제가 될 것이다: 우리는 세계 혁명과 사회주의 사회의 시대에 들어섰는가 아니면 반대로 전체주의 관료의 쇠퇴하는 사회의 시대에 들어섰는가?
첫째, 소련 정권을 이미 최종적으로 수립되어 온 것으로 선언함으로써, 그리고 소련 정권을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사회 사이의 시간적으로 길게 늘어진 이행기 국가라고 선언함으로써, 휴고 우르반스와 브루노 알같은 도식주의자들은 이중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그러나 만약 우리 시대 전체의 경험과 현재의 새로운 전쟁의 결과로 국제 프롤레타리아트가 사회의 주인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준다면, 사회주의 혁명을 위해 지금보다 더 좋은 조건들을 예상할 수 없기 때문에 이것은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모든 희망이 무너지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 절대적으로 자명하다; 어떻든 현재 누구도 그렇게 예견하지 않다. 혹은 아무도 그렇게 성격규정하지 못하고 있다. 맑스주의자들은 프롤레타리아트가 자신의 혁명적 가능성을 상실했으며 즉각적으로 다가오는 시대에서 헤게모니에 대한 모든 열망을 포기해야만 한다는 결론을 도출할 조금의 권리도 가지고 있지 않다(만약 환멸과 피로가 "권리"로 간주되지 않는다면). 그것이 경제적 문화적 체제의 가장 심원한 변화들의 문제에서 역사의 잣대로 25년은 인간의 삶에서 한 시간에도 미치지 못한다. 한 시간이나 하루 동안에 있었던 실패들의 경험들 때문에 자신의 이전의 모든 삶 속에서의 경험과 분석에 기초하여 자신을 위해 세운 목표를 포기하는 사람이 무엇에 쓸모가 있는가? 1907년에서 1917년까지의 러시아의 최악의 반동의 세월 동안 우리는 1905년에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해 드러났던 혁명적 가능성들을 우리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세계 반동의 세월 동안, 우리는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가 1917년에 보여주었던 혁명적 가능성들로부터 계속 나아가야만 한다. 제4 인터내셔널은 우연히 사회주의 혁명의 세계정당으로 스스로를 부르지 않았다. 우리의 길은 바뀌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세계 혁명을 향하여, 그리고 바로 그 힘으로 노동자 국가로서의 소련의 소생을 향하여 우리의 진로를 잡는다.
대외 정책은 국내 정책의 연속이다
우리는 소련에서 무엇을 방어하는가? 소련이 자본주의 국가들과 닮아 있는 부분이 아니라 정확하게 그것들과 다른 부분[을 우리는 방어한다.-해석자의 첨가]. 독일에서도 역시 우리는 지배 관료에 맞서는 봉기를 주창하지만, 오로지 즉각적으로 자본주의 소유를 타도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다. 소련에서 관료의 타도는 국가 소유의 보존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오직 이러한 의미에서만 우리는 소련에 대한 방어를 주장한다.
소비에트 노동자들이 관료라는 기생세력에 대항해서뿐만 아니라, 예를 들면, 집단농장[kolkhoz-소련의 집단농장]의 귀족 세력에게 있는 사적 소유를 향하는 경향들에 대항해서도 역시 국가소유를 방어해야 한다는 것을 의심하는 자는 우리 중에 한 명도 없다. 그러나 결국, 대외정책은 국내 정책의 연속이다. 만약 국내 정책에서 우리가 10월 혁명의 성과들에 대한 방어를 관료에 맞서는 화해불가능한 투쟁과 관련시킨다면, 우리는 대외정책에서도 역시 똑같은 것을 해야만 한다. 모든 측면에서 "관료적 집산주의"가 이미 승리했다는 사실로부터 앞으로 나아가면서, 브루노 알은 분명하게 히틀러(그리고 체임벌레인?)가 스탈린만큼이나 국가소유를 보존하는 것에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아무도 국가 소유를 위협하지 않는 게 확실하다고 주장한다. 슬프게도, 브루노 알의 확신에 찬 주장들은 바보 같은 것들이다. 승리할 경우 히틀러는 십중팔구는 독일 자본가들로부터 몰수했던 모든 재산을 그들에게 되돌려주는 것을 요구하는 것부터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나서 그는 소련의 희생의 대가로 영국, 프랑스, 그리고 벨기에와의 합의에 도달하기 위하여 그들을 위한 비슷한 소유의 회복을 보장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그는 독일 군사 기구의 이해관계에 입각하여 독일을 소련에 있는 가장 중요한 국유기업들에 대한 계약자로 만들 것이다. 바로 지금 히틀러는 스탈린의 동맹이며 동지이다; 그러나 만약 스탈린의 도움으로 히틀러가 서부전선에서 승리하게 된다면, 그는 승리 직후 자신의 총을 소련을 향하여 돌릴 것이다. 결과적으로 체임벌린도 또한 비슷한 조건들에서 히틀러와 전혀 다르지 않게 행동할 것이다.
소련에 대한 방어와 계급투쟁
소련에 대한 방어의 문제에서의 오류들은 "방어"의 방책들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서 가장 흔하게 비롯된다. 소련에 대한 방어가 크레믈린 관료와의 친교나 그들의 정책들에 대한 수용, 혹은 소련의 동맹들의 정치와의 화해를 의미하는 것이 전혀 아니다. 다른 모든 것들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문제에서 우리는 온전하게 국제 계급투쟁의 기반에 서 있다.
프랑스의 소규모 정기간행물 무엇을 할 것인가[Que Faire]는, "트로츠키주의자들"이 프랑스와 영국과 관련하여 패배를 주장하는 자들이기 때문에, 그들은 소련에 대해서도 역시 패배를 주장하는 자들이라고 최근 말했다. 즉, 만약 당신들이 소련을 방어하고자 한다면, 당신들은 소련의 제국주의 동맹국들과 관련하여 패배를 주장하는 것을 멈추어야만 한다[고 말했다-해석자의 첨가]. Que Faire는 "민주주의자들"이 소련의 동맹국들일 것이라고 계산했다. 이제 이들 현명한 자들이 무엇을 말할 것인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들의 바로 그 방책이 썩었기 때문에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는 거의 중요하지 않다. 소련이 현재 가맹하고 있거나 아니면 조만간 가맹하게 될 제국주의 진영과 관련하여 패배를 주장하는 것을 포기하는 것은 전쟁 상대국 진영의 노동자들을 그들의 정부 편으로 밀어 부치는 것이다; 이것은 패배주의 노선 일반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회주의 혁명에 대한 거부와 동일한 의미를 가지는 제국주의 전쟁 상황에서 패배주의에 대한 폐기는 - "소련에 대한 방어"의 이름으로 혁명을 포기하는 것 - 소련에 대하여 최종적인 해체와 사망을 선고하게 될 것이다.
과거의 "파시즘에 맞서는 투쟁"처럼, 코민테른에 의해 해석된 "소련에 대한 방어"는 독립적인 계급 정치에 대한 폐기에 기초하고 있다. 프롤레타리아트는 - 다양한 환경들에서 다양한 이유 때문에, 그러나 항상 그리고 변함없이 - 하나의 부르주아지 진영에 맞서는 다른 하나의 부르주아지 진영의 보조세력으로 변형된다. 이것과는 구별되게, 우리 동지들 중 일부는 스탈린과 그의 동맹국들의 도구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소련에 대한 방어를 포기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으로 그들은 단지 그들의 "방어"에 대한 이해가 기회주의자들의 이해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것을 증명할 뿐이다; 그들은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자적인 정치에 관하여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가 몇몇 제국주의 정부들에 맞서서 다른 일부 제국주의 정부들을 지원함으로써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메트로폴리탄 중심지들에서뿐만 아니라 식민지들에서도 국제 계급 투쟁의 방책으로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것처럼, 실제에 있어서 우리는 식민지들을 방어하듯이 소련을 방어한다.
우리는 정권을 장악하고 있는 당이 아니다; 우리는 자본주의 국가들에서뿐만 아니라 소련에서도 화해를 거부하는 반대당이다. 우리는 부르주아 정부라는 매개를 통해서도 아니며, 소련 정권을 통해서는 더더욱 아니라 선동을 통한 대중들에 대한 교육을 통해서만, 그리고 노동자들에게 그들이 무엇을 방어해야 하는지, 그들이 무엇을 타도해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을 통해서만 우리의 정책들, 그 중에서도 "소련에 대한 방어"를 현실화한다. 그러한 "방어"는 즉각적인 기적적 결과들을 낳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더더욱 기적을 행하는 자들인 척하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 우리는 혁명적 소수파이다. 우리의 작업은 우리가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노동자들이 사태들을 정확하게 평가하고, 기습을 허용하지 않으면서,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임무들을 혁명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총체적 계급성을 준비할 수 있도록 향해져야만 한다.
우리에게 소련에 대한 방어는 세계 혁명의 준비와 일치한다. 오직 혁명의 이해관계와 상충하지 않는 그러한 방책들만이 허용된다. 소련에 대한 방어의 세계 사회주의 혁명에 대한 관계는 전략적 임무에 대한 전술적 임무의 관계와 같다. 전술은 전략적 목표에 종속되며, 어떠한 경우에도 전술이 전략적 목표에 상충될 수 없다.
점령지에 대한 문제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중에도, 적군 점령지에 대한 문제는 여전히 불분명하다. 해외의 급전들은 양 당사자들의 무성한 거짓말들 때문에 서로 모순된다; 그러나 현장에서의 실제 관계들은 여전히 대단히 불안정한 게 확실하다. 대부분의 점령지들은 의심의 여지없이 소련의 일부가 될 것이다. 어떤 형식으로?
히틀러와의 조약에 따라서 모스크바 정부가 점령 지역들에 있는 사적 소유의 권리들을 건드리지 않고 내버려두며, 파시스트 양식을 그대로 이어서 "통제하는 것"에 스스로를 제한한다고 잠시만 생각해보자. 그러한 양보는 근본적인 원칙적 성격을 가지며 소비에트 정권의 역사에서 새로운 장을 위한 출발점이 될 것이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소비에트 국가의 성격에 대한 우리 쪽에서의 새로운 평가의 출발점이 될 것이다.
그러나 소련의 일부가 될 예정으로 있는 영토들에서, 모스크바 정부는 대지주에 대한 몰수와 생산수단의 계급화[원문은 Stratification으로 되어 있으나 문맥상 국유화(statification)의 오기로 보임. 따라서 국유화로 해석하는 것이 올바른 것으로 판단됨-해석자의 의견]를 성취하게 될 가능성이 더 크다. 이러한 전화가 가장 가능성이 있는데 이것은 관료가 사회주의 강령에 충실하기 때문이 아니라, 관료가 권력과 그것에 수반하는 특권들을 점령지들에 있는 구 지배계급들과 공유하고자 하지도 않으며 그렇게 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이 시점에서 하나의 유추가 글자그대로 저절로 나온다. 첫 번째 보나파르트는 군사 독재를 통해서 혁명을 정지시켰다. 그러나, 프랑스 군대가 폴란드를 침공했을 때, 나폴레옹은 "농노제는 철폐되었다"라는 법령에 서명했다. 이러한 조처는 농민에 대한 나폴레옹의 동정에 의한 것도 아니었으며 민주주의적 원칙들에 의한 것도 아니었고, 보나파르티스트 독재가 봉건주의가 아니라 부르주아 생산관계에 기초하고 있었던 것에서 기인했다. 스탈린의 보나파르티스트 독재가 스스로를 사적소유가 아니라 국가소유에 기초하기 있기 때문에, 사건의 성격상 적군에 의한 폴란드 침공은 점령지의 정권이 소련의 정권에 일치될 수 있도록 사적 자본가 소유의 폐지로 귀결될 것이다.
그 성격에서 혁명적인 이 조처는 -"착취자에 대한 착취" - 이 경우에 군사적-관료적 방식으로 성취된다. 새로운 영토들에 있는 대중들 쪽에서의 독립적인 실천에 대한 호소는 -비록 극도로 조심스럽게 표현되더라도 그러한 호소가 없이는 새로운 정권을 세우는 것이 불가능하다 - 자각한 혁명적 대중들에 대한 관료의 우위를 보장하기 위한 잔혹한 경찰 조처들에 의해 의심의 여지없이 곧바로 억압될 것이다. 이것이 사물의 한 측면이다. 그러나 다른 측면이 있다. 히틀러와의 군사적 동맹을 통하여 폴란드를 점령할 가능성을 얻기 위하여, 오랫동안 크레클린은 소련과 세계의 대중들을 속였고 계속해서 속이고 있으며, 그래서 자기 자신의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대오의 완전한 혼란을 야기했다. 우리에게 있어서 첫 번째의 정치적 기준은 아무리 그것이 자체로 중요하다고 해도, 이런 혹은 저런 지역에서의 소유관계의 변형이 아니라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의식과 조직에서의 변화와 그들의 과거의 성과들을 방어하고 새로운 것들을 성취할 가능성을 높여내는 것이다. 이와 같은 그리고 유일한 결정적인 입장으로부터 전체적으로 보자면, 모스크바의 정치는 자신의 반동적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세계 혁명으로 가는 길에서 주요한 장애물로 남아있다.
그러나 크레믈린과 코민테른에 관한 우리의 일반적인 평가가 점령지들에서의 소유의 국유화가 그것 자체로 진보적인 조처라는 특수한 사실을 바꾸지는 않는다. 우리는 이것을 공개적으로 인정해야만 한다. 만약 곧 히틀러가 동부 폴란드에서 "법과 질서"의 회복을 위하여 동쪽으로 자신의 군대를 보낸다면, 선진노동자들은 보나파르티스트 소비에트 관료에 의해 수립된 이들 새로운 소유형태들을 히틀러에 맞서서 방어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방향을 바꾸지 않는다
우리가 말했듯이 생산수단의 국유화는 진보적인 조처이다. 그러나 그것의 진보성은 상대적이다; 그것의 특수한 비중은 다른 모든 요소들의 총합에 달려있다. 그래서 우리는 제일 먼저 "사회주의" 조처들이라는 외투를 걸친 관료적 독재와 기생주의에 의해 지배되는 영토의 확장이 크레믈린의 신망을 증대시킬 수 있으며, 관료적 책략에 의한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의 대체의 가능성과 관련하여 환상을 야기할 수 있다는 것 등을 입증해야만 한다. 이 해악은 폴란드에서의 스탈린주의 개혁들의 진보적인 내용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소련 내에서뿐만 아니라 점령된 지역들에서의 국유화된 소유가 진정으로 진보, 즉 사회주의적 발전의 기초가 되기 위해서는 모스크바의 관료를 타도하는 것이 필요하다. 따라서 우리의 강령은 모든 타당성을 가지고 있다. 사태들이 우리를 기습하지는 않았다. 단지 그 사태들을 올바로 해석하는 것만이 필요하다. 소련의 성격 속에, 그리고 소련의 국제적 지위에 포함되어 있는 날카로운 모순들을 분명하게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노동자 국가"이다 "노동자 국가가 아니다"라는) 용어상의 교묘한 속임수의 도움을 받아서는 이러한 모순들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것이 불가능하다. 우리는 사실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만 한다. 우리는 현실의 관계들과 모순들을 우리의 출발점으로 취함으로써 우리의 정책을 세워만 한다.
우리는 크레믈린에 어떠한 역사적 임무도 부여하지 않는다. 우리는 크레믈린에 의한 새로운 영토의 점령을 반대했고 여전히 반대한다. 우리는 소비에트 우크라이나의 독립을 지지하며, 만약 그들이 원한다면 소비에트 벨로루시의 독립을 지지한다. 동시에 적군에 의해 점령된 지구에서, 제4 인터내셔널의 투사들은 지주와 자본가들에 대한 몰수에서, 농민에 대한 토지의 분배에서, 소비에트와 노동자 위원회를 건설하는 등의 활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해야만 한다. 그렇게 하는 한편으로 그들은 반드시 그들의 정치적 독립성을 보존해야만 하며, 소비에트들과 공장위원회에 대한 선거 동안에 관료로부터 소비에트들과 공장위원회의 완전한 독립을 위하여 투쟁해야만 하며, 그리고 혁명적 선전을 크레믈린과 그들의 지역 대리인들에 대하여 불신하고 있는 사람들 속에서 수행해야만 한다.
그러나 히틀러가 자신의 무기들을 동쪽으로 돌려서 적군에 의해 점령된 영토들을 침략한다고 가정해보자. 이러한 상황에서, 제4 인터내셔널의 투사들은 크레믈린 독재에 대한 그들의 태도에서의 어떠한 변화도 없이 히틀러에 대한 군사적 저항을 목전의 가장 긴급한 임무로서 가장 앞에 제출할 것이다. 노동자들은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우리는 히틀러가 스탈린을 타도하는 것을 허용할 수 없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임무이다." 히틀러에 대항하여 군사적으로 투쟁하는 동안, 혁명적 노동자들은 적군의 일반 병사 대오와 가능한 가장 가까이 동지적인 관계를 맺으려고 노력할 것이다. 손에 쥔 무기로 히틀러를 타격하는 한편, 동시에 볼셰비키 레닌주의자들은 다음의 그리고 아마도 매우 가까운 단계에서의 스탈린 타도를 준비하면서 스탈린에 대항한 혁명적 선전을 수행할 것이다.
이런 종류의 "소련에 대한 방어"는 마치 하늘이 땅과 다른 것처럼 "조국을 위하여, 스탈린을 위하여!"라는 슬로건 하에서 현재 수행되고 있는 공식적인 방어와 태생적으로 다를 것이다. 우리의 소련에 대한 방어는 "사회주의를 위하여! 세계 혁명을 위하여! 스탈린 타도를 위하여!"라는 슬로건 하에서 수행된다. 이 두 종류의 "소련에 대한 방어"가 대중들의 의식에서 혼란스럽게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구체적인 정세에 조응하는 슬로건들을 어떻게 정식화하는가에 관하여 분명하게 그리고 자세하게 알고 있을 필요가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단지 우리가 무엇을 방어하고 있는가, 단지 우리가 어떻게 그것을 방어하고 있는가, 누구에 맞서서 우리는 그것을 방어하고 있는가에 대하여 명확하게 입증할 필요가 있다. 오직 우리 스스로가 우리의 임무들에 대한 분명한 개념을 가지고 있지 않는 경우에만, 우리의 슬로건은 대중들 사이에서 혼란을 야기할 것이다.
결론들
우리가 소련과 관련하여 우리의 원칙적 입장을 바꿔야 할 어떠한 이유도 현재 존재하지 않는다.
전쟁은 다양한 정치적인 진전을 가속화한다. 전쟁이 소련의 혁명적 소생의 과정을 촉진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전쟁은 소련의 최종적인 퇴행의 과정 또한 가속화할지도 모른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가 제때에 그것들을 설명할 수 있도록 전쟁이 소련의 내부 삶에 가져다주는 이들 변화들을 성실하고 편견 없이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점령된 영토들에서 우리의 임무들은 기본적으로 소련 내부에서의 그것과 동일하다; 그러나 사태들이 그것들을 고도로 날카로운 형태로 제기하기 때문에, 그만큼 더 소련과 관련된 우리의 일반적 임무들을 명료하게 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준다.
우리는 반드시 노동자들이 우리가 소련에서 무엇을 방어하고 있는지(국가소유와 계획경제), 그리고 누구에 대항하여 우리가 가열찬 투쟁을 수행하고 있는지(기생적 관료와 그들의 코민테른)를 분명하게 볼 수 있는 방식으로 우리의 슬로건들을 정식화해야만 한다. 우리에게는 소비에트 관료를 타도하는 것에 대한 문제가 소련에서 생산수단에서의 국가 소유를 보존하는 것에 대한 문제에 종속되며, 소련에서 생산수단에서의 국가 소유를 보존하는 문제가 세계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의 문제에 종속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한순간이라도 잊어서는 안 된다.
1939년 9월 25일<div class="buttons-bottom center jinboblog-i-like-this-buttons"><a class="button-jinboblog" href="javascript:void(0);" title="스크랩으로 글 링크를 저장하세요" onclick="recommend('1454',37,'/communism','');"><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mini_chuchon.png" alt="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a><a class="button-twitter" href="http://twitter.com/home?status=https%3A%2F%2Fblog.jinbo.net%2Fcommunism%2F37+%22%ED%8A%B8%EB%A1%9C%EC%B8%A0%ED%82%A4%20-%20%EB%A7%91%EC%8A%A4%EC%A3%BC%EC%9D%98%EB%A5%BC%20%EC%A7%80%ED%82%A4%EA%B8%B0%20%EC%9C%84%ED%95%98%EC%97%AC%20%EC%A4%91%EC%97%90%EC%84%9C%22" target="_blank" title="트위터로 리트윗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twitter.png" alt="트위터로 리트윗하기" /></a><a class="button-facebook" href="http://www.facebook.com/sharer.php?u=https%3A%2F%2Fblog.jinbo.net%2Fcommunism%2F37&t=%ED%8A%B8%EB%A1%9C%EC%B8%A0%ED%82%A4%20-%20%EB%A7%91%EC%8A%A4%EC%A3%BC%EC%9D%98%EB%A5%BC%20%EC%A7%80%ED%82%A4%EA%B8%B0%20%EC%9C%84%ED%95%98%EC%97%AC%20%EC%A4%91%EC%97%90%EC%84%9C" target="_blank" title="페이스북에 공유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facebook.png" alt="페이스북에 공유하기" /></a><a class="button-delicious" href="http://delicious.com/save" onclick="window.open('http://delicious.com/save?v=5&noui&jump=close&url=https%3A%2F%2Fblog.jinbo.net%2Fcommunism%2F37&title=%ED%8A%B8%EB%A1%9C%EC%B8%A0%ED%82%A4%20-%20%EB%A7%91%EC%8A%A4%EC%A3%BC%EC%9D%98%EB%A5%BC%20%EC%A7%80%ED%82%A4%EA%B8%B0%20%EC%9C%84%ED%95%98%EC%97%AC%20%EC%A4%91%EC%97%90%EC%84%9C','delicious','toolbar=no,width=550,height=550'); return false;" title="딜리셔스에 북마크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delicious.png" alt="딜리셔스에 북마크" /></a></div><p><strong><a href="https://blog.jinbo.net/communism/37?commentInput=true#entry37WriteComment">댓글 쓰기</a></strong></p>노동자 국가도 아닌, 부르주아 국가도 아닌?얼치기 공산주의자https://blog.jinbo.net/communism/282008-03-11T01:38:02+09:002008-03-11T01:38:02+09:001937년 트로츠키의 저작이다. 최근 다시 재개되고 있는 소련사회성격 논쟁에 도움이 될 만한 글이라 생각하여 옮겨본 것이다.
노동자 국가도 아닌, 부르주아 국가도 아닌?
1937년 11월 25일
트로츠키
정치적 형식과 사회적 내용
번햄 동지와 카터 동지는 소비에트 국가의 계급적 성격에 관하여 새로운 의문점을 던졌다. 내 의견으로는 그들이 제시하는 답변은 완전한 오류이다. 그러나 이들 동지들이 극좌파들이 하는 것처럼 과학적 분석을 비명 지르기로 대체하려고 시도하지 않는 한, 우리는 번햄, 카터와 함께 이 예외적으로 중요한 문제에 관하여 진중하게 토론해야 하고 할 수 있어야 한다.
번햄과 카터는 소련과 현 부르주아 국가의 중요한 차이가 소유 양식에서의 변화의 결과로서의 생산력의 강력한 발전에 있다는 점을 잊지 않고 있다. 그들은 더 나아가 " 10월 혁명에 의해 확립된 경제구조가 기본적으로 변화하지 않은 채 남아 있다"는 것에 동의한다. 그들은 이 사실로부터 제국주의의 공격으로부터 소련을 방어하는 하는 것은 소비에트와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임무라는 것을 추론한다. 이 측면에서 우리와 번햄, 카터 사이에 완벽한 동의가 존재한다. 그러나 우리의 동의의 정도가 아무리 크다고 할 지라도, 그것이 전체 논점을 커버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비록 번햄과 카터가 극좌주의자들과 연대하고 있지는 않지만, 소련이 "맑스주의에 입각한 전통적인 용어적 의미에서" 노동자 국가이기를 멈추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경제 구조가 여전히 기본적으로 변화하지 않은 채 남아있기 때문에", 소련이 부르주아 국가가 된 것은 아니다. 동시에 번햄과 카터는, 그리고 이것 때문에 우리가 그들을 축하할 수 있을 뿐인데, 관료가 독립적 계급이라는 것을 부인한다. 결론적으로 이들 모순되는 주장들의 결과는 일반적으로 소비에트 국가는 계급지배의 기관이 아니라는 스탈린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바로 그것이다. 그럼 그건[계급지배의 기관이 아닌 국가는-역자-] 뭔가?
그래서 우리는 국가에 대한 계급 이론을 수정하는 새로운 입장을 만나게 된다. 두 말 할 것도 없이 우리는 물신숭배주의자들이 아니다; 새로운 역사적 사실들이 이론의 수정을 요구한다고 해도, 우리는 그렇게 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에도 구 수정주의자들의 비탄스러운 경험은 우리에게 유익한 교훈을 준다. 우리는 새로운 이론을 정형화하기 위하여 시도하기 전에 옛 이론과 새로운 사실들을 10배 보다 더 숙고한다.
번햄과 카터 스스로가 내친김에 프롤레타리아트의 지배는 주객관적 상태에 대한 그것의 종속성으로 인해, "여러가지 다른 정부 형태에서 스스로를 발현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분명하게 하기 위하여 우리는 다음의 것들을 추가할 것이다: 소비에트 내부에서 다른 정당들 간의 공개된 투쟁을 통해서건, 하나의 정당의 독점을 통해서건, 혹은 한 사람의 손아귀로의 사실상의 권력 집중을 통해서건. 물론 개인 독재는 정권에 대한 가장 커다란 위험의 현상이다. 그러나 동시에, 특정 조건에서는, 그것이 그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유일한 수단이다. 결론적으로 국가의 계급적 성격은 그것의 정치적 형태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사회적 내용: 즉, 그 국가가 보호하고 방어하는 소유양식과 생산관계의 성격, 에 의해 결정된다.
원칙적으로 번햄과 카터는 이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소련을 노동자국가로 보지 않는다면, 그것은 경제적이고 정치적인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지난해에" 그들은 "관료가 명백하게 계획화되고 국유화된 경제의 파괴의 길로 들어섰다"고 쓴다.(단지 "그 길로 들어섰을 뿐인가?) 더 나아가 "발전의 경로가 관료를 국유화된 경제의 필요성과 이해와의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깊어지는 대립으로 이끌고 있다"고 한다.(단지 "관료를 이끌고 있을 뿐인가?") 관료와 경제 사이의 모순은 이전에 발견되었으나 지난 해 "관료의 행동들이 적극적으로 계획을 사보타지하고 국가 독점을 붕괴시키고 있다."(단지 "붕괴하고 있는가" 그래서, 아직 붕괴되지는 않았는가?)
위에서 언급하였듯이, 두 번째 내용은 정치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개념은 근본적으로 경제적인 카테고리가 아니라 주요하게 정치적인 카테고리이다. ……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지배의 모든 형식, 조직, 기관들이 이제는 파괴되었고, 이것은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지배가 이제 파괴되었음을 의미한다." 프롤레타리아트 정권의 "서로 다른 형태들"에 관하여 들은 후라면, 그 자신에 의해 채택된 두 번째 내용은 예상외의 것으로 보이게 된다. 물론,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는 단지 "주요하게"만 정치적 카테고리인 것이 아니라 완전히 "정치적 카테고리"이다. 그러나, 바로 이 정치는 단지 집중화된 경제일 뿐이다. 국가와 소비에트에서의 사회민
주주의의 지배(독일 1918-1919년)는 그것이 부르주아적 소유를 신성불가침으로 남겨두는 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와 어떠한 공통점도 없다. 그러나 제국주의로부터 소유권을 몰수하고 국유화된 소유를 지키고 있는 정권은 정치적 형태와는 독립적으로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이다.
말하자면, 번햄과 카타는 "일반적으로" 여기에 동의한다. 그래서 그들은 경제적인 내용과 정치적 내용을 결합시키는 것에 의지한다. 그들은 관료가 명백하게 프롤레타리아트로부터 정치권력을 빼앗았을 뿐만 아니라 경제를 막다른 골목으로 이끌고 있다고 한다. 지난 시기에 관료가 그들의 모든 반동적 성격을 가진 채 진보적 역할을 했다면, 이제는 명백하게 반동적 요소가 되었다. 이 논거에 제4 인터내셔널의 이전의 모든 분석 및 예측과 완벽하게 일치하는 유익한 핵심이 있다. 우리는 "계몽 절대주의"가 부르주아지의 발전에 있어서 진보적 역할을 하였으나 이후 그 발전에 장애가 되었다는 사실을 여러 차례 언급해왔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이 대립은 혁명 속
에서 스스로를 해소한다. 사회주의 경제의 기초를 놓는데 있어서, "계몽 절대주의"는 단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짧은 동안에만 진보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고 했다. 이러한 예측은 우리의 눈앞에서 분명하게 확증되었다. 자신의 성공에 현혹되어, 관료는 경제 성장에서 어느 때보다도 많은 부분을 챙길 것이라고 예측했다. 한편 관료는 심각한 경제위기에 직면했고, 이것이 관료의 현재 공황상태와 격렬한 억압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이것이 소련에서 생산력 발전이 이미 멈추었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우리는 감히 이런 주장을 하지 않을 것이다. 국유화된 경제의 창조적 가능성은 너무나도 위대해서 그것들에 가해지는 관료적 장애에도 불구하고 비록 지금까지와는 현저하게 낮은 비율이기는 하지만 수년 동안 생산력을 발전시킬 수 있다. 어떠한 경우에도, 관료를 산산이 분열시키고 있는 정치적 위기가 생산력의 정체에 대한 전망보다도 훨씬 더 오늘날 관료에게는 위험스럽다. 그러나 문제를 단순화시키기 위하여, 관료가 이미 경제발전에 절대적인 장애가 되었다고 인정하도록 해보자. 그러나 이 사실이 본질적으로 소련의 사회 성격이 변화되었거나 소련이 어떠한 종류의 계급적 성격도 결여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내가 보기에는 우리 동지들의 결정적인 실수가 여기에 있다.
일차대전까지는 부르주아 사회는 자신의 생산력을 발전시켰다. 단지 지난 25년 동안, 부르주아는 경제발전의 명백한 장애가 되었다. 이것이 부르주아 사회가 부르주아이기를 멈추었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아니다, 이것은 단지 쇠퇴하는 부르주아 사회가 되었음을 의미할 뿐이다. 몇몇 나라에서는 부르주아적 소유의 보존이 파시스트 정권을 통해서만 오로지 가능하다. 즉, 부르주아는 모든 자신의 정치적 지배의 형식과 수단을 결여하고 있으며 매개자를 이용해야만 한다. 이것이 그 국가가 부르주아이기를 멈추었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파시즘이 자신의 야만적 수단으로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를 방어하는 한, 그 국가는 파시시트 지배하의 부르주아지로 존재한다.
우리는 우리의 유추를 모든 포괄적 의미에까지 부여할 의도는 전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관료의 손아귀로의 권력의 집중과 생산력 발전의 정체조차도 아직은 저절로 그 사회와 국가의 계급적 성격을 바꾸지는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오로지 소유관계로의 혁명적 혹은 반혁명적 세력의 침투만이 국가의 계급적 성격을 바꿀 수 있을 뿐이다.
(페너 브록웨이가 편집을 맡고 있는 런던의 신 지도자는 올해 11월 12일자 사설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독립노동당은 소비에트 러시아의 사회주의적 경제기초가 파괴되었다는 트로츠키주의의 관점을 받아들이고 있지 않다." 이 사람들에게 무엇을 말 할 수 있을까? 그들은 자기 것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사상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단지 노동자들의 마음속에 있는 혼란을 유포할 수 있을 뿐이다. - L.T.)
그러나 역사는 경제와 국가간의 계급적 대립의 경우들에 관하여 진정으로 모르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 "제 3 계급"이 권력을 장악한 이후, 수년의 기간 동안 그 사회는 여전히 봉건적인 채 남아 있었다. 소비에트 지배의 첫 몇 달 동안 프롤레타리아트는 부르주아 경제의 기초 위에서 통치했다. 농경 영역에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는 수년동안 소부르주아 경제의 기초 위에서 수행되었다.(상당한 정도까지 현재에도 그렇다.) 소련에서 부르주아지의 반혁명이 성공한다고 해도, 긴 기간 동안 새로운 정권은 자신의 기초를 국유화된 경제에 둘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경제와 국가 사이의 일시적 대립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혁명인가 아니면 반혁명인가를 의미한다. 한 계급의 다른 계급에 대한 승리는 승리자의 이해에 입각하여 경제를 재건설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사회적 변혁에서 필요한 국면인 양자택일의 상황은 진짜 주인이 없는 가운데 점원, 다시 말하면 관료에 의해 착취당하고 있다는 무 계급사회 이론과는 어떠한 공통점도 없다.
규범와 사실
문제에 대한 객관적이고 변증법적인 접근에 대한 주관적인 "규범적" 방법으로의 대체가 많은 동지들의 소련에 대한 올바른 사회학적 평가에 도달하는 것을 어렵게 하고 있다. 이유도 없이 번햄과 카터는 "맑시즘에 의해 이 용어에 주어진 전통적 의미"에서 소련은 노동자국가로 여겨질 수 없다고 말한다. 이것은 단순히 소련이 우리의 강령에 나와있는 것과 같은 노동자 국가의 규범에 조응하지 않는 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점에서는 어떠한 이견도 있을 수 없다. 우리의 강령은 노동자 국가의 진보적 발전과 점진적 소멸을 나타냈다. 그러나 항상 "강령에 따라서" 행동하지는 않는 역사는 퇴행하고 있는 노동자 국가의 전개에 우리를 맞닥뜨리게 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의 강령적 요구들에 대립하고 있는 노동자국가가 그래서 노동자국가이기를 멈추었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말라리아에 중독된 간은 정상적인 타입의 간에 조응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 때문에 중독된 간이 간이기를 멈추는 것은 아니다. 그것의 성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해부학이나 생리학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병리학이 또한 필요하다. 물론 질병에 걸린 간을 보면서 "이것은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야"라고 말하면서 등을 돌려버리는 것이 훨씬 쉽다. 그러나 내과의사는 스스로에게 그런 사치를 허용할 수 없다. 질병 그 자체의 상태와 그 신체기관의 손상에 기초하여, 그는 치료를 위한 처치("개혁")나 수술("혁명") 여부를 결정해야만 한다.
그러나 이것을 하기 위해서 그는 무엇보다도 먼저 그 손상된 신체기관이 질병을 앓고 있는 간 이외에는 어떤 다른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먼저 이해해야만 한다.
노동자 국가와 노동조합과 관련된 좀 더 익숙한 유추를 해보자. 우리 강령의 관점에서 노동조합은 계급투쟁의 기관이어야 한다. 그럼 AFL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어떠해야 하는가? 이 조직의 지도부에는 명백한 부르주아지의 대리인들이 앉아 있다. 모든 핵심적인 문제들에서, 그린, 올 등등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이해와는 직접적으로 반대되는 정치적 입장을 수행한다. 우리는 유추를 확장해서 CIO가 등장할 때까지는 AFL이 얼마간 진보적인 작업을 했다면, 이제는 그것의 주요한 실천의 내용이 CIO의 보다 진보적인(혹은 덜 반동적인) 경향들에 대항하는 투쟁으로 구체화되었으며, 그린의 기관은 명백하게 반동적인 요소가 되었다고 말 할 수 있다. 이것은 완벽하게 올바를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AFL이 노동조합 기관이기를 그만둔 것인가?
국가의 계급적 성격은 국가의 생산수단에 대한 소유의 형태와의 관계에 의해 결정된다. 노동조합과 같은 노동자 기관의 성격은 그것의 국민소득의 분배에 대한 관계에 의해 결정된다. 그린과 그 일당이 생산수단에 대한 사적 소유를 방어한다는 사실은 그들을 부르주아지로 성격 지운다. 여기에 대해서 만약 이 신사양반들이 노동자 쪽으로부터의 공격으로부터 부르주아지의 수입을 방어하고, 파업과 임금인상, 실업자에 대한 원조에 대항하는 투쟁을 조직한다면, 우리는 노동조합이 아니라 파업파괴자의 조직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린과 그 일당은 그들의 기반을 잃지 않기 위해서 어느 정도까지는 국민 소득에서 그들 몫의 증가를 위해서 혹은 적어도 감소에 반대하여 투쟁을 지도해야만 한다. 이런 객관적 현상이 모든 중요한 경우들에 있어서 가장 반동적인 노동조합과 파업파괴자의 조직 사이의 경계선을 긋는 것을 우리에게 허용하기에 충분하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AFL에서 활동해야 할 의무 뿐만이 아니라 KKK단과 같은 파업 파괴자들로부터 그것을 방어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린의 기능처럼, 스탈린의 기능은 이중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스탈린은 관료를 위해 복무하며 그래서 세계 부르주아지를 위해 복무한다; 그러나 스탈린은 관료가 자기 자신의 이해관계에서 착취하고 있는 사회적 기초를 방어하지 않고는 관료를 위해 복무할 수 없다. 그 정도만큼 스탈린은 제국주의의 공격과 너무나 참을성 없고 탐욕스러운 관료 그 자신으로부터 국유화된 소유를 방어한다. 그러나 이러한 방어는 소비에트 사회의 총체적 파괴를 준비하는 방식으로 수행된다. 스탈린 도당이 타도되어야 하는 이유가 정확하게 바로 이것 때문이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제국주의자들에게 이 역할을 맡길 수 없다. 스탈린에도 불구하고, 프롤레타리아트는 제국주의
의 공격으로부터 소련을 방어한다.
역사적 발전이 우리를 가장 다양한 종류의 노동조합에 익숙하도록 했다: 전투적인, 개량적인, 혁명적인, 반동적인, 자유주의적인, 그리고 카톨릭의. 이것은 다른 점에서 노동자 국가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러한 현상을 우리는 처음으로 목격하고 있다. 그것이 혁명적 강령의 규범의 관점으로부터 오로지 소련에 접근하는 우리의 경향을 설명해준다. 한편, 노동자국가는 서로 다른 역사적 힘들의 영향을 받고 있으며, 우리가 보는 것처럼 "전통적인" 규범에 완전히 대립될 수 있는 객관적인 역사적 사실이다.
번햄과 카터 동지가 스탈린과 그 일당은 그들의 정치에 의해서 세계 부르주아지를 위해 복무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완전히 올바르다. 그러나 이러한 올바른 생각은 반드시 올바른 시간과 장소의 조건에서 확립되어야만 한다. 히틀러 또한 부르주아지를 위해 복무하고 있다. 그러나, 스탈린과 히틀러의 기능들 사이에는 차이점이 있다. 히틀러는 부르주아지의 소유양식을 방어한다. 스탈린은 관료의 이해관계를 프롤레타리아트의 소유 양식에 적용한다. 부르주아 정권의 토양 위에 있는 스페인에서 바로 그 스탈린은 히틀러의 기능을 한다.(정치적 방책들에서 그들은 전반적으로 다소 다르다.) 소련과 스페인에서 똑같은 스탈린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나열은 관료가 독립적 계급이 아니라 계급들의 기구라는 것만큼이나 국가의 사회적 성격은 관료의 선행과 악행으로 정의될 수 없다는 것을 잘 말해 준다.
정상적인 마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노동자 국가가 부르주아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주장은 이해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몰상식한 것으로 보일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화학적으로 순수한 형태의 국가는 일반적으로 존재하지 않았으며, 존재하지 않는다. 반봉건적 프러시아 왕국은 부르주아지의 가장 중요한 임무들을 수행했으나 자코뱅의 방식이 아닌 자기 자신에 고유한 방식 말하자면 봉건적인 방식으로 그것들을 수행했다. 심지어 오늘날 일본에서 우리는 국가의 부르주아적 성격과 지배계층의 반봉건적 성격 사이의 유사한 상호관계를 목격한다. 사실, 그것이 계급 착취의 두 가지 양식의 경우를 의미하는 한 봉건적 세력과 부르주아 세력 사이의 상호협조는
부르주아 세력과 프롤레타리아트 세력의 상호협조보다 헤아릴 수 없이 훨씬 쉽게 현실화 될 수 있다는 반대를 제기할 수 있다. 이것은 완전히 올바르다. 그러나 노동자국가는 새로운 사회를 하루에 만들지 않는다. 맑스는 노동자국가의 첫 번째 시기에 부르주아적 분배의 규범이 여전히 보존될 것이라고 했다. (이것에 관하여는, 국가와 혁명의 "사회주의와 국가"편을 보라.) 이러한 생각을 잘 숙고해야 한다. 정확히 부르주아적 분배의 규범이 여전히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국가로서의 노동자 국가 자체가 필요한 것이다.
이것은 노동자 국가에서 어느 정도까지는 가장 혁명적인 관료조차도 부르주아의 기관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이러한 부르주아화와 발전의 일반적 경향이 결정적인 중성을 지닌다. 만약 노동자 국가가 자신의 관료주의적 성격을 잃으면서 점차적으로 소멸한다면, 이것은 그것의 발전이 사회주의로의 길을 따라 진군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반대로, 관료가 더없이 강력하고, 권위적이며, 특권화되며 보수적으로 된다면, 이것은 노동자 국가에서 사회주의를 대가로 하여 부르주아 경향이 성장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즉, 어느 정도까지는 노동자 국가 등장의 최초 나날들로부터 노동자 국가에 존재하는 내부 모순이 "규범들"이 요구하는 것처럼 줄어들지 않고 증가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러한 모순이 분배의 영역에서 생산의 영역으로 이동하지 않는 한, 그리고 국유화된 소유와 계획 경제를 파괴하지 않는 한, 그 국가는 노동자 국가이다.
레닌은 이미 15년 전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의 국가는 관료적으로 변형된[불구화된] 노동자 국가이다." 그 시기에 관료적 변형은 부르주아 정권의 직접적 유산을 의미했으며, 그런 의미에서 과거의 미미한 생존으로서 여겨졌다. 그러나 비우호적인 역사적 상황의 압력 하에, 관료적 "생존"은 새로운 자양분의 원료를 얻었으며, 엄청난 역사적 요인이 되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노동자 국가의 타락[퇴행]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이유이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보나파르트적 테러가 보여주고 있듯이, 이러한 타락은 결정적인 순간에 도달했다. "관료적 변형"이었던 것이 지금 이 순간에는 어떠한 흔적도 남기지 않고 노동자 국가를 집어삼키고, 국유화된 소유의
폐허 위에 새로운 소유계급의 씨를 뿌리려고 하고 있다. 이러한 가능성이 정말 가까워지고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단지 가능성일 뿐이며 우리는 그 가능성에 미리 굴복할 생각은 없다.
노동자 국가로서의 소련은 "전통적인" 규범에 조응하지 않는다. 이것이 소련이 노동자 국가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또한 이것이 그 규범이 잘못 된 것이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규범"은 국제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완벽한 승리에 기초하고 있다. 소련은 단지 후진적이고 고립된 노동자국가의 부분적이고 불구화된 표현에 불과하다.
이상주의적이고 비타협적이며 "순수하게" 규범적인 사상은 자기 자신의 이미지로 세상을 건설하려고 하며, 자신이 좋아하지 않는 현상으로부터는 간단하게 등을 돌려버린다. 종파주의자들, 말하자면 자기 자신의 상상에서만 혁명가인 사람들은 공허한 이상주의적 규범으로 스스로를 인도한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들 노동조합은 우리가 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여기에 합류하지 않을 것이다; 이 노동자 국가는 우리가 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것을 방어하지 않을 것이다." 매번 그들은 역사를 새로 시작하겠다고 약속한다. 그들은 만약 신이 그들의 손에 이상적인 정당과 이상적인 노동조합을 쥐어 준다면 이상적인 노동자 국가를 건설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행복한 순간이 올 때까지, 그들은 가능한 많이 현실에 대하여 입을 삐죽거릴 것이다. 삐죽거림 그것이 바로 종파주의자들의 "혁명가주의"의 최고의 표현이다.
순수하게 "역사적인" 개량주의적인 멘셰비키의 수동적이고 반동적인 사상은, 맑스가 말한 것처럼, 과거의 추잡함으로 오늘의 추잡함을 합리화하는 데 스스로 바쁘다. 이 종류의 대표자들은 대중조직 속에 들어가서 그곳에서 스스로를 해소한다. 소련의 경멸스러운 "동지들"은 "역사적" 상황에 호소하면서 관료의 비열함에 스스로를 적응시킨다.
이런 종류의 부류들과는 반대로, 변증법적 사상 - 맑스주의자, 볼셰비키 - 은 객관적 발전 속에서 현상들을 취하는 동시에 자신의 "규범들"의 실현을 위한 기초에서 이 발전의 내부 모순을 발견한다. 물론 강령적 규범들은 그것들이 객관적인 역사적 과정 그 자체의 진보적 경향들의 일반화된 표현일 때에만 실현된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노동조합의 강령적 정의는 대략 다음과 같을 것이다: ⑴ 노동자들의 개량을 위해 자본주의에 대항에 투쟁하는 ⑵ 부르주아지의 타도를 위해 혁명적 투쟁에 참여하는, ⑶ 사회주의적 기초 위에서 경제 조직에 참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한 직장 혹은 산업의 노동자들의 조직이다. 만약 우리가 이 "규범적" 정의를 실제 현실과 비교한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할 것이다: 오늘날 세상에는 단 하나의 노동조합도 존재하지 않는다. 바꿔말다면, 이런 사실에 대한 규범의 대치, 똑같은 발전의 특수한 표현에 대한 일반화된 표현의 대치 - 이런 형식적이고 비타협적이며 비유물론적인 현실에 대한 강령의 대치는 명백하게 생명력이 없으며 혁명적 정당의 개입을 위한 어떠한 길도 열지 못할 것이다. 이럭저럭 하는 사이에 기회주의적 노동조합은 자본주의 붕괴의 압력 하에서 우리의 강령적 규범으로 접근할 수 있으며 진보적 역사적 역할을 할 수 있다 - 노동조합에 우리의 올바른 정책들이 받아들여진다면 반드시 그럴 것이다. 물론 이것은 지도부의 완전한 변화를 전제한다. 미국, 영국, 프랑스의 노동자들이 그린, 시트린, 조혹스 일당을 축출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소비에트 노동자들이 스탈린 일당을 축출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만약 프롤레타리아트가 스탈린 일당을 제 때에 축출한다면, 승리 이후 프롤레타리아트에게는 여전히 국유화된 생산수단과 계획경제의 기본적인 요소들이 있을 것이다. 이것은 프롤레타리아트
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것이야말로 엄청난 잇점이다! 오로지 이 쪽 가지에서 저 쪽 가지로 부주의하게 뛰는 것에 익숙한 급진주의 멋쟁이들만이 경솔하게 그런 가능성을 무시할 수 있을 뿐이다. 헤아릴 수 없이 중요한 물질적 진보에 경솔하게 손사래를 치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려는 사람에게 사회주의 혁명은 너무나도 엄청나고 힘든 문제이다.
번햄과 카터 동지가 크레이포 등 우리의 프랑스 동지들과는 다르게 생산력의 요소를 잊지 않고 있으며 소련에 대한 방어를 부정하지 않는 것은 매우 훌륭하다. 그러나 이것은 전적으로 효과가 없다. 그리고 만약 범죄적 관료 지도부가 경제성장을 마비시킨다면? 번햄과 카터 동지가 이런 경우에 수동적으로 제국주의가 소련의 사회적 기초를 파괴하도록 허용할 수 있다는 것이 가능할까? 우리는 그렇지 않을 것이라 확신한다. 그러나, 노동자 국가도 아니고 부르주아 국가도 아니라는 그들의 소련에 대한 비 맑스주의적 정의는 모든 종류의 결론들에 개방되어 있다. 이것이 그들의 정의가 절대적으로 거부되어야 하는 이유이다.
지배계급이면서 동시에 피지배계급
초좌익주의자들은 "어떻게 우리의 정치의식이 스탈린의 지배하에 있는 소련에서 프롤레타리아트가 '지배계급'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믿도록 그들이 강요한다는 사실에 분노하지 않을 수 있는가 … ?!"라고 말한다. 너무도 추상적인 방식으로 제기되는 이러한 주장이 사실은 우리의 "분노"를 일으킨다. 그러나 진실은 분석의 과정에서 필요한 추상적인 범주들은 온전하게 극도의 구체성을 요구하는 통합을 위한 단위들이라는 것이다.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트는 생활에 가장 필수적인 것들이 부족한 후진국의 지배계급이다. 소련의 프롤레타리아트는 인류의 오직 12분의 1을 이루고 있는 나라를 지배하고 있다; 제국주의는 나머지 12분의 11을 지배하고 있다. 이미 나
라의 후진성과 가난에 의해 불구화된 프롤레타리아트의 지배는 세계 제국주의의 압력 하에 두 배 세 배 기형화되었다. 프롤레타리아트 지배의 기관 - 국가 - 는 제국주의로부터의 압력(외교, 군사, 무역, 사상 그리고 관습 등)을 위한 기구가 된다. 역사적 규모에서 고려되는 지배를 위한 투쟁은 프롤레타리아트와 관료 사이의 것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와 세계 부르주아지와의 사이의 것이다. 이 투쟁에서 관료는 단지 전달 장치에 불과하다. 투쟁은 끝나지 않았다. 스탈린 도당 측에서의 자신의 보수적 신뢰성을 증명하기 위한 노력들(스페인에서 스탈린의 반혁명적 정치들!)에도 불구하고, 세계 제국주의는 스탈린을 신뢰하지 않고 있으며, 그에게 가장 치욕적인
타격도 아끼지 않고 있으며, 그를 타도하기 위해서 혈안이 되어 있다. 그의 힘을 빼앗고 있는 히틀러는 소비에트 관료에 대한 세계 부르주아지의 태도에 관하여 보다 일관되고 솔직하게 표현한다. 부르주아지에게 - 파스시트 뿐 아니라 민주주의에게도 - 스탈린의 고립된 반혁명적 착취는 충분하지 않다; 소유관계에서 완전한 반혁명과 러시아 시장의 개방이 필요하다.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부르주아지는 소비에트 국가가 자기들에게 적대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그리고 이것은 올바르다.
식민지와 반식민지 국가들에 있는 국내 정권은 압도적으로 부르주아적 성격을 가진다. 그러나 외국 제국주의의 억압이 이들 나라들의 경제적 정치적 구조를 변화시키고 왜곡시키기 때문에 민족 부르주아지는 (남아메리카의 정치적으로 독립해 있는 국가들에서조차) 단지 부분적으로만 지배계급의 지위에까지 도달하게 된다. 억압을 가하는 자와 억압을 받는 자가 하나의 동일한 부르주아 사회에서 상이한 수준의 발전만을 대표하기 때문에, 제국주의가 후진국에 가하는 압력이 그들의 기초적인 사회적 성격을 바꾸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과 인도, 일본과 중국, 미국과 멕시코 사이의 차이는 너무도 커서 우리는 분명하게 억압 부르주아지와 피 억압 부
르주아지 국가들을 구분할 수 있으며, 우리는 전자에 대항하여 후자를 지지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라고 여긴다. 식민지와 반식민지 국가의 부르주아지는 반지배, 반억압 계급이다.
소련에 가해지는 제국주의의 압력은 소비에트 사회의 성격을 바꾸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투쟁은 - 현재는 평화적이고, 미래에는 군사적이게 될 - 소유의 형식과 관계될 것이다. 이 투쟁에서 전달장치로서의 자신의 역량 안에서, 관료는 현재 제국주의에 맞서 프롤레타리아트에 의지하고 있고, 자신의 권력을 증가시키기 위하여 프롤레타리아트에 맞서 제국주의에 의지하고 있다. 동시에 관료는 자신들의 호화로운 삶과 권력을 지키기 위하여 미약한 생필품 분배자로서의 자신의 역할을 무자비하게 활용한다. 그래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지배는 빼앗기고, 억제되고, 왜곡된 성격을 가진다. 만약 "지배계급인 동시에 피지배계급"이라는 말에 모순이 있다면, 이것은 사상의 오류로부터가 아니라 소련의 상황 그 자체에 있는 모순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정확하게 바로 이것 때문에 우리는 일국 사회주의 이론을 거부한다.
노동자 국가 - 전형이 아닌 전형의 파괴 - 로서 소련을 이해하는 것이 소련관료를 위한 이론적 정치적 사면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반대로, 그것의 반동적 성격이 오로지 그것의 반 프롤레타리아적인 정치와 노동자 국가의 필요성 사이의 모순을 조명하는 속에서 완전하게 폭로될 것이다. 오로지 이러한 방식으로 문제를 제기함으로써만, 스탈린 도당의 범죄들에 대한 우리의 폭로가 완전한 동력을 획득할 것이다. 소련에 대한 방어는 제국주의에 대항한 최고의 투쟁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보나파르티스트 관료의 타도에 대한 준비를 의미한다.
소련의 경험은 노동자 국가에 존재하는 가능성이 얼마나 큰가, 그리고 그 저항의 임이 얼마나 강력한가를 보여준다. 그러나 이 경험은 또한 제국주의와 제국주의의 관료 대리자들의 압력이 얼마나 강력한가, 프롤레타리아트가 완전한 해방을 쟁취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그리고 새로운 인터내셔널을 화해불가능한 혁명적 투쟁의 정신으로 교육하고 단련시키는 것이 필요한가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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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츠키가 1935년에 쓴 글입니다.
노동자 국가, 테르미도르 그리고 보나파르티즘
1935년 2월 1일 씌여짐
1935년 7월 출판
스탈린주의 관료의 외교 정책들은 - 양쪽 채널 내부에서 모두: 일차적으로 외교에서 그리고 부차적으로 코민테른의
채널에서 - 국가연합(UN의 전신조직) 쪽으로, 현상유지의 보존 쪽으로, 그리고 개량주의자들과 부르주아 민주주의와의
동맹 쪽으로 급선회해 왔다. 동시에, 국내 정책들은 시장과 "부유한 집산 농민들"쪽으로 선회해왔다. 동시에, 국내 정책
들은 시장과 "부유한 집산 농민" 쪽으로 돌아섰다. 반대자와 준반대자 그룹들, 뿐만 아니라 최소한의 비판적인 고립된
인자들에 대항한 최근의 경향과 당에 대한 새로운 대대적인 숙청은 스탈린에 우익으로의 진행에 자유를 주는 것을 목
표로 하고 있다. (쿨락, 국민당과의 동맹, 앵글로-러시아 위원회 등에 모든 것을 거는) 과거의 유기적인 진행으로의 복
귀가, 그러나 훨씬 큰 규모에서 그리고 헤아릴 수 없이 더 부담스러운 조건하에 있는, 여기에 관련된다. 이 과정은 어
디로 귀결되는가? "테르미도르"라는 말이 많은 입을 통해서 다시 들리고 있다. 불행하게도, 이 단어는 사용으로부터 신
선미를 잃었다; 그것은 자신의 구체적인 내용을 잃었고, 스탈린 관료가 통과하고 있는 국면이나 스탈린 관료가 준비하
고 있는 참상을 성격화하는 임무에 분명하게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반드시 우리의 용어학을 확립 해야만
한다.
"테르미도르"에 관한 문제는 소련 좌익반대파의 역사와 깊이 관련되어 있다. 누가 처음으로 테르미도르라는 역사에
관련된 유추를 사용했는지 밝히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어떤 경우이더라도, 1926년에 이 문제에 대한 입장들은 다
음과 같다: "민주주의적 중앙주의" 그룹(스탈린에 의한 유배에서 박해로 죽은 스미르노프, 나프로노프, 그리고 다른 이
들)은 "테르미도르는 이미 실현된 사실!"이라고 선언했다. 좌익반대파의 강령 고수자들인, 레닌주의-트로츠키주의자들은
분병하게 이러한 주장에 반대했다. 그리고 이 주제와 관련하여 분리가 있었다. 어느 쪽이 올바른 것으로 판명 났는가?
이 문제에 답하기 위하여, 우리는 각각의 그룹 스스로가 "테르미도르"가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하여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가에 관하여 상세히 밝혀야만 한다.
구 볼셰비키 학교의 가장 총명한 대표자 중 하나였던 스미르노프는 산업화의 지연, 쿨락과 네프맨(새로운 부르주아
지)의 성장, 쿨락, 네프맨과 관료와의 결합, 그리고 최종적으로 당의 퇴행이 새로운 혁명 없이는 사회주의의 길로의 복
귀가 불가능할 정도로까지 진행되었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이미 권력을 상실했다. 좌익반대파를 분쇄
함으로써, 관료는 다시 살아나고 있던 부르주아 정권의 이해관계들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10월 혁명의 근본적 성취들은
청산되었다. 위의 것들이 "민주주의적 중앙주의" 그룹의 입장의 핵심적인 것들이다.
좌익반대파는 비록 이중권력의 요소들이 의심의 여지없이 나라 안에서 성장하기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 요소
들로부터 부르주아 헤게모니로의 이행은 반혁명적 전복이 없이는 발생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관료가 이미 네프맨, 쿨
락과 연결되어 있었으나, 관료의 주요한 뿌리들은 여전히 노동자 계급 속으로 뻗어 있었다. 좌익반대파에 대항한 투쟁
에서 관료는 의심의 여지없이 네프맨과 쿨락의 형태 속에 있는 무거운 꼬리를 자신의 뒤에 끌고 있었다. 그러나 바로
다음에 이 꼬리는 머리, 다시 말하면 지배 관료, 를 강타할 것이다. 관료 대오의 내부에서 새로운 분리들은 필연적이었
다. 반혁명적 전복의 직접적 위험에 직면하여 중앙파적 관료의 기본적인 핵심부위는 성장하는 지방 부르주아지에 대항
하는 지원을 위해 노동자들에 의지하게 될 것이다. 싸움의 결과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10월 혁명의 매장은 너무 이
르다. 좌익반대파의 붕괴가 "테르미도르"의 작업을 촉진할 것이다. 그러나 "테르미도르"는 아직 발생하지 않았다.
우리는 이후 사태 전개의 관점에서 모든 명백함 속에서 드러나는 볼셰비키-레닌주의자들의 입장의 올바름에 관한
1926-27년 논쟁의 요지를 실제로 단지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1927년 초, 쿨락들이 자신들의 수중에 집중하여 관리
하고 있던 빵을 공급하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관료에게 타격을 가했다. 우익은 쿨락에 더 양보를 하는 입장이었다. 우익
들과 함께 자신들이 분쇄했던 좌익반대파의 사상으로 무장하고 있던 중앙파들은 노동자들 속에서 지지를 발견했고, 우
익을 패배시키고 산업화와 결과적으로 집산화의 길를 택했다. 10월 혁명의 기본적인 사회적 성과들이 종국적으로는
헤아릴 수 없이 불필요한 희생들을 댓가로 지켜지게 되었다.
볼셰비키-레닌주의자들의 예측 - 보다 정확하게, 그들의 예측의 최대한의 변형 - 이 완벽하게 입증되었다. 이 점에
관하여 오늘날 어떠한 논쟁도 있을 수 없다. 생산력 발전이 사적 소유의 복구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회화의 기초에서 계
획된 관리에 의하여 진행되었다.
테르미도르의 실제 의미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는 테르미도르에 관한 유추가 문제를 명확하게 하기보다는 불분명하게 하는데 기여
했다는 것에 동의할 수 있고 동의할 수밖에 없다. 1794년 테르미도르는 국민공회[the Convention]의 특정 그룹들로부
터 다른 그룹들로의 권력 이동, 승리한 "민중"의 한 영역으로부터 다른 계층으로의 권력이동을 만들어냈다. 테르미도르
는 반혁명적이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주어진 경우에 "반혁명"의 개념에 우리가 얼마나 광범위한 중요성을 부가
하는가에 달려있다. 1789년에서 1793년의 전복은 성격상 부르주아적이었다. 본질적으로 위의 전복은 "자유로운" 부르
주아의 소유에 의한 고정된 봉건적 소유의 대체에 스스로를 제한했다. 이 혁명에 "대응하는" 반혁명은 봉건적 소유의
재건을 이루어야만 했다. 그러나 테르미도르는 이러한 방향으로의 어떠한 시도도 하지 않았다. 로베스피에르는 직공
[artisan]들 중에서 지지를 획득하고자 했고, 총재정부는 중간 부르주이지 중에서 지지를 획득하고자 했다. 보나파르트
는 은행들과 동맹을 맺었다. 그러나 정치적인 중요성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중요성도 물론 가지고 있었던 이러한 모든
이동들은 새로운 부르주아 사회와 국가의 기초 위에서 발생했다.
반동으로 가는 길에서 다음의 중요한 단계인 보나파르트의 부뤼메르 18일이 동일한 정도로 중요하다. 두 가지 경우
모두에서, 문제는 과거의 소유양식이나 과거 지배계층의 권력 복원이 아니라 승리한 "제3 계급"의 서로 다른 부위들 사
이에서 새로운 사회 정권의 성과를 나누는 것이었다. 부르주아지는 점점 더 많은 재산과 권력을 전유했으나(직접적으로
그리고 즉각적으로 혹은 보나파르트와 같은 특수한 대리인들을 통해서) 혁명의 사회적 성과들에 대항해서는 어떠한 시
도도 하지 않았다; 반대로, 부르주아지는 간절하게 혁명의 사회적 성과들을 강화하고 조직하고 안정시키려고 노력했다.
나폴레옹은 "하층계급"과 몰수당한 재산소유자들의 주장들 모두에 대항하여 농민의 것을 포함하여 부르주아적 소유를
보호했다. 봉건적 유럽은 나폴레옹을 혁명의 살아 있는 화신으로 증오했으며 이것은 그들의 기준에 따르면 올바른 것이
었다.
오늘날의 소련은 1917년에 레닌이 서술했던 소비에트 공화국 타입과의 유사성을 거의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은 의
심의 여지가 없다.(상비 관료와 상비군이 없는, 모든 선출된 관리에 대하여 언제든지 소환할 수 있는 권리, 그리고 "그
개인이 누구이건 간에" 대중에 의한 그들에 대한 적극적인 통제 등) 국가에 대한 관료의 지배, 뿐만 아니라 관료에 대
한 스탈린의 지배가 거의 완전하게 성취되었다. 그러나 이것으로부터 어떤 결론이 도출되는가?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부터 출현한 실제 국가가 이상적인 중요한 규범에 조응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으로부터 등을 돌려버리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은 평화적 민주주의, 해방주의자(Libertarian), 아나코 생디칼리스트 그리고 일반적으로 소부르주아 지식인들의 극좌
써클 들에 공통적인 정치적 속물근성이다. 한편, 이 국가가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으로부터 등장했기 때문에, 그것에 대
한 모든 비판은 신성모독이고 반혁명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것은 소부르주아 지식인이나 노동자 관료들 사이
의 특정 그룹들의 즉각적인 물질적 이해가 그 뒤에 숨어 있는 위선의 주장이다. 이들 두 타입 - 정치적 속물과 정치적
위선자 - 은 개인적 환경에 따라서 상호간에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이 들 두 타입을 지나치도록 하자.
맑스주의자는 현재의 소련이 분명하게 소비에트 국가의 기본적인 규범에 가깝지 않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강령
적 규범을 만들어낼 때 예상하지 못한 것들을 찾아보자; 이들 왜곡이 국가의 경제적인 기초로까지 확대되었는가, 다시
말해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기본적인 사회적 성과들이 보존되어 왔는가에 관하여 다시 한번 체크해보자; 만약 이것들
이 보존되어왔다면, 그것들이 어떤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는가에 관하여 살펴보자; 그리고 반동에 대한 진보적 발전의
경향들의 우월함을 촉진할 수 있는 것과 같은 요소들을 소련에서 그리고 세계적 영역에서 획득하고 있는지 찾아보자.
이런 접근은 복잡하다. 이것은 어떠한 이미 만들어진 열쇠를 후자 쪽에서 그렇게도 사랑하는 게으름뱅이들에게 가져다
주지 않는다. 그러나, 대신에, 이것은 두 질병, 속물과 위선, 을 가진 사람을 보존할 뿐만 아니라 소련의 운명에 적극적
인 영향을 미칠 가능성을 의미한다.
"민주주의적 중앙주의" 그룹이 1926년 노동자 국가가 청산되었다고 선언했을 때, 이것은 명백하게 혁명이 아직 살
아있는 동안에 혁명을 매장하는 것이었다. 이것과 다르게, 좌익 반대파는 소비에트 정권의 개혁을 위한 강령을 제출했
다. 스탈린주의 관료는 특권화된 계층으로서의 자신을 보호하고 강화하기 위하여 좌익반대파를 분쇄했다. 그러나 자기
지위를 위한 투쟁에서, 스탈린주의 관료는 자기 자신들이 소비에트 국가의 사회적 기초를 지켜낼 수 있도록 하는 유일
한 모든 방책들을 좌익반대파로부터 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것은 너무나도 소중한 정치적 교훈이다! 이
것은 농민의 후진성, 프롤레타리아트의 피로, 서구로부터의 결정적인 지원의 부족이라는 특수한 역사적 상황이 어떻게
보수적인 국내의 관료에 의한 프롤레타리아 전위에 대한 억압과 혁명적 국제주의의 분쇄로 특징지워지는 혁명에서의
"두번째 장"을 준비하는 가를 보여준다. 그러나 바로 이 똑같은 예가 "두번째 장"의 승자들이 "첫번째 장"의 혁명가들을
짓밟았을 때에 조차도 어떻게 올바른 정치적 노선이 맑스주의 조직들로 하여금 발전의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하는가
를 보여준다.
기계적으로 살아있는 발전의 과정들을 이미 만들어진 규범들에 맞추면서 이 규범들에 의해 작동되는 미신적 이상주
의적 경향의 사상은 쉽게 사람들을 열정으로부터 의기소침으로 이끈다. 모든 존재를 발전의 과정과 내부적 세력들의 투
쟁 속에서 바라보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는 변증법적 유물론만이 사상과 실천에 필요한 안정성을 부여할 수 있다.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와 관료의 독재
과거 몇몇 저작들에서, 우리는 생산수단의 국유화에 의해 증명되는 경제적 성공들에도 불구하고, 소비에트 사회는
생활여건의 불평등과 관료의 특권들에 의해 평가되는 것과 같이 완벽하게 모순적인 이행기적 성격을 보존하고 있으며,
여전히 미래의 공산주의보다는 자본주의 정권에 훨씬 가까이 서있다는 사실을 확립했다.
동시에, 우리는 거대한 관료적 퇴행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국유화된 생산수단의 기초 위에서 경제와 문화의 발전을
담보하고 이것에 의해서 관료와 사회적 불평등의 폐지를 통해 노동자들의 진정한 해방을 위한 조건을 준비하고 있는
한 소비에트 사회는 여전히 노동계급의 역사적 기구로 남아있다는 사실을 확립했다.
이 두 가지 근본적인 명제들에 관하여 깊이 생각해보거나 이 명제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은 누구나, 그리고 1923년부터의 소련 문제에 대한 볼셰비키-레닌주의 저작들을 일반적으로 공부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누구나 모든 새로운 사건에서 지도지침을 잃고 절망적인 슬픔으로 맑스주의적 분석을 포기할 위험이 있다.
소비에트(보다 정확하게 反소비에트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관료주의는 도시와 지방,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이들
두 종류의 모순들은 똑같지 않다), 전국에 걸친 공화국과 지역들, 농민의 서로 다른 그룹들, 노동 계급의 서로 다른 층
들, 소비자의 서로 다른 그룹들, 그리고 최종적으로 소비에트 국가 전체와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자본주의 환경들 사이
의 모순의 산물이다. 모든 관계들이 화폐적 계산의 언어로 번역되어지고 있는 오늘날, 경제적 모순들이 예외적 중요성
을 가지고 전면에 나서게 된다.
노동 대중의 위로 스스로를 끌어올리면서, 관료는 이러한 모순들을 규제하고 있다. 관료는 스스로의 지배를 강화하
기 위하여 이러한 기능을 사용한다. 자신의 통제되지 않는, 어떠한 항의도 없는 무소불위의 지배를 통해서 관료는 새로
운 모순들을 축적하고 있다. 새로운 모순들을 축적하면서 관료적 절대주의 정권을 만들어낸다.
관료 스스로의 내부에 있는 모순들이 주요 명령 직위를 자기 멋대로 선택하는 시스템의 원인이 되었다; 선택 순서
안에서의 규율의 필요성이 일인 지배로 그리고 무오류의 지도자라는 우상숭배의 원인이 되었다. 하나의 그리고 똑같은
시스템이 공장, 콜차크, 대학 그리고 정부에 만연해 있다: 자신의 충성스러운 부대의 꼭대기에 서 있는 지도자; 나머지
는 지도자를 따른다. 스탈린은 결코 그의 성격상 대중의 지도자가 아니었으며 될 수도 없었다; 그는 관료들의 정점에
있는, 그들의 인격화였으며, 관료적 "지도자들"의 지도자였다.
경제적 임무들이 더욱 복잡해질수록, 사람들의 요구와 이해관계가 커질수록, 관료정권과 사회주의적 발전의 요구들
사이의 모순이 더욱더 날카로와지고, 관료는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하여 더욱더 거칠게 투쟁하며, 관료는 더욱더
냉소적으로 폭력과 사기, 뇌물에 의존하게 된다.
경제와 문화의 성장에도 불구하고 지속되는 정치적 정권(regime)의 악화 - 이 슬픈 사실이 여기에서, 그리고 오로
지 여기에서만 설명된다: 억압, 박해 그리고 탄압은 오늘날 큰 틀에서 국가의 방어에 복무하는 것이 아니라 관료의 지
배와 특권의 방어에 복무한다. 이것이 또한 사기와 기타 방법에 의한 억압들을 위장할 어느 때보다도 증가하고 있는 필
요성의 원인이다.
"그러나 이런 국가가 노동자 국가로 불리 울 수 있는가?" - 그래서 도덕주의자, 이상주의자, 그리고 "혁명적" 속물
들은 분개해서 말한다. 약간 더 주의 깊은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아마도 이것은 노동자 국가 일 것이다. 하
지만 최종적으로 분석해보면, 여기에는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다. [따라서] 이것은 관료의 독재하
에 있는 퇴화한 노동자 국가이다."
전반적으로 우리에게는 이 논쟁을 다시 시작할 만한 이유가 없다. 이것과 관련되어 이야기되었던 모든 것들은 우리
경향의 저작들과 공식문서들에서 논의되었다. 누구도 이 가장 중요한 문제에 관한 볼셰비키-레닌주의의 입장에 대하여
논박하거나 수정하거나 보충하려고 하지 않았다.
우리는 관료의 분파적 독재가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로 불리 울 수 있는가 여부의 문제에 우리 자신을 엄격하게 제
한할 것이다.
독재라는 용어가 종종 제한적인 정치적 의미에서 사용되기도 하고, 보다 심오한 사회학적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는 사실로부터 용어학상의 어려움이 발생한다. 우리는 "무쏠리니의 독재"에 관하여 말하는 동시에, 파시즘은 금융자본
의 기구일 뿐이라고 선언하기도 한다. 무엇이 올바른가? 둘 다 맞지만, 서로 다른 측면에서 그렇다. 모든 집행권력이
무쏠리니의 손아귀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에 관하여는 논란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국가 활동의 실질적 내용 전체가 금
융자본의 이해관계에 따라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한 계급의 사회적 지배(그 계급의 독재)는 극도로 다양한
정치적 형식을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은 중세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부르주아지의 전체 역사에 의해 증명된다.
바로 이 똑같은 사회학적 법칙을 - 모든 필요한 변화들과 함께 -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로까지 확장하는 것 역시 소
련의 경험으로 이미 충분하다. 권력의 장악과 사회주의 사회에서 노동자 국가의 소멸 사이의 시기에, 프롤레타리아 지
배의 형식과 수단들은 내외부적인 계급투쟁의 경로에 따라서 뚜렷하게 바뀔 수 있다.
그래서, 현재 스탈린의 지배는 어쨌거나 혁명 초기 동안의 소비에트 지배를 닮아있다. 한 정권의 다른 정권으로의
대체는 한번의 타격으로 발생하지 않고, 일련의 방책들을 통해서, 프롤레타리아트 전위에 대항하여 관료에 의해 수행되
는 일련의 소규모 내전들을 통해서 발생한다. 최종적인 역사적 분석에 따르면, 소비에트 민주주의는 사회적 모순들의
압력에 의해 폭발했다. 사회적 모순들을 활용하여, 관료는 대중조직들의 수중에서 권력을 찬탈했다. 이런 의미에서 우
리는 관료의 독재와 그리고 심지어 스탈린 일인 독재에 관하여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찬탈은 오로지 관료 독재의
사회적 내용이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의해 창출된 생산관계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에 가능했고, 스스로를 유지할 수 있
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프롤레타리아트 독재가 관료독재에서 자신의 왜곡되었으나 의심의 여지가 없는 표현을 발견
하게 되었다고 완벽한 정당성을 가지고 말 할 수 있다.
러시아와 국제 반대파의 내부 논쟁에서, 우리는 노동자 국가의 사회적 기초에 대항하는 것을 목표로 했던 부르주아
반혁명의 첫 번째 국면을 테르미도르라고 가정적으로 이해했다. 비록 우리가 보아왔던 것과 같이, 과거에 논쟁의 내
용이 유추에 의해 고통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역사적 유추가 순수하게 가정적으로 그리고 실제적 성격을 가지지 않
은 채 동원되었고, 이 가정적 성격이 소비에트 국가의 가장 최근 진화의 분석에 대한 요구와 유례없이 증가하는 모순이
되었다. 우리 스스로가 종종 국민투표 정권과 스탈린의 보나파르트 정권에 관하여 - 충분한 이유가 있어서 - 이야기
한다는 사실을 언급하는 것으로 족하다. 그러나 프랑스에서 보나파르티즘은 테르미도르 뒤에 왔다. 만약 우리가 역사적
유추의 틀 거리 내에 머무르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다음의 질문을 해야만 한다: 소비에트 테르미도르가 아직 존재하지
않았다면, 어디서 보나파르티즘이 생겨난 것인가? 우리의 과거 평가에서 본질적으로 어떠한 변화들을 주지 않는다면, -
그렇게 할 이유가 없다 - 우리는 역사적 유추를 근본적으로 수정해야만 한다.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특정 과거 사실들
에 대하여 보다 세밀하게 관찰하도록 해주며, 보다 나은 어떤 표현들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해준다.
제9 테르미도르의 전복은 부르주아 혁명의 기본적인 성과들을 청산하지 않았으나, 그것은 권력을 보다 온순하고 보
수적인 자코뱅들, 부르주아 사회의 보다 부유한 부류들에게 이전시켰다. 소비에트 혁명에서도 또한 훨씬 느린 템포와
위장된 형식으로이기는 하지만, 테르미도르와 전체적으로 유사한 우익으로의 이동이 오래 전에 발생했었다는 것을 간과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좌익에 대항한 소비에트 관료의 음모는 그 음모 자체가 제9 테르미도르의 즉흥성보다 훨씬 더
조직적으로 총체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 최초 국면들 동안 상대적으로 "건조"한 성격을 보존할 수 있었다.
사회적으로 프롤레타리아트는 부르주아지 보다 더 균일하다. 그러나 권력 장악에 뒤이어 관료와 관료와 연결된 노
동귀족이 형태를 갖추기 시작하는 시기 동안에 그 자신의 내부에 모든 계층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 예외적 명확성을
가지고 분명해 진다. 가장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의미에서, 좌익반대파의 분쇄는 혁명적 전위의 수중으로부터 관료와 노
동계급 상층부의 보다 보수적인 인자들의 수중으로의 권력의 이전을 의미했다. 1924년 - 이때가 소비에트 테르미도르
의 시작이었다.
물론 역사적 동일성이 아니라 항상 서로 다른 사회 구조와 시대를 자신의 한계로서 가지는 역사적 유추의 문제가
여기에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주어진 유추는 피상적인 것도 아니고 우연적인 것도 아니다: 이것은 혁명과 반혁명의 시
기 동안 널리 발생하는 계급투쟁에서의 극도의 긴장에 의해 결정된다. 두 가지 모두의 경우에서 관료는 새로운 정권을
위한 승리를 보증했었던 민중의 민주주의의 배후로부터 스스로를 끌어올린다. 자코뱅 조직은 서서히 교살되었다. 1793
년의 혁명가들은 전장에서 죽어갔다; 그들은 외교관과 장군이 되었다; 그들은 억압의 타격 아래 쓰러졌거나.... 혹은 지
하로 갔다. 그후, 다른 자코뱅들은 성공적으로 스스로를 나폴레옹의 장관으로 이행했다. 그들의 대오는 과거 정당들의
배산자들, 구 귀족들, 그리고 아둔한 출세주의자들로 인해 유례가 없는 숫자로 증가했다. 그럼 러시아에서는? 130년에
서 140년이 지난 후에 생명이 넘치던 소비에트들과 당 조직들로부터 "열정적으로 추앙 받는 지도자"에 전적으로 의지
하는 서기들의 징발[commandeering]로의 점차적 이행에 의해 똑같은 퇴행의 그림이, 그러나 훨씬 더 광대한 영역에
서 훨씬 더 무르익은 배경 위에서, 재생되고 있다.
프랑스에서, 테르미도리안-보나파르티스트 정권의 뒤늦은 안정화가 가능했던 것은 오로지 봉건주의의 구속으로부터
해방되었던 생산력의 발전 덕분이었다. 행운아들, 약탈자들, 관료의 친척과 동맹자들은 스스로 부자가 되었다. 환상에
서 깨어난 대중들은 의기소침에 빠졌다.
1923년에 시작되었고 소비에트 관료 자신에게도 예상치 못하게 다가왔던 국유화된 생산력의 급증이 관료의 안정화
를 위해 필요한 경제적 전제조건을 창출했다. 경제적 생활의 향상이 활동적이고 능력있는 조직가들, 행정가들 그리고
기술자들의 에너지를 위한 분출구를 제공했다. 고위 지배계층에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광범위한 특권적 계층이 만들어
졌다. 노동대중은 희망에 살거나 무관심으로 떨어졌다.
러시아 혁명의 다른 국면들을 18세기의 끄트머리에 발생했던 프랑스에서의 유사한 사건들에 맞추려고 시도하는 것
은 진부한 이론일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소비에트 정치 정권과 특히 제국의 시대가 가까왔었던 통령정부의 말미의 제
1 통령의 정권과의 유사성으로 인해 한가지는 글자 뜻 그대로 강렬한 인상을 준다. 스탈린에게 승리자의 찬란함이 부
족했던 한편, 어쨌건, 그는 조직화된 굽실거림의 정권 내부의 보나파르트 1세를 능가했다. 그러한 권력은 오로지 당과
소비에트들과 노동 계급 전체를 교살시킴으로써만 얻어질 수 있었다. 스탈린이 의지하고 있던 관료는 완성된 국내 혁명
의 결과들에 물질적으로 긴박되어 있으나, 국제 혁명의 발전과는 어떠한 연결 포인트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들의 삶의
방식, 이해관계 그리고 심리상태에서, 현재 소비에트 관료들은 나폴레옹의 장성들과 장관들이 혁명적 자코뱅과 다른 것
못지 않게 혁명적 볼셰비키와 다르다.
소비에트 런던 대사 마이스키는 최근 영국 노동조합주의자들의 한 대표에게 "반혁명분자" 지노비에프주의자들에 대
한 스탈린주주의의 재판이 얼마나 필요하고 정당한 것인가에 대하여 설명했다. 이 충격적인 이야기가 - 수 천가지 중
에 하나이지만 - 우리를 문제의 핵심으로 인도한다. 우리는 지노비에프주의자들이 누구인지 안다. 그들의 실수와 동요
들이 무엇이건 한가지는 분명하다: 그들은 "직업적 혁명가" 형태의 대표자들이다. 세계 노동자 운동의 문제들 - 이것들
이 그들의 피 속으로 들어와 있었다. 마이스키는 누가인가? 콜차크의 보호하에 있던 트랜스 우랄 백색 정부에 장관으
로 들어갈 기회를 이용하기 위하여 우익으로 가면서 1918년 자기자신의 당과 결별했었던 우익 멘셰비키. 오로지 콜차
크가 절멸된 후에야, 마이스키는 자신의 얼굴을 소비에트 쪽으로 돌릴 시간이 무르익었다고 생각했다. 레닌 - 그리고
그와 함께 나도 - 그런 타입들에 대하여 - 경멸은 말할 것도 없고 - 가장 큰 불신을 가지고 있었다. 오늘날 대사의 대
열 안에 있는 마이스키는 자본주의 복귀를 위한 군사적 개입을 선동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다고 "지노비에프주의자
들"과 "트로츠키주의자들"을 비난한다. - 마이스키가 내전이라는 방식으로 우리에 대항하여 방어했었던 것과 같은 바로
그 자본주의.
현재 미국의 대사인 트로이야노프스키는 젊은 시절 볼셰비키에 가입했다; 직후 그는 당을 떠났다; 전쟁기간 그는 애
국자였다; 1917년에는 멘셰비키였다. 10월 혁명 때에 그는 멘셰비키 중앙위원회의 맴버였고, 여기에 더해서 그후 수년
동안 트로이야노프스키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대항하여 비합법 투쟁을 수행했다; 좌익 반대파가 분쇄된 후 그는 스탈
린주의 당, 보다 정학하게, 외교부에 들어갔다.
파리 대사인 포템킨은 10월 혁명의 기간 동안 부르주아지 역사 교수였다; 승리 이후에 그는 볼셰비키에 가입했다.
구 베를린 대사 킨츄크는 10월 전복의 나날 동안 멘셰비키로서 반혁명적인 조국과 혁명을 구하기 위한 모스크바 위원
회에 현재 재정 인민위원이며 우익 사회혁명당원인 그린코와 함께 참여했다. 베를린 후임대자 슈리츠는 소비에트 초대
의장 멘셰비키 츄하이졔의 정치비서였다; 그는 승리 후에 볼셰비키에 가입했다. 거의 모든 외교관들이 같은 타입이다;
그리고 한편으로 - 특히 베세오프스키, 디미트리에프스키, 아마베코프 등등의 경험이 있고 난 후 - 오로지 가장 의존적
인 사람들만이 지명되고 있다.
얼마 전에 소비에트 금광 산업의 주요한 성공들과 관련한 급보가 그것의 조직자인 엔지니어 세레브로프스키와 관련
된 코멘트들과 함께 세계 언론에 실렸다. 오늘날 관료 상층 부의 공식적인 대변인으로서 듀란티, 루이스 피셔와 성공적
으로 경쟁하고 있는 르 템프스의 모스크바 특파원은 세레브로프스키가 1903년 이후로 볼셰비키이며, "친위대"라는 사
실을 강조하기 위해서 특히 애를 썼다. 이것은 세레브로프스키의 당적 카드가 실제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은, 그
는 젊은 학생으로서 그리고 멘셰비키로서 1905년 혁명에 참여했고, 이후 오랜 기간 동안 부르주아지 캠프로 넘어갔었
다. 1917년 2월 혁명기에 그는 두개의 군수품 공장의 정부 감독관의 직함을 가지고 있었으며 무역국의 맴버였고 금속
노동조합에 대항하는 투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자였다. 1917년 5월에 세레브로프스키는 레닌이 "독일의 첩자!"라고
선언했다. 볼셰비키의 승리 이후, 세레브로프스키는 다른 전문인들[기술관련 전문가]과 함께 나 자신에 의해 기술적인
업무로 이전되었다. 레닌은 그를 전혀 믿지 않았다; 나는 그에 관하여 어떠한 믿음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오늘날, 세
레브로프스키는 당의 중앙위원회 위원이다.
중앙위원회의 이론적 저널인 볼세비키(1934년 12월 31일)에 "소련에서 금광 산업에 관하여"라는 세레브로프스키의
기사가 실린다. 첫 번째 페이지를 보자: " .... 당과 노동계급의 가장 사랑하는 지도자 스탈린 동지의 지도하에..."; 세
줄 아래: "... 미국 특파원 듀란티 씨와의 대화에서 스탈린 동지는..."; 다섯줄 아래: "... 스탈린 동지의 간략하고 정확
한 답변..."; 페이지의 가장 아래에: "그것이 스탈린 방식의 금을 위한 투쟁을 의미하는 것이다." 두 번째 페이지: "...
우리의 위대한 지도자 스탈린 동지가 우리를 가르치는 바와 같이..."; 네 줄 아래: " 그들(볼셰비키들)의 보고에 답하면
서 스탈린 동지는 다음과 같이 썼다: '당신들의 성공을 축하한다'..."; 같은 페이지 더 아래에: "스탈린 동지의 영도에
영감을 받아 ..."; 한 줄 아래에: "...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스탈린 동지와 함께 하는 당 ..."; 두 줄 아래에: "... 우리
당과 (!!) 스탈린 동지의 영도..." 이 기사의 결론을 보자. 우리는 반 페이지에 걸쳐 읽게된다:" 당과 노동계급의 천재적
지도자 스탈린 동지의 영도..."; 그리고 세줄 아래에: " ...우리의 가장 사랑받는 지도자 스탈린 동지의 말들..."
이런 아첨의 홍수 앞에서는 풍자라는 것 자체도 무력하다! "가장 사랑받는 지도자들"은 그들에 대해 만들어지는 사
랑의 선언들이, 그리고 한편으로 지도자에 대한 축사가 아닌 금광에 관한 기사에서 한 페이지 마다 5번씩 있을 필요가
전혀 없다고 사람들은 생각할 것이다. 한편, 그런 아부의 능력을 가진 기사의 저자는 분명히 그 자신의 속에 혁명가의
어떠한 것도 가지고 있을 수 없다. 노동자들에 대항하여 투쟁했고 오늘날 정권의 보루요 중앙위원회 위원이며 100%
스탈린주의자인 과거 짜르 시절 대공장의 감독관, 부르주아지 그리고 애국자가 바로 이들이다.
또 다른 예. 오늘날 프라우다의 중심인물 중 하나인 자스라프스키는 올해 1월에 도스토예프스키의 반혁명적 소설들
을 출판하는 것은 "트로츠키, 지노비에프 그리고 카메네프의 반혁명적 저작들"을 출판 하는 것만큼 허가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 자르라프스키는 누구인가? 아슴프레한 과거에는 분트주의자[유대인 분트의 멘셰비키] 였고, 이후에는
1917년에 레닌과 트로츠키에 대항하여 독일의 첩자라고 가장 경멸적인 캠페인을 벌였던 자. 1917년 레닌의 글들에서,
자제된 표현으로서, "자스라프스키와 그와 같은 다른 건달들"이라는 구절이 있다. 그래서 자스라프시키는 당 문헌에 극
단적 타입의 부패한 부르주아 중상가로 들어가게 되었다. 오늘날 그는 반혁명분자 트로츠키, 지노비에프 그리고 카메네
프로부터 스탈린주의를 사수하고 있다! 소련 내에서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 스탈린의 언론은 이런 인간들로 채워져 있
다.
구 볼셰비키 중핵들은 분쇄 당했다. 혁명가들도 분쇄 당했다. 혁명가들은 유연한 등뼈를 가진 관료들로 대체되었다.
맑스주의 사상은 공포와 아첨과 음모에 의해 제거되었다. 레닌의 정치국원들 가운데 오직 스탈린만이 남아있다: 정치국
원 중 두 명은 정치적으로 박살났고 머리를 땅에 조아리며 아첨하고 있다(리코프와 톰스키); 두 명은 감옥에 있다(지노
비에프와 카메네프); 한 명은 국외로 추방되어 시민권을 빼앗겼다(트로츠키). 그룹스카야 스스로가 말한 것 처럼, 레닌
은 오로지 그의 죽음 때문에 관료의 억압을 면할 수 있었다; 그를 감옥에 가두고, 무덤 속에서 그의 입을 닫게 할 기회
를 잃었다. 지배계층의 전체 토대가 퇴행했다. 자코뱅은 테르미도르와 보내파르티스트들에 의해 축출되었다; 볼셰비키
는 스탈린주의자들에 의해 대체되었다.
크건 중간이건 작건 간에 보수적이고 결코 청렴하지 않은 마이스키, 세리브로프시키, 자스라프스키 등의 광대한 계
층에게 스탈린은 정의의 심판관이고, 모든 특혜의 원천이며, 있을 수 있는 반대로부터의 방어자였다. 이것에 대한 대가
로, 관료는 가끔 스탈린에게 전국적인 국민투표에 의한 찬성을 선물한다. 소비에트 대회와 마찬가지로 당 대회들은 단
하나의 기준에 따라서 조직된다: 스탈린에 찬성하는가 아니면 반대하는가? 오로지 "반혁명 분자들"만이 반대할 수 있으
며, 그들은 그에 상응하는 만큼 다루어졌다. 이것이 오늘날 지배의 메카니즘이다. 이것은 보나파르티스트의 메카니즘이
다. 이것 외에 어떠한 정의도 정치사전에서 아직 발견되지 못한다.
우리는 역사적 유추없이 역사로부터 배우지 못한다. 그러나 유추는 구체적이어야만 한다; 우리는 유사성의 모습들
뒤에 있는 비유사성의 모습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두 혁명들 모두 봉건주의와 농노제도를 끝장냈다. 그러나 그들 중
하나는, 극단적 진영의 모습으로, 부르주아 사회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하여 헛되이 노력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 다른
하나는 실제로 부르주아지를 타도하고 노동자국가를 건설했다. 유추에 필수적인 물질적 한계를 부여하는 이 근본적인
계급의 차이가 예측을 위한 결정적인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
농노제로부터 농민을 해방하고 그들에게 땅을 제공하는 심원한 민주주의 혁명 이후에 봉건적 반혁명은 일반적으로
불가능하다. 타도된 왕국은 스스로를 권력에 재 설립할 수 있고 스스로를 중세의 유령들로 둘러싸게 될지 모른다. 그러
나 이것이 봉건주의 경제를 재 설립하기에는 이미 힘이 없다. 일단 봉건주의의 구속으로부터 해방되자 부르주아적 관계
가 자동적으로 성장한다. 그것들은 외부적 힘에 의해 정지될 수 없다; 그것들은 먼저 자기 자신의 매장자를 만들어내면
서 자신의 무덤을 스스로 팔 수밖에 없다.
사회주의적 관계의 발전은 이것과 다르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사적소유의 구속으로부터 생산력을 해방시키는 것
뿐만 아니라 스스로가 만들어낸 국가의 직접적 폐기로 그것을 이행시킨다. 혁명 이후 부르주아 국가가 시장을 그 자신
의 법칙에 맡겨 두면서 경찰의 역할에 스스로를 제한하는 반면, 노동자 국가는 경제가와 조직가의 직접적인 역할을 떠
안는다. 한 정치 정권의 다른 것에 의한 대체는 오직 시장 경제에 간접적이고 피상적인 영향만을 미칠 뿐이다. 반대로,
부르주아 혹은 소부르주아 정부에 의한 노동자 정부의 대체는 필연적으로 계획화 초기단계의 청산과 계속해서 사적 소
유의 복구로 이어질 것이다. 자본주의와는 다르게, 사회주의는 자동적으로 건설되는 것이 아니라 의식적으로 건설되는
것이다. 사회주의를 향한 진보는 사회주의를 갈망하는 혹은 사회주의를 갈망하도록 강제되는 국가권력과 분리될 수 없
다. 사회주의는 그것의 생산력이 자본주의를 훨씬 추월했거나, 개인과 모두의 인류욕구가 충분한 만족을 얻을 때, 그리
고 국가가 사회 속에 해소되면서 완전히 사라지게 되는 그 발전의 매우 높은 단계에서만 오직 불변의 성격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먼 미래에 있다. 주어진 발전의 단계에서, 사회주의 건설은 노동자 국가와 함께 유지되거
나 넘어가게 된다. 부르주아("무정부적인")와 사회주의("계획된") 경제 형성의 법칙 사이의 차이에 대하여 충분히 숙고
한 이후에야 비로소, 프랑스 대혁명에 대한 유추가 넘어설 수 없는 한계에 대한 이해가 가능하다.
1917년 10월 민주주의 혁명이 완수되었고 사회주의 혁명이 시작되었다. 세상의 어떠한 세력도 러시아에서의 농경-
민주주의 전복을 뒤로 돌릴 수 없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자코뱅 혁명에 대한 완벽한 유추가 가능하다. 그러나 콜차크
의 전복은 그것의 모든 힘을 보유한 위협이며, 이것과 함께 생산수단의 국유화를 위협하고 있다. 그것이 로마노프 왕조
로의 후퇴라고 하더라도 정치적 반혁명은 토지의 봉건적 소유를 재건할 수 없었다. 그러나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 블럭
의 권력 복귀는 사회주의 건설을 말살하기에 충분할 것이다.
두 혁명과 결과적으로 그들에 "조응하는" 반혁명들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는 스탈린 정권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반
동적인 정치적 이행들의 중요성을 이해하는데 극도로 중요한 것이다. 농민 혁명은, 농민혁명에 의존했던 부르주아지 또
한, 나폴레옹 정권과 쉽게 평화적 관계를 맺을 수 있었으며, 심지어 루이 18세 하에서도 스스로를 유지할 수 있었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이미 현재의 스탈린 정권 하에서 치명적인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그것은 더 이상 우익으로의 이
행을 견딜 수 없을 것이다.
소비에트 관료는 - 그것의 전통에서는 "볼셰비키"이지만 현실에서는 오래 전부터 그것의 전통과 절연했었던, 그것
의 구성과 정신에 있어서 소부르주아인 -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 사이, 노동자 국가와 세계 제국주의 사이의 적대를
규제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것이 관료적 중앙주의, 관료의 지그재그 행보들, 권력, 약점, 그토록 중요했었던 세계 프롤
레타리아 운동에 대한 그들의 영향력의 사회적 기초이다. 관료가 점점 더 독립적으로 될수록, 권력이 점점 더 한사람
의 손아귀에 집중될 수록, 점점 더 관료적 중앙주의는 보나파르티즘으로 바뀌어 갔다.
너무도 넓게 이해되고 있는 보나파르티즘의 개념은 구체화가 필요하다. 지난 수년 동안 우리는 이 용어를 프롤레타
리아와 파시스트 캠프 사이의 적대주의를 이용하면서 그리고 직접적으로 군-경찰 기구에 의존함으로서 "민족 통일"의
구세주로서 의회와 민주주의 위에 스스로를 올려 세우는 자본주의 정부들에 적용했었다. 우리는 항상 쇠퇴하는 보나파
르티즘과 부르주아 혁명의 정치적 원칙들의 매장자였을 뿐만아니라 그 사회적 성과들의 방어자이기도 했던 젊고 전진
하는 보나파르티즘을 엄격하게 구분했다. 우리는 이 두 표현들에 같은 이름을 적용하는데 이것은 그들이 같은 자취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잔인한 세월의 자취에도 불구하고 젊은이를 80대와 구분하는 것은 언제나 가능하다.
물론, 우리는 오늘날 크레믈린의 보나파르티즘을 쇠퇴하는 것이 아닌 상승하는 부르주아지의 보나파르티즘과 동렬
에 놓는다: 나롤레옹 3세, 더 나아가, 슈라이허[Schleicher]나 도머규[Doumergue]가 아닌, 통령정부와 제1제국의. 이
러한 유추의 목적을 위하여, 나폴레옹 1세의 특징들을 스탈린의 것이라 여길 필요는 없다; 사회적 상황이 요구하는 경
우 언제든지, 보나파르티즘은 가장 다양한 직경의 축 주변에서 스스로를 강화할 수 있다.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관점으로부터, 자코뱅과 소비에트 기원의 두 보나파르티즘의 사회적 기초에서의 차이는
훨씬 더 중요하다. 자코뱅의 경우, 관련된 문제가 자신의 원칙과 정치적 기구들의 해체를 통한 부르주아 혁명의 강화였
다. 소비에트 보나파르티즘의 경우, 관련된 문제가 자신의 국제 강령, 지도 정당, 소비에트를 파괴하는 것을 통해서 노
동자 농민 혁명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테르미도르의 정책들을 더욱 더 수행하면서, 나폴레옹은 봉건적 세계에 대항하는
투쟁을 수행했을 뿐만 아니라 "하층계급"과 소부르주아, 중간부르주아의 민주주의적 써클들에 대항하는 투쟁도 수행했
다; 이런 방법으로 그는 혁명으로부터 태어난 정권의 과실들을 새로운 부르주아 상층계급의 손아귀에 집중시켰다. 스탈
린은 봉건적-부르주아 반혁명에 대항해서 뿐만 아니라 노동자, 그들의 조바심과 불만의 주장들에 대항해서도 10월 혁
명의 성과들을 방어한다; 특권이 없는 노동 대중들의 질서정연한 역사적이고 진보적인 경향들을 의미하는 좌익을 분쇄
한다; 그는 임금과 특권, 서열 등이 극단적으로 다른 새로운 지배귀족을 창조한다. 최하층에 대항하여 새로운 사회적
지배계층의 최상층 부위에서 지지를 구하면서 - 때로는 반대로 - 스탈린은 자기 자신의 손에 권력의 완전한 집중을 확
보했다. 소비에트 보나파르티즘이 아니면 이 정권은 다른 무엇으로 불리울 수 있는가?
보나파르티즘 - 바로 그것의 본질에서 - 스스로를 오랫동안 유지할 수 없다; 피라미드의 꼭지점 위에서 균형이 잡
힌 구는 반드시 한쪽 또는 다른 쪽으로 굴러 떨어질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보았던 것 처럼 - 역사적 유추
가 자신의 한계와 충돌하는 것이 정확하게 바로 이 지점에서이다. 물론 나폴레옹의 추락은 계급들 사이의 관계를 손대
지 않은 채로 놔두지 않았다; 그러나 핵심에서 프랑스의 사회적 피라미드는 자신의 부르주아적 성격을 계속 유지했다.
피할 수 없는 스탈린주의 보나파르티즘의 붕괴는 즉각적으로 노동자 국가로서의 소련의 성격에 문제를 제기 할 것이다.
사회주의 경제는 사회주의 권력이 없이는 건설 될 수 없다. 사회주의 국가로서의 소련의 운명은 스탈린주의 보나파르티
즘을 대체하려고 일어서게 될 정치적 정권에 달려있다. 만약 프롤레타리아트가 다시 자신의 주변에 도시와 농촌의 노동
자들을 조직할 수 있다면, 오로지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전위만이 소비에트 시스템을 재생시킬 수 있다.
우리의 분석으로부터 아래에 간략하게 적시하는 몇 가지 결론들이 도출된다.
· 위대한 러시아 혁명의 테르미도르는 우리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훨씬 뒤에 있다. 트르미도리안들은 대략
10주년째 승리를 기념 할 수 있을 것이다.
· 소련의 현재의 정치적 정권은 통령정부보다는 제국의 형태에 더 가까운 "소비에트"(혹은 反 소비에트") 보나파르
티즘이다.
· 그 사회적 기초와 경제적 경향에서, 소련은 노동자 국가로 남아 있다.
· 보나파르티즘의 정치적 정권과 사회주의적 발전의 요구들 사이의 모순이 내부적 위기들의 가장 중요한 요인을 의
미하며 노동자 국가로서의 소련의 존재 자체에 직접적인 위험이다.
· 여전히 낮은 생산력의 수준과 자본주의적 환경 때문에, 현재 약화되기도 하고 강화되기도 하는 계급들과 계급모순
들은 세계의 중요한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완전한 승리가 있을 때까지 어떤 경우든지 불확정적으로
긴 기간동안 소련 내에 여전히 존재하게 될 것이다.
·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존재는 또한 미래 소련에서 경제와 문화의 발전을 위한 필요조건으로 남아 있다. 따라서 독
재의 보나파르트적 퇴행은 모든 프롤레타리아트의 사회적 성과들에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위협을 의미한다.
· 공산당 청년 대오내의 테러주의적 경향들은 보나파르티즘이 자신의 정치적 가능성을 모두 소진했으며 자신의 존
재를 위한 가장 무자비한 투쟁의 시기에 들어섰다는 사실의 가장 해악적인 증상들 중의 하나이다.
· 스탈린주의 정치적 정권의 불가피한 붕괴는 오로지 프롤레타리아 전위의 의식적 실천에 의한 보나파르티즘의 제
거의 경우에만 소비에트 민주주의의 확립으로 귀결될 것이다. 모든 다른 경우, 스탈린주의 진영에서 파시스트-자본주의
반혁명이 올 수 있을 뿐이다.
· 어떠한 슬로건 하에 그것이 진행되건 개인적 테러리즘의 전술은, 특정 상황에서, 프롤레타리아의 최악의 적들의
이익에 복무할 수 있다.
· 공산당 청년 대오 내의 테러주의의 발단에 대한 정치적 도덕적 책임은 당의 매장자 - 스탈린에게 있다.
· 보나파르티즘에 맞서는 투쟁에서 소련의 프롤레타리아 전위를 약화시키는 가장 중요한 원인은 세계 프롤레타리아
트의 계속되는 패배이다.
·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패배의 가장 중요한 원인은 스탈린주의 보나파르티즘의 맹목적인 종복인 동시에 개량주의
관료들의 최고의 동맹이면서 방어자인 코민테른의 범죄적 정책들이다.
· 국제적 차원에서의 성공을 위한 첫 번째 조건은 사기를 저하시키는 소비에트 보나파르티즘의 영향으로부터, 예를
들면 소위 코민테른의 타락한 관료로부터, 국제 프롤레타리아 전위의 해방이다.
· 사회주의 국가로서 소련의 구조를 위한 투쟁은 제4 인터내셔널을 위한 투쟁과 완전히 일치한다.
후기
우리의 반대자들은 - 그리고 그들은 환영하고 있다 - 우리의 "자기비판"을 이용할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당신들은
테르미도르라는 근본적인 문제에서 입장을 바꾸었다고 소리를 지를 것이다; 지금까지 당신들은 테르미도르의 위험성에
대해서만 말했다; 이제 당신들은 갑자기 테르미도르는 이미 뒤쪽에 있다고 선언한다. 스탈린주의자들이 아마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덤으로 우리가 더 쉽게 군사적 개입을 유발하기 위하여 우리의 입장을 바꾸었다고 추가할
것이다. 한편으로 브랜들러와 러브스톤 도당들과 다른 한편으로 "극좌"의 아는 체 하는 자들은 똑같은 음조로 스스로를
표현할 것이다. 이 사람들은 테르미도르에 대한 유추에서 무엇이 잘못이었는가를 우리에게 결코 지적하지 못했다; 그들
은 우리가 오류를 우리 스스로 드러냈다고 목청껏 소리지를 것이다.
우리는 소련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평가에서 이 오류의 입장을 위에서 밝혔다. 그것은 여러 개의 공식문서들에서
공식화되었던 것처럼 우리의 원칙적 입장 변화의 문제가 결코 아니라 단지 그것에 보다 정확함을 부여하는 문제이다.
우리의 "자기 비판"은 소련의 계급적 성격에 대한 분석이나 소련의 퇴행화의 원인과 조건들로까지 확장되는 것이 아니
라 단지 잘 알려진 대 프랑스 혁명의 단계들에 대한 유추의 확립에 의한 이들 과정들에 대한 역사적 명확화로까지 확
장되는 것이다. 비록 중요하한 것이더라도 부분적 오류의 교정은 볼셰비키-레닌주의자들의 기본적 입장을 확고하게 둘
뿐만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보다 정확하고 보다 현실성 있는 유추로 보다 정확하고 구체적으로 그것을 확립할 수 있도
록 해준다. 토론 중에 있는 정치적 퇴행화의 과정들 바로 그것들이 한편으로 훨씬 더 독특한 형태를 띠고 있다는 사실
이 오류의 발견(disclosure)을 매우 촉진시켰다는 것이 또한 추가되어야만 할 것이다.
우리 경향은 모오류성을 결코 주장하지 않았다. 우리는 스탈린주의 고위 성직자들 처럼 묵시와 같은 이미 만들어진
진실들을 받지 않는다. 우리는 존재의 관점에서 우리의 결론을 학습하고 토론하고 체크하며 공개적으로 인정한 실수들
을 정정한다. 그리고 우리는 전진한다. 과학적 의식성과 개인적 엄격함이 맑스주의와 레닌주의의 최고의 전통이다. 우
리는 또한 이러 측면에서 우리 스승들에게 올바랐던 것으로 남기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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