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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자, 약도 먹지 말아라?'

 
'가난한 자, 약도 먹지 말아라?'

3월 5일에서 13일 사이, 프레토리아의 고등법원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의 의약품에 대한 접근권을 둘러싼 법정공방이 진행되었다. 이 재판은, 남아프리카공화국 정부가 지난 1997년 제정한 의약품과 관련 물질에 관한 법률 개정안(Act 90)에 대한 것으로서, 이 법령이 WTO 위반이라고 39개의 제약회사들이 제소한 데에 따른 것이다. 남아공이 이 법령을 개정하게 된 주요한 원인은 그 나라의 뿌리깊은 인종차별적 문화와 엄청난 AIDS/HIV감염율에 있다.
전세계적으로 3천4백만명 이상으로 추산되는 AIDS/HIV감염자 중, 95%가 개발도상국에 존재한다. 남아공으로 봤을 때 AIDS/HIV감염자는 전체 인구 4천만명 중에서 4백3십만명 이상에 이르는데, 특히 남아공 군인 3명 중 2명이 감염자이며, 임산부의 20%가 감염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에 따라 이 나라의 예상수명은 10년 전에 비해 20년 가까이 감소되고 있는 추세이다.
이러한 놀라운 AIDS/HIV감염율이 남아공의 오랜 인종차별적 통치와 결합되어 주로 흑인으로 구성되는 빈민층은 AIDS/HIV감염증의 진행을 방해하는 항레트로바이러스약물들이나, 수많은 AIDS 합병증을 치료하기 위한 약물들에 접근하기 위한 충분한 경제적 요건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 예로, AIDS를 치료하기 위한 3단 요법에 드는 비용은 현재 연간 미화 3,500달러 정도에 이르는데, 사하라 남부 아프리카 지역의 1인당 GNP가 1,500달러에 불과하다. 여기에 AIDS 합병증을 치료하기 위해 필요한 결핵약, 항진균제 등을 포함시킨다면 그 비용은 어마어마해지게 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렇게 높은 약값의 대부분은 지적재산권에 의해 보호되는 독점적 판매권한에 의해 형성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남아공 정부는 앞에서 이야기한 법률을 통과시키게 된다. 법률에서 의약품과 관련된 주요한 골자는 강제실시권과 병행수입을 허용하는 것이었다. 이 조치는, Ralph Nader에 따르면, "(생산원가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미국에서 개발되어 판매되고 있는 의약품 가격을 70-95% 낮출 수 있는 획기적인 것"이었다.
강제실시권이란, 국가가 공공적 목적 등을 위해 특허권자의 사전동의없이 그 특허권을 국내에서 강제적으로 실시할 수 있게 하는 권한이며, 병행수입은 세계시장의 약가 차이를 이용하여 자국 내에서 특허를 가지고 있는 약물 대신 다른 나라에서 더 값싼 같은 약을 수입해오는 것이다. 이것은 각종 국제법과 국내법, 대표적인 예로 미국의 '독점방지법' 등에 근본적으로 포함되는 내용이며, WTO의 '무역관련지적재산권협정'에서도 8조(강제실시권)와 6조(병행수입) 등에 명시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9개의 다국적 제약회사는 WTO 위반이라는 명목으로 남아공을 제소한 것이며, 제약회사에게 그 정치자금의 많은 부분을 의존하고 있는 미 정부도 또한 이에 적극 지원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AIDS/HIV감염증과 관련된 보건의 문제는, 비단 의약품 가격의 문제만은 아니다. 예를 들어, 남아공의 빈민들에게는 태아에 대한 수직감염을 방지할 수 있는 제왕절개술을 실시할 만한 의료자원이 공급되지 않으며, 제왕절개술을 실시한다고 하더라도 분유를 태워먹일 물이 없어 모유를 통해 또다시 감염되고 있는 형편이다. 다른 여타 건강의 문제와 마찬가지로 남아공의 AIDS 문제도 사회/경제적 상황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는 것이 확실하지만, 이것의 한축으로 특허권에 의한 독점적 권리의 보호문제도 있는 것이다. 의약품의, 제약회사에 의한 상업적 권리를 더더욱 강화하는 지적재산권과, 좀더 근본적으로는 환자의 요구와 필요가 아니라 상업적 이윤에 의해 개발/생산/유통되는 현재적 의약품 시장에 대한 적극적인 문제제기가 필요하다.

정혜주(민중의료연합, 투자협정·WTO 반대 국민행동 정책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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