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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바다 권오일 이야기

사회복지시설에서의 비리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지만 그 심각한 문제가 제대로 해결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사회복지시설이 워낙 폐쇄적으로 운영되는데다가 지역토호세력들과 거대한 카르텔을 형성하며 그 비리를 감추고 있기 때문이다.

평택에 있는 에바다복지회 역시 마찬가지였다. 최성창 일가에 의해 장악된 폐쇄적 족벌운영과 상상을 초월하는 각종 비리, 그를 엄호하는 지역의 거대한 동맹세력들로 인해 비리재단 척결과 정상화라는 과제는 험난한 과정이었다.

그들은 7년을 싸웠다. 그 7년은 지옥의 7년이고, 행복의 7년이고, 전쟁의 7년이었다.

그 7년의 얘기를 듣기 위해 에바다학교 권오일 동지를 만났다.

 

권오일은 40대 후반의 나이와 7년의 힘겨움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매우 젊고 활기찬 얼굴과 모습을 보여줬다. 경북 청송출신이라 말하는 도중에 잠깐씩 경상도 억양이 섞여 있기는 했지만 입담이 좋아서 얘기를 듣는 도중 몇 번이나 손뼉을 치면서 웃어야 했다.

학교 다닐 때부터 탁구를 해왔던 권오일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구미에 있는 인동초등학교 탁구코치를 하고 있었다. 그때 그 학교 어머니회장 아들이 농아였는데 저녁에 탁구 개인지도를 하게 된 것이 농아와의 첫만남이었다. 81년은 UN이 정한 세계장애인의 해였고,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장애인체전이 열리기도 했다. 장애인체전에 권오일이 가르친 그 어머니회장 아들이 출전해 금메달을 따면서 권오일은 장애인들도 어릴 때부터 제대로 지도를 하면 일반학교 학생들과도 경쟁이 가능하겠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82년 8월 권오일은 학교를 갑자기 그만두고 대학을 가지 위한 준비를 하게된다. 그러나 당시 학력고사를 두 달 반 밖에 남겨두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때 사지선다였으니까 한 번호만 찍으면 사분의 일이 맞는데, 사분의 일 맞아가지고는 대학 들어갈 방법이 없거든요. 그래서 머리를 어떻게 썼냐 하면은... 그 당시에 예비고사 학력고사 14년간 나왔던 문제집을 사가지고 뒤에 나와 있는 정답란을 보면서 주판으로 며칠 동안 데이터를 냈어요. 몇 번이 확률이 높으냐... 그래서 수학이 11223344 제일 많으니까 그것을 반복... 문제지 보지 않고 답만 썼는데, 그게 50% 맞았어요. 그게 50점 만점에 24점 나왔거든요. 영어도 그렇게 해서 절반 가까이 맞았어요.

국어시험 같은 경우는 세 개를 문제지에 체크해놓고 답안지에 옮겨 적을 때 잘못 옮겨 적었어요. 그 세 개는 맞는 것이라 생각해서 기억하고 있었는데, 그날 저녁에 방송에서 문제풀이를 보는데 잘못 적은 세 개가 다 맞아버렸어요.”

(이 얘기를 들으면서 한참을 웃었다.)

 

그렇게 학력고사를 치르고 경북대 체육과에 지원을 했지만 실기시험을 앞두고 발목과 무릎, 허리를 다쳐 떨어지고, 후기로 대구대 특수교육과에 입학하게 된다. 입학하자마자 1개월 반 만에 나이문제로 입대를 한다. 졸업 후 부산과 안동 등에서 교직생활을 하고 있던 가운데 93년 당시 에바다학교 교감선생님이 탁구를 제대로 키워보자고 해서 에바다로 오게 된다.

그러나 에바다학교에서는 탁구부에 대해 특별히 지원하지 않아 권오일이 자비를 떨어가면서 학생들을 가르쳐야 했다. 그런 가운데도 94년 일반학교 학생들이 참가하는 전국대회에 나가서 3위로 입상하는 성공을 한다. 그를 이어 95년에는 장애인체전에서 금메달을 따기도 하는 등 에바다학교 탁구부가 외부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에바다학교의 반응이 이상했다.

 

“그때 외부에서 독지가들이 탁구 후원해주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기자들이 찾아오고 그랬어요. 나중에 사태 터지고 이해한 것인데... 워낙 비리가 많으니까 학교 알려지는 거 자체를 두려워했던 거예요. 탁구 전문잡지에서 학생들 훈련하는 거 취재하러 왔는데, 교문 막고, 덩치 큰 사람들 보내가지고 못 들어오게 밀어내고...”

 

상식이 통하지 않는 에바다에서 권오일은 96년 갑작스럽게 파면통보를 받게 됐고, 탁구부는 해체된다. 너무나 상식이하의 일이었기 때문에 교육청의 원상회복 지시로 권오일은 복귀를 하지만 탁구부는 당분간 운영되지 못했다.

 

1964년 미국인 선교사에 의해 세워진 보육원을 1984년 기증받은 최성창 목사가 모금 등으로 만든 것이 에바다농아원이다. 이후 86년 에바다학교가 정식승인을 받게 되면서 에바다복지회에는 에바다학교, 에바다장애인종합복지관, 에바다농아원이 운영된다.

워낙 비리와 인권유린이 비일비재했던 에바다에서는 96년 이전에도 이미 다섯 번의 농성이 있었다고 한다. 학생들이 세 번, 교사들이 두 번에 걸쳐 농성을 했지만 그때마다 재단의 탄압으로 농성은 실패하곤 했다.

96년 당시 농아원생 80여 명을 포함해 120여 명이 에바다학교를 다니고 있었던 상황에서 춥고 배고픔에 시달린 농아원생 26명이 96년 11월 27일 새벽 5시에 농아원에서 기습농성을 벌이게 된 것이 7년 싸움의 시작이었다.

 

“그때 애들이 농성 시작해서 5분만에 경찰이 출동해서 수갑을 채우고, 수갑이 부족하니까 노끈으로 굴비 엮듯이 묶어가지고, 200미터 정도 떨어진 파출소까지 26명을 전원 연행해 갔어요. 가면서도 무자비하게 두들겨 패고, 파출소 안에서도 권총을 가슴에 들이대면서 두들겨 패고 그랬대요. 그래가지고 26명 중에 23명이 다치고, 3명이 병원에 입원하고 그랬어요.

우리는 아침에 그 상황까지는 몰랐고, 출근하니까 최성창 당시 교장이 교무회의 시간에 ‘이런 일로 학생들이 붙잡혀 갔는데, 교사들 중에 누구든지 여기에 관여를 하면 가만 안두겠다’ 그러더라고.

이놈들이 애들을 무자비하게 두들겨 패면서 수사하다 보니까 대통령에게 탄원서를 보냈다는 말을 듣고 급히 내보낸 거예요. 3명은 병원에 입원해 있고, 애들은 여기저기 다쳐서 교실에서 울고 있더라고요. ‘왜 우냐’ 그러니까 경찰이 두들겨 팼대요. 그래서 ‘잠깐 기다려봐’ 그러고 다른 교실에 돌아보니까 곳곳에 애들이 울고 있어요. 그래서 수업시간에 전체 돌면서 ‘지금 수업이 중요한 게 아니다. 모여서 대책 논의하고, 경찰에 항의방문이라도 들어가자’ 그래서, 그 때 당시에 교장과 교감 빼고 교사가 21명이었는데 11명이 모였어요. 11명의 선생님들이 모여서 ‘애들 이야기 들어보자’ 그래서 애들을 모아놓고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진짜 교사로서 부끄러움을 많이 느꼈어요.

그 얘기 듣고 11명의 선생님들이 2시간 정도를 격론을 벌였거든요.

우리가 여기에 개입을 하면 파면 해임이 문제가 아니다. 이 정도의 비리내용이라면 단순히 돈 때먹은 것만이 문제가 아니고, 경찰 검찰 시청 할 것 없이 연결돼 있는데, 우리가 싸우면 사법기관 행정기관들이 자기들 모가지 지키기 위해서 우리를 집어넣을 거다. 우리가 그런 정도까지 각오를 해야 이 싸움에 개입을 할 수 있는 거지, 괜히 어설프게 나섰다가 중간에 겁나다고 그래서 발을 빼버리면 말이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나설 거냐.

그렇게 했는데 결론에 가서는... 우리가 여기에 모른 척하면 우리의 목은 지킬 수 있다. 그러나 평생 양심의 가책을 갖고 살아갈 거다. 제2 제3의 에바다 농성은 계속 일어날 수밖에 없는 사회인데, 여기서 우리가 발을 빼버리면 우리 목은 안전하게 지킬 수 있지만, 어디서 무슨 사건이 터졌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 목 지키기 위해서 제자들이 용기를 내서 고통스럽게 농성하는데 외면했다는 양심의 가책을 받고 살아갈 거다. 그럴 바에는 구속이 되더라도 재판정에서 당당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게 애들을 위하기보다는 차라리 우리를 위한 거다.

그래서 11명이 만장일치로 개입하자 결정하고 막바로 성명서를 냈어요.”

 

학생들을 통해서 알게 된 내용과 이후에 농성과정에서 알게 된 에바다의 비리내용은 ‘비리의 종합백화점’이었다.

 

“농아애들 70여 명을 미국으로 돈 받고 팔았어요. 해외입약이라고 그러지만 돈 받고 팔았으니까 인신매매죠. 고아들 같은 경우는 쉽게 넘긴 거고, 부모들이 있는 경우는 부모들에게 ‘병신 자식 대리고 있으면 뭐 할 거냐. 미국가면 잘 먹고 잘 산다’ 그런 거죠. 그중에 3명은 병원에서 갓 태어난 신생아였어요. 또 사망, 실종, 변사체 발견이 6건이 있어요.

이 옆에 책 만드는 제본공장이 있었어요. 거기에 어린애들 새벽까지 강제노동 시키고, 시청에 보고할 때는 한 달에 60만원 준다고 그랬는데, 정작 애들은 그게 있는 줄도 모르고... 강제노동 시키고, 말 안 들으면 두들겨 패고...

동양매직에서 대형세탁기 4대를 보냈는데, 기증딱지를 때버리고 사진 찍어서 시에는 지원금을 샀다면서 돈 받고, 이것은 자기네 형제들 하나씩 다 나눠가졌거든요. 그렇게 하니까 애들은 추운 겨울에도 손빨래를 해요. TV나 선풍기 같은 거 몇 십대 씩 새거로 들어오는 데 2~3일 지나면 하나도 없어요. 전부다 뒷거래로 넘겨버리고...

아무튼 끝도 없이 많은 폭력사태들이 있었고... 애들이 농성을 시작하게 된 것은 비리가 있고 없고 보다는 당장 춥고 배고팠던 거예요.”

 

학생들의 농성에 교사들이 결합하자 학교측에서는 이를 교사들의 사주로 몰아가기 시작했고, 농성장에 대한 물리적 침탈이 계속됐다. 그런 과정에서 농아원 안에서의 농성을 유지하기 어려운 학생과 교사들은 농아원 밖으로 농성장을 옮겼지만 이마저도 계속된 침탈 속에 7번이나 농성장을 옮겨다녀야 했다.

또 폐쇄적인 학교 안에서 출근하는 교사들에게 이뤄지는 폭력을 상상을 초월했다.

 

“교문 들어오는 게 도살장 들어가는 기분이에요. 교실에 들어가면 창문까지 다 잠궈 버려요. 그리고 새까맣게 붙어가지고 여선생 남선생 가릴 것 없이 머리채 잡고 끌고 다니면서 콘크리트 바닥에 찧어대기도 하고, 똥 오줌을 뒤집어씌우는 날도 있고, 어떤 날은 커피포트에 끓고 있는 물을 붇기도 하고, 임신 6개월 여선생님이 배와 가슴을 맞아서 실신해서 병원에 입원하기도 하고, 임신 9개월의 만삭인 여선생님이 교문까지 질질 끌려가기도 하고... 경찰들은 보면서 웃고 넘어가요.

맨날 이 교실 저 교실, 밖으로 복도로, 몇 십 명한테 끌려 다니고... 그렇다고 출근 안할 수는 없거든요. 그걸 거의 매일 당해야 하니까... 요즘도 선생님들이 발자국 소리 크게 나면 깜짝 깜짝 놀라거든요.

애들끼리 북한의 5호담당제처럼 서로가 감시를 해요. 그렇게 안하면 손목에 담뱃불로 지져버려요. 어떤 애는 손목에 담뱃불이 7개나 지져져 있었어요. ‘선생을 때려라’ 그래서 안 때리면 손목에 담뱃불로 지지고 몽둥이로 두들겨 패고 하니까 애들이 살아남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거예요. 그런 짓거리들을 몇 년을 걸쳐서 했으니까... 아후~ 학교 들어오는 게 정말 끔찍했어요.

이놈들도 때리고 싶어서 때리는 것이 아니니까 얼굴도 제대로 못 마주치고 때려요. 밖에서 눈 딱 마주 치면 우선 주변부터 살펴가지고 아무도 없으면 막 미안하다고 그러고 사과를 하는데, 큰애든 작은애든 누구라고 한 명이 보이면 욕하고 가야돼요. 그게 차라리 다른 사람들이라면 머리가 터지더라고 괜찮은데, 이 놈들이 때리는 저들도 괴로워하면서 때려야 하니까...”

 

사건이 발생해서 학생, 학부모, 교사들로 대책위가 만들어지고, 당시 복지관에서 막 결성된 노조가 이에 합류한다. 또 한 달 만에 평택지역대책위가 구성돼 활동에 들어간다.

이런 상황에서 엄청나게 충격적인 비리가 드러나면서 최실자 당시 농아원장이 긴급구속 되지만 이는 단순 무마책이었다. 학교 안과 밖에서는 엄청난 폭력과 압력이 계속 이어진다. 그나마 최실자 마저 97년 6월에 병보석으로 풀려난다.

지역차원의 대응을 전국으로 확산시키기 위해 97년 1월 10일부터는 농성장을 서울로 옮기고 장애인단체와 인권단체, 종교단체 등으로 전국적 공대위를 구성하게 된다.

 

“처음에 서울에서 농성할 때는 교사들은 출퇴근 했고, 애들은 수업거부 한거죠. 그때 아침에 4시 반되면 선생님들이 일어나고, 첫차 타고 내려와서 출근하고, 퇴근하면 서울 올라가요. 올라가면 부모님들이 올라오셔서 새벽 두 시까지 있다 가시고, 회의하고 자료 만들고 하다보면 새벽 두 시 전에 자본 적이 없어요. 그러고 새벽 네 시 반 되면 일어나야 하고. 5~6개월을 그 생활을 했거든요. 학교 오면 매일 두들겨 맞지... 요즘 생각하면은, 누가 돈 주고 다시 그 생활을 하라면 못 할 거 같아요.”

 

서울에서의 농성을 정리하고 97년 6월 2일 다시 평택으로 내려와 지역거점을 마련하게 된다.

그 당시 시민단체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평택지역대책위는 지역세력들의 압박 등으로 활동력이 제약되는 상황에서 해산논의를 하고 있었다. 이에 당사자들은 해산만은 말아주기를 바랐지만 결국 대책위는 해산을 결정하고, 싸움을 계속 해야 한다는 세력들을 중심으로 지역공대위를 구성하게 된다. 이 공대위는 민주노총 평택지구협의회와 평택민주노동자회 등 노동단체들이 중심에 서게 된다. 하지만 상황의 진전이 없이 시간만 계속 흘러가자 공대위도 조금씩 지쳐가지 시작했다.

 

“97년말에 ‘에바다 대학생 비상대책위원회’라고 해서 전국의 특수교육과나 장애인동아리들을 중심으로 해서 비상대책위원회가 만들어졌어요. 그걸 만들면서 첫사업으로 겨울에 평택역 앞에서 천막농성을 했거든요. 그때 1년 정도 지나는 과정이었는데, 지역의 공대위가 너무 오래 싸우다보니까 힘도 빠지고 끝도 안보이고 그러니까 지쳐있는 상황이었어요. 그런 상황에서 대학생들이 요일별로 맡아서 공연도 하고 서명도 받고 그러는 것이 계기가 돼서 지역의 단체들이 다시 활성화가 됐죠.

이 학생들이 98년 여름에 명동성당에서 천막농성을 진행하면서 참여연대, 민주노총, KNCC 등 33개의 단체들이 모여서 ‘에바다 정상화를 위한 연대회의’가 만들어졌어요. 그러면서 크게 대학생연대회의, 중앙연대회의, 평택공대위로 움직인 거죠.”

 

이런 과정을 통해 다시 에바다투쟁은 활성화된다.

특히 대학생들과 중앙연대회의 활동은 각 지역과 국외에서도 자발적 활동들을 조직하는 등 매우 왕성한 활동력을 보여줬다. 평택과 서울 등 수도권은 물론이고, 원주, 제주, 대구 등에서도 다양한 연대활동이 진행됐고, 해외인권단체에서도 농아들에 대한 인신매매문제를 중심으로 연대움직임이 일기도 했다. 이런 활발한 연대활동으로 언론에서의 관심들도 높아져 지역과 중앙언론에서도 여러 차례 보도되기도 했다. 심지어 당시 MBC에서 인기리기 진행되던 ‘칭찬합시다’라는 프로그램에도 출연하는 등 언론활동은 분위기를 반전시키기는 데 매우 중요하게 작용했다.

 

또한 97년 6월 평택으로 농성장을 다시 옮기면서 지역거점으로 자리 잡은 해아래집은 이후 투쟁의 상징이 돼 버렸다. 냇가 옆에 식당으로 쓰던 건물을 빌려서 농성장겸 원생들의 숙소겸 생활공간으로 이용됐다.

초반에 시청과 경찰 등에서 집주인에게 압력을 많이 넣었지만, 쌍용자동차 노조간부 출신이었던 집주인은 그런 압력에 완강히 버텼다.

 

“사태가 발생하면서 같이 농성하던 11명 선생님들이 매달 40만원씩, 많이 낼 때는 70~80만원씩 낼 때도 있고... 그때는 학생들이 70명 가까이 됐으니까 돈도 많이 들고, 계속 집회하고 유인물 만들고 그랬으니까... 그렇게 하다가 IMF가 떠지고 하면서 너무 힘들어 하니까 20만원씩으로 줄였어요.

후원은 공대위하고 대학생 중심으로 지로를 개설해가지고 2천원 3천원씩 내는 사람도 있고 많게는 5만원씩 내는 단체도 있었죠. 한 달에 300만원씩 이어져 나오다가 IMF 터지면서 70만원으로 줄어들었어요. 그때 너무 힘들었죠.

결혼하시지 않은 여선생님 세 분이 상주하고, 저는 그 앞에 집 얻어서 살고 그랬어요. 운영은 굉장히 자율적으로 했어요. 자율적이라는 것이 말로만 자율이 아니고, 실제 애들 중심으로 자기들이 다 의논을 하고, 교사들은 옆에서 조언하는 부분을 담당을 하고... 그러다보니까 애들이 어떤 일이 생기면 자기들 스스로 결정할 줄 알고, 거기에 책임질 줄 알고...

우리가 투쟁하는 동안에는 주말이나 휴일에 거의 빈틈없이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고 하는데, 오는 사람들마다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애들이 너무 밝게 지낸다’는 거예요. 외부에서 손님들이 오면 사회복지시설 애들은 일반적으로 싫어해요. 와서 사진 찍고, 먹을 거 조금 내놓고는 온갖 생색 다 내고, 교회에서 오면 나와서 기도해야 되고... 그런데 우리 같은 경우는 사람들이 오면 피곤한 애들은 자도록 내버려 둬요.”

 

해아래집에서의 행복한 시간은 학교에서의 지옥과 같은 시간과 결합됐다.

 

“우리가 애들에게 ‘때리면 맞아라. 절대 대응하지 말아라. 너희가 뜻이 옳았던 만큼 행동 바르게 해야 한다’ 그랬어요. 애들 말로 반대선생이라고 그러는데, 재단측 선생들 있죠. 애들이 선생님보고 인사를 하면 인사도 안받고 그런다고 해아래집에 오면 울어요. 그래서 일단 학교에 등교하기 전에 교회에 들려가지고 기도를 하고, 그리고 애들한테 ‘오늘 학교에 가서 선생님이 인사를 안 받으면 오늘은 더 숙이고, 내일은 더 숙여라. 언젠가는 자기들이 부끄러워서라도 인사를 받을 거다. 그리고 재단측 애들이 때리면 절대 대응하지 마라. 매일 맞으면 계속 때리진 못할 거다. 며칠만 고생해라. 뜻도 옳은 만큼 행동도 바로해라. 학교에 청소당번이 아니라도 너희가 먼저 쓸고 딲고 해라’라고 거의 세뇌시키다시피 했어요.

애들이 교실에서 자기들 보는 앞에서 선생님이 끌려 다니고 그러면 괴롭잖아요. 유도를 잘 하는 애가 있는데, 제가 맞는 것을 보고 견디다 안되니까 한 애를 확 밀어버린 거예요. 그러니까 4명이 파바박 하면서 쓰러지더라고요. 제가 되게 야단을 쳤죠. 내가 그만큼 얘기를 했는데 말을 안듣냐고, 차라리 보기 힘들면 교실에서 나가라고 그랬죠.

하루는 해아래집에 선생님들이 있는데, 애들이 오다가 동네에서 맞았나봐요. 다 큰 놈들이 눈이 벌것게 돼서 웃으면서 오드라고요. ‘오늘 삼거리에서 맞았는데 같이 안 때리고 참고 왔다’고 웃으면서 들어오는데... 애들이 대견스럽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고...(이 대목에서 권오일의 목소리가 떨리고 잠시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부부가 같이 에바다 교사였던 권오일 부부는 7년의 투쟁동안 투쟁동지였다. 투쟁 초기 임신6개월이었던 부인은 재단관계자에게 복부를 맞아 병원으로 실려가기도 했고, 부부가 동시에 파면과 해임을 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권오일은 그에 대한 얘기를 아주 짧게 흘러가는 얘기로 그쳐버렸다.

 

장기간 계속되던 투쟁은 98년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며 반전의 기미가 보이는 듯 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이런 저런 자리에서 에바다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의지를 보였고, 실제 이런 저런 형태로 움직임이 있었다.

하지만 감사원 감사는 중재를 통한 문제해결로 진행되다가 엉뚱한 보고서를 올리는가 하면, 정부 관계자들의 구두약속은 번번이 공수표로 나타났다. 이에는 지역토호세력들의 완강한 저항과 당시 공동정부를 형성하고 있던 자민련의 영향력이 작용했을 것이라고 권오일은 보고 있었다.

87년과 98년 연속으로 국정감사에서도 다뤄지는 등 에바다 문제가 계속 여론의 관심을 갖자 결국 98년 이성재 의원을 이사장으로 하는 관선이사가 파견된다. 그에 따라 이사회는 여야 국회의원 3명, 재단측 이사 3명, 중립인사로 평택대 김범수 교수가 참여하는 구조로 구성된다. 그러나 김범수 교수는 당시 재단측과 연관돼있다는 의심을 받고 있었고, 새로운 이사회는 재단비리의 핵심세력들을 요소요소에 발령하면서 공대위와 갈등을 벌이기도 한다.

 

“이사회가 2000년 3월에 임기가 끝인데, 김범수 교수가 임기 끝나기 직전에 사표를 내버린 거예요. 사표를 내버리니까 3:3이 되잖아요. 그러니까 할 수 있는 게 없는 거예요. 임기가 끝났으니까 우리는 시청에다가 이사들 선임 제대로 해라 그랬죠. 게들(시청)은 최성창이를 집어넣으려고 그랬어요. 시청에서 우리에게 제안했던 거는 우리측 7, 재단측 6, 이사장은 우리한테 주고, 상임이사는 저쪽으로 가고. 그런데 거기에 최성창이 들어있는 거거든요. 그래서 우리는 ‘백 명 중의 한 명이라도 최성창은 안된다’ 그러면서 밀고 당기고 하고 있었죠.

그래서 5월말까지 싸우다가 나중에 시에서 일방적으로 발표를 해 버렸어요. 2000년 6월 5일자로 시청 앞에 텐트를 치고 싸웠어요. 6월 28일 시에서 최성창이를 넣어서 발표를 해버린 거예요. 그러니까 야단이 났어요. 우리쪽 장애인단체에서 온 사람이 갈비뼈 부러지고, 거기가 온통 쑥대밭이 되고, 완전히 다 이성을 잃어버렸어요. 시청 바닥이고 벽이고 전부 울긋불긋하게 스프레이로 욕도 써넣고, 대대적으로 붙어서 엄청 다쳤어요. 정보과장하고 정보과 형사들에게 휘발유를 뿌리고, 한 명은 분신한다고 불 붙이려고 하고... 밤새 난장판이 됐어요.”

 

이후 삭발과 단식농성 등으로 시청의 일방적 방침을 철회하려 했지만 그를 이루지 못하고 8월 중순 텐트농성을 정리하게 된다.

5:2로 절대적으로 불리한 이사회 구조를 바꿔내기 위해 공대위는 재단측 이사들 간의 대립을 이용했다. 당시 재단 형제들간에 매우 사이가 좋지 않은데다가 재단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한 대립이 극심한 상황이었다. 이를 이용해 한쪽 이사들을 집요하게 만나면서 설득을 하기 시작한다.

그 결과 2001년 3월 2일 이사회에서 공대위측 이사를 3명 추가하는데 성공해 이사회 구성은 5:5비율을 이루게 된다. 이에 뒤통수 받은 재단측 반대파에서 공대위와 함께 한 이사를 매우 격하게 공격하자 이사직을 사퇴하는 일이 발생했다. 그에 따라 자연스럽게 이사회 구성은 4:5로 역전됐고, 이사회 구성이 역전된 상황에서 공대위는 이사를 추가로 선임해 4:9비율로 이사회 구성을 바꿔낸다. 재단측에서 소송을 제기했지만 법원에서는 적법하다는 판결을 내림으로서 이사회 구성을 민주화시키는데 성공한다. 이후 2003년 7월 12일부로 재단측 이사들의 임기가 만료되면서 자연스럽게 이사회는 전원 공대위측 이사로 구성된다.

 

그러나 농아원과 학교는 최성창의 의해 장악되 있는 상황이어서 이사회 민주화는 반쪽의 성과였다. 현장을 장악하지 않고는 이사회만으로 에바다를 정상화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당시 최성창은 법원으로 출입금지가처분 등의 결정을 받았지만 경찰 등의 비호 속에 현장을 계속 장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2002년 5월에 진입투쟁을 벌이지만 원생들을 동원한 물리적 저지에 막혀 실패한다. 2002년 7월에 다시 진입투쟁을 벌여 진입에 성공하지만 막바로 이어진 물리적 폭력에 밀려 다시 쫓겨나게 된다. 그리고 에바다 학교 앞에서 텐트농성을 벌인다.

당시 공대위는 장애인을 건들면 역공을 당한다는 이유로 물리적 대응을 자재했다. 그러나 두 차례 진입투쟁 과정에서 물리적 대응을 하지 않고 합법적 방법으로는 현장탈환이 어렵다는 결론을 얻게 된다.

2003년 노무현 정부가 들어서자 다시 에바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계기가 생긴다. 새롭게 내려온 평택경찰서장은 에바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경찰 입회하에 합법 이사가 현장에 들어간다는 중재안을 내놓기도 했다. 그러나 재단측에서 갑작스럽게 교문을 막아버리자 공대위에서 실력으로 교문을 뚫고 들어가게 된다.

 

“들어가니까 본관 2층에 최성창이가 들어앉아 있는 거예요. 그때 70명인가 들어왔는데... 전경들 여기저기에 쫙 깔려있고... 평생 잊지 못할 장면인데... 누군가가 튀어나오면서 ‘안에 최성찬!’이러는데... ‘창’자가 떨어지기가 무섭게... 훈련을 받아도 그렇게 순식간에 움직이기가 어려울거예요. 그게 참 감동적이기도 하고... 사람들이 최성창이라는 사람에 대한 생각들이... 저놈 끌어내야 한다는 생각이 얼마나 간절했으면... ‘최성창’그러니까 ‘창’자가 떨어지기 무섭게 사람들이 거의 날아들었어요. 경찰들이 계단 옆에 지키고 서 있었거든요. 워낙 빨라버리니까 막으려고 하는 사이에 다 들어가 버린 거예요.

들어가서 문을 잠가 놓고 있으니까 창문 다 부숴버리고 멱살 잡고 끌어내는데 야단판이 벌어졌어요. 앞에서 끌고 나오고, 뒤에서 따라 나온 사람들이 최성창이 한테 울면서 ‘사백만 장애인 앞에 꿇어앉아 빌어라’ ‘너 한 사람으로 인해서 칠년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 받았는지 아느냐’ 그러면서... 여기저기 끌고 나오는 사람이나 따라 나오는 사람들이 막 울부짖고 굉장했어요.”

 

그러나 최성창은 그날 자정쯤 경찰의 도움으로 다시 건물 안으로 피신하게 되고 1주일간 경찰을 사이에 두고 구재단측과 공대위간의 대치가 이어진다. 이 과정에서도 평택지역출신 경찰들은 신임 경찰서장에게 허위보고를 하면서 최성창을 보호하려 했지만, 워낙 명분이 없는 상황에서 1주일만에 최성창은 연행되기에 이른다.

그렇게 어렵게 장악한 현장도 4일만인 2003년 6월 7일 새벽에 구재단측 세력 60여 명이 침탈을 시도해 빼앗길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새벽 침탈에 맞서 현장에 있던 소수 인원은 격렬히 저항하면서 시간을 벌고 긴급 연락을 받은 공대위 사람들이 20분 만에 달려오면서 현장을 지켜낸다. 구재단측의 물리적 침탈이 계속 예상되는 상황에서 2003년 연말까지 사수조를 계속 유지하면서 현장을 지켜나가야 했다.

 

상상을 초월하는 지역토호세력들의 거대한 카르텔에 맞선 7년간의 장기투쟁은 투쟁주체들간에 무한한 신뢰를 바탕으로 했다. 그래서 권오일은 얘기 과정에서 진정성을 몇 번이나 강조했다.

 

“내부주체들은 가서 상황설명하고 호소하고, 지역의 연대틀을 실제로 꾸려나가는 것은 민주노총 지구협이 중심이 되가지고 계속 이끌어냈고, 중앙단체 연결하는데도 지구협이 많은 역할을 했어요.

민주노총 지구협 사무차장을 맡고 있는 김은천 동지 같은 경우는 지구협 내에서도 ‘에바다 신경 쓸 시간 있으면 전화 한 통 더 받아라’ 그런 이야기를 들을 정도로 너무 에바다에 집중하는 거에 대한 비판을 받기도 했어요. 그러나 그런 부분은 잠시였어요. 김은천 동지 같은 경우는 해아래집에서 1년을 상주했어요. 해아래집에 생활하면서 지구협 출퇴근하고... 우리 에바다 입장에서는 그게 굉장히 중요한 계기였어요. 그렇게 되니까 지역에 우리 에바다 상황을 알리고 하는 일이 우리가 막 따라다니면서 하지 않아도 김은찬 동지가 계속 투쟁을 이끌어가고...

지역의 ‘지역이 에바다를 도와준 것이 아니라 에바다가 지역을 도와줬다’는 얘기를 많이 해요. 어떤 사안이든지 지역에서 운동하는 단체들이 각자 자기생각 가지고 할 수 있는데, 에바다라는 틀을 가지고는 단체들이 다 똑같은 생각이예요. 어떤 성향을 가졌든지 간에 에바다가 투쟁하는 동안에는 다들 똘똘 뭉쳤거든요. 이견이 거의 없었고... 이런 경우가 거의 없는 경우라고 하더라고요. 지역운동에서 에바다가 결과적으로 미쳤던 영향들은... 지역에서 연대하는데 있어서 서로를 이해하는데 상당한 역할을 했다는 얘기를 자주 하더라고요.

이 투쟁에 어떤 이념이나 노선 이런 게 있는 게 아니고, 어린 학생들이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고 고통을 받으면서 들고 일어난 것에 대해서 ‘이런 일은 해결해야 된다’ ‘평택지역에서 이런 사건을 해결하지 못한다면 지역에서 우리가 운동한다고 얘기할 수 있느냐’ 이런 순수한 마음들이 작용을 했었던 것 같아요.

또 능력은 없지만 내부 3주체라고 할 수 있는 학생, 학부모, 교사들이 7년간 계속 버티니까... 외부에서도 열심히 투쟁하다가 오래가니까 지치거든요. 힘이 빠져서 활동 하는지 안하는지 모를 정도로 있다가 계속 버티고 있으니까... 또 어느 순간에 어떤 계기가 생기면 다시 또 왕창 붙다가... 이런 게 반복되는 과정들이었어요.

우리 내부 학생, 학부모, 교사들이 7년을 싸우면서도 투쟁에 대한 방향이라는 이런 문제 갖고 얼굴 붉힌다거나 이런 경우는 거의 없었어요. 처음에 사건 터졌을 때 학생들이 선생들에 대한 신뢰가 확고했었어요. 그 신뢰가 바탕이 됐던 거고. 부모님 같은 경우는, 처음에 농성을 시작하면서 선생님들끼리 그런 얘기를 했어요. 특히 부모님들 상대로 우리가 굉장히 신경을 써야 한다. 이 싸움이 시간이 걸리다보면, 처음에는 ‘선생님 고생하십니다’ 그러지만 그 ‘고생하십니다’가 언제까지 갈지 모른다. 우리가 부모님들에게 ‘역시 우리 선생님들은 어딘가 다르구나’하는 인식을 심어주지 못하면,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서 뒤죽박죽되는 일이 생길수도 있기 때문에 부모님들에 대해서는 우리가 초기에 상당히 신경을 썼어요. 투쟁외적으로 개인적으로 어려운 일이 생기면 서로가 힘써가지고 도와주고 이러면서 선생이다 학생이다 부모다 이런 거 보다는 거의 한 가족처럼 지냈어요.

저나 우리 선생님들이 투쟁하는 과정에서 누구를 상대하든지간에 최대한 진정성을 가지고 대했어요. 누구든지 ‘이 사람들이 잔머리 굴리고 있다’ 이런 생각 들게 하면 안되니까... 정말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들어야 되기 때문에... 우리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해서 성심껏 대하고 순수하게 대하려고 애를 쓴 부분들도 있어요.”

 

이사회는 민주화시키고 현장을 탈환한 후 에바다를 정상화시키는 과정에서 고민스러웠던 것은 구재단측과 연계돼 있었던 직원과 교사들에 대한 처리문제였다.

 

“이사진 개편되는 과정에서 구재단측 친인척들은 자연스럽게 제거가 됐어요. 제가 2003년 9월 1일자로 교감이 됐거든요. 교감이 되면서 회의시간에 두 차례 ‘대한민국이 다 아는 도둑놈들에게 빌붙어서 그 짓 하느냐’면서 굉장히 엄하게 야단쳤어요.

굉장히 심각한 한 사람을 해임시켰어요. 그 사람이 소송까지 다 걸었는데 해임이 결정났어요. 회의시간에 그 사람에 대한 판결문을 읽었어요. 그리고 ‘당신들을 해임 못시켜서 그냥 두는 게 아니다. 앞으로 에바다 발전하는 과정에서 지난날에 도둑놈에게 빌붙어서 그런 악한 짓을 한 것에 대해서는 뼈저리게 반성해라. 앞으로 이 문제에 관해서 공개석상에서 더 이상 거론하지 않겠다. 단 에바다 발전에 같이 동참하고 협조한다는 전제하에서 그리 한다’ 그랬어요. 그 후 6개월 정도까지는 이 사람들이 반신반의한 거예요. 저에 대한 두려움이랄까 이런 것도 있었거든요. 오히려 우리 투쟁했던 선생님들보다 더 편하게 해줬어요. 1년쯤 지나고 나니까 우리 진정성을 느끼는 것 같더라고요. 물론 아직까지 정서적인 것이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았는데, 옛날에 골 깊었던 것에 비하면 거의 문제없다할 정도로 잘 풀어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7년 동안 투쟁하는 과정에서 ‘언젠가는 이 투쟁을 이긴다. 그것도 완벽하게 이긴다’라고 무식하다고 싶을 정도로 그렇게 생각했어요. 우리가 이겼을 때 저 비리재단에 빌붙어 있는 사람들 다 쳐낼 수는 없다. 우리가 싸운 목적이 학생들에게 좋은 교육적 환경을 만들어주겠다는 것인데, 선생들끼리 나누어져가지고 으르렁거리면 애들한테 피해가 가고 그러면 우리가 싸운 목적이 없어지는 거다. 언젠가 우리가 이 싸움이기면 승자가 손을 내밀지 패자가 손을 내밀 수는 없다. 승리했을 때 대비해가지고 우리는 꾸준히 베풀자 그랬어요. 그래서 7년 동안 저 사람들이 꾸준히 우리를 괴롭히고 그랬어도 우리는 그 사람들 문제 있으면 도와주고 그랬어요. 남들 보면 속도 없는 사람들같이. 7년 동안 그런 게 있으니까 정상화 된 후에도 이럴 수 있게 된 거 같아요.”

 

에바다학교를 정상화시키는데 있어서 최우선 과제로 삼은 것이 학교이전이었다. 기존 건물은 워낙 낡고 구먹구구식으로 지어져 있어서 정상적 교육을 벌이기에 어려움이 많았다. 그에 따라 2003년 가을부터 매각을 추진했지만, 평택이 토지거래허가지역으로 묶이는 등의 우여곡절 끝에 올해 매각협상이 진행중이라고 한다. 또 학교주변 지역주민들을 찾아다니면서 그동안 고생이 많았다며 사과도 하고 인사도 하는 등 주민들과 함께 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현재 에바다 학교가 가장 자랑스럽게 내놓고 있는 것 중의 하나가 교육프로그램이다. 매년 전교생 수학여행, 매달 전교생 등산, 매달 하루 현장학습의 날 등 여러 프로그램은 수차례 언론에 보도되는 등 관심을 끌고 있다. 학교 급식문제와 관련해서 학생과 학부모 당사자가 직접 검사한다는 취지에서 잔류농약속성검사기를 지급해 그날그날 재료를 직접 검사하는 시스템으로 해결하고 있다.

그러나 정상화 과제에 대해 권오일은 공동책임을 강조하면서 앞으로가 더 중요하다고 얘기했다.

 

“도둑놈들 다 내좋고 100% 민주적 이사회 구성하고 투명하고 민주적으로 운영한다는 거는 정상화를 위한 발판을 마련한 거거든요. 발판 마련했다고 다 끝난 것은 아니잖아요. 이제 시작해야 하니까. 7년간 싸워서 정상화의 시작점을 만들어 놨다는 거지 정상화된 거는 아니라고 봐요.

앞으로 우리 에바다가 지향하는 거는 에바다가 하나의 모델이 되가지고 앞으로 장애인시설이나 특수학교가 들어선다면 자기 지역에 유치하겠다고 데모하게 만들겠다는 거예요. 그게 그냥 뜬구름 잡는 소리가 아니고 충분히 가능한 얘기거든요.

예를 들어서 우리가 앞으로 시설을 이전해서 실내체육관도 갖추고 정상적으로 물리적인 공간을 다 갖추었을 경우에, 가을운동회를 한다고 할 경우 돼지 대여섯 마리 잡아서 지역주민들 잔치를 하는 거예요. 소풍을 간다면 지역의 어르신들 어려운 분들 다 모시고 같이 움직이고... 특수학교는 일반학교에 비해서 법적으로 필요한 시설들이 굉장히 많아요. 장애인들을 위한 시설들은 비장애인들에게 그대로 적용되거든요. 특수학교가 갖고 있는 여러 가지 기자재들을 방과후라든지 공휴일이라든지 지역주민들에게 언제든지 개방하고, 실내체육관 같은 경우 무료체육시설로 제공하고, 지역주민들 잔치를 하거나 그러면 공휴일이나 방학이면 무료로 빌려주는 거예요. 그런 식으로 됐을 때 이 에바다는 지역주민들이 필요한 시설이 돼요. 실내체육관을 크게 지어서 각종 탁구대회나 여러 행사를 유치하려고 하거든요. 그렇게 에바다에 사람들이 계속 모여들면 지역주민들에게는 그게 경제적 소득으로 돌아가요.

그렇게 만들어놓으면 ‘장애인시설이나 복지시설은 저렇게 운영해야 된다’ 그렇게 되는 거죠. 그게 정상화라는 거죠.

그게 쉽지는 않겠지만 전혀 어려운 것은 아니라는 거예요. 우리가 어떤 진정성을 가지고 어떻게 하느냐의 문제지, 처음에 우리가 마음먹은 이 부분만 변하지 않고 유지해나간다고 그러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봐요. 단, 저도 10년 20년 후에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거예요. 개인에 의지하다보면 사람이 장담하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에, 저는 항상 어디가도 요구를 하는 게, 에바다에 함께 했었던 사람들이 ‘이제 에바다는 잘 돌아가겠지. 느그가 알아서 하겠지’ 그런 거는 상당히 무책임하다는 거예요. 그거는 에바다투쟁의 의미를 같이 싸웠던 사람들이 희석시키는 거다. 계속 에바다의 건강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느 개인에게 맡겨 놓을 것이 아니고, 계속 감시를 하고 견제를 하고 같이 함께 참여하고 이렇게 해야죠.

에바다투쟁 과정 자체가 전국적으로 볼 때도 모범적인 모델이 될 수 있었듯이 투쟁 이후에서도 투쟁에 같이 했던 사람들이 관심의 끈을 놓지 않고 계속 감시하고 같이 참여하면서 운영해나가는 과정에서도 하나의 좋은 모델을 만들어가야 한다. 투쟁할 때는 오히려 쉬울 수가 있거든요. 운영하는 것은 투쟁할 때보다 더 힘들고 어려울 수 있거든요. 그런 부분들만 꾸준히 이어진다면 에바다가 가장 모범적인 케이스로 성장할 수 있다고 보는 거고, 그렇게 됐을 때 많은 장애인시설 운영하는 사람들한테는 발목을 잡는 대비를 명확하게 시켜버리는 거예요.”

 

투쟁 이후 권오일은 소위 ‘쌩까지않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 7년의 투쟁 속에서 함께 했던 여러 동지들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요즘도 각종 일정이나 투쟁이 있으면 열심히 다니려고 노력한다. 특히 전국에 있는 각종 복지시설에서 문제가 발생하면 연락이 많이 온다고 했다. 이틀 동안 얘기를 나누는 동안에도 중간 중간 걸려오는 전화의 많은 경우가 복지시설 비리문제에 대한 상담이었다.

 

“작년 우리끼리 이야기를 하다가 ‘지역에서 그만큼 도와주고 했는데 우리가 혹시 지역에 소홀하게 아닌가’ ‘저그들 정상화되고 그러니까 지역에 일 생겨도 안 움직이네. 이런 소리를 들어서는 안된다’ 그런 얘기를 했어요.

그 사람들이 에바다에 계속 관심을 갖고 견제를 하게하려면 우리가 뛰어다녀야 하거든요. 우리가 뛰어다니는 만큼 관심을 갖는다 생각해요. 우리 나름대로 하는데 가끔씩 소홀하게 보인다는 반성을 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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