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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마흔번째 생일

엄마는 벌써 집에 와 있었다.

 

" 웬일이야? 오늘 화실 안 갔어?"
" 갔다 왔지."

 

 엄나는 좋은 일이 있는지 들떠 보였다. 간간이 피식피식 웃기까지 했다.

 

" 무슨 일 있어?"
" 있지."

 

 나는 정말 오랜만에 엄마가 웃는 이유가 궁금했다.

 

" 내 그림, 전시회에 출품하게 됐다."
 엄마는 비밀 얘기를 하듯 속삭였다.

 

" 전시회?" 엄마가 그린 그림으로?"
" 정식 전시회는 아니고 엄마 학교에서 졸업생들이 여는 전시회야."

 

 나는 엄마 말에 기운이 빠졌다. 겨우 그런 일로 좋아하다니-------.
" 그게 그렇게 좋아?"
 내가 약간 빈정대듯이 물었는데도 엄마는 알아채지 못하고 웃기만 했다.

 

" 그럼 좋지. 붓 다시 잡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망설이고 있는데 교수님이 내라고 하시잖아. 드디어 마흔 전에 내 그림을 걸게 된 거야."
" 엄마, 뭐 착각하는 거 아냐? 작년에 마흔 살 생일 파티 했잖아? 벌써 잊었어?"
" 그건 진짜 나이가 아니지. 만으로 마흔은 올해야."
" 어쨌든 또 바빠지겠네."
 나는 어이가 없었지만 엄마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 그렇겠지."
 엄마는 뭘 해도 신이 나는 것 같았다. 전에 없이 콧노래까지 흥얼거렸다. 딸은 종일 되는 일이 없는데.

 

 아빠가 집에 돌아온 건 우리가 저녁을 다 먹고 난 뒤였다. 아빠는 내 인사도 받지 않고 할머니 방으로 들어갔다.

 

" 가영아, 아빠 식사하시라고 해."
 나는 할머니 방으로 들어갔다. 아빠는 잠든 할머니 손을 잡고 물끄러미 할머니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 아빠, 저녁."
 아빠는 별로 기분이 좋지 않은 모양이었다. 내 쪽으로는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그러니 내 마음이 더욱 조마조마했다. 혹시 낮에 싸운 것 때문에 아빠가 화난 건가?
" 아빠, 엄마 있잖아. 학교 전시회에 엄마 그림을 내게 됐대. 잘됐지? 교수님이 엄마 그림 좋다고 했대."
 아빠가 갑자기 무서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때까지도 나는 내가 뭘 잘못했는지 알아채지 못했다.
" 다시 말해 봐. 뭐라고? 전시회? 정말 보자보자 하니까------."

 

 아빠는 거실로 뛰어나가 다짜고짜 엄마한테 고함을 질렀다.
" 당신이란 사람, 도대체 뭐 하는 여자야? 전시회? 그래, 시어머니 병은 하루가 다르게 나빠지는데 그런 일을 벌이고 싶어? 그리고 뭐? 학교에서 뭘 해? 그것도 몇 달동안이나 누나들한테 병든 엄마 맡겨 놓고 나 몰래 자원 교사를 했다고?"

 

나는 꿈 얘기의 효력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학교에서 선생님이 아빠 휴대폰으로 전화를 했을 때 왜 그런 생각을 조금도 못 했는지 ------.
" 흥분하지 마. 뭐가 무섭다고 내가 몰래 자원 교사를 해? 그건 내 일이야. 그것도 화실 가는 시간을 비워서 한 거고."
" 그럼 화실 나갈 시간 비워서 엄마 보살피면 안 되었냐고. 당신이 가정주부야? 우리 집안을 뭘로 알고 이렇게 제멋대로야?"
" 분명하게 말해. 내가 집을 비워서 어머님 상태가 더 나빠진 거야? 어머님 병은 처음부터 예상한 일이었잖아."
" 마음을 안 쓰는데 엄마가 좋아질 리 있느냐고. 왜 다른 여자들처럼 얌전히 집에서 살림을 못 하는 거야!"
" 당신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면 난 더 얘기안 할 꺼야."
 부들부들 떠는 아빠를 보면서도 엄마는 침착하게 대꾸했다.

 

엄마는 변명이라도 좀 하지. 왜 자꾸 아빠 화를 돋우는 걸까? 변명이 좋은 건 아니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아빠 흥분을 먼저 가라앉혀야 하지 않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엄마는 정말 변명할 줄을 모른다.
" 내가 분명히 말하는데 당신 화실이고 뭐고 내일 당장 집어치워!"
 나는 할머니 방에서 벌벌 떠느라 엄마가 뭐라고 대답했는지 듣지 못했다. 이 모든 일이 나 때문에 생긴것 같아 안절부절못했다. 이런 때 언니라도 있었다면 좋았을걸.

 

" 가영이, 너도 이리 나와 봐!"
 기어이 올 게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빠가 '깡'이라고 부르지 않는 건 예삿일이 아니었다. 나는 두려워 어디로 도망가고 싶었다.
" 너, 그 축구 시합 나가지 않았으면 좋겠어. 아니, 나가지 마! 선생님하고도 얘기 끝냈으니까. 알았지?"
" 아빠, 하지만 나는 ------."
" 오늘 너희 반에서 너 때문에 여자 남자 편까지 갈라서 싸웠다며? 선생님이 화해를 시켰는데도 거절하고 ------."
" 그건 나더러 시합에 못 나가는 사실을 인정하라는 말이잖아. 여자니까 나가지 말라면서 무조건 화해만 하라는 게 싫었어."
" 가영이, 너 잘 들어. 아빠가 원하는 건 씩씩한 딸이지, 자기만 아는 드센 딸이 아니야. 너는 언니가 억지 부릴 때도 알아서 양보하는 애였잖아. 그런데 그건 왜 못해? 네가 축구 잘하는 건 인정해. 하지만 너 때문에 시합을 할 수 없다면 당연히 네가 알아서 빠져야 하는 거지. 아빠 말 알겠어?"
" 아니, 모르겠어."
 아빠가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엄마만 변명하지 못하는 줄 알았는데 그 상황이 되니 나도 마찬가지였다.
" 가영이, 너한테 실망했다. 어쨌든 넌 이번 시합에 못나가. 너하고 더 얘기할 것 없으니까 방으로 들어가. 아직 엄마랑 할 얘기가 있으니까."
 아빠는 아빠 말만 다 하고 가라고 했다. 아빠 말이니까 무조건 들으라면서.

 

 방에 들어와 나는 오늘 일어난 일들을 하나씩 떠올렸다.
 학교에서 여자 남자 싸움은 내가 일으킨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난 여자랑 남자랑 편 가르는 건 처음부터 관심도 없었다. 그런데 일이 왜 이렇게 꼬였는지 알 수가 없다.
 더욱 더 궁금한 건 아빠가 나한테 화내는 이유였다. 내가 축구 시합에 나가겠다는 게 왜 나만 아는 일인지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 아빠는 선생님 말만 들을 게 아니라 내 얘기도 공평하게 들었어야 했다. 아무리 우리 아빠지만, 내게 시합에 빠지라고 일방적으로 명령하는 건 옳지 않다. 내가 지금껏 알았던 아빠의 모습이 아니었다.
 엄마 문제도 그랬다. 아빠 얘기를 들으면 할머니 아픈 건 모두 엄마 탓이다. 그럼 할머니는 엄마가 곁에 있었으면 치매에 걸리지 않았을 것라는 말인가? 그리고 왜 아빠는 엄마 전시회를 축하해 주지 않지? 무조건 다른 여자들처럼 살라니?
 무조건 화해하고, 무조건 축구 시합에 나가지 말고, 무조건 화실 정리하고, 무조건, 무조건 ------. 도대체 아빠가 원하는 딸은 어떤 딸이지? 나는 아빠와 마음이 잘 통한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자신이 없다. 오늘은 나도 아빠한테 실망했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잠깐 심각해지면 바로 배가 고픈 건 언니 말처럼 불치병인지도 모른다. 거실에서는 아빠와 엄마가 아직도 싸우는 것 같다. 할 수 없이 나는 자리에 누웠다.
 악몽 같은 하루가 겨우 지나가고 있었다. 일이 잘못되는 데도 순서가 있다. 이것이 오늘 얻은 교훈이었다.

 

 청년사에서 출판한  엄마의 마흔번째 생일(최나미 글, 정용연 그림)의 166-173. 쪽을 옮겼고 줄을 읽기 편하게 만들어봤다.

 아이들이 읽어야 하는 책이지만 성인 남성이 읽어도 좋은 책이다.

 아내와 갈등이 있었을 때 내가 가영이 아빠와 같았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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