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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전후 사회주의 경쟁

인간과 계획 제3장 (6) 총명한 유물론 3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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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 사회주의 경쟁

 

1946년 말에 이르러 한 해 동안의 가동실적을 결산하는 과정에서, 앞서 언급한 모든 영역에서의 공고한 성과들뿐만 아니라 실로 다종다양한 형태의 경쟁 양상이 수면 위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는 사회주의 경쟁이 최초로 만개했던 1929년부터 1932년까지의 역사적인 격동기를 연상시키는 것이었다. 대개 프라우다의 보도에서 발췌한 아래의 예시들은, 이러한 측면에서 당시의 실상을 그 자체로 여실히 증명한다.

 

개별경쟁: “모스크바 공작기계공장의 노동자들은 전후에 생산을 군수에서 민수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성공적으로 경쟁을 전개하고 있다. 현재 이 공장의 공구생산량은 전전수준을 25% 상회했다. 모든 작업장들에서는 각 직무별로 ‘최우수 노동자’ 칭호를 쟁취하기 위해 스타하노프 운동가들과 돌격대원들이 생동감 넘치는 경쟁을 벌이고 있다. 이러한 경쟁은 훌륭한 과실을 맺고 있다. 노동생산성은 괄목할만큼 성장했고 규정된 계획을 10% 초과달성했다. 일부 작업장들은 기존 인력을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연초 대비 20-30% 더 많은 생산량을 산출해내고 있다.”(1946년 11월 23일)

 

청년돌격대: 고리키에서 당도한 소식에 따르면, 몰로토프 자동차 공장에서 진전을 거두고 있다고 한다. 이곳은 1941년 가을에 공산주의청년동맹(콤소몰)의 단원이자 공구제작반의 작업반장이었던 바실리 슈빈 주도로 “전선돌격대” 운동이 최초로 불붙은 곳이었다. 현재 이 공장에 존재하는 돌격대는 200개를 넘으며, 이들은 모두 “청년돌격대”로 이름을 바꾸었다. 해당 보고의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새로운 5개년 계획의 첫 해 계획의 달성과 초과달성을 위해 사회주의 경쟁이 시작됐을 때 바실리 슈빈은 사회주의 경쟁이 ‘노동공훈돌격대’의 칭호를 달고 청년돌격대들 사이에서 조직되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관리부서와 공산주의청년동맹 공장위원회는 이 제안을 지지했다. 이 칭호는 한 달 동안 생산기준량을 초과달성한 돌격대들에게 수여됐는데, 이때 돌격대원 개개인 역시 단독으로 모두 기준량을 초과달성해야 한다는 조건이 따라붙었다. 경쟁에서 승리한 돌격대에게 붉은 깃발이 수여됐고, 12개의 포상금 제도가 제정됐다. 이 공구제작공들의 주도로 시작된 사회주의 경쟁은 1932년 1월 1일에 설립된 공장의 건립 15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공장 내 모든 작업장으로 확대됐다. 11개의 청년돌격대는 이미 이 칭호를 쟁취했다.”(1946년 11월 22일.)

 

합리화: “올해 소련의 철강공업, 기계공업, 철도공업, 수운공 등 주요 산업부문의 노동자들에 의해 약 3만 건에 달하는 생산합리화 안건들이 상정됐다. 이를 적용한 결과, 거의 4억 루블 이상의 절약효과를 거두었다. 이 제안 중 상당수는 매우 가치있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 제철소의 노동자 니콜라이 아스타포프는 압연기 조작에 새로운 방식을 도입하여 통상적인 월간생산량인 4,500을 훨씬 상회하는 7,000톤의 박판을 생산해냈다.”(Soviet Monitor, 1946년 11월 30일)

 

다직기운동: 오레호보-주예보의 직조공 마리아 볼코바는 다음과 같이 썼다: “내가 여러 대의 직기를 동시에 굴리는 작업을 떠올린 것은 거의 1년 전이었다. 나는 동료들과 이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고, 설비를 추가로 더 도맡아 운영하기로 뜻을 모았다. 처음에는 1인당 10개의 직기를 관리했다가, 점차 12대, 14대로 늘려갔고, 현재는 한 사람이 각각 16대의 직기를 운용하고 있다. 연간생산계획에 따라 당초 우리가 국가에 공급해야 했던 직물은 19만 미터였다. 하지만 우리는 이 목표를 이미 8월 15일에 조기 달성했다. 이어 혁명 29주년 기념일을 앞두고 8만 5천 미터를 추가로 생산해냄으로써, 11월 7일을 기해 수립했던 생산초과달성결의를 멋지게 완수했다. 우리 작업반의 발의(發意)가 오레호보 공장뿐만 아니라 여타 수많은 공장으로까지 확산되어 매우 기쁘게 생각한다. 현재 우리 시 전역에서 170명의 직조공들이 나의 선례를 따르고 있다. 이제는 개별 직조공이나 작업반 단위를 넘어서서 전체 작업장이 여러 대의 직기를 굴리는 체제로 바뀌는 추세이다. 제2직포 공장의 제3작업장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 운동 덕분에 우리 시의 최소 2개 공장에서 유휴직기 2대로 400대를 추가로 가동할 수 있게 됐다. 그 결과, 우리 콤비나트의 전체의 면직물 생산량이 대폭 증가했다. 지난해 일일 생산량은 8만 미터 수준이었지만, 현재는 11만 미터에 달한다. 나는 ‘스타하노프 학교’나 ‘현장기술훈련반’을 통해 지역 노동자들에게 나의 현장 경험을 전수하고 있다. 최근에는 유명 섬유산업도시인 이바노보와 글루호프의 섬유노동잗르로부터 초청을 받아, 우리가 생산성을 혁신한 구체적인 작업공법에 대해 현지에서 강현을 진행하기도 했다.”(Soviet Monitor, 1946)

 

연쇄돌격대: “10월 혁명 공장의 최우수 직조공으로 오레호보의 마리아 볼코바의 작업방식을 습득했던 칼미코바와 포템키나는 자신들의 교대근무시간에 기존에 돌격대가 관리하던 60대의 직조기 대신 180대의 노스럽 자동직기를 도입하기로 결정했다. 이들은 8월 16일부터 이를 도입하기 시작했고, 도입 첫날부터 돌격대들은 계획을 초과달성하기 시작했다. 9월 1일에 이들은 스타하노프 연쇄돌격대로 재조직됐고, 면화의 분류부터 완제품의 포장에 이르기까지 전체 생산공정을 관장했다. 방적기 공장과 직조기 공장의 예비부서들과 링정방기 작업장에는 작업반장들이 조수로 배치됐다. 공정 전반에 걸쳐, 각 기계장치는 특정 노동자들에게 배정됐다. 그 결과, 방적기와 직조기를 돌리는 모든 과정에서 반제품의 질을 검사하는 작업은 훨씬 더 개선됐다. 그동안 공장가동중단의 원인을 야기하는 주된 원인 중 하나였던 링정방기와 직기에서의 원사절단현상은 눈에 띄게 감소했다. 완제품의 질은 개선됐다. ⋯ 스타하노프 다중직조기 연쇄돌격대를 조직한 덕분에 65명의 숙련노동자들을 전환 배치할 수 있는 여유인력으로 확보하여 그들에게 놀고 있던 직조기를 맡길 수 있었다. 자동직기 작업장은 이전에 하루에 12-13,000미터를 생산했지만, 이제는 16-17,000미터를 생산하고 있다. 연쇄돌격대원들의 임금은 인상됐다. ⋯ 가장 선진적인 직조공들인 칼미코바와 포템키나는 공장 전체를 각성시켰다. 고류노바와 자이체바는 이들의 선례를 받아들였다. 고류노바와 자이체바는 9월 7일부터 120개의 자동직기를 전담하기 시작했으며, 이들 또한 계획을 성공적으로 완수해나가고 있다. ⋯ 어제 칼미코바의 돌겨대는 새로운 방식으로 월간작업결과를 토의 후 다가오는 11월 혁명 29주년을 기념하는 사회주의 경쟁에 돌입했다. 칼미코바의 돌격대는 9월의 생산기준량을 160% 이상, 10월에는 170% 이상 달성하고, 계획보다 높은 원사 600kg와 직물 20,000미터를 생산하는 데에 착수했다. 칼미코바의 돌격대는 포템키나의 돌격대에 도전장 내밀었다.”(1946년 9월 15일)

 

호응계획: “야로슬라블, 10월 24일. 셰르바코프 도로기계공장은 도로포장기계의 연간생산계획을 9개월 반만에 완수했다. 생산원가는 연간계획 하에서 설정된 18.7%를 한참 상회하여 45%나 절감됐다. 1946년 말에 공장은 전전 수준의 생산원가에 도달할 전망이다. 노동자들은 1947년도 계획을 125% 수준으로 상향하여 초과달성할 수 있다고 계산했다. 전체회의에서의 승인과 함께 공장관리부서는 이 제안을 건설도로기계성에 상정했다. 내년에 이처럼 더 높은 계획을 완수하기 위해 공장이 보유한 잠재력은 가장 많은 노동력이 소요되는 공정들을 끊임없이 기계화하는 데에서 나온다. 공장 자체의 역량과 주도적인 노력 하에, 이 방향을 향해 이미 상당한 진척이 이루어지고 있다. 실제로 공장의 생산능력은 이미 1947년도에 계획됐던 것보다 더 높다. 노동자들의 생산성은 지속적으로 상승하여, 현재 계획 대비 15%를 초과달성하고 있다.”(1946년 10월 25일)

 

수많은 100% 달성자들’: “야로슬라블의 열차수리공장에서는 사회주의 경쟁의 광범위한 확장이 다양한 영역들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한 교대조당 2-3개의 생산기준량을 수행하는 노동자들의 숫자는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다. 현재 공장은 약 100명의 ‘300% 달성자’들과 500명 이상의 ‘200% 달성자’들을 보유하고 있다. 205명의 노동자들은 이미 자신들의 연간생산기준량을 생산해냈다.”(1946년 10월 19일) “우크라이나 공산당 하르코프 지역위원회는 도시의 공업지대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맡으며 향후 5년치의 생산기준량을 달성한 스타하노프 운동가들을 모아 대표자회의를 진행했다. [공장에는]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하는 젊고 늙은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자신들이 그토록 높은 노동생산성을 어떻게 달성할 수 있었는지 설명했다.”(1946년 11월 25일)

 

기술의 공유: “파블로보-포크롭스크 섬유공장(모스크바 지역)의 최근 당 및 행정관리일꾼 대표자회의에서 현장 감독자인 E. 볼샤코바는 감독자들 사이에 사회주의 경쟁을 조직하자고 제안했다. 이 창의적 제안은 이제 공장의 모든 감독자에게 채택됐다. 볼샤코바가 담당한 부문은 11월 15일에 이미 연간생산량을 완수했다. 해당 부문의 직조공 38명 중 30명이 연간할당량을 달성한 것이었다. 그들의 성공은 크게는 볼샤코바의 역할에 따른 것이었다. 이들의 성공은 상당 부분 감독자인 볼샤코바의 공로였다. 뛰어난 조직가였던 볼샤코바는 여성 직조공 각자에게 각기 다른 접근방식을 취했으며, 스타하노프 학교들과 산업훈련모임에 참석시키도록 독려하여 기술을 향상시켰고, 더 많은 직조기를 전담할 수 있는 적절한 작업조건을 조성해주었다. 38명 전원이 이를 해냈으며, 심지어 그 중 4명은 표준규격의 3배에 달하는 18대의 직조기를 전담하고 있다. 직조기에 더욱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 덕분에 현재 이 부문의 설비가동중단율은 계획된 허용치보다 낮아졌다. 이는 설비와 개별 직조공 모두의 생산성을 증진시켰다. 1945년 이 부문의 일일 평균생산량은 3,655미터였으나, 올해에는 5,356미터에 달한다. 직조공들의 수입 도한 증가했다. 일례로, 쿠르코바는 올해 1월에 696루블을 벌었으나 10월에는 1,997루블을 벌었고, 예고로바는 같은 기간 동안 수입이 941루블에서 1,878루블로 늘었으며, 볼샤코바의 부감독자인 타타미코프는 1,500루블에서 2,328루블로 수입이 증가했다. 어제 열린 모스크바 지역 섬유공업 감독자 회의에서 볼샤코바는 자신의 작업방식을 설명했고, 여러 섬유공업도시에서 온 다른 감독자들도 그녀의 가치있는 제안을 지지했다. 이 회의에서는 볼샤코바에게 감사를 표하고 두 달 치 임금에 해당되는 상여금을 지급한다는 섬유공업성의 지령이 낭독됐다. 해당 부문의 노동자들과 현장 작업반장들 역시 상여금을 받았다. 이 지령은 모든 섬유공업 공장장들에게 이와 같은 사회주의 경쟁을 촉진할 수 있는 필수조건을 조성하라고 지시하고 있다.”(1946년 12월 1일)

 

자아비판: “11월 13일, 카디예프카(도네츠 분지). 어제 1,000명이 넘는 인원이 참석한 가운데, 보로실로프그라드 석탄 콤비나트의 광부열성자회의가 개최됐다. 회의에서는 올해 4분기 탄광의 작업개선전망에 관한 공장장 파데예프의 보고를 놓고 토의가 진행됐다. 파데예프의 보고는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는데, 그럴 만한 이유가 차고도 넘쳤다. 콤비나트는 3분기에도, 10월에도 석탄생산계획을 완수하지 못했고, 11월에 들어서도 여전히 실적이 뒤처지는 중이었다. 올해에 이 콤비나트 산하의 탄광들이 국가에 미납한 석탄의 결손량은 무려 17만 톤 이상에 달했다. 광산 8곳 중 오직 3곳만이 10개월간의 석탄생산계획을 달성했을 뿐이었다. 이러한 작업부진의 원인은 낙후된 대다수의 탄광들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다. 탄광의 막장에서는 기술공정의 관리와 노동조직에 대한 적절한 통제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으며, 설비 역시 제대로 활용되지 못하고 부실하게 운용되는 실정이다. 탄광에는 428대의 채탄기가 있었지만 실제로 가동된 것은 300대에 불과했다. 채탄기 한 대당 월평균생산량은 1,560톤이었는데, 이는 전쟁 전에 비해 1,040톤이나 떨어진 수치였다. 기존 채굴장의 규모만으로도 매일 계획보다 2,000~2,500톤의 석탄을 추가로 생산할 수 있었음에도, 이러한 잠재력은 온전히 활용되지 못했다. 토의에서 가장 먼저 발언한 사람은 채탄기 운전원인 베셰레브니였다. 그의 채굴량은 월 8,000톤이다. 그는 모든 운전원들에게 채탄기의 채굴량을 4,000톤으로 올리자고 도전장을 던졌다. ⋯ 크레멘나야 동부 탄광의 채탄기 운전원인 스타이추크 역시 채탄기의 채굴량을 급격히 늘릴 수 있는 가능성을 논의했다. 3호 탄광의 채탄부 이스말코프는 표준할당량인 40미터를 뛰어넘어 7월에 90미터를, 8월에 114미터를, 그리고 9월에 135미터를 채굴했던 경험을 설명했다.”(1946년 11월 14일)

 

사무원들의 생산현장으로의 진출: 1946년 10월 9일자 프라우다는 콜롬나에 위치한 쿠이비셰프 기관차공장의 젊은 여성 시간기록원 갈리나 세르기옌코의 사연을 보도했다. 갈리나 세르기옌코는 생산현장의 노동력 부족을 메우기 위해 제관 작업장의 현장 노동자로 전직하여 일하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노동자 부족으로 인해 수많은 공작기계가 가동을 멈추고 놀고 있는 모습을 목격한 뒤, 직업을 바꾸겠다는 뜻을 공산주의청년동맹(콤소몰) 공장위원회와 의논했다. 위원회는 그녀의 제안을 열렬히 환영했고, 세르기옌코는 10월 1일자로 보일러 작업장에 배치됐다. 현장 감독자인 레빈은 세르기옌코가 천공기의 조작법을 숙달할 수 있도록 자신의 휴가까지 반납하며 도왔다. 3주 후, 그녀는 독립적으로 작업을 수행할 수 있게 됐고, 공장의 청년들에게 자신의 선례를 따라 달라고 호소했다. 10월 11월까지 쿠이비셰프 기관차공장의 사무원 89명이 이 호소에 응답했다. 이틀 전 첫 보도가 나간 이후, 모스크바의 스탈린 자동차 공장, 포돌스크의 칼리닌 기계공장, 류베레치의 우흐톰스키 공장 등 수많은 공장의 사무원들 사이에서도 뜨거운 반향이 일어났다. 10월 23일에 이르러서는 콜롬나 공장 사무원 중 160명 이상이 갈리나의 선례를 따르겠다는 의사를 밝혔으며, 그중 138명은 이미 작업장에 배치되어 근무하고 있었다. 10월 25일자 프라우다 보도에 따르면, 콜롬나 공장의 동참자 숫자는 195명으로 늘어났고 그중 160명은 이미 새로운 기술교육을 받는 중이었다. 한편, 모스크바 지역 전역에서는 자원자가 689명에 달했다. 예컨대, 볼베어링 공장의 통계원이었던 베라 오레호바(Vera Orekhova)는 증기해머 운전원이 됐고, 같은 공장의 사무직 7명도 오레호바의 뒤를 따랐다. 류블리노의 카가노비치 금속공장 사무실에서 근무하던 여성 직원 10명은 주조공과 증기해머 운전원 등의 교육을 받았다. 여러 섬유공장의 여성 사무원들도 생산작업장으로 이동했다. 모스크바 탄전의 막장에서 전직 남성 사무원과 시간기록원, 그리고 식당 종업원 출신 등 46명이 지하에서 채탄기 운전원, 채탄부, 혹은 전기트럭 운전원으로 일하게 됐다. 한 자동차 공장에서는 기술자 집단이 청년들에게 공작기계의 조작법을 가르치기 위해, 정규 근무를 마친 후 매일 3시간씩 시간을 내기로 결의하기도 했다.

 

스타하노프적 작업방식의 계획: “모스크바 ‘파리 코뮌’ 공장의 노동자들은 1947년 한 해 동안 당초 계획된 생산량을 초과하여 10만 켤레의 신발을 추가로 생산하겠다는 서약을 했다. 이 결의를 이행하기 위해서는 노동생산성을 대폭 끌여올려야 했다. 이때 재단작업장의 열성적인 스타하노프 노동자인 바실리 마트로소프는 뒤처진 노동자들을 가장 선진적인 노동자들의 수준으로 견인하고, 모든 노동자가 가장 생산적인 작업방식을 숙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스타하노프적 작업방식의 전면적 도입을 위한 계획”을 수립하자고 제안했다. 마트로소프의 제안은 공장 내에서 열렬한 지지를 얻었으며, 소련 공산당 모스크바 위원회가 개최한 경공업 노동자 대표자회의에서도 논의됐다. 회의 연단에 오른 마트로소프는 제안의 핵심 내용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우리 공장은 올해에 지난해보다 90만 켤레나 많은 신발을 생산해내야 한다. 생각컨대, 우리 공장의 인력으로 이 계획을 충분히 초과달성할 수 있다. 이를 위해 무엇이 필요한가? 바로 모든 노동자의 노동생산성을 끌어올리는 것이다. 나 자신도 지난해 할당량의 2.5배를 생산해냈다. 많은 스타하노프 재단공들이 자신의 할당량을 두 배나 초과달성하고 있다. 우리 작업장의 평균할당량 달성률은 150-155%에 달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평균’일 뿐이다.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우리 작업장의 도급노동자 125명 중 13명은 할당량 근처에도 가지 못하고 있으며, 수십 명의 노동자가 평균적인 노동생산성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내가 생산회의에서 우수한 스타하노프식 공법을 모든 재단공에게 본격적으로 전수하자고 제안한 이유이다. 이렇게 하면 모든 노동자의 수준을 선진노동자들의 수준으로 끌어올릴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 작업장에는 스타하노프적인 노동방식을 도입하기 위한 ‘작업장 세부계획’을 수립하고 실행하기로 결의했다. 우리는 말에 그치지 않고 이미 실천에 착수했다. 우리는 현재 최우수 재단공들의 작업방식을 면밀히 분석하는 중이다.””(Soviet Monitor, 1947년 2월 4일.) “수많은 대형 공장의 직원들이 마트로소프의 공법을 연구하며 도입을 추진 중인데, 대표적인 곳으로는 ‘낫과 망치’ 섬유공장과 오레호보 면방직공장이 있다. ‘낫과 망치’ 섬유공장은 1947년 계획 대비 300만 야드의 직물을 추가생산하겠다는 포부를 품고 있으며, 오레호보 면방직공장은 연간계획의 200만 야드에 가까운 직물의 초과달성을 목표로 하고 있다. 스탈린 자동공장의 노동자들은 마트로소프의 새로운 공법을 배우고 그의 발상을 연구하기 위해 그의 공장을 직접 방문했다. 우크라이나 공화국 신발공업계의 모든 노동조합원들이 참여한 대표자회의가 끝난 후 키예프의 신발공장들이 ‘파리 코뮌’ 공장에 사회주의 경쟁을 제안함에 따라, 우크라이나 신발공장의 대표자들은 현재 모스크바로 향하는 중이다. 노동조합 신문 트루드는 마트로소프의 공장에서 수립된 작업장 종합계획에 지면 한 면을 통째로 할애했다. 이 신문은 사설을 통해 이렇게 썼다: “바실리 마트로소프가 내놓은 제안은 수많은 공장 임직원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고 있으며, 이 운동은 나날이 세를 불려가고 있다”. 동시에, 트루드는 이 새로운 스타하노프 운동을 위한 계획을 단 2-3일 만에 짜낼 수 있다고 착각하는 공장장들을 비판했다. 신문은 이러한 보여주기식 ‘초속도전’이 결코 좋은 결과로 이어질 수 없다고 경고했다.”(Soviet Monitor, 1947년 2월 15일.)

 

이전의 사회주의 경쟁들과 마찬가지로 1946년에 휘몰아친 경쟁의 물결 역시 생산의 증대, 원가절감체계의 도입, 생산성의 향상 등의 결의를 특징으로 하지만, 그중에서도 마트로소프 운동은 단연코 가장 중요한 이정표였다. 기술적 탁월함을 일부 선진노동자들만의 전유물로 남겨두지 않고 평범한 일반 노동자 대중의 자산으로 만들고자 노력했다는 점에서, 이 운동은 1931년의 독립채산제 작업반, 1933년의 기술, 산업, 재정계획, 그리고 1935년의 스타하노프 운동 그 자체로 이어지는 역사적 적통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었다. 이는 결코 우연한 사건이 아니었다. 기술의 진보를 향한 투쟁과 새로운 공법의 도입을 강력하게 요구하는 아래로부터의 역동적인 움직임은 전후 사회주의 경쟁단계의 가장 뚜렷한 특징이었다. 석유공업에서의 신형 기계장치의 도입, 자동차공업에서의 고압주조공법 및 부품의 고주파 전열 정밀가공기술의 도입, 그리고 이와 유사한 여타 기계공학 제품의 고도화 작업 등 1946-7년 사회주의 경쟁 과정에서 노동자들이 수립한 생산서약의 핵심적인 내용을 구성했다. 이 시기에 수많은 스타하노프 모범노동자들이 과학적 성취에 대하여 수여되는 소련의 최상위 훈장인 ‘스탈린상’의 수상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는 사실은 대단히 시사하는 바가 크다.

 

1947년 1월 셋째 주에 국가계획위원회가 발표한 새로운 5개년 계획의 첫해 집행실적은 무엇보다도 사회주의 경쟁이 거둔 실효성을 가늠하는 확실한 척도였다.1 대체로 전후 기존 생산설비들의 전환은 1946년 한 해 동안 완료됐다. 소련 산업의 민수용품 총생산량은 전년 대비 20% 증가했다. 계획을 97% 달성하는 데에 그친 동부 지역의 석탄공업을 제외하고, 야금공업, 석탄공업, 석유공업, 전력공업, 화학공업, 중기계공업 등 모든 기간산업은 계획을 최소 99% 이상 달성했으며, 이들 중 대부분은 계획을 초과달성했다. 반면에, 공작기계공업은 계획의 89%, 자동차공업은 92%를 달성하는 데에 머물렀고, 그보다 아래 순위로는 수송기계공업(81%), 농업기계고업(77%)가 뒤를 이었다. 건설자재공업은 계획을 105% 초과달성했고, 목재공업은98%를 기록했다. 여러 경공업 및 식품공업부문 역시 계획을 105% 초과달성했다. 여러 경공업 중 식품공업부문 역시 연간계획을 초과달성했다. 1946년 한 해 동안 약 800개의 신규 공장이 건설되거나 복구되어 본격적으로 가동에 돌입했다. 같은 해 산업 전반에서 드러났던 주요 결함은 숙련노동력의 부족, 전시의 성과와 비교할 때 지나치게 낮게 책정된 생산할당량, 그리고 과도한 설비유휴현상에서 기인했다.

 

이에 따라, 1947년 3월 1일 소련 각료회의가 공표한 인민경제계획은 경제건설과정에서 발생하는 기술적 문제들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였다. 이 계획은 사상 최초로 모든 주요 산업분야에서 설비의 운용에 관한 평균 “기술-경제적 활용기준”의 최하한선을 공개적으로 설정하는 형태를 취했다. 이 기준에 명시된 세부지표들은 다음과 같았다. 소련 서부 탄전의 채탄기당 월간 생산량 3,50톤 및 동부 탄전의 4,750톤, 남부와 서부 유전에서 실제 생산에 투입된 시추기의 월간시추속도 600미터 및 탐사시추기의 월간시추속도 280미터(동부 유전에는 이와 다른 별도의 기준을 적용.), 면방직공업의 방추 1,000개당, 시간당 생산량 454킬로카운트, 철도화차의 평균회송주기 8.8일 등이었다. 제정된 지표들은 가장 낙후된 공장들이나 노동자층까지 합산하는 바람에 수치가 지나치게 하향조정되는 “경험통계적” 기준2이 아니라 우수한 작업장이나 기계단위 또는 돌격대들이 거둔 성과를 바탕으로 정한 “선진평균적” 기준3이라는 것이 명시됐다. 아울러, 각 부처(성)에는 개별 기업소들의 구체적인 여건에 맞추어 더욱 정밀한 수치를 설정할 수 있는 권한이 부여됐다. 이와 동일한 총체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채탄공업, 목재공업 및 건설공업에 대한 기계화의 추진은 물론, 철도, 하천운송, 상선단의 하역작업의 기계화에 관한 구체적인 목표치도 함께 규정됐다.

 

소련의 경제운용을 관통하는 특유의 진취적인 기조는 1947년 1월 7일자 이즈베스티야지가 연간실적의 예비조사결과를 두고 발표한 논평에서 이미 새로운 과제들에 주목하고 있었다는 사실에서 잘 드러난다:

“국가의 지속적인 경제적 번영을 보장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미 앞서나가는 선진적인 경제부문을 더욱 전진시키는 데에 그치지 않고, 여타 개별 부문들의 낙후성을 일소해야만 한다. 이러한 일부 부문의 낙후성은 국민경제 전반의 신속한 복구와 발전을 지연시키는 걸림돌이 되기 때문이다. ⋯ 현재 연료공업, 특히 도네츠와 쿠즈네츠크 탄전 및 우랄 지역의 채탄부문은 인민경제의 전반적인 수요를 충족시키는 데에 필요한 생산속도에 아직 도달하지 못했다. 농업의 전반적인 발전과 수확량의 증대는 농업현장에 적절한 기계설비가 확충될 때만이 가능하다. 그러나 농업기계제조공업은 여전히 농업의 요구를 충족하지 못하고 있으며, 트랙터를 비롯한 각종 농기계 및 예비부품의 조달계획에 차질을 빚고 있다. 주택의 건설과 소비재의 생산 역시 여전히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어 인민의 필요를 채우지 못하고 있으며, 5개년 계획의 목표치에도 뒤처져있는 실정이다. 전기기기공장들의 생산규모 부족은 대규모 노동의 기계화와 산업공정의 전기화를 저해하는 걸림돌이 되고 있다. ⋯ 1947년에 우리 산업의 가장 중요한 과업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개별 공업부문의 낙후성을 극복하고, 이들을 가장 선진적인 공업부문의 대열로 합류시키는 것이다.”

1947년 2월 20일에, 혁명 30주년 기념일(1947년 11월 7일)까지 연간생산계획을 조기완수하기 위해 전국적으로 총력을 기울이자는 레닌그라드 15개 공장 노동자들의 공동호소문이 발표되면서, 사회주의 경쟁의 새로운 물결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이 새로운 단계의 운동에서 노동자 집회를 통해 수립된 생산서약에서는 기술적 측면에 더 많은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생산과제들이 전면에 부각됐다. 이에 대한 가장 전형적인 사례는 다음과 같다: ‘크라스니 보가티르’ 고무공장은 레닌그라드 노동자들의 선구적인 발의에 호응하여, 11월 7일까지 연간생산계획을 완수하고, 1947년 한 해 동안 150만 켤레의 갈로시(방수용 고무덧신)와 고무신발을 추가생산하기로 약정했을 뿐만 아니라, 다음과 같은 구체적인 서약을 추진했다. 1. 노동생산성을 25% 향상시킬 것; 2. 배정된 고무 할당량의 5%와 전력 50만 kWh를 절약할 것; 3. 합리화 조치와 노동자들의 창의적 제안을 통해 계획 대비 총 100만 루블의 원가절감액을 확보할 것; 4. 갈로시 공정에 새로 투입된 신입 여성노동자 600명에게 직무기술을 전수할 것.

 

이 몇 주 동안, 작업장이나 부서별 집회 및 공장전원회의에서 철저한 토론을 거쳐 채택한 이와 같은 형태의 생산서약들이 소련 신문의 1면을 장식했다.

 

1947년 한 해 동안 새로운 문제들에 대응하여 등장한 사회주의 경쟁의 새로운 형태들을 일일이 재론할 필요는 거의 없을 것이다. 이 운동이 거쳐온 이전 단계들을 지켜본 독자라면, 소련 노동자들의 무궁무진한 창의적 역량이 당면한 과제 앞에서도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발휘되었으리라는 점을 이미 충분히 짐작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1947년의 공업생산량은 1946년 대비 22% 증가했으며, 이는 소련의 전체 공업계획의 103.5%를 달성하여 지난 1946년도의 계획 미달분을 완벽히 만회하는 성과였다.4 이로써 “5개년 계획을 4년 만에!”라는 새로운 대중적인 돌격대 운동이 본격적인 궤도에 오르고 있었다.

 

1947년 11월 6일, 몰로토프는 혁명기념일 전야 연례보고5를 통해 이처럼 광범위하게 확산된 새로운 운동을 직접 언급했다:

“노동자 각자가 자기의 연간생산계획은 물론, 5개년 계획 정책을 예정보다 앞당겨 조기완수하겠다고 스스로 서약하고 있다.”

그는 이러한 실천이 전쟁 전에는 전례가 없었던 일이라고 지적하며, 현재 이 운동이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 돈바스, 그리고 전국 각지에서 비약적인 기세로 급속히 확산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이는 결코 우연한 현상이 아니었다. 바로 이 움직임이 노동생산성을 끌어올리는 데에 있어 “가장 중대한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사회주의 경쟁은 이제 모든 집단농장으로까지 확산됐다. 노동자와 집단농장 농민, 사무원, 기사, 기술자는 물론, 예술자와 과학자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모든 이들이 사회주의 경쟁에 동참하고 있다. 오늘날 이러한 경쟁의 규모와 내실은, 노동에 대한 소비에트 인민의 공산주의적 태도가 과연 어떤 수준에 도달했는지를 보여주는 확실한 지표가 되고 있다.”

 

*   *   *

 

1919년의 수보트니크 운동으로부터 1947년 수백만 숙련노동자들이 보여준 동지적 경쟁에 이르기까지, 거의 30년에 달하는 사회주의 경쟁의 오랜 역사를 되돌아본다면, 우리는 누구의 말이 옳았는지에 대해 더욱 명확한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공산주의는 한 국가의 영혼을 부패시킨다”고 단언했던 처칠이었을까, 아니면 공산주의란 “자유롭고 자각적인 규율”과 “대중적 영웅주의” 위에 서는 것이라 했던 레닌이었을까.

 

우리는 또한 소련의 계획경제체제가 정말로 말 못하고 순종적인 노예들을 영혼 없이 무자비하게 몰아세우는 병영식 통제에 불과한 것인지, 아니면 그와는 반대로 생동감 넘치는 수백만 개별 지성들의 능동적이고 비판적인 협력을 본질적인 전제로 삼고 있는 것인지를 한층 더 객관적으로 판가름할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됐다.6

 

마침내 우리는 수중에 확보한 더욱 구체적인 자료를 바탕으로, 소련의 인민들이 군사적 모험주의나 “붉은 제국주의”, “침략적 확장” 따위에 관심을 두거나 쏟을 여력이 과연 있겠는가 하는 점을 한층 더 정확하게 판가름할 수 있게 됐다. 아니면, 이처럼 근면하고 자기희생적인 인민이 실제로는 다른 그 무엇보다도 자국의 내부 건설, 즉 ‘자신들의 정원을 가꾸는 일’에 완전히 몰두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말이다.

 

번역: 김의진 | 사무위원

2026년 7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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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oviet News, 22nd January, 1947.텍스트로 돌아가기
  2. 〔역자 주〕 경험통계적 기준(опытно-статистические нормы)은 한 작업장에 있는 모든 기계와 노동자의 생산량을 모두 더한 뒤, 이를 기계의 숫자로 나누는 산술평균을 의미한다. 소련의 경제학계에서는 기술 발전을 가로막고 낙후성을 합리화하는 보수적인 지표로 강력히 비판받는다.텍스트로 돌아가기
  3. 〔역자 주〕 선진평균적 기준(среднепрогрессивные нормы)은 전체 평균값을 구한 뒤, 그 평균치 이상을 달성한 선진적인 작업장과 노동자들의 수치를 따로 모아 평균을 내는 방식이다. 낙후되고 뒤처진 공장, 작업장의 수치는 과감히 배제한 지표였는데, 스타하노프 노동자들이 달성한 성과만큼 노동자들이 따라오도록 독려하기 위한 일환으로 제시된 통계지표였다.텍스트로 돌아가기
  4. Soviet Monitor, 18th January, 1948.텍스트로 돌아가기
  5. V. M. Molotov, “30th Anniversary of the Great October Socialist Revolution”, Soviet News, 1947.텍스트로 돌아가기
  6. 이 장에서, 그리고 책 전반에 걸쳐서, 노동조합이 소련의 경제에서 수행하고 있는 중요한 역할은 간간이 스치듯 언급되는 것을 제외하고는 본격적으로 다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 이유는 노동조합원인지, 아닌지를 떠나, 기존의 소련 연구에서 노동조합에 비해 주목을 덜 받아온 노동자 개인 그 자체로서의 역할을 서술하고자 하는 본 저자의 의도 때문이다. 그러나 노동계급의 가장 광범위한 기구로서, 그리고 말단 작업장으로부터 상부에 이르기까지 민주적 선거들에 바탕을 두고 있는 만큼, 소련의 노동조합이 공업계획의 성패를 결정하는 데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예컨대, 전후 단체협약의 체결을 위한 최초의 운동(1947년)은 경제계획과 사회주의 경쟁서약(해당 주제에 관해서는 V. V. 구즈네초프 소련 노동조합 중앙평의회 의장이 “소련 프로프소유즈” 1947년 제2호”에 기고한 기사를 보라.)의 완수를 점검하기 위한 공동의 노력이었다. 1947년에 25,000건이 넘는 단체협약이 무려 1,400만 명에 달하는 노동자와 기술자를 포괄했던 소련의 공업부문과 운송부문 기업소들 사이에서 체결됐다. 단체협약은 도급율과 생산기준량, 직무훈련, 주거, 의료, 휴양시설, 식료품 공급, 공공식당에 관한 문제들을 다뤘다. 그러나 단체협약 초안에 관한 협의는 명실상부한 생산회의로 전환됐으며, 여기에는 평균적으로 약 90%의 노동자들이 참석했다. 88만 명이 넘는 현장 토론자들이 이 협의에 참가했으며, 그 과정에서 무려 70만 건 이상의 제안이 제기됐다. 그 중 절반은 고된 공정의 기계화 방안과 안전장치의 개선, 기계설비와 생산조직의 결함을 제거하는 문제를 다루는 것이었다. 이 제안들 가운데 20만 건이 최종적으로 단체협약에 반영됐다. (Soviet Monitor, 22th April, 1948.)텍스트로 돌아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