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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추상에서 구체로 상승하는, 마르크스의 방법의 유물론적 실증

마르크스의 자본론에서 추상과 구체의 변증법: 제3장 (4) 총명한 유물론 3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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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A AB AC AD AE AF AG AH AI AJ AK AL AM AN AO AP AQ AR AS AT AU AV AW AX AY AZ BA BB BC BD BE BF BG BH BI BJ BK BL BM BN BO BP BQ BR BS BT BU BV

상에서 구체로 상승하는,

마르크스의 방법의 유물론적 실증

 

추상에서 구체로의 상승을 과학적 발전이 따르는 보편적 법칙으로 정식화한 것은 헤겔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구체적인 과학적 지식 발전의 실제적 방법이 된 것은 오직 마르크스의 손에서였다. 마르크스는 그것에 유물론적 정초를 부여했는데, 반면 헤겔에게서 그것은 관념론적 해석과 적용으로 인해 오직 사변적인 과학의 과학, 즉 '전체로서 세계'의 절대적 체계를 구성하는 방법으로서만 나타났다.

 

마르크스는 이 법칙을 단지 일반적 이론적 차원에서 증명한 것이 아니라그는 그것을 구체적인 과학인 정치경제학의 발전에 실제로 적용했다. 이 방법의 도움으로 창조된 『자본론』은 이 방법의 필연성에 대한 구체적이고 광범위한 실천적 증거, 객관적 현실의 변증법과 합치하는 유일한 방법으로서 그것의 실재적인 유물론적 증명을 담고 있다.

 

『자본론』에 적용된 탐구 방법과 관련하여 『자본론』의 분석은 또한 추상에서 구체로 상승하는 방법의 구체적 본질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것은 유물론적 변증법에서 보이는 과학적 탐구의 중심 과제상호작용을 통해 역사적으로 발생하고 발전한, 그리고 자신의 존재와 내적 상호작용의 새로운 형태를 지속적으로 발전시켜나가 하나의 체계를 창조하는 현상의 구체적 상호 제약을 추적하는 과제의 해결을 확실히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이 과제는 다른 어떤 방식으로도 해결될 수 없다. 다른 어떤 방법도 그것의 도움으로 정신 속에서 재생산된 대상의 객관적 본성과 일치하지 않는다.

 

추상에서 구체로의 상승 방법의 필요성을, 단지 인간의 의식이 대상을 그 전체적 복잡성 속에서 파악할 능력이 없으므로, 원하든 원하지 않든 대상에 대한 불완전하고 일면적인(추상적인) 관념에서 점점 더 완전하고 포괄적인 인식으로 상승해야 한다는 사실에서 도출하는 것은 전혀 잘못된 것이다. 이러한 설명은 단순히 불충분하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것은 설명이 아니라 잘 알려진 사실에 대한 단순한 언급이다. 의식이 실제로 그러하다는 것은 자명하다. 그러나 의식의 모든 속성과 고유한 특징 자체가 유물론적 해명을 요구한다. 게다가 의식의 본성에 대한 그러한 언급은 통상적으로 과학적-이론적 탐구의 방법으로서 추상에서 구체로의 상승 방법의 특수성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할 것이다. 어떤 대상, 현상, 혹은 현상 체계와의 유사화(類似化)도 새로운 세부 사항을 점진적이고 질서 있게 전유하는 형태를, 대상에 대한 일면적이고 빈약한 관념에서 포괄적인(비록 여전히 경험적이지만) 관념으로의 이행 형태를 취한다. 경험적 정보의 축적으로 현실[관념이 전유한 것으로서 ‘현실’]이 [객관적 현실과] 유사해지기는 하나, 이는 “아직 인식되지는 않은” 것이며, 그 역시 일면적 인식에서 포괄적 인식으로의 발전으로 진행된다.

 

따라서 이러한 해석은 개념 속에서 구체성의 이론적 재생산이 현상에 대한 단순한 경험적 친숙화와 공통으로 갖는 추상적으로 동일한 특징만을 고려할 것이며, 양자 어느 쪽의 특수성도 표현하지 못할 것이다.

 

추상에서 구체로 상승하는 방법은 사유의 힘으로 구체적 현실을 창조하는 방법이헤겔이 제시한 것과 같은아니라, 단지 사유 속에서 구체적 현실을 반영하는 방법일 뿐이다. 바로 그러므로 이 방법을 통한 개념의 논리적 발전이 어디서 시작하고 어떤 방향으로 진행할지는 전적으로 사유에 달려 있지 않은 것이다. 마르크스가 보여준 바와 같이, 그것은 오직 구체적 전체의 다양한 측면이 서로에 대해 맺는 관계에만 달려 있다. 논리적 발전의 방법은 따라서 이 전체의 내적 구분의 방법에, 사유 외부에서의 구체성 형성의 변증법에, 즉 최종 분석에서 이 구체성의 역사적 발전에 조응해야 한다. 단, 나중에 보이겠지만, 이 일치는 결코 단순하거나 경직되거나 거울 같은 것이 아니며, 발전의 보편적 계기와만 관련된다.

 

인식론과 논리학에서 유물론의 공식은 방금 정식화된 것의 반대이다: 대상이 그러하기에, 다른 어떤 형태의 의식 활동이 아니라 바로 이 형태만이 그것에 조응한다; 대상이 그러하기에, 그것은 오직 이 방법의 도움으로만 의식 속에 반영될 수 있다.

 

달리 말하면, 여기서 논리적 활동 방식에 관한 논의는 객관적 실재의 객관적 본성에의 탐구, 즉 현실 실존(existence of reality)의 보편적 형태를 표현하는 객관적 범주로서 구체성의 범주를 더욱 정교화하는 작업이 된다.

 

여기서도 논리학·인식론·변증법의 일치라는 원칙이 지배적이다: 언뜻 보기에 순전히 논리적인 문제가 본질적으로는 객관적 구체성이 발생하고 발전하는 보편적 형태에 관한 문제다.

 

추상에서 구체로 상승하는 방법의 올바름과 필연성에 대한 유물론적 증명은 오직, 상호작용하는 현상으로 이루어진 어떤 구체적 체계의 형성에서도(그것이 사회적 관계의 자본주의적 체계이든, 태양계이든, 화학적 혹은 생물학적 형태의 상호작용이든) 동일하게 지배적인 실재적인 보편적 법칙을 논증하는 데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변증법의 익히 알려진 난점에 부딪힌다: 변증법으로의 접근 자체가 변증법적이다. 자본주의 체계가 가진 태양-형성 체계와의 공통성과 자연에서 생물학적 형태의 상호작용이 가진 전자기적 및 화학적인 것과의 공통성의 귀납적 일반화의 경로를 통해, 어떤 구체성의 형성 속에서도 지배적인 보편적 법칙을 확립하고 이론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명백히 불가능하다.

 

이런 방식으로 물음을 정식화하는 것은, 그 본성상 절대적으로 해결 불가능한 과제를 설정하는 것이다. 저자는 말할 것도 없고 인류 전체도 무한한 자연 속에서 일어나는 구체적 상호작용의 모든 사례를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객관적인 구체적 상호작용의 어떤 체계의 형성에서도 지배적인 보편적(즉 논리적) 법칙을 확립하는 과제에 직면한다. 달리 말하면, 우리는 철학의 영원한 문제 중 하나로 되돌아온다한계지어졌으며 필연적으로 유한한 일련의 사실에의 연구에 기초해서 진정으로 보편적이고 무한한 일반화를 도출하는 것이 가능한가, 그리고 가능하다면 그 과제에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가.

 

다행히, 철학은 귀납적 접근의 테두리 안에서 이것의 이해를 얻으려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과학과 철학의 실제적 발전은 그것이 형이상학적으로 정식화되는 한에서만 원칙적으로 해결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저 이율배반을 해결하는 실천적 방식을 오래전에 찾아냈다.

 

실제로, 인류는 언제나 보편적인, ‘무한한’ 일반화와 결론을, 철학에서뿐만 아니라 지식의 어떤 영역에서도, 가능한 모든 사례가 공통으로 갖는 동일한 특징을 추상하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 하나의 전형적인 사례에 대한 분석을 통해 획득해 왔다.

 

이와 관련하여 엥겔스의 『자연변증법』에 나오는 다음의 구절을 상기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귀납이 과학적 발견의 유일한 혹은 심지어 주된 형태라고도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의 놀라운 사례는 열역학에서 나타난다: 증기기관은 열을 공급하여 기계적 운동을 얻을 수 있다는 가장 인상적인 증거를 제공했다. 10만 대의 증기기관은 한 대보다 이것을 더 잘 증명하지 않으며, [그것은] 물리학자를 그것을 설명할 필연성으로 더욱더 몰아넣을 뿐이다. 사디 카르노가 처음으로 이 과제에 진지하게 착수했다. 그러나 귀납을 통해서가 아니었다. 그는 증기기관을 연구하고 분석하여, 그 속에서 문제가 되는 과정이 순수한 형태로 나타나지 않고 온갖 부수적 과정으로 은폐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본질적인 과정과 무관한 이 부수적 사정을 제거하고, 이상적인 증기기관(혹은 가스 기관)을 구성했다. 그것은 예를 들어 기하학적 선이나 면처럼 현실화 될 수 없는 것이지만, 그것 나름의 방식으로 저 수학적 추상과 동일한 역할을 수행한다: 그것은 과정을 순수하고 독립적이며 혼합되지 않은 형태로 제시한다.”1

철학이 실제로 객관적 발견에 도달한 곳마다 언제나, 철학의 방법이었던 것은 모든 특수한 사례의 일반적 특징을 표현하는 추상을 탐구하는 귀납이 아니라, 연구 중인 과정을 순수한 형태로 드러내는 것을 목표로 하는 하나의 특수한 사례에 대한 심층 분석이다. 귀납과 추상화의 경로를, 그에 걸맞은 빈약한 결과물과 함께, 따르려 한 사람은 오직 콩트나 스펜서 같은 사람들이었다.

 

철학은 언제나 악어와 목성이 공통으로 갖는 추상적 일반 특징이나 태양계와 부(富)가 공통으로 갖는 그것을 발견하려는 욕구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자신의 고유한 문제에 관여해 왔다. 철학은 언제나 자신의 진지한 문제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 해결은 철학을 존재하는 모든 것의 보편적 법칙의 확립, 범주의 내용을 드러내는 것 가까이 이끌었다.

 

마르크스가 헤겔의 보편적 범주 체계를 비판적으로 분석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이 범주를 인류가 원자핵과 공통으로 갖는 특징이나, 그 양자 모두가 거대한 우주의 구조와 공통으로 갖는 특징과 비교함으로써 그것을 행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헤겔 체계를 주로 변증법적 발전의 한 사례와의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가장 전형적인 사례와의) 비판적 비교를 통해발전의 어떤 단계에 있는 사회적 생산관계의 변증법과의 비판적 비교를 통해비판적으로 극복하였다.

 

철학을 통해 역사적으로 발전된 보편적 범주를, 최소한 하나의 전형적인 사례와 관련하여 비판적으로 극복하는 것, 그것이 보편적 범주의 내용에 대한 이해가 진화하는 과정에서 언제나 걸어온 현실적 경로이다.

 

보편에 대한 이론적 분석의 기본 과제는 실제로 언제나 보편의 관점에서 개별을 분석하는 것으로 귀착된다. 다만 개별 속에서 그것의 개별성이나 특수성이 아니라 이 사례의 보편성을 이루는 것을 가려낼 수 있어야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추상과 그것을 획득하는 방법에 대한 의식적 태도가 가장 절실히 요구된다. 왜냐하면 이론적 탐구의 가장 흔한 오류는, 실제로는 실재적인 보편적 형태가 관찰되는 특정한 일시적 상황적 일치에 불과한 것을 개별적 사실의 보편적 형태 자체로 간주할 때 저질러지기 때문이다.

 

구체성과 같은 보편적 범주의 내용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내적으로 상호작용하는 객관적 현상의 변증법적으로 발전하는 살아 있는 체계의 최소한 하나 이상의 전형적 사례를 연구해야 하며, 또 연구할 수 있다.

 

사람 사이의 자본주의적 관계 체계는 그러한 자기 발전하는 상대적으로 독립적인 체계(구체성)의 가장 전형적인 사례이다. 우리는 그것을 구체성 일반의 직접적이고 특수한 사례로 고찰할 것이며, 그 속에서 어떤 구체성에서도 나타나는 보편적 윤곽이 드러날 수 있고 드러나야 한다. 다른 영역의 자료는 그 자체로 특징적인 것인 한에서 고려될 것이다.

 

이 자료의 선택은 주관적 변덕이나 개인적 성향이 아닌 다른 이유로 결정된다. 이 선택을 지지하는 훨씬 더 무게 있는 고찰은 다른 어떤 구체성도 이것만큼 심층적으로 파악된 바 없다는 것이다. 다른 어떤 체계도 자본주의적 관계의 체계가 『자본론』과 마르크스-레닌주의 창시자들의 다른 저작에서 드러낸 것만큼, 내적 변증법의 전체적 복잡성과 그 구조의 전체적 복잡성, 그리고 구체적 상호작용면에서 사유에 이토록 온전히 제시된 바 없다. 바로 그래서, 어떤 구체성에서도 나타나는 보편적 특징을 고찰하고 구체성 일반의 범주를 해명하는 기초로서 이 자료를 사용하는 것이 가장 편리하다.

 

이 고찰 방식은 마르크스 자신이 자신의 인식적 실천에서 행한 것과 완전히 일치한다.

 

마르크스가 역사적으로 규정된 사회적 생산 체계로서의 자본주의 그 자체의 보편적 법칙을 드러내는 과제를 설정했을 때, 그는 자신의 시대에 지구상에서 일어난 자본주의적 발전의 모든 사례를 예외 없이 귀납적으로 비교하는 경로를 택하지 않았다. 그는 변증가답게 다르게 행동했다: 그는 가장 특징적이고 가장 잘 발전된 사례, 즉 영국의 자본주의적 현실과 영국 경제 문헌 속에서 그것의 반영을 취하고, 주로 이 단일한 사례에 대한 상세한 탐구에 기초하여 보편적인 경제 이론을 발전시켰다.

 

그는 자본주의 발전의 보편적 법칙이 어떤 나라에서도 동일하며, 자본주의 발전의 경로에서 다른 어떤 나라보다 앞서 나간 영국이 모든 현상을 가장 뚜렷한 형태로 보여준다는 것을 이해했다. 다른 나라에서 매우 미약하고 거의 식별 불가능한 맹아로서, 아직 충분히 형성되지 않은 채 부차적인 외적 사정으로 불명확해지고 복잡해진 경향으로서 존재했던 모든 것이, 여기서는 가장 발전되고 전형적으로 명확한 형태로 존재했다. 마르크스가 다른 나라의 자본주의적 발전에 관한 자료를 활용한 것은 몇몇 경우에 불과했다(예를 들어 지대 분석에서 그는 러시아 농촌의 경제적 발전에 관한 많은 자료를 사용했다). 자본주의적 발전의 상이한 사례 사이에서 직접적으로 공통된 특징을 확립하는 이 방식은 자본주의 발전의 보편적 이론에 도달하는 왕도가 아니었다. 그의 탐구의 왕도는 변함없이 영국의 경제적 현실에 대한 연구와 영국 정치경제학에 대한 건설적 비판이었다.

 

논리학이자 인식론으로서, 사고의 과학으로서 변증법의 범주 문제와 씨름할 때도 동일한 생각을 분명히 고려해야 한다. 『자본론』이나, 같은 계열의 다른 저작(마르크스 자신의 것이든, 그의 가장 뛰어난 제자이자 계승자, 무엇보다도 엥겔스와 레닌의 것이든)에서 이론적으로 드러난 자본주의의 현실이야말로, 역사적으로 발생하고 발전한 구체성을 구체성 일반의 가장 전형적인 사례로서 가장 포괄적인 그림으로 제공한다. 이것이 우리가 왜 『자본론』을 지금까지 변증법적 방법, 변증법적 논리학을 그 완전한 내용을 가지고 의식적으로 적용함에서 [그것을] 능가하는 것이 없는 모델로서 간주하는지의 이유이다. 그것은 수많은 과학에 그것들의 미래를 보여주며, 다른 과학에서는 아직 동일하게 일관된 방식으로 실현되지 않은 방법의 모든 측면을 전형적이고도 명확한 형태로 보여준다.

 

우리는 또한 우리 시대의 과학적 문제에 대한 이론적 정립의 필연적 계기인 이전 이론에 대한 건설적 비판이, 비판적으로 전유한 최상의 질을 가진 이론적(정신적) 자료, 즉 주어진 경우에서 주목과 탐구의 대상으로 나타나는 현실의 이론적 파악의 실제 최상의 모델을 전제한다는 것을 지적해야만 한다.

 

마르크스가 자신의 경제 이론을 발전시킴에서, 현실에 대한 자신의 이해를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그가 논쟁한 주된 이론적 상대는 속류 경제학의 동시대적 대표자나 이론의 '강단적 퇴락' 형태의 대표자가 아니라 부르주아 정치경제학의 고전적 대표자였다. 후자는 연대적으로만 마르크스의 동시대인이었을 뿐, 연구 대상에 대한 이론적 파악의 관점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이론의 측면에서 그들은 고전파에 무한히 못 미쳤으며, 결코 진지한 논쟁에 값하는 이론적 상대가 아니었다. 마르크스는 고전파와의 진지한 논쟁의 형태로 현실에 대한 자신의 이론적 이해를 전개하면서 시니어, 바스티아, 맥컬록, 로셔 등과 같은 '이론가'를 기회가 닿을 때마다 단지 조롱할 뿐이었다. 이들에 대한 비판은 연구 대상에 대한 이론적 이해가 이미 그 본질적인 면에서 전개된 뒤에야 비로소 적절했다.

 

변증법의 범주, 철학적 범주에 관한 한, 부르주아 고전 철학은 여전히 변증법적 유물론 철학에 맞서는 유일하게 값진 진지한 이론적 상대로 남아 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현대 부르주아적 체계와의 투쟁이라는 과제를 제거하지 않으며, 오히려 반대로 그것은 위대한 철학적 문제에서 도피하려는 욕구를 폭로하는 데 도움을 준다.

 

헤겔이나 포이어바흐에 대한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의 태도는 쇼펜하우어, 콩트, 마흐, 보그다노프에 대한 그들의 태도와 근본적으로 달랐다. 하찮은 관념론자의 사변을 날카롭게 비판하면서, 그들은 저들 저작에서 합리적 핵심을 찾으려 한 적이 없었다.

 

레닌은 마흐주의자의 혼란스러운 궤변적 논변을 엄중히 비판하면서, 우선 그것을 버클리와 피히테가 이 견해에 부여한 전형적인 투명하고 원칙적인 표현으로 환원한다. 이것은 단순한 논쟁적 책략이 아니라, 그들 입장의 본질을 이론적으로 드러내는 최선의 방법이다. 반면, 레닌이 유물 변증법을 더 발전시키는 과제에 직면할 때, 그는 버클리의 이론적 추종자로서의 마흐주의자를 제쳐두고, 자연, 사회, 인간 사유의 보편적 법칙을 파악하면서 부르주아 사상의 실제적 정점인 헤겔의 『논리의 학』에 대한 비판적 분석으로 돌아간다.

 

이상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논리적 발전의 유일하게 과학적으로 올바른 방법이자 객관적 변증법에 조응하는 유일한 방법인 추상에서 구체로의 상승 방법에 대한 진정으로 구체적인 증명은 마르크스의 『자본론』에서, 그것의 논리적 구조에 대한 분석에서 찾아야 한다.

 

논리학·인식론·변증법은 『자본론』에서 일관하게 일치하며, 추상에서 구체로 상승하는 방법을 특징짓는 이 체계적 일치, 귀납과 연역, 분석과 종합의 일치가 마르크스의 탐구 방법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먼저 이 문제를 그것의 구체적인 경제학적 표현 속에서 고찰한 다음, 일반적인 방법론적 및 논리학적인 결론으로 나아가기로 하자.

 

다음과 같은 물음을 제기해보자: 가치 범주가 미리 독립적으로 분석되어 있지 않다면, 잉여가치와 이윤과 같은 현상의 객관적 본질을 이론적으로 이해하는 것(개념 속에서 재생산하는 것)이 일반적으로 가능한가? 단순한 상품 시장의 운동을 지배하는 법칙을 알지 못한다면 화폐를 이해할 수 있는가?

 

『자본론』을 읽고 정치경제학의 문제에 익숙한 사람은 이것이 해결 불가능한 과제임을 안다.

 

다양한 종류의 자본 어디서나 관찰되는 추상적 특징을 순수 귀납적으로 일반화하는 것을 통해 자본의 개념(구체적 추상)을 형성할 수 있는가? 그러한 추상이 과학적 관점에서 충분한가? 그러한 추상이 경제적 실재의 특수한 형태로서 자본 일반의 내적 구조를 표현하는가?

 

이런 형태로 물음을 제기하는 순간, 그것에 부정적으로 답해야 할 필요성이 자명해진다.

 

이 추상은 물론 산업 자본, 금융 자본, 상업 자본 그리고 고리대 자본이 공통으로 갖는 동일한 특징을 표현할 것이다. 이게 우리를 되풀이에서 벗어나게 해줄 것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것의 실제적 인식적 잠재력은 소진된다. 그것은 저 종류의 자본 어느 것의 구체적 본질도 표현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그것들의 상호 연관, 상호작용의 구체적 본질을 마찬가지로 표현하지 않을 것이다. 바로 이것이 추상이 만들어내는 특징이다. 그러나 변증법의 관점에서, 개념을 통한 사유의 대상이자 목표를 이루는 것은 바로 구체적 현상의 구체적 상호작용이다.

 

레닌이 지적했듯이, 일반성의 의미는 모순적이다; 그것은 살아 있는 현실을 죽이지만, 동시에 그것에 대한 이해를 향한 유일하게 가능한 발걸음이다. 그러나 주어진 예시에서, 그 일반은 단지 구체를 죽이기만 하고, 구체로부터 멀어져 결코 구체로 동시에 다가가지 않는다. 저 일반이 추상인 것은 구체에서, 즉 ‘비본질적’인 것에서 기인한다.

 

이 추상은 또한 자본의 보편적 본성을 (어떤 자본이든산업, 금융, 상업) 표현하지도 않는다.

 

마르크스의 『자본론』은 자본주의 전체의 구체적인 측면으로서 상업 자본의 구체적인 경제적 본성은 원칙적으로 산업 자본의 내적 구조를 먼저 이해하지 않고서는 이론적 추상으로 이해하거나 표현할 수 없음을 매우 생생한 방식으로 보여준다.

 

산업 자본의 내적 규정을 고찰하는 것은 자본 일반의 본질을 드러내는 것과 같다. 산업 자본 역시 가치 이전에는 이해될 수 없다는 것도 마찬가지로 분명하다.

“ ⋯ 잉여가치의 법칙을 알고 나면 이윤율은 더는 신비가 아니다. 과정을 역으로 밟는다면, 그 어느 쪽도 파악할 수 없다.”2

여기서 핵심은 이해(개념 속에서 표현하는 것)에 있다는 점을 강조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윤 일반에 대한 추상을 형성하는 것은 물론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이다. 후자의 경우에는 경험적으로 관찰된 이윤 현상을 추상적 표현으로 환원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이 추상은 이윤 현상과 다른 현상을 확실하게 구별하고, 이윤을 '식별하는' 데에는 충분히 적절할 것이다. 이것은 이윤과 임금, 화폐 등을 매우 잘 구별할 수 있는 모든 기업가가 상당히 성공적으로 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서 기업가는 이윤이 무엇인지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는 그것을 필요로 하지도 않는다. 실천적으로, 그는 실증주의 철학과 경험 논리학의 본능적 신봉자로서 행동한다. 그는 단지 자신의 관점에서, 자신의 주관적 목적의 관점에서 중요하고 본질적인 현상에 일반화된 표현을 부여할 뿐이며, 이 현상의 일반화된 표현은 이윤을 이윤이 아닌 것으로부터 확실하게 구별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개념으로서 실천적으로 그에게 훌륭하게 복무한다. 참다운 실증주의자답게, 그는 그토록 소중한 이 현상[이윤]의 내적 본성에 관한, 이윤의 본질과 실체에 관한 일체의 이야기를 형이상학적 궤변으로서, 삶으로부터 유리된 철학적 유희로서 진심으로 여긴다. 자본주의적 생산의 조건에서 기업가는 이것 중 어느 것도 알 필요가 없다. “누구나 화폐가 무엇인지를 반드시 이해하지 않고도 화폐를 화폐로서 사용할 수 있다.”3

 

마르크스가 강조했듯이, 협소한 실천적 오성은 근본적으로 이해와 이질적이고 그것에 적대적이다(『정치경제학 비판』 제1장에서 프리드리히 리스트에 관한 언급을 참조).

 

이윤의 문제에 대해 철학적으로 사유하는 것은 기업가에게 심지어 해로울 수도 있다. 그가 그것을 이해하려 애쓰는 동안, 더 영리하고 더 실천적이며 더 적극적인 다른 경쟁자가 그의 이윤 몫을 가로챌 것이다. 사업가는 결코 현실적 이윤을 이윤이 무엇인지에 대한 이해와 맞바꾸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과학과 논증에서는 이해가 중요하다. 개념적 사유로서의 과학은 오직 의식이 자신에게 자생적으로 강요된 사물에 관한 관념을 단순히 다른 말로 표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사물과 사물에 관한 관념 양자를 목적-지향적이고 비판적인 방식으로 분석하려 시도하는 곳에서만 시작된다.

 

어떤 현상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것이 필연적으로 실현되는 상호작용하는 현상의 구체적 체계 속에서 그것의 위치와 역할을 확립하고, 현상이 전체 속에서 이 역할을 수행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바로 그 특징을 발견하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현상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것의 발생 방식을, 즉 현상이 조건의 구체적 총체성에 뿌리를 둔 필연성으로 발생하는 규칙을 발견하는 것을, 현상의 발생 조건 자체를 분석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개념개념 이해의 형성을 위한 일반적 공식이다.​​​​​​​​​​​​​​​

 

이윤을 이해하는 것은 자본주의적 생산 체계 내에서 그 기원과 운동의 보편적 및 필연적 본성을 확립하는 것이며, 전체 체계의 전반적인 운동 속에서 그 고유한 역할을 드러내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구체적 개념이 오직 그 발생 조건의 총체성 내에서 현상을 표현하는 복잡한 추상물들의 체계를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는 이유이다.

 

과학으로서 정치경제학은 역사적으로, 반복적인 현상(이윤, 임금, 이자 등)이 단순히 일반적으로 이해되거나 통용되는 용어나 명칭으로 나타내지 않는 지점(그러한 표현은 과학 이전에 과학 외부에서 실천적 생산 참여자의 의식 속에서 나타난다)에서, 즉 체계 내에 그 위치와 역할에 대한 분석을 통해 구체적으로 파악되는 지점에서 시작한다.

 

따라서 이윤을 이해하는 것(개념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잉여가치와 그 발생 법칙이 그 이전에 미리 독립적으로 파악되어 있지 않은 한 원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왜 이것이 불가능한가? 우리가 이 질문에 일반 이론적 형태를 가지고 답한다면, 그러므로 우리는 추상에서 구체로 상승하는 방법의 실제적 필연성을, 어떤 지역 영역에서도 적용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게 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정치경제학의 역사로 눈을 돌리기로 한다.

 

번역: 노준엽 | 집행위원

2026년 8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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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Dialectics of Nature, 1974, 229.텍스트로 돌아가기
  2. Capital, Vol. I, 1974, 207-8.텍스트로 돌아가기
  3. “Theories of Surplus-Value”, Capital, Vol. 4, Part. 3, 1975, 164.텍스트로 돌아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