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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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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4월 26일 새벽 2시 15분에 쓴 글

나는 이 영화를 정말 많이 보고 싶었고 또 정말로 보는 것을 피하고 싶었다.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것, 아이 중에 한 명이 죽는다는 것,

엄마가 떠난 시간을 열두살 큰애가 견딘다는 것.

한국에서 개봉하기 전부터 내내 화제였고(칸 영화제 최연소 남우주연상 수상~!)

개봉을 앞두고 모든 영화주간지가 특집으로 다루었고

필름 2.0의 손가락 평점에서는 모두가 엄지손가락을 내밀었고

본 사람들은 모두 내게 권했다. 꼭 한 번 보라고.

나는 정말정말 보고 싶으면서도 '그 슬픔을 견딜 수 있을까' 하며 피해왔다.

그런데 기회가 갑자기 왔다.

 

토요일부터 일요일까지 강촌으로 피정을 다녀왔고

모두들 깊은 낮잠을 자고 저녁을 먹으며 '롯데마트에 가자'는 얘기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싸웠고, 오랜만의 싸움은 생각보다 격렬했으며 나는 집을 나왔다.

집을 나온 건 처음인 것같은데 솔직히 말하자면 '너도 한 번 당해봐라'라는 심정이었다.

혼자서 아이 둘을 돌보는 일을 '잠깐' 혹은 '누군가를 대신해서'가 아니라

스스로의 일로 두세시간동안 견뎌보라는 것이었다.

나왔으나 갈 데도 없었고 그렇다고 엄마나 언니네 집으로 갈 수도 없었다.

어떻게 할까 생각하다가 만화방엘 가려는데 만화방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 영화를 보게 된 것이다.

 

돈이 한 푼도 없어서 돈을 찾으려다가

내 생일날 남동생으로부터 선물받은 '선물카드'라는 게 생각났다.

우리은행에서 발행한 비씨카드 표시가 있는 선물카드는

이마트에서도, 롯데마트에서도 '사용불가'라고 해서 내내 갖고만 다녔던 것이다.

출금계좌가 남편 명의의 통장이라서 돈 꺼내는 게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었고

또 한편으로는 한별이와 하은이 얼굴이 눈에 어른거려서 그냥 집에 가야하는 거 아닌가

그런 생각때문에 망설이다가 혼자 내기를 했다.

선물카드로 영화를 볼 수 있으면 보고, 못본다고 하면 집에 가자.

다행인지 불행인지 신림동 프리머스의 직원은 표를 끊어주었다.

그렇게 해서 본 영화 '아무도 모른다'

나는 화장실에 가서 두루마리 휴지를 많이 뜯어서 눈물흘릴 준비까지 했다.

그런데 영화는 가슴을 먹먹하게 할 뿐 눈물이 흐르게 하지는 않았다.

언젠가 누군가의 수기에서 그런 문구를 보았었지.

진짜 슬프고 정말 절망스러울 때에는 눈물마저 나오지 않는다고.

영화를 보는 내내 생각했다.

세상에나, '아무도 모른다'를 이런 식으로 보게 되다니.

 

인간 사이의 관계는 '깨지기 쉬운' 무언가로 이루어져 있다는 말,

그리고 산다는 것은 팽팽하게 당겨진 끈의 한쪽 끝을 잡고 있는 것과 같다는 말,

이 두 문장이 내내 생각났다.

영화 한 편을 보려면 나는 최소한 1~2주일 전에 일정을 알리고

몇 번이고 확인을 하고 하고 또 하고 난 다음에

얼른 뛰어가서 보고 또 얼른 뛰어와야했다.

하기사 그렇게본 영화는 글을 쓰기 위해 봐야했던 <말아톤>이 유일하군.

아니면 아기를 등에 업고서 혹시나 깰까봐 조마조마하며 본다.

그렇게 본 영화가 <빌리지>이다.

한별이 낳고서 극장가서 영화 본 건 저 두 편이 다다.

 

일요일저녁, 나는 팽팽하게 당기고 있던 끈을 맥없이 놓아버렸다.

허탈함에 비실거리면서도 나는 극장에 앉아서 영화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살아갈 수도 있는 거였군!

새로운 세상을 발견한 기분이랄까...

영화의 모든 장면들을, 아이들의 모든 표정들을 다 가슴에 꼭꼭 담고 싶었다.

눈물이 났던 건 영화보다도 영화 속 아이들을 닮은 내 아이들 때문이었다.

그리고..꼭 언급하고싶은 한 장면.

 

아키라, "엄마는 너무 제멋대로야"

엄마, "무슨 소리. 네 아버지가 제일 제멋대로야. 혼자 없어져버리고"

아키라, 침묵,

그리고 엄마, "엄마는 행복해지면 안돼?"

 

그래, 엄마는 행복해지면 안돼?

아빠가 다른 네 아이들.

남자들은 곧 떠났지만 여자는 남았고 자신에게 남겨진 생명들을 포기하지 않은 것뿐.

돈이 없어서 찾아간 아키라에게 아이들 중 누군가의 아빠였을 남자들은

자신은 아버지가 아니라는, 혹은 자기도 살기 힘들다는 푸념을 하며

오천엔만 쥐어준다. 어색하게 웃을 듯 말듯 하던 아키라의 검고 깊은 눈동자.

사건이 터졌을 때 세상사람들은 엄마를 죄인취급하며 손가락질했겠지만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절대 그런 시선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래, 엄마는 행복해지면 안되나?

그 네 아이를 그 나이까지 키워왔던 그 시간,

눈물과 외로움과 스산함이 마음을 뛰놀았을 그 시간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영화가 끝나고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타려는데 비가 내리고 있었다.

정류장에 서니 그때서야 준비했던 휴지를 쓸 수가 있었다.

유하은은 엄마를 많이 기다렸겠다.

결국 롯데마트를 가지 못해서 시무룩해 있다가 잠이 들었겠다.

유한별도 많이 울었겠다.

그런그런 생각을 하며 집에 돌아와 자고 있는 아이들을 안았다.

때때로 내가 지금 서있는 이자리를 후회하기도 하지만

돌아가기에는 너무 멀리 와버린 것이다.

 

아침에 하은이가 물었다. "엄마, 왜 아빠랑 싸웠어?"

나, "아빠가 엄마를 화나게 하니까"

부엌에 서있는데 하은이가 아빠한테 또 묻는 소리가 들린다.

"아빠, 어제 엄마랑 왜 싸웠어?"

남편, "어른들도 싸울 때가 있는 거야"

아파서 씩씩이 놀이방에 가지 않은 하은이는 놀다가 생각난듯 문득 얘기했다.

"엄마, 어제 어디 갔었어? 내가 엄마 들어오라고 저 문 옆에 저거 저거(걸쇠),옆으로 이렇게 풀어놓았어. 엄마, 한별이가 엄마 보고 싶다고 막 울었어. 아빠가 한별이보고 코자하라고 그랬어"

어쨌든 오늘 하루 종일 두 아이들과 행복하게 잘 지냈다.

그냥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

앞으로 주어진 이 생의 저만치 저 앞에서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을지

그건 정말 아무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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