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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케티와 자본열풍에 대하여

피케티 ‘자본’ 열풍,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사회민주주의자는 ‘소외’를 어떻게 해결하는가?

 

 

요즈음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가 쓴 ‘21세기 자본’이 2014년 프랑스사회에 돌풍을 몰고 오고 있다고 한다. 프랑스 지식인 사회에 100만부가 팔려나간 이같은 피케티 열풍은 위기에 쌓인 자본주의 시대에 구원의 등불이 될 수 있을까? 이 열풍을 지켜보는 사회운동가들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반가워해야 하는가? 경계해야 하는가? 이 어려운 물음에 대해서 한마디 던지고자 한다. 그러나 우문현답이 될 수 있는지는 섣불리 장담할 수 없다.

 

자본론은 베스트셀러가 되어야 하는가?

 

최근에 불어닥치는 피케티의 ‘21세기자본’은 마르크스의 ‘자본론’처럼 대중에게 그 내용이 알려져 있지 않다. 그래서 대중들은 더욱 피케티의 자본에 열광하는 지도 모른다. 더욱이 마르크스의 ‘자본론’이 19세기에 씌여진 것에 대조해서 ‘21세기’라는 수식어가 붙어서인지 프랑스 경제학자 피케티에 대한 막연한 열풍은 고전마르크스가 분석한 자본론과 다른 ‘21세기자본주의’가 현존하는 부르주아 경제가 자본론과 다르다는 것을 뜻하는 듯 느껴진다. 피케티가 말하는 자본이 19세기나 20세기와는 전혀 다른, 어떤 인간적 정체성이 있는 것처럼 받아들여지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건 완전한 착각이다. 자본주의는 19세기든 20세기든 21세기든 변하지 않았고, 그 속성상 인간소외물신주의를 양산하고 있으니 말이다.

 

혹자들은 이렇게 말할 지도 모른다. 마르크스의 ‘자본론’이 피케티 ‘21세기 자본’ 열풍처럼 대중적 열광을 불러오지 못한 것은 그의 잘못된 가치관 때문이지 않는가? 그간 설명한 자본주의의 대안이었던 현실 사회주의가 몰락한 것은 마르크스주의가 틀렸다는 말이지 않는가?

그러나, 이러한 논거는 적확하지 않다. ‘자본론’이 주장한 대안사회가 지구의 절반에서 실현되었고 80여년을 지켜왔으나, 1990년대에 무너지게 된 것이 대중들이 자본론을 읽지 않아서인가? 그러나, 아니다. 현실투쟁에서 밀려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실투쟁에서 이기려면 자본론에 대한 창조적인 적응력을 찾아야 한다.

 

왜 그랬는가? 물론 사회주의권 민중들이 자본론이 말하려는 바를 몰라서이기도 하지만, 자본론은 심심할 때 읽는 소설이나 시가 아니라 사회를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재구성한 ‘사회과학’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반인들은 쉽게 접근할 수가 없는 특성이 있다. 일하는 사람들, 즉 노동자계급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하며 느끼는 불만과 불합리와 인간소외를 고치기 위해서 쌓아가는 노동운동이, 평생 노동을 해도 불행해지는 잘못된 사회에 대해서, 어떻게 사회를 변화시켜야만이 인간이 노동으로 보람을 찾고 평등한 사회, 즉 사회주의가 도래하는지를 과학으로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본론은 재미있는 이야기가 아니라 암을 수술할 때 느끼는 것처럼 고통스럽게 나아가는 과정을, 그리고 그 과정이 이끄는 목적의식적인 사회에서 지켜야 할 원칙과 투쟁역사를 과학이라는 도구로 설명하였기 때문에, 논문처럼 딱딱한 이론이고, 경제학으로 서술되는 사회 물적운동 텍스트이다.

 

그래서 자본론을 이해하려면 그것을 배태시킨 토양인 고전 정치경제학의 쟁점을 알아야 하고, 마르크스가 활동한 ‘공산주의자 동맹’의 활동상을 알아야 하고, 러시아에서 최초로 사회주의혁명을 실현시킨 ‘레닌’의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역사를 조금이라도 알아야 쉽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본론’은 성경이나 세익스피어 4대 희극처럼 왜 베스트셀러가 되지 못한가? 내용이 빈약해서가 아닌가? 내용이 불순해서가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지만 아니다.

그 이유는 자본론은 유수한 문학가가 쓴 문학이 아니라 철학자가 쓴 날선 과학이기 때문이다. 단순한 시나 산문으로 씌여진 인문학이 아니고 노동자 경제학이기 때문이다. 경제학도 단순한 부르주아 경제학이 아니라 사회에서 부를 독점하고 있는 부르주아들이 가지고 있는, 이기적이고 허구적인 관념론을 사회과학이라는 비판의 칼로 법칙적으로 해부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이나 문학처럼 싯구나 명구가 남아 있기보다도, 복잡한 자본의 운동을 규명하기 위해 돈의 흐름을 추적하였고, 고전 경제학을 태동시킨 부르주아 정치경제학을 역사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농노가 임금노동자로 전락하고 지대가 부불노동으로 바뀌어진 연원을 추적하고, 그 법칙과 그 법칙이 가지는 부당성과 부후성을 맹렬히 비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학적 정서를 쌓는 인문학과는 방법이 다르기에 교양을 쌓기에는 딱딱하고, 낭만을 기대하기에는 매우 씁쓸하게 맛보아야 하는 보약처럼 반가운 내용이 아니다. 그래서 일부 목적의식적이고 계급적인 인텔리층이나 노동운동가가 아니면 섣불리 읽어지지가 않고, 사회현실을 모르는 상태에서는 쉽사리 책장을 넘길 수가 없는 것이다. 이른바 돈 버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고 사회를 해부하는 활동가들이 획득할 노동자계급의 고등경제학이기 때문이다.

 

자본론으로 지적호기심을 충족시켜야 하는가?

 

그렇다면 절대 다수는 아니지만 일부에서 왜 자본론을 공부하는가? 돈 버는 데에 전혀 도움이 안 되는 데에도 사회적 출세가 목적이 아닌데도 왜 자본론을 그리 열렬히 지지하고 있는가? 혹 지적인 악세사리가 필요해서이지는 않는가? 아니다. 자본론을 읽는 목적이 지적인 호기심이 메말라서가 아니라, 사회변혁이기에 우리 사회에서 경제적 기초가 되는 자본주의가 인간을 억압하고 인간성을 파괴하여서, 이를 말리고 회복시킬 방법이 필요해서이고, 인간간의 유대 관계를 찢는 사회경제를 비판하고 바꾸기 위해서이다. 즉 돈이 만들어낸 세상이 사회속에서 인간성 대신 돈이라는 배금주의 우상을 만들어 숭배하게 하고, 돈을 중심으로 사람을 사귀고, 돈을 위해서 반강제적으로 노동하기 때문에, 인간 본연의 유대관계를 회복시키려면, 사회의 토대인 물적 관계를 해명하고 비판하고, 바꿀 수 있는 길을 모색하고 제시하는 것이 사회운동의 내용이어서이다. 자본론을 공부하는 것은 지적인 호기심의 확대가 아니라, 비판적 지식활동의 확대이고 조직적 실천의 확대이기에, 자본론을 공부하는 것은 지적인 호기심의 충족과는 전혀 다른 실천적 인간운동이 되는 것이다. 자본론을 공부한다는 것은 부족한 지식을 습득하는 지성인의 교양활동이 아니다. 즉 부르주아 고전경제학에 대한 비판으로서 인간적인 노동 경제학을 노동자계급에게 깨우치는 혁명적 인텔리들의 실천이고 그 실천적 조직 활동이다.

 

자본론공부는 부르주아처럼 공부나 교양이 목적인가?

 

일반적으로 공부라고 하는 것은 사회지식이나 사회교양의 습득이다. 좀 사치스런 의식활동이다. 자본론을 공부하는 것도 그런가? 절반은 그렇지만 절반은 아니다. 자본론은 부르주아처럼 남들에게 부족한 학문이나 교양을 쌓기 위해서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를 바꾸기 위해서 변혁을 위해서 학문적-경제학적 수단으로 투쟁하는 것이다. 경제학을 철학혁명의 수단으로 사회변혁을 원하는 노동자계급의 해방의 무기로 삼는 것이다.

 

배웠고 교양있고 가진 사람들이 사회에서 어떤 모습을 보여주었는가? 노동자들을 무시하고 부를 자랑하고 권력을 휘두르며 자신만의 존엄을 주장하고, 목적없이 충성스런 노동을 강요하고 자신을 따르지 않는다고 굶겨 죽이지 않는가? 이런 교양에 대해서 그리고 허울투성이 지적유희에 대해서 사회막장을 선언하고 투쟁하려면, 무엇을 위해 투쟁하고, 투쟁을 해서 어떻게 바꿀 것인가를 알아가려고 자본론을 공부하는 것이다. 즉 자본론 공부는 사회를 학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회변혁을 위해서이다. 고된 노동에서 해방되기 위해서이다. 사회를 해부해서 암의 뿌리인 중노동과 장시간 노동이라는 착취구조의 암종을 잘라내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부르주아 경제학을 비판하고 해부해서 프롤레타리아트 경제법칙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것이 자본론을 공부하는 주된 목적이다.

 

노동자, 무엇을 공부해야 하는가?

 

노동자들은 생산의 주체이다. 의식주 생활에 필요한 물건을 만들어내고 사회적 가치의 생산자이며, 사회의 물적 흐름을 돌아가게 하는 생산 계급이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일개미처럼 생산을 수행하고 꿀벌처럼 사회를 떠받치는 인간 무리들이다. 사회에서 주된 역할을 수행하는 노동자라면 무엇을 공부해야 하는가를 한번쯤 생각하게 된다. 출세를 위해서인가? 아니다. 대부분은 그렇지만 노동자들도 변한다. 생산적 노동만 수행하고 기술을 습득하고 말아야 하는가? 물론 부르주아 사회의 기본 인간인 시민들처럼 학문이라는 교양을 습득해야 한다. 그러나 자신들을 번영시키고 자신의 존재를 고양시키고, 자신들의 계급을 지키고 재생산하기 위해서는, 자기 계급의 철학을 공부하고 이데올로기 토대인 경제법칙까지도 공부해야 한다. 그래서 자기가 수행하는 노동이 무슨 역할을 하고 있으며, 오늘 내가 힘들게 수행한 노동이 나와 누구를 위한 것인지, 어떻게 하면 나와 동료들이 중노동과 사회차별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를 배워야 한다. 그리고 어떻게 다른 사람을 설득하고, 어떻게 자기가 속한 노동조합을 통해서 자주성과 창의성을 발전시킬 수 있는지, 조직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들과 함께 최종적으로는 자본주의 사회를 바꾸는 사회과학을 총체적으로 습득해야 한다. 그런 지적 활동 과정이 쌓여서 혁명적 노동자당의 이론이 되고 실천이 되는 것이다. 즉 프롤레타리아트 운동의 계급 투쟁과 일상 활동에 필요한 지식과 과학적 관점을 습득하고 훈련해야 한다.

 

자본론학습, 지금이 기회이다

 

한국사회에 자본론이 번역된 지 어언 26년이 되었다. 물론 일제시대이후 조선노동당의 번역본이 있었으나 북한사회과학으로 분류된다. 그러나 아직까지 자본론 학습은 합법적인 영역이다. 하지만 사반세기(四半世紀)를 거치면서도 자본론에 대한 기피와 금지는 깨지지 않고 있다. 사회과학에 대한 정부의 탄압 때문이기도 하지만 자본주의의 필연적 위기가 자본론이 가르키는 대로 심화되지 않아서 일게다. 그러나 97년 경제위기이후 자본주의는 더욱 성장과 축적을 거듭하여 국가독점자본주의를 공고히 하였고, 모순이 총체적으로 드러났다. 이 독점자본주의는 국가와 밀착하여 국내외 노동자들을 더욱 위태로운 지경으로 몰아넣기에, 이러한 자본주의를 알지 않고는 그 구조적 착취 체제를 끝장낼 수가 없다.

더구다나, 90년대 중반 경제위기 이후에 진보정당 창당과 민주노총의 성장으로 한국사회에 사회민주주의가 뿌리내렸고 유럽식 민주주의가 복지사민주의 이름으로 한국에 정착을 시도하고 있다.

 

이러한 시점에서 자본주의 순환운동을 파악하지 않고서는, 노동자당은 투쟁방침을 내올 수 없고 노동자들에게 창의적인 투쟁을 요구할 수 없다. 근로대중들이 현실에서 느끼는 불합리가 모순인지 아닌지, 모순이라면 어떤 모순인지, 그리고 어떻게 극복하는 것이 인간적인지를 알려주려면, 노동운동가는 물론이고 사회활동가, 조직활동가라면 자본론 학습은 선택사항이 아닌 필수사항이 된다. 게다가 서두에서 밝힌대로 자본론열풍은 아니지만 대신에 ‘피케피’의 ‘21세기자본’ 열풍이 불고 있다는 것은 대중들 사이에서도 자본주의에 대한 지적인 인식대상이 되고 있다는 것이고, 자본주의에 대해서 전혀 모른다면 우리 사회에서 시민적인 지위를 얻을 수 없다는 믿음이 퍼져간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만큼 우리사회도 인문학과 사회학에까지 지적인 영역이 확대되었고, 선진노동자들의 조직화는 물론, 전문적인 영역에까지 시민들이 파고들 정도로 사회학문 민주화가 진척되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런 사회적 흐름을 놓치지 않고 사회과학 학문과 마르크스 ‘자본론’을 일반인에게 권유해주어야 한다. 극심한 자본주의 모순과 위기의 심화로 제국주의 전쟁이 발생하고 팔레스타인 양민이 학살되는 배경에 제국주의가 존재한다면, 그 물질적이고 역사적인 물적 과정을 이해하고 해부하기 위해서, 사회과학과 마르크스 ‘자본론’을 대중화할 기회로 삼아야 할 것이다.

 

자본론은 그 특성상 조직운동을 수반할 수밖에 없기에 근로대중 속에서 자본론학습자를 찾아내고 선진노동자 조직과 연관을 맺도록 해야 할 것이다. 노동운동을 대중화시키는 방법으로 대면접촉이나 즉자적 투쟁만으로는 한계가 있기에, 모든 사회과학의 중심에 ‘자본론학습’을 포함시키고, 과학으로 훈련된 자신감을 조직의 물적성과로 또는 인적성과로 남겨두고, 노동조합과 의회전술이라는 사회민주주의 일상투쟁을 이끌도록 해야 할 것이다.

 

자본주의, ‘빈곤’을 느끼는 이유가 무엇인가?

 

자본주의사회의 최대 문제점은 빈곤과 소외이다. 대중들이 ‘피케티’교수의 ‘21세기자본’에 열광하는 이유는 교양이 적어서도 학문의 끈이 짧아서도 아니다. 아무리 일해도 가난감을 느끼기 때문이고, 자신이 한 노동이 결과물인 상품으로부터 분리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원인이 대중으로 하여금 피케티의 ‘21세기자본’을 찾게 하였다고 본다. 노동할수록 가난해지고 자신이 노동하고서도 쓸 수 없는 상품이 넘쳐나고, 자신의 바램과 다르게 팔려나가고, 특정인에게 부와 성공을 가져다준다면 누구라도 노동을 증오하고 포기할 것이다. 그러나 노동은 포기될 수 없다. 인간사회의 물질적 생산운동의 근간을 이루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러한 ‘빈곤’과 ‘소외’는 즐거워야 할 노동을 고된 작업으로, 하기 싫은 작업으로 전락시키고 만다. 우리 사회의 빈곤은 물질적인 생산 결여 때문이 아니라 잘못된 생산양식과 이로부터 파생되는 사적인 욕구 실현 수단으로 전락한 ‘노동’의 사적인 전유 성격 때문이다. 일하고도 빼앗기기 때문이다. 이러한 ‘노동의 소외’는 국가주의의 등장과 함께 사회성이 거세되고, 사적인 轉有(전유) 성격으로 인해 더 악화되어 ‘물신주의’와 ‘인간소외’를 불러오고 있으며, 현상적으로는 경제공황을, 대중들에게는 '일상빈곤'과 '실업대란'으로 ‘자살폭증’이나 ‘인간파괴’, ‘범죄일상화’라는 ‘인간성파괴’의 부작용을 낳고 있다.

 

사회민주주의자는 ‘빈곤’과 ‘소외’를 어떻게 극복하여야 하는가?

 

자본주의에서 빈곤은 해결될 수 없다. 사유재산과 사적소유 때문이다. 모든 것은 자본주의적 개인을 위해서 결정되고, 사회의 물적 기초인 생산활동마저 사적인 판단으로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자본주의는 단 한 순간에 극복될 수 없다. 권력의 교체가 뒤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결론부터 말한다면 조직을 중심으로 살아가야 한다. 운동으로 풀어가야 한다. 자신이 속한 조직에서 노동이외에 의식적 활동, 즉 실천적 의식 활동으로 인간성소외를 해결하여야 한다. 조직의 방침을 만들고, 조직의 방침을 행동에 옮기고, 조직의 방침에 따라 사람을 만나고 사회적 지식을 수용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는 사적인 생산질서에 치여서 숨막히는 생활을 해야 하거나 사회의 낙오자가 되고 만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자신이 속한 노동조합에서, 민중들은 자신이 가입한 대중조직에서, 지식인은 인텔리그룹이나 진보정당에서, 폭넓게 사람을 만나고 운동의 당면임무와 의식적 활동을 소화해내고 실천함으로써, 전인격성에 버금가는 행동하는 사회인으로 태어나게 될 것이다. 여기에 상호부조환난상휼적 상부상조가 더해진다면 미래에 실현할 자발적 공유공동체사회는 우리 해방공동체 안에서 잘 자라나게 될 것이다.

 

 

 

 

 

 

 

 

2014.12.3

이스크라

민들레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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