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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The Ethereal Mirror</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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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DATA[
답변이 질문에 대한 비판에서만 구해질 수 있고, 질문 자체가 부인됨으로써만 해결될 수 있는 경우가 간혹 있다. ㅡ Marx (1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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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anguage>ko</language>
		<dc:creator>EM(mailto:)</dc:creator>
		<pubDate>Mon, 01 Dec 2008 13:16:18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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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The Ethereal Mirror</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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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답변이 질문에 대한 비판에서만 구해질 수 있고, 질문 자체가 부인됨으로써만 해결될 수 있는 경우가 간혹 있다. ㅡ Marx (1857)]]></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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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guid>http://blog.jinbo.net/ethereal/?pid=480</guid>
			<title>태국, &amp;quot;마소의 나라&amp;quot;?</title>
			<link>http://blog.jinbo.net/ethereal/?pid=480</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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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DATA[
<!--FCKeditor--><br /><br />태국 공항 점거 7일째&hellip;'미소의 나라' 먹칠<br /><br />위와 같은 제목의 기사가 우리나라 대표언론 &lt;연합뉴스&gt;에 올랐다. [<a target="_blank" href="http://www.yonhapnews.co.kr/economy/2008/12/01/0320000000AKR20081201094300076.HTML">링크</a>]<br /><br /><br />저거 쓴 기자부터 외신부장, 편집국장, 그리고 사장까지 일렬종대로 세워놓고 <br /><br />쪼인트 한대씩 x고싶다... <br /><br />(근데 기사 본문에 있는 "마소의 나라"는 대체 뭐니...?)<br />
]]>
			</description>
			<author>EM</author>
			<category>잡기장</category>
			
			<pubDate>Mon, 01 Dec 2008 13:12:29 +0900</pubDate>
		</item>
		<item>
			<guid>http://blog.jinbo.net/ethereal/?pid=479</guid>
			<title>Extravaganza!!</title>
			<link>http://blog.jinbo.net/ethereal/?pid=479</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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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DATA[
<!--FCKeditor--><br /><br />영국에 맨처음 왔을 땐 정말 아무것도 몰랐다. 정말이지 빈말이 아닌게... 난 유학이라고는 꿈도 거의 꿔본 적이 없었는데, 어찌어찌하다 보니 영국까지 흘러들어왔고, 그래서 아무런 준비도 안 돼 있었던 것이다. 영국은 물론이고 일반적으로 외국에서 생활을 한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아무런 생각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고등학교 졸업하고 나서 영어를 공부해 본적도 없었고, 뭣보다 유학생활에 가장 필요한 돈도 (사실은 시간도) 없었다. <br /><br />그렇다 보니 막상 영국에 와서는 나름대로 고생이 많았는데, 그 중에서 가장 날 괴롭혔던 것이, 지금와서 돌이켜보면, 돈과 시간을 쓸줄을 몰랐다는 것이 아니었나 싶다. 사실 나머지는 모두 부차적인 거였고, 변명거리에 불과했다. (어떻게 생각하면, 이 둘만 제대로 쓸줄 알면 인생에 아무런 걱정이 없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br /><br />어떤 "결핍"의 상태에서, 그 결핍되어 있는 것을 제대로 규모있게 쓸줄 모르는 자에게 열려있는 선택이란 그리 많지 않다. 아니, 거의 유일한 선택이 바로 "무조건 아끼는 것"이다. 그렇게 "무조건" 아끼면서 영국에서의 첫 몇 달을 보냈던 것 같다. <br /><br />그 결과는? 글쎄... 좋은 것부터 말하면, 학업에 진전이 빠르다는 주변의 칭찬과 나 자신의 자부심, 그리고 돈을 진짜 조금 썼다는 뿌듯함. 물론 나쁜 것도 있다. 일단 시간으로 말하자면, 그게 참 묘한 것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그래서 아끼면 아낄수록 더더욱 조여들어온다는 것! 이에 비하면 돈은 참으로 정직한(!) 편이었다. 아끼는 만큼 남았지만, 동시에 난, 말하자면, 그런 쪼들리는 생활을 약 7개월간 하고 처음으로 한국에 왔을 때 무려 2주동안 집에 뻗어있어야만 했다. <br /><br /><br />
<div style="text-align: center;"><font size="5" style="font-weight: bold;">*&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 *&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 *</font><br /></div>
<br /><br />이제 영국에 온 지도 3년이 넘었고, 적어도 이젠 더이상 이곳이 낯설지는 않다. (그러나 올해의 절반 이상을 포함해서 그동안, 자의에 의해서건 어떤 불가피한 일 때문이건, 한국에 있었던 것이 약 1년정도 되니까... 이걸 두고 과연 유학생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어쨌든 그렇게 시간이 가면서, 어찌어찌하다 보니, 이젠 시간에도, 돈에도, 전처럼 그렇게 "지나치게" 신경을 쓰지 않게 되었다. <br /><br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렇다고 해서 내가 시간과 돈을 "쓸줄 알게 되었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그런 문제에 전보다 훨씬 더 무뎌졌을 뿐이다. 아니, 무뎌져도 너무 무뎌졌는데... 실로 나는 지난 1년 동안 해놓은 것이 거의 없을 뿐만 아니라, 며칠전 배달된 이번달 내 은행계좌 출납표에 따르면 난 현재 매우 "럭셔리"한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Extravaganza!!<br /><br /><br />
<div style="text-align: center;"><font size="5" style="font-weight: bold;">*&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 *&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 *</font><br /> </div>
<br /><br />좀 더 분발해야겠다. 분발하는 기념으로, 노래도 한곡.. (-_-) <br /><br />Stravaganzza라는 스페인 메탈밴드인데, 저들의 무대를 보면 과연 extravaganza하다. 에... 그러니까 이름이 비슷해서 올리는 거다. 밑천이 다 떨어졌다는 뜻? ;; (아... 저런 모습을 보니, 슬퍼진다. 내 은행계좌 출납표는 내가 extravaganza한 삶을 살고 있다고 힘주어 말하고 있건만, 결코 내 삶은 저 무대위의 저들과는 전혀 닮지 않았으니...) <br /><br /><br /><br /><br /><object width="425" height="344">
<param value="http://www.youtube.com/v/eczoBx9C76M&amp;hl=ko&amp;fs=1" name="movie" />
<param value="true" name="allowFullScreen" />
<param value="always" name="allowscriptaccess" /><embed width="425" height="344" allowfullscreen="true" allowscriptaccess="always" type="application/x-shockwave-flash" src="http://www.youtube.com/v/eczoBx9C76M&amp;hl=ko&amp;fs=1"></embed></object><br /><br /><br />위 노래의 제목은 Hijo de la Luna. 원래는 역시 스페인의 3인조 Mecano의 노래였다. Mecano의 핵심은 뭐니뭐니해도 메인보컬을 맡고있는 여자(이름을 까먹었다)인데, 자랑스럽게도 그도 경제학도 출신이란다. 재밌는 것은, 그가 본격적인 음악활동을 하게된 경위인데... 어느날 저녁 자신의 지도교수인가 하는 사람의 집에서 하는 파티에 갔다가, 역시 초대되어 온 다른 두 남자 멤버들을 만났다는 거다. <br /><br />암튼 이 아름다운 선율의 슬픈 노래는 나중에 많은 이들에 의해 리메이크되기도 했는데, 대표적으로는 &lt;오페라의 유령&gt;의 히로인 Sarah Brightman과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Freddie Mercury와 함께 주제곡을 불렀던 Montserrat Caballe를 꼽을 수 있다. (이상 모두 유튜브에 가면 볼 수 있다.) <br /><br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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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
			<author>EM</author>
			<category>잡기장</category>
			
			<pubDate>Fri, 28 Nov 2008 22:48:32 +0900</pubDate>
		</item>
		<item>
			<guid>http://blog.jinbo.net/ethereal/?pid=478</guid>
			<title>한 시대가 저무는 방식: 노무현에 대한 상념</title>
			<link>http://blog.jinbo.net/ethereal/?pid=478</link>
			<description>
<![CDATA[
<!--FCKeditor--><br /><br />심상정 공동대표가 한미FTA 토론을 노무현씨한테 제안했다. 이는 원래 노씨가 자기가 만든 "민주주의 2.0"이란 곳에 올린 글에 대한 반응인데, 이런 심 공동대표의 비판 내지는 토론제안에 대한 노씨의 대답이 가관이다. (솔직히 지금 와서 보면, 뭣하러 에초에 대꾸를 했나 싶기도 한데) 처음엔 예의가 없다고 나무라더니, 심 공동대표가 예를 갖추어 다시 제안을 하니까 이번엔 "무슨 토론을 또 하냐"며 "대꾸하지 않겠다"라고 반응했다고 한다. <br /><br />
<ol>
    <li><a href="http://www.democracy2.kr/view.php?dcode=3&amp;scode=0&amp;tid=6948&amp;uid=18529&amp;fid=-18529" target="_blank">노씨의 첫 번째 글</a></li>
    <li><a href="http://www.redian.org/news/articleView.html?idxno=11593" target="_blank">심 공동대표의 첫 번째 제안</a><br /></li>
    <li><a href="http://www.redian.org/news/articleView.html?idxno=11656" target="_blank">노씨의 첫 번째 반응<br /></a></li>
    <li><a href="http://www.redian.org/news/articleView.html?idxno=11692" target="_blank">심 공동대표의 두 번째 제안</a></li>
    <li><a href="http://www.redian.org/news/articleView.html?idxno=11713" target="_blank">노씨의 두 번째 반응</a></li>
</ol>
<br />위 과정을 지켜보고 있자니 착잡한 느낌이 든다. 결국 한 인물이 저렇게 무너져 가는구나... 저 우스꽝스런 모습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아니, 정말이지 앞으로도 노씨는 저런 식으로 계속해서 "더" 무너져갈 것이다. 원래 그의 "정치적 아버지"였던 김영삼 전대통령이 그랬듯. <br /><br /><br />생각해 보면, 바로 그것이 역사의 한 순환이 (그것이 작든 크든) 마감을 하는 방식이 아닌가 싶다. 역사는,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종종 특정한 개인의 형체를 빌려 모습을 드러내곤 한다. 이것이 그 개인의 입장에서는 자못 진지한 과정일 것인데, 이를테면 위에서 언급한 전직 대통령들이 "역사적 사명" 운운할 때 그들은 진심으로 비장한 마음이었을 거란 얘기다. 그러나 그들이 그렇게 "역사적 개인"으로 거듭나는 순간, 이제 그들은 더이상 자기 자신을 통제할 수 없게 되곤 한다. (이제는 누구라도 웃으며 떠올릴 수 있게 된) 김영삼씨를 보면 이 말이 쉽게 이해된다. 즉 그의 막가파 식의 일거수 일투족을 바라보며 많은 사람들이 "저 사람 왜 저러나..."하며 위태로움을 느꼈을 것이다. 그가 그러는 것은 단순히 자기가 무슨 짓을 하는지, 무슨 소릴 하는지 잘 모르기 때문인 것이다. <br /><br /><br />그러니까 지금 노무현을 보고 있자니 그런 생각이 드는 거다. 그렇다면 현재 그가 뒤집어 쓰고 있는 "역사"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신자유주의"다. 그는 요샌 입만 열면 자긴 "신자유주의자가 아니다"라고 거품을 물곤 하는데, 이상의 맥락에서 보면 그는 "신자유주의자"라기보다는 "신자유주의" 그 자체다. 즉 그는 스스로 자기의 의지를 가지고 신자유주의에 찬성하느냐 반대하느냐와는 전혀 관계없이, 아니 나아가 그의 개인적인 능력/자질/인간됨과는 전혀 관계없이, 신자유주의와 명운을 함께 할 운명이 됐다는 거다. 불행한 일이지만 어쩌겠는가. 역사는 그를 골랐고, 그는 거기에 순순히 따랐는데... <br /><br /><br />일전에 이번 금융공황 국면을 거치며 신자유주의가 종말을 고할 것이라고 말한 일이 있는데(<a href="http://blog.jinbo.net/ethereal/?cid=1&amp;pid=471" target="_blank">링크</a>), 말하자면 대한민국에서 신자유주의는 바로 노무현과 함께 그렇게 우스꽝스런 모습으로 저물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은 토론할 때가 아니라 언젠가 마르크스가 말한 대로, "과거와 즐겁게 이별"할 때인지도 모르겠다. <br /><br /><br />
<p class="MsoNormal"><span lang="EN-US" style=""><o:p></o:p></span></p>
<div style="margin-left: 120px;"><font size="7" style="font-family: Times New Roman; color: rgb(255, 0, 0);"><span style="font-weight: bold;">&ldquo;</span></font> 역사는 철저하고, 낡은 등장인물을 무덤으로 보낼 때에 많은 국면들을 통과한다. 세계사적 등장인물의 최후의 국면은 그것의 희극이다. 아이스킬로스의 &lt;묶여있는 프로메테우스&gt;에서 이미 한 번 비극적으로 치명적 부상을 입은 바 있는 그리스의 신들은 루키아노스의 대화편에서 또 한 번 희극적으로 죽어야 했다. 왜 역사의 진행이란 이러한가? 인류로 하여금 자신의 과거와 즐겁게 이별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우리는 이 즐거운 역사적 사명을 독일의 정치적 세력들에게 요구한다. (&lt;헤겔 법철학 비판을 위하여&gt;의 '서설') <br /><br /><font size="7" style="font-family: Times New Roman; color: rgb(51, 102, 255);"><span style="font-weight: bold;">&ldquo;</span></font> ... 나는 어떻게 프랑스에서 계급투쟁이 우스꽝스러운 보통사람으로 하여금 영웅으로 행세할 수 있는 그러한 환경과 정세를 만들어 내었는가를 보여주려고 한다. (&lt;루이 보나빠르뜨의 브뤼메르 18일&gt;의 '제2판 서문')<br /></div>
<br /><br /><br /><br />((사족))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 ㅡ 그렇다고 해서, 저 망가지고 있는 역사적 인물에게 동정따위를 베풀 필요는 없다. 그는 그가 받아야 할 것을 받게 될 것이다. 이를테면 그의 정치적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a target="_blank" href="http://www.mgoon.com/view.htm?id=1219514">링크</a>). <br /><br />
]]>
			</description>
			<author>EM</author>
			<category>잡기장</category>
			
			<pubDate>Fri, 21 Nov 2008 10:29:45 +0900</pubDate>
		</item>
		<item>
			<guid>http://blog.jinbo.net/ethereal/?pid=477</guid>
			<title>나의 문제, 만인의 문제</title>
			<link>http://blog.jinbo.net/ethereal/?pid=477</link>
			<description>
<![CDATA[
<!--FCKeditor--><br /><br />동료들, 특히 별달리 할일이 없는 한국인 유학생들이랑 얘길 하다보면, 컴퓨터 특히 인터넷에 지나치게 시간을 많이 빼앗긴다는 푸념을 많이 듣곤 한다. 뭐 한국에 있을 때도 마찬가지였지만, 어쨌든 외국에 있다 보니, 자기가 인터넷에 "의존"하고 있다는 생각/걱정을 좀 더 "명확하고 심각하게" 하는 것 같다. <br /><br />그들은 대개, 이를테면 중요한 에세이를 써야할 때조차도 어느순간엔가 인터넷에 혼을 빼앗기게 되고, 그러다가 한찬 뒤에 정신을 차리곤 머리를 쥐어뜯으며 "저놈의 컴퓨터를 갖다 버리든가 해야지!" 또는 "저 인터넷 선을 뽑아버리든가 해야지!!"라며 "연장"을 나무라는 것이다. 그러나 (굴욕적이게도) 대부분은, "그래도 잘 사용하면 좋은데..."라고 자신을 합리화하며 앞으로는 좀 더 계획적으로 인터넷/컴퓨터를 대할 것을 다짐하곤 한다. (-_-) <br /> <br />뭐, 나도 그다지 예외는 아닌데... 요새 그와 관련해서 아주 중요한 발견을 (이제서야!!) 했다. 에... 그러니까, 일단 기본적으로 나는 인터넷을 그다지 많이 한다고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오히려 문제는, 그 "그다지 길지 않은" 시간을 안배하는 방식에 있는 것 같다. <br /><br />간단히 말하면 이런 거다. 내가 내 인터넷 사용행태를 대충 분석해본 결과 나의 문제는 자리에 앉아 공부를 하기 전에 인터넷을 한다는 데 있다. 즉 나의 패턴은 대충 다음과 같다. <br /><br />
<div style="margin-left: 40px;">자리에 앉는다 --&gt; 인터넷을 한다 --&gt; 이미 많은 에너지를 쏟은 뒤에 '아니 내가 뭐하고 있는겨'라고 혼자서 화들짝 놀라며 책을 편다 --&gt; 이미 많이 지쳐있으므로 별로 능률이 오르지 않는다 --&gt; 쉰다 --&gt; 다시 자리에 앉는다 --&gt; 인터넷을 한다 ... (-_-) <br /></div>
<br />그니까, 가뿐한 마음으로 자리에 앉아, 그 가뿐함을 인터넷 하느라 다 써버린 다음에 공부를 한다는 게 문제! 따라서 다음과 같이 바꿔보면 좀 더 낫지 않을까 한다. <br /><br />
<div style="margin-left: 40px;">(가뿐한 맘으로) 자리에 앉는다 --&gt; 일단 공부를 한다 --&gt; 힘들어질때쯤 인터넷을 한다 --&gt; 이미 지쳐서 어차피 오래도 못한다 --&gt; 휴식 --&gt; (가뿐한 맘으로) 자리에 앉는다 --&gt; 무조건 책을 펴! ㅆㅂㄹㅁ (-_-)</div>
<br />따라서 이제 난 쉬러 간다. (-_-) <br /><br />
]]>
			</description>
			<author>EM</author>
			<category>잡기장</category>
			
			<pubDate>Thu, 20 Nov 2008 11:34:15 +0900</pubDate>
		</item>
		<item>
			<guid>http://blog.jinbo.net/ethereal/?pid=476</guid>
			<title>I Fall Apart</title>
			<link>http://blog.jinbo.net/ethereal/?pid=476</link>
			<description>
<![CDATA[
<!--FCKeditor--><br /><br />- 가방을 잃어버렸다. 흔히 하는 말로, "눈 앞에서" 도둑맞았다.<br /><br />토요일 저녁. 먹을것을 좀 사가지고 집에 오는 길. 아는 형을 잠깐 만나서 길에서 얘길 하는 도중 가방을 옆에 슬쩍 잠시동안 뒀는데, 그 형도 나도 모르는 사이 누군가가 가지고 튀었던 거다. 어차피 별로 든 것이 없어서... 그니까 gym에서 입는 가벼운 운동복이랑 방금 슈퍼에서 산 폭탄세일 싸구려 샌드위치 2개, 사과 한봉다리, 쥬스 한통이 전부였으니... 아무리 높게 쳐도 2만원쯤 되려나... 그마저도 돈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은 방금 산 먹을거리들 뿐이니... 아, 가방도 다 낡아서 vintage라고 뻥치기도 민망한 수준이고... 그 도둑 사람 잘못 짚었다. (-_-) 그냥 허허, 웃었다. (솔직히 창피하다. 여행객이나 당하는 일--여행객을 무시하는 게 아니라--을 당하다니..;;) <br /><br /><br /><br />- 성당엘 가봤다. 친구의 권유도 있고 해서... Westminster Cathedral엘... <br /><br />일요일 오전 10시반 대미사여서 사람도 많았고 분위기도 좋았다. 특히 그 친구 말대로 소년합창단이 완전 끝내줬다. 그러나 함께 간 친구놈이 자꾸만 보채는 바람에, 특히 "봉헌" 시간에, 얼마 내야 되냐고 자꾸 칭얼대는 바람에 그냥 나왔다. (-_-) 결국 미사의 핵심인 성찬식을 못 보고 나온 셈. <br /><br />아.. 글고 보니 정말 오랜만에 가본 성당. 다음엔 혼자 가야겠다;;; <br /><br /><br /><br />- Rory Gallagher를 좋아했는데... <br /><br />어쩌다가 그저께 정말정말 오랜만에 그의 곡을 클릭했다. (아... "클릭했다"라니... "턴테이블에 걸었다"가 아니고..;;) YouTube엘 찾아보니, 마침 좋아하는 곡의 뮤비가 라이브로 있구나. 반갑다. 제목은 I Fall Apart. Rory의 솔로 1집 수록곡이다. 많이도 들었던 노래. <br /><br />별로 상관없는 얘길지 모르겠는데... 전영혁 아저씨가 음악세계를 관뒀단 소식을 일년도 더 지나서 알게 됐다. 쩝... 별로 내막을 알고싶지도 않고, 그냥 가슴이 아플 뿐이다. <br /><br /><br /><object height="344" width="425">
<param value="http://www.youtube.com/v/pkBYvscNKy8&amp;hl=en&amp;fs=1" name="movi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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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m value="always" name="allowscriptaccess" /><embed height="344" width="425" allowfullscreen="true" allowscriptaccess="always" type="application/x-shockwave-flash" src="http://www.youtube.com/v/pkBYvscNKy8&amp;hl=en&amp;fs=1"></embed></object><br /><br /><br /><br /><br />아... 노래 좋구나..... <br />Heroes die young...... <br />
]]>
			</description>
			<author>EM</author>
			<category>음악</category>
			
			<pubDate>Mon, 17 Nov 2008 10:14:39 +0900</pubDate>
		</item>
		<item>
			<guid>http://blog.jinbo.net/ethereal/?pid=475</guid>
			<title>심심풀이 퀴즈(?)</title>
			<link>http://blog.jinbo.net/ethereal/?pid=475</link>
			<description>
<![CDATA[
<!--FCKeditor--><br /><br /><br />&ldquo;모든 상품들을 다루는 하나의 상설시장이 열리고, 그리하여 누구든 자기 집을 떠나지 않고서도 화폐를 매개로 토지, 동물, 인간의 근로에 의해 생산된 모든 것들을 획득하고 즐길 수 있는 하나의 도시로 전 세계가 실제로 변해버렸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민족들 사이의 교류가 전체 지구를 가로질러 퍼졌다. 놀라운 발명이다!&rdquo;<br /><br /><br /><br />[문제] 위 구절은 어떤 책에서 따온 것입니다. 언제쯤 나온 책일까요? <br /><br /><br />
]]>
			</description>
			<author>EM</author>
			<category>잡기장</category>
			
			<pubDate>Fri, 14 Nov 2008 20:18:35 +0900</pubDate>
		</item>
		<item>
			<guid>http://blog.jinbo.net/ethereal/?pid=474</guid>
			<title>화끈해!</title>
			<link>http://blog.jinbo.net/ethereal/?pid=474</link>
			<description>
<![CDATA[
<!--FCKeditor--><br /><br /><br />별다른 뜻은 없고... 그냥 사심없이, 나는 이른바 "제3세계"의 <br /><br />이런 화끈하고 피지컬한 면모가 참 좋다. 아... 화끈해.&nbsp; [<a href="http://media.daum.net/foreign/china/view.html?cateid=100023&amp;newsid=20081113100109281&amp;p=yonhap" target="_blank"><span style="font-weight: bold;">--&gt;여기</span></a>]<br /><br />이 기회에 다 그냥 잡아 쳐 넣어부러~~ <br /><br /><br />
]]>
			</description>
			<author>EM</author>
			<category>잡기장</category>
			
			<pubDate>Thu, 13 Nov 2008 10:30:00 +0900</pubDate>
		</item>
		<item>
			<guid>http://blog.jinbo.net/ethereal/?pid=473</guid>
			<title>Historical Materialism 2008 연례 컨퍼런스</title>
			<link>http://blog.jinbo.net/ethereal/?pid=473</link>
			<description>
<![CDATA[
<!--FCKeditor--><br /><a href="http://blog.jinbo.net/ethereal"><strong>EM</strong></a>님의 <a href="http://blog.jinbo.net/ethereal?pid=333">[[진짜 참관기 1] Historical Materialism 2007년 컨퍼런스]</a> 에 관련된 글. <br /><br /><br />그러나 이번엔 "참관기"라기보단 그냥 몇 가지 느낌이다. <br />왜냐하면 그 이상은 건질 것이, 또는 건지고 싶었던 것이 없었기 때문인데... <br />이는 다른 한편으로는 나 자신이 충분한 준비 없이 이번 컨퍼런스를 맞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br />깊이 반성할 부분이다. <br /><br /><br /><hr style="width: 100%; height: 2px;" /><br />
<div style="margin-left: 40px;"><span style="font-weight: bold;">내용 : 2008년 Historical Materialism 연례 컨퍼런스</span><br style="font-weight: bold;" /><span style="font-weight: bold;">일시 : 2008년 11월 7-9일</span><br style="font-weight: bold;" /><span style="font-weight: bold;">장소 : London, UK</span><br /></div>
<br /><br />올해도 어김없이 열렸다. 올해 주제는 Many Marxisms. 솔직히 주제가 좀 맘에 안 들었는데.. 왜냐하면 별 이상한 인간들이 다 나와서 "이것도 마르크스주의다"라고 하면서 별 미친 소리를 늘어놓을 게 뻔했기 때문이다. <br /><br /><br />에... 결국 절반 이상은 예상적중! 별별 미친 인간들이 참 많았다. 다 좋다. 뭐 열심히 하는 건 좋은데... 난 그들이 왜 자꾸만 자기들의 생각을 "마르크스"와 연결짓는지 모르겠다. 뭐... 그만큼 마르크스의 영향력이 컸다는 방증이기도 하겠지만, 그래도 분명코, "나는 마르크스에게서 영감을 받았다"라고 하는 것과 "이것이 마르크스의 진정한 의도였다"라고 하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만큼 다르다. <br /><br /><br />이번 컨퍼런스는 작년 것에 비해 많이 퇴보했다. 이렇게 평가하는 까닭은, 거기엔 별다른 관점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HM은 이제 명실공히 영어권에서는 최고의 마르크스주의 학술저널로 자리를 잡았다. 그렇다면 HM이 일년에 한번 여는 컨퍼런스는 어떤 내용으로 채워져야 할까. 내가 보기엔 당연하게도 일정한 관점을 가지고 마르크스주의 이론 발전에 기여하는 것이다. <br /><br /><br />바로 이런 관점에서 보면, HM의 작년 컨퍼런스에선 마르크스주의 이론 발전의 몇 가지 단초를 (영어권에서는 거의 최초로) 보여줬다고 말할 수 있다. 하나만 예로 들자면, 바로 마르크스/엥엘스의 새로운 전집(MEGA)에 기반을 둔 새로운 연구경향을 소개했다는 점이다. 내가 보기에 이는 매우 획기적인 일인데, 적어도 HM정도 되었으면, 바로 이런 사항들을 지속적으로 발전시켜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대체 왜 HM 같은 저널이 bio-politics 같은 것까지 신경을 쓰느냔 말이다. (이는 bio-politics가 나쁘단 얘기가 아니다.) <br /><br /><br />결국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이번 컨퍼런스는 "기인열전"이었다고 볼 수 있다. 즉 세상엔 이런 별 희한한 사람들도 있더라...라는 거다. 즉 마르크스주의 건축학자, 마르크스주의 민족운동가, 마르크스주의 환경운동가, 마르크스주의 영문학자, 마르크스주의 생철학자 등등... 이런 사람들이 모두 또라이라는 게 아니다. 그들이 마르크스에게서 받은 영감을 자기 분야에서 나름대로 성실하게 발전시켜 나가는 한에 있어서는, 나는 그들을 전적으로 지지한다. 그러나 그들이 "이게 진짜 마르크스야"라고 말하려는 순간부터 그들은 지랄하는 게 된다. "진짜 마르크스"라는 게 굳이 있다고 한다면, 그건 그가 쓴 텍스트들에 대한 면밀한 연구를 바탕으로 해서만 밝혀질 수 있는 것이며, 또 그것은 일차적으로는 그가 발언하려 했던 바로 그 지적 맥락 안에서만 의미규정될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진짜 마르크스"라는 것도 그다지 입에 게거품 물고 추구할 바도 못 된다. 반드시 "그것"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는 얘기다.)<br /><br /><br />그러니까 내가 이번 컨퍼런스를 "기인열전"이라 한 것은, 거기 참석한 사람들 자체가 나름 자기들 분야에서는 괴짜로 통하기도 하겠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단 컨퍼런스를 주최하는 쪽의 "관점 부재" 때문이다. 즉 주최하는 쪽에서 어떤 생각으로, 어떤 방향성을 가지고 그런 "기인"들을 배치하느냐에 따라 이런 컨퍼런스는 "기인열전"이라는 한 편의 희극이 될 수도, 또는 (말하자면) "인생극장"이라는 한 편의 감동적인 휴먼 드라마가 될 수도, 나아가 세상을 바꾸는 전투적 이론의 산실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br /><br /><br />그러나 불행히도 이번 컨퍼런스는 첫 번째 경우로 귀결되었다는 게 내 생각인데... 더 불행한 일은, 바로 그런 까닭으로, 내가 커다란 흥분을 가지고 참석했던 작년 컨퍼런스 역시 이제와서 돌이켜 보면 바로 그 "기인열전"의 전편으로 판명나게 되었다는 점이다. <br /><br /><br />뭐.. 물론 그렇다고 해서 지나치게 절망할 필요는 없겠다. 이런저런 과정을 거치며, 좌충우돌하면서도 뭔가 나아지는 게 생기기 마련이니까. 이를테면, 지난해 "기인열전"에서 소개된 자크 비데(Jacques Bidet)의 책 두 권이 --특히 둘 중 하나는 아주 오랜 시간을 거슬러-- 영어로 번역된다거나 하는 것처럼 말이다. (<a target="_blank" href="http://www.brill.nl/default.aspx?partid=18&amp;searchtext=bidet&amp;type=1"><span style="font-weight: bold;">참조</span></a>)<br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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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EM</author>
			<category>For Marx(-ism)</category>
			
			<pubDate>Wed, 12 Nov 2008 20:19:53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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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다시 금융공황에 대해. 좀 더 길게</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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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DATA[
<!--FCKeditor--><br /><a href="http://blog.jinbo.net/ethereal"><strong>EM</strong></a>님의 <a href="http://blog.jinbo.net/ethereal?pid=471">[최근 금융공황에 대한 단상 - 신자유주의의 운명?]</a> 에 관련된 글. <br /><br />위 글을 요약하면서 내용을 좀 더 추가해봤다. <br /><br /><hr style="width: 100%; height: 2px;" /><br /><br />요즘 범지구적 금융공황을 맞으면서 신자유주의의 운명에 대해 말들이 많은데, 앞의 글은 거기에 초점을 두고 전개해봤다. 많은 이들이 이번 공황을 두고, 신자유주의의 종말이냐 강화냐, 또 만약 종말이라면 그 대신 케인스주의가 부활할 것이냐 하는 물음을 제기한다. <br /><br />그에 대해 나는 이번 금융공황은 명확하게도 신자유주의에 대한 사형선고라고 (또는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신자유주의를 케인스주의와 대비시키는 것은 &ldquo;격&rdquo;에 맞지 않는다고 하면서, 먼저 케인스주의를 다시 볼 것을 제안했다. 그에 따르면. 커다란 관점에서 봤을 때, 케인스주의는 특정한 정책들의 단순한 조합이라기 보단 적어도 19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계속된 경제영역에서 국가의 역할에 대한 별 성과 없는 논란ㅡ오늘의 관점에서 봤을 때 이것이 얼마나 무모한 논쟁이었는지를 깨닫는 데는, 당시에 이른바 &ldquo;야경국가론&rdquo;이라는 게 꽤 진지한 사람들에 의해 제안되기도 했었음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족하다ㅡ에 종지부를 찍는, 말하자면 국가의 불가피성에 대한 (최초의, 그리고 조직적인) 공공연한 인정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는 거였다. 나는 이런 인식상의 발전은, 특히 오늘의 관점에서 보면 더 명확해지듯이, 진정으로 인류사적인 의의를 갖는 것으로, 그리하여 한번 습득하게 되면 쉽게 돌이키거나 물릴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고 했다. (이런 의미에서 그것을 굳이 &ldquo;케인스주의&rdquo;라고 부를 까닭도 없다고 했다. 비록 그런 외피를 뒤집어쓰고 나타나긴 했지만.) 이렇게 보면, 20세기 특히 중반부에 서구의 선진국들에서 광범위하게 전개된 사회복지정책과 산업의 국유화 등은 위와 같은 인식을 극단에까지 몰아붙인 것ㅡ그것이 좋으냐 나쁘냐는 논외로 하더라도ㅡ이라고 볼 수 있겠고, 신자유주의는 그런 움직임에 대한 우파의 역공세였다고, 그러나 어떤 &ldquo;필연적인 것&rdquo;에 대한 도전이었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무모하고 그래서 애초부터 엄청난 희생을 치룰 수밖에 없었던 역공세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br /><br />한편 케인스주의가 등장한 이래 경제 및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국가의 역할이 (그렇게 큰 저항 없이도) 비약적으로 커질 수 있었던 것은 당대의 특수한 역사적 상황, 한 마디로 동서냉전의 결과이기도 했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그에 대한 반작용이었던 신자유주의 또한 바로 그 냉전의 산물인 셈인데, 그렇다면 결국 이번 범지구적 금융공황은 바로 그 신자유주의를 끝장냈다는 점에서 &ldquo;장기 20세기&rdquo;의 종료선언이라고 볼 수도 있는 것, 그리고 향후 전개될 사태를 대비하는 것도 바로 이상과 같은 인식 위에서 이뤄질 필요가 있다는 게 내 주장이었다. <br /><br /><br /><br />좀 더 구체적으로는, 특히 신자유주의의 운명과 관련해서 쓴 앞의 글에서 나는, 지금으로부터 70-80년 전에 케인스주의에 의해 처음으로 공공연히 표명되었으나 지난 20-30년 사이에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무참하게 짓밟힌 인류사적 인식의 발달을 다시금 공언함과 동시에, 그것을 범지구적 차원에서 돌이킬 수 없는 상식으로 만들 필요가 있다고 했다. 그것은 곧, 우리가 &ldquo;경제&rdquo;라고 부르는 영역, 즉 아담 스미스로부터 헤겔을 거쳐 마르크스에 이르기까지 근대사회의 위대한 과학자들이 하나같이 &ldquo;사적 개인&rdquo;의 영역이라고 불렀던 그 &ldquo;경제&rdquo;라는 영역에는, 단순히 사적 개인에게만 맡겨둘 수 없는 것들, 공공의 이름으로 관리되거나 보장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들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물론 마르크스였다면 이런 영역의 존재 자체를 자본주의의 &ldquo;모순&rdquo;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왜냐하면 근대세계에서 &ldquo;경제&rdquo;란 <span style="font-weight: bold; text-decoration: underline;">본질적으로</span> &ldquo;사적 개인&rdquo;의 영역이기 때문이고, 따라서 그 경제 영역에서 공적인 것의 존재를 인정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근대의 모순을 넘어선다는 의의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br /><br />어떤 이들은 이런 주장이 구태의연하다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실제 현실을 보면 결코 그렇지 않다. 즉 서유럽의 몇몇 선진국들을 빼면, 이른바 후발국들 내지는 저개발국들에서 위에서 말한 &ldquo;공공성&rdquo;이라는 것이 얼마나 헌신짝처럼 취급되고 있는지를 떠올려보라. 우리나라만 해도 그렇고, 심지어 미국도 그렇다. 어떤 이들은 우리나라나 기타 제3세계에서 오히려 공공성이 훨씬 잘 보존되고 있다고 주장할지도 모른다(이를테면 이런 사회들에는 토속적인 것이 비교적 강하게 남아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그것은 오히려 그런 곳에서 자본주의적 제도ㅡ특히 소유권과 관련된 제도ㅡ가 제대로 확립되지 않았음을 보여줄 뿐이다. 즉 그런 공공성이란 헤겔식으로 말한다면 &ldquo;지양되지 않은 공공성&rdquo;, &ldquo;직접적 공공성&rdquo;일 뿐으로, 자본주의가 자리를 잡아감에 따라 그런 공공성은 아주 급속하게, 극도로 냉혹한 &ldquo;개인주의&rdquo;로 변모할 것이고, 또 그것이 우리가 지금까지 후발국의 자본주의 발달사에서 목격해온 바이기도 하다. <br /><br />이 대목에서 우리는, 이런 제3세계 나라들이 본격적인 자본주의화의 길을 걷기 시작했을 때, 또는 (한국처럼) 자본주의화의 본궤도에 오르기 시작했을 바로 그 때, 선진국들 특히 미국과 영국을 중심으로 신자유주의라는 것이 출현했음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사실 돌이켜보면 신자유주의란 국내적인 정책이었다기 보단 대외정책의 성격이 매우 강했다. 어쨌거나 적어도 1980년대 초반부터 세계 최강대국들은 제3세계에 신자유주의적인 형태의 자본주의, 일찍이 그 어디에서도 실제로 실행된 적이 없었던 지나치게 도그마화한 형태의 자본주의, 그래서 단순히 실행 불가능한 형태의 자본주의를 강요해 왔고, 결과적으로 그런 지역들에서는 (대체로 국가가 관리하고 보장해야 할) &ldquo;공공성&rdquo;이라는 개념 자체가 <span style="font-weight: bold; text-decoration: underline;">제도적으로</span> 발달할 기회 자체가 없었던 것이다. <br /><br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런 요구들이 <span style="font-weight: bold; text-decoration: underline;">범사회적 차원</span>에서도 제기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아마도 공정하게 평가한다면, 공공성의 제도적 발달이 외부의 압력에 의해 인위적으로 저지되고 지체된 것만큼이나, 그것의 사회적 발달은 (대체로 선진 사회들과의 교류 속에서) 반대로 지나치게 급속하게 이뤄졌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어쨌거나 이런 제도발달과 사회적 의식 및 요구의 발달 사이의 부조화는 이른바 자본주의의 후발국들과 제3세계 나라들에서 심각한 사회문제(우리나라의 비정규직 문제처럼)와 함께 엄청난 사회적 갈등을 낳고 있는 실정이고, 바로 그런 의미에서 세계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이런 지역들에서는 여전히 경제에서의 국가의 역할 문제, 즉 이른바 &ldquo;경제&rdquo;라는 영역에서 공적으로 확보되고 관리되어야 할 영역의 존재 여부에 대한 문제는 여전히 주요한 투쟁의 장으로 남아있다. (하지만 여기서, 이런 지역들에서 그런 역할의 문제가 제기되는 <span style="font-weight: bold; text-decoration: underline;">방식</span>이 어떤가를 다시금 강조할 필요가 있다. 즉 아주 놀랍게도, 많은 경우에, 그 역할의 문제는 &ldquo;<span style="font-weight: bold; text-decoration: underline;">정도</span>&rdquo;에 대해 제기되는 게 아니라 &ldquo;<span style="text-decoration: underline; font-weight: bold;">여부</span>&rdquo; 자체에 대해 제기된다는 사실이다.) <br /><br /><br /><br />바로 이와 같은 상황이기에, 오늘날 국가의 역할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다. 물론 앞의 글에서도 단서를 달았듯이, 여기서 &ldquo;국가&rdquo;란 그저 사회에서 어떤 공적인 것의 (최종적인) 현실의 담지체를 의미할 뿐이다. 따라서 그런 공적인 것을 반드시 국가가, 그것도 아주 투명하게 표현할 것이라고 볼 필요는 없으며(그렇게 한다면 그게 &ldquo;국가 물신성&rdquo;이다), 오히려 우리는 그렇게 믿는 무리들을 경계해야 한다. 하지만 반대로 특히 위에서 대략적으로 묘사한 것과 같은 상황에 있는 후발국들이나 제3세계에서는 여전히 &ldquo;국가&rdquo;라는 이름으로 실행되어야 할 것들이 너무도 많다는 점도 (뿐만 아니라 선진국들에서도 역시, 그런 의미에서 지난 20여 년 사이에 신자유주의 하에서 이뤄진 엄청난 훼손과 후퇴를 회복시켜야 한다는 점도) 우리는 잊으면 안 된다. <br /><br />이번 범지구적 금융공황을 통해, 이제껏 내가 해묵은 인류사적 지혜라고 불렀던 것, 즉 경제에서 공적인 것의 존재 또는 국가의 역할에 대한 믿음이 공공연해지는 것의 의의는 바로 위와 같은 배경에서 이해될 필요가 있다. 즉 일부 선진국에서는 그런 지혜가 이미 상당부분 상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이 지구상의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그렇지가 않다. 그것은 말하자면 많은 나라에서 주요한 이데올로기적 대립의 장이었으며, 지난 20-30년 사이에는 특히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폭력 앞에서 공공성을 옹호하는 세력들이 수세적인 위치에 있었던 게 사실이다. 따라서 범지구적 금융공황을 통해 결국은 &ldquo;금융&rdquo;이라는 현대자본주의의 핵심 중의 핵심이 그 자체로 사실은 공공적인 것이었음이 만천하에 드러난 지금, 그리하여 (그동안 금융에는 자율적이고도 자생적인 조화로운 운동양식이 있다고, 그러니 금융은 그냥 놔두라고 줄곧 외쳐왔던) 신자유주의가 극적이고도 필연적인 종말을 고한 지금, 그리고 그 이데올로기적 공백이 &ldquo;케인스주의&rdquo;라는 다소 애매모호한ㅡ그러나 그렇게 나쁘지는 않은ㅡ이름으로 채워지고 있는 지금, 우리는 그 낡았지만 새로운 &ldquo;공공성&rdquo;이라는 가치를 (이를테면 &ldquo;인권&rdquo;과 같은) 범지구적, 전인류적 상식으로 격상시킬 호기를 맞았고, 따라서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 <br /><br /><br /><br />한편 이렇게 이제껏 주요한 이념적 및 실천적 투쟁의 장이었던 것이 상식의 영역으로 옮겨지는 것은, 그와 동시에 <span style="font-weight: bold; text-decoration: underline;">새로운 투쟁의 장(들)</span>이 형성될 것을 필연적으로 요구할 것이다. 내가 보기엔, 그중 가장 중요한 것들 중 하나가 국제적인 영역에서 형성될 것이다. 바로 <span style="font-weight: bold; text-decoration: underline;">국제적인 차원에서 범지구적 경제체제의 관리</span>. <br /><br />앞서 글의 한 덧글에서도 지적했듯이, 사실 이 문제는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다. 케인스주의 아래서 성립된 브레튼우즈 체제가 그 가장 대표적인 예이며, 이후 출현한 국제무역기구(WTO)도 비슷한 정신을 구현하고 있다. 문제를 굳이 &ldquo;경제&rdquo;라는 것으로 한정짓지 않는다면 그 기원은 더 끌어올려진다. 하지만 지금까지 이런 노력들은 그다지 성공적이지는 못했는데, 오늘의 관점에서 봤을 때 그것은 그런 문제가 제기될 만한 여건이 성숙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비록 &ldquo;당위&rdquo;의 차원에서는 제기될 수 있었지만) 평가할 수 있다. 요컨대, 국제적인 문제를 적극적으로 사고하기엔 각국이 자국 내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가 너무 많았을 뿐만 아니라, 또 국제무대에서 독자적으로 또는 &ldquo;이기적으로&rdquo; 행동했을 때 얻을 수 있는 것이 많았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 더해 다양한 이데올로기적인 문제도 있었을 것이다. <br /><br />그러나 범지구적 금융공황을 맞이한 지금, 선진 각국을 중심으로 현재 우리가 속해있는 이 체제는 진정으로 범지구적으로 작동하는 체제라는 점이 공공연하게 인정되고 있다. 이것은 정말이지 매우 획기적인 사건이다. 이제껏 보수적/반동적 세력들은, 이미 150년 전에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에 필연적임을 과학적으로 증명해낸 바 있는 위기들이 닥칠 때마다, 대체로 그것을 &ldquo;체제&rdquo;의 문제로 보기를 거부해왔다. 대체로 그들은 그런 위기들이, 이를테면 1997-98년의 국제통화금융공황을 맞았을 때도 그랬듯, 자본주의 체제와는 별로 상관이 없는 외부적인 그 무엇 때문에 빚어진 것이라고 (당시엔 예컨대 동아시아의 유교적 특성 때문이라는 식으로) 변명을 둘러대곤 했던 것이다. <br /><br />같은 맥락에서, 이번 범지구적 금융공황 국면에서 현재의 자본주의 체제가 &ldquo;범지구적&rdquo;으로만 작동하는 체제라는 사실이 대체로 승인되고 있는 분위기 또한 매우 이례적인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다시 1997-98년의 경우를 떠올리면, 당시 좌파들 사이에선 그 문제를 &ldquo;범지구적 자본주의&rdquo;의 위기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었음에 반해, 우파들은 끝끝내 그 문제를 오로지 &ldquo;동아시아&rdquo;의 문제로, 또 같은 맥락에서 1996년의 사태는 &ldquo;러시아&rdquo;의 문제로, 그리고 1994년의 사태는 &ldquo;중남미&rdquo;의 문제로 축소/왜곡해 왔던 것이다. 요컨대, 이번 금융공황에서 특징적인 것은, 그동안 정말로 어처구니없게 부정되어왔던 또 하나의 사실, 즉 현재 우리가 속해있는 체제는 &ldquo;범지구적 자본주의&rdquo;이며, 그 안에서 우리가 주기적으로 맞는 위기들은 바로 그 &ldquo;체제 자체의 문제&rdquo;임이 은연중에 공언되고 있다는 점이다. (바로 이런 미세하지만 의미 있는 차이/변화를 감지해내고, 나아가 그것을 발판으로 좀 더 많은 &ldquo;공간&rdquo;을 확보해 나가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를테면 이번에 선진국들이 특히 중국이나 일본에 대해 그들이 세계경제에서 차지하는 위상에 걸맞은 역할을 요구하고 있는데, 한편으로 이는 선진국들이 자기들의 책임을 일정하게 회피하려는 수작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현재의 문제가 &ldquo;진정으로&rdquo; 범지구적인 것임을 그들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음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br /><br /><br /><br />나는 이와 같은 사태의 극적인 전개는, 그 자체로 현대 세계가 도달해있는 일종의 물적 발전의 수준을 반영한다고 생각한다. 그 물적 발전이란, 말하자면, 지금으로부터 약 70-80년 전에, 그 전까지는 국가가 굳이 나서서 적극적인 역할을 하지 않아도 되었지만 이제 더 이상 그런 상태가 지속될 수 없게 되었을 때, 즉 사회경제영역에서 국가가 적극적으로 도맡아야 할 일련의 역할들이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을 때 도달했던 바로 그 물적 발전의 새로운 수준에 상응하는 것이다. <br /><br />그 당시에 어땠는가. 다시 말하지만, 국가의 역할 인정은, 한편으로는 자본주의 체제의ㅡ그리하여 자본가들의ㅡ요구이기도 했지만, 단순히 특정한 체제의 문제로만 환원할 수 없는 근본적인 수준에서의 물질적 발전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이미 위에서 설명한 대로, 이후 (적어도 서유럽의 선진국들에서는) 국가의 역할은 일정한 범위 안에서 점점 더 강화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 과정이 엄청나게 치열한 쟁투의 과정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바로 그 국가의 역할이라는 문제는, 그것이 처음으로 적극적이고 광범위하게 인정된 지 80년이 지난 뒤에도 지구상의 대부분의 곳에서는 &ldquo;도달해야 할 그 무엇&rdquo;으로 남아있는 실정이고, 그 사이에 우리는 신자유주의라는 엄청난 반동의 시기를 겪기도 했다. <br /><br />이와 같은 역사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새로운 역사의 문턱 앞에 있는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바는 분명하다. 바로 역사는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것. 물론 그런 교훈을 배우기 위해 우리는 뭣보다 먼저, 우리가ㅡ이제껏 내가 말했던 바에 따라 표현하자면ㅡ&ldquo;국가의 역할&rdquo; 문제를 넘어 &ldquo;범지구적 경제체제의 국제적 관리&rdquo;의 문제를 제기하는 방향으로 전진해 나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그 전제조건으로서 나는 &ldquo;국가의 역할&rdquo;에 대한 부분이 인류의 상식으로 격상되어야 한다고도 말했다.) 이를테면 현재 좌우를 막론하고 많은 이들이 &ldquo;제2의 브레튼우즈 체제&rdquo;와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우리는 위와 같은 이해와 깨달음을 바탕으로 이런 문제들을 좀 더 진지하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 즉 막연한 이상주의적인 상념에 따라 그런 제안에 열광하는 것도(또는 바로 그런 이유로 그것을 거부하는 것도), 반대로 그것이 현실 옹호적인 케인스주의적인 발상이라고 단순하게 거부하는 것도(또는 바로 그런 속셈으로 그것을 지지하는 것도) 결코 바람직한 태도라고 볼 수 없다. 이 대목에서 가장 기본적인 사항은, 그런 제안들이 이제는 거부할 수 없게 된 현실의 물적 발달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다. (어떤 때는 단순한 &ldquo;깨달음&rdquo;만으로 많은 것이 이뤄지기도 한다. 특히 인식하지 못한 사이에 뭔가가 내적으로 쌓여있을 때는 더욱 그렇다. 이를 위에선 &ldquo;물적 조건&rdquo;의 축적이라고 했다. 이럴 때 하나의 깨달음은, 단 한번의 자극만으로도 그 내적으로 쌓인 것들을 한꺼번에 조직해주고 그로부터 엄청나게 긴 의미의 연쇄를 만들어내 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깨달음이 실천으로 보충되지 않는다면 헛될 것임은 물론이다.) <br /><br /><br /><br />글이 쓸데없이 길어진 것도 같은데, 마무리하면서 두 가지만 다시 강조하겠다. 첫째, 이번 범지구적 금융공황을 통해 명백해진 신자유주의의 패퇴를 명확히 하고(사실은 이것 자체가 하나의 과제다) 이를 사회경제 영역에서 (주로 국가를 통해 제도화되어 온) &ldquo;공공성&rdquo;을 범지구적 차원에서 확립하는 계기로 발전시켜야 한다. 둘째, 이런 과정에서 지배계급들에 의해 추진되는 여러 조치들에서조차 현실의 물적 발전의 추이가 필연적으로 드러남을 인식하고 이에 대응하며, 동시에 좌파 나름의 공간을 확보해나갈 필요가 있다. (끝)<br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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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
			<author>EM</author>
			<category>잡기장</category>
			
			<pubDate>Thu, 06 Nov 2008 13:33:51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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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최근 금융공황에 대한 단상 - 신자유주의의 운명?</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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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CKeditor--><br /><br />요즘 범지구적 금융위기 와중에 신자유주의의 종말 또는 강화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많다. 신자유주의가 끝나고 이제 새로운 케인스주의 시대가 올 것이라는 사람도 있고, 이번 위기를 통해 신자유주의는 더욱 강력하게 거듭날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의 장차 운명을 논하기에 앞서 그것이 정녕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br /><br />많은 경우에 신자유주의는 이른바 케인스주의와 대비되곤 하는데, 거기서부터 얘기를 시작하는 것도 좋겠다. 결론부터 말하면, 나는 신자유주의를 케인스주의에 대한 반응으로 이해하는 것에 반대한다. 그것은 지나치게 단순하고도 위험한 성격규정이다. 우리가 흔히 &ldquo;케인스주의&rdquo;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것은 사실은 질적으로 상이한 여러 가지 차원들을 가지고 있다. 그 중 특정한 차원에서는 신자유주의가 케인스주의에 대한 반응이었다고 봐줄 수도 있겠지만, 결코 그것은 오늘날 케인스주의라는 이름으로 요약되는 전체상(像)에 대한 반응으로 볼 수는 없다. 그러기에 신자유주의는 너무도 취약하다. <br /><br /><br /><br />그런 차원들 중에서 두 가지가 주요하다. 하나는 정책적인 차원, 다른 하나는 이념적인 차원. 여기서 특히 내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두 번째인데, 사실 케인스주의라는 것이 처음 나타난 지 70년도 넘은 지금 와서 중요한 것도 바로 그것이다. 케인스주의가 담고 있는 이념적 내용이란 결국 경제영역에서 국가의 의의를 적극적으로 인정할 필요가 있다는 데 있다. 즉 비로소 케인스주의를 통해, 인류는 [좀 더 정확히는 &ldquo;서구세계는&rdquo;] 정부의 역할이나 경제에의 개입 정도에 대한 지난하고도 성과 없는 논쟁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게 되었고, 우리는 정부라는 실체를 경제행위의 당당한 주체로 [좀 더 엄밀히는 &ldquo;경제의 일부로&rdquo;] 상정할 수 있게 된 것이다. <br /><br />여기서 반드시 강조해둬야 할 것은, 위와 같은 사항이 우리가 &ldquo;케인스주의&rdquo;라고 부르는 [구체적으로 그것을 어떻게 정의하든 상관없이] 일련의 이념체계 자체의 내재적인 힘에 의한 결과는 아니었다는 점이다. 말할 것도 없이 그것은 일정한 역사적 배경, 즉 우리로 하여금 필연적으로 정부[또는 국가]를 경제의 일부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일련의 역사발달을 사후적으로 추인해주는 매개에 다름 아니었단 얘기다. <br /><br />바로 이런 까닭에, 흔히 &ldquo;케인스주의&rdquo;로 요약되곤 하는 경제영역에서의 국가의 의의에 대한 인식은, 그 자체로 인류의 역사적인 인식의 발전의 표현으로서, 역사가 아무리 요동을 쳐도 쉽게 뒤집어엎거나 되돌릴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반대로, 바로 그런 의미에서 이런 인류의 발전을 &ldquo;케인스주의&rdquo;라고 요약하는 것도 한편으로는 매우 잘못된 일이라 할 것이다. <br /><br /><br /><br />이에 비하면 &ldquo;신자유주의&rdquo;는 한낱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과연 거기에, 위에서 케인스주의가 담아내고 있다고 한 바와 같은 [비록 그것이 케인스주의의 옹호자들에 의해 적극적으로 의도된 바는 아니라 할지라도] 어떤 인류사적 지혜가 있는가? 몇몇 신자유주의 옹호론자들은 아담 스미스나 기타 19세기 경제학자들을 들먹이며 애써 &ldquo;시장 대 국가&rdquo;라는 대립쌍을 강화시킴으로써 자신들이 끼어들 여지를 만들고, 또 나아가 그런 바탕 위에서 &ldquo;시장&rdquo;을 옹호하려 했지만, 지금 범지구적 공황이라는 국면에서 명명백백해졌듯이 그런 시도는 앞서 묘사한 것과 같은 인류사적 인식의 발전을 뒤집을 수 없다. <br /><br />사실 신자유주의는 케인스주의라는 이름으로 표방되는 경제영역에서의 국가 역할 내지는 개입을 부정하지도 않았다. 이는 적어도 1970년대 말 이후 미국이나 영국 등에서 국가가 얼마나 자주, 그리고 유례없는 수준으로 경제영역에 개입해왔는지를 보면 명확해 진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이른바 &ldquo;신자유주의&rdquo;의 진정한 안식처는 오직 &ldquo;말&rdquo;의 영역이었을 따름이다. 최근 장하준 교수는 영국 일간지 &lt;가디언(The Guardian)&gt;에 기고한 글에서, 미국의 신자유주의란 한마디로 &ldquo;내가 하는 대로 하지 말고, 내가 말하는 대로 해&rdquo;라는 정책이라고 비꼰 바 있다. <br /><br /><br /><br />물론 신자유주의가 케인스주의에 반대해서 나타난 것과 같은 겉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는,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일련의 사태전개 속에서 이른바 &ldquo;케인스주의&rdquo;에 벌어진 &ldquo;변형&rdquo;을 고려해야만 적절하게 이해될 수 있다. 한 마디로 말해, 이 &ldquo;변형&rdquo;이란, 케인스주의가 단순히 국가역할을 인정하는 수준을 넘어 &ldquo;지나치게 멀리&rdquo; 나갔음을 가리킨다. 물론 그것은 동서냉전이라는 특수상황, 그 안에서의 체제경쟁, 또 일정부분 그 결과로서 서방진영 내에서의 공산주의 창궐 등을 배경으로 한다. 즉 각종 사회복지의 비약적인 확충, 누진세의 광범위한 도입을 통한 부의 재분배, 엄청난 규모의 산업 국유화 등등의 결과로 경제에서 국가의 비중이 매우 특수한 방식으로 커졌다는 것. 사태의 이와 같은 발달들은 굳이 &ldquo;케인스주의&rdquo;라고 불릴 만한 이유가 없는데도 [대체로 나중에] 부당하게도 &ldquo;케인스주의&rdquo;라는 이름으로 뭉뚱그려지곤 했던 것이다. <br /><br />말하자면 &ldquo;신자유주의&rdquo;가 반대한다던 케인스주의란 결국 이렇게 특수하게 변형된 케인스주의, 그 변형의 정도가 너무 심해서 케인스주의라고 부를 수조차 없는 케인스주의, 그리하여 케인스주의라기보다는 사회주의적 정책이라고 불리는 것이 일견 타당한 그 무엇에 다름 아니었던 것이다. 즉 신자유주의가 반대한 것은 대체로 위에서 간략히 묘사한 것과 같은 국가의 &ldquo;과잉&rdquo;이었지 국가 자체가 아니었던 것이며, 그에 대한 반응인 한에서는 신자유주의라는 것도 냉전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겠다. <br /><br />물론 매우 극단적인 신자유주의론자들 중에는 국가의 역할을 완전히 부정하는 이들이 없지는 않다. 어쩌면 그런 반응은, 국가의 &ldquo;과잉&rdquo;에 대한 비판이란 어떤 의미에서는 필연적으로 국가의 &ldquo;불필요성&rdquo;에 대한 옹호로 연결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불가피한 것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 뿐만 아니라 1970년대 특히 서구 선진국을 중심으로 한 광범위한 경제위기를 겪으면서 국가의 역할에 대한 엄청난 불신이 쌓였음을 떠올리면, 그런 극단적인 주장이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시점에서는 어느 정도 명확해 졌듯이, 역사는 국가의 역할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과 같은 극단적인 주장들을 점점 더 주변화했다. 요컨대, 1970년대의 거대한 실패의 충격이 사람들의 뇌리에서 사라져감에 따라, 즉 1970년대의 쌔처(Margaret Thatcher)에서 2000년대의 블레어(Tony Blair)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신자유주의는 [적어도 그 언어의 강도 면에서는] 놀라울 정도로 말랑말랑해졌던 것이다. <br /><br /><br /><br />내가 보기에 이번에 주로 선진국들과 그 주변국들을 휩쓸고 있는 금융공황은, 위와 같은 극단론자들을 포함한 신자유주의라는 매우 역사-특수한 맥락에서만 그 생명력이 유지될 수 있는 말 그대로의 &ldquo;이데올로기&rdquo;에 대한 사형선고에 다름 아니다. 사실 우리는 그와 비슷한 류의 사형선고를 이른바 현실사회주의의 몰락에서 보았다. 결국 위의 설명을 종합해 본다면, 신자유주의야말로 바로 그 현실사회주의에 대한 가장 적확한 우파적 대응물이라 할 수 있겠는데, 이런 의미에서 보면 우리는 비로소 신자유주의의 몰락을 통해 &ldquo;장기 20세기&rdquo;의 진정한 종말을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br /><br />그렇다면 이제 무엇이 올 것인가. 글쎄 아직은 이에 대해 누구도 명확한 답을 내놓을 수 없을 것 같다. 다만 내가 보기에, 실제로 그것이 무엇이든, 앞으로 우리가 진입하게 될 새로운 세계에서는, 이미 약 70-80년 전에 케인스주의에 의해 공공연히 선언되었으나 최근 약 20-30년 사이에 신자유주의에 의해 심각하게 위협받았던 인류사적 지혜, 즉 경제영역에서 국가의 의의에 대한 인식이 하나의 상식으로 자리잡게 될 것임은 분명하다. 이데올로기에 휘둘려왔던 꼴통들이야 지금 똥인지 된장인지 분간을 못하고 지멋대로 떠들고 있지만 [우리나라의 경제관련 최고 수장 두 분(대통령과 장관)을 떠올리면 된다], 이제껏 신자유주의의 &ldquo;합리적&rdquo; 옹호자였던 사람들, 즉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또는 글로벌리제이션이라는 이름으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자본주의에서 벌어진 국가의 &ldquo;과잉&rdquo;에 반대했던 합리적인 옹호자들은, 그들이 이제껏 알고는 있었지만 결코 입 밖에 내지는 않았던 진실을 공공연하게 발설하고 있다. 즉 그런 이들의 입에서조차 이제는 &ldquo;금융시스템은 국가의 일부다&rdquo;라는 이야기가 공공연히 나오고 있으며, 사실 이는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어차피 신자유주의는 &ldquo;말&rdquo;, 그것도 아주 취약한 체계를 가진 말뿐이었으므로, 그것을 가장하는 것만큼이나 그것을 부정하는 것도 쉽다.] <br /><br /><br /><br />글을 끝맺기 전에 세 가지를 확인해둘 필요가 있다. 첫째, 이제껏 계속해서 강조한 인류사적 발달, 즉 경제영역에서 국가의 의의에 대한 인식은 비록 그것이 케인스주의라고 불리는 것은 매우 부당하지만, 한동안은 불가피하게 그렇게 불리게 될 것이다. 이름이야 뭐 아무려면 어떻겠냐만, 중요한 것은 그것이 뭐라 불리든 그 핵심을 잊지 않는 것이며, 반대로 그것이 비록 케인스주의라고 불릴지언정 결코 케인스주의는 아니란 사실이다. <br /><br />둘째, 그 인류사적 발달이란 것이 아무리 거스를 수 없는 것이라 해도, 신자유주의와 같은 새로운 반동적 형태가 출현하지 말란 법도 없다. 계속된 투쟁이 필요한 이유다. <br /><br />셋째, 비록 이 글에서 &ldquo;국가&rdquo;가 강조되었기는 하지만, 그것을 물신적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사실 내가 이제껏 국가라고 했던 것은 보편적으로 말해 공동체적인 것 일반에 해당한다. 현실적으로 말해서, 사회의 경제영역에서 국가의 의의를 인정한다는 것은, 경제라는 것이 결코 고립된 개인이 모든 것을 떠맡는 곳이 아님을, 거기엔 공동체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있음을, 나아가 개인의 행위라는 것도 사실은 바로 그 공동체성 안에서 진정한 의미를 발휘할 것임을 인정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따라서 국가를 물신화하지 않는 첫걸음은 국가만이 그런 공동체적인 것을 체현하고 있는 것은 아님을, 그리고 때로는 국가는 공동체성을 오직 기만적으로만 반영함을 잊지 않는 것이다. 어쨌거나 바로 그러한 사항을 인류의 공공연한 상식으로 만드는 것은 현재 범지구적 금융공황의 국면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중요한 과제들 중 하나이며, 또 결국 그것은 상식이 되고 말 것이다. <br /><br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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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EM</author>
			<category>잡기장</category>
			
			<pubDate>Mon, 03 Nov 2008 00:46:29 +0900</pubDate>
		</i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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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uid>http://blog.jinbo.net/ethereal/?pid=470</guid>
			<title>할로윈</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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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DATA[
<!--FCKeditor--><br /><br />할로윈이다. 하루종일 이상한 분장과 차림을 한 사람들. <br />얘들은 이상한 게, 밤에만 그렇게 하고 나오면 될 텐데, <br />대낮부터 (어떤 이들은 심지어 아침부터) 그러고 다닌다. <br /><br /><br />할로윈, 하면 당연히 Helloween의 "Halloween"이다. <br />그 유명한 Keeper of the Seven Keys 앨범에 들어있는 곡. <br />고등학교때 남들 자율학습하는데 복도에서 불러제끼며 돌아다니던.. 그런 추억이 있는 곡이다. ;; <br /><br /><br /><object height="344" width="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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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m name="allowscriptaccess" value="always" /><embed height="344" width="425" src="http://www.youtube.com/v/yOAl0enE7kI&amp;hl=en&amp;fs=1" type="application/x-shockwave-flash" allowscriptaccess="always" allowfullscreen="true"></embed></object><br /><br /><br />이 노랠 듣고 있자니, 어김없이 그 시절이 생각난다. <br />고등학교 다닐때부터 대학교 1학년때까지, 누가 제일 좋아하는 밴드가 뭐냐고 물어보면, <br />단연코 대답은 Kreator였다. <br /><br />고동학교 다닐땐 집이 대로변에 있어서, 학교갔다가 밤에 집에 오려면 사람도 없이 차만 쌩쌩 달리는 그 큰길을 지나쳐와야 했는데, 그럴때 Kreator의 노랠 들으며 흥분하면 따라부트곤 했다. 바로 다음과 같은 노래다. (YouTube에 만족스런 동영상이 없길래 소리만 나오는 것으로 링크..) <br /><br /><br /><object height="344" width="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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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m value="always" name="allowscriptaccess" /><embed height="344" width="425" allowfullscreen="true" allowscriptaccess="always" type="application/x-shockwave-flash" src="http://www.youtube.com/v/FPb0OE73YKo&amp;hl=en&amp;fs=1"></embed></object><br /><br /><br />위 노래의 제목은 "Europe after the Rain"으로, <br />어딘가에 돌아다닐 가사를 찾아서 보면 알겠지만, 매우 심각한 곡이다. <br />나중에 Kreator를 더 좋아하게 된 계기도 바로 이들이 전하는 메시지의 진중함 때문이었다. <br /><br />암튼, 위 노래는 특히, 내가 대학교 2학년 때던가... <br />과에서 무슨 자리에서 불렀던 적도 있다. (-_-) <br />아마도 학과 사람들과 별로 안 친한 게 그것 때문이지 싶기도 하다...;; <br /><br /><br /><br />으아... 노래는 두곡밖에 안 올렸지만 한동안 이어폰 끼고 볼륨 이빠이로 해놓고 <br />이것저것 많이도 들었다. 아.. 그때는 죽을때까지 저런 음악만 들을 줄 알았는데...... <br /><br /><br /><br />물론 그래도 10월의 마지막 날이니... Barry Manilow의 When October Goes도... <br />이노랜 정말 슬프다..<br /><br /><br /><br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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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EM</author>
			<category>음악</category>
			
			<pubDate>Sat, 01 Nov 2008 10:20:31 +0900</pubDate>
		</i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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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uid>http://blog.jinbo.net/ethereal/?pid=468</guid>
			<title>EM Wood on 제국주의 and 서구정치사상</title>
			<link>http://blog.jinbo.net/ethereal/?pid=468</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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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DATA[
<!--FCKeditor--><br /><br />예전에 하비(David Harvey)와 우드(Ellen Meiksins Wood)에 관한 간단한 글을 하나 쓴 적이 있다. <br />(가만... 그러고 보니, 우드도 "EM"이군. ㅎㅎ) <br /> <br /><a href="http://blog.jinbo.net/ethereal?pid=411">[Harvey v. Wood on "정경분리"?]</a><br /><br />위 글은 어떤 인터넷 매체에 실린 글에 대한 일종의 논평이었는데, 거기서 나는 하비보다는 우드가 한수위라고 말했고, 그 판단은 지금도 변함없고 앞으로도 바뀌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직간접적으로 접한 바에 따르면 하비도 굉장히 멋진 사람일 것 같은데... 그래도 이론적으로는 좀 떨어진다는 게 내 생각이다. 암튼! 바로 그 우드를 어제 봤다. 무슨 globalisation에 대한 강연 시리즈 중 하나였다. <br /><br />1942년생이니 우리 나이로 치면 예순일곱. 결코 적지 않은 나이인데도, 외모에서도 말투에서도 전혀 "나이"를 느낄 수 없는 강연이었다. 말투가 어찌나 힘차고 또박또박한지... 그래, 마치 힐러리 같았다. 물론 "내용"으로 치자면, 도저히 힐러리의 입에서는 나올 수 없는 것들을 내놓았지만 말이다. <br /><br />강연 내용이야 뭐 그다지 큰 건 없었다. 한시간 남짓 한 강연에서 뭘 얼마나 바라겠는가. 그를 잘 모르는 사람에겐 강렬한 인상을 줌으로써 흥미를 유발하고, 그를 좀 아는 사람에겐 평소 그에게 궁금했던 것들을 직접 물어보고... 뭐 이런 것 아니겠는가. 물론 나처럼 그냥 한번 직접 보고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만족하는 사람도 있겠고. <br /><br />그러니까 내용은, 전작인 &lt;자본의 제국&gt;(<span style="font-style: italic;">Empire of Capital</span>)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굳이 더 덧붙인다면, 거기에서 더 나갔다기보단 후퇴했다고 하는 게 더 적절할 것 같다. "방향성"으로 보자면 그렇단 얘기. (가끔 오해하시는 분들이 있어서 덧붙이자면, 비록 "후퇴"의 겉모습을 보였지만, 그건 꽤 성공적이었단 게 내 생각이다.)<br /><br />&lt;자본의 제국&gt;에서 그는 오늘날 "미 제국"의 성격을 "진정한 자본주의적 제국" 즉 과거의 제국들처럼 형식적 지배나 경제외적 폭력에 의존하지 않고 오로지 "경제적 강제"를 통해, 즉 "등가교환이라는 외양을 띈 잉여수취"를 통해 다른나라, 나아가 전세계를 지배하는 체제로 규정한 바 있다. 이번 강연에서는, 이런 주장을 예컨대 &lt;자본의 제국&gt; 출판(2003년 초) 이후의 사태추이를 반영하는 등의 방식으로 업데이트했다기보단(하비라면 이렇게 했을 거다), 그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서구정치사상의 사회적 기반들을 더 파헤침으로써 궁극적으로 그 주장을 좀 더 설득력 있게 만들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br /><br />내가 우드를 높게 보는 것도 바로 이래서다. 그는 결코 중심을 잃는 법이 없다. 내가 보기에 그의 이론적 작업에서 핵심은 바로 (위에서 링크한 글에서 다뤘듯) "자본주의 사회에서 정치와 경제의 분리"라는 문제를 파헤치는 것이다. 즉 그는 바로 이런 분리를 자본주의를 과거 다른 사회들과 구분해주는 가장 기본적인 특징으로 놓고서 작업을 전개해 나간다. 그는 이를테면 실제 자본주의의 역사를 파헤침으로써 이 테제의 물적기반을 강화시키기도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br /><br />이른바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의 이행"을 둘러싼 굵직굵직한 논쟁들에 직접 개입하여 예의 그 "분리" 테제를 중심으로 그것을 재평가하기도 하고, 이번 "미 제국"을 둘러싼 논쟁과 같이 현대적인 이슈들에도 역시 그 "분리" 테제에 기반을 두고 개입하기도 한다. 물론 이런다고 해서 우드에게, "분리' 테제로 모든 것을 환원시킨다는 비난 따위를 할 필요는 없다. 그런 것이 가능한 것은 오히려 그 "분리'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더 나아가, 그런데도 이른바 이론가들이 얼마나 그것에 무지한가를 알려줄 따름이다. <br /><br />바로 이렇게, 핵심적인 테마들을 몇 가지 정해놓고, 오랜 세월에 걸쳐 그것들을 여러 방면으로 갈고닦아 나가는 것... 그 구체적인 결과물이 어떤 것이든 상관없이 일단은 누가 봐도 존경할 만한 태도가 아닐까 한다. <br /><br />아, 어제의 강연은 사실은 자신의 새로나온 책에 기반을 두고서 행한 것이었다. 책 제목은: <span style="font-family: Verdana; font-style: italic; font-weight: bold;">Citizens to Lords: A Social History of Western Political Thought from Antiquity to the Middle Ages</span> (London, 2008). 우드의 책들이 대체로 그렇듯, 주어진 주제를 아주아주 깊이 파고든다거나 또는 (그래서) 읽기 어렵다거나 하지는 않은 것 같다. (<a target="_blank" href="http://www.versobooks.com/books/tuvwxyz/w-titles/wood_e_citizens_to_lords.shtml"><span style="font-weight: bold;">책정보 링크</span></a>)<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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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EM</author>
			<category>잡기장</category>
			
			<pubDate>Fri, 31 Oct 2008 00:16:54 +0900</pubDate>
		</item>
		<item>
			<guid>http://blog.jinbo.net/ethereal/?pid=467</guid>
			<title>The Doors - People Are Strange</title>
			<link>http://blog.jinbo.net/ethereal/?pid=467</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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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DATA[
<!--FCKeditor--><br /><br /><a href="http://blog.jinbo.net/ethereal"><strong>EM</strong></a>님의 <a href="http://blog.jinbo.net/ethereal?pid=135">[짐모리슨의 목소리가]</a> 에 관련된 글. <br /><br /><hr style="width: 100%; height: 2px;" /><br />
<div style="text-align: right;"><font size="4"><span style="font-weight: bold; font-family: Verdana; font-style: italic; color: rgb(255, 0, 0);">People <span style="color: rgb(51, 102, 255);">Are</span> Strange</span></font><br /></div>
<br /><br />Doors 노래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것 중 하나. <br /><br />아무래도 런던에 살기 시작하면서 특히 더 좋아하게 된 듯. <br />(이탈리아인 친구 마띠아가 기타로 연주해준 뒤로는 더더더 좋아하게 됐다.) <br /><br />"이방인"에 대한 노래로는 아무래도 Sting의 Englishman in New York이 유명한 것 같다. <br />그 곡에선 스스로 자신을 alien이라 부르기도 하지만, 그 세련된 선율에 실려오는 <br />Sting의 부드러운 목소리는, "이방인"도 다 같은 이방인이 아니란 느낌을 깊이 심어준다. <br /><br />에... 그러니까 뉴묙에 잠시 출장나온 영국인과 <br />고향을 잃고 쫓겨나온 이라크 난민이, 결코 "같은" 이방인일 수는 없는 것이다. <br />결국 Sting의 노래는 위의 그 영국인이 느낄 법한, 그런대로 "즐길만한" 이질감을 담아낸 것 같고, <br />Doors의 People are Strange는 굳이 후자에 대한 것이라고까진 못해도 <br />대체로는, 이방인이라는 이유로 남의 눈총을 받고 위축되어야만 하는 사람들에 대한 것 같다. <br /><br />(물론 그 이라크 난민한테는 People Are Strange도 사치일 것이다. <br />며칠 전 런던에서 또 폭탄테러를 저지르려는 줄 알고 한 경찰관이 <br />또 하나의 "이방인"을 총으로 쏴 죽였다. 물론 그는 결백했다.) <br /><br />어쨌든 런던에 처음 왔을 땐 정말 그랬다. <br />가사에 나오듯... 누구도 내 이름을 몰라주고, 어딜 가도, 무얼 해도, <br />모두 다 나만 빤히 바라보면서 자기들끼리 수군대는 것 같고... <br />저 노래에서, 계속 짐모리슨 혼자 노래하다가 곡의 끝부분에 가면<br />합창을 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바로 그 대목에 이르면, <br />지금까지 그저 흘끔흘끔 곁눈질로만 내게 눈총을 보내던 이들이, <br />한꺼번에 몰려나와서 나를 둘러싸고 손가락질을 하는 것 같아 얼굴이 화끈거리고... <br />그러다가도 나도 같이 완전 맛탱이 가서 그들과 함께 깔깔대며 춤추고... (-_-) <br /><br /><br /><br />자, 노래방 버전(!)이다. <br />슬며시 따라부르다 보면, 흥도 제법 난다. ^_^ <br /><br /><br /><br /><object height="344" width="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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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EM</author>
			<category>음악</category>
			
			<pubDate>Wed, 29 Oct 2008 13:02:59 +0900</pubDate>
		</item>
		<item>
			<guid>http://blog.jinbo.net/ethereal/?pid=466</guid>
			<title>Camel - Never Let Go</title>
			<link>http://blog.jinbo.net/ethereal/?pid=466</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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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DATA[
<!--FCKeditor--><br /><br />요새 Camel을 듣는 회수가 부쩍 늘었다. <br /><br />보고싶은 밴드 하나만 꼽자면 단연 Camel이다. <br />그런데 이렇게 영국에 있으면서도 못 본다는 게 천추의 한이다. <br />2003년 투어를 끝으로 완전히 활동을 접었기 때문이다. <br /><br />아래 연결된 Never let Go는 Camel의 1973년 1집 Camel에 들어있는 곡이다. <br />YouTube에 보니까 나중에 Andy Latimer가 부른 것도 있고, <br />Caravan의 Richard Sinclair가 부른 것도 있던데... <br />내가 듣기엔 원래 이곡의 목소리인 Peter Bardens가 최고다. <br /><br />Andy의 목소리는 지나치게 굵고 낮으며, <br />Richard Sinclair는 약간 더 미성이긴 하지만 Peter Bardens의 분위기를 살리진 못한 것 같다. <br /><br />아래 영상은 화면에 나오는 대로 1973년 것이고(1집 앨범이 나온 그 해다), <br />보컬은 키보드를 함께 맡고 있는 Peter Bardens다. <br /><br /><br /><object height="344" width="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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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m name="allowFullScreen" value="true" /><embed height="344" width="425" src="http://www.youtube.com/v/YbqaKyVEFjU&amp;hl=en&amp;fs=1" type="application/x-shockwave-flash" allowfullscreen="true"></embed></object><br /><br /><br /><br />아.. 좋다... ㅠㅠ<br />
]]>
			</description>
			<author>EM</author>
			<category>음악</category>
			
			<pubDate>Sun, 26 Oct 2008 12:56:31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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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uid>http://blog.jinbo.net/ethereal/?pid=463</guid>
			<title>마르크스의 전성시대?!</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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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DATA[
<!--FCKeditor--><br /><br />요새 금융공황이 전세계를 휩쓸고 있다. 세상이 마치 끝날 것처럼 여기저기서 호들갑을 떨지만, 이런 상황에서 이득을 보는 이들도 적지 않다. 얼마전 BBC에서는 본의 아니게 불경기 덕분에 매출이 급증한 구두수선공 이야기를 짤막하게 보여주기도 했고, 실제 내 주변에 있는 대만이나 일본과 같은 아시아 인접국들에서 온 유학생들도 요새 환율 때문에 속으로는 싱글벙글하고 있다. (그러니까 나같은 한국인들만 죽을 상이다.) <br /><br /><br />이런 세태 속에서 호황을 맞고 있는 또 하나의 분야가 바로 이른바 "마르크스 산업"이다. 아닌게 아니라 요새 어디만 가면 다들 마르크스 타령이다. 마르크스가 결국 옳았다는 얘기가 여기저기서 들려오고, 학교를 중심으로 곳곳에서 마르크스와 공황을 주제로 한 크고작은 강연 등등이 거의 매일 열리고 있다. 무슨 신문보도를 보니까 독일에서는 &lt;자본론&gt; 등 마르크스의 저서들이 날개돋친듯이 팔리고 있다고 한다. <br /><br /><br />그런데 사실 우리에게 이런 풍경이 전혀 낯선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에선 적어도 지난 약 20년 사이에 마르크스 열풍이 크게 두 차례나 있었다. 첫 번째 것은 1980년대 말 대학가를 중심으로 일었던 열풍이다. 나야 직접 겪은 것은 아니지만 선배들의 이야기를 듣거나 각종 기록들을 보면 정말 그 열기가 엄청났음을 알 수 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김수행 선생께선 서울대 교수가 될 수 있었고, 그의 강의에는 매번 1천명 이상이 몰려들었다 한다. 뿐만 아니라 이 당시에 나왔던 서울대 경제학과 석박사학위 논문들을 보면 절반 이상이 마르크스나 그와 관련된 주제들에 집중되어 있음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현재의 모습만 봐서는 도무지 우리나라에서 일어났다고는 볼 수 없는 일들이지만, 달리 생각해 보면 우리나라였기에 가능했던 일들이 아닐까 싶다. <br /><br /><br />두 번째 열광의 시기는 바로 지금으로부터 약 10년 전인 이른바 "1997-98년 금융통화위기" 당시다. 이때도 역시 전사회적으로 마르크스라는 이름이 다시금 환기되었다. 물론 이건 1980년대 말의 그것에 비하면 애들 장난수준이었지만, 그래도 그 사이에 현실사회주의의 몰락과 신자유주의의 공세 등에 의해 사회가 한참 우경화되고 있었음을 떠올리면 아주 놀라울 정도의 반전이었다고 평가해야 한다. <br /><br /><br />하지만 이런 갑작스런 마르크스에 대한 열광이 우리나라에서만 있었던 것은 아닌데, 그 가장 비근한 예를 우리는 2001년 이른바 "닷컴 붕괴"를 전후한 시기 미국 등 선진국들에서 볼 수 있다. 이 때도, 월스트리트를 중심으로 마르크스, 특히 &lt;자본론&gt;의 인기가 잠시 반짝였다. (내 기억이 맞다면 요상한 형태로 재출간되기도 했던 것 같다. 음... 확신할 수는 없다.) 웃기는 일이지만, 네그리(Antonio Negri)와 하트(Michael Hardt)의 &lt;제국&gt;도 이런 분위기에 편승해서 인기를 누리기도 했었다. <br /><br /><br />이렇게 보면, "마르크스 산업"이야말로 가장 대표적인 "불황산업"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어쨌건 그것은 가장 최근의 "호황" 이후에 약 8년여 만에 다시금 호황을, 그러나 이번엔 그야말로 전지구적 규모로 호황을 맞고 있다. 현재의 이런 마르크스에 대한 열광(?)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br /><br /><br />
<ol>
    <li>일단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인 홉스봄(Eric Hobsbawm)은 얼마전 BBC 라디오 인터뷰에서, 이번에 맞고 있는 마르크스 열광은 지난번 즉 2000년대 초의 그것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지적한 바 있다. 위에서도 썼듯이 당시엔 주로 월스트리트의 금융귀족들을 중심으로 국지적으로 반짝인기가 일어났을 뿐이지만, 이번엔 그 범위나 강도 면에서 그때와는 다르다는 것이다. 과연 일리있는 지적이다. <br /><br /></li>
    <li>하지만 역시 위에서 언급했던 우리의 경험을 함께 떠올려 보면, 어쩌면 범위나 강도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얘기할 수도 있다. <span style="FONT-WEIGHT: bold; TEXT-DECORATION: underline">열광의 범위와 강도가 크면 클수록 그것이 빠져나가는 광경 또한 더욱 스펙타클한 장관을 이룰 것이라고</span>. 나는 그렇게 되는 것을 바라는 것은 당연히(!) 아니지만(결국은 나도 "마르크스 산업"에 종사하는 1인이니까ㅎ), 솔직히 그렇게 될 것이 많이 걱정되고 또 그런 가능성이 안그럴 가능성보다 더 높다고 본다. 사실 그런 징후는 지금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렇게 얘기할 수도 있다. <span style="FONT-WEIGHT: bold; TEXT-DECORATION: underline">현재의 마르크스 열광은 우리가 마르크스에 대해 얼마나 무지한지만을 드러내줄 뿐이라고</span>. 잘 살펴보면, 여기저기서 마르크스 얘길 많이 하기는 하는데, 내용이 별로 없다. 많은 이들이 &lt;공황=마르크스&gt;라는 매우 단순화된 등식에 기대고 있는 것 같은데, 그건 말하자면 &lt;무신론=니체&gt; 등과 같은 말도 안 되는 등식이다. 대체 니체가 무신론을 어떻게 했다는 것인가? 대체 마르크스가 공황을 어떻게 했다는 말인가?? <br /><br /></li>
    <li>나는 대중의 무지를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사실 대중들의 언어에서는 "마르크스가 옳았어"라고 탄식 내지는 감탄을 하는 것만으로도 족할 수도 있다. 문제는 그 너머에 있다. 즉 그와 같은 대중들의 짤막한 한마디 사이사이에 있는 공백을 채워주고 가꿔줘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는 자들이 문제라는 얘기.이런 의미에서 내가 보기엔 요새 가장 문제가 언론이다.우리나라 언론이야 뭐 그저 입 헤~ 벌리고 "마르크스가 옳았다니까!"라는 탄식인지 감탄인지 모를 일성(一聲)을 질러대는 정도의, 그러니까 그저 회사원들이 막간을 이용해 회사옥상에서 담배 꼬나물고 주고받는 짧은 대화에도 못 미치는 논평을 내놓고 마는 정도이지만, 어쩌면 그래서 (적어도 이 점에 있어서는) 그 해악도 그리 크지 않을 지 모르겠지만, 최근에 영국에서 나온 몇몇 기사들은 아주 별로였다. <br /><br /></li>
    <li>일단 우리나라 기사 하나: '<a style="FONT-WEIGHT: bold" target="_blank" href="http://www.heraldbiz.com/SITE/data/html_dir/2008/10/17/200810170119.asp">마르크스가 살아났다</a>' &lt;헤럴드 경제&gt;. 이 기사를 보시면, 위에서 내가 묘사한 것이 결코 과장이 아님을 누구라도 느낄 수 있을 거다. (아.... 기자님하, 대체 뭘 어쩌라고요!!)&nbsp; 그런데 이 기사의 "소스"가 되었을 법한 기사는 &lt;가디언 The Guardian&gt;에 있다(<a style="FONT-WEIGHT: bold" target="_blank" href="http://www.guardian.co.uk/books/2008/oct/15/marx-germany-popularity-financial-crisis">Booklovers turn to Karl Marx as financial crisis bites in Germany</a>). 위의 두 기사를 비교해 보시라. 마르크스는 그와 동시대를 살던 여러 경제학자들을 두고, 앞선 세대의 경제학자들 즉 아담 스미스 같은 위대한 학자들의 이론을 베낄 뿐이라고 비아냥거리곤 했는데, 이 대목에서 그는 "원본이 복사본보다 낫다"라는 말을 덧붙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런데 위 경우엔, 원본이 복사본보다 더 나쁘다. <br /><br /></li>
    <li>언뜻 보면 위 평가가 너무 야박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잘 살펴보면 &lt;가디언&gt; 기사는 진짜 더 나쁘다. 다시 말하지만 &lt;헤럴드 경제&gt; 기사는 내용은 없지만 사람한테 별로 해로울 것도 없다. 그러나 &lt;가디언&gt; 기사는 사실을 "왜곡"하고 있다. 자신의 여타 복사판들로 하여금 감히 복사할 엄두를 못내게 만드는 필살기, 바로 마지막 문단에 답이 있다. 이 대목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br /><br /><span style="COLOR: rgb(0,204,255)">But for those not quite ready to immerse themselves in Marxist theory, Marx's correspondence to Friedrich Engels at the time of an earlier US economic crisis makes more entertaining reading. "The American Crash is a delight to behold and it's far from over," he wrote in 1857, confidently predicting the imminent and complete collapse of Wall Street. </span><br style="COLOR: rgb(0,204,255)" /><span style="COLOR: rgb(0,204,255)">(옮김: 마르크스 이론에 빠져들 준비가 안 된 이들을 위해서는, 과거의 미국경제공황 시기에 마르크스가 엥엘스에게 보낸 편지가 흥미를 돋울 것이다. "미국의 파국을 지켜보는 것은 짜릿하다. 그건 끝나려면 아직 멀었다"라고 1857년에 쓰면서, 그는 월스트리트가 조만간 완전히 아작날 것임을 자신있게 예언했다.)</span><br /><br /></li>
    <li>위 대목을 넣음으로써 &lt;가디언&gt;의 기사는 한층 "업그레이드"된 것 같지만, 사실 위 내용은 틀렸다. 간단히 말하면, (1) 저 말은 마르크스가 한 말이 아니라 엥엘스가 한 말이고, (2) 위 문맥에서 엥엘스는 위와 같은 "예언"을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a style="FONT-WEIGHT: bold" target="_blank" href="http://www.marxists.org/archive/marx/works/1857/letters/57_10_29.htm">참조</a>)<br /><br /></li>
    <li>영국의 또 하나의 대표적 일간지 &lt;더 타임스 The Times&gt;의 한 기사(<a style="FONT-WEIGHT: bold" target="_blank" href="http://www.timesonline.co.uk/tol/news/politics/article4981065.ece">Karl Marx: did he get it all right?</a>)도 저열하기 그지없다. 언뜻 봐서는 이건 위 &lt;가디언&gt;의 기사보다 훨씬 더 진지해 보이며, 최근 일련의 금융공황 사태를 접하면서 마르크스가 과연 뛰어났다는 평가를 내리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여기 인용된 근거들이란 게 하나같이 피상적이고 우습기가 짝이없다. 예컨대 저자는, 마르크스의 분노가 개별 자본가들을 향하지는 않았다고 하면서도(이런 평가가 크게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마르크스의 이론 전체를 놓고 봤을 때 그다지 중요한 내용도 아니다), 그 근거라고 내놓는 것이 "결국 그의 훌륭한 독일인 동료이자 친구인 프리드리히 엥엘스는 맨체스터의 공장주였던 것이다"라는 따위다. 뿐만 아니다. 이 저자는, 마르크스의 착취이론을 거론하면서, 오늘날 고액연봉을 받는 펀드매니저들에게도 적용되느냐고 묻는다. 여기서 저자의 위트가 발휘되는데, 즉 그에 따르면 그들이 마르크스 말대로 착취되고 있다고 해도 결국은 고액의 보너스로&nbsp; 그것을 만회할 것이라는 거다. 뭐 이 정도로만 해두자.<br /><br /></li>
    <li>결국 위와 같은 유력 일간지의, 그야말로 무지로만 똘똘뭉친 저런 기사들을 보면, 현재의 마르크스 열광(?)이 어디를 향하고 있을지 심히 걱정된다. 그것은 마르크스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더 높여주는 방향으로 귀결될 것인가? 아니면, 기존에 그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편견들, 그러니까 "김일성=돼지"라는 우리가 어렸을적 가지고 있었던 종류의 그런 편견(<a style="FONT-WEIGHT: bold" target="_blank" href="http://blog.jinbo.net/ethereal/?cid=1&amp;pid=99">링크</a>)만을 더 강화시키는 것은 아닐까? <br /><br /></li>
    <li>그러거나 말거나, 현재의 이 열광적 분위기가 재밌는 현상임엔 분명하다. 홉스봄 말대로 이번 것은 과연 이전의 것들과는 다른데... 에... 그 열광이 어느정도냐면... <a style="FONT-WEIGHT: bold" target="_blank" href="http://economy.hankooki.com/lpage/opinion/200810/e2008102217292748200.htm">이젠 Max도 "마르크스"로 읽을 정도다</a>. (눈치를 아직 잘 못채신 분들을 위한 <a target="_blank" href="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10XXXXX228"><span style="FONT-WEIGHT: bold">링크!</span></a>)&nbsp; </li>
</ol>
<br /><br /><br /><br /><br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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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EM</author>
			<category>잡기장</category>
			
			<pubDate>Fri, 24 Oct 2008 13:39:56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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