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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김] 동사무소 개인정보공개, ‘원칙이 없다’

 

동사무소 개인정보공개, ‘원칙이 없다’

 

주민등록초본 등 개인서류 열람 때 요구 서류 사무소마다 달라

 

미디어다음 / 이윤성 통신원

 

 

각 동사무소에서 개인정보 공개가 정해진 원칙 없이 이뤄지고 있어 제도 정비가 시급한 실정이다.

변호사 사무실 등에서 소송 의뢰를 받고 재판을 진행하기 위해서는 우선 피고(상대방)의 주소를 알아야 한다. 상대방에게 소장(訴狀, 소송을 제기하기 위하여 법원에 내는 문서)을 전달해 재판이 진행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야 하기 때문이다.

채무와 관련된 소송일 경우에는 채무자가 소유하고 있는 부동산이나 은행계좌를 가압류해야 하는데 이때는 채무자의 주민등록번호를 알아야 한다.

이처럼 피고의 주소나 주민등록번호를 알아야 할 경우 변호사 사무실에서는 각 동사무소에 주민등록초본 등의 서류를 열람해 개인정보를 알아낸다. 열람을 신청하기 위해서는 주민등록법 시행령 제 36호에 따른 주민등록열람 또는 등초본교부 신청서와 각종 입증자료가 필요하다.

이 입증자료에는 이해관계사실확인서, 소송위임장, 소장 등이 있다. 그러나 이 입증자료는 동사무소마다 요구하는 서류가 다른 실정이다.

26일 미디어다음이 확인해 본 결과 실제로 주민등록초본이나 등본, 호적등본 등의 열람을 신청할 때 각 동사무소에서 요구하는 서류가 동사무소마다 달랐다.

경기도 성남시 금광2동 동사무소는 신청서, 소송위임장, 이해관계사실확인서를 제출하면 피고의 주민등록초본 등 서류를 발급해 준다.

경기도 안산시 호수동 동사무소에서는 신청서와 소송위임장을 제출하면 상대방의 주민등록초본 등 서류를 발급받을 수 있다.

경기도 성남시 양지동 동사무소는 신청서, 소송위임장, 이해관계사실확인서, 소장을 제출하면 상대방의 주민등록초본 등 서류를 발급해주고 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변호사 사무소 등 일선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간단한 서류를 요구하는 동사무소를 골라 찾아가고 있다.

변호사 사무실에서 사무국장으로 근무하는 유모 씨는 “주민등록초본 등의 서류가 전산화돼 있어 어느 동사무소에 가든지 원하는 서류를 발급받을 수 있다”며 “그렇기 때문에 간편하게 서류를 발급받을 수 있는 동사무소만 찾게 되고 다른 사무소 직원들도 대부분 그렇게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유씨는 또 “무엇보다 소중하게 다뤄져야 하는 개인정보가 각 동사무소마다 정해진 원칙 없이 공개되고 있는 것은 문제가 있다”며 “하루빨리 정확한 원칙을 정해 그에 맞게 정보를 공개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런 지적에 대해 동사무소 관계자는 "입증자료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반드시 어떤 서류를 받아야 한다고 정해진 것이 없어 동사무소마다 서류를 다르게 요구하고 있는 것"이라며 "행정자치부도 소송위임장만으로 입증서류를 대신할 수 있다는 의견을 낸 바 있고 신청자의 재직증명서, 신분증 등을 철저하게 확인하고 있어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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不亦快哉行 二十首 - 정약용


* 마음이 답답할 때 가끔 읽는 다산 정약용 선생의 시 입니다. 출처는 창작과비평사의 "茶山詩選"(송재소 역주)입니다.


통쾌한 일



1




달포 넘어 찌는 장마 퀴퀴한 냄새

아침저녁 사지가 맥없이 노곤터니




초가을 푸른 하늘 맑고 더 넓어

해맑은 하늘에 구름 한점 없어졌네




이 어찌 통쾌한 일 아니겠는가




2




산골짝 푸른 시내 흙과 돌이 가로막아

가득히 고인 물이 막혀서 돌아들 때




긴 삽 들고 일어나서 일시에 터뜨리니

우뢰처럼 소리치며 쏜살같이 흘러간다




이 어찌 통쾌한 일 아니겠는가




3




푸른 매 날개 묶여 오랫동안 굶주리며

숲 속에서 나래 치다 기진하여 돌아갈 때




때마침 북풍 불어 끈을 풀고 훨훨 나니

바다 같은 푸른 하늘 마음껏 날아가네




이 어찌 통쾌한 일 아니겠는가




4




나그네 돛단배 갠 강에 둥실 뜨니

넘실넘실 물결 위에 물새 쌍쌍 날아든다




내려 쏟는 여울목에 배가 이르니

시원한 바람 불어 뱃전을 씻어가네




이 어찌 통쾌한 일 아니겠는가




5




지팡이 지쳤어라 높은 산에 올랐더니

구름 안개 겹겹이 눈 아래 막고 있네




이윽고 서풍 불어 맑은 햇볕 내려쬐니

만 골짜기 천 봉우리 일시에 드러나네




이 어찌 통쾌한 일 아니겠는가




6




지친 말 절름절름 험한 바위 지나가니

돌부리 나뭇가지에 옷자락이 찢어진다




말 내려 배를 타니 앞길이 평탄한데

석양에 순풍 따라 돛을 높이 달았으니




이 어찌 통쾌한 일 아니겠는가




7




낙엽이 소리 없이 강 언덕에 떨어지고

황혼녘 하늘빛이 흰 파도를 걷어찰 때




옷자락 휘날리며 바람 속에 섰노라니

내가 마치 선학(仙鶴) 되어 흰 날개 씻겨진 듯




이 어찌 통쾌한 일 아니겠는가




8




이웃집 처마 끝이 앞마당을 가로막아

가을날도 바람 없고 맑은 날도 그늘 지네




백금(百金) 주고 그 집 사서 당장에 헐어버려

먼 산 봉우리가 눈앞에 보인다면




이 어찌 통쾌한 일 아니겠는가




9




기나긴 여름날 무더위에 시달려서

등골에 땀이 흘러 베적삼 축축할 때




상쾌한 바람 불어 소나기 쏟아지니

단번에 얼음발이 벼랑에 걸려 있네




이 어찌 통쾌한 일 아니겠는가




10




맑은 밤 산골짜기 소리 없어 적막한데

산귀신도 잠이 들고 새 짐승 기척 없네




집채만한 큰 바위를 번쩍 들어 뒹굴리니

천길 낭떠러지 우뢰 같이 울리누나




이 어찌 통쾌한 일 아니겠는가




11




성(城)에 싸인 서울 땅서 기 못펴고 지내기가

병든 새 조롱 속에 갇힌 것 같더니만




말 채찍 울리며 성 밖으로 나아가니

아득한 산과 들에 야색(野色)이 깔려 있네




이 어찌 통쾌한 일 아니겠는가




12




펼쳐놓은 큰 종이에 취중시(醉中詩)가 더디더니

우거진 초목에 후두둑 비 오길래




장대같이 큰 붓을 손에 가득 움켜잡고

크게 한번 휘두르니 먹물 뚝뚝 떨어지네




이 어찌 통쾌한 일 아니겠는가




13




장기 바둑 승부를 내 일찍이 모르노라

바보같이 옆에 앉아 구경만 하고 있네




한 조각 여의철(如意鐵)을 가만히 흔들어서

단번에 판 위를 쓸어 없애 버린다면




이 어찌 통쾌한 일 아니겠는가




14




대수풀 외로운 달 밝은 저녁에

고요한 초당에 술병과 마주 앉아




백잔을 들이키고 싫도록 취한 후에

호기롭게 노래 불러 근심 걱정 씻었노라




이 어찌 통쾌한 일 아니겠는가




15




하늘 가득 눈보라 북풍이 차가운데

껑충껑충 여우 토끼 숲 속으로 뛰어 든다




긴 창, 큰 화살에 털모자 눌러 쓰고

생포한 놈 끌어당겨 말안장에 달아맨다




이 어찌 통쾌한 일 아니겠는가




16




평화롭게 노니는 푸른 물결 고깃배가

바람 이슬 삼경인데 취해 아니 돌아가네




기러기 우는 소리 놀래어 잠을 깨니

갈대 이불 싸늘한데 초승달이 걸려 있다




이 어찌 통쾌한 일 아니겠는가




17




집안 세간 모두 팔아 행장을 꾸리고서

구름처럼 유유하게 타향에서 떠돌다가




뜻 잃은 옛 친구를 길에서 상봉하여

주머니 털어내어 열냥 돈 주었노라




이 어찌 통쾌한 일 아니겠는가




18




가지 끝에 맴돌면서 어미 까치 급히 운다

비늘 달린 시꺼먼 놈 둥지로 기어드네




어디서 호령하며 목 긴 새 날아들어

범 울 듯이 달려들어 머리통을 쪼았네




이 어찌 통쾌한 일 아니겠는가

 

 

 


19




거문고 둘러메고 보름밤에 손 왔는데

보람 없이 먹구름이 온 하늘을 덮었어라




시름겨워 옷 여미고 자리에서 뜨려할 때

홀연히 숲 속에서 아리따운 달이 뜨네




이 어찌 통쾌한 일 아니겠는가




20




타향땅 귀양살이 대궐 생각 그지없어

등잔불 앞에 앉아 잠 못 이뤄 하는 때에




홀연히 금닭[金鷄] 울어 기쁜 소식 전하려나

집에서 보낸 편지 내 손으로 뜯어보네




이 어찌 통쾌한 일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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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선생의 염원과 한국사회의 오늘 - 곽노현

* 아래의 글은 방송대 법학과 곽노현 교수님의 글 입니다. 출처는 분명하지 않으나 "사랑방시평"으로 표시가 되어 있던 것으로 보아, 인권운동사랑방의 간행물에 게재 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작성시기는 1997년 3월 15일인데, 약 8년전의 시평이기는 하지만 아직까지 변함 없는 우리 사회 기득권세력의 일면 등을 엿볼 수 있어 옮겨 봅니다.



김구선생의 염원과 한국사회의 오늘

                      
곽 노 현
                          

  며칠전 친구의 후원회 모임에 가기 위해 처음으로 지하철 5호선을 타보게 되었다. 지하철 5호선은 90년대의 경제력을 반영하듯 다른 지하철 노선보다는 훨씬 번듯하고 쾌적했다. 여의도역을 빠져나와 길 양측에 늘어선 고층빌딩군을 지나면서 그날따라 자꾸만 김구선생의 말씀이 기억났다. 군사력은 국토를 방위할 만하면 되고 경제력은 먹고 살만하면 되지만 문화만은 세계일등이 되었으면 한다는 취지의 말씀이 그것이다. 저마다의 특색을 뽐내는 고층빌딩들이 숲을 이룬 것을 보면서 나라의 부가 이만큼 쌓였으니 이제 무턱대고 성장에만 힘 쓸 것이 아니라 함께 나누며 균형과 조화를 꾀하는 일에 보다 신경을 써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일에 필요한 정치도덕성과 문화능력을 기르기만 하면 지속적이고 인간중심적인 경제성장도 절로 될 것만 같았다.

  문제는 한보사태나 김현철 사태에서 보듯이 우리에게 이러한 능력이 한참 결여되었다는 데 있다. 사실 이러한 문제들은 우리 사회의 경우 정치력, 경제력을 막론하고 권력이 과도하게 집중된 반면 그에 대한 감시와 통제장치는 지극히 미흡하다는 데서 연유한다. 구체적으로 생각해보자. 대통령은 그야말로 제왕적 권력을 누린다. 헌법재판소장과 대법원장을 임명하고 감사원장과 안기부장을 임명하며 총리와 장관, 기타 고위 공무원을 임명한다. 여당몫인 국회의장 및 국회 상임위원회 위원장도 실질적으로는 임명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밖에 대통령이 임명하는 각종 위원회와 국영기업체 임원도 부지기수다. 대통령은 이러한 임명권을 행사하면서 인사청문회 한 번 거치지 않는다.

  한편 국회는 평균 재산신고액이 33억원에 달하는 부자 국회의원들로 구성돼있다. 평균재산액으로 치면 우리 국회는 국내에서 재벌단체인 전경련 다음으로 부자클럽일 것이고 세계의 의회중에서 최고로 부자일 것이다. 이렇게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부자 국회가 법을 만드니 법은 자연히 부자에게 유리할 수밖에 없다. 반면 근로서민대중의 권익을 보호하는 노동조합의 힘은 미약하기 짝이 없다. 우선 공무원, 교사등은 노조결성권이 없다. 그나마 노조결성권이 있는 일반근로자들중 15%만이 간신히 노동조합에 가입해있을 뿐이다. 그것도 강력한 산업별 노동조합에 속해있는 것이 아니라 기업별 노동조합으로 갈갈이 찢겨져있다. 더욱이 이들중 30% 가까이는 공익사업장에 속해있어 단체행동을 할 수 없는 반쪽 노조다. 이것으로도 모자라 노동조합에 대해서는 공직후보 지원이나 정치자금 제공등 일체의 정치활동을 금지시켰다. 이렇듯 각종 악법으로 얽어매고도 안심이 안돼 정부는 뒷돈을 대주며 한국노총을 어용화하고 조강지처로 삼아왔다.  

  이런 기본적 구도가 바뀌지 않는 이상 균형과 조화를 추구하며 더불어 사는 세상을 만들어나가는 일은 지난하다. 지금 거론되는 종합과세논쟁은 이 점을 잘 말해준다. 종합과세제도는 은행이자소득이 연간 4천만원을 넘는 경우에만 적용된다. 은행이자소득이 연간 4천만원에 달하는 수준이면 총재산이 최소한 30억원 이상은 된다. 현재 약 4만명 정도가 대상이라고 한다. 금융실명제 때문에 못살겠다고 하소연하는 이들도 이 사람들일 것이다. 이들은 최근 종합과세기준을 올리고 금융실명제를 완화하라고 한목소리로 요구하고 있다. 4천만명의 다른 국민들은 모두 조세정의 확립과 부정부패 방지 차원에서 종합과세의 확대 및 금융실명제의 유지를 바라고 있는데도 4만명에 불과한 이 사람들이 원하는대로 법과 정책이 백팔십도로 바뀌고 마는 현상을 우리는 수없이 보아왔다.

  30여년만에 찾아온 작년의 노동법 개정국면은 이른바 3금으로 대표되는 노동악법체제를 철폐함으로써 이러한 비민주성을 극복해나가는 제도적 단초를 제공할 것으로 기대를 모았었다. 그러나 이번 노동법 개정의 실제내용을 살펴볼 때 노사정 간의 세력불균형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다. 공무원, 교사의 단결권은 여전히 부정되었으며, 노동조합의 정치활동금지 역시 여전한 상태다. 오히려 대체근로 허용등 노조의 교섭력을 현저히 약화시키는 조항들이 대거 삽입되었다. 그렇기에 김구선생의 인간적이기 그지없는 염원이 달성되기에는 여전히 요원한 상태다. 하지만 어쩌랴. 이만큼 쌓았으면 이제 더쌓기 위해서라도 ‘나누는 도덕성’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변함이 없으니! 갈길이 멀어도 믿음과 소망으로 꾸준히 나아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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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 정지용

 
정지용 시, "호수1" <詩文學> 2호, 1930.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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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님 - 김지하/오윤

형   님


                      김지하


희고 고운 실빗살

청포잎에 보실거릴 땐 오시구려

마누라 몰래 한바탕

비받이 양푼갓에 한바탕 벌려놓고

도도리장단 좋아 헛맹세랑 우라질 것

보릿대춤이나 춥시다요

시름 지친 잔주름살 환히 펴고요 형님

있는 놈만 논답디까

사람은 매한가지

도동동당동

우라질 것 놉시다요

지지리도 못생긴 가난뱅이 끼리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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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교본 - Bertolt Brecht

 

잊지 말아라, 너희보다 못할 것 없는 많은 사람들이 다퉜다는 걸,
왜 자신들이 아니라 너희가 이곳에 앉을 수 있느냐고.
책 속에만 파묻히지 말고 함께 투쟁하여라.
배움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배워라, 그리고 그걸 결코 잊지 말아라.
[출처: 이승진 역, "전쟁교본", 한마당]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는 사진을 오려내어 거기에 시를 붙여 주석을 달았다. 그가 그렇게 한 이유는, "사진"은 그 자체로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오히려 "사진기 역시 타이프라이터처럼 거짓말을 할 수 있다"고 하면서 사진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나지 않는 진실을 드러내고자 했다. 바로 그와 같은 방법으로 전쟁에 관한 진실을 명쾌하게 밝힌 작품이 "전쟁교본(Kriegsfibel)"이다. 그리고 그는 전쟁교본의 후속작품으로 "평화교본(Friedensfibel)"을 쓰려 했지만, 아쉽게도 위에서 소개한 단 한편의 사진과 시만이 남게 되었다. "사진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라고 하는 포토리얼리즘의 이데올로기적 허구성을 날카롭게 지적한 그의 작업은 우리가 진실에 접근하는 데 필요한 매우 유용한 인식의 수단으로 남았다. 사진을 볼 때도 항상 의심하라. 진실이 무엇인가를 고민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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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나와 작은 나 - 신채호

큰 나와 작은 나 (大我와 小我)


단재 신채호


왼편에도 하나 있고 오른편에도 하나 있어서 가로 놓이고 세로 선 것을 나의 '이목'이라고 하고, 위에도 둘이 있고 아래도 둘이 있어서 앞으로 드리운 것을 나의 '수족'이라하며, 벼룩이나 이만 물어도 가려움을 견디지 못하는 것을 나의 '피부'라 하며, 회충만 동하여도 아픔을 참지 못하는 것을 나의 '장부'라 하며, 팔만사천의 검은 뿌리를 나의 '모발'이라 하며, 일분 동안에 몇 번식 호흡하는 것을 나의 '성식'이라 하며, 총총한 들 가운데 무덤에 가마귀와 까치가 파먹을 것을 '해골'이라 하며, 개미와 파리가 빠라 먹을 것을 나의 '혈육'이라 하여, 이 이목과 수족과 피부와 장부와 모발과 성식과 해골과 혈육을 합하여 나의 '신체'라 하고, 이 신체를 가리켜 '나'이라 하나니, 오호-라. 내가 과연 이같이 희미하며 이같이 작은가. 이같을진대 한편에 있는 내가 열 곳에 널리 나타남을 얻지 못할 것이요, 일시에 잠간 있는 내가 만고에 길게 있음을 얻지 못할지니, 오호-라. 내가 과연 이같이 희미하며 이같이 작은가. 이같을진대 바람과 같이 빠르고 번개같이 번복하며 물거품같이 꺼지고 부싯돌같이 없어지는 내가 몇 십년을 겨우 지내고, 형용과 그림자가 함께 없어질지니, 오호-라. 내가 과연 이같이 희미하고 이같이 작은가. 과연 이같을진대 나는 부득불 나를 위하여 슬퍼 하고 머리를 풀어 헤치고 미칠 만도 하며, 이를 갈고 통곡을 할 만도 하고, 나를 창조하신 상제를 원망할 만도 하도다.

오호-라. 내가 과연 이러한가. 가로되 그렇지 않다. 저것은 정신의 내가 아니요 물질의 나-며, 저것은 영혼의 내가 아니라 껍질의 나-며, 저것은 참 내가 아니요 거짓 나-며, 큰 내가 아니요 작은 나-니, 만일 물질과 껍질로 된 거짓 나와 작은 나를 나-라 하면 이는 반드시 죽는 나-라. 한 해에 죽지 아니하면 십년에 죽을 것이며, 십년에 죽지 아니하면 이십세 삼사십세 육칠십세에는 필경 죽을 것이요, 상수를 하여도 백세에 지나지 못하나니, 오호-라. 이 지구의 있을 이천이백만년 동안에 나의 생명을 백세로 한정하여 백세 이전에 나를 구하여도 없고 백세 이후에 나를 구하여도 없거늘, 그 중에서 가로되 부귀라, 빈천이라, 공명이라, 화액이라 하여 이것을 길하다 하고 저것을 흉하다 하며, 이것을 낙이라 하고 저것을 근심이라 하나니, 오호-라. 이를 말하매 나는 가히 슬퍼도 하고 울기도 할 만하다 할지나, 이제 이 물질과 껍질로 된 거짓 나와 작은 나를 뛰어 나서 정신과 영혼으로 된 참 나와 큰 나를 쾌히 깨달을진대, 일체 만물 중에 죽지 아니하는 자는 오직 나라. 천지와 일월은 죽어도 나는 죽지 아니하며, 초목과 금석은 죽어도 나는 죽지 아니하고, 깊은 바다와 끓는 기름가마에 던질지라도 작은 나는 죽으나 큰 나는 죽지 아니하며, 예리한 칼과 날낸 탄환을 맞으면 작은 나는 죽을지언정 큰 나는 죽지 아니하여, 천상천하에 오직 내가 홀로 있으며 천변 만겁에 오직 내가 없어지지 아니하나니, 신성하다 나여, 영원하다 나여. 내가 나를 위하여 즐겨하며 노래하며 찬양함이 가하도다.

작은 나는 죽는대 큰 나는 어찌하여 죽지 아니하느뇨. 가로대 작은 나를 의논할진대 이목과 수족이 곧 내라. 보고 들으매 벽으로 막힌 대를 능히 통하지 못하며, 뛰어도 한 길 되는 담을 넘지 못하고 현미경을 대이고 보아도 몇 천만의 희미한 티끌을 다 보지 못하며, 화륜차를 타고 행하여도 한 날에 천리를 더 가지 못하거니와, 큰 나는 곧 정신이며 사상이며 목적이며 의리가 이것이다. 이는 무한한 자유 자재한 나-니, 가고자 하매 반드시 가서 멀고 가까운 것이 없으며, 행코자 하매 반드시 달하여 성패가 없는 것이 곧 나-라. 비행선을 타지 아니하여도 능히 공중으로 다니며, 빙표(주: 여행허가증)가 없어도 외국을 능히 가며, 사기(史記)가 없어도 천만세 이전 이후에 없는 때가 없나니, 누가 능히 나를 막으며 누가 능히 나를 항거하리오.

내가 국가를 위하여 눈물을 흘리면 눈물을 흘리는 나의 눈만 내가 아니라, 천하에 유심한 눈물을 뿌리는 자- 모두 이 나이며, 내가 사회를 위하여 피를 토하면 피를 토하는 나의 창자만 내가 아니라 천하에 값있는 피를 흘리는 자- 모두 이 나이며, 내가 뼈에 사모치는 극통지원의 원수가 있으면 천하에 칼을 들고 이러나는 자가 모두 이 나이며, 내가 마음에 새겨 잊지 못할 부끄러움이 있으면 천하에 총을 메고 모도히는 자- 모두 이 나이며, 내가 싸움의 공을 사랑하면 천백 년 전에 나라를 열고 땅을 개척하던 성제 명왕과 현상 양장이 모두 이 나이며, 내가 문학을 기뻐하면 천만리 밖에 문장 명필과 박학 거유가 모다 이 나이며, 내가 봄빛을 조아하면 수풀 가운데 꽃 사이에 노래하고 춤추는 봉접이 모두 이 나이며, 내가 강호에 놀기를 즐겨 하면 물속에 왕래하는 어별과 물가에 조는 백구가 모두 이 나이라.

한량없이 넓은 세계 안에 한량없는 내가 있어서 동에도 내가 있고 서에도 내가 나타나며, 위에도 내가 있고 아래도 내가 나타나서 내가 바야흐로 죽으매 또 내가 나며, 내가 바야흐로 울며 또 나는 노래하여 나고 죽으며, 죽고 나며, 울고 웃으며, 웃고 우는 것이 대개 나의 참면목이 본래 이 같은지라.

슬프다. 온 세상이 어찌하여 자기의 참 면목을 알지 못하고 혹 구복을 나-라 하여 진진한 고량으로 이것만 채우고자 하며, 혹 피육을 나-라하여 찬찬한 의복으로 이것만 장찬코자 하며, 혹 생명이 내라 하고 혹 문호를 나-라 하여, 부끄럽고 욕이 오든지 자유치 못함을 당하든지 이것만 보전하고 이것만 유지코자 하다가 조상에게는 패류의 자손이 되고 국가의 죄인도 되며 동포의 좀과 도적도 되고 인류의 마귀도 되나니, 오호-라, 자기의 참 면목이 나타나는 날이면 어찌 설워 울고 이를 갈지 아니하리오.

울지어다 울지어다. 내가 이 한 붓을 들고 천당의 문을 열고 분분이 길을 일은 자들을 부르노니, 울지어다 울지어다. 나의 이르는 바 천당은 종교가의 미혹하는 별세계의 천당이 아니라, 나의 참 면목을 나타내는 것을 깨닫는 것이 곧 이것이라.

이 참 면목만 나타내는 날이면 저 구구한 일개 신체는 모도와 연기가 되어도 가하고, 흩어져서 구름이 되어도 가하며 피어서 꽃이 되어도 가하고, 맺어서 열매가 되어도 가하며 단련하여 황금이 되어도 가하고, 부수어서 모래가 되어도 가하며 물에 잠겨서 어별이 되어도 가하며 산과 들에 행하여 호표세상이 되어도 가하고, 하늘에 오름도 가하며 따으로 들어감도 가하고, 불에 던짐도 가하며 물에 빠짐도 가하니, 성인의 말씀에 가함도 없고 불가함도 없다 하심이 곧 이를 이르심이어늘, 애석하다. 저 어리석은 사람들이여, 그 눈을 감으면 이르대 내가 죽었다 하며, 그 다리만 넘어지면 이르대 죽었다 하고, 반드시 죽는 나를 잠간 살기 위하여 영원히 죽지 아니하는 나를 욕되게 하며, 반드시 죽는 나를 영화롭게 하기 위하여 죽지 아니하는 나를 괴롭게 하고, 반드시 죽는 나를 편안히 하기 위하여 죽지 아니하는 나를 타락케 하니 어찌 그리 어리석으뇨.

내가 인간에 유람한 지 이십여년에 이 세상 사람을 보건대, 그 누가, 이 반드시 죽는 나를 위하여 구구한 자-가 아니리오. 이 사람들이 필경에는 죽는데, 혹 주리다가 죽기도 하고, 혹 배부르다가 죽기도 하고, 혹 근심하다가 죽기도 하고, 혹 즐기다가 죽기도 하고, 혹 초췌하여 죽기도 하고, 혹 발광하여 죽기도 하고, 혹 신음하다가 죽기도 하고, 혹 낭패하여 죽기도 하는도다. 어찌 다만 나의 눈앞에 사람만 이같이 죽으리요. 혹 나의 이전 사람도 이같이 죽었으며, 장래의 사람도 장차 이같이 죽으리니, 슬프다. 이 지구상 인류의 대략 총계 십오억만명 중에, 세계에 뛰어난 영웅이나 천명을 아는 성인이나, 단장한 미인이나 재조 있는 선비이나, 황금이 산 같은 부자이나, 세력이 흔천동지하는 귀인이라도 세상에 나던 날, 이미 하늘이 정한 한 번 죽는 것이야 어찌하리요, 그런즉 반드시 죽는 나를 생각지 말고 죽지 아니하는 나를 볼지어다.

반드시 죽는 나를 보면 마침내 반드시 죽을 것이요, 죽지 아니하는 나를 보면 반드시 길이 죽지아니리라.

비록 그러나 나의 이 의논이 어찌 철학의 공상을 의지하여 세상을 피하는 뜻을 고동함이리요. 다만 우리 중생을 불러서 본래 면목을 깨달으며, 살고 죽는데 관계를 살피고 쾌활한 세계에 앞으로 나아가다가 저 작은 내가 칼에 죽거든 이 큰 나는 그 곁에서 조상하며, 작은 내가 탄환에 맞아 죽거든 큰 나는 그 앞에서 하례하여 나와 영원이 있음을 축하기 위함이로다.




1908년 9월 16일, 17일 대한매일신보 국문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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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안법 수호를 위한 광신적 신앙

 

국가보안법 수호를 위한 광신적 신앙

 

“모든 것을 걸고 국가보안법을 지켜내겠다”던 박근혜 대표의 특별기자회견, “대한민국은 이미 공산화된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회자 된다”고 알리는 사회 원로들의 비상시국선언, 또 ‘국가보안법 폐지 결사반대’라는 피켓을 들고 나와 동료의원들에게 다짐을 하는 한나라당 김용갑 의원의 모습은 마치 그들만의 ‘국가안보 신앙’을 주제로 한 새로운 연속극을 보는 듯 하다.


이를 지켜보면서 한때 사회에 물의를 일으켰던 “휴거”를 연상하게 되는 것은 필자만의 느낌일까. 확실히 ‘이성’이 아니라 ‘비정상적인 신앙행위’이다. 물론 종교를 함부로 비하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종교에서도 본래의 가르침에서 벗어나고 사회적 이성마저도 상실한 종교적 병리현상이 나타나듯이 지금의 국가보안법을 사수하려는 수구보수진영의 모습도 이와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휴거”와 “적화통일”의 차이일 뿐.


사실 헌법이 존재해도 국가보안법을 폐지하려 들면 그것이 곧 국가정체성을 부정하는 것이고, 충분히 일반형법으로 규율이 가능해도 국가보안법이 없으면 적 앞에서 무장해제 하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하는 그들의 주장은 정말 이성과는 거리가 멀다. 자나 깨나 오직 ‘반공’만이 진리이자 깨달음의 전부인 이들에게 국가보안법은 자신들이 믿고 의지하는 상상 속의 ‘국가안보’를 지켜내기 위하여 ‘빨갱이’를 제물로 바치는 일상적인 제사에서 없어서는 안 될 칼과 제단인 셈이다.


광신적 신앙행위에 순결한 믿음이란 없다. 순수하고 깨끗한 믿음이 없으니 자기반성 또한 없으며 사회적 약자의 아픔을 이해하고 그들과 함께하려는 자기희생의 실천의지도 없다. 그 이면에는 항상 순결하지 못한 무언가가 있기 마련이다. 그것은 광신적 신앙행위를 주도하는 자의 사악하고 더러운 욕망의 계산이거나 종교의 이타적 가르침을 제대로 깨닫지 못한 추종자들의 이기심이다.


수구보수진영의 믿음도 그런 의미에서 의문을 갖게 한다. 그들이 믿고 의지하며 진실로 걱정하는 것이 ‘국가안보’인지 아니면 ‘국가보안법’인지 말이다. 그들은 진정 국가안보를 위해서 국가보안법이 존속되어야 한다고 하는 것인가? 아니면 국가보안법을 위해서 진지하게 접근해야 할 중대한 국가안보 문제를 엉뚱하게 걸고넘어지고 있는 것인가.


자신들이 누려온 지배체제를 수호했던 철옹성이었으니 그들이 지켜내야 할 것은 당연히 국가안보가 아니라 국가보안법이다. 그러나 다급한 나머지 가끔씩 수구보수세력조차도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듯 하다. 북한의 체제를 동경할 리 없는 국민들의 상식이나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의지는 접어두더라도 대한민국 정부의 군사력과 경찰력은 이들의 눈에는 보이지도 않는 것이다. 한마디로 국가보안법이 없으면 지금의 군사력이나 경찰력도 다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국가보안법이 없으면 이미 "친북좌파반미 세력"이 장악한 정부는 대한민국을 통째로 김정일에게 갖다 바칠 것처럼 이야기하고, 그동안 대한민국 국민으로 위장하고 숨어 있던 간첩들이 마음 놓고 본격적으로 활동하여 무력적화통일을 앞당길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은 소설로서도 가능하지가 않다. 그런 소설이 팔리기는커녕 읽히기나 하겠는가. 한나라당은 얼마 전 보여준 희대의 연극에 이어서 대국민 홍보를 위하여 국가보안법이 폐지되면 벌어질 상황을 문학으로 한번 만들어 볼 것을 권한다.


그동안 냉전적 분단현실 속에서 국가보안법의 철옹성이 워낙 견고하였기에 국가보안법 폐지를 반대하는 수구보수세력은 매우 당황해 하고 있다. 국가보안법이 폐지되어도 그동안 국가보안법이 수행해 온 그 기능과 역할을 최대한 보전할 수 있는 방안이 제대로 마련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물론 지금은 죽어간다던 민생경제를 제쳐 두고 자신들의 위기극복을 위해 전력을 다하고 있을테지만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문제는‘국가보안법’이라는 하나의 법률이 아니다. 본질적인 문제는 그러한 법을 존속시키며 강화해 온 지배이데올로기에 있다. 국가보안법이 폐지된다고 하더라도 형법이나 대체입법의 내용이 어떻게 구성될 것인가가 중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아울러 이것이 추후에 사법부와 헌법재판소에 의해서 어떻게 해석되느냐 하는 문제도 여전히 남게 된다. 사법부와 헌법재판소는 이미 민주적 헌정질서를 비틀면서까지 국가보안법 존속을 위해 집행부와 입법부에 압력을 행사하는 수구적 저항을 보였으므로, 국가보안법을 존속시켰던 그 논리를 쉽게 버리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도 게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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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안법, 폐지가 끝은 아니다.

 

국가보안법, 폐지가 끝은 아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1949년 국가보안법이 제정된 이래 현직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국가보안법 폐지”라는 일대 선언을 하였다. 아직 입법부에서 폐지된 것도 아니고 단지 대통령의 중요한 입장표명에 불과하지만, 국가보안법 폐지를 강하게 외쳤던 사람도 정계에 진출하여 좋은 자리만 꿰차고 앉으면 어느새 개정이나 존치론자가 되어 버리는 그 지난한 현실을 생각할 때 현직 대통령의 의지표명은 분명 ‘선언’이라고 해도 과하지는 않다.

 

두 말할 것도 없이 국가보안법은 폐지되어야 마땅하다. 기나긴 세월동안 친일과 독재로 쌓아 올린 기득권의 확실한 보장문서였던 국가보안법을 사수하기 위하여 수구보수세력이 마지막으로 기댈 수밖에 없는 사법부와 헌법재판소의 저항을 의식해서인지 대통령은 자꾸 법리적으로 얘기하지 말고 역사적으로 나타난 영향과 기능을 보자고 했지만, 국가보안법은 법리적으로도 당연히 폐지되어야 마땅하다.

 

국가보안법 존치론의 입장에서 특별히 내세울 만한 설득력 있는 법리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껏해야 국가보안법이 ‘남북분단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와 ‘시장경제체제’를 수호하기 위한 필수불가결한 장치인 것처럼 홍보하여 왔을 뿐이다. 이유는 본래 의미의 진정한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의 사상에 따른다면 국가보안법은 도무지 설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자유주의적 민주주의를 억압하고 법치주의를 깨뜨리면서 마치 그것들을 위한 것인 양 홍보되었다는 점에서 국가보안법 존치론은 일종의 부당이득을 챙기기 위한 교묘한 허위광고에 불과했다.

 

국가보안법이 사수임무를 맡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는 우리가 북한체제에 대해 우월하다고 믿는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의 사상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우리말로는 똑같이 ‘자유민주주의’라고 표현되지만 그 의미가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차이는 ‘자유주의적 민주주의(liberal democracy)’가 ‘관용의 정신’을 핵심으로 하는데 반해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는 그런 관용의 정신이 없다는 데에 있다. 이를 ‘자유로운 민주주의(free democracy)’라고 한다. 영어의 ‘liberal’에는 ‘관용의’라는 뜻이 있으나, ‘free’에는 ‘없는’의 의미가 있다. 바로 관용이 없다는 의미이다.

 

사상의 자유시장에서 서로 경쟁하여 보다 좋은 사상이 살아남는다는 것이 본래 의미의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의 생각이라면, “자유의 적에게는 자유를 줄 수 없다”는 것이 ‘자유로운 민주주의’의 생각이다.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이 있을 경우에만 표현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다는 것이 전자의 법리라면, 국가보안법 위반을 의심한 공안당국의 자의적 판단에 의해 제한할 수 있다는 것이 후자의 법리이다. 어떤 것이 옳은가? 어떤 것이 우리가 지키고자 하는 ‘자유민주주의’인가? 당연히 사상의 자유를 온전하게 보장하는 그런 자유민주주의이다. 누군가가 단지 어떤 사상을 가졌고 그것을 표현한다는 것만으로 감옥에 가두는 것이 우리가 지키고자 하는 자유민주주의라면 그것은 이미 우리가 그토록 혐오하는 독재체제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과거 군사독재 시대에 자주 들었던 ‘자유대한(Free Korea)’, 또는 ‘자유대만(Free China)’은 그저 이들 나라가 사상의 자유가 온전하게 보장되지 못하는 전투적 민주주의의 반공국가임을 나타내 주는 것이었다. ‘국가보안법’은 그런 비민주적이고 반인권적인 불량한 사상에 의해 뒷받침 되고, 동시에 그러한 사상에 의해 유지되는 기득권 체제를 지키기 위한 법에 불과했다. 국가보안법이 진정한 의미의 ‘국가안보’와도 거리가 멀고 ‘정치탄압’의 수단일 수밖에 없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본래 전투적 민주주의를 내용으로 하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의 원조국가는 독일이다. 역사적으로 몇 단계를 거치면서 독일 연방헌법재판소는 도저히 헌법원리가 될 수 없는 근거를 들이대며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헌법(본기본법)의 본래 내용인 것처럼 해석해 버렸다. 그런 과정을 보면 우리의 헌법재판소는 독일 연방헌법재판소가 했던 일을 그대로 수행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전투적 민주주의의 선배국가이자 똑같이 분단을 겪었던 독일에서도 국가보안법 같은 법률은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오히려 독일의 언론매체들이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구속되어 있던 송두율 교수의 사건을 보도하면서 ‘독일에서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고 한다. 이는 송두율 교수의 석방을 바라는 입장에서도 결코 좋아할 수만은 없는 소식이었다.

 

국가안보를 빌미로 민주주의를 억압하고 인권을 침해하는 국가보안법은 반드시 폐지되어야 한다. 그러나 국가보안법이 폐지되는 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국가보안법을 만들고 그것을 유지해 왔던 반민주적 지배이데올로기는 여전히 남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국가보안법이 폐지되었다고 해도 ‘국가보안법’으로 다져진 그 위헌적 논리의 헌법해석은 분명 여기저기서 반전의 기회를 엿볼 것이기 때문이다. 국가보안법을 폐지시킨다면 그것은 분명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를 한 단계 도약시키는 일임에 틀림없다. 지금은 우선 수구적 저항을 물리치고 국가보안법을 폐지시키는 일에 온힘을 기울여야 하겠지만, 그것은 민주화를 위한 싸움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도 게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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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안법 구출을 위한 헌재와 대법원의 합동작전

 
 
국가보안법 구출을 위한 헌재와 대법원의 합동작전
 
최근 헌법재판소와 대법원은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 연이어 ‘국가보안법’을 비호하고 나섰다. 헌법재판소가 국가보안법을 합헌이라 하거나, 또 국가보안법을 위반한 혐의에 대한 유죄선고를 대법원이 확정하는 재판은 지금까지 늘 있어 왔던 일이긴 하지만, 이번에는 두 점잖은 기관이 무언가 새로운 작심을 한 듯 하다.

모두가 알고 있듯이 “국가보안법을 폐지하라”는 말은 ‘군사독재’의 암울한 시절에는 함부로 꺼내기 힘든 말이었다. 그다지 좋은 추억은 아니지만 군사독재 보다는 훨씬 좋은 ‘문민’의 시절이 왔을 때에도 “국가보안법 폐지”라는 말은 자동적으로 반체제, 반정부, 친북좌파로 간주되는 신통력이 있었다. 정치적 후진국가의 국민이었음을 실감하는 일이었지만 ‘50년만의 정권교체’ 그 자체가 정말 반가웠던 시절에도 “국가보안법 폐지”는 ‘안 되는 말’이었다.

그러나 집행부 탈환에 다시 한번 실패한 수구보수세력이 조바심을 못 이긴 나머지 그나마 우위를 지키고 있던 입법부를 통해 반란을 꾀하다 실패로 끝나고, 그 탄핵정국 이후에 입법부에서조차 개혁세력이 조금 더 힘을 얻게 되자 상황은 달라졌다. 바로 국가보안법에 관한 문제의식이 정부와 국회 차원으로까지 확산되어 ‘개정이냐 폐지이냐’를 두고 논란을 벌이는 변화의 움직임이 눈앞에 닥친 것이다.

우리는 최고의 사법기관이라는 헌법재판소와 대법원의 판결이 바로 이런 시기에 나온 것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집행부를 잃고 입법부에서조차 ‘자업자득’으로 어이 없이 패전한 수구보수세력이 기득권 유지의 핵심인 ‘안보법 체제’의 붕괴를 막을 수 있는 마지막 보루는 이제 사법부 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두 기관은 이런 속내를 깊이 숨기지 못하고 입법부를 향해 안 해도 좋을 정치적 메시지를 남겼다. 차이가 있다면 헌법재판소는 매우 어설프게, 대법원은 좀 세련되게 남겼다는 것이다. 무얼 하든 항상 결정적인 실수를 남기는 이 모습을 한국의 수구보수세력이 갖고 있는 ‘인간다운 면모’라고 하면 어폐가 있을까.

그러나 좀처럼 사이좋게 어깨동무하는 모습을 보기 힘든 두 기관이 모처럼 보여준 단결된 모습은 쉽게 보아 넘길 일은 아니다. 바로 국민의 의사가 반영되지 않고 국민의 통제가 제대로 닿지 않는 ‘사법’이라는 이름의 권력이기 때문이다. 이는 사법권이 객관적이며 공정하지 않고 정의롭지도 않을 때 사후에라도 바로 잡을 방법이 없다는 민주주의 원칙의 치명적인 결함을 뜻한다. 그렇다고 모든 법관이 기득권 수호의 마지막 파수꾼인 것은 아니지만, 대한민국의 헌법재판소와 대법원은 “정치적 기능과 본질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에서 결코 객관적인 최후의 심판자라는 평가를 쉽게 얻을 수는 없다.

여기서 한 가지 다행인 것은 헌법재판소이든 대법원이든 사법기관에 대한 우리 국민의 신뢰가 시원찮다는 것이다. 이 역시 오랫동안 지배체제 수호에 앞장서면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국민 위에 군림해 온 법조계 일반의 자업자득이다. 그러나 국민들의 신뢰가 형편없다고 하더라도 국민들이 사법개혁의 적극적인 의지를 명시적으로 보이지 않는 한 이들이 스스로 쉽게 변화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과거청산과 함께 사법개혁이 민주화의 또 다른 과제임을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헌법재판소이다. 우선 헌법재판소는 대법원에 비하면 국민들의 눈에 상대적으로 긍정적으로 비쳐져 왔다. 헌법재판소에 대한 체감거리는 3심제의 마지막까지 가야 겨우 만날 수 있는 대법원보다 가깝게 느껴지고, 그동안 헌법재판소가 심심찮게 내놓은 일련의 위헌결정들이 매스컴을 통해 알려지면서 사회와 법질서를 올바르게 변화시키는 역할을 하는 최고의 헌법수호기관이자 인권보장의 마지막 보루라는 이미지 구축에도 어느 정도 성공하였다고 생각한다. 물론 군사독재의 시대를 거치지 않았다는 점도 빼놓을 수는 없다.

그러나 “자잘한 것은 위헌, 굵직한 것은 합헌”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헌법재판소를 미화하는 홍보성 이미지에 가려진 본래의 진면목을 예리하게 지적하면서 헌법재판소의 기능과 본질을 가늠해 볼 수 있게 해주는 말이다. 이 말의 의미는 헌법재판소가 기득권 체제를 유지하는 법률들 가운데에서 비교적 가벼운 것들은 위헌결정을 내리지만, 핵심적인 법률에 대해서는 항상 합헌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해방 이후 우리 사회의 기득권 체제가 반공지상의 전투적 민주주의로 유지되어 왔고 그 핵심수단이 안보법 체제이며 이것이 민주주의와 인권을 억압해 왔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위의 말은 다시 곱씹어 볼 수 있다. 즉 헌법재판소가 민주주의와 인권에 부합하지 않는 비교적 가벼운 법률에 대해서는 위헌결정을 내리지만, 민주주의와 인권을 심각하게 위협하는 중대한 법률에 대해서는 여지없이 합헌결정을 내린다는 것이다. 이 민주주의와 인권보장에 심각한 위협이 되는 중대한 법률의 대표로 꼽을 수 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국가보안법’이다.

그렇다면 헌법재판소가 보이는 이러한 경향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헌법재판소는 분명 민주주의와 인권보장을 위한 기능과 역할을 하고는 있지만, 결정적 사안에 있어서는 오히려 민주주의와 인권보장을 가로막는 최후의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헌법재판소와 대법원이 합동으로 보여 준 이번 ‘국가보안법 구명작전’이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두고 볼 일이다. 수구보수세력이 믿고 의지해 온 국가보안법을 위기에서 극적으로 구해낼 것인지, 혹은 목숨만은 끊어지지 않도록 겨우 살려낼 것인지, 아니면 작전실패로 끝나 국가보안법 장례식에 조문하게 될 것인지 말이다. 결과야 어떻든 민주주의와 인권의 관점에서 헌법재판소와 대법원이 보여준 심판은 아테네 올림픽에서 본 것보다 더 충격적인 오심이 아닐 수 없다. 아울러 두 기관이 보여준 합동작전은 언젠가 끝이 날 ‘국가보안법 폐지의 역사’에 ‘수구적 저항’으로 기록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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