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르빌'을 아시겠지요. 만약 모르더라도 인터넷에서 검색해 보면 아실 수 있을 겁니다. 인도에는 오르빌 말고도 생태공동체들이 많이 있습니다. 물론 오르빌도 초창기와 달리 본래 취지가 많이 퇴색했다는 얘기도 들립니다.
문제는 좋은 뜻으로 만든 그런 공동체들조차 점점 다양한 사람들이 모이고, 시간이 지나면서 조건이 변화하면서 처음의 취지와 다른 모습을 보이게 된다는 겁니다. 뭐 멀리 오르빌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인터넷 동호회를 예로 들어도 될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모임을 만들었고, 후속 회원들에 의해 창립 회원들이 꿈꾸던 모임의 취지가 훼손되었다고 판단되는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인터넷 동호회들을 보면 그런 문제로 다툼이 생기는 것도 심심찮게 볼 수 있습니다.
항상 그렇듯이 그런 모임에는 원로에 해당되는, 그러니까 말하자면 처음에 모임을 만들던 사람들이 변화하는 모임의 성격을 두고 신진 세력(?)과 다툼을 벌이는 일이 있습니다. 학교도 마찬가지이고, 가족도 마찬가지이고,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그런 일들이 있을 것입니다.
자신이 주도해서 다큐멘터리 필름을 공부하는 모임을 만들었는데, 그게 후속 회원들에 의해서 슬그머니 상업영화를 불법 유통하는 모임으로 둔갑한다면? 그럼 둘 중에 하나일 겁니다. 모임을 그만 두고 떠나거나 아니면 모임을 만든 사람들끼리 모임의 처음 취지를 살리기 위해 노력하든가. 그런데 모임을 마음대로 그만두기도 쉽지 않고, 경우에 따라서는 조폭들처럼 모임을 그만 두려면 상당한 손해를 감수해야 할 때 여러분은 어떻게 할 것입니까?
선택을 할 수 없는 상황, 즉 생득적 강요의 상황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모임이 몇 가지 았습니다. 가족과 국가, 경우에 따라서는 종교적 모임도 있겠지요. 내 윗사람들이 정한 것을 내 맘대로 바꿀 수도 없고, 내 아랫사람들이 정하는 것을 "원래의 취지"가 이러저러 하므로 그러지 말라고 가르치기도 쉽지 않으며, 동시에 가입과 탈퇴도 그닥 자유롭지 않고 경우에 따라서는 상당한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상황.
여려분들은 자신의 뜻대로 안 되는 경우에 모임을 개혁하고자 하겠습니까, 방관하겠습니까? 엄격한 멤버쉽과 취지에 맞는 행동만 해야 하는 동호회가 좋은가요, 아니면 가입과 탈퇴의 의무가 없는 블로그 시스템이 좋은가요. 자신이 만든 동호회라고 해도 다른 사람들이 주장하는 대로 변화해 가는 것을 내버려 둘 겁니까, 아니면 창립 취지가 지켜지도록 싸울 것입니까. 창립취지에 어긋나는 사람들을 탈퇴시키겠습니까, 아니면 본인이 새로 모임을 만들든가 다른 모임으로 옮겨갈 것입니까?
만약 진보넷이 점차 태극기가 휘날리는 곳으로 변해간다면, 진보넷 블로거들과 운영진은 그것을 어떻게 할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변화를 인정할 것인가, 취지를 지키려 할 것인가. 아니면 진보넷을 탈퇴하고 '진짜' '원조' 진보넷을 따로 만들 것인가의 문제지요. 이 경우 "가치를 지키자"는 것이 "보수"가 아닐 수도 있는 것이지요.
이런 문제가 단지 인터넷 동호회의 문제가 아니라, "가족"과 "국가"일 경우 어떤 일들이 벌어지게 되는지 고민해 보기 바랍니다. 그리고 앞으로 여러분들이 만들게 될 수많은 모임들(인터넷 동호회부터 지역 공동체까지를 포함해서)의 성격과 여러분의 책임한도와 참여의 폭 등을 어떻게 설정할 것입니까? 이건 답이 있는 문제가 아니라 스스로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동호회 시스템이 좋은지 블로그처럼 1인 미디어가 좋은지, 운영진에 의해 멤버쉽이 관리되는 국가 시스템이 좋은지 자유롭게 상호 소통하는 소규모 친환경 지역공동체가 좋은지 각자 생각해 봅시다. 이것은 현실의 문제가 아니고, 미래를 위해 어떤 가치를 지향할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인터넷처럼 무한공간이라면 상관 없겠지만, 우리가 사는 물리적인 공간은 유한하기 때문에 결국 무한하게 딴 살림 차릴 수만도 없고 따라서 딴 살림 차리는 것보다는 옮겨 다니기가 쉽도록 가입탈퇴의 문턱을 낮추고, 1인 미디어처럼 가입탈퇴와 운영진의 간섭에서 최대한 자유로운 사람들이 많아져도 내버려 두는 것. 서로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조그만 모임을 임시로 구성해서 어울려 살면서 평화롭게, 즐겁게, 재미나게 일생을 사는 것. 그게 대안은 아닐까요?
어쩌면 웹이 동호회보다는 블로그가 대세인 것처럼 우리는 운영진이라는 것이 필요없는, 중앙집권화한 국가권력이 최소화해도 세상 돌아가는 데는 문제가 없다는 생각을 이미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은 아닐까요? 어쩌면 인구가 줄어들수록 그런 세상을 실현하기가 더 쉬워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인류학자 피에르 클라스트르는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라는 걸작을 통해 '국가'라는 것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수많은 옵션 중에 하나였을 뿐이라고 주장합니다.
그가 현장연구를 통해 보여준 것처럼, 우리는 모임의 취지를 바꾸거나 지키려 하지말고 그런 모임을 구상하려는 생각 자체를 없애고, 모임의 크기도 줄이고, 많이 갖는 것보다는 얼마나 즐겁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는 삶이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