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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꼬박꼬박 세금내고 국가대표 경기가 있는 날이면 태극기도 흔들어주고 한국 국적의 배우가 딴 나라에서 인기 있다면 기분 좋아해 주기도 했건만 이놈의 나라는 결정적일 때는 나 몰라라 하는 것이 취미인지라, 지진해일로 지네 나라 국민이 죽던 말 던 시체가 어디 쳐 박혀서 썩던 말 던 도무지 아무런 관심도 가져주지 않는다. '국가를 택하지 못하고, 국가가 우리를 택한 것이' 무엇이 그리 원죄라고 국가를 향한 우리의 원초적 짝사랑은 끝도 없는데, 그것에 대한 응답은 세금 고지서나 징집 통지서가 전부다. 그래도 여전히 나의 국적은 한국이며, 이름도 대체로 한글로 쓰고, 한국인이라면 함께 사용하는 표준시에 맞춰 생활하며, 퓨전이든 뭐든 해도 한국적인 - 한국 사람들이 대부분 공유하는 - 문화에 젖어서 산다.
아마 19세기 중후반에 태어나서 조국 땅에서 살아가던 대다수의 사람들은 민족이나 국가에 대한 의식이 그다지 없었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대한제국’이라는 국호도 이룰 수 없는 허상을 절망적으로 움켜잡으려는 노력에 불과하며 '민족'이란 개념도 원래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일제라는 타자의 침략에 저항하는 과정에서 인식된 것이 아니던가. 하지만 18,19세기의 격변기동안 세계는 산업혁명을 지나 근대에 접어들었고, 그것은 못난 나라가 선택한 죄로 이국땅으로 팔려간 피지배국의 민중들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들이 선택한 '일포드'호는 거대한 과도기의 용광로가 되어 매우 짧은 시간에 그들을 근대의 - 근대로 격렬하게 접어드는 - 땅으로 이끌었던 것이다. 이제 타자의 세계에 내동댕이쳐진 그들이 자신의 세계를, 즉 (되돌아)가야할 자기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들은 두고 온 제물포의 기억에 끊임없이 얽매인다.
그러나 그들의 시도는 항상 목적한 곳에 닿지 못하고 미끄러지고 만다. 각기 다른 처지와 신분의 그들은 애처롭게 조국의 이름을 불러보지만, 다가오는 것은 그것이 소멸했다는 소식뿐이다. 그러는 와중에 타국 땅에서도 노동조합이나 종교적 갈등 같은 근대적인 사건은 민중들의 삶에 스쳐지나간다. 이국땅이든 어디든 개인도 나이를 먹고, 시대정신도 결국 나이를 먹기 때문이다. 이내 모국에 닿을 수 없음을 인식한 그들은 이국땅에라도 어떤 식으로든 뿌리내리려 애써보지만 그것마저 녹록치 않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남의나라 혁명인 것이다. 그들의 거대한 상실에 대한 치유의 욕망은 항상 어그러지고 만다. 결국 그들은 막다른 골목에서 이렇게 얘기할 뿐이다. '무국적이 되려고 해도 나라가 필요한 거라구' 그들은 이윽고 나라를 세운다. 적들로 우글대는 정글의 한복판에 세워진 흔적도 남지 않을 국가의 이름은 '신대한新大韓'이다. 아 이 얼마나 희극적인 비극인가.
그리고 그러한 '이주민의 상실감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다. 가족이라는, 돈이라는, 성공이라는, 권력이라는 꿈을 잡기위해 그것의 외부도 한번 생각해 볼 여유 없이 노동하는 현대인의 모습은 어디에도 실질적으로 뿌리내리지 못하는 그때의 민중들의 모습에 다름 아니다. 주체가 탄생하긴 했는데, 그 주체는 도무지 몸 붙일 곳이 없는 것이다. '노마드' 같은 것이야 있는 사람들의 잘난 체이지, 없는 사람들로서는 터전 없는 떠돌이가 된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국가는 비겁한 표정으로 민중을 착취할 따름이다. 이미 백 년 전부터, 자본주의의 민중들은 정신분열을 시작했다. 그리고 바로 그 비극적인 어그러짐을 자연스럽게, 담담하게 일상을 스케치하듯 - 물론 여기에서 번뜩이는 그의 ‘기교’는 논외로 해두자 - 묘사해나가는 것에 작가 김영하의 저력이 있다.
그는 절망을 그리는데 있어서 담담하며 희망을 그리는데 있어서 처연하다. 모든 등장인물의 일생을 두리번거리며 더듬는 듯한 그의 필체는 죽음을 향해 돌진하는 일상을 포착하는데 있어서 적실하다. 형식상에서도 그는 결말을 맨 앞에 배치함으로서 근대인의 운명적인 비극을 선취한다. 그는 절망을 말하는데 있어서 머뭇거리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동시에 절망을 말하는데 있어서 무기력하지 않다. 그의 이야기들이 담고 있는 비극성은 결코 저열한 일상/인생을 비꼬는 관념의 유희에 머물지 않는다. 또한 그는 결코 섣부른 이분법을 늘어놓고는 그것에 의한 갈등을 잡다하게 피워놓고, 카타르시스로 내려앉는 통속적인 관습을 반복하지 않는다. 그는 이러한 방식으로 불우한 과거시대의 '개인'의 삶을 그림으로써 이제 이데올로기와 무관할 수 없는 어휘인 '민중'으로 포섭되지 않는 ‘현대인의 삶’을 성찰한다.(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포화 속에 천박한 자본주의가 심화되는 현실에서 ‘현대인이라는 범주가 무슨 의미를 지닐 수 있을 까’라는 ‘비판적’ 질문은 어떠한 형식과 내용을 내포한 ‘김영하’라는 하나의 ‘취향의 대상’에 대한 근본적 문제제기로서 여기에서 다룰 성질의 것은 아닌 듯싶다)
어쨌거나 김영하의 그러한 성찰이 읽는 이의 마음에 울림을 주는 것은 그 '현대인'이 '민중'과는 전혀 무관하거나 혹은 단순히 반 편향으로 생성된 대상이 아니라는 것에 있을 것이다. 그의 소설의 등장인물은 정신분석학적으로든, 정치경제학적으로든 어떠한 개인의 노력으로 벗어날 수 없는 구조에 연유한 헤어날 수 없는 삶의 절망을 겪는다.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고통의 근원은 그저 대책 없이 포스트 모던한 '개인적 이유'에 머물지 않는 것이다. 다시말해 과거의 민중문학이 거대한 치열함에 천착했다면, 김영하의 소설은 작은 각자의 치열함에 천착한다. 하지만 그는 그러한 파편화된 작은 것들을 그것 자체로 존중하면서 나름의 방식으로 거대한 이미지 하나를 직조해내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그것이 그의 작품을 보면서 때때로 짧은 숭고를 느낄 수 있도록 해주는 힘이다. 그리고 아마 이것이 그의 소설이 홍상수의 영화와 궤를 달리하는 지점일 것이다.
문득 '진지한' 민족문제를 - 물론 소재로서 - 다루는 그의 소설을 읽으며 김훈이 떠올랐다. 왜 역사에는 쿨하고, 삶에는 냉정하며, 미에는 끊임없는 집착을 보이는 김훈이 - 김영하 못지않게 국내 유수의 상을 휩쓴 - 그의 소설에서 떠올랐을까. 그것은 아마도 그가 나이를 먹어가면서 그를 성공케 한 '계급에서 벗어난 새로운 치열함과 정제된 세련됨'이 구성이나 문체를 통한 예술가적 유희로 전화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내 머리 속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사회와 개인(혹은 이런 이분법을 극복한 그 무엇)에게 모두 세심한 관심을 쏟지만, ‘나의 개인적인 취향에 비추어 보자면’ 그는 항상 '너무 돌리고 꼬아서' 말하는 것 같다. 물론 쉽게 읽으면, 그가 돌리고 꼬았다는 것조차 눈치 채기 어려울 정도로, 그가 지어내는 이야기는 그것 자체로 매혹적이지만 말이다.
소설 ‘검은 꽃’의 후반부, 누군가가 총을 손질하며 말한다. ‘이봐 정치는 모두 꿈이야 민주주의든 공산주의든 무정부주의든 다 마찬가지야. 서로 총질을 해대기 위해 만들어낸 것이란 말씀이지’ 하지만 그 말을 하는 그가 하는 행동이 무기의 손질이듯, 그럼에도 우리는 ‘싸울 수밖에’ 없지 않은가. 자신의 세계를 창조하는 작가로서 김영하가 자신이 낳은 인물들의 ‘죽음’까지 치열하게 추적했듯, 우리도 이렇게 죽는 날까지 살아갈, 그리고 싸워나갈 수밖에 없지 않은가. 끊임없이 미끄러지면서. 혹은 어그러지면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산다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 가’라고 노래를 부르면서.
어둠의 주둥아리들과 인터넷 언론
by 현
지금 남한사회엔 하나의 유령이 배회하고 있다. '네티즌'이라는 유령이. 따지고 보면 '네티즌'이란 명칭은 '한국사람'이란 명칭만큼 모호하기 이를 데 없다. 인터넷에 접속하기 위한 약간의 '기술'적인 측면을 고려해 일반적으로 이용자의 연령대가 '젊다'는 것을 제외하면, 그것은 특정한 계층이나, 계급을 담지하지 못한다.(물론 '정보에 있어서의 빈부격차의 심화' 또한 다룰 만한 주제겠지만, 이 글의 목적은 그렇게 심도 있는 논의를 하기 위함이 아니다. 그냥 짜증나서 써제끼는 글이다.)
오히려 '네티즌'이라는 개념은 남한 사회의 전반적인 어떠한 구조적인, 혹은 가시적인 현상을 설명하는 개념으로서 유용할 것이다. 그 개념은 두 가지를 의미한다. 기술로서의 네트워크의 발전과 소통의 생산 양식이자 토대로서의 가상 공동체다. 물론 이 글에선 소통의 측면을 다룰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세계-사람이라는 의미를 갖는 '누리꾼'이라는 개념도, 기술보다는 ‘소통 문화’에 중심을 둔 듯이 보인다. 어쨌거나 가상공간의 공론 장에서 벌어지는 정보화 사회의 특정한 소통양식이 네티즌이라는 개념을 채우는 남한 사회의 핵심적 요소다.
그러한 인터넷에서의 소통은 시간이 흐를수록 눈덩이가 커지듯 커다란 힘을 손에 넣고 있다. 체제에 포섭되지 않는 개인의 창조적인 활동이 기반이 되는 체제를 흔드는 차원을 넘어서, 네티즌들의 소통 자체가 하나의 물질적인 힘을 갖게 된 것이다. 이젠 권력자들이 인터넷을 살핀다. 수많은 인터넷 폴이 넘쳐나고, 그것의 결과는 정책에 반영된다. 그것은 21세기형 새로운 '직접민주주의'의 환상을 불러일으키기까지 한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화려한 결합이다. 축원하라, 풍요로운 그리스가 재림하시었다.
하지만 의식은 그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 것 같다. 도덕적 가치판단과 관련한 이슈에 대하여 격렬한 반응을 보이기는 하는데, 그것은 '마녀사냥'식의 ‘징벌’에 머물 뿐이다. 근래 앞뒤 상황에 대한 깊은 판단 없이 우르르 몰려가서 '한 사람의 인생'을 파멸시키는 그 꼴을 보라. 기술은 첨단이지만 의식은 중세 말기의 수준이다. 결코 재림하지 않는 자본의 신에 대한 회의가 공공의 적에 대한 비극적인 열광으로 표출된다. 중세야 법의 정비가 덜되어서 그냥 넘어갔지(동시에 지배층의 입맛에 맞는 것이었기에) 오늘 날 분명히 그것은 인권 침해이며 범죄다.
그리고 그러한 범죄의 핵심에 선정적인 인터넷 언론이 있다. 인터넷 언론의 핵심은 무엇인가? 히트수다. 기존 신문의 구독자 수가 중요한 이유가 '광고의 가격'을 결정하기 때문이듯, 인터넷 언론은 자신의 기사를 클릭 하는 사람들의 수에 따라 가치가 매겨진다. 그런데, 누가 포털 사이트에 올려져 있는 기사들을 출처들을 파악하고 읽는가? 따라서 '신속하게' 경쟁에서 승리할만한 '자극적인' 기사들을 생산해 내는 것이 그들의 소명이 된다. 그리고 인터넷 상의 시민들의 '의식'은 딱 그것에 비례한다. '쓰레기 언론'이라는 단순 비평은 늘어나지만, 그것을 정화하는 노력은 이루어지지 않고, 이루어지기도 어렵다. '클릭'은 그만큼 쉽다. 악덕 중간 판매업자들이(예컨대 싼값에 뮤지션들을 착취해온 메이저 음반사) 제도적 측면에서의 인터넷의 극단적 자본주의화를 꾀하고 있다면 언론은 정신적 측면에서 천박한 자본주의화를 이루고 있는 중이다. 전자의 경우에는 치열하게 싸우면서, 후자의 경우에는 왜 동조하는가. 반성하지 않는가. 정신적으로 미숙해서 그런가?
물론 한국 시민이든, 인터넷상의 시민이든, 우리에겐(나를 포함하여) 무조건적인 권리로서 저항권이 있다. 어린 두 학생이 억울한 죽음을 당하였을 때, 우리가 뽑은 국가가 우리를 전범으로 만들려고 하였을 때, 독재정권을 이은 부패정당이 나라를 뒤엎으려 하였을 때 우리는 ‘기술’의 힘을 보았고, ‘사람’의 힘을 보았으며, 그러한 힘들이 우리의 삶의 조건을 실질적으로 바꿀 수 있음을 분명히 목격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저항과 지금의 징벌은 다르다. 국가와 정부에 대한 ‘회의’는 우리를 ‘징벌’로 이끌지만 그것은 본질적으로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 징벌은 도덕적으로 잘못이 있거나 없을 어떤 개인의 인생을 망치는 대가로 스트레스를 풀며, 동시에 이 사회를 이렇게 만든 권력자들에게 ‘다시금’ 복종하는 행위일 뿐인 것이다. ‘권력과 제도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으며’, 동시에 ‘상대방을 인정하는’, 나아가 ‘삶에서 풀어나갈 수 있는 소통’이 필요하다.
가상공간의 곳곳에서 수많은 작은 모임들이 생겨나고 논의가 이루어진다. 결코 체제가 그것을 다 지배하지는 못할 것이다. 민중은 기술을 자신의 식으로 전유할 것이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이분법은 이제 무의미하다. 현실 공간과 가상공간은 모두 '현실'이며 그 현실은 바뀌어 왔고, 앞으로도 바뀌어 나갈 것이다. 그런데, 생각 없는 정신적 초딩들은 개혁이라는 자아도취에 취해, 언제까지 그 짓을 계속 할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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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 소유의 권리를 위해 줄지어선 자유권의 실제 모습... 반어법만은 아닌 듯하네요.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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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전의 법이 세상에 내려 앉을때, 그 형상을 결정하는건 '투쟁'이겠지요. 당연한 얘기겠지만, '권리'는 쟁취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자본가로서든, 노동자로서든.부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