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길의 그냥그저그래 3http://blog.jinbo.net/gimche/2018-03-22T12:33:16+09:00Textcube 1.8.3.1 : Secondary Dominant진태원, “비판적 사유의 미국화, 이론과 실천의 괴리 불러”새벽길http://blog.jinbo.net/gimche/14312014-03-04T21:34:16+09:002014-03-04T17:57:36+09:00<p> <br />
<span style="color:#006400;">황해문화 봄호를 읽어봐야겠네. 이번 황해문화에 실린 글들 중에 볼 게 많다고 하던데...<br />
<br />
그건 그거고, 진태원 교수의 글에 대해서는 비판적으로 볼 수밖에 없다. 유럽의 비판적 사유인데, 미국을 거쳐서 들어오면서 문제가 된다는 것이 글의 논지인 듯하다. 그런데 미국에서 유럽의 비판적 사유가 어느 정도 세를 이룬 적이 있던가? 물론 이건 잘 몰라서 하는 말이다.<br />
나아가 미국화보다는 외국 사상에 기대어 자신의 이론적 권위를 확보하려는 한국 학계의 풍토가 문제라면 문제다. 이렇게 해석해야 유럽의 비판적 사유뿐만 아니라 행정학, 정치학 분야에서 미국의 사유를 가져오는 게 설명이 된다.<br />
<br />
게다가 진태원 교수는 한겨레에 '다시, 변혁을 꿈꾸다-정치적인 것의 사상사'를 연재하고 있으며, 몇 해 전에도 비슷한 기획연재글을 쓴 바 있다. 이러한 연재글이 진태원 교수가 말하는 '포스트-포스트 담론'의 소개와 무슨 차이가 있을까. 진태원 교수는 사회적인 실천, 특히 조직적인 실천과의 연계를 맺고 글쓰기를 하고 있는가? 나야 진태원 교수만큼 그 이론들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이런 궁금증이 이는 걸 참을 수가 없다. 아마 많은 이들이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지 않을까. <br />
</span><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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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href="http://www.hani.co.kr/arti/culture/religion/626433.html"><strong>“비판적 사유의 미국화, 이론과 실천의 괴리 불러”</strong></a> (한겨레, 안선희 기자, 2014.03.02 19:40)<br />
<span style="color:#000080;"><strong>진태원 교수, 지제크 등 열풍 비판</strong></span><br />
국내에서 슬라보이 지제크(왼쪽), 알랭 바디우(오른쪽), 조르조 아감벤(가운데) 등 일련의 유럽의 좌파 사상가들이 큰 인기를 누리는 현상에 대해 ‘비판적 사유의 미국화’라는 문제제기가 나왔다.<br />
진태원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인문한국(HK) 연구교수는 최근 발간된 계간 <황해문화> 봄호에 실은 ‘좌파 메시아주의라는 이름의 욕망’이라는 글에서 이런 담론들이 유행하는 원인 중 하나는 국내 연구자들이 미국을 통해 비판적 사상들을 수입하기 때문이고, 이런 담론들이 이론적으로는 혁명적이지만, 실천적으로는 공허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비판했다.<br />
진 교수는 “이 글을 쓰게 된 이유 중 하나는 1990년대 이후, 특히 2000년대 들어 국내에 크게 유행하고 있는 현대사상의 국내 수용에서 나타나는 이상한 현상에 관한 의문 때문”이라고 글을 시작했다.<br />
그는 먼저 1990년대 이후 ‘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구조주의’ 등과 같이 ‘포스트’라는 접두어가 붙은 문화적·사상적 흐름이 수용된 현상을 지적했다. 미셸 푸코, 자크 데리다, 질 들뢰즈, 자크 라캉 등이 대표적 사상가들이다. 2000년대 들어서는 지제크, 아감벤, 바디우, 자크 랑시에르, 안토니오 네그리 등과 같은 이론가들이 반향을 일으켰다고 진 교수는 말하고, 이들을 ‘포스트-포스트 담론’이라고 이름 붙였다.<br />
진 교수는 “이들은 대부분 급진적인 정치적 주장을 제시한다”며 “특히 지제크, 바디우, 아감벤 등은 현대 사상가들 중에서도 가장 급진적인 정치, 반자본주의적이며 반자유주의적인 정치를 제창한다”고 말했다. 그는 <u>“이들은 ‘교양대중’을 포함해 주로 문학이나 영화, 기타 대중예술 관련 연구자들에게 열광적으로 수용되고 인용되고 있는데, 이 지지자들이 아마 보수적인 사람들은 아닐 것이지만, 그렇다고 정치적인 의미에서 급진적인 것도 아니다”며 “이들은 이 사상가들의 급진적이고 혁명적인 주장에 열광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선거 때가 되면 (특히 대선 같은 중요한 선거일수록) 늘 민주당 후보에게 투표하러 투표소로 간다”</u>고 말했다.<br />
진 교수는 이러한 ‘괴리’의 원인을 찾기 위해 이런 담론들, 특히 지제크, 바디우, 아감벤의 이론적 성격을 분석한다. 진 교수는 “해방의 정치를 제도정치 바깥에서 찾고 있는 점”과 함께 ‘좌파 메시아주의’를 이들의 특징으로 규정한다. 이는 “이들이 자본주의 및 자유민주주의 체제와의 급진적이고 전면적인 단절을 주장할 뿐 아니라, 이를 기독교 전통에 대한 재독해에 기반해 혁명적 사건성의 관점에서 해명하려고 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진 교수는 <u>“이러한 메시아주의 정치는 매우 사변적인 정치철학”이라며 “이들 중에서 누구도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나 국가에 대한 구체적 분석을 제시하지 않으며, 그것에 맞설 수 있는 대안적인 운동이나 조직에 관한 구체적 성찰도 보여주지 않는다”</u>고 말했다. 그는 이런 ‘사변성’이 바디우의 ‘대상 없는 주체’, 지제크의 ‘신적 폭력’, 아감벤의 ‘계급 없는 사회’ 등의 개념에서 나타난다고 분석한다.<br />
진 교수는 이런 담론들이 국내에 차례로 소개되고 유행하는 이유를 ‘비판적 사유의 미국화’, 즉 “오늘날 한국 인문학에서 회자되는 많은 담론들이 미국을 통해 가공되고 변형되고 수입된다는 사실”에서 찾는다.<br />
진 교수는 “<u>오늘날 한국에서 비판적 사유의 전거로 작용하는 여러 사상가들은 그가 프랑스 사상가든, 이탈리아 사상가든, 독일 사상가든 간에, 미국이라는 생산과 유통의 회로를 거치지 않고서는 더 이상 영향력을 미치기 어렵게 됐다</u>”며 “이들이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탁월한 사상가들’이기 때문에 논해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순진한 생각일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우리나라에서 포스트 담론이나 포스트-포스트 담론이 1990년대 이후 영문학자, 문화이론가 등을 중심으로 미국을 통해 수입된 현상을 가리키는 것이다. 진 교수는 “<u>비판적 사유의 미국화는 미국 학계의 특정한 일부분이 생산해낸 담론, ‘미국제 담론’을 세계적인 담론으로, 서구 담론 전체로 일반화하는 경향</u>이 있다”고 말했다.<br />
그는 이런 경향은 인문학을 고립하는 효과를 가져온다고 지적했다. “<u>우선, 인문학이 다른 학문분과, 특히 사회과학들과의 연계를 점점 더 상실해가고 있고, 둘째 비판적 인문학을 자처하는 경우에도 사회적 실천, 특히 조직적인 실천과의 연계를 맺는 경우가 매우 드물다</u>”는 것이다. 그는 “<u>1990년대 실천적 면모를 보여주지 못하고 어떤 의미에서 자유주의 헤게모니를 공고히 하는 데 기여했던 포스트 담론들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길을 포스트-포스트 담론들이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u>”고 결론지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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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뉴스토마토의 기획기사 "재야연구소를 가다"의 내용을 흥미있게 읽었다. 지금까지 9개의 연구단체를 다루었다. 이 중에서 과연 재야연구소가 맞나 싶은 곳도 있었지만, 정부의 지원 없이 나름의 재정 확보, 인력 충원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재야연구소라 할 만하다.<br />
<br />
면면들을 보니 공공운수정책연구원(사회공공연구소)보다 나은 상황이다. 진보진영 자체의 싱크탱크가 상대적으로 보수 성향, 기업 산하 내지 국책 연구소에 비해 역량이 딸리는 게 사실하지만, 나아가 노동조합운동은 이러한 진보적 싱크탱크만큼의 정책역량도 못된다 싶어 안타깝다.<br />
<br />
그 동안 뭘 해온 것일까. 민주노총 정책연구원, 한국노총 중앙연구원, 전교조의 참교육연구소, 공무원노조의 정책연구소, 금속노조의 노동연구원, 금융노조의 금융경제연구소, 사무금융연맹의 진보금융네트워크 등 노동조합 산하로 설립된 연구소들이 있지만, 이들 중에 제 역할을 해내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 곳은 드물다. 공공운수노조연맹 산하의 공공운수정책연구원(사회공공연구소)의 경우가 그나마 역량이 있지만, 빈약한 건 마찬가지이다. <br />
<br />
아마 정책역량의 확보에 충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일 터이다. 앞으로는 달라질 수 있을까. 글쎄다. 전반적인 상황을 보면 회의적이다. 뭔가 돌파구가 필요한데... 물론 이게 나의 주된 고민도 아니고...<br />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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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야'는 제도권에 속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사전에는 "벼슬하지 않고 민간에 존재한다"고 정의할 정도로 권력과는 거리를 두고 쓴소리 내는 재야에 기반을 둔 연구소들이 우리 주변에도 적지 않습니다. 정부 산하이거나 대기업이 운영하는 여러 연구소들이 제도권의 정책을 보완해서 풍부하게 만드는 것과 달리 제도권 정책을 끊임없이 의심하며 정책을 감시하고 더 나은 대안을 고민하는 것이 이들 재야연구소의 주업무입니다. 뉴스토마토는 소수의 목소리로 묻혀있는 이들 재야연구소의 목소리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특히 새정부 출범 전후로 빚어진 현안과 향후 이슈에 대한 이들의 견해는 귀기울일만 합니다. [편집자] <br />
<br />
http://www.newstomato.com/ReadNews.aspx?no=360403<br />
(재야연구소를 가다)①토지+자유연구소 "부동산투기는 불로소득" (뉴스토마토 김원정기자, 2013-05-06 오전 11:10:37)<br />
토지 공개념 불지핀 한국의 조지스트 집단 "강한세금이 투기 잡는다" <br />
<br />
http://www.newstomato.com/ReadNews.aspx?no=362689<br />
(재야연구소를 가다)②사회적경제센터, 착한경제는 이윤배분 시스템에서 나온다 (뉴스토마토 김원정기자, 2013-05-13 오전 10:00:00)<br />
"경쟁 아닌 연대로 성장과 가치, 두 마리 토끼 잡는다 <br />
<br />
http://www.newstomato.com/ReadNews.aspx?no=364558<br />
(재야연구소를 가다)③새사연, '진보적 생활인' 타깃한 맞춤형 싱크탱크 (뉴스토마토 김원정기자, 2013-05-20 오전 10:00:00)<br />
사회경제 아젠다 제시 주력..9000명 이르는 회원 든든한 자산 <br />
<br />
http://www.newstomato.com/ReadNews.aspx?no=366802<br />
(재야연구소를 가다)④당인리대안정책발전소 "신자유주의 대안 찾는다" (뉴스토마토 김원정기자, 2013-05-27 오전 9:00:00)<br />
개선·보완 아닌 근본해법 주목.."공공성 확대 위해 부동산문제부터 천착" <br />
<br />
http://www.newstomato.com/ReadNews.aspx?no=369087<br />
(재야연구소를 가다)⑤경제개혁연구소 `국내대표 재벌 감시자` (뉴스토마토 김원정기자, 2013-06-03 오전 9:00:00)<br />
경제민주화의 원조 "재벌과 오너 경제력 집중 막고 기업지배구조 투명하게" <br />
<br />
http://www.newstomato.com/ReadNews.aspx?no=370947<br />
(재야연구소를 가다)⑥좋은예산센터 "예산의 주체는 국민" (뉴스토마토 김원정기자, 2013-06-10 오후 12:15:19) <br />
10년간 납세자 권리 운동..'감시'에서 '참여'로 보폭 확대중 <br />
<br />
http://www.newstomato.com/ReadNews.aspx?no=379701<br />
(재야연구소를 가다)⑦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신자유주의, 그 이후" (뉴스토마토 김원정기자, 2013-07-08 오전 8:30:00)<br />
세계 자본주의 변화 추적, 북유럽 사민주의 주목..방법론으로 '지구정치경제학' 소개 <br />
<br />
http://www.newstomato.com/ReadNews.aspx?no=381861<br />
(재야연구소를 가다)⑧한국노동사회연구소 "노동자와 28년 동고동락" (뉴스토마토 김원정기자, 2013-07-15 오전 8:43:10)<br />
'평등사회' 모색 국내대표 노동계 싱크탱크..위기 맞은 노동운동, 이정표 찾기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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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newstomato.com/ReadNews.aspx?no=383919<br />
(재야연구소를 가다)⑨GSnJ, `농정계 브루킹스연구소`를 꿈꾸다 (뉴스토마토 김원정기자, 2013-07-22 오전 9:17:58)<br />
"FTA 불가피하다면 대책부터 확실하게..농민에게 믿음 주는 정책 없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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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pan style="color: #006400">발제문은 조금 이해하기 어렵다. 편집자주가 오히려 사회적 경제에 대해 쉽게 얘기하는 듯...<br />
<br />
사회적 경제와 협동조합에 대해 좀더 제대로 알 필요성을 느낀다.</span><br />
</p>
<p>------------------------------------</p>
<p><u><a href="http://www.newscham.net/news/view.php?board=news&nid=71012">http://www.newscham.net/news/view.php?board=news&nid=71012</a></u><br />
<strong>‘사회적 경제’, 신자유주의 위기관리의 보충물</strong> (참세상, 김성윤(문화사회연구소) 2013.07.19 15:49)<br />
<strong><font color="#0900ff">[주례토론회] 사회적 경제 비판<br />
[편집자주-토론내용] </font><br />
경제민주화, 사회적 경제, 협동조합, 그 뿌리는 어디에서 시작하나</strong><br />
작년 대선을 앞두고 경제정책의 아젠더를 선점하려는 정치세력들간의 논쟁에서 우리는 매우 이례적이고 흥미로운 점을 발견했다. 당시 보수 이데올로기의 강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조선일보가 전지구적으로 불고 있는 ‘자본주의 4.0’이라는 새로운 경제패러다임의 바람을 소개하면서 신자유주의의 폐해를 극복하자고 설파했고, 곧이어 박근혜 후보진영에서 경제민주화를 대대적으로 들고 나왔다. 설령 그 진의가 선거승리를 위한 술책이라 하더라도, 이후 대선논쟁과 현 정부의 경제정책에 대한 평가에서 경제민주화 담론은 계속 거론되고 있다. 왜냐하면 야당을 비롯한 시민사회 및 진보진영에서 경제민주화 공약 준수를 계속 요구하고 있고, 나아가 ‘창조경제론’으로 변질된 경제민주화를 바로 잡기 위해 ‘사회적 경제’로의 구조적인 경제개혁과 ‘협동조합’ 육성을 외치고 있기 때문이다.<br />
우리도 지난 <주례토론회>에서 ‘창조경제론’을 살펴보았다. 거기에서 근혜노믹스의 ‘창조경제론’이 김대중-노무현-이명박 정부로 이어져 온 신성장동력 찾기의 또 다른 버전임을 지적했다. 또한 지난 대선시기 각축을 벌였던 다른 후보들과 정치세력들에 대해서도 상호간의 이념적, 정책적 뿌리가 대동소이함을 지적하면서, “내가 하면 잘 할 수 있다”라는 진정성 논쟁만이 남았다고 비판했다.<br />
과연 실체에 비해 지나칠 만큼 과잉된 현재의 경제담론과 논쟁들은 대선이라는 정치일정에서 종종 드러나는 특별한 현상인가, 혹은 한국사회에서 경제 질서의 근본적 변화를 요구하는 대중적 분출의 대리전인가, 이제 좀 더 자세히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대외 경제 환경의 불안정성과 내부적 정책혼선으로 인해 ‘창조경제론’의 동력이 저하되고 있고, 반대 진영에서는 내년 지방선거에서 격돌할 경제담론논쟁 2라운드를 준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주례토론회>에서는 우리사회에 ‘자본주의 4.0’, ‘사회적 경제’, ‘협동조합’ 등으로 표상되는 새로운 경제패러다임의 이론적 실체와 역사적 전개과정을 조명하고자 했다.<br />
<strong>자본의 새로운 전술, ‘경제적인 것’에 ‘사회적인 것’을 얹어라</strong><br />
80-90년대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워싱턴 컨센서스)이 세계를 휩쓸던 시절, 신자유주의 구조개혁을 통해 위기를 탈출하고 새로운 성장을 도모하려고 했던 많은 제3세계 국가들은 반복되는 경제위기와 국가 실패로부터 벗어나지 못했고 경제종속과 불평등문제는 더욱 심화했다. 이에 반발하면서 퍼지기 시작한 반세계화 운동은 97년 동아시아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급격히 터져 나오게 된다.(99년 시애틀 WTO 반대투쟁) 이를 전후한 시점에 흥미로운 사건이 일어나는데, 98년 세계은행 수석부총재에 새케인스주의자인 스티글리츠가 임명된 것이다. 주류진영에서는 시장 중심적 편향에 과도하게 기운 신자유주의적 국제개발원조 방식에 대한 내부적 반성이 일고 있었는데, 이것이 비주류 경제학자였던 스티글리츠를 세계은행의 수장으로 앉힌 것이다. 이후 50-60년대 이후 사그라들었던 산업정책의 사회학적 이념이 경제학 패러다임에 다시 들어오면서, 점점 기존의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워싱턴 컨센서스)은 ‘포스트 워싱턴 컨센서스’로 변형을 일으킨다.<br />
<u>가장 핵심적인 변화는 ‘사회적인 것’(지역, 커뮤니티, 문화, 관습)으로부터 이탈되었던 ‘경제적인 것’(자유시장)에 다시 ‘사회적인 것’들을 얹히는 것이었다. 쉽게 말해서 신자유주의가 추구한 순수한 시장경제 이데올로기만으로는 의도한 구조개혁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번번이 실패했는데, 위로부터의 제국주의적이고 수탈적인 이미지를 지우고 아래로부터의 개혁참여를 북돋우면서 구조개혁의 실행가능성을 높이기 위한 새로운 전략이 등장한 것</u>이다.<br />
여기서 가장 중요한 개념으로서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이 등장한다. 이전엔 근대화를 위한 발전에 금융화와 탈규제가 단골처럼 등장했지만, 이젠 지역커뮤니티가 활성화되어 ‘사회적 자본’이 구축되어야만 제대로 발전한다는 논리가 부상한 것이다.<br />
‘사회적 자본’의 개념은 말 그대로 사회학적 개념이 경제학 개념으로 들어간 것을 말하는데, 퍼트넘이라는 학자가 지역커뮤니티가 활성화된 곳에서 왕성한 경제 활력과 선순환 구조를 관찰하면서 유명시킨 말이다. 여기에 새로운 주체로서 NGO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사회적 신뢰구축이 중요한 정책과제가 된다.(신뢰, 협동, 자조, 시민사회 주도성)<br />
이러한 <u>‘포스트 워싱턴 컨센서스’의 내용들은 개발도상국에게는 빈곤퇴치전락의 핵심으로 포함되고, 선진국에서는 ‘위기관리’ 개념으로 확대된다. 그리고 2007-8년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신경제론의 핵심인 인적자본 개념은 점차 쇠퇴하고 ‘사회적 경제’와 ‘사회적 자본’ 개념이 더욱 일반화</u>되게 된다. 이는 세계적인 금융위기의 영향으로 위기에 처한 자본이 자신의 위기관리 전망에 국가와 NGO를 적극적으로 배치시킨 결과이다.<br />
<u>이제 ‘사회적인 것’은 경제구조 재편과 경제주체의 동일화라는 두 축으로 재등장하게 된다. ‘자본주의 4.0’, ‘사회적 경제’, ‘사회적 기업’, ‘협동조합’ 등등의 키워드로 상징되는 경제구조 재편의 문제의식은 대동소이</u>하다.(주례토론회 <‘창조경제’는 창조적이지 않았다> 참조) 여기에 경제주체의 동일화를 끌어내기 위해 ‘공정’, ‘지속가능성’, ‘호혜성’, ‘자발성’ 등등 주체화양식의 키워드들이 등장한다. 이러한 주체화과정에서 시민단체와 자원봉사조직이 굉장한 탄력을 받는다. 가령 태안기름유출사태에서 보듯, 정작 사고당사자인 삼성중공업은 보상축소에 골몰하고 있을 때, 온 국민이 나서서 해안의 기름때를 모두 닦아 냈다. 복지정책과 밀접한 세 개 부처인 보건복지부, 여성가족부, 안전행정부가 관련시민단체와 자원봉사조직 관리에 적극적인 건 단순한 업무협조 때문만이 아니다. 바로 ‘사회적 자본’의 토대가 여기서부터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u>요즘 ‘000 마을 만들기’ 운동이 곳곳에서 한창인데, 만약 지역주민들이 자발성과 협동, 상호신뢰가 없으면 사업은 지속불가능해고 일회성 전시행정으로 끝나고 만다</u>.<br />
<strong>사회적 기업, 협동조합, 사회책임투자, 윤리적 소비</strong><br />
이렇게 ‘사회적인 것’들이 들어찬 경제적 토양에 조직형태로서 사회적 기업, 협동조합이 최근 우후죽순처럼 확대되고 있다.(2007년 사회적기업육성법, 2012년 협동조합법 제정) 사회적 기업이 기존 기업들처럼 임노동 관계에 따른 위계질서를 갖는 경영구조라면, 협동조합은 1인 1표에 근거한 수평적 경영구조를 갖는다.<br />
사회적 기업의 진출분야는 대부분 사회서비스 분야에 치중되어 있다. 그 이유는 김재구 한국사회적기업진흥원장이 어느 언론에서 인터뷰한 내용을 보면 이해할 수 있다.<br />
“사회적 기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개념적인 설명보다 등장 배경을 살펴보는 것이 더 좋겠다. 우리나라는 1997년 외환위기 이후 대량 실업사태로 양극화가 심화되자 정부가 공공근로 일자리를 제공하는 정책을 폈으나 문제는 이 정책 자체가 지속가능한 일자리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더구나 한국은 공공서비스에 대한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데도 사회적 안전망이 상대적으로 미흡해 충분히 대처하기 어려웠다.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새로운 대안의 필요성이 고조됐던 것이다.” -국민일보 2013.7.2<br />
<u>현재 사회적 기업은 828개가 운영 중인데, 생존율이 94%에 달한다. 1990년대 후반 붐을 이뤘던 벤처기업의 성공률이 2∼4%였던 것을 감안하면 매우 높은 생존율이다. 그런데 현재 정부의 재정지원을 받을 수 있는 기한 5년이 끝나고 이제 본격적으로 독자생존을 해야 할 시점에 직면했다. 그러나 현재 활동하고 있는 사회적 기업 중에서도 손익분기점을 넘긴 곳은 소수에 불과</u>하다. 이러한 우려에 대해서 현장 분위기는 사회적 기업에 대한 우대정책을 정부가 제도적으로 지원하길 요구하고 있다.(김종각 한국사회적기업진흥원 본부장) 이러한 의존적 관계는 <u>사회적 기업이 국가가 당연히 해야 할 공공서비스의 영역을 외주화하면서 탄생했던 사회적 기업의 역사와 무관치 않다. 애초부터 복지정책의 하위파트너 관계에서 출발한 사회적 기업에게 ‘독자생존’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 것</u>일 지도 모른다.<br />
최근엔 지난해 말 협동조합법 시행을 계기로 협동조합 설립 붐이 일어나고 있다. 7개월 동안 1,461개가 생겼다. 불합리한 ‘갑을관계’가 횡행하는 우리나라에서 소위 “뜻있는 사람끼리 뭉쳐보자”라는 대중적 욕구가 분출한 현상이라고 분석해 볼 수 있다. 그런데 <u>사회적 기업처럼 협동조합도 독자생존을 위한 비즈니스 모델을 구체적으로 고민해야 하는 어려움에 처해 있다. 내부적 경영에 관한 조합원들간의 민주적 소통과 교류는 스스로의 몫일 지라도, 외부적인 판로 개척의 문제는 주관적 의지로만 될 성질이 아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개인 자영업자가 여럿이 모인 자영업체로 바뀌었다고 해서 사업모델이 저절로 혁신되는 건 아니기 때문</u>이다.<br />
또한 사회적 기업이나 협동조합이 사업을 시작할 때 가장 어려워하는 부분은 자금조달 문제이다. 사업자금을 처음부터 충분히 쌓아놓는 경우는 많지 않기 때문이다. <u>정책자금을 받거나 창업투자를 받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여기에 ‘사회적 경제’의 중요한 축을 담당하는 ‘사회책임 투자펀드’가 큰 역할을 한다. 말 그대로 사회적 책임을 지는 기업에 투자한다는 의미인데, 유엔은 이미 2007년 책임투자개념을 정립시켰다. 이후 ‘마이크로 파이낸싱’이라는 말로 상징되는 여러 자금투자모델들이 개발되었다. 이러한 ‘사회책임투자’라는 개념은 여러 정책적인 자극을 주는데, 대표적으로 국민연금과 같은 연기금의 투자방향은 사회적 책임을 지는 기업을 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는 일반 대기업들에게도 ‘사회공헌사업부’를 만들어 기업이미지 관리나 사회공헌에 참여하도록 만들기도 한다. 또한 기존의 윤리적 소비 개념을 ‘착한소비자’가 ‘착한기업가’에게 투자한다는 개념으로 확장</u>시키기도 한다.("ISO 26000" 인증마크) 이것을 더욱 적극적인 방식으로 만든 것이 ‘크라우드 펀딩’이라 불리는 것이다. 말 그대로 대중들의 참여로 자금을 모으는 것인데, 이를 위한 제도적 방안도 이미 정립되어 있다.<br />
<img src="http://www.newscham.net/data/news/photo/12/59276/j1.jpg" /><br />
<strong>‘사회적 경제’ 담론에서 드러나는 논란들</strong><br />
그렇다면 이렇게 첫 걸음마를 데고 막 일어나기 시작한 ‘사회적 경제’에서 드러나는 논란은 무엇일까? 먼저 많이 지적되는 것이 자본주의적 대안으로 신화화된 현상이다. <u>‘국가의 실패’와 ‘시장의 실패’라는 두 가지에 대해서 이를 극복할 새로운 대안으로 ‘사회적 경제’를 상정하는 것인데, 서구에서는 이미 ‘제3의길’을 통해 20년 전부터 회자된 주장</u>이다. <u>우리나라에서는 IMF 이후 경제불평등의 심화와 최근 2008년 경제위기의 영향으로 자본주의의 새로운 대안으로 선전되는 경향이 존재</u>한다.<br />
그러나 앞에서 정리한 그림에서 보듯, <u>현재 창업되는 사회적 기업이나 협동조합은 국가 기능에 하위파트너로 조응하거나 시장영역으로부터 자금조달과 판로개척 문제로 종속되어 있는 형태를 가지고 있다</u>. ‘사회적인 것’을 다시 경제학에 끌고 들어온 ‘포스트 워싱턴 컨센서스’의 개념 자체가 말 그대로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위싱턴 컨센서스)을 보충하기 위해 정립된 개념이 듯, <u>현재 회자되는 ‘사회적 경제’ 담론도 자본주의 폐해를 완화시키고 보완시키기 위한 개념이다. 심지어 요즘은 ‘사회적 경제’를 주장하는 이들도 이것을 체제를 변혁시키는 새로운 대안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라는 말로 정리</u>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에 대한 여러 비판들 중 사회변혁에 미달하는 하는 관점이라 비판은 번지수를 잘못 짚은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변혁이라는 관점은 탈각된 지 오래되었기 때문이다.<br />
그런데 <u>문제는 ‘사회적인 것’을 ‘정치적인 것’과 혼동하는 이데올로그들에 의해 ‘사회적 경제’ 담론은 과잉된다. 가장 대표적인 표현으로 “돈벌이 경제가 아닌 살림살이 경제로 나아가야 한다”라는 주장</u>이다. 여기에 약육강식의 돈벌이 경제와 협동 상생의 살림살이 경제라는 말이 대비되면서, 대기업 중심의 불합리한 ‘갑을관계’가 판치는 경제구조를 경제민주화와 협동의 경제로 판을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 설파된다. 이를 위해 1인 1표의 민주적 운영원리가 깃든 협동조합이 대안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논리로까지 확장된다.<br />
하지만 협동조합운동 100년의 역사에서 지적되는 바, <u>시간이 지날수록 새로운 구성원들의 유입과 세대간 격차로 인해 관료적 위계질서에 편입되거나 자본주의 기업으로 퇴행할 우려가 늘 상존해 있었다. 또한 다른 협동조합들과 시장에서 경쟁하는 관계 속에서 타 조직에 배타적 경향을 띨 수밖에 없고, 이는 조직들 간의 문제로 불거지기도 했다. 더 큰 문제는 현재 다시 활성화 되고 있는 협동조합들은 이미 거대화된 국가(권력)과 시장(돈)이라는 매개물과 관계를 끊을 수 없다. 그들과의 관계를 변화시키기 위해선 협동조합방식의 경제운영원리에 국가와 자본이 조응하도록 거시적인 변혁을 일으켜야 한다</u>. 그러면 이것은 다시 체제변혁의 관점으로 돌아가는 것인데, 순환논리에 빠지고 만다. <u>‘사회적 경제’ 담론에서 ‘기간산업 국유화’나 ‘노동자자주관리’와 같은 담론이 끼어들지 못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보충물이 대체물이 되어선 안 되기 때문</u>이다. 오로지 영미식 ‘소셜벤처기업’과 같은 보충물 만이 허락될 뿐이다.<br />
그렇기 때문에 <u>운영원리와 주체의 도덕성에 기댄 ‘사회적 경제’ 담론은 ‘사회적인 것’이 보편적인 상수가 아닌 변수라고 이해될 때, 올바른 논쟁의 방향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사회적인 것’은 목표가 아닌 ‘현존하는 것’으로서 확인해야 할 대상</u>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u>항상 신자유주의(포스트 워싱턴 컨센서스)에 영합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자기 경계와, 극복하려고 했던 ‘배제’의 문제를 없애서 이를 해결하기보다 배제의 분할선을 다른 곳으로 재배치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자기성찰이 필요</u>하다.(예를 들어 협동조합의 신화로 알려진 ‘몬드라곤’의 성공비결에 대해 가장 많이 거론되는 것이 바스크 민족주의이다. 지역주의 동일성에 기초한 공동체주의는 타 공동체에 대한 분할선을 가지고 있다. 또한 ‘몬드라곤’이 세계화하면서 브라질 등등에서 현지법인 조합원들과 고용-피고용의 관계를 맺고 있는데, 이는 앞서 말한 배제의 분할선의 재배치를 강하게 상기시킨다.)<br />
<strong>앞으로 제기될 쟁점들</strong><br />
그래서 자연스럽게 거시적 부문의 구조변혁으로 논점을 옮기지 않을 수 없다. 1930년대 대공황 이후 경제를 사회로 끌어당기는 운동이 분출하였고, 이는 고도금융을 제어하고 국가에 의해 재분배정책을 취하는 것으로 나아갔다. 그러다 80-90년대 신자유주의 등장 이후 경제는 사회에서 다시 떨어져 나갔고, 2008년 세계적 경제위기를 겪으면서 다시 경제를 사회로 끌어당기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사회적 경제’의 등장이 바로 그러한 움직임이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오히려 반대로 사회가 경제로 끌려가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u>30년대 대공황 이후 분출한 뉴딜적 재분배정책(사회방어운동)과 현재 ‘포스트 워싱턴 컨센서스’ 사이에 커다란 차이가 있다. 핵심적 이유는 국가이다. 국가가 위기를 관리할 능력 저하된 상태에 있기 때문</u>이다.(신자유주의 국가의 최소화)<br />
그런데 이런 국가의 위기관리 능력도 비대칭적인데, 미국처럼 헤게모니 국가로서 기축통화를 통한 위기관리능력을 가진 나라가 있는 반면, 유럽채무위기국가들처럼 경제종속에 의해 위기관리에 아주 무력한 나라가 있다. 또는 중국처럼 독자적인 정치체제로 자본운동과 시민운동을 제어하고 관리하는 국가도 있다. 두 강대국의 행태를 보면 국가기능의 핵심인 화폐관리와 노동력 관리를 중심으로 위기를 적극 관리하면서, 여기에 ‘사회적인 것’들을 배치하고 있다. 사회를 경제로 끌고 들어오는 형태의 전략이다. 그래서 ‘국가의 재등장인가?’라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u>국가는 복지국가가 아니라 위기관리국가이며, 재등장이라기보다 변형, 변모</u>에 가깝다.<br />
이렇다 보니 ‘사회적 경제’ 담론의 중요한 축으로서 시민사회 주도성은 그 중심을 잡기 어렵게 된다. 국가-시민사회-자본 공조체제에서 힘은 국가로부터, 돈은 자본으로부터 전달받는 시민사회가 독자적으로 자신의 ‘정당성’을 어디까지 유지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기 때문이다.(제도적 동형화 발제문 참조) 그렇다 보니 3주체를 이끌어가는 ‘창발적 제4섹터’라는 개념까지 등장하면서 현실의 곤란함을 관념적 이론모델로 대체하려는 경향마저 등장한다. 현실의 곤란함을 적극적으로 인정한다면 국가의 문제를 우회할 수 없다. 앞서 말했듯, <u>‘사회적인 것’은 문제의 해결점 혹은 종착점이 아니다. 우리가 관찰하고 그걸 딛고 넘어서야 할 출발점이다. 그래서 ‘사회적 경제’ 담론은 국가와 자본으로부터 독립된 ‘제3영역’이라는 자기 우월적 관념에 머무르면 안 된다</u>. 왜냐하면 우리가 딛고 극복해야할 문제점은 어느 영역에서나 있기 때문이다. 대중들이 ‘사회적 경제’ 담론과 협동조합의 이념에 보이는 커다란 관심과 열망이 단순한 유행이 될지, 아니면 ‘사회적 경제’ 담론이 사회변혁의 매개물이 될지, 이는 신자유주의 위기관리의 보충물에서 시작된 ‘사회적 경제’ 담론의 역사를 성찰하고 자기변모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토론문 끝]<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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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pan class="toggle-text" onclick="toggleMore(this)" style="display: none; cursor: pointer">발제문 전문</span></p>
<div class="more-content" style="border-bottom: black 1px dashed; border-left: black 1px dashed; padding-bottom: 1px; margin: 1px; padding-left: 1px; padding-right: 1px; background: #efffaf; border-top: black 1px dashed; border-right: black 1px dashed; padding-top: 1px">
<p><strong>사회적 경제에서 사회적인 것의 문제1)</strong><br />
김성윤 (문화사회연구소 연구원, 중앙대 한예종 강사)<br />
오늘날의 위기는 축적의 위기와 동일성의 위기로 파악될 수 있다.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금융세계화 경향은 사실상 ‘강탈에 의한 축적’에 가까웠고 지구적인 외환, 금융, 재정 위기 그리고 그에 대항하는 민중적 저항들을 거치면서는 더 이상의 강탈조차 힘들어졌을 정도로 축적의 위기에 다다랐다. 다른 한편, 세계화로 은유되는 ‘시장의 퇴행적 확장’ 경향은 얼마간 안정적이었던 ‘국민적-사회적 국가 형태’를 쇠퇴하게 했고 이에 따라 더 이상 포섭되지 않는 사람들로 하여금 배제의 고통을 경험하게끔 했다. 따라서 <u>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 프로그램이 제시된다면, 적어도 그것은 생산과 소비 그리고 소유와 분배 등에 있어 대안적인 교환양식이어야 하며, 동시에 주체화와 타자화 그리고 인간관계 등에 있어 대안적인 교류양식이어야 할 것</u>이다.<br />
그 중에서 ‘사회적 경제’는 주로 교환양식의 측면에서 제기되는 의제에 해당한다. 전체 경제에서 사회적 경제가 차지하는 비중은 0.04%로 극히 미미한 수준이지만, 적어도 담론적 차원에서는 대항 헤게모니로 간주될 수 있을 정도로 각 분야에서 진지한 검토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2) 이러한 사실은 (특히 한국사회에서는) 사회적 경제라는 문제가 정치적 입장을 초월할 정도로 중요한 담론이지만 그 방향성은 아직 안정화되지 않았다는 점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 실제로 사회적 경제에 얽혀 있는 위기관리에 대한 기대와 발전에 대한 전망은 다양한 이해관심들에 따라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다. 따라서 <u>적어도 오늘날 한국에서 사회적 경제는 운동의 의제화, 공공성 강화의 시도, 복지의 대체 입론, 윤리적 시민성 고양 기획 등등이 과잉결정‘되고 있는’ 산물</u>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br />
결정된 것이 없다는 현실은 두 가지 문제의식을 유도한다. 하나는 미결정 상황이라면 우리들 누구라도 거기에 개입하여 정치적 방향을 구부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러기 위해 과잉결정의 ‘블랙박스’ 안에 무엇이 얽혀 있는가를 알아둘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 글은 대안적 교환양식으로 부상하고 있는 사회적 경제에서 ‘사회적’이라는 언어의 모호성으로부터 시작하여 여기서 제기될 수 있는 이론적, 실천적 쟁점들을 추출하고자 한다(3절). 이를 위해 사회적 경제 담론이 제기된 배경과 그 자체의 역사성(1절),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제기될 수 있는 문제점들(2절)에 대해 비판적으로 접근하도록 할 것이다.<br />
<br />
<strong>1. 사회적 경제의 역사적 쟁점</strong><br />
(1) 대안적 교환양식 혹은 새로운 경제학적 가상<br />
1990년대에 지식기반경제라는 용어가 출현한 이래로, 이 용어는 새로운 ‘경제학적 가상’(economic imaginary)3)을 매개로 하여 경제 관행이 새롭게 조직됨을, 어쩌면 이미 조직되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경제학적 가상이란 말이 역설적으로 들릴 수도 있다. 경제라는 물질적 영역과 가상이라는 상징적 영역은 서로 무관하거나 오히려 대척점에 서 있는 것으로 오해되기 쉽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제가 이데올로기라는 타자 없이, 마찬가지로 이데올로기가 경제라는 타자 없이 존립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문제다. 어느 시대의 어느 국면에서나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경제는 이데올로기를 통해서야 제대로 관철될 수 있었고 이데올로기는 경제에 힘입어서만 작동할 수 있었다.<br />
<표 1>4)을 통해 추론할 수 있는 것처럼, 한 번 수립된 경제학적 가상은 단순히 이 가상을 중심으로 하는 (유사)완결적 구조를 지닌 기호체계로서만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의 경제 관행은 물론이고 일상의 사회 실천을 조직화하는 효과를 낳는다.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지식기반경제’라는 담론을 유력한 표상으로 가지게 됐을 때, 이것은 (생산 차원에서) 지식이나 창의성같은 비-물질적인 대상을 허구적으로 상품화하는 새로운 변화 그리고 (주체화 차원에서) 인간 주체를 무한히 자기계발하게 하는 새로운 변화와 조응하는 셈이었다.5) 요컨대, 경제학적 가상은 축적 논리와 동일화 메커니즘에 두루 영향을 미치면서 오늘날의 세계를 질서 짓는 중요한 구실을 한다.<br />
지식기반경제가 됐든, 아니면 그것의 모체로 지목받는 신자유주의가 됐든, 그것의 정치적 효과는 비교적 자명해 보인다. 1990년대의 축적 위기에 직면하여 고안된 탈출구는 ‘지식’을 정점으로 하는 비-물질의 개발이었다. 이를 두고 자본의 실질적 포섭 운운하면서 노동자들의 역량 강화로 이어질 것이라는 장밋빛 전망이 있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 자본의 동학은 전혀 녹녹하지 않아서 대중들의 역량을 강화하기보다는 새로운 허구적 상품으로써 ‘시장의 퇴행적 확장’을 촉진하는 역설을 창출했다. 그 사이에 순수한 프롤레타리아라는 형상들은 자기 내면으로 침잠하면서 (다른 존재들과 횡적으로 동일화하기보다는) 성찰적으로 자기-동일화를 반복하는 모순에 처했다.<br />
이렇게 한동안 지식기반경제가 지배적인 가상으로 작동하고 있었지만, <u>2000년대 후반 지구적 금융위기와 이로 인한 금융 헤게모니에 대한 도전들이 중심부 지역마저 강타하면서, 사람들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잉태한 삶과는 전혀 다른 삶을 집합적으로 소망하기 시작했다. 경제 영역에서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요구하고 일상 영역에서는 소셜 네트워크(와 이를 통한 치유)를 강조하는 경향들이 대표적</u>이다. 이는 지난 대선에서 민주당뿐만 아니라 새누리당마저 ‘경제민주화’라는 모토를 내걸었던 것을 결코 우연으로만 볼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민주화라는 말이 가지는 이념적 보편성에 비해 이들의 실제가 얼마나 제한적인 것인가 하는 점은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지만 말이다.<br />
그런 맥락에서, 우리는 근 몇 년에 걸쳐 거의 유일한 대안(적 교환양식)으로 부상하고 있는 ‘사회적 경제’ 담론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누적적 위기로 인해 세계경제 질서에 있어 근본적 재고가 요청되는 시점이고, 동시에 국민주의의 이념적 시효가 다함으로써 생겨난 배제의 정치에 대응하여 새로운 가상적 보편성의 창출이 긴급한 상황이기 때문이다.<br />
그 사이에 죽은 줄로만 알았던 ‘사회적인 것’(the social)이 출몰하고 있음은 모두가 아는 바와 같다. <u>사회책임투자,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공유가치 창출, 사회적 기업, 마이크로 크레딧, 공정 무역 등이 한편에 있고, 사회적 자본, 소셜 미디어, 윤리적 소비, 마을 만들기, 공공예술과 관계미학, 자원봉사활동, 재정 재능 기부 등이 다른 한편에 있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들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서의 지배적 관행들, 즉 ‘고삐 풀린’ 금융, 주주가치경영, 벤처기업, ‘약탈적’ 담보 대출, 자유무역, 그리고 인적 자본, 1인 미디어, 과잉소비, 주거 격리, 상업화된 대중예술, 자기계발, 스펙쌓기 등과 흥미로운 대척점을 보여준다. 축적 논리와 동일화 메커니즘에서 한동안 역량, 유연성, 계산가능성, 개별성 같은 것들이 지배하고 있었다면, 거기에 네트워크, 지속가능성, 공정성, 친밀성 같은 덕목들이 응전하고 있는 태세</u>인 셈이다.<br />
이와 같은 추세가 언어유희 내지는 단순한 유행현상 정도로 그치진 않을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 이런 말들은 지배계급과 중간계급, 심지어는 민중계급조차도 동의하는 보편성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일보가 자본주의 4.0을 보도할 때 경향신문이 사회적 경제를 기획하고, 야당 후보가 경제민주화를 ‘제시’할 때 여당 후보도 경제민주화를 ‘약속’한다. 이러한 역설은 사회적 경제라는 새로운 교환양식과 그에 준하는 새로운 교류양식이 대다수 민중계급뿐만 아니라 지배계급에 의해서도 추구된다는 점을 입증한다.<br />
물론 사회적 경제에 관한 이론적 논의와 실천적 관행들은 비교적 깊은 역사를 가지고 있고, 무엇보다 국가와 시장이 주도했던 지난 시기의 자본주의와는 질적으로 다른 자본주의를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받곤 한다. 그런 까닭에 사회적 경제 담론에 비판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이론적으로나, 무엇보다 정서적으로 결코 쉬울 리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u>오늘날 사회적 경제 담론이 가지는 대안적 측면이 과연 무엇이고 여기서 담론 내적으로 제기될 수 있는 문제들은 없는지, 실제 대안 프로그램으로 적용됐을 때 발생하는 문제들은 없는지, 아울러 경제 담론으로서 경제 외적인 영역들을 얼마나 포괄할 수 있는지 등에 관한 질문들은 비교적 까다로운 쟁점</u>이 될 수밖에 없다. 요컨대, 오늘날 사회적 경제 담론은 어떠한 이론적 곤궁을 가리키고 있는 것일까.<br />
(2) 지배 내 구조라는 은폐된 논점<br />
먼저 사회적 경제 담론이 대안적 교환양식으로 추인받게 된 역사적 궤적을 따라 가보자. 사회적 경제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사회적 목적을 가진 경제활동’을 포괄하지만, 때로는 제3섹터나 비영리부문 같은 용어들과 혼용되면서 신자유주의적 경제 체제에 대한 대안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6) 그러나 사회적 경제에 관한 담론들은 19세기부터 있어 왔으며 1970년대 축적 위기와 더불어 그리고 가장 결정적으로는 20세기 후반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문제들과 더불어 정교화되고 있다. <u>애초에 사회적 경제는 △정치경제 논리를 대체하기 위해 경제의 사회적 속성을 해명하고자 시도됐던 이론적 작업, △분배 문제 등과 같은 경제적 정의 실현에 관한 포괄적 프로젝트, △당대의 사회적 위험에 결사체주의적으로 대응하고자 한 경제적 사회적 운동 등으로 (서로가 무관하지만은 않았던) 여러 뿌리들을 가지고 있었지만, 오늘날에는 이 세 가지 전통이 혼융되어 현행하는 자본주의에 대한 거의 유일한 대안으로 간주</u>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7)<br />
20세기를 거치면서 대안적 실천으로서 사회적 경제는 공제조합, 농업협동조합, 신용협동조합, 소비자협동조합, 노동자협동조합 등의 지류들로 현실화됐다. 이들 협동조합이 영리적 관심의 부차화를 비롯해 공동출자, 공동목표, 공동책임 등을 특징으로 하면서 일반적인 자본주의적 기업조직과 다른 형태를 가진다는 점은 주지의 사실이다. 실제로 노동계급이 직접적으로 기업을 운영하는 등 착취 메커니즘을 최소화한다는 점에서 이러한 결사체(association) 조직들이 대안적인 생산양식으로서의 속성을 가지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br />
오늘날에 와서는 사회적 경제가 내포하는 가능성의 조건들이 더욱 구체화되고 있다. 물론 케인스주의 이래로 국가가 주도하는 관리자본주의의 속성이 강화되면서 사회적 경제 영역이 일정 부분 제도화되거나 주변화되는 부침을 겪기도 했지만, 1970년대 대량생산체계에 위기가 닥치고 복지국가 위기론이 격화됨으로써 사회적 경제 부문이 재부상할 수 있었던 것은 거의 자연스러운 수순에 가까웠다. <u>1977년 데로쉬가 ‘사회적 경제 기업’이라는 용어를 제안한 이래로, 사회적 기업과 협동조합 운동 그리고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윤리적 소비 등등으로 구축된 오늘날의 사회적 경제 담론은 ‘국가의 실패’ 및 ‘시장의 실패’ 이후로 상상가능한 대안의 최대한도로 자리매김</u>되기에 이르렀다.<br />
이번에는 사회적 경제 부문이 가지는 불가능성의 조건들에 대해서도 고려해보도록 하자. 사실 초기의 협동조합 운동 역사에서도 이에 대한 비관적 전망은 줄기차게 제기된 바 있었다. 특히, <u>사회적 경제가 성공하기 위해선 무엇보다도 생산관계에서의 대안적 가능성이 점쳐져야 하는데, 다른 협동조합 조직들에 비해 (몬드라곤 같이 다소 신화화된 몇몇을 제외한다면) 대다수 노동자협동조합들이 크게 성장하지 못한 점에 주목할 필요</u>가 있다. 이것은 <u>사회적 경제 조직이 조합원들의 배타적 소유 경향 때문에 관료제적 위계질서에 빠짐으로써 결국에는 자본주의적 조직으로 퇴행하기 십상이고(조직 자체의 문제), 나아가 조직 내 민주적 질서를 확립했다 하더라도 비조합원이나 다른 조직들에 대해서는 소집단 이기주의 경향을 내비치며(조직들간의 문제), 궁극적으로는 조직 규모 자체가 영리 기업에 비해 약소하기 때문에 사회 전체로 확산될 만한 생산양식으로 보기 어렵다(전체 경제와의 문제)는 문제</u>들로 나타나곤 한다.<br />
그렇기에 무엇보다도 마르크스가 ‘경제적 관계의 무언의 강제’라고 말했던 것을 사회적 경제에 대해서도 중대한 질문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노동자들이, 나아가 다수의 집합적 시민들이 무엇을 하더라도 ‘생산의 자연법칙’에 따라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으로 귀환할 수밖에 없다는 역설 때문이다. <u>사회적 경제 부문이 (특히 협동조합이) “자유롭고 평등한 생산자의 협동 사회라는, 복지를 동반한 공화적 제도”인 것은 분명하지만, “전반적인 사회적 변화, 즉 사회의 전반적 조건의 변화”를 수반하지 않는 이상 자본주의 사회를 개조하는 것은 불가능</u>할 수밖에 없다.8) 실제 역사에서도 20세기 중반을 거치면서 공제조합과 노동자협동조합은 사회보장 체계 내로 통합됐고, 신용협동조합과 농업협동조합은 소규모 투자에 국한됐으며, 소비자협동조합 등은 단순 경제조직으로만 명맥을 유지했다. 사실상 ‘사회의 기술적 관리자’로 전락한 것이다.9)<br />
사회적 경제 담론의 생산자들은 사회적 경제의 역사적 문제들에 대해 다소 기계적인 방식으로 논점을 끌어내는 데 치중해왔다. 이를테면 과거의 협동조합에 관해선 △노동자의 지위에 존엄을 부여하는 이상의 성과를 기대하기 어려웠다는 점, △노동자 개인이나 경영진이 효과적 경영을 수행하지 못했다는 점, △조합원 자격을 제한하거나 하면서 소규모 자본주의적 기업으로 전환하는 경향이 있었다는 점, △성공하더라도 자산을 확보하기 위해 해산하는 경향이 있었다는 점, △자본조달 능력이 결여되어 있었다는 점, △생산방법과 시장거래에 있어서 보수적인 경향이 있었다는 점 등이 지적되곤 한다.10) 이러한 논점들은 사회적 경제의 문제점에 대한 원인들이라기보다는 문제점 그 자체를 재기술한 동어반복에 가깝다.<br />
그런 점에서 우리는 협동조합에 대한 마르크스의 역사적 평가 자체보다는 ‘무언의 강제’라는 그의 설정에 더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마르크스의 설정에는 교환의 당사자들 사이에서 맺어지는 대면적 관계에 더하여 외재적인 제3의 관계가 작용하는데, 이는 체계에 대한 반작용적 요소들을 흡수하면서 자본주의 사회의 개조를 불가능하게 할 뿐만 아니라 재생산하게끔 하는 지점으로서 지배 내 구조(structure in dominance)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게끔 한다. 요컨대, <u>사회적 경제가 왜 역사적으로 패착을 보였는가가 아니라, 사회적 경제라는 대안적 운동이 어떻게 해서 경제와 사회를 관리하는 데 기여했는지가 더 중요한 논점</u>이라는 것이다. 오늘날 사회적 경제 담론은 ‘기술적 관리자’의 지위를 벗어나 실제적인 대안이 될 수 있겠는가. 이에 답하기 위해서라도, 사회적 경제라는 교환양식에 있어서, 경제 자체가 아니라 이를 가능케 하는 전반적 조건들로서 이데올로기나 국가 등과 같은 논점들이 제기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br />
<br />
<strong>2. 두 가지 이상 징후</strong><br />
(1) 담론과 그 효과: 접합과 배제<br />
최근 사회적 경제 담론들 중 일부는 대안으로서의 전거를 들기 위해 폴라니를 수용하는 경향을 보인다. 폴라니의 대안적 경제 모델은 경제라는 언어에 필요 충족에 초점을 둔 ‘실체적 정의’와 비용 편익 달성에 초점을 둔 ‘형식적 정의’가 중첩되어 있음에 착목하면서, 시민사회의 실체적 경제로써 시장의 형식적 경제를 인간화하고 제어하는 것을 기본원리로 삼는다.11) 따라서 <u>폴라니로부터 아이디어를 추출하고자 하는 사회적 경제 담론들은 전자의 ‘살림살이 경제’를 후자의 ‘돈벌이 경제’로부터 어떻게 보호할 것인지, 나아가 돈벌이 경제 원리를 살림살이 경제 원리로써 어떻게 최소화할 것인지 등을 기본적인 전략으로 삼곤 한다</u>.<br />
<img src="http://www.newscham.net/data/news/photo/12/59276/j3.jpg" /><br />
<표 2>12)에서 보는 것처럼, 이때 <u>‘실체적 경제’란 등가적 교환이 아니라 상호성과 재분배에 기초한 선물 교환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경제적 동기를 정치 사회적 동기에 착근시키며, 국가에 복종하는 신민도 아니고 시장에서의 원리적 이익추구자도 아닌 총체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되는 것을 목적</u>으로 한다. 물론 이 모델 자체만으로 사회적 경제 전체를 설명할 수는 없는데, 왜냐하면 오늘날의 선진자본주의 맥락에서는 이와 같은 호혜적 경제 체계를 (경제인류학적인 관심사를 넘어서) 국가-시장-시민사회 간의 ‘규범적 균형’을 달성하고자 하는 시도로서 제시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회적 경제 담론의 ‘현대화된’ 설정은 정당화 기제로서 사회적 목적, 주체 설정으로서 이해당사자들의 사회적 소유, 타당성 논리로서 호혜와 연대에 기초한 사회적 자본 등등의 논리들로 확장되고 정교화되기에 이른다.13)<br />
사회적 경제 담론과 폴라니의 논의를 결부시키는 시도들은 사회를 기업 형식으로 대체하는 것에 반대하고 시장경제를 사회 속에 재착근화하고자 하는 시도라는 점에서 정당성을 부여받곤 한다. 그러나 그 순수한 의도와 달리 여기에도 일정한 난점이 존재하게 된다. 먼저 <u>폴라니의 실체적 경제학 자체만으로는 사회적 경제라는 대안적 교환양식이 시장 제도와 양립을 추구하는 것처럼 인식될 여지</u>가 있다.14) <u>사회적 경제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보완재라는 소극적 관점이 아니라 대체재라는 적극적 관점을 유지하는 한, 폴라니의 논의, 그 중에서도 실체적 경제는 하나의 참조점일 뿐이지 그 자체로 ‘해답’이 된다는 보장은 없기 때문</u>이다.<br />
물론 폴라니의 사회의 자기 방어 운동 명제는 뉴딜을 비롯한 역사적 사례들이 있어왔기 때문에 오늘날 사회적 경제에 있어서도 일정 정도 기시감을 부여할 수도 있다. 특히 사회적 경제 담론이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초래한 위기의 형식들 이후에 부상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사회적 경제 담론에서 폴라니 수용에 있어서 제기되는 의문점들은 적어도 두 가지 측면에서 검토해볼 만하다.<br />
첫째, 선물 경제 원리 같은 것들이 오늘날에 적용됐을 때 중요한 점은 원리 자체가 아니라 그 원리가 어떻게 굴절되느냐 하는 데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사회적 경제의 모체로서 시민사회가 국가나 시장과 맺는 체계가 고도화되고 복잡해진 탓에 오히려 그로 인해 촉발될 문제들이 더 많을 수도 있으며, 시민사회 자체도 순수한 결정체가 아닌 이상 우리는 더 많은 이론적 논점들을 필요로 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러한 고려사항들은 실체적 경제 자체를 이상화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한 이유에 해당한다. 오늘날 필요한 것은 사회적 경제에 관한 일반이론이 아니라 이것을 급진화시킬 수 있는 정치적 접근이기 때문이다.<br />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 문제는 폴라니 자신에 있다기보다는 최근 들어 폴라니의 도덕경제론이 유통되는 맥락과 관계되어 있다. 예컨대 폴라니는 좋은 자유와 나쁜 자유를 구분한 바 있는데, 그에 따르면 사상, 표현, 결사, 집회, 선택의 자유 등은 19세기 정치경제학의 산물로서 작동한 것이지만 동시에 ‘악한’ 자유들을 생산하기도 했다.15) 그렇기에 “그것을 구성하는 요소들을 깔끔하게 분리해내는 일은 불가능”하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새로 얻는 자유와 새로 잃는 자유의 사이에 어떻게 균형을 취할 것인가의 문제뿐이다.”16) 이는 자유 개념이 근본적으로 경합적임을 함의하는 주장으로서, 자유뿐만 아니라 실체적 경제 역시도 언제나 특정한 정치적 관계들에 의해 현실화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이해하게 해준다. <u>사회적 경제 담론에 있어서도 관건이 되는 것은 이 담론이 현실화되는 정치적 맥락에 있다고 볼 수 있으며, 실체적 경제라는 관념 자체는 이 과정에서 제기되는 (폴라니에게 있어서는) 일종의 보편적 상수로서 이해될 필요</u>가 있다. 그렇지만 최근 사회적 경제 분야에서 폴라니는 이론적 교리로서만 등장할 뿐, 그 자신이 토로했던 현실적 곤궁들에 대해서는 그다지 주목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br />
둘째, 경제의 도덕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가 하는 좀 더 근본적인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주지하듯이 폴라니에게는 빈곤 구제라는 쟁점으로부터 시작하여 사회의 자기 방어 운동이 불가피성으로서 인식된다. 19세기 고전적 자유주의로부터 시작하여 경제가 재착근됨으로써 자유방임주의가 후퇴했던 시기들(사회적 자유주의의 시기)을 돌아보건대 경제가 완전히 탈착근된 자기조정적 시장은 불가능하다. 이러한 논지를 최근으로 옮겨와서 신자유주의 그리고 이에 대응하는 사회적 경제에 맞물려 추론을 해보더라도 유사한 설명 구도가 형성된다. 사회 또는 사회적인 것을 우회하는 어떠한 통치나 지배도 궁극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설명인 셈이다. 바로 이때 폴라니에게 사회적인 것은 관계의 형식으로서 사회성의 측면(socius)보다는 공동체주의적인 가치가 응집된 사회부조의 측면(societas)으로 집중된다. 이는 사회적인 것이 이론적 대상이거나 정치적 구성물이 아니라 반드시 그 자리에 있어야만 하는 일종의 당위적 원리로서 이해된다는 점을 함의한다.<br />
전술했듯이 폴라니의 논지에서는 실체적 경제나 사회적인 것이 보편적 ‘상수’로 배치되며 그 자체가 모든 문제의 해답으로서 제시된다. 그런데 여기에는 서로 연관된 두 가지 논점이 따라붙게 된다. 첫째, 사회적인 것이 상수가 아니라 ‘변수’라면 어떻겠는가. 사회적인 것을 상수로 상정하는 문제설정에서는 인간주의적 서사를 통해 순수한 시민이라는 형상과 다소간 낭만화된 시민사회라는 영역이 전제된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이러한 서사들이 종종 들어맞지 않기 일쑤이며 오히려 지배적인 주체 형상과 활동 공간과는 거리가 먼 것임을 알게 해준다. 둘째, 사회적 경제를 비롯하여 최근 제기되고 있는 공동체 논리가 신자유주의와 불화를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면 또 어떻겠는가. 이를테면 <u>푸코주의식으로 착근된 자유주의든 신자유주의든 이것은 ‘국가의 통치화’를 가리키는 것일 수 있으며, 따라서 오늘날 ‘착근되고 있는 신자유주의’ 역시도 통치의 이상적 영토를 자율과 책임성의 테크놀로지로부터 공동체의 테크놀로지로 찾아가는 과정일 수 있다</u>.17)<br />
이러한 문제점은 사회적 경제라는 하나의 이념적 모델을 실제 세계에 적용했을 때 ‘담론의 헤게모니적 접합’이라는 쟁점이 제기된다는 점을 가리킨다. 이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어떻게 해서 다른 생산양식을 자신의 (확대)재생산에 끌어들이면서 스스로 지배적인 생산양식이 되는지에 관한 문제18)와도 연결되는데, 그런 까닭에 사회적 경제가 시장경제를 재착근화하더라도 그 불안정성 때문에 사회권력을 강화하고자 하는 힘, 즉 정치 없이는 그 어떤 해결도 불가능하다는 쟁점이 남을 수밖에 없다. 일례로 1930~50년대 독일에서 탄생했던 ‘사회적 시장경제’에서 ‘사회적’이라는 형용사는 경제에서는 (등가적 교환을 넘어) 효율적 경쟁의 원리를, 사회보장에서는 (연대가 아니라) 자기 책임과 국가 보조의 원리를 도입하는 데 일조하기도 했다.19) 요컨대 <u>특정한 정치적 조건 하에서는 사회적인 것이란 이름으로 오히려 경제적인 것을 더욱 급진화하는 역설이 나타날 수도 있다</u>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이데올로기에 관한 문제설정이 없을 경우 사회적 경제 담론이 물화될 수도 있다는 쟁점도 만나게 되는 셈이다. ‘사회적’이라는 언어는 논란의 종결자가 아니라 논란의 생산자 구실을 할 수도 있다.<br />
여기서 추가적으로 고려해야 할 것은 담론의 접합 과정에서 특정한 효과가 수반되리라고 예측해볼 수 있다는 점이다. 사회적 경제가 보통 도덕적이고 순수하며 이상적인 것으로 간주되곤 하는데, 실제 결과도 그러하겠는가 하는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전술했던 것처럼 사회적 경제 담론은 배제의 문제에 대응하는 취지를 가지는데 이는 사회적 경제의 문제설정이 기본적으로 사회적 포섭을 목적으로 삼고 있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나 포섭의 시도가 기술적으로 완전할 수 있는가 하는 데 의문을 품어본다면, 적어도 지금 시점에서는 배제된 자들을 문자 그대로 모두 포용하는 데 성공한다고 낙관할 수 없으며 필연적으로 배제의 영역이 재산출될 가능성에 대해서도 예상을 해볼 필요가 있다. 여기서는 두 가지 사례들에 검토해보도록 하겠다.<br />
첫째, 협동조합운동들이 부침을 겪는 가운데 몬드라곤이 가장 성공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바스크 특수주의가 있었다.20) 이러한 조건은 자본주의적 기업의 일반적 관행이라는 외적 압력 속에서도 자본주의적 기업으로 전환하는 것을 방지하고 조합원의 이탈을 막을 수 있었던 구심점 구실을 했다. 문제는 몬드라곤이 세계화하는 방향으로 발전 궤도를 그리면서 나타나고 있다. <u>현지의 자본주의 기업들을 인수해 자회사로 전환시키면서 이제 몬드라곤 협동조합 기업은 절반 이상을 비조합원으로서 일반 피고용자 상태에 있는 노동자들을 보유하게 됐다. 이 과정에서 대다수 몬드라곤 회원들은 이들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해 “신뢰하기 어렵고 게으르며 성공적인 협동조합을 운영하는 데 필요한 동기를 결여했다”고 판단하고, “자회사들 내의 조합들에 대해 오히려 적대적인 태도를 취해” 오고 있다.</u>21)<br />
둘째, 사회책임투자 부문은 투자 포트폴리오에 오른 사회책임경영 기업이나 협동조합들에 자금 순환을 가능케 해주는데 이러한 구도는 자못 의미심장한 것일 수도 있다. 과거의 국민적-사회적 국가 형태에서는 국민이라면 누구나 사회적 권리를 요구하는 것이 가능했다. 그런데 사회책임투자라는 관행은 사회부조에 쓰이는 자금들이 주로 시장-시민사회의 회로에서 순환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보면 사회적 권리의 요구와 행사에 있어서 새로운 위계가 발생하게 됨을 적시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제부터 시민 개인이 사회보장을 요구하기 위해선 그 자신이 압력을 행사할 수 있는 투자자가 되지 않고서는 권리 요구의 권한이 상대적으로 약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잠재적인 수준에서 말하자면, 사회적인 것에 관한 최악의 시나리오이기는 하지만, 사회적 성원권(membership)이 국민이나 시민이 아니라 투자자에게만 주어질 가능성도 무시할 수는 없다.22) 어쩌면 이것은 외부불경제의 내부화를 통해 역설적으로 (축적 조건의 재생산을 자기 스스로 관장하는) 자기조정적 시장의 신화가 관철되는 과정일 수도 있다.23)<br />
이러한 양상들은 사회적 경제가 배제의 현실적 조건들에 대응하여 사회적 포섭에 성공적이라기보다는, 정확히 말하자면 배제의 분할선을 새롭게 획정해가는 측면들을 보여준다. 이것은 사회적인 것이 나타내는 공동체 효과가 결과적으로는 배제의 새로운 수준을 동반하는 한에서만 작동한다는 점을 함의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사회적 경제는 하나의 해결책에 머무는 게 아니라 또 다른 문제를 유발하는 측면이 있다. 사회적 경제에 관한 일반이론이 강조될수록, 문제가 해결된다기보다는 지배 내 구조의 힘에 의해 오히려 과잉결정될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이다.<br />
(2) 제도와 그 효과: 동형화와 물화<br />
실제에 비해 담론적 과잉이 나타나는 현상은 이 새로운 교환양식이 지역과 계급 등을 초월해서 광범위하게 지지받고 있음을 나타낸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고용 창출과 사회적 서비스 수요에 대응하고자 하는 국가, 지속가능성 패러다임에 영향을 받아 장기수익성을 도모하고자 하는 시장, 빈곤과 비인간화의 위협으로부터 탈피하고자 하는 시민사회 등의 삼자적 이해관계가 사회적 경제라는 언어로 수렴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관건은 20세기 자본주의의 역사를 거친 이래로 오늘날 사회적 경제 담론이 19세기에서 20세기 초중반 무렵의 사회적 경제 담론과 결코 동일할 수 없다는 데 있을 것이다.<br />
<u>실제로 (주체의 차원에서) 19세기의 사회적 경제 담론이 노동자들의 집합적 대응 전략으로 제기되었던 데 반해, 오늘날의 사회적 경제 담론은 주로 시민사회 차원에서 제기된다는 특징</u>을 지닌다. 이는 해당 시대별 담론이 무엇을 표적으로 삼는가라는 문제와도 연결되는데, (의제의 차원에서) 19세기의 문제가 자본주의 산업화와 시장경제라는 상대적으로 넓은 범위의 것이었다면 오늘날의 문제는 실업과 복지 후퇴라는 좀 더 좁은 범위로 초점화된다는 점에서 구별된다. 그래서 (형태의 차원에서) 과거의 사회적 경제 부문이 국가나 시장과 무관한 성격으로 오늘날 말하는 제3섹터로서의 순수형에 가까웠다면, 최근에는 국가-시장-시민사회의 공조체계로서 상대적으로 혼합형에 가깝다는 점도 특징적이다. 이러한 공조 형태를 일컬어 ‘제4섹터’ 또는 ‘창발적 제4섹터’(the emerging fourth sector)라고 개념화하기도 하는데, 여기에는 사회적 기업가, 펀드 가입자, 비영리부문 종사자, 경영인, 피고용인, 일반 대중, 결사체 회원, 정책입안자, 학자, 법률가, 회계사, 컨설턴트 등등이 참여하고 각자의 이득을 취한다. 이러한 논리에 따르면 그동안 국가-시장-시민사회 등 각자의 영역에서 활동하던 이들은 이제 공동의 언어와 전망을 필요조건으로 여기고 공동 작업(collaboration)을 충분조건으로 삼는다.24)<br />
‘사회 같은 것은 없다’던 영국 보수당에서 ‘큰 사회’(big society)라는 선거 모토를 들고 나왔던 것처럼, ‘실용’과 ‘성장’을 외치던 한국 여당에서 ‘공정 사회’와 ‘경제민주화’ 같은 말들이 나올 수 있었던 배경도 바로 여기에 있다. <u>지배-피지배의 논리에서 보자면, 국가와 시장을 제외했던 과거의 사회적 경제는 지배질서에 있어 원리상 불온하고 위험한 것이었지만, 지금의 사회적 경제는 어렵지 않게 관리될 수 있는, 따라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 내로 포섭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됐기 때문</u>이다. 그래서 우리는 바로 ‘그’ 큰 사회와 경제민주화가 과거와 같이 국가가 아니라 사회적 기업 같은 것들을 통해서 충족된다는 논리 그리고 그것이 가져오는 효과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25)<br />
사실상 거버넌스 형태에 가까운 사회적 경제 부문은 그 자체로 구조적인 제약조건을 떠안을 수밖에 없다.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논점이 바로 신제도주의 등에서 언급하곤 하는 ‘제도적 동형화’(institutional isomorphism)26)라고 하는 일종의 동질화 현상이다. <u>사회적 기업이 됐든 협동조합이 됐든 사회적 경제 조직들은 육성과 진흥이라는 맥락에 위치되는 이상 정부와 기업의 행정적, 재정적 지원에 의존하게 되는데, 이로 인해 자원을 통제하는 측으로부터 나오는 특정한 규범과 요구사항을 따라야 하는 고충을 겪게 된다. 실제로 사회운동 차원에서 사회적 기업 등에 몸담았던 종사자들이 자신이 활동가인지 피고용자인지 그리고 조직형태가 비영리조직인지 영리기업인지 혼동하게 되는 것도 바로 이런 문제와 맞닿아 있다</u>.27)<br />
<u>물론 그 과정은 타율적 강제나 막연한 모방 또는 자체적 규범화 등 다양한 경로를 통해 전개된다. 이를테면 대다수 사회적 경제 조직들이 「사회적 기업 육성법」(2007)이나 「협동조합 기본법」(2012) 같은 법률에 의해 동기화되고 정부 기관이나 기업 부서에 활동 결과를 계량화해서 성과 보고해야 하는 사정들을 들 수 있다</u>. <u>이 과정에서 관료제적 관습이나 영리기업의 관행을 그대로 답습해야만 하는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다(강제적 동형화). 또한 사회적 경제가 일종의 붐처럼 확산되고 있는 이상 신생 기업이나 조합의 경우 조직의 목적이 불확실하거나 모호한 것이 일반적인데, 이때 기존에 성공했다고 평가되는 기업이나 조합을 모델로 삼으면서 자기 조직의 전망을 설정하는 사례들이 종종 발생하곤 한다(모방적 동형화). 뿐만 아니라 (중간)관리자나 조합원들이 각종 전문가 집단들로부터 교육을 받고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것 또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 동질화되는 직간접적 경로가 될 수 있다. 실제 종사자들을 체계적으로 그리고 효과적으로 관리하는 데 있어 학습과 내면화만큼 빠른 지름길은 없기 때문이다(규범적 동형화)</u>.28)<br />
그리고 우리는 동형화 과정(특히 모방적 동형화 과정)에서 과연 무엇이 패턴 설정자(pattern setter) 역할을 하느냐 하는 데에도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모방의 대상이 되는 패턴 설정자가 생산 소비 분배를 아울러 대안으로서의 적합성을 가진다면 사회적 경제 담론에서도 일정 정도 출구를 모색할 길이 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에서 추진되는 사회적 경제는 서구중심주의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문제가 있다. 한국이 2000년경에야 사회적 국가 형태를 경험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29) 제3의 길로서 사회적 기업 등과 같은 서구 사회의 포스트복지 담론을 모델로 삼는 것은 다소간 아이러니한 현실을 보여준다. 그러다보니 <u>사회적 경제 담론에서 (이를테면) 베네수엘라의 국유화나 아르헨티나의 노동자 자주관리 같은 사례들은 구조적으로 삭제되고, 대리운전 협동조합이나 동네슈퍼 협동조합 등이 모범적 사례로 추인되는 것이 보통</u>이다.30) 이와 같은 경향은 두 가지 쟁점을 내포하는데, <u>하나는 사회적 경제 내에서 생산관계의 변혁과 같은 정치적 쟁점을 찾기 어렵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권위주의의 패착을 예외로 한다면) 국가의 실패를 채 경험하기도 전에 위기관리와 발전의 전망에서 국가의 자리를 지워버리거나 후퇴시키는 경향이 강하다</u>는 것이다.<br />
한국적 맥락에서 사회적 경제의 경험은 서구의 표준화된 경험 방식과 다를 수밖에 없다. 이를테면 한국의 국가 형태는 주지의 사실처럼 (사회)보장보다는 (사회)동원하는 형태에 가까웠다. 이러한 역사는 복지의 문제를 공적인 차원에서 제기하기보다는 개인이나 가족 같은 사적인 차원에서 해결하는 쪽으로 수렴시켰던 게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민주화 이후에도 국가로 권위가 집중되는 풍토가 지속되는 등, 서구 사회에 비해 국가권력이 시장권력이나 사회권력에 대해 비대칭적이라는 점 역시 제기될 수 있다. 결국 이런 이유들 때문에 한국에서는 사회적 경제에 관한 담론과 현실이 크게 어긋나는 경우도 종종 발생한다. 어떤 경우에는 현실이 담론을 견인하는 게 아니라 거꾸로 담론에 이끌려 다니고 때로는 경합하는 담론들에 치여 기형적인 형태로 창출되기도 한다. 이러한 불안요소는 국가, 시장, 시민사회에 고루 산포해 있다.<br />
<u>국가의 강력한 정치적 영향력은 기본적으로 사회적 기업이나 협동조합으로 하여금 정부 지원에 대한 의존을 심화시키는 경향을 낳는다. 이 문제는 제4섹터와 같은 아이디어를 통해 얼마간 봉합되는 측면이 있기는 하지만, 한국의 경우에는 「사회적 기업 육성법」이나 「협동조합 기본법」 제정 이전에 자생적으로 존립해왔던 몇몇 조직들을 제외하면 사실상 고용창출이나 사회서비스 수요 충족 등과 같은 지배의 기술에 종속되게끔 하는 경로를 형성할 수밖에 없다. 나아가 기존의 조직들마저도 지원 혜택을 위해 기관들로부터 ‘인증’을 받고자 하는 경우에는 관료제적 병폐와 성과지상주의로 인해 대안적 생산양식으로서의 전망이 소원해지기는 마찬가지다</u>. 실제로 현장에서 ‘나라가 끼면 될 일도 안 된다’는 푸념이 종종 들리는 것도 이러한 문제점들과 무관하지 않다.<br />
시장의 경우에도 사회적 경제를 바라보는 관점은 교과서적 기술 내용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보통은 지속가능성과 장기수익성을 위해 기업의 사회적 책임(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 CSR)을 언급한다고 하지만, 한국의 대기업들이 사회사업팀이나 사회공헌팀을 운영하는 경우는 내부적으로 기업의 이미지 제고 전략과 맞물려 있거나 외부적으로는 ISO 2600031) 같은 국제 규제에 수세적으로 대응하는 것으로 보는 게 일반적이다. 그마저도 관리자나 실무자들의 경우 CSR을 생산활동, 고용창출, 세금납부 등에 국한해서 인식하는 경향이 팽배하고 대중적으로 퍼져 있는 반기업 정서 때문에 마지못해 움직이는 경향32)이 작지 않아서 ‘규범적 균형’으로서의 사회적 경제라는 이념형과는 거리가 먼 게 사실이다. 요컨대 (당연한 귀결일 수 있겠지만) 영리기업들에 있어서 사회적 경제 부문은 그들 자신이 ‘제4섹터’에 참여를 하더라도 대안이 아니라 부차화된 영역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br />
아울러 시민사회 차원에서 발견될 수 있는 취약성은 첫째로 정치운동과 경제전략, 즉 체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의도와 그 안에서 적응해야만 하는 제약조건 사이에서 평형감각을 유지하는 게 원만하지 않다는 사실에서 기원한다. 여기서 개인과 조직의 존립 및 유지를 위해 제도적 동형화의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역설은 비교적 예상가능한 수순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흔히 말하는 ‘대중들의 의식 문제’도 중대한 장벽으로 존재한다. 예컨대 사회적 기업이나 협동조합에서 생산품을 만들어도 그에 걸맞은 적정 소비가 이뤄져야 하는데, 사회적 경제 담론에 대한 의식이 부족하거나 관련 정보가 아예 부재한 경우들이 많아 경제적, 사회적 생태계 자체가 원활하게 작동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33) 마지막으로, 사회적 기업 종사자들이나 협동조합 조합원들 사이에서도 사회적 경제를 둘러싸고 세대간 온도차가 존재한다는 문제가 있다. 이것을 청년 세대들이 상대적으로 정치적 관심이 적어서 생기는 문제로 볼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그로 인해 사회적 기업에 신규 채용되는 경우 조직의 기존 목표를 공유하지 못한다거나 직접 창업하는 경우에는 대안적 가치에 대한 전망이 불투명한 문제들이 발생하곤 한다.<br />
이상과 같은 문제점들을 집약했던 것이 ‘소셜 벤처’와 같은 사례였다. 이 말은 사회적 기업이라는 사회적 경제 조직 그리고 창업을 통한 고용 창출이라는 시장경제 전략이 극적으로 타협한 결과물이었다. 물론 2012년 들어 사회적 경제 조직의 지배적 패러다임이 사회적 기업에서 협동조합으로 이전되고 말 자체의 넌센스가 널리 공유되면서 전보다 덜 언급되긴 하지만, 이 말은 1990년대 말 외환위기 당시의 벤처 열풍과 2000년대 말 지구적 금융위기 즈음의 사회적 기업 열풍 사이에 묘한 근친성이 있음을 내포한다. 즉, 위기를 안정적으로 관리하고자 하는 국가, 이윤 창출의 사회적 토대 및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하는 시장, 경제적 성공 내지는 생존을 희구하는 시민사회 등의 삼각구도 속에서 달라진 게 있다면, 주재료가 창의성에서 사회성으로 바뀌었고 동력이 성공에서 생존으로 조정됐다는 정도일 뿐이다.<br />
소략하자면, <u>사회적 경제에는 제도적 동형화의 위험이 뒤따를 뿐만 아니라 (‘사회적 시장경제’라는 전례와 마찬가지로) 사회적이라는 언어가 어떻게 접합되느냐에 따라 물화의 위험34)도 수반된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런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근래 들어 사회적 기업이 아니라 협동조합이 강조되는 추세에 접어든 게 사실이지만, 협동조합 체계 역시도 제도적 동형화와 더불어 담론의 헤게모니적 접합의 가능성으로부터 자유롭다고 단정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u>. 사정이 그렇다면, 우리는 ‘경제적 관계의 무언의 강제를 돌파할 수 있는 전반적인 사회적 변화’라는 고전적 질문의 테두리에서 여전히 머물러 있는 셈이 된다.<br />
<br />
<strong>3. 사회적 경제라는 가상의 함의</strong><br />
문제는 우리의 선택이 종종 의도와는 다른 결과로 이어지는 일이 있다는 데 있다. 자본주의로부터 달아난 덕분에 외려 자본주의가 공고해지고, 내쫓은 신자유주의가 뒷문으로 슬쩍 들어오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새로운 답이 제출되는 순간 그와 동시에 새로운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쯤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래서 적잖은 사람들이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며 또 그 어떤 것도 해서는 안 된다는 비판을 던지곤 한다. 비판가들의 분석에 얼마간 동의하면서도 가끔은 갈피를 잡을 수 없어 혼란스럽기 그지없다.<br />
사회적 경제에 관련하여 그런 혼란이 생겼다면 그것은 기본적으로 ‘사회적’이라는 형용사가 가진 어떤 신비함에서 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회적인 것은 단순히 성취해야 할 무언가라기보다는 그 자체로 문제 삼고 넘어서야 할 대상일 텐데, 우리들은 종종 이 언어가 전도되어 있음을 간과하고 그 자체로 물신화하기 때문이다. 결국 이 문제는 사회적 경제 담론에 빠져 있는 근본적 공백 두 가지와도 관련된다. 하나는 정치라는 쟁점이고 다른 하나는 이데올로기라는 쟁점이다.<br />
<u>사회적 경제 담론의 인상적 특징은 다분히 당위적이라는 데 있다. 그것은 ‘사회적인 것 = 윤리적인 것 =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이라는 암묵적 전제에 기초하고 있다. 그리고 간혹은 그 자체로 성장과 분배의 완결적 구조를 가진 일반이론인 것처럼 묘사하는 경향도 이러한 정당화 논리를 강화하곤 한다</u>. 사회적인 한 그것이 정답이라는 이론적 독단에 의해, 정치에 관해서는 더 이상 말하지 않게 되는 것은 역설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경향은 사회적인 것의 탄생이 “진보에 대한 믿음을 대체”해버리고 결과적으로는 “노동과 자본의 대립을 사회적인 것과 경제의 대립으로 전위”시켰던 19세기 프랑스의 정치적 상황을 재연하는 것 같기도 하다.35) 예컨대 현실에서는 국가권력이 문제적이라 토로하면서도 담론에서는 국가를 협상의 대상으로 중성화하는 관습은 사회적 경제 담론이 국가와 자본의 동학에 대해 근본적으로 무기력할 수밖에 없다는 방증일 수밖에 없다.<br />
그런 까닭에 사회적 경제 담론은 시민사회 영역을 다소간 낭만화하는 문제들로 이어지게 된다. 경제에서 시민사회 영역을 확장하겠다는 논지는 그 바탕에 시민사회의 주체들이 ‘순수성을 담지하고 있고 따라서 정치적으로 옳으며 종국에는 그 자체로 희망’이라는 부당전제를 깔고 있다. 사회적 경제 담론이 경제학 담론으로서 주체에 관한 문제를 언급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라고는 하나, 그것이 체계에 대한 대안운동 차원에서 제기된 것이라면 사정이 달라질 필요가 있다. 경제적 관계를 바꿔내기 위해서는 그것의 재생산을 추동하는 이데올로기와 주체화양식의 뇌관을 건드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회적 경제 담론 내에서 징후적으로라도 주체에 관한 문제설정을 독해해낸다면 우리는 기껏해야 ‘호혜성에 바탕을 둔 합리적 인간’이나 ‘그들의 교류관계’ 정도를 발견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관계가 자기-동일성을 확보한 평등한 존재들의 2자관계로 수렴되고 현대사회가 이들의 ‘네트워크’ 내지 ‘직조’(fabric)로 구상되는 한, 착취와 배제를 양산하는 현대자본주의의 ‘지배 내로의 구조’(structure in dominance)에 관해서는 그 어떤 변화도 대안이라 말할 수 없을 것이다.</p>
<p>우리의 소망과 달리 현실에서 국가-시장-시민사회는 전혀 대칭적인 영역이 아니며, 그렇다고 해서 일상의 구체적 개인들이 계급 젠더 민족 인종 등을 초월해서 서로가 평등하다고 상정될 수 있는 보편적 조건이 주어져 있는 것도 아니다. 이렇게 보면 결을 달리 하긴 하지만 ‘제3항’이 없다는 점에서 사회적 경제 담론에서 나타나는 정치의 공백과 이데올로기의 공백은 사실상 동일하다. 여기서 전혀 다른 차원의 이론적 문제설정을 구하지 못한다면, 사회적 경제는 담론의 헤게모니적 접합과 제도적 동형화의 막다른 길에서 별다른 출구를 찾지 못할 듯하다. 그리고 그들이 말하는 정확히 바로 그 의미에서 사회적 경제는 반(反)사회적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다.<br />
그러면 이제 사회적 경제라는 새로운 경제학적 가상이 가지는 이론적 함의들에 대해 정리해보자. 이 문제는 크게 세 가지 정도로 요약된다. 첫째는 교환양식의 가상으로서 사회적 경제가 필연적으로 주체화를 비롯한 교류양식에서도 어떤 새로운 가상을 필요로 한다는 점이고, 둘째는 사회적 경제가 신자유주의의 대체제인지 보완재인지 살펴봐야 하고 아울러 지구적 수준뿐만 아니라 한국적 이례성에 대한 논점들도 기입해야 한다는 점이며, 셋째는 사회적인 것이라는 문제에서 은폐되어 있는 혹은 과소결정된(under-determined) 요소들을 고려해야 한다는 점이다.<br />
우선, 사회적 경제가 교환양식으로서만 제기된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파생한 사회적 삶의 위기를 해소 내지 유예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주지하듯이 오늘날의 위기는 축적의 위기뿐만 아니라 동일화의 위기를 내포한다는 점에서 상징이나 주체화 같은 교류양식의 문제설정이 요청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몬드라곤의 세계화 과정에서 나타난 외국인 차별 문제는 함의하는 바가 결코 가볍지 않다. 조합원 자격이 국민 또는 종족민에게만 제공되고 비국민은 피고용 노동자로만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은 사회적 경제 프로그램만으로는 배제의 문제를 전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36) 그런 점에서 기존의 고용관계와 동일성 논리를 넘어서는 새로운 횡적 동일화 메커니즘에 대한 접근이 절실해질 수밖에 없다.<br />
<u>문제는 사회적 경제를 보충할 수 있는 동일화 메커니즘의 자리에 윤리적 시민성에 바탕을 둔 소셜 네트워크 담론 정도가 선택적 친화성을 가진다는 점에 있다</u>. 이는 사회적 경제 담론과 소셜 네트워크 담론이 내포하는 형식적 상동성에 근거한다. 앞서 사회적 경제 담론에서 국가의 자리가 (부재 혹은) 후퇴해 있음을 지적했는데, 이와 유사한 양상이 소셜 네트워크 담론의 원리에서도 재연된다. 자원봉사, 재능기부, 소셜 미디어, 소시오메트리, 관계미학 등 오늘날 인간관계를 형성하는 담론과 관행에서 개인들은 평등하고 합리적인 주체들로 상정되고 그런 한도 내에서 관계의 네트워크가 상상된다. 이것은 시장과 시민사회 나아가 국가까지도 평등한 행위자로 간주하는 사회적 경제의 설정과 닮아 있다. <u>사회적 경제가 국가라는 제3의 매개를 부재 처리하는 것처럼, 소셜 네트워크 역시도 횡적 동일화를 매개하는 자아-이상의 집합적 대상이나 대타자 없이 평등한 관계가 도출될 수 있다는 논리를 지니고 있다</u>는 것이다. 요컨대, 관계의 메타구조를 고려하지 않은 채 개별성(또는 상호주체성)에 기초한 2자관계로서 대안적인 교환양식과 교류양식을 입론한다는 것은 불평등, 억압, 배제 등의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고, 나아가 그러한 문제들이 마치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한 ‘신기루’를 창출하는 것일 수도 있다.<br />
둘째, 적어도 현재의 사회적 경제에는 신자유주의의 대리-보충(supplement)으로서의 측면이 나타난다. 일견 사회적 경제는 최소 국가보다는 국가가 포함된 공조체계를, 탈규제보다는 재규제를, 그리고 자기 책임보다는 사회적 책임을, 개별화보다는 전체화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신자유주의적 관행들에 대립각을 세우고 나아가 대안을 제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요소들에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와 단절적이고 대체적이라기보다는 연속적이고 보충적인 측면도 있다. 사회적 경제를 향한 상상에는 전자의 신자유주의적 원리들이 제거됐다기보다는 오히려 내장되어 있다고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회적인 것을 통한 위기관리와 발전의 전망이 (흡사 제도주의에서 ‘경로의존성’이라 개념화했던 것처럼) 포스트 뉴딜 또는 포스트 복지의 국면 위에서 제기될 수밖에 없는 난점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br />
실제로 사회적 경제 담론에서는 국가가 과잉통치한다든가 시장 특히 금융이 억제된다든가 하는 논점들이 관철되지 않는다. 그에 반해, <u>정치적으로는 신자유주의가 중도좌파마저도 거둬들임으로써 헤게모니화했다는 점,37) 경제적으로는 마이크로 파이낸스 같은 사회적 자본의 대안적 관행마저도 국제적 금융 네트워크의 일부로 편입되어 있다는 점,38) 복지 차원에서는 사회안전망이 추구되기는 하지만 ‘통치의 탈국가화’에 조응하여 전문가 집단이 전면에 나서는 ‘국가의 준자율적 비정부조직화’(the quango-ization of the State; 즉, 특수법인화)가 가속화되고 있다는 점39) 등이 지적</u>된다. <u>따라서 과거에는 국가가 주도했던 사회적인 것과 경제적인 것의 순환이 이제는 신자유주의의 후과(後果) 속에서 시민사회의 자조성에 그 성패가 달려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u>.<br />
이러한 논점은 사회적 경제의 담론과 관행이 나타나고 있는 한국적 맥락을 통해서도 징후적으로 드러난다. 한국의 이례성은 사회적 경제의 시도가 사회적 국가의 경험이 없었던 바탕 위에서 1997년 이후 신자유주의 본격화와 (거의) 더불어 전개된다는 데 있다.40) 그래서 ‘좌파 신자유주의’나 ‘MB노믹스 하의 공정사회’ 같은 레토릭들은 단순한 언어유희를 넘어 특정한 실질성을 확보했던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한국적 상황은 애초부터 신자유주의가 사회적인 것을 전제로 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의문을 남긴다(또는, 사회적 경제가 문자 그대로 사적, 경제적인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 물론 그 때의 사회적인 것이란 뉴딜식으로 국가를 매개로 연대성에 기반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경제적 순환을 위해 결사체나 공동체와 연결된다는 전제 하에서 나타나기 마련이다.<br />
마지막으로, 사회적 경제에서 사회적인 것의 문제는 결국 정치라는 쟁점, 이를테면 국가와 이데올로기 같은 논점들을 내포한다. <u>사회적인 것의 기본 특징이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 어디로도 환원할 수 없는, 두 가지 영역이 융합하는 하이브리드한 이형적 영역”이고,41) 그 기원 역시도 공적 영역에 진출한 사적인 관심사로서 공적 영역에서 엄존했던 정치적인 것(the political)에 대한 관심을 대체한 데서 찾을 수 있다면,42) 우리는 사회적인 것이 어떠한 구실을 하는 것인지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없다</u>. 이런 맥락에서 사회적 경제라는 용어가 처음 출현했을 때 이것이 ‘정치적’ 경제에 대한 이론적, 실천적 반대급부로서 제출됐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왜냐하면 사회적 경제의 축자적 의미가 경제는 사회적이라는 데 있긴 하지만, 그 이면으로는 경제가 정치적인 것과 절연할 것을 요구하는 모종의 반(反)정치적 태도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br />
그런 점에서 <u>사회적 경제 담론이 (국가 그리고 자본과의 파트너십 형태로) 공공성 강화와 시민성 발현을 목적으로 삼고, 계급투쟁이나 배제와 같은 언어들을 간과한다는 것은 그다지 놀랄 만한 일이 아닌 듯하다</u>. 물론 패턴 설정자를 서유럽 모델에 두고도, 또한 ‘외부자들’을 불가피하게 남겨 놓더라도, 사회적인 것이 잘만 구축되면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같은 홉스적 적대의 문제들은 효과적으로 감축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u>사회적인 것 안에서조차 또는 사회적인 것 자체만으로는 적대라는 문제가 전소될 수 없음을 다시금 상기할 필요가 있다. 사회적인 것은 그 자체로 해답이 아니라 통과해야 할 관문이기 때문이다</u>.<br />
그동안 우리는 사회적인 것이 경제와 대립하는 것으로만 알고 있었지만 사회적 경제 담론은 그 대립을 지양하는 한편, 마치 그 자체로 정치와 대립하고 그 자리를 대신할 수 있는 것처럼 ‘상상’되고 있다. 그리고 최근 정세에서 부상한 사회적 경제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대리-보충으로서 오히려 위기를 가중시킬지 모른다는 의심마저 사고 있다. 물론 국가라는 쟁점을 (기묘한) 방식으로 우회하는 한 대안적 교환양식으로서의 적합성도 불투명해 보인다.<br />
그렇다면 사회적 경제는 나쁜 것인가. 사회적인 것을 통한 위기관리와 발전의 전망은 나쁜 것인가. 물론 아직까지 우리는 전체적인 답을 내놓을 순 없다. <u>첫째로 사회적인 것 없이 정치를 구상하는 게 가능하겠는가라는 문제 때문이고, 둘째로는 (현장 상황에 비춰보자면) 짧은 역사로 인한 다양한 이해관계들의 경합성 덕분에 한국에서 사회적 경제는 그나마 개입의 공간이 개방적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u>이다. 그렇게 본다면 결론은 한 가지다. 당분간 우리는 사회적 경제가 됐든 혹은 그 무엇이 됐든 사회적인 것 앞에서 이론적, 실천적 동요로부터 쉽사리 벗어나지 못하리란 것이다. 사회적 경제가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는 여전히 불명확하지만 이것 역시도 위험하기는 마찬가지란 사실 때문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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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pan class="toggle-text" onclick="toggleMore(this)" style="display: none; cursor: pointer">주</span></p>
<div class="more-content" style="border-bottom: black 1px dashed; border-left: black 1px dashed; padding-bottom: 1px; margin: 1px; padding-left: 1px; padding-right: 1px; background: #efffaf; border-top: black 1px dashed; border-right: black 1px dashed; padding-top: 1px">
<p><strong>주</strong><br />
1) 이 글은 『문화/과학』, 73호(봄호), 2013에 같은 제목으로 수록된 글을 많은 부분 수정보완했다. 필자는 오늘날 사회적인 것의 문제가 물질적인 교환양식과 정신적인 교류양식에서 동시적으로 부상하고 있다고 보는데, 이번 글에서는 ‘사회적 경제’ 담론을 중심으로 하여 주로 교환양식에 집중하고자 하며 교류양식에서 나타나는 문제들에 대해서는 추후 다른 지면을 통해 논의하고자 한다.<br />
2) <한겨레>, “새정부·민간 함께 ‘사회적경제 펀드’ 조성해야”, 2013년 1월 2일자.<br />
3) Bob Jessop, “Critical Semiotic and Cultural Political Economy”, Critical Discourse Studies Vol. 1, No. 2, October 2004, 159 174쪽.<br />
4) 같은 글, 169쪽.<br />
5) 이에 대해서는 서동진, 『자유의 의지, 자기계발의 의지』, 돌베개, 2009를 참조하라.<br />
6) 장원봉, 「사회적 경제의 대안적 개념화: 쟁점과 과제」, 『시민사회와 NGO』, 5권, 2호, 2007. 이하에서 사회적 경제에 관한 핵심적인 아이디어는 물론 필자 본인의 것이지만, 역사기술 자체는 많은 부분 장원봉의 논문을 참고하였음을 밝힌다.<br />
7) 이러한 전통들이 최근 들어 사회적 경제를 구상하는 상상력의 원형으로 작동하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라투르를 필두로 하는 행위자-네트워크 이론에서 결사체주의의 이론적 원형으로서 (뒤르켐과 대립하고 사실상 패배했던) 가브리엘 타르드(Gabriel Tarde)로 복귀하고자 하는 특징을 보이는 것 역시, 현존해왔던 ‘국가’사회주의를 비판하고 초기 ‘결사체’주의 전통을 일종의 ‘오래된 미래’로 간주하고자 하는 맥락과 연결되어 있다. 최근 젊은 연구자들을 위시로 해서 생시몽이나 오언을 다시 보고자 하는 시도들 역시 이러한 맥락으로 이해해볼 수 있을 것이다.<br />
8) 칼 마르크스, 「임시중앙평의회 대의원에게 보내는 개별적 문제에 관한 지침」, 김성한 옮김, 『맑스·엥겔스의 농업론』, 아침, 1990, 159~160쪽. 이에 덧붙여 마르크스는 △경제제도 표면에 저항하는 소비 협동조합보다는 이 제도의 토대를 공격하는 생산 협동조합에 열중할 것, △총수입의 일부를 기금으로 돌려 새로운 협동조합의 설립을 촉진하고 그 취지를 널리 알릴 것, △흔한 부르주아 주식회사로 타락하는 것을 막기 위해 협동조합에서 일하는 모든 노동자는 주주든 아니든 평등한 분배를 받을 것 등을 협동조합 노동의 원칙으로 삼았다.<br />
9) 장원봉, 앞의 글, 15쪽.<br />
10) 존스턴 버챌, 장종익 옮김, 『21세기의 대안 협동조합 운동』, 들녘, 2003, 46~47쪽.<br />
11) 홍기빈, 「옮긴이 해제: 시장경제 유토피아와 사회의 발견」, 칼 폴라니, 홍기빈 옮김, 『거대한 전환』, 길, 2009, 629~630쪽.<br />
12) 홍기빈, 「칼 폴라니와 한국에서의 사회적 경제」, 『새롭게 다르게』, 창간호, 2011의 내용을 요약 정리함.<br />
13) “사회적 경제는 사회적 목적, 사회적 소유 그리고 사회적 자본을 구성요소로 해서 새로운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고자 한다.” 장원봉, 앞의 글, 27쪽.<br />
14) 이상우, 「우석훈과 사회적 경제」, 『마르크스 21』, 3호, 2009년 가을호, 296쪽.<br />
15) “다른 동료들을 착취할 자유, 공동체에 덜 기여하고도 과도한 이득을 취할 자유, 공적 이득에 사용될 것으로부터 기술적 혁신을 영위할 자유, 교묘한 획책을 부려 공적 재난으로부터 사적 이익을 취할 자유” 등이 그것이다.. Karl Polanyi, “Our Obsolete Market Mentality”(1947), in: George Dalton(ed.), Primitive, Archaic and Modern Economies: Essays of Karl Polanyi, Boston: Beacon Press, 1968, pp. 74-5.<br />
16) 칼 폴라니, 홍기빈 옮김, 앞의 책, 594-5쪽.<br />
17) Nicolas Rose, “The Death of the Social? Re-figuring the Territory of Government”, in: Economy and Society, vol. 25(3), 1996.<br />
18) 그런 의미에서 국가-시장-시민사회 사이에서 규범적 균형을 하나의 원리로 제시하더라도 “자본주의적 권력이 자신의 내재적 경향에 따라 경제에 대한 시민사회의 결사체적 권력을 침식하게 되어, 결국 자본주의가 다시 뚜렷하게 지배적으로 되고 말 것”이라는 경고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에릭 올린 라이트, 권화현 옮김, 『리얼 유토피아』, 들녘, 2012, 188쪽.<br />
19) 독일의 사회적 시장경제와 그에 대한 이념적 토대를 제공했던 질서자유주의에 관해선 미셸 푸코, 심세광 옮김, 『안전, 영토, 인구』, 난장, 2011를 참조하라.<br />
20) 버챌, 앞의 책.<br />
21) 라이트, 앞의 책. 344쪽.<br />
22) 김성윤, 「사회적인 것의 재-구성: 사회자본론, CSR, 자원봉사활동 담론들의 접합」, 『진보평론』, 48호, 2011.<br />
23) Geoffrey M. Heal, “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 ― An Economic and Financial Framework”, in: The Geneva Papers on Risk and Insurance - Issues and Practice, vol. 30(3), 2005.<br />
24) Heerad Sabeti, “The Emerging Fourth Sector: Executive Summary”, <a href="http://www.fourthsector.net/"><font color="#333333">http://www.fourthsector.net</font></a> (2013년 1월 12일 검색).<br />
25) 물론 현재 한국에서 중앙정부와 도시정부에 따라 약간의 온도차가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예컨대 고용노동부가 사회적 기업을 주로 일자리 창출의 목적으로 지원하는 데 반해, 서울시의 경우엔 그에 더하여 윤리적 시민성과 시민복지를 도모하고자 하는 차원에서 사회적 기업이나 협동조합을 지원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이 둘 모두 시민들의 요구에서 정치적인 것의 자리를 간과하고 사회적인 것만 반영하고자 한다는 점에선 공통적이다. 또한 역설적으로 그래서 더 정치적이기도 하다.<br />
26) 동형화는 “어떤 단위체가 같은 환경조건에 직면한 단위체를 닮아가게 하는 제약 과정”을 의미하는데, 여기서 제도적 동형화라 함은 “조직들이 자원과 고객을 놓고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권력과 제도적 정당성, 즉 경제적 적합성뿐만 아니라 사회적 적합성을 놓고 경쟁”을 하는 맥락에서 나타나는 동질화 양상을 가리킨다. Paul J. DiMaggio and Walter Powell, “The Iron Cage Revisited: Institutional Isomorphism and Collective Rationality in Organizational Fields”, American Sociological Review, Volume 48, Issue 2, April 1983, 149쪽.<br />
27) “사회적 기업의 경우 비자본주의적·반자본주의적 입장들이 논의의 중심에서 밀려나는 것 같은 인상과 정부가 인증을 매개로 적극적으로 제도화해 간 과정이 무관해 보이지 않습니다.” 김병기, 「사회적 경제에 대한 토론문」, 한국사회포럼 기획토론 발표문, 2009년 8월 27일(이상우, 앞의 글, 301쪽에서 재인용).<br />
28) 그들은 이러저러한 과정들을 통해 사회적인 것과 경제, 혹은 사회적인 것과 기업 사이에 발생할 수 있는 원리적 모순들을 거의 체념조로 봉합하게 된다. ‘사회적 기업도 어차피 기업이잖아’, ‘계속 지원을 받으려면 수치화할 수밖에 없어’, ‘(사회적 기업이든 협동조합이든) 원래 이런 거구나’, ‘싫어도 해야만 하는 게 있는 법이야’ 등등. 그런데도 오늘날 사회적 경제의 환경조건들은 별다른 문제해결의 기미 없이 조직의 유지와 재생산을 위해 정부나 영리기업과의 파트너십 구조를 재촉하는 실정이다. 이 문제에 대해선 별도의 경험적 연구를 진행 중이다.<br />
29) 이 당시 한국은 ① 5%에 이르는 공적 사회 지출을 기록했고(이는 서구 국가들과 달리 복지 지출이 증가한 결과였다), 질적인 측면에서도 ② 1995~8년 고용보험 도입과 확대 그리고 2005~8년 노인장기요양보험으로써 포괄적인 사회보험제도의 골격이 갖춰졌으며, ③ 2000년부터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이 시행됨으로써 복지정책에서 시민권, 사회권 성격이 강화되었다.<br />
30) <한겨레>, “대리운전자도 동네슈퍼도 “협동조합으로 양극화 막자””, 2012년 11월 30일자.<br />
31) ISO 26000은 사회적 책임 개념과 원칙에 있어 조직 거버넌스, 인권, 노동관행, 환경, 공정 운영 관행, 소비자 이슈, 지역사회 참여와 발전이라는 7대 핵심 주제에 대한 지침을 제공한다. 이 국제인증은 40여개 국가의 기술 규정과 소비자 평가 기준으로 활용되기 시작하고 있으며, 미국 등에서 ISO 26000 인증 마크 부착 제품만 수입하겠다고 공시하는 등 사실상의 무역장벽으로 작동할 개연성이 커지고 있다. 우리나라도 2012년 8월부터 고시, 보급하고 있다.<br />
32) 임항, 「지금 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인가」, 이장원 엮음,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노동』, 한국노동연구원, 2008.<br />
33) 최근에는 서울시에서 (중소기업뿐만 아니라) 협동조합 상품에 대한 공공구매 물량을 늘리기로 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 경우에는 거꾸로 생산 단위에서 상품 수요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문제가 예상되기도 한다.<br />
34) 이러한 경우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사회적 자본’ 개념이다. 이에 대해서는 Ben Fine, Theories of Social Capital: Researchers Behaving Badly, Pluto Press, 2010 참조.<br />
35) 자크 동즐로, 주형일 옮김, 『사회보장의 발명』, 동문선, 2005, 141쪽.<br />
36) “시장을 착근시키는 사회적, 정치적 배치는 프레임이 잘못 잡히면 또 다른 방식으로도 억압적일 수 있다. 미스프레이밍이란 착근된 시장이라는 보통은 민족적 범위와 인민을 위험에 노출시키는 종종은 초민족적 범위 사이의 부조화를 두고 내가 만든 신조어이다. 미스프레이밍의 억압은 [사회] 보호의 배치들이 시장의 부정적 효과들을 “외부자들”에게로 외재화할 때 나타나는데, 이는 부당하게도 위험에 노출된 인민들 중 일부를 배제하는 한편 타자들을 보호하는 비용을 그들에게 떠넘기는 것이다.” Nancy Fraser, “Marketization, Social Protection, Emancipation: Toward a Neo-Polanyan Conception of Capitalist Crisis”, in: Craig Calhoun and Georgi Derluguian(eds.), Business as Usual ― The Roots of the Global Financial Meltdown, the Social Science Research Coucil and New York University Press, p. 152.<br />
37) Stephanie Lee Mudge, Precarious Progressivism: The Struggle Over the Social in the Neoliberal Era, ProQuest, 2007.<br />
38) 김성현, 「국제금융기구와 빈곤 축소 프로그램」, 『경제와 사회』, 80호, 2008, 302-3쪽.<br />
39) Nicolas Rose, 앞의 글, p. 350. 그리고 사카이 다카시, 오하나 역, 『통치성과 ‘자유’ ― 신자유주의 권력의 계보학』, 그린비, 2011, 123-6쪽. 물론 이러한 양상은 흔히 제3의 길이라 일컬어지는 네오사민주의 또는 진보된(advanced) 자유주의의 독특한 특징이기도 하다.<br />
40) 사회적 국가의 경험과 관련해서는 박정희 시기가 쟁점이 될 수도 있다. 이 시기에 사회복지가 도입됐던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물론 국가 주도로 물질적 보장이 이뤄지지는 못했던 까닭에 표준적인 의미에서는 사회보장 국가라고 보기 어렵지만, 적어도 국민들 사이의 횡적 동일화를 통해서는 상징적 차원의 보장이 이뤄진 측면이 존재한다.<br />
41) 사카이 다카시, 앞의 책, 93쪽.<br />
42) 한나 아렌트, 이진우 태정호 역, 『인간의 조건』, 한길사, 특히 2장 참조.</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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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n style="color:#006400;">이 책은 언제 읽게 되려나.</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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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href="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50120817172813">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50120817172813</a><br />
<strong>호흡기 찬 자본주의, 명줄 안 끊기는 이유는…</strong> (프레시안, 김현수 경제학 박사, 2012-08-17 오후 6:32:49)<br />
<strong><font color="#0100fe">[프레시안 books] 데이비드 하비의 <자본이라는 수수께끼></font></strong><br />
데이비드 하비의 <자본이라는 수수께끼>(이강국 옮김, 창비 펴냄)는 자본 '흐름'의 관점에서 자본주의 재생산의 논리를 분석하고, 자본주의의 내재적 위기 경향과 그러한 위기가 자본주의 재생산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밝히려고 한다. 이러한 분석을 통해 하비는 2008년 시작된 세계 금융 위기의 원인을 이해하고, 최종적으로 자본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말하고자 한다.<br />
<strong>위기와 자본주의 발전</strong><br />
우선 자본 흐름의 관점에서 자본의 재생산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하비는 자본이 재생산되기 위해서는 다음 여섯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고 본다. ①자본 순환을 시작할 수 있는 충분한 화폐 자본, ②자본의 필요에 부응하는 충분한 노동 공급, ③(자연자원을 포함한) 생산 수단, ④기술과 조직의 혁신, ⑤자본 축적에 효율적인 노동 과정, ⑥충분한 유효 수요(노동자와 자본가의 소비와 자본가의 재투자).<br />
이 여섯 가지 조건 가운데 하나라도 충족되지 않으면 자본 흐름의 연속성이 단절되고, 이것이 상당기간 지속되면 자본 축적이 중단되는 위기가 발생한다. 다시 말해 이 여섯 가지는 자본이 재생산되기 위해 끊임없이 극복해야 하는 잠재적 한계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본주의는 이러한 잠재적 한계가 현실화되면 자본 축적의 중단이라는 파국을 맞게 되는가?<br />
하비는 그렇지 않다고 설명한다. <u>자본 흐름의 연속성을 가로막거나 둔화시키는 장애가 발생하면 자본(과 국가)은 그것을 극복하거나 우회하는 방법을 발견할 수 있으며, 그럼으로써 자본은 다시 순환하게 된다</u>. 하비의 이러한 설명은 자본주의의 내재적 위기 경향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자본주의가 붕괴되지 않고 확대 재생산된 이유를 보여준다.<br />
그러나 여기서 하비는 또 한 가지 점을 지적한다. 자본이 직면한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 찾은 방법은 또 다른 장애에 맞닥뜨리도록 한다. 즉, <u>자본주의는 하나의 장애를 피하면서 곧 다른 장애에 직면하게 되는 끊임없는 변화 과정 속에서 발전한다</u>는 것이다. 하비의 이와 같은 생각은 위기를 본질적으로 모순적인 체제의 '비합리적인 합리화 기제(irrational rationaliser)'로 인식하는 것과 맞닿아 있다. 위기는 자본주의가 진화하고 발전하는 데 필수적인 것이다. 따라서 자본주의 재생산에서 위기의 역할은 재생산의 중단을 초래하는 동시에 재생산이 확대된 형태로 이루어질 수 있는 계기가 된다. 물론 그럴 수 있기 위해서는 자본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적절한 방법을 찾아야 하지만 말이다(지금까지는 그렇게 해왔다).<br />
<strong>2008년 위기와 자본주의의 근본 문제</strong><br />
<font color="#590100"><img src="http://image.pressian.com/images/2012/08/17/50120817172813(0).JPG" style="MARGIN: 0px 1em 0px 0px; FLOAT: left" />◀ <자본이라는 수수께끼>(데이비드 하비 지음, 이강국 옮김, 창비 펴냄). ⓒ창비</font><br />
하비의 자본 순환에 관한 분석은 자본주의의 '위기들'을 하나의 지배적인 분석틀로 설명하려는 시도가 부적절하다는 함의를 갖는다. 위에서 지적한 여섯 가지 자본 순환의 잠재적 한계들 가운데 어떤 것이 실제 발생하는가는 '역사적, 지리적 상황에 따라'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즉, <u>위기는 특정한 장소나 시간에 따라 화폐 자본의 부족 때문에 발생할 수도 있고 이윤 압박 때문에 발생할 수도 있으며 이윤율 저하 때문에 발생할 수도 있고 과소 소비 때문에 발생할 수도 있는 것</u>이다.<br />
위기에 대한 이러한 관점은 마르크스주의의 전통적인 주요 위기 이론들, 대표적으로 이윤 압박 이론, 이윤율 저하 이론, 과소 소비 이론 간의 대립을 뛰어넘는 것처럼 보인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위기의 경향은 내재하지만 이것은 상이한 형태로 발현될 수 있으며, 따라서 특정한 위기의 원인은 그 위기가 발생한 상황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을 통해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br />
그렇다면, 2008년의 세계 금융 위기는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하비는 이 책에서 1970년대의 구조적 위기를 해결하려는 과정에서 현재의 위기가 배태되었다고 본다. 1970년대에 노동 공급의 위기 및 그에 따른 이윤 압박의 위기에 직면한 자본은 노동을 억압하는 신자유주의를 통해 이 위기를 우회했지만, 이러한 시도 자체는 유효 수요 부족이라는 또 다른 문제를 초래했다. 자본은 이러한 잉여의 실현 문제를 금융의 팽창을 통해 해결하려고 했으나, 그 시도는 일시적으로 위기를 우회하는 효과만 있었을 뿐 결국 현재의 위기로 귀결되었다는 것이다.<br />
여기서 유효 수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금융화는 하비가 '자본 잉여의 흡수 문제(capital surplus absorption)'라고 부르면서 자본주의의 핵심적 근본 문제로 인식하는 문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러한 관련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유효 수요 문제의 해결 방법에 대한 하비의 이해 방식을 알 필요가 있다.<br />
하비는 유효 수요 문제는 가계 부채의 증가를 통한 노동자들의 소비 지출 증가뿐만 아니라 잉여의 재투자(과잉 자본의 투자)를 통해서 해결될 수 있다고 본다. 그런데 잉여가 재투자되는 곳이 반드시 생산 부문일 필요는 없다. 투자를 좌우하는 것은 '수익성'이며, 생산 부문보다 금융 부문의 수익성이 더 높다면 과잉 자본은 금융 부문으로 더 많이 몰릴 것이다.<br />
그리고 이것이 1970년대 이후 실제로 전개된 과정이라고 하비는 보고 있다. 그런데 자본은 '경쟁의 강제 법칙(coercive law of competition)' 하에서 작동하는 자본 축적의 논리에 따라 끊임없이 수익성 있는 새로운 투자 기회를 찾아야 하는 근본적인 문제에 직면하는데, 하비는 이것을 '자본 잉여의 흡수 문제'라고 부른다. 따라서 하비에게 금융화는 '자본 잉여의 흡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인 것이다.<br />
자본주의의 진화와 위기의 새로운 개념화<br />
하비는 이 책에서 자본주의의 역사적 진화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 자신이 '활동 영역(activity sphere)'이라 부르는 개념을 도입한다. 특히 자본주의의 진화와 관련되는 것은 다음 일곱 개의 활동 영역이다. ①기술과 조직 형태, ②사회적 관계, ③제도적·행정적 장치, ④생산과 노동 과정, ⑤자연과의 관계, ⑥일상생활과 종의 재생산, ⑦세계에 관한 정신적 개념.<br />
이 활동 영역은 그 어떤 것도 지배적이지 않다. 각각의 영역은 다른 영역(들)에 의해 결정되지 않은 채 스스로 진화하지만 항상 다른 영역들과의 역동적인 상호 작용 속에서 진화한다. 이 활동 영역들의 끊임없는 상호 작용과 그 속에서의 재구성을 하비는 자본주의 역사 속에서 활동 영역의 '공진화(co-evolution)'로 파악한다.<br />
하비는 이 일곱 개의 활동 영역들이 어떤 사회의 특정한 시공간에서(예컨대 1850년의 영국) 서로 어떤 관계를 맺으며 어떻게 조직되고 구성되는지를 파악하면 그 사회의 일반적 성격과 조건을 알 수 있다고 본다. 즉, 특정한 시공간을 대상으로 이 일곱 개 활동 영역의 공진화를 연구하면 그 사회의 자본주의 진화 궤도를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br />
그런데 일곱 개 활동 영역의 공진화는 결정적이지 않고 우연적으로 발생하며, 그 과정이 항상 조화로운 것도 아니다. 하비는 활동 영역들의 공진화 속에서 그들 간에 발생하는 긴장과 적대의 관점에서 위기를 새롭게 개념화한다. 즉, 활동 영역들 간의 긴장과 적대가 공진화를 중단시키는 파열로 귀결될 때 자본주의의 위기가 도래한다는 것이다.<br />
<strong>누가, 무엇을 할 것인가?</strong><br />
공진화가 중단되는 파열 국면에서 자본주의는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는가? 하비가 지적하듯이, 자본은 활동 영역들 간의 질서와 조화를 다시 회복하기 위해 대대적인 노력을 감행할 것이며, 이것은 다양한 영역에서 정치적 권력 투쟁의 토대를 마련할 것이다. 이 투쟁에서 비판 세력이 성공하여 보다 민주적이고 평등한 사회로 나아갈 수 있기 위해서는 일곱 개 활동 영역들이 이에 조응하는 방식으로 함께 변화해야 한다.<br />
그렇다면 누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 지점에서 활동 영역은 그 어떤 것도 지배적이지 않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대안 운동은 자본의 공세에 맞서는 반자본주의 운동이지만 계급투쟁이 아니다. 하비의 설명에서 계급투쟁은 중심적이지도 지배적이지도 않다. 반자본주의 운동은 활동 영역들 가운데 그 어떤 영역에서도 먼저 시작할 수 있다.<br />
다만 먼저 시작된 영역에서의 변화의 움직임이 서로를 추동하며 강화하는 방식으로 다른 영역으로 전파되면서 모든 영역들이 함께 변화할 때 반자본주의 운동은 성공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자본의 수수께끼를 풀어 그 비밀을 드러내는 비판적 지식인의 역할이 중요하게 제시된다.<br />
<strong>질문들</strong><br />
글로벌 금융 위기가 끝났다고 공식적으로 선언된 지 3년여가 지났지만 여전히 본격적인 회복은 나타나지 않고 있으며 실업률도 여전히 위기 이전보다 높은 수준에 머물러 있다. 그리고 가까운 미래에 빠른 회복세가 나타날 것 같지도 않다. 오히려 유로존의 재정 문제로 위기의 재발 가능성이 우려되고 있다.<br />
이런 상황에서 대중들이 겪고 있는 고통을 줄이고 보다 나은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는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질문이다. 하비의 이 책은 자본주의의 대안을 사고하는 전통 속에서 이 질문에 의미 있는 답을 제시하기 위해 자본 축적의 근본적 모순과 자본주의의 위기 경향을 밝히고 현재의 위기를 구체적으로 해명하려고 시도한다. 이 점에서 이 책은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대안을 모색하는 대다수 위기 이론들과 차별을 보이면서,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인 이론적 전통을 한층 풍부하게 만들고 있다.<br />
물론 하비가 이 책에서 제시한 개념과 분석이 논쟁의 여지가 없지는 않다. 예컨대 '자본 잉여의 흡수 문제'가 자본 흐름의 여섯 가지 장애 중 하나인지, 아니면 '자본 잉여의 흡수 문제'가 자본주의 위기 경향을 내재적으로 만드는 근본적인 모순이고 여섯 가지 장애로 인한 위기는 이것의 발현 형태인지가 분명하지 않다. 한마디로 '자본 잉여의 흡수 문제'와 자본 흐름의 여섯 가지 장애에 대한 설명이 하비의 위기 이론에서 각각 어떤 수준에 위치하고 있으며, 그 둘의 관계는 어떠한지가 분명하게 제시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br />
그리고 활동 영역의 공진화 이론을 통해 분석되는 위기가 자본의 순환 및 그로부터 발생하는 위기와 어떤 관련을 맺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해 보인다. 또한 1970년대 위기부터 현재의 위기까지 그 위기의 성격에 대해, 그리고 현재의 위기의 극복 가능성, 즉 자본주의가 현재의 위기를 일시적으로 우회할 수 있을 뿐인지 아니면 이윤 창출과 잉여 흡수의 새로운 기반을 발견하게 되어 다시 지속적인 성장으로 회복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더 면밀한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앞으로 이러한 문제들을 비롯하여 이 책에서 제시된 분석과 개념이 보다 생산적인 논쟁으로 이어진다면, 이 책은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인 이론의 발전을 위해 의미 있는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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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href="http://www.naeil.com/News/economy/ViewNews.asp?sid=E&tid=4&nnum=670911">http://www.naeil.com/News/economy/ViewNews.asp?sid=E&tid=4&nnum=670911</a><br />
<strong>[책으로 읽는 경제] 인류는 글로벌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까</strong> (내일, 박준규 기자, 2012-07-13 오후 2:37:37)<br />
"2006년 미국에서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데이비드 하비는 글로벌금융위기의 대서사시를 이같이 시작했다. 구도시 저소득층 지역의 주택차압률이 급등한 것이다. 정부와 언론은 주목하지 않았다. 흑인과 히스패닉, 편모가정이 주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잘 보이지 않던 작은 구멍이 결국 점점 커지면서 무너져 내리는 모습이 긴박하게 그려졌다.<br />
'자본이라는 수수께끼'는 글로벌금융위기를 피할 수 없는 재앙으로 규정했다. '자본'에 의해 만들어진 위기였다. 그러나 이번 위기는 과거와 달랐다. 해결책이 없다.<br />
하비 뉴욕시립대 대학원 교수는 먼저 많은 위기들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설명했다.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작동원리다. 위기는 '자본의 흐름이 멈추는 것'이다. 화폐자본의 부족, 자연적 한계, 기술과 조직의 한계, 노동의 저항, 수요의 부족 등이 자본의 흐름을 막는 장애물로 나타났다. 세계경제는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끊임없이 자본을 움직이게 했다. 자본은 위기를 우회했다. 자본축적이 만들어낸 모순을 조금씩 변화시키면서 모면했다.<br />
FTA(자유무역협정)를 통해 공간적 장벽을 없애기도 했고 IT기술이라는 새로운 통로를 만들어 속도전을 펼치기도 했다. 노동력 부족을 생산기지의 저개발국가 이전으로 해결했고 노동운동을 정치적으로 선제공격해 무력화시켰다. 임금 저하, 소비 위축을 신용카드와 대출로 막아냈다.<br />
살아있는 생물처럼 어려움을 피해가는 기술을 하비 교수는 '국가-금융 연관'이라고 불렀다. 국가와 금융권력과 결합하고 심지어 국제기구까지 끌어들인 위기극복의 매커니즘이다. 화폐주조권부터 토지개발을 위한 수용권, 인수합병, 국영기업 민영화 등 합법적인 부의 축적을 만들어냈다. '탈취에 의한 축적'은 1944년 브레튼우즈 합의, 1970~80년대 미국 영국 아르헨티나의 대대적인 노동탄압, 1980년대 서울의 재개발, 1990년대 멕시코 민영화 등으로 이어졌다.<br />
<u>자본에겐 경제위기가 "자본축적의 내부모순을 해결할 수 있는 수단"이면서 "비합리적인 방법으로 합리화할 수 있는 기회"였다. 위기가 닥칠 때마다 '국가-금융 연관'은 은행의 방만한 운영에 책임을 묻지 않고 국민들에게 책임을 전가했다. 이익의 사유화, 손실의 사회화다</u>.<br />
2008년이후 터진 글로벌금융위기는 그러나 과거에 가보지 않은 길이다. 하비 교수는 "자본이라는 수수께끼는 내부모순을 우회하는 방식의 지속성장이 왜 불가능한지 묻게 한다"고 꼬집었다. 구제금융 신규투자기회 등 과거 해법이 속수무책이다.<br />
그는 "우리의 미래가 더 이상 월스트리트당이 아닌 빼앗기고 탈취당한 이들의 연대체인 분노의 당에 달려 있다"면서 "전통적인 노동자계급뿐만 아니라 수많은 지식인을 비롯한 비롯한 다양한 비판세력이 연대해 자본주의 극복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는 "정치적인 결집은 과거에 나타난 바가 있으며 그것은 가능하고 벌써 그랬어야 한다"면서 자본주의 한계를 벗어나기 위한 적극적인 행동을 촉구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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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ong>자본주의의 위기, 이번엔 다르다</strong> (한겨레, 한승동 기자, 2012.07.13 21:02)<br />
<strong><font color="#0100fe"><자본이라는 수수께끼-자본주의 세계경제의 위기들> 데이비드 하비 지음, 이강국 옮김/창비·2만8000원<br />
제3세계로 위기 이전시키며 자본축적 해오던 방식 한계<br />
2008 금융위기는 심장경련<br />
빼앗긴 대중들 저항 들끓는 지금이 바로 가능성의 순간</font></strong><br />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며 자본주의 대안체제를 모색해온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의 대가 데이비드 하비 뉴욕시립대 교수는 <자본이라는 수수께끼>(The Enigma of Capitalism and the Crises of Capitalism, 2010) 제8장에서 이렇게 묻는다.<br />
“자본주의가 현재의 충격을 극복하고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러고는 대답한다. “물론이다.” 그는 또 묻는다. “자본가계급이 수많은 경제적·사회적·정치적·지정학적·환경적 난관에 직면하여 그 권력을 재생산할 수 있을까?” 역시 자답한다. “분명히 할 수 있다.”<br />
그런데 앞 질문 대답에서 하비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러나 무엇을 대가로?” 두번째 대답에도 이런 말을 붙였다. 재생산할 수는 있겠지만, 그걸 위해선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 노동의 열매를 권력자들에게 관대하게 건네줘야 하고, 많은 권리와 힘겹게 얻은 자산가치(주택에서 연기금까지)를 포기해야 하며, 막대한 환경 악화를 감수해야만 할 것이다. 생활수준 저하는 말할 것도 없다. 이는 이미 사회 최하층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많은 이들에게 굶주림을 의미한다. 그로 인한 불안을 억누르려면 상당한 정치적 억압, 경찰 폭력, 국가의 군사적 통제가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자본가 계급 권력 중심부에도 힘겹고 고통스런 변화가 나타날 것이다. 역사를 보건대, 자본가 계급은 자체의 성격을 바꾸고 자본축적을 이제까지와는 달리 하면서 (동아시아 같은) 새로운 공간으로 (자본을) 이동시켜야만 권력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와중에 신생 자본가들 또는 약화된 자본가들의 계급권력 재생산에 도전하는 혁명적 운동들과 충돌할 수도 있다.<br />
그러니까 하비는 자본가계급과 자본주의가 살아남고 권력을 재생산할 순 있겠지만, 반드시 그렇게 되도록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되려면 반발하는 다중의 저항을 극복하고 스스로도 변해야 하는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라 얘기하고 있다. 한마디로 쉽지 않을 거라는 얘기다. 그리고 덧붙인다. “위기는, 사회주의적인, 그리고 반자본주의적인 것들을 포함하여 그것으로부터 모든 종류의 대안이 등장하는 역설과 가능성의 순간이다.”<br />
2009년 <자본이라는 수수께끼>를 쓴 하비는 2008년 금융위기가 한 고비를 넘긴 그 시점에도 위기를 진행형으로 봤다. 하비는 위기는 자본주의체제의 항상적인 현상이라고 주장한다.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위기를 우회하거나 이전해 왔을 뿐,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소한 적이 없고, 또 해소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br />
하비는 자본을 혈액에 비유한다. 그는 2008년 금융위기를 “국가의 심장에서 발생한 심각한 경련”으로 봤다. 그런데도 경제학자나 기업가, 정치적 정책결정자들은 자본 흐름의 특성에 무지했고 자본의 횡포는 여전했다고 비판한다. “이른바 ‘구조조정’ 프로그램과 (신용카드 수수료를 갑자기 2배로 인상하는 식의) 다양한 계략을 통해, 국제기구와 신용거래 장사꾼들은 거머리처럼 세계의 모든 이들로부터­-그들이 아무리 가난하더라도-빨아낼 수 있는 최대한의 피를 계속 빨아대고 있다.”<br />
<신자유주의〉(한울 펴냄, 2009)에서도 그는 1980년대 이래 50개국 이상 주변부 국민들의 4조6000억달러에 이르는 부를 중심부 채권자들이 앗아 갔다며, 이를 뒤집힌 마셜플랜이라고 했다.<br />
하비에 따르면, 신자유주의화의 본질은 ‘탈취에 의한 축적’이며 1960년대에 자본가계급의 자본축적과 권력강화, 곧 탈취를 가로막은 것은 노동이었다. 자본가들은 더 값싸고 더 고분고분한 노동력을 원했다. 1970년대 위기 때 그들은 신자유주의라는 칼을 빼들었다. 그리하여 임금 억제와 사회복지 축소를 통해 이윤율 하락과 부의 감소 위기를 해결하려 했다. 그러나 그것은 유효수요 감소라는 또다른 위기를 불렀다. 자본가들은 신용카드산업과 부채 증대, 곧 금융 팽창으로 그 구멍을 메우며 피해갔다. 하지만 그 귀착점은 2008년 금융위기였다. 그러자 또 막대한 긴급구제금융 살포로 파산을 피해갔다.<br />
하비는 말한다. 영원히 지속되는 성장은 불가능하다. 자본주의 위기는 거듭되며 근본적인 해결책은 없다. 자본주의의 한계를 극복하는 길은 잉여의 생산과 분배 모두를 사회적으로 통제하는 것밖에 없다. “모두에게 이득을 주는, 윤리적이고 착취하지 않고 사회적으로 정의로운 자본주의는 불가능하다. 이는 자본의 본질 그 자체와 모순된다.”<br />
그럼 어떻게 할 것인가. 제8장의 제목은 ‘무엇을 할 것인가? 그리고 누가 할 것인가?’다. 레닌의 말에서 따온 이 질문과 관련해 그는 마침내 대안을 구체적으로 논의해야 할 만큼 자본주의가 변동기 또는 변곡점에 도달했음을 암시한다. 그리고 ‘새로운 공산주의’의 도래 가능성에 대해 얘기한다. <u>“공산주의 가설을 부활시키려는 현재의 시도들은 보통, 국가의 통제를 포기하고 생산과 분배를 조직하는 기초로서 시장의 힘과 자본축적을 대체하는 집단적인 사회적 조직화의 다른 형태들에 주목한다. 수직적 명령이 아닌, 자율적으로 조직되고 운영되는 생산자와 소비자의 집단공동체들 간의 수평적 네트워크로 연결된 조정시스템들이 새로운 형태의 공산주의 핵심에 자리잡고 있다. 오늘날 커뮤니케이션 기술들이 이런 시스템을 가능케 하는 것 같다.”</u><br />
이건 스탈린주의적 공산주의가 아니다. 공산주의라는 말이 싫으면 ‘월스트리트 당’에 대적하는 ‘분노의 당’이라 불러도 좋다고 그는 말한다. 자본주의는 저절로 무너지지 않으며, 자본가계급 또한 권력을 결코 순순히 내주지 않을 것이라고 하비는 얘기한다. 정치적 행동을 통해 그것을 쟁취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는 그게 곧 시작될 것이라고 했고, 이 책이 영어권에서 출간되고 얼마 뒤 “월가를 점령하라!”가 시작됐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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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ong>데이비드 하비의 위기론</strong> (경상대학교 사회과학연구원 대안세계화운동 자료관, 하태규, 2011-07-27 16:33:40)<br />
하비는『자본의 수수께끼』(2010)를 통해 2007-9년 위기를 분석하면서 자본주의 위기에 대한 일반이론을 제시하고 있다. 여기서 하비의 위기론은 1970년대 전후한 만성적 장기저하 위기론, 과잉축적 위기론이지만, 그것을 이윤율의 저하와 자본의 과다 즉,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에 근거하여 분석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하비는 6가지 자본 흐름의 장애 요소나 7가지 자본주의 진화의 활동영역들을 분석하면서 이들이 다 같이 위기의 요인이 될 수 있고 역사적 지리에서 특수한 상황을 반영하여 나타나며 그것도 하나의 위기를 해소하는 방법은 다른 종류의 위기를 초래하는 즉, 계속 이전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고 주장한다.<br />
하비에 따르면, 마르크스는『그룬트리세』에서 화폐축적의 잠재적 무제한성과 물질적 활동의 잠재적 제약성을 대조했다. 자본은 그런 한계에 머물지 않는다. 마르크스는 ‘모든 한계는 극복해야할 장애로 보인다.’고 했다. 그래서 자본주의 역사지리에는 절대적 한계로 보이는 것을 초월하거나 피해갈 수 있는 장애로 바꾸는 영구적 투쟁이 있다. 생산을 통한 자본의 흐름을 검토하면 자본축적에 6가지 잠재적 장벽이 있다. ① 시초 화폐자본의 불충분 ② 노동공급의 부족 혹은 정치적 어려움 ③ ‘자연적 한계’ 포함한 불충분한 생산수단 ④ 부적절한 기술과 조직 형태 ⑤ 노동과정의 저항이나 비효율성 ⑥ 화폐로 뒷받침되는 지불할 수요부족. 이 모든 것들이 위기가 발생하는 계기가 된다.(Harvey, D. 2010:47) ④와 관련하여, 마르크스의 이윤율 저하 경향과 그것이 불가피하게 가져오는 위기는 자본주의에 내재적이지만, 혁신이 (에너지 절약같이) 자본이나 생산수단 절약형이라면 이윤율저하의 마르크스 이론은 잘 맞지 않는다. 과잉자본 흡수문제는 신제품 라인을 개척하지 않았다면 자본주의의 조종을 울렸을 것이기 때문에 마르크스의 상쇄경향 목록의 마지막 항목(새로운 노동집약적 생산라인의 개설과 독점)은 더 정교하게 할 가치가 있다. 완전한 신제품 라인의 창조에 대한 놀라운 애호와 1950년 전후 이후 신제품 개발에 발생한 가속은 소비주의의 발전과 증대하는 유효수요를 마르크스가 인식하기 힘들었을 방법으로 현대 자본주의의 지속가능성의 중심에 놓았다. 그렇지만 마르크스의 기술·조직적 변화 과정이 어떻게 불가피하게 이윤율이 떨어지는 경향을 낳는가에 대한 설명은 지나치게 단순할지 모르지만, 그런 변화가 모든 것을 불안정하게 하고 이런 저런 위기를 낳는다는 그의 본질적인 통찰은 틀림없이 정확하다.(Harvey, D. 2010:94-101) ⑥과 관련하여, 더 풍요한 사회에 대한 ‘소비자 감정’과 ‘소비자 신뢰’는 끝없는 자본축적뿐 아니라 점점 더 자본주의 생존이 의존하는 지주다. 미국 경제활동의 70%는 소비에 의존한다. ‘과소소비’위기라고 하는 것이 생산된 상품을 흡수할 유효 수요가 충분하기 못할 때 초래된다. 그러나 노동자의 수요는 비록 중요한 기반이기는 하지만, 단독으로 이윤의 실현문제를 결코 풀 수 없다.(로자 룩셈부르크가 제기한 문제) 결론적으로 어제의 과잉생산물에 대한 유효수요는 노동자의 소비 더하기 자본가의 개인적 소비 더하기 내일의 추가적 생산 팽창에서 나오는 새로운 수요라고 공식화할 수 있다. 여기서 이런 새로운 재투자가 발생하려면, 세 가지가 반드시 실현되어야 한다. ① 자본가들은 반드시 어제 획득한 화폐를 즉각 새로운 자본으로 유통에 투입해야 한다. 여기에 과소소비 위기에 관한 마르크스와 케인스 사고 사이의 중첩이 있다. 경제에 대한 신뢰와 확신의 상실은 화폐의 축장으로 이끌거나, ‘유동성 함정’을 낳아서 유효수요가 붕괴되기 쉽고 생산에 대한 투자가 수익성이 덜 해진다. 이것은 하향 소용돌이를 낳기 쉽다.(이런 종류가 1930년대에 있었고, 지금 목격하고 있다) ② 두 번째 조건은 오늘의 재투자와 어제의 잉여 생산물 사이의 시간 격차가 어떻게 연결되는가이다. 이것은 계산 수단으로 화폐를 요구한다는 것, 즉 불충분한 유효수요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유통과정에 들어갈 수 있는 신용체계의 존재를 의미한다. 다른 수단(전자본주의 사회의 금 보유고를 약탈하는 것)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됨에 따라, 신용이 유효수요 문제를 대응할 유일한 주요수단이 된다. ③ 세 번째 조건은 신용 화폐가 이미 생산된 추가 임금재와 생산수단의 구매에 실제로 사용되는 것이다. 자본가들은 무엇에 재투자할 것인가에 대한 선택권이 있다. 여기서 (경제의) 3% 성장이 3% 재투자를 요구하는 이유가 명백해진다. 만약 그렇게 하기에 실패한다면, 현재가 그런 경우인데, 계속적 생산 팽창에 대한 장벽 때문에 위기가 발생한다. ④ 한 가지 더 추가되어야 한다. 만약 영구적인 생산 팽창을 유지하려면, 자본주의를 경쟁적으로 유지하는 것이 또한 자본주의의 생존에 필수적이다. 예를 들어, 과도한 독점을 통한 어떠한 경쟁의 제약도 그 자체로 자본주의 재생산의 위기를 낳기 쉽다.(바란과 스위지의 요점) 1970년대의 스태그플레이션과 그에 뒤따른 신자유주의 반혁명은 노동력을 분쇄했을 뿐 아니라 끝없는 자본주의 축적의 법칙의 ‘집행자’로서 강제적 경쟁의 법칙을 촉발시켰다. 이 과정은 잠재적인 문제들이 없는 것이 아니다. 우선 (자연과의 관계 같은) 다른 모든 장벽들이 극복되었다는 것과 더 많은 생산이 발생할 공간이 많다는 것을 전제한다. 이것은 제국주의가 필요하고 자본수출이 중요하다는 것을 함의한다. 그렇지만, 과소소비에 대한 이 해법에 두 가지 내재적 문제가 있다. ① 첫째는 축적이 두 배로 투기적이라는 단순한 사실에서 도출된다. 축적은 내일의 팽창이 어떤 장벽도 마주치지 않고 오늘의 잉여가 유효하게 실현될 수 있다는 믿음에 의존한다. 즉 예측과 기대를 의미한다.(케인즈) 어떠한 투기적 기대의 저하도 위기를 발생시킬 것이다. ② 두 번째는 화폐와 신용체계 자체 내에서 발생한다. 정확히 화폐는 사회적 권력의 형태이기 때문에 개인들은 화폐를 보유하려는 상시적 유혹을 가진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할수록 유통의 계속성에 대한 위협이 더 커진다. 그 체계에 대한 신뢰가 매우 중요해진다. 화폐 상징들(화폐 안정을 보장하는 국가 권력)이나 화폐의 질(인플레)에 대한 확신의 상실은 화폐 기근의 가능성과 2008년 가을에 발생한 종류의 지불수단의 동결로 돌출한다. 함의는 신용수단에 대한 통제가 자본주의 기능에 치명적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주조의 질, 더 중요하게 상징화폐와 관련하여 국가의 핵심적인 역할에 더해지면, 국가-금융 결합에서 국가와 금융 권력의 더 한층 융합이 불가피해 보인다. 그러나 여기에 주요한 문제가 있다. 자본이 노동력 수요와 공급의 양면에서 작용할 수 있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자본은 신용체계를 통해 생산-실현 관계의 양면에서 작동할 수 있다. 유망한 주택소유주들에게 점점 더 후한 신용을 제공하는 것이 똑 같이 자산 개발자들에게 후한 신용을 제공하는 것과 결합되어 주택과 도시개발에 거대한 호황을 부채질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지속되려면, 지난 20년 간 그랬듯이, 신용자체가 복리의 비율(compound rate)로 팽창해야 한다. 신용거품이 터지면, 이것은 불가피한데, 전체 경제가 2007년에 그랬듯이 하향 소용돌이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자본주의는 자신의 내부 모순으로부터 자신을 구제하기 위해 외부 힘을 창조해야 한다. 역사적으로 먹여 살렸던 봉건적이거나 비자본주의적 금 보유고와 등가물인 것이 필요하다. 이것은 연준같은 하나의 신봉건적 기관 내에 무한한 화폐 창조력을 둠에 의해 실현된다. 실현문제와 과소소비 문제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실현문제는 유효수요의 부족이 아니라, 어제 번 잉여를 생산에서의 수익성 있는 재투자 기회의 부족 문제다.(Harvey, D. 2010:109-116)<br />
한편, 하비에 따르면, 자본주의 진화의 궤도 안에 7대 활동 영역을 구분할 수 있다. ① 기술과 조직적 형태들 ② 사회적 관계들 ③ 제도적이고 행정적인 배열들 ④ 생산과 노동과정들 ⑤ 자연과의 관계들 ⑥ 일상생활과 종의 재생산 ⑦ 세계에 대한 정신적 개념들이 그것이다. 각 영역들은 자신의 이유에서 진화하지만 항상 서로 간에 역동적인 상호작용을 한다. 참으로 위기 형성을 이 다른 활동영역들 사이의 긴장과 적대들로 재 개념화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신기술은 사회적 관계에서 새 배열을 위해 욕망과 겨루거나 현존 노동과정의 조직을 방해한다. 이것들은 자본주의 장기 역사 내에서 집단적으로 공존하고 공진화한다고 생각된다. 이런 사고의 틀은 독창적인 것이 아니라 마르크스 『자본론』 1권 15장 각주의 다윈 진화론에 관한 언급에서 유래한다. 여기서 마르크스가 7가지 중 나머지는 다 언급하였지만, 제도적 배열만 하지 않았다. 진화적 궤도 내에서 긴장을 낳는 이 영역들 사이에 불균등 발전이 있다. 7가지 활동 영역들은 하나가 나머지를 지배하지 않고 자율적 발전의 가능성 내에 있다. 인간사에 새로움을 영구히 창조하는 내적 동력을 통해서 뿐 아니라 상호관련을 통해서, 각자는 항구적인 갱신과 변형에 종속된다. 전체 배열은 하나의 사회-생태적 총체를 구성한다. 이것은 르페브르의 ‘앙상블(ensemble)’이나 들레즈의 ‘아상블라주(assemblage)’와 유사한 생태체계이다. 여기에서도 자본주의 위기 경향은 해소되지 않고 이전된다. 요점은 자본주의 생존은 장기적으로 3% 복리의 성장을 달성하는 능력에 달려 있다. 이 7가지 영역들은 균등한 비중이 주어질 수 없고 불균등 발전 내에서 변증법적 긴장이 있다. (Harvey, D. 2010:123-134)<br />
하비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마찬가지로 지리적 수준에서 불균등 발전을 지정학적이고 지리경제적인 방식으로 전개한다. 이 모든 것 뒤에 지리적 결정의 복합성이 놓여있다. 한편, 자본가들은 어떤 종류의 지리적 장벽과도 공존할 수 없고 그들을 초월하거나 피해갈 항구적 투쟁을 전개한다. 다른 한편, 자본가들은 적극적으로 새로운 지리와 지리적 장벽을 그 가치가 상실되지 않으려면 반드시 완전 사용돼야하는 고정되고 이동할 수 없는 자본의 거대한 양에 구현된 물리적 건조 환경들의 형태로 건설한다. 자본가들은 또한 자본과 노동의 지리적 이동성을 나중에 제약하게 되는, 지원하는 기능들의 모든 방법을 그들 주위에 결합한 지역적 노동 분업을 창조한다. 영토화 된 행정 제도들과 국가 기구들은 이동을 종종 제약하는 방식으로 경계와 국경을 고정시킨다. 이 모든 것들에 사람들이 자연과의 적절한 관계와 사회적인 것의 적절한 형태에 관한 그들의 특유한 관점과, 만족할만하고 물질적으로 보상되고 의미가 있는 일상생활 형태가 무엇인가에 관한 그들의 정신적 개념들을 반영하는 자신들의 생활공간을 창조하는 다양한 방법들이 더해져야 한다. 자본주의를 재생산한다는 것은 새 지리를 형성하는 것을 포함한다는 것과 옛것을 창조적으로 파괴하여 새 지리를 형성하는 것이 항상 존재하는 과잉자본의 처리 문제를 취급하는 매우 좋은 방법이라는 것이 명백하다.(Harvey, D. 2010:213-214)<br />
이상에서 볼 때, 하비는 실현의 위기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국가와 금융의 결합과 투자 기회를 강조한다. 물론 이윤율 저하위기도 가능하지만 6가지 자본 흐름의 장애요소의 하나인 기술·조직적 형태의 요소에서 한정적인 위기 유발 요인으로 분석된다. 따라서 과잉축적의 위기는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나 이윤율 저하에 의하기보다 자본의 축적과정과 실현과정의 본성상 유발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나타난다. 하비는 (6가지 자본 흐름의 장애요소와 관련된) 금융의 위기차원과 (7가지 자본의 진화 영역과 관련된) 공간차원의 위기 설명에서 훌륭한 설명을 제공하지만 수익성 있는 투자기회를 제공하지 못하는 이유인 근본적인 차원의 설명을 생략하기 때문에 전체적인 통합성과 정합성이 떨어진다. 만약, 현재의 위기는 공급압박 이론에서 출발하여 계속 이전되는 위기로서 설명된다고 하더라도, 전후 황금기의 호황이 ‘위기들이 계속 이전됨’에도 불구하고 장기 지속되었던 원인을 설명하는 문제나 그 이전의 위기들을 설명하는데 정합성 있는 설명을 찾을 수 없다. 이런 점에서 1997-8년 동아시아 위기를 설명하는데, 하비처럼 외부적 요인만 강조하기보다는 브레너가 강조하는 내부적 요인을 먼저 고려하여 그것이 발현되는 외부적 요인을 결합하는 설명이 정합적일 것으로 보인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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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href="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07112113315&code=990100"><strong>[경제와 세상]재벌 개혁과 사장 직선제</strong></a> (경향, 강수돌 | 고려대 교수·경영학, 2012-07-11 21:13:31)</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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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12월 대통령 선거에서는 아무래도 경제민주화 이슈가 가장 큰 화두가 될 것 같다. 그것은 경제민주화가 ‘민생 경제’의 핵심을 이루기 때문이다. 민생 경제란 한마디로 ‘살림살이’ 경제다. 기존의 돈벌이 경제 논리와 다른 논리 위에 선다는 말이다.</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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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 기득권층을 대변하는 새누리당은 경제민주화 이슈를 선점한 듯 보이지만 좀 더 깊이 들어가 보면 그 내용이 ‘무늬만’ 경제민주화일 가능성이 높다. 일례로, 최근 뉴스에 많이 등장한 ‘일감 몰아주기 근절’ 등 불공정 행위 규제를 통한 공정 거래 확립은 경제민주화가 아니라 시장 경제 질서 강화에 불과하다. 이것은 마치 사냥할 때 정작 목표물은 겨냥하지 않고 덤불 언저리만 때리는 꼴이다.</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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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산층이나 서민층을 대변한다는 민주당은 그보다 한 발 더 나아간다. ‘재벌 개혁’을 초점으로 하여 경제력 집중 완화, 지배구조 개혁을 꾀하기 때문이다. 일례로, 최근 발의된 9개 법률 개정안에는 재벌 문제의 핵심 중 하나인 대기업 순환출자를 금지하고 출자총액을 제한하는 제도를 다시 도입하기, 금산 분리 강화와 재벌 범죄의 사면 제한 등이 포함되어 있다.</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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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대해 새누리당은 민주당더러 재벌 개혁이 아니라 재벌 해체를 지향한다고 비난하고, 민주당은 새누리당에 대해 알맹이가 없이 말로만 경제민주화를 외친다고 비난했다. 내가 볼 때, 민주당의 여러 정책이 추진된다고 해서 재벌이 해체될 리 만무하고 새누리당의 시장 질서 확립이 된다고 해서 경제민주화가 될 리 만무하다. 참된 경제민주화는 기득권을 가진 양당 자체가 자신의 기득권을 온전히 버림으로써만 실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거대 정당이 기득권을 버린다는 것은 단순히 두 정당만 그렇게 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 사회가 암묵적으로 전제하고 있는 모든 기득권 구조 자체를 허물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결국, 참된 경제민주화를 이루려면 거대 양당부터가 스스로의 기득권에 대해 포기할 각오까지 하면서 사회 전체가 묵인하고 있는 기득권 구조 자체를 근원적으로 수술해야 한다.</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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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례로 나는 김상봉 교수의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에서 제안된, 재벌을 비롯한 주식회사 사장을 노동자가 선출하는 미래를 상상한다. 봉건주의 시대에 왕은 하늘의 뜻이나 선친의 뜻에 의해 군림했다. 민주주의 시대라면 당연히 온 백성이 대통령을 뽑는다. 이런 맥락에서 경제민주화 시대엔 주식회사 같은 기업체나 학교 같은 곳에서 일반 직원이나 노동자, 평교사가 그 대표를 뽑아야 한다. 그래야 ‘민주주의는 공장 문 앞에서 멈춘다’는 말도 사라진다. 대부분의 노동자나 가족을 떨게 하는 고용 불안 또는 정리 해고 문제, 비정규직, 성차별이나 학력 차별도 사라질 것이다. 물론 과연 그 노동자나 교사들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도 중요하다. 따라서 경제민주화가 완성되려면 ‘보통’ 사람들의 철학이 중요하다. 어릴 때부터 삶에 대해 어떤 태도를 배우는가가 중요한 셈이다. 어른이 되어서도 인문학적 깊이가 있는 학습이 필요한 까닭이다. 게다가 나 혼자만 깨친다고 될 일도 아니고 친구나 이웃들과 소통하고 토론하며 공론을 만들어가야 한다. 소모임이나 네트워크가 중요해지는 까닭이다.</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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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최근에 국립대 네트워크 구축을 통한 서울대 학부제 폐지안이 부각되기도 했지만, 실은 이것도 기득권에 대한 근본적 변화를 꾀하는 것은 아니다. 제2의 서울대가 분명히 나올 것이고 이미 몇몇 대학들이 속으로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태의 핵심은 일류대 출신들이 정치경제적 기득권을 장악한 현실이다. 이를 허물기 위해서는 기업이나 학교 등에서 사람을 구할 때 출신 학교나 학위, 지역을 물을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잘할 수 있는지 보아야 한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개인 행복을 넘어 사회 행복에 기여할 것인가, 학벌이나 직업에 무관하게 비슷한 대접을 받을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결국, 고교평등화를 넘어 대학평등화, 또 이를 넘어 직업평등화가 되면서도 교장 및 사장 직선제까지 이룰 때 비로소 사람들은 신바람이 날 것이고 경제민주화도 완성될 것이다.</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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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class="external" href="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50120518105927" title="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50120518105927"><strong>'김정은 3대 세습'보다 더 괴이한 '이재용 3대 세습'!</strong></a> (프레시안, 최종덕 상지대학교 교수, 2012-05-18 오후 5:17:30)<br />
<strong><font color="#0100fe">[철학자의 서재] 김상봉의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font><br />
세속화된 형이상학</strong><br />
철학은 형이상학을 품기도 하며 논리학으로 드러나기도 하며 윤리학으로 비춰지기도 한다. 그 무엇이건 간에 철학은 세계와 우주를 조우하며 동시에 인간에 대한 질문과 맞닿아 있어야 한다. 인간을 묻는 질문이 없다면, 철학이 만나는 세계란 공허하고 유명무실한 존재일 뿐이다. 인간에 대한 질문은 자아 내부를 깊숙이 비추는 반성력과 자아가 세상을 보는 비판력에서 생긴다.<br />
인간의 토대 위에 구축된 세계 인식을 나는 '세속화된 형이상학'이라고 부른다. 공허하거나 순수 논리적이거나 인간 없는 형이상학, 즉, '신성화된 형이상학'과 대비되는 삶의 철학이라고 보면 된다. 철학은 신성화된 형이상학을 극복해야 하지만, 형이상학 없는 철학은 자칫 유사 과학 수준에 머물 수 있다.<br />
나의 철학 공부는 신성화된 형이상학 대신에 세속화된 형이상학을 주요한 커리큘럼으로 하고 있다. 신성화된 형이상학이란 인간이 배제되어서, 색깔이 없으며 차가우며 건조한 형이상학이다. 반면 세속화된 형이상학이란 인간의 시선 안으로 투영된 형이상학을 뜻한다. 어떤 때는 인간의 역사와 사회의 구조가 묻어난 존재의 서사시처럼 비춰질 수도 있다.<br />
이렇게 세속화된 형이상학 안에는 인간의 실존과 세계의 실재가 뒤섞여 있다. 세속화된 형이상학은 혼돈과 중첩, 비규정성과 불확실성이 스며들어 있다. 마치 논리학처럼 질서정연한 신성화된 형이상학 공부는 수학자나 신학자에게 맡기고, 나는 혼돈의 세속 형이상학을 공부하려 한다. 그런 나의 공부 커리큘럼에는 김상봉의 책들도 목록으로 있다. <br />
김상봉의 책에는 세계 형이상학과 인간 윤리학이 날줄과 씨줄처럼 치밀한 구조로 짜여 있다. 특히 최근에 출판된 그의 책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꾸리에 펴냄)에서는 거대한 관습과 문명적 오류를 붕괴시킬 만한 세속적 형이상학의 범례를 제시하고 있다. 거대한 자본의 우상을 깨고 삶의 윤리를 재구축하려는 범례이다. 형이상학과 현실학의 페이지로 구성된 철학적 선언서이기도 하다.<br />
김상봉의 선언 명제는 한국형 자본주의 사회에서 아무 의심 없이 통용되는 주주 경영 구조의 허구와 모순을 밝히는 철학적 프로토콜이다. 주식회사는 주인이 있을 수 없으며, 있어서도 안 된다는 주장이다. 사회가 진보하기 위하여 재벌 기업의 주식회사는 그것이 크면 클수록 폴리스 민주제 즉 공화제처럼 되어야 한다는 설명을 자세히 해주고 있다.<br />
<u class="underline">주식회사에는 주인이 없기 때문에 그 누구든 주식회사의 경영자가 될 수 있다는 입장은 단순한 개인의 의견이 아니라 경제사적이며 철학사적인 근거 위에 배선된 분명한 사실임을 밝히고 있다. 따라서 노동자가 주식회사의 경영자로 되는 것은 당연하다고 했다</u>. 이런 주장이 뭇사람들에게 큰 당혹감을 줄 수 있지만, 실은 아무도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았던 사실 명제를 언급했을 뿐이다. 김상봉은 그런 진실을 조금이라도 교조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그 대신 철저한 역사적 근거와 철학적 논증을 통하여 주주 자본주의 사회의 허구를 설득시켰다. 그래서 이 책은 정말 읽을 만했다. 정말 그런지 하나하나 책 내용을 따져보겠다.<br />
<strong>국가 위에 재벌</strong><br />
국가 권력보다 더 커진 한국의 재벌 기업들은 이미 기업 국가의 주인 행세를 하고 있다. 저자는 기업 국가의 무수한 부패들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국가가 기업에 동화되면 일어나는 전형적인 변형은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독재적이고 권위적인 문화가 확산되는 데 있다. 여기서 저자는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부분을 지적했다. 즉, 자본주의 경제 제도와 자유 민주주의는 동전의 양면이라는 오판들이다.<br />
한국의 재벌 기업 문화는 그들의 이익 구조를 위하여 민주주의와 자유주의를 심각하게 훼손시키고 있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26쪽). 재벌 기업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그런 기업들이 있어서 대한민국이 이렇게 잘 살게 된 것이 아니냐고 항변한다. 그러나 <u class="underline">재벌 기업의 이윤 행위는 공적으로 국민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사적으로 그들만의 개인 이익을 위한 착취 수준</u>이라는 점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br />
너무나 당연한 논리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그런 모순을 덮어버리곤 한다. 재벌이 우리를 잘 살게 해줄 것이라는 마약 같은 믿음을 조작하고 있다. 이명박이 대통령 되면 우리 모두 재벌처럼 잘 살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마약의 환상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강남 부자들이 대한민국의 부를 상승시킬 것이라는 믿음이 횡행하고 있다. 빈부격차는 더 많이 벌어지고 있는 당면한 현실에 많은 사람들이 기꺼이 눈감아 버린다. 재벌 기업에게 더 많은 돈을 몰아주면 끝내는 우리들 대중들에게도 혜택에 돌아올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믿음은 재벌과 그 공조자인 정부 공무원이 만들어낸 가짜 유토피아일 뿐이다.<br />
나는 이런 희망을 '의존적 희망'이라고 말한다. '주체적 희망' 반대편에 놓인 허망한 믿음의 결과이다. 앞서 말한 기만의 믿음, 즉 부자들에게 돈을 우선적으로 몰아주면 넘쳐나고 난 이후, 끝내는 대중들에게 떡고물이 똑똑(trickle) 떨어질 것이라는 믿음은 전형적인 트릭클다운(trickle-down) 현상의 귀결이다. 트릭클다운 정책은 미국에서 아버지 부시 대통령이 1990년 전후로 시행했던 부자 혜택 정책이다. 한국은 이런 부자 혜택 경제 정책을 미국 이상으로 노골적으로 시행하고 있다.<br />
그런데 한국에서는 부자들에게 더 큰 파이의 혜택을 돌리고 난 후 그 파이 아래로 똑똑 떨어지는 떡고물조차 서민들에게 돌아가지 않는다. 재벌 2세들이 그 남은 떡고물까지 깡그리 흡수해 버리기 때문이다. 재벌 2세, 3세에게 기업을 불법적으로 물려주는 현실을 법관들까지 모른 척하고 있으며 관련 상급 공무원들은 한 발 더 나가 재벌 비위 상하지 않도록 미리 알아서 기고 있다.<br />
자본과 기술면에서 세계 최강을 자랑하는 삼성전자의 대표이사라는 사람이 자본 독재자 이건희에게는 물론이거니와 그 아들에게도 벌벌 기는 장면을 아마 유럽 기업인들이 보았다면 무슨 영화 찍고 있냐는 신기한 생각으로 물어볼 것이다. 가부장적인 권위에 독재자의 폭압성이 더해져서 주주법상으로 아무 직함도 없는 이건희에게 감히 고개조차 들지 못한다. 그 아들에게도 마찬가지다.<br />
김정일에 이어 김정은 3대로 이어지는 북한 권력 세습을 보고 있으면 한숨이 푹푹 나오거늘, 소위 자유 민주주의라는 국가에서 재벌 기업의 세습 권력은 북한 정권 이상으로 더더욱 괴이한 모습이다. 전 세계 자본주의 국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한국형 독재 권력이려니 하고 쉽게 생각하려 해도, 여전히 가슴이 더 깊게 패이고 만다. 김상봉은 그의 책에서 이런 괴이함을 재미나게 표현했다. "<u class="underline">북한에서는 국가 위에 당이 있다면 남한에서는 국가 위에 재벌 기업이 있는 것이 다를 뿐이다</u>." (225쪽)<br />
경영자가 이사회를 주물럭거리는 것이 한국 주식회사의 기현상이다. 이사회 위에 경영진이 있고, 경영진 위에 절대권력 회장님이 있다. 그런 재벌 기업의 규모는 국가 예산을 넘어설 정도로 방대해졌지만 그 지배 방식은 동네 식당을 운영하는 수준이다. 그들의 세습 권력은 두말할 것도 없이 재벌이라는 조직 자체가 독재의 잔존이라는 점을 김상봉은 잘 설명해주고 있다. 독일 같은 나라에서는 재벌이 없다는 말이 너무나 당연하여 거론조차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재벌 떨거지들, 맹목적 재벌 자본 추종자들이 우러러 받들어 모시는 미국에도 재벌 개념은 없다. 최근 무섭게 융기하는 친일 세력들이 좋아하는 일본에서조차도 재벌 조직이 없다는 것을 저자는 상세하게 서술하고 있다.<br />
그러나 독재 세습 한국형 재벌은 재벌 기업식 주주 자본이 현대 자본주의의 주류라고 서민을 속이고 있다. 미국 기업 사회 자본가들은 이미 미국 사회에서 발생한 독재적 주식회사의 전횡과 몰락을 많이 보아왔다. <u class="underline">2001년 전 세계 경제를 혼란에 빠뜨린 "엔론 사태가 경영자 지배의 극단이라면 포드의 경우는 소유주 지배의 극단이다. 그리고 주주 자본주의는 이 두 극단 사이에서 언제나 동요할 수밖에 없다.</u>"(204쪽)<br />
책에 쓰인 대로 이재용은 1994년 아버지 이건희로부터 61억 원을 물려받았다. 증여세를 납부하고 나니 44억 원이 남았다고 한다. 당시 매스컴은 소박한 상속이라고 칭찬했다. 그러나 이재용의 돈 44억 원이 불과 15년 만에 2조2000억 원이 되었다. 더군다나 셀 수 없을 정도의 많은 계열사 기업의 실질적인 주인이 되었다. 전 지구적 차원의 불법적 행위가 일어났지만, 대한민국 법원이 내린 그에 대한 법정 판결은 결국 그 부자에게 면죄부를 준 결과에 지나지 않았다. 저자가 쓴 다른 한 구절을 보자.<br />
"예를 들자면, 정몽구 회장은 2006년 1000억 원의 비자금을 조성해 빼돌린 협의로 구속 기소당해 보석으로 풀려나기까지 두 달 가량 감옥 체험을 해야 했다. 미국이라면 정 회장은 어쩌면 아직도 감옥에 있을 수도 있었겠지만, 이 나라에서는 100만 원을 훔쳤다는 죄로 감옥에서 썩는 사람들은 많아도 1000억 원을 훔쳤다고 징역을 살지는 않는다. 그리고 정몽구 회장도 여전히 회장으로 건재하고 있다." (256쪽)<br />
<strong>노동자 경영권</strong><br />
그래서 김상봉은 재벌 기업의 지배 구조를 민주적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너무 당연한 말이다. 여기서 <u class="underline">민주적이라는 뜻의 실속은 그 구성원들이 공동체 의사 결정에 참여하는 데 있다. 기존 방식대로라면 참여하는 구성원이 주주나 경영자에 제한되었지만 그런 제한이 바로 주식회사법을 어기고 있는 셈</u>이다.<br />
김상봉은 이제라도 노동자 대표가 참여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증명한다. 노동자가 경영자도 될 수 있고 그런 노동자는 마치 기업이라는 공화국의 시민인 셈이다. 이런 방식이 바로 김상봉이 전개하는 폴리스로서의 기업이다. 이런 주장에 대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은 난리법석을 떨며 자본의 생리를 조금도 모르고 까부는 말이라고 한다. 어떤 사람들은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원시 공동체 같은 헛소리를 하고 있냐고 핀잔을 하기도 한다. 현대 사회는 국가 간 치열한 경쟁력의 전쟁터와 같은 곳인데 웬 꿈같은 로맨스에 빠져 있냐고 극단적으로 몰아붙이는 사람들도 있다. 재벌 기업을 하는 사람들, 많은 경제학자들, 정부 관료들이 바로 그런 비난과 조롱을 퍼붓는 사람들이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진보적이라는 지식인조차 기업 공화제 구조를 실현 불가능한 이상주의라고 일축하면서 그런 비난에 적극적으로 가세한다.<br />
저자 김상봉이 그런 비난을 모르는 채 이 책을 쓴 것은 아니다. 노동자 경영권으로 압축된 그의 주장이 낭만적 이상이 아니라 아주 구체적으로 실현 가능하다는 것을 상세히 쓰고 있다. 기업이 이윤을 추구하기 위하여 생겨났다는 기업의 본능적 생리에 대하여 김상봉이 모르는 바도 아니고 무시하지도 않는다. 그런 자본의 생리를 무시했다면 그는 기존의 낡은 유토피아 경제학자와 별 다를 바가 없었을 것이다.<br />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업의 탄생은 그들이 투자한 모든 자산보다 훨씬 더 많은 잉여 가치를 얻어내는 데 있다는 점을 저자는 절실하게 알고 있다. 그런 절실한 인식이 있었기에 그는 우리들의 행복한 공동체를 구현하려는 의지와 설계를 분명히 제시할 수 있었다. 철학사의 관점에서, 경제 사상사적 관점에서 그리고 유럽이나 일본의 가까운 실증적 사례들을 통하여 김상봉은 노동자 경영권의 실현이 가능한 이유를 소상하게 보여 준다.<br />
헤겔에서 좀바르트에 이어가면서 철학사와 경제사를 결합하여 소유 개념을 설명하는 그의 분석력이 돋보인다. <u class="underline">소유에 대한 헤겔의 개념이 너무 추상적이라는 오해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그는 주식회사에 대한 법적인 보기를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소유권이란 쉽게 말해서 (1) 나만 가질 수 있고 (2) 내 마음대로 늘리거나 (3) 처분할 수 있는 권리를 뜻한다. 그런데 주식회사의 주주는 자기가 소유한 주주의 한도 안에서만 주주의 배당과 손실을 받을 뿐, 회사의 경영에 대하여 책임질 필요가 없다</u>. 누구나 다 알고 있듯이 말이다.<br />
김상봉은 다양한 현실 사례를 들어 주식 기업의 소유가 불가능함을 지적하고 있다. 그 중의 하나, 2008년 <파이낸셜타임스>가 선정한 시가 총액 1위 기업 엑손모빌을 사례로 들어 주식회사가 소유 혹은 지배의 대상이 될 수 없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161쪽).<br />
<u class="underline">"주주의 몫은 배당금이며, 노동자의 몫은 임금이고, 채권자의 몫은 원금과 이자이며, 소비자나 계약자의 몫은 계약에 따라 지불한 금액에 상응하는 상품이나 서비스이다. 하지만 경영권은 누구의 몫도 아니다. 그런 까닭에 주식회사에서 누가 경영을 맡느냐 하는 것은 모두에게 열려 있는 문제로서 원칙적으로 주식회사의 본질적 특성으로부터 연역되지 않는 문제이다. 아니 주식회사의 경영권이 누구에게 속하느냐 하는 것이 미리 결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야말로 주식회사의 고유한 특성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u> (183쪽)<br />
노동자 경영권이 어떻게 가능한지 그리고 별 문제 없는지를 따져 보아야 한다. 앞서 말했듯이 진보 지식인조차 노동자 경영권의 실현 가능성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주식회사에 주인이 없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렇다고 노동자가 그 경영권을 가져야 한다는 분명한 명분이 있겠느냐는 자조적 의심 때문에 그렇다.<br />
김상봉은 이에 대하여 책의 마지막 장을 할애하고 있다. <u class="underline">노동자는 기업으로부터 받는 임금이 그들의 최후 생활 보장에 대한 경제적 권리이기 때문에 기업에 대하여 진정으로 책임감을 갖는 주체는 바로 노동자</u>이다. 이러한 김상봉의 주장에 대하여 나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주식회사의 주주는 책임을 지지 않으며, 경영자는 원칙적으로 경영을 잘하여 수익을 많이 남기라는 주주들 대표에 의해 임명된 사람이므로 전적인 책임을 질 수도 없다. 주주의 권한을 넘어선 재벌은 공적 책임보다는 그들만의 사적 잉여금을 챙겨가는 데에 여념이 없다. 그래서 노동자의 책임은 소중하며, 노동자가 기업 경영에 참여하는 것이 당위적이다.<br />
노동자 경영권에 대한 실질적인 사례도 많다. 독일이나 일본에서 노동자 경영권의 관행과 제도가 있다는 것을 저자는 본보기로 보여주었다. 그리고 경제사적인 측면에서 그 정당성을 증명해 보였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들의 관습적 사유를 깨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1) 어찌 감히 노동자 경영권을 생각할 수 있단 말인가? (2) 기업의 창업자가 있는데, 어찌 감히 그들의 재산을 간섭할 수 있단 말인가? 이렇게 순응되어진 두려움에 우리는 휩싸여 있다. 그런 두려움의 관습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이 지식 학습보다 더 우선하며 더 중요하다.<br />
<strong>철학이 필요한 이유</strong><br />
여기서 철학이 요청된다. 이 책은 겉보기에 노동자 경영권이라는 현실 경제 주장을 담은 책 같지만, 실은 자본 권력 즉 돈의 힘에 순치된 우리의 자화상을 내부로부터 깨부수려는 철학적 선언서라고 나는 생각한다. 마치 코페르니쿠스의 혁명처럼 말이다. 코페르니쿠스 혁명이라는 것도 후대로 지나고 보니 혁명이라는 칭송을 받게 된 것일 뿐이다. 남들 다 천체가 돈다고 할 때 지구가 돈다고 했으니 당대에 코페르니쿠스는 정말 비난과 조롱을 받았었겠지.<br />
남들 다 하는 대로 나도 쫓아가는 것이 뭐가 문젤까? 한때 유행했던 할리우드 영화 <매트릭스>에서는 누구에 의해 프로그램되어진 세상 속에서 가짜의 세계, 허구의 세계, 조작된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가짜 세계에서 안주하는 것이 행복하다고 여겨질 수 있을지 의심을 품고 되묻는 것 그것이 바로 철학이다. 박사 학위에 교수라는 최고의 철학 전공 지식인이라도 그 조작된 세계에 안주하거나 조작에 가담했다면 그는 철학과 동떨어진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br />
노동자 김진숙이 크레인에 올라 자본 권력의 허구에 항거했을 때 김진숙으로부터 우리는 가장 철학적인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의심을 하지 않고 주어진 틀에 안주하도록 많은 사람들이 순치되었다. 조금만 참으면 희망찬 미래가 올 것이라는 감언이설에 빠져 가짜의 현실을 그냥 인정하고 마는 허구의 믿음들이 넘쳐난다. 그런 믿음들은 일종의 '의존적 믿음'일 뿐이다. <u class="underline">우리에게는 '의존적 믿음'이 아니라 '주체적 믿음'이 요청된다. 그런 '주체적 믿음'을 실현하려는 의지가 바로 철학</u>이다.<br />
대학 법인은 공적 법인인데도 불구하고 많은 대학 이사장들은 대학의 사적 주인을 당당하게 자처하고 있다. 또 대학 재벌 권력의 비리와 부패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정부는 그들을 주인으로 모시고 있다. 노동자와 국민을 무시한 채 국민의 세금으로 세워진 고속철도나 국제공항도 그들 마음대로 주인을 기업에게 넘긴다고 한다. 4대강을 그네들 개인 관광지처럼 결정해서 억지 주인 행세하며 자연으로부터 빼앗고 우리 모두의 것으로부터 빼앗아 토건 정부답게 그들 마음대로 파헤치고 있다. 보수 신문의 비호 아래 제주도 강정 마을을 빼앗아 해군 기지를 세워서 미군에게 안주인을 넘겨주고 있다. 그네들끼리 마음대로 주인을 만들거나 바꿔치기에 능숙해졌다. 오래 전부터 주식회사가 법적으로 주인이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재벌이 주인을 자처하고 또한 재벌을 주인으로 모셔온 그들의 관행에 우리들이 침묵했기 때문이다.<br />
시각을 조금만 넓혀 유럽이나 일본 아니면 금융 자본주의의 극치를 달하는 미국을 바라본다면 한국의 세습적 주주 자본이 얼마나 변태적인지를 느낄 수 있다. 시선을 조금만 달리하여 자본의 역사 및 한반도 제국주의의 역사를 되새길 수 있다면 현행 기업 권력이 왜 국가를 넘어서게 되었으며 나아가 왜 국가가 나서서 재벌을 옹호해 주는지를 알 수 있다.<br />
불법의 관행에 침묵으로 동참한다면 우리 역시 누구에게선가 프로그램된 게임 캐릭터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u class="underline">기업을 그네들 마음대로 하고 싶다면 주식회사 형태 말고 사적 기업으로 운영하라고 해라, 그러면 아무도 간섭하지 않을 것이다. 대학을 세워 명예 권력을 쥐고 돈을 벌고 싶다면 처음부터 노골적으로 개인 기업형 학원을 차리라고 해라, 그러면 어느 누구도 말리지 않을 것이다. 법인의 이름을 도용하여 공중 이익을 침식하고 그네들 이익을 지수 함수적으로 늘려가고 있는 현실을 관행이라고 옹호하는 비호 세력에 무력해져서는 안 된다</u>고 김상봉은 제동을 걸었다.<br />
그런 관습이 가짜라는 것을 그의 책에서 읽을 수 있었다. 김상봉의 책에 나온 대로 우리는 그들이 가짜 주인이요 진짜 주인은 우리 모두라는 항변을 해야 한다. 이러한 항변이 바로 철학함의 출발이다. 여기서 김상봉의 철학이 고귀한 박제된 형이상학이 아니라 현실을 섭동하며 극복하는 실천적 형이상학임을 알게 되었다. 실천적 형이상학이란 조작된 의존적 희망으로부터 탈출하여 주체적 희망을 되찾는 삶의 매뉴얼이다. 그런 매뉴얼을 읽을 수 있다면, 김상봉의 노동자 경영권 주장이 낭만이 아니라 한국 사회 전체에 관통하는 실천적 지표임을 쉽게 알 수 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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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class="external" href="http://www.redian.org/index.php/archive/1708" title="http://www.redian.org/index.php/archive/1708"><strong>어떤 철학적 몽상에 관하여</strong></a> (레디앙, 남종석 진보신당 부산 동래당협 부위원장, 부산대 경제학 강사 / 2012년 5월 2일, 5:04 PM)<br />
<strong><font color="#0100fe">[비판과 모색] 김상봉『기업은 누구의 것인가』 비판①</font><br />
1. 당의 지식인</strong><br />
선거 후 홍세화 진보신당 대표는 당원들에게 보낸 공개편지에서 진보신당의 두 지식인이 새로운 저서를 발간했다고 썼다. 그 중 하나가 김상봉 선생의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이다. 이 책은 철학자로서 그가 한국 사회의 변혁을 위한 상을 제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자신의 표현에 따른다면, 이 책은 “자본주의 체제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 대한 종합적 답변이다.<br />
그간 김상봉 선생은 이런 저런 강연을 통해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에서부터 구체적인 정책개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쟁점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제시해 왔다. 삼성 반대, 서울대 폐지 등 진보신당의 정책이 그의 입장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가 당 강령 전문을 작성한 지식인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그의 성향과 진보신당의 정책 방향이 크게 다를 것 같지는 않다. 이런 점에서 보면 이 책에서 제시된 자본주의 극복 방향은 진보신당의 노선 결정에도 큰 영향을 줄 수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br />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는 자본주의적 소유제도의 특징과 주식회사의 구조분석에서 출발하여, 노동자들을 노예화시키고 있는 경영의 본질을 밝히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으로서의 노동자 경영권을 주장하고 있다. 그는 노동자들 스스로 경영권을 갖고 노동을 자주적으로 통제하며, 잉여를 자율적으로 배분함으로써 예속의 상태를 벗어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자본주의적 소유관계의 변혁 없이도 노동자들이 경영권만 장악할 수 있다면 기업을 만남의 공동체로 전환시킬 수 있다는 주장이다.<br />
그의 주장이 과연 창조적 발상이 될 것인지 아니면 개인적인 몽상에 불과한지를 알기 위해서는 꼼꼼한 검토가 필요하다. 이 글은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에 대한 비판적 논평이다. 나는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김상봉 선생의 진단과 처방에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 그의 철학적 상상력은 창조적 문제 제기라기보다는 고립된 철학자의 몽상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이후의 장들에서 내가 왜 이렇게 판단했는가를 제시해볼 것이다. 나의 문제 제기는 김상봉 선생이나 그의 입장을 옹호하는 진보신당 내의 세력들과의 생산적 대화를 위한 것으로 이해해주었으면 한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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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ong>2. 소유권과 분리된 경영권?</strong><br />
이 책은 현대 사회의 노동자들은 노예와 같은 처지로 전락했다고 진단한다. 노동자계급이 노예의 상태가 된 것은 현대 기업 체제에서 사용자가 경영권을 독점하고, 이를 토대로 노동과정에서 노동자들을 이윤 추구의 수단으로 활용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br />
<u class="underline">경영권은 “노동자에게 자신의 지위와 명령에 복종할 것을 요구할 수 있는 사용자의 권리”(122쪽)로서, 사용자는 이 권리를 통해 “노동자들의 인격”을 지배할 수 있고 “착취”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123쪽) 이는 인간을 “수단이자 목적”으로 대해야 하는 칸트식의 도덕적 명령에 위배되는 것으로 인간의 도구화만을 부추길 뿐이다</u>. 경영권은 노동자들에게 가해지는 권력이기도 하다. 비록 노동자는 자유로운 계약을 통해 고용되지만 노동과정에서 자본착취의 도구로 전락하고, 그의 인격은 경영주에게 예속됨으로써 노예와 같이 되었다고 한다.<br />
경영주는 노동자들을 그들의 자유 의지와 상관없이 명령하고 강제함으로써 인격적 억압을 자행하고 있는 것이다. 근대 이후 시민들은 법 앞의 평등을 획득했지만, 노동과정에서 예속됨으로써 노예의 지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기업의 경영권은 자율적인 개인들의 동의에서 벗어난 외부적 강제 수단일 뿐이다.<br />
노동과정에서 노동자가 노예와 같은 처지가 되었다는 주장은 별로 새로울 것도 없고 특별한 것도 없다. 김상봉 선생 스스로도 인정하고 있듯이, 이 책이 진정 독창적인 점(?)은 경영권을 자본주의적 소유와 분리여 사고하고 있다는 점이다. 김상봉 선생은 기업의 경영권은 자본주의적 소유와 필연적인 관련이 없기 때문에 소유권의 전환 없이 경영권만 노동자들이 장악하면 노동자들은 노예 상태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br />
주주들이 기업을 소유하더라도 경영권만 노동이 지니게 되면, 노동자들은 기업을 자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고 잉여의 사용을 주체적으로 결정할 수 있다. 노동자는 경영권을 장악함으로써 자율적인 사회적 주체가 되는 것이다. 이렇듯 “소유 없는 자유”를 제시한 것이야말로 그의 독창성을 보여주는 증표인 듯하다.(107쪽)<br />
그는 주식회사의 구조분석을 통해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주식회사는 소유와 경영이 분리되어 있다. 주주들은 비록 배당권과 주식평가차익을 얻고자 하지만 어느 누구도 기업을 배타적으로 소유하고 있지 않으며 경영권에 대해서도 대부분 무관심하다.<br />
<u class="underline">주주들은 이사를 선임하고, 이사회에서는 대표이사를 선출한다. 이렇게 선출된 사용자들은 경영권만 지니고 있을 뿐 실질적인 소유권을 행사하지 않으며 행사할 수도 없다.(257쪽) 왜냐하면 주식회사는 법인으로서, 자본의 결합물이지 인간적 결합물이 아니며, 주식회사가 자유로운 인격(법인격)으로 간주되는 것은 회사 스스로가 주인이지 다른 어떤 인간의 독점적 소유물이 아니라는 것</u>이다.(147쪽) 그러므로 주식회사의 소유구조는 그대로 두고 경영권만 노동자들이 장악하면, 주주들은 배당이익을 받고 노동자들은 인격적 예속에서 벗어나 기업을 만남의 공동체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br />
소유권과 분리된 경영권 장악이라는 김상봉 교수의 주장은 언뜻 독창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는 그가 부르주아적 소유에 대한 기본적 이해조차 제대로 하지 않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증거다. 소유란 생산관계의 법적 표현일 따름이다. 그것은 특정인이 무엇을 소유했기 때문에 임의적으로 처분하거나 혹은 처분할 수 없다는 문제가 아니다.<br />
<u class="underline">자본주의적 소유법칙은 부르주아 계급의 생산수단의 독점과 재생산을 보증하는 것이다. 자본가는 사적으로 소비하고 생산수단을 감가시켜도, 잉여가치를 생산에 재투자함으로써 생산수단을 지속적으로 소유할 수 있게 된다. 잉여를 재생산에 투자함으로써 생산수단에 대한 부르주아의 소유는 지속되는 것</u>이다. 이것이 자본주의적 소유법칙이다.<br />
<u class="underline">문제는 자본가의 소유가 재생산되려면 생산과정에서 잉여가치가 추출되어야 하고, 잉여가치를 추출하려면 노동과정에서의 자본의 지배는 필수적이다. 부르주아들이 경영권을 장악해야 하는 이유는 생산과정에서의 지배를 통해서만 잉여가 추출될 수 있고, 잉여가 추출되어야만 소유가 재생산될 수 있기 때문</u>이다. 이것은 자본가가 계급으로서 자신을 재생산하는데 필수적인 부분이며, 노동과정에서의 지배야말로 계급투쟁의 핵심적 사안이 되는 것이다. <u class="underline">자본주의적 소유는 노동과정에서의 부르주아의 지배(경영권)와 긴밀하게 결합</u>되어 있는 것이다.<br />
그러므로 주주들은 경영에는 관심이 없고 배당에만 관심이 있다는 분석은 전혀 맞지 않는 주장이다. <u class="underline">주주들이 경영에 무관심한 것은 경영권을 장악한 부르주아들이 잉여의 생산을 감독함으로써 부르주아적 소유가 재생산된다는 가정 하에서 그런 것</u>이다.<br />
특정 주주가 주식 평가차익에만 관심을 두는 것을 두고 부르주아 일반이 경영권에 관심이 없다고 일반화시키는 것은 계급으로서의 부르주아의 본성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소치일 뿐이다. 부르주아들이 소유권만 갖고 경영권은 노동자들에게 넘겨줄 것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나려면 부르주아들이 노동자들의 도전에 대해 어떻게 대응하는지만 살펴보면 된다. “곤봉을 맞아보면 정신을 차린다.”<br />
물론 김상봉 교수는 나의 이런 비판에 대해 노동자들이, 소유권의 변동 없이도 경영에 참여한 역사적 사례가 있다고 반박할지 모르겠다. 그가 제시하는 대안 가운데 하나는 독일의 노동자평의회이다. 그는 독일에서는 노동자들이 사용자에게 “제안하고 협의하고, 동의할 권리”를 지녔다고 쓰고 있다.(186쪽) 노동자들 스스로 주체적으로 노동과정에 참여한 역사적 선례인 것이다.<br />
그러나 독일의 사례는 전혀 근거가 될 수 없는데, 왜냐하면 독일의 노동자 경영참가는 부르주아의 경영권에 대한 자발적 동의였지 그 반대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는 전후 미국 법인자본을 따라잡기 위한 전형적인 ‘노사협조 문화’일 뿐 노동자의 경영권 분점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이는 3절에서 다룬다). 그것은 부르주아 경영권에 대한 자발적 종속의 다름 아니었다.<br />
<u class="underline">부르주아들이 소유권에만 관심을 두고 경영권에는 무관심하다는 사고는 김상봉 선생의 심오한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지 현실의 부르주아들은 결코 그렇게 멍청하지 않다</u>. 부르주아들은 잉여의 생산과 소유의 재생산은 필연적으로 결합되어 있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노동과정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계급투쟁을 언제나 능동적으로 조직한다. <u class="underline">마르크스주의자들이 부르주아적 소유관계의 철폐를 주장하는 이유는 소유관계(생산관계의 재생산)와 노동과정에서 자본가의 지배(경영)는 필연적으로 결합되어 있다고 보았기 때문</u>이다.<br />
그런데 김상봉 선생은 “마르크스는 겉으로는 자본주의적 소유를 경멸하는 허세를 부렸으나 마음속으로는 은밀하게 자본주의적 소유를 부러워했다”(104쪽)고 마르크스를 비판한다. 참으로 코믹스런 비판이지 않는가?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적 소유를 은밀하게 부러워해서” 부르주아적 소유관계를 전환시키려고 했다는 해석이야말로 김상봉 교수의 전무후무 한 독창성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br />
<br />
<strong>3.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는 주주자본주의의 대안인가?</strong><br />
김상봉 교수는 주식회사(법인자본)에 대한 분석을 보충하여 법인자본의 구체적 형태에 대한 비교 분석을 제시한다. 그는 독일, 일본, 미국, 한국의 법인자본의 특징을 비교 분석한다. 그는 미국 자본주의가 주주자본주의에서 경영 자본주의로 이행함으로써 도저히 빠져 나올 수 없는 수렁에 빠졌다고 주장한다.<br />
경영자들이 자신들의 권력과 이해를 추구함으로써 주주의 지배권을 전복시켰으며, 경영자(대표이사)가 이사들을 선임함으로써 이사회를 완전히 장악해 버렸다고 주장한다. 주주권과 경영권의 대립이 미국 자본주의의 심각한 문제라는 지적이다.(197쪽)<br />
반면 독일 법인자본주의는, 노동자들이 직장별로 존재하는 노동자평의회를 통해 경영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노동자의 자주 관리의 전범이 된다고 주장한다. 노동자들은 경영주들과 동등한 입장에서 자신들의 입장을 관철시킴으로써 생산과정이 주인이 되었다는 것이다.<br />
일본의 주식회사에 대한 예찬도 빠지지 않는다. 일본 기업들은 종업원들에게 종신고용을 보장하고, 경영자는 종업원 출신이 많으며, 기업은 종업원을 운명공동체로 여긴다고 주장한다.(228쪽) 반면 한국은 일본 재벌의 껍질만 가져왔을 뿐 일본 기업의 ‘종업원 중심주의’는 전혀 수용하지 않고 있다고 덧붙인다.<br />
<u class="underline">김상봉 교수의 법인제도의 비교는 1990년대 초반 한국 사회 일각에서 미국의 주주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된 이해관계자 자본주의의 변종</u>이다. 몇몇 진보주의자들은 미국식 주주자본주의를 넘어서기 위한 전거로 독일 자본주의를 가져 왔던 것이다. 더불어 일본의 ‘종업원 중심주의’까지 결합시킴으로써 자본주의적 시장체제 내에서도 노동자들의 지위는 혁신적으로 개선될 여지가 있음을 보이고자 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 미국식 법인자본은 경영권의 과잉이라는 측면에서 헤어 나올 수 없는 수렁에 빠져있으며, 한국의 재벌은 제왕적 지배자가 독재를 하는 악의 근원인 것처럼 제시된다.<br />
그러나 김상봉 교수가 독일이 노동자평의회를 찬양하지만 20세기 법인 혁명의 중심지는 미국이다. 20세기 초반 미국에서 등장한 법인자본은 생산(라인이라 한다)과 스텝을 결합시킴으로써 거래비용을 내부화했다. 미국 법인 기업들은 컨베이어벨트로 라인을 혁신했을 뿐만 아니라 부품산업을 내부화하고, 생산과 인사-재무-마케팅(판매)을 결합시킴으로써 시장의 불안정성을 내적으로 통제하는 새로운 혁신을 이뤄낼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지오바니 아리기가 『장기 20세기』에서 논하고 있는 20세기 미국 법인혁명이다. <u class="underline">미국은 법인혁명을 통해 19세기 말부터 시작된 자본주의의 위기를 극복하고 새로운 헤게모니 국가가 될 수 있었다. 김상봉 교수가 법인체제에 대한 분석을 하고자 했다면, 가장 표준적인 사례인 미국 법인자본주의의 혁신을 제대로 분석했어야</u> 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br />
그가 제시하는 표준적인 사례는 독일이다. 전후 독일은 미국의 생산성에 한참 뒤쳐져 있었다. 이런 와중에 미국과의 경쟁을 위해서는 노사협력이 필수적이었다. 기업들은 노동자들에게 일자리 안정과 경영에 참여를 보장하는 대신 노동자들은 임금인상을 억제하고, 파업을 자제하며, 기업의 경영전략에 적극 동참할 것을 결의한다.<br />
1948년부터 1968년까지 무려 20년간의 무파업 행진이 이를 상징하고 있다. 로버트 브레너가 『혼돈의 기원』에서 밝히고 있듯이, 이는 독일 노동자 운동의 후진성을 보여주는 것이지 결코 진보적인 무엇이라 할 수 없다. 경쟁력 향상을 위한 노동자들의 자발적 종속을 어떻게 ‘진보’라고 할 수 있겠는가?<br />
1990년대 한국의 진보주의자들이 독일의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를 찬양하고, 산별노조를 주장하는 세력들이 독일 금속노조를 모델로 삼기도 했다. 그러나 2010년 비교자본주의는 온 데 간 데 없다. 유럽은 붕괴되고 있고, 독일이 유지되는 것은 유럽 주변부의 부를 착취하기 때문이다. 더불어 독일 노동조합은 노사협조주의의 전형이었지 노동운동의 독자성과는 별반 상관이 없었다. 물론 노사협력의 문화가 정착되면서 노동자들의 경영참여가 보장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노동의 자율성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오히려 노조는 부르주아의 축적 전략에 보수적으로 통합되어 있었을 뿐이다. 이와 같은 보수적 타협체제의 근원은 비스마르크까지 거슬러 올라간다.<br />
김상봉 교수의 분석에서 더 기가 막히는 것은 일본 법인기업에 대한 분석이다. 그는 일본 기업의 종업원 중심주의를 찬양한다. 일본 기업들은 오랫동안 헌신한 종업원에게 승진의 기회를 보장하고 종업원의 안정을 최고의 가치로 여긴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일본기업의 종업원 중심주의는 ‘정규직 노동자’에 한하여 그렇게 하고 있을 뿐이다. 일본 기업체계는 다층적인 하청체계를 통해 다수의 노동자들을 계층화시켰으며, 기업의 위기는 하청 노동자들을 조절함으로써 외부화했다.<br />
정규직은 기술적 신축성의 대상이 되고 비정규직 하청고용 노동자들은 산술적 신축성의 대상이 된 것이다. 이것이 그 유명한 도요티즘이다. 도요티즘의 린 생산방식은 1980년대 미국과 유럽으로 수입됐고, 이는 다시 세계로 번져 나갔다. 한국의 재벌체제의 하청 계열화와 비정규직화는 이런 도요티즘을 극단화시킨 것이다. 그 표준적인 사례가 동희오토와 같은 ‘꿈의 공장’이다. 정규직이 단 한 명도 없다는 점에서 꿈의 공장이다.<br />
김상봉 교수가 기이한 것은, 그가 진보신당 내에서 비정규직 투쟁을 가장 열심히 주장하는 분이라는 사실이다. 그런 분이 일본의 기업문화를 찬양하고 있다. 그 일본의 기업문화가 바로 린 생산방식, 노동의 불안정성을 세계적으로 수출하는 표준적인 모델이 되었는데 말이다.<br />
이런 기이한 주장을 할 수 있는 이유도 그가 현대 노동과정과 관련된 쟁점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이다. 기초적인 문헌 학습만 했어도 그는 린 생산방식이 일본에서 유래한 것이고, 이것이야말로 비정규직 확대의 모델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한국 기업들이 다른 모든 것은 일본을 따라하면서도 기업문화는 일본을 따라하지 않는다고 타박하는데, 한국 기업들이야말로 일본식 생산방식의 가장 반동적인 수입자들 중 하나이다. 너무 잘 따라 해서 문제이지 따라하지 않는 게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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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class="external" href="http://www.redian.org/index.php/archive/1920" title="http://www.redian.org/index.php/archive/1920"><strong>“마르크스 극복? 170년 전으로 퇴행”</strong></a> (레디앙, 남종석 진보신당 부산 동래당협 부위원장, 부산대 경제학 강사 / 2012년 5월 4일, 4:50 PM)<br />
<strong><font color="#0100fe">[비판과 모색] 김상봉 교수『기업은 누구의 것인가』 비판②</font><br />
4. 자본주의 극복인가 시장 예찬인가?</strong><br />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는 노동자의 경영권 장악으로 주식회사가 만남의 공동체가 되면 부르주아적 소유관계의 극복 없이도 자본주의는 극복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u class="underline">노동자가 기업의 경영권을 갖게 되면, 기업은 잉여가치 착취를 하는 공간이 아니라 노동자의 주체성이 실현되는 곳이 되며, 개별 기업들은 각자 자신의 판단에 따라 시장에 필요한 제품을 공급할 것</u>이라고 주장한다. 시장은 그대로 두되 기업 경영만 전환시키면 자본주의적 착취 질서는 극복될 수 있다는 것이다.<br />
시장을 보는 김상봉 선생의 시각은 매우 독특하다. 그에게 있어 “시장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는 장소”이다. 자유란 “타자와의 만남에서 한편에서는 수동적으로 당하고 받아들이면서도 그 작용에 능동적으로 응답할 때” 생겨나는 것이다. <u class="underline">시장은 “내가 타인의 결핍을 채워주는 대가로 나의 결핍을 채울” 수 있는 “수동성이 교환되는 장소”(73쪽)이기 때문에 자유가 생겨나는 공간</u>이라는 것이다. 개인들은 타인과의 만남을 통해서만 결핍을 충족시킨다는 점에서 시장은 나와 타자의 만남의 공간이자 자유 실현의 공간이 되는 것이다.<br />
그러므로 김상봉 선생의 입장에서 시장은 결코 사라져서는 안 된다. 시장이 존재한다면 경쟁도 사라지지 않는다. 그는 경쟁에서 실패할 경우 기업은 퇴출된다고 말한다. <u class="underline">노동자들이 경영하는 기업도 경쟁에 노출될 것이기 때문에 기업 생존을 위해서 노동자들은 잉여를 아무렇게나 처분하지 않고 기업의 유지 존속을 위해 합리적으로 사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장담</u>한다.(62쪽) 더 나아가 <u class="underline">노동력이 상품이 되는 사회적 질서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으며, 시장에서 화폐가 어떤 기능을 하고 있는가에 대한 분석도 없다. 노동력을 판매하고 화폐를 통한 교환은 자생적 질서의 일부인 것이다. 그가 문제 삼는 것은 오로지 경영권뿐</u>이다.<br />
김상봉 선생은 스스로의 입장은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사이에 있는 어떤 독특함으로 분류하고 있다. 누군가는 그를 두고 공산주의라고 비판하고 누군가는 그가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라고 비판하고 있다고 이 책에서 언급하고 있다. 그러면서 자신의 입장이 ‘새로운 길’(87쪽)이라고 평가한다. <br />
<strong>시장이 자유의 영역?</strong><br />
기업 경영권을 소유권으로부터 분리할 수 있다고 주장한 점에서 김상봉 선생이 ‘독창적’일지 몰라도 그가 그리고 있는 경제체제는 전형적인 시장 사회주의 체제로서 이미 많은 논자들이 주장해 왔던 것이다. 여기서 시장 사회주의란 중국과 같은 현실 경제체제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시장 사회주의란 사회주의 체제 속에서도 시장이라는 제도를 활용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런 이론적 조류는 매우 다양하다. 신고전파 이론가였던 왈라스와 랑게는 시장이 일반 균형 달성에 유리하다는 점에서 계획경제에서 활용할 수 있다고 했고, 분석마르크스주의 로머는 시장의 경쟁이 사회주의 체제에게 역동성과 혁신을 초래할 수 있다고 보았다.<br />
그러나 <u class="underline">시장 사회주의자들 어느 누구도 김상봉 선생처럼 시장을 ‘자유의 영역’이라고 치켜세우지 않는다. 그들은 시장이 사회주의 체제의 한계를 보조할 수 있다고 주장할 따름이지 시장 그 자체가 인간의 자유가 이뤄지는 곳이라서 시장이 유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u>.<br />
시장을 자유의 영역이자 자생적 질서의 공간이라고 찬양하는 자들은 신자유주의 경제학의 마두 하이예크이다. 하이예크는 『자유의 길』에서 시장이야말로 개인들의 자율적인 조정을 통해 만들어진 자생적 질서이기 때문에 인간 자유의 근원적 공간이라고 했다. 가장 반동적인 철학자나 시장을 자유의 영역이라고 떠들지 사회주의자들 중 어느 누구도 시장을 자유와 연결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김상봉 선생은 시장 사회주의가 어떤 모순을 안고 있는지 자문하지 않는다. 시장체계에서는 고정자본을 많이 투자한 기업(기술경쟁력이 우월한 기업)이 그렇지 못한 기업이 생산한 잉여를 영유한다. 평균이윤율을 매개로 경쟁력이 우월한 기업이 그렇지 못한 기업의 잉여노동을 가져가는 것이다.<br />
그러므로 다른 기업에게 부를 넘겨주지 않으려면 기업은 지속적으로 투자해야 한다. 노동자가 경영하든 누가 경영하든 시장경쟁은 기업으로 하여금 축적을 강제한다. 마르크스는 이를 ‘축적을 위한 축적’이라고 했다.<br />
<strong>김상봉식 독창성 또는 몽상</strong><br />
<u class="underline">노동자가 경영하는 기업도 경쟁에 노출되면 축적을 위한 축적에 참여할 수밖에 없다</u>. 더불어 파산하는 기업이 나올 것이며, 시장의 변동은 경기 순환을 만들어 낼 것이다. 축적을 위한 축적은 이윤율의 저하를 야기하고, 경제의 불안정도 지속될 수밖에 없다. 기업이 망하면 경영의 주체였던 노동자들은 실업 상태로 전락한다. 김상봉 선생이 제시하는 체제에서라면 이 모든 것들이 그대로 작용한다. 거기다가 경제학의 기초만 알아도 쉽게 추측할 수 있는 사적 생산과 사회적 실현의 모순에 대해서도 일체 언급하지 않는다. <u class="underline">김상봉 선생이 제시하는 체제는 경영만 노동자가 할 뿐이지 자본주의와 거의 같게 움직인다</u>.<br />
대부분의 시장사회주의자들은 이런 문제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를 두고 그들 나름의 해법을 제시한다. 로머는 중앙계획기구가 부를 공정하게 배분하여 독점이나 부의 편중을 원천적으로 봉쇄해야 한다고 했다. 여기서 로머의 주장에 동의하는가 그렇지 않은가는 쟁점이 아니다. <u class="underline">시장 사회주의자들은 시장의 모순을 어떻게 지양할 것인가를 두고 나름의 대안을 제시하려 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김상봉 선생은 자신이 시장사회주의 전통 속에 있다는 것조차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시장 사회주의의 고유한 모순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한다. 당연히 시장사회주의의 한계에 대한 자각도 없다</u>. 문헌 리뷰는 아예 없다. 기초적인 문헌 조사도 없이 그저 자신의 ‘몽상’을 서술하고 있을 뿐이다. 이게 김상봉식 독창성의 핵심이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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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ong>5. 이행의 길인가 과거로의 퇴행인가?</strong><br />
사회변화는 변혁 주체들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사회 모델을 제시한다고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변혁운동 진영은 새로운 사회가 어떠해야 하는가도 고민해야지만 이를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의 문제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김상봉 선생도 자신이 구상한 체제를 실현하기 위한 나름의 방안을 제시한다. 앞에서도 밝혔듯이 그는 노동자들이 경영권을 장악하고, 민주적 과정을 통해 사장을 선출하고, 노동자가 기업 활동에 주체적으로 참여함으로써 기업 속에서 민주공화정을 수립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br />
베를린 필과 같은 오케스트라도 지휘자를 선거로 선출하고, 지휘자와 연주자들이 서로주체성을 실현하고 있듯이, 기업이라고 공화정의 원리를 실현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u class="underline">“필요한 것은 단 두개의 법률 조항”이다. “주식회사의 이사는 종업원 총회에서 선임한다.” “주식회사의 감사는 주주총회에서 선임한다.”</u> 이 두 개가 법조항을 넣음으로써 주식회사의 노동자들을 회사의 노예에서 회사의 주권자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308쪽) 남은 일은 입법투쟁이다. 노동자 경영권을 법제화함으로써 노동자를 예속의 상태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br />
김상봉 선생은 명시적으로 언급하지 않지만 그의 <u class="underline">이행전략은 말 그대로 의회주의다. 노동자들의 예속을 반대하는 좌파들이 의회의 다수파를 장악하고, 노동자들에게 경영권을 부여하는 법률 두 조항을 입법화함으로써 노동자들은 자주성을 쟁취할 수 있다는 것</u>이다.<br />
<strong>국가의 계급성 무시</strong><br />
<u class="underline">김상봉 선생에게 있어 국가 그 자체는 중립적인 존재이며, 공화정의 구현체이다. 그에게 있어 국가의 계급성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u>. 인민들은 누구나 정치에 참여할 수 있고 권력의 주체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누구나 민주적 과정을 통해 권력을 장악할 수 있고 자신들의 이상을 법제화할 수 있다. <u class="underline">문제는 민주적 과정을 통해 대중들의 지지를 받는 것</u>이다. 다수 대중들이 좌파를 지지하기만 한다면, 우리는 노동자 경영권을 입법화할 수 있고 이를 통해 노동자들은 해방될 수 있다는 것이다.<br />
참으로 간단명료한 이행 전략이다. 사회체제가 이렇게 쉽게 바뀔 수 있다면 모든 활동가들의 우울증도 단번에 날려 버리겠다. 체제변화가 이렇게 쉬운데 고민할게 뭐가 있겠는가? 그러나 의회를 통한 이행이라는 게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다. 의회는 부르주아 국가 장치의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고, 의회권력은 부르주아 권력의 일부에 불과하다. 의회를 장악하는 것도 쉽지는 않지만 의회과정 자체가 부르주아의 소유권/경영권을 공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br />
2절에서 나는 부르주아의 소유권은 경영권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부르주아들은 결코 경영권을 노동자들에게 이양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u class="underline">만약 노동자들이 의회를 통해 기업 경영권을 공격하게 된다면, 부르주아들은 의회를 해산해서라도 노동자 계급의 요구를 파괴시켜 버릴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부르주아 국가의 계급성</u>이다. 더군다나 부르주아 국가에 대한 김상봉 선생의 이해는 조잡하다. 그는 대학에서 교수들이 대학총장을 선출하거나 오케스트라의 단원들이 지휘자를 선택할 수 있다면서 기업도 종업원들이 사장을 선출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u class="underline">마르크스는 음악에 대해 “전혀 무지하기 때문에”(106쪽) 교향악단 단원이 지휘자의 노예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비판</u>한다. 김상봉 선생은 기업의 운영체제와 대학이나 교향악단의 운영이 동일한 원리에 따라 작동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 스스로는 이것이 대단한 독창적인 발견처럼 쓰고 있다.<br />
<strong>대학과 예술단체는 이데올로기적 장치</strong><br />
그러나 마르크스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기업과 대학, 사장과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와의 관계를 잘 몰라서 사장을 민주적으로 선출하자는 제안을 하지 않은 것일까? 아시다시피 마르크스는 경제적 장치와 국가권력, 특히 이데올로기적 장치의 작동을 구별하여 분석했다. 경제가 잉여노동이 착취되는 체제의 토대라고 한다면,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는 체제의 재생산을 담당한다. 당연히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의 작동원리와 경제의 작동원리는 다르다. 경제는 생산과정에 대한 지배를 통해 구성되지만, 이데올로기적 장치는 참여와 자율성이라는 외피를 걸치지 않을 수 없다.<br />
그람시가 시민사회 내에서는 강제보다 헤게모니가 주요하게 작동한다고 주장한 것도 이를 두고 한 말이다. 헤게모니는 근본적으로 강제에 토대를 두고 있지만 윤리적 동의 또한 무시하지 않는다. 당연히 이데올로기적 장치에는 참여와 자율성이 보장된다. 그러나 경제는 그렇지 않다.<br />
<u class="underline">대학과 예술단체는 그것이 사적으로 소유된 것이든, 공적인 것이든 이데올로기적 장치이지 경제적 장치가 아니다. 부르주아들은 이 두 곳에서 대표가 자율적으로 선출되는 것을 허용하지만 그들의 계급적 이익의 토대가 되는 기업 조직에서는 결코 그와 같은 운영을 수용하지 않는다</u>. 대학교와 기업을 동일한 지반 위에 놓고 같은 원리가 적용될 수 있다는 김상봉 선생의 주장은 경제적 장치와 이데올로기적 장치가 다른 성격의 것임을 무시할 때나 가능한 것이다.<br />
경제의 작동원리와 문화의 작동원리를 다르게 분석한 것은 비단 마르크스주의만의 주장은 아니다. 뒤르켐이나 탈코트 파슨즈와 같은 주류 사회학자도 사회를 구별하여 기능을 분석했고, 위르겐 하버마스 같은 중도좌파 사회학자도 사회체제를 구분한다. 하버마스는 경제는 이익의 논리가, 행정은 권력의 논리가, 생활세계는 의사소통적 합리성의 논리가 작동한다고 보았다.<br />
<strong>사회작동 원리 차이 무시</strong><br />
부르주아 사회체제를 이렇게 구별하여 인식하는 것은 정치와 경제, 사회는 비록 하나의 구성체로 밀접히 결합되어 있지만 그들은 고유한 작용원리가 있기 때문이다. 이는 사회과학의 상식 수준에서도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이와 같은 작동원리의 차이를 무시하고 오케스트라와 기업을 동일한 수준에서 논한다면 과학이 될 수가 없다.<br />
김상봉 선생의 ‘참으로 순박한 이행전략’은 마르크스 이전의 사회주의를 연상시킨다. 로버트 오웬이나 생시몽주의자들은 부르주아들에게 사회주의 장점을 잘 보여주면, 누구나 사회주의가 더 우수한 체제인 것을 인식하고 그 과정에 동참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들은 사회관계 내에서 계급투쟁을 무시했으며, 근원적으로 폭력에 의존하는 부르주아 체제의 본질에 대해서는 무지했다. 언젠가 홉스봄은 ‘맑스, 엥겔스와 맑스 이전의 사회주의’라는 논문에서 이들 유토피아 사회주의자들과 마르크스를 구별하며, 마르크스주의는 적어도 두 부분에서 그 이전의 사회주의와 다른 질적 진보를 이끌어 냈다고 썼다. 하나는 마르크스가 경제를 과학적으로 분석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정치적 이행을 위한 구체적 전략을 제시하려 했다는 것이다.<br />
김상봉 선생은 마르크스의 경제학 비판에 대해 무지하다. 그의 정치적 이행전략은 유토피아주의자들만큼이나 단순하다. 그는 마르크스주의가 전혀 대안이 될 수 없다는 판단으로 인해 스스로 새로운 사회변화의 상을 제시하고자 했다고 한다. 그러나 <u class="underline">그가 제시하는 프로그램들은 마르크스주의에 한참 미달하는 조잡한 수준에 불과하다. 그는 시장경제의 고유한 모순에 대해서도, 자본주의적 노동과정의 본질에 대해서도 무지하다. 경제적 장치와 이데올로기적 장치를 동일한 수준에서 분석하고, 이행을 “단 두 개의 법률 조항”으로 대체한다</u>. 그 스스로는 마르크스를 극복했다고 주장하지만 나의 관점에서 보자면 그는 논쟁의 수준을 170년 전의 상태로 돌려놓고 있다는 느낌이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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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ong>6. 메타과학으로서의 철학?</strong><br />
어떤 주장이 독창성을 지니려면 해당 분야의 현대적인 쟁점들을 정확히 인식하고 그에 대한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이것이 가능하려면 해당 분야의 현대적인 논의들을 완전히 섭렵해야 한다. 박사학위 논문을 준비하는 학생들이 제일 먼저 하는 것은 문헌 리뷰이다. 자신이 다루는 분야의 쟁점은 무엇이고, 현대적인 논의가 어디에 도달해 있는가를 정확히 알아야 그 이상의 진전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학자라면 누구나 갖춰야 할 가장 기본적인 소양이다.<br />
김상봉 선생은 이 책에서, 책의 부제도 알려주고 있듯이 철학을 통해 자본주의를 뒤집는다. 그는 권력의 본질을 논하면서도 칸트를 언급하고(124쪽), 생물학의 한계를 이야기하면서도 칸트를 논하며(267쪽), 소유의 의미를 심오하게 분석한 것도 헤겔이라고 쓰고 있다. 그는 모든 것을 철학으로 환원하고, 철학적 논리 속에서 비판과 대안을 구성한다. 과학에 대한 그의 편견은 놀랍다. 그는 생물학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생물학은 다양한 생명체들이 보여주는 수많은 현상들을 분석하고 기술하려 할 뿐, 생명현상 또는 생명체를 하나의 통일된 원리 속에서 파악하려는 데는 별 관심이 없다.”<br />
그가 과연 어떤 생물학 저작을 읽었는지 의심스럽다. 몇몇 유명한 진화생물학의 저작들만 보아도 생명현상을 총체적으로 다루고 있음을 단박에 알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다루는 탁월한 대중적 과학 저작들만 해도 부지기수이다. 이들 대부분의 저작들은 생명체를 통일된 원리로 파악한다. 심지어 사회생물학은 생명현상만이 아니라 정치/사회/문화/윤리적 문제마저 생물학의 논리로 설명한다. 윌슨의 『통섭』은 이런 부류들 중 가장 급진적인 흐름을 대변한다. 나는 물론 윌슨류의 메타생물학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생물학이 생명체를 하나의 통일된 원리 속에서 파악하는데 관심이 없다는 김상봉 선생의 주장은 억측을 넘어 지적 편견일 뿐이다.<br />
<strong>억측을 넘은 지적 편견</strong><br />
그는 <u class="underline">철학을 메타 과학의 지위에 올려놓고 다른 과학을 재단한다. 철학이 경제학보다도 경제에 대해 더 잘 설명하며, 생물학보다도 생물의 본질을 더 잘 보여준다고 주장</u>한다. 그의 입장은 알튀세르가 『과학과 과학자들의 자생적 철학』에서 “철학의 이데올로기화”라고 비판했던 바로 그 이데올로기를 대변한다. 과학을 통제하고 과학 위해 군림하는 철학! 경제도, 정치도, 생물학도 철학으로 환원하여 재단하는 이런 지적 폭력을 해방을 추구하는 철학자가 자행하고 있다는 사실이 나로서는 의아할 따름이다.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그의 이해도 1930년대의 스탈린주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br />
그는 타자와의 만남이야말로 서로주체성이 실현되는 조건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 스스로는 철학의 타자인 과학을 만나지 않고 있다. 그가 <u class="underline">마르크스의 경제학 비판만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어도 이런 이상한 저작을 발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자기 동일성에 매몰된 존재, 홀로 주체성으로 고립된 존재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u>이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이다. 만남을 그렇게나 강조하는 철학자가 철학의 자궁 속에서만 웅크리고 있다는 사실은 정말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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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class="external" href="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530308.html" title="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530308.html"><strong>바보야, 문제는 기업의 민주화야</strong></a> (한겨레, 장정일 소설가, 2012.04.27 20:41)<br />
<strong><font color="#0100fe">[장정일의 독서일기]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 김상봉 지음/꾸리에·1만5000원</font></strong><br />
개인이 출자하거나 창업한 회사의 주인은 출자를 하고 창업을 한 본인이다. 그러나 허다한 주주가 출자를 한 주식회사는 누구의 것일까? 김상봉의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꾸리에, 2012)는 대표적인 법인 기업인 주식회사는 주식회사 자체에 인격이 부여되어 있으므로, 자연인이 자신의 인격을 타인에게 양도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로 어느 한 사람의 소유물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김용철 변호사의 <삼성을 생각한다>(사회평론, 2010)가 그 실상을 널리 폭로한 바와 같이, 주식회사의 외양을 띤 우리나라 재벌의 총수는 순환출자로 조성된 쥐꼬리만한 지분을 가진 지주회사를 통해 자기보다 더 큰 그룹 전체에 무제한의 경영권을 행사할 뿐 아니라, 왕국을 물려주듯이 자식에게 주식회사를 물려준다.<br />
주식회사는 공공재다. 그런데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오늘의 자본주의 양식을 대표하는 주식회사가 총수의 사유물이 됨으로써 거기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기업의 노예가 되었다. 지은이는 그것에 대한 해결책으로, 자금을 출자한 주주와 거기서 일하는 노동자를 소유권자와 경영권자로 분리할 것을 제안한다. 노동자의 경영권 법제화를 촉구하는 지은이의 가열한 주장은 “주주에겐 배당금을, 노동자에겐 경영권을!”이라는 전언 속에 온전히 담겨 있다. 여기에는, <u class="underline">기업이 국가보다 더 커진 오늘의 현실에서는 “정부가 아니라 기업을 민주화하기 위해 싸우는 것이야말로 지금 우리 시대의 진보적 과제”라는 지은이의 평소 신념이 반영되어 있다</u>. ‘삼성 공화국’이 은유가 아니라 실재라면, 그 공화국을 민주주의화해야 한다는 것이다.<br />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는 자본주의자나 사회주의자 모두에게 불편한 책이다. 우선 주류 경제·경영학자들은 주주들의 수가 너무 많아서 어느 특정인이 불가피하게 경영을 도맡게 된 것이라고 항변하면서, 노동자의 경영권 접수는 사유재산 침탈이라고 반박할 것이다. 또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주주에겐 배당금을, 노동자에겐 경영권을!”이라는 주장을 빼다 박은 조합주의적 수사로 치부하면서, 노동해방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국가적 기획에 의해서만 완수될 수 있다는 교조적 이론을 되풀이할 것이다.<br />
지은이는 양쪽의 비판을 어수룩이 넘기지 않는다. 먼저 주류 경제·경영학자들의 논리에 대해서는 우리나라 주식회사법과, 우리나라의 주식회사 구조와 운영 체계를 미국·독일·일본의 주식회사 체계와 세심히 비교하는 것으로 충분히 해명하고 있다. 또 마르크시스트의 비난에 대해서는, 자본주의의 극복이 노동자를 기업에서 해방시켜 국가의 월급쟁이로 만드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는 논리로 응답한다.<br />
1990년대부터 기승을 부렸던 신자유주의는 많은 사람들을 바보로 만들었다. 예컨대 신자유주의 초기에는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라는 회유와 협박에 못 이겨, 구조조정과 비일용직 양산을 용인했다. 그런데 신자유주의의 위세가 한풀 꺾이고 폐해가 드러나면서 거기에 대한 반동으로, ‘바보야, 문제는 정치야!’라는 담론이 유행처럼 번진다. 하지만 정치를 배제한 경제 담론이 우리에게 희생을 강요한 것처럼, 경제가 없는 정치 담론 역시 유권자를 동원하려는 정치인들의 ‘뽐뿌질’에 지나지 않는다. 더 이상 바보가 되고 싶지 않다면, ‘정치경제’에 대한 동시 접근이 필요하다.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는 그것을 해낸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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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class="external" href="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03231954525&code=960308" title="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03231954525&code=960308"><strong>“주주가 회사 주인이며 경영권 갖는다는 건 만들어진 믿음”</strong></a> (경향, 황경상 기자, 2012-03-23 19:54:52)<br />
<strong><font color="#0100fe">ㆍ‘기업은 누구의…’ 김상봉 교수</font></strong><br />
‘사장을 노동자가 뽑으면 안되는가?’ 김상봉 전남대 교수(52)가 펴낸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꾸리에)의 문제의식은 간명하다. 다만 갸웃거림을 넘어 비난까지 들을 게 뻔하다. 그 스스로도 “불가능하다는 논거를 더 열심히 찾았다”고 썼을 정도다. 그럼에도 주류 경제학자들조차 노동자의 경영권 행사를 처음부터 부정하는 이는 없었다. 역사적·법적·철학적 분석을 통해 그가 내린 결론은 “주식회사의 주인이 주주이며 그들에게 경영권을 줘야 한다는 믿음은 만들어진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br />
김 교수는 지난 17일 전화 인터뷰에서 “오늘날 우리는 정치적으로는 자유로운 시민이지만 경제적으로는 기업의 노예”라며 문제제기의 배경을 설명했다. 우리 시대는 노동이 임금벌이를 넘어서 ‘사회적 존재’를 결정하고 있다. 국가는 날로 세계화하고 있는 기업을 통제하기에 역부족이다. 되레 ‘기업국가화’되고 있는 현실에서 민주주의는 후퇴하기 마련이다. 세상에서 가장 ‘독재적인 조직’인 기업의 문화가 사회로 배어든다는 것이다.<br />
“신자유주의, 나아가 자본주의를 극복하자고 하지만 구체적인 방법은 없어요. 마르크스-레닌의 상상력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건 생산수단의 국유화 같은 실패한 정책을 되풀이하는 셈이죠. 반면 복지 모델은 자본주의의 모순에 손대지 못하는 한계가 있습니다.”<br />
김 교수는 차라리 ‘공장’을 ‘공화국’으로 만들어 나가자고 제안한다. 외부의 통제보다 내부를 민주주의화하는 전략이다. 이미 1985년 정치학자 로버트 달은 노동자들이 집단 소유·운영하는 ‘자치 기업’을 제안했다. 최근에는 협동조합의 가능성에 주목하는 이들도 많다. 김 교수는 노동자가 대규모 기업을 인수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모든 기업이 협동조합이 될 수도 없다는 점에서 이들과 거리를 둔다. 그러면서 일반 주식회사 자체를 노동자들이 경영해야 한다는 논지를 전개한다.<br />
이는 ‘사유재산 부정’이 아니다. 동네 식당처럼 개인 출자 기업이라면 소유권을 인정해야 하지만 주식회사는 다르다는 생각이다. 간단한 몇 가지 사실로도 주주가 주인이라는 신화는 깨진다. 우선 <u class="underline">주주가 납입한 자본은 회사로부터 되돌려받을 수 없다. 재산권도 행사할 수 없는데 과연 ‘소유’라 볼 수 있는가. 게다가 1인이 모든 주식을 소유한 주식회사라도 주주는 투자금 외에 어떤 책임도 지지 않는다. 주주는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물질’로 기업이라는 공동체에 참여할 뿐이다. 이 무책임함에 ‘소유’를 인정할 수 없다는 것</u>이다.<br />
나아가 김 교수는 <u class="underline">주식 소유와 기업의 경영권 사이에 필연적 관계가 없다</u>고 말한다. <u class="underline">주식회사가 주주만의 것이라면 국가가 공공성을 고려해 이해관계도 없고 주주도 아닌 사외이사를 두게 하는 것도 비상식적</u>이다. 결국 김 교수는 <u class="underline">주식회사라는 법인은 ‘법적 인격체’이므로, 인격체를 누군가 소유하거나 지배할 수 없듯 소유·지배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법으로 주주들이 주인 행세를 할 수 있도록 규정했지만 기만에 불과하다</u>는 것이다.<br />
김 교수는 “절대다수의 주주들은 기업 경영에 아무 관심이 없고,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대다수의 회사는 “주식회사라는 옷을 걸치고 있지만 실제로는 개인 소유의 기업”으로 남게 된다. 극히 작은 비율의 주식을 소유하고도 이건희 회장은 78개 거대 기업집단의 ‘오너’로 전권을 행사한다. 법적 등기이사가 아니어서 경영 실패에 책임도 지지 않는다. 독재자보다 나은 지위다.<br />
김 교수는 주식회사라는 공동체에서 ‘물질’로 남아버린 주주가 몸이라면 노동자야말로 활동하는 주체라고 말한다. 주주가 움직이기 위해서는 노동자에게 의존해야 한다. 아니면 또 다른 ‘이건희’가 주식회사를 사유화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주주가 노동자와 서로를 통해 주체성을 확립할 때만 건강한 상태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실현은 간단하다. ‘주식회사의 이사는 종업원 총회에서 선임한다’는 단 하나의 법률 조항만이 필요하다. 주주는 배당금을 받고 노동자는 경영을 이끈다.<br />
이런 논지의 바탕에는 만남이 주체성을 형성한다는 김 교수의 ‘서로주체성’ 철학이 있다. 김 교수는 소유를 늘려야만 자유가 커진다는 신자유주의, 사적 소유의 철폐만이 자유를 가져온다는 마르크스주의를 모두 부정한다. ‘기업’을 소유하지 않아도 ‘자기통제’만으로 노동자는 자유로워질 수 있다.<br />
독일과 일본은 이미 ‘노동자 경영’이라고 부를 수 있는 제도나 관행이 있다. 김 교수는 <u class="underline">노동자 기업이 당장의 임금과 복지 지출로 고갈돼버릴 것이라는 주장도 편견이라 본다. “시장 경쟁 속에서 자신의 목줄을 죌 리 없다”는 것이다. 파산 뒤 노동자들이 인수해 키워낸 키친아트 같은 기업이 모범을 보여준다. 그는 일단 공기업에서부터 노동자 경영을 실천해보자고 제안한다</u>.<br />
이번 책에는 ‘거리의 철학자’로 불리며 거대 재벌과 투쟁을 벌여온 김 교수의 삶이 녹아 있다. 그에게 철학과 경제는 따로 떨어진 것이 아니다. “지금은 경제가 모든 삶의 철학이 돼버렸는데 우리 삶의 총체적 방향성을 제시하는 것은 다시 철학이 돼야 합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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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class="external" href="http://news.hankooki.com/lpage/culture/201203/h2012032321575984210.htm" title="http://news.hankooki.com/lpage/culture/201203/h2012032321575984210.htm"><strong>"사장을 노동자가 뽑으면 안되나" 철학자, 주식회사를 사유하다</strong></a> (한국, 김범수기자, 2012.03.23 21:57:59)<br />
<strong><font color="#0100fe">김상봉 전남대 철학과 교수 "유한 책임만 지는 주주는 주식회사의 소유주가 아니다 주주엔 배당금, 노동자엔 경영권"<br />
재벌이 장악한 한국 현실 감안 공기업 사장 선출권 우선 도입 등 당장 실현가능한 방법 제안</font></strong><br />
1960년 경동산업으로 출발한 키친아트는 알려진 대로 숟가락이나 국자 같은 주방용품을 전문으로 생산하는 기업이다. 프레스 작업 중심이어서 일 하다가 손가락이 잘려나가는 산업재해가 많은, 한국의 열악한 노동 현실을 대변하는 이미지를 가진 기업이었다. 양식기로 제법 돈을 번 이 회사는 자동차 부품, 종이컵 제조 등으로 투자를 확장했다가 경영전략이나 재무관리 부재로 2000년에 법정관리에 들어가고 말았다. 파산 당시 빚만 1,000억원. 이 회사를 노동자들이 체불임금과 퇴직금, 위로금 등을 모아 76억원에 인수해 주식회사 키친아트로 새 출범시켰다. 노동자 기업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공동소유, 공동책임, 공동분배'를 사훈으로 내건 이 회사는 그 뒤 매출 700억원대의 탄탄한 기업으로 성장했고 해마다 주식 배당금 10%를 사회에 환원한다.<br />
자본주의 기업의 소유와 경영 문제를 재검토한 김상봉 전남대 철학과 교수의 이 책을 한국 재벌기업의 1인 전횡 구조를 비판하거나 협동조합 같은 식의 노동자 경영 참여를 모색한 책으로 지레 짐작했다. 책의 앞부분에 키친아트 사례 같은 것이 나와서 더욱 그랬다. 하지만 저자가 노동자의 경영 참여를 검토한 뒤 강조하는 것은 그것이 협동조합처럼 노동자의 삶의 질 개선에 '필요'한 것이 아니라 '당위'라는 사실이다.<br />
저자의 질문은 '경영자를 왜 노동자가 직접 선출하면 안 되는가'에서 출발한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선거로 국민의 이해를 대변할 의원을 뽑고 대통령을 선출하듯, 기업의 구성원인 노동자가 경영자를 뽑아서 안 될 이유는 무엇인가.<br />
<u class="underline">문제의 핵심은 '소유권'이었다. 물건을 가진 사람이 그것을 이용할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 당연하듯, 기업을 가진 사람이 회사를 경영하는 것은 마땅하다. 중요한 것은 지금 자본주의 사회를 지탱해가는 물적 토대라고 할 수 있는 주식회사에 이 같은 상식을 적용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주식회사는 주주의 자본금 납입으로 설립되지만 등기를 마침과 동시에 그 자체로 하나의 법적인 인격체가 된다. 노예사회가 아닌 이상 한 인간을 다른 인간이 소유할 수 없듯, 주식회사 역시 누구에게 소유되는 대상이 아니라 그 자체로 '주체'라는 것</u>이다.<br />
이를 법적으로 뒷받침하는 것이 주식회사의 소유주로 흔히 착각하는 주주의 유한 책임이다. 식당이 망하면 주인이 가게 인테리어며 임대를 위해 은행에서 빌린 대출금을 어떻게든 갚아야 한다. 하지만 주식회사는 망해도 주주가 그런 책임을 지지 않는다. 주주는 기업이 잘 되면 주가 상승의 이익이나 배당금을 받고 못 되면 주가 하락에 따른 손실을 볼 뿐이다. 더구나 주주 경영권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이유는 기업이 크면 클수록 주주의 다수가 주가를 통한 이익 실현에만 관심이 있지 실제 경영에는 무관심하기 때문이다.<br />
저자의 말대로 주식회사가 '오늘날 우리의 삶을 가장 본질적으로 규정하는 지평'이라면, 그것이 '일종의 유기체이면서 구성원들이 서로를 도구로 활용하면서 동시에 목적으로 대접하고 다시 그들이 하나의 공동의 목적을 추구하는 통일성을 실현하는 조직'이 되어야 한다면, 이런 주주를 기업의 주인으로 믿고 그들에게 경영을 맡기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는 <u class="underline">'생각하는 주주가 주식회사의 몸이라면 노동자는 활동하는 주체'라고 규정한다. 협동조합처럼 굳이 노동자가 주주가 되지 않더라도 주식회사의 경영권은 주체인 노동자가 가져야 한다는 것</u>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자본의 사적 소유를 국가 소유로 전환하려는 마르크스의 기획에도 반대한다.<br />
책에서 삼성을 대표 사례로 꼽아 신랄하게 고발하듯 미국식 주주자본주의에다 봉건적 의식에 사로 잡힌 재벌이 장악하고 있는 한국의 현실 앞에서 그의 주장은 언뜻 공허하게도 느껴진다.<br />
그래서일까. 노동자가 기업의 주체가 되기 위해 '주식회사의 이사는 종업원 총회에서 선임'하고 주주와 함께 활동의 주체가 되기 위해 '주식회사의 감사는 주주 총회에서 선임한다'는 상법 개정을 최종 목표로 하면서도 저자는 당장 실현가능한 방법들을 제안한다. 우선 <u class="underline">공기업 사장 선출권을 노동자들에게 위임하고 원칙적으로 법인이 운영하는 기관은 그 기관에 소속되어 일하는 종업원들이 기관장을 선출하도록 하는 것이다. 주식회사의 경우도 성격상 공익적인 회사에서는 노동자 경영권을 도입한다. 대표적인 기업으로 요즘 파업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언론사를 꼽았다. 기관투자가들이 주주권을 행사해 노동자 경영권 도입을 앞당기는 방법도 생각해 볼 수 있다고 한다</u>. 노동자들의 유보된 임금이라고 할 수 있는 연기금이 어떤 기업의 최대주주라면 그것은 실질적으로 익명의 노동자들이 최대주주라는 말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br />
독일에서 철학을 공부한 그가 아리스토텔레스며 칸트의 철학 이론과 법학, 경제학의 논리를 다양하게 인용해가며 펴는 이런 논리 전개에 실은 모델이 있었다. 베를린 필 같은 세계 수준의 교향악단들이다. 그 조직은 주식회사든, 재단법인이든 단원들이 통치하는 작은 공화국이라고 한다. 지휘자를 선출하는 것도 물론 단원들이다. 교향악단의 이윤을 창출하는 핵심적인 존재인 단원이 주체가 되는 이런 체제에 아무도 불만을 제기하지 않는다. 주식회사가 교향악단처럼 운영되면 안 될 까닭 역시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인다. '만약 주식회사가 이런 오케스트라가 될 수 있다면, 우리가 사는 세계의 진리가 가장 탁월하게 표현되고 실현되는 장소라면, 모든 주식회사가 오케스트라가 된다는 것은 이 세계에 넘쳐 흐르는 고통스런 신음소리가 아름다운 음악소리로 바뀐다는 것을 의미하는 일일 것이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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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class="external" href="http://newjinbo.org/n_news/news/view.html?no=696" title="http://newjinbo.org/n_news/news/view.html?no=696"><strong>재벌 개혁, 하려면 진보신당처럼</strong></a> (진보신당 정책위원회, 2012/03/27 09:24) <br />
총선 시작하기 전, 새누리당까지 포함해서 모든 정당이 재벌을 개혁하겠다고 목소리를 높였었다. 진보정당만의 주장처럼 되어 있던 ‘경제 민주화’가 모두의 구호가 되었다.<br />
하지만 막상 총선 공약으로 나온 것을 보면, 실망스럽기 그지없다. 새누리당 공약은 굳이 길게 언급할 필요도 없겠다. ‘경제 민주화’라는 거창한 표제 아래 담긴 내용은 “대기업의 무분별한 중소기업 사업영역 진출방지” 정도가 고작이다. 공약으로 낼 것도 없이 지금 당장 정부, 여당이 해야 할 일들을 생색내듯이 나열할 뿐이다.<br />
민주통합당은 이런 새누리당을 비판하면서 “출자총액제한제도 재도입, 순환출자 금지, 금산분리 강화 등”을 공약한다. 이러한 공약은 민주통합당이 바라보는 재벌 문제의 핵심이 무엇인지 잘 보여준다. 그것은 총수 일가가 자신들이 실제 소유한 주식 지분보다 훨씬 더 많은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따라서 해결책은 모든 주주가 자신이 소유한 지분만큼만 영향력을 행사하게 하는 것이다. 즉, ‘1주 1표’의 주주자본주의 질서를 철저히 확립하는 것이다.<br />
지난 2월에 통합진보당 이정희 대표가 발표한 ‘맞춤형 재벌개혁 로드맵’도 민주통합당의 시각과 크게 다르지 않다. 각 재벌 그룹에 대해 맞춤형 처방을 내놓는다고는 하지만, 일관된 것은 민주통합당과 마찬가지로 “출총제 부활, 순환출자 금지 등”을 통해 재벌의 경제집중력을 억제하겠다는 것이다. 이정희 대표의 방안이 실현된다면, 10대 재벌 그룹은 해체되고 총수 일가는 다른 대주주와 마찬가지의 지위가 된다. <br />
민주통합당 공약이나 이정희 대표 로드맵은 새누리당 공약에 비해서는 ‘재벌 개혁’이라 할 만한 측면이 있다. 재벌 권력에 손을 대겠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모든 ‘재벌 개혁’이 곧 ‘경제 민주화’는 아니라는 점이다. 이들의 방식대로 하면, 재벌 권력은 약화되는 대신 전체 대주주 집단의 권력은 더욱 강화된다. 즉, 주주자본주의가 강화된다.<br />
우리가 흔히 ‘신자유주의’라고 부르는 경제 현실의 미시적 기초가 되는 기업 단위 질서가 주주자본주의다. 위의 ‘재벌 개혁’안들은 경제 민주화가 아니라 신자유주의 강화의 통로가 되고 말 것이다.<br />
최근의 ‘재벌 개혁’론에 대한 장하준 교수의 다음과 같은 비판은 이러한 맹점을 짚고 있다. “재벌, 특히 삼성은 참 나쁘다. 자식들에게 편법 상속을 했고, 우리 사회 엘리트들을 매수했다. 여기에 대해선 법에 따라 단호하게 처벌을 해야 한다. 하지만 삼성그룹을 해체하자는 주장은 동의할 수 없다. 그렇게 되면, 삼성 계열사의 주인이 누가 되나. 국가가 주인이 된다면, 그건 차라리 낫다. 하지만 실제론 해외 투기자본이 주인이 될 게다.” (장하준 교수 인터뷰, <프레시안> 2012. 3. 25.)<br />
그렇다면 ‘어떤’ 재벌 개혁이어야만 하는가? 진보신당은 ‘탈삼성 공약’을 통해 그 대안을 제시한다. <u class="underline">삼성을 비롯한 재벌 대기업에서 이사의 절반 이상을 노동자가 뽑자는 것이다. 그래서 총수 일가의 전횡도 아니고 주주들의 ‘1주 1표’도 아닌 노동자의 ‘1인 1표’로 운영하는 기업을 만들자는 것</u>이다. 이러한 공약은 재벌 문제에 대한 진보신당의 독자적 진단에서 비롯된다. 재벌 문제의 밑바탕에는 주식회사의 근본 구조가 있다. 주식회사 본래의 문제가 한국적 형태로 나타난 게 바로 재벌 문제다.<br />
<u class="underline">주식회사는 주인 없는 사회적 자산이다. 그런데도 자본주의 법체계는 이 사회적 자산의 경영권을 주주라는 특정 집단에게 맡긴다. 하지만 주주는 사실 일종의 채권자에 불과하다. 이들에게는 경영의 의지도, 능력도 없다. 그러다보니 실제로는 대주주들의 묵인과 담합 아래 소수 과두 세력이 기업을 지배한다</u>. 한국에서는 이 과두 세력이 총수 일가로 나타날 뿐이다. <br />
최근 출간된 김상봉 진보신당 상상연구소 이사장의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꾸리에)는 이러한 진보신당의 재벌관을 깊이 있게 정리한다. 그 몇 구절이다. “[이건희 일가가] 대규모 기업집단을 단돈 41억 원으로 지배할 수 있게 해주는 나라가 이 나라이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지극히 역설적인 일이지만 주식회사에는 처음부터 주인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무나 주인일 수 있는 것이다.”(221쪽)<br />
<u class="underline">“주식회사에서 활동의 주체는 노동자들이니, 오직 노동자들만이 주식회사의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주체일 수 있다. (중략) 그렇다면 더 무슨 말이 필요한가? 주식회사를 참된 의미의 생산 공동체로 만들기 위해 이제 우리에게 남은 과제는 노동자들에게 주식회사의 주체성을 돌려주는 일만 남았다. (중략) 필요한 것은 단 하나의 법률조항이다. - 주식회사의 이사는 종업원 총회에서 선임한다.”</u>(307-308쪽)<br />
이사회의 다수를 노동자들이 선출하자. 노동자야말로 그 기업의 장기적인 생존과 발전에 가장 깊은 이해관계를 지니고 있고 따라서 책임의 주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필요하다면, <u class="underline">이와 함께 다른 이해관계자들, 즉 소비자, 지역사회, 유관중소기업(하청업체 등) 대표들도 이사회에 참여할 수 있을 것이다. 주식회사의 기업지배구조가 이렇게 바뀌면, 주주의 독점권이 약화되면서 동시에 재벌의 권력도 자연스럽게 해체</u>되지 않을 수 없다.<br />
물론 몇몇 ‘진보적’ 재벌 개혁안은 노사공동결정제를 언급하기도 한다. 하지만 먼 미래의 과제로 미뤄두거나 혹은 출총제 재도입, 순환출자 금지 등에 따르는 보완책 정도로만 제시한다. 이에 반해 진보신당은 주장한다. 노동자 경영권이야말로 재벌 개혁의 몸통이고 가장 먼저 추진되어야 할 과제라고. 순환출자 금지 등은 오히려 이것이 실현되는 과정에서 이를 보완할 수단일 뿐이다. <br />
바야흐로 ‘재벌 개혁’의 백가쟁명의 시대다. 하지만 같은 ‘재벌 개혁’ 구호 아래서도 나머지 정당들과 진보신당 사이에는 이러한 차이가 존재한다. 한 마디로, 신자유주의 ‘이후’의 시대를 열어가기 위해 지금부터 과연 무엇이 가장 필요한지에 대한 입장 차이이다. 그리고 이것은 이번 총선에서 유권자들이 진보신당을 눈여겨볼만한 충분한 이유가 된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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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class="external" href="http://www.hani.co.kr/arti/culture/religion/525524.html" title="http://www.hani.co.kr/arti/culture/religion/525524.html"><strong>주식회사 경영권 주체는? 철학자의 대답은 ‘노동자’</strong></a> (한겨레, 최원형 기자, 2012.03.27 20:39)<br />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업, 특히 주식회사는 이제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삶의 장소다. 그러나 이윤을 만들어내는 도구로서의 가치만이 주목받았을 뿐 이 장소의 본질에 대해서는 따져물은 사람이 거의 없었다.<br />
철학자 김상봉 전남대 교수가 최근 펴낸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는 철학자의 눈으로 주식회사의 본질을 파고들어간 책이다. 공화국의 이상을 강조해온 지은이는 우리 삶을 지배하는 공간인 주식회사가 ‘공동체’가 되어야 할 필요성을 강조하고, 민주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이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을 선출하듯 주식회사에서 노동자가 사장을 선출할 수 있는 근거들을 따지고 들어간다.<br />
사실 많은 사람들이 주식회사의 주인은 주주라고 생각하고, 기업의 소유와 경영은 같은 것으로 치부한다.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해결하겠다는 사람들도 국가가 소유권을 넘겨받도록 하거나, 노동자들이 소유권을 갖게 하는 등 기업의 소유관계를 변화시키는 데에서 그 방법을 찾곤 한다.<br />
그러나 철학자인 지은이는 소유를 통해서 자유를 확보하려는 생각에 비판을 가한다. “많은 사람들이 기업의 주인을 바꿈으로써 자본주의의 모순을 해결하겠다는 유혹에 빠지는 까닭은 인간의 자유가 소유에 기초한다는 전제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 그가 볼 때 자유는 사물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활동을 스스로 규정할 수 있는 능력과 권리를 의미한다. 그는 이로부터 노동자의 자유를 위해서 요구되는 것은 기업의 소유권이 아니라 경영권이라는 명제를 도출해낸다.<br />
그렇다면 경영권은 소유의 대상이 될 수 있는가? 일반적으로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업을 개인적으로 소유할 수 있다는 인식은 경영권도 마찬가지로 소유할 수 있다는 인식을 이끌어낸다. 삼성그룹의 경영권이 3대째 세습되는 이유도 이른바 ‘오너’들이 소유한 지분에 근거한다. 그러나 지은이는 주식회사가 과연 사사로이 소유할 수 있는 대상인지 따져묻는다. 개인이 차린 식당이 그의 소유물인 것과는 다르게 주식회사는 사람의 결합체가 아닌 자본의 결합체로서 ‘법인격’을 부여받은 주체이기 때문에, 그 누구의 소유물도 될 수가 없다고 한다.<br />
지은이는 이로부터 ‘주주 경영권’을 배격하고 ‘노동자 경영권’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생산활동은 언제나 노동자의 몫이기 때문에 노동자만이 회사가 다치면 함께 고통받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주체일 수 있다는 것. 이에 따라 그는 “주식회사의 이사는 종업원 총회에서 선임한다”는 단 하나의 법률조항만 도입하더라도, 주식회사를 참된 의미의 생산공동체로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한다. 여기에 주주들의 목소리를 반영하기 위해 “주식회사의 감사는 주주 총회에서 선임한다”는 조항을 덧붙일 수 있다고 한다. 지은이는 이런 논의를 ‘주주에겐 배당금을, 노동자에겐 경영권을’이란 한마디로 압축할 수 있다고 말한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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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class="external" href="http://www.segye.com/Articles/NEWS/CULTURE/Article.asp?aid=20120330021835&subctg1=&subctg2=" title="http://www.segye.com/Articles/NEWS/CULTURE/Article.asp?aid=20120330021835&subctg1=&subctg2="><strong>주주자본주의 문제점 조목조목 지적</strong></a> (세계일보, 박종현 기자 <a href="http://gimche.springnote.com/pages/mailto:bali@segye.com">bali@segye.com</a>, 2012.03.30 17:10:57)<br />
<strong><font color="#0100fe">기업은 누구의 것인가―철학 자본주의를 뒤집다/김상봉 지음/꾸리에/1만5000원</font></strong><br />
선거를 앞두고 너도나도 ‘재벌개혁’을 내세운다. 그러나 선거가 끝나면 또다시 독자들은 실망할 것이다. 전남대 철학과 교수인 저자가 ‘주주자본주의’를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한다. 저자는 15.9%의 지분을 가지고 오너로 군림하는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예를 들면서 주주자본주의 문제점을 지적한다.<br />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밀턴 프리드먼은 “기업은 기업을 소유한 주주들의 도구일 뿐”이라고 했고,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의 석좌교수인 마이클 젠슨과 도널드 츄는 “경영자들의 목적은 그 기업을 소유한 주주들의 목적과 자주 충돌한다”고 했다. 이들은 모두 주주들이 기업을 소유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는 듯 전제하고 있다. 이들이 설파하는 주주자본주의의 교리는 미국이나 이를 추종하는 한국사회에서 오랜 시간 종교와도 같은 위력을 발휘해 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누가 주식회사의 주인이 누구냐고 물으면 마치 당연한 듯이 주주들이 주인 아니냐고 반문한다.<br />
영·미권에서 학위를 받은 한국의 경제학자들 역시 이 주주자본주의 체제를 불변의 현상으로 간주한다. 당연한 반응이다. 저자는 “이들은 체제 내의 경제운용에만 관심을 가질 뿐 그 체제가 만들어내는 모순과 파행을 극복해야 할 필요성도 가능성도 인정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이들이 국가의 경제정책을 결정하고 주도해온 탓에 이 나라는 기업 특히 재벌 기업 지배국가가 돼 버렸다고 비판한다.<br />
저자는 “무릇 모든 위대한 사고는 무심히 지나쳐온 ‘상식적인 현실’로부터 시작된다. 자본주의 경제학은 물론이고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도 정면으로 묻지 못했던 자본주의 내부로부터 자본주의의 극복의 길 찾기를 시작하자”고 촉구한다. “기업을 참된 의미의 생산 공동체로 만들기 위해 노동자들에게 경영권을 돌려주는 일이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하나의 법률조항, 바로 이것이다. 주식회사의 이사는 종업원 총회에서 선임한다는 것이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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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class="external" href="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50120330113216" title="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50120330113216"><strong>삼성 회장 선거로 뽑는다면, 이건희 아닌 ○○○가 주인!</strong></a> (프레시안, 장석준 진보신당 상상연구소 부소장, 2012-03-30 오후 5:26:37)<br />
<strong><font color="#0100fe">[장석준의 '적록 서재'] 김상봉의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font></strong><br />
1990년대 초에 나온 <우리 시대의 사회주의 당>(민맥 펴냄, 1993년)이라는 책이 있다. 저자는 '민중회의'라는 좌파 정치 조직에서 활동하던 김종박이었다. 이 책의 요지는 1992년 백기완 민중 후보 운동의 성과를 모아 사회주의 지향의 진보 정당을 건설하자는 것인데, 흥미로운 것은 '사회주의'에 대한 설명 방식이었다.<br />
김종박은 이 책에서 '사회주의'를 "국민이 대통령을 투표로 뽑듯, 노동자가 사장을 투표로 뽑자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사회주의=프롤레타리아 독재+국유화'라고 이해되던 당시로서는 사뭇 파격적인 주장이었다. 관련된 몇 구절을 인용해보자.<br />
"우리 당이 주장하는 재벌 회사의 공장을 노동자에게 맡기자는 말은 무엇인가? 말 그대로다. 그 기업의 대표를 노동자들이 직접 뽑자는 것이다." "기업보다 더 큰 게 나라다. 나라의 대통령도 국민이 뽑는다. 그래도 나라는 잘 유지되고 있다. 하물며 재벌 회사의 대표를 공장 노동자들이 뽑는 것은 대통령을 뽑는 것보다 쉬운 일이다."<br />
아쉽게도 김종박의 이런 주장은 새로운 사회주의관으로 발전하거나 현실 운동과 결합되지는 못했다. 한때의 기발한 선전 아이디어 정도로만 사람들 뇌리에 남았다. 그럴 수밖에 없기도 했다. 1992년 대선 이후, 한국의 진보 세력에게 자본-노동 관계의 근본적 변화는, 점점 더, 현실 정치 의제가 될 수 없는 먼 미래의 이상이 되어갔으니까.<br />
그리고 20여 년이 지나고 나서, 난 한 권의 문제작과 마주하고 있다. 김상봉(전남대학교 철학과 교수, 진보신당 상상연구소 이사장)의 신간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꾸리에 펴냄)가 그 책이다. 1980년대 사회과학 서적을 연상시키는, 거의 디자인이라 할 것이 개입되지 않은 흑백 표지가 이 책의 민낯이다. 그리고 이 표지 하단에는 단정적인 어조의 한 문단이 구호처럼 선명히 박혀 있다. <u class="underline">"기업을 참된 의미의 생산 공동체로 만들기 위해서는 노동자들에게 경영권을 돌려줘야 한다. 이를 위해 많은 일을 할 필요는 없다. 필요한 것은 하나의 법률 조항, 바로 이것이다!-주식회사의 이사는 종업원 총회에서 선임한다."</u><br />
<strong><img src="http://image.pressian.com/images/2012/03/30/50120330113216.JPG" style="MARGIN: 0px 1em 0px 0px; FLOAT: left" />철학, 주식회사를 뒤집다</strong><br />
김상봉은 철학자다. 전공은 칸트 철학이지만, 서양 철학 전반에 대한 근본적 비판을 통해 독창적인 사유 체계를 발전시켜온 우리 시대의 사상가다. 그는 서양 철학의 주체 개념을 '홀로주체성'이라 비판적으로 정리하면서 그 대안으로서 '서로주체성' 개념을 탐색해왔다. 이러한 사색 작업에서 그의 주된 영감의 원천은 서양 철학자들보다도 오히려 함석헌의 '씨알' 사상 그리고 한국 근현대사의 민중 투쟁이었다.<br />
그런 그에게는 별명이 있다. '거리의 철학자'. 실제로 그는 왕성한 실천가다. 이미 오래 전부터 '학벌 없는 사회'라는 교육 운동 단체를 만들고 키우는 데 앞장서왔다. 게다가 진보 정당 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여 진보신당의 강령 제정 작업을 주도했고 지금도 그 부설 연구소 이사장을 맡고 있다.<br />
그래서 철학자인 그가 주식회사, 기업 지배 구조, 노동자 경영권 등을 다루는 신간을 낸 것이 아주 낯설게만 느껴지지는 않는다. 특히 김상봉은 최근 몇 년 새 '삼성 공화국'의 현실을 비판하고 그에 맞서 싸우는 일의 최전선에 서 있었다. 이런 사정을 잘 아는 이들이라면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가 지난 몇 년간 그의 삶의 궤적에서 필연적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던 저작이라고 느낄 법하다.<br />
그런데 이것은 영 틀린 짐작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정확한 것도 아니다. 저자는 이 책에서 전개하는 사유의 발단이 반(反) 삼성 운동보다 훨씬 오래된 것임을 밝힌다. 한국에서 대통령 직선제가 쟁취되고 뒤이어 노동자 대투쟁이 폭발한 1987년에 당시 독일 유학 중이던 김상봉은 다음과 같은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졌다고 한다. "공장의 폴리스(polis)화. 폴리스로서의 공장. 즉, 하나의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단위로서의 공장. 이때만이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 왜 사장은 선거를 통해 뽑으면 안 되는가?"<br />
"왜 사장은 선거로 뽑으면 안 되는가?"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는 분명 반 삼성 운동 등의 정세로부터 촉발된 것이기는 하되 그 뿌리는 1987년의 거대한 투쟁들의 여진 속에서 솟아난 이 물음에 있다. 그 해 이후 한국의 민주화가 먹은 나이 꼭 그만큼의 세월과 함께 숙성된 물음인 것이다.<br />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의 제1장 제목 자체가 "바보 같은 물음-사장을 노동자가 뽑으면 안 되는가?"이다. 제1장은 이 질문을 던지면서 또한 이 질문의 답을 얻으려던 과정에서 저자가 맛본 실망과 좌절에 대해 토로한다. 저자가 보기에 카를 마르크스를 포함한 기존 좌파 이론가들은 모두 이 문제에 대해 속 시원히 답하지 못했다. 그래서 제1장은 이 책 전체에서 가장 신랄하며 논쟁적인 어조를 취한다. 기존 이론의 권위에 상당한 애착을 지닌 독자라면 이 장을 읽으며 혈압이 좀 올라갈 수도 있겠다.<br />
제2장에서 저자는 철학자답게 자유, 소유, 권력 등의 근본적 개념들을 재검토하며 앞 장의 비판을 발전시켜나간다. <u class="underline">자유는 소유로부터 나올 수 없다는 것, 사람은 소유의 대상이 될 수 없으며 권력 역시 소유의 대상일 수 없다는 것을 차근차근 논증</u>한다. 얼핏 진부한 상식으로 들릴 수도 있지만, 우리의 일상인 자본주의 현실은 이런 상식의 정반대를 진리로 전제하며 존립하고 있다. 그래서 이러한 철학적 비판 작업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br />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의 백미이자 압권은 제3장부터다. 이 장에서 저자는 자본주의 기업의 가장 발전되고 일반화된 형태인 주식회사를 철저히 검토하고 그야말로 '해체'한다. 그리고 독일, 미국, 일본 등에서 발전한 주식회사의 여러 변형태들을 검토하는 제4장이 제3장의 이런 중심 논의를 뒷받침한다.<br />
주식회사는 노동자와 사회의 다른 부분에 막대한 권력을 행사하며 주식회사 자체가 상품이 되어 시장에서 팔리기도 하고 그 과정에서 주주 집단이 엄청난 이익을 향유한다. 이것이 현대 자본주의다. 이 모든 현실의 밑바탕에는 주식회사를 존립시키는 제도적 중핵들이 존재한다. 그 중 하나가 자본주의 법체계에서 주식회사에 부여되는 법인격이다. 김상봉은 법철학적 논의를 통해 이러한 제도적 중핵들을 사정없이 파헤친다. 그래서 그것이 결국은 한 더미의 무의미하고 허술하며 모순된 명제들의 조합에 지나지 않음을 밝힌다.<br />
결론은 무엇인가? 주식회사에는 주인이 없다는 것이다. <u class="underline">대부분의 자본주의 법체계에서 주식회사의 주인인 것처럼 전제되는 주주들도 사실은 주인임을 내세울 아무런 근거를 갖고 있지 못하다. 주식회사는 본래부터 그렇게 주인 없이 성립된 생산 공동체다. 따라서 주주 소유권을 전제하고 그로부터 연역되는 경영권이라는 것도 거짓 논리에 지나지 않는다</u>. 저자가 보기에는 한국의 재벌 문제도 바로 이 근본적 문제에서 파생하는 것이다.<br />
<u class="underline">"(이건희 일가가) 수많은 주주들이 주식을 소유하고 있고 국가 경제에 엄청난 영향력을 가진 대규모 기업 집단을 단돈 41억 원으로 저렇게 간단히 사유화하고 지배할 수 있게 해주는 나라가 이 나라이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지극히 역설적인 일이지만 주식회사에는 처음부터 주인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무나 주인일 수 있는 것이다."</u> (220~221쪽)<br />
저자는 이렇게 기존 현실의 논리적 토대들을 해체한 뒤에 제5장에서 자신의 오래된 물음에 대한 답을 제시한다. 소유에 따른 권력 행사의 논리가 원천 부정된 자리에서 우리가 마주하는 과제는 이제 이 주인 없는 공동체를 어떻게 참다운 공동체로 만드느냐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김상봉의 '서로주체성' 개념이 등장해 제 역할을 한다.<br />
<u class="underline">주식회사의 자산 제공자가 주주일지는 몰라도 주주는 결코 주식회사의 활동 주체는 아니다. 그런 활동의 주체로 우리는 노동자 말고 다른 어떤 집단도 생각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제 경영권은 주주 '소유'권이라는 허상에서 의제될 것이 아니라 이들 활동 주체와의 '관계' 속에서 형성되어야 한다</u>. <u class="underline">노동자와 경영자가 '서로주체'로서 마주할 때에 주식회사는 비로소 실체를 갖춘 공동체, 폴리스('공화국'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가 된다</u>. 즉, 노동자가 경영자를 선출해야 한다.<br />
그럼 주주에게는 무엇이 남는가? 그는 이제 금융 투자자로서 자신의 본분에 충실해야 한다. 김상봉은 이들 '수탈자들에 대한 수탈'로서 지극히 문명적인 방식을 제시한다. 소유권과 경영권 사이의 고리를 확실히 끊는 조치만으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배당권이 여전히 인정된다. 하지만 경영권과는 안녕이다. 이들의 역할은 경영 감사 정도로 족하다. 그래서 드디어 이 책의 최종 결론이 완성된다. "주주에겐 배당금을, 노동자에겐 경영권을!"<br />
<strong>현대 자본주의의 지배 메커니즘</strong><br />
다소 길지만,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의 논지를 쭉 소개해봤다. 이 책의 성취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나는 우선 마르크스 이야기를 좀 하고 싶다.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에서 마르크스는 주로 과거 논의의 한계를 대표하는 인물로 출연한다. 그런데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오히려 마르크스를 다시 보게 되었고, 그간 주목하지 못했던 측면들을 새로 발견할 수 있었다. 가령 <자본> 3권의 다음과 같은 발언이다.<br />
"자본주의적 생산이 고도로 발전한 결과 만들어진 이것(주식회사)은 자본이 생산자 소유로 재전화―그러나 이제 소유는 개별화된 생산자들의 소유가 아니라 결합된 생산자들의 소유[즉, 직접적인 사회적 소유]로서의 생산자 소유이다―하기 위한 필연적인 통과점이다. 또 다른 한편 그것은 재생산 과정에서 지금까지 자본 소유와 결합되어 있던 모든 기능이, 단지 결합된 생산자들만의 기능[즉, 사회적 기능]으로 재전화하기 위한 통과점이기도 하다." (<자본 3-1>(강신준 옮김, 길 펴냄), '제27장 자본주의의 생산에서 신용의 역할', 586쪽)<br />
주식회사는 분명 마르크스에게도 중요한 연구 주제였다. 그러나 그에게는 시간이 별로 없었다. 그에게 주어진 역사적 시간은 이 주제를 탐색하기에는 너무 제한적이었다. 마르크스가 말년에 이르러서야 주식회사는 자본주의 세계에서 일반적 기업 형태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자본> 자체의 체계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런 시대적 상황 때문에도 주식회사는 3권에서야 중요한 주제로 부상한다. 하지만 그조차도 충분히 자세히는 다뤄지지는 못한다.<br />
그 결과로 <자본>의 독자는 혼란을 느끼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자본> 1권에서 우리가 마주하는 자본가는 19세기 중반 영국 자본주의의 전성기에 자본가의 일반적 유형이었던 가족 기업 경영자다. 이 자본가 유형은 소규모 기업의 창업주이자 실질 소유자였고 경영에서는 무자비한 독재자였다. <자본> 1권을 접한 한국의 독자들이 이 책의 자본가 상(象)에 한국의 재벌을 쉽게 오버랩시킬 수 있었던 것(사실은 오인인데)도 이런 사정 때문이었다.<br />
하지만 <자본>의 끝머리(제3권)에 다다라서 우리는 전혀 다른 자본가 유형을 마주하게 된다. 여기에서는 화폐 자본가와 생산 자본가가 서로 나뉜다. 화폐 자본가란 은행가, 주식시장 중개인, 주식 소유자 등으로서 현실의 자본가 계급은 점점 더 이들을 중심으로 재편된다. 그러면서 자본가 계급의 다수는 직접적 생산 기능으로부터 유리된다. 반면 생산 자본가가 담당하던 감독 기능은 점차 전문 경영인이 담당하게 된다.<br />
"<u class="underline">주식회사(신용 제도와 함께 발달한다)는 일반적으로 이 관리 노동을 점점 더 자본(자기 자본이든 차입 자본이든)의 소유와 분리된 기능으로 만드는 경향이 있다. (…) 한편으로 자본의 단순한 소유주인 화폐 자본가에 대해서 기능하는 자본가가 대립해 있고, 또 신용의 발달과 더불어 이 화폐 자본 자신이 하나의 사회적 성격을 취하면서 은행으로 집중되어 이제는 직접적인 소유주들로부터가 아니라 바로 이 은행들로부터 대부됨으로써, 그리고 또 다른 한편으로 차입된 것이든 그렇지 않든 어떤 명목의 자본도 소유하지 않은 단순한 관리자가 기능하는 자본가 그 자신이 수행해야 할 모든 실질적인 기능들을 수행하게 됨으로써, 이제 기능인만 남게 되고 자본가는 별로 쓸모없는 사람으로서 생산 과정에서 사라진다.</u>" (<자본 3-1>, '제23장 이자와 기업가 수익', 509~510쪽)<br />
주식회사는 이러한 역사 발전 과정에서 등장하고 정착된 기업 형태다. 마르크스도 언급하고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도 조목조목 따지고 있는 것처럼, 이것은 영락없는 사회적 자산이다. <u class="underline">어느 누가 배타적인 사적 소유를 주장할 수도 없고 단순히 주주들의 사적 소유의 총합이라고 하는 것도 어불성설인 그런 물건이다. 그런데도 현실의 주식회사에서는 여전히 사적 소유의 논리가 지배</u>한다. 그래서 이것은 반드시 모순의 현장이 될 수밖에 없다.<br />
<u class="underline">"주식 제도 안에는 사회적 생산 수단이 개인의 소유로 나타나는 낡은 사회 형태에 대한 대립이 이미 존재한다. 그러나 주식 형태로의 전화 그 자체는 아직 자본주의적 한계 내에 묶여 있다. 그래서 그러한 전화는 사회적 부와 사적 부의 성격 간의 대립을 극복하기보다는 그것을 새로운 형태로 바꿀 뿐이다."</u> (<자본 3-1>, '제23장 이자와 기업가 수익', 590쪽)<br />
<u class="underline">사실상 이미 극도로 사회화된 자산의 사적인 전유(일상어로는 차라리 '횡령')―이것이 주식회사에서 작동하는 지배의 메커니즘이다. 마르크스는 이미 이것을 예감했고, 더 나아가 신용 제도의 발전과 함께 이러한 지배 메커니즘이 기업 울타리를 넘어 사회 전체로 확대될 것임을 내다보았다</u>. 주인 없는 주식회사 안에서 주주들이 주인 노릇 하는 것처럼, 금융 과두 세력이 사회 전체의 저축을 농단하리라는 것이었다.<br />
"주식 제도―이것은 자본주의 체제 그 자체의 기초 위에서 이루어지는 자본주의적 사적 산업의 지양이며, 또 그것이 확대되어 새로운 생산 영역을 장악할 정도가 되면 사적 산업을 아예 절멸해버린다―이외에도 신용은 개별 자본가[혹은 한 사람의 자본가로 간주될 수 있는 사람]에게 일정 범위 내에서 타인 자본과 타인 소유 그리고 그럼으로써 타인 노동에 대해서까지 하나의 절대적인 처분권을 제공한다. 자기자본이 아닌 사회적 자본에 대한 처분권은 그에게 사회적 노동에 대한 처분권을 부여해준다.<br />
(…) 이제 수탈은 직접적 생산자로부터 중소 자본가들에게까지 널리 확대된다. 이러한 수탈은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의 출발점이다. 그러한 수탈의 관철은 곧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의 목표이며 궁극적으로는 생산 수단을 모든 개인들로부터 수탈하는 것을 의미한다." (<자본 3-1>, '제23장 이자와 기업가 수익', 588~590쪽)<br />
마르크스 사후 주식회사 형태는 계속 발전했고, 신용 제도도 더욱 발전했다. 사회화된 자산의 사적 전유를 통한 지배의 작동도 가일층 확대되고 치밀해졌다. 오늘날의 신자유주의는 어쩌면 그 극단적 발전태라 할 수 있다. 그런데도 막상 마르크스의 후계자들은 이 논의와 분석을 그다지 심화시키지 못했다. 혁명을 주장하는 진영이든 개혁 노선을 취한 진영이든 마찬가지였다. 왜 그랬을까?<br />
아마도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은 마르크스가 남겨놓은 정도의 주식회사 비판이라면 선동의 재료로서 이미 충분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들에게 그 다음 과제는 결코, 각 나라에서 주식회사가 작동하는 구체적인 방식을 분석하거나 그에 따른 대안을 발전시키는 것 따위가 아니었다. 단지, 존재가 입증된 자본가 '계급' 전체와, 아니 사실은 그들의 대변자로 지목된 국가와 맞서 싸우는 일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프리드리히 엥겔스와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이 선호한 '국유화' 방식의 사회주의 이행 노선도 이런 무관심에 크게 일조했다.<br />
한편, 개혁주의자들은 또 다른 방향에서 고민을 지워버렸다. 이들은 기업 단위에서부터 자본-노동 관계를 뒤집는다는 과제를 먼 미래의 이상 정도로 계속 뒤로 미루거나 아니면 현실 정치 의제에서 아예 배제했다. 물론 루돌프 마이드네르와 스웨덴 노동 운동이 1970년대에 시도한 임노동자 기금 같은 예외가 있기는 했다(<복지 자본주의냐, 민주적 사회주의냐 : 임노동자 기금 논쟁과 스웨덴 사회 민주주의>(신정완 지음, 사회평론 펴냄)). 하지만 이런 사례들은 어디까지나 예외일 뿐이었다. '제3의 길' 노선이 등장하기 이전에 이미 많은 사회민주주의자들에게 주식회사는 복지 국가와 공존해야 할, 대안 없는 선택지였다.<br />
이렇게 다소 길게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자들 이야기를 한 이유는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의 성취를 제대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다. 내가 보기에 이 책의 가장 중요한 성과는 두 가지다. <u class="underline">하나는 주식회사를 둘러싼 여러 제도들의 봉합점 역할을 하는 법인격 개념의 철저한 해체이고, 다른 하나는 소유가 아니라 관계(서로주체성)에 바탕을 둔 노동자 경영권의 근거를 철학적으로 정초</u>한 것이다.<br />
이 중 첫 번째 성과는, 기존 이론들과의 관계 속에서 본다면, <u class="underline">마르크스가 단편적으로 언급하는 데 그친 현대 자본주의의 지배 메커니즘 비판을 좀 더 완성된 형태로 전개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법인 조직을 둘러싼 제도들의 비판을 통해 사회적 자산이 사적으로 전유되는 구체적 양상을 포착한 것</u>이다. 달리 말하면, <u class="underline">'법인 제도(주식회사를 비롯한)를 통한' '사회적 자산의 사적 전유' 메커니즘의 규명</u>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우리 시대의 성격을 더없이 선명하게 이해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사회의 살아 있는 주체들이 실질적인 결정권을 확보하지 못했다는 단 하나의 이유로 주인 아닌 자들이 사회의 모든 처분권을 행사하는 시대, 어떤 임계점에 달한 인류사적 과도기다.<br />
<strong>노동자 경영권 없는 재벌 개혁은 신자유주의 강화!</strong><br />
'법인 제도를 통한' '사회적 자산의 사적 전유'에 대한 이러한 비판과 분석은 지금 당장 한국 사회의 현안을 살피는 데도 유용한 나침반이 되어준다. 그것은 이번 총선에서도 쟁점 중 하나로 부상한 재벌 문제다.<br />
총선 시작하기 전, 새누리당까지 포함해서 모든 정당이 재벌을 개혁하겠다고 목소리를 높였었다. 진보 정당만의 주장처럼 되어 있던 '경제 민주화'가 모두의 구호가 되었다. 물론 막상 총선 공약으로 나온 것을 보면, 실망스럽기 그지없다. 가령 새누리당 공약은 공약으로 낼 것도 없이 지금 당장 정부, 여당이 해야 할 일들을 생색내듯이 나열한 것일 뿐이다.<br />
민주통합당은 이런 새누리당을 비판하면서 "출자 총액 제한 제도 재도입, 순환 출자 금지, 금융-산업 분리 강화 등"을 공약한다. 이러한 공약은 민주통합당이 바라보는 재벌 문제의 핵심이 무엇인지 잘 보여준다. 지금 재벌의 문제는 총수 일가가 자신들이 실제 소유한 주식 지분보다 훨씬 더 많은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따라서 해결책은 모든 주주가 자신이 소유한 지분만큼만 영향력을 행사하게 하는 것이다. 즉, '1주 1표'의 주주 자본주의 질서를 철저히 확립하는 것이다.<br />
지난 2월에 통합진보당 대표 이정희가 발표한 '맞춤형 재벌 개혁 로드맵'도 민주통합당의 시각과 크게 다르지 않다. 각 재벌 그룹에 대해 맞춤형 처방을 내놓는다고는 하지만, 일관된 것은 민주통합당과 마찬가지로 "출자 총액 제한 제도 부활, 순환 출자 금지 등"을 통해 재벌의 경제 집중력을 억제하겠다는 것이다. 이정희의 방안이 실현된다면, 10대 재벌 그룹은 해체되고 총수 일가는 다른 대주주와 마찬가지의 지위가 된다.<br />
민주통합당 공약이나 이정희 대표 로드맵은 새누리당 공약에 비해서는 '재벌 개혁'이라 할 만한 측면이 있다. 재벌 권력에 손을 대겠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u class="underline">문제는 모든 '재벌 개혁'이 곧 '경제 민주화'는 아니라는 점이다. 이들의 방식대로 하면, 재벌 권력은 약화되는 대신 전체 대주주 집단의 권력은 더욱 강화된다. 즉, 주주 자본주의가 강화</u>된다.<br />
우리가 흔히 '신자유주의'라고 부르는 경제 현실의 미시적 기초가 되는 기업 단위 질서가 주주 자본주의다. 주주 자본주의의 강화란 다름 아니라 신자유주의의 강화다. 그렇다면, 위의 '재벌 개혁' 안들은 경제 민주화가 아니라 신자유주의 강화의 통로라는 이야기가 된다. 최근 '재벌 개혁' 논의에 대한 장하준의 다음과 같은 비판은 이러한 맹점을 잘 짚고 있다.<br />
"재벌, 특히 삼성은 참 나쁘다. 자식들에게 편법 상속을 했고, 우리 사회 엘리트들을 매수했다. 여기에 대해선 법에 따라 단호하게 처벌을 해야 한다. 하지만 삼성그룹을 해체하자는 주장은 동의할 수 없다. 그렇게 되면, 삼성 계열사의 주인이 누가 되나. 국가가 주인이 된다면, 그건 차라리 낫다. 하지만 실제론 해외 투기자본이 주인이 될 게다."<br />
대개의 '재벌 개혁'론이 한국의 재벌 문제를 주주 자본주의의 모순과 별개로 바라본다. 그래서 일단 재벌을 해체하여 '정상적인' 주주 자본주의 질서를 수립해야 하고 주주 자본주의의 문제는 그 다음부터 고민하면 된다는 식의 태도를 보인다. 여기에는 자본주의적 근대화 이후 사회과학의 표준적 틀이 되어온 '보편'-'특수' 구도도 작동한다. '보편적인' 자본주의와 '특수한' 한국 재벌 문제 식의 구도 말이다.<br />
그러나 재벌 문제는 그런 '특수한' 질병이 아니다.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는 이 문제가 오히려 보편적인 현대 자본주의의 모순이 한국 사회에서 나타나는 한 형태라고 분석한다. 그 보편적인 모순이란 곧 '법인 제도를 통한' '사회적 자산의 사적 전유'다.<br />
<u class="underline">주식회사는 주인 없는 사회적 자산이다. 그런데도 자본주의 법체계는 이 사회적 자산의 경영권을 주주라는 특정 집단에게 맡긴다. 하지만 주주는 사실 일종의 채권자에 불과하다. 이들에게는 경영의 의지도, 능력도 없다. 그러다 보니 실제로는 대주주들의 묵인과 담합 아래 소수 과두 세력이 기업을 지배한다. 한국에서는 이 과두 세력이 총수 일가로 나타날 뿐</u>이다.<br />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는 이렇게 재벌 문제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열어준다. 그래서 대안도 민주통합당 류와는 전혀 달라지지 않을 수 없다. 노동자 경영권이 당면 중심 과제가 된다. <u class="underline">노동자가 이사를 선출하자, 그래서 총수 일가의 전횡도 아니고 주주들의 '1주 1표'도 아닌 노동자의 '1인 1표'로 운영하는 기업을 만들자</u>는 것이다.<br />
물론 몇몇 '진보적' 재벌 개혁안은 노사 공동 결정 제도를 언급하기도 한다. 하지만 출자 총액 제한 제도 재도입, 순환 출자 금지 이후의 다음 단계 과제로 미뤄두거나 혹은 이러한 조치들에 따르는 보완책 정도로만 제시한다. 이에 반해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의 결론은 이렇게 주장한다. 노동자 경영권이야말로 재벌 개혁의 몸통이고 가장 먼저 추진되어야 할 과제라고. 순환 출자 금지 등은 오히려 이것이 실현되는 과정에서 이를 보완할 부분적 수단일 뿐이다.<br />
<strong><기업은 누구의 것인가> '이후'의 과제들</strong><br />
나는 "주식회사의 경영은 노동자가 한다!"는 것이 우리 시대 노동 운동과 사회 변화의 중심 구호가 되어야 한다는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의 결론에 깊이 공감한다. 그래서 감히 이 책을 이 시대 모든 깨어 있는 노동자와 민주 시민의 필독서로 추천한다. 이 책의 독자가 변호사 김용철의 <삼성을 생각한다>를 읽어본 이들의 숫자만큼만 되어도 한국 사회의 균열이 지진으로, 화산으로 폭발하는 것을 기대해볼 수 있지 않을까. 다만, <u class="underline">"주주에겐 배당금을, 노동자에겐 경영권을"이라는 이 책의 결론에 동의하더라도 그 결론에 수반되는 수많은 의문점들, 더 해명되어야 할 숱한 쟁점들은 남는다</u>.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는 기업 내의 민주화를 강조하다 보니 이러한 또 다른 고민거리들은 굳이 부각시키지 않는 경향이 있다.<br />
한 가지 사례만 들자면, 이런 것이다. <u class="underline">노동자가 이사를 선출하기 시작한 주식회사가 이제 그 다음에는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느냐는 문제. 당연히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선출한 이사를 일상적으로 감시하고 주요 경영 사안을 숙의하기 위해 노동자 평의회 같은 현장 대의 기구를 만들고 운영해야 할 것이다</u>. 이것은 굳이 강조할 필요도 없는 필수 과제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그러한 끊임없는 감시와 요구가 향할 방향, 그것이다.<br />
<u class="underline">만약 노동자 경영 기업이 지금과 마찬가지 정도의 경쟁 압력 속에서 생존해야 한다면, 어찌 될 것인가? 주식회사를 우리 시대의 아테네로 만들었더니, 그 아테네가 끝없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이라는 격랑 한 가운데에 놓여 있다면? 이렇게 되면 노동자 스스로 노동 시간을 연장하고 사회적, 환경적 비용을 늘리더라도 당장의 수익 기준을 충족시키는 데 골몰하게 되지는 않을까? 억압과 착취를 이제는 자본가의 명령이 아니라 노동자 스스로의 투표로 결정할 뿐인 상태가 출현하지는 않을까?</u><br />
노동자 경영이 필요 없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u class="underline">노동자 경영 기업이 활동하는 경제 생태계 전반의 변화가 함께 이뤄져야 한다</u>는 점을 지적하려는 것이다. 노동자 경영 기업이 작은 공화국들로 지속, 발전하기 위해서도 영구 평화에 가까운 경제 생태계가 만들어져야한다.<br />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는 이런 문제까지는 짚지 않는다. 하지만 '경제 민주화'라는 21세기의 숙제를 완수하려면 이런 물음을 생략하거나 우회할 수는 없다.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의 답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것이다. 좀 더 총체적인 대안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런 대안을 마련하기 위해서도 확고한 출발점이 필요하다.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는 분명 그런 시작점이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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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었는데, 이전에 민주노동당에서, 전진에서 많이 논의되었던 안과 비슷하기에 그랬겠다 싶었다. <br /> <br />이에 대해 자본의 논리와 닮았다, 정규직=귀족노동자론의 노동자 버전(노동자책임론)이다, (정규직) 노동자 선 양보론이다 라는 식으로 비난하는 것은 자기만족적일 뿐 자신들이 비판했던 대상과 별로 차이가 없다. 현재의 위기를 극복할 대안을 제출하지 못하고 있기에...<br /> <br />그럼 뭐? 글쎄... 나도 고민해봐야지. 우선 관련 글 먼저 옮겨놓고... </font><br /> </p><br /><p><span class="toggle-text" onclick="toggleMore(this)" style="cursor: pointer; display: none;">계속 보기...</span></p> <div class="more-content" style="border: 1px dashed black; background: none repeat scroll 0% 0% rgb(239,255,175); padding: 1px; margin: 1px;"><br />----------------------------------------------------- <br /><strong><a title="[http://www.newscham.net/news/view.php?board=news&nid=47561]로 이동합니다." target="_blank" href="http://www.newscham.net/news/view.php?board=news&nid=47561"><font color="#5a5194">사회연대전략이냐 사회화전략이냐</font></a></strong> (참세상, 유영주 기자, 2008년05월02일 10시26분)<br /><strong><font color="#193da9">[좌담] 노중기-이광일-홍석만, '진보의 재구성' 토론</font></strong><br /> <br /><font color="#006699">노중기 진보신당 정책위원장, 이광일 성공회대 교수, 홍석만 진보전략회의 운영위원이 ‘진보의 가치’와 ‘진보의 재구성’을 놓고 토론을 가졌다.<br /> <br /></font>총선 결과 평가에서는 큰 이견이 없었다. <u>노중기 정책위원장은 실패이면서 성공이기도 한 진보신당의 총선 결과를 논평했고, 이광일 교수는 선거 결과 자체보다는 진보의 재구성 과정이 어떠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짚었다. 홍석만 운영위원은 진보정당 뿐 아니라 좌파운동도 경제 프레임을 넘어서지 못했던 한계를 주되게 지적했다</u>.<br /> <br />진보의 재구성과 관련, 노중기 정책위원장은 ‘종북주의 민족문제’, ‘노동조합과 정당과의 관계’, ‘당 운영 관련된 정파 패권주의’ 등의 쟁점을 돌아보고, 진보신당이 표방하는 네 가지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당의 역할을 강조했다. 이광일 교수는 진보의 가치에 대한 내재,외재적 접근에 있어 비대칭적, 억압적, 대립적 문제를 대칭적, 호혜적, 융합적으로 가져가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던졌다. 이런 문제의식이 없는 진보대연합 같은 구상은 실패하게 된다고 평가했다. 홍석만 운영위원은 87년체제를 넘는 방향에서 진보의 재구성을 고민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으로, 공적 삶에 대한 국가의 문제와 생산수단의 통제 등 사회화 과제를 제기했다.<br /> <br /><u>진보의 가치, 진보의 재구성에 있어 과제의 핵심은 연대전략이라는 데 이견이 없었으나, 사회연대전략과 관련해서는 역시 쟁점이 되었다. 노중기 정책위원장이 사회연대전략이 좌우에서 모두 비판받고 있지만, 임금연대 등 구체적인 정책으로 제시되고 있다는 점에 의미를 부여했다. 이에 비해 홍석만 운영위원은 사회연대전략이 임금연대 차원에서 다뤄지는 한계가 있다고 지적하고, 생산수단의 소유와 민주적 통제 등 사회화 문제의 적극적인 논의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개진해 쟁점이 되었다</u>.<br /> <br />진보의 재구성에 있어 진보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정치세력 간의 노력이 한편으로는 진보신당을 통해, 다른 한편으로는 계급정당을 통해, 또 그밖의 비계급적인 운동을 통해 각각 발전해야 한다는 데 이견이 없었다. 진보의 가치가 추상 수준에서가 아니라 정책과 실현 경로 제시를 통해 이뤄져야 한다는 점도 십분 공유된 자리였다. 아래는 좌담 전문이며, 사회는 김용욱 민중언론참세상 편집국장이 맡았다.<br /> <br /><font color="#006699"><strong>사회자(김용욱)</strong> : 총선이 끝난 지 한 달 정도 지났다. 이번 총선 결과에 대한 평가 이야기부터 시작하자.<br /> <br /></font><strong>노중기</strong> : 진보신당이 말도 많고 탈도 많았는데, 총선 참여를 결정하고 당 만들고 성과 내는 것이 목표였다. 큰 성과를 내지는 못했다. 패배 같은데 또 보니 당원도 생기고 분위기가 나쁘지 않다는 이야기가 동시에 나온다. 의석을 확보 못한 것 때문에 문제의식이 꺾인다면 그런 신당은 안 만들었을 테고, 제도정치세력이 선거라는 기제를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바람직하냐는 논란은 있을 수 있지만 거침없이 나가자 했던 것이고. 어쨌든 한 달 준비해서 50만 표 얻은 것이고, 성공이다 실패다 하는 단정은 어렵다. 민주노동당에서 탈당했던 사람들이 대중적이든 개인적이든 그들의 역량으로 나온 거라 진보신당의 평가로 볼 문제만도 아니다. 의석을 못 얻은 것은 자기정당화일 수 있지만 제대로 된 제2 창당, 계급적 대중정당을 건설하자는 진보신당의 포부에 비쳐볼 때 나쁜 것은 아니다. 바닥부터 다시 시작하라 라는 객관적인 근거는 아닌데, 우연하게 그런 결과가 나론 거라 바닥에서 시작해서 발본적으로 노동자정치세력화를 고민해야 할 것으로 받아들인다.<br /> <br /><strong>이광일</strong> : 노중기 선생님 이야기처럼 여러 가지 평가가 있었는데, 결과를 놓고 보면 진보신당은 2.9%를 받았다. 3% 이상이 되어야 진입장벽을 넘는건데 결과만 보면 성공했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 중요한 건 민주노동당의 분당과 진보신당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진보의 재구성을 살피는 데 있다. 결과를 보면 보수정당 세력들이 지난 번 대선 때 63.74% 지지를 받았다. 유효투표율에 이회창씨와 이명박 씨 합치면. 이번에 몇% 못 미치지만 그 정도 지지를 받았다. 투표율이 낮았고 국회의원 선거라고 보면 보수는 받을 만큼 받았고 보수 결집 현상은 지속되고 있다. 자유주의 정치세력은 대선에서 정동영 후보가 26.14%, 총선에서 25.17%를 받았다. 바닥을 치고 있고 이후에도 상승은 비관적이다. 자유주의 정치세력이 독자적으로 받을 수 있는 최대 수치라고 본다. 과거 디제이피 연합 때는 혼자 안돼서 그랬던 건데 이 두 사람들은 투표율로 볼 때 선방했다고 본다. 민주노동당을 포함해서 진보신당은 기권표를 봐야 한다. 대선 때는 34.7%였는데 이번에는 45% 정도가 기권했다. 보수세력과 자유주의 정치세력은 받을 만큼 받았는데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등 진보세력은 지지를 받지 못한 거다. 최소 10% 이상은 얻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다. 대중들은 고통스럽고 살기 어렵다고 하는데 왜 이런 결과가 나왔겠는가.<br /> <br /><strong>홍석만</strong> : 이번 선거는 총선만 놓고 평가할 건 아니고, 대선과 총선을 이어서 짚어봐야 할 것 같다. 결과도 그렇고 원인도 그런데 이번 경제프레임이 쭉 이어졌다. 노무현 정부의 실정으로 경제살리기 개발 열망이 드러났고, 공교롭게도 보수 우위 하에 지역 구도로 치러진 선거이다. 투표 참여율은 낮았지만 의회 중심으로 놓고 볼 때 한국 정치는 오른쪽으로 이동했다는 점을 짚을 수 있고, 그 책임이 진보진영한테 있는 것 아니겠는가. <u>진보운동이 신자유주의 프레임을 넘는 자기 대안을 갖지 못하고, 신자유주의 프레임에 갇혀 자기 이야기를 풀지 못한 게 가장 큰 문제였다. 두 당도 마찬가지였다고 본다. 그런 점에서 지나치게 구체적인 정책들 요구하면서 정책이라는 함정에 거꾸로 빠지는 것</u> 아니냐 싶다. 현재 진보정당 운동 뿐 아니라 계급정치라고 하는 좌파진영도 자유로울 수 없는 조건이다. 이런 것을 넘어서는, 이광일 선생님이 이야기하는 진보의 재구성이 중요한데, 어떤 틀이 됐든 그걸 구성하는 게 필요하다.<br /> <br /><strong>노중기 : 진보신당 총선 패배이기도 하고 승리이기도 하고 <br />이광일 : 진보의 재구성 위한 노력 무엇이었나 평가가 중요 <br />홍석만 : 경제 프레임에 좌파 자기 이야기 못 풀었다</strong><strong> </strong><font color="#006699"><br /> <br /><strong>사회자</strong> : 총선 평가에 대해 각자의 위치에서 이야기해준 것 같다. 진보정치 전체를 놓고 볼 때 이번 총선을 거치며 여러 근거가 마련됐다고 하는데, 좀 더 깊이 들어가보자.<br /> <br /></font><strong>노중기</strong> : 이번에 글이 많이 쏟아졌다. 인터넷언론에 여러 분들이 진보정책과 관련한 글을 썼다. 민중언론참세상에서는 상대적으로 계급적 좌파의 글이 적었다고 보는데 홍석만 선생님이 쓴 글은 읽어봤다. 이번 선거를 87년체제로 해석했던 거는 동감하고 이광일 선생님 글을 통해서도 많이 배웠다. 홍석만 선생님이 이야기한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계급정치 그룹 모두가 이 신자유주의 대항 프레임을 만드는데 실패했다는 점에서 대선 총선 모두 자유롭지 못하다. 그런 점에서 일차적인 책임은 진보신당 그룹에 있다. <u>계급정당 그룹도 책임이 있지만 어쨌든 세력을 가진 대중정당으로서 주어진 조건에서 평등파로 알려진 이분들이 그런 전망을 가져야 한다고 보는데, 그분들이 별다른 역할을 못했다는 점이 심각하다</u>고 본다. 그래서 진보의 재구성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고, 계급정치에서 보면 모두가 패배자라는 이광일 선생님의 지적이 중요한데, 이후 진보정당을 새롭게 만들어야 한다는 맥락에서 볼 때 2.9% 획득 자체가 나쁜 건 아니다.<br /> <br /><strong>이광일</strong> : 진보신당의 책임 차원의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기본적으로는 가장 급진적이고 진보적이고 좌파라는 사람들한테 책임이 있다. 정당조직이든 그렇지 않든. <u>급진적이고 좌파인 부분들이 더 많이 고민해야 하고, 그런 맥락에서 논쟁이든 논의든 앞으로 진보정당 중심으로 갈 수는 있겠지만, 급진적이고 좌파라는 사람들이 자기의 생각을 많이 이야기하면서 진보의 재구성에 참여할 필요가 있다</u>고 본다.<br /> <br /><strong>홍석만</strong> : 진보의 재구성의 핵심이 뭐냐는 건데...<br /><strong>이광일</strong> : 자연스럽게 하면 된다.<br /><strong>홍석만</strong> : 이것 저것 안 되니 재구성하자는 게 아니고 주장이 좀 있어야겠는데. <br /><strong>노중기</strong> : 주장을 다 채우려면 책을 쓸 일이다.<br /> <br /><strong>홍석만</strong> : 노중기 선생님은 87년노동체제 논의의 시초가 되는 분이라 특별하기도 한데, 민주노동당이란 것 자체가 87년체제의 산물이다. 민주노동당 운동의 성과이기도 하고. 김대중 류의 세력들이 신자유주의 세력화 하면서 그들이 담으려 했던 좀더 급진적이고 양심적인 부분도 있었지만 이번 선거의 한계는 그 임계점을 보여준 것이다. 이번에 논쟁은 종북주의 문제로 보이지만 일정한 노선 갈등이 있는데, 이것들이 87년체제를 넘어서서 신자유주의 대응력을 회복할 거냐 가져갈 거냐 그런 고민이 있다. 계급정치 세력도 마찬가지로 전투적 조합주의에 기반한 것이긴 한데 생존권 자체를 가장 집중한다는 것 자체도 신자유주의 문제를 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라고 한다면, 진보의 재구성도 87년체제의 진보정치를 넘어서는 방식과 방향으로 봐야하지 않을까 싶다.<br /> <br /><strong>이광일</strong> : 두 당은 평등파와 자주파 라고 하는데, 평등과 자주라는 개념을 상당히 가치 하락시키고 있다. 평등과 자주는 동전의 앞뒤면 같은 건데, 87년체제의 산물이지만 기본적으로는 완고한 민족주의적인 발상들, 그로부터 보여지는 정치적 행태들이라고 본다. 보수세력과 자유주의세력은 사실은 타협체제이다. 그 안에서 노조운동도 놀았던 거고. 그걸 넘어가야 하는데 민주노동당은 계급문제에 대해 소홀한 측면이 있었다. <u>민주노동당도, 배타적 지지를 했던 민주노총도 조합주의적인 운동, 자기 조직운동 중심의 운동을 했던 한계가 있는 것</u>이다. 종북주의가 나타났지만 완고한 민족주의 흐름이 여러 진보의 가치들을 수용해내지 못해왔다. 성소수자, 평화 문제 등에서... 그걸 넘지 못하는 한계에 이른 거다. 종북주의 문제는 외견상의 것이고, <u>완고한 민족주의가 실제로 극복해야 할 것은 자유주의정치 헤게모니가 진보진영에 투사되는 기능을 하는 데 대한 것이다. 그걸 극복해야 하는데 진보신당이 만들어진 것은 그런 의미 부여가 될 수 있다</u>. 많은 사람들이 평등파를 비판하는데 민주노동당 문제를 자주파가 아니라 평등파의 문제로 보기 때문이다. 평등파가 과거 정치적 행태를 반성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고, 이걸 증명하려면 어떻게 해야겠나. 진보의 재구성에서 어떤 자세를 보이고 어떻게 자기를 버릴 수 있을 것인가에 따라 검증될 것이다.<br /> <br /><strong>노중기</strong> : 다 동의되는 이야기다. 해야 할 이야기를 해주신 것 같다.<br /> <br /><font color="#006699"><strong>사회자</strong> : 민주노동당이 87년체제의 산물이라면 진보신당이 그걸 극복해야 한다는 요지의 말씀인데, 진보신당이 어떤 과제를 가질 수 있는가. 진보의 재구성 과제는 어떻게 바라보나. <br /></font> <br /><strong>노중기 : 민주노동당 껍데기 정치세력화.. 장기 플랜 위한 이론과 노선 갖춰야 <br />이광일 : 진보의 가치, 비대칭적.억압적.대립적 문제를 대칭적.호혜적.융합적으로 <br />홍석만 : 형식적인 한 지붕 세 가족으로 진보의 가치 이뤄지진 않아 </strong><br /> <br /><strong>노중기</strong> : 그동안 진보신당 중심으로 논의가 진행된 것을 보면 세 가지 논란이 있었다. 종북주의 민족문제, 노동조합과 정당과의 관계, 당 운영 관련된 정파 패권주의 등이다. 물론 이 세 가지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왜 이런 의제가 갑자기 터져나왔을까. 종북주의 민족문제는 아다시피 민족문제 자체도 있지만 계급적으로 풀어낼 문제도 있는데, 계급적인 사회운동세력은 민족문제를 자기 문제로 삼을 수 있는 역량과 조건을 갖추지 못했고, 민족문제에 치우치거나 쁘띠부르주아적인 방식으로 풀려했던 세력에게 20년간 맡겨놓게 됐다. 길게 보면 87년부터 계급적인 사회운동세력들은 여름에 통일문제는 너희들이 해라, 가을에 노동문제는 우리가 한다는 식으로 활동했다. 세월이 흐르고 노무현 정부가 탄생하면서는 계급적 사회운동세력의 자기 역할을 가로막는 양상을 보여주었다. 두 번째 당과 노조의 관계와 관련해서는 단병호 의원의 이야기가 아주 정확하다. 단병호 의원이 민주노동당에는 민주노총 조합원은 있지만 민주노총 내에는 민주노동당 당원이 없다고 했다. <u>노동자 대중의 정치의식화, 정치조직화는 안 했다는 거다. 당이건 노조건 리더들의 역할방기 문제였는지 더 구조적인 문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껍데기 정치세력화였다는 평가이고, 단병호 의원이나 심상정 의원이나 그 점을 다 알고 있었다. 어영부영하다 지도력 문제에 봉착</u>한 거다. 세 번째 문제는 모든 정치세력과 정파들이 민주주의를 제대로 하자고 했지만 엄혹한 군부통치하에서 운동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운동 관행이 절대 민주적일 수 없는 한계가 있었다. 안기부가 죄다 잡아가는 상황에서 민주적으로 조직을 운영하면 다 망하는 시기였다. 그런 점에서 전노협은 민주적이지 않았다. 전노협 시기 1단계 정치세력화는 두 단계 걸쳐 완성됐다. 97년의 국민승리21, 2000년 민주노동당 건설로 형식적, 합법적 대중정당 건설을 완성했다. 또 노동자계급의 정치세력화가 자유주의적인 정치적 성과를 내는 데는 한 단계 발전이 더 필요했는데, 2004년 의회진출이 그것이었다. 합법정당을 전국조직으로 건설하고 국회의원 배출을 이룬 거다. 그런데 형식적인 요건을 달성한 후 계급적 정치세력화의 장기플랜을 가져가기 위한 이론과 노선 활동은 사실상 없었다. 민주노동당이든, 진보신당이든, 계급적 운동세력이든 다 자유로울 수 없다. 큰 틀에서 넘어서는 그런 문제의식을 갖지 못했던 거다.<br /> <br /><strong>홍석만</strong> : 최근 노동, 생태, 여성 이런 세 가지 가치에 대해 큰 틀에서 동의되지만 노동중심성을 인정해야 한다. 그런다고 해서 생태중심성 여성중심성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중심이 하나인 것은 아닌 상황이다. <u>다중심의 형태이고 정치세력화에 있어 그런 가치를 녹여내는 고민이 있는데, 초록정치연대도 있고 여성주의 패미니즘도 있고 성소수자운동도 있지만 당이라는 틀에 모인다고 그런 가치들이 융화되고 결합되는 건 아니다</u>. 도대체 뭘로 결합할 거냐는 거다. 가령 며칠 전 반사유화 공공성 토론회를 했는데, 공무원과 환경운동이 대립하는 문제가 확인됐다. 일전에 발전노조와 환경운동이 대립했던 적이 있었는데, 당이 조율한다고 하지만 양자의 가치가 진보적으로 통일 통합 되느냐는 다른 문제이다. 한 지붕 세 가족, 이것이 진보의 재구성은 아니다. 진보신당도 마찬가지고 앞으로 진보적인 정치가 지향할 바는 한지붕 세 가족을 넘는 결합을 꾀해야 하고, 그것이 진보적 재구성의 내용이 아닐까 한다.<br /> <br /><strong>이광일</strong> : 총선 기간 중에 민중언론참세상에 진보신당에 문제제기를 하는 글을 하나 기고했는데, 기존에 진보를 노동,생태,평화,여성 등으로 나누지만, 사실은 각각의 영역에서 자기 밖의 외재적인 존재로 바라봤다. 노동 안에는 생태 없냐라는 접근을 해봐야 한다. 노동은 여기 떨어져 있고 기계적으로 결합하는, 그런 논의 맥락을 갖다보니 대선 전 진보대연합 제안도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거다. 진보가 대체 뭐냐, 민주주의가 뭐냐, 한 번 물어보자. <u>민주주의 이야기에서 제도와 절차 이야기 많이 하지만, 중요한 것은 사회관계를 보는 거다. 생산현장의 노동자본관계, 여성남성노동 관계 등 사회관계에 있어 비대칭적, 억압적, 대립적 문제를 살펴봐야 한다</u>는 거다. 비대칭적, 억압적, 대립적 문제를 대칭적, 호혜적, 융합적으로 가져가야 한다. <u>좌파가 뭐냐 했을 때 진보적이고 민주적인 것을 위해 전투적으로 싸우는 것, 래디컬하게 접근하고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꼬뮨의 한 면이고, 진정한 좌파는 꼬뮨주의가 되어야 한다. 진보의 재구성 논의는 조직의 형식적 연대의 측면이 아니라 사회관계적인 측면에서 이루어져야 한다</u>.<br /> <br /><strong>노중기</strong> : 홍석만 선생님의 제기는 진보의 재구성의 핵심 문제이다. 진보신당은 네 가지 가치를 담는다고 하는데, 이게 우경화 아니냐 식으로 볼 수도 있을 거다. 그러나 핵심은 이광일 선생님과 같은 생각인데, 이광일 선생님은 진보의 재구성을 내재와 외재의 개념으로 살핀다. 네 가지 가치는 영역과 공간으로 나눌 수 있는 게 아니라 동시에 풀어야 할 진보적 가치들이다. 조금 다른 각도에서 보면, 결국은 진보의 연대의 문제라 하겠는데, 87년의 전노협을 신화처럼 생각하는데 전노협이 신화였던 것은 자신의 직접적 이해도 있었지만 그걸 넘는 우리 사회의 포괄적 민주주의 문제, 사회적인 이데올로기 지형을 만들었던 데 있다. 그것이 전노협 운동의 특징이자 의미였다. 지금도 노동 현장에는 반여성적인 남성 중심의 강력한 문화와 정치가 작용하는 것을 다 잘 알지 않는가. 과거 100인위 활동이 있었지만 진짜 심각한 곳은 현장인데, 그런 문제를 노동조합이 자기 과제로 받아들여 변화시키기 위해 얼마나 논의했었나. 공무원과 물 문제는 당장 자기 고용 문제이고, 원자력도 마찬가지, 생태에서 보면 직접 부닥치는 문제이다. <u>노동운동 내부에서 공공성, 생태 등의 문제를 고려하고 풀어나가야 한다. 지금 단계 운동 과제는 정당의 지부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운동과제를 자기 운동 단위에서 실천하는 것</u>이다. 민주노동당이 그걸 못해 진보운동의 위기를 부른 거다. <u>당 간판 아래 모아놓는 것이 진보적 재구성이냐 라는 문제제기는 맞지만, 형식적, 절차적 투쟁 성과를 버릴 이유는 없다. 오히려 조직을 통해 그런 운동을 만드는 의식과 실천을 가져가야 한다. 그걸 할 수 있는 최소한의 기본조직이 노조이고 정당이다</u>. 사회운동으로 각개전투하면서 노조는 노조끼리 단체는 단체끼리 전선체를 만들어서 그 문제를 풀어라 할 수 있나. 항구적이고 장기적인 조직 틀이 반드시 필요하다. 조직이 관료적 틀이 아니라 살아움직일 수 있도록 하고, 조직의 구성원의 변화를 위해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br /> <br /><font color="#006699"><strong>사회자</strong> : 진보의 재구성과 관련한 논의가 되고 있는데, 연대전략의 문제가 중요한 것 같다. 이미 많이 논쟁되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br /> <br /><strong><font color="#666666">노중기 : 사회연대전략 좌우 모두 비판, 계급타협적이라는 비판으로는 안 돼 <br />홍석만 : 공적 삶에 대한 국가의 보장, 생산수단 통제 통한 사화화 전략 필요 </font></strong><br /> <br /></font><strong>홍석만</strong> : 노중기 선생님의 말씀에 동의한다. 그런데 허전한 느낌이 든다. 내재적 접근을 하는데 있어 의식과 관점을 잡는 건 중요한데, 물론 아직 그 단계 못 가고 있다는 것은 맞다. 당을 통해 연대를 확장하자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찌 보면 지나치게 추상적일 수 있다. 의식개혁 캠페인을 하는 것도 아닐 테고, 양 주체를 모아놓고 해봐라 라는 게 아니라면, 연대란 게 과연 어떤 거냐. 레닌주의는 계급동맹을 통해 강령을 중심으로 운동을 한 건데, 오늘날 사회에서 그런 가치들, 계급대중의 연대를 확장하는 고민으로 본다면, 진보신당이 이야기하는 사회연대전략이그런 의미를 지니느냐 하는 점을 냉정하게 평가해야 한다. 저소득층 비정규직 지원방안이 선거정책으로는 의미가 있을 수 있으나, 민주노동당도 그렇고 진보신당도 그렇고 연대전략 수준에서 사회연대전략을 들고나왔다. 국민연금도 고소득 정규직과 자본가 비용을 끌어내는 방식, 노동시간 일자리연대도 2000 시간 제한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으나 그럴 경우 누군가는 야간노동을 하거나 채워야 하는 문제가 있다. <u>연대는 주고받는 거고 공동의 목표를 향하는 건데 한쪽은 주기만 하고 한쪽은 받기만 하게 된다. 한편으로는 사회연대전략을 둘러싼 논쟁과 비판이 좀 과하다 싶은 점은 있다. 연대전략이라고 보기 어려운 내용적 비판이 아니라 계급타협이라 식의 추상 수준을 높여 비판할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u>.<br /> <br /><strong>이광일</strong> : 국가에 의존하거나 시혜적인 게 있는데, 시혜 자체가 문제라기보다는 주는 쪽 받는 쪽이 진보 연대의 가치를 체화하는 가운데 이루어지느냐 여부가 중요하다고 본다. 그렇게 안 이루어진다.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모두 당원교육이 없다. 진보신당이 앞으로 어찌할지는 모르나 <u>민주주의나 진보의 가치들이 교양이 되고, 공감대를 형성하고 그러면서 정책적으로 이루어진다면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런 것 없이 주고받기식이라고 한다면 사상누각이 된다</u>. 어느 순간 그런 거 할 수 없다는 게 확인되면 진보운동도 사기를 치는구나 그렇게 되는 거다.<br /> <br /><strong>노중기</strong> : 어쨌든 사회연대전략은 진보신당의 타이틀이었다. 문성현 전 민주노동당 대표가 이야기하면서 많이 알려졌고, 오건호 전 전문위원의 문제제기가 있었고, 지금 다시 문제가 되고 있다. 사회연대전략은 우파도 좌파도 비판한다. 그걸 진보신당이 하고 있는 건데, 민주노동당 안에서는 당 내 다수파한테, 결정적으로는 민주조총 지도부에 의해 깨졌다. <u>우파의 비판의 요지는 정규직 조합원의 이익이 침해되고 따라서 지지기반이 잠식된다는 거였다. 좌파는 사회연대전략 이야기 나오기만 하면 계급타협이라고 비판한다. 가령 이 문제와 민주노총이 정규직 조합원 연맹의 돈을 모아 비정규사업 하겠다는 것과 본질적으로 무슨 차이가 있는가. 이데올로기나 헤게모니 여론정치 요소도 있지만, 많이 거두면 10억 원, 적으면 5억 원 정도일 텐데, 그걸 하는 것과 본질적으로 뭐가 다른가</u>. 갈등은 뻔하지만 이런 의제를 꺼내놔야 사회공공성이든 뭐든 민주노총 조합원들에게 현실적인 문제가 될 수 있다. 민주노총 1만 원 내면 된다, 정책은 민주노동당 당원이 되면 된다... 비정규 기금도 그랬다. 관철을 하려니 조합원한테 말도 못 붙이고. 이런 부분이 계급적 정치의식화 교육의 출발점이다. <u>신자유주의 추상이론이나 정세, 이명박 성격 같은 걸로 교육하는 건 헛방이다. 지금은 전망을 보여줘야 한다. 이런 의제를 가져가서 단기적으로 돈을 더 내지만 1만원 내는 것이 장기적으로는 우리 조합에 도움이 되고, 다음 세대에 가면 이 문제가 자식들의 노동환경에 영향을 미칠 거라는 이야기를 해야 한다</u>.<br /> <br /><strong>이광일</strong> : 사회연대전략 자체보다는 연대가 왜 필요한지를 받아들여야 하는데, 그런 의도라면 좋다고 본다. <u>대중을 주체화시킬 수 있는 어떤 계기로서 제안하고 실질적으로 하겠다고 한다면 의미가 있다. 그러나 현재 드러난 게 없어 평가하기는 이르다</u>. 민주노동당이 실질적으로 못했다. 거대한 소수 전략을 표방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홍석만 선생님이 이야기한 여러 가치들에 대해, 노중기 선생님이 대중들에게 별반 소용없다고 하는데 그렇지는 않다. 근본적인 전환 없이 1만 원, 10만 원 내고 하는 게 이벤트는 될 수 있지만, 이걸 해석하지 않으면 안 된다.<br /> <br /><strong>노중기</strong> : <u>연대전략은 프레임, 형식 틀이 문제가 아니다</u>. 프레임이 나오면 그 프레임 틀만 놓고 스웨덴 정책과 비슷하다, 사민주의다 개량이다 라고 하는데 그건 아니다. 스웨덴은 권력을 잡고 있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다. 노조가 그랬던 걸 다 개량으로 볼 수 있느냐. 그런 점에서 반계급적이다, 계급타협적이다는 식의 좌파의 태도는 문제가 심각하다고 생각한다. <u>이 문제 나올 때마다 좌파는 계급적인 전투적 투쟁의지를 꺾어놓는 거다, 타협적인 거다 라고 비판하는데 그래서 결과가 뭐냐. 2006년부터 2-3년간 제대로 된 정치세력화 내용이 아니라고 그렇게 비판했다고 치자. 이론적으로 아무리 세련 되도 정규직, 비정규직 구조적 분절을 정당화 하는 이상의 의미가 없다</u>. 정규직 비정규직 문제 바람직한 게 아니라면 새로운 다리를 내는 시도를 해야 하는데, 그것 없이 비계급적이다 계급타협적이다 라고 한다면 주관적 의지와 관계없이 구조적 분절을 정당화하고 만다. 그런 좌파는 서구에서도 많이 봤다.<br /> <br /><strong>홍석만</strong> : 앞에서 과도하게 정치적으로 비판하는 요소가 있다고는 말씀드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 지나치게 의미부여하는 게 문제의 근원이 아니냐는 거다. 비정규직 지원 등을 정책적으로 접근한다면 기존 민주노조에서 의식적으로 작동할 수 있겠지만, 논쟁 자체가 과하게 번져나가는 게 처음부터 그런 의도를 제공한 게 아니냐.<br /> <br /><strong>노중기</strong> : 반대로 질문하면, 정책적인 사안으로 현실적으로 보자면 그렇게 접근하자는 말씀 같은데, 연대전략이라고 이름붙일 만한 게 뭐가 있는가.<br /> <br /><strong>홍석만</strong> : 임금연대 관련해서는 국내적으로 다시 검토될 필요가 있다. <u>기본적으로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정규직 비정규직 간의 연대에서 어떻게 할 거냐의 문제이다. 일자리 노동시간 문제도 그 관계 속에서 풀어야 한다. 사회공공성 문제는 생산수단의 통제를 놓고 연대가 필요한 문제인데, 국가 생산물이 공공서비스 형태로 나타나는만큼 그와 관련한 사회적 통제를 위한 연대를 어떻게 이룰거냐를 논의해야 한다.</u> 최근 이철호 선생님과 워크샵을 하면서 나온 이야기가 있다. 일제고사 진단평가 할 때 교사가 시험감독을 거부할 권리가 있는데 혼자하면 어렵지만 같이하면 총파업이 된다. 아이들 교육권, 수업 통제권 등 국가의 정책 자체에 대한 문제제기를 일방적으로 하는 게 아니라, 전교조와 학부모단체가 시험감독을 거부하고, 시험 본 다음 답안지를 안내는 방식 등의 협약을 맺는 거다. 국가정책으로서의 교육문제에 대한 상호간의 통제력을 연대 속에 형성할 수 있을 것이다. <u>물 사유화 관련해서도 공무원의 태만의 문제가 지적되는데, 그걸 개혁하기 위해 공무원이 바뀌어야 한다는 주장과 함께 공무원 스스로 박정희 정권의 유산을 철폐하기 위한 조건을 제시하고 환경단체, 지역주민과 깨끗한 물을 위한 협약을 맺고 생산수단을 통제하는 운동도 가능할 것</u>이다. <u>가치와 연대에 대한 상상력을 키워가는 방향으로 계급대중과의 연대, 사회화를 위한 연대를 할 수 있을 것</u>이다. 최근 진보신당의 연대전략 제기 방식은 좀 내부용 같다는 생각까지 든다. 한국사회 진보 전체의 프레임으로 놓고 보면 진보신당의 연대전략은 마땅해 보이지 않는다. 생산물과 생산수단을 놓고,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현실화하는 연대를 구체화하는 고민이 필요하다.<br /> <br /><strong>이광일</strong> : 전략이라는 이름을 쓰면 과거의 기억이 있는데, 전략이든 정책이든 진보정치에서 연대를 한다면 뭔가 업그레이드 되어야 한다. 노동자 내부 연대든, 다른 연대이든 그걸 통해서 대중들이 자립적으로 일어서는 계기를 제공해야 한다. 정책이 아무리 좋다 해도 상승되는 수준에서 비로소 연대의 의미가 있는 거다.<br /> <br /><strong>노중기</strong> : 의지와 현실이 다른 건데...<br /><strong>이광일</strong> : 진보의 재구성이 그런 거다. <br /><strong>홍석만</strong> : 좌파적 상상력이 많이 필요한데 전체적으로 논의지형이 너무 협소하다. 뭔가 비판 하면 나오는 반응들이 너무나 정형화되어 있고, 탈출구가 필요한 시기다.<br /> <br /><strong>노중기</strong> : 생산수단, 공공부문, 임금연대 등과 관련해서 국민연금, 노동시간, 최저임금 연대가 별개가 아니다. 선거 과정에서 이 세 개를 내오고 전략적 연대의 전부다 라고 한다면 차원이 다르지만, 그런 건 아니고, 정책안을 실무선에서 최종 사인을 한 게 본인이었다. 임금연대로, 임금 외 노동조건의 통일성을 높이는 연대 즉 노동시간 문제를 들었다. 추상적 큰 틀에서 보면 임금연대이다. 국민연금은 다른 문제일 수 있지만 2000시간 노동시간 같은 건 명확히 임금연대의 성격을 갖는다. 야간이라도 노동 투입되고, 비정규직 일자리 안정적으로 확보하고, 소득을 확대한다는 가능성이 있어 하자는 거다. <u>넓은 의미에서 임금연대는 계급 내부의 연대이다</u>. 이는 전노협 시절부터 중요하게 다뤄왔다. 노조 깨지면 옆에 노조가 연대하고, 금속이 KBS 막아주고 그렇게 연결된 것 아닌가. <u>ILO공대위, 전노대 만들어 민주노총 간 거고, 국민파가 뿌리를 내리는 과정에서도 연대의 노력을 계속해온 것이 노조운동이었다</u>. 대기업 중심의 연대는 그런 노력 안 하고 고착된 거다. 돈도 안내고 총파업도 안 되고. 노조 내부에서 그 돌파구는 더 이상 가능성이 없어보인다. 좌파 지도부가 민주노총을 잡을 것 같지도 않고, 잡아도 어떻게 될 지 모를 일이다. 그런 점에서 굉장히 큰 사업이다. 이걸 못하면 임금연대는 불가능하다. OECD 국가 모두 년 2000시간 미만이다. 홍석만 선생님이 국가 생산수단의 통제를 놓고 연대를 하자는 데 적극 동의하고 진보신당도 그렇게 본다. 그런데 어려움이 있다. 개인적으로 공무원노조에서 그런 경험이 있다. 노조가 전반적으로 그런 요소가 있지만 공무원노조도 경제주의적인 성격이 강해, 자기 이해관계는 철저한 보장을 전면에 내세우지만 자기 내부적인 문제를 드러내는 데는 인색하다. 국민적 비난은 뜨거운데 공무원노조를 보호하자고 하니 씨가 안 먹힌다. 발전도 마찬가지다. 핵발전소 짓자고 하면서 발전 파업 하겠다면 환경운동이 나서서 도와주겠는가. 연대가 어려운 부분이 분명히 있다.<br /> <br /><strong>홍석만</strong> : 정책으로 접근하자면 노동시간 일자리연대 연 2000시간, 정규직이 잔업특근을 나서서 하는 이유가 자기재생산 비용 마련 때문이다. 자기 미래가 불안하고 자녀 교육비 문제가 있는 상황에서 정규직도 어려움이 있는 건 마찬가지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노동 참여 배경에도 사교육비 문제가 큰데, 결국 이걸 해결하지 않고서 되겠는가. 노동정책 자체가 노동 하나만 놓고 해결할 게 아니라 노동자의 생활 영역과 다 연결되어 있는 거라 어디서부터 풀어나갈 지를 총체적으로 봐야하지 않겠는가.<br /> <br /><strong>노중기</strong> : 물론 전방위적으로 매스를 가해야 한다. 그런데 <u>모든 삶이 신자유주의 때문이야 그 자체로는 안 되고, 정규직 비정규직 문제를 본질적으로 풀어야 돼 라고 하는 것도 문제를 떠넘기는 거</u>다. <br /><strong>홍석만</strong> : 그건 동의한다. <br /><strong>이광일</strong> : 요즘 그런 사람은 잘 없다.<br /><strong>노중기</strong> : 좌파 현실에서는 있다. <br /><strong>이광일</strong> : 좌파나 진보나 어느만큼 내용 있게 설득력 있게 하느냐 하는 문제이다. 한편으로는 신자유주의의 문제를 부단히 이야기 하는 것도 필요한 거다.<br /> <br /><strong>노중기</strong> : 어디까지가 좌파냐 하는 게 헷갈리는 시대가 왔는데 어떻게 보면 바람직한 상황이다. 가령 민주노동당에 잔류한 한 좌파에게서 그런 반응이 있다. 2000시간 문제 고리 끊는 건 고통스러운데 지금도 정규직한테 어려운 문제이고, 애들 서울 유학가면 1년에 2천만 원 드는데 잔업 안하면 턱도 없다. 엄청난 요구다. 이거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러나 작업현장에서 만나는 장시간 노동시간 문제와 교육 문제는 영역으로 볼 문제다. 직접적인 노동 문제는 아니다. 노동자가 진보신당 활동을 통해 그 때는 지역 시민으로서 사교육 문제 정치의식화 가져가고, 두 가지를 같이 풀어가는 과정이 필요한 거다.<br /> <br /><strong>이광일</strong> : 교육 전문가들이 새로운 발상과 새로운 수단을 이야기해야 한다. 브레튼우즈 시대 발전국가와 신자유주의 국가가 다른 게 뭐냐면, 앞은 독재를 해도 노동자 착취나 민주주의를 제한해도 규범적으로 온당한 것으로 생각지 않았다. 신자유주의는 그렇지 않다. 이 세상 원리가 그것이고, 그것을 벗어나서 다른 대안이 없다고 이야기하는 게 차이다. 그런 차원에서 신자유주의는 정치적으로나, 철학으로나, 생태적으로나 더 다차원적으로 교육되어야 한다. 신자유주의자들도 다원주의 이야기한다. 우리가 다양성을 부정하지 않으므로 다양성을 살리기 위해서라면 신자유주의에 대한 다양한 비판을 해야 하고, 그런 연대전략을 가져야 한다. 이런 맥락을 대중이 5-10%만 받아들이게 되더라도 엄청난 거다. 선거에서 45%가 기권을 하는데 10%만 그렇게 생각해준다면 큰 의미가 있을 것이다. 정당이든 계급좌파든 비계급좌파든 다 중요한데, 계급정당 만들어진다 하더라도 성향상 정당 활동을 안 하는 사람들도 있다.<br /> <br /><font color="#006699"><strong>사회자</strong> : 10% 이야기를 했는데, 진보진영의 과제라는 점에서 10% 전략은 무엇이 될 수 있겠는가, 이 과제와 함께 계급적 좌파든 진보정치세력이든 향후 정치세력의 재편이나 전망 이야기로 넘어가자.</font> <br /> <br /><strong>노중기 : 계급정당의 내용 담보되면 구체적인 논의 가능할 것 <br />이광일 : 조직 형식이 아니라 진보 가치 논의 확장이 중요 <br />홍석만 : 사회화 전략 갖는 계급정당 만들겠다</strong><br /> <br /><strong>홍석만</strong> : 민주노동당이나 진보신당도 강령에 민주적 사회주의 라고 쓰고 있다. 말하자면 사회주의적 가치를 이야기해본 적은 없다. 무상교육, 무상의료도 서구 복지국가 형태인데, 선거 시기 실현가능한 정책을 이야기하다보니 그럴 수도 있지만 반복되면 당의 정체성도 규정되기 마련이다. <u>사회주의정당이라기보다는 사민주의에 가까운 내용의 정당이 한국 사회 급진적인 정당으로 자리</u>잡고 있는 거다. 사회주의정당이 필요하다고 본다. <u>다른 무엇보다 대중의 삶에 대해 국가의 공적인 보장, 노동자 중심적인 가치와 시각에 따른 운영원리와 생태, 여성, 평화의 가치가 결합하는 정당이 필요하다. 그 교두보가 생산수단의 사회화 문제이고, 그걸 제기하고 연대하고 싸우는 가치와 내용을 담는 정당을 만들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진보신당은 정치공학적 사고 측면이 크다</u>. 프레임은 유효할 수 있으나 그것이 발현되는 계기를 만들어야 하지 않겠는가.<br /> <br /><strong>노중기</strong> : 계급좌파는 그런 걸 어떻게 하고 있나.<br /> <br /><strong>홍석만</strong> : 출발이다. 대선, 총선 정치적 격변기를 맞아 입장과 의도를 밝히고 그래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사회주의노동자연합은 현장 노동자 중심의 비공개 정치단위들이 정치연합의 형태로 공개적인 노동자정당 건설을 자기 목표로 제시했다. 현장활동가와 지식인 일부가 변혁정당건설모임을 꾸리며 구상을 논의한 바 있으나 구체적으로 확장되지는 않았다. 노동자의힘은 내년 초까지 자신의 당으로의 전화가 아니라 제3지대에서 당 건설 동의 세력과 함께 계급정당을 건설한다는 계획이다. 아직 구체적인 결합 방식이나 단위가 가시권에 들어오는 건 아니다. 이제 막 시작인 거 같다. 한편으로는 이것마저도 공학적인 성격이 있다. 사람이란 게 빤한데 누가 와서 만들어주는 게 아니고, 현 상태에서 계급정당이 자신의 당적 수준의 활동을 어떻게 가져가느냐의 문제, 어떤 노선과 정책을 갖고 나아가느냐가 중요하게 제기되는 것 같다. 사회화 운동을 제대로 하는 당, 그런 프레임을 형성하는 당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바램이 있다.<br /> <br /><strong>노중기</strong> : 사회화가 정확히 어떤 의미이냐. <br /><strong>홍석만</strong> : 아니, 다 아시면서... <br /> <br /><strong>노중기</strong> : 공적 삶, 노동자 중심적인 가치 다 동의되는데, 구체적으로 쟁점이 없는 건 아니지만 지금 진보신당은 평등파가 주류다. 좌파적인 부분, 평등파 주류, 사민주의 우파 일부까지 모여있는데, <u>국가의 공적 삶의 보장이란 게 구체적인 실현태가 안 나오면 사회주의 전망 갖는 계급정당도 눈에 안 들어올 거다</u>. <br /> <br /><strong>홍석만</strong> : 빨리 계급정당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이고, 노중기 선생님이 진보신당 가는 거 보면서 그런 생각 많이 들었다. <br /> <br /><strong>이광일</strong> : 진보신당과 많은 세력이 이야기를 하는 건 필요하다. <u>꼭 같이 해야 한다는 차원이 아니라 무엇이 다른가 하는 걸 분명하게 보여줘야 한다</u>. 노중기 선생님이 다 받아들인다고 하는 점에서도 그렇다. 논의가 필요하다. <u>정당의 성격과 위상은 다르므로 새로운 당을 만들어도 된다. 그런 과정을 거쳐야 조직의 위상이나 성격은 달라도 새로운 연대를 할 수 있는 거다</u>. 홍석만 선생님이 이야기한 것은 중요하지만 가치 문제를 이야기해야 한다. 생태, 평등, 평화의 연대 그러한 부분들이 어떠한 연관성을 갖는지, 신자유주의는 추상이 아니다. 가령 평화를 이야기하면 남북간 국가간 평화만 이야기한다. 그런데 그거 확장하면 국가적인 데서 벗어나는 거고, 거기서 신자유주의 문제를 보게 되는 거다. 사회주의 문제도 그렇다. <u>사회주의는 자기 스스로 열려있다는 것이고, 꼬뮨으로 가는 거다. 진보신당이나 계급정당이나 꼬뮨주의에 입각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생태니 여성이니 평화니 노동이니 같이 할 수 있는 걸 하자는 것은 말장난이 된다</u>. <br /> <br /><strong>홍석만</strong> : <u>노동자국가가 장기적 목표라고 한다면 생산수단 통제 문제가 주요한데, 그걸 어느 정치세력도 제기하지 않고 있다</u>. 한 급진적인 좌파진영이 투쟁강령이라며 은행의 국가 소유라는 걸 내놨는데, 그걸 위해 싸우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성명서 한 장 안 내놓는다. 사회주의가 자기 신념체계인지는 모르나 발현되는 적은 없다. 총선 때 거제에서 대우조선 매각을 놓고 민주노동당 후보는 합리적 매각이라 하고, 진보신당 후보도 노동배제적인 매각 반대한다는 이야기를 하던데, 일괄매각이나 경영권 포함하는 매각은 안 되고, 우리사주 20%나 국내 매각으로 경영권 안 넘기면 되고 식이다. 이게 뭔가. 결국 국민주 매각을 동의한다는 건데, 대우조선해양은 국유기업이고 세계 3위 조선업종이다. 진보정당이 지금 그런 매각을 동의한다고 이야기한다. 이게 과연 진보냐 라는 거다. 그런 점에서 <u>생산수단의 노동자 통제 문제, 그걸 주장하고 투쟁하는 정당이 사회주의적인 것을 할 수 있지 않겠는가</u> 라고 본다. 사민주의와 사회주의의 경계가 모호하고, 사회주의가 사민주의 포괄하며 넘어서는 구조라는 것으로 이해한다. <br /> <br /><strong>이광일</strong> : 대우조선 보면, 진보의 마지노선이 공공재 사유화 반대인데, 외국자본 국내자본으로 구분하는 건 우스운 거다. 삼성이 국내자본이냐, 아니다. 이미 글로벌자본이다. <u>신자유주의에 있어 진보가 가장 버리지 말아야 할 것은 공공재 부분이나 공공기업이나 이의 민영화를 철저하게 반대하는 데 있다. 데이빗 하비가 제2의 원시적 축적이 신자유주의라고 했는데 남은 게 그거밖에 없다</u>. 홍석만 선생님이 논의 테이블 열리면 노동자의힘이든 사회주의노동자연합이든 그런 문제제기를 구체적으로 했으면 한다. <br /> <br /><strong>노중기</strong> : 국유화와 관련 대우조선 매각을 포함해서 생산수단의 사회화가 이론적 측면과 함께 정책 실행 과정 문제가 복잡할 것으로 생각된다. 지금 느낌으로 보면 모두가 달리는 국면이고, 새로운 출발점에 선 거 같다. 진보신당이라 해서 특권은 아니고, 새로운 조직을 만드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u>진보의 고유한 가치가 있지만 그 실현형태는 이론적으로 많이 허물어져있다. 실현 형태를 만들어야 하는 문제이고, 진보, 계급, 노동자 중심성의 고도의 추상적 합의가 있다면 그 나머지는 각 조직이 호혜적으로 경쟁할 문제이다. 진보신당 내부의 경쟁이든, 민주노동당과 계급정당과의 외부의 경쟁이든, 이론적 논쟁도 해야겠지만 결국 실천적인 내용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계급정당 만드는 것도 내용이 담보되면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거다</u>. 항상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누가 더 올바른 입장이냐, 누가 더 현장에서 많이 조직했냐를 우리끼리만 하면 점점 더 힘들어지게 된다는 점이다.<br /> <br />-------------------------------------------<br /><strong><a title="[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4221749315&code=940702]로 이동합니다." target="_blank" href="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4221749315&code=940702"><font color="#333333">[민주노조운동 20년, 위기의 민주노총]“사회연대에 인력·예산 쏟겠다”</font></a></strong> (경향, 정제혁기자, 2009-04-22 17:49:31)<br /><strong><font color="#193da9">ㆍ민주노총 한석호 미조직·비정규실장(45)</font></strong><br /> <br />-사회연대운동본부의 성격과 구성 시기는.<br />“사회연대운동본부는 민주노총의 산하조직이 아니다. 민주노총은 물론 비정규직 단체, 시민·사회단체, 진보정당, 청년층이 참여하는 조직이다. 조직 구성과 활동 방향은 현재 초안이 만들졌으며 이를 통해 내부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 우선 노동절 조직위원회에 참여하고 있는 시민·사회단체를 상대로 계획을 제안할 방침이다.”<br /> <br />-사회연대운동본부는 어떤 일을 하게 되나.<br />“대략 열 가지 정도의 사업을 고려하고 있다. 비정규직과 실업자, 구조조정 등 일자리 문제 대응이 핵심 이슈가 될 것이다. 일자리 문제는 단지 노동만의 문제가 아니다. 사회·정치적인 문제이다. 때문에 전 사회적인 운동이 필요하다. 인력과 예산을 쏟아붓겠다는 결의가 돼 있다.” <br /> <br />-민주노총 내부의 연대도 필요해 보이는데. <br />“조직 내부의 소통과 단결이 필요하다. 지난 10년간 내부 소통에 문제가 있었고, 갈등도 심했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 먼저 총연맹과 산별노조, 지역본부, 단위 사업장 사이의 소통을 활발히 할 것이다. 또 정파간의 소통과 타협도 필요하다. 정파들이 더이상 반목해서는 안 된다는 공감대는 이미 형성돼 있다.”<br /> <br />-비정규직을 ‘고용안전판’으로 여기는 정규직 조합원의 정서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br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교육과 선전, 홍보를 대폭 강화할 것이다. 그동안 실종됐던 현장토론도 활성화할 생각이다. 비정규직과 연대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도 중요하다.” <br /> <br />-비정규직 사업에 인력과 예산을 투입하는 데 대해 정규직 조합원의 반발이 우려되는데.<br />“현장 조합원들도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해서는 미안한 감정을 갖고 있다. 비정규직의 고용이 안정돼야 한다는 원론에는 동의하고 있다. 다만 자신의 고용이 불안정해질까봐 실천을 못하는 것뿐이다. 정규직 조합원들의 반발은 없을 것이라고 본다.”<br /> <br />-----------------------------------------<br /><strong><a title="[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0429113508&Section=03]로 이동합니다." target="_blank" href="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0429113508&Section=03"><font color="#333333">"남 탓만 하다간 진보 진영 몰락은 시간문제"</font></a></strong> (프레시안, 이상호 금속노조 정책연구원 연구위원, 2009-04-29 오후 3:03:48)<br /><strong><font color="#193da9">[기고] 민주노총이 말하는 '사회연대전략'의 ABC<br /></font></strong> <br />'사회연대전략'이 다시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지난 1일 민주노총 대의원대회에서 보궐 집행부의 위원장 후보로 나선 임성규 비대위원장은 민주노총이 앞으로 정규직 조합원 중심의 경제적 실리주의에서 벗어나 미조직노동자, 사회적 약자, 소외된 서민들과 소통하고 함께 하는 사회연대운동에 기반한 노동운동을 할 것이라고 공언했다.<br /> <br />이튿날 당선 기자회견에서 임 위원장은 '사회연대노총'으로 거듭나기 위해 사회연대전략의 구체적 내용을 제출하고 조직체계도 바꾸겠다고 약속했다. 위원장의 약속에 따라 민주노총 내부에서는 독자적인 단위를 구성해 사회연대노총으로 가기 위한 깊은 논의가 진행 중이다. 5월 1일 노동절에 맞춰 이른바 '사회연대선언'도 발표할 예정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사회연대전략'은 이미 지난 2007년 1월 민주노동당 대표의 신년 기자회견을 통해 우리 사회에 처음 알려졌다. <br /> <br />민주노조운동에게 '연대'란 익숙하면서도 불편한 가치다. 노동자의 단결과 투쟁을 위해서는 노동자의 연대가 필수적이라고 알고 있지만, 현실적 조건과 이기적 본성을 이겨내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님을 경험적으로 확인하고 있다.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수많은 연대투쟁을 벌였고, 1995년 노동자연대의 틀로서 건설된 민주노총은 그 성과였다.<br /> <br />당시만 하더라도 평등사회를 건설하는 사회비전을 가진 민주노조운동은 한국사회의 변혁을 위한 주체세력인 동시에, 억압받는 민중들에게 신뢰받는 연대세력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연대의 가치는 98년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본격화된 신자유주의 경제체제로 인해 파편화되고 협소화되고 말았다.<br /> <br />노동자의 연대투쟁은 민주노총의 총파업으로 형해화되고, 민중연대활동은 집회지원으로 대체됐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민주노조운동의 '연대'는 '우리만의 리그'에서 통용될 뿐, 사회적 약자와 계급 내 소수자에 대한 '사회연대'는 서서히 실종되고 말았다. 대기업 조직노동자에 대한 따가운 사회적 여론은 이를 반영하는 것이고, 민주노조운동이 봉착하고 있는 사회적 고립이 이러한 상태를 잘 보여주고 있다.<br /> <br />과연 그렇다면 <u>지금 왜 다시 민주노조운동은 '사회연대'라는 시대적 가치를 화두로 삼아야 하는가? 그 이유는 경제위기 국면에서 더욱 악화되고 있는 한국 사회의 양극화와 차별화를 저지하고 민주노조운동의 사회적 고립을 극복하기 위한 민주노조운동의 전략적 대응방침으로 '사회연대'가 절실하게 요구되기 때문</u>이다.<br /> <br />모름지기 '사회연대'는 지배계급의 이념이 될 수 없다. 바로 우리, 사회적 약자들이 지향해야 할 가치이며, 운동방식이다. 즉 <u>경제위기로 인한 양극화와 차별화의 심화가 자본과 정권에 일차적 책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내부격차를 해소하는 과정에서 조직 노동자들의 실천적 역할과 활동이 중요</u>하다.<br /> <br /><u>모든 것을 저들의 탓으로만 돌리기에는 사회경제적 현실이 너무나 참혹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계급 내 응집력을 복원하고 계급 간 전선을 제대로 구축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약자들의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조직노동자의 연대와 실천이 반드시 필요</u>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제위기의 현실 속에서 미조직 노동자, 더 나아가 영세업자 및 서민 등 사회적 약자들은 민주노조운동에게 묻고 있다. '사회양극화의 극복과 새로운 사회건설을 위해 민주노조운동은 우리와 함께 무엇을 구체적으로 실천하고 있는가'라고.<br /> <br />정부와 자본에 대한 투쟁만으로 민주노조운동의 역할을 면피할 수는 없다. 이제 기존의 인식과 관행을 넘어서야 한다. 계급 내 조직노동자의 인내와 결단을 통해 '사회연대전략'이 구체적으로 실천될 때, 비로소 민주노조운동은 사회적 고립을 극복하고 계급대표성을 확보할 수 있는 사회적 인정을 받게 될 것이다.<br /> <br />이러한 필요성에도 불구하고 민주노조운동의 '사회연대전략'은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이는 지난 2007년 1월 민주노동당이 불붙인 '국민연금 보험료 지원 사업' 논란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기존 국민연금 가입자(정규직)가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미가입자(비정규직)의 보험료 지원에 일부 기여하는 방안을 담고 있는 이 사업은 정규직과 비정규직 노동자의 내부 분화를 극복하기 위한 계기를 마련한다는 실천적 의미에도 불구하고 소위 '사회연대전략'을 둘러싼 진보진영 내부의 뜨거운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br /> <br /><u>민주노총의 '사회연대전략'은 평등사회의 건설을 위한 계급 내 연대를 강화하는 민주노조운동의 비전으로서 제시돼야 한다. 기존의 '국민연금 보험료 지원 사업'이라는 일면적 사업으로 기획되기 보다는 임금격차해소와 사회적 임금확보를 위한 '소득연대', 노동시간단축과 고용안정망의 구축에 기반한 '고용연대', 지역사회공헌과 지역공동체형성을 위한 '생활연대', 보편적 복지체계와 사회안정망의 강화를 위한 '복지연대'라는 종합적인 '사회연대전략'으로 구성되어야 한다</u>.<br /> <br />정규직 노동자의 보험료 지원이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정규직의 책임론을 강화할 것이라는 비판이 있었다. 이는 조직 노동자에 대한 정부와 자본의 이데올로기적 공세가 심각한 상황에서 사회연대전략이 정규직 노동자의 책임론으로 와전될 가능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br /> <br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u>'사회연대전략'이 지닌 정규직 책임론에 대한 공세적 대응의 의미를 무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국민연금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수많은 저임금,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한 조직노동자의 연대적 실천이라는 의의를 도외시하고 있다. 특히 미래급여의 일정수준 인하를 통해 미가입자의 실질적인 혜택을 주자는 주장에 대해 '임금삭감론'으로 치부하는 과정에서 조직노동자의 기득권 유지 입장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u>.<br /> <br />이와 같이 소위 정규직의 '책임론'과 '양보론'은 앞으로 민주노총이 다양한 형태의 '사회연대전략'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가장 많이 부딪히게 될 비판일 것이다. 하지만 민주노총의 '사회연대전략'이 미조직, 비정규직에 대한 '연대'가 될지, 아니면 정규직의 '양보'가 될 지 선험적으로 예단할 수는 없다. <u>더 중요한 것은 '사회연대전략'의 실천을 통해 사회적 약자들과의 연대활동과 투쟁을 얼마나 굳건하게 만들 수 있는지에 달려 있다. 따라서 지금 민주노총의 '사회연대전략'은 정규직의 '책임론'에 위축되어 수세적이고 방어적인 대응에 머물렀던 민주노조운동의 관행과 관성을 깨뜨릴 수 있는 계기로 만들어야 한다</u>.<br /> <br />"'사회연대전략'으로 인해 노동자계급의 분열이 초래되고 민주노총의 투쟁이 약화될 수 있다"는 비판이 있었다. 이에 대한 근거로 '사회연대전략'의 당내 이견과 갈등, 더 나아가 민주노총 지도부의 반대 등을 들고 있었다. 하지만 이 주장은 <u>'국민연금 보험료 지원사업'이 추구한 궁극적인 목표가 단순히 연금사각지대에 있는 미조직, 비정규노동자들에게 경제적 이익을 베푸는 것에 있기 보다는 양극화와 차별화에 찌들어가는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조직노동자들의 연대적 실천을 통해 계급내부의 응집력을 강화시키는데 있다는 사실을 보지 못했다. 또 이들은 계급구성의 분화와 차별이라는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계급내부 구성원들의 공통된 경험과 의식을 통한 신뢰형성이 전제되어야 하고, 이를 통해 응집된 사회정치적 정체성이 계급의식으로 발현된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다</u>.<br /> <br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민주노총의 '사회연대전략'은 정규직 조직노동자들이 미조직 비정규노동자는 물론, 한국사회의 사회적 약자로 대변되는 민중과 서민들의 생활현장과 삶의 고민을 경험하고 그 문제점을 공감할 수 있는 방향으로 추진되어야 한다. 이와 같이 2007년 '국민연금 보험료 지원사업'을 계기로 촉발된 '사회연대전략'에 대한 논란은 '투쟁회피론'이라는 전술적 비판에서 '정규직 책임론', '계급분열론'과 같은 전략적 논의로 비화되었다.<br /> <br />하지만 이러한 논리적 쟁점 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을 포함한 진보진영의 '소통의 한계'와 '실천의 부재'라고 평가할 수 있다. 각 정파세력은 정책핵심라인의 전략적 고민 속에서 마련된 사회연대적 실천사업을 특정 세력의 기획물로 오도함으로써, '사회연대전략'의 기본취지와 운동적 의미를 무시하고 정파논란으로 귀결시키고 선거정치에서 악용하였다.<br /> <br />한편 이러한 문제점과 함께, 당과 노조지도부, 더 나아가 내부정파와 단위조직의 '실천적 의지'의 부족은 '사회연대전략'의 실험조차 불가능하도록 만들었다. 이러한 경험은 심각한 정파갈등과 취약한 토론문화에 노출되어 있는 민주노총이 '사회연대전략'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봉착할 수밖에 없는 문제를 예고하고 있다.<br /> <br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u>민주노조운동 지도부와 정파조직으로 대표되는 의사소통의 '횡적 구조'를 복원하는 동시에, '사회연대전략'에 대한 평조합원과 간부간 의사소통을 활성화해야 한다. 또한 이론적이고 추상적인 거대담론적 논란에 치중하기 보다는 민주노총의 '사회연대전략'을 사회적 약자들이 피부로 느낄 수 있고 조직노동자들이 자긍심을 가질 수 있는 구체적인 실천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한다</u>. 바로 이러한 과정을 거쳐야만 민주노총의 '사회연대전략'은 진보진영의 혁신의 계기로 작용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민주노조운동의 새로운 사회비전으로 위상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br /> <br />-----------------------------------------<br /><strong><119주년 세계노동절 사회연대선언> 사회연대의 새로운 깃발을 듭시다</strong> (2009년 5월 1일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위원장 임성규)<br /> <br />한국경제가 위기를 넘어 공황에 다다르고 있습니다. 사실상의 실업자가 400만명에 육박했고, 기초생활보장에서도 제외된 빈곤층이 전체 인구의 10%에 가깝습니다. 경제공황은 다름 아닌 자본주의와 시장주의의 파국입니다. 이 파국 속에 모든 책임이 노동자와 서민에게 돌아오고 있습니다. 서민의 빚은 날로 늘어 802조원에 이르렀는데, 갈 곳이 없어 은행에 잠자고 있는 부자들의 돈이 800조원입니다. 83%의 사유지를 5%의 부자국민이 독점하고 있습니다. 쌍용자동차 2천6백43명, 철도공사 5천1백15명, 구조조정 숫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나지만, 자본금의 10배가 넘는 잉여금을 쌓아두고 있는 재벌들의 곳간은 열릴 줄을 모릅니다. 바로 자본주의 자체의 모순과 병폐 때문입니다. 소수의 가진 자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더 쥐어짜야 유지되는 사회, 극에 이른 빈부격차를 더 키워야만 돌아가는 이상한 경제, 노동자가 수없이 잘려 나가고 자영업체가 문을 닫아도 경제지표는 오히려 성장하는 경이로운 나라, 바로 대한민국입니다. 부패와 착취, 야만은 자본주의 대한민국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br /> <br />노동자도 인간임을 선언하며 건설된 민주노조는 지난 시절 해고와 구속․수배 등 모진 탄압 속에 전진해 왔습니다. 노동법 날치기에 맞선 총파업과 노조탄압에 맞선 동맹파업 등 수많은 투쟁과 함께 성장해온 민주노총은 노동자의 대표체이자 자부심이었습니다. 그러나 <u>민주노조운동은 자신의 임무를 모두 수행하지 못했습니다. 노동자 내부의 격차와 차별은 더욱 심화됐습니다. 재벌대기업의 팽창과 시장개방으로 영세자영자와 농민은 벼랑으로 내몰리고 있습니다. 교육과 의료, 주거 등 공공부문의 시장화를 막아내지 못했습니다. 수없이 강조하고 투쟁했던 비정규직 문제는 여전히 무겁게 남아있습니다. 수차례에 걸쳐 혁신을 약속했지만 실천으로 이어지지 못했으며, 혁신에 대한 불신은 투쟁과 요구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민주노조운동이 벌인 투쟁의 성과가 오히려 노동자 내부의 차별로 전화되는 역설적 상황을 맞고 있습니다. 민주노조운동의 자랑스러운 대표체인 민주노총이 ‘정규직 노동자’의 조직으로 간주되고 비판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민주노총은 보다 근본적인 혁신 없이는 목표를 이루기 어렵다는 교훈을 얻었습니다</u>.<br /> <br />자본의 위기와 민주노조운동의 반성은 그 자체에 대한 분석에 머물러선 안됩니다. <u>새로운 운동으로 발전하고, 새로운 가치를 담아내는 근거와 발판이 돼야 합니다. 민주노총은 ‘사회연대 운동’을 제안하고 선언합니다. 조직된 노동자만의 임금․고용투쟁을 넘어 비정규직과 중소영세사업장, 이주노동자 등 전체 노동자의 차별을 해소하기 위해 어깨를 걸고 나아가야 합니다. 노사간의 임금투쟁 뿐만 아니라 의료․교육․주거 등 사회보장 제도를 확충하고, 보다 나아가 사회구조의 근본적 개혁을 외쳐야 합니다. 선배 노동자들이 ‘민주성’을 조직의 생명으로 삼아 민주노총을 만들었다면, 이제는 ‘연대성’을 혁신의 징표로 삼아 사회연대노총으로 거듭 나겠습니다. ‘사회연대’는 비단 민주노총의 새로운 깃발만이 아닌,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u>이기도 합니다. 파국으로 치닫는 자본주의의 질주를 막아내고, 경제위기를 빌미로 노동자․서민의 삶을 파괴하는 이명박 정부의 잘못된 정책을 중단시키기 위한 무기로서의 사회연대입니다. 각 부문별 싸움이 아닌, 전체 민중이 하나의 깃발 아래 투쟁하기 위한 기치로서의 사회연대입니다. <u>사회연대는 공장 안에 갇힌 투쟁을 넘어, 공장 밖의 사회적 의제에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는 실천입니다. 노동의제에 한정된 ‘노동운동’을 넘어, 노동자가 펼치는 사회연대 운동인 ‘노동자 운동’으로의 전진</u>입니다.<br /> <br />민주노총은 오늘 노동절을 맞아 <u>‘사회연대헌장 제정운동’을 제안합니다. 노동자, 시민, 사회운동이 자기 혁신에 기반한 각각의 사회연대 요구를 아래로부터 만들어 내고, 이를 바탕으로 공동의 사회연대 헌장을 만듭시다. 이를 실현하기 위한 공동의 대중운동을 펼칩시다.</u> 비정규직과 영세중소기업 노동자, 이주노동자 등 모든 노동자가 온전한 노동권과 생존권을 누릴 수 있도록 싸워 나갑시다. 빈곤과 격차에 신음하는 서민에게 최소한의 교육과 의료, 주거, 노후, 보육 등 기본생활을 보장하는 사회보장 확대 투쟁을 대대적으로 전개합시다. 비정규직 정규직화와 청년실업 해소, 모든 형태의 강제해고를 막아내는 고용보장, 비정규직을 포함한 전체 노동자의 총고용을 보장하는 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일자리 나누기를 실현합시다. 실업안전망을 보다 확대하고, 고용보험 사각지대의 자영업자․청년실업자를 보호하기 위한 고용보험법 개정에 나섭시다.<br /> <br />민주노총은 5월 중순 대정부 교섭을 제안하겠습니다. <u>사회연대 전략에 걸맞는, 모두가 함께 살 수 있는 실현가능한 방안을 제안할 것</u>입니다. 아울러 이에 앞서 지금 당장 정부가 비정규직법과 최저임금법, 언론악법 개악을 중단할 것을 촉구합니다. 또한 정부가 건설․화물 등 특수고용노동자의 노동자성을 인정하지 않고 노조설립신고증을 반려하는 등 최소 국제노동기구 수준의 노동3권 보장요구마저 수용하지 않을 경우, 민주노총은 설립신고증 반납투쟁 등을 포함한 특단의 대응에 나설 수도 있음을 엄중히 경고합니다.<br /> <br />오늘 노동절 범국민대회는 사회연대헌장 제정운동의 출발점이 될 것입니다. 만일 정부가 우리의 선언과 요구를 외면하고 계속해서 노동자와 서민에게 고통 전담을 강요한다면, 강력한 사회연대총파업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엄중히 경고합니다. 정부는 사회연대총파업이 급격히 빨라질 수 있음을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br /> <br />조합원 동지 여러분, 그리고 시민여러분.<br />매년 세계 노동절을 맞아 전세계 노동자들이 단결과 연대의 정신으로 어깨를 걸고 투쟁하는 축제의 장을 만들었듯이, ‘사회연대’ 기치로 새로운 세상을 열어 나갑시다. 노동자․농민․학생․서민, 온 국민의 힘을 사회연대 깃발로 높이 세워냅시다.<br /> <br />----------------------------------------------------------------<br /><strong>민주노총의 사회연대운동과 실천․추진방안</strong> (민주노총 사무총국 토론안, 2009. 05) <br /> <br /><strong>사회연대 총론 </strong><br /> <br />1. 사회연대란 무엇인가?<br /> <br />- 연대의 사전적 정의는 “여럿이 함께 무슨 일을 하거나 함께 책임을 짐”을 의미함. 즉, 다수가 공동의 일을 하고 책임을 지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단지 사회적 약자를 불쌍하게 여기거나 돕는 봉사활동과 구별됨. 멕시코 사빠띠스타 원주민 여성이 말했듯이 “연대란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같은 뿌리의 문제를 함께 푸는 것이다”. <br /> <br /> - 사회운동에서 사회연대라 함은 서로 다른 집단이나 계급, 계층이 공동의 목표와 활동을 전개하는 것을 의미함. 즉, 사회연대란 상이한 처지에 있는 노동자, 서민들이 공동의 목표를 가지고 공동의 실천을 벌일 수 있는 사업을 전개하고 이 과정에서 공동의 의식과 경험을 만들어 가는 것임. 결국 사회연대는 노동자들이 하나의 사회정치적 주체로 성장해 나가는 계급형성과정임.<br /> <br />- 노동운동은 본래부터 연대와 평등의 정신에 기초하여 발전해왔음. 자본과 권력에 의해 탄압받고 빼앗긴 노동자들의 단결과 연대로부터 노동운동은 출발하였으며,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노동자 내부의 다양한 계층이나 부분을 참여시키고 노동자뿐만이 아니라 다양한 계급, 계층, 집단과 연대해왔음. <br />- 결국 노동운동에서 사회연대란 노동자내부의 계급적 단결과 타 계급, 계층과의 사회적 연대를 모두 포괄하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음. <br /> <br />2. 왜 지금 사회연대인가?<br /> <br />- 사회연대의 이러한 일반적 정의에 의하면 사회연대란 노동운동이 일상적으로 실현하는 사업이며, 또 반드시 관철해야 하는 사업임. 노동운동이 노동자계급과 민중의 이해를 앞장서서 관철시키는 사회운동으로서의 기능을 발휘하기 위해서 반드시 이루어내야 할 가치이자 목표임. <br /> <br />- 그러나 현재의 노동운동이 실상이 그렇지 못하고 연대의 가치가 훼손되고 있다는 점에 지금 사회연대를 논의하는 현실적 과제가 있음. 일부가 지적하듯이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노동운동이 과거의 영광과 달리, "노동자, 민중의 계급적 이익을 관철하는 운동에서 80만 정규직의 고용조건을 확보하는 운동으로, 정치적 변화와 사회변혁을 추동하는 운동에서 실리주의적 경제투쟁에 집중하는 운동으로, 사회변혁운동의 중심적 위치의 책임을 갖는 운동에서 부문운동으로" 전락해 있다는 점에서 사회연대가 제기된 배경이 있음. <br /> <br />- 민주노총은 “노동자도 인간이다” “평등사회 건설하자”며 자주적으로 단결하여 비인간적인 사업장의 노동조건을 바꾸었으며 민주노조를 건설해왔음. <br /> <br />- 지금 상황은 바뀌었음. 우리가 기업별 임금, 단체협약 투쟁에 집중하는 사이에 기업들은 정규직과 비정규직, 원청과 하청, 대공장과 중소기업, 남성과 여성, 국내 노동자와 이주노동자를 갈라치고 차별을 더욱 심화시켰음. 공공부문이 시장화되고 기업과 투기자본에 대한 규제는 철폐되어 자본의 배는 더욱 불러만 갔으며 일반 국민들의 삶은 더욱 어려워졌음. 더 이상 조직된 노동자들의 임금과 고용을 중심으로 하는 투쟁만으로는 정당성과 도덕성을 획득할 수 없으며 계급성과 변혁성을 가질 수 없는 조건임. <br /> <br /><!--StartFragment-->- 민주노조운동이 활성화되기 이전에 비해 노동운동의 성장과 더불어 노동시간이 단축되고 학력별 성별 격차는 줄어들고 있음을 알 수 있음. 그러나 97년 외환위기 이전에 비해 대폭 줄어들던 임금불평등도(0.353->0.281)는 다시 늘어나고 있음(0.306). 이는 표에서 보듯이 비정규직과 중소영세사업장 노동자들의 급증과 격차 확대를 해소하지 못한 것이 결정적 원인임. 결국 자본이 정규직과 비정규직, 원청과 하청, 대기업과 중소기업으로 분할통치하고 있으며 그 원인에 대한 공격이나 제도적 해결책없이는 사업장 차원의 임단협 중심투쟁으로는 오히려 자본의 분할통치를 강화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음. 한편 노조 조직률도 늘어나다가 오히려 87년 이전 수준으로 대폭 줄어들었는데 이는 그 핵심이 대폭 늘어난 비정규직과 중소영세기업 노동자의 조직화에 돌파구가 열리지 못했기 때문임.(2008.8 현재 정규직 노동조합 가입률 21.6%, 비정규직 노조 가입률 2.8%, 300인 이상 정규직 조직률 19.9%) <br /> <br />- 사회적 연대와 관련해서도 마찬가지로 우리가 임, 단협 투쟁에 집중하는 동안 사회전반의 영역이 시장화, 상품화로 변화되었음. 임금이나 고용조건의 개선투쟁은 이러한 사회전반의 시장화, 상품화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기 때문에 사회전반의 빈부격차는 더욱 심화되고 많은 영역이 상품화로 변질되어 압도적인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음. <br /> <br />- 의료, 교육, 보육․간병 등의 돌봄서비스, 주택, 노후, 등 사회서비스 전반의 영역이 지금은 시장주도 영역으로 변질되어 사회복지가 빈부격차를 좁히는 역할을 전혀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재의 한국사회임. 철도, 발전, 가스, 수도 등의 공공기간산업 역시 여지없이 민영화되고, 보편적 서비스가 축소되고 있음. 사회보험의 급여는 쥐꼬리만하고 기초생활보장 등 사회부조 영역도 저급하기 짝이 없음. 사회보험과 사회부조 역시 비정규직, 자영업자 등에서 광범위한 사각지대가 존재하기 때문에 결국은 사회적 보호가 가장 필요한 이들에게 사회안전망으로서 역할이 이루어지지 않음. 결국 GDP대비 우리나라의 공적사회복지지출 수준은 5.7%로 OECD국가 가운데 꼴찌로서 OECD평균인 20.7%의 1/4수준이고, 1위인 스웨덴은 우리나라의 5.5배. 멕시코(6.8%)를 제외하면 모든 국가들의 공적사회복지지출수준이 우리나라에 비해 3배 이상 높음. 결국 대다수 민중의 삶은 피폐할 수 밖에 없는 조건에 놓여 있음. 최근 OECD발표에 따르면 한국의 가계 구성중에서 사회임금은 7.9%로 OECD평균 31.9%의 1/4에 미치지 못함. 결국 시장임금에 의존하는 한국노동자는 구조조정이나 실업, 질병 등에 유난히 취약할 수 밖에 없으며 이나마도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비정규직이나 자영업자 층은 생계에 큰 타격을 입을 수 밖에 없음. <br /> <br />- 따라서 우리는 시장임금만이 아니라 사회임금에 해당하는 사회복지 영역을 대폭 확대하고, 이들 영역에서 정규직만이 아니라 비정규직, 자영업자 등 전체 국민 모두에게 보편적 서비스로서 사회복지가 확대되도록 투쟁을 전개하는 것이 빈부격차와 차별을 해소하는 지름길임. <br /> <br />3. 사회연대의 실천방향 <br /> <br />첫째, 계급적 단결을 강화한다. <br />1) 진정한 계급대표성 확보를 위해 미조직·비정규·이주·여성노동자의 노동기본권 보장 투쟁과 조직화에 집중적인 역량을 투입한다. <br />- 조직화를 위해 지역본부를 중심으로 인력, 예산 및 사업을 전면적으로 집중·재배치한다. <br />- 취약계층 노동자의 노동기본권 보장을 위한 투쟁을 적극 지지·지원하고, 법제도 개선투쟁을 우선적으로 전개한다. <br /> <br />2) 점차 확대되고 있는 비정규·중소영세·이주·여성노동자의 임금 및 고용차별을 해소하기 위한 실천을 다각적으로 전개한다. <br />- 동일노동·동일임금, 산업별 임금격차해소, 최저임금 현실화를 통해 임금격차를 해소한다. <br />- 비정규노동자, 실업자를 포함한 모든 노동자의 안정된 일자리를 위해 구조조정·정리해고 등 인력감축을 막아내는 고용안정특별법을 제정하고, 전국민 실업안전망을 구축한다.<br /> <br />둘째, 사회적 연대를 실현한다. <br />1) 모든 국민의 보편적 복지제도를 전면적으로 실현하기 위한 사업을 본격화하고, 민중시민사회진영과의 연대활동을 강화한다.<br />- 사회공공성을 훼손하는 신자유주의 시장화정책을 막아내고, 사회복지목적세 도입 등 국가재원확충을 통해 의료, 교육, 보육, 주거, 노후 등 국민의 기본생활을 보장하도록 한다.<br />- 정규직 중심의 기업복지 한계를 극복하고, 비정규직을 포함한 취약계층 노동자까지 전면적으로 확대될 수 있도록 조직적, 제도적 실천을 전개한다. <br /> <br />2) 모든 국민의 기본적인 생활단위인 지역사회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평등한 공동체적 삶을 지향하기 위한 지역 내 사회연대를 실천한다. <br />- 사업장 내 현안을 넘어 생태, 교통, 문화, 먹거리 등 일상생활과 맞닿아있는 지역 의제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 지역적 차원의 실천과 연대를 강화한다. <br /> <br /><strong>사회연대운동 추진 및 실천방안</strong><br /> <br />1. 민주노총, 그동안 전혀 연대하지 않았는가. <br />1) 민주노총의 지난 시기를 평가하면, 비정규직 사업과 관련하여 총연맹과 일부 산별, 지역본부 등에 미조직비정규특위와 부서를 만들고, 50억 기금모금운동도 전개했으며, 수차례에 걸친 총파업도 전개했음. 또한 총연맹 차원에서 사회와도 연대했음. <br />2) 그러나 민주노총의 위기와 혁신을 말할 때 이구동성으로 지적하는 것은 노동계급 내부에서 비정규직과 연대하지 않았고, 사회와 연대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임. 나름대로 열심히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평가를 받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를 확인할 필요가 있음. <br />3) 그동안의 연대가 상층과 비정규직 주체를 포함한 해당사업 단위만의 실천으로 그치고, 일부만의 연대로 그쳤던 것에 그 이유가 있음. 민주노총이 총연맹부터 현장까지 전조직적으로 매달리지 못했던 것이 핵심 원인임. 총연맹과 산별단위, 지역본부, 단위사업장까지 거대한 하나의 흐름으로 연대하고 실천하지 못한 때문임. 따라서 사회연대운동과 그것의 핵심이 되어야 할 비정규운동의 새로운 전략은 “어떻게 전조직적으로 실천할 것인가”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함.<br /> <br />2. 사회연대운동 경과 및 약평<br /><경과><br />1) 수년째 누적된 민주노총 위기가 성폭력 사건을 계기로 폭발하면서 사회적 질타가 쏟아짐. 민주노총 안팎에서 이구동성으로 “연대”의 복원을 혁신의 핵심내용으로 제기함.<br />2) 집행부 총사퇴와 함께 비대위가 구성되고 보궐집행부가 출범함. 임성규 위원장이 유세와 당선 기자회견 등을 통해 총론적 방향으로서의 사회연대노총을 제기함. <br />3) 메이데이 대회를 민주노총과 진보정당, 시민사회단체 등이 공동으로 주최하여 진행함. 대회사를 통한 사회연대선언을 통해 사회연대헌장 제정운동을 제안함. <br /> <br /><약평><br />1) 사회연대운동에 대한 언론의 관심과 호의적인 분위기 형성됨. 아울러 노동절 대회 진행에 대한 우호적 분위기 형성됨. 시민사회진영에서도 동의하고 호의를 표시함. 언론과 시민사회진영이 이처럼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민주노총이 위기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취하는 일시방책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가지고 있음.<br />2) 노동운동(민주노총) 내부는 사회연대운동에 대해 부정하지 않음. 그러나 산별과 지역본부, 현장까지 그 의미를 공유하는 과정이 없었음. 일부에서는 사회연대운동이 특정노선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를 가지고 있음.<br />3) 보궐집행부가 들어선지 불과 두 달 만에 운동방향의 총론에서는 흐름을 형성했고 성과로 평가할 수 있음. 그러나 구체적인 추진방안과 각론이 비어 있음. 또한 사회연대운동(~전략, ~노총 등)의 개념에 혼란이 있음. 무엇보다 현장과의 소통과 합의가 아직 추진되지 않았음.<br /> <br />3. 사회연대운동의 필요성<br />1) 계급운동의 측면에서 반드시 필요함. 약화된 ‘연대’의 가치를 복원하는 것은 민주노총이 노동운동 본연의 위상을 되찾는 것임. ‘연대’하지 않는 노동운동과 민주노총은 운동집단이 아니라 이익집단에 불과할 따름임. ‘연대’는 노동운동의 중심 가치임. <br />2) 정세의 측면에서 시급하게 필요함. 신자유주의와 이명박 정권은 빈부격차를 심화시키고, 비정규직을 양산하고 있으며, 최소한의 민주주의마저 짓밟고 있음. 계급연대와 사회연대를 통해 소외되고 억압받는 각계각층을 투쟁 전선으로 연결해야 함. <br />3) 혁신의 측면에서 절박하게 필요함. 민주노총에 대한 사회적 질타와 외면, 싸늘한 시선을 극복해야 함. 이는 민주노총의 생존을 위한 절박한 요구임. <br /> <br />4. 사회연대운동 성사의 전제와 관건<br /><전제><br />1) 12월말까지가 임기인 보궐집행부가 사회연대운동을 완성하는 것은 불가능함. 사회연대운동은 단기간에 완성될 수 없는 중장기적 노동운동의 방향전환임.<br />2) 따라서 보궐집행부 기간에 할 수 있는 것은 민주노총 안팎의 소통을 통해 합의와 동의를 형성하고, 그 초석을 놓는 것임. 아울러 틀을 만들고 몇 가지 실천사업을 통해 사회연대운동의 물꼬를 트는 것임. <br /> <br /><관건><br />1) 노동운동(민주노총) 내부의 개념정리와 인식 통일<br />- 사회연대운동이 보궐집행부만의 사업으로 멈추지 않고, 중장기 과제로 추진되기 위해서는 민주노총과 노동운동 내부의 인식통일이 있어야 함. 공조직 체계를 형성하고 있는 각 산별, 지역본부, 단위 현장까지의 자성과 대중적 공유, 결의가 사회연대운동 성사의 관건임. 각 정파의 소통과 합의도 뒤따라야 함. <br />- 사회연대운동의 개념(~운동, ~전략, ~노총), 내용, 추진방안을 합의해서 만들어야 함. 이것과 관련해서는 위원장이나 집행부가 일방적으로 끌어가면 안 됨. 이를 위해 쟁점이 될 만한 것은 중장기 과제로 남기고, 우선 합의되는 내용부터 실천하는 지혜가 필요함. <br /> <br />2) 전조직적 실천과 구심 만들기 <br />- 사회연대운동은 상층만의 사업에 멈추지 않고, 현장까지 관통하면서 전 조직적인 사업이 되어야 함. 상층만의 사업은 민주노총이 나름대로 열심히 해 왔음. 그럼에도 <br />- 다만 현장까지 사회연대운동으로 전환하는 것은 상당한 시일이 걸리는 문제임. 그렇다고 그 때까지 늦출 수는 없음. 연말까지 사회연대운동을 앞서서 실천할 단위는 비정규 운동단위와 간부·활동가 대오일 것임. 흐트러진 비정규 운동단위의 구심력과 응집력을 형성해야 함. 아울러 간부와 활동가들과의 소통을 통한 공유와 결의가 있어야 함. <br />- 사회연대운동본부(가칭)를 구성해서 노동, 농민, 빈민, 진보정치, 시민사회, 학생, 촛불네티즌, 문화예술 등을 망라한 역량을 최대한 결집하고 공동의 실천을 전개함. <br /> <br />3) 사회적 호응 및 분위기 형성 <br />- 사회연대운동을 함께 추진할 진보정당, 시민사회단체 등의 호응이 있어야 함. 언론 등의 우호적인 분위기도 필요함. 사회적 흐름을 형성하고, 이러한 사회적 흐름이 노동현장에 영향을 주고 실천에 나설 수 있도록 추동해야 함. 그것을 위해 내용에서의 현실성, 실천에서의 진정성과 지속성 등이 필요함.<br /> <br />5. 현장까지의 전조직적인 실천 <br />1) 민주노총 실천 <br />- 정치·정책적 실천 중심<br />- 먼저 민주노총과 진보정당, 시민사회단체 등이 통일되게 추진하는 실천의 영역이 있음. 정치·정책적 내용과 계기별 핵심현안을 중심으로 진행될 것임. <br />- 집회, 열린 문화제, 전국 동시다발 캠페인(전국 시군구, 빈곤지역, 대학교, 병원, 중고등학교 앞 등), 각계각층 자성 및 선언운동, 릴레이 행진, 운동본부 결성, 매월 1회 사회연대의 날 등을 전개함. 오체투지, 정대협 수요집회 등에 대한 민주노총의 참여 등.<br /> <br />2) 산별 실천<br />- 정치·정책적 실천 + 생활 실천<br />- 모든 산별은 자신의 영역에 있는 비정규직과의 연대를 기본으로 정하고, 구체적 실행계획을 마련하고 실천해야 함. <br /> <br />3) 지역 실천<br />- 정치·정책적 실천 + 생활 실천<br />- 현장 조합원의 요구와 관심이기도 한 지역의 비정규직, 일자리와 실업, 생태, 문화, 교통, 먹거리, 소비, 의료, 교육, 장애인, 저소득 소외계층 등 일상생활과 맞닿아 있는 지역의 단체와 연계된 실천에 나서도록 함. <br />- 조합원뿐만 아니라 활동가와 간부들조차 일상생활에서는 과도한 사교육 의존, 외형적 소비패턴, 대중교통 외면 등 자본에 포섭되어 있음. 이를 극복하기 위한 현실적 대안과 지역의 실천이 마련되어야 함. 조합원의 생활과 밀접하게 결합하는 생활운동이 요구됨. <br />- 예) 조합원과 비정규직 및 저소득 자녀들에 대한 지역별 방과후 대안학교, 지역 어린이캠프, 생협, 주민의원 세우기 운동, 공제회, 녹색마을 운동, 문화마을 운동 등 지역단위별로 최소 5년의 계획을 세우고 하나의 사업을 특화하는 것<br /><※ 이는 지금까지와 같은 담론투쟁의 수준을 벗어나야 함. 조합원과 지역주민의 당장의 삶에 유용하거나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으로 고민되어야 하며, 이것은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 지점임. 즉 적더라도 당장의 성과를 남길 수 있는 사업을 고민하고 만들어야 함. 이는 사실 당연한 것임. 노동조합도 임금, 단협, 고용 등 당장의 성과를 만들어 조합원들에게 주지 않으면 존속할 수 없는 것임.> <br /> <br />4) 현장 실천<br />- 당장의 생활과 연결된 실천 중심.<br />- 사회연대운동에 대한 간부와 활동가들의 학습과 교육, 결의가 우선되어야 함. <br />- 우선 사업장에서 비정규직과 연대할 수 있도록 하고, 지역운동에 관심을 가지고 참여할 수 있도록 해야 함. 조합원들에 대한 교육, 선전, 지역운동 홍보, 지역단체 회원으로 가입하고 활동할 수 있도록 돕기 등의 사업을 전개함. 산별과 지역본부의 사회연대운동을 받아서 함께 하고, 단위노조 차원의 특화된 사업을 한 가지 정해서 할 필요도 있음. <br />- 간부와 활동가들만 하는 실천으로 축소되지 않도록 조합원들 속에서 실천의 주체를 만들어가는 사업이 필요함. 이를 위해 사회연대운동 담당 부서나 담당자를 두는 방안을 적극 추진할 필요가 있음. 조합비도 배분해야 함. 90년대 초중반, 신경영전략을 도입할 때 사측이 했던 사업과 지원을 분석할 필요가 있음.<br /> <br />6. 09년말까지의 추진계획<br /> <br />-------------------------------- <br /><strong><a title="[http://blog.jinbo.net/spt/?pid=65]로 이동합니다." target="_blank" href="http://blog.jinbo.net/spt/?pid=65"><font color="#333333">자본의 논리와 너무나 닮은 ‘사회연대노총론’, 실현가능성도 글쎄?</font></a></strong> (사회주의노동자정당 건설 준비모임, 장혜경, 2009년 05월 27일 17:57)<br /> <br />임성규 민주노총 신임 지도부가 민주노총 혁신을 위한 운동방향을 제출했다. 이른바 “사회적 약자 곁으로 다가가 자세를 낮추고, 사회연대노조운동으로 거듭나겠다”는 것이다. 사회연대노총론은 정규직 중심의 민주노총 조합원은 ‘사회적 약자’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민주노총은 노동자계급 내의 단결(통일)과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새로운 운동노선으로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 <u>정규직 조합원은 비정규조합원/미조직 노동자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자는 아니다. 그러나 정규직을 포함해 한국사회의 모든 노동자는 사회적 약자다. 상시적인 구조조정 압력에 시달리고, 정권의 심기를 거스르는 집회만 해도 탄압받고 구속되는 이 땅의 노동자는 모두 사회적 약자</u>다. 정규직의 상대적 고용안정성과 고임금(?)이 근거라면? 그러나 이 알량한 상대적 안정성조차 현 공황 국면에서 정권과 자본의 공세로 위협받고 공격받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사회연대노총론의 이런 주장은 “정규직=귀족 노동자”라는 정권의 주장과 과연 무엇이 다른가?<br /> <br />임성규 위원장은 ‘정규직이 밥 몇 술 덜어야 민주노총에 희망 생긴다’고 한다. 또 ‘기업의 직접지불 부담을 줄여주는 것, 즉 노동자들이 직접임금 요구를 줄이거나 적게 요구하는’ 사회임금노선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정규직이 양보하는 것’이 정규/비정규연대의 핵심이고, 양보교섭이나 임금인상 자제가 사회임금(=사회복지책)을 확대할 수 있는 기반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u>정규직이 양보하면 비정규 문제가 해결된다는 발상은 정규/비정규라는 노동자계급 내의 분할을 노동자에게 떠넘기는 자본의 논리와 다를 바 없다. 또 정규직 양보를 통해 비정규문제 해결한다는 것이나 임금인상 투쟁 자제를 통해 사회임금을 확보할 수 있다는 발상은 순진</u>하기 이를 데 없다. 민주노총이 ‘자본과 정권이 책임지고 모든 노동자민중의 기본생활을 보장하라’며 총력을 다 해 싸워도 자본과 정권의 공세를 막을 수 있을까 말까한 정세에서 ‘민주노총이 기득권을 버렸어요. 그러니 정부와 자본도 한 발 양보하세요’라는 구걸이 먹힐 것이라 생각하는 것 자체가 너무도 비현실적이라는 것이다. <br /> <br />이미 2007년 좌초된 사회연대전략의 확대개정판인 사회연대노총론은 즉각 폐기되어야 한다. <u>지금 민주노총이 해야 할 역할은 (민주노총이 강조하는)사회적 약자들의 투쟁인 용산철거민 학살투쟁, 박종태열사투쟁, 쌍용차투쟁을 자신의 투쟁과제로 받아안아 이 투쟁들을 반자본/반이명박투쟁전선으로 모아내고. 이 투쟁의 중심에 서는 것</u>이다. 그럴 때만이 전체노동자의 대표체로서, 노동자민중연대투쟁의 선도체로서 민주노총은 혁신될 수 있다. 노동운동이 자본의 논리에 포획되는 한, 노동자계급의 연대를 노동자 내부의 파이나누기로 접근하는 한, 노동운동의 미래는 암담할 뿐이다.<br /><br /></div><div class="buttons-bottom right jinboblog-i-like-this-buttons"><a class="button-jinboblo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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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것이 그 증거이겠다.<br /> <br />여기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미 다른 소개자료를 통해서 어느 정도 알려지지 않았나. 오히려 스웨덴 모델을 한국상황에 적용할 경우 대두되는 문제점이나 한계를 지적하는 이들의 주장에 설득력 있는 반박논리를 제공하는 것이 더 필요한 시점이 아닌가 싶다.<br /> <br />홍기표는 번역자인 윤도현 교수가 원저자들보다 마르크스주의의 기본을 더 충실하게 설명하고 있다고 얘기한다. 하지만, 지금까지 윤도현 교수가 쓴 논문을 보면 전혀 그럴 것 같지 않은데, 과연 어떠한 부분이 그러한지 궁금하기는 하다.<br /> <br />그리고 홍기표가 도식화한 대로 지금의 좌파는 국유화에 매달리고 있지 않다. 한국에서 사민주의를 지향하는 이들은 좌파의 가치나 슬로건을 과거 반공교과서에 나오는 것처럼 지나치게 단순화시키는 오류를 범하는 경우가 많다. 미국에서 자본주의를 방어하기 위해 은행이나 GM같은 회사를 국유화하는 것을 제껴놓더라도 국유화라는 게 우리나라에서도 실제 필요한 경우가 상당히 있기 때문이다. 주유소나 이동통신 등이 그러하다. 오늘날의 좌파는 대안사회에서 소유구조가 다양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할 뿐 아니라 관리체계의 문제(이를 지배구조, 거버넌스의 문제라고도 한다) 또한 관심을 가지고 대안을 제출하려 노력한다. <br /> <br />아무튼 시간이 되면 읽어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다. 아래에 프레시안에 실린 성현석 기자의 서평과 레디앙에 실린 홍기표 기획위원의 서평을 담아놓는다.</p><br /><p><span class="toggle-text" onclick="toggleMore(this)" style="cursor: pointer; display: none;">계속 보기...</span></p> <div class="more-content" style="border: 1px dashed black; background: none repeat scroll 0% 0% rgb(239,255,175); padding: 1px; margin: 1px;"><br /><p>=======================================<br /><strong><a href="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0515113437&section=03">"복지는 약자만을 위한 것?"</a></strong> (프레시안, 성현석 기자, 2009-05-16 오후 2:30:37)<br /><strong><font color="#000080">[화제의 책] <사회민주주의란 무엇인가></font></strong><br /> <br />스웨덴 수도인 스톡홀름 남쪽 해안가에 노르쾨핑이라는 도시가 있다. 115년 전, 이 도시는 번창하는 산업의 활기로 흥청댔다. 섬유산업이 특히 번창했는데, 당시 4000여 명이 이 도시의 섬유공장에서 일했다. 기술의 발전과 대량생산체제의 도입이 막대한 부(富)를 낳았지만, 공장을 실제로 움직이는 노동자들과는 별 상관이 없었다. 1894년 당시 모직공장에서 노동자 한 명이 생산한 가치는 2696크라운(당시 스웨덴 화폐단위. 현재 단위는 크로나)이었지만, 방직기 앞에서 일하는 여성 노동자의 연 평균 임금은 500크라운이 채 안 됐다.<br /> <br />당시 이곳 노동자들의 생활을 다룬 자료를 보면, 공장 작업 감독이 돼야만 방 하나에 부엌이 딸린 집에서 살 수 있었다. 노동자의 3분의 1 가량은 '아이언 스토브 룸(Iron-stove room)', 즉 별도의 부엌이 없는 단칸 아파트에서 가족이 함께 살았다.<br /> <br />귀리로 쑨 죽, 콩, 감자, 청어 등이 이 도시 주민들의 주식이었는데, 많은 이들이 영양실조에 시달렸다. 늘 산업재해를 걱정해야 하는 섬유공장 노동자들의 평균 수명은 40세를 간신히 넘겼다. 아이들은 초등학교만 마치면 일자리를 구해야 했다. 섬유공장에서 일하는 12살 노동자는 1년에 약 150~200크라운을 벌어 집에 가져왔다.<br /> <br />투표권은 소수에게만 주어졌다. 선거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는 연소득이 800크라운이 넘는 사람들로 제한됐다. 노동조합에 가입하려는 자는 곧장 해고되는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가족이 병에 걸리면 가계 재정은 바닥이 났고, 노동자에게 경기 침체는 해고와 같은 뜻으로 통했다.<br /> <br />
<table style="BORDER-RIGHT: #ccc 1px solid; BORDER-TOP: #ccc 1px solid; BACKGROUND: #ffffff; MARGIN: 5px 15px 10px 0px; BORDER-LEFT: #ccc 1px solid; BORDER-BOTTOM: #ccc 1px solid" cellspacing="5" cellpadding="5" align="left">
<tbody>
<tr>
<td width="230"><img class="resize3" height="321" alt="" width="230" border="1" name="img_resize" src="http://pic.pressian.com/images/2009/05/15/60090515113437.JPG" /></td>
</tr>
<tr>
<td style="FONT-SIZE: 11px; COLOR: #777; LINE-HEIGHT: 15px; LETTER-SPACING: -0.05em" width="230">▲ <사회민주주의란 무엇인가>(안네마리에 린드그랜·잉바르 카를손 지음, 윤도현 옮김, 논형 펴냄). ⓒ프레시안</td>
</tr>
</tbody>
</table>
최근 국내에 번역된 <사회민주주의란 무엇인가> 도입부에 나오는 내용이다. 스웨덴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개설서인 이 책이 115년 전의 극심한 불평등에 대한 묘사로 시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돈과 힘이 정의로 통하고, 약하면 죽어야 하는 약육강식 사회를 세계 최고 수준의 복지사회로 바꿔낸 것은 스웨덴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이었다.<br /> <br />사회민주주의 정당 활동가들은 스웨덴 곳곳에 '인민의 집'을 세웠다. 이곳에 모여 책을 읽고 토론한 노동자들은 사람은 누구나 평등하며 국가는 약자를 보살필 의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렇게 번져간 깨달음이 스웨덴 사회를 바꿨다. 무상교육과 무상의료, 직업과 학력에 따른 차별 해소, 실업과 노후에 대한 보장제도, 권위와 서열보다 개성과 자율을 숭상하는 문화 등이 그 결과다. 이런 성과 앞에서 스웨덴 사민주의 활동가들이 느끼는 자부심을 이해하는 게 어렵지 않다.<br /> <br />어떤 이들은 여전히 '맨발에서 벤츠까지'라는 성공담에 더 솔깃해 하겠지만, '불평등에서 평등으로'라는 스웨덴 사민주의의 성공담에 쏠리는 관심도 의외로 만만치 않다. 115년 전 스웨덴 공장도시 풍경이 남의 일 같지 않다는 이들이 많기 때문이다.<br /> <br />식민통치와 전쟁의 상처 위에서 거대산업을 일으키는 데는 성공했지만, 한국 사회에서 불평등은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권위와 서열에 지나치게 매달리는 문화 역시 여전하다. 대륙 반대편 국가가 백년에 걸쳐 일궈낸 성공담이 '지금 이곳'에서 관심을 끄는 것도 그래서다.<br /> <br /><사회민주주의란 무엇인가>는 학술 서적이 아니다. 스웨덴에서 이 책이 출간된 시점은 1996년 8월. '세계화', '정보화'가 거스를 수 없는 대세로 통하던 때다. 대륙 반대편에 있는 한국이 '세계화' 흐름에 동참한다는 명분으로 OECD에 가입한 해이기도 하다.<br /> <br />'세계화', '정보화'라는 흐름은 박정희 식 개발독재에 익숙하던 한국 정부에만 새로운 도전이었던 게 아니다. 백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스웨덴 사민당에게도 낯선 도전이었다. '자본과 지식이 자유롭게 이동하는 세상에서도 높은 세금에 의존하는 사민주의 복지체제가 작동할 수 있을까.'<br /> <br />같은 도전 앞에서 한국은 OECD 가입을 택했다. '세계화' 흐름을 밀어붙이는 신자유주의에 더 깊이 발을 담그는 쪽으로 방향을 잡은 것이다. 스웨덴 사민주의자들은 어떤 선택을 해야 했을까. 이 책은 이런 고민이 낳은 결과물이다. 저자 가운데 한명인 잉바르 칼손(Ingvar Karlsson)은 이 책이 세상에 나오기 직전까지 스웨덴 수상과 사민당 당수를 지냈다. 나머지 한명인 안네마리 린드그렌(Anne-Marie Christnia Lindgren)은 사민당 당 강령 위원회 위원으로 오래 활동했으며, 사민주의 운동 진영 내부 논쟁을 다루는 잡지 <티덴(Tiden)>의 편집장을 지냈다.<br /> <br />한국에서 스웨덴 사민주의에 관심을 둔 이들은 많지 않다. 올로프 팔메(Sven Olof Joachim Palme) 전(前) 스웨덴 수상이 널리 알려져 있을 뿐, 올로프 팔메에 이어 수상 직을 맡은 잉바르 칼손은 많은 이들에게 낯선 이름이다.<br /> <br />저자인 잉바르 칼손의 전임자였던 올로프 팔메는 스웨덴 사민주의의 황금기를 상징하는 인물로 통한다. 금융자본가 아버지와 독일 귀족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좌파가 됐고, 미국 여행을 한 뒤 미국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갖게 됐으며, 교육부 장관 시절에는 횃불을 들고 미국의 북베트남 폭격에 항의하는 대학생 시위 행렬에 동참했고, 수상 재직 중 수행원 없이 가족과 함께 영화를 보다 의문의 암살을 당한 팔메 전 수상의 삶은 온갖 역설로 점철된 거대한 드라마다.<br /> <br />반면, 절정의 인기를 누리던 수상이 갑작스레 암살당하면서 자리를 물려받은 잉바르 칼손의 삶은 상대적으로 밋밋하다. 그는 사민당 청년동맹 지도자와 장관, 국회의원 등을 거치며 큰 굴곡 없는 삶을 살았다.<br /> <br />하지만, 1990년대 중반 잉바르 칼손에게 던져진 숙제는 만만치 않았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거대한 파업투쟁 속에서 잉태된 사민주의 정당은 백년 역사를 거치는 동안 스며든 관료주의로 활기를 잃어갔고, 강력한 복지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비용은 부담스러워졌다. 사민당과 재벌의 공존이라는 독특한 모델은 균형을 잃어갔고, 거대기업의 힘은 점점 통제하기 힘들어졌다.<br /> <br />이런 상황에서 자본이 국경을 자유롭게 넘나들게 된다면? 기업은 싼 인건비와 낮은 세금을 찾아 해외로 빠져나가고, 일자리가 줄어드는 결과가 생길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세금이 줄어서 복지체제를 유지하기 힘들어지고 스웨덴 식 사민주의 체제는 근본적인 위기에 부딪힌다.<br /> <br />이 책의 저자들을 포함한 사민당 지도자와 이론가들은 이런 숙제를 어떻게 해결했을까? 해결 못했다. 역사가 던지는 질문은 정답이 있다고 믿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세계화, 정보화가 던지는 거대한 질문 앞에서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휘청거렸던 게 사민주의 정당들의 최근 역사다.<br /> <br />답이 없는 질문 앞에서 이리저리 흔들리는 정치인과 지식인을 탓하는 것은 무리다. 다만 이런 비틀거림이 제자리걸음이나 후퇴로 이어지지 않기 위한 조건을 확인할 필요는 있다. 비틀거리면서도 놓치지 말아야 할 원칙이 있다는 이야기다. 올로프 팔메로부터 정통 사민주의 노선을 이어받은 저자들이 이 책을 쓴 것은 그래서다. 이들은 좌편향과 우편향 사이에서 흔들리는 사민주의 정당이 움켜쥐고 있어야 할 핵심 가치로 네 가지를 제시했다. 자유, 평등, 연대, 민주주의가 그것이다.<br /> <br />유럽식 사민주의자를 '머리에 뿔 달린 빨갱이'의 아류쯤으로 이해하는 이들은 여기에 자유가 포함된 이유를 알지 못한다. 이런 이들은 "사민주의자=좌파=획일적인 평등만 강조하며 개인의 자유는 억누르는 자들"이라는 등식을 고집한다. 하지만, 사민당 정치인과 이론가가 쓴 <사회민주주의란 무엇인가>는 이런 등식이 명백한 오해라는 점을 잘 보여준다. 또, 자유라는 낱말 앞에서 모든 영역에 시장 질서만을 폭력적으로 강요하는 신자유주의만을 떠올리는 일부 좌파 역시 다른 이유로 비슷한 반응을 보일 수 있다.<br /> <br />개인이 모여 사회를 이루고 있는 이상 '자유'를 포기할 수 없다는 점은 명백하다. 집단의 횡포와 부당한 권위에 맞서기 위한 자유가 없다면, 인권도 없다. 물론, 여기에도 조건이 있다. 저자들은 이렇게 정리했다.<br /> <br />"개인과 집단 간에는 항상 긴장이 있을 수밖에 없다. 이러한 긴장은 모든 사람들이 개인이면서 동시에 사회적 존재라는 사실에서 불가피하게 나오는 것이다. 만약에 사람들이 개인의 행동의 자유만을 일방적으로 주장한다면, 이 경우 강자가 약자를 억압하는 체제로 가버릴 것이다. 반대로 만약에 사람들이 집단 공동체의 요구만을 일방적으로 강조한다면, 집단의 요구라는 이름하에 개인들의 요구는 무조건 무시될 위험이 있다.<br /> <br />첫 번째의 위험에 대해 경각심을 가져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들은 사회민주주의자로서 두 번째의 위험에 대해서도 똑같이 경계를 해야만 한다. 우리는 통상적으로 개인들의 자유를 제한하면서 정당화하는 것에 대해서 경계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이것은 보통 상식으로는 마치 타인들의 자유를 증대시키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br /> <br />'집단'이 다수의 요구에 대한 배려를 제대로 하지도 못하면서 얼마나 사람들의 생활양식과 견해를 획일화 시킬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많은 사례들이 있다. 집단은 집단에 대한 충성을 강조하면서 자유로운 토론을 누르고, 집단의 이름으로 결정된 사항들에 대해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것을 금지시킨다. 집단은 통제 엘리트를 낳는데, 이들은 실제로는 사회 전체의 공공선에 도움이 되는 결정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엘리트 자신들의 지위를 강화하는 데에만 관심을 가지면서 집단을 착취한다.<br /> <br />물론 이런 종류의 위험은 정치적 색깔을 불문하고 모든 형태의 집단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많은 사회학 연구들은 여론이 가장 획일적으로 나타나는 집단은 사기업체라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는 사회민주주의자로서 개인의 자유는 그가 속한 사회를 통해서 실현되어야 한다는 기본적 입장을 견지해야 하지만, 동시에 집단주의의 여러 위험한 형태에 대해 경계를 늦춰서는 안 된다."<br /> <br />"…(생략)…모두가 상호 의존적으로 되어 있는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일정한 공동의 규칙을 준수해야 된다는 통찰이 반영된 집단주의일 경우, 자유는 위협받지 않는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모든 형태의 근본주의하에서, 즉 그것이 종교적, 정치적 또는 경제적 형태든 간에 자유는 위협받는다. 근본주의는 '신', '역사' 또는 '시장'에 의해 부여된, 우월하고 어떤 이미 정해져 있는 사명에 의해 개인보다 집단이 무조건 옳다고 간주하는 시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렇게 만약에 어떤 하나의 입장이 근본적으로 옳다도 가정한다면,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들의 입장은 고려할 필요가 전혀 없게 된다. 하지만 정반대로 생각하는 게 옳다. 자신과 타인의 행복을 위해서는, 자신들만이 자신들의 '그릇된' 이념을 무조건 실천에 옮기는 소명을 타고 났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br /> <br />자유를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시장 근본주의' 입장에 서서 자유를 위협하고 있는 이들이 경계로 삼을만한 내용이다. 자신들만이 이념을 무조건 실천에 옮기는 소명을 타고 났다고 믿는 종교적, 이념적 교조주의자들에게도 유익한 반성을 하게 하는 내용이다.<br /> <br />평등과 연대, 민주주의 등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움켜쥐고 있던 다른 가치들 역시 마찬가지다. 저자들은 이런 가치들이 변화하는 현실 속에서도 의미를 잃지 않는 이유를 자세히 설명한다. 그런데 스웨덴 사민주의 체제에서 이런 가치들이 잘 녹아있는 제도로 흔히 꼽히는 게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보편적 복지제도'다.<br /> <br />열심히 일하려는 의지가 없는 이들에게도 복지 혜택을 준다는 점에서 이 제도는 시장주의자들로부터 집중적인 비판을 받았다. 다른 사람들의 노동에 기생하는 계층을 양산한다는 비판이다. 또, 복지 제도를 운영하는 기구가 너무 방대해져서 관료주의적인 낭비가 심해졌다는 비판도 나왔다.<br /> <br />외부 환경 변화도 이런 비판에 힘을 실었다. 정보화, 세계화가 진행되면서 지식 노동자에 대한 수요가 크게 늘었다. 이에 따라 대학 진학률도 높아졌다. 무상교육을 유지하기 위한 비용이 과거보다 늘어날 수밖에 없다. 여기에 인구 노령화로 인해 늘어난 복지수요도 중요한 변수다. '보편적 복지제도'를 유지하기 위한 부담이 과거보다 커졌다는 뜻이다.<br /> <br />하지만, 이런 비판이 평등과 연대라는 사민주의의 핵심 가치와 깊이 맞물려 있는 '보편적 복지제도'를 폐기할 이유가 되기는 어렵다. '보편적 복지제도'에 대한 저자들의 생각은 어떤 걸까.<br /> <br />"사회보장은 1930년대 이래 사회민주주의 정치의 핵심이었다. 고전적 사회민주주의식으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생산된 과일을 어떻게 분배할 것인가라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즉 조세라는 방법을 통해 돈이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로 들어가고, 이 돈이 직접적인 경제적 보조의 형태 또는 사회서비스의 형태로 각 가정에 재분배된다.<br /> <br />…(생략)…자신의 고유한 생활경로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존재하려면 일정수준의 경제적 안정 그리고 의료, 교육 같은 필수적인 서비스에 대한 이용이 필요하다. 그리고 평등은 자유의 이러한 전제 조건들이 모든 시민들에게 충족되어야만 가능하다. 그런데 이러한 평등 그리고 또한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가 시민으로서 이러한 전제조건들을 연대적 방식으로, 다시 말해 우리의 세금을 통해 이를 위한 재정을 마련하는 방식으로 보장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br /> <br />"…(생략)…하지만 복지정치에 대한 전반적인 지지가 있다 해서 복지 사회에 대한 논의가 더 이상 불필요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우리는 1990년대부터 정부 재정에 부담을 가지고 있는데, 이러한 부담은 어떤 정책을 우선시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있어서 우리의 선택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노인 부양은 물론 교육 부문에서도 점점 더 많은 자원의 사용을 필요로 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재정 문제는 향후 몇 십 년간은 지속될 것이라는 사실을 고려해야만 한다.<br /> <br />…(생략)…1950년대에 좋은 해결책으로 간주되었던 것이 1990년대에도 여전히 좋은 해결책은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복지시스템은 결코 '완벽'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어느 특정 시대에 추진했던 개혁을 마치 미래의 모든 시대에도 타당하고 또 바꾸어서는 안 되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도록 조심해야만 한다."<br /> <br />"사회민주주의적 복지정책에서 하나의 중요한 원칙은 복지정책은 전반적으로 보편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자산조사'를 해서 가장 어려운 사람들만을 대상으로 급여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국민에게 평등하게 혜택을 제공하는 것이다. 아동수당은 아이가 있는 모든 가정에 지급된다. 노령연금은 65세 이상의 모든 노인들에게 해당되고, 교육비는 모든 아이들에게 무료이다.<br /> <br />…(생략)…보편적 복지정책의 근본이념은 간단하다. 복지개혁을 통해 모든 사람이 혜택을 본다면, 모든 사람은 자신들을 위한 재정 확보에 동참하는 것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기꺼이 돈을 지불한다면, 우리는 훌륭한 사회보험체계와 사회서비스를 유지할 수 있는 자원을 가질 수 있게 된다. 이것은 경제적으로 더 약자인 사람들에게 많은 혜택이 돌아가는 것이다.<br /> <br />그런데-특히 자원이 한정되어 있을 경우-저소득자와 실업자에게만 급여를 지급하는 것이 더 낫다는 견해가 종종 사회민주당 내에서도 제기되었다. 이런 방법으로 하면 어려운 사람들을 집중적으로 지원할 수 있고 그들이 원하는 것들을 실제로 보장해 줄 수 있다는 것이다.<br /> <br />…(생략)…만약에 가장 어려운 사람들만이 아동수당, 무상의료 또는 무상교육의 혜택을 받는다면, 나머지 사회집단들은 그러한 혜택이 가능한 한 값싸게 지급되는 데 관심을 가질 것이다. 그들은 온갖 이유를 들면서 급여의 비용을 줄이려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 급여는 자신들은 받지 못하는 것이고, 또 여기서 제공되는 서비스의 질이 나쁘다고 해도 자기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이 미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대로 우리 모두가 조세 기반적인 복지급여를 받을 수 있다면, 우리 모두는 의료, 교육 같은 것들이 잘 제공되는지, 질병보험과 연금 시스템이 적절한 경제적 보호를 해주는지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될 것이다."<br /> <br />모든 사람이 복지 수혜자가 돼야, 모든 사람이 복지 개선을 위해 애쓰게 된다는 논리다. 사회, 경제적 약자만을 위한 복지라면, 다른 계층 사람들은 자기 문제로 받아들이지 않게 된다. 그래서 복지에 쓰이는 예산을 아까워하게 되고, 복지 예산은 점점 줄어든다. 결국 사회안전망 자체가 허물어지는 결과로 이어진다. 사민주의의 핵심 가치인 '연대'와 '보편적 복지제도'를 떼놓을 수 없는 이유다.<br /> <br />'보편적 복지제도'에 대한 이런 통찰은 지금 한국에서 진행되는 논의에도 좋은 힌트가 된다. 영리병원 도입을 추진하는 기획재정부는 국민건강보험 체계에서 벗어나는 의료기관이 생겨나도 사회경제적 약자를 위한 공공의료가 훼손되지 않으리라고 주장한다.<br /> <br />하지만, 이는 명백한 억지다. 국민건강보험을 '남의 일'로 여기는 이들이 생겨나면, 공공의료가 무너지는 것 역시 순식간이다. 이들에게는 공공의료를 위한 예산이 자신들과 아무런 상관없는 곳에 쓰이는 돈이다. 따라서 이들은 이런 예산을 줄이는 쪽으로 압력을 가하게 된다. 언론을 장악하여 사회 여론을 주도하는 쪽 역시 이들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더욱 확연해지는 전망이다. 사립학교가 발달한 미국에서 공립학교의 교육환경이 계속 취약한 상태로 방치되고 있다는 사실 역시 이런 전망에 힘을 싣는다.<br /> <br />사민당 거물 정치인과 이론가가 이 책을 쓸 당시, '떠오르는 해'였던 신자유주의 세계화 흐름은 지난해 금융위기를 계기로 '지는 해'가 됐다. 저자들이 '떠오르는 해'에 맞서 사회민주주의적 가치가 반영된 '보편적 복지제도'를 지키기 위해 이 책을 쓸 무렵, 김영삼 정부는 신자유주의적 개혁의 시동을 걸었다. 이듬해 불거진 IMF 경제위기는 한국에서 신자유주의적 개혁의 실패로 받아들여지기보다 오히려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본격적으로 밀어붙이는 계기로 작동했다. '떠오르는 해' 앞에서 서로 다른 길을 택했던 저자들과 한국 정부는 이제 다시 선택의 갈림길에 섰다. 중천에 떴던 해가 노을을 그리고 있는 지금, 한국 정부가 택한 길은 어디로 향하고 있을까.<br /> <br />---------------------------------------------------------------------<br /><strong><a href="http://www.redian.org/news/articleView.html?idxno=14074">국유화 편협한 수단, 문제는 다양한 권력</a></strong> (레디앙, 2009년 06월 01일 (월) 08:21:48 홍기표 / 기획위원)<br /><strong><font color="#000080">[새책] 스웨덴 사민당이 펴낸 책 『사민주의란 무엇인가?』</font></strong> <br /> <br />자본주의와 사민주의와 공산주의의 차이는 무엇일까? 무식할 정도로 간단하게 이야기 하면 모두 거둬서 몽땅 나눠주는 것이 순수 공산주의이고, 아무것도 거두지 않고 아무것도 안 주는 사회가 순도 100%짜리 자본주의이다. 사민주의란 아마 그 중간쯤의 어디 일 것이다. 즉 국가가 좀 많이 거둬서 개인들에게 좀 많이 나눠주는 사회쯤 될 것이다. 사민주의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정말 이렇게 대답해도 될까? <br /> <br />가수 윤도현씨가 아닌 교수 윤도현님께서 최근에 『사민주의란 무엇인가?』(논형. 13,000원)라는 책을 번역했다. 이 책의 원저자는 잉바르 카를손과 안네마리 린드그렌이라는 스웨덴 사람들이다. 외국사람들이라 책을 다 읽고나도 저자들의 이름을 외우기란 쉽지 않다. 단지 우리 입장에서는 번역한 사람 윤도현만 기억에 남는다. 그리고 잉바르 카를손이 스웨덴 수상이었다는 정도만 생각날 뿐이다. <br /> <br />이 책은 스웨덴 사민당에서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해 만든 책이다. 책은 사회민주주의 핵심 가치와 주요정책 등을 서술하면서 사민주의 자체에 대한 쉽고 일반적인 서술에 주력하고 있다. <br /> <br />이 책은 사민주의의 슬로건으로 알려진 자유, 평등, 연대라는 3대 가치에 대해 이해하기 쉬운 필치로 친절한 설명하고 있다. 그 위에서 자본주의에 대한 시각과 시장에 대한 이해, 공산주의에 비판을 펼치고 있다. 즉 사민주의의 핵심 3대 가치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라는 양대 굴곡 사이에서 어떻게 단일한 이념적 가치로 자리 잡을 수 있는지 설명하고 비판하는 체계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br /> <br />이 책을 보면서 우리는 ‘자유’와 ‘시장’이 꼭 자본주의자(?)들만의 전유물도 아님을 확인할 수 있고, 왜 평등과 연대가 사민주의의 핵심 구호인지도 재삼 이해할 수 있다. 이 책은 모든 문제를 '소유문제'로 정리하면 혁명적인 것이고, 소유문제를 외면하면 근본적 해결을 도외시하는 개량주의라는 관점에 반대한다. 이 책은 ‘소유의 문제’ 라는 관점 이전에 '권력의 문제'를 더 중시 여긴다. <br /> <br />“중요한 문제는... 사적 자본가로부터 권력을 빼앗는 것만이 아니었다... 소비자들에게 더 많은 자원을 제공하여 그들이 공급의 다양성과 질에 대해 영향을 미칠 수 있게 하는 문제, 그리고 피고용인들에게 권력을 주어 그들이 임금과 고용조건에 영향을 미칠 수 있게 하는 문제였다.” <br /> <br />그리고 이것은 일방적 국유화의 한계에 대한 절절한 인식으로 이어진다. “국유화라는 고전적인 요구는 실제 현실에 있어서 너무나 편협한 수단이었다. 이것은 권력의 다양성이 생겨날 여지를 전혀 주지 않았다. 완전히 국유화된 경제에서는 임노동자, 소비자 그리고 시민의 영향력은 동일한 경로를 통해 행사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는데 이것은 결코 그렇게 될 수 없는 것이었다.” <br /> <br />책을 읽으면서 한 가지 부러웠던 것은 편견 없이 ‘사회주의’라는 이념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서구 사상계의 넓은 안목과 전통이었다. 북유럽의 사상계는 맑스주의를 역사적 맥락 속에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또한 비판하며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책속에 배어 있는 스웨덴 사민주의자들의 맑스주의를 바라보는 관점은 매우 균형 잡혀 있다. 합리적 핵심은 받아들이면서 지나친 이념 중독을 또한 경계하고 있다. 북한이 주체사상을 선전하듯이 불멸의 사상체계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br /> <br />이 책의 저자들은 전체주의와의 투쟁하는 사민주의자답게 소련 등 이른바 공산주의에 대한 비판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책 중간 중간에 전체주의 일당 체제에 대한 적대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br /> <br />"소련체제 붕괴의 가장 큰 원인은 소련의 모든 정치적, 경제적 조직의 기틀을 만든, 마르크스-레닌주의로 알려진 러시아 공산당의 이데올로기에 있다. 여기서 우리가 이끌어내야 할 피할 수 없는 교훈은 사회주의적 이상에 충실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중앙집권적으로 통제된 획일적인 체제는 비록 생산수단의 집단적 소유가 고전적 사회주의 이론과 일치한다 하더라도, 이러한 이상을 결코 실현할 수 없다는 것이다." <br /> <br />한 가지 재밌는 것은 이러한 책의 흐름에 대해 역자가 약간의 반기(?)를 들고 있다는 점이다. 역자인 윤도현 교수는 개량주의자(?)인 책의 원저자들보다도 맑스주의의 기본을 더 충실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 때문에 책의 구석구석에서 나타나는 역자와 저자 사이의 묘한 신경전도 주의 깊게 볼만하다. 역자인 윤도현 교수는 역주를 이용해서 때론 저자들을 비판하고 때론 원저를 보충하면서 전체적으로 책의 완성도를 높여준다. <br /> <br />예전에 우리는 소련 교과서라는 별칭으로 변증법적 유물론, 사적 유물론, 정치경제학을 읽었었다. 그리고 소련의 붕괴 이후 사회과학을 별로 진지하게 접해 본적이 없다. 이런 상황에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를 모두 비난하며 중간에 끼어서 어떻게든 자리를 잡아보려는 사민주의의 시각을 접해볼 필요가 있다.<br /> <br />이제 40줄에 들어선 이른바 386세대에게 있어서 사민주의란 ‘일단 나쁜 것’이었다. 이 세대는 사민주의가 무엇인지 알기도 전에 사민주의란 개량주의라 나쁜 것이라는 인식을 먼저 전달받았던 독특한 사상사를 갖고 있다. 이제 그 왜곡된 사상사를 좀 벗어나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래서 윤도현 교수의 이번 역서는 20대 청년 시절에 소련 사회과학 교과서로 공부를 하고 그 뒤로 이념서적을 본적이 없는 사람에게 특히 권할 만한 책이다. <br /> <br />전체적으로 스웨덴 중심적인 서술이라 한국사람들이 별로 주목하지 않는 내용도 다소 등장하지만 전반적으로 평이한 서술이라 읽는데 큰 거리낌이 없다. 내 마음 속에 뻘건 국물이 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라면 먹으면서 봐도 될 정도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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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 class="article_writer2"><strong><u><font color="#800080">○</font></u><a target="_new" href="http://www.pressian.com/scripts/section/menu/search_thema.asp?article_num=261">"키워드로 읽는 북유럽"</a></strong><br /><br /><strong><font color="#000000">☞ 연재를 시작하며: </font></strong><a target="_blank" href="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80923152016">"'사람값'이 비싼 사회를 찾아서"</a><br /><br />
<table style="BORDER-RIGHT: #dadada 1px solid; BORDER-TOP: #dadada 1px solid; BORDER-LEFT: #dadada 1px solid; COLOR: #666666; BORDER-BOTTOM: #dadada 1px solid" height="20" cellspacing="5" cellpadding="5" width="95%" align="center" bgcolor="#f0fbff" border="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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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 class="article_writer2"><strong><font color="#000000">- 첫 번째 키워드 : 협동</font></strong><br /><strong><font color="#000000"></font></strong><br />☞ <a target="_new" href="http://www.pressian.com/scripts/section/article.asp?article_num=60081001010700&s_menu=사회">"평등 교육이 더 '실용'적이다" (上)</a><br />☞ <a target="_new" href="http://www.pressian.com/scripts/section/article.asp?article_num=60081002144002&s_menu=사회">"'혼자 똑똑한 사람'을 키우지 않는다" (中)</a><br />☞ <a target="_new" href="http://www.pressian.com/Scripts/section/article.asp?article_num=60081007144808">"'로마'만 배우는 역사 수업" (下)</a></td>
</tr>
</tbody>
</table>
<br />
<table style="BORDER-RIGHT: #dadada 1px solid; BORDER-TOP: #dadada 1px solid; BORDER-LEFT: #dadada 1px solid; COLOR: #666666; BORDER-BOTTOM: #dadada 1px solid" height="20" cellspacing="5" cellpadding="5" width="95%" align="center" bgcolor="#f0fbff" border="0">
<tbody>
<tr>
<td class="article_writer2"><strong><font color="#000000">- 두 번째 키워드 : 코뮌</font></strong><br /><br />☞ <a target="_new" href="http://www.pressian.com/Scripts/section/article.asp?article_num=60081010134542">"가족 없이 늙어도, 당당하다" (上)</a><br />☞ <a target="_new" href="http://www.pressian.com/Scripts/section/article.asp?article_num=60081014171822">"'착한 정부'는 '코뮌'에서 나온다" (中)</a><br />☞ <a target="_new" href="http://www.pressian.com/Scripts/section/article.asp?article_num=60081017171339">"'인민의 집', 그들만의 천국?" (下)</a></td>
</tr>
</tbody>
</table>
<br />
<table style="BORDER-RIGHT: #dadada 1px solid; BORDER-TOP: #dadada 1px solid; BORDER-LEFT: #dadada 1px solid; COLOR: #666666; BORDER-BOTTOM: #dadada 1px solid" height="20" cellspacing="5" cellpadding="5" width="95%" align="center" bgcolor="#f0fbff" border="0">
<tbody>
<tr>
<td class="article_writer2"><strong><font color="#000000">- 세 번째 키워드 : 생태</font></strong><br /><strong><font color="#000000"></font></strong><br />☞ <a target="_new" href="http://www.pressian.com/scripts/section/article.asp?article_num=60081022121416">"산적이 100년 동안 다스리는 마을에서는…" (上)</a><br />☞ <a target="_blank" href="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81125192025">'MB식 녹색성장'이 불안한 이유 (中)</a><br />☞ <a target="_blank" href="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81201140444">'친환경 기술'로 녹색성장?…"글쎄요" (下)</a></td>
</tr>
</tbody>
</table>
<br />
<table style="BORDER-RIGHT: #dadada 1px solid; BORDER-TOP: #dadada 1px solid; BORDER-LEFT: #dadada 1px solid; COLOR: #666666; BORDER-BOTTOM: #dadada 1px solid" height="20" cellspacing="5" cellpadding="5" width="95%" align="center" bgcolor="#f0fbff" border="0">
<tbody>
<tr>
<td class="article_writer2"><font color="#000000"><strong>- 네 번째 키워드 : 민감<br /><br /></strong><font color="#666666">☞ </font><a target="_blank" href="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81210172722">"'강철신경'은 자랑이 아니다"</a></font></td>
</tr>
</tbody>
</table>
</td>
</tr>
</tbody>
</table>
<table style="BORDER-RIGHT: #dadada 1px solid; BORDER-TOP: #dadada 1px solid; BORDER-LEFT: #dadada 1px solid; COLOR: #666666; BORDER-BOTTOM: #dadada 1px solid" height="20" cellspacing="5" cellpadding="5" width="95%" align="center" bgcolor="#f0fbff" border="0">
<tbody>
<tr>
<td class="article_writer2"><font color="#000000"><strong>○ 김명신의 '카르페디엠' : 북유럽 교육<br /><br /></strong><font color="#666666">☞<1> </font><a target="_blank" href="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0309173149">"당신은 펜을 들고, 친구는 카메라를 든 것처럼"</a><br /><font color="#666666">☞<2> </font><a target="_blank" href="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0310203739">"경쟁과 협력…누가 더 많이 웃고 살까"</a></font><br />☞<3> <a target="_blank" href="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0313131403">"한국 부모들, 심리학을 공부하세요"</a><br />☞<4> <a target="_blank" href="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0316174031">백년대계를 바꾸는 열 가지 차이는?</a><br />☞<5> <a target="_blank" href="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0318100016">"지구 반대편 '그들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a></td>
</tr>
</tbody>
</table>
<br />
<table style="BORDER-RIGHT: #dadada 1px solid; BORDER-TOP: #dadada 1px solid; BORDER-LEFT: #dadada 1px solid; COLOR: #666666; BORDER-BOTTOM: #dadada 1px solid" height="20" cellspacing="5" cellpadding="5" width="95%" align="center" bgcolor="#f0fbff" border="0">
<tbody>
<tr>
<td class="article_writer2"><font color="#000000"><strong>○ 핀란드 교육 탐방<br /><br /></strong><font color="#666666">☞ </font><a target="_new" href="http://www.pressian.com/Scripts/section/article.asp?article_num=60081029112203">"세금 많아서 자랑스럽다"…"튼튼한 복지는 좋은 교육의 조건"</a><br /><font color="#666666">☞ </font><a target="_new" href="http://www.pressian.com/Scripts/section/article.asp?article_num=60081029115441">"협동ㆍ배려ㆍ여유 vs 경쟁ㆍ욕심ㆍ긴장"</a><br /><font color="#666666">☞ </font><a target="_new" href="http://www.pressian.com/Scripts/section/article.asp?article_num=60081029120219">"부모 잘 만나야 우등생 되는 사회…벗어나려면"</a><br /><font color="#666666">☞ </font><a target="_new" href="http://www.pressian.com/Scripts/section/article.asp?article_num=60081029120350">"멀리 봐야 희망을 찾는다"</a></font></td>
</tr>
</tbody>
</table>
<br />
<table style="BORDER-RIGHT: #dadada 1px solid; BORDER-TOP: #dadada 1px solid; BORDER-LEFT: #dadada 1px solid; COLOR: #666666; BORDER-BOTTOM: #dadada 1px solid" height="20" cellspacing="5" cellpadding="5" width="95%" align="center" bgcolor="#f0fbff" border="0">
<tbody>
<tr>
<td class="article_writer2"><strong><font color="#000000">○ 핀란드 교육 관련 인터뷰</font></strong><br /><br />☞ <a target="_new" href="http://www.pressian.com/scripts/section/article.asp?article_num=60071005173641">국제학력평가 1위, 핀란드의 비결은?</a><br />☞ <a target="_new" href="http://www.pressian.com/scripts/section/article.asp?article_num=60080813100312">"경쟁? 100m 달리기 할 때만 들어본 단어입니다"</a><br />☞ <a target="_blank" href="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0112184434">"일제고사, 교사 해직…한국은 놀랄 일 투성이"</a><br />☞ <a target="_new" href="http://www.pressian.com/Scripts/section/article.asp?article_num=60081029121202">"교원노조는 좋은 교육 위한 동반자"</a><br />☞ <a target="_new" href="http://www.pressian.com/Scripts/section/article.asp?article_num=60081029121039">"관리자는 '윗사람'이 아니다"</a><br />☞ <a target="_new" href="http://www.pressian.com/Scripts/section/article.asp?article_num=60081029120934">"'피드백'이 교육을 살린다"</a><br />☞ <a target="_new" href="http://www.pressian.com/Scripts/section/article.asp?article_num=60081029120736">"차별, 더 강력한 차별이 필요하다"</a></td>
</tr>
</tbody>
</table>
<br />
<table style="BORDER-RIGHT: #dadada 1px solid; BORDER-TOP: #dadada 1px solid; BORDER-LEFT: #dadada 1px solid; COLOR: #666666; BORDER-BOTTOM: #dadada 1px solid" height="20" cellspacing="5" cellpadding="5" width="95%" align="center" bgcolor="#f0fbff" border="0">
<tbody>
<tr>
<td class="article_writer2"><font color="#000000"><strong>○ 핀란드 학교 탐방<br /><br /></strong></font>☞ <a target="_blank" href="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0310152555">꼴찌 없는 교실, 이유는?</a><br />☞ <a target="_blank" href="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0310170129">"자율 선택 강조하는 평등교육"</a><br />☞ <a target="_blank" href="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0310170417">"직업교육이 더 자랑스럽다"</a><br />☞ <a target="_blank" href="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0310170555">"혼자서 잘 해내는 아이를 키운다"</a><br />☞ <a target="_blank" href="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0331152103">"수업시간에 잠자는 아이를 보기 어려운 이유"</a><br />☞ <a target="_blank" href="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0401170539">"관료주의 깨야 공교육 산다"</a></td>
</tr>
</tbody>
</table>
<br />
<table style="BORDER-RIGHT: #dadada 1px solid; BORDER-TOP: #dadada 1px solid; BORDER-LEFT: #dadada 1px solid; COLOR: #666666; BORDER-BOTTOM: #dadada 1px solid" height="20" cellspacing="5" cellpadding="5" width="95%" align="center" bgcolor="#f0fbff" border="0">
<tbody>
<tr>
<td class="article_writer2"><font color="#000000"><strong>○ 도종환 시인이 본 핀란드 교육<br /><br /></strong><font color="#666666">☞ </font><a target="_blank" href="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40090127215548">핀란드의 아이들</a><br /><font color="#666666">☞ </font><a target="_blank" href="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40090220113332">악덕의 씨를 심는 교육</a></font></td>
</tr>
</tbody>
</table>
<br />
<table style="BORDER-RIGHT: #dadada 1px solid; BORDER-TOP: #dadada 1px solid; BORDER-LEFT: #dadada 1px solid; COLOR: #666666; BORDER-BOTTOM: #dadada 1px solid" height="20" cellspacing="5" cellpadding="5" width="95%" align="center" bgcolor="#f0fbff" border="0">
<tbody>
<tr>
<td class="article_writer2"><font color="#000000"><strong>○ 스웨덴 학교 이야기<br /><br /></strong><font color="#666666">☞ </font><a target="_blank" href="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81030180651">"일등을 포기한 학교에서, 더 많이 배웠다"</a></font><br />☞ <a target="_blank" href="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0310150844">"외운 것은 가장 낮은 수준의 지식일 뿐"</a><br />☞ <a target="_blank" href="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0310151447">청소부에게 야단맞는 대학 교수</a><br />☞ <a target="_blank" href="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0310152242">사민주의 사회에서 이뤄지는 경쟁 실험</a></td>
</tr>
</tbody>
</table>
<br />
<table style="BORDER-RIGHT: #dadada 1px solid; BORDER-TOP: #dadada 1px solid; BORDER-LEFT: #dadada 1px solid; COLOR: #666666; BORDER-BOTTOM: #dadada 1px solid" height="20" cellspacing="5" cellpadding="5" width="95%" align="center" bgcolor="#f0fbff" border="0">
<tbody>
<tr>
<td class="article_writer2"><font color="#000000"><strong>○ 잘 사는 나라가 져야 할 책임<br /><br /></strong><font color="#666666">☞ <a target="_blank" href="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81204144421">"'아이에게 살충제 먹이는 회사'엔 투자할 수 없다"</a></font></font><br />☞ <a target="_blank" href="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40070510112740">당당하게 '퍼주자', 스웨덴처럼</a></td>
</tr>
</tbody>
</table>
<br />
<table style="BORDER-RIGHT: #dadada 1px solid; BORDER-TOP: #dadada 1px solid; BORDER-LEFT: #dadada 1px solid; COLOR: #666666; BORDER-BOTTOM: #dadada 1px solid" height="20" cellspacing="5" cellpadding="5" width="95%" align="center" bgcolor="#f0fbff" border="0">
<tbody>
<tr>
<td class="article_writer2"><font color="#000000"><strong>○ 스웨덴 우파의 도전<br /><br /></strong><font color="#666666">☞ <a target="_blank" href="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40070612145612">스웨덴 우파 집권, 그 이후…</a></font></font><br />☞ <a target="_blank" href="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40070726110056">스웨덴에 특목고가 생긴다?</a></td>
</tr>
</tbody>
</table>
<br />
<table style="BORDER-RIGHT: #dadada 1px solid; BORDER-TOP: #dadada 1px solid; BORDER-LEFT: #dadada 1px solid; COLOR: #666666; BORDER-BOTTOM: #dadada 1px solid" height="20" cellspacing="5" cellpadding="5" width="95%" align="center" bgcolor="#f0fbff" border="0">
<tbody>
<tr>
<td class="article_writer2"><strong><font color="#000000">○ "덴마크에서 살아보니"</font></strong><br /><br /><strong><font color="#000000">- 직업과 학벌에 따른 차별이 없다</font></strong><br /><br />☞ <a target="_blank" href="http://www.pressian.com/scripts/section/article.asp?article_num=60080213170146">"명문대? 우리 애가 대학에 갈까봐 걱정"</a><br />☞ <a target="_blank" href="http://www.pressian.com/scripts/section/article.asp?s_menu=사회&article_num=60080217200036">의사와 벽돌공이 비슷한 대접을 받는 사회</a><br />☞ <a target="_blank" href="http://www.pressian.com/scripts/section/article.asp?s_menu=사회&article_num=60080219160113">"덴마크도 40년 전에는 '서열 의식'이 견고했다"</a><br />☞ <a target="_blank" href="http://www.pressian.com/scripts/section/article.asp?s_menu=사회&article_num=60080226174858">모두가 승리자 되는 복지제도</a><br />☞ <a target="_blank" href="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80722115621">비정규직 임금이 정규직 임금보다 더 많은 나라</a><br /><br /><strong><font color="#000000">- '암기가 아닌 창의, 통제가 아닌 자율'을 장려하는 교육</font></strong><br /><strong><font color="#000000"></font></strong><br />☞ <a target="_blank" href="http://www.pressian.com/scripts/section/article.asp?s_menu=사회&article_num=60080206161352">"아이들은 숲 속에서 뛰노는 게 원칙"</a><br />☞ <a target="_blank" href="http://www.pressian.com/scripts/section/article.asp?s_menu=사회&article_num=60080206172159">"노는 게 공부다"</a><br />☞ <a target="_blank" href="http://www.pressian.com/scripts/section/article.asp?s_menu=사회&article_num=60080206173918">"충분히 놀아야 다부진 어른으로 자란다"</a><br />☞ <a target="_blank" href="http://www.pressian.com/scripts/section/article.asp?s_menu=사회&article_num=60080211121454">1등도, 꼴찌도 없는 교실</a><br />☞ <a target="_blank" href="http://www.pressian.com/scripts/section/article.asp?s_menu=사회&article_num=60080221190044">"왜?"라는 물음에 익숙한 사회</a><br />☞ <a target="_blank" href="http://www.pressian.com/scripts/section/article.asp?s_menu=사회&article_num=60080222173730">"19살 넘으면, 부모가 간섭할 수 없다"</a><br /><br /><strong><font color="#000000">- "아기 돌보기, 사회가 책임진다"</font></strong><br /><br />☞ <a target="_blank" href="http://www.pressian.com/scripts/section/article.asp?s_menu=사회&article_num=60080131191916">"출산율? 왜 떨어집니까"</a><br />☞ <a target="_blank" href="http://www.pressian.com/scripts/section/article.asp?s_menu=사회&article_num=60080203180119">"직장인의 육아? 걱정 없어요"</a><br /><br /><strong><font color="#000000">- "덜 소비하는 풍요"</font></strong><br /><br />☞ <a target="_blank" href="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80316172140">"에너지 덜 쓰니, 삶의 질은 더 높아져"</a><br />☞ <a target="_blank" href="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80318151717">"개인주의를 보장하는 공동체 생활"</a><br />☞ <a target="_blank" href="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80324094337">'빚과 쓰레기'로부터의 자유</a><br />☞ <a target="_blank" href="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80324172527">"장관이 자전거로 출근하는 나라"</a><br />☞ <a target="_blank" href="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80324174916">"우리는 언제 '덴마크의 1979년'에 도달하려나"</a><br /><br /><strong><font color="#000000">- "낡고 초라한 아름다움"</font></strong><br /><br />☞ <a target="_blank" href="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80227184616">"수도 한 복판에 있는 300년 전 해군 병영"</a><br />☞ <a target="_blank" href="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80302171350">인기 높은 헌 집</a><br />☞ <a target="_blank" href="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80304135939">"코펜하겐에 가면, 감자줄 주택에 들르세요"</a><br />☞ <a target="_blank" href="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80306170246">도서관, 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곳</a><br /><br /><strong><font color="#000000">- 덴마크 사회의 그림자</font></strong><strong><font color="#000000"></font></strong><br /><br />☞ <a target="_blank" href="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80330163650">"덴마크는 천국이 아니다"</a><br />☞ <a target="_blank" href="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80220130513">"덴마크 사회의 '관용'은 유럽인을 위한 것?"</a></td>
</tr>
</tbody>
</table>
<br />
<table style="BORDER-RIGHT: #dadada 1px solid; BORDER-TOP: #dadada 1px solid; BORDER-LEFT: #dadada 1px solid; COLOR: #666666; BORDER-BOTTOM: #dadada 1px solid" height="20" cellspacing="5" cellpadding="5" width="95%" align="center" bgcolor="#f0fbff" border="0">
<tbody>
<tr>
<td class="article_writer2"><strong><font color="#000000">○ 입양대국 북유럽, 그리고 '수잔 브링크의 아리랑'</font></strong><br /><br />☞ <a target="_blank" href="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80314074418">한국에서 덴마크로 입양된 사람들</a><br />☞ <a target="_blank" href="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80320103149">"스웨덴에서 자란 입양인이 왜 한국을 그리워하죠?"</a><br />☞ <a target="_blank" href="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80825120150">"중국에 공녀, 일본에 위안부, 그리고 우리"</a><br />☞ <a target="_blank" href="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70513075925">해외입양은 아동복지인가, 아동학대인가?</a><br />☞ <a target="_blank" href="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70504154631">"한국은 여전히 '미개한 나라'일지도 모른다"</a><br />☞ <a target="_blank" href="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70509182024">해외입양 16만명 중 10만명이 미국으로, 왜?</a><br />☞ <a target="_blank" href="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70508105455">한국, 경제대국? 세계 1위 '아동수출대국'!</a></td>
</tr>
</tbody>
</table><br /></div><div class="buttons-bottom right jinboblog-i-like-this-buttons"><a class="button-jinboblog" href="javascript:void(0);" title="스크랩으로 글 링크를 저장하세요" onclick="recommend('308',675,'/gimche','');"><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mini_chuchon.png" alt="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a><a class="button-twitter" href="http://twitter.com/home?status=http%3A%2F%2Fblog.jinbo.net%2Fgimche%2F675+%22%5B%EC%84%9C%ED%8F%89%5D%20%3C%EC%82%AC%ED%9A%8C%EB%AF%BC%EC%A3%BC%EC%A3%BC%EC%9D%98%EB%9E%80%20%EB%AC%B4%EC%97%87%EC%9D%B8%EA%B0%80%3E%22" target="_blank" title="트위터로 리트윗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twitter.png" alt="트위터로 리트윗하기" /></a><a class="button-facebook" href="http://www.facebook.com/sharer.php?u=http%3A%2F%2Fblog.jinbo.net%2Fgimche%2F675&t=%5B%EC%84%9C%ED%8F%89%5D%20%3C%EC%82%AC%ED%9A%8C%EB%AF%BC%EC%A3%BC%EC%A3%BC%EC%9D%98%EB%9E%80%20%EB%AC%B4%EC%97%87%EC%9D%B8%EA%B0%80%3E" target="_blank" title="페이스북에 공유합니다"><im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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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겠지만,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는 이 책이 기파랑이라는 출판사에서 나온 것은 조금 의외다. 이전에 기파랑에서 나왔던 책들이 주로 뉴라이트 성향을 띠었던 것에 비추어보면 그렇다는 얘기다.<br /> <br />아래에 서평과 함께 이와오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 나왔던 기사를 덧붙인다.</font><br /> <br />-----------------------------------------------------------<br /><strong><a href="http://www.naeil.com/News/economy/ViewNews.asp?nnum=473347&sid=E&tid=4">[신간]자본주의는 왜 무너졌는가</a></strong> (내일, 장세풍 기자, 2009-05-22 오전 11:50:11)<br /><strong><font color="#000080">“글로벌 자본주의는 악마의 사상” 일본 신자유주의 전도사가 쓴 참회의 고백 … “미국식 붕괴 시작”<br />자본주의는 왜 무너졌는가/나카타니 이와오 지음/이남규 옮김/기파랑/1만3000원</font></strong><br /> <br />전 세계가 불황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다. 이번 불황은 이른바 신자유주의의 본토, 미국에서 발생한 금융위기로 인해 시작된 것이라 전 세계 곳곳에서 세력을 떨치던 글로벌 자본주의 신봉자들이 충격에 빠져 있다.<br /> <br />이런 가운데 일본열도에서 진행됐던 신자유주의 개혁노선의 선봉장 역할을 하던 한 경제학자가 최근 출간한 책이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누구보다 신자유주의의 우수성을 역설했던 저자가 이번에 출간한 책을 통해 그동안의 신념을 버리고 ‘전향’을 선언했기 때문이다.<br /> <br />저자는 31세에 미국 하버드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해 규제완화 추진파 경제학자로서 주목을 받았다. 그의 주장은 일본정부의 경제정책에도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그는 1990년대 호소카와 내각과 오부치 내각에서 수상자문기관의 일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특히 그는 오부치 내각의 경제전략회의 의장 대리를 맡기도 했다.<br /> <br />그런 저자가 갑자기 “나를 포함해 너무 미국에 심취한 유학파들의 착각이 있었다”며 작은 정부, 자기 책임 등 자신이 주장해온 신자유주의 논리들을 철회했다. 저자는 또 일부 경제학자 특히 미국의 경제학자들이 아직까지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고 우려하고 있다. 그들이 세계금융공황을 커다란 변화일지 모르지만 결국은 자본주의 경제의 자율적인 조정과정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지적이다.<br /> <br />그러나 저자는 이번 금융위기의 해결시점에 대해 신자유주의 학자들과 같은 낙천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다. 글로벌자본주의가 경제의 불안정화, 빈부격차의 확대, 자연환경 파괴 등과 같은 본질적인 결함을 내포하고 있으며 이제 그 정당성을 재검증 받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br /> <br />책에서 저자는 “이번에 일어난 금융 불안은 글로벌자본주의의 본질적인 결함이나 문제의 일부만 드러낸 것일 뿐”이라며 “지금도 심각성이 높아지고 있는 환경오염, 식품오염, 빈부격차 확대 등을 생각하면 큰 수정이 불가피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좀 더 강하게 표현한다면 미국주도의 글로벌자본주의는 스스로 붕괴되기 시작했다는 것이 나의 인식”이라며 “이대로 가만히 있다면 글로벌 자본주의라는 괴물은 다시 날뛰기 시작해 결국 인류를 멸망의 늪으로 몰아갈 것”이라고 경고했다.<br /> <br />저자는 이런 위기의 원인을 자신의 경험담을 통해 담담히 써내려가고 있다.<br />그는 자신이 미국에서 유학하던 시절을 ‘좋은 미국’이라는 말로 설명하고 있다. “내가 미국에 유학했던 30년 전의 미국과 현재의 미국은 너무나 다르다. 그 무렵 ‘좋은 미국’의 모습을 나는 지금도 생생하게 회상할 수 있다. 여유 있는 중류계급 사람들의 가정생활은 청결하고 화려했다. 그리고 그들의 느긋함과 관대한 마음 그리고 식기세척기나 컬러텔레비전, 자가용. 그리고 무엇보다 당시 가난한 학생이었던 내 눈에 띄는 것은 아이들까지 사용했던 대량의 휴지였다. 실로 넘치는 듯한 물질적인 풍요였다. 당시의 일본이 빈곤했던 때문이기도 해서 내게는 미국이 더욱 화려하게 보였다”고 회상했다.<br /> <br />그런 저자가 현재의 미국을 ‘변질된 미국의 풍요’라는 말로 비판하고 있다. 책에서 그는 “그로부터 30여년. 경제성장은 지속되고 미국은 경제적으로 훨씬 더 풍요한 사회가 되었을 터인데도 오늘의 미국에서는 과거의 ‘풍요함’이나 ‘관대함’을 느낄 수 없다. 최근에는 미국사회의 ‘조잡함이 마음에 걸린다. 지역차, 개인차는 물론 있지만 기본적으로 ‘문화’의 향기가 없는 것이다. 어쨌든 미국사회는 무언가 커다란 질적 변호를 겪을 것 같다는 생각을 억제할 수 없다”고 설명하고 있다.<br /> <br />저자는 이런 변화의 원인을 먼저 미국의 소득격차가 놀랄 만큼 확대되었다는 사실에서 찾고 있다. 미국에는 빌게이츠 같은 슈퍼부유층이 많이 등장한 반면 지난날 ‘좋은 미국’을 지탱하고 있던 풍요한 중류계급 사람들이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지난 수 십 년 사이에 소득 상위계층 1%의 소득합계가 미국인 전체의 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8%에서 17%로 급상승했다.<br /> <br />이 덕분에 미국인의 ‘평균소득’은 매년 2% 이상 증가했다. 이것만 보면 확실히 미국인의 삶은 풍요해졌다. 그러나 이는 숫자상의 풍요로움에 지나지 않다는 것이 저자의 분석이다. 평균소득 증가가 보여주는 풍요로움은 어디까지나 평균치의 이야기이고, 미국을 ‘동경의 나라’로 만들었던 ‘풍요로운 중류가정’의 모습은 이미 사라졌다는 것이다.<br /> <br />소득격차의 문제와 함께 저자는 멜트다운(도덕적퇴폐)를 현재의 미국경제를 어렵게 만든 원인으로 분석하고 있다. 최근 서브프라임 문제로 시작된 금융위기 이전, 미국중심 글로벌자본주의의 심장인 월스트리트에는 ‘오만한’ 비즈니스맨들이 활보했다.<br /> <br />최대의 투자은행이었던 골드먼삭스의 종업원들은 1인당 평균 66만달러의 연봉을 받았다. 비단 이 회사뿐 아니라 월스트리트를 기반으로 하는 많은 금융자본들이 돈의 축제를 이어갔다. 문제는 건강보험에 들 수 없어 아파도 의사에게 갈수 없는 미국인이 5000만명이 넘었고, 값싼 정크 푸드로 인해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의 고도비만으로 고생하는 미국인들을 거리에 넘쳐났다는 것이다. 특히 월스트리트의 오만한 비즈니스맨들은 돈 때문에 질병과 의식주 문제로 고민하는 이웃에 대해 관심도 없고 어떤 배려도 할 생각이 없었다.<br /> <br />지난해 12월 일본에서 발간된 이 책은 발간 한달 만에 경제서적으로서는 이례적으로 13만부가 판매된 베스트셀러이다. 책이 나오자 일본 경제학계서 조차도 저자의 논지에 대해 찬반양론으로 갈라져 지금까지 논쟁을 벌이고 있다.<br /> <br />특히 아사히, 요미우리, 마이니찌 등 일본 신문들은 서평란에서 이 책을 소개했다. 또 주간현대는 ‘고이즈미 대죄와 일본의 불행, 구조개혁 주인공의 참회고백’이란 제목으로 특집기사를 싣기도 했다. 특히 잡지 ‘정론’은 ‘내 참회의 글을 쓴 이유’라는 제목으로 나카다니씨의 글을 게재해 논쟁의 불을 지폈다. 현재 많은 인터넷 매체가 이 책에 관한 찬반양론 싸움에 가세하고 있다.<br /> <br />한편 저자는 100년에 한번이라고 하는 금융위기로 인해 촉발된 세계경제불황이 상당기간 지속될 것으로 보고 있다. 실제로 버블경제의 파탄 이후 일본은 불량채권을 처리하는데 10년 이상 걸렸다. 아무리 낙관적으로 생각해도 4~5년은 걸린다는 것이다. 특히 일본의 불량채권 문제는 국내 상황이었는데 반해 이번 불황은 이미 전 세계로 확산됐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을 뒷받침해주고 있다.<br /> <br />-----------------------------------------------------------<br /><strong><a href="http://news.khan.co.kr/section/khan_art_view.html?mode=view&artid=200905221732315&code=900308">[책과 삶]어느 경제학자의 참회 “내가 틀렸다”</a></strong> (경향,김재중기자, 2009-05-22-17:32:31)<br /><strong><font color="#000080">자본주의는 왜 무너졌는가. 나카타니 이와오 | 기파랑</font></strong><br /> <br />지난해 말 일본 논단에서 꽤 큰 소동이 벌어졌다. ‘작은 정부, 큰 시장’을 외치며 신자유주의 개혁노선의 전도사를 자처한, 그리고 일본 정부의 신자유주의 경제개혁의 기틀을 마련해주었던 주인공이 한 권의 책을 통해 “이제까지 내 주장은 잘못됐다”며 ‘전향’을 선언한 것이다. 주인공은 나카타니 이와오(中谷嚴) 미쓰비시UFJ리서치&컨설팅 이사장(66). 미국 하버드대 유학파 출신 경제학자인 그는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총리 시절 총리자문기관인 경제전략회의에 핵심 멤버로 참여했고, 그가 내놓은 제안들은 고이즈미(小泉) 정권에 인계돼 미국식 신자유주의가 일본에 들어오도록 했다.이 책은 지난해 말 일본에서 출간된 그의 참회록을 번역한 것이다. 나카타니는 자신이 미국식 신자유주의의 신봉자가 된 계기를 27세 때(1969년) 떠난 미국 유학의 경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밝혔다. 미국이라는 거대한 나라에서 목도한 자유의 풍요에 압도당했다는 것이다. 그가 공부하던 시절 미국에서는 케인스주의가 서서히 퇴조하고 큰 정부에 대한 비판이 거세지던 시기였다. 이러한 신자유주의의 세례를 듬뿍 받고 돌아와 대학 강단에 서게 된 그는 당연히 근대경제학, 특히 시장경제 메커니즘의 위대성을 열렬히 강의했고 정부에도 참여했다.<br /> <br />그가 참회와 전향을 선언한 것은 자신이 신봉한 미국식 경제의 붕괴, 그리고 자신이 추진했던 개혁의 결과로 일본 사회에 만연한 양극화 때문이었다. “개혁은 필요하지만 그 개혁이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어주지 못하면 의미가 없고, 사람을 고립시키는 개혁은 개혁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미국을 들여다봐도 마찬가지다. “미국은 자유경쟁, 자기책임의 나라이므로 세계 제일의 풍요한 국가가 되었다”고 믿어왔지만 그 자유경쟁, 자기책임이 “압도적 다수는 패배자가 되어 비참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처절한 참회를 거쳐 그가 내놓은 대안은 고용의 안정, 정부의 개입, 지방분권, 환경보호 등 신자유주의 교리와 정면 배치되는 것들이다. 지금이야말로 ‘악마의 맷돌’로서의 시장사회를 해체하고 글로벌 자본주의라는 괴물에 족쇄를 채울 때라는 것이다.<br /> <br />세계 경제위기 발생 이후 한국에서도 신자유주의 비판이 거세지고 있다. 그러나 나카타니와 비슷한 이력을 가진, 미국 유학파 출신의 주류 경제학자·정책가들로부터의 자성과 참회는 들어본 적이 없다. 그들은 일본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는 한국의 심각한 상황에 언제까지 눈을 감고 있을 것인가.<br /> <br />-----------------------------------------<br /><a href="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80474"><strong>한국의 신자유주의자들도 반성할 때가 올까</strong></a> (미디어오늘, 2009년 06월 13일 (토) 04:00:36 이정환 기자)<br /><strong><font color="#000080">[서평] 나카타니 이와오, 자본주의는 왜 무너졌는가</font></strong> <br /> <br /><img id="my_post_img8668248" style="CURSOR: hand" onclick="viewPostImage('/attach/308/141049356.jpg')" height="431" width="300" onload="setTimeout('fixImage(8668248)',300)" align="left" alt="" src="/attach/308/141049356.jpg" />나카타니 이와오가 뭔가 잘못됐다고 생각하게 된 건 미국의 물질적 풍요가 사라진 걸 발견하면서부터였다. 30년 전과는 분명히 달랐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풍요로운 삶을 즐겼던 중류 계급이 언젠가부터 사라졌다. 일본 역시 마찬가지였다. 경제는 성장하는데 소득 격차는 더욱 벌어지고 저소득 계층은 급증하고 있다. 뭐가 잘못된 것일까. 그는 글로벌 자본주의를 회의하기 시작했고 결국 전향을 선언한다. <br /> <br />나카타니 이와오는 미국 하버드대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1974년 귀국해 규제완화와 구조개혁을 진두지휘했다. 1990년대 호소카와 내각과 오부치 내각의 수상자문기관의 일원이었고 오부치 내각에서는 경제전략회의 의장 대리를 맡기도 했다. 대표적인 신자유주의 개혁론자였던 그가 갑자기 "내가 틀렸다"고 털어놓았을 때 일본이 발칵 뒤집힌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지난해 12월 출간된 이 책은 일본에서 13만부나 팔렸다. <br /> <br />그는 "공부를 하면 할수록 미국 현대경제학의 놀라운 논리체계와 치밀성에 압도되지 않을 수 없었다"면서 "특히 시장이론의 정치성과 이론체계 전체의 높은 완성도에 경의를 표하게 됐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그의 대학시절을 떠올리면서 "단순히 물질적으로 풍요하다는 것 뿐만 아니라 가족과 지역사회를 소중히 하는 건전하고 밝은 정신으로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보였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br /> <br />그러나 그는 "미국의 풍요로운 사회를 지탱하고 있었던 것은 자유로운 시장활동이 아니라 위대한 사회 건설을 내걸고 정부의 역할을 중시했던 신고전파 종합에 기초를 둔 경제 정책이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런 현실을 간과하고 레이건 정권 이후 주류가 된 신자유주의야 말로 오래 전부터 미국형 경제의 중심이었던 것처럼 착각하고 말았던 것"이라고 털어놓았다. 반전치고는 정말 놀라운 반전이었다. <br /> <br />그는 "미국 사회가 풍요하고 건전한 중류계급이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은 신자유주의적인 의미의 시장원리가 미국사회에 관철돼 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프랭클린 루즈벨트의 뉴딜정책이나 케인즈적 정책, 소득 평등화를 위한 세제나 사회복지 정책 덕택이었다"고 강조했다. "미국은 자유경쟁의 나라, 자기책임의 나라이므로 세계 제일의 풍요한 나라가 됐다는 이미지는 진실의 반밖에 말해주고 있지 않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br /> <br />그는 이제 글로벌 자본주의를 정면으로 비판하기 시작한다. "미국 경제학이나 시장 원리주의는 엘리트들의 지배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면서 "글로벌 자본주의는 과격한 경쟁을 도입하고 기업이 죽기 살기로 경쟁을 한 결과 소비자와 투자가는 충분한 보상을 받았을지도 모르지만 노동자와 시민은 골탕을 먹었다"는 과격한 발언도 서슴지 않는다. 그는 "격차 확대는 시장의 실패라고 하기보다는 글로벌 자본주의에 내재된 본래적 기능"이라고 정리한다. <br /> <br />그가 말하는 일본 재생을 위한 대안은 다분히 원론적이지만 흥미롭다. <br />"가난은 자조노력이 부족해서 생긴 것이며 국가나 사회가 도와주는 것은 응석을 받아주는 것이라는 신자유주의 사상으로는 사회가 무너져갈 뿐이고 일본 경제의 잠재력은 점점 더 소멸되고 만다. 이런 상황을 일각이라도 빨리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서 우리가 먼저 참고해야 하는 것은 미국식 신자유주의와 반대에 있는 북구 여러 나라의 방식이다." <br /> <br />그는 또 "작은 정부가 더 효율적이라고 말할 수 없다"면서 "큰 정부에서도 경제를 더 활성화시킬 수 있는 경우가 있다"고 지적한다. 동시에 그는 "국가가 할 수 있는 것은 모든 국민들에게 최저한의 생활을 물질적 금전적으로 보장하는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면서 "국민이 각자 행복감을 느낄 수 있는 사회를 만들려고 하면 행정 단위를 가능한 작게 하고 사회의 유대, 인간끼리의 신뢰를 회복해 나가는 것 외에 일본을 재생시킬 길이 없다"고 강조했다. <br /> <br />그는 이 책의 결론으로 "자유 때문에 자본주의는 스스로 붕괴한다"고 선언한다. "글로벌 자본이 세계 경제를 불안정하게 만들고 소득 격차 확대가 불행한 사람을 대량으로 생산하고 지구 환경도 이제는 수복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오염되고 말았다는 점에서 자본주의의 자괴작용은 이미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이 괴물의 움직임에 족쇄를 채우기에 앞서 우리들은 욕망의 억제라는 것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고 덧붙였다. <br /> <br />먼저 궁금한 건 왜 우리나라의 신자유주의자들은 반성을 하지 않는 걸까 하는 점이다. 그러나 돌아보면 우리나라 정책 입안자들 가운데는 제대로 된 신자유주의자조차도 없다. 노무현 전 대통령 때는 신자유주의 구조개혁을 진보라고 착각하는 얼치기 좌파들이 넘쳐났고 이명박 대통령 때는 기업의 이해를 대변하는 것이 성장의 초석을 닦는 것이라고 믿는 기득권 만능주의가 판을 치고 있다. 이들이 여전히 문제가 뭔지 모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br /> <br />나카타니 이와오는 글로벌 자본주의를 괴물로 규정했다. "괴물과 싸우지 않으면 잡아먹히고 만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그가 격차의 확대에 주목하면서 자유방임이 아니라 정부의 주도적인 개입을 강조하고 공동체적 가치를 복원해야 한다고 역설한 것은 온갖 반대를 무릅쓰고 비즈니스 프렌들리에 열중하고 있는 이명박 정부에게도 많은 시사점을 준다. 이명박 대통령은 여전히 괴물에게 애정을 쏟고 있는 중이다. <br /> <br /><p><span class="toggle-text" onclick="toggleMore(this)" style="cursor: pointer; display: none;">계속 보기...</span></p> <div class="more-content" style="border: 1px dashed black; background: none repeat scroll 0% 0% rgb(239,255,175); padding: 1px; margin: 1px;"><br />===================================================== <br /><strong>日 대표적 신자유주의자의 ‘참회록’ 나카타니 이와오 인터뷰</strong> (2009/03/03 21:17) <br /> <br /><font color="#105738">이와오가 어떻게 해서 변절(?)하게 되었는지 궁금하던 차에 경향에서 인터뷰 기사를 실었다. 물론 자신의 생각이 바뀐 구체적인 얘기는 하고 있지 않지만, 미국의 네오콘과 같이 트로츠키주의자였다가 극우로 돌아선 이들이나 신지호 등과 같이 엉뚱하게 맛이 간 경우가 많은 세태에서 신자유주의의 입장에 서 있다가 이렇게 바뀐 이를 만난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이쯤되면 나카타니 이와오가 쓴 <자본주의는 왜 자멸했는가?>가 번역되어 나올 것도 같은데...<br /></font> <br />-------------------------------------------------------<br /><strong><a title="[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3031746055&code=210000]로 이동합니다." target="_blank" href="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3031746055&code=210000"><font color="#333333">[경향과의 만남]“버블·빈곤층 고립·지구 파괴가 신자유주의 3대 병폐”</font></a></strong> (경향, 도쿄 | 조홍민특파원, 2009-03-03 17:46:05)<br /><strong><font color="#193da9">ㆍ日 대표적 신자유주의자의 ‘참회록’ 나카타니 이와오</font></strong><br /> <br />금융위기, 비정규직 해고, 빈곤층의 확산, 무차별 살인사건의 급증…. 버블 붕괴 이후 최근 약 10년간 미국형 신자유주의를 모델로 호황을 구가해온 일본사회에 이상 기류가 감지되고 있다. 세계적인 경기 침체로 인해 지난해 12월 국내총생산(GDP)은 두 자릿수로 뒷걸음치고, 가족과 직장 구성원의 ‘끈’을 중시해온 일본적 가치관이 붕괴되면서 사회문제화하고 있다. 이런 일본사회에서 최근 신자유주의를 맹신하며 구조개혁 노선을 주도해온 경제학자의 ‘참회록’이 화제가 되고 있다.<br />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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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 align="center"><img alt="" src="http://img.khan.co.kr/news/2009/03/03/20090304.01100129000001.01M.jpg" /><a href="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090225025005#"></a></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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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토 끝 -->주인공은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내각 당시 총리자문기관인 경제전략회의에 핵심멤버로 참여했던 나카타니 이와오(中谷嚴) 미쓰비시UFJ리서치&컨설팅 이사장(66). 그가 쓴 <자본주의는 왜 자멸했는가>라는 책은 지난해 12월 발간된 한 달 사이에 13만부가 넘게 팔리는 등 폭발적 관심을 끌고 있다. 구조개혁의 필요성을 누구보다도 역설해온 그는 “최근 일본사회의 병폐를 보면서 구조개혁노선만으로는 일본인들이 행복해질 수 없다고 믿게 됐다”면서 ‘전향’을 선언했다. 지난달 23일 나카타니 이사장을 도쿄 시내 사무실에서 만나 ‘반성의 변’을 들어보았다.<br /> <br />-지금 세계 경제가 악화하고 있습니다. 지금 상황을 어떻게 평가하십니까.<br />“아주 어렵습니다. 일본 경제도 2009년도 성장률이 마이너스 5~6%로 예상되고 있습니다. 아마 3~4년 동안 가장 어려운 상황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처음에는 물론 서브프라임모기지론 사태에서 시작됐습니다만 이런 상황이 금융기관 이외에 일반 기업의 자금 사정에까지 영향을 주고 경영을 위축시켰습니다. 일본의 경우, 3월 결산에서 꽤 많은 기업이 도산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렇게 일반 회사의 경영이 어려워지면 금융기관에 불똥이 다시 튀어 타격을 주게 될 것입니다. 결국 이런 악순환이 시작되는데, 무서운 것은 이게 한 번 시작되면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서 현상으로 굳어진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것을 멈출 것인가가 문제인데, 지금 논의되는 정책으로는 부족합니다. 1~2년 안에 회복되면 좋겠지만 그렇게 되긴 힘들 겁니다.” <br /> <br />-미국이 주도한 글로벌 자본주의가 경제불안의 근본원인으로 지적됩니다.<br />“글로벌 자본주의는 지난 20년간 활성화됐습니다. 공적도 있지만 부작용도 무척 컸습니다. 그 부작용은 3가지를 꼽을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필연적으로 버블을 만들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1987년 뉴욕 증시 블랙 먼데이 이후 일본 90년 버블 붕괴, 2001년 정보기술(IT) 버블 붕괴, 지난해 리먼 브라더스 쇼크 등이 있었습니다. 버블이 자주 일어났고 깨지기를 반복하는 등 무척 불안정한 상황이었습니다. 이번 경우는 매우 큰 버블이 터진 것입니다. 글로벌 자본이 자유롭게 움직이는 신자유주의 체제에서는 반복해서 버블이 발생하고 터진다는 사실을 강하게 인식해야 합니다. 둘째는 사회가 이상하게 변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시장 메커니즘에서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인간이 고립됐지만 사회는 그런 사람들을 구제하지 못했습니다. 국가의 역할이 작아지면서 ‘자기 책임이니까 스스로 알아서 해결하라’는 식이었습니다. 신자유주의하에서는 경쟁에서 낙오된 사람을 구해주는 철학이 없어지게 된 것입니다. 세번째는 지구 환경 파괴입니다. 글로벌 자본은 자신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환경보호 비용을 지불하려고 하지 않는 쪽으로 점점 가고 있어서 지구의 환경파괴가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이들 문제를 해결할 명쾌한 비전이 없다면 21세기 지구가 어떻게 될까 모릅니다. 무척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br /> <br />-신자유주의의 가장 큰 문제가 무엇입니까. <br />“지금 지적한 3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선 버블 붕괴를 봅시다. 국가에 비해 글로벌 자본은 더 큰 규모로 자유롭게 움직입니다. 인구 32만명밖에 되지 않는 작은 나라인 아이슬란드의 경우 ‘금융입국’을 목표로 하면서 전 세계 자본을 끌어들였습니다. 이 작은 나라가 GDP 세계 1위를 기록합니다. 그러나 자본이 전부 빠져나오자 국가는 속수무책으로 무너집니다. 글로벌 자본이 ‘괴물’로 변한 셈이죠. 신자유주의는 그동안 글로벌 자본의 욕심을 인정해야 한다고 했지만 이제 반성과 근본적인 개선책이 필요합니다.” <br /> <br />-미국식 자본주의로부터 전향하고 참회록을 내게 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br />“나도 규제철폐를 주장하고 시장 메카니즘에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u>규제에는 (사회나 경제를) 정체시키는 요인이 가득하다고 봤습니다. 당시는 그것이 옳다고 생각했지만 (미국식 자본주의가 초래할) 사회의 영향을 과소 평가했습니다.</u>” <br />(이 대목에서 그는 자신의 저서 맨 앞장에 ‘과이불개 시위과의(過而不改 是謂過矣)’라고 적어주었다. 논어에 나오는 말로 ‘허물을 알고도 고치지 않는 것, 그것이 허물’이라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br /> <br />-고이즈미의 구조개혁을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br />“<u>사회적 약자를 부축하는 사회적 안전망을 먼저 고려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개혁의 방향, 자유화에만 치중하면서 사회안전망 정비와 관련해서는 거의 실행한 것이 없습니다</u>.” <br /> <br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보십니까. <br />“책에도 썼지만 어느 방향으로 갈 것인지가 중요합니다. 미국 근대경제학 체계는 민주주의가 최선의 방책이라는 데 근거합니다. 시장도, 국가도 민주주의에 의해 굴러간다는 것이죠. 모두가 자유롭고 아무도 강제하지 않는 자유의지에 근거해 사고팔고 하는 곳이 시장입니다. 결과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는 것은 양산되고, 그렇지 못한 것은 도태된다는 이론입니다. 다수결의 정치와 같은 것이죠. 그런데 이것은 어떤 사회가 바람직하냐는 개념에 대해서는 ‘논의하지 않아도 된다’는 극단적인 시각으로 연결됩니다. ‘시장과 민주정치가 자동적으로 좋은 사회를 이끌 것’이라는 식의 사고는 안이했다고 봅니다. <u>시장이 어떤 문제점을 갖고 있는지, 사회가 어떤 방향을 지향해야 하는지 제대로 논의하고 개선할 필요</u>가 있습니다.” <br /> <br />-빈부 격차 확대에 대한 해결책은 무엇일까요. <br />“신자유주의적인 작은 정부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생각을 그만두고 확실한 재분배정책을 실행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일본의 소비세를 예로 들자면 현행 5%를 20%까지 올린다는 얘기가 있는데, 여기에도 차등을 둬야 합니다. 소비세를 지불할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는 고율의 소비세를 내게 하고, 저소득층에게는 소비세를 ‘0’으로 하는 것입니다. 빈곤층은 국가가 나서 구제해야 합니다.” <br /> <br />-실업자가 넘쳐나고 의료혜택을 못 받는 ‘구급난민’이 느는 등 ‘일본적 가치’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br />“일본 경제가 세계 2위 대국이 된 이유는 회사의 사원, 현장의 근로자들, 서민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몇몇 특출한 경영자가 한 일이라기보다는 현장에 있는 사람들이 일본의 경쟁력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현장에서는 비정규직 사원 해고 등으로 공동체에 대한 일체감이 없어졌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회사는 나와 무관하다’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일할 의욕을 잃고 있습니다. 일본의 강점인 단결력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br /> <br />-글로벌 자본주의가 나름대로 장점을 가지고 있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br />“물론입니다. 세계에서 잠자고 있는 자산, 경제자원을 개척했고 세계 각국의 경제를 발전시키는 데 기여했습니다. 매년 5%가량의 성장을 가져온 것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수정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미국인들은 자신들의 방식을 모두 ‘아메리칸 스탠더드’라고 생각해왔습니다. 각국은 나라별로 자신들의 가치가 있고 사정이 있습니다. 각국은 무엇을 지켜야 할 것인지, 또 어떤 가치를 인정해야 할 것인지를 고민한 뒤에 미국식 방식을 수용해야 합니다. 글로벌 자본주의하에서는 국가간 통로가 뻥 뚫려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젠 적정한 규제가 필요합니다.” <br /> <br />-한국에 대해 조언하신다면.<br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중요한 것은 역사도, 민족도, 문화도 모두 (미국과) 다르다는 점입니다. 자신들은 어떤 존재인가를 살펴보고, 어느 것을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스스로 분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신의 것을 잃어버리면 안됩니다. 한국도 70년대 고도성장을 이뤘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좋았던 것인가 성찰해볼 필요가 있습니다.”<br /> <br /><strong>나카타니 이와오는</strong><br />오사카(1942년생) 출신으로 히토쓰바시대에서 경제학을 전공했다. 닛산자동차에서 근무하다 1969년 하버드대에 유학, 거시경제학을 공부했다. 호소카와 내각의 자문위원과 오부치 총리의 경제전략회의 의장대리 등을 맡으며 규제완화와 자유경쟁 체제 강화를 주장했다. 이는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의 구조개혁에 큰 영향을 끼쳤다. <br />저서로 <자본주의는 왜 자멸했는가>(2008), <입문 거시경제학)(2007), <일본경제의 역사적 전환>(1996) 등이 있다.<br /> <br />===============================================<br /><strong><a title="[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japan/334147.html]로 이동합니다." target="_blank" href="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japan/334147.html"><u><font color="#800080">일본, 신자유주의 전도사 ‘참회의 책’ 화제</font></u></a></strong> (한겨레, 김도형특파원, 2009-01-19 오후 07:07:41)<br /><strong><font color="#193da9">“미국식 경제학이 올바르다 생각했었다” <br />경제전략회의 전 의장 나카타니, 저서 통해 미국식 경쟁주의 맹비난</font></strong><br /> <br />규제 완화, 자유 경쟁, 시장 중시 등 일본의 구조개혁 노선을 이끌었던 저명한 경제학자가 스스로 ‘참회의 책’이라고 칭한 저서를 출간하고, 미국식 자본주의를 맹종했던 자신의 행적을 반성했다.<br /> <br />오부치 게이조 내각(1998년 7월~2000년 4월) 당시 총리 자문기관인 경제전략회의의 의장대리를 역임한 나카타니 이와오(67·사진) 미쓰비시유엔프제이 리서치 앤 컨설팅 이사장은 지난해 말 출간한 저서 <자본주의는 왜 자멸했는가>를 놓고, <주간 금요일> <도쿄신문> 등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전향’의 이유를 소상히 밝혔다.<br /> <br />이와오 이사장은 한때 ‘1억 총 중류’란 말로 전 국민의 중산층화를 구가했던 일본 사회가 최근 20년 사이에 (선진국 가운데) 미국에 이어 두번째로 빈곤율(소득재분배 포함한 수치)이 높은 나라가 됐다며, 신자유주의에 입각한 일본의 구조개혁을 자성했다. 경제전략회의를 통해 파견사원 완전자유화, 의료제도에 경쟁원리 도입, 소득세의 최고 세율 인하를 제안해 고이즈미 준이치로 정권에도 큰 영향을 준 구조개혁 전도사로서는 180도 전향선언인 셈이다.<br /> <br />그는 “최근 일본은 급속히 빈곤층이 늘고, 구급의료를 받을 수 없는 ‘구급 난민’도 늘고 있다”며 “일본인이 소중하게 키워왔던 사회적 가치를 파괴하는듯한 개혁에는 찬성할 수 없고, 새로운 개혁의 시나리오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br /> <br />그는 하버드대 유학 시절(1969~1974년) “미국의 풍요로움에 압도당해서 하버드에서 배운 미국식 경제학이야말로 올바르다고 생각하며 귀국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미국식의 구조개혁의 결과 “의료도 복지도 경비절감, 경쟁원리가 우선돼 고도성장을 지탱해준 사람들의 존엄을 짓밟는 후기고령자의료제도가 등장했다”며 “거리를 헤매는 사람들에게 차가운 ‘자기책임’이라는 말이 부과됐다”고 후회했다.<br /> <br />그는 금융공학을 구사해 거액의 자본이 수시로 국경을 넘어 이동하는 것을 ‘정의’라고 주장하는 글로벌자본주의는 세계경제의 활성화에 기여했으나, 한편으론 세계를 대공항에 빠뜨리는 위험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엘리트층은 보다 많은 정보를 보유하는 것뿐아니라 정보를 만들어낼 수 있다”며 “시장에 영향을 주는 정보를 만들어낼 수 있는 사람들이 돈을 더 많이 버는 게 당연하게 된다”고 비판했다. 이와오 이사장은 “파탄 상태인 미국 증권사인 골드만삭스 종업원의 평균 연봉이 7천만엔(2007년)에 달하는 데 비해 미국에서는 5천만명 가까운 사람이 건강보험에도 가입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br /> <br />---------------------------------------<br /><strong><a title="[http://news.hankooki.com/lpage/world/200901/h2009012003315422510.htm]로 이동합니다." target="_blank" href="http://news.hankooki.com/lpage/world/200901/h2009012003315422510.htm"><u><font color="#800080">'미국식 자본주의' 참회 책 일본서 돌풍</font></u></a></strong> (한국, 도쿄=김범수 특파원, 2009/01/20 03:31:54)<br /><strong><font color="#193da9">고이즈미 개혁 이론적 기초 제공 나카타니 저술<br />"시장과 경쟁의 우선 원리가 양극화 가속" 지적</font></strong><br /> <br />일본 고이즈미(小泉) 정권의 신자유주의 개혁 노선에 이론적 기초를 제공한 경제학자의 신간 한 권이 일본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br /> <br />미국 유학파 경제학자로 수십 년 동안 시장만능주의를 믿어 의심치 않은 그가 책에서 규제완화와 자유경쟁, 글로벌 스탠더드를 비판하며 '참회'의 글을 쏟아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왜 스스로 붕괴했는가>(슈에이샤 인터내셔널 발행)라는 이 책은 지난달 출간 이후 한 달 만에 10만부가 넘게 팔렸다.<br /> <br />저자는 나카타니 이와오(中谷巖ㆍ67) 미쓰비시(三菱)UFJ 리서치&컨설팅 이사장. 거시경제학을 전공한 그는 히토쓰바시(一橋)대학을 졸업한 뒤 1970년대 초 하버드대학원에 유학해 강사까지 지내고 돌아왔다.<br /> <br />귀국 후 오사카(大阪)대학, 히토쓰바시대학 교수를 지낸 그는 1990년대 후반 오부치 게이조 내각의 총리 자문기관인 경제전략회의의 의장대리를 맡아 규제완화, 비정규직 노동자 파견 자유화, 의료 경쟁원리 도입, 소득세 최고 세율 인하 등을 제언해 고이즈미 개혁에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이명박 정권의 국제자문위원에 임명된 다케나카 헤이조(竹中平藏) 게이오(慶應)대학 교수도 이 회의의 일원이었다가 뒤에 고이즈미 개혁의 선봉에 섰다.<br /> <br />'글로벌 자본주의는 세계경제를 활성화하는 비장의 카드이면서 동시에 세계경제의 불안정화, 소득과 부의 격차 확대, 지구환경파괴 등 인간사회에 숱한 부정적인 영향을 가져오는 주범이기도 하다. 글로벌 자본이 자유를 얻으면 얻을수록 이 경향은 더 커진다.'<br /> <br />나카타니 이사장은 <u>21세기 세계는 글로벌 자본이라는 괴물에 더 큰 자유를 부여할지, 제동을 걸어야 할지 선택의 기로에 서있다며 글로벌 자본주의는 이미 더 많은 자유를 요구하며 자멸의 길을 걷고 있다</u>고 지적했다. '자유시장을 추구할수록 단기적으로는 경제가 활성화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자본주의를 불안정화 시키기' 때문이다.<br /> <br /> 그는 '개혁은 필요하지만 그 개혁이 인간을 행복하게 하지 못한다면 의미가 없다'며 시장과 경쟁의 원리를 중시하며 작은 정부를 지향한 구조개혁이 잘못이라고 비판했다. 고이즈미의 개혁이 결국 사회 양극화를 가속화하고, 안심하고 안전해야 할 일본의 의료 및 식품유통 체계를 붕괴시켰다고 지적했다. <br /> <br />그는 <u>'불필요한 공공사업에 우편예금을 투입하는 재정투융자제도에 쐐기를 박았다'며 우정민영화의 의의를 인정하면서도 효율성만 중시해 '시골 사람에게 사랑 받아온 작은 우체국을, 채산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문 닫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하고 되물었다</u>.<br /> <br />미국식 자본주의에 홀렸던 지난 세월을 반성한다는 의미에서 '참회의 글'이라고 한 책 끝에서 그는 구체적인 정책 제언과 함께 일본 재생을 위해 정부가 더 적극 개입할 것을 요청했다. 그리고 '사회가 나를 지탱해주고 있다'고 느끼는 사람이 더 많아지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end clix_content --><br /></div><div class="buttons-bottom right jinboblog-i-like-this-buttons"><a class="button-jinboblog" href="javascript:void(0);" title="스크랩으로 글 링크를 저장하세요" onclick="recommend('308',689,'/gimche','');"><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mini_chuchon.png" alt="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a><a class="button-twitter" href="http://twitter.com/home?status=http%3A%2F%2Fblog.jinbo.net%2Fgimche%2F689+%22%5B%EC%B1%85%EC%86%8C%EA%B0%9C%5D%EB%82%98%EC%B9%B4%ED%83%80%EB%8B%88%20%EC%9D%B4%EC%99%80%EC%98%A4%2C%20%EC%9E%90%EB%B3%B8%EC%A3%BC%EC%9D%98%EB%8A%94%20%EC%99%9C%20%EB%AC%B4%EB%84%88%EC%A1%8C%EB%8A%94%EA%B0%80%22" target="_blank" title="트위터로 리트윗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twitter.png" alt="트위터로 리트윗하기" /></a><a class="button-facebook" href="http://www.facebook.com/sharer.php?u=http%3A%2F%2Fblog.jinbo.net%2Fgimche%2F689&t=%5B%EC%B1%85%EC%86%8C%EA%B0%9C%5D%EB%82%98%EC%B9%B4%ED%83%80%EB%8B%88%20%EC%9D%B4%EC%99%80%EC%98%A4%2C%20%EC%9E%90%EB%B3%B8%EC%A3%BC%EC%9D%98%EB%8A%94%20%EC%99%9C%20%EB%AC%B4%EB%84%88%EC%A1%8C%EB%8A%94%EA%B0%80" target="_blank" title="페이스북에 공유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facebook.png" alt="페이스북에 공유하기" /></a><a class="button-delicious" href="http://delicious.com/save" onclick="window.open('http://delicious.com/save?v=5&noui&jump=close&url=http%3A%2F%2Fblog.jinbo.net%2Fgimche%2F689&title=%5B%EC%B1%85%EC%86%8C%EA%B0%9C%5D%EB%82%98%EC%B9%B4%ED%83%80%EB%8B%88%20%EC%9D%B4%EC%99%80%EC%98%A4%2C%20%EC%9E%90%EB%B3%B8%EC%A3%BC%EC%9D%98%EB%8A%94%20%EC%99%9C%20%EB%AC%B4%EB%84%88%EC%A1%8C%EB%8A%94%EA%B0%80','delicious','toolbar=no,width=550,height=550'); return false;" title="딜리셔스에 북마크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delicious.png" alt="딜리셔스에 북마크" /></a></div><p><strong><a href="http://blog.jinbo.net/gimche/689?commentInput=true#entry689WriteComment">댓글 쓰기</a></strong></p>'아무도 기획하지 않은 자유'를 읽고새벽길http://blog.jinbo.net/gimche/4742007-08-03T19:47:42+09:002007-08-03T19:47:42+09:00<!--FCKeditor--><p> <br /><strong>아무도 기획하지 않은 자유: ‘수유+너머’에 대한 인류학적 보고서<br /></strong>고미숙 지음, 휴머니스트, 2004.<br /> <br /><font color="#1c4827">헌책방에서 나온 것이 보이길래 사서 처박아 두었다가 얼마 전 시간이 나서 다 읽었다. 전체적으로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을 파악은 하였다. 그런데 이렇다고 세상이 바뀔까. 세상을 바꿀 생각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게다가 나는 그 마저도 하지 않고 있지만...<br /> <br />항상 내가 하는 것에서 하는 고민이지만, 생산은 어떻게 가능할까. 수유+너머의 사람들도 자신이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는 것은 아닌 듯한데... 앎에 대한 욕구를 충족하는 방식으로 수유+너머의 시스템은 괜찮아 보인다. 그런데 결국은 다른 주도적인 활동에 기생하여 사는 것은 아닌가. 분배메커니즘만 있을 뿐 여기에서 무엇인가를 생산해내지는 못하지 않은가. 상상력이나 서적, 보고서 같은 것 말고 말이다. 코뮌을 이야기하면서 자체적으로 독립되어 있다고 하지만, 수유+너머 이외의 다른 공간과의 교류와 관계가 없다면 존재하기 힘든 것 아닌가. <br /> <br />그래도 그 이너서클에 들어가고 싶다는 욕구가 생기기도 하였지만, 그 길은 내가 갈 길은 아닌 듯 싶다. 다만 내가 앞으로 무엇을 조직하고 모색할 때 도움은 되지 않을까 싶다. 그 기본적인 마인드 자체와 하나하나씩 이루어나가는 방식은 배우고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br /> <br />책을 읽으면서 써먹을 만한 문구 등을 발췌한다. 발췌한 내용을 옮기는 것도 보름쯤 되지 않았나 싶다. 발췌된 것 중에 반복되는 것도 많지만, 이는 그 만큼 내가 거기에 관심을 쏠렸다는 의미가 아닐까. <br /> <br />이 내용들을 어디에다 써먹을까. 글 중간에 언급되는 책들이나 사상들을 좀더 깊게 접해보고 싶은 생각은 있지만, 시간을 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font> </p><br /><p><span class="toggle-text" onclick="toggleMore(this)" style="cursor: pointer; display: none;">계속 보기...</span></p> <div class="more-content" style="border: 1px dashed black; background: none repeat scroll 0% 0% rgb(239,255,175); padding: 1px; margin: 1px;"><br /> <br /><font style="BACKGROUND-COLOR: #e4ff75">과거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늘 새롭게 구성된다는 것. 지금, 여기의 삶이 어떻게 구성되느냐에 따라 미래 뿐 아니라 과거도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것. 그러므로 무엇을 기록한다는 것은 과거 속에 미래를, 현재 안에 과거를 중첩시켜 전혀 다른 시간의 장 안으로 진입하는 것</font>임을 알았다. (12쪽)<br /> <br />한때 ‘사랑하면 알게 된다’는 말이 유행한 적도 있다. 그럼 “사랑하면 전파한다”는 어떤가? 사랑하는 것을 어떻게 혼자만 즐긴단 말인가. 사방팔방 퍼뜨려서 함께 나누어야지. (37쪽)<br /> <br />학문의 영역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시간과의 싸움이다. 즉, <font style="BACKGROUND-COLOR: #e4ff75">한 사람이 얼마나 뛰어난 지적 성취를 이룰 수 있는가의 여부는 천재적 영감이 아니라 얼마나 지속적으로 지적 열정을 견지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font>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43쪽)<br /> <br />의무나 강제에 의해서가 아니라 순전히 내적 에너지에 의해 추동되는 앎의 여정을 밟아가고 싶었다. 이건 사실 지극히 평범한 욕구이지만 용기와 담대함이 요구된다.<br /> <br />지식의 횡단이 요구되는 건 바로 이런 맥락에서이다. 경계를 가로질러 넘나드는 지식이란 쉬임없이 우리를 미지의 세계로 인도한다. 거기에서는 원로의 권위나 노년의 안식 따위는 필요 없다. 가슴 벅찬 열정과 끈질긴 지구력만이 요구될 뿐. 물론 그 세계를 자유롭게 가로지르기 위해서는 이전에 메고 다니던 뗏목을 내려놓아야 한다. 치열하게 접속하되 때가 되면 가차없이 내려놓고 떠나는 것. ‘횡단’이란 무릇 이런 것이다. (45쪽)<br /> <br />하긴 예정된 일들만 일어난다면 삶이 얼마나 메마르고 썰렁할 것인가. 거꾸로 말하면 우발적인 마주침이 많을수록 삶은 그만큼 역동적이 된다. 그렇게 보면 코뮌이란 예기치 않은 마주침과 사건이 수시로 일어나는 곳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50쪽)<br /> <br /><font color="#1c4827">→ 내 삶에서 우발적인 마주침은 얼마나 많을 것인가. 사실 우발적이라고 해도 거기에는 어느 정도의 의식성(상대방이든, 나든)이 개입되어 있는 건 아닐까. 내가 이 책을 헌책방에서 만나 시간을 투자하여 보게 된 것도 우연이고, 그 만큼 나름 얻은 것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내가 글쓴이를 몰랐다면, 수유+너머에 대해 알고 싶어하지 않았다면, 이런 것에 관심이 없었다면, 헌책방에 그런 책이 들어오지 않았다면 과연 우연이 가능했을까. 우연과 필연은 백치 한 장 차이일 뿐이다.<br /></font> <br />우리는 노마디즘을 사랑할 뿐, 그것을 이념적 지주로 떠받들지는 않는다. 우리는 노마디즘의 용법을 몸으로, 삶으로 익히고 싶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천 개의 고원’의 용법, ‘노마디즘’의 응용일 뿐이다. 뗏목이 되는 순간, 그것조차 놓아버릴 작정이다. 길은 어차피 우리 스스로가 직접 열어야 하는 것이므로. (51쪽)<br /> <br />연구비의 지원보다 좀더 근본적인 문제는 텍스트에 대한 열정이다. 텍스트를 사랑하게 되면 돈이 되지 않아도, 아니 사방에서 뜯어말려도 그것과 접속하기 위해 몸부림치게 된다. 거꾸로 열정이 없으면 설령 연구비 지원이 충분히 된다 한들 아무런 소용이 없다. (59쪽)<br /> <br />연구실을 꾸려온 것도 어찌 보면 길눈이 어두워 잘못 들어선 것인지도 모른다. 길눈이 조금만 더 밝았더라면 그렇게 무모하게 길을 나서지는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font style="BACKGROUND-COLOR: #e4ff75">세상에 잘못 들어서는 길이란 없다. 길이란 본디 그렇게 만들어지는 것일 뿐</font>이다. 오직 모를 뿐! 오직 갈 뿐! (64-65쪽)<br /> <br />공간 확장 또는 이전할 때의 갈등 - 서로 대립하는 동안에는 고통스럽기 짝이 없지만, 그런 차이는 너무도 당연하다. 공간은 그저 중립적 대상물이 아니라 삶의 토대이자 또 다른 신체이기도 하다. 그러니 새로운 공간을 결정함에 있어 그 많은 사람들의 생각이나 입장이 어떻게 동일할 수 있겠는가. 다르다는 것이 얼마나 힘겨운 것인지, 또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몸으로 깨우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75쪽)<br /> <br />자신이 타고난 능력만으로 사는 건 바보다. 타인의 능력과 제대로 접속하면 내가 지닌 능력의 몇십 배의 능력을 마음대로 활용할 수 있다. (83쪽)<br /> <br /><font color="#1c4827">→ 나에게 부족한 것은 바로 이런 마인드가 아닐까 싶다. 그런데 과연 타인의 능력이 언제까지나 나의 능력이 될 수 있을까. 사물은 변할 수 있는 것인데...</font><br /> <br />공동체는 명분이 무엇이든 희생과 손해를 감수하는 곳이어서는 안 된다. 방식은 다를지언정 구성원 개개인의 삶이 비옥해지지 않는다면 그것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시쳇말로 다 잘 살자고 하는 짓인데, 공동체는 더더욱 그래야 하지 않는가 말이다. (87쪽)<br /> <br />사랑이 자기 아닌 다른 존재를 향한 욕망의 투어이고, 혁명이 타인들과의 연대를 통해 새로운 종류의 삶을 창출하는 것이라면, 어떤 인간도 이 욕망의 생산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br /> <br />자본주의건 사회주의건 어떤 체제 하에서건 사랑은 삶의 방식과 습속, 무의식의 기저를 이룬다고 할 때, 혁명은 사랑법을 바꾸는 일과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 사랑의 습속을 바꾸는 일이야말로 혁명 그 자체가 아닐까? 이제 필요한 것은 또다시 이분법의 레일 위에서 성급하게 해답을 찾아 헤매는 것이 아니라, <font style="BACKGROUND-COLOR: #e4ff75">물음 그 자체를 바꾸는 것, 그럼으로써 주어진 레일을 아예 벗어나는 것</font>일 터이다. (89-90쪽)<br /> <br />사랑이란 상대가 원하는 것을 하게 하는 것이다! 소유와 집착이 아니라, 혹은 자기와의 동일성에의 요구가 아니라, 그의 본성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하도록 촉발해주는 것이 바로 사랑인 것이다. (99쪽)<br /> <br />외부를 향한 감염력이 없다면, 다른 대상들을 촉발할 수 없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다. 사랑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사랑은 근원적으로 코뮌주의를 지향한다. (106쪽)<br /> <br />사랑은, 존재를 뭔가 고유하고 사적인 것 속에 가두는 모든 시도의 파괴로서, 절대적으로 근본적인 방식 속에서 제기된다. 나는, 사랑은 고유하고 사적인 것을 공동적인 것으로 변형시키기 위한 근본적 열쇠라고 생각한다. (107쪽, 안토니오 네그리와 펠릭스 가타리)<br /> <br />코뮌주의란 “우리가 미래에 도달해야 할 어떤 장소나 상태가 아니라 지금의 현실을 종식시켜 나가는 살아 있는 노동의 현실적 힘이며 바로 지금, 우리 시대에 내재하고 있는 울림”이 된다. (107쪽)<br /> <br />시간을 이기지 못하면 혁명은 없다. 혁명은 일상을 극복할 때 온다. 일상 안에서 축제를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일상을 축제화하지 못한다면 그건 혁명이 아니다. 길거리에서, 바리케이드 안에서 하는 혁명이 며칠 가겠나……. 시간을 극복하는 것, 시간과 싸워 이기는 게 혁명 아닌가. 사랑도 그렇지 않나. (109-110쪽)<br /> <br />사람들은 어째서 아주 젊은 날부터 그토록 노후를 걱정하는 것일까. 나는 그것이 일과 친구가 사라질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즉, 활기차게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할 수 있고, 마음을 주고받을 수 있는 친구들이 있다면 노후대책을 위해 많은 돈을 쌓아놓을 이유가 없다. 돈이란 그야말로 최후의 거처일 뿐이다. 그러나 연구실 같은 집합적 관계가 가능하다면 죽을 때까지 배움의 길이 열려 있고, 점입가경으로 늘 새로운 친구들과 만날 수 있는데, 외롭고 심심할 겨를이 어디 있는가. (114-115쪽)<br /> <br />책을 진정으로 소유하는 방법은 벗들에게 주어 닳아 없어지게 하는 것이다? (119쪽)<br /> <br />우리가 선물을 ‘살뜰하게’ 받을 수 있었던 건 갚아야 한다는 강박에서 자유로웠기 때문이다. 어차피 선물을 준 이들에게 고스란히 갚을 길은 없다. 가능하다 해도 별 의미도 없고, 대신 그 선물들이 가능하게 해준 능력과 행복을 더 많은 이들과 나누면 된다. 증여란 바로 이런 것이다. 주고받음이 맞물려 계속 새로운, 그리고 강렬한 울림을 만들어 가는 것. 흐름이 흐름을 불러 동심원처럼, 혹은 전자파처럼 멀리 멀리 퍼져 나가는 것. (120쪽)<br /> <br />인디언 주술사 베어하트는 말한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 처해 있든지 무엇인가 줄 것을 찾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부터 10년 후가 아니라 바로 지금 주어져야 한다”고. 줄 것이 하나도 없을 만큼 가난한 사람도 없고, 더 이상 받을 게 없을 만큼 풍족한 사람도 없다. 주고받기의 흐름에는 경계가 없다는 뜻이다.<br /> <br />아울러 증여는 순환하면 할수록 더 왕성해진다는 게 특징이다. 활동성이 크면 클수록, 사심 없이 베풀면 베풀수록 그 주체는 더 큰 활동과 관계의 장 속에 들어가기 때문에 능력이 커지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이치이다. 타인을 위한 배려의 최대 수혜자가 자기 자신이 되는 오묘한 역설! (121-122쪽) <br /> <br />순환적 시스템이야말로 노마드의 정치경제학이다. 물건들은 지천에 넘치는데 사람들은 그것들을 활용할 줄 모른다. 그래서 다시 물건들을 폐기하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이 지긋지긋한 반복을 끊고 싶다면 먼저 물건들을 해방시켜라. 삶이 훨씬 가벼워질 것이다. 가족과 연애가 사람들을 붙들어매는 중력장치라면, 소유에 대한 집착은 자신의 몸을 얽어매는 쇠사슬이다. (124쪽)<br /> <br />싸우면서 터득한 지혜가 하나 있다. 서로 다르다는 건 소중하다는 것. 만약 내가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고 무대포로 일관했다면 나 자신의 돌부리에 수없이 부딪혀 넘어졌을 것이다. 나와 정반대로 세상을 보는 이가 좌우에서 당겨주기 때문에 나는 계속 나의 속도를 측량하고 조절할 수 있었다. (128쪽)<br /> <br />코뮌적 활동에서 단위의 차이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아무리 사소해 보이는 것일지라도 그 자체로 전체를 표현할 수 있고, 또 그래야 하기 때문이다.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는 규칙도 같은 맥락에 있다. 아주 사소해 보이는 행위까지 윤리적 태도를 견지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 자체가 전체의 흐름을 고스란히 표현하는 까닭이다. (128-129쪽)<br /> <br />식생활이 건강해야 삶에 활기가 넘친다. 건강한 식생활의 첫째 조건은 함께 먹는 것이다. 함께 먹다 보면 정도 들고, 여러 가지 지혜가 모여 건강한 먹을거리 풍토가 조성되게 마련이다. 식당을 전전해서는 절대 불가능하다. 그리고 더욱 근본적인 건 일상이 바뀌지 않으면 결코 지식의 새로운 경계가 펼쳐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보통 지식을 두뇌활동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그건 오산이다. 삶이 바뀌고 신체가 바뀌지 않고서 능동적인 지식이 생산되기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만큼이나 어렵고도 어렵다. 그렇다면 일상의 핵심은 무엇인가? 바로 밥이다. (138-139쪽)<br /> <br /><font color="#1c4827">→ 왜 1992년 총선 당시 구로을 이우재 사무실 옥상의 주방이 생각날까. 당시 민중당 총재였던 이우재의 선거운동을 한다고 깝죽댔던 시절도 있었구나.</font><br /> <br />매 끼마다 어떤 정성과 선물, 그리고 노동력이 투입되는지를 한눈에 파악하게 되니 음식쓰레기를 만들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이런 무형의 보답에 무심해지면 증여는 더 이상 이루어지지 않는다. 인디언들에 따르면, 무언가를 받는다는 건 그 사람의 영혼의 일부를 받는 것이다. 증여가 단순히 물질적 나눔에 그치지 않고 인간과 자연, 인간과 인간 사이의 대화의 장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일 터이다. (143-144쪽)<br /> <br /><font color="#1c4827">→ 이런 얘기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육식을 멀리하게 되는 과정이 나온다. 그런데 내가 과연 육식을 버릴 수 있을까. 나는 아직 그렇게까지 치열하지는 못할 듯하다.</font><br /> <br /><font style="BACKGROUND-COLOR: #e4ff75">더럽다는 것은 공간을 축소시키고 변용가능성을 떨어뜨린다는 의미에서 ‘무능력(혹은 공간의 부르주아적 소유)’의 다른 표현</font>이기도 하다. <br /><font style="BACKGROUND-COLOR: #e4ff75">흔적을 남긴다는 건 단순한 무능력을 넘어 타인의 노동을 무상으로 점유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일종의 착취</font>다. 말하자면 ‘내 대신 네가 치워!’라는 명령을 내리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다. 코뮌을 구성하고 싶다면 적어도 이러한 무의식적 착취와 명령의 습속에서는 벗어나야 하지 않을까.<br /> <br />시간에 대해서도 똑같이 적용된다. <font style="BACKGROUND-COLOR: #e4ff75">모든 활동에서 시간 엄수는 기본이다. 시간을 지키지 않는 건 타인의 시간을 무상으로 점유하는 것일 뿐 아니라, 활동 전반을 침체시키는 주범이 된다</font>. 시공간에 대한 태도를 투명하게 하지 않고서 코뮌적 관계란 가능하지 않다. (148쪽) <br /> <br /><font color="#1c4827">→ 이 대목을 읽을 땐 꼭 나에게 대고 얘기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반성하고 고치는 수밖에...</font><br /> <br /><font style="BACKGROUND-COLOR: #e4ff75">끊임없이 변이를 추구하면서 활동마다에 특징을 부여할 수 있어야 외부와 소통하는 능력이 증대된다</font>. 코뮌의 생명은 외부와의 소통능력이다. 코뮌이 실패하는 여러 가지 이유 가운데 하나가 ‘자족적’이라는 데 있다. 자족적이라는 것은 자신의 내적 경계를 고정시킨다는 뜻인데, 개인이든 집단이든 <font style="BACKGROUND-COLOR: #e4ff75">경계가 명료해지는 만큼 활동 에너지가 위축되는 건 만고불변의 법칙</font>이다. (151쪽)<br /> <br />삶의 지평을 넓혀 가기 위해서는 품성의 기초가 튼튼해야 하는 건 틀림없다. 그런데 그것이 능동적으로 발현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튼튼한 체력이 요구된다. <br /> <br />체력이 받쳐주지 않으면 신체가 수동적, 방어적으로 될 뿐 아니라 계속 다른 사람들과 불협화음을 만든다. <br /> <br />건강할 때는 저절로 남을 배려할 수 있다. 배려는 근본적으로 의무나 희생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적 에너지가 밖으로 흘러넘치는 것임을 그 때 알았다. 하지만 몸의 균형이 깨어지면 타인을 배려할 수도,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 갈 수도 없다. 설상가상으로 그 전에 잘 하던 것까지 귀찮아진다. 더욱 문제인 것은 부정적이거나 비관적인 생각에 사로잡히게 된다는 것이다. 어떤 관계와 활동을 구성할 것인가의 여부는 품성 이전에 체력의 문제이다. (158-159쪽)<br /> <br />탁구든 제기든, 또 앞으로 무슨 운동을 하게 되든 이것들은 모두 우리 일상의 원동력이다. 배려하는 힘을 키우는 훈련터이면서 동시에 외부를 향해 열린 창구이다. 밥상도 그렇지만 이 배치에 들어오면 서로의 벽을 아주 쉽게 허물 수 있다. 건강한 몸과 외부를 향한 열정, 지식생산에 이보다 더 절실한 것은 없다. (164쪽)<br /> <br />페미니즘이 주류가 되어버린 상황에서 뼛속까지 가부장주의로 무장한 남자들도 감히 하지 못하는 말들을 나는 거침없이 해댄다. ‘여자애들은 할 수 없어. 여자니까 그렇지. 하여튼 여자들은 문제라니까.’ <br />이렇게 자극적인 발언을 서슴지 않는 이유는 이 문제가 코뮌적 관계를 풀어가는 데도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몸을 사리는 데 익숙한 이들은 동정이나 연민 혹은 맹목적 순종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br /> <br /><font color="#1c4827">→ 게으르고, 활동이나 행동하는 걸 귀찮아하는 것은 보수반동인 걸까? 고미숙은 여성들의 신체가 선천적으로 보수반동이라고 하면서 몸이 너무 무겁고, 안움직이는 걸 문제라고 지적하는데... 고미숙의 이러한 언급은 평소 내가 생각하는 것과 유사하지만, 남성이 하기엔 부담스러운 말이다. 게다가 나같이 게으른 청춘에게는 더욱더...</font>
<p> <br />나는 여성의 사회적 소외의 단적인 예가 체육교육의 부재라고 생각한다. 몸에 대해 사유할 수 있는 기회, 아니 그 이전에 몸을 능동적으로 활용할 기회를 완전히 박탈당한 채 교육과정을 마친다는 것이다. 그리고 몸에 대한 조절능력을 확보하지 못하는 한 여성이 삶의 주체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166쪽)<br /> <br />정화스님은 남보다 잘하려고 하지 말고 자신의 몸에 맞게 하면 된다고 하셨다. 안 되면 될 때까지 하면 된다고. 척도는 오직 자기 자신이라는 것. 그래서 자신의 몸과 투명하게 대화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바로 요가의 지혜이다. (168쪽)<br /> <br />요가를 하다 보면 자세의 완성도가 아니라, 일상의 패턴을 바꿀 수 있느냐 하는 문제로 귀착된다. 일상을 바꾸지 않는 한 아무리 멋진 자세를 취할 수 있다 해도 그건 모두 ‘황’이다.<br /> <br /><font color="#1c4827">→ 내가 요가나 참선에 부정적인 것은 삶의 여유가 없어서인지도 모르겠다.</font><br /> <br />등산은 그저 평범한 스포츠가 아니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삶에 대한 생생한 지혜를 터득할 수 있는 ‘인연의 장’이기도 하다. (169쪽)<br /> <br /><font color="#1c4827">→ 공감. 사람들과 함께 산에 오르면서 얘기를 나누도록 해볼까. 하긴 그것도 맘에 맞는 사람들과 함께 올라야 제 맛이다.</font><br /> <br /><font style="BACKGROUND-COLOR: #e4ff75">유머를 즐기기 위해서는 마음의 경계를 푸는 것, 즉 무거운 감정을 내려놓는 것이 필요</font>하다. 안팎의 구별이 두터운 이들, 진지한 것이 진실에 더 가깝다고 굳게 확신하는 이들, 인정욕망에 익숙한 이들은 이 유머의 퍼레이드에 참가하기 어렵다. 거꾸로 말하면 유머에 익숙해지면 안팎이 사라지면서 새로운 관계, 이질적인 삶이 열리게 된다. (181쪽)<br /> <br /><font color="#1c4827">→ 내가 유머에 익숙하지 못한 이유를 잘 적어놓았다. 실없는 소리하고는 구분해야 하는 것일까.<br /></font> <br />유머는 누가 뭐래도 ‘노마디즘의 토대’다. 낯설고 이질적인 것들 사이를 자유롭게 가로지르며 예기치 않은 흐름들을 만들어내는 동력으로서의 유머. 더 나아가 그것은 주류적 질서를 전복하면서 매끄럽게 옮겨 다니는 ‘유목적 특이점이자 우발점의 기법’이다. (181-182쪽)<br /> <br />함께 살아보면 집합적 리듬에 동참한다는 것, 더 나아가 그것을 능동적으로 조성한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하고도 어려운 일인지를 실감하게 된다. (183쪽)<br /> <br />행복하게 살기 위해 코뮌을 구성했는데, 왜 나는 나 자신을 자꾸 궁지로 몰아가고 있는 것일까? 해답은 간단했다. 나는 엄청난 노력을 투여한 대신 연구실 사람들에게 그에 대한 대가를 요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즉, 나는 능동적 배려가 아니라 희생이라는 자의식에 묶여 있었던 것이다. 아무도 나에게 연구실을 위해 돈과 시간과 능력을 투여하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내가 좋아서 했을 뿐이다. 그런데도 나는 어느덧 ‘내가 이렇게 희생했는데 너희들은 대체 왜 그 모양인가,’ ‘왜 스스로 활동의 주체가 되지 못하는가?’라고 분노를 키웠던 것이다.<br /> <br />남을 괴롭히는 자들은 진정으로 약자다. 자기가 궁지에 몰려 외롭고 두렵기 때문에 남은 힘으로 타인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것이다. 자신이 충분히 행복하다면 무엇 때문에 타인을 괴롭히겠는가? 그래서 타인을 배려하기 위해서는 건강해야 한다. 설령 병이 들더라도 그것을 고통으로 받아들이지 않아야 한다. (188쪽)<br /> <br /><font style="BACKGROUND-COLOR: #e4ff75">오래된 습속, 자신에 대한 맹목적 집착을 벗어나지 않는 한, 코뮌은 불가능</font>하다. <font style="BACKGROUND-COLOR: #e4ff75">욕망과 능력에 따라 자유롭게 활동하되, 코뮌적 리듬을 구성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떤 습속이 나로 하여금 그리로 가는 길을 막고 있는지를 명료하게 보는 것이 필요</font>하다. (189쪽)<br /> <br />스승이 될 수 없으면 진정한 친구가 아니고, 친구가 될 수 없다면 스승으로 섬길 수 없다. (203-204쪽, 이탁오)<br /> <br />대체 앎의 영역에서 스승과 제자가 어떻게 고정된 선으로 구획될 수 있을 것인가? 나이가 많다거나 학벌이 좋다거나 지력이 뛰어나다거나 하는 것은 그저 하나의 특이성일 뿐이다. 앎의 세계에는 종착점이 없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배우고, 쉬지 않고 가르치는 앎의 흐름만이 있을 뿐. 이런 관계에서는 교육의 주체가 아니라 오직 지식이 구성되고 진수되는 ‘벡터’만 작동하는 까닭에 학문외적 권위나 위계 따위는 설자리가 없다. (205쪽)<br /> <br /><font style="BACKGROUND-COLOR: #e4ff75">지식 자체가 사람 사이의 친밀감을 높이는 중심요소가 될 때 비로소 ‘스승과 친구가 하나인 우정의 교육’이 가능한 법</font>이다. 따라서 공간의 수평적 배치는 교사와 학생의 경계뿐 아니라, 학습자들 상호간의 친화력을 상승시키는 데도 결정적인 기능을 한다. (206쪽)<br /> <br />사람의 마음은 본래 저절로 즐겁다. 배움이란 이 즐거움을 배우는 것이다. 즐겁지 않다면 배움이 아니고, 배우지 않는다면 즐겁지도 않다. 즐거운 연후에야 배운 것이고, 배운 연후에야 즐거운 것이다. 즐거움이 배움이고 배움이 즐거움이다! 아아! 세상의 즐거움 중에 이 배움만한 것이 있는가? (206쪽, 왕심재)<br /> <br />지식의 본래면목이 즐거움이라는 데 동의한다면, 자연히 가르침과 배움의 경계는 사라진다. (207쪽)<br /> <br />분과학문은 단지 여러 전공 사이의 소통장애에 그치지 않고, 분과 내의 위계를 작동시킨다는 점에서 더욱 문제적이다. <br />자신의 분야에서 한 발짝만 벗어나도 앞이 캄캄한 것이 이른바 우리 시대 전문성의 실체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이것이 한 분야를 심화시키기 위한 불가피한 방책이라고 주장할지도 모르지만, 이것은 심화가 아니라 고립을 자초하면서 현실에 아무런 쓸모도 없는 지식을 양산하는 불모성에 불과할 뿐이다. (211쪽)<br /> <br />유목민의 전투방식으로는 게릴라 전술이 최고다. 예측불가능한 지점들을 이리저리 옮겨다니며 균열을 일으키는 것. 돌연 솟구쳐 올라 섬광을 쏘아 올리기도 하고 순식간에 가라앉아 심해를 탐사하기도 하면서 끊임없이 새로운 전략전술을 구사하는 것. 그것은 지식 게릴라들만이 수행할 수 있는 작업이다. 그런 점에서 세미나는 그런 게릴라들의 양성거점인 셈이다. (213-214쪽)<br /> <br />지식이 책과 대학이라는 협소한 소통구조 안에 갇혀 있을 이유가 어디 있는가. 수치상으로 보면 매년 치러지는 학술대회는 정말 많다. 그럼에도 소통의 구조가 조금도 달라지지 않고 있는 것은 전적으로 지식인들의 열정과 상상력의 빈곤 때문이다. 상상의 배치를 바꾸고 과감하게 ‘거리의 열정’과 접속하고자 한다면, 분명 드넓은 소통의 창구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223쪽)<br /> <br />제국주의와 민족주의, 오리엔탈리즘과 옥시덴탈리즘을 해부하는 정도로 근대성의 지반을 넘어서기에는 분명 한계가 있다. 그러한 지배와 예속, 오만과 편견을 작동시키는 인식론적 전제에 대한 근원적인 회의 없이 ‘근대 외부’에 대한 사유란 결코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br /> <br />들뢰즈/가타리의 사유 역시 휴머니즘에 대한 맹렬한 비판을 담고 있다. ‘기계(machine)'라는 개념을 고집하는 이유도 인간의 특권적 지위를 해체하기 위해서이다. 기계란 어떤 대상과 접속하느냐에 따라 끊임없이 용법이 달라지는 모든 대상을 지칭하는 개념이다. 예컨대 입은 강의할 때는 말하는 기계지만, 식사시간에는 밥 먹는 기계, 남에게 욕할 때는 싸움기계 등이 된다. 공간 역시 그렇다. 연구실 1층은 탁구를 칠 때는 체육관이, 밥 먹을 때는 식당이, 강의할 때는 교실이 된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인간도, 동물도, 공간도, 시간도 모두 기계의 일종일 뿐이다. (233쪽)<br /> <br /><font color="#1c4827">→ 들뢰즈/가타리에 대해 제대로 공부할 필요가 있겠네.<br /></font> <br />서로 다른 의견들이 충돌할 때, 상이하고 이질적인 개성들이 부딪힐 때, 시시비비를 가린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된 적은 거의 없다. 그건 그저 하나의 출발점에 불과할 뿐이다.<br /> <br /><font style="BACKGROUND-COLOR: #e4ff75" color="#000000">장단점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어떤 특성이 장점이나 단점으로 작용하는 인연조건 혹은 배치가 있을 뿐</font>이다. 어떻게 하면 각자의 개성과 활동들이 서로 매끄럽게 소통하는 집합적 배치를 구성할 것인가, 코뮌의 강밀도는 바로 여기에서 결정된다. (244-245쪽)<br /> <br />자의식과 내면이라는 중력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자신을 끊임없이 비워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비운다는 말은 아주 상투적으로 들릴 수 있다. 하지만 그건 매우 구체적인 실천의 방편이다. 누구나 아는 말이지만, 강을 건너면 뗏목을 버려야 한다. 그래야 다시 길을 갈 수 있는 법이다. 마찬가지로 새로운 경계로 나아가려면 익숙하고 낡은 것들을 가차없이 내려놓아야 한다. (245쪽)<br /> <br />비움은 한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낯설고 새로운 앎에 대한 열정을 계속 고양시켜 가려면 비움의 강밀도 역시 커져야 한다. 앎이란 천지에 가득 찬 흐름이기 때문에 사적으로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적으로 소유하려 하는 순간, 앎의 경계는 막혀버린다. 따라서 안팎의 경계를 넘어 계속 흐르게 하려면 끊임없이 비워야 한다. (246쪽)<br /> <br />노마드란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는 유랑민이나 이주민이 아니다. 어떤 불모의 땅에서도 찰거머리처럼 들러붙어 새로운 삶과 관계를 구성할 수 있는 능동적 주체들이다. 초원이나 스텝을 찾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선 자리를 초원으로, 스텝으로 만드는 이들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자신을 비워야 한다. 비운다는 걸 그저 욕심을 버리는 정도로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비운다는 건 소극적으로 내면에 침잠하는 게 아니라, 거꾸로 외부의 역동적 흐름 속에 자신을 아낌없이 던진다는 뜻이다. 따라서 자신에 대한 집착, 지나간 인연에 대한 집착에 사로잡혀 있는 한 유목은 불가능하다. 비울 수 있는 자만이 새로운 삶을 구성할 수 있다! (246-247쪽)<br /> <br />코뮌적 관계에 들어온다고 해서 모두가 저절로 코뮌적 주체가 되는 건 아니다. 오히려 사회적 차별이 없기 때문에 자의식의 견고한 벽이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날 수 있다. 따라서 누구도 그런 시행착오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하지만 진정 노마드가 되고 싶다면 그런 모습을 적나라하게 응시하는 것이 필요하다. ‘보면 사라진다’고 했던가. 강렬하게 접속하되 집착과 소유라는 함정에 빠지지 말 것. 활동이 하나의 영역에 멈추지 않고 다른 활동들로 흘러 들어가게 할 것.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나’와 ‘나 아닌 것’의 경계가 없어야 한다. (247-248쪽)<br /> <br />지식생산의 측면에서도 명상의 지혜는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우리가 추구하는 지식의 능동적 생산은 궁극적으로 ‘지식 외부’를 지향한다. 즉, 앎과 삶의 일치, 나아가 삶의 새로운 가능성에 대한 실험이 바로 우리가 추구하는 지식의 내용이다. 그리고 그리로 가는 길은 단지 책에서만 얻어지지는 않는다. 그것들은 책 밖에서, 책을 넘는 신체적 변이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249쪽)<br /> <br />달라이 라마는 늘 불안과 신경증에 시달리는 서구인들에게 ‘문제에 해결책이 있다면 걱정할 필요가 없다. 해결책이 없다면 역시 걱정해도 소용없는 일이다’라고 말하는 터무니없는 낙천주의자. (254쪽)<br /> <br />“자네는 길이 이미 어딘가에 있다고 생각했네. 하지만 거기에 길은 없었다네. 길은 바로 우리가 만든 것이라네.”<br />이를 나의 버전으로 바꾸면, 잘못 들어선 길은 없다. 길이란 늘 그렇게 만들어지는 것일 뿐이다. 그래서 언제 어디서건 다시 시작할 수 있지만, 결코 끝나지 않는다. (259-260쪽)<br /> <br />무엇보다 삶과 동떨어진 분석적 지식으로부터 탈주해야 한다. 분석적 지식은 정보일 뿐, 앎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신체를 비껴 허공에 흩어지고 만다. 그것은 아무리 폼나게 유목과 탈주, 탈영토화 따위를 조리 있게 설명한다 해도 자본과 권력에 고스란히 회수되고 만다. 자본과 권력은 정말 ‘힘이 세기’ 때문이다. 그 동안 우리가 추구한 앎에 대한 원초적 본능, 욕망과 능력의 분자적 증식은 하나의 탈주선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만으로 자본과 권력에 맞서 싸우기에는 역부족이다. <br /> <br />‘지혜의 바다’로 ‘혁명의 산’으로 이어지려면 앎이 삶 속에서, 일상 속에서, 매 호흡마다 강렬하게 표현되어야 한다. 앎과 삶을 가로막고 있는 모든 경계를 거칠게 뛰어넘는 열정과 결단이 요구된다. ‘야생마-되기’ 혹은 ‘미꾸라지-되기’를 쉬임없이 시도해야 한다. ‘도래할 혁명’, ‘오래된 미래’를 가능케 하는 건 이념적 명분도 수목적 위계도 중심적 장치도 아니고, 오직 ‘지금, 여기’에서 솟구치는 생의 ‘강밀도’인 까닭이다. (278-279쪽)<br /> <br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달리 방법이 없기 때문에 남들처럼 사는 길을 택할 뿐이다. 성공해봤자 나른한 일상과 소통부재만이 존재하는 그런 코스를. 따라서 그런 코스와는 다른 선택지가 많아야 한다. <font style="BACKGROUND-COLOR: #e4ff75">돈으로 환원되지 않는 행복을 스스로 창안할 수 있어야 비로소 자본에 대항할 수 있는 법</font>이다. 아니, 그 자체가 자본으로부터의 탈주가 된다. <font style="BACKGROUND-COLOR: #e4ff75">자본에 대한 대안이 자본보다 빈곤해서야 말이 되는가</font>. (287쪽)</p><br /></div><div class="buttons-bottom right jinboblog-i-like-this-buttons"><a class="button-jinboblog" href="javascript:void(0);" title="스크랩으로 글 링크를 저장하세요" onclick="recommend('308',474,'/gimche','');"><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mini_chuchon.png" alt="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a><a class="button-twitter" href="http://twitter.com/home?status=http%3A%2F%2Fblog.jinbo.net%2Fgimche%2F474+%22%27%EC%95%84%EB%AC%B4%EB%8F%84%20%EA%B8%B0%ED%9A%8D%ED%95%98%EC%A7%80%20%EC%95%8A%EC%9D%80%20%EC%9E%90%EC%9C%A0%27%EB%A5%BC%20%EC%9D%BD%EA%B3%A0%22" target="_blank" title="트위터로 리트윗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twitter.png" alt="트위터로 리트윗하기" /></a><a class="button-facebook" href="http://www.facebook.com/sharer.php?u=http%3A%2F%2Fblog.jinbo.net%2Fgimche%2F474&t=%27%EC%95%84%EB%AC%B4%EB%8F%84%20%EA%B8%B0%ED%9A%8D%ED%95%98%EC%A7%80%20%EC%95%8A%EC%9D%80%20%EC%9E%90%EC%9C%A0%27%EB%A5%BC%20%EC%9D%BD%EA%B3%A0" target="_blank" title="페이스북에 공유합니다"><im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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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랐던 지식을 알려주는 부분도 있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좀더 치열한 인식에 대해 알아가는 것이 쏠쏠하다. <BR></FONT> <BR>o 오늘날 우리 사회는 크게 세 가지의 열병을 앓고 있다. 첫째는 실업문제를 비롯한 고용 위기라는 열병이고, 둘째는 스트레스나 산업재해 등으로 나타나는 노동 소외라는 열병이며, 셋째는 주변의 생활환경에 대한 파괴를 포함한 인간의 생활방식, 사고방식 자체의 위기로 나타나는 생태계 파괴라는 열병이다(강수돌, 1999: 8).<BR> <BR>o 경쟁을 핵으로 하는 기존의 시장 중심적인 길도 아니요, 훌륭한 당이나 국가가 위에서 주도하는 계획 중심적인 길도 아닌, 진정한 자율․자치의 길이야말로 참된 ‘제3의 길’을 찾아나서야 한다(강수돌, 1999: 11).<BR><FONT color=#008000>→ 말은 쉬운데, 그게 제대로 될까?</FONT> <br /><p><span class="toggle-text" onclick="toggleMore(this)" style="cursor: pointer; display: none;">계속 보기...</span></p> <div class="more-content" style="border: 1px dashed black; background: none repeat scroll 0% 0% rgb(239,255,175); padding: 1px; margin: 1px;"><br /><STRONG>Ⅰ. 문제의 뿌리<BR></STRONG> <BR>1. 경제 위기는 삶의 위기! <BR> <BR>o '국가부도'니 '제2의 국치'니 하는 말들로 우리를 괴롭혔던, 그러나 이제는 정리해고나 대량실업, 가정파탄과 인간성 파괴라는 극한 상황으로 우리를 옥죄고 있는 ‘IMF 시대’를 과연 어떤 식으로 이해해야 하나? 우리가 보건대 <FONT style="BACKGROUND-COLOR: #e4ff75">'IMF 시대'란 축적 위기에 처한 한국 자본의 내적 필요와 세계 자본의 내적 필요가 '외환위기'를 매개로 결합되어 나타난 것</FONT>이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개방화·탈규제화·민영화·유연·합리화 등을 주요 축으로 하는 IMF식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BR> <BR>우선 한국 자본의 내적 필요라는 측면을 살펴보자. 한국 자본은 상대적으로 유연하면서도 강력한 국가를 등에 업고 매우 효율적으로 몸을 불려왔다(재벌-국가 복합체). 그것이 관치금융이고 정경유착이며 문어발 경영이나 재벌 공룡의 배경을 이룬다. 그러나 이 과정은 국가의 효율성이 떨어지거나 상대적으로 노동운동의 힘이 강해지면 더 이상 유지되기 어려운 한계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자본의 입장에서 보면 ‘위기’를 통해서라도 새로운 축적의 조건들을 과감하게 정비해 나가는 ‘기회’가 필요했다. 흔히 ‘위기를 기회로’라는 구호와 함께 고비용-저효율의 구조를 과감히 뜯어 고치자라는 주장이나, 아니면 비효율적인 기업의 M&A나 과잉 노동력에 대한 군살빼기식 정리해고가 별다른 규제도 받지 않고 이루어지는 것은 바로 이런 한국 자본의 필요성이 겉으로 드러난 것이다.<BR> <BR>다음으로 세계 자본의 필요라는 측면을 보자. 세계 자본주의의 변동과 관련해서는 한마디로 과잉축적과 과잉생산이 현재 세계 자본의 움직임 뒤에 놓여있다고 볼 수 있다. 이 과잉생산과 과잉축적은 생산적 자본의 이윤율을 경향적으로 저하시킬 뿐만 아니라, 실물자본과 금융자본의 분리를 가속화시킨다. 따라서 우리가 경험하는 <FONT style="BACKGROUND-COLOR: #e4ff75">세계화란 한편으로 생산적 실물자본의 탈국경화가 급속도로 진행되는 것이요, 다른 편으로는 직접적 생산과정에서 분리된 금융자본이 천문학적 차익을 노리면서 투기자본화, 카지노자본화하는 것</FONT>이다. 그러면 이것과 한국의 경제 위기는 무슨 관련이 있을까? 이와 관련해 두 가지 문제를 지적할 수 있다. <BR> <BR>첫째, 세계 자본의 입장에서는 이미 1980년대 이래 신자유주의적 경제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세계화’ 전략을 추진해 왔다. 이들 입장에서는 한국과 같은 나라가 더 이상 보호주의적 장벽의 공고화나 국가 및 노조의 자본 운동에 대한 불필요한 개입 같은 것을 하지 않기를 바라왔다. 게다가 공공 부문의 비효율성을 깨뜨린다는 명분 아래 공기업 등의 민영화 및 이를 통한 자유로운 투자 유치를 바랐다. 또 재벌 기업들도 정경유착이나 내부거래 등으로 밀실 경영을 하기보다는, 그리하여 세계 자본에게는 언제나 ‘블랙박스’로 남아있기 보다는 투명하고 합리적인 경영을 하기를 바라왔다. 그래야만 세계 자본이 자유롭게 더 많은 단물을 빨아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세계 자본의 개방화 압력과 탈규제화 압력 등이 역설적이게도 그간 세계 자본과 권위적 국가의 힘으로 급성장한 한국 자본에게는 치명타로 작용, 마침내 경제 위기의 도화선이 되었다.<BR> <BR>둘째, 대개 초국적 기업이나 세계 금융자본으로 표현되는 세계 자본은 지구 전체를 무대로 운동하면서 자기 몸을 불려나가는데, 만일 한국에서 1997년 말 ‘모라토리엄’ 상태가 실제 현실이 된다면, 그리하여 마침내 ‘멸망’한다면 세계 자본으로서는 더 이상 '한국과 같은 신흥공업국이야말로 세계적 모델’이라면서 다른 후진국들에게 열심히 벤치마킹하라고 선전할 명분을 잃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더 이상 한국에서 단물을 빨아먹을 수 없게 되므로 실리적으로도 엄청난 손해를 입게 된다. 게다가 한국 사태의 불똥이 일본이나 미국에까지 튈 우려도 매우 컸다. 또 당시 미국의 자본가 세계에서는 국내 금리인상을 자제해야 한다는 논의가 있었는데, 그 이유는 ‘금리인상이 이뤄질 경우, 아시아로부터 자본이 대거 이탈, 미국으로 쏠려 결국 아시아 위기를 더욱 부채질할 것이고, 그러면 미국(자본)뿐만 아니라 전세계 경제(자본)에도 매우 해롭다’는 것이었다. 이런 인식을 하기에 이들은 보기 드문 규모로 축적 위기의 한국에 구제금융을 실시하고 바로 그 조건으로 한국 경제의 구조조정을 ‘관리’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 점은 현재 한국 경제의 위기가 한국 자본의 축적 위기일 뿐만 아니라 ‘축적 위기를 관리할 능력의 위기’이기도 하다는 것을 동시에 일러준다(강수돌, 1999: 25-27). <BR> <BR>o 대개 사람들은 우리 사회의 국가부도 사태나 외환 바닥 사태, 또는 국가경쟁력 약화를 경제 위기의 핵심으로 꼽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FONT style="BACKGROUND-COLOR: #e4ff75">위기의 핵심이 세계의 자본이 범지구적으로 인간 공동체와 자연 생태계를 급속도로 파괴하고 있는 현실 그 자체 속에 있다</FONT>고 본다. 그리고 나아가 <FONT style="BACKGROUND-COLOR: #e4ff75">우리 스스로 내면적인 자율성에 기초하여 자립자족적이고 상부상조하면서 서로 즐겁게 살지 못하고, 오히려 우리 자신의 내면세계로부터도 분리된 채, 자본과 시장 경쟁의 논리에 종속되어 힘겹게 살고 있는 것, 바로 이것이 오늘날 위기의 또 다른 핵심을 이루고 있다</FONT>고 본다. 한마디로 ‘삷의 위기’, 바로 이것이 우리가 진정으로 걱정해야 할 위기인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IMF 시대’의 위기란 이미 우리가 오래 전부터 경험하고 있는 삶의 위기가 더욱 첨예하고 세계적인 형태로 느껴진 것일 뿐 새삼스럽게 나타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강수돌, 1999: 28-29). <BR><FONT color=#008000>→ 결국은 삶의 위기라는 것인데, 사람들의 인식은 그 이후에도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BR></FONT> <BR>2. 말 많은 세계화, 그 본질 <BR> <BR>o 자본주의 세계 경제의 흐름은 약 400년 동안의 준비기를 거쳐 불과 100년 만에 독점화, 제국주의화하였고, 이것이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유발하였으며, 그 뒤로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대체로 미국 독점자본 중심의 자유시장 자본주의가 세계 경제의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할 수 있다.<BR> <BR>특히 1970년대 중반 이후 세계 경제, 특히 선진 자본주의 경제는 그 축적의 한계를 돌파하기 위해 기본적으로 ‘과학기술혁명’의 성과를 바탕으로 한편으로는 직접적 생산 과정에서 고도의 유연 합리화를 추진하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해외 직접투자 등 경영의 세계화를 공격적으로 추진하게 된다. 그 배경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설명할 수 있는데, 결국은 일국 차원의 복지국가형 모델로는 더 이상 자본의 발빠른 축적을 이룰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사실상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과학기술혁명을 생산과정에 도입한 것은 역설적이게도 자본의 수익률을 경향적으로 저하시켰고, 이것은 자본으로 하여금 더욱 해외 진출과 세계화를 진행하게 추동했다. 나아가 시장도 국내 시장은 잠재적으로 포화상태로 치달았고, 국내 노동자들도 더 이상 규율 잡힌 노동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 다른 한편 복지국가적 노동자 통합정책은 돈이 엄청나게 드는 프로젝트이므로 더 이상 재정적으로 버티기 어려워졌다. 그리고 더 이상 수익성이 높은 국내 투자 기회를 찾지 못한 엄청난 돈들은 생산과정 즉 실물경제로부터 이탈된 채 네트워크로 긴밀히 연결된 세계금융시장을 빛과 같은 속도로 돌아다니기 시작했다(강수돌, 1999: 33-34). <BR> <BR>세계화의 덫(강수돌, 1999: 35)<BR>IMF는 그동안 수많은 개발도상국들에게 구제금융을 제공하는 대신 그 나라의 경제 구조나 생활방식을 구조적으로 바꾸어 세계시장에 편입시켜내었다. 1980년대만도 IMF는 약 70개 정도의 제3세계 나라에 개방화, 탈규제화, 민영화, 합리화를 강제하면서 구조조정을 유도하였다. 지금까지 지구촌의 절반에 해당하는 약 100개 정도의 나라들이 IMF에 의해 ‘세계화’라는 이름으로 반강제적 구조 조정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BR> <BR>그런데 이러한 구조 조정 과정은 거의 예외없이 현지의 자급자족적 사회경제 시스템이나 고유한 특성을 가진 경제를 지극히 세계시장의존적으로, 따라서 자본의존적으로 불구화시켜내는 것이었다. 그 결과는 너무나 자명하게도, 빈곤(사회의 양극화)과 대외의존의 심화, 민주주의의 말살, 자연이나 전통 지역사회의 생태적․사회적 황폐화, 불평등 구조의 심화, 시민사회에 대한 자본 독재의 강화, 지구촌의 “20:80의 사회”로의 이행 등이다. <BR> <BR>신자유주의적 세계화 물결의 경제 논리는 크게 네 가지 기둥으로 구성된다. 그것은 ① 자본 운동에 대한 대외적 개방화, ② 정부와 노조의 기업에 대한 규제 철폐, ③ 공공부문이나 복지 제도의 민영화 및 감축, ④ 인원 감축을 비롯한 기업경영 유연화 등으로 요약된다(강수돌, 1999: 36).<BR> <BR><STRONG>Ⅱ.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7가지 분리<BR></STRONG> <BR>3. 7가지 분리<BR>o 원래 ‘경영’ 내지 ‘관리’(management)라는 말은 라틴어로 ‘손’을 뜻하는 마누스(manus)에서 왔다. 이것이 기마술, 즉 ‘말 다루는 솜씨’로 이어졌고, 이 단어가 오늘날의 ‘관리’(management)이라는 말로 굳어졌다. 고전적인 ‘말 다루는 솜씨’로는 ‘당근과 채찍’, ‘박차를 가하기’, ‘재갈 물리기’ 등이 있다. 즉 주인이 의도하는 대로 말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이끌고 가는가, 그리고 ‘말을 물가로 끌고 갈 수는 있어도 물을 강제로 먹이지는 못한다’는 격언에도 나오듯이 말로 하여금 자발적으로 뭔가를 할 수 있게 만드는 것도 관리의 핵심적 문제이다. 따라서 오늘날 인적 자원(human resources)인 인간 노동력과 관련, 경영학적 의미에서 관리(management)란 능력 개발과 동기 부여, 성과 평가와 노동 통제 등을 그 핵심적인 내용으로 한다(강수돌, 1999: 45-46). <BR> <BR>4. 공동체로부터 개인의 분리<BR> <BR>o 자본이라는 새로운 권력자에 의한 노동자 삶의 ‘종속화’ 경향 촉진은 두 가지 의미<BR>하나는 보다 많은 사람들이 ‘자유로이’ 노동시장에 나가서 자신의 노동력을 화폐와 교환하여 팔게 될수록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기존의 삶의 방식을 스스로 폐기시키는 결과가 되어, 결국 이제는 어느 누구도 기업가 아래로 들어가지 않으면 스스로 살아 나가기가 어렵게 된다는 점이다. 노동자는 형식상 자유롭긴 하지만 기업가 아래로 들어가 순종해야만 삶이 보장되는 이 모순된 현실이 자본주의 사회의 기본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기업가들이 노동자를 ‘종업원’이라고 부르는 것도 바로 삶의 종속성을 은연중에 확인하는 과정이다. 다른 하나는 ‘자유로운’ 노동 계약의 결과, 노동자는 이제 무엇을 어떻게 생산하여 소비할 것인가를 스스로 결정하기보다는 하나의 대상화된 ‘생산요소’로서 또 기업가나 경영자에 의해 관리 통제되는 ‘인적 자원’으로서 자본가의 의지나 시장 상황에 수동적으로 따라가거나 적응해야만 한다는 점이다. 결국 ‘자유로운 종속’, 바로 이것이 우리가 근본적으로 안고 있는 문제의 핵심을 이루는 것이다(강수돌, 1999: 53-54).<BR> <BR>o 노동의 내용도 문제<BR>일자리를 갖고 있는 사람들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일하고, 또 무엇을 만들어내느냐 하는 것과 관련해서도 그 심각성을 깨우쳐야 한다. 갈수록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노동내용이 공허하거나 단조로우며 자아실현과는 거리가 멀다고 얘기하고 있고, 나아가 생산하는 내용이 갈수록 의미없는 것, 쓸데없는 것 또는 필요 이상으로 넘치는 것, 또는 파괴적인 것 - 인간과 자연을 병들게 하고, 죽이는 것 - 들을 만드는 것은 아닌가 하고 의심스러워하고 있다. <BR>노동사회란, 외적 자율성은 획득했으되, 자연과 인간의 파괴를 통한 이윤추구라는 내적 타율성이 강화된 사회이다(강수돌, 1999: 58).<BR> <BR>o 사람들이 수출 경쟁력 향상에 도움이 되는 ‘양질의 노동력’으로 길러질 수 있도록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가정과 학교를 포함한 온 사회가 ‘공장’ 역할을 수행해왔다. 하나는 노동 능력의 측면이고, 다른 하나는 노동 자세의 측면이다. 노동 능력이란 건강한 육체는 물론 국어, 수학, 영어, 컴퓨터, 기술 등의 실력이며, 반면에 노동 자세란 작업 명령에 대해 거부하지 않고 복종하며 일할 수 있는 태도이다. 대부분은 초등하교, 아니 유치원 시절부터 고등학교 시절에 이르기까지 “부모님과 선생님, 어른들 말씀을 잘 듣고, 열심히 공부(일)해야 한다”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다. 여기서 “열심히 공부해야” 하는 것은 노동 능력을 훌륭히 기르기 위해서이며, “…말씀을 잘 들어야” 하는 것은 저항하지 않고 순종하는 태도, 즉 노동 자세를 성실히 가다듬기 위함이다. 특히 한 학기나 한 학년이 끝나면 몇몇 학생이 우등상을 받게 되는데, 이 상장의 내용을 자세히 분석해 보면 바로 그 속에 이 두 가지 요소가 모두 들어 있다. “…위 학생은 행동이 방정하고 성적이 우수하여 타의 모범이 되므로…”라는 상장 문구에서 “행동이 방정하고”는 저항하지 않고 순종하는 노동 자세가 올바로 길러지고 있다는 뜻이며, “성적이 우수하여”는 노동 능력이 뛰어나게 길러지고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이 소수의 우등생을 모범으로 하여 수많은 다른 학생들이 이를 따르도록 ‘보상을 통한 강제’를 행하게 되는 것이다(강수돌, 1999: 59-60).<BR><FONT color=#008000>→ 학교교육의 본질을 짚고 있는 부분이다. 그런데 제도교육은 그렇다 치고, 노조나 진보정당에서 모범당원, 모범활동가 등도 이와 비슷한 의미가 있는 것 아닌가?<BR></FONT> <BR>o 대개 한국인은 중요한 사항은 바이어가 떠나기 전날 밤에야 다루기 시작한다. 따라서 귀국일자를 미리 말하지 말고 귀국 항공편을 복수로 예약하는 등 돌발사태에 대비하라고 가르친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한국의 기업문화 내지 사회문화의 한 측면을 지적하고 있는데, 그것은 문제를 차분하게 체계적으로 처리하기보다는 최종 마감시각이 가까워져야 비로소 서둘러 한꺼번에 처리해버린다는 점이다. 대개 많은 ‘중독조직’(addictive organization) 안에서 볼 수 있는 현상이다. 물론 이는 기동성이 있어 좋을 수도 있지만, 대개는 분별력 있고 지혜로운 판단이 이뤄지기보다는 혼란과 오판으로 귀결되기 쉽다. 이러한 의사결정방식은 한편으로는 자기 중심적인 권위주의 의식을, 다른 편으로는 일상화된 임기응변적 위기 대처 방식을 증명하고 있어, 전형적인 중독 조직의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강수돌, 1999: 62-63).<BR> <BR>5. 생산 수단과 노동력의 분리<BR> <BR>o 경제 위기와 외자 유치 <BR><FONT style="BACKGROUND-COLOR: #e4ff75">외자유치가 경제 위기, 삶의 위기와 맺는 관련성이란, 그 출처가 외국이라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본이 민중과 맺는 관계가 잘못되는 데 있다</FONT>. 이런 점에서 외자든 내자든 본질적으로 크게 다른 점은 없다. 물론 내자에 비해 외자는 대체로 그 운동 반경이 훨씬 더 클 뿐만 아니라 운동 속도나 기동력, 융통성이 더 클 것이다. 따라서 개별 국가 차원에서 움직이는 노동 입장에서 보면 그에 마땅히 대응하기가 훨씬 더 어려워지고 복잡해질 것이다. <BR> <BR>그렇다면 외자 유치를 통해 무엇이 잘못되는 것일까?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민중이 스스로 살아가는 삶의 능력을 갈수록 많이 잃어버린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바로 그만큼 삶의 과정 자체가 외적인 힘에 대해 종속성이 커진다는 점이다. 현재 세계에는 약 4만개 정도의 다국적기업이 있어 전 세계의 정치경제를 쥐고 흔든다. 또한 수십조 달러 규모의 세계금융자본은 하루에도 지구를 수십 바퀴씩 돌며 순식간에 높은 수익을 뽑아가려 하고 있다. IMF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그러한 세계 자본의 대변자이자, 동시에 단기고리채 자본이 아니던가. 이러한 <FONT style="BACKGROUND-COLOR: #e4ff75">거대 권력체인 자본 앞에 특정 나라의 생산 조직과 민중의 삶이 그대로 노출된다는 것은 자립성의 상실과 종속성의 강화로 귀결되고, 이것은 결국 민중이 자율적이고 책임성 있게 삶의 문제를 풀어갈 수 있는 능력의 위기, 즉 삶의 위기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FONT>. 왜냐하면 <FONT style="BACKGROUND-COLOR: #e4ff75">자본은 그 자체가 권력이기 때문에 스스로가 의사결정의 주체로 등장하면서 다른 모든 것을 그 대상으로 객체화시켜버리기 때문</FONT>이다. 다시 말해 빌려오는 돈은, 돈과 함께 정치·경제 및 사회·문화 운영의 방식까지 그 자본에 유리한 방향으로 재편하고자 한다. 이렇게 외자라는 빚을 얻어 빚을 갚아나가는 일이 일상화되면, 우리의 후손들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나름대로의 독자적 삶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물려받은 빚을 갚기 위해 피와 땀과 눈물을 흘려야 하는 운명, 즉 삶의 위기 그 자체를 유산으로 물려받게 될 것이다. <BR> <BR>6. 계획과 실행의 분리<BR> <BR>o 경쟁의 한계<BR>; 세계화된 경쟁 물결의 결론은 명백히 범지구적 사회 분열과 생태계 파괴이다.<BR>첫째, 경쟁을 어느 한 기업 입장에 국한된 시각으로 볼 때에만 ‘노사 모두가 성공하는 것’(win-win game)이 가능할 뿐이지, 사회 전체 또는 지구촌 전체로 보면 실패하는 기업, 따라서 실패하는 노사가 생기게 마련이다. <BR>둘째 일단 한번 성공한 기업의 노사가 앞으로도 영원히 성공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이다. 이들이 계속 성공할 수도 없긴 하지만, 그렇게 하기 위해서라도 지속적으로 잠재적 경쟁자를 물리치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 즉 갈수록 더욱 허리띠를 졸라매고 노동의 효율 및 경영의 효율을 높여 노동 강도를 높여야 한다. 물론 기업 특유의 기술 혁신을 통해 어느 정도까지는 성공할 수 있겠지만, 문제는 이것에도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BR> <BR>셋째, 이 무한 경쟁 과정에서 각 기업들이 그 상품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원가 절감 차원에서 흙, 물, 공기, 나무나 원유와 같은 값싼 원료를 채취, 운반하느라고 지구촌의 유한한 자연 생태계를 더욱 가속도로 훼손하여 결국에는 우리 모두의 삶의 토대를 허물어뜨리고 있다는 점이다. <BR>물론 지구 자체도 각 기업별 무한 경쟁을 더 이상 참아내지 못하겠다고 소리치고 있는 점을 재빨리 알아차린 기업들은 ‘그린 상품’을 개발하여 생태계 문제를 재빨리 상품화하고 있지만, 이 것 역시 한계가 있다. 모든 기업이 그렇게 할 역량이 부족할뿐더러 경쟁의 압력이 존재하는 한 모든 제품을 그렇게 만들기도 힘들다.<BR> <BR>세계시장을 둘러싼 경쟁이란 모든 가치판단의 기준을 상품경쟁력에 둔다. 시장 경쟁력이 없는 상품은 아무런 인정을 받지 못하고 폐기처분된다. 따라서 그 상품을 생산한 노동도 아무런 사회적 인정을 받지 못하고, 결국은 그 노동을 수행한 노동자가 쓸모없는 존재로 평가받는 것이다. 요컨대 대다수의 경쟁력 없는 사람은 이 경쟁 사회에서 아무런 인정을 받지 못한다는 것, 즉 <FONT style="BACKGROUND-COLOR: #e4ff75">시장 경쟁이 곧 삶의 위기로 연결될 수밖에 없다는 것, 이것이 시장 경쟁의 근본적 한계</FONT>가 아닐까?(강수돌, 1999: 86-87)<BR><FONT color=#008000>→ 경쟁의 한계에 대해 이렇게까지 접근해보지는 못했다. 이래서 국제주의적, 생태주의적 시각이 필요하다. </FONT><BR> <BR>7. 삶터와 일터의 분리<BR> <BR>o 자가용 수요의 증대는 한편으로 삶터와 일터의 분리의 산물이요, 다른 편으로 그러한 분리의 현실과 자본의 효율성 논리를 노동자들이 생활 속에 내면화한 결과이다(강수돌, 1999: 95).<BR><FONT color=#008000>→ 갈수록 사람들이 자가용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지 않게 되고, 그것이 가진 효능에 더 주의를 기울인다. 이를 테면 애를 가진 부부의 경우 차가 없으면 애를 데리고 외출하기 어렵다, 물건을 가지고 이동하려 해도 차가 있어야 편하다 등이 그런 이유이다. 그래서 사회 구조가 가진 문제를 개인, 자기 가족의 문제로 축소시켜 파악하게 되고, 차를 살 여유가 없는 사람들이 가진 고통, 모두가 차를 샀을 때의 문제에 대해서는 간과하게 된다. <BR>대중교통을 고민하는 이만 목이 터져야 대중교통에 대해 문제제기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모두의 인식이 필요하다. 이렇게 변해가는 문화에 저항하고, 핵심을 깨우쳐 주는 것, 그런 것이 진보 아니던가. <BR></FONT> <BR>o 정보화와 일터의 변화<BR><FONT style="BACKGROUND-COLOR: #e4ff75">정보화 과정은 노동과정상 노동통제 방식에도 새로운 가능성을 제공한다. 즉 과거의 권위주의적 형태나 기계적 형태로 표현되는 외재적 통제보다는 제도적 형태나 소통적 형태로 표현되는 내재적 통제가 선호될 뿐만 아니라 가능해지고 있다</FONT>. 여기서 제도적 형태란 경영참가 제도나 복지제도를 통해 노동자를 기업과 동일시하게 하여 자본의 지배력을 강화시키고자 하는 것이고, 소통적 형태란 자본이 노동에게 제한된 범위에서나마 어느 정도의 자율 공간과 의사소통의 기회를 제공하여 자본의 운동 논리를 노동 스스로 내면화하게 함으로써 지배력을 강화하고자 하는 것이다. 예컨대 오늘날 어떤 기업에서는 컴퓨터 통신망을 통하여 불만 사항이나 건의사항, 기발한 아이디어 제안 등을 아무런 위험 부담 없이도 그 조직의 높은 사람에게 전달할 수 있고, 많은 경우에 이러한 제안은 채택되어 포상되기도 하고 불만 사항은 개선되고도 한다. 이러한 과정은 노동자들로 하여금 더욱 그 조직과 일체감을 느끼게 하고 이른바 ‘전자민주주의’의 환상까지 가지게 한다. 그러나 반면에 정보기관과 기업이 공유하는 포괄적인 인사정보시스템이나 전자감응장치, 호출기, 휴대폰 등은 기업 활동에 거슬리는 행위를 하는 모든 개인이나 조직체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사실상 더욱 강력하고 신속하게 통제할 수 있다. <BR> <BR>노동통제방식과 관련하여 또 하나 특기할 만한 것은, 생산직․사무직․관리직을 불문하고 공장이나 사무실에서 집단적으로 노동이 수행되는 경우에는 팀작업이 확산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원래 1970년대에 유럽의 노조들이 노동과정의 자율성 확대나 노동자의 자질 향상, 노동의 인간화라는 맥락에서 요구한 것이지만, 정보화와 더불어 자본이 주도하여 인력감축, 노동시간상 빈틈의 축소<FONT color=#0000ff>(각주. 노동시간은 자본의 관점에서 볼 때 유일하게 중요한 살아있는 시간이다. 왜냐하면 그 시간이 돈을 벌어주기 때문이다. 더 많은 노동시간은 더 적은 손실 또는 더 많은 잉여가치를 의미하기 때문에 자본은 그 시간을 증대시키기 위하여 할 수 있는 온갖 수단을 모두 동원한다. 반면 노동자들이 노동을 위해 쓰지 않는 어떠한 시간도 자본에게는 죽은 시간이다(해리 클리버, 『자본론의 정치적 해석』, 권만학 옮김, 풀빛, 1996: 182 참조)</FONT>, 노동강도 강화, 외재적 통제의 내재화, 관리비용(위계적 경직성 및 중간관리자)의 축소, 노동자의 경험적 지식과 창의성의 적극적 활용이라는 맥락에서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BR> <BR>특히 <FONT style="BACKGROUND-COLOR: #e4ff75">정보기술은 한편으로는 대단히 예민한 특성을 가지고 있고 다른 편으로는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시스템적 특성을 지니고 있기에, 일부 공정의 조그마한 장애도 전체 조직을 마비시키거나 교란시킬 수 있는 위험이 있다. 따라서 노동과정 및 관리과정의 정보화가 진척될수록 자본의 입장에서는 노동자들이 더욱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이러한 위험성을 사전에 예방하는 데 동참하도록 만들 것이 요청된다. 따라서 주인의식과 일체감, 그리고 원활한 의사소통 등이 더욱 강조된다.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팀조직이 발전해 나오고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정보화를 기초로 하는 팀작업은 팀구성원끼리 자기통제를 할 수 있게 함으로써 자본이 생산성과 품질, 작업태도, 노조의 영향력 등의 문제를 일거에 해결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한다</FONT>. <BR> <BR>끝으로 정보기술의 도입은 소수의 남성 노동력이 핵심 노동자층으로, 그리고 다수의 여성 노동력이 주변부 노동자층(단순기술직, 단순사무직, 임시직 등)으로 양극화되도록 하는 데에 더욱 기여한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강수돌, 1999: 102-103). <BR><FONT color=#008000>→ 내가 놓치고 있었던 부분을 잘 지적하고 있다. 팀제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검토해봐야겠다. </FONT><BR> <BR>8. 인간과 자연의 분리<BR> <BR>o 모든 것이 경쟁력을 중심으로 판정되고 인간의 생존 여부도 시장 경쟁력에 의해 결정되는 사회가 도래하고, 세계화 시대가 도래하면서 인간 사회와 학문 세계는 크게 세 가지 측면에서 오류를 범하고 말았다.<BR> <BR>첫째, 자연과 인간을 철저하게 분리시켜 생각하고 행동한다는 점이다. <BR>자본주의적 효율서오가 그에 바탕한 경쟁 논리가 온 세상을 지배하기 시작하면서, 자연은 인간 주체의 무한한 욕구 충족을 위한 도구나 수단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인간은 갈수록 자연을 대상화, 수량화하여 개발과 성장, 발전이라는 미명 하에, 그리고 생산성이라는 이름 아래 오히려 그 파괴성을 증대시켜 왔다. <BR> <BR>둘째, 비록 경제학이나 경영학이 이론적으로는 자원의 유한성을 전제하였으나, 현실 정치에서는 이러한 유한성을 철저히 망각하고 말았다는 점이다. <BR>국민국가 단위의 상호경쟁적인 경제적 효율성 향상의 과정에서, 지구의 자원은 마치 무한히 ‘퍼낼 수’ 있는 것처럼 비춰졌다. 뿐만 아니라 전통적 이론에서는 물이나 공기 같은 것은 처음부터 무한한 자원 - 따라서 아무런 시장 가격을 지니지 못하는 무가치한 것으로 가정되었다. 그러나 물이나 공기조차 바로 그러한 경제적 효율성 향상의 과정에서 오히려 급속도로 파괴되었고, 따라서 이제는 유한한 것으로 드러나게 되었다.<BR> <BR>셋째, 인간의 외면과 내면이 철저히 분리되었다는 점이다(강수돌, 1999: 108-109).<BR> <BR>o “공격자와의 동일시”(H. 하이데, 한국 경제-축적양식의 위기, 「녹색평론」5-6월호, 1998)<BR>자신을 공격하고 지배한 사람들에 대해 아예 저항을 않거나 저항을 하다가 도중에 포기하고, 더 이상 대안적 전망에 관해 고민하거나 결사항쟁을 하기보다는 오히려 공격자가 원하는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지 않느냐’고 공격자나 지배자의 논리를 스스로 내면화하고 숭배하게 되는 것이다(강수돌, 1999: 118).<BR> <BR>o 기득권을 가진 지배자들에게 대한 분노가 곧장 자동적으로 저항으로 연결되기보다는, 대개 다른 한편으로 국가의 장래에 대한 걱정, 파산선고에 대한 두려움 등과 함께 뒤섞이면서 노동자들은 매우 심한 혼란을 일으키게 된다. 왜냐하면 한국의 노동자들은 여태껏 애국심과 애사심을 너무나 가슴깊이 내면화해 왔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심리 구조를 적극적으로 파들어가서 노동과 자본 사이의 대립을 완화하고자 하는 관리 방식이 종업원지주제나 우리사주제 도입, 그리고 참여경영 전략 또는 노동자의 중산층화 전략이다. 만일 이러한 여러 기법들이 일정한 효과를 발휘하게 되면 “공격자와의 동일시”가 더욱 강화되어, 마침내 ‘싸움의 상대방’이 뒤바뀌게 된다(강수돌, 1999: 119-120). <BR> <BR>9. 생산자와 소비자의 분리<BR> <BR>o 정보기술을 활용한 상품광고가 세계 구석구석으로 침투하여 우리의 욕구 구조를 표준화시키고 탈정치화시키고 있다면, 유행과 패션은 그러한 상품 소비의 주기를 단축하고 “제도화”(강내희, 속도와 화면, 「문화과학」, 제12호/가을, 문화과학사, 1997: 166)시키고 있다(강수돌, 1999: 127).<BR> <BR>o 웹스터와 로빈스는 오늘날 정보통신기술이 현대인의 모든 활동 흔적과 기록을 전자적인 감시상태 아래 남김으로써 기존의 테일러리즘을 생산현장 뿐 아니라 전사회적 영역으로까지 확장시켰다고 하여, ‘사회적 테일러리즘’(social Taylorism)이라 이름짓고 있다(추광영, 커뮤니케이션 혁명과 미래문화, 「철학과 현실」가을호, 철학문화연구소, 1997 참조). <BR> <BR>o 관광이나 여행의 산업화는 자동차의 대중화(대량 생산-대량 판매)와 더불어 진행된다. 원래 관광이나 여행은 자연이나 인간 사회의 새로운 면을 발견하고 그 이해의 폭을 심화시키 자연과 인간의 관계, 우리 자신의 문제에 대해 다시 성찰하며 더욱 보람된 삶을 위한 심신의 재충전 기회이다. 또한 스포츠도 심신을 단련하여 삶의 건강성을 드높이는 데에, 그리고 스포츠를 매개로 해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는 데에 그 핵심이 있다. 그러나 이것이 상품화되고, 나아가 스포츠의 경우 상대방을 눌러 이겨야만 거대한 상금을 탈 수 있는 새로운 투지의 장으로 변모하면서 급속히 상품화를 부채질하게 되었다. 대부분의 영상물의 경우 사람들을 탈정치화하고 은연중에 자본의 논리, 지배자의 논리를 내면화하도록 조장한다.<BR> <BR>다른 한편 진보적인 문화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운동문화를 상품화하면서 거꾸로 자본의 논리에 자기도 모르게 재포섭되는 위험도 나타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러한 운동들이 그 잠재적 위험을 극복하여 이념적 (확대)재생산을 해냄과 동시에 경제적 재생산까지도 해낼 수 있는 내적 생명력을 가질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일 것이다(강수돌, 1999: 134-135).<BR> <BR>10. 인간 내면과 외면의 분리<BR> <BR>o 세계경영과 성과주의<BR> <BR>‘세계 경영’의 입장에서 지구촌 전체의 노동력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배치, 관리하고 통제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가장 핵심적인 과제 중의 하나로 된다. 그 ‘세계 경영’의 대표적인 수단이 애국주의와 민족주의, 인종주의, 능력주의, 성과주의 따위이다(강수돌, 1999: 139-140).<BR> <BR>o 경제 위기와 애국주의 <BR> <BR>왜 자본은 근대 민족국가를 필요로 하는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FONT style="BACKGROUND-COLOR: #e4ff75">하나는 자본이 활동하는데 필요한 사회적 조건을 만들어내는 데에 국가의 힘이 필요하다(공권력으로서의 국가). 다른 하나는 자본이 노동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통제하는 데에도 국가라는 경쟁단위가 필요하다(경쟁단위로서의 국가)</FONT>(강수돌, 1999: 140). <BR> <BR>문제는 자본끼리의 경쟁 관계가 지속될수록 각 자본들은 각각의 노동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려는 경쟁을 하게 되며, 이 과정에서 어떤 개별 자본의 승패와는 무관하게 자본 일반의 노동 일반에 대한 지배력은 계속 유지, 강화된다는 점이다. 결국 자본간 경쟁 관계는 자본주의 지배 관계가 겉으로 드러난 형태일 뿐이다. 즉, <FONT style="BACKGROUND-COLOR: #e4ff75">자본 일반이 노동 일반을 나라별로 갈라 놓고 서로 경쟁을 시키게 되면 나라별로 노동과 자본이 협동하여 애국주의 깃발 아래 다른 나라와 싸우게 되므로, 바로 그 과정에서 각 나라별 자본은 각각의 노동을 확실히 장악하게 되고(‘참여와 협력’의 확보), 따라서 자본 일반은 그 지배력을 그만큼 강화시킬 수 있는 것</FONT>이다. 이것은 마치 어떤 행사 때, 사회자가 조별로 박수를 쳐보라고 하면서 조별 경쟁을 유도함으로써 참여자 전체를 확실히 장악하는 것과 유사하다. 따라서 <FONT style="BACKGROUND-COLOR: #e4ff75">“남들이 모두 경쟁하는 데 우리만 게을리 하면 패배하지 않느냐”하는 논리는 자본의, 자본에 의한, 자본을 위한 목소리이든지 아니면 문제의 줄기와 뿌리를 잘못 보는데서 오는 오류다. 결국 자본 입장에서 본다면 월드컵이나 올림픽과 같은 국제 경기는 그 자체로 엄청난 초국가적 사업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자자손손 국가별 애국주의를 장려할 수 있는 중요한 매개 고리가 된다</FONT>. <BR> <BR>이와 같이 시장지배력을 둘러싼 자본 사이의 경쟁은, 겉으로 보기에는 어쩔 수 없는 외적 강제로 보이긴 하지만 사실상은 자본이 자기 몸을 불려나가고자 하는 내적 본성이 밖으로 드러난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우리나라가 세계 최고가 되도록 허리띠를 더욱 졸라매자!”라는 식으로 ‘애국주의’에 흠뻑 빠져, 자본 사이의 경쟁에 노동이 동참하는 것은 결국 자본의 지배력 강화와 몸 불리기를 도와주는 일이다. 자본의 증식이란 자본이 노동을 매개로 자기 몸을 불려 나가는 것이므로, 바로 이것이 노동에게는 삶이 아니라 죽음을 뜻한다. 그것은 많은 경우 물리적 생명 자체의 죽음도 의미하지만, 더 중요한 측면은 살아 움직이는 주체적 역량의 죽음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당하고 있는 경제 위기, 삶의 위기의 본질이 아닐까?(강수돌, 1999: 141-142). <BR> <BR>o 성과주의와 연봉제의 함정<BR> <BR>성과주의와 능력주의를 원칙으로 하는 임금제도, 승진 제도는 기업의 효율향상과 노동통제 측면에서 매우 효과적인 수단으로 보이기 때문에 노동자나 노동조합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서서히 도입-적용-확산될 전망이다. <BR>대체로 97년까지만 해도 능력주의, 성과주의를 원칙으로 하는 연봉제 임금 체계의 도입은 일반적 사회분위기와 노조의 반발로 인해 저지되어 온 편이다. 하지만 97년 말 이후 이른바 ‘IMF 시대’에 접어들면서 기업들은 고용 위기의 상황을 이용하여 그 동안 주춤거렸던 성과주의 임금 제도의 도입을 서두르고 있다. 이른바 노동시장 유연화(정리해고와 파견근로, 임시직 증대)를 어느 정도 진척시킨 뒤에 이제 인사제도 유연화(성과급, 연봉제)를 진척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BR> <BR>기업에서 성과주의를 핵심으로 하는 인사제도의 유연화를 도입하려는 표면적 이유는 기존의 연공주의 체제(나이와 근속연수에 비례해서 임금과 승진이 정해지던 방식)에서는 무사안일주의가 팽배하고, 별다른 공헌도 없이 높은 자리에 앉아 임금만 많이 받아가며 자기개발의 동기부여도 없어 조직이 정체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비용은 많이 치르되 창의적인 경쟁력 향상에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관련주의, 무사안일주의, 부당 차별주의, 부정부패, 낭비와 형식주의 등은 철저히 척결해야 한다. 그런데 과연 연봉제를 통해 이러한 문제가 해결될까?<BR> <BR>능력주의, 성과주의 인사 제도는 크게 세 가지 정도의 함정을 가지고 있다. 이른바 <FONT style="BACKGROUND-COLOR: #e4ff75">‘능력 있는 사람이 대우받는’다는 새로운 인사제도라는 게임의 규칙은 매우 훌륭하게 보이기는 하지만 - 물론 평가기준의 객관성과 공정성도 문제가 크다 - 게임 그 자체를 자세히 살펴보면 매우 심각한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첫째, 연봉제와 같은 능력주의 인사제도 아래에서 마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능력만큼 그대로 평가를 받아 보상을 받을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것은 결코 절대평가가 아니라 상대평가</FONT>이다. 즉 동료에 비해, 또는 다른 팀에 비해 얼마나 더 잘했는가가 문제되는 것이지 자기 스스로 얼마나 훌륭하게 발전하고 있는지는 일차적 관심의 대상이 못 된다는 말이다. 평가 자체가 상대평가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소수의 승리자와 다수의 패배자가 만들어질 수밖에 없다. 갈수록 피곤해질 수밖에 없는 게임이다. 무한경쟁이 부채질되기 때문이다. <FONT style="BACKGROUND-COLOR: #e4ff75">둘째, 능력주의 인사제도가 강화, 확대되면 노사관계가 3차원에서 변질된다. 맨 먼저 집단적인 교섭관계가 개별적인 평가관계로, 노와 사의 힘 관계가 노와 노의 경쟁 관계로, 또 시간적으로 장기계약관계가 단기계약관계로 변동하는 것</FONT>이다. 결론은 노동조합의 역할 축소와 무력화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다. 경영자 입장에서는 눈 속의 가시 같은 존재가 아예 사라지는 것이 좋겠지만, 힘의 균형을 중시하는 주류노사관계이론의 입장에서조차도 이것은 바람직한 것이 아니다. 노동조합이 힘을 가지고 경영 과정에 대해 ‘건전한 비판자’ 역할을 수행할 때 노동의 인간화와 경영의 선진화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FONT style="BACKGROUND-COLOR: #e4ff75">셋째, 기업 내 구성원들을 상호 경쟁시키면 일부에게는 이러한 시스템이 동기부여 효과를 낳겠지만, 대다수에게는 동기저하 효과가 나타나게 된다. 게다가 부분적인 생산성 효과에도 불구하고 상호 경쟁 관계로 인해 총체적인 생산성에는 역효과가 나타날 가능성이 크다</FONT>. 팀워크나 정보공유, 원활한 의사소통으로 인한 효과적 문제해결 등의 측면에서 문제가 많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게다가 개인의 노동생산성은 결코 그 개인 혼자만의 배타적 능력이나 업적이라고 보기가 어려운 측면이 있다. 조직 속의 여러 개인들이, 그리고 유․무형의 관계들이 복합적으로 상호작용하여 개인의 업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닐까? 나아가 평가 대상에 포함되는 단기적이고 가시적인 업적과 성과에 치중한 나머지 장기적인 조직 발전에 도움이 되는 매우 중요한 부분을 놓칠 가능성도 크다(강수돌, 1999: 152-153).<BR> <BR>o 연공, 능력, 업무에 따른 차별조차도 과연 얼마나 합리적인 근거가 있는지에 대해서 논란이 있을 수 있다. 사실, 자본과 경영의 입장에서는 그 차별이 얼마나 합리적인가 하는 것은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 입장에서는 차별의 구조를 통하여 여러 집단 사이에 ‘이성적인’ 경쟁이 일어나도록 동기부여하고 그럼으로써 조직구성원 전체가 조직의 목표 달성을 위해 더 한층 땀흘리도록 만들어내는 것, 즉 효과적으로 분할 통치하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다(강수돌, 1999: 154). <BR> <BR><STRONG>Ⅲ. 대안은 있는가</STRONG><BR> <BR>11. 세계화를 넘어서기<BR> <BR>o 미국식 시장경쟁 위주의 자본주의란 한마디로 모든 판단의 기준을 시장경쟁력에다 두고, 오로지 주주 이익의 극대화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경쟁력이 없는 사람과 조직은 가차없이 잘라내고, 경쟁력이 없는 공장이나 사무실은 가차 없이 폐쇄한다.<BR> <BR>이를 미국의 자본가들은 ‘주주중심 민주주의’(shareholder democracy)이라고 정당화하고 있다. 주주들만 모든 판단과 기업 행위의 기준이 되고 이들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이 사회의 공동선을 높인다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은 동일한 자본주의 경영이론 안에서도 ‘이해관계자 민주주의’(stakeholder democracy)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주주뿐만 아니라 다양한 이해당사자들, 즉 노동자, 노동조합, 지역사회, 소비자, 환경운동가 등 모든 이해당사자들의 권익을 골고루 생각해야 옳다는 견해가 많다. <BR> <BR>ㅇ주주중심 민주주의의 한계<BR>시장경쟁력만을 높이기 위해 기업들은 경영합리화를 통한 인원 감축과 임금 인하, 조직 축소, 외주․하청화, 구조 조정 등을 가속화하는데, 이 과정에서 수많은 정규직 노동자들은 하루아침에 실업자로 쫓겨나고, 다수의 비정규직 사원들이 빈자리를 메우게 된다. 이들은 더 낮은 임금에 더 긴 노동시간을 일하게 되면서도 노동조합 활동을 하기가 힘들게 된다(강수돌, 1999: 160-161). <BR> <BR>미국의 뉴스위크조차도 이러한 미국식 자본주의를 두고 임금과 일자리를 지속적으로 죽여나가면서 경쟁력을 유지하고자 하기 때문에 ‘킬러 자본주의’(killer-capitalism)라고 비꼬기도 한 바 있다(강수돌, 1999: 162). <BR> <BR>o 자유화, 탈규제화, 민영화, 경영합리화 등 크게 네 가지 기둥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오늘날 세계화의 물결은 IMF나 IBRD, 초국적 기업, 그리고 세계금융시장 등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세계 각 나라, 각 기업에 시장경쟁력과 주주이익 향상을 위한 ‘하향평준화’ 경쟁을 촉진시키면서 고용불안과 대량 해고, 노동시간 연장과 노동강도 강화, 복지감축과 재정감축, 금융공황과 사회 불안 등을 불러일으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강수돌, 1999: 170).<BR> <BR>12. 구조 조정과 위기 탈출<BR> <BR>o 구조조정 - 5가지 시나리오<BR>구조조정이라는 개념이 누구의 입장에서 어떠한 시각으로 접근하는가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BR> <BR>첫째의 의미는 IMF가 요구하는 바, 보호주의적이고 규제 위주인 경제구조를 개방적이고 자유주의적인 구조로 바꾸어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정경유착의 표본인 재벌을 개혁하여 계열사간 상호지급보증을 폐지하고 내부거래를 금지하며 경영과 소유를 분리하라는 것이다. 나아가 부실금융기관을 정리하고 금융기관의 대출 행위를 철저히 시장경쟁 논리에 맡기며, 세계금융자본에게 활동의 자유를 확대하라고 한다. <BR> <BR>둘째의 의미는 노동집약적이고 저부가가치형의 경제구조를 자본집약적이고 고부가가치형의 경제구조로 전환하자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노동배제적 자동화나 정보화가 가속화되고 따라서 인간 노동력은 가차없는 합리화의 대상으로 전락하여 실업자나 임시직의 형태로 길거리로 내몰리고, 오로지 소수의 고급 기능인력만이 상대적으로 좋은 대접을 받게 되었다. <BR> <BR>셋째의 의미는 재벌이나 대기업들이 많이 쓰는 의미로, 경쟁력 있고 고이윤이 나오는 분야(핵심․주력업종)는 살리고, 반면에 경쟁력 없고 이윤이 낮은 분야(주변․한계업종)는 과감하게 정리한다는 뜻이다. <BR>아무리 기업들이 ‘고객만족 경영’을 외치고 다닌다하더라도 그것이 높은 이윤을 보장해 주지 못하는 한, 인간의 사회적 욕구를 충족하는 데 필요한 것을 만들어 공급한다는 이상적 목표는 ‘빛 좋은 개살구’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시장 경쟁을 통해서 사회적 자원의 효율적 배분과 삶의 질 향상을 도모하겠다는 발상은 현실화되기 어려운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BR> <BR>넷째는 일부 시민단체의 요구처럼 재벌 위주의 구조를 중소기업 위주의 구조로 바꾸자는 의미의 구조 조정이 있다. 이러한 구조 조정은 지금까지 재벌이 혈통과 친족을 매개로 경제적인 합리성이 아닌 전근대적 비합리성과 정경유착이라는 의혹 속에서 급성장을 해왔기 때문에 냉혹한 세계화의 물결을 헤치고 국제경쟁력을 획득하려면 과감한 재벌해체와 소유와 경영의 분리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시각에 바탕을 두고 있다. 나아가 대만이나 독일, 이탈리아 등의 경우에서와 같이, 중소기업체들이 그 고유의 유연성과 기술력을 바탕으로 충실하게 성장한 나라의 국제경쟁력이 강하다는 사실에 착안하여 우리나라도 그렇게 중소기업 위주의 경제구조로 전환해야만 국제경쟁력을 높일 수 있다는 입장에서 여러 시민단체들은 이런 식의 구조조정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일정 정도 합리적인 측면이 있긴 하지만 다음과 같은 점에서 한계를 가진다. 즉 이 입장은 중소기업도 경쟁력을 획득하고 자본을 축적하면 얼마든지 독점대자본으로 클 수 있어 재벌의 전철을 밟을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고, 다른 편으로는 이 시각도 세계시장과 국제경쟁력 강화의 틀 속에 갇혀 있기 때문에 부단히 사라지고 부단히 생기는 수많은 중소기업들 뒤에서 고통을 당하는 수많은 민중들의 삶은 별로 고려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BR> <BR>다섯째의 의미는 진정으로 일하는 사람들이 원하는 구조조정으로, 이것은 인간의 사회적 필요와 삶의 질 향상에 도움이 되는 경제 분야나 경영방식은 계속 살려 나가고 적극 장려하되, 그렇지 않은 것은 과감하게 잘라낸다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군수산업이나 공해산업, 사치품산업, 퇴폐․향락업, 열악한 노동환경을 강요하는 분야, 중복투자된 분야, 사람들의 민주적 의견에 반하는 투자 등은 과감하게 척결해야 하며, 인간적 필요를 충족시키고 삶의 질을 높이는 데 기여하는 분야는 적극적으로 촉진해야 한다. 그리고 경제과정이나 노동과정을 일하는 사람들의 소망과 욕구에 부합하도록 고쳐 나갈 수 있는 생산조직은 계속 살리고 그렇지 못한 조직은 과감하게 제거해야 한다(강수돌, 1999: 179-182).<BR> <BR>o 고용 위기 시대를 돌파할 정책 대안들<BR>첫째, 영미식 노동시장의 유연화 방식: 대개 정규직 대신 비정규직을 확대함으로써 인건비를 줄이고 노동통제를 용이하게 함으로써 경쟁력을 높여 마침내 신규 고용도 늘일 수 있다는 것<BR> <BR>둘째, 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일자리 나누기의 방법: 경제성장을 배경으로 하는 노동시간 단축은 효과적인 고용창출 수단이 된다. 그러나 주당 노동시간의 단계적 감소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독일 사회의 실업은 더욱 늘고 있는 실정이다. 그것은 다른 요인들, 즉 산업의 재편과 노동 과정의 합리화, 자본의 세계화 등이 노동시간 단축으로 인한 새 일자리 창출의 가능성을 사전에 삼켜버렸기 때문이다. <BR> <BR>셋째, 정부나 공공기관이 주도하여 이루어지는 공공 고용창출 정책: 1930년대의 미국이나 1960년대 이후의 유럽에서와 같이 정부나 공공기관 또는 여러 형태의 고용촉진회사가 여러 가지 일자리를 만들어, 실업자로 하여금 임시로 몇 개월, 일 년 내지 몇 년간이라도 일자리를 가지도록 촉진시키는 정책을 펼 수도 있다.<BR>특히 동독의 경우에는 오래된 공장이나 산업설비를 재정비하는 작업, 산림보호 작업, 벌목 작업, 박물관 관리 작업, 도시빈민이나 노약자 돌보는 일 등에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어 고용을 촉진하는 프로그램을 실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은 일시적 대책일 뿐 그 이후의 고용에 대해선 아무런 보장을 못해 준다.<BR> <BR>넷째, 여성의 노동력을 재평가하는 방법: 가사노동이나 어린이 돌보는 일 등 지금까지 아무런 사회적 인정을 받지 못하던 일을 법적으로나 조세의 측면에서 제대로 평가해 준다는 것이다. 이러한 가사노동이 ‘정상적인 서비스 직업’으로서 사회적 인정을 받게 되면 여성 실업자를 대폭 없앨 수 있다는 발상이다(독일 여성기업가연맹의 리자 헤어만이 제안). 이런 정책도 “여성을 가정으로 돌려보내려는 음모”라고 비난받고 있고, 또 실제로 이런 식으로 여성노동을 재평가한다고 하더라도, 과연 오늘날처럼 수백만 명의 실업자가 상존하는 고용 위기 시대에 효과적으로 실업을 줄일 수 있는지도 의문시되고 있는 형편이다(강수돌, 1999: 182-185).<BR> <BR>o 현실적 실업 대책들의 한계<BR>노동시장의 유연성 증대: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증대시키면 새로운 고용 창출이 이루어져서 결국에는 실업문제가 해소될 것이라는 논리. 해고의 역설<BR>파괴적인 효과를 수반하는 경제성장 자체도 문제이지만 경제가 성장하더라도 고용 증대가 이뤄지지 않는 시대가 오고 있다. 게다가 노동시장의 유연화는 스스로의 삶의 자율성을 잃고 시장과 기업의 상황에 완전히 묶이게 되는 상황을 초래하고 있어, ‘노동시장의 유연화는 노동자 삶의 경직화를 초래한다’는 말이 성립한다. <BR> <BR>현재의 대책들은 오로지 자본주의 기업들이 필요로 하는 기능과 기술, 돈이 되는 재주를 보유한 자들만 높이 평가하고 그 외의 사람들은 열등한 존재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어, 전반적으로 공동체적인 삶의 문화를 확대하기보다는 분열과 차별의 문화를 강화하고 있다(강수돌, 1999: 185-189).<BR> <BR>13. 독일 노동조합의 대응 전략: 고용 문제를 중심으로<BR> <BR>o 사실상 기업별로 수행해야 하는 과업들은 서로 다양하게 제시되고 있고, 나아가 성별, 직종별, 직위별 노동자들의 욕구 또한 서로 달라서 구체적으로 노동조건을 어떻게 통일적으로 만들어내는가 하는 작업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BR>독일 노총에서는 포괄적인 산별협약을 계속 체결하되, 이것이 개별 기업에서 실시되는 과정에서는 노동자들의 욕구나 업종별, 지역별, 기업별 특수성을 감안해서 신축적으로 적용하고 형성하자는 복안을 가지고 있다. <BR> <BR>세계화 시대에 기업경영의 유연성을 높일 뿐만 아니라 노동자들의 개별적인 노동시간의 선택권 및 시간주권도 높여주기 위해서, 산별 협약의 기초 위에서도 기업별로 다양하고 유연한 노동시간 제도를 도입하는 것도 배제하지 않는다.<BR> <BR>사실상 이 모든 것이 고용 창출이라는 미명 하에 노동자들의 희생을 통해 기업가들의 신규 투자 재원을 마련해 주었음에도, 기업가들은 ‘고용 없는 성장’을 추진하였고 결국 아무런 고용 창출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결국 독일노조는 앞으로도 계속 성장을 통한 고용창출의 전략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부의 재분배 전략을 선택할 것인가 하는 양자택일의 기로에 서 있다.<BR> <BR>고소득자로부터 저소득자로의 부의 재분배 정책을 적절히 실시하여 이 노사 양측의 부담 비중을 낮추게 된다면, 노동자뿐만 아니라 기업도 부담이 상당히 줄어들 것이고, 성장과 고용도 상당한 정도 촉진될 것이라는 것이 독일 노조의 시각이다(강수돌, 1999: 194-196).<BR> <BR>o 노동형성 전략 - 자율성과 숙련 향상, 노동 참여와 공동 형성<BR>독일 금속노조(IG Metall)는 1990년대 초 들어 “2000년대를 향한 단체협약 개혁안(Tarifreform) 2000"를 제출하고 이를 관철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21세기를 향한 미래의 산업노동이 어떤 식으로 재편되어야 독일 기업과 노동자들에게 바람직하게 형성될 수 있는가에 관해 일종의 지침서를 마련한 것이다. 이에 따르면 생산직과 사무직 사이에 통일된 임금체계를 마련하는 것, 노동자의 업무 내용을 다양하고 풍부하게 재조직하는 것, 자율적인 분위기가 주도하는 팀작업을 조직하는 것, 평생 계속되는 능력 개발 프로그램을 구축하는 것, 작업시간 중에 직업교육을 받게 하는 것, 과업량을 노동자의 의사와 능력을 고려해서 공동결정하는 것, 인력 배치와 인원 조정을 교섭하는 것, 작업장 의사결정 과정에 노동자의 참여를 보장하는 것, 모든 결정을 노사 동수의 위원회에서 실행하는 것, 노동과정을 적극적이고 민주적으로 형성하는 것, 여성 노동자와 미숙련 노동자를 위해 신분 상승과 승진 기회를 보다 많이 확보하는 것 등을 새로운 단체협약의 주요 내용으로 담아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구상에 깔린 기본적인 논리는 노동과정을 보다 민주적이고 인간적으로 형성함으로써 효율성과 생산성, 결국 경쟁력을 극대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BR>특히 독일 금속노조는 신기술의 도입과 적용, 노동의 조직과 통제, 산업안전과 환경보호, 직무분류 및 임금등급 조정, 개별 노동자 과업량의 결정, 인원 할당과 배치 전환, 노동자의 근무태도 조사나 노동생산성 조사 등과 같은 문제들에 있어서는 노동자평의회가 반드시 강제적인 공동결정권(erzwingbare Mitbestimmung, 노동자협의회의 동의 없이는 경영 측 단독으로 실행 불가)을 확보할 수 있도록 산별 단체협약에 못을 박아야 한다는 방침이다(강수돌, 1999: 201-202). <BR> <BR>o 독일 노조의 고용 보호 전략이 주는 교훈<BR>첫째, 독일 노조는 당면한 도전을 ‘위협’으로만 보지 않고 일종의 ‘기회’로 보고 있다. 사회생태적 구조 혁신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는 식의 사고 방식. 특히 노동시간 단축 운동과 사회생태적 구조혁신이 필요한 한국 사회에서는 이러한 발상의 전환이 시급히 필요하다고 본다. <BR> <BR>둘째, 독일 노조는 노동자 권익을 수호하고 발전시킴에 있어 사후적인 ‘보상’의 논리나 ‘보호’의 논리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전적인 ‘형성’의 논리까지도 관철시키고자 한다. 모든 사회경제적인 구상과 계획을 자본과 정권에 맡기고 노동 측은 생산성과 경쟁력을 위해 열심히 일을 할 터이니 대우만 잘해 달라는 식의 대응 논리는 노동자 권익 수호에 있어 한계가 많다는 것이다.<BR> <BR>셋째, 그러나 독일 노조는 세계화된 시장 경쟁 자체에는 반대하지 않는다. 이것은 세계시장을 둘러싼 무한경쟁 안에서도 지속적인 ‘하향평준화’ 경쟁보다는 ‘상향평준화’ 경쟁을 하자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인데, 이는 독일 노조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불행하게도 자본주의 시장 경쟁은 일단 누군가는 그 속에 참여하기만 하면 하향평준화로 달려가는 경향성을 지니고 있다.<BR> <BR>넷째, 독일 노조의 고용 보호 전략에는 ‘대안 사회’에 대한 전망이 부재하다. <BR>최소한 우리의 미래에 대한 설계도에는 대안 사회에 대한 밑그림이 나와야 한다. 아무리 서투른 건축가라도 노련한 꿀벌보다 나을 수 있는 것은, 이 건축가가 집을 짓기 전에 미리 어떤 집을 지을까 하는 구상을 머릿속에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고 누군가가 말하지 않았던가?(강수돌, 1999: 202-204) <BR> <BR>14. 한국판 트로이 목마와 재벌: 자본의 돌파구?<BR> <BR>o 통일에 대한 입장<BR>첫째, 휴전선의 긴장과 분단이 유지되는 상태에서 이뤄지는 남북한 생산요소의 재결합은 결코 바람직하지 못하다. 이러한 모습은 진정한 통일에 접근하기보다는 오히려 남북 분열을 강화하고 게다가 사회 분열까지도 심화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BR> <BR>둘째, 남북한 통일은, 축적의 위기를 돌파하기 위한 남한 자본과 북한 노동력의 결합이라는 형태가 아니라, 새로운 자율자치 공동체를 형성하기 위한 남북한 민중의 민주적 결합이라는 형태로 이루어져야 한다. 창의성과 자율성을 바탕으로 ‘아래로부터’ 진지하게 만들어나가는 ‘과정’이 중요하다.<BR> <BR>셋째, 남북통일은, 한반도 민족주의를 재강화하거나 세계시장에서 국가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이 되어서는 안되며, 오히려 겸허하게 기존의 사회경제 시스템을 내면적으로 성찰하고 공동체와 생태계의 생명령을 동시에 살려내기 위한 진지한 모색 과정이 되어야만 한다(강수돌, 1999: 214-215). <BR> <BR>o 기업의 사회적 책임(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BR>- 기업의 사회적 책임론이 제기되는 원론적 근거는 대개, 기업이 사회적 정당성을 확보하거나 되찾는다는 것이다. 즉 기업이 유기체로 존속하기 위해서는 내외의 이해관계자들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BR>그러나 현실은 기업이 저비용 고효율의 구조를 만들어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부단히 ‘비용을 사회화’한다. <BR> <BR>- “기업이 최대한의 이윤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윤리적 제약을 받게 되자 절충적으로 나온 대안이 기업이 사회적 책임론이고, 그것이 일정한 성공을 거두자 경영학의 일부로 편입된 것”이라고 솔직히 인정하는 편이 낫다(강수돌, 1999: 216-217).<BR> <BR>o 재벌의 지배구조의 다층적 의미<BR>첫째, 한국판 독점 자본인 재벌이 전 사회를 통째로 지배한다는 것이다. 모든 분야가 재벌의 몸 불리기 운동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나아가 재벌에 고용된 관리자와 노동자들조차도 그 재벌의 생존 논리, 지배 논리를 스스로 ‘내면화’해 왔다는 것이다. <BR> <BR>둘째, 재벌이 그 계열사나 하청회사 - 1차, 2차, 3차 하청 등의 수직적 위계 관계를 통해 중소 자본을 체계적으로 지배한다는 것이다. 재벌은 한편으로 스스로의 필요에 의해 일부 공정이나 조직을 따로 분리하여 하청계열사의 형태로 하위 편입시키고, 다른 편으로는 조직경계선 밖의 중소사업체나 특정 사업 영역이 돈이 될 것같이 보이면 즉각 재벌의 경계선 안으로 편입시켜 내었다.<BR>재벌의 지배 관계는 전 사회적으로 노동자의 위계적 편성을 초래하여, 규모별로, 또 하청 관계의 위상별로 노동자들의 존재 상태와 의식을 차별화, 분절화하는 데 기여하게 된다.<BR> <BR>셋째, 재벌 조직 내부의 지배구조와 관련해서는, 회장 중심주의, 경영권 세습주의, 내부 거래, 상호 지급 보증, 회계장부 조작 등이 지배관계를 유지, 재생산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 만큼 재벌 조직 내부의 지배관계는 불투명하고 독단적이며, 돈의 흐름이 부정하게 조작되었다(강수돌, 1999: 220-222). <BR> <BR>o 진정한 재벌 지배구조의 청산<BR>첫째, 여러 유형의 모든 일하는 사람들이 정치경제 등 모든 사회적 의사결정의 주체가 되어 진정한 풀뿌리 민주주의를 실현해야 한다. <FONT style="BACKGROUND-COLOR: #e4ff75">‘아래로부터의’ 강력한 힘이 토대로 자리잡지 못한 변화는 그 내용과 방향, 지속성에 있어 생명력을 갖기가 어렵다. 생명력이 있는 변화, 사회적 정당성이 있는 변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지금과 같이 이윤율, 경쟁력 중심의 구조조정이 아니라 ‘삶의 질 중심의 구조조정’을 해야 한다. 따라서 경쟁력이 아니라 ‘삶의 질’ 향상에 도움이 되는 기업과 경제 분야, 일자리는 살려나가거나 새로이 만들고, 그렇지 못한 것은 과감하게 척결해나가야 한다</FONT>.<BR> <BR>둘째, 생산조직과 생산조직 사이에 그 어떠한 지배관계나 위계질서가 있어서도 안된다. 건강한 생산조직들 사이에 수평적인 의사소통이 이루어지면서 상부상조하는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내어야 한다. 이때 민주적으로 선출되고 언제든지 소환될 수 있는 각 조직의 대변인들이 모여 전제적 과정을 ‘조정’하는 역할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BR> <BR>셋째, <FONT style="BACKGROUND-COLOR: #e4ff75">모든 생산조직은 내부 민주주의를 실현해야 한다. 노동자와 사용자가 따로 노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지 그 역할을 돌아가면서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민주적인 경력개발과 역할학습이 이루어져야 한다. 경영자는 지배자나 결정자가 아니라 조정자와 심부름꾼의 역할을 하여야 한다. 노동자도 작업 과정이나 경영 과정에 주체로 참여하여 투명하고 건강한 경영을 스스로 담당하고, 노동 생산물의 사회적 연관성 파악 및 자율적이고 책임성 있는 운영을 해나가야 한다. 계획의 입안과 실행이 철저하게 자율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모든 운영원리는 삶의 질 향상에 풀뿌리 민주주의의 실현, 그리고 창의성과 다양성, 자율성의 구현에 기초해야 할 것</FONT>이다(강수돌, 1999: 224-225). <BR> <BR>15. 과연 ‘제3의 길’은 있는가?<BR> <BR>o '제3의 길‘이 가능한 사회적 조건이 과연 우리 사회에 얼마나 성숙되어 있는가 하는 문제가 가장 중요한 핵심이다. 게다가 근본적으로 볼 때, 과연 ’제3의 길‘조차 우리 모두가 추구해야 할 바람직한 가치인가 하는 것도 되물어봐야 한다(강수돌, 1999: 227).<BR> <BR>o 제3의 길의 핵심(강수돌, 1999: 228-229)<BR>1) 자본주의의 길도 아니요, 사회주의의 길도 아닌 길이라는 뜻에서 제3의 길. 자본주의적 효율성의 강점과 사회주의적 평등성의 강점을 동시에 살려내자는 뜻에서의 제3의 길.<BR>이런 개념의 제3의 길은 ‘사회민주주의’와 크게 다르지 않으며, 기본적으로 자본주의 시스템(사적 소유, 시장 경쟁) 위에서 그 부작용(노동소외, 생태계 파괴, 빈부 격차)을 사회적으로 치유하자는 것이기 때문에, ‘수정 자본주의’로 불린다. <BR> <BR>2) 복지국가 자본주의 또는 구식 사회민주주의의 이념(자유, 정의, 연대 등 구좌파의 이념)을 신자유주의 또는 지구적 자본주의 시대에 걸맞게 변용시킨 것이라는 의미.<BR>세계화와 정보화의 구호로 표방되는 신자유주의적 글로벌 자본주의 시대에 기존의 사회민주주의적 지향성을 가진 세력들이 새롭게 변신함으로써 그 이념적, 정치적 돌파구를 찾아보고자 하는 것.<BR> <BR>3) 미국식의 시장자유주의와 유럽 대륙식의 복지국가주의를 창조적으로 상호작용시킨 결과로 나온 것<BR> <BR>o 제3의 길의 내용<BR>범세계화와 지역적 보전의 조화(세계주의적 민족, 세계적 민주주의), 범세계적 다원주의, 사회 정의 및 평등과 개인적 자유의 공존(통합으로서의 평등, 적극적 복지, 포용적 사회), 책임과 권리의 공존(책임 없이 권리 없다, 활발한 시민사회, 민주적 가족), 자율성으로서의 자유, 민주주의와 국가의 공존(민주주의 없이 권위 없다, 사회투자국가, 새로운 민주국가), 기술 변화에 대한 실용주의적 자세 등이 제3의 길이 내세우는 가치와 프로그램들이다.<BR> <BR>이에 대해 에릭 홉스봄은 근본적으로 “이미 끝장났음이 판명된 신자유주의”의 가정을 그대로 바탕에 깔고 있는 새 노동당의 ‘제3의 길’은 “결국 실패할 것”이라 경고하고 있다(가디언, 98. 10. 20)(강수돌, 1999: 229-230).<BR> <BR>o 제3의 길은 가능한가(강수돌, 1999: 230-231)<BR>이는 이론적, 논리적 측면에서 제3의 길이 과연 대안으로 성립 가능한가 하는 문제이고, 제3의 길 정치를 실천적으로 구현해낼 주체적인 역량의 문제이다. <BR> <BR>첫째, ‘제3의 길’이 이론적으로 일관성 있는 대안으로 성립될 수 있는 것인가? <BR>실업문제나 빈곤문제를 치유하기 위해 국가의 인적자원에 대한 투자를 강조하고, 노동자의 도덕적 해이를 예방하기 위해 국가에 의한 사회보장제도의 적극적 개혁을 촉구하고 있다. 이러한 점들은 제3의 길이 결코 시장과 국가라는 양축을 잇는 일차원적 공간을 지양해내는 진정한 ‘제3의 대안’이 아니라 시장과 국가를 적절히 조합함으로써 신자유주의에 ‘온건한 반론’을 제기, 엘리트가 중심이 되어 국가권력을 새롭게 장악하여 또다시 노동대중을 정치경제적 동원의 대상으로 삼으려는 정치전략이 아닌가 한다. <BR> <BR>둘째, 제3의 길을 실현할 주체는 있는가? <BR>의미상으로는 민주적인 국가와 활발한 시민사회를 그 주체(political agency)로 내세우고 있다. 거기엔 여전히 권력 엘리트가 주도권을 쥘 가능성이 은밀히 내재해 있다. 반면에 기든스는 전통적 사회민주주의 정당과 노동조합 사이의 동반 관계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을 하고 있지 않다. 이제 계급적․집단적 블록보다는 개인화도니 행위자들이 그에게는 더욱 중요한 고려사항이다. <BR> <BR>o ‘제3의 길’은 바람직한가(강수돌, 1999: 232-233) <BR>자본주의와 사회주의에 동시에 반기를 들면서 등장한 사회민주주의는 복지국가를 표방하면서 고전적인 ‘제3의 길’을 제시하였는데, 그것이 가능하게 된 것은 주체적 역량의 문제도 있었지만 물질적 토대의 문제가 해결되었기 때문이다. 즉 노동 계급과 자본가 계급이 모두 만족할 수 있을 정도로 나눠 먹을 파이가 충분히 컸다는 점인데, 바로 여기서 우리가 관심을 갖는 것은 파이의 크기(scale of pie)가 아니라, 그 파이의 원천(source of pie)이다.<BR> <BR>요컨대, 선진국의 노사가 대타협 속에서 나눠 먹었던 커다란 파이의 원천은 세 가지로 정리된다. 첫째, 선진 자본주의 내 자국 노동자들이 흘린 피와 땀과 눈물이다. 선진국에서는 고도의 기술혁신과 높은 생산력을 바탕으로 경쟁력 있고 부가가치가 높은 상품을 만들었다. 이것이 커다란 파이의 원천이 되었다. 둘째, 제3세계 노동 대중의 피와 땀과 눈물이다. 선진국 자본은 제3세계로부터 공업 원료나 농산물, 수산물, 임산물 등을 대량으로 가져가고 대신에 값비싼 기계와 기술, 자본, 제품과 서비스, 정보 등을 판매하였다. 이 과정에서 엄청난 부가 선진국으로 흘러들어갔다. 셋째, 선후진국을 가리지 않고 모든 노동자들의 묵인과 동참 아래 이뤄진 자연 생태계의 파괴이다. 산업화 내지 상품 생산과정에서 지구의 물과 공기, 흙과 숲 등이 커다란 파이의 원료로 동원되어 빨려 들어갔다. 그 결과 이제 생태계 위기가 인류의 생존을 극도로 위협하고 있다. <BR> <BR>사실이 이러하다면 과연 고전적 제3의 길은 오늘날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시대에 그 유효성을 고이 간직할 수 있을까? 대답은 단연코 ‘아니다’이다. 인간과 자연의 생명력을 파괴하면서까지 만든 파이를 배불리 먹는다는 발상 자체가 결코 바람직할 리 없다. 게다가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시대에 그러한 ‘파괴성’이 더욱 강화되고 있지 않은가? <BR> <BR>그러면 기든스가 말하는 현대적 ‘제3의 길’은 어떠한가. 생각건대, <FONT style="BACKGROUND-COLOR: #e4ff75">민주적으로 혁신된 사회투자 국가와 활발한 시민사회, 민주적인 가족, 창의적인 벤처기업, 능동적인 인적 자원, 효율적인 교육 제도, 범세계적 민주주의 지향성 등이 어우러진 현대적 제3의 길조차도, 인간노동에 대한 효과적 착취와 자연 자원에 대한 인간중심적 개발, 그리고 제국주의적 국제 사회 관계 등의 문제를 미해결의 과제로 남겨두고 있다. 아니 오히려 그러한 기반을 전제로 하고 있다. 물론 기든스의 제3의 길은 ‘지속가능한 개발’, ‘생태적 현대화’, ‘성찰적 현대화’의 문제를 적극 끌어안고 있다. 하지만 앞서 말한 과제들 - 착취성, 인간중심성, 제국주의적 관계성 등 - 이 미해결된 상태에서의 지속가능성이나 현대화란 여전히 노동 대중의 객체화, 대상화, 자연 생태계의 상품화를 초래하며, 이것은 동시에 자본 축적의 현대화, 자본 증식의 지속가능성 제고와 동전의 양면을 이룰 뿐</FONT>이다. <BR> <BR>o 한국에서 ‘제3의 길’이 갖는 의미(강수돌, 1999: 234-235)<BR>첫째, 이념적 억압성과 편협성이 매우 극심한 우리 사회에서 ‘제3의 길’ 논의는 그것 자체만으로도 이념적 지평을 확대할 수 있는 가능성이 크다.<BR> <BR>둘째, ‘제3의 길’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범지구적 자본주의라는 배경 위에서 거론되고 있기 때문에 예전에 비해 그 선택의 폭이 매우 제한되어 있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 ‘IMF 체제’가 강제하는 구조조정과 신자유주의적 프로그램들은 ‘제3의 길’을 가능하게 하기는커녕 오히려 무색하게 만들고 있다.<BR> <BR>셋째, 김대중 정부나 국민회의를 과연 노동당이나 사민당과 같은 유럽의 중도 좌파와 동일선상에서 사고할 수 있겠는가 하는 점이다. <BR> <BR>넷째, ‘제3의 길’은 은연중에 노사대타협을 전제로 하고 있는데, 그러한 타협이 가능하려면 노동자와 노동조합이 만족할 정도의 수입과 고용, 노동기본권, 경영참가권, 사회보장권 등이 보장되어야 한다. 나아가 여러 시민사회 영역의 발전과 각종 사회운동의 성숙이 필요하다. <BR> <BR>다섯째, 이러한 제약에도 불구하고 기든스의 제3의 길은 좌파와 우파의 이원론에 대한 문제 제기, 세계주의적 사고의 틀, 생태적 사고의 틀, 평등과 자유의 문제, 국가와 가족의 민주화, 자율적 개인과 공동체의 문제, 삶의 정치 등 여러 측면에서 우리 모두가 진보적 대안의 모색과정에서 심사숙고하고 적극 토론해야 할 중요한 화두를 던지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BR> <BR><STRONG>Ⅳ. 발상의 전환</STRONG><BR> <BR>16. 전환 1 - 패러다임의 전환<BR> <BR>o 총체적 사회혁신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패러다임 전환’이 일어나야 한다. 그 하나는 인간과 인간 사이에 더 이상 ‘경쟁과 분열’이 아니라 오히려 ‘연대와 협동’을 할 수 있는 경제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인간이 자연을 단지 개발과 이용의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오만과 남용’의 패러다임이 아니라, 인간이 자연의 일부로 태어나 그 품안에서 고맙게 살다가 조용히 그 속으로 돌아간다고 하는 ‘겸손과 외경’의 패러다임을 가져야 한다(강수돌, 1999: 239).<BR> <BR>o 대안적 구조조정 - 생산의 사회적 조정(강수돌, 1999: 241-242)<BR>경제와 경영, 사회, 문화 등에 대한 구조조정에 있어 올바른 기준은 경쟁력이 아니라 삶의 질이 되어야 한다. 즉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는 분야는 계속 살리고 그렇지 못한 분야는 과감하게 척결한다. 여기서 자율과 자치에 기반한 ‘생산의 사회적 조정’이라는 개념이 필요하다.<BR> <BR>첫째, 기존의 시장논리와 국가나 당의 엘리트에 의한 계획 논리라는 이분법을 지양하는 ‘자율의 논리’를 통해 삶의 문제 해결에 있어 수요와 공급의 양과 질을 민주적으로 논의, 조절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내는 것이 중요하다.<BR> <BR>둘째, 생산의 목표가 무정부적 생산성 향상이나 제살 깎아먹기 경쟁을 통한 이윤 추구가 아니라, 삶의 질 향상과 건전한 사회적 욕구의 충족에 이바지하도록 생산과 소비의 전 과정을 양적․질적 측면에서 혁신하는 것이 필요하다.<BR> <BR>셋째, 이러한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수단과 방법이 과잉 투자나 초과착취의 형태가 아니라, 사회-생태적으로 건강한 투자 및 노동의 인간화라는 형태를 취하도록 하는 것이어야 한다. 물론 이것은 ‘경쟁의 한계’에 대한 인식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BR> <BR>o 노동자의 정치세력화<BR>첫째, 정치적인 것과 경제적인 것을 분리해서 보지 말자. 인간 사회에서 정치적인 것과 경제적인 것은 거의 통일적으로 연관되어 있거나 함께 움직인다. 생산, 분배, 소비 등 모든 경제과정의 뒷면에는 중대한 의사결정을 내리는 주체들의 이해관계가 얽히고설켜 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겪고 있는 사회경제적 변화 과정들도 결국은 이러한 이해당사자들 사이의 권력작용의 한 산물로서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사회경제적 변화과정들은 거꾸로 정치적 의사결정 주체들이나 그 상호간의 관계에 일정하게 긍․부정적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때문에 이해당사자들은 이러한 사회경제적 변화 과정 자체를 자신의 이해관계에 부합하도록 이끌고 가려는 노력을 서로 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싸움도 일어나게 된다. <BR> <BR>둘째, 철저하게 살아 있는 운동은 그 자체로서 가장 올바른 정치세력화라고 본다. <BR>만일 살아 있는 운동이 강하다면 그 자체로서 정치경제적, 사회문화적 의사결정 과정을 일하는 사람들이 주도할 수 있기 때문에 굳이 그 대변인 조직이 필요없다. <BR>현장에 밀착된 운동이 별로 강하지 못한 상태에서 정당 건설을 위주로 하는 ‘정치세력화’가 문제되면서 오히려 운동과 조직이 분리되고, 그러면서 운동도 약해지고 정당도 제 구실을 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BR> <BR>노동운동이든 생태계운동이든 현장에 기반한 살아 있는 운동을 더욱 철저하게 갈고 닦아 나가는 것만이 진정한 정치세력화이지, 그나마 불타오르는 운동을 모방하는 형태로 끌고 가려 하게 된다면 역설적이게도 사람과 운동 모두를 놓치게 된다. <BR> <BR>반드시 산별 ‘조직체’가 구축되어야 현장 운동이 강해지는 것은 아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좁은 범위의 기업별 울타리를 뛰어넘어 통일과 연대의 틀을 지속적으로 확장해 나가는 ‘운동과정’이다. <BR> <BR>서구의 경험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비록 노동자 정당들이 그 강령에서는 자본주의의 극복이라는 근본적 문제 제기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나중에 현장 운동과 서서히 분리되어 가면서 결국 쟁취한 성과물은 ‘자본주의’ 자체의 극복이 아니라 초기 자본주의의 열악한 ‘노동조건’을 극복한 정도에 불과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BR> <BR>가장 올바른 조직이란 살아 움직이는 운동 그 자체가 조직이고 정치인 그런 것이지, 정당이나 정부, 산별노조 등으로 대표되는 굳어진 조직체와 그를 이끄는 지도자, 그리고 그에 따르는 많은 대중적 구성원 따위를 가리킨다고 보아서는 곤란한 것이다.<BR> <BR>힘있는 운동이 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살아 움직이는 연대 활동이 필요하다. 현장의 구체적인 문제에 기초하면서도 결코 좁은 범위에서만 간단히 또는 임기응변적으로 해결하려는 것이 아니라 전체 기업이나 산업, 전체 사회와의 관련성 속에서 문제제기하고 해결하고자 하는 노력이 중요한 것이다. <BR>다른 하나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대안을 연구하고 개발하는 것이다(강수돌, 1999: 243-247). <BR> <BR>o 참여와 협력의 시대, 노사 관계의 민주화?<BR>- 우리 삶의 사회적 과정을 주체적으로 형성하는 데에 우리 모두가 능동적으로 ‘참여’한다는 것은 지극히 올바른 자세다. 그런데 주의할 것이 있다. 많은 경우에 ‘참여’ 그 자체에만 현혹이 되어, 과연 ‘무엇’을 위해 ‘어떠한’ 원칙으로 참여할 것인가에 대해 진지한 논의가 이뤄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논의조차 우리가 현실사회의 성격이나 구조를 어떻게 바라보는가, 또는 참여를 요구하는 상황적 맥락이 어떠한가에 따라 방향이 많이 다를 것이다(강수돌, 1999: 248-249).<BR> <BR>- 노사관계가 올바르게 개혁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노사관계의 ‘민주화’라기보다는 노사관계 자체의 ‘지양’이다. 즉 노사가 구분이 없어야 하고, 따라서 지배와 ‘종업원’ 관계 자체가 신뢰와 협동관계로 근본적으로 혁신되어야 한다. 이러한 근본적 전환을 위해서는 몇 가지의 기본적 원칙에 ‘사회적 합의’가 이뤄져야 할 것이다.<BR> <BR>첫째는 공유공생의 원칙이다. 노사가 따로 존재하지 않기 위해서는 땅이나 기계, 건물, 원료 등 여러 생산수단을 사회 구성원 모두가 공유해야 할 뿐 아니라, 지식과 정보가 특정 집단에 의해 독점되는 것을 방지하고, 생산의 결과물도 공유해야 한다. 그리고 인간 상호간의 복잡다단한 감정이나 다종다양한 의견, 생각과 지혜 등을 허심탄회하게 나누어 가짐으로써 주체적인 상호작용을 더욱 활발히 해야 할 것이다.<BR> <BR>둘째는 자율자치의 원칙이다. 사회경제적 삶의 형식과 내용, 과정을 우리 스스로가 결정해야 한다. 사회의 주인을 생산자로 본다면 이 생산자들이 생산․분배․소비의 내용과 형식, 생산․소비 과정의 여러 의사결정을 스스로 주관해야 한다. 외적인 힘에 빼앗긴 ‘내적 자율성’을 되찾고 스스로 단련시켜 나가야 한다. 나아가 이는 그 과정과 결과에 대한 책임도 동시에 떠맡는 것을 뜻한다. 또한 이는 엘리트 중심주의적 대중관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을 뜻하기도 한다. 더디 가더라도 대중이 주체로 서도록 뒷바라지를 해가면서 함께 생각하고 함께 나아가는 것이야말로 여태껏 빼앗긴 자율성을 되찾고 진정한 삶의 주체로 설 수 있는 길이다.<BR> <BR>셋째는 인간존중의 원칙이다. 노동자는 더 이상 관리와 통제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생산과 소비, 분배를 스스로 주관하는 자로 바뀜으로써, 사용자는 더 이상 노동력과 생산수단을 독점적으로 지배하는 주체로서가 아니라 스스로 생산자가 됨으로써 모두 참다운 인간이 될 수 있다. <BR>내가 다른 사람의 내면 세계로 들어가 그 사람의 의견, 느낌과 감정상태에 젖어 드는 것(Empathy), 易地思之, 이것이야말로 인간이 진실로 서로를 존중할 수 있는 주체적 조건이다.<BR> <BR>넷째는 생태조화의 원칙이다. ‘환경’이란 ‘Um-Welt’라고 하는데, 이는 나(인간)를 중심에 놓고 볼 때, ‘나(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라는 뜻이다. 이런 관점은 나(우리)와 환경을 분리하여, 나는 주체이고 자연환경은 객체로 된다. 따라서 자연환경은 인간에 의한 지배와 이용, 개발과 돈벌이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만다. 반면에 ‘생태계’(Ecology)란 어원적으로, 집을 뜻하는 ‘Oikos’와, 논리를 뜻하는 ‘Logos’의 합성어로, 전체적으로는 ‘집의 논리’이다. <BR>우리 인간은 큰 자연의 일부가 되고, 또 거꾸로 우리 인간 내면에 들어 있는 본성, 즉 내적 자율성, 삶의 활기, 생명력은 바로 작은 자연을 이루고 있는 셈이 된다. 자연과 인간은 둘다 ‘삶의 주체’인 것이다. 자연을 이런 눈으로 보게 되면, 발에 걸리는 돌부리 하나에도 생명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게 되며, 우리가 다니는 길도 우리가 공유해야 하는 큰 집의 일부로 볼 수 있게 된다(강수돌, 1999: 250-253). <BR> <BR>o 사회적 참여의 수준<BR>첫째, ‘위로부터’ 구상되고 제시된 정책을 단순히 실행만 하기 위한 참가는 바람직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가장 기본적인 문제, 즉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계획과 구상을 세우는 문제에 있어 주체적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구상참가를 전제로 한 실행참가’여야 한다. <BR> <BR>둘째, 노동조합은 기본적으로 품을 팔아야 하는 노동자들이 서로 자신의 품을 경쟁적으로 값싸게, 함부로 팔지 않기 위하여 스스로 만들어낸 연대의 틀이다. 인간다운 대접을 받기 위해서는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을 만들어야 가능하다. <BR> <BR>셋째, 노조가 모든 일하는 사람들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을 만들어내고자 한다면, 사실상 위의 선진국형 노동조건 추구보다도 한 걸음 더 나아가야만 한다. 경기변동과는 무관하게 노조는 자신의 내포와 외연을 부단히 확장해야 한다. <BR> <BR>노조활동의 내포를 확장한다는 것은 노조나 노동자가 열심히 일한 데 대한 대가를 찾는다는 ‘보상’의 논리나, 건강보호, 고용 안정과 같은 ‘보호’의 논리에만 머물 것이 아니라, ‘주어진’ 사회를 ‘주어진’ 그대로 받아들이지 말고, 진정으로 민주적이고 생태적으로 새롭게 ‘형성’하는 논리로 나아가야 한다는 말이다. <BR>반면에 노조활동의 외연을 확장한다는 말은 노조나 노동자가 노동조건의 개선에만 목숨을 걸고 매달릴 것이 아니라, 노동조건 개선에만 목숨을 걸고 매달릴 것이 아니라, 노동조건을 포함한 총체적인 삶의 조건을 개선하는 데로 영역을 확대해야 한다는 뜻이다(강수돌, 1999: 254-255). <BR> <BR>o 대안이 없다?<BR>흔히 “대안이 없다”(There is no alternative, TINA)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 말은 1980년대에 영국의 대처 수상이 노동자와 지식인의 저항에 맞서서 자신의 신보수주의적, 신자유주의적 자본 자유화 전략을 관철시키기 위해 내세운 이념적 공격에 지나지 않는다. 문제를 이렇게 제대로 보게 된다면 우리는 이제라도 과감하게 “대안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BR> <BR>그렇다면 도대체 진정한 대안은 어디에 있을까? 진정한 대안은 무엇보다도 경제운용의 ‘원리’ 자체를 바꾸는 데서 출발한다. 한마디로 ‘발상의 전환’에 바탕하여 ‘패러다임의 전환’을 모색하는 ‘과정’ 속에 대안이 있는 것이다. <BR> <BR>첫째, ‘경제’란 사람들이 먹고 사는 것이다. 그렇다면 ‘경제 위기’란 수익성의 위기나 외환 위기 이전에 ‘삶의 위기’로 재규정되어야 한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고민하는 토론 내용들이나 새 정부의 경제 과제 속에는 이러한 원칙적 입장이 드러나지 않을 뿐 아니라, 이러한 문제의식을 중심으로 다른 과제들을 묶어세우는 내적 일관성도 결여되어 있다.<BR> <BR>둘째, 일하는 사람들이 하루하루를 신바람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미래에 대한 비전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비록 오늘은 힘들어도 다음달이나 내년이면 좀더 나은 생활이 가능하다는 기대를 가질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새 경제 과제 속에는 비록 노동자들이 고통 분담, 아니면 심하게 고통 전담을 하더라도 결코 모두가 골고루 잘 사는 밝은 내일이 올 것이라는 전망이 보이지 않는다. 오로지 ‘갈수록 힘들어지겠구나’ 하는 암담한 전망만 예견된다면 참여와 협력보다는 거부와 저항이 더 많이 나타날 것이다. <BR> <BR>셋째, 범지구적 시장 경쟁의 물결을 강요하는 세계화와 경쟁의 ‘한계’에 대한 문제의식을 모두가 공유해야 한다. ‘경쟁의 한계’는 결국 지구촌 차원에서 소수의 승리자와 다수의 패배자로 분열되는 과정일 뿐만 아니라, 경쟁력 강화를 위한 ‘생산성’ 증대 과정이 불행히도 건강과 인격, 공동체와 생태계 등 삶의 질에 대한 ‘파괴성’의 증대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 핵심 문제이다. <BR> <BR>넷째, 이러한 기본 인식을 바탕으로 크게 두 가지 측면의 패러다임 전환이 일어나야 한다. 그 하나는 인간과 인간 사이에 더 이상 '경쟁과 분열'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연대와 협력을 할 수 있는 경제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인간이 자연을 단지 개발과 이용의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오만과 남용’의 패러다임이 아니라 인간이 자연의 일부로 태어나 그 품안에서 고맙게 살다가 자연스럽게 그 속으로 돌아간다고 하는 '겸손과 외경'의 패러다임을 가져야 한다(강수돌, 1999: 257-258). <BR> <BR>17. 전환 2 - 삶의 질 향상과 노동시간 단축<BR> <BR>o 20년의 시간이 미래의 삼사십 년을 위한 투자의 시간으로 설정되는 순간부터 우리의 삶은 이미 처음부터 심각하게 왜곡된다. 그것은 이 시간들이 창의적이고 자율적인 삶 그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 ‘양질의 노동력’을 생산해내기 위한 사회적 공장의 가동시간으로 변질된다는 것이다(강수돌, 1999: 262).<BR> <BR>o 그 동안 여러 유형의 노동현장에서 기계화니 자동화니, 컴퓨터화니 하면서, 또 공정개선이니 하면서 온갖 지혜와 실력을 모아 이룩한 생산성 향상의 성과들은 과연 어디로 사라지고 노동시간은 왜 이렇게 여전히 길 수밖에 없는가? 상식적으로, 생산성이 오르면 그만큼 삶의 여유가 많아져야 하는 것 아닌가.<BR> <BR>사람들이 전혀 여유가 없는 채 노동생활만 강요받게 된다면, 그리하여 장시간노동과 고강도 노동을 수십 년씩 하게 된다면 진정한 사회의 효율이나 삶의 질 향상은 결코 기대하기 어렵다. 사람들이 가진 주체적 생명력, 창의성과 자율성, 삶의 활력 따위야말로 사회의 진정한 발전과 삶의 질 향상을 위한 근본 동력인데도, 바로 이러한 것들이 수십 년 동안의 직장생활과 노동생활에서 체계적으로 소진되기 때문이다(강수돌, 1999: 265).<BR> <BR>o 노동시간이란 결코 우리 삶의 양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질적인 문제도 함께 가지고 있으며, 노동시간 단축이란 결코 열심히 일한 데 대한 보상의 차원으로 거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새롭게 형성(re-shaping)한다는 차원에서 절박한 심정으로 이루어내야 하는 것이다(강수돌, 1999: 265-266).<BR> <BR>o 일하는 시간과 인생을 즐기는 시간을 우리의 시간표에서 주중과 주말 또는 직장생활과 정년 이후 생활 등으로 분리하여 진정한 삶의 시간을 자꾸 뒤로 ‘유보’할 것이 아니라, 일상적 노동생활의 하루하루를 ‘일하는 동시에 삶을 음미하며 사는’ 것으로 ‘재구성’해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노동시간 단축운동의 필요성<BR> <BR>1) 건강과 생명의 수호 - 과로사 및 산재, 직업병의 예방을 통한 노동생활의 인간화를 위해서이다. 노동력의 지출이란 노동자 입장에서는 자신의 생명력을 지출하는 것이다.<BR>사회 전체의 분위기가 강력하게 요구하지 않는 한, 개별 기업들은 결코 노동자의 건강이나 수명을 고려하지 않는다. 그리고 무한한 생산력의 발전이 결코 저절로 삶의 자유와 해방을 안겨다주는 것은 아니다.<BR> <BR>2) 대량 실업에 대한 대안으로서 사회적 연대를 강화시키는 의미를 지니는 일자리 나누기 차원에서도 필요하다.<BR> <BR>3) 지적 발달이나 사회적․문화적․정치적 활동 증대를 통한 일상생활의 풍부화를 위해서도 요구된다. 노동시간의 단축과 여가시간의 확대는 다음 단계의 노동을 위한 휴식과 노동력 재생산의 의미를 뛰어넘는 것이다. 즉 자신과 그 가족의 삶의 내용을 풍부화, 다양화, 고차원화시킬 계기가 되기도 한다. 또한 여가시간의 확대는 지적․사회적 발달과 문화적․정치적 활동의 증대 가능성으로 연결되어 우리 모두의 삶을 풍요롭고 다양하게 할 수 있다(강수돌, 1999: 265-269). <BR> <BR>o 우리는 지배자들에 의한 ‘경쟁력 중심의 구조조정’에 맞서, ‘삶의 질 중심의 구조조정’을 대안으로 제시한다.<BR>첫째, 고용위기의 해소는 실업보험이나 일자리 소개와 같은 사후 대책이 아니라 새 일자리 만들기나 노동시간 단축 등 사전 대책을 통해 이루어낸다. 특히 ‘하루 4시간’ 정도로의 과감한 노동시간 단축은 모두가 일자리를 고루 나누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모두가 삶의 여유를 되찾아 보다 수준높은 생활을 하기 위한 필수조건이다. 이것이 가능해지려면 대도시의 분산화 정책과 풀뿌리 민주주의 차원의 주민자치제가 힘차게 추진되어야 한다.<BR> <BR>둘째, 노동시간 단축과 더불어 어느 정도 명목임금 수입의 감소가 불가피하다면 이를 두려워하지 말자. 가장 돈이 많이 드는 주택, 육아 및 교육, 의료제도만이라도 바꾸어 임금 지출 부분을 더 크게 줄이면 될 것이다. 그래서 실질 임금은 오히려 늘도록 만들자. 따라서 주거공개념, 육아 및 교육공개념, 그리고 의료공개념 따위를 도입하여 삶의 문제들을 더 이상 개인만이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적으로 해결하도록 해야 한다.그 재원은 정부 지출의 20%에 이르는 방위예산의 축소, 탈세 또는 누세 포착, 고소득자에 대한 상후하박식 직접세 추진, 비자금이나 뇌물 등의 생산적 전환, 정부 투자재원의 지혜로운 활용 등이 될 수 있다. 동시에 더 이상 중앙집권국가가 아니라 지방자치체를 올바로 개혁하여 방방곡곡에 자율적이고 생태적인 공동체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BR> <BR>셋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일의 내용’이다. 과연 일의 내용이 사회적 필요 충족이나 삶의 질 향상에 도움이 되는지, 아닌지 지혜롭게 따져봐야 한다. 그래서 그에 도움 되는 것이면 더욱 장려하고 그렇지 않으면 하나씩 척결해야 한다. <BR>우리 모두의 건강과 인격의 발전, 그리고 공동체나 생태계의 건전한 발전에 도움이 되는 경영․경제분야는 계속 살려나가고, 그렇지 못하면 과감하게 줄여나가야 한다. 특히 먹거리와 관계된 1차 산업이 건강하고 탄탄하게 중심을 잡고, 2차 산업이나 3차 산업은 삶의 질 향상 차원에서 보완적으로 발전되어야 할 것이다(강수돌, 1999: 271-272).<BR> <BR>18. 전환 3 - 희망 만들기<BR> <BR>o 현재까지의 경제와 경영 방식, 삶의 방식 아래에 깔린 근본 ‘원리’ 자체를 바꾸지 않고서는 현재의 경제 위기, 즉 삶의 위기를 극복할 수 없다. 만일 경쟁 관계와 지배 관계에 기초한 경제 방식을 그대로 고집하면서 ‘과거의 번영’을 재현하려는 식으로 위기를 극복하고자 한다면, 불행하게도 삶의 위기가 재현되거나 갈수록 강화될 뿐이다. 나아가 우리의 경쟁력 회복은 다른 이들의 불행과 삶의 위기를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 경쟁과 분열, 지배와 종속에 기초한 경제 방식을 고수해서는 안 되겠다는 자기 성찰과 결심이 있어야겠다. <BR> <BR>다른 한편, 보다 훌륭한 철학과 신념을 가진 국가나 당의 지도력 아래 ‘민족 경제’를 계획적으로 재편하면 시장 경쟁이 가지는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지 않겠느냐는 주장도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도 현실 사회주의나 복지 자본주의, 개발 독재 등에서 보았듯이 문제가 크다. 하나는 아무리 훌륭한 국가나 당이 ‘민주집중제’라는 원칙을 내세우더라도 계획과 명령을 통해 새로운 지배 관계가 재생산될 것이라는 점이다. 관료주의, 엘리트주의, 조직보신주의 속에서 민중과 지도부가 유리되는 경험들을 상기해보면 - 이러한 경향성은 노동조합에서도 발견된다 - 이 문제는 보다 명확해진다. 둘째는 다양하고 복잡한 민중의 사회적 요구를 어떻게 소수의 지도부가 계획을 통해 ‘대변’할 수 있겠는가 하는 점이다. 이것은 기술적으로도 불가능하고 정치적으로도 바람직하지 못하다. <BR> <BR>따라서 진정한 대안은 오히려 특정의 단일한 대안적 프로젝트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민초’의 모든 자율권을 확고히 보장하는 데에 있을 것이다. 국가가 할 수 있다면 스스로 이러한 정도의 역할만을 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조차 민초들의 연대에 의해서만 가능하게 되겠지만..... 여기서 우리는 단일하고 통일된 마스터플랜 - 이것은 결코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 - 은 내세우지 못할지라도 무수한 대안들을 가능하게 하는 ‘원칙’에 대해서는 타협 없는 단호함과 엄숙함이 필요하다고 본다. 따라서 자본의 지배와 종속, 착취와 억압에 대해서는 우리 모두가 “하나의 NO!”를 외치되, 그 대안에 대해서는 겸손하게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 놓은 “수많은 YES!”를 외쳐야 할 것 같다(강수돌, 1999: 273-274). <BR> <BR>o 그러면 민초들은 어떤 식으로 자율권을 행사할 것인가. 첫째, 경제 즉 살림살이의 단위를 가능하면 분산하고 분권화시키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그래서 직접 민주주의가 가능하도록 해야 한다. 최소한 직접 민주주의에 수렴하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지만 재벌을 비롯한 자본의 지배와 제국주의적 사회관계 전반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다. 둘째, 그러한 살림살이 단위들이 민초들의 자발적 선택에 의해 참으로 다양하고 창의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철저히 보장되는 열린 관계가 되어야 한다. 자신들이 어울려 살고 싶은 사람들을 스스로 선택하고, 또 살아가는 방식들조차도 스스로 선택해서 개성 있고 책임성 있게 살림살이를 영위하도록 해야 된다. 그러한 것에 반대하는 세력이 있다면 맞서 싸울 수밖에 없다. 셋째, 지금처럼 범지구화된 자본 관계가 강제하는 경쟁과 분열, 지배와 억압을 그대로 둔 채 우리 하나만 뒤바뀐다고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이러한 ‘작은’ 원리의 큰 변화를 범지구적 연대를 통해 세계화해야 한다. 따라서 민초들에 의한 ‘아래로부터의’ 연대가 필수 조건인 것이다. 민초들의 조직적, 정신적 연대가 강화되는 만큼 그에 비례해서 우리가 원하는 자율적이고 창의적인 경제 혁신, 따라서 삶의 혁신 - ‘삶의 질 중심의 구조조정’도 그만큼 생명력을 강하게 띠면서 발전하게 될 것이 분명하다. 그리하여 “썩은 손톱의 아래 쪽에서 새 손톱이 자라나 마침내 썩은 손톱을 밀어내는” 그러한 변화가 와야만 한다(강수돌, 1999: 275).<br /></div><div class="buttons-bottom right jinboblog-i-like-this-buttons"><a class="button-jinboblog" href="javascript:void(0);" title="스크랩으로 글 링크를 저장하세요" onclick="recommend('308',379,'/gimche','');"><im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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