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길로 돌아가자"
의문표가 없는 의지의 각 잡음
창조적 삶이 아닌 모방적 삶일수 있다.
대륙의 정신적 지도자도
옥중의 혁명시인도
사회주의 노동자 시인도
"스님의 수행의 실천의 禪行"도
그때는 창조적 의지의 삶이 분명한 길이었다.
그러나 지금
"희망이 다른 누군가의 절망이 되고 있다면"
여기서 오늘,역사의 사회구성원으로서 나?
절망은 앵무새와 같음이 부정에+부정이 긍정의 법칙을 장악할뿐 둘다 "다른 이름으로 불러야 한다(희망을 찾아야 한다)"
"생명의 길"은 순리에 따라서 인간과 자연의 인류적인 존엄함의 行이어야 한다.
옥중의 혁명시인이 족쇄의 탄압으로 부터 역사의 진실을 놓지 않는 저항의 힘이 시이다.
생명의 길에서 스님의 깨달음은 모두를 위한 희망이었다.
그 절절함에서 분명하게 길은 있었다.
禪이란 "佛의 종단에서 내리는 僧적의 증표"는 아니다
성찰없는 저항은 탄압과 저항의 힘의비례 일뿐
절망은 생명의 학살을 막을수 없다는그저 대치의 불행일 뿐이다.
사람이 또 죽는다면
물고기와 그 생물들의 생명의 공생도 물의 흐름도 여강이 될수 없는 '저항의 표류'라면.....
길이란 깨달음을 실행하는 것이다.
祖史禪의 僧標가 종교적 권력이라면
생명을 살리는 생태의 저항이 되지 못하는 저항이 권력으로 군림 한다면
그야말로 모든이의 희망을 살리기 위해
생명의 길을 트기위해 창조적 길을 가는 것이다.
모든것을 내려놓고 그야말로 역사의 화두를 던지며
(이것이 살아있는 조사선이며,또한 지금 사회변혁의 저항의 태도이다)
박물관에서는 깨달음은 가져 오지만
돌조각 하나라도 가져와서 모시지 말자.박물관에서 메모해온 것은 이내 불태워 버려야 한다.
그래야 87년을 넘어서는 촛불의 한계를 넘어서는
또다른 역사의 함성이 길을 만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