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사정위에 대하여

2005/02/12 06:25

아래 글 중 하나는 손석춘 님의 글은 2004년 8월말에 쓴 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사회적 교섭이 왜 문제인지, 노사정 대타협을 운운하는 것이 왜 위선인지를 잘 지적하고 있다. 대타협을 할만한, 사회적 교섭에 임할만한 조건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그런데 왜 민주노총 지도부는 공약을 들먹거리며 사회적 교섭을 운운하는가.

 

두번째 기사에서 언급되는 글들은 읽어볼 만할 듯하다. "여전히 지속되는 국가의 노동배제 전략이 전환되지 않는 한 노사정위는 ‘참여와 협력’의 기제가 아닌 ‘이데올로기 통제장치’ 구실을 할 뿐"이라는 노중기 교수의 글이나, "조직노동자의 대표성 확보를 통한 사회통합은 정규직 노동자의 특권화를 통한 대다수 비조직 노동의 배제와 경쟁 등으로 대표되는 보수적 사회통합 논리에 활용될 가능성이 매우 높"고, "조직노동자만이 참여하는 노사정위는 또 다른 배제를 낳을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기존의 틀로는 노동계 전체의 문제를 담아낼 수 없다"고 파악하는 김원 연구원의 글도 의미가 있다.



‘노사정 대타협’의 위선

한겨레신문 아침햇발 편집 2004.08.30(월) 18:52

         

가물가물하다. 권력과 손잡은 ‘먹물’을 우리 무엇이라 불렀던가. 그 이름을 다시 새긴다. 어용지식인. 박정희·전두환·노태우에 부닐던 어용지식인은 늘 넘쳐났다. 언론인·문인·교수들이었다.

                    

권력의 성격이 바뀌면서 ‘어용’이란 말은 시나브로 사라졌다. ‘어용’보다 ‘참여’가 온당하게 들렸다. 딴은 갈고닦은 지성을 현실화한다면 ‘보국’ 아닌가. 잘못된 현실을 바꾸기란 어쩌면 권장할 미덕일지 모른다.

            

김대중을 거쳐 노무현 정권이 들어선 뒤 지식인의 참여는 여느 때보다 왕성하다. 먹물만이 아니다. ‘운동가’까지 곳곳에 포진했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다. 대통령에 오른 두 김씨 또한 ‘민주인사’ 아니었던가. 그들보다 기여는 적지만 ‘인권 변호사’ 노무현도 대통령에 앉았다.

             

문제는 그들 모두 권력을 쥔 뒤다. 현실을 지청구로 군부독재자를 어금지금 닮아간다. 노동문제에 이르러선 한결 두드러진다. 국제 사회에서 손가락질 받는 악법을 근거로 살천스레 “불법 엄단” 으름장이다. 권력을 만끽하는 풍경이다.

              

본디 권력을 잡겠다고 나선 정치인들은 그렇다고 접자.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정치인도 아닌 이들이다. 누구인가. 김대환. 현직 노동부 장관이다. 경제학 교수인 그는 학식과 성품 두루 높이 평가받아 온 학자였다. 부조리한 사회현실에 모르쇠하지도 않았다. 참여했고 발언했다. 노 당선자 시절 ‘정권 인수위’에 들어간 그가 조각에 빠졌을 때 아쉬움마저 느꼈다. 현직 노사정위원장에 눈길이 가면 더 허전해진다. 김금수. 그 이름 석자는 현재 대다수 노동운동가의 가슴에 깊숙이 박혀있다. 부자신문의 표현을 빌리면 ‘노동운동의 대부’다. 그의 영향과 감화로 노동운동에 뛰어든 젊은이들도 적지 않다.

            

하지만 생게망게한 일이다. 노동정책은 그대로 아닌가. 여전히 불법을 내세워 엄단한다. 정책결정에 노동자를 따돌리는 구태도 달라지지 않았다. 가령 ‘노사정 대타협’만 보더라도 그렇다. 이른바 ‘대타협’에서 노동자는 더 잃을 것밖에 없지 않은가. 금융노련의 한 간부는 분노를 삭이며 물었다. “무엇으로 우리가 조합원에게 타협을 설득할 수 있단 말인가.” 차분히 톺아볼 일이다. 실제로 그러하지 않은가. 악법으로 노동자를 곰비임비 구속하면서, 대타협을 윽박지르기란 위선 아닌가. 올해 초 노사정의 ‘일자리 사회협약’을 되돌아보자. 선언으로 끝나지 않았던가. 그 선언에 나선 김 위원장의 모습은 차라리 민망스러웠다.

          

물론, 오늘의 노동현실을 모두 권력 탓으로만 돌릴 일은 아니다. 일차적 책임은 응당 지난 10여년 노동운동을 이끌어온 ‘지도부’에 물어야 할지 모른다. 지도부에만 싸움을 맡기거나 뒤에서 ‘평론’만 일삼는 이들 또한 그 ‘문책’에서 자유롭지 못할 터이다.

           

하지만 그 자성이 문제의 본질마저 흐릴 수는 없다. 보라. 이 땅의 자본가들을. 조금도 양보하지 않으려는 저들의 완고함이야말로 노사관계를 무장 악화시키는 주범 아닌가. 더구나 그들의 논리를 세련되게 포장해 날마다 수백만부씩 뿌리는 공범이 있지 않은가. 부자신문만이 아니다. 방송 3사도 노동운동에 결코 ‘중립’이 아니다. 비단 언론에 그치는 것도 아니다. 자본의 권력에 부닐며 떡고물 챙기는 어용교수·어용문필가 따위는 얼마나 널려 있는가.

            

그래서다. 언죽번죽 ‘노동귀족’을 들먹이는 대통령이나 ‘불법 엄단’을 앵무새처럼 부르대는 국무총리에게도 ‘언론의 자유’를 한껏 주자. 다만 김금수 위원장과 김대환 장관에게는 그럴 수 없다. 믿음 때문이다. 노동운동만 지지하라는 뜻은 아니다. 다만 최소한의 일은 해야 옳지 않은가.

          

정부·여당과 한나라당이 ‘합창’하는 대타협이 허울만 타협이지 노동운동을 겨냥한 ‘여론 공격’임을 모르는가. 그것이 ‘오해’라면 대타협에 어떤 내용이 들어가야 하는지 당당하게 밝혀야 옳지 않은가. 선언식으로 압박하는 대타협이 이땅의 노동운동을, 이땅의 노동자들을, 벅벅이 옥죌 것임을 누구보다 잘 알지 않은가. 그런데도 왜 궁따고 있는가. 그 ‘깊은 뜻’은 대체 무엇인가.

손석춘 논설위원 son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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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는 ‘친노동자’ 정부 노사정위는 어디로?

기사섹션 : 책과 사람 등록 2003.07.04(금) 18:23

조흥은행 및 철도 파업 이후 재계와 보수·수구언론이 노동계를 향해 총공세를 취하고 있는 가운데, 노무현 정권 아래에서 노사정위원회의 향배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작업장 차원에 국한된 조합원들의 물질적 복지를 개선하자는 성격보다는, 은행산업 및 철도교통망의 향후 방향을 둘러싼 정책 갈등 성격을 띤 파업 국면에서, 해결을 모색하는 노사정위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한국에서 ‘사회적 합의주의’가 가능하냐는 물음에 대한 회의론도 커지고 있다.

노중기 교수 "김대중 정권의 신자유주의 정당화 장치"
조효래 교수 "정규 노동자 실리 넘어 사회연대 나서야"
파업 때 정부의 노동배제 극복이 노사정위 앞날 관건


노중기 한신대 교수(사회학)는 한국사회과학연구소에서 펴내는 학술지 〈동향과 전망〉(박영률출판사/1만2천원)에 특집기획으로 실린 ‘노사정위 5년, 평가와 전망’에서 “노사정위는 국가의 노동통제라는 차원에서 접근할 때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며 “김대중 정권 아래에서 노사정위는 신자유주의 노동정책을 정당화하기 위한 국가의 이데올로기적 통제장치였다”고 분석한다.

현 정권 아래에서 노사정위 전망을 두고서는 △위기 국면을 벗어난 한국의 거대자본들이 더는 정부의 노사정위 참여를 달가워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 △조합주의의 정치적 기반 및 조직구조가 부재한 상황에서 상층부 중심의 합의기구는 장기적으로 존속하기 어렵다는 점 등을 들어 회의적인 눈길을 보낸다. 특히 여전히 지속되는 국가의 노동배제 전략이 전환되지 않는 한 노사정위는 ‘참여와 협력’의 기제가 아닌 ‘이데올로기 통제장치’ 구실을 할 뿐이라고 한다. 다만 노동계의 최대과제인 비정규직 노동 해소, 산업별 노조체제로의 전환에 대해 정부가 비전을 제시한다면, 노동계의 동의를 끌어낼 수 있음을 내비친다.

같은 책에 실린 ‘노사정위를 둘러싼 노사정의 전략과 활동전망’에서 임상훈 한국노동연구원 박사(노사관계학)도 어두운 전망을 내놓는다. 무엇보다 “사용자 단체는 노동계가 참여하지 않도록 분위기를 조장하거나 참여하더라도 노정간 갈등을 증대시키고 실질 협의를 지연하는 태도를 보일 가능성이 높다”는 점 때문이다. 노사정위 역시 “김대중 정권 때처럼 노동정치의 전면에서 활동하기보다는 업종·지역협의회나 노정 교섭, 산별 노사교섭 등 노사정 간에 벌이는 사회적 협의의 한 교섭기구로서 운영되는” 쪽으로 방향을 설정하고 있다는 점도 상당한 기간 동안 우여곡절을 겪을 것임을 예고한다.

노동조합으로 결성된 ‘조직노동자’의 상태에 관한 연구결과들도 노사정위의 향후 전망이 밝지 않음을 보여준다. 김원 일본 리쓰메이칸대학 객원연구원은 〈역사비평〉 2003년 여름호에 노사정위를 코퍼러티즘의 실험으로 보는 시각을 비판하며 기고한 ‘노동문제 인식과 담론 비판’에서 “조직노동자의 대표성 확보를 통한 사회통합은 정규직 노동자의 특권화를 통한 대다수 비조직 노동의 배제와 경쟁 등으로 대표되는 보수적 사회통합 논리에 활용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지적한다. 조직노동자만이 참여하는 노사정위는 또 다른 배제를 낳을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기존의 틀로는 노동계 전체의 문제를 담아낼 수 없다는 것이다.

〈경제와 사회〉 2003년 여름호의 특집기획 ‘경제위기 이후 노사관계와 노동자 의식’은 조직노동자의 상태를 엿볼 수 있게 한다. 지난해 7~8월 경상대에서 경남·울산·부산지역의 민주노총 금속산업연맹 소속 노동조합 92곳을 대상으로 실시한 연구 결과를 정리하며, 조효래 창원대 교수(사회학)는 “기업 수준에서 단체교섭의 목표를 효과적으로 달성하고자 하는 조합원들의 실리적 참여 수준은 높으나, 기업 수준을 넘는 조합활동을 통한 사회적 연대나 계급적 연대는 취약하다”고 분석하며, 이런 조합원의 의식상태를 ‘집합적 도구주의’로 규정했다. 최근 현대자동차 노조 조합원들이 산별노조로 전환하는 것을 부결시키고 기업별 노조를 유지하기로 한 것은 이런 틀로 분석할 수 있다.

학계에서는, 노사정위의 필요성에 대해 비판적이든 긍정적이든, 말로는 노사정위를 키운다고 해놓고 ‘대통령직속자문기구’인 노사정위에 힘을 싣는 대통령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고 꼬집는다. 노사정위는 올 11월까지 ‘사회적 합의기구’로 발돋움하기 위한 ‘로드맵’을 만들 계획이지만, 최근 파업 국면을 거치는 과정에서 정부가 드러낸 ‘노동배제’의 모습은 두고두고 발목을 잡을 것이라는 게 학계의 중론이다.

조준상 기자 sang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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