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혁기의 라틴아메리카, 무엇을 주목할 것인가

2005/03/03 13:49

장석준 동지가 어딘가에 기고할 글일 듯한데, 그 어디를 모르겠다. 글에는 다음과 같은 역자주가 있어서 아르네케르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역자주] 이 글은 라틴아메리카의 저명한 여성 사회주의자 마르타 아르네케르가 브라질의 유일한 좌파 일간지 Brazil de Fato와 가진 인터뷰를 번역한 것이다(2005년 1월 10일자). 칠레 출신인 아르네케르는 프랑스의 맑스주의 철학자 루이 알튀세르의 제자며, 아옌데 정부, 니카라과 혁명 등에 직접 참여한 바 있다. 아르네케르가 집필한 역사유물론 교과서는 한때 라틴아메리카 좌파 운동가들의 필독서이기도 했다. 현재는 베네수엘라에서 진행되는 볼리바르주의 혁명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이론과 실천> 2003년 10월호에 아옌데 정부에 대한 평가를 담은 그의 글([미래를 만들기 위해 과거를 이해하자])이 소개된 바 있다.

 

아래 글은 브라질과 베네주엘라를 중심으로 라틴아메리카의 상황을 얘기한 인터뷰 글이다. 베네주엘라의 차베스 정권만을 긍정적으로 파악하고, 브라질의 룰라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시선이 많은 한국의 좌파들에게 권하고 싶다. 물론 나 또한 룰라의 행보가 맘에 드는 것은 아니다.

 



변혁기의 라틴아메리카,  무엇을 주목할 것인가

                                                                        마르타 아르네케르 (Marta Harnecker)

 

조지 W. 부시의 재선 이후 라틴아메리카 상황을 어떻게 보십니까?

국제 정책에 관한 한 존 케리나 조지 부시나 별 차이가 없다는 건 모두 다 아는 사실입니다. 존 케리도 미국의 대외 정책을 크게 바꾸지는 않았을 거예요. 하지만 일정한 차이는 있었겠지요. 이 점이 바로 제가 미국에서 민주당 후보를 지지한 사람들을 편든 이유인데요. 아무튼 우리의 투쟁에 별다른 상황 변화는 없습니다. 우리는 제국과 정면 승부해야 합니다.

 

그럼 우리에게 아무런 변화도 없으리라는 말씀인가요?

다시 말하지만, 저는 우리의 과제에 별다른 변화가 없다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대륙[라틴아메리카]에서 신자유주의 모델에 대한 저항은 케리가 되든 부시가 되든 전진할 것이기 때문이에요. 여전히 빈 데가 많지만, 어쨌든 우리는 전진하고 있어요. 지난 몇 년간의 선거 결과들이 이것을 반영하지요. 우리 민중들은, 적어도 상징적인 차원에서라도 신자유주의에 대한 대안을 대변하는 후보들을 뽑고 있어요. 제가 '상징적인 차원'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어떤 경우는 강령의 내용과 실천 사이에 커다란 간극이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러한 간극이 좁혀지지 않는다면 에콰도르의 루치오 구티에레스 대통령의 사례처럼 민중의 심판이 따르지요.1)

 

약속이 지켜지지 않은 사례를 말씀해주시지요.  

에콰도르의 경우에는 원주민 운동이 구티에레스를 지지했었는데 결국 자신들이 실수를 저질렀으며 다른 대안을 찾아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고 말았습니다. 구티에레스가 권좌에서 쫓겨난다 해도 놀랄 일이 아닐 거예요. 라틴아메리카 민중들은 최소한 저항할 준비가 돼 있는 단계에까지 와 있습니다. 민중들은 이미 정부를 바꿔낸 경험이 있어요. 아르헨티나에서는 페르난도 데 라 루아 정부를 몰아냈고, 볼리비아에서는 곤살로 데 로사다를 카를로스 메사로 교체했지요.2) 하지만 저항하거나 정부를 전복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우리는 파괴적 좌파 수준에 머물러 있지 않으니까요. 우리 시대의 좌파는 대안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핵심은 민중 조직이에요. 이제, 민중 조직이 없다면, 대안을 만들기는 불가능합니다. 이게 바로 베네수엘라가 보여주고 있는 거예요. 베네수엘라에서는 차베스가 8번이나 확고한 민주적 방식으로 선거에서 승리했어요. 그가 승리하고 힘을 기를 수 있었던 것은 민중들이 계속 조직된 덕분이지요.

  

- 게임의 규칙 자체를 바꿔야 한다 -

좀 더 자세히 설명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베네수엘라 정부는 낡은 제도적 틀을 물려받았지만 이것을 바꾸기 위해 분투하고 있습니다. 라틴아메리카에서 오직 베네수엘라 정부만이 평화적인 방식으로 기존 체제의 게임이 변화되도록 근본적 변화를 시도하고 있어요. 베네수엘라는 헌법을 바꾸는 데 성공했지요.3)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해요. 법률을 만들어야 하는데, 그러자면 법안을 통과시킬 수 있도록 의회 내의 세력 관계를 바꿔야 하지요. 또한 중앙 부처든 광역 자치단체든 기초 자치단체든 과거의 제도적·관료적 기구들을 물려받았거든요. 이러한 기구들은 새로운 사회를 향해 이 나라를 변혁시키려는 프로젝트가 실행되는 걸 가로막았지요. 

  

차베스 정부는 어떻게 이 시나리오를 바꿨습니까?

제도적 기구들은 활동가들의 노력을 방해할 수 있습니다. 사회적 조치들을 펼치고 빈곤, 문맹, 교육, 보건 같은 민중들의 가장 심각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볼리바르주의 정부[차베스 정부]는 특별 작전에 착수했어요. 다르게 말하면, 정부 부처 바깥에 행동 공간을 만들었습니다. 이제까지 한 번도 배려라는 것을 경험해보지 못한 민중들을 바로 이런 방식으로 돌보았는데요. 그 이유는 정부 부처들은 그 구조상 애초에 이런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브라질과 라틴아메리카 전체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지요.

그래요. 결점으로 가득한 체계를 통해 사회적 과제들을 완수하기란 불가능한 일입니다. 차베스 대통령은 정부 부처 내에 새로운 형식의 행정 조직들을 수립했고, 때로는 부처 자체를 새로 만들었어요. 조직된 민중은 이들 기관 내에서 지역적 수준의 목표들을 수립하는 데, 그리고 집행을 모니터링하는 데 참여해야 했고요. 조직이나 압력이 없었다면 아무 것도 가능하지 못했을 거예요. 민중들은 정부를 도와야 했고, 정부는 대중의 압력을 받아들여야만 했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사례가 있습니까?

좌파에게는 매우 까다로운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좌파를 대변하는 후보가 없을 때 뭘 할 것이냐는 거지요. 베네수엘라의 지난 지방선거에서 바로 이런 일이 벌어졌어요. 하향식으로 공천 받은 후보들이 있었는데, 별다른 지지를 못 받았지요. 유권자들은 이런 후보들이 당선된 데 불만을 표시했어요. 우리는 베네수엘라의 투표 기권율 문제를 분석해야만 합니다. 중대한 문제예요.

  

기권율이 어느 정도였습니까?

60% 가량 됐어요. 베네수엘라에서 진행되는 상황을 지켜보면서 저는 차베스 대통령의 교육적 실천이 민중들의 정치적 성장을 이끌고 있다고 주장해왔습니다. 바로 그 민중들이 거리에 나와 차베스의 복귀를 성사시켰고, 별다른 정치 이념 없이도 자신들이 역사의 주인임을 느꼈던 거죠. 정부에 반대하는 언론의 선동에도 불구하고 말예요. 게다가 민중들은 야당 TV의 시청과 야당 신문의 구독을 단호히 거부해서 거짓 정보의 유통을 막았어요.

  

언론의 역할이 컸나요?

현대전이 미디어 전쟁이라는 것은 다들 아는 사실이지요. 저는 다음과 같은 노엄 촘스키의 말을 잊지 않습니다. "독재에 억압이 있다면, 민주주의에는 선전이 있다." 달리 말하면,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성공하는 이유는 언론이 민중들로 하여금 지금 이 세상이야말로 가장 좋은 세상이라고 믿게 만든다는 겁니다. 그리고 TV 드라마를 통해서 환상을 낳는 거죠. 이게 이 시대의 민중의 아편이에요. 제가 브라질에서 보고 놀란 게, 그렇게 많은 빈민가에 집집마다 TV 안테나 하나씩은 있다는 거예요.

  

어떻게 언론의 권력에 맞서 싸울 수 있을까요?

부르주아 언론과 경합하는 진보 세력과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뭘까요? 포르투 알레그레에서는 어떻게 언론의 공세에도 불구하고 좌파가 오래도록 성과를 낼 수 있었을까요?4) 이제까지와는 다른 정치적 실천이 있었고, 그걸 민중들이 눈으로 보았기 때문이지요. 눈으로 직접 목격하고 나면, 반대파의 주장과 맞서게 되면, 기성 언론에 대한 비판적 거리가 생겨나게 마련입니다.

 

- 베네수엘라에는 있지만 브라질에는 없는 것 -

우루과이에서는 타바레 바스케스가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외에도 좌파가 의회에서도 다수를 차지한 게 커다란 의미를 지니겠지요?5)

물론입니다. 이 문제는 룰라와도 관련됩니다. 세력 관계의 분석 없이 정부를 평가할 수는 없기 때문이지요. 좌파는 정부를 분석할 때마다 세력 관계 문제를 곧잘 잊어버립니다. 우리는 차베스 정부와 룰라 정부를 단순 비교할 수 없어요. 베네수엘라의 경우를 보면, 차베스 스스로 말한 대로, 평화적 경로이긴 하지만 무력 충돌이 전혀 없지는 않았어요. 이게 뭘 의미합니까? 민중들이 무장했다는 의미인가요? 아닙니다. 정규군의 지지를 받는, 달리 말하면, 군대의 대다수가 차베스를 지지하는 평화적 경로라는 의미입니다.

 

브라질에서도 마찬가지인가요?

차베스 정부는 선거에서 체제의 게임의 규칙을 바꾸는 것을 전면에 내건 첫 번째 정부입니다. 이들은 새로운 헌법이 필요하다는 것을, 따라서 선거에서 제헌의회 소집을 공약으로 내걸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거지요. 차베스는 결국 헌법을 바꿔냈고, 그래서 제도적 기구들 내의 세력 관계도 바뀌었어요. 하지만 룰라는 그럴 수 없었습니다. 비록 룰라가 1998년 차베스가 거둔 것보다 더 큰 표차로 당선되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이게 광범한 정치적 동맹의 산물이었다는 점을 잊어선 안 됩니다.6) 사실 정치적 동맹은 투표에서 이기기 위해서도 필요했고, 나라를 통치하는 데도 역시 필요했어요. 노동자당은 아직도 상·하 양원에서 소수당이니까요. 게다가 브라질은 석유를 지닌 베네수엘라에 비해 훨씬 심각하게 국제 금융 자본에 의존하고 있어요.

 

베네수엘라 정부와 라틴아메리카의 다른 나라들, 가령 브라질이나 아르헨티나 정부 사이의 차이를 어떻게 보시나요?

세력 관계, 헌법 개정, 제도권 내의 세력 관계 변화, 민중 조직 건설이라는 내기 외에도 석유의 문제가 있습니다. 달리 말해, 베네수엘라는 거대한 부를 소유한 나라예요. 석유 채굴로 막대한 이익금을 받고 있지요. 그래서 초기에 야당이 유전의 폐쇄부터 요구했던 것이기도 하고요. 오늘날 베네수엘라는 석유 이익금 덕분에 IMF의 정책에 종속되지 않아도 될 잠재력을 갖고 있습니다. 라틴아메리카의 대부분의 나라들은 상황이 그렇지 못해요. 다른 나라들은 베네수엘라 정도의 경제적 자유를 지니고 있지 못하지요.

 

그럼 당신은 룰라에 대한 좌파의 비판을 비판하시는 겁니까?

제 생각에 우리는 수많은 요소들을 숙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비판은 때로 너무 표피적인 수준에 그칠 수 있어요. 우리는 대안을 제시해야 합니다. 저는 브라질에서 지금 벌어지는 일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박수를 보냅니다. 하지만 저는 룰라 정부가 사회적 갈등의 와중에 있고 그럼에도 저울의 방향을 돌릴 능력이 없어서 상태가 이 지경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요. 비판자는 매우 큰 책임을 가집니다. 급진파가 된다는 것은 항상 보다 급진적인 해답을 표방한다는 게 아니라 뭔가를 실제로 할 조건을 창출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저는 엘살바도르 사람들이 반전평화 시위를 조직하기 위해 벌인 토론을 기억합니다. 이들은 사회주의 깃발을 들어야 하는지 평화 깃발을 들어야 하는지 논쟁했지요. 보다 급진적인 쪽은 전자를 원했어요. 다른 쪽은 평화 깃발을 들어야 기독교도나 비사회주의자 대오를 규합할 거라고 주장했고요. 결국 이들은 평화 깃발을 들기로 결정했고, 엄청난 수의 군중을 모았습니다. 모든 시위 참가자들은 투쟁을 계속할 자신감을 얻었지요. 이게 더 급진적인 거예요.

 

- 지금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미래에 할 수 있을 힘을 만들어내는 것 -

그럼 해답은 뭡니까?

제가 믿는 것은 아래로부터 힘을 구축하는 겁니다. 이게 바로 제 연구 주제라고 말하고 싶군요. 정치의 예술이란 이런 겁니다. 지금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미래에 할 수 있을 힘을 만들어내는 것. 흔히들 기회주의자란 "힘이 없으니까 현실에 순응하자"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반면에 혁명가는 힘이 없다는 것을 알더라도 이를 실현하는 데 필요한 조건을 만들어낼 방도를 찾는 사람입니다. 세력 관계를 바꿀 방법을 탐구하고 고안하는 거지요. 둘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어요. 하나는 순응주의자이고 기회주의자입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 혁명적인 또 다른 입장은 목표에 도달할 수 있게 만들어줄 힘을 구축하기 위해 노력하지요. 보다 좌익적인 언사를 내뱉는다고 자신이 보다 좌익적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잘못된 길로 나아가곤 했어요. 저는 이렇게 주장하겠습니다, 급진적이고자 한다면 우리가 급진적일 수 있도록 만들어줄 사회·정치적 힘을 구축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우리는 창조하기 위해 투쟁합니다. 제가 즐겨 파괴적 좌파와 건설적 좌파를 구별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어요.


주1) 역주 - 에콰도르에서는 1999년에 IMF의 요구에 따라 신자유주의 정책을 집행하던 정부가 인구의 다수인 원주민들의 봉기로 무너졌다. 2002년 10월의 대선에서는 99년 봉기 당시 군부 내에서 원주민 운동을 지지했던 구티에레스가 원주민 운동의 지지로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당시에 그의 당선은 라틴아메리카 좌파 붐의 한 신호로 평가받았지만, 이후 그는 전임 정부와 마찬가지로 미국과 IMF의 요구를 고분고분 따랐다.

 

주2) 역주 - 아르헨티나에서는 2001년 12월에 경제위기에 잇따른 민중 봉기로 대통령이 세 명이나 갈렸고, 볼리비아에서는 2003년 10월에 좌파와 원주민 대중이 주도한 천연가스산업 사유화 반대 운동의 결과로 대통령이 하야해야 했다. 

 

주3) 역주 - 아르네케르는 [미래를 만들기 위해 과거를 이해하자](<이론과 실천> 2003년 10월호)에서 칠레 아옌데 정부의 중대한 오류 중 하나가 헌법 개정을 시도하지 않은 것이라고 지적했다.

 

주4) 역주 - 브라질의 포르투 알레그레에서 노동자당 시정부가 보수 언론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참여예산제를 추진해 성공시킨 사례를 지적하는 것이다. 

 

주5) 역주 - 우루과이의 좌파 정치에 대해서는, 장석준, [라틴아메리카 좌파 부활의 또 다른 주역: 우루과이의 확대전선], <이론과 실천> 2004년 10월호를 참고할 것.

 

주6) 역주 - 룰라의 부통령 러닝메이트는 브라질 굴지의 섬유산업 재벌이자 중도우파 자유당(PL) 소속인 주제 알렌카였다(현재는 국방부 장관을 겸임). 또한 현재 룰라 정부에는 우파 정당인 브라질민주운동당(PMDB) 등이 결합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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