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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세기말엔 농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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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말엔 농구

 

 

_파니

 

 

나는 왜 공놀이에 매료되었나? 공놀이를 시작하면 틀림없이 진입하게 되는 어떤 차원에 대해 쓰고 싶다. 이하 나와 공의 약사를 따라 쓴다.

 

고등학교 시절 - 여자 농구

 

빅 매치가 있는 날이었다. 일주일 전, 조는 내 탁상달력에 이 날을 시뻘건 펜으로 점지해두었다. 점심 시간이 되자 조와 나는 전교에서 첫 번째로 배식을 받았고, 쌀알을 씹는 둥 마는 둥 식도에 털어 넣은 뒤 곧장 식당을 박차 체육관으로 향했다. 체육관에 가까워질수록, 우리의 발걸음은 점차 비장해졌다. 우리는 쇠락해가는 왕가의 운명이 달린 비밀서한을 손에 쥔 결사대처럼 달음질치듯 걸었다. 이처럼 조는 내 고등학교 시절의 혈기를 빅Big, 과 매치Match, 라는 방식으로 독점하고 있었다. 빅, 은 거대함과 야성을 상기한다. 우리는 15분 안에 피자 반 판을 먹어 치우는 식으로 과식을 경쟁했고 그에 뒤따르는 서로의 비만한 실루엣에 무감각했다. 그런 몸을 하고 청소 시간마다 학교 뒤 야산을 잘도 기웃거렸다. 매치, 는 갈등과 우애를 상기한다. 우리는 같은 교복을 입고 고만고만하게 친절한 또래들 중에서 상대방에게 유일한 존재가 되기 위해 암투를 벌였고, 그를 통해 단짝친구로서의 칭호나 소풍 파트너, 급식 파트너라는 안정적인 지위를 획득했다. 빅 매치는 이 중에서도 최고의 놀이로, 10명 이상의 여학생들을 모아 학교 실내체육관의 절반을 차지하고 벌이는 농구시합을 칭하는 이름이었다.

 

실내 체육관에 도착했더니, 입구에 쇠사슬 자물쇠가 걸려 있었다. 우리는 일말 당황도 없이 영미에게 전화를 걸었다. 영미가 잡채를 먹다 말고 체육관으로 달려 왔다. 영미의 몸은 전교에서 가장 가늘었고 우리 중 가장 길었다. 그 몸은 쇠사슬이 허락해주는 만큼의 좁은 문틈마저 고양이처럼 유연하게 비집고 들어갔고, 이윽고 영미는 내부에서부터 체육관을 전면개방 해주었다. 영미는 범법행위를 무사히 마치면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곤 했는데, 그때마다 복숭아같이 보얀 볼에 놀라울 만큼 깊은 보조개가 패였다. 우리는 어떠한 박탈감도 없이 그녀의 돌고래 같은 몸매를 축복하였고 그 곡선이 언제나 우리 곁에 있음에 입이 닳도록 감사했다.

 

그렇게 최초로 입장한 우리들이 체육관에 설치된 4개의 골대 중 2개의 골대를 차지하고 그 사이를 종횡하며 드리블하기 시작하면, 먹을 거 다 챙겨먹고 후발주자로 나선 남자애들이 나머지 골대를 차례로 차지한다. 아무 골대도 차지하지 못한 지각생 남자애들도 생겼다. 그들은 우리를 노골적으로 쳐다보며 우리의 코트 옆에 자리를 잡고 준비운동 따위를 하고 서 있었다. 가끔 그들은 맥락 없이 웃통을 벗어 반 나체를 공개하는 식으로 무언의 시위를 벌였다. 그들의 널찍한 피부는 농구코트란 애초에 남성친화적 공간이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5교시 직전까지 시합을 연장해가며 혈투를 벌이는 것으로 그의 누드에 보답했을 뿐 단 한 번도 그들에게 코트 전체에 대한 지배권을 내어주지 않았다.

 

내가 거시기를 달고 태어나지 않은 나 자신의 최초에 대해 가장 애석하게 여겼던 부분이 뭔지 알려줄까? 내 몸으론 <슬램덩크>의 강백호가 되지 못한다는 것. 다시 말해 서태웅 같은 동료나 채치수 같은 선배를 얻지 못한다는 것. 여성간의 유일한 관계가 ‘질투’이고 여성 최고의 이상이 ‘예쁨’이라면 나는 그 “여성” 따위는 전부 내동댕이치고 오직 비인간이 되기만을 소망했다. ‘질투’는 한 남성을 경유해서만 설명할 수 있는 상호작용이었고, 예쁜 신체는 가련하고 야했고 질투에서 승리하기 위해 가꾸어내야 하는 상태에 불과했으므로. 그런데 농구공이 손쉽게 판세를 엎었다. 빌리 하스Willy Haas에 따르면, 인간의 모든 놀이는 동물의 움직임을 모방하는 데서 기원한다. 그 중 농구는 상대편의 공을 빼앗는 놀이로서 뼈다귀 또는 사랑하는 대상을 둘러싼 동물들 사이의 싸움에 그 기원이 있다. 공을 손에 쥔 순간, 나는 동물처럼 그러니까 “여자”에서 벗어난 것처럼 굴었다. 농구를 하는 시간에, 우리를 지배한 것은 질투가 아닌 우애라는 관계의 형태였으며, 우리의 몸은 심미가 아닌 기능적 차원으로 이동하는 것 같았다. 나는 땀이 줄줄 흐르는 목덜미에 대충 수돗물만 끼얹고 오후의 교실로 입장했다. 얼굴과 목에 맞닿은 머리카락이 흠뻑 젖어 피부 위로 찰싹 들러붙어 있는 나의 모습이 아마존의 늪지대를 사지로 헤엄쳐 나온 맹수의 갈기처럼 엉망진창으로 헝클어져 있기를 소망하면서.

 

대학교 시절 - 퀴어 축구

 

대학교에 입학하고 나서는 양상이 달라졌다. “여성”의 전형성을 요구하는 시선은 여전했지만 그를 기각하기 위해 굳이 농구공까지 튀길 필요가 없었다. 나는 여성주의 활동을 시작했고 몸의 다양성, 몸의 언어, 몸의 규격화가 야기하는 부작용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했다. 여성주의 언어로 내 몸을 의미화할 수 있었고, 그 과정에서 나는 아주 자발적인 손짓으로 내 아이라인을 그림과 동시에 성적대상화를 비판하는 한 두 편의 서사도 완성할 수 있었다.

 

그 뒤에 성소수자 인권운동을 하면서, 나는 몸을 점차 특정한 방식으로 인지하고 발화하기 시작했다. 퀴어의 몸은 언제나 논쟁의 최전선에 서 있었다. 혐오세력들은 에이즈 운운하며 퀴어를 섹스하는 몸으로 치환했고, 그에 맞서 우리는 기갈 넘치는 리듬에 맞춰 퍼레이드하며 퀴어를 전복적인 몸으로 전시했다. 퀴어가 감당하는 사회적 차별이 얼마나 불합리한지를 해설하기 위해 우리는 우선 누가 퀴어인지부터 설명해야 했다. 그때 우리의 몸은 우리가 가진 유일한 독립변수였다. 즉 우리는 자신의 몸이 이원젠더, 이성애주의가 요구하는 것과는 다른 정체성, 다른 욕망을 가졌으며 그것이 매우 정당한 몸이라는 사실을 아주 섬세한 표현으로 해설해야 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퀴어로서 나의 몸은 주로 보여주는 몸이었고 언어 속의 몸이었다.

 

저 몸은 미래에도 존속할 수 있을까? 퀴어와 퀴어 친화적인 사람들이 모여 축구단을 결성했다. 여름 해가 길다 해도, 밤 8시가 되자 한강공원 거북축구장에 면한 대기와 수면에 노을이 내리기 시작했다. 구름이 계단처럼 쌓여 표표히 하늘을 운행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는데, 축구 하는 퀴어들의 등 뒤에서 노을은 진한 핑크로 펄펄 끓고 있었다. 능소화와 진달래만 골라 놓은 꽃다발같이 진한 색이었다. 그 노을을 기려 우리는 “세기말 축구단”이 되기로 했다. 세기말, 멸망의 예감 속에 우리가 채비해야 할 것이 아마추어 축구팀이었단 말인가? 그렇다. 나는 모든 언어가 잦아든 미래에도 여전히 남아 있을 어떤 움직이는 몸들, 퀴어의 움직이는 몸들을 믿고 싶었다.

 

물론 나는 “세기말 축구단”을 차별과 저항의 서사로 설명할 수 있다. 이 축구단이 나로 하여금 다른 축구를 하도록 하는 것은 분명하다. 나의 몸을 곡해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팀메이트들의 존재 때문이다. 우리는 이 곳에서 동성 애인에게 특혜를 주었다가 장난기 어린 야유를 받을 수 있는 축구를 하고, 유방의 곡선이 드러난다고 해서 여성으로 치환되지 않을 수 있는 축구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주로 대의와 무관하게 공을 찬다. 우리가 2주에 한 번씩 모이는 것은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을 철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만나기 위해서고 놀기 위해서다.

 

축구를 하면서, 나는 퀴어 친구들의 몸을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이해하기 시작한다. 슈팅에 성공한 뒤 탄성을 내지르듯 허공으로 내다 꽂는 팔뚝과 도드라지게 솟아오르는 핏줄로서. 연달아 패스 미스 하고 아찔해진 내 어깨에 별안간 격려를 전하는 짧은 토닥임으로서. 경기가 마치자 둥근 공들을 그라운드 한 쪽에 정리한 뒤 양 다리를 길게 늘이는 스트레칭으로 자신의 몸을 다독이던 고요함으로서. 이러한 관계 속에서, 우리의 몸은 서로에게 여전히 퀴어한가? 우리는 기존에 ‘성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요소들을 언급하지 않을 때에도 서로를 혹은 자신을 퀴어로서 인식할 수 있는가? 이 축구가 퀴어 몸의 가용범위, 인지범위의 경계선이 어디에 있는지에 대해 묻는다. 그 질문 외에 이 축구단은 오로지 활기, 몸이 화살처럼 직진할 때 솟는 활기로 채워진다.

 

공 놀이의 리듬

 

노을이 지면 무엇이 시작되나? 자정의 코트에서, 나는 여동생과 농구를 하고 있었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절, 모든 것이 자신보다 압도적으로 거대한 세상에서 나와 여동생은 너무나 작은 서로를 발견하였다. 아직 세상을 이해할 언어도 없이, 어른들이 구축한 질서 속에 몸뚱이 하나만 갖고 던져진 영유아기. 그때 우리는 서로의 유일한 동료였다. 우리가 가진 하나의 문제는, 언니는 못생겼는데 똑똑했으며 동생은 예쁜데 게을렀다는 점이다. 둘 중 누구도 완전한 우위를 차지할 수 없는 상황에서 나름의 질서를 만들기 위해 우리는 상시적 전쟁상태에 돌입했다. 하루에도 열두번씩 상대방의 존재에 자신을 견주어 보며 이겼다 졌다 했다. 이 전쟁을 휴지할 수 있는 유일한 상태가 “놀이”였다. 어린 포유류 특유의 나약함과 호기심으로 우리는 무엇에 관하여든 다투고, 질문하였으며 그것이 “놀이”라는 형식으로 우리의 관계를 지배했다. 그리고 우리는 특히 공놀이를 좋아했다.

 

공놀이를 하다 보면 우리는 어느 순간, 미모나 학벌이 사라지는 지경에 진입한다. 우리는 각자의 “자아”라는 것에 신경을 쓸 틈이 없이, 코트 사방에 출몰하는 농구공을 잡아채기 위해 혼비백산하기에 바쁘다. 우리는 잔근육 가장 말초까지를 백퍼센트 활용하면서 코트를 뛰어다니고 있었다. 전력투구 속에서 모든 자아들이 몰아하는 바람에, 모든 게 정제된 후 공과 육체만이 걸러져 남은 자정의 코트. 탕, 탕, 불규칙적인 드리블 소리. 고무가 진동하면서 전송하는 음파들. 그곳은 우리가 태어난 동네, 실업계 고등학교 운동장이었다. 그곳에 농구코트 전용 라이트는 없었고, 근처 주차관리소 가로등이 사선으로 빛을 내려주었다. 주렁주렁 매달린 가을 같은 광선. 홍시처럼 도톰히 익은 광대의 곡선. 드리블의 운행을 따라 가시화되는 반복들, 솟아오르고 떨어져 내리는 무용한 위치에너지들. 완전하게 둥근 구체를 받쳐 들고 시도하는 불완전한 도약, 레이업하고 슛.

 

이 슛이 내 어린 시절을 흉내 낸다. 아이는 놀이를 통해 나 아닌 존재를 향한 최초의 도약을 한다. 파악할 수 없는 외부를 향해, 때로는 적대적인 상대를 향해, 길항의 리듬을 익히기 위해 아이는 놀이라는 도약을 한다. 공은 그 도약을 내 현재의 코트 위로 소환해주는 마법이다. 여기가 내 공놀이의 기원이다.

 

 

  • [세기말 축구단]은 [세기말 농구단]으로 변경되어 2주에 한번, 농구를 함께 하고 있습니다. 함께 하고 싶으신 분들은 lalata@hanmail.net로 연락 주십시오. 이 모임은 퀴어 및 퀴어 친화적인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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