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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컬포인트 Glocal Point2021-12-04T09:08:42+09:00Textcube 1.8.3.1 : Secondary Dominant제주 예멘 이슈를 통해 본 한국 난민정책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http://blog.jinbo.net/glocalpoint/812019-02-11T19:09:46+09:002019-02-11T18:15:37+09:00<p style="text-align: right;"> </p>
<p style="text-align: center;"><img alt="텍스트: [보이지 않아도 우리는] 제주 예멘 이슈를 통해 본 한국 난민정책 # 고은지 / 배경이미지: REFUGEE라는 단어 위로 가시철망이 쳐져 있는 일러스트" src="/attach/6789/4485895106.jpg" style="width: 700px; height: 262px;"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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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style="text-align: right;">고은지 / 난민인권센터</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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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style="text-align: justify;">2018년은 한국 난민 인권 운동 역사에 있어 기록적인 해가 되었다. 2017년 12월부터 제주-쿠알라룸푸르 비행편 정기 운항이 시작되며 짧은 시간 내에 500명이 넘는 예멘 사람들이 제주에 오게 되었다. 2018년 5월 2일 오후 76명의 예멘 사람들이 제주공항에 도착하며 출입국은 관련 정보를 언론에 제공하였다. 다음날 연합뉴스 등 10개 이상 언론이 ‘가짜 난민’의 제도 악용에 대한 우려를 폭발적으로 보도하기 시작하며 이른바 ‘제주 예멘 이슈’는 촉발되었다.<sup><a href="http://blog.jinbo.net/glocalpoint/81#footnote_81_1" title="언론은 ‘이들은 체류 목적으로 제주에 온 것으로 의심돼 출입국관리사무소가 주시하고 있다.’, ‘난민 신청자 상당수는 불법취업을 목적으로 브로커 등을 통해 난민을 신청하는 ‘가짜 난민’이다‘ 등을 언급했다." id="identifier_81_1"class="identifier">1</a></su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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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style="text-align: justify;">이 글에서는 제주 예멘 난민 이슈를 둘러싸고 일어났던 사회적 현상들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자 한다. 다만 제주 예멘 이슈와 관련한 정부의 대처를 지켜본 당사자로서 상반기 일련의 과정을 짧게나마 기록해 보고자 한다. 또한 예멘 이슈를 통해 드러난 정부의 문제적 행보들은 2018년에만 국한되는 일이 아닌 점을 짚고 싶다. 지난 25년간 정부가 난민에 보여 왔던 일관된 관점과 태도는 제주 예멘 이슈를 통과하며 더욱 공고해졌다. 예멘 난민을 둘러싼 정부의 행보는 전체 난민의 삶에도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2018년 상반기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에 비추어 과거 정책 운용의 사례들을 돌아보고 현재 난민 정책의 문제와 활동 대안을 함께 고민해 볼 수 있다면 좋겠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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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ong>예멘 난민 11명의 강제송환, 출입국항 제도의 그늘</strong></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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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style="text-align: justify;">활동가들은 예멘 이슈가 논란이 되기 전부터 제주의 상황에 주목하고 있었다. 4월 중순경 예멘 난민 11명이 제주공항에서 강제송환 되었다는 소식을 접했기 때문이다. 국제사회에서 대표적인 난민 송출국으로 언급되고 있는 예멘에 대해 당시 제주출입국청은 ‘외형적으로 전혀 난민의 가능성이 없다’ 등의 문제적 언급을 하며 11명을 강제송환하였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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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style="text-align: justify;">사실 유사한 인권침해는 2013년 출입국항 난민신청 제도 시행 이래로 꾸준히 접수되었다. 2017년은 한 해 신청자 197명 중 단 10%만이 공항이나 항만에서 난민신청을 공식적으로 접수하여 대한민국에 입국할 수 있었다. 즉, 난민신청 접수를 거절 받은 90%는 대부분 심각한 인권침해의 상황에 직면해온 것이다. 송환 회유를 위해 한 달 가까이 식사를 제공받지 못하거나, 비누가 없어 변기 세정제로 손을 씻거나, 질병을 호소해도 출입국 직원이 의료진 연결을 하지 않아 사망 직전의 상태에 이르거나, 임신한 상태에서 폭행을 당하는 등 경악할 사건들이 발생해왔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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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style="text-align: justify;">주말 밤 비행기를 예약해 아무도 모르게 수갑 채우고 구타하며 강제송환 시켜버리는 뱀 같은 법무부에 맞서 활동가들은 싸워야 했다. 주로 SOS는 주말 밤 비행기 탑승 직전에 온다. 이륙을 얼마 남기지 않은 상황에서 활동가들은 항공사와 법무부 관계자에 수십 통의 전화를 돌리고, 소 제기를 하며 공항에 쫓아가야했다. 2018년 5월 23일 위구르인에 대한 강제송환 상황이 발생했던 당시에도 마찬가지이다. 관련 항공사와 법무부 관계자에 접촉을 하고, 난민심사불회부결정취소소송을 제기하며 강제송환 중지를 강력히 요구하였으나, 강제송환은 자행되었다. 법무부는 ‘위 사건이 인천지방법원에 정식 접수된 시간은 2018.05.23. 22:44이고, 신청자가 탑승수속을 완료한 시각이 22:30이므로 소제기 사실을 무시하고 송환하기 위해 권한을 남용한 것으로 보기 어렵다’는 입장을 밝혔다. 당사자가 탑승수속 이전부터 SOS를 보내와, 비행기 이륙 직전까지 항공사 탑승안내 직원 및 법무부 공무원에 유선상으로 접촉을 하며 강제송환 중지를 강력히 요구했음에도, 법무부는 강제송환을 강행하고 알리바이를 조작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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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style="text-align: justify;">출입국항에서는 어엿이 행정소송을 진행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송환도 진행되고 있다. 지금까지만 해도 활동가들이 접한 강제송환은 20건에 가깝다. 외부에 연락도 하지 못한 채 강제송환 되어버린 사건들의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출입국항 불회부 사유를 요구하고 있으나 법무부는 ‘관리하고 있지 않다’는 이유로 해당 정보를 공개하지 않고 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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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출도제한을 둘러싼 정부의 무능</strong></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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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style="text-align: justify;">한편 논란이 되었던 출도제한은 예멘 난민에만 해당되는 조처였을까? 강제송환과 마찬가지로 법무부는 출입국관리법 제22조(동법 시행령 제27조 , 동법 시행규칙 제30조)에 명시된 ‘공공의 안녕질서나 대한민국의 이익을 위해 필요하다면 체류하는 외국인의 활동 범위를 제한할 수 있다’라는 모호하고 문제적인 조항을 근거로 제주지역 신청자 957명 중 총 581명(예멘 434명, 중국 48명, 기타 4명)에 대해 출도를 제한해왔다.<sup><a href="#footnote_81_2" title="2018년 5월 기준, 법무부 행정정보공개청구 결과" id="identifier_81_2"class="identifier">2</a></sup> 지난 4월 말 예멘 난민에 대해 출도제한 조처를 하는 과정에서도 당사자를 비롯한 활동가들에 명확한 이유를 제시하지 못했을뿐더러, 출도 제한을 위한 행정절차 정보제공은 이행하지 않은 채 인권침해를 발생시켰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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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style="text-align: justify;">출도제한 시행 이전에 육지로 이주한 예멘 난민과 제주에 남게 된 예멘 난민 486명은 ‘대한민국의 이익’에 있어 도대체 어떤 차이가 있는가? 예멘난민에 대중의 관심이 뜨거워졌던 시기에 돌연 이들에 대한 출도제한 조처를 결정한 이유는 무엇인가? 법무부는 곧 대중에 발각될 자신의 무능을 가리기 위한 수단으로 출도제한 제도를 이용하며 예멘 난민의 이동권을 박탈함으로써 자신의 ‘통제력’, 즉 ‘힘’을 과시한 것이 아닌가?</p>
<p style="text-align: justify;"> </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러나 출도제한은 거꾸로 법무부의 무능을 부각시켰다. 당장 수백 명의 예멘 난민이 제주 거리에 나앉아야 했던 상황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난민신청자에 대해 전례 없는 방식으로 생존권을 박탈하고 있는 정부의 정책 운용이 야기한 당연한 결과였다. 예멘 난민이 처했던 상황은 모든 지역 출신의 난민이 신청 과정을 지나 지위 인정 이후에도 겪게 되는 문제를 드러냈다. 생존할 권리의 보장은 난민 정책 시행 이래로 지속적으로 제기되어 왔던 이슈이다. 활동가들은 난민의 정착을 위한 대책 마련을 정부에 요구해왔다. 그러나 각 정부 부처들은 “난민이 뭐냐”, “우리 소관이 아니다” 서로 떠넘기기에 급급했다. 2015년 폐기되었던 김포시 난민지원조례는 이를 증명해줄 수 있는 가장 대표적인 사건이다. “난민에 관한 사무는 외교마찰을 유발할 수 있으니 지방자치단체에 부여된 책무의 범위를 벗어났다”는 뚱딴지같은 이유로 조례는 폐기되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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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멘 난민 노숙 사례가 집중적으로 늘어났던 5월경에는 해가 지기 전까지 이들이 안전하게 노숙할 수 있는 장소를 찾는 일이 활동의 주요한 일과가 되었다. 여론의 관심이 뜨거워지기 전, 법무부는 ‘예멘 난민이 범죄에 노출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이들에 대한 취업허가를 예외적으로 적용하고 노숙하는 난민을 찾아 사람들의 시야에 닿지 않는 장소로, 즉 선박으로 이들을 보내기 시작했다. 당시 출입국 직원은 아무런 설명 없이 이들을 “재워주겠다”라는 말로 회유하며 배에 태웠다. 영문을 모르는 예멘 사람들이 출입국 직원을 따라갔다가 배를 탄 이후로 놀라서는 연락이 오기도 했다. 그리고 우리는 실질적인 생존권 보장을 요구하며 매일 다시 노숙할 장소를 찾아야 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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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ong>주먹구구식 정책 운용의 정당성 확보</strong></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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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style="text-align: justify;">난민정착 정책 운용에 대한 숙고 없이 진행된 취업 연계는 이내 여러 문제를 발생시켰다. 어선원 노동 안전 교육을 위한 아랍어 통역자는커녕 관련 자료가 전무했기에 안전이 담보될 수 없었다. 다른 이주노동 체계와의 마찰이 발생하며 예멘 난민의 어선원 취업에 대한 항만노조의 항의가 발생했다. 이후 난민 반대 청원이 뜨거워지자, 법무부는 ‘국민의 일자리 잠식 우려’을 앞서 언급하며 양식업, 요식업에 한해 공개적으로 취업설명회를 개최하고 취업 연계를 하기 시작하였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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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style="text-align: justify;">가짜뉴스가 확산되는 동안 법무부는 난민에 대한 정확하고 전문적인 정보 제공 없이 자신의 입맛대로 여론을 선택하며 ‘국민’을 거론하고 ‘국민’과 ‘난민’을 대치시켰다. 법무부의 ‘국민의 일자리 잠식’이나 ‘예멘 난민의 범죄가능성’ 등의 논거는 결국 가짜뉴스의 반복이었다. 가짜뉴스는 역행하는 법무부 정책을 위한 든든한 파트너가 되었다. 제3차 외국인정책기본계획 간담회에서 “한국 사람도 불쌍한 사람들이 많은데, 무슨 난민이냐”는 발언을 외국인정책과장에게 들어야 했던 현실이 그대로 반영된 행보였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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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style="text-align: justify;">지난 7월, 반대여론이 가장 뜨거웠을 당시 법무부 차관이 제주지방경찰청을 방문하여 ‘순찰 강화 등 치안 활동을 강화하여 범죄 예방’을 당부한 정황도 난민에 대한 정부의 일관된 관점과 태도를 보여주는 예이다. 8월 초 경찰이 예멘 난민을 대상으로 범죄예방 교육을 진행하는 과정에서도 예멘 난민을 잠재적 범죄자로 표현하여 논란이 되었다. 그런데 최근 제주 거리에서 난민에 대한 시민의 민원이 늘고 있다. 그냥 거리에 있으면 신고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보다 더욱 심각하게 주목할 점은 법무부 차관 방문 이후 민원이 발생할 때마다 5~6명이나 되는 인력이 투입되어 난민신청자에게 위화감을 주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과도한 민원처리는 ‘치안 활동’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고 있다. 제주 예멘 이슈를 통해 제기되는 사회적 문제를 두텁게 읽어내지 못한 채, 난민을 범죄자로 낙인하고 시민의 공포를 더욱 조장하는 주먹구구식 대응이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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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style="text-align: justify;">6월부터 9월까지 순차적으로 무사증불허국가에 예멘을 포함한 방글라데시, 파키스탄, 이집트 등 총 13개 국적을 추가하고 ‘악용 개연성 상존’을 언급한 점도 정책 운용의 정당성 확보를 위해 난민을 ‘범죄자’로 동원한 대표적인 예이다. 법무부의 관점은 그동안 여러 간담회를 통해서도 거듭 확인되어왔다. ‘가짜 난민신청’을 어떻게 가려낼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다. 올해 일련의 과정을 겪으며 심사인력을 늘리고, 영상녹화<sup><a href="#footnote_81_3" title="난민법 제 8조 3항에 의해 난민심사 면접 과정에서는 녹음 또는 녹화를 진행할 수 있다. 녹음녹화는 면접 과정에서 일어나는 오역, 폭언, 잘못된 면담기록 등의 인권침해 사례를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증거가 된다. 전년도 기준으로 전체 심사종료자 중 단 8%만이 녹음녹화를 할 수 있었다. 심사종료자 중 17,764건(92%)에 대해서는 녹음녹화가 진행되지 않았다. 녹음이 진행되지 않은 이유에 대한 정확한 통계는 없으나 난민인권센터에 방문한 사람들은 대부분 ① 녹음녹화 권리 고지 부재 ② 녹음녹화 요청을 난민신청자가 하더라도 면접관이 이를 무시 ③ 녹음녹화 기기의 고장 등의 이유로 해당 권리를 박탈당해왔으며, 그 결과 면접과정 인권침해의 증거가 없어 심사의 불이익을 겪고 있다." id="identifier_81_3"class="identifier">3</a></sup>를 의무화하겠다 이야기했지만, 오히려 청원에 대한 답변으로 난민법 개정을 통해 재신청 회부 절차<sup><a href="#footnote_81_4" title="난민 심사 절차를 모두 마친 사람들이 전 과정에서 부당하게 인권침해를 겪어 다시 심사를 요청하거나, 새로운 난민 신청 사유가 발생하여 다시 처음부터 난민신청을 할 때, 이를 접수 받을지 여부를 판단하는 절차" id="identifier_81_4"class="identifier">4</a></sup> 도입을 추진하고 있다. 이미 구조적으로 심사의 전문성과 독립성이 확보될 수 없는 상황을 보지 않고 난민신청자가 ‘남용’하니 걸러내겠다는 것이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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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난민 간 차별을 확장하는 난민 정책</strong></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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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style="text-align: justify;">한편 현재 제주 예멘 난민에 한해서만 부여되고 있는 특권(?)들은 다른 국적의 난민신청자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유사한 시기에 난민 지위를 신청한 이에 대하여는 취업허가를 적용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여론의 관심에 따라 움직이는 법무부 정책의 현재를 잘 조명해준다. 그동안 법무부는 언론 등을 통해 여론의 주목을 받았던 사례에 대해는 심사의 기회를 더욱 제공해왔다. 예멘 난민을 빠르게 심사하기 위해 다른 출입국 상주 심사관과 통역관을 제주로 재배치하며 기타 지역에서 먼저 신청한 이들의 심사 대기기간은 늘어나게 되었다. 난민법 시행 이후 1차 심사 결과 통보를 위한 상한 기간이 6개월<sup><a href="#footnote_81_5" title="이후 6개월 간격으로 연장이 가능하나 당사자에게 심사 연장을 위한 사전 통보가 필요함" id="identifier_81_5"class="identifier">5</a></sup>로 조정되며, 난민법 시행 전 신청자들의 대기기간이 무기한 늘어났던 정황도 유사한 사례이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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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style="text-align: justify;">제주 예멘 이슈 이전부터 한국에서 난민 지위를 신청하고 심사과정을 밟고 있는 예멘 난민의 상황 또한 모순적이다. 그동안 300여 명에 가까운 전체 예멘 출신 난민 중<sup><a href="#footnote_81_6" title="제주 예멘 난민을 제외한 2016년 기준" id="identifier_81_6"class="identifier">6</a></sup> 단 1%에 불과한 이들만이 난민 지위를 인정받을 수 있었다. 인도적체류지위 인정 또한 극소수에 불과하다. 2015년 이후 국내에서 상대적으로 부각된 시리아 이슈와 1천여 건이 넘는 인도적체류지위 부여 대해 예멘 난민들은 “예멘 또한 시리아에 준한 상황이며, 난민 지위를 인정해달라”는 메시지를 캠페인 등을 통해 호소해왔다. 그러나 여전히 이들에 대한 심사는 ‘제주 예멘 난민’으로 분리되는 이들과 다른 속도와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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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style="text-align: justify;">법무부 난민과 등의 성과나 이익에 집중되는 사업 운영으로 인해 발생하는 난민 간의 권리보장 차이 또한 문제다. 영종도 출입국지원센터의 운용이나 재정착난민 정책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법무부는 전체 난민신청자에 대한 생존 대책은 묵과한 채 단 2%에 불과한 신청자들에게 28억 여 원의 예산을 투입하며 영종도 출입국외국인지원센터를 운영해왔다. 90명도 되지 않는 재정착난민에 대해서는 작년 한 해 2억 4천여만 원을 사용하였지만 900여 명의 난민인정자와 1,500여 명의 인도적체류자를 위해서 운영한 예산은 0원이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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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급히 글을 마무리하며 드리는 세 가지 </strong><strong>연대요청</strong></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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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style="text-align: justify;">첫째, 혐오범죄 제재 활동에 함께해주세요. 2018년 상반기 난민 반대와 관련한 일부 여론이 확산됨과 함께 혐오 범죄 사건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길거리를 걷다가 욕설을 듣는 일뿐만 아니라, 소셜서비스를 통해 살해 협박을 받은 사례도 신고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혐오 범죄를 방관할 수 없습니다.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혐오 범죄 가해자에 대한 제재를 적극적으로 시작하고자 합니다. 이에 혐오범죄 모니터링과 사례 접수, 악플 및 혐오성 콘텐츠 신고 등의 개입과 통·번역 활동으로 연대해주실 것을 요청드립니다.<br />
· 페이스북 페이지: <a href="https://www.facebook.com/SeeHateReportIt">Stop Hate Welcome Refugees</a><br />
· 혐오 범죄 신고: <a href="http://bit.ly/난민혐오범죄신고">http://bit.ly/난민혐오범죄신고</a></p>
<p style="text-align: justify;"> </p>
<p style="text-align: justify;">둘째, 차별금지법 제정 활동에 함께해주세요. 난민에 대한 차별은 비단 ‘난민’에만 국한된 이슈가 아닙니다. 지난 5월 31일 최초의 오프라인 난민 반대 집회를 개최한 일부 조직은 이전에도 성소수자나 HIV에이즈 감염인에 대한 가짜 정보를 배포하고, 시민에 공포를 조장하며 소수자의 권리를 적극적으로 억압해왔던 집단입니다. 차별의 경험이 반복되지 않기 위해서는 여러 노력이 필요하겠지만,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일도 중요한 일입니다. 난민이 본국에서 경험했던 일들을 다시는 한국에서 겪지 않을 수 있도록,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해 함께 힘을 모아주시길 부탁드립니다. <br />
· 차별금지법 제정연대 홈페이지: <a href="https://equalityact.kr/">https://equalityact.kr/</a></p>
<p style="text-align: justify;"> </p>
<p style="text-align: justify;">셋째, 난민법 개악 반대 캠페인에 연대해주세요. 이른바 '제주도 예멘 난민 사태' 이후 김진태, 이언주, 조경태, 권칠승, 강석호 의원 등은 충분한 숙의 없이 난민법 개악안을 내놓았습니다. 난민에 대한 가짜 뉴스는 한국의 일베와 같은 서구의 혐오 선동 사이트가 실제 출처였음에도 '해외 언론'이라는 거짓 출처를 바탕으로 일파만파 퍼졌습니다. 가짜뉴스가 확산됨에도 법무부는 난민에 대한 정확한 정보제공 없이 일부 부정적 여론을 '국민 여론'으로 기계적으로 반영하여 '가짜 난민'을 가려내겠다는 법 개악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공정하고 전문적인 난민심사와 제도 운영에 대한 근본적인 대안 없이, 난민의 권리를 되려 제한하고 통제하는 개악안들은 난민협약의 규정 및 취지에 정면으로 배치됩니다. 한국이 국제적 기준에 부합하는 난민 심사 제도를 운용하고, 한국에 온 모든 난민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개악안 반대와 난민법 개정에 힘을 모아주세요.</p>
<p style="text-align: justify;">· 개악반대 서명 운동 보러가기: <a href="https://nancen.org/1803">https://nancen.org/1803</a> (2019년 2월 28일 까지)</p>
<p style="text-align: justify;"> </p>
<p style="text-align: justify;">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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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div><div class="buttons-bottom center jinboblog-i-like-this-buttons"><a class="button-jinboblog" href="javascript:void(0);" title="스크랩으로 글 링크를 저장하세요" onclick="recommend('6789',81,'/glocalpoint','');"><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mini_chuchon.png" alt="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a><a class="button-twitter" href="http://twitter.com/home?status=http%3A%2F%2Fblog.jinbo.net%2Fglocalpoint%2F81+%22%EC%A0%9C%EC%A3%BC%20%EC%98%88%EB%A9%98%20%EC%9D%B4%EC%8A%88%EB%A5%BC%20%ED%86%B5%ED%95%B4%20%EB%B3%B8%20%ED%95%9C%EA%B5%AD%20%EB%82%9C%EB%AF%BC%EC%A0%95%EC%B1%85%22" target="_blank" title="트위터로 리트윗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twitter.png" alt="트위터로 리트윗하기" /></a><a class="button-facebook" href="http://www.facebook.com/sharer.php?u=http%3A%2F%2Fblog.jinbo.net%2Fglocalpoint%2F81&t=%EC%A0%9C%EC%A3%BC%20%EC%98%88%EB%A9%98%20%EC%9D%B4%EC%8A%88%EB%A5%BC%20%ED%86%B5%ED%95%B4%20%EB%B3%B8%20%ED%95%9C%EA%B5%AD%20%EB%82%9C%EB%AF%BC%EC%A0%95%EC%B1%85" target="_blank" title="페이스북에 공유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facebook.png" alt="페이스북에 공유하기" /></a><a class="button-delicious" href="http://delicious.com/save" onclick="window.open('http://delicious.com/save?v=5&noui&jump=close&url=http%3A%2F%2Fblog.jinbo.net%2Fglocalpoint%2F81&title=%EC%A0%9C%EC%A3%BC%20%EC%98%88%EB%A9%98%20%EC%9D%B4%EC%8A%88%EB%A5%BC%20%ED%86%B5%ED%95%B4%20%EB%B3%B8%20%ED%95%9C%EA%B5%AD%20%EB%82%9C%EB%AF%BC%EC%A0%95%EC%B1%85','delicious','toolbar=no,width=550,height=550'); return false;" title="딜리셔스에 북마크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delicious.png" alt="딜리셔스에 북마크" /></a></div><div class="footnotes"><ol><li id="footnote_81_1">언론은 ‘이들은 체류 목적으로 제주에 온 것으로 의심돼 출입국관리사무소가 주시하고 있다.’, ‘난민 신청자 상당수는 불법취업을 목적으로 브로커 등을 통해 난민을 신청하는 ‘가짜 난민’이다‘ 등을 언급했다.<a href="#identifier_81_1" class="backToTextAnchor"><img src="/plugins/../jplugins/CKEditor/images/icon_footnote_backtotext.gif" alt="텍스트로 돌아가기" /></a></li><li id="footnote_81_2">2018년 5월 기준, 법무부 행정정보공개청구 결과<a href="#identifier_81_2" class="backToTextAnchor"><img src="/plugins/../jplugins/CKEditor/images/icon_footnote_backtotext.gif" alt="텍스트로 돌아가기" /></a></li><li id="footnote_81_3">난민법 제 8조 3항에 의해 난민심사 면접 과정에서는 녹음 또는 녹화를 진행할 수 있다. 녹음녹화는 면접 과정에서 일어나는 오역, 폭언, 잘못된 면담기록 등의 인권침해 사례를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증거가 된다. 전년도 기준으로 전체 심사종료자 중 단 8%만이 녹음녹화를 할 수 있었다. 심사종료자 중 17,764건(92%)에 대해서는 녹음녹화가 진행되지 않았다. 녹음이 진행되지 않은 이유에 대한 정확한 통계는 없으나 난민인권센터에 방문한 사람들은 대부분 ① 녹음녹화 권리 고지 부재 ② 녹음녹화 요청을 난민신청자가 하더라도 면접관이 이를 무시 ③ 녹음녹화 기기의 고장 등의 이유로 해당 권리를 박탈당해왔으며, 그 결과 면접과정 인권침해의 증거가 없어 심사의 불이익을 겪고 있다.<a href="#identifier_81_3" class="backToTextAnchor"><img src="/plugins/../jplugins/CKEditor/images/icon_footnote_backtotext.gif" alt="텍스트로 돌아가기" /></a></li><li id="footnote_81_4">난민 심사 절차를 모두 마친 사람들이 전 과정에서 부당하게 인권침해를 겪어 다시 심사를 요청하거나, 새로운 난민 신청 사유가 발생하여 다시 처음부터 난민신청을 할 때, 이를 접수 받을지 여부를 판단하는 절차<a href="#identifier_81_4" class="backToTextAnchor"><img src="/plugins/../jplugins/CKEditor/images/icon_footnote_backtotext.gif" alt="텍스트로 돌아가기" /></a></li><li id="footnote_81_5">이후 6개월 간격으로 연장이 가능하나 당사자에게 심사 연장을 위한 사전 통보가 필요함<a href="#identifier_81_5" class="backToTextAnchor"><img src="/plugins/../jplugins/CKEditor/images/icon_footnote_backtotext.gif" alt="텍스트로 돌아가기" /></a></li><li id="footnote_81_6">제주 예멘 난민을 제외한 2016년 기준<a href="#identifier_81_6" class="backToTextAnchor"><img src="/plugins/../jplugins/CKEditor/images/icon_footnote_backtotext.gif" alt="텍스트로 돌아가기" /></a></li></ol></div><p><strong><a href="http://blog.jinbo.net/glocalpoint/81?commentInput=true#entry81WriteComment">댓글 쓰기</a></strong></p>평화의 시대, 저항의 자리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http://blog.jinbo.net/glocalpoint/792019-02-11T19:45:33+09:002019-02-11T16:57:14+09:00<p style="text-align: right;"> </p>
<p style="text-align: right;"><img alt="텍스트: [칼럼] 평화의 시대, 저항의 자리 # 시우 / 배경이미지: "양심에 따른 경역거부 무죄다", "평화가 이겼다 평화를 석방하라" 등의 문구가 적힌 피켓을 들고 있는 사람들 사진" src="/attach/6789/5640602406.jpg" style="opacity: 0.9; text-align: center; width: 700px; height: 262px;" /></p>
<p style="text-align: right;">시우 / <span style="text-align: right;">병역</span><span style="text-align: right;">거부자</span></p>
<p class="바탕글" style="line-height:180%;layout-grid-mode:char;margin-left:0.0pt;text-align:center;"> </p>
<p class="바탕글" style="line-height: 180%; margin-left: 0pt; text-align: justify;"><span lang="EN-US">2017년 11월, 저는 정치적 신념과 종교적 양심에 따라 입대를 거부했습니다. 이미 여러 차례 병역거부의 의지를 밝혔던 탓인지 병무청 담당자는 제게 앞으로의 법적 절차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하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오래 준비해왔던 순간을 지나고 있다는 생각에 약간 설렜던 것 같기도 하고, 결국 이렇게 되었구나 싶은 마음에 조금 차분했던 것 같기도 합니다. 괜찮다고 해야 할지, 그렇지 않다고 해야 할지 어느 쪽이든 그림자와 같은 여운이 남아 어떤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여전히 불투명한 미래와 불확실한 상황을 마주하며 삶의 중심을 잡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간의 시간을 되짚어보며 병역거부의 여정을 잠시 나누어보려고 합니다.</span></p>
<p class="바탕글" style="line-height: 180%; margin-left: 0pt; text-align: justify;"><!--[if !supportEmptyParas]--> <!--[endif]--> <o:p></o:p></p>
<p class="바탕글" style="line-height: 180%; margin-left: 0pt;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family:서울남산체 M;font-weight:bold;">흩어진, 연결된 삶의 조각</span></p>
<p class="바탕글" style="line-height: 180%; margin-left: 0pt; text-align: justify;"><!--[if !supportEmptyParas]--> <!--[endif]--> <o:p></o:p></p>
<p class="바탕글" style="line-height: 180%; margin-left: 0pt;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family:서울남산체 M;">병역거부자로서 자주 들었던 질문 중 하나는 ‘왜 병역거부를 하게 되었냐’는 다정하면서도 분명한 물음이었습니다. 아쉽게도 병역거부를 선택한 결정적인 계기가 무엇인지 묻는 이들에게 제가 할 수 있는 이야기는 많지 않았습니다. 언뜻 병역거부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어 보이지만 제게 선명한 흔적을 남겼던 삶의 조각들이 저를 조금씩 병역거부로 이끌었기 때문입니다. 입시에만 몰두해야 했던 학교 경험, 남성 집단과 꾸준히 불화했던 관계 경험, 세계의 적법한 주체로서 자신의 위치를 의심하지 않는 이들과 부딪쳤던 경험처럼 병역거부의 필연적인 이유는 아닐지 모르지만, 병역거부를 결심하는 데 중요한 배경이 되었던 일들이 제법 단단히 저를 붙잡고 있습니다.</span></p>
<p class="바탕글" style="line-height: 180%; margin-left: 0pt; text-align: justify;"> </p>
<p class="바탕글" style="line-height: 180%; margin-left: 0pt;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family:서울남산체 M;">물론 제게 특별한 영향을 준 사람들은 있었습니다. 그중에서도 그리스도인들과 퀴어 페미니스트들은 소중한 길잡이였습니다. 저는 교회 생활을 하면서 자신이 지향하는 가치에 따라 소박하고 정직하게 삶을 꾸려나가는 이들,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의 삶을 기꺼이 나누는 이들, ‘여기서는 마음을 놓아도 괜찮다’고 위로해주는 이들을 만났습니다. 저는 고통스러운 현실을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그리스도인들을 통해서 ‘평화의 씨앗을 심어서 정의의 열매를 거두는 일’이 무엇인지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 공동체에서 성장한 경험은 적대와 폭력을 생산하는 현 체제에 저항하며 서로 다른 이들의 급진적인 공존을 모색하는 일로, 규율과 복종으로 구축된 시공간을 강제하는 국가의 명령을 거부하고 저의 리듬과 선율에 집중하는 일로 이어졌습니다.</span></p>
<p class="바탕글" style="line-height: 180%; margin-left: 0pt; text-align: justify;"> </p>
<p class="바탕글" style="line-height: 180%; margin-left: 0pt;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family:서울남산체 M;">퀴어 페미니스트들 역시 병역거부를 탐색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페미니스트들은 군사적 개입을 통해 지배를 관철시키고 착취로 인한 초과이익을 누리는 주류 집단의 통치 전략을 비판해왔습니다. 군사주의, 자본주의, 가부장제, 비장애인중심주의, 이원 젠더 체계, 이성애 가족질서에 도전해온 페미니스트 계보는 병역거부를 구체적으로 그려보는 데 좋은 참조가 되었습니다. 동료 페미니스트들과 함께 새로운 세계를 만들기 위해 현장을 누빈 경험, 바람직한 인간이 누구인지 규정함으로써 인구를 등급화하는 국가와 자본의 기획에 맞선 경험, ‘인구 재생산의 책임을 지닌 여성 국민’도 ‘병역의 의무를 지닌 남성 국민’도 아닌, 이기적이고 불성실하며 퀴어한 몸들을 긍정한 경험은 병역거부와 점차 공명하기 시작했습니다.</span></p>
<p class="바탕글" style="line-height: 180%; margin-left: 0pt; text-align: justify;"><!--[if !supportEmptyParas]--> <!--[endif]--> <o:p></o:p></p>
<p class="바탕글" style="line-height: 180%; margin-left: 0pt; text-align: justify;"><strong>국가의 부재하는 현존</strong></p>
<p class="바탕글" style="line-height: 180%; margin-left: 0pt; text-align: justify;"><!--[if !supportEmptyParas]--> <!--[endif]--> <o:p></o:p></p>
<p class="바탕글" style="line-height: 180%; margin-left: 0pt;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family:서울남산체 M;">병역거부 선언 이후, 병무청은 저의 병역거부가 ‘정당한 사유’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저를 고발했고 저는 얼마 지나지 않아 경찰 조사를 받게 되었습니다. 크리스마스가 가까이 다가온 시기였던 터라 경찰서 주변이 밝고 화려한 조명등으로 장식되었던 모습이 기억납니다. 담당 경찰관은 친절하지도 무례하지도 않은, 건조하고 사무적인 태도의 공무원이었습니다. 조사를 받으면서 그에게 ‘조사 일정이 생각보다 일찍 잡힌 것 같다’고 이야기하자 그는 재미있는 말이라도 들었다는 듯 ‘조서 다섯 장짜리밖에 안 되는 사건인데 미룰 이유가 없다’며 웃으면서 대답했습니다. 그때 마음 한편이 무너지면서 아찔한 기분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조서 다섯 장짜리 사건. 저는 이따금 그의 말을 곱씹어보고는 합니다.</span></p>
<p class="바탕글" style="line-height: 180%; margin-left: 0pt; text-align: justify;"> </p>
<p class="바탕글" style="line-height: 180%; margin-left: 0pt;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family:서울남산체 M;">저는 경찰 조사를 통해 병역거부자가 어떤 위치에 놓이게 되는지 조금 더 체감할 수 있었습니다. 경찰관이 확인하고 싶었던 것은 단 두 가지, 정해진 날짜에 입대하지 않은 것이 맞는지와 여호와의 증인 신자인지 여부였습니다. 그는 여호와의 증인 병역거부자를 대상으로 작성해오던 조서의 내용에서 종교적 소속을 성공회로 바꾸는 정도의 수고를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에게는 증거를 모아서 사실관계를 맞춰보아야 할 필요도, 피의자의 협조를 애써 구해야 할 필요도 없는 간단한 사건이었으니까요. 병무청의 고발에서부터 경찰 조사, 검찰 수사, 법원 재판, 유죄 선고, 감옥 수감까지 이어지는 일련의 절차가 너무도 매끄럽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깨닫자 분노와 무력감이 동시에 찾아왔습니다.</span></p>
<p class="바탕글" style="line-height: 180%; margin-left: 0pt; text-align: justify;"> </p>
<p class="바탕글" style="line-height: 180%; margin-left: 0pt;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family:서울남산체 M;">저는 병역거부를 고민하던 시간만큼이나 병역거부를 선택한 이후에 곧잘 길을 잃고는 했습니다. 병역거부자에게 무죄를 선고하는 경우가 점점 많아지는 추세였지만, ‘정찰제 판결’이라는 이름이 붙을 정도로 1년 6개월 실형 선고가 표준화되어있는 상황에서 저의 신념을 밝히는 일이 얼마나 의미 있을지 확신하기 어려웠습니다. 국가는 대체복무를 인정하지 않는 징병제의 정당성을 굳이 밝힐 필요가 없지만, 피고인의 자리에 선 저는 병역거부가 정당함을 호소해야 하는 구도가 무척이나 답답했습니다. 무슨 말을 하더라도 결과를 바꾸기 어렵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일상을 정리해야 할지, 아니면 결과와는 상관없이 저의 선택을 스스로 존중한다는 면에서 차분하게 이야기를 풀어가야 할지 쉽사리 결정하지 못했습니다. 곁에서 지혜와 용기를 나누어준 동료들, 특히 병역거부 과정에 함께해준 ‘레인메이커’ 친구들이 없었다면 조금 더 헤맸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span></p>
<p class="바탕글" style="line-height: 180%; margin-left: 0pt; text-align: justify;"> </p>
<p class="바탕글" style="line-height: 180%; margin-left: 0pt;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family:서울남산체 M;">기대 반 체념 반의 심정으로 기다리던 1심에서 1년 6개월 실형이 선고되었습니다. 다행히 법정 구속을 면해서 당분간 일상을 지속할 수 있었지만 마음은 더 무거워졌습니다. 100일 동안의 법적 절차, 30분 동안의 경찰 조사, 3분 동안의 공판과 1분 40초 동안의 선고로 징역 1년 6개월을 살아야 하는 몸으로 처분될 수 있다는 사실에 당황스러울 따름이었습니다. 헌법재판소 결정과 대법원 판결이 예견되는 상황에서 법적 다툼을 계속해야 할지, 더 이상의 시간 소모를 멈추고 수감생활을 해야 할지, 무엇을 지켜내고 무엇을 포기해야 할지 여러 생각이 정신없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퀴어한 몸들을 처벌하는 것을 통해서 통치의 완결성과 정상성을 드러내는 국가와 어떻게 싸워야 할지에 대한 고민은 더욱 깊어졌습니다.</span></p>
<p class="바탕글" style="line-height: 180%; margin-left: 0pt; text-align: justify;"><!--[if !supportEmptyParas]--> <!--[endif]--> <o:p></o:p></p>
<p class="바탕글" style="line-height: 180%; margin-left: 0pt;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family:서울남산체 M;font-weight:bold;">변화하는 풍경, 그러나</span></p>
<p class="바탕글" style="line-height: 180%; margin-left: 0pt; text-align: justify;"><!--[if !supportEmptyParas]--> <!--[endif]--> <o:p></o:p></p>
<p class="바탕글" style="line-height: 180%; margin-left: 0pt;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family:서울남산체 M;">유죄 판결의 부당함을 주장하며 항소를 제기하고 2심을 기다리던 중, 병역거부와 관련된 중대한 변화를 마주할 수 있었습니다. 작년 6월에 헌법재판소는 ‘병역거부가 헌법적 권리에 속한다’는 의미의 결정을 내렸고, 이어서 11월에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병역거부자에게 유죄를 선고해온 그동안의 판례를 바꾸었습니다. 대체복무제를 도입해야 할 의무가 국회에 있다고 밝힌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있기까지, ‘공동체에서 다를 수 있는 자유를 인정’해야 한다는 대법원의 판결문이 나오기까지 오랜 기간 싸워온 병역거부 활동가들, 양심과 신념에 따라 평화의 길을 선택한 이들의 투쟁을 다시금 떠올려봅니다. 물론 2만 명의 달하는 병역거부자가 36,700년 동안 수감되는 동안 적극적 부작위로 일관해왔던 국가에 대한 깊은 절망감과 서늘한 분노는 사법적 변화만으로 쉬이 사라지지는 않을 듯합니다.</span></p>
<p class="바탕글" style="line-height: 180%; margin-left: 0pt; text-align: justify;"> </p>
<p class="바탕글" style="line-height: 180%; margin-left: 0pt;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family:서울남산체 M;">저는 헌법재판소 결정과 대법원 판결 덕분에 2심 재판에 보다 가벼운 마음으로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검찰의 수사 과정은 아예 생략되고, 재판의 심리 절차가 충분하지 않았던 때와는 달리 병역거부와 관련된 구체적인 논의가 가능해졌다는 변화가 소중하게 느껴졌습니다. 물론 넘어야 하는 벽은 아직도 높기만 합니다. 검찰에서는 1인칭 슈팅게임 접속 기록을 ‘진정한’ 양심을 가리는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집시법이나 도로교통법 위반과 같은 전과기록을 이유로 병역거부의 진정성을 의심하기도 합니다. 병역거부자가 고민해온 과정을 구체적으로 살펴야 한다고 하지만, 정작 병역거부자에게 던지는 질문이 경찰과 군대에 대한 입장이나 북한 체제에 대한 관점일 때도 있습니다. 종교적 병역거부자의 경우에는 개인의 양심 형성과정보다 소속된 종교의 공식적인 교리에 중점을 두는 경향도 나타납니다.</span></p>
<p class="바탕글" style="line-height: 180%; margin-left: 0pt; text-align: justify;"> </p>
<p class="바탕글" style="line-height: 180%; margin-left: 0pt;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family:서울남산체 M;">병역거부 의제를 대하는 정부의 태도 역시 문제적이긴 마찬가지입니다. 국제적 기준에 턱없이 부족한 것은 물론이고 한숨이 나올 만큼 징벌적인 정부의 대체복무법안을 보면서, 정부가 지키려고 하는 것이 헌법적 가치로서 재확인된 양심과 신념인지 아니면 정부에 대한 지지율인지 질문하게 됩니다. ‘소모적 논란을 줄인다는 명목’으로 양심적 병역거부자를 ‘종교적 신앙 등에 병역거부자’로 부르겠다는 정부의 발표에 국방부 담당자와 청와대 관계자가 헌법재판소 결정문과 대법원 판결문을 제대로 읽어보았는지 의심이 들기도 했습니다. 병역거부자를 처벌하는 데만 급급해온 정부는 병역거부자 처벌이 헌법에 부합하지도, 올바른 법률 해석에 근거하지도 않다는 사법적 판단에도 반성은커녕 병역거부자에 대한 보수적인 집단의 공격과 적대를 정당한 반응으로 승인하고 있을 뿐입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가끔씩은 ‘내가 이러려고 병역거부를 했나’ 하는 허탈감에 씁쓸한 마음을 달래야 하는 날도 있습니다. 하지만 고통스럽게도, 어쩌면 다행스럽게도 게임은 이제부터 시작이 아닐까요?</span></p>
<p class="바탕글" style="line-height: 180%; margin-left: 0pt; text-align: justify;"><!--[if !supportEmptyParas]--> <!--[endif]--> <o:p></o:p></p>
<p class="바탕글" style="line-height: 180%; margin-left: 0pt;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family:서울남산체 M;font-weight:bold;">끝나지 않은 질문들</span></p>
<p class="바탕글" style="line-height: 180%; margin-left: 0pt; text-align: justify;"><!--[if !supportEmptyParas]--> <!--[endif]--> <o:p></o:p></p>
<p class="바탕글" style="line-height: 180%; margin-left: 0pt; text-align: justify;"><span lang="EN-US">2018년에 있었던 여러 사건은 역사의 한 페이지를 넘기는 일의 어려움과 소중함을 알려주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지적하는 것처럼, 병역거부를 둘러싼 문제는 대체복무의 법제화로 매듭지어진 것이 아니라 보다 치열하고 까다로운 질문으로 재구성되고 있습니다. 병역거부는 양심과 신념의 자유라는 헌법적 권리를 어떻게 실현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일 뿐만 아니라 몸을 어떻게 식별하고 해석할 것인지, 인구를 어떻게 배치할 것인지, 안전과 질서, 자율성과 결정권과 같은 자원을 어떻게 분배할 것인지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병역거부가 던지는 평화, 정의, 국가, 법, 몸, 인간성, 정상성에 대한 질문은 어떤 이야기를 가능하게 할까요? 이른바 ‘진정한’ 병역거부자를 가려내려는 시도 속에서 지워지는 존재들은 누구일까요? 거부와 저항이라는 삶의 양식은 어떻게 번역되고 변주되며 인식될 수 있을까요?</span></p>
<p class="바탕글" style="line-height: 180%; margin-left: 0pt; text-align: justify;"> </p>
<p class="바탕글" style="line-height: 180%; margin-left: 0pt;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family:서울남산체 M;">병역거부를 불평등한 세계의 규칙을 다르게 반복하려는 실천으로 이해한다면, 우리는 배제된 이들, 추방된 이들, 사라진 이들, 퀴어한 이들의 자리를 기억하는 평화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병역거부를 경유해서 만나게 되는 평화가 주어진 영토 안에서 ‘우리’의 번영과 안전을 보장받는 기획을 넘어서, 지속 불가능한 사회의 현실을 ‘그들’에 대한 차별과 혐오로 덮으려는 권력에 맞서, 감히 지금 당장 모두를 위한 정의를 요구하는 무례한 평화라고 생각합니다. 법과 제도의 구획을 초과해버리는 평화, 시끄럽고 노골적이며 불쾌한 평화, 그리고 어느 책의 제목처럼 저항하는 평화는 아마도 국제질서의 재배치가 만들어낸 화해의 분위기 속에서 ‘평화가 경제’임을 선언하는 곳이 아니라 ‘정당하고 가치 있는 일을 위해서는 죽어도 아무런 한이 없다’는 마음으로 투쟁하는 곳에서, 한국을 찾은 뜻밖의 여행자들을 환대하며 경계를 가로지르는 곳에서, ‘낙태가 죄라면 범인은 국가’라고 외치는 곳에서 피어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span></p>
<p class="바탕글" style="line-height: 180%; margin-left: 0pt; text-align: justify;"> </p>
<p class="바탕글" style="line-height: 180%; margin-left: 0pt;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family:서울남산체 M;">질문은 계속되고 고민은 이어집니다. 누구와 싸우고 있는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어디까지 왔고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 머릿속이 복잡해지기도 합니다. 사회적 합의 부족과 시기상조라는 주장을 무기처럼 휘두르는 국가, 퀴어한 몸들에 낙인을 찍는 국가와 동일시하며 ‘나중에’를 외치는 사람들, 특히 폭력적인 군대 경험을 소수자들을 지배하고 침묵시키는 방식으로 인용해온 ‘남성’ 집단의 정치학에 어떻게 도전해야 하는지 답답한 마음이 앞서기도 합니다. 저는 혼란스럽고 불안한 마음을 담백하고 진솔하게 마주할 수 있는 방법을, 저항하는 평화의 이야기를 힘 있는 질문으로 만드는 방법을 여전히 찾고 있습니다. 그 과정이 새로운 길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span></p>
<p class="바탕글" style="line-height: 180%; margin-left: 0pt; text-align: justify;"> </p>
<p class="바탕글" style="line-height: 180%; margin-left: 0pt;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family:서울남산체 M;">부디 평화의 시대, 저항의 자리에 있는 모든 분들께 평화가 있기를 간절히 빕니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p>
<p style="text-align: justify;">헤더 배경이미지: ⓒ <a href="https://www.flickr.com/photos/pspd1994/44619935135" target="_blank">참여연대</a></p>
<fieldset style="margin:20px 0px 20px 0px;padding:5px;"><legend><span><strong>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strong></span></legend><!--Creative Commons License--><div style="float: left; width: 88px; margin-top: 3px;"><a rel="license" href="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nd/2.0/kr/" target=_blank><img alt="Creative Commons License" style="border-width: 0" src="http://i.creativecommons.org/l/by-nc-nd/2.0/kr/88x31.png"/></a></div><div style="margin-left: 92px; margin-top: 3px; text-align: justify;">이 저작물은 <a rel="license" href="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nd/2.0/kr/" target=_blank>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2.0 대한민국 라이센스</a>에 따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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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4>"<a href="http://blog.jinbo.net/glocalpoint/category/35">5호_2019년 1월</a> / <a href="http://blog.jinbo.net/glocalpoint/category/38">칼럼</a>" 분류의 다른 글</h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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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style="text-align: center;"><img alt="텍스트: [특집] 어떤 미투 # 안팎 / 배경이미지: 시멘트 벽 위에 "#METOO"라는 문구가 여러 글에서 오려 붙인 듯한 낱자들로 적혀 있다." src="/attach/6789/1123646558.jpg" style="width: 700px; height: 262px;" /></p>
<p> </p>
<p dir="ltr" style="line-height:1.38;margin-top:0pt;margin-bottom:0pt;text-align: right;"><span id="docs-internal-guid-a1baea48-7fff-eb27-7f3c-bdfe57aa05ad"><span style="font-size: 11pt; font-family: Arial; color: rgb(0, 0, 0); background-color: transparent; font-variant-numeric: normal; font-variant-east-asian: normal; vertical-align: baseline; white-space: pre-wrap;">안팎 / 웹진 <글로컬포인트> 기획편집팀</span></span></p>
<p dir="ltr" style="line-height:1.38;margin-top:0pt;margin-bottom:0pt;"><span id="docs-internal-guid-a1baea48-7fff-eb27-7f3c-bdfe57aa05ad"><span style="font-size: 11pt; font-family: Arial; color: rgb(0, 0, 0); background-color: transparent; font-variant-numeric: normal; font-variant-east-asian: normal; vertical-align: baseline; white-space: pre-wrap;"> </span><span style="font-size: 11pt; font-family: Arial; color: rgb(0, 0, 0); background-color: transparent; font-variant-numeric: normal; font-variant-east-asian: normal; vertical-align: baseline; white-space: pre-wrap;"> </span><span style="font-size: 11pt; font-family: Arial; color: rgb(0, 0, 0); background-color: transparent; font-variant-numeric: normal; font-variant-east-asian: normal; vertical-align: baseline; white-space: pre-wrap;"> </span><span style="font-size: 11pt; font-family: Arial; color: rgb(0, 0, 0); background-color: transparent; font-variant-numeric: normal; font-variant-east-asian: normal; vertical-align: baseline; white-space: pre-wrap;"> </span><span style="font-size: 11pt; font-family: Arial; color: rgb(0, 0, 0); background-color: transparent; font-variant-numeric: normal; font-variant-east-asian: normal; vertical-align: baseline; white-space: pre-wrap;"> </span></span></p>
<p dir="ltr" style="line-height:1.38;margin-top:0pt;margin-bottom:0pt;text-align: justify;">*<br />
2013년의 일이다. 어느 생매매 업소 밀집 지역에 붙었다는, 이내 ‘삼촌들’(업소를 운영하는 남성들)이 떼어 버렸다는 대자보 한 장이 화제가 되었다. 당시 많은 이들이 썼듯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제목이 붙은 이 대자보는 “저는 성매매를 하는 여성입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했다.</p>
<p dir="ltr" style="line-height:1.38;margin-top:0pt;margin-bottom:0pt;text-align: justify;"> </p>
<blockquote>
<p dir="ltr" style="line-height: 1.38; margin-top: 0pt; margin-bottom: 0pt; text-align: justify; margin-left: 40px;"><span style="text-align: justify;">안녕들 하십니까</span><br style="text-align: justify;" />
<span style="text-align: justify;">저는 성매매를 하는 여성입니다. 요즘 ‘안녕들 하십니까’가 정말 유행이기는 한가 봅니다. 성매매를 하러 온 구매자 남성이 자신도 자보를 썼다며 자랑스럽게 얘기를 하더군요. 거기에 제대로 호응하지 않았다고 주먹질을 당해야 했습니다. 돈을 냈으니 무엇이든 해도 된다는 논리에 구타 당하고 욕먹고 성병예방도 할 수 없고 수치스러운 말들을 듣고 내가 성매매 하는 여성이라는 걸 알고 강간하려 하는 사람들. 돈의 출처는 묻지 않고 그저 돈 벌어오라고 하는 사람들. 결혼도 안 한 여성이 산부인과 드나든다고 경멸하는 눈초리. 쉽게 돈 번다고 마냥 욕하는 사람들[,] 성매매 한 번에 몇 십만원을 지출할 수 있는 남성들의 재력은 묻지 않고 여성에게만 욕하는 사람들 때문에 나는 괜찮지 않습니다. 낙태를 하고도 돈을 벌기 위해 쉬지도 못하고 오늘도 성매매를 하러갑니다. 더 이상 이렇게 살고싶지 않습니다. 나는 안녕하지 못합니다.</span><br style="text-align: justify;" />
<span style="text-align: justify;">나도 말 할 수 있는 사람이다</span></p>
</blockquote>
<p dir="ltr" style="line-height: 1.38; margin-top: 0pt; margin-bottom: 0pt; text-align: justify; margin-left: 40px;"> </p>
<p dir="ltr" style="line-height:1.38;margin-top:0pt;margin-bottom:0pt;text-align: justify;">많은 공감과 지지를 얻었던 것으로 기억하지만, 의심하는 이들도 있었다. ‘안녕들 하십니까’ 운동을 깎아 내리기 위해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냐는둥 하고 말이다. 저 대자보를 의심했던 사람들, 혹은 “성판매 여성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페이지를 일방적으로 삭제했던 페이스북<sup><a href="http://blog.jinbo.net/glocalpoint/77#footnote_77_1" title="페이스북은 2017년 8월 일방적으로 페이지를 삭제했다가 수일만에 1200여 명의 항의 서명이 모이자 별다른 해명 없이 복구 조치를 취했다. 페이지 주소는 https://www.facebook.com/성판매-여성-안녕들-하십니까-184300758649712/ 운영자 이소희가 페이지에 게시한 글들과 다른 필자들의 글을 엮은 책으로 『나도 말할 수 있는 사람이다』(도서출판 여이연, 2018)가 있으며(이 책은 1쇄를 낸 후 절판이 결정되었는데, 절판 경과에 대해서는 fb.com/gynotopia/posts/1930658413693709 참고) 이외에 성판매업 종사 당사자의 이야기를 공유하는 페이지로 “성노동자 대나무숲”(fb.com/sexworkersbamboo), “모던바 근무자의 업무일지”(fb.com/bar0000alba) 등이 있다." id="identifier_77_1"class="identifier">1</a></sup> 등을 생각하면 “나도 말 할 수 있는 사람이다”라는 마지막 문장의 무게는 가볍지 않다.</p>
<p dir="ltr" style="line-height:1.38;margin-top:0pt;margin-bottom:0pt;text-align: justify;"> </p>
<p dir="ltr" style="line-height:1.38;margin-top:0pt;margin-bottom:0pt;text-align: justify;">그러나 저 말은 쉽게 먹혀들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2016년의 “#○○계_내_성폭력” 해시태그 운동에 이어 2018년 초 “미투(Me too)”라는 이름으로 전개된 성폭력 고발 운동 가운데 유독 논란거리가 된 것이 있었다. (한국에서 성폭력 피해를 말하는 자리에는 언제나 의심과 비난이 따라붙곤 하지만) ‘진짜 피해자에게 사과하라’, ‘미투의 본질을 흐린다’는 식의 ‘악플’이 몰렸던 그 게시물은 다름아닌 성판매 여성의 성폭력 피해 경험을 밝히는 “성판매 여성 안녕들 하십니까” 페이지의 글이었다. ‘안녕들 하십니까’ 운동을 깎아내리려는 것이라는 의심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한 반응이 다시 한 번 반복된 것이다.<br />
그 페이지에 종종 달리곤 했던 ‘닥쳐, 이 창녀야’ 수준의 댓글들과 연장선상에 있는 저러한 반응들은 한국에서 성판매 여성이 처한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감히 말하건대, 이것은 한국에서 여성 일반이 처한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p>
<p dir="ltr" style="line-height:1.38;margin-top:0pt;margin-bottom:0pt;text-align: justify;"> </p>
<p dir="ltr" style="line-height:1.38;margin-top:0pt;margin-bottom:0pt;text-align: justify;"> </p>
<p dir="ltr" style="line-height:1.38;margin-top:0pt;margin-bottom:0pt;text-align: justify;">*<br />
성판매 경험을 묘사할 때엔 ― 인신매매를 비롯한 직접적인 강요를 당한 것이 아닌 경우에도 ― ‘성매매로 내몰렸다’는 표현이 종종 사용된다. 건강을 비롯한 가장 기초적인 수준의 안전조차도 보장되지 않는 환경에서 매우 낮은 수준의 협상력 만을 가진 채 일하게 되는 것이므로 내몰렸다는 말은 적지 않은 경우 적절해 보인다. 제도적인 보호를 받지 못하며, 구매자나 관리자의 폭력에 노출되기 쉽다는 점 등에서 모두 말이다.<sup><a href="#footnote_77_2" title="‘개인의 가장 내밀한 영역을 타인에게 내어보여야 한다’는 식의 말은 의식적으로 배제했다." id="identifier_77_2"class="identifier">2</a></sup></p>
<p dir="ltr" style="line-height:1.38;margin-top:0pt;margin-bottom:0pt;text-align: justify;"> </p>
<p dir="ltr" style="line-height:1.38;margin-top:0pt;margin-bottom:0pt;text-align: justify;">그러나 이 당연한 말을 조금 더 뜯어 보기로 하자. 성판매 행위의 비범죄화를 비롯한 몇 가지 조치들로써 나아질 수 있는 문제들이 있을 것이다. 임금을 받지 못했을 때, 폭행을 당했을 때, 휴일을 보장 받지 못했을 때, 혹은 이 일로 인해 병에 걸리거나 상해를 입었을 때, 신고할 수 있고 국가가 구제 조치를 취한다면 저 ‘내몰림’이 지금과 같이 출구 없는 형태의 내몰림은 아니게 될 것이다. 여기에다 이를테면 복지제도 같은 것을 통해 저 열악한 환경을 택해야 하는 상황 자체를 줄인다면, 어쩌면 문제는 해결된 듯 보인다.</p>
<p dir="ltr" style="line-height:1.38;margin-top:0pt;margin-bottom:0pt;text-align: justify;"><br />
하지만 또 한 가지, 놓쳐서는 안 될 성판매의 조건이 있다. 바로 성적 규범에의 극단적인 종속이 요구된다는 점이다. ‘사이즈’나 ‘스펙’ 혹은 ‘마인드’와 같은 은어들은 특정 형태의 외모나 순종성 등 사회가 그리는 성적 규범으로서의 ‘여성성’이 성적 거래의 현장에서 극단적인 형태로 드러남을 보여준다. 또한 이 여성성이라는 것에 순종성이라는 것이 포함되어 있는 한, 이것은 순종의 거부에 대해 가해지는 물리적 폭력과도 직접적으로 연결됨을 잊지 말하야 할 것이다.</p>
<p dir="ltr" style="line-height:1.38;margin-top:0pt;margin-bottom:0pt;text-align: justify;"><br />
한국과는 다른 여성성 관념을 가진 사회가 있다는 점을, 혹은 한국 내에조차 주류적 관념과는 다른 어떤 것을 가진 그룹이 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이것은 성 문화 일반의 층위에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문제일 테다. 어째서 성판매는 단순히 성적 행위 ― 예컨대 다양한 형태의 성교 ― 를 판매하는 일이 아니라 ‘전적인 순종’을 함께 판매하는 일로서 존재하는가? 구매자의 폭력은 어째서 단순히 개인의 일탈이 아니라 그다지도 쉽게 정당화되고 타인들의 (‘성판매 여성은 자신의 성을 내어 놓은 것이므로 성폭력 피해를 말할 자격이 없다’는 식의) 언어로 다시금 반복되는 당연한 현상으로서 존재하는가?<br />
달리 말하자면, 어째서 성판매는 인격의 판매로 치환되어 이해되는가? 성을 산 것은 곧 인격을 산 것이므로 마음대로 해도 좋다는 생각은 어떤 토대를 갖는가? 성이 인격을 대표할 정도로 중대한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일까. 많은 남성들은 그의 성적 수행들이 비규범적일 때조차 그의 삶 전반이 부정당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예컨대 성범죄를 저질렀을 때조차 사회적 지위에 아무런 타격을 입지 않기도 한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그렇지는 않아 보인다. 그보다는 여성의 인격이란 성 이외의 것이 아니라고 여겨진다는 점을 들어야 할 것 같다.</p>
<p dir="ltr" style="line-height:1.38;margin-top:0pt;margin-bottom:0pt;text-align: justify;"><br />
‘성’이 아닌 다른 영역(으로 이야기되는 것)을 구매할 때, 그러니까 어떤 형태로든 여성을 고용할 때, 같은 일이 반복된다. 업무의 종류나 수준에 상관 없이 여성이 ‘직장의 꽃’이 될 때, 노동자 여성에게 업무상 필요한 노동이 아니라 여러가지 성적인 (혹은 성별화된) 노동들 ― 식사나 다과 준비부터 웃음 짓기에 이르기까지 ― 이 요구될 때, 성적인 폭력들을 받아들이는 것이 당연한 일로 이야기 될 때. 그리고 이것은 다시 한 번, 고용 관계 바깥의 다른 모든 관계들에서 반복된다. 성적인 수행들을 연인·배우자 여성에게 의무로 부과할 때, 혹은 여성의 모든 행동을 (종종 거절의 표시마저도) 성적인 신호로 읽을 때.</p>
<p dir="ltr" style="line-height:1.38;margin-top:0pt;margin-bottom:0pt;text-align: justify;">이렇게 생각한다면 성판매 여성이 성판매 과정에서 겪는 폭력들, 폭력으로 불리지조차 못하는 여러 강압들은 이 사회 전반에 횡행하는 성적 폭력들과 질적으로 다른 것이 아니다. 성판매 여성이 폭력에 노출되어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일 뒤에 있는 것은 당연하게도 단순히 성매매라는 현상을 없애야 한다는 결론(만)이 아니다. 기어이 성매매라는 현상을 존속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금 당장 그곳에 있을 수밖에 없는 이들이, 그리고 그와 같은 원리를 갖고 있는 이 사회 모든 곳에 있는 이들이, 성으로 제한되지 않는 인격을 되찾을 길을 탐색하는 과정으로서의 성판매 노동 조건 변화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p>
<p dir="ltr" style="line-height:1.38;margin-top:0pt;margin-bottom:0pt;text-align: justify;"> </p>
<p dir="ltr" style="line-height:1.38;margin-top:0pt;margin-bottom:0pt;text-align: justify;"> </p>
<p dir="ltr" style="line-height:1.38;margin-top:0pt;margin-bottom:0pt;text-align: justify;">*<br />
‘성판매 여성은 성폭력을 당하고도 신고조차 할수 없다’는 문제 의식 이상의 지점에서, 성판매 노동 조건을 바꾸려는 시도와 미투 운동 일반<sup><a href="#footnote_77_3" title="성판매 여성의 미투와 구분되는 일반 미투라는 것이 있다는 말이 아니다. ‘미투 일반’이란 성판매 여성의 것을 포함한 모든 경우의 미투를 가리킨다." id="identifier_77_3"class="identifier">3</a></sup>이 만난다는 뜻이다. 성폭력을 고발하고 비판하는 것은 몇 가지 특정한 행위들을 금지하는 데에서 끝나지 않는다. 여성은 인격체가 아니기에 성적으로 정복해도 좋다는, 역으로 성 이외의 인격이란 없기에 성적으로 정복하면 모든 인격을 지배한 것이라는 관념에 기반한 성폭력 일반에 저항하는 운동으로서의 미투 운동은 결국 성폭력이라는 개개 행위들을 고발하고 처벌하려는 운동이 아니라 성에 대한 관념 전반을 바꾸는 운동일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p>
<p dir="ltr" style="line-height:1.38;margin-top:0pt;margin-bottom:0pt;text-align: justify;"><br />
안희정의 성폭력 혐의를 다루는 법정의 재판관은 “정조”라는 단어를 입에 올렸다. 법조문에서는 사라졌지만 여전히 이 사회의 굳건한 기둥으로 남아 있는 그 단어를, 여성이 지키고 가꾸어야 할 유일한 것으로 성(적 순결)을 말하는 그 단어를. 그러나 성 이상의 것이 아닌 여성이 그것을 소유할 수는 없으므로 결국 여성이란 그를 소유할 남성을 위해서만 지켜질 가치가 있으며 그 남성이 요구할 때 언제나 전적으로 바쳐져야 하는 것임을 말하는 그 단어를 말이다.</p>
<p dir="ltr" style="line-height:1.38;margin-top:0pt;margin-bottom:0pt;text-align: justify;"><br />
‘미투 운동’ 앞에서조차 반복되어 입에 오르는 이 “정조”라는 말은, 남성의 소유물로서의 스스로를 지키지 못한 여성을 비난하는 데에 동원되어 왔다. 그처럼 성이 여성 인격의 전부인 이 사회에서 성을 내어 놓은 성판매 여성은 곧 스스로의 인격을 포기한 사람으로 그려진다. 성판매 여성의 말하기를 의심하고 성폭력 고발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된다. 그에 맞서 성을 파는 일 ― 저들의 말로, 정조를 지키지 않는 일 ― 이 곧 인간임을 포기하는 일이 아님을 말하는 실천들은 곧 이 사회 모든 영역에서 여성이 지켜야 할 것 ― 따라서 주권자로서의 여성이 거주하는 사회가 지켜야 할 것 ― 이 정조가 아니라 인격적 존재로서의 여성임을 말하는 실천들일 것이다. 때로 다른 이름이 붙고 때로 다른 취급을 받는 이 실천들은, 실은 동떨어져 있지 않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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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td><a href="http://blog.jinbo.net/glocalpoint/76">퀴어 커뮤니티와 성폭력</a></td></tr>
<tr><td><a href="http://blog.jinbo.net/glocalpoint/75">‘#MeToo’, 법 너머의 변화를 위하여</a></td></tr>
</table></div><div class="buttons-bottom center jinboblog-i-like-this-buttons"><a class="button-jinboblog" href="javascript:void(0);" title="스크랩으로 글 링크를 저장하세요" onclick="recommend('6789',77,'/glocalpoint','');"><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mini_chuchon.png" alt="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a><a class="button-twitter" href="http://twitter.com/home?status=http%3A%2F%2Fblog.jinbo.net%2Fglocalpoint%2F77+%22%EC%96%B4%EB%96%A4%20%EB%AF%B8%ED%88%AC%22" target="_blank" title="트위터로 리트윗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twitter.png" alt="트위터로 리트윗하기" /></a><a class="button-facebook" href="http://www.facebook.com/sharer.php?u=http%3A%2F%2Fblog.jinbo.net%2Fglocalpoint%2F77&t=%EC%96%B4%EB%96%A4%20%EB%AF%B8%ED%88%AC" target="_blank" title="페이스북에 공유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facebook.png" alt="페이스북에 공유하기" /></a><a class="button-delicious" href="http://delicious.com/save" onclick="window.open('http://delicious.com/save?v=5&noui&jump=close&url=http%3A%2F%2Fblog.jinbo.net%2Fglocalpoint%2F77&title=%EC%96%B4%EB%96%A4%20%EB%AF%B8%ED%88%AC','delicious','toolbar=no,width=550,height=550'); return false;" title="딜리셔스에 북마크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delicious.png" alt="딜리셔스에 북마크" /></a></div><div class="footnotes"><ol><li id="footnote_77_1">페이스북은 2017년 8월 일방적으로 페이지를 삭제했다가 수일만에 1200여 명의 항의 서명이 모이자 별다른 해명 없이 복구 조치를 취했다. 페이지 주소는 https://www.facebook.com/성판매-여성-안녕들-하십니까-184300758649712/ 운영자 이소희가 페이지에 게시한 글들과 다른 필자들의 글을 엮은 책으로 『나도 말할 수 있는 사람이다』(도서출판 여이연, 2018)가 있으며(이 책은 1쇄를 낸 후 절판이 결정되었는데, 절판 경과에 대해서는 fb.com/gynotopia/posts/1930658413693709 참고) 이외에 성판매업 종사 당사자의 이야기를 공유하는 페이지로 “성노동자 대나무숲”(fb.com/sexworkersbamboo), “모던바 근무자의 업무일지”(fb.com/bar0000alba) 등이 있다.<a href="#identifier_77_1" class="backToTextAnchor"><img src="/plugins/../jplugins/CKEditor/images/icon_footnote_backtotext.gif" alt="텍스트로 돌아가기" /></a></li><li id="footnote_77_2">‘개인의 가장 내밀한 영역을 타인에게 내어보여야 한다’는 식의 말은 의식적으로 배제했다.<a href="#identifier_77_2" class="backToTextAnchor"><img src="/plugins/../jplugins/CKEditor/images/icon_footnote_backtotext.gif" alt="텍스트로 돌아가기" /></a></li><li id="footnote_77_3">성판매 여성의 미투와 구분되는 일반 미투라는 것이 있다는 말이 아니다. ‘미투 일반’이란 성판매 여성의 것을 포함한 모든 경우의 미투를 가리킨다.<a href="#identifier_77_3" class="backToTextAnchor"><img src="/plugins/../jplugins/CKEditor/images/icon_footnote_backtotext.gif" alt="텍스트로 돌아가기" /></a></li></ol></div><p><strong><a href="http://blog.jinbo.net/glocalpoint/77?commentInput=true#entry77WriteComment">댓글 쓰기</a></strong></p>퀴어 커뮤니티와 성폭력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http://blog.jinbo.net/glocalpoint/762019-02-12T14:56:05+09:002019-02-11T16:54:16+09:00<p> </p>
<p> </p>
<p style="text-align: center;"><img alt="텍스트: 퀴어 커뮤니티와 성폭력 # 잇을 / 배경이미지: 시멘트 벽 위에 "#METOO"라는 문구가 여러 글에서 오려 붙인 듯한 낱자들로 적혀 있다." src="/attach/6789/5995850638.jpg" style="width: 700px; height: 262px;" /></p>
<p> </p>
<p> </p>
<p dir="ltr" style="line-height:1.38;margin-top:0pt;margin-bottom:0pt;"> </p>
<p> </p>
<p dir="ltr" style="line-height:1.38;margin-top:0pt;margin-bottom:0pt;text-align: right;"><span style="font-size:14px;"><span style="font-family:arial,helvetica,sans-serif;"><span id="docs-internal-guid-d37d47ea-7fff-cdd2-7098-25f41b477cd2"><span style="color: rgb(0, 0, 0); background-color: transparent; font-variant-numeric: normal; font-variant-east-asian: normal; vertical-align: baseline; white-space: pre-wrap;">잇을 / 언니네트워크 </span></span></span></span></p>
<p dir="ltr" style="line-height:1.38;margin-top:0pt;margin-bottom:0pt;text-align: right;"><span style="font-size:14px;"><span style="font-family:arial,helvetica,sans-serif;"><span id="docs-internal-guid-d37d47ea-7fff-cdd2-7098-25f41b477cd2"><span style="color: rgb(0, 0, 0); background-color: transparent; font-variant-numeric: normal; font-variant-east-asian: normal; vertical-align: baseline; white-space: pre-wrap;">*이 글은 언니네트워크 및 무지개행동 반성폭력교육TF에서의 논의를 정리했다.</span></span></span></span></p>
<p><br />
</p>
<p dir="ltr" style="line-height:1.38;margin-top:0pt;margin-bottom:0pt;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14px;"><span style="font-family:arial,helvetica,sans-serif;"><span id="docs-internal-guid-d37d47ea-7fff-cdd2-7098-25f41b477cd2"><span style="color: rgb(0, 0, 0); background-color: transparent; font-variant-numeric: normal; font-variant-east-asian: normal; vertical-align: baseline; white-space: pre-wrap;">성폭력을 주로 암수범죄라고 한다. 신고부터 여전히 극히 적기 때문이다. 피해자가 성소수자라면 더욱 그런 것 같다. 많은 성소수자가 성폭력피해 상담전화를 걸기 전에 한 번 더 고민할 것이다. 미지의 상담원이 성소수자를 존중하고 이해하는 사람일지, 성소수자에 대한 편견 없이 자신의 성폭력 피해경험을 경청하여 줄지 두렵다. 상담을 해도 성소수자임을 밝히지 않고 수화기를 내려놓기도 한다. </span></span></span></span></p>
<p> </p>
<p dir="ltr" style="line-height:1.38;margin-top:0pt;margin-bottom:0pt;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14px;"><span style="font-family:arial,helvetica,sans-serif;"><span id="docs-internal-guid-d37d47ea-7fff-cdd2-7098-25f41b477cd2"><span style="color: rgb(0, 0, 0); background-color: transparent; font-variant-numeric: normal; font-variant-east-asian: normal; vertical-align: baseline; white-space: pre-wrap;"><한국 LGBTI 사회적 욕구조사(2014)>에 따르면 조사에 참여한 성소수자 3,208명 중 레즈비언의 64.3%, 트랜스젠더 여성의 59.7%, 트랜스젠더 남성의 68.5%가 성폭력 및 성적 괴롭힘이 ‘자주 또는 종종 일어난다’고 응답했다. 다수의 성소수자가 성폭력 피해를 겪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여성가족부 성폭력 실태조사>나 성폭력상담소의 상담통계 등에서는 성소수자 대상의 성폭력이나 성소수자 간 성폭력이 파악되지는 않는다. 피해자의 대다수가 여성이고 가해자의 대다수는 남성이라는 점만 파악이 가능하다.(<2017년 한국성폭력상담소 상담통계> 전체 상담 2,118회(1,414건) 중 피해자는 여성이 94.5%, 가해자는 남성이 94%) 성소수자 단체에 상담하는 경우도 있겠으나 이 경우에도 총 상담건수를 확인할 방법은 없다.</span></span></span></span></p>
<p> </p>
<p dir="ltr" style="line-height:1.38;margin-top:0pt;margin-bottom:0pt;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14px;"><span style="font-family:arial,helvetica,sans-serif;"><span id="docs-internal-guid-d37d47ea-7fff-cdd2-7098-25f41b477cd2"><span style="color: rgb(0, 0, 0); background-color: transparent; font-weight: 700; font-variant-numeric: normal; font-variant-east-asian: normal; vertical-align: baseline; white-space: pre-wrap;">알려진 사건들 </span></span></span></span></p>
<p> </p>
<p dir="ltr" style="line-height:1.38;margin-top:0pt;margin-bottom:0pt;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14px;"><span style="font-family:arial,helvetica,sans-serif;"><span id="docs-internal-guid-d37d47ea-7fff-cdd2-7098-25f41b477cd2"><span style="color: rgb(0, 0, 0); background-color: transparent; font-variant-numeric: normal; font-variant-east-asian: normal; vertical-align: baseline; white-space: pre-wrap;">성소수자운동은 여성가족부가 ‘성소수자는 양성평등기본법의 정책대상이 아니’라는 공식 입장을 내고 지자체 양성평등기본조례에 개입한 것을 비판해왔다. 그리고 양성평등정책이 중요하게 주목하고 있는 성폭력, 가정폭력 문제에서 성소수자를 떼어내지 말고 성소수자의 경험을 파악하고 대응할 것을 주문해왔다. 성소수자라는 사실이 알려질 것을 우려해 정신병원 강제입원, 교정 강간, 학교와 직장에서 성희롱을 경험하고도 신고하거나 도움을 요청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span></span></span></span></p>
<p> </p>
<p dir="ltr" style="line-height:1.38;margin-top:0pt;margin-bottom:0pt;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14px;"><span style="font-family:arial,helvetica,sans-serif;"><span id="docs-internal-guid-d37d47ea-7fff-cdd2-7098-25f41b477cd2"><span style="color: rgb(0, 0, 0); background-color: transparent; font-variant-numeric: normal; font-variant-east-asian: normal; vertical-align: baseline; white-space: pre-wrap;">한편, 성소수자운동 안에서 성소수자의 성폭력 경험을 가시화하고 대응하기 위한 노력이 그만큼 수반되어 왔는지 통렬하게 반성할 수밖에 없는 사건들이 알려졌다. 2017년, 무성애 가시화 행동 무:대(구 에이로그 팀), 성별이분법에 저항하는 사람들의 모임 여행자, 팟캐스트 프로젝트 승냥이FM, ACE STORY, (구)논모노로그,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이하 행성인)에서 활동해온 (전)활동가 케이의 착취, 횡령, 성추행과 데이트강간이 공론화되었다. 2017년 10월 행성인은 케이의 강연을 취소했으나 취소의 정확한 이유, 공식입장과 후속처리는 공표되지 않은 상태였다. 2018년 3월 여성의 날을 앞두고 비판이 다시 제기되었고 반상임활동가가 다수의 성폭력 사건 가해자로 지목되었다. 특히 행성인이 성폭력을 방조하고 묵인한 점이 강하게 비판받았다. 이후 행성인은 조정위원회를 통해 성폭력 피해를 신고 받는다는 공고를 올리고, 사과문과 함께 대외 활동을 잠정 중단하였다. </span></span></span></span></p>
<p dir="ltr" style="line-height:1.38;margin-top:0pt;margin-bottom:0pt;text-align: justify;"> </p>
<blockquote>
<p dir="ltr" style="line-height: 1.38; margin-top: 0pt; margin-bottom: 0pt;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14px;"><span style="font-family: arial, helvetica, sans-serif;"><span id="docs-internal-guid-d37d47ea-7fff-cdd2-7098-25f41b477cd2"><span style="color: rgb(0, 0, 0); background-color: transparent; font-variant-numeric: normal; font-variant-east-asian: normal; vertical-align: baseline; white-space: pre-wrap;">성폭행, 성추행이란 우리나라 사법기관이 유권해석으로 밝힌 바와 같이 “사람으로 하여금 성적 수치심을 유발케 하는 행위”를 포함하는 것은 물론, 행위자의 의사, 행위의 태양, 발생한 결과, 피해자의 의사, 신체적 혹은 정신적 조건, 행위자와 피해자와의 관계, 주변의 상황, 당시의 사회구조, 경제 및 교육수준, 신분관계 등에 따른 당사자간의 위계의 존재나 정도 등을 아울러 전방위적으로 검토하여 그것이 사람의 성적 자기결정권에 대한 침해 내지는 위해로 인정될 수 있는 것을 말하는 바, 여기에서 사람의 의사라 함은 확정적이고 사전적인 의사는 물론 사후적인 의사나 불확정적인 의사 또한 상대방이 예견할 수 있는 정도를 고려하여 참작되어야 할 것이고, 피해자의 의사결정에 행위자가 개입한 정도 역시 고려되어야 한다. 이를 앞서 밝힌 피해자의 진술과 비교하면 피징계자는 피해자들에 대하여 신체접촉 또는 성행위의 동의 여부와 의사를 고의적으로 묵살하거나 기존에 견지하던 태도와 의사를 자신의 교육수준이나 사회구조적 위계를 이용하여 교란하고 자신의 의사에 따르도록 적극적으로 설득하여 충분히 성숙되지 않은 형식적인 동의 의사를 무리하게 표시하도록 한 바, 피임기구를 사용하지 않은 성행위와 기타 신체접촉 등은 피해자의 동의 없이 이루어졌다고 봄이 상당하며 이는 각 성폭행, 성추행으로 평가될 수 있다. </span></span></span></span></p>
<p dir="ltr" style="line-height: 1.38; margin-top: 0pt; margin-bottom: 0pt;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14px;"><span style="font-family: arial, helvetica, sans-serif;"><span id="docs-internal-guid-d37d47ea-7fff-cdd2-7098-25f41b477cd2"><span style="color: rgb(0, 0, 0); background-color: transparent; font-variant-numeric: normal; font-variant-east-asian: normal; vertical-align: baseline; white-space: pre-wrap;">- 여행자 171110 징계3 결정문 (18.01.14 공개)</span></span></span></span></p>
</blockquote>
<p> </p>
<blockquote>
<p dir="ltr" style="line-height: 1.38; margin-top: 0pt; margin-bottom: 0pt;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14px;"><span style="font-family: arial, helvetica, sans-serif;"><span id="docs-internal-guid-d37d47ea-7fff-cdd2-7098-25f41b477cd2"><span style="color: rgb(0, 0, 0); background-color: transparent; font-variant-numeric: normal; font-variant-east-asian: normal; vertical-align: baseline; white-space: pre-wrap;">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이하 행성인)는 성폭력을 포함한 인권침해와 공동체에서의 배제, 인권단체로서의 책임을 방기한 것에 대해 피해자와 피해자를 지지하시는 모든 분들, 그리고 행성인을 믿고 지지해주셨던 모든 분들께 사과드립니다. </span></span></span></span></p>
<p dir="ltr" style="line-height: 1.38; margin-top: 0pt; margin-bottom: 0pt;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14px;"><span style="font-family: arial, helvetica, sans-serif;"><span id="docs-internal-guid-d37d47ea-7fff-cdd2-7098-25f41b477cd2"><span style="color: rgb(0, 0, 0); background-color: transparent; font-variant-numeric: normal; font-variant-east-asian: normal; vertical-align: baseline; white-space: pre-wrap;">행성인 운영위원회는 (1) 행성인 회원이었던 케이 전 퀴어활동가의 성폭력과 노동착취, 횡령 등 인권침해 가해 문제제기에 대한 단체의 미흡한 조치, (2) 반상임활동가(현재 직무정지 되었고, 조정위원회에 회부되어 있습니다)이자 전 사무국장인 활동가의 성폭력 가해 사실에 대한 방조와 묵인, (3) 현 성소수자노동권팀장의 성폭력과 주취폭력 등에 대한 피해자와 피해자를 지지하는 분들의 문제제기를 통해, 문제제기의 대상이 된 회원 뿐 아니라 행성인의 조직문화와 구조에도 폭력을 용인하고 묵인하도록 만드는 잘못이 있었음을 깨달았습니다.</span></span></span></span></p>
<p dir="ltr" style="line-height: 1.38; margin-top: 0pt; margin-bottom: 0pt;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14px;"><span style="font-family: arial, helvetica, sans-serif;"><span id="docs-internal-guid-d37d47ea-7fff-cdd2-7098-25f41b477cd2"><span style="color: rgb(0, 0, 0); background-color: transparent; font-variant-numeric: normal; font-variant-east-asian: normal; vertical-align: baseline; white-space: pre-wrap;">-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에서 사과드립니다 (18.03.17 게재)</span></span></span></span></p>
</blockquote>
<p> </p>
<p dir="ltr" style="line-height:1.38;margin-top:0pt;margin-bottom:0pt;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14px;"><span style="font-family:arial,helvetica,sans-serif;"><span id="docs-internal-guid-d37d47ea-7fff-cdd2-7098-25f41b477cd2"><span style="color: rgb(0, 0, 0); background-color: transparent; font-variant-numeric: normal; font-variant-east-asian: normal; vertical-align: baseline; white-space: pre-wrap;">두 사건은 활동 경험이 상대적으로 적은 활동가/회원에 대해, 가해자가 상대적으로 지위와 힘을 이용했다고 보인다. 이들 사건은 ‘좁은 성소수자판’에 큰 충격과 상처를 남겼고, 반성폭력에 대한 더 깊은 고민과 교육 마련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안팎에서 높아졌다. 이후 대학 성소수자동아리나 작은 규모의 단체 등에서도 성희롱, 성추행, 위력을 이용한 성폭력 사건들이 공론화되었다. </span></span></span></span></p>
<p dir="ltr" style="line-height:1.38;margin-top:0pt;margin-bottom:0pt;text-align: justify;"> </p>
<p dir="ltr" style="line-height:1.38;margin-top:0pt;margin-bottom:0pt;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14px;"><span style="font-family:arial,helvetica,sans-serif;"><span id="docs-internal-guid-d37d47ea-7fff-cdd2-7098-25f41b477cd2"><span style="color: rgb(0, 0, 0); background-color: transparent; font-weight: 700; font-variant-numeric: normal; font-variant-east-asian: normal; vertical-align: baseline; white-space: pre-wrap;">‘소수의 예외’로 남겨진 성폭력 </span></span></span></span></p>
<p> </p>
<p dir="ltr" style="line-height:1.38;margin-top:0pt;margin-bottom:0pt;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14px;"><span style="font-family:arial,helvetica,sans-serif;"><span id="docs-internal-guid-d37d47ea-7fff-cdd2-7098-25f41b477cd2"><span style="color: rgb(0, 0, 0); background-color: transparent; font-variant-numeric: normal; font-variant-east-asian: normal; vertical-align: baseline; white-space: pre-wrap;">‘남성간 성폭력’은 상대적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여성인권진흥원의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남성 대상 성폭력 사례에서 가해자가 남성인 경우가 82.8% 여성인 경우 10.2%, 성별을 알 수 없는 경우는 6.9%를 차지했다. <군대 내 성폭력 실태조사(2004)> 및 다수의 사례에서 남성 가해자는 이성애자로 정체화하며, 피해자에 대해 권력의 우위를 확인하고 공고히 하는 수단으로 성폭력을 저질렀다고 보고된다. 이는 성폭력이 ‘권력과 불평등의 문제’라는 점을 보여주는 예시로도 종종 언급된다.</span></span></span></span></p>
<p> </p>
<p dir="ltr" style="line-height:1.38;margin-top:0pt;margin-bottom:0pt;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14px;"><span style="font-family:arial,helvetica,sans-serif;"><span id="docs-internal-guid-d37d47ea-7fff-cdd2-7098-25f41b477cd2"><span style="color: rgb(0, 0, 0); background-color: transparent; font-variant-numeric: normal; font-variant-east-asian: normal; vertical-align: baseline; white-space: pre-wrap;">그러나 성폭력의 기저에 있는 핵심권력이라고 지목되는 ‘젠더권력’이 동성 간에도 작동하는지, 성소수자 간에는 어떻게 작동하는지는 아직 충분히 다뤄지지 못했다. 우리는 남성이 여성을 상대로 저지르는 성폭력이 압도적으로 높은 수를 차지한다는 걸 알지만, 그러므로 남성이 남성을, 여성이 남성을, 여성이 여성을, 성소수자가 성소수자를 대상으로 하는 성폭력은 모두 ‘소수의 예외’로 남겨둬도 되는지, 우리의 지식과 이해를 어떤 방식으로 더 넓혀가야 할지를 고민해야 하는 시점에 있다. </span></span></span></span></p>
<p> </p>
<p dir="ltr" style="line-height:1.38;margin-top:0pt;margin-bottom:0pt;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14px;"><span style="font-family:arial,helvetica,sans-serif;"><span id="docs-internal-guid-d37d47ea-7fff-cdd2-7098-25f41b477cd2"><span style="color: rgb(0, 0, 0); background-color: transparent; font-variant-numeric: normal; font-variant-east-asian: normal; vertical-align: baseline; white-space: pre-wrap;">누구나 성폭력 피해를 겪을 수 있지만 그 ‘누구나’는 90% 이상 여성으로 상상되고, ‘남성에 의한 여성의 피해가 전부는 아니’라는 말은 그 ‘전부가 아닌’ 사건 앞에 공허해진다. 나는 반성폭력을 중요한 가치로 두는 회사에서 성희롱을 경험한 적이 있다. 만약 가해자가 남성이었다면 성희롱임이 분명했겠지만, (내가 나를 어떻게 정체화하는지를 떠나서) 둘 다 여성이라고 간주할 때 그 관점은 쉽게 간과되었다. 이성애자 기혼여성이 한 몸매평가는 성적인 의미가 없거나 적다고 간주되고, 그러므로 사소하게 취급된다. 같은 행동도 여성이 했다면 무서울 것도, 못 견딜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경우를 많이 겪었다. 정말 여기에 젠더권력이 없으며, 그러면 성폭력이 아닌 걸까? </span></span></span></span></p>
<p> </p>
<p dir="ltr" style="line-height:1.38;margin-top:0pt;margin-bottom:0pt;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14px;"><span style="font-family:arial,helvetica,sans-serif;"><span id="docs-internal-guid-d37d47ea-7fff-cdd2-7098-25f41b477cd2"><span style="color: rgb(0, 0, 0); background-color: transparent; font-weight: 700; font-variant-numeric: normal; font-variant-east-asian: normal; vertical-align: baseline; white-space: pre-wrap;">등잔 밑을 밝혀야 할 때 </span></span></span></span></p>
<p> </p>
<p dir="ltr" style="line-height:1.38;margin-top:0pt;margin-bottom:0pt;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14px;"><span style="font-family:arial,helvetica,sans-serif;"><span id="docs-internal-guid-d37d47ea-7fff-cdd2-7098-25f41b477cd2"><span style="color: rgb(0, 0, 0); background-color: transparent; font-variant-numeric: normal; font-variant-east-asian: normal; vertical-align: baseline; white-space: pre-wrap;">간혹 여성긴급전화 1366에서 성소수자 단체에 전화해 피해자가 성소수자인데 어떤 지원을 해야 할지 묻는 일이 있다. 1366은 피해자가 ‘성소수자니까’ 성소수자 단체에 자문을 구하고, 성소수자 단체는 ‘성폭력피해자니까’ 성폭력지원기관에 도움을 구한다. 그래서 성소수자인 성폭력피해자를 위한 별도의 지원체계가 필요하다거나 어느 쪽이 이 문제에서 전문성을 차지해야 하는가를 논하자는 건 아니다. 성소수자 단체가 성폭력 문제를 이해하고 대응하는 역량을 갖추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이야기다. </span></span></span></span></p>
<p> </p>
<p dir="ltr" style="line-height:1.38;margin-top:0pt;margin-bottom:0pt;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14px;"><span style="font-family:arial,helvetica,sans-serif;"><span id="docs-internal-guid-d37d47ea-7fff-cdd2-7098-25f41b477cd2"><span style="color: rgb(0, 0, 0); background-color: transparent; font-variant-numeric: normal; font-variant-east-asian: normal; vertical-align: baseline; white-space: pre-wrap;">남성 가해-여성 피해 중심의 성폭력 담론을 어떻게 참고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호소를 접해왔다. 일반적인 성폭력 매뉴얼을 똑같이 적용할 수 있느냐는 질문도 받았다. 그런데 선행되어야 할 질문이 있다. ‘상대가 원하지 않은 성적 언행은 성폭력’이라는 명제에서 ‘원하지 않았고 동의하지 않았다’는 것의 의미, ‘성적인 것’의 의미를 얼마나 토론해왔는가? 대개 성폭력을 안다고 여기면서도 잘 접근하지 못하는데, 담론의 한계가 아니라, 기존의 논의부터 수용하고 소화하지 못한 데 주된 원인이 있다. </span></span></span></span></p>
<p> </p>
<p dir="ltr" style="line-height:1.38;margin-top:0pt;margin-bottom:0pt;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14px;"><span style="font-family:arial,helvetica,sans-serif;"><span id="docs-internal-guid-d37d47ea-7fff-cdd2-7098-25f41b477cd2"><span style="color: rgb(0, 0, 0); background-color: transparent; font-variant-numeric: normal; font-variant-east-asian: normal; vertical-align: baseline; white-space: pre-wrap;">성소수자 성폭력을 가시화하고 그에 대한 이해를 넓혀야 한다. 무엇을 성적 침해라고 느끼고 문제화하고 있는지 돌아볼 때다. 정체성을 구성하는 요소와 성폭력을 인지하는 감각이 연관관계를 갖는다면, 그것을 탐구할 때 젠더와 섹슈얼리티, 성폭력에 대해 더욱 이해하게 될 것이다. 또 정체성의 한 부분으로서 ‘성적욕구를 표현’하는 것이 어떻게 때때로 성폭력과 이어지는지 그 맥락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등잔 밑까지 환하게 밝혀야 하는 때가 왔다. 우리가 그 불을 붙여야 한다. </span></span></span></span></p>
<p dir="ltr" style="line-height:1.38;margin-top:0pt;margin-bottom:0pt;text-align: justify;"> </p>
<p dir="ltr" style="line-height:1.38;margin-top:0pt;margin-bottom:0pt;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14px;"><span style="font-family:arial,helvetica,sans-serif;"><span id="docs-internal-guid-d37d47ea-7fff-cdd2-7098-25f41b477cd2"><span style="color: rgb(0, 0, 0); background-color: transparent; font-variant-numeric: normal; font-variant-east-asian: normal; vertical-align: baseline; white-space: pre-wrap;"> </span></span></span></span></p>
<p dir="ltr" style="line-height:1.38;margin-top:0pt;margin-bottom:0pt;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14px;"><span style="font-family:arial,helvetica,sans-serif;"><span id="docs-internal-guid-d37d47ea-7fff-cdd2-7098-25f41b477cd2"><span style="color: rgb(0, 0, 0); background-color: transparent; font-weight: 700; font-variant-numeric: normal; font-variant-east-asian: normal; vertical-align: baseline; white-space: pre-wrap;">폐쇄성과 특수성이라는 알리바이 </span></span></span></span></p>
<p> </p>
<p dir="ltr" style="line-height:1.38;margin-top:0pt;margin-bottom:0pt;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14px;"><span style="font-family:arial,helvetica,sans-serif;"><span id="docs-internal-guid-d37d47ea-7fff-cdd2-7098-25f41b477cd2"><span style="color: rgb(0, 0, 0); background-color: transparent; font-variant-numeric: normal; font-variant-east-asian: normal; vertical-align: baseline; white-space: pre-wrap;">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퀴어 커뮤니티는 다소 폐쇄적인 특징을 갖는다. 그리고 이는 조직 자체를 경직되게 하기 쉽다. 사회의 공고한 성소수자혐오는 그 자체로도 성소수자에 대한 폭력이지만, 커뮤니티가 폭력에 대응하는 데 취약하게 만든다. 피해자, 가해자, 그 주변인 모두가 ‘다른 데 가면 되지’ 라고 가볍게 생각할 수 없기 때문에 커뮤니티 내부에서의 문제제기는 더 어렵고, 이 공간을 지켜야 한다는 절박하고 방어적인 심리는 성폭력 피해 은폐를 정당화하는 논리로 이용될 수 있다. </span></span></span></span></p>
<p> </p>
<p dir="ltr" style="line-height:1.38;margin-top:0pt;margin-bottom:0pt;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14px;"><span style="font-family:arial,helvetica,sans-serif;"><span id="docs-internal-guid-d37d47ea-7fff-cdd2-7098-25f41b477cd2"><span style="color: rgb(0, 0, 0); background-color: transparent; font-variant-numeric: normal; font-variant-east-asian: normal; vertical-align: baseline; white-space: pre-wrap;">사회는 비규범적 섹슈얼리티와 성폭력을 구분하지 않고 처벌한다. 바꿔서 말한다면 많은 성폭력이 그저 일탈적인 섹슈얼리티로 왜곡된다. 퀴어커뮤니티에도 성희롱과 성추행을 ‘플러팅’, ‘성적 신호를 보내는 행위’ 정도로 여기며, ‘제약 없는 성적 언동’이 문화적 특징으로 수용되기를 바라는 기대가 일부 존재할 것이다. 커뮤니티가 닫혀 있는 점은 이 기대가 고질적으로 지속되는 데, 다른 구성원을 성적으로 침해해도 비판받지 않는 데 기여한다. ‘아웃팅하겠다’는 협박을 통해 적지 않은 성폭력이 일어나는 만큼, 강간 가해자를 고발한 것이 ‘아웃팅’이라는 비난도 적지 않다. </span></span></span></span></p>
<p> </p>
<p dir="ltr" style="line-height:1.38;margin-top:0pt;margin-bottom:0pt;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14px;"><span style="font-family:arial,helvetica,sans-serif;"><span id="docs-internal-guid-d37d47ea-7fff-cdd2-7098-25f41b477cd2"><span style="color: rgb(0, 0, 0); background-color: transparent; font-variant-numeric: normal; font-variant-east-asian: normal; vertical-align: baseline; white-space: pre-wrap;">그러나 ‘특수성’이라는 알리바이는 힘을 잃어간다. 점점 더 많은 성소수자가 페미니스트로, 성평등운동의 주체로 선언하고 있다. 성적으로 친밀한 동시에 불편하지 않고, 불편함을 표현했을 때 그것이 존중받는 커뮤니티를 기대한다. 게이문화중심성, 상대적으로 가시화되지 않는 정체성/의제에 대한 편견과 희화화를 경계하고, 보다 다양한 사람들이 공감하고 성장할 수 있는 커뮤니티를 기대한다. 이런 변화 앞에, 커뮤니티의 ‘특수성’은 당연히 전제되기 이전에 ‘왜 달라야 하는가?’ 라는 예리한 질문을 받는다. 성급한 알리바이는 내부를 성찰하는 대신 외부적 요건만을 탓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span></span></span></span></p>
<p dir="ltr" style="line-height:1.38;margin-top:0pt;margin-bottom:0pt;text-align: justify;"> </p>
<p dir="ltr" style="line-height:1.38;margin-top:0pt;margin-bottom:0pt;text-align: justify;"> </p>
<p dir="ltr" style="line-height:1.38;margin-top:0pt;margin-bottom:0pt;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14px;"><span style="font-family:arial,helvetica,sans-serif;"><span id="docs-internal-guid-d37d47ea-7fff-cdd2-7098-25f41b477cd2"><span style="color: rgb(0, 0, 0); background-color: transparent; font-weight: 700; font-variant-numeric: normal; font-variant-east-asian: normal; vertical-align: baseline; white-space: pre-wrap;">역량의 부족이 아니라 원칙의 부재 </span></span></span></span></p>
<p> </p>
<p dir="ltr" style="line-height:1.38;margin-top:0pt;margin-bottom:0pt;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14px;"><span style="font-family:arial,helvetica,sans-serif;"><span id="docs-internal-guid-d37d47ea-7fff-cdd2-7098-25f41b477cd2"><span style="color: rgb(0, 0, 0); background-color: transparent; font-variant-numeric: normal; font-variant-east-asian: normal; vertical-align: baseline; white-space: pre-wrap;">성폭력 해결절차가 없다. 사건조사, 가해자징계, 피해자회복에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도 모른다. 절차가 있어야 기록도 남으니, 문제제기는 늘 ‘처음’이고 당혹스럽다. 성폭력이 있을 때 어디서 어떻게 어떤 도움을 받을 수 있는지 정보가 없고, 기존 지원체계가 낯설어서 활용하지 못하고, 상담기관에 연계하지 못한다. 징계 내규만 있을 뿐 징계의 의미, 조직의 책임범위에 대한 토론은 드물다. 이는 역량과 자원의 부족으로 설명되지만, 사실은 원칙의 부재라고도 할 수 있다. </span></span></span></span></p>
<p> </p>
<p dir="ltr" style="line-height:1.38;margin-top:0pt;margin-bottom:0pt;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14px;"><span style="font-family:arial,helvetica,sans-serif;"><span id="docs-internal-guid-d37d47ea-7fff-cdd2-7098-25f41b477cd2"><span style="color: rgb(0, 0, 0); background-color: transparent; font-variant-numeric: normal; font-variant-east-asian: normal; vertical-align: baseline; white-space: pre-wrap;">조직의 역량을 재평가하고 재편하는 것이 필요하다. 역량이 부족한 것이 우리의 현실이라면, 그 역량을 원칙에 맞게 배분하고 정의롭게 사용하지 못하는 것은 원칙의 공백이며, 우리의 한계다. 성폭력 사건을 해결하는 데 무능한 조직이기에 피해자는 부담을 감수하고 공론화를 선택하게 되며, 조직은 급작스럽게 여론에 압도된다. 일상적으로 논의하지 않던 주제를 토론에 부치니 성폭력 피해사실을 적시하게 되며, 여지 없이 2차 피해가 일어난다. 구성원이 이해하지 못한다면 규약이 있어도 효용을 찾기 어렵다. 사후 약방문. 그저 남는 것은 ‘어떻게든 책임져야 한다’는 압박감이다.</span></span></span></span></p>
<p> </p>
<p dir="ltr" style="line-height:1.38;margin-top:0pt;margin-bottom:0pt;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14px;"><span style="font-family:arial,helvetica,sans-serif;"><span id="docs-internal-guid-d37d47ea-7fff-cdd2-7098-25f41b477cd2"><span style="color: rgb(0, 0, 0); background-color: transparent; font-variant-numeric: normal; font-variant-east-asian: normal; vertical-align: baseline; white-space: pre-wrap;">안타깝게도, 가해자를 영구제명한다고 해도 조직의 책임은 사라지지 않는다. 영구제명은 오히려 조직과 개인이 함께 책임지지 않고 가해자에게만 문제를 전가하는 가장 무책임한 행동일지도 모른다. 당장의 비난을 모면하고자 지킬 수 없는 약속을 하는 것은 옳지 않다. 현실적으로 지금 무엇을 시작할 수 있는지 제시하고 신뢰감 있게 소통하는 것, 작더라도 행동으로 변화를 보여주는 것이 더 좋은 모습이다. 그러려면 주위에 잘 보이는 것이 아니라 조직의 원칙을 지키는 것이 우선해야 한다.</span></span></span></span></p>
<p> </p>
<p dir="ltr" style="line-height:1.38;margin-top:0pt;margin-bottom:0pt;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14px;"><span style="font-family:arial,helvetica,sans-serif;"><span id="docs-internal-guid-d37d47ea-7fff-cdd2-7098-25f41b477cd2"><span style="color: rgb(0, 0, 0); background-color: transparent; font-weight: 700; font-variant-numeric: normal; font-variant-east-asian: normal; vertical-align: baseline; white-space: pre-wrap;">구조적 장치 마련과 기준점 세우기</span></span></span></span></p>
<p> </p>
<p dir="ltr" style="line-height:1.38;margin-top:0pt;margin-bottom:0pt;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14px;"><span style="font-family:arial,helvetica,sans-serif;"><span id="docs-internal-guid-d37d47ea-7fff-cdd2-7098-25f41b477cd2"><span style="color: rgb(0, 0, 0); background-color: transparent; font-variant-numeric: normal; font-variant-east-asian: normal; vertical-align: baseline; white-space: pre-wrap;">커뮤니티에 갓 진입했을 때 겪은 성희롱을 시간이 흐른 뒤 문제제기 했을 때, 그 사이 쌓인 위치와 관계 맥락이 겹쳐져 해당 사건을 공정하게 판단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활동 경력도 권력이 된다는 점에서, 왜 곧바로 문제제기하지 않았는지 의심할 게 아니라 조직문화 점검이 먼저다. 소수에 의해 많은 활동이 진행될 때 ‘활동을 주도하는 사람’이 갖는 권력은 크게 다가올 수밖에 없다. 권력이 명시적 지위, 물리적 힘만이 아니고, 의식적으로 선택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얻어지기도 한다는 점에서, ‘난 권력이 없다’거나 ‘어쩌라는 거냐’고 항변하기보다는 잘못된 권위와 권력의 행사에 경각심을 갖는 게 필요하다. </span></span></span></span></p>
<p> </p>
<p dir="ltr" style="line-height:1.38;margin-top:0pt;margin-bottom:0pt;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14px;"><span style="font-family:arial,helvetica,sans-serif;"><span id="docs-internal-guid-d37d47ea-7fff-cdd2-7098-25f41b477cd2"><span style="color: rgb(0, 0, 0); background-color: transparent; font-variant-numeric: normal; font-variant-east-asian: normal; vertical-align: baseline; white-space: pre-wrap;">또한 정보와 결정권한이 집중되지 않도록 대체 가능한 시스템을 구축하는 공동의 노력, 커뮤니티에서 활동한 기간, 활동량, 커밍아웃의 폭과 인맥 등 서로 다른 위치와 자원에서 오는 격차를 돌아보고 견제하는 구조적 장치를 마련하는 것도 과제다. 성과주의를 내려놓고 자기돌봄과 휴식을 독려하는 연습, 때로는 일에 공백이 생기는 것도 받아들이는 연습이 필요하다. 그 공백이 재충전이고, 반성이고, 내부에 당연히 존재하고 있을 갈등을 돌아볼 수 있는 쉼표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span></span></span></span></p>
<p> </p>
<p dir="ltr" style="line-height:1.38;margin-top:0pt;margin-bottom:0pt;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14px;"><span style="font-family:arial,helvetica,sans-serif;"><span id="docs-internal-guid-d37d47ea-7fff-cdd2-7098-25f41b477cd2"><span style="color: rgb(0, 0, 0); background-color: transparent; font-variant-numeric: normal; font-variant-east-asian: normal; vertical-align: baseline; white-space: pre-wrap;">단일하지 않은 위치, 경험, 정체성이 공존하므로 논의는 계속될 수밖에 없지만, 정신없이 내달리지 않는 조직, 쉼표가 있는 조직일수록 그 과정에서 서로 상처입히는 일도 적다. 좋은 토대 위에 뼈대를 세우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름 붙지 않은 폭력’이 성폭력으로 수렴되는 현상은 사실 자연스럽다. 반성폭력운동은 성차별을 문제시하고, 남성중심적 문화를 배격하고, 성적 불평등을 쟁점화하는 운동이다. 즉 사회가 폭력이 아니라 ‘성’이라고 간주하는 것을 폭력으로 명명해왔고, 성폭력을 엄격하게 정의해서 ‘어디까지는 괜찮다’고 말하는 방향으로 흘러오지 않았다. ‘성폭력인가?’ 의문이 떠오를 때 이를 ‘조직에 변화가 필요하다는 신호’로 바꿔서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는다면 ‘전투’가 아닌 학습의 계기로 만드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span></span></span></span></p>
<p> </p>
<p dir="ltr" style="line-height:1.38;margin-top:0pt;margin-bottom:0pt;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14px;"><span style="font-family:arial,helvetica,sans-serif;"><span id="docs-internal-guid-d37d47ea-7fff-cdd2-7098-25f41b477cd2"><span style="color: rgb(0, 0, 0); background-color: transparent; font-weight: 700; font-variant-numeric: normal; font-variant-east-asian: normal; vertical-align: baseline; white-space: pre-wrap;">쉽게 버리지 않고 천천히 평등을 뿌리내리기</span></span></span></span></p>
<p> </p>
<p dir="ltr" style="line-height:1.38;margin-top:0pt;margin-bottom:0pt;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14px;"><span style="font-family:arial,helvetica,sans-serif;"><span id="docs-internal-guid-d37d47ea-7fff-cdd2-7098-25f41b477cd2"><span style="color: rgb(0, 0, 0); background-color: transparent; font-variant-numeric: normal; font-variant-east-asian: normal; vertical-align: baseline; white-space: pre-wrap;">퀴어 커뮤니티의 성폭력 사건에서 많은 성소수자는 피해자이자 침묵한 방조자다. 그 자책을 헛되게 증발시키고 망각하지 않기 위해서 여러 성소수자 단체들, 그리고 단체들의 연대체인 무지개행동은 성폭력 문제에 대해 논의하고 배울 수 있는 장을 여는 시작 단계에 있다. 대응은 항상 사건 뒤에 올 수밖에 없는 걸까? 몇 박자 늦었더라도, 그러니 더욱 더 우리가 서로를 성장시켜야 하고, 그 과정에 질문과 비판이 아낌없이 있어야 한다는 걸 절실히 느낀다. </span></span></span></span></p>
<p> </p>
<p dir="ltr" style="line-height:1.38;margin-top:0pt;margin-bottom:0pt;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14px;"><span style="font-family:arial,helvetica,sans-serif;"><span id="docs-internal-guid-d37d47ea-7fff-cdd2-7098-25f41b477cd2"><span style="color: rgb(0, 0, 0); background-color: transparent; font-variant-numeric: normal; font-variant-east-asian: normal; vertical-align: baseline; white-space: pre-wrap;">‘공동체적 해결’에 해답을 척 내놓지는 못한다. 그렇지만 퀴어커뮤니티 성폭력의 공동체적 해결이란 ‘커뮤니티를 부수지 않는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생각한다. 커뮤니티는 허울을 위해서 사람을 버릴 때 부서진다. 의미를 잃기 때문이다. 피해자에 대해서도 가해자에 대해서도 선을 긋고, ‘피곤하게 하는 사람’, ‘문제를 일으킨 사람’이라고 딱지 붙일 때. 성급한 자기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 제대로 경청하지 않고 사람을 함부로 이용할 때. 그건 알맹이를 다 버리는 일이다. 그러니 ‘잘 해결해야 한다’고 할 때 그 이유를 먼저 생각해야 할 것 같다. 사람을 버리고 가치를 버리면서 성폭력을 잘 해결할 수는 없다. </span></span></span></span></p>
<p> </p>
<p dir="ltr" style="line-height:1.38;margin-top:0pt;margin-bottom:0pt;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14px;"><span style="font-family:arial,helvetica,sans-serif;"><span id="docs-internal-guid-d37d47ea-7fff-cdd2-7098-25f41b477cd2"><span style="color: rgb(0, 0, 0); background-color: transparent; font-variant-numeric: normal; font-variant-east-asian: normal; vertical-align: baseline; white-space: pre-wrap;">우리는 평등하지 않다. 평등은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안온하고 고정된 상태가 아니라, 끊임없이 만들어가야 하는 지향점일 것이다. 평등을 담보하는 것은 지금까지 해온 노력과 앞으로 해나갈 노력뿐이다. 피해자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경청하고, 가해자의 주변인이라면, 그를 감싸는 것이 그를 위해서나 모두를 위해 최선이 아니라는 것을 새기며, 무책임하게 가해자를 옹호하고 부추기기를 중단하는 것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이 정도 잘못은 넘어가줄 수 있는 거 아니야?’ 라는 안이한 생각이 실상 우리 자신을 얼마나 모욕하는지 생각한다면, 우리는 평등을 재고하고, 평등을 뿌리내려야 한다.</span></span></span></span></p>
<div> </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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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style="text-align: center;"><img alt="텍스트: [특집] 어떤 미투 # 안팎 / 배경이미지: 시멘트 벽 위에 "#METOO"라는 문구가 여러 글에서 오려 붙인 듯한 낱자들로 적혀 있다." src="/attach/6789/1326384536.jpg" style="width: 700px; height: 262px;" /></p>
<p> </p>
<p dir="ltr" style="margin: 0pt 0px; color: rgb(34, 34, 34); font-family: 나눔고딕, NanumGothic, 돋움, Dotum, 굴림, Gulim, sans-serif; line-height: 1.38; text-align: right; padding: 0px !important;"> </p>
<p dir="ltr" style="margin: 0pt 0px; color: rgb(34, 34, 34); font-family: 나눔고딕, NanumGothic, 돋움, Dotum, 굴림, Gulim, sans-serif; line-height: 1.38; text-align: right; padding: 0px !important;"><span style="font-size: 14px;"><span style="font-family: arial, helvetica, sans-serif;">나영 / 웹진 <글로컬포인트> 기획편집팀</span></span></p>
<div> </div>
<p>‘#MeToo’(이하 미투)는 2018년 한국 사회를 뒤흔든 핵심 키워드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그 이전에도 성폭력 사건에 대한 사회적 고발은 꾸준히 있었고 ‘00계 내 성폭력’ 해시태그를 통한 공론화도 이어져 왔다는 점에서, 한국에서의 미투 운동은 이미 오래전부터 시작되었으며 그 힘으로 2018년에는 본격적으로 정치적 발화의 궤도에 오른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박근혜 탄핵 이후에 들어선 새 정부가 장식 삼아 페미니즘을 자신의 깃털 사이에 대충 꽂아두고 있을 때, 서지현 검사는 국정농단을 보도했던 바로 그 JTBC에 출연해 자신을 드러내고 검찰 내부의 성폭력 문화를 고발했다.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서 연이어 김지은 씨가 안희정을, 최영미 시인은 고은을 고발했다. 즉, 이들의 미투는 개인적인 피해 호소나 폭로의 차원을 넘어 정치사회적 패러다임 변화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미디어는 그 의미를 “나도 고발한다”가 아닌 “나도 당했다”로 해석하며 사건을 개별화, 개인화해 나갔다. 고발이 스캔들이 되고, 사건이 법정으로 집중되어 오직 ‘무죄냐 유죄냐’만이 사건의 의미로 남게 될수록 그 속에서 정치적 발화의 의미는 조금씩 탈각되어 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계속해서 주지해야 한다.</p>
<p align="left"> </p>
<p>한편 문학계, 연극계, 영화계, 대학, 군대, 체육계 등 사회 각계의 영역에서도 고발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뿐만 아니라 이주여성들도 국회에서 별도의 기자회견을 열었고, 운동사회 내 성폭력이나 성소수자 간 성폭력에 대한 고발도 이어졌다. 미투로 고발된 모든 사례들은 피해자와 가해자가 위치한 각 사회 영역의 특수한 조건과 맥락들 속에서 발생한 일이었다. 개인과 극단의 생존 자체가 연출가 한 명에게 달려있는 특수성을 이해하지 않고는 연극계의 미투를 이해할 수 없고, 해군이라는 조직의 특수성과 함정 내 구조, 군에서의 여성 성소수자라는 위치가 어떠한 조건을 만드는 지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해군 내 성폭력 상황에 대해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이주여성이나 성소수자는 더 복합적인 지형들이 얽혀있다. 그런데 이 이야기들은 지금 어디로 흩어졌을까. 누군가는 “가해자가 유명하지 않아서 우리의 이야기는 미투가 되지 못한다”고 아이러니한 심정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미투로 고발된 각 현장의 조건과 맥락은 사라지고 가해자 개인에게 모든 시선이 집중되었기 때문이다.</p>
<p align="left"> </p>
<p>문제는 어떤 지점에서 도돌이표처럼 이 미투 운동의 정치사회적 효과를 원점으로 되돌리는 한계가 여전히 강하게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어쩌면 당연하게도 그 한계는 그 동안 반성폭력 운동이 계속해서 넘어서고자 했던 지점의 연장선상에 있다.</p>
<p>구조를 건드리지 않으면 광장은 다시 좁아질 수밖에 없다. 개인의 용기에 기대는 미투가 아니라 구조를 흔드는 미투가 되기 위해, 2018년의 미투는 이제 어떻게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이어져야 할까. 이 글에서는 2018년의 미투를 돌아보며 그 방향을 찾아보고자 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죽일 놈, 재수없는 놈, 억울한 놈</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 </p>
<p>서지현 검사의 고발 이후 2018년 국회에서는 1월부터 3월까지만 90여 건에 달하는 성폭력 관련 법안이 발의되었다. 이 중 39건이 가해자 처벌 방지에 관한 법안, 38건이 피해자에 대한 불이익을 방지하기 위한 법안이었다. 그러나 처벌 강화가 실질적으로 성폭력을 줄이는 데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은 이미 이전 5년의 통계 추이만 보아도 확연하게 드러난다. 2013년 조두순 사건을 계기로 성범죄 처벌이 강화되었지만 이후 성범죄 발생률은 오히려 증가하고, 기소율은 감소해왔기 때문이다. 2016년 3월 한겨레신문이 대검찰청 범죄분석 자료를 바탕으로 보도한 바에 따르면 2014년 성폭력 범죄 인구는 10만명 당 58.2건으로 10년 전 23.7건에 비해 145.5%나 증가했다. 뿐만 아니라, 살인, 강도, 방화 등 다른 강력범죄는 감소추세를 보이고 있음에도 성폭력 범죄는 약 2.5배나 증가하였으며, 특히 몰래카메라를 이용한 범죄가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보도하고 있다.<sup><a href="http://blog.jinbo.net/glocalpoint/75#footnote_75_1" title="한겨레, “박대통령 “4대악 척결”에도 성범죄 급증 여성들 ‘범죄 피해 불안’ 더 커졌다“, 엄지원 기자, 2016.3.7." id="identifier_75_1"class="identifier">1</a></sup> 한편, 2017년 이재정 의원이 경찰청으로부터 제출받은 자료를 통해 공개한 바에 따르면 2013년부터 2017년 7월까지 13만 건의 성범죄가 발생하였고 기소율은 2013년 76.9%에서 2014년 80.5%로 잠시 높아졌다가 이후 계속 감소하여 2017년엔 76,5%로 2013년보다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sup><a href="#footnote_75_2" title="여성신문, “2013년 이후 성범죄 13만 5000건...피해자 90% 여성”, 이하나 기자, 2017.9.1." id="identifier_75_2"class="identifier">2</a></sup> 반면, 서지현 검사가 안태근 전 검사의 성추행 사실을 고발하면서 “명예훼손으로 고소된다면 ‘사실 적시에 의한 명예훼손’에 대해 위헌법률심판 소송을 하겠다”고 굳이 언급할 정도로 피해자에 대한 명예훼손, 무고죄 고소는 증가했다.</p>
<p align="left"> </p>
<p>2018년의 #미투 운동이 이러한 현실 속에서 터져 나왔다는 사실은 정작 중요한 문제가 법적 처벌 수위에 있기 보다는 법으로 다룰 수 없는 부분, 즉 점점 심각해져 온 차별적 구조의 모순이 폭발한 데에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주목을 받는 성폭력 사건이 매번 조두순 사건과 같은 심각한 강력범죄의 문제로 상징화되고 그 때마다 ‘강력한 법적 처벌’만을 대책으로 제시한 결과, 그보다 훨씬 많은 비중을 차지하며 일상에서 빈번하게 발생하는 성폭력 문제에 대해서는 구조적 문제로서 제대로 다뤄지지 않고 개인 간의 문제로만 방치되어 왔다. 가해자가 괴물로 그려질수록 일상의 성폭력은 관심에서 멀어져 온 것이다.</p>
<p>또한 구조적 맥락보다는 가해자, 피해자의 개인적인 특성과 가해 행위의 수위, 피해자의 당시 반응 등에만 주목하다 보니 성폭력 사건에 대한 대중의 인식 또한 가해자와 피해자 개인에 대한 평가를 중심으로 구분되곤 한다. 이를테면, 가해자가 어떠한 의심도 없이 ‘죽일 놈’으로 명백히 인식되기 위해서는 가해자가 심각한 상해나 사망에 이를 정도의 폭력을 행했거나, 피해자가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고, 미성년자이거나, 판단과 저항을 전혀 할 수 없었음을 강조하여 입증해야 한다. 그 밖의 경우에는, 일례로 안희정 전 도지사의 경우 기껏해야 ‘재수없는 놈’ 정도로 취급되고, 양예원 씨가 고발한 스튜디오 실장처럼 심지어 ‘억울한 놈’이 되기도 한다. 어느덧 가해자의 행위가 아니라 피해자의 반응을 중심으로 사건에 대한 판단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러한 판단은 법정에서도 여전히 그대로 반복되고 있다.</p>
<p> </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법이 없어서 문제인가</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 </p>
<p style="text-align: justify;">서울서부지법 조병구 판사는 안희정 사건 1심에서 위력에 의한 간음과 추행을 인정하지 않고 무죄 판결을 내리면서 ‘비동의 간음죄’가 없어 현행법으로는 그를 처벌할 수 없다고 했다. 성소수자 여군에 대한 해군 간부들의 성폭력 사건 항소심을 담당한 고등군사법원은 “업무상 위력에 의한 간음 내지는 업무상 위력에 의한 추행죄의 성립 여부는 별론으로 하고” 증거가 불충분하여 강제추행과 강간치상은 인정되지 않는다면서 가해자들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안희정 1심 판결 이후 한동안 ‘비동의 간음죄’의 도입 필요성에 대해 논의가 있었으나 두 판결에서 보다시피 문제는 법이 없어서 이런 판결이 나온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대법원은 이미 1998년에 업무상 위력에 의한 추행죄에 대해 “피해자의 의사, 성별, 연령, 행위자와 피해자의 이전부터의 관계, 그 행위에 이르게 된 경위, 구체적 행위태양, 주위의 객관적 상황과 그 시대의 성적 도덕관념 등을 고려하여” 판단해야 한다고 명시(대법원 1998.1.23. 선고 97도2506 판결)함으로써 폭행이나 협박 없이도 유무형의 위력 행사를 판단할 수 있음을 밝혔다. 위력을 이러한 전제 하에 판단한다면 피해자가 당시 적극적인 거절의사를 밝히지 못했던 상황이라 해도 이를 기준으로 충분히 가해사실을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대법원은 2018년 10월 판결(대법원 2018.10.25. 선고 2018도7709 판결)에서도 “법원이 성폭행이나 성희롱 사건의 심리를 할 때에는 그 사건이 발생한 맥락에서 성차별 문제를 이해하고 양성평등을 실현할 수 있도록 ‘성인지 감수성’을 잃지 않도록 유의하여야 한다”면서 “성폭행 피해자의 대처 양상은 피해자의 성정이나 가해자와의 관계 및 구체적인 상황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수밖에 없다”고 판시했다. 결국 적용할 수 있는 법이 없어서가 아니라 미리 가해사실을 기각하는 결론을 내려놓고 법리 해석을 끼워 맞추는 재판부 때문에 오히려 피해자의 입증 부담이 가중되고 가해자에게는 무죄판결이 내려지는 결과가 반복되는 것이다. <sup><a href="#footnote_75_3" title="다행히 안희정 사건 2심 재판부는 "피고인은 피해자가 지방별정직 공무원이라는 신분상 특징과 비서라는 관계 때문에 피고인의 지시를 순종해야 하고 내부적 사정을 쉽게 드러낼 수 없는 취약한 처지를 이용해 범행을 저질러 피해자의 성적 자기 결정권을 현저히 침해했다"는 내용으로 가해자의 행위가 업무상 위력을 이용해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한 성폭력 행위임을 분명하게 확인했다. " id="identifier_75_3"class="identifier">3</a></sup></p>
<p style="text-align: justify;"> </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성폭력 판단, 동의, 성적 자기결정권에 대한 잘못된 전제들</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 </p>
<p style="text-align: justify;">위력에 의한 성폭력 사건에서마저 여전히 폭행과 협박의 여부가 판단의 기준이 되는 최협의설이 작동하고 있는 것은 피해자에 의해 고발된 가해행위를 가해사실로 판단하기에 앞서 개인 간의 성적 관계로 전제하고 구성요건을 맞춰나가는 식의 재판 관행이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즉, 성인 남녀 간에 성적 관계가 있었다면 모종의 성적 욕구나 이를 유발하는 행위가 상호간에 존재했을 것이라는 전제를 두고 사건을 판단한다는 것이다. 이 같은 전제는 합의된 성관계와 성폭력을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게 하는 중요한 원인일 뿐만 아니라 다음과 같은 문제들을 내포하고 있다. </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첫째, 남녀 사이에는 당연히 성애적 감정이 유발된다고 전제하며, 성적 행위와 성적 욕구를 당연한 인과로 전제한다. 성적행위가 있었다고 해도 피해자는 물론 가해자에도 아무런 성애적 감정이 없었을 수 있다. 가해자는 피해자에게 성애적 감정을 느껴서 성폭력을 저지르는 것이 아니며, 성폭력으로서의 성적 행위는 단순히 성적 욕구 때문이 아니라 피해자에 대한 지배 욕구, 자신의 권력과 위치를 확인하고자 하는 욕구, 다른 욕구 불만이나 불안을 해소하고자 하는 욕구 등 다양한 욕구와 의도에 의해 벌어진다. 그러나 명시적인 폭행과 협박이 확인되지 않는 경우 이러한 다양한 지점들이 적극적으로 검토되지 않음으로써 ‘성적 욕구를 유발했을만한 정황’만을 전제로 사건을 판단하게 된다. </p>
<p style="text-align: justify;"> </p>
<p style="text-align: justify;">이러한 판단은 동성 간 성폭력을 다룰 때에도 문제가 된다. ‘남녀 사이가 아님에도’ 성행위가 이루어졌다면 이는 가해자의 동성애적 욕망 때문이거나, 피해자도 이에 동의했기 때문이라는 전제 하에 사건에 대한 판단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현주 감독 사건에서 판사가 “혹시라도 무죄를 선고하게 되면 피해자를 동성애자로 보이게 만드는 것이 아니냐, 그렇다면 오히려 피해자에게 피해를 입히는 것이다”라는 말을 했다는 사실은 이러한 문제를 명확히 보여준다. 결국 피해자는 동성애자여도 동성애자임을 말할 수 없고, 동성애자가 아니어도 동성애자라는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해 자신을 입증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둘째, 가해자를 성적 행위의 주체로 판단하는 반면, 피해자는 그에 대한 의사표현의 주체로만 판단한다. 해당 사건이 성폭력인지 여부를 판단할 때 상호 간의 합의 사실을 확인하는 질문들이 피해자에게만 돌아오게 되는 것이다. 어느 덧 가해자의 행위는 마치 배경처럼 나열되고 심문의 방향은 피해자를 향하게 되어 있다. 더구나 이와 같은 관행은 피해자의 의사표현을 판단 능력의 문제와 동일시한다는 점에서 더욱 문제적이다. 미성년자, 장애인 등의 경우 판단과 의사표현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존재로 치부하는 한편, 다른 피해자의 경우에는 판단 능력이 있음에도 이를 행사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전형적인 피해자상을 강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결정적으로, 위에서 언급한 문제들로 인해 피해자의 동의 여부나 성적 자기결정권이 어려운 딜레마가 된다. “YES MEANS YES, NO MEANS NO”가 마치 명확한 대안인 것처럼 이야기 되지만, 결국 무엇이 동의를 강제하는가의 문제를 떼어놓고는 ‘동의’와 ‘자기결정’을 단순하게 판단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비동의 간음죄’가 도입된다고 하더라도 위와 같은 관행이 이어지는 한 피해자 입장에서의 판단을 기대하기가 어려운 이유이다. </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가해자가 일방적으로 위력을 행사할 수 있는 관계가 분명한 안희정 사건이나 해군 성폭력 사건에서조차 피해가 반복되었다는 사실을 도리어 ‘피해자가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판단하는데 과연 ‘비동의 간음죄’가 도입된다고 해서 “동의하지 않았는데 왜 가만히 있었느냐”는 질문이 멈춰지게 될까? 결국 법적으로 범죄의 구성요건만을 두고 이루어지는 논의는 한계가 분명할 수밖에 없다. </p>
<p style="text-align: justify;"> </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잘 해내야 했던 피해자들과 변하지 않은 구조, <br />
더 이상 성폭력을 ‘성의 문제’로만 다루지 말자</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 </p>
<p style="text-align: justify;">이제 성폭력을 정치사회적 맥락으로부터 탈각시키는 층위를 다각도로 살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성폭력을 ‘성의 문제’로만 다루는 구도를 깨야 한다. 성폭력을 ‘성의 문제’로만 다룰 때, 성폭력은 폭력이 아닌 욕망의 문제가 되거나, 다른 폭력의 구조와 분리되어 상상되고, 동시에 다른 폭력보다 과도하게 상상된다. 그 결과, 조직 내 위계 구조에서 살아남기 위해 일상적 폭력을 견디는 것은 공감하고 이해하지만 성폭력을 견딘다는 것은 이해하지 못할 일로 여겨진다. 고발의 언어를 피해의 언어, 공포의 현실로만 형상화 할수록 정치사회적 주체로서 고발에 나선 이들은 욕망의 대상, 피해자로만 재현되고 가해자는 사이코, 변태, 괴물이거나 억울한 욕망의 주체로 남는다. 섹슈얼리티를 자원으로 이용한 이들과 무고하게 성을 침해당한 이들로 피해자의 유형이 구분된다. </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이주여성들은 미투를 통해 생산직 남성 노동자 중심의 이주노동 구조, 한국인 부계 혈통을 중심으로 거주 여건이 귀속되게 만드는 한국의 비자제도가 이주여성에 대한 성폭력의 배후에 있음을 간접적으로 고발했다. 연극계 미투에서는 지원금에 의존할 수밖에 없고 연출자 한 명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연극계의 열악한 구조가 연극계 성폭력의 구조적 원인임을 짚었다. 현재 진행 중인 스쿨미투에서는 교사, 또래 학생에 의한 성폭력이 개인의 문제만이 아니라 사립학교의 구조적 문제, 나아가 교육 현실의 문제임을 드러내고 있다. 즉, 성-섹스, 젠더, 섹슈얼리티-만이 아니라 이에 연결된 다른 구조들을 건드려야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이다. 이 문제에서 변화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동의도, 성적 자기결정권도 개인의 문제로만 돌아오게 된다. 어떻게 보면 새삼스러운 이야기가 아니다. 성폭력 사건은 개별 사건이 아니라 그에 연결된 수많은 구조적 연결고리들을 보아야만, ‘진짜 문제’가 보인다. 그럼에도 사건이 발생하면 늘 대증적 해결책으로 개별 사건에만 집중되거나 법적 논의로만 귀결되고 만다는 것이 반복되어 온 문제이다. 미투 운동이 지닌 중요한 의의는 바로 이런 지점들을 드러냈다는 데에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2018년에는 이를 정치사회적 의제로서 제대로 살려내지 못했다. 우리가 미투 운동을 한 단계 진전시키고자 한다면 이제 이러한 변화를 위한 움직임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마지막으로, 성폭력은 노동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는 점을 짚고 싶다. 여기서 ‘노동의 문제’라는 것은 1차적으로는 임금노동에서의 문제이고, 더 나아가서는 노동에 대한 개념과 전제까지 바뀌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임금노동에서의 문제에 대해서는 이미 성차별적 고용과 노동구조가 어떻게 성폭력의 구조를 유지시키는지 여러 차례 다루어져 왔기에 여기서 굳이 반복해 짚을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 글에서 강조하여 짚고 싶은 것은 임금노동 구조만을 다루는 것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미투 운동에서 고발자로 목소리를 낸 많은 여성들이 “잘 해내야 했다”, “잘 해내야 했기에 쉽게 말할 수 없었다”고 이야기했다. 임금노동 구조 안에서는 주어진 위치가 좁고, 그 아슬아슬한 벼랑길에서 떨어지는 것은 곧 ‘여자라서’라는 이유로 돌아올 차별적 시선과 동시에, ‘여자라서’ 다시 기어오르기도 벅찬 현실을 마주해야 한다는 걸 의미할 때, “NO”를 말할 수 없는 구조는 지속될 것이다. 그런데 이 구조의 원인은 임금노동에만 있지 않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임금노동에서의 성차별을 유지시키는 구조는 여성들을 1차적으로 가사, 돌봄, 임신출산 영역에 묶어두려는 구조, 동시에, 바로 그 이유로 여성들에게 불안정, 계약직 노동을 요구하는 구조에 있기 때문이다. 언제든 가정의 영역으로 돌아갈 것으로 전제되는 여성들, 직장에서도 가정에서의 역할을 해줄 것으로 기대되는 여성들은 직장에서 늘 임시의 위치로 여겨진다. 성폭력은 이 취약한 위치를 이용하여 가해지는 폭력이다. 가사노동, 돌봄노동, 임신출산 노동이 한 사람의 일생에서 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는 노동의 영역이자, 임금노동과의 연결선상에 있는 노동, 중요한 사회적 노동으로 인정되어야 임금노동에서의 위치도 달라질 것이다. 먼 이야기인 것 같지만 이러한 사회적 인식을 만드는 것은 마음만 먹으면 정부가 당장 시작할 수 있는 일이다. #MeToo에 대한 응답은 개인들의 #withyou에만 달려있지 않다는 사실을, 2019년엔 우리가 다른 행보로 확장해 나갈 수 있기를 바란다. </p>
<p style="text-align: justify;"> </p>
<div> </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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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4>"<a href="http://blog.jinbo.net/glocalpoint/category/35">5호_2019년 1월</a> / <a href="http://blog.jinbo.net/glocalpoint/category/36">특집</a>" 분류의 다른 글</h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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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style="text-align: center;"><img alt="텍스트: [보이지 않아도 우리는] 아랍의 봄바람에 피었다 전쟁의 피바람에 진 꽃, 시리아 혁명 # 최재훈 / 배경이미지: 건물 앞 광장을 가득 메운 집회 인파. 오른쪽 끝에 서 있는 기둥에 아랍 문자들이 적혀 있다." src="/attach/6789/2567177754.jpg" style="width: 700px; height: 262px;" /></p>
<p> </p>
<p style="text-align: right;">최재훈 / 경계를넘어 회원, 도서출판 경계 대표</p>
<p style="text-align: right;"> </p>
<p style="text-align: justify;">중동에서도 지중해 동부 연안에 자리한 시리아의 나라꽃은 그리스어로 ‘바람’을 뜻하는 아네모스(anemos)에서 유래된 아네모네라는 예쁜 이름의 꽃이다. 바람이 불면 아름답게 피어올랐다가 다시 바람이 불면 어느새 지고 마는 허무한 운명의 바람꽃. 그래서 사람들은 그 꽃에다가 ‘사랑의 고통’, 혹은 ‘덧없는 사랑’이라는 꽃말을 붙여주었다. 그리고 2019년의 오늘, 시리아 국민들은 그 꽃말과 정확히 일치하는 고통의 시간을 통과하고 있다. </p>
<p style="text-align: justify;"> </p>
<p style="text-align: justify;">2010년 12월 튀니지에서부터 불어오기 시작한 민주화 항쟁의 바람은 이내 이집트, 리비아, 알제리, 예멘, 바레인 등 북아프리카와 중동 지역 전체를 휩쓸었고, 거기에 시리아도 예외는 아니었다. 40년 넘게 이어져온 일당 독재와 그로 인한 부패, 생활고에 지친 시민들은 일제히 거리로 쏟아져 나와 자유와 정의와 존엄을 외치기 시작했고, 그렇게 민주주의의 꽃은 활짝 만개하는 듯했다. 그러나 곧이어 잔인한 탄압과 참혹한 내전이라는 강한 맞바람이 불어오자, 그 꽃은 언제 그랬냐는 듯 고개를 떨어뜨린 채 금세 시들어버리고 만다. 그렇게 어느덧 8년째에 접어든 전쟁으로 인한 사망자만 줄잡아 50만 명, 인구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6백만 명이 전쟁을 피해 나라 밖으로 몸을 피했고, 또 다른 6백만 명이 목숨을 부지할 곳을 찾아 나라 안 이곳저곳을 떠돌고 있는 시리아의 오늘의 현실은 자유와 정의를 사랑한 대가라 하기엔 너무나 큰 고통을 수반했다. 또한 그렇게 기나긴 고통의 시간을 통과하고도 이 모든 결과의 근본적인 책임이 있는 독재자와 그 체제가 여전히 건재할뿐더러 오히려 승전가를 준비하기까지 하는 현 상황은 때로 그동안 흘린 피가 너무나 덧없이 느껴지게까지 한다. 불과 8년 전 한바탕 바람처럼 불어 닥쳤던 시리아 국민들의 민주화 열망은 어쩌다 이렇게 피비린내로 변해버린 걸까. 과연 이 잔혹한 전쟁이라는 어두운 터널의 끝은 어디일까. 아니, 그 끝이 대체 있기나 한 걸까.</p>
<p style="text-align: justify;"> </p>
<p style="text-align: justify;">시리아 전쟁의 첫 시작은 어찌 보면 간단명료했다. 1963년과 1966년, 1970년, 이렇게 세 차례의 쿠데타를 거쳐 장기집권을 시작한 하페즈 알 아사드 정권과 그가 이끌던 바트당은 원래 아랍 사회주의와 탈식민주의라는 대의명분 아래 주요 산업의 국유화와 토지 개혁을 통한 부의 재분배, 아랍 사회의 혁신 및 근대화를 발판으로 한 서구로부터의 완전한 독립이라는 야심찬 기획의 산물이었다. 그러나 하페즈 대통령은 권력을 장악함과 동시에 살라 자디드를 필두로 한 당내 진보 세력을 몰아내고, 지지 기반이던 중하층민과 농민, 노동자들을 소외시키는 길로 곧장 내달았다. 바트당 이외의 모든 정치 세력은 불법화 되었으며, 노동조합은 해체되었고, 그 빈자리는 바트당 내 보수파들이 채웠다. 또한 인종적으로는 다수의 아랍인과 쿠르드, 투르크멘, 앗시리아 등의 소수민족, 종교적으로는 75퍼센트의 수니파 무슬림과 15퍼센트의 시아파 알라위 무슬림, 그리고 소수 기독교인 등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이 뒤섞여 있음에도 그동안 큰 탈 없이 한데 어울려 살아오던 나라를, 대통령 자신이 속한 시아파 알라위들이 나머지 종파를 지배하고, 또 수니파끼리도 도시민들을 지배층에 편입시키는 대신 농촌 인구를 피지배층으로 전락시키는 방식으로 갈라놓았다. 그리고 경제적으로는 199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인 신자유주의를 도입하면서 공기업과 대학을 민영화하고, 가난한 서민들에게 지급하던 보조금을 없애는 방식으로 불평등을 키워갔다. 그 사이 아버지인 하페즈의 사망으로 불과 서른다섯의 나이에 바샤르 알 아사드가 대통령직을 물려받은 2000년에 잠깐 변화의 조짐(‘다마스쿠스의 봄’)이 보이는 듯도 했으나, 헛된 기대는 이내 더 큰 실망으로 변해버렸다. </p>
<p style="text-align: justify;"> </p>
<p style="text-align: justify;">2011년 3월부터 시작된 반정부 봉기는 바로 그런 40년에 걸친 배반과 불의의 역사를 바로잡기 위한 집단적 몸부림이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는 달리 초기의 시리아 항쟁은 무장투쟁 보다는 평화적인 대규모 행진과 시위, 농성, 문화적인 방식의 저항이 오히려 주를 이뤘고, 그래서 더더욱 전 국민적인 공감과 참여를 이끌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바샤르 대통령과 기득권 세력은 시민들의 예상보다 훨씬 더 교활하고 치밀했다. 인근 튀니지와 이집트에서 독재자 벤 알리와 무바라크가 각각 거리의 시민들에 의해 쫓겨난 걸 지켜보면서 위기감이 극에 달한 정권은 크게 네 가지 전략으로 대응하고 나선 것이다, </p>
<p style="text-align: justify;"> </p>
<p style="text-align: justify;">그 첫 번째로는 평화적인 시위대를 잔인하게 무력으로 진압함으로써 자연스레 시민들의 무장을 유도해내는 항쟁의 군사화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시리아 민중들이 평화적인 시위에서 무장투쟁으로 저항의 방식을 바꾼 것이 잘못이었다는 뜻은 아니다. 시위에 나선 시민들이 정부군과 ‘샤비하’라 일컬어지는 친정부 폭력집단에 의해 무자비하게 살해당하고 끌려가는 상황에서 그들의 무장은 불가피한 측면이 강했고, 시민들을 대상으로 한 유혈 진압 명령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일부 군인들이 스스로 탈영해 ‘자유시리아군(FSA)’을 결성하면서 본격적인 내전이 시작된 것도 어찌 보면 별다른 선택지가 없는 상태에서 이어진 자연스러운 귀결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광범위한 대중적 참여에 기초한 비폭력적 저항에서 전투가 가능한 청년층 중심의 무장투쟁으로 항쟁의 무게 중심이 옮겨가는 순간, 나머지 시민사회와 여성, 노년층의 참여는 필연적으로 배제될 수밖에 없다는 데에 있다. 게다가 정부군에 비해 무기와 훈련이 턱없이 부족한 시민군이 시간이 지날수록 군사적으로 열세에 놓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도 불 보듯 예견되는 일이었다. </p>
<p style="text-align: justify;"> </p>
<p style="text-align: justify;">다음으로는 정권이 2011년과 2012년 사이 수백 명에 달하는 급진 이슬람주의자들을 의도적으로 감옥에서 풀어줌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시민군과 뒤섞이게끔 만든 항쟁의 이슬람주의화를 들 수 있다, 때마침 그 시기는 애초 아사드 정권의 존립 여부를 놓고 머뭇거리다 시민군이 결정적인 승기를 잡아가는 것처럼 보이자 정권 축출 쪽으로 마음을 굳힌 미국 정부가 동맹국인 터키와 사우디를 비롯한 걸프국가들을 통해 시민군에게 다량의 무기와 자금을 제공하는 전략을 취하고 있던 때였다. 그러나 그렇게 제공된 무기와 자금은 고스란히 급진 이슬람주의 세력에게 대거 넘어가 오늘날의 ‘이라크레반트 이슬람국가(ISIL)’, 즉 이슬람국가(IS)를 탄생시킨 자양분이 됐다는 건 익히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리고 아사드 정권의 축출보다는 궁극적으로 칼리프를 정점으로 한 이슬람 신정체제 건설을 더 큰 목표로 삼은 급진 이슬람주의자들은, 한 편으로는 정부군과 싸우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시민군과 지역의 활동가들을 향해 본격적으로 총부리를 겨누기 시작했다. 이렇게 독재정부에 맞선 시민들이라는 단순한 구도에서 출발한 항쟁이 정부군과 시민군, 시민군과 이슬람주의자들이 서로 뒤엉켜 싸우는 복잡한 구도로 변해가면서, 아사드 정권은 자신들의 잔학 행위를 이슬람 테러리스트들에 맞선 정당한 대응으로 포장할 수 있게 되었다. </p>
<p style="text-align: justify;"> </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리고 세 번째는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수니파 주민들과 소수인 시아파 알라위, 그리고 쿠르드족이 서로서로 맞서게 하는 종파주의화였다, 항쟁 초기만 해도 반정부 시위 대열에는 수니파 뿐 만 아니라 알라위파 시민들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정설인데, 전세가 불리해지자 정권은 자신들이 무너질 경우 수니파 이슬람주의자들이 알라위 시민들을 상대로 대량 학살을 자행할 거라는 식의 공포를 부추겨 결과적으로 그들을 시위 대열 밖으로 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그와 동시에 ’로자바‘라 불리는 시리아 북동부 지역에서 완전한 자치를 꿈꾸던 쿠르드족들을 그들과 국경을 마주한 터키가 군사적으로 공격하는 걸 용인함으로써 수세에 몰린 쿠르드족이 정부에게 방패막이 되어 달라고 손을 내밀 수밖에 없게끔 만드는 데도 성공을 거뒀고 말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p>
<p style="text-align: justify;">마지막으로 아사드 정권이 취한 네 번 째 전략은 가장 치명적이고도 결정적인 것이었다. 지금까지 내전 과정에서 시리아 정부가 거의 붕괴 직전까지 몰린 경우는 적어도 두 차례가 있었는데, 한번은 시리아 국토의 거의 대부분을 반군에게 빼앗긴 정부군이 수도 다마스쿠스와 그 인근 지역에 사실상 고립된 2013년이었고, 또 한 번은 오랜 소모전으로 병력과 무기를 대거 소진한 바샤르 대통령이 공개적으로 더 이상 버티기 힘들 것 같다는 절망감을 표출했던 2015년 여름이었다. 그러나 그 때마다 정권은 이란과 레바논의 헤즈볼라, 그리고 러시아를 차례로 내전에 끌어들여 위기에서 탈출했고, 그러자 그들과 경쟁, 혹은 적대 관계에 있는 미국은 기존의 간접적인 개입 방침을 폐기하고 시리아 내전에 군사적으로 직접 개입하는 전략으로 선회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오늘날 미국은 시리아 내에 12개의 군사기지를 두고 주로 특수부대원들로 구성된 2천 명 가량의 병력을 주둔시키고 있다). 그 결과 내전은 러시아와 이란, 헤즈볼라를 한 축으로 하고, 미국, 영국, 프랑스의 서구 국가들과 사우디를 중심으로 한 걸프의 수니파 왕정국가들 및 이스라엘을 다른 한 축으로 한 외세 열강들 간의 국제적인 대리전이 되어 버렸다. 그로 인해 더욱 더 장기화되고 극대화된 전쟁의 피해가 고스란히 국민들에게 전가되었음은 물론이다. </p>
<p style="text-align: justify;"> </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럼에도 시리아 정부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런 교활하고 파멸적인 전략이 결과적으로 효과를 거둔 셈이 되었고, 오늘날 정부군은 북서부 이들립 주와 남부 요르단과의 국경 지역 일부, 그리고 북부 쿠르드 지역을 제외한 나머지 영토를 거의 다 장악하고 있다. 반면 탈영병과 시민들로 구성돼 처음 무장 항쟁의 불을 댕겼던 자유시리아군은 상당수가 죽거나 나라 밖으로 탈출하고, 나머지는 이슬람주의 세력으로 편입돼 사실상 이름만 남은 상징적인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슬람국가는 정부군과 러시아, 미국, 영국, 프랑스, 쿠르드의 협공으로 거의 시리아 영토에서 쫓겨났고, 알 카에다 계열의 ’자밧 파타 알 샴(시리아 정복 전선)‘과 ’아흐라르 알 샴(시리아 자유인 운동)‘, '자이쉬 알 이슬람(이슬람군대)' 같은 이른바 온건 이슬람주의 반군들도 북서부 이들립 주에 고립된 상태다. 그러나 설령 군사적으로 시리아 정부가 최종적인 승리를 거둔다 한들, 그 누구도 그것을 가리켜 평화와 안정의 회복이라 이야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기에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고, 너무나 많은 증오와 분노가 사람들의 가슴 속 깊은 곳에 낙인처럼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리아 전쟁이 일방의 군사적인 승리와 그 반대편의 굴욕적인 궤멸로 끝나게 되는 상황은 궁극적으로 그 나라에 결코 씻기 힘든 후유증을 남기게 될 것이다. 이는 불과(??) 3년 동안 지속된 한국전쟁의 상처가 반세기가 넘도록 제대로 아물지 않은 채 남아 있는 우리의 과거를 떠올려보면 쉽게 상상이 갈 것이다. 결국 시리아 전쟁의 엉킨 실타래를 풀 수 있는 해법은 군사적 방식의 정반대 편에 있다는 것이다. 우선 그 출발점은 모든 적대 행위의 중단이다. 그를 위해서는 미국과 러시아, 터키, 이란 같은 외세 열강들이 각자가 미는 세력들에 대한 군사적 지원과 개입을 일절 중단하는 게 선행되어야 한다. 더 많은 개입은 더 많은 죽음과 고통을 낳을 뿐이다. 그 다음으로 시리아의 미래는 시리아 국민들이 대화와 협상을 통해 결정하게끔 놔두어야 한다. 물론 국민들을 상대로 갖은 악행을 저질러온 아사드 정부의 존재를 인정할 것인 지에서부터 이슬람국가의 퇴치에 이르기까지 넘어야할 산들은 첩첩산중이다. 그러나 어쨌든 그 산을 곧장 넘어갈지 에둘러 갈 지를 결정하는 건 철저히 그들의 몫이어야 한다. 한국을 비롯한 이른바 국제사회는 그런 그들의 대화와 협상을 중재하고 응원하는 역할에 머무르고 그에 충실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이 그런 험난한 과정을 버틸 수 있도록 시리아에 평화가 올 때까지 세계 이곳저곳을 떠돌고 있는 전쟁 난민들을 품어주고 그들의 상처를 보듬어주는 것, 그것이 지금 우리가 해야 할 몫인 것이다. </p>
<p style="text-align: justify;"> </p>
<p style="text-align: justify;">- 덧붙이는 글 : 지난 연말인 2018년 12월 20일,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돌연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시리아에 주둔 중인 2천 여 명의 미 지상군 병력을 모두 철수시키겠다고 선언했다. “나의 대통령 임기 동안 우리가 그 곳에 주둔했던 유일한 이유였던 이슬람국가(ISIS)를 (완전히) 격퇴시켰다”는 이유에서였다. 이는 곧 미 백악관 내부와 워싱턴 정계의 강한 반발을 불러왔다. 제임스 매티스 국방장관은 사실상의 항명의 뜻을 담은 편지를 남긴 채 자리를 내던졌고, 존 볼튼 국가안보 보좌관과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철수시기를 늦추도록 대통령을 설득하는 한편 이스라엘과 사우디아라비아, UAE 등 지역의 동맹국들을 달래느라 여념이 없다. 물론 트럼프가 하루아침에 지역민의 자결권을 존중하고 평화를 옹호하는 대통령으로 변신했다고 믿을 근거는 전혀 없지만, 시리아를 둘러싼 미국 정부 내의 갈등과 혼란 속에서 지상군을 철수하기로 한 트럼프의 결정은 옳았다. 다만 지상군 철수 선언과 동시에 트럼프가 시리아에서의 공습을 더욱 더 강화하라고 지시한 사실 또한 결코 놓쳐서는 안 된다. 두어 달 뒤 미 지상군이 실제로 시리아에서 모두 철수하더라도 이슬람국가 격퇴를 명분으로 한 미국의 군사개입은 한동안 계속될 것이며, 시리아를 놓고 연신 계산기를 두들기는 러시아, 터키, 이란, 사우디 등 열강들의 행태도 곧 중단될 것 같지는 않다. 즉 불행히도 시리아 국민들이 겪는 고통 역시 당분간 계속 이어질 전망이라는 이야기다. </p>
<p style="text-align: justify;"> </p>
<p style="text-align: justify;">헤더 배경 이미지 ⓒ <a href="https://www.flickr.com/photos/syriana2011/6089225897" target="_blank">syriana2011</a></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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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style="text-align: center;"><img alt="텍스트: [보이지 않아도 우리는] 요즘의 청소년 참정권 운동 쟁점들 # 쥬리 / 배경이미지: 창살 속에서 사람들이 "청소년에게 참정권을", "어린 것은 죄가 아니다" 등의 피켓을 들고 있는 퍼포먼스 장면 사진." src="/attach/6789/2211834593.jpg" style="width: 700px; height: 262px;" /></p>
<p> </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11px;"><span id="docs-internal-guid-ad2a2cae-7fff-0aa7-7b84-27012f35e93b"><span style="font-family: Arial; color: rgb(0, 0, 0); background-color: transparent; font-variant-numeric: normal; font-variant-east-asian: normal; vertical-align: baseline; white-space: pre-wrap;">(이 글은 2017년 이후 촛불청소년인권법제정연대의 활동을 중심으로 쓴 글이며, 다른 주체들이 하고 있는 ‘요즘 청소년 참정권 운동’ 관련 내용은 빈약하거나 없을 수 있다.)</span></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p>
<p style="text-align: right;">쥬리 / 촛불청소년인권법제정연대</p>
<p style="text-align: justify;"> </p>
<p style="text-align: justify;">2018년 2월, 자유한국당 김성태 원내대표는 국회 본회의에서 열린 교섭단체 대표 연설로 다음과 같은 발언을 하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p>
<p style="text-align: justify;">“선거연령 하향에 따른 ‘학교의 정치화’에 대한 우려는 취학연령 하향으로 불식해 가도록 할 것입니다. 조기취학은(선거연령이 하향되어도) 만 18세 유권자가 교복 입고 투표하는 상황을 초래하지 않습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p>
<p style="text-align: justify;">그간 자유한국당 의원들이 선거연령 하향을 반대하며 “학교가 정치화된다”는 명분을 내세웠으나 공감대를 얻지 못하자, 선거연령 하향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학제개편을 하고 나서 하자는 것이라는 변명을 한 것이다. 김성태 원내대표의 해당 발언 이후, 자유한국당 의원들은 하나같이 “선거연령 하향 반대하지 않는다”며 비판을 불식시키려 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1년씩 일찍 입학·졸업하는 학제개편 이후 선거연령 하향을 하자는 건 안 하겠다는 소리다. 학제개편은 어마어마한 예산과 조정이 필요한 일인데 제대로 논의된 적도 없는 일이며,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만 18세에 도달하게 된다면 투표할 수 있게 해주겠다는 건 당장 7세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하더라도 12년 후에야 해주겠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반대 안 한다면서 반대하는 것들 때문에 선거연령 하향 법안은 아직도 통과되지 못하고 계류 중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학교와 정치, 청소년 참정권</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 </p>
<p style="text-align: justify;">헌법에는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 조항이 있다. 정권이나 특정 정치세력이 교육, 특히 공교육을 자신의 이익을 달성하는 도구로 이용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하지만, 현 사회에서는 “학교는 무無정치의 공간이어야 한다”는 뜻으로밖에 해석되지 않는 것 같다. </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교사의 정치적 행위, 정당가입이나 학교 안에서는 물론이고 밖에서의 정치적 의견 피력조차 금지되는 현실이고, 이러한 금지는 ‘학생들을 선동할 수 있다’는 우려로 정당화된다. 학생들은 (많은 중고등학교에 존재하는)정치활동 금지 학칙에 의해 탄압받고, 선거권을 비롯해 정당가입 및 선거운동 자유조차 미성년이라는 이유로 박탈당하고 있다. 학교는 현실정치와 무관한 공간이어야 하고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기만이 청소년의 정치적 주체성을 말살하기 위한 근거가 되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2013년 교학사에서 낸 역사교과서가 뉴라이트 역사관을 반영한 내용으로 서술되어 이를 채택한 고등학교들의 학생들과 교사들, 역사학자 등이 채택 반대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반공교육, 통일교육을 비롯해 사회교과에만 정치가 개입되는 것이 아니다. 국어·영어교과에 어떤 지문이 등장할지, 음악시간엔 어떤 노래가 불려 지며 과학시간에는 어떤 관점으로 과학을 사고하게 될지, 성교육 시간엔 무엇을 어떻게 배울지 등, 공교육의 내용으로 무엇을 누구의 관점으로 채택할 것인가는 이미 정치적 문제이자 정치적 투쟁이 벌어지는 장이다. </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교육 내용만 그러한가. 학생의 인권과 지위, 학비와 급식비, 학교시설과 교육환경 등 모든 것이 정치에 의해 결정된다. 현재 시행되고 있는 광주, 경기, 서울, 전북 외에도 여러 지역에서 학생인권조례 제정을 위한 운동이 벌어졌지만 시·도의회에 의해 좌절되었다. 조례를 주민발의할 권한이 만 19세 이상에게만 주어지고, 조례 제정 권한이 있는 시·도의회의 의원들을 청소년들이 뽑을 수 없는 것도 정치적 결과다. 왜 청소년은 어른들끼리만의 정치에 의해 결정된 것을 일방적으로 수용해야 하는가. 민주주의는 누구나 정치적 주체라는 합의에 기초하는데, 학생이라는 이유로 예외가 되어선 안 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그러나 여전히 정치권에서, 그리고 사람들의 인식 속에서도 청소년 참정권과 관련해 가장 부각되는 쟁점은 ‘학생이 정치를 해도 되는가’ 내지는 ‘학교에 정치가 들어와도 되는가’인 현실이다. 선거연령 하향 등 정치관계법을 소관하는 국회 헌법개정·정치개혁특별위원회에서 자유한국당 의원들이 소리 높여 외쳤던 것도 ‘학교가 정치화된다’ ‘전교조가 선동한다’ 등이었으며, “교복 입고 투표하는 상황”을 초래해선 안 된다던 자유한국당 원내대표의 발언에서 이러한 인식이 드러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2018 지방선거에서 교복을 입고 투표하는 유권자행동을 벌인 이유는 ‘교복을 입은 자’ 곧 학생의 정치적 참여에 대한 이 쟁점을 돌파하기 위한 의도였다. 사전선거일에 맞춰 교복을 입고 투표하는 행위를 알리는 기자회견을 진행하며 ‘투표소 교복 입장’개시를 선포했으며, 자유한국당이 우려하던 ‘교복 입고 투표하는 상황’이 이미 초래되었다고 소리쳤다. 본 선거일에도 개별 지역에서 유권자들이 교복을 입고 투표소에 가서 투표를 한 후 인증샷을 올리는 캠페인이 진행되었다. 4.19 혁명과 5.18 민주화운동, 6월 항쟁을 비롯해 최근의 박근혜 정권 퇴진 촛불까지 교복 입은 학생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했는데 왜 교복을 입고 투표는 할 수 없는 하는지 따져 물었다. </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지방선거를 계기로 기호 0번 교육감 후보 ‘청소년’ 출마와 유세 캠페인도 진행되었다. ‘청소년이야말로 교육감 후보로 자격이 있다’는 모토로 진행된 이 캠페인은 교육감 선거를 비롯한 공직선거 과정에 청소년이 배제되는 문제, 그리고 배제됨으로써 청소년이 원하고 필요로 하는 정책들은 잘 실시되지 않게 되는 현상을 지적했다. 지역 선관위 앞에서 출마를 선포하고, 다른 후보들처럼 유세 명함을 만들어 배포했다. ‘학생 두발·복장 규제 철폐’ ‘폭력교사 징계’ ‘9시 등교 3시 하교’ 등을 내용으로 공약을 발표하고 알리기도 했다. 기호 0번 ‘청소년’의 공약과 실제 교육감 후보 공약의 내용 차이는 청소년 참정권 박탈의 결과를 극명히 드러내주기도 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보편적 권리보장인가 연령 기준의 조정인가</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 </p>
<p style="text-align: justify;">청소년 참정권을 요구하기 위한 국회 앞 농성이 시작되던 지난 3월, 청소년 세 명이 ‘선거권은 인권이다’라고 쓰인 천을 두르고 삭발을 했다. 이 문구는 선거와 정치에서 배제되는 것이 곧 갈급한 인권의 문제임을 이야기하기 위해 고심 끝에 채택되었다. 청소년 참정권 운동은 ‘선거연령 하향 조정(정치개혁) 운동’일 뿐 아니라 ‘청소년인권운동’이기도 하다. 전자라면 무게가 덜해지는 것이 아니다. 다만 전자로 여겨졌을 때 현장 없이 당위만 있는 문제로 간주되어온 경향이 있기 때문에 ‘참정권은 인권’임을 더 힘주어 이야기하게 될 뿐이다. ‘만 18세’라는 나이 기준을 요구할 것인지 아닌지, 얼마나 강조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은 이 부분 때문이기도 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만 18세로의 연령 하향을 요구하는 것은 그것이 가장 정의로운 선거연령 제한 기준이기 때문이 아니다. 민주주의에서 배제되어온 청소년이라는 집단의 참정권을 보장하기 시작하자고 요구하는 것이며, 고등학생이 포함되는 만 18세 연령이 선거권을 갖게 된다면 청소년 참정권의 큰 장벽을 하나 넘어갈 수 있으리란 기대로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농성 이전까지 우리가 말하는 청소년 참정권은 ‘만 18세 선거권’으로 자동 번역되어 받아들여졌고 논의는 ‘만 18세면 판단력이 있는가’ ‘만 18세는 납세, 국방 등 의무를 지는데 권리를 주어야 하지 않은가’에 기울었다. 촛불청소년인권법제정연대는 이러한 장벽 때문에 ‘16세 선거권’ 법안을 국회에 청원하기도 했지만 논의의 지형을 바꾸기는 어려웠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농성이 끝난 후 스스로 평가했을 때 우리의 농성이 이끌어낸 가장 큰 성과는 이와 관련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선거연령 하향 문제가 단순히 선거연령 제도를 약간 조정하는 것 그 이상의 의미가 없다면 삭발을 하고 길바닥에서 농성을 하며 연대하기 위해 전국에서 달려올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참정권은 인권’임을 이야기했던 수많은 구호들이 일조했겠지만 결국 논의의 지형을 조금이나마 바꾼 것은 말이 아니라 행동이었다고 평가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그러나 여전히 청소년 참정권 문제는 ‘만 18세로의 선거연령 하향’으로만 논의되는 경향이 있다. 세계적으로도 만 18세부터 선거권을 보장하는 것이 대세이고 납세, 국방, 혼인, 운전면허 등 ‘성인의 의무와 권리’로 여겨지는 것들이 18세에 부여되는데 참정권은 누리지 못하는 모순적 상황을 해결해야 한다는 논리가 가장 널리 쓰인다. 유효하지만 한계도 있는 논리다. 재산, 인종, 성별이라는 참정권의 장벽이 하나씩 무너져온 역사는 민주주의의 실현이자 확대의 과정이었으며, 동등한 인격체라는 인권의 선언이 진행되어온 역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만 18세에게 인권이 있고 참정권이 보장되어야 한다면, 만 18세 미만에게 보장되어야 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선거연령 하향 운동은 민주주의에서 배제되어온 청소년이라는 집단의 참정권을 요구하는 운동이다. 만 18세로의 한 살 하향도 어려운 상황임에도, 개인적으로 한국 최초로 선거연령 폐지를 요구하는 운동을 시작하고 싶은 욕심과 그 날이 그렇게까지 멀지는 않다는 기대가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참정권 투쟁, 어떻게 싸울 것인가</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 </p>
<p style="text-align: justify;">삭발과 농성이라는 투쟁 방식을 채택하는 과정에서 만류와 우려를 여럿 접했다. 그렇게까지 했는데 주목을 받지 못하고 국회도 꿈쩍하지 않을 상황에 겪게 될 절망에 대한 우려, 청소년 참정권을 요구하는 운동이 또는 ‘청소년들’<sup><a href="http://blog.jinbo.net/glocalpoint/82#footnote_82_1" title="외부로 보인 중심 주체는 청소년 당사자들이었으나, 실제로는 비청소년인 청소년인권활동가들과 연대하는 타 운동의 활동가들 또한 중심적으로 결합했던 농성이었기에 따옴표를 표시했다. " id="identifier_82_1"class="identifier">1</a></sup>이 삭발과 농성이라는 과격한 방식을 택할 때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걱정을 했었다. 삭발과 농성을 진행했을 때 실제로 ‘청소년들이 어른 따라한다’거나 ‘청소년들이 저러는 모습이 보기 좋지 않다’는 식의 반응도 많았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했듯 삭발과 농성이라는 투쟁 방식은 참정권이 인권 문제라는 이해를 넓히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선거연령 하향을 문제는 정치인들의 이해타산 문제가 아니고 그래서도 안 되며, 참정권을 박탈당해 고통 받는 당사자들이 존재한다는 점을 드러내고자 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농성 개시를 선포하며 참정권을 요구하는 청소년 삭발식이 진행되었던 그 기자회견은 나의 사회운동 역사상 가장 많은 기자들이 취재를 하러 왔던 기자회견이었다. 우리의 운동이 지상파 뉴스에 일제히 보도되었던 것도 처음이었다. 권리를 요구하며 삭발하는 청소년들의 모습 자체가 우리 사회에 그만큼 충격적이고 생소했던 것이다. 청소년 인권을 요구하는 공개 삭발식은 기록된 한국 역사상 최초이기도 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참정권을 요구하며 삭발하는 청소년들의 모습이 큰 충격을 불러일으킨 사실 자체가 청소년 참정권의 요구에 의의가 있다. 청소년이 권리를 요구하며 삭발하는 것은 괴기스럽고 이상한데, 그것은 청소년이 자신의 권리를 한 몸 바쳐 요구하는 것이 낯설기 때문이다. 청소년의 의견 개진은 어른들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 수준에서, ‘연습’ 또는 ‘교육’의 과정으로 수행될 때만 인정을 받아왔다. 그러나 청소년이 비청소년과 동등한 참정권을 요구하는 것, 그것을 삭발이라는 방식으로 피력하는 행위는 허용될 수 없다. 참정권을 요구하는 청소년들의 삭발은 금기를 어기는 행위였고 삭발식과 그것을 둘러싼 대중의 반응은 청소년 참정권 요구의 본질을 드러냈다. 삭발을 한 청소년 중 한 명은 “나의 몸을 이용해 내 권리를 요구하고 싶었다”고 취지를 밝혔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삭발과 농성까지 하며 선거연령 하향 법안의 4월 국회 통과, 그리고 6월 지방선거에서의 참여를 요구했으나 결국 우리의 희망은 이뤄지지 못했다. 이후 6월 지방선거일에는 만 19세 미만 청소년들만 표를 행사할 수 있는 ‘모의선거’도 함께 진행되었다. 이 모의선거는 촛불청소년인권법제정연대가 주최하지는 않았고, 한국YMCA를 비롯하여 지역 곳곳에서 시행되었다. 이 모의선거 또한 청소년 참정권 보장과 선거연령 하향을 요구하는 방식이었다. 청소년도 충분히 숙고하여 투표라는 행위를 할 수 있는 주체임을 보여주고, 투표율을 통해 선거에 참여하고 싶은 청소년 대중의 욕구를 드러냈다. 선거 후에는 결과를 공개하여 청소년 민심의 동향을 알리기도 했다. 비록 청소년 대다수가 참여하는 선거는 아니지만 말이다. 한국YMCA 등은 보다 많은 청소년들이 참여하는 공식적인 행사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모의선거 법제화를 요구하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그러나 모의선거 방식에 대한 비판도 있다. 청소년의 행위가 늘 연습이거나 모의적인 것으로만 여겨지는, 그런 틀 안에서만 허용되는데 참정권이라는 현실의 권리를 요구하는 방식마저 모의선거여야 하는지를 묻게 되는 것이다. 청소년 참정권을 반대하는 어른들마저 ‘투표 연습’하는 의미로 찬성해줄 것 같은 온건한 방식으로 투쟁하는 것을 탐탁지 않아하는 시각도 있다. 모의선거가 치러지고 나면 어른들의 ‘진짜 선거’ 결과와 얼마나 비슷하거나 다른지를 위주로 청소년들의 판단력을 평가하는 언론 보도들이 나오게 되는 현상을 비판적으로 보기도 한다. 청소년을 배제한 경선을 통해 출마한 후보들이, 청소년들의 목소리를 들을 필요가 없는 조건에서 공약을 만들고 선거운동을 해온 마당에 기존의 후보들 중에 선택하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는 시각도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삭발과 농성, 그리고 모의선거 모두 청소년 참정권 요구를 알리는 데 일조한 운동이다. 선거연령 하향 법안이 통과되지 않는 한, 그리고 통과되더라도 더 낮추기 위하여, 청소년 참정권을 요구하는 운동은 계속될 것이고 그 과정에 또다시 삭발이나 농성이 진행될 수도 있다. 아마 다음 선거에서도 청소년 모의선거는 치러질 것이다. 어떻게 싸울 것인가를 둘러싼 논의가 더욱 깊어지길 바라며, 청소년 참정권 운동이 빠른 시일 내에 실질적 성과 또한 함께 거두길 기원한다.</p>
<p> </p>
<p>헤더 배경이미지: ⓒ <a href="http://youthact.kr/2018%EB%85%84-%ED%95%99%EC%83%9D%EC%9D%98-%EB%82%A0-%EC%84%A0%EC%96%B8%EB%AC%B8/">촛불청소년인권법제정연대</a></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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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td><a href="http://blog.jinbo.net/glocalpoint/81">제주 예멘 이슈를 통해 본 한국 난민정책</a></td></tr>
<tr><td><a href="http://blog.jinbo.net/glocalpoint/80">아랍의 봄바람에 피었다 전쟁의 피바람에 진 꽃, 시리아 혁명</a></td></tr>
</table></div><div class="buttons-bottom center jinboblog-i-like-this-buttons"><a class="button-jinboblog" href="javascript:void(0);" title="스크랩으로 글 링크를 저장하세요" onclick="recommend('6789',82,'/glocalpoint','');"><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mini_chuchon.png" alt="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a><a class="button-twitter" href="http://twitter.com/home?status=http%3A%2F%2Fblog.jinbo.net%2Fglocalpoint%2F82+%22%EC%9A%94%EC%A6%98%EC%9D%98%20%EC%B2%AD%EC%86%8C%EB%85%84%20%EC%B0%B8%EC%A0%95%EA%B6%8C%20%EC%9A%B4%EB%8F%99%20%EC%9F%81%EC%A0%90%EB%93%A4%22" target="_blank" title="트위터로 리트윗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twitter.png" alt="트위터로 리트윗하기" /></a><a class="button-facebook" href="http://www.facebook.com/sharer.php?u=http%3A%2F%2Fblog.jinbo.net%2Fglocalpoint%2F82&t=%EC%9A%94%EC%A6%98%EC%9D%98%20%EC%B2%AD%EC%86%8C%EB%85%84%20%EC%B0%B8%EC%A0%95%EA%B6%8C%20%EC%9A%B4%EB%8F%99%20%EC%9F%81%EC%A0%90%EB%93%A4" target="_blank" title="페이스북에 공유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facebook.png" alt="페이스북에 공유하기" /></a><a class="button-delicious" href="http://delicious.com/save" onclick="window.open('http://delicious.com/save?v=5&noui&jump=close&url=http%3A%2F%2Fblog.jinbo.net%2Fglocalpoint%2F82&title=%EC%9A%94%EC%A6%98%EC%9D%98%20%EC%B2%AD%EC%86%8C%EB%85%84%20%EC%B0%B8%EC%A0%95%EA%B6%8C%20%EC%9A%B4%EB%8F%99%20%EC%9F%81%EC%A0%90%EB%93%A4','delicious','toolbar=no,width=550,height=550'); return false;" title="딜리셔스에 북마크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delicious.png" alt="딜리셔스에 북마크" /></a></div><div class="footnotes"><ol><li id="footnote_82_1">외부로 보인 중심 주체는 청소년 당사자들이었으나, 실제로는 비청소년인 청소년인권활동가들과 연대하는 타 운동의 활동가들 또한 중심적으로 결합했던 농성이었기에 따옴표를 표시했다. <a href="#identifier_82_1" class="backToTextAnchor"><img src="/plugins/../jplugins/CKEditor/images/icon_footnote_backtotext.gif" alt="텍스트로 돌아가기" /></a></li></ol></div><p><strong><a href="http://blog.jinbo.net/glocalpoint/82?commentInput=true#entry82WriteComment">댓글 쓰기</a></strong></p>[웹진 글로컬포인트] 5호를 발행합니다!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http://blog.jinbo.net/glocalpoint/832019-02-11T16:44:08+09:002019-02-11T16:24:48+09:00<p> </p>
<p style="text-align: center;"><img alt="좌상단 텍스트: "글로컬포인트 5호" / 우상단 이미지: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 로고 이미지 / 중단 커버이미지: "나도 고발한다"라는 큰 글자와 "#METOO"라는 작은 글자가 검은 배경 위에 흰색으로 적혀 있다. / 하단: 목차(게시물 본문 참조)" src="/attach/6789/1100015785.jpg" style="width: 600px; height: 900px;" /></p>
<p>웹진 <strong>글로컬포인트</strong> 5호 목차</p>
<p><span style="color:#FFFFFF;"><span style="background-color:#FF0000;">[특집]</span></span><br />
나영 <a href="http://blog.jinbo.net/glocalpoint/75"><strong>‘#MeToo’, 법 너머의 변화를 위하여 </strong></a><br />
잇을 <a href="http://blog.jinbo.net/glocalpoint/76"><strong>퀴어 커뮤니티와 성폭력</strong> </a><br />
안팎 <a href="http://blog.jinbo.net/glocalpoint/77"><strong>어떤 미투</strong></a></p>
<p><span style="color:#FFFFFF;"><span style="background-color:#FF0000;">[보이지 않아도 우리는]</span></span><br />
최재훈 <a href="http://blog.jinbo.net/glocalpoint/80"><strong>아랍의 봄바람에 피었다 전쟁의 피바람에 진 꽃, 시리아 혁명</strong></a><br />
고은지 <a href="http://blog.jinbo.net/glocalpoint/81"><strong>제주 예멘 이슈를 통해 본 한국 난민정책</strong></a><br />
쥬리 <a href="http://blog.jinbo.net/glocalpoint/82"><strong>요즘의 청소년 참정권 운동 쟁점들</strong></a></p>
<p><span style="color:#FFFFFF;"><span style="background-color:#FF0000;">[칼럼]</span></span><br />
김현철 <a href="http://blog.jinbo.net/glocalpoint/78"><strong>‘감금’에서 ‘감금지리’로, 언어화되지 않은 착취와 소외, 감정과 트라우마, 살들의 논의를 위해</strong></a><br />
시우 <a href="http://blog.jinbo.net/glocalpoint/79"><strong>평화의 시대, 저항의 자리</strong></a></p>
<p> </p>
<fieldset style="margin:20px 0px 20px 0px;padding:5px;"><legend><span><strong>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strong></span></legend><!--Creative Commons License--><div style="float: left; width: 88px; margin-top: 3px;"><a rel="license" href="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nd/2.0/kr/" target=_blank><img alt="Creative Commons License" style="border-width: 0" src="http://i.creativecommons.org/l/by-nc-nd/2.0/kr/88x31.png"/></a></div><div style="margin-left: 92px; margin-top: 3px; text-align: justify;">이 저작물은 <a rel="license" href="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nd/2.0/kr/" target=_blank>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2.0 대한민국 라이센스</a>에 따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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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p>
<p style="text-align: center;"><img alt="텍스트: [칼럼] ‘감금’에서 ‘감금지리(carceral geographies)’로, 언어화되지 않은 착취와 소외, 감정과 트라우마, 살들(fleshes)의 논의를 위해 # 김현철 / 배경이미지: 검은 실루엣으로 표현된 감금시설 외부 전경" src="/attach/6789/2391828646.jpg" style="width: 700px; height: 262px;" /></p>
<p> </p>
<p> </p>
<p dir="ltr" style="line-height:1.2;margin-top:0pt;margin-bottom:8pt;text-align: justify;"> </p>
<p dir="ltr" style="line-height:1.2;margin-top:0pt;margin-bottom:8pt;text-align: right;"><span style="font-size:14px;"><span style="font-family:arial,helvetica,sans-serif;"><span id="docs-internal-guid-5caebee4-7fff-3780-417e-1f95544aa698"><span style="color: rgb(0, 0, 0); background-color: transparent; font-variant-numeric: normal; font-variant-east-asian: normal; vertical-align: baseline; white-space: pre-wrap;">김현철 / 지리학 연구자</span></span></span></span></p>
<p> </p>
<p dir="ltr" style="line-height:1.2;margin-top:0pt;margin-bottom:8pt;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14px;"><span style="font-family:arial,helvetica,sans-serif;"><span id="docs-internal-guid-5caebee4-7fff-3780-417e-1f95544aa698"><span style="color: rgb(0, 0, 0); background-color: transparent; font-variant-numeric: normal; font-variant-east-asian: normal; vertical-align: baseline; white-space: pre-wrap;">‘감금’이라는 말을 들으면 사람들은 어떤 이미지나 장면을 떠올릴까? 누군가는 최근 종영된 ‘슬기로운 감금생활’을 떠올릴지도 모르고, 북미에서 시즌 6을 넘어가며 꾸준한 인기를 얻고 있는 ‘오렌지 이즈 더 뉴 블랙(Orange is the new black)’ 등, 감금되어있는 사람들을 다루는 이야기를 떠올릴지도 모른다. 어쩌면 실제 감금사건에서 발생한 폭력과 살인을 기반으로 한 다큐멘터리를 떠올릴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감금지리’라는 말을 들으면 어떤 이미지나 장면이 떠오를까? 아마 그전에 감금지리라는 게 도대체 뭔지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지리라니까 지도를 말하는 걸까? 감금공간을 지도에 표시하는 걸까? 그 역시 감금지리의 일부이겠으나 감금공간을 시각화하는 것이 곧 감금지리라고 말하기는 어렵다.</span></span></span></span></p>
<p dir="ltr" style="line-height:1.2;margin-top:0pt;margin-bottom:8pt;text-align: justify;"> </p>
<p dir="ltr" style="line-height:1.2;margin-top:0pt;margin-bottom:8pt;text-align: justify;"> </p>
<p dir="ltr" style="line-height:1.2;margin-top:0pt;margin-bottom:8pt;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14px;"><span style="font-family:arial,helvetica,sans-serif;"><span id="docs-internal-guid-5caebee4-7fff-3780-417e-1f95544aa698"><span style="color: rgb(0, 0, 0); background-color: transparent; font-variant-numeric: normal; font-variant-east-asian: normal; vertical-align: baseline; white-space: pre-wrap;">감금지리는 뭘까? 나 역시 계속 공부해가는 입장이라 조심스럽지만, 나는 감금지리는 감금을 시공간적 과정(temporal-spatial process)으로 다루는 분야라고 말하고 싶다. 달리 말하면 감금을 단순히 특정한 장소, 고정된 지점(fixed point)에서 발생한 일회적/일탈적 행동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 감금이 발생하기 전과 후, 그리고 감금되어있는 동안 다층적으로 얽혀있는 관계와 감정, 경제/정치적 착취와 소외를 ‘과정’의 측면에서 이해하는 것이다. 더불어 감금된 주체를 단순히 ‘일상사회’와 유리된 ‘벌거벗은 생명’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감금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폭력과 친밀감, 돌봄 사이에서 ‘되어가는(becoming)’ 존재로 바라본다는 것이다. 즉 감금지리는 감금을 ‘비밀스럽고 은밀한’, ‘사적인’, ‘현실과 떨어진’ 미지의 무언가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감금의 과정들을 ‘사회적 공간의 생산’이 이루어지는 영역으로, 그리고 피와 땀을 담지한 ‘살(flesh)’의 현현으로 바라보는 영역이다.</span></span></span></span></p>
<p dir="ltr" style="line-height:1.2;margin-top:0pt;margin-bottom:8pt;text-align: justify;"> </p>
<p dir="ltr" style="line-height:1.2;margin-top:0pt;margin-bottom:8pt;text-align: justify;"> </p>
<p dir="ltr" style="line-height:1.2;margin-top:0pt;margin-bottom:8pt;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14px;"><span style="font-family:arial,helvetica,sans-serif;"><span id="docs-internal-guid-5caebee4-7fff-3780-417e-1f95544aa698"><span style="color: rgb(0, 0, 0); background-color: transparent; font-variant-numeric: normal; font-variant-east-asian: normal; vertical-align: baseline; white-space: pre-wrap;">감금지리는 지금, 한국사회에서 어떤 파편화된 조각들을 ‘이야기’로 엮어내고, 발화할 수 있는 힘을 우리에게 줄 수 있을까? 이 글에서는 크게 세 가지 부분 – (1) 감금공간을 둘러싼 권력과 통치의 역학, (2), 일상공간과 감금공간 간 경계의 모호함, (3) 감정과 육체, 트라우마의 정동-에 초점을 맞춰 간략히 설명해볼까 한다.</span></span></span></span></p>
<p dir="ltr" style="line-height:1.2;margin-top:0pt;margin-bottom:8pt;text-align: justify;"> </p>
<p dir="ltr" style="line-height:1.2;margin-top:0pt;margin-bottom:8pt;text-align: justify;"> </p>
<p dir="ltr" style="line-height:1.2;margin-top:0pt;margin-bottom:8pt;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14px;"><span style="font-family:arial,helvetica,sans-serif;"><span id="docs-internal-guid-5caebee4-7fff-3780-417e-1f95544aa698"><span style="color: rgb(0, 0, 0); background-color: transparent; font-variant-numeric: normal; font-variant-east-asian: normal; vertical-align: baseline; white-space: pre-wrap;">우선 첫째로 감금지리는 구금, 억류, 투옥 등 다양한 형태의 (준)감금공간에 갇히게 되는 사람들을 둘러싼 권력과 통치의 역학이 모든 ‘몸’들에게 균등하지 않게 발전해왔다는 것,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본과 노동이 어떻게 유동되어왔는지에 대해 다룬다. 루스 길모어 (2007)의 경우 어떻게 사설감옥이 캘리포니아에서 1970년대 이후 급증해왔는지에 대해 논한다. 길모어는 이 논의를 통해 국회의원과 기업, 사립대학법인 등이 어떻게 감옥시설을 지지하고 이를 법제화함으로써 인종화된 ‘몸들’을 ‘침대수’로 자리매김해왔는지, 그리고 그 침대수로 채워진 ‘죄수’들이 어떻게 거의 공짜에 다름없는 값싼 노동력이 되어 ‘교정(correction)’이란 명목 하에 산업의 끝자락에서 착취되어왔는지를 보여준다. 이처럼 감금지리는 감옥을 단순히 ‘죄를 지은 사람을 가두는 곳’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어떤 정체성과 몸을 담지한 존재들이 불균등한 권력의 역학 속에서 감금되고, 그 감금된 몸들이 어떻게 복지와 노동착취의 사각지대에 놓이게 되는지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언어를 제공한다. 한국사회에서는 최근 몇 년 동안 사적 공간에서의 불법촬영과 디지털성범죄물의 생산 및 유통을 둘러싼 성산업의 카르텔을 규탄하는 논의들이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특히 2018년 8월 4일이면 4차 시위를 맞는 불법촬영 편파수사 규탄 시위에서 핵심이 되는 주장은 법과 구금의 역학이 균등하지 않으며, 개인/집단의 정체성에 따라 그 역학이 달라지는 것에 대한 부당함에 대한 것이다. 이처럼 감금지리는 권력과 통치가 어떻게 특정한 집단과 몸들에게 더욱 견고한 힘을 휘두르는지, 그럼으로써 어떻게 ‘일상공간’이라는 환상을 견고하게 유지하는지 통찰할 수 있게 한다.</span></span></span></span></p>
<p dir="ltr" style="line-height:1.2;margin-top:0pt;margin-bottom:8pt;text-align: justify;"> </p>
<p dir="ltr" style="line-height:1.2;margin-top:0pt;margin-bottom:8pt;text-align: justify;"> </p>
<p dir="ltr" style="line-height:1.2;margin-top:0pt;margin-bottom:8pt;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14px;"><span style="font-family:arial,helvetica,sans-serif;"><span id="docs-internal-guid-5caebee4-7fff-3780-417e-1f95544aa698"><span style="color: rgb(0, 0, 0); background-color: transparent; font-variant-numeric: normal; font-variant-east-asian: normal; vertical-align: baseline; white-space: pre-wrap;">칼리 니콜 그로스(Gross, 2015)는 아프리칸 어메리칸 여성들(이하 흑인여성)이 어떻게 법의 보호에서 끊임없이 밀려나는지, 그리고 그 밀려나는 기제에 어떻게 백인남성중심의 위계와 흑인여성들을 향한 이중잣대(한없이 유혹적이거나 힘이 남자처럼 세거나)가 드리워져 왔는지에 대해 논한다. 이는 비단 흑인여성에게만 해당되는 사향은 아니다. 한국의 맥락에서 ‘가장’의 상습적인 가정폭력은 ‘사적 공간’에서 발생한 일이라는 이유만으로 훈방조치로 끝나는 일이 비일비재하지만, 오랫동안 폭력에 노출되어온 여성이 파트너를 폭행하거나 죽였을 경우, 여성이 그 동안 오롯이 홀로 감당해와야했던 폭력은 고려되지 않고 징역이 부과되는 경우는 흔하다. ‘가정폭력’과 ‘남편 살해’와 같은 키워드를 넣고 단순 검색만 해봐도 그 사례들을 찾기는 어렵지 않다 (여성신문, 2014.10.30, 중앙일보, 2018.07.02 등). 성폭력의 경우, 여성이 자신이 당한 성폭력에 대해 정당한 고소를 하더라도 ‘무고죄’항목으로 쉽게 맞대응할 수 있는 현재의 법구조는 ‘여성= 피해자거나 꽃뱀’이라는 이중도식이 견고히 작동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 과정에서 여성은 성폭력, 성추행의 피해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법’으로 보호받지 못할뿐 아니라 많은 경우 침묵을 암묵적으로 강요당하고, 더 나아가 오히려 가해자로 여겨지기도 한다. 이 일련의 과정 속에서 피해여성은 ‘집’과 ‘감옥’ 사이 흐릿해진 경계 사이에 놓인다. 그 불안과 때론 오갈 데 없는 감정 역시 감금지리에서 주의깊게 보고자 하는 지점 중 하나이다.</span></span></span></span></p>
<p dir="ltr" style="line-height:1.2;margin-top:0pt;margin-bottom:8pt;text-align: justify;"> </p>
<p dir="ltr" style="line-height:1.2;margin-top:0pt;margin-bottom:8pt;text-align: justify;"> </p>
<p dir="ltr" style="line-height:1.2;margin-top:0pt;margin-bottom:8pt;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14px;"><span style="font-family:arial,helvetica,sans-serif;"><span id="docs-internal-guid-5caebee4-7fff-3780-417e-1f95544aa698"><span style="color: rgb(0, 0, 0); background-color: transparent; font-variant-numeric: normal; font-variant-east-asian: normal; vertical-align: baseline; white-space: pre-wrap;">이와 연결하여 감금지리가 지닌 두 번째 가능성의 영역으로 넘어가보고자 한다. 감금지리는 감금공간을 단순히 갇힌 공간으로만 바라보지 않는다. 오히려 일상공간과 감금공간의 경계가 뚜렷하지 않으며, 그 경계는 자주 겹쳐진다는 시사점을 준다. 제니퍼 터너 (Jennifer Tuner, 2016)는 일상공간과 감금공간 사이 지속적으로 미끄러지는 지점들에 대해 논의한다. 그녀의 논의에서 감금공간의 경계는 ‘패치’되는 것, 즉 여러 조각들로 기워지고 덧대지는 것이다. 즉 각 조각들의 경계가 지닌 물질성을 담지하면서도 그 경계를 둘러싼 개인/집단 간 관계망에 의해 기워지는 경계들이 때로는 우연에 의해 강화되기도 하며, 때로는 흐려지기도 한다. 터너의 감금공간을 바탕으로 한 경계 논의는 경계의 유동성(fluidity)의 입장을 견지하면서도 그 경계의 물질성과 육체성을 고려한다는 점에서 해체주의적 경계 논의와 구별된다.</span></span></span></span></p>
<p dir="ltr" style="line-height:1.2;margin-top:0pt;margin-bottom:8pt;text-align: justify;"> </p>
<p dir="ltr" style="line-height:1.2;margin-top:0pt;margin-bottom:8pt;text-align: justify;"> </p>
<p dir="ltr" style="line-height:1.2;margin-top:0pt;margin-bottom:8pt;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14px;"><span style="font-family:arial,helvetica,sans-serif;"><span id="docs-internal-guid-5caebee4-7fff-3780-417e-1f95544aa698"><span style="color: rgb(0, 0, 0); background-color: transparent; font-variant-numeric: normal; font-variant-east-asian: normal; vertical-align: baseline; white-space: pre-wrap;">터너의 감금공간 경계논의는 ‘주민등록법’이나 ‘이주노동자등록법’과 같은 법 사이에서 ‘일상공간’과 ‘감금공간’의 경계 사이에 놓이는 존재들을 탐구하는 데 시사점을 줄 수 있다. ‘주민’이나 ‘합법적 이주자’로 자신의 신분을 증명할 수 없는 몸들은 종종 ‘정신병자’나 ‘염전노예’와 같은 이름으로 감금공간에서 ‘발견’되기도 한다. 실제 사건을 배경으로 한 <믿거나, 말거나 찬드라의 경우, 박찬욱, 2003>는 ‘제대로 된 한국어’나 이주노동자 신분을 보여주는 문서가 없을 경우 그/그녀가 경찰서의 임시구금공간에서 폐쇄 정신병원으로 이동되는 등 6년이 넘는 시간동안 강제구금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주민등록의 누락과 장애, ‘보호자’의 부재 속에서 종종 ‘염전노예’와 같은 이들이 오랫동안의 감금과 노동 착취 중 ‘떠오른다’. 이들에게 있어 일상공간과 감금공간의 경계는 뚜렷한 ‘범죄’의 이름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국민’과 ‘주민’을 호명하는 법과 그 법을 집행하는 사람들의 무지나 무관심, 혹은 적극적인 착취 속에서 발생한다. 그리고 이러한 요소들 사이에서 강화되기도 하고 덧대워지며, 때로는 흐려지는 감금공간과 일상공간의 경계지대를 이야기해나갈 때, 우리는 단순한 교정과 처벌, 애착과 탈착, 사회 안/팎, 민간인/수감자로 이분화할 수 없는 부분들을 대면할 수 있다.</span></span></span></span></p>
<p dir="ltr" style="line-height:1.2;margin-top:0pt;margin-bottom:8pt;text-align: justify;"> </p>
<p dir="ltr" style="line-height:1.2;margin-top:0pt;margin-bottom:8pt;text-align: justify;"> </p>
<p dir="ltr" style="line-height:1.2;margin-top:0pt;margin-bottom:8pt;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14px;"><span style="font-family:arial,helvetica,sans-serif;"><span id="docs-internal-guid-5caebee4-7fff-3780-417e-1f95544aa698"><span style="color: rgb(0, 0, 0); background-color: transparent; font-variant-numeric: normal; font-variant-east-asian: normal; vertical-align: baseline; white-space: pre-wrap;">더 나아가 감금지</span></span></span></span><span style="background-color: transparent; color: rgb(0, 0, 0); white-space: pre-wrap; font-family: arial, helvetica, sans-serif; font-size: 14px;">리는 이 모호한 경계 사이에서 발생하는 감정과 트라우마, 되어가는(becoming) 살들(fleshes), 그리고 이들간의 정동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가능성을 열기도 한다. 터너 (Turner, 2016)는 ‘디스포라 (Dyspora, dystopia와 diaspora의 합성어)’라는 개념을 통해 전과자들이 감금공간에 대해 가지게 되는 모순적인 감정과 정동에 대해 논의한다. 그녀는 전과자들이 ‘거리 위(on street)’ 삶의 척박함과 공식적 경계에 포함될 수 없는 낙인 사이에서 어떻게 감옥이라는 공간에 대해 디스토피아적 애착을 느끼게 되는지에 대해 논한다. 더불어 앞서 이야기했던 그로스 (Gross, 2015) 역시 오랫동안 가정폭력에 시달렸던 아프리칸 어메리칸 여성들이 어떻게 감금공간을 친밀감의 공간으로 느끼게 되었는지에 대해 논한다. 감금공간 내에서의 친밀감이나 동질성에 기반한 관계형성과 돌봄의 관계를 보는 것은 ‘감금공간 = 폭력’이라는 납짝한 상상이 어떤 관계와 돌봄을 누락하고 있는지를 질문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더불어 이를 통해 감금공간 내 저항과 공간전복에 대한 가능성을 저평가하게 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나오미 백(Paik, 2016)은 관타나모 베이(Guantanamo bay) 포로수용소에서 있었던 단식투쟁과 이 투쟁으로 말미암은 강제음식급여에 관해 다루고 있는데, 이는 감금공간 내에서 존재하는 폭력의 정동과 그 트라우마가 단지 트라우마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수감자들의 공통경험과 감각을 기반으로 한 저항의 정동으로 나아가기도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span></p>
<p dir="ltr" style="line-height:1.2;margin-top:0pt;margin-bottom:8pt;text-align: justify;"> </p>
<p dir="ltr" style="line-height:1.2;margin-top:0pt;margin-bottom:8pt;text-align: justify;"> </p>
<p dir="ltr" style="line-height:1.2;margin-top:12pt;margin-bottom:0pt;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14px;"><span style="font-family:arial,helvetica,sans-serif;"><span id="docs-internal-guid-5caebee4-7fff-3780-417e-1f95544aa698"><span style="color: rgb(0, 0, 0); background-color: transparent; font-variant-numeric: normal; font-variant-east-asian: normal; vertical-align: baseline; white-space: pre-wrap;">앞</span></span></span></span><span style="background-color: transparent; color: rgb(0, 0, 0); white-space: pre-wrap; font-family: arial, helvetica, sans-serif; font-size: 14px;">에서 살펴본 세 지점들은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있으며, 감금지리는 자주 이들간의 연결지점을 포착하는 것에 중점을 둔다. 권력과 통치의 불균등한 역학을 보여주는 지점이자 일상공간과 자주 경계가 중첩되는 공간, 떄로는 모순적인 감정과 정동이 교차하는 공간으로 감금공간을 바라보는 것은 궁극적으로 ‘한국사회 = 발전주의 국가’라는 강력한 논의틀과 상상을 흔들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한국사회를 다루는 연구에서 권력과 자본은 끊임없이 ‘추동’하는 힘으로, 능동적 힘으로 재현되어온 반면, 감금공간은 이러한 ‘발전주의적 추동’의 일탈적 사건들, 혹은 단순히 군사정권의 폐해나 복지제도 실패의 결과로 취급되었다. 예컨대 정수남(2015)의 경우, 1960년대 부랑인 통치방식을 군사세력을 기반으로 한 박정희 정권의 국가근대성의 ‘허약함’이 나타난 것으로 분석하였다. 강력한 발전추동을 지녔던 군사정권의 허약함이 부랑인 통치방식으로 나타났다는 서사나 ‘염전노예’나 ‘강제입원’과 같은 ‘사건’들을 아직도 ‘후진적’인 한국의 복지체계를 한탄하는 서사로 이야기하는 것은 감금공간을 발전적 추동의 부산물이나 잔여물로 여기는 시각을 보여준다. 이러한 수동적인 서사와 달리 필자는 감금공간의 건설과 관리 그 자체가 바로 발전적 추동을 가능, 역동하게 해온 능동적 힘이라는 가능성을 감금지리의 논의가 보여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한다. 그리고 가능성을 탐구함으로써 그동안 한국사회의 정치경제구조를 발전주의적 모델로 이해하는 과정에서 논의되지 못했던, 혹은 논의하지 않았던 정치적 지형과 경계구조, 감정과 존재의 논의가 이루어지기를 고대해본다.</span></p>
<p><br />
<br />
</p>
<p dir="ltr" style="line-height:1.2;margin-top:0pt;margin-bottom:8pt;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14px;"><span style="font-family:arial,helvetica,sans-serif;"><span id="docs-internal-guid-5caebee4-7fff-3780-417e-1f95544aa698"><span style="color: rgb(0, 0, 0); background-color: transparent; font-weight: 700; font-variant-numeric: normal; font-variant-east-asian: normal; vertical-align: baseline; white-space: pre-wrap;">참고문헌</span></span></span></span></p>
<p dir="ltr" style="line-height:1.2;margin-top:0pt;margin-bottom:8pt;text-indent: -36pt;text-align: justify;padding:0pt 0pt 0pt 36pt;"><span style="font-size:14px;"><span style="font-family:arial,helvetica,sans-serif;"><span id="docs-internal-guid-5caebee4-7fff-3780-417e-1f95544aa698"><span style="color: rgb(0, 0, 0); background-color: transparent; font-variant-numeric: normal; font-variant-east-asian: normal; vertical-align: baseline; white-space: pre-wrap;">박찬욱, 2003, 믿거나, 말거나 찬드라의 경우.</span></span></span></span></p>
<p dir="ltr" style="line-height:1.2;margin-top:12pt;margin-bottom:0pt;text-indent: -36pt;text-align: justify;padding:0pt 0pt 0pt 36pt;"><span style="font-size:14px;"><span style="font-family:arial,helvetica,sans-serif;"><span id="docs-internal-guid-5caebee4-7fff-3780-417e-1f95544aa698"><span style="color: rgb(0, 0, 0); background-color: transparent; font-variant-numeric: normal; font-variant-east-asian: normal; vertical-align: baseline; white-space: pre-wrap;">여성신문, 2014.10.30, 목에 칼을 들이대도 죽일 마음은 없었다?, </span><a href="https://bit.ly/2OFsnSA" style="text-decoration-line: none;"><span style="color: rgb(5, 99, 193); background-color: transparent; font-variant-numeric: normal; font-variant-east-asian: normal; text-decoration-line: underline; text-decoration-skip-ink: none; vertical-align: baseline; white-space: pre-wrap;">https://bit.ly/2OFsnSA</span></a></span></span></span></p>
<p dir="ltr" style="line-height:1.2;margin-top:0pt;margin-bottom:8pt;text-indent: -36pt;text-align: justify;padding:0pt 0pt 0pt 36pt;"><span style="font-size:14px;"><span style="font-family:arial,helvetica,sans-serif;"><span id="docs-internal-guid-5caebee4-7fff-3780-417e-1f95544aa698"><span style="color: rgb(0, 0, 0); background-color: transparent; font-variant-numeric: normal; font-variant-east-asian: normal; vertical-align: baseline; white-space: pre-wrap;">정수남, 2015, 「1960년대 ‘부랑인’ 통치방식과 ‘사회적 신체’ 만들기」, 민주주의와 인권 15(3): 140-185.</span></span></span></span></p>
<p dir="ltr" style="line-height:1.2;margin-top:0pt;margin-bottom:8pt;text-indent: -36pt;text-align: justify;padding:0pt 0pt 0pt 36pt;"><span style="font-size:14px;"><span style="font-family:arial,helvetica,sans-serif;"><span id="docs-internal-guid-5caebee4-7fff-3780-417e-1f95544aa698"><span style="color: rgb(0, 0, 0); background-color: transparent; font-variant-numeric: normal; font-variant-east-asian: normal; vertical-align: baseline; white-space: pre-wrap;">중앙일보, 2018.07.02, ‘37년 가정폭력’ 남편 살해, 法 “정당방위 아니다”, </span><a href="https://bit.ly/2LS652g" style="text-decoration-line: none;"><span style="color: rgb(5, 99, 193); background-color: transparent; font-variant-numeric: normal; font-variant-east-asian: normal; text-decoration-line: underline; text-decoration-skip-ink: none; vertical-align: baseline; white-space: pre-wrap;">https://bit.ly/2LS652g</span></a></span></span></span></p>
<p> </p>
<p dir="ltr" style="line-height:1.2;margin-top:0pt;margin-bottom:8pt;text-indent: -36pt;text-align: justify;padding:0pt 0pt 0pt 36pt;"><span style="font-size:14px;"><span style="font-family:arial,helvetica,sans-serif;"><span id="docs-internal-guid-5caebee4-7fff-3780-417e-1f95544aa698"><span style="color: rgb(0, 0, 0); background-color: transparent; font-variant-numeric: normal; font-variant-east-asian: normal; vertical-align: baseline; white-space: pre-wrap;">Gilmore, R. W. (2007). </span><span style="color: rgb(0, 0, 0); background-color: transparent; font-style: italic; font-variant-numeric: normal; font-variant-east-asian: normal; vertical-align: baseline; white-space: pre-wrap;">Golden Gulag: Prisons, Surplus, Crisis, and Opposition in Globalizing California</span><span style="color: rgb(0, 0, 0); background-color: transparent; font-variant-numeric: normal; font-variant-east-asian: normal; vertical-align: baseline; white-space: pre-wrap;">. California: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span></span></span></span></p>
<p dir="ltr" style="line-height:1.2;margin-top:0pt;margin-bottom:8pt;text-indent: -36pt;text-align: justify;padding:0pt 0pt 0pt 36pt;"><span style="font-size:14px;"><span style="font-family:arial,helvetica,sans-serif;"><span id="docs-internal-guid-5caebee4-7fff-3780-417e-1f95544aa698"><span style="color: rgb(0, 0, 0); background-color: transparent; font-variant-numeric: normal; font-variant-east-asian: normal; vertical-align: baseline; white-space: pre-wrap;">Gross, K. N. (2015). African American Women, mass incarceration, and the politics of protection. </span><span style="color: rgb(0, 0, 0); background-color: transparent; font-style: italic; font-variant-numeric: normal; font-variant-east-asian: normal; vertical-align: baseline; white-space: pre-wrap;">The Journal of American History 102</span><span style="color: rgb(0, 0, 0); background-color: transparent; font-variant-numeric: normal; font-variant-east-asian: normal; vertical-align: baseline; white-space: pre-wrap;">(1), 25–33.</span></span></span></span></p>
<p dir="ltr" style="line-height:1.2;margin-top:0pt;margin-bottom:8pt;text-indent: -36pt;text-align: justify;padding:0pt 0pt 0pt 36pt;"><span style="font-size:14px;"><span style="font-family:arial,helvetica,sans-serif;"><span id="docs-internal-guid-5caebee4-7fff-3780-417e-1f95544aa698"><span style="color: rgb(0, 0, 0); background-color: transparent; font-variant-numeric: normal; font-variant-east-asian: normal; vertical-align: baseline; white-space: pre-wrap;">Paik, N. (2016). </span><span style="color: rgb(0, 0, 0); background-color: transparent; font-style: italic; font-variant-numeric: normal; font-variant-east-asian: normal; vertical-align: baseline; white-space: pre-wrap;">Rightlessness: testimony and redress in U.S. prison camps since World War II</span><span style="color: rgb(0, 0, 0); background-color: transparent; font-variant-numeric: normal; font-variant-east-asian: normal; vertical-align: baseline; white-space: pre-wrap;">. Chapel Hill: The University of North Carolina Press.</span></span></span></span></p>
<p dir="ltr" style="line-height:1.2;margin-top:0pt;margin-bottom:8pt;text-indent: -36pt;text-align: justify;padding:0pt 0pt 0pt 36pt;"><span style="font-size:14px;"><span style="font-family:arial,helvetica,sans-serif;"><span style="color: rgb(0, 0, 0); background-color: transparent; font-variant-numeric: normal; font-variant-east-asian: normal; vertical-align: baseline; white-space: pre-wrap;">Turner, J. (2013). Re-</span></span></span><span style="font-family:arial,helvetica,sans-serif;"><span id="docs-internal-guid-5caebee4-7fff-3780-417e-1f95544aa698"><span style="font-size: 10pt; color: rgb(0, 0, 0); background-color: transparent; font-variant-numeric: normal; font-variant-east-asian: normal; vertical-align: baseline; white-space: pre-wrap;"><span style="font-size:14px;">‘homing</span><span style="font-size:14px;">’ the ex-offender: constructing a ‘prisoner </span><span style="font-size:14px;">dyspora</span></span></span></span><span style="font-size:14px;"><span style="font-family:arial,helvetica,sans-serif;"><span style="color: rgb(0, 0, 0); background-color: transparent; font-variant-numeric: normal; font-variant-east-asian: normal; vertical-align: baseline; white-space: pre-wrap;">’. </span><span style="color: rgb(0, 0, 0); background-color: transparent; font-style: italic; font-variant-numeric: normal; font-variant-east-asian: normal; vertical-align: baseline; white-space: pre-wrap;">Area 45</span><span style="color: rgb(0, 0, 0); background-color: transparent; font-variant-numeric: normal; font-variant-east-asian: normal; vertical-align: baseline; white-space: pre-wrap;">(4), 485-492.</span></span></span></p>
<p dir="ltr" style="line-height:1.2;margin-top:0pt;margin-bottom:8pt;text-indent: -36pt;text-align: justify;padding:0pt 0pt 0pt 36pt;"><span style="font-size:14px;"><span style="font-family:arial,helvetica,sans-serif;"><span style="color: rgb(0, 0, 0); background-color: transparent; font-variant-numeric: normal; font-variant-east-asian: normal; vertical-align: baseline; white-space: pre-wrap;">_________. (2016). </span><span style="color: rgb(0, 0, 0); background-color: transparent; font-style: italic; font-variant-numeric: normal; font-variant-east-asian: normal; vertical-align: baseline; white-space: pre-wrap;">The Prison Boundary: Between Society and Carceral space</span><span style="color: rgb(0, 0, 0); background-color: transparent; font-variant-numeric: normal; font-variant-east-asian: normal; vertical-align: baseline; white-space: pre-wrap;">. London: Palgrave </span></span></span><span style="font-family:arial,helvetica,sans-serif;"><span id="docs-internal-guid-5caebee4-7fff-3780-417e-1f95544aa698"><span style="font-size: 10pt; color: rgb(0, 0, 0); background-color: transparent; font-variant-numeric: normal; font-variant-east-asian: normal; vertical-align: baseline; white-space: pre-wrap;"><span style="font-size:14px;">Macmilian</span></span></span></span><span style="font-size:14px;"><span style="font-family:arial,helvetica,sans-serif;"><span style="color: rgb(0, 0, 0); background-color: transparent; font-variant-numeric: normal; font-variant-east-asian: normal; vertical-align: baseline; white-space: pre-wrap;">.</span></span></span></p>
<div>헤더 배경이미지: ⓒ <a href="https://pngimg.com/download/60140">pngimg.com</a></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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