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민영화, 불안한 한국 사회를 향한 경고

[영화]노동자뉴스제작단, 공공서비스노조 공동 제작 “심장이 필요한 남자”

정재은 기자 2010.11.09 11:06

의료보험이 민영화된 멀지 않은 미래의 한국. 캐피탈생명보험이라는 민영보험사 강문기는 민간보험회사가 열람할 수 있게 된 개인질병정보를 이용해 보험가입여부를 심사하는 일을 한다. 문기는 아주 원칙적이고 깔끔한 일솜씨로 능력을 인정받는 과장이다. 보험 심사 결과 합격, 불합격을 판단해 사인하는 그의 손놀림은 능숙하다.

 

딸의 생일날, 일찍 퇴근하려고 채비를 하던 문기에게 형사가 찾아온다. 형사는 김선호라는 사람이 실종되었다며 문기의 10년 전 명함을 내민다. 그러나 문기는 선호를 기억할 수 없다. 그리고 이어지는 낯선 자들의 미행과 동료 후배의 죽음.

 

영화는 추리물을 연상시키는 장르성을 선보이며 긴장감 있게 문기의 하루를 다룬다. 기억할 수 없는 선호를 기억해 나가는 과정은 문기와 ‘심장이 필요한 남자’ 선호가 하나 되는 과정이다. 승용차에서 캐피탈생명보험 로고송을 듣고 흥얼거리고, 백미러에 걸린 아내와 아이의 사진을 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던 문기는 오래전 약속한 어린 딸의 생일잔치조차 뒤로하고 새벽잠이 든 아내에게 전화를 건다.

 

“나 그 사람한테 잘못한 게 없는데 왜 이렇게 죄를 진 거 같지”

 


‘심장이 필요한 남자’(감독 정호중)는 특히 개인질병정보가 민간보험사로 넘어갈 때 발생할 수 있는 문제를 담아 의료민영화의 허점을 꼬집는다.

 

비록 국가적 차원에서 시장의 자유를 가로막는 규제가 있다손 치더라도, 돈이 필요하고 돈만 있다면 장기매매를 위해 버스터미널 화장실로 갈 일이 아니라 개인질병정보가 집적된 민간보험사로 찾아가야 할지도 모른다.

 

장기매매를 영화의 소재로 끌고 온 영화는 우회적으로 국가의 책임을 묻는다. 국가가 국민의 기본권인 의료에 관한 최소한의 역할마저 포기하고, 의료서비스를 재벌과 대기업의 이윤 보장으로 까딱 고개를 돌려 적극적으로 편승해 간다면, 폭력과 차별이 난무하는 사회와 우리는 마주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의료민영화가 시기마다 고개를 드는 불안한 한국 사회는 불과 2년 전 정부는 민간보험사에 개인질병정보를 팔아넘기려다 사회적 반발에 부딪혀 2009년 12월 국무회의에서 무산된 바 있다.

 

‘심장이 필요한 남자’는 비정규직 문제를 다룬 영화 ‘안녕? 허 대짜수짜님!’을 제작한 노동자뉴스제작단의 극영화 제작팀 ‘그리고 필름 앤 드라마’의 두 번째 장편극영화이자, 정호중 감독의 두 번째 작품이기도 한다. 특히 전국공공서비스노동조합에서 공동 제작했다는 점이 주목받는 이유다.

 

▲  11월 5일 시사회로 첫 선을 보였다. [출처: 미디어충청 엄명환 현장기자]

시사회장에서 만난 공공노조 한선주 교육국장은 “오랜 기간 작업한 끝에 결실을 맺었다. 많이 봤으면 하는 바램이다”고 전했다.

 

영화는 지난 5일 필름포럼에서 첫 시사회를 열었으며, 공동체상영을 통해 관객과 만난다. 관람문의는 노동자뉴스제작단 02-888-5123번. (기사제휴=미디어충청)

 

“문기가 선호가 되는 이야기”
노동자뉴스제작단 김호중 감독을 만나다
[출처: 미디어충청 엄명환 현장기자]
의료민영화를 주제로 영화를 만든 동기는
정부가 개인질병정보를 사기업에 열람할 수 있게 한다는 법안을 추진한다는 것을 접하고 만들게 되었다. 굉장히 위험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노동 다큐, 극영화를 만들어온 노동자뉴스제작단의 영화 제작 과정 중 하나이기도 했다.

 

장르적 요소를 가져와 긴장감 있게 영화를 봤다. 반면 영화의 메시지가 분명하지 않은 인상도 준다.
스릴러의 틀을 가지고 접근한 것은 맞다. 그래서 더 리얼할 수 있는 부분이 낮춰졌을 수 있다. 선택의 문제였다고 본다. 그러나 장르 영화가 다 그런 건 아닌데, 장르를 하나의 도구로 사용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내용이 더 채워졌어야 하는데 시간에 쫓긴 부분도 있고. 좀 더 잘 만들었으면 하는 아쉬움은 있지만 많이 봐 주셨으면 좋겠다.

 

음악 사용을 아낀 것 같은데
‘안녕? 허 대짜수짜님!’ 영화에서 음악을 과하게 사용했다는 지적이 있어 조심한 부분도 있고, 음악 감독도 필요한 곳에만 음악을 넣자는 입장이었다.

 

배우연기가 안정적이다
‘안녕? 허 대짜수짜님!’에서 아마추어 배우들이 연기했다면 이번 영화에서 전문배우들이 연기했다.

 

촬영때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
영화 촬영할 때 일반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 문제들이었다. 아파트 촬영씬에서 허가 받지 않고 촬용하다가 돈으로 물어 준 일, 배우들 스케줄 문제, 보충 촬영시 시간이 지나 배우들의 머리 스타일이 달라졌다거나. 기본적으로 내가 사건을 만들지 않으면서 촬영하는 스타일이다.(웃음)

 

장기매매를 소재했는데, 사회적 과제임에도 음지의 영역이라 다루기 쉽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태국의 충격적인 아동 성매매와 장기매매의 실태를 다룬 <어둠의 아이들> 소설, 영화 역시 말이 많았다.
자료를 읽으면서, 미국에서는 아기가 태어나면 혈액샘플, 유전자 정보를 모두 보관한다고 한다. 장기가 없어진 채 죽은 사람의 이야기를 언론을 통해 접하기도 한다. 영화속 일만은 아니다.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영화에서 문기의 마지막 대사가 기억에 남는다.
문기는 보험을 심사하는, 일방적으로 대상을 판단하는 입장이었다. 그런 문기가 처음에는 선호와의 감정이입을 거부하다 대상에게 동화되어 가는 과정이다. 회상하고, 쫓기면서 그 사람의 입장이 되어간다. 문기가 선호가 되는 이야기가 중심이다. 그러긴 쉽지 않다.

 

다음 영화 계획이 있는지
비밀 프로젝트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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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17 21:15 2011/04/17 2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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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뽀 작가 이선옥 씨가 쓴 <오마이뉴스> 인터뷰 기사입니다.

"연구소 닫으니 '앵벌이 노동운동가의 말로'래요"

[인터뷰] 23년 역사 막내린 한울노동문제연구소 하종강 소장

얼마 전 인기리에 방송된 세시봉 콘서트 마지막에 MBC 노동조합 부위원장인 신정수 PD 모습이 잠시 비쳤다. 짧은 메이킹 필름이었는데 담당 PD인 그는 삭발한 채로 열심히 제작을 지휘하고 있었다. 그 장면을 본 하종강 전 한울노동문제연구소 소장의 마음도 짠해졌다. 신 PD는 하 소장이 작년까지 강의를 했던 인천대 수업에도 찾아와 MBC 파업에 대해 선전했던 사람이다.

15일 저녁, 성공회대학교에 마련된 특강을 시작하면서 그는 잘나가는 간판 예능 프로그램의 PD까지 파업에 참여하고 스스로 노동자라고 하는 이유에 대해, 세시봉 콘서트 화면을 시작으로 얘기를 풀어냈다. 들을수록 빠져드는 노동자 이야기, 웃다 울다 고개가 절로 끄덕여지는 소문난 노동교육, 역시 명불허전, '하 소장표 강의'다.

세시봉 콘서트 화면은 이날 아침 강의 슬라이드에 새로 붙인 것이라 한다. 늘 비슷비슷한 것 같아도, 그는 지금까지 한 번도 똑같은 강의안으로 강의한 적이 없다. 강의할 대상에 따라 조금이라도 더 쉽게 접근할 방법을 고민한다. 노조라는 이름 달고 활동하는 곳 치고 그의 강의 한번 듣지 않은 곳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그는 유명하다. 노조뿐 아니라 각종 단체, 강연회, 교장들 교육까지… 정말 "(강의를) 하려고만 하면 하루도 안 거르고 할 수 있는" 바쁜 강사이기도 하다.

이날 특강은 성공회대학교 한홍구 교수가 한국노동운동사 수업에 초청해 마련되었다. 5년 동안 최상위 평가를 받았던 인천대 강의도 '박사학위 없는 자'라는 이유로 잘리고, 23년 동안 활동한 '한울노동문제연구소'도 문을 닫으면서 '교수', '소장' 같은 직함을 모두 잃고 '무직'이 된 하종강 전 소장을 강의가 끝난 후 한홍구 교수 연구실에서 만났다.

연구소가 문을 닫은 후 그의 일상엔 어떤 변화가 있는지 물었다. 인터뷰를 청할 때 "연구소가 없으니 당장 인터뷰할 장소가 아쉽네" 했던 그의 말이 기억나서다.

"1988년 12월에 처음 이경우 변호사 사무실에 책상 하나만 놓고 노동상담이란 걸 시작했어요. 아무 간판도 없다가 노동, 인권 전문 변호사들이 늘면서 다른 곳과 통폐합도 되고 규모가 점점 커져서 법률 회사의 부설 연구소가 된 거지. 94년에 한울노동문제연구소라는 간판을 달았는데, 그땐 한울의 '한'자도 '아래아'자로 썼어. 노동자들이 읽기 힘든 글씨라는 지적을 받고 그냥 '한'자로 바꿔서 지금의 '한울노동문제연구소'가 됐어요.

법률 회사의 부설 형태이다 보니 연구소라는 공간이 유지되려면 변호사들의 도움이 있어야 하는데 20명쯤까지는 가능했어요. 그런데 최근 사무실이 크게 통폐합되서 변호사가 80명이나 되는 큰 법무법인으로 바뀌었어요. 이제 변호사 80명이 동의해야 하는데, 사무실 유지 비용만도 엄청난 상황에서 노동문제연구소를 유지하는 게 어렵다고 생각했어요. 현실적으로 우리 연구소가 존재하는 한 기업 사건 맡기 어렵다는 얘기도 나왔다고 하더라고요. 결국 문을 닫기로 결정했어요. 함께 일하던 분들 가운데 원하는 사람은 모두 고용승계를 했어요.

섭섭하지 않느냐고 물어보는 분들이 많은데, 별로 섭섭하진 않았어요. 지금까지 이 공간을 유지하고 지켜준 공이 훨씬 크기 때문에 고마운 마음이 먼저지. 개인적인 섭섭함은 고마움에 비하면 아주 적어요. 그게 내 생존의 근거지였다면 더 허탈했을 테지만, 내 개인이 피해를 입은 것도 아니고, 다만 그 공간이 없어졌다는 건 생각하면 안타까워요. 그래서 생각 안 하려고 해요. 나 혼자만의 느낌인지 모르겠지만, 그걸 결정했을 무렵엔 사람들이 눈길을 안 마주치고 다녔어요. 서로 미안해서…."


'<작은책> 편집위원'과 '노동자교육센터 교육위원'이 당분간 그의 공식 직함이다. '하 소장'은 그가 아주 오래 불린 직함이었다. 이날 아침, 모든 직함이 사라진 후 처음 나간 <경향신문>의 연재 칼럼에는 그의 직함이 '노동과 꿈 대표'로 바뀌었다. 물리적 공간도 없는 웹상의 홈페이지 이름을 대표로 써준 건 파격이다.

"이혼당하지 않을 만큼만 해라"

'노동과 꿈'. 그와 참 잘 어울리는 말이다. 노동하는 사람들의 소박한 꿈을 위해 자신의 노동을 잠시도 쉬지 않았던 그이기 때문이다. 스물여덟에 인천도시산업선교회의 자원봉사자라는 무직 신분으로 결혼에 성공했고, 서른넷에 상담 일을 시작해 오늘까지 쉼 없이 달려 온 그의 인생. 활동비 10만 원도 고마웠던 때에 상담 일을 시작했고, 설령 활동비를 못 받아도 동일방직 노동자들과 함께 활동할 수 있어 영광스럽기만 했다. 물론 그의 영광이 아내와 가족에게는 고통이었을 테지만.

"여성운동 하는 사람들은 굉장히 나를 안 좋게 봐요. 우리 연구소의 연구실장도 아내를 한 번 보더니 '하 선배가 돈 벌고 언니가 운동하라고 그러세요. 그게 우리 사회 민주화에 더 기여하는 거예요' 하면서 진짜 정색하더라고요. 제 아내를 보니 '저 훌륭한 여성이 어쩌다. 쯧쯧' 뭐 그런 마음이 들었겠죠.

얼마 전에 <울지마 톤즈>를 본 아내가 나한테 그래요. '당신은 나를 안 만났으면 그 사람처럼 살았을 거 같더라'고. 자기와 안 만났으면 마음껏 꿈을 펼쳤을 거라는 소리를 들으면서 '아, 부부가 사랑은 식어도(정말 식었다는 건 아니라고 여러 차례 강조 후) 부채감으로 사는구나' 싶었어요. 결혼 30년이 되도록 나에게 그런 신뢰를 준다는 게 정말 감격스러웠어요. 우린 서로에게 '나를 안 만났으면 이 사람 인생이 더 나았을 텐데' 하는 자격지심과 부채감이 있어요. 그게 우리의 관계를 다잡는 기둥이 되는 것 같아요.

우리 가족들도 마찬가지죠. 다른 가족들이 겪는 어려움이 우리에게도 있지만 지혜롭게 푼 편이에요. 많이들 아는 이야기인데, 내가 집에 늦게 들어갈 때 가족들이 대문에 나를 규탄하는 대자보를 붙였잖아요. '하종강은 귀가 시간 엄수하라! 아빠와 놀고 싶다!' 그거 쓰면서 얼마나 재미있었겠냐고. (웃음) 그런 식으로 푸는 거죠."


잠자코 얘기를 듣던 한홍구 선생이 "자기가 비난 받은 걸 저렇게 자랑스럽게 얘기하다니, 이건 무슨 경우야(웃음)" 한다.

"아내가 신혼 때 정한 기준이 '노동운동 하는 남편한테 일찍 들어오라고 할 생각은 없으니, 최소한 이혼당하지 않을 만큼만 해라. 일주일에 두 번만 10시 이전에 들어와라.' 그거였어요. 그걸 못 지켜서 그 대자보가 나온 거예요. 내 활동의 최저값과 최대값은 그게 기준이에요. 불성실한 활동가가 되지 않을 만큼이 최저값, 이혼당하지 않을 만큼이 최대값.

한번은 교원 임용에 합격한 사범대생, 교대생 워크숍에 갔는데 한 학생이, 어머니가 교사신데 벌써부터 전교조 하지 말라고 계속 다짐을 받으신다는 거예요. 그런 갈등을 어떻게 푸느냐고 나한테 물었어요. 그래서 모녀지간의 인연이 끊어지지 않을 만큼, 불성실한 교원이 되지 않을 만큼, 그만큼만 하라고 그랬어요."


"내가 밤을 새면 저 노동자가 따뜻한 밥을 먹겠지"

그가 평생의 자랑으로 여기는 타이틀은 '전태일문학상 수상자'다. 그는 살면서 만났던 평범하지만 매우 특별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너무 늦게 만난 사람들>로 써서 94년 제6회 전태일문학상을 받았다. 그는 진정성 있는 이야기가 어떻게 세상에 울림을 줄 수 있는지 그 기록을 통해 보여주었다. 30년 넘는 세월 동안 만난 숱한 사람들은 그에게 어떤 존재였을까?  

"상담 일이 어찌 보면 나를 지켜줬다고 볼 수 있어요. 노동운동 분야에 30년 활동했다면 사람들이 신기하게 생각해요. 지금 내 나이가 쉰일곱인데 젊은 학생들은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냐고 그래요. 근데 노동 상담 업무에는 사람을 지켜주는 고전적인 휴머니즘 같은 게 있어요. '내가 이 서류 뭉치를 붙들고 며칠 밤을 새면 저 노동자가 따뜻하게 밥을 먹을 수 있게 된다' 하는 그런 마음이 들거든요. 90년대 초반에 소비에트는 해체되고, 92년 대선에서 운동권 90%가 지지했던 비판적지지 노선도 비참하게 실패하면서 세계관이 흔들렸던 사람들 많았어요. 그때 내 친구들도 다시 복학하고, 사법시험 준비, 영어회화 그건 걸로 썰물처럼 빠져나갔으니까요. 근데 나는 내가 수고하면 노동자와 가족들이 따뜻한 방에서 발 뻗고 자는 데 보탬이 되는 일이 있었던 거죠. 그게 나를 지켜줬어요.

한 날은 사람들이랑 밤새 서류 만들고 자료 꾸미고 새벽에 셔터 내리고 집에 가려는 길이었어요. 어떤 노동자가 와서 손을 잡아요. 부인이 뇌졸중으로 쓰러져 산재 인정받기 위해 상담했던 분인데, 나보다 나이도 많은 인천 삼익악기 노동자였어요. 그분이 우리에게 '정말 내가 제대로 찾아왔군요. 정말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집사람하고 붙잡고 많이 울었어요' 그러면서 열 번도 더 같은 말을 하는 거예요. '정말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그런 경험들이 나를 지금까지 지켜준 거죠."


어슴푸레한 새벽, 인적 드문 거리에서 동이 터 올 시간까지 노동자를 위한 자료를 준비하고 셔터를 내리는 사람들, 자신 같은 사람이 아내와 따뜻하게 밥을 먹을 권리를 위해 밤새 고생을 마다 않은 그들의 모습을 확인한 늙은 노동자. 그 모습이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그려져 살짝 울컥했다. 말하는 그의 목소리도 젖어든다. 아마 그 늙은 노동자도 그랬을 것이다. '이번엔 제대로 찾아왔을까? 이 사람들이 정말 나를 위해 애써 줄까?' 세상 어디에서도 제대로 된 대접 한번 못 받았을 그 노동자가, 실낱 같은 희망과 두려움이 교차하는 복잡한 마음으로, 그 새벽까지 사무실 앞을 서성였을 생각에 그도 많이 서글펐을 것이다.

그의 장수 비결 '최대공약수의 룰'

그는 그 나이의 남성 노동운동가들이 하지 않는 행동을 자주 한다. 강의하다 울먹이기, 여성들과 수다 떨기, 조직에 속하지 않기, 조직에 안 속해도 욕 안 얻어먹기 등.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이 바닥'에서 욕먹지 않는 게 과연 가능할까 싶은데, 내가 본 사람 중 그는 이 바닥의 좌우를 넘나들고 상하를 막론할 수 있는 보기 드문 인물이다. 이 속 시끄러운 바닥에서 어떻게 그게 가능했을까? 단지 뛰어난 강사라고 해서 가능한 일은 아니었을 텐데.

"조직사업도 한 10년 해봤어요. 후배를 조직에서 제명해보기도 했고, 나도 조직 내에서 내 일을 금지당하는 결정을 받아보기도 했고. 그런 일을 겪으면서 감당이 안 됐어요. 조직사업은 누군가 할 일이고 꼭 필요한 일이지만 내가 감당할 일은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어요.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되고 그런 일들을 나는 못 견디겠더라고요. 그래서 노동상담 영역을 선택했을 때 탓하는 후배들이 많았어요. '편하게 살지 말고 거기서 기어나오라'고 하는 후배도 있었어요.

그때 후배들한테 그랬어요. '노동상담을 선택한 건 운동권 내에서조차 출세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영원히 운동의 중심에 설 수 없으니까.' 한마디로 '배 째라'는 거지.(웃음) 정말 작은 노동조합, 조합원 열 몇 명도 안 되는 그런 노동조합의 간부들만 봐도 나는 정말 존경스러워요.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기 때문에. 내가 너무 버거워서 포기한 길을 가고 있는 그 사람들이 진짜 존경스러워요. 진심으로."


그와 책 모임을 통해 정기적으로 만나면서 나는 그가 장수하는 비법을 알았다. 그는 늘 최대공약수를 찾는다. 자꾸 선을 긋고 다른 걸 확인하는 것보다, 공통점, 장점, 합의점들을 찾아 함께하는 게 더 필요하다고 생각해서다. 물론 뚜렷한 자기 생각도 있고, 우리 안의 차이를 명확하게 하는 일도 진보를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누군가 그걸 하는 것도 존중하지만, 자신은 차이를 확인하는 일엔 되도록 말을 보태지 않는다.

최근에 그가 최대공약수 룰을 깨고 한 쪽을 비판하는 행동을 취하려 고민하던 때가 있었다. 한진중공업의 김진숙이 김주익이 올랐던 크레인에 오른 지 벌써 두 달째, 그 곳에서 혼자 밥까지 굶고 있을 때 이를 모르쇠한 사람들에게 너무 화가 나서다. 부산에 갈 때마다 그녀를 찾아 안부를 묻고 온 것만 해도 몇 차례, 답답하고 화난 마음에 욕먹을 각오하고 나설까 생각했다. 최대공약수의 룰을 지켜온 건 그게 운동을 위해 더 나은 방법이란 믿음 때문이었지, 한 노동자의 목숨과 실리를 맞바꾸는 게 운동이란 이름으로 행세하도록 하기 위함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광대의 부채'와 같은 사람

그는 얼마 전 작은 필화를 겪었다. 세시봉 콘서트 때문이다. 콘서트는 정말 감동스러운데 저기 나온 가수들이 적어도 담당 PD가 왜 삭발했는지 그 이유라도 알았으면 좋겠다는 얘기를 온라인 공간에 했다가 비난을 받았다.

"사람들이 엄청 분노하더라고요. 노래는 제발 노래로 좀 끝내면 안 되겠냐고. 나는 애완동물 안고 다니면서 자기를 엄마라고 부르는 사람들 보면 그런 생각이 들어요. '파업하는 노동자들에게도 저런 사랑을 좀 가져주면 좋을 텐데.' 노동교육 하는 박준성 선생은 실제로 강아지한테 '엄마가~' 어쩌고 하는 사람한테 '아니, 어쩌다 개를 낳으셨어요?' 하고 물은 적도 있대요. 하하하."

알고 보면 매사에 이렇게 까칠한 남자들인데, 말투랑 글투가 착해서 사람들이 모르는 거라고 했더니, 한홍구 선생이 "평소 착한 척하느라고 받은 스트레스를 그런 데 푸는 거지" 하며 웃는다. 사실 그동안 바빠서 뒤끝을 발휘 못해 그렇지 섭섭한 게 있었다면서. 그러자 이번에는 하종강 소장이 받아쳤다.  

"대학 강의 잘린 사람한테 베풀어주는 가장 큰 호의가 오늘 한홍구 교수처럼 강의 주는 건데, 사실 맨 처음 대학 강의 부탁 받은 것도 한 교수 통해서예요. 10년쯤 전에 성공회대에서 강의해 달라고 요청이 왔는데, 그땐 노동운동가의 정체성과 맞지 않는다고 회의에서 안 하기로 결정했어요. 근데 나중에 어찌어찌 인천대 강의를 하게 됐는데, 최근에 잘리고 나니까 한 교수가 그때 내심 섭섭했다며 이제야 말을 하더라고. 완전 '뒤끝 홍구'지. 하하."

그는 괜찮은데 주변 사람들이 더 지금 상황을 안타까워한다. 오히려 그동안 직함이 없어지는 고비가 있을 때마다 전화위복이 된 경험이 있어 내심 기대가 될 정도인데, 그런 주변의 걱정들이 고맙고 미안할 뿐이다. 연구소가 문을 닫았다고 하니 그의 홈피에는 "평소 노동문제에 대해 온정적인 접근이 불만이었는데, 자기 문제는 어떻게 접근하는지 두고 보겠다"는 사람도 있고, "프롤레타리아 무장투쟁을 강조하지 않는 앵벌이 노동운동가의 말로"라는 사람도 있다.

"나는 그런 주장을 잘 받아들이는 편이에요.(웃음) 일리가 있다고 생각해요. 나는 그런 면이 있는 사람이니까. 물론 '일리(1, 2)'는 있어도 '삼사(3, 4)'는 없다고 하지.(웃음) 대부분 대중 강좌나 언론 기고를 보고 나를 판단하는 분들일 텐데, 나는 그런 공간에 프롤레타리아 혁명이나 무장투쟁을 얘기하는 건 맞지 않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내가 개량이란 소리를 들어도 뭐 할 수 없지."

그가 강의에서 잘하는 말이 있다. "줄 타는 광대가 한쪽 손에 부채를 쥐고 있는 건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다. 온통 오른쪽으로 기울어진 우리 사회에서, 노동운동은 이 부채와 같은 존재다." 아마도 그가 노동운동에선 이 부채와 같은 존재일 것이다. 애완동물만도 못한 취급을 받는 노동자들을 연민하는 마음, 그들의 따뜻한 잠자리와 오붓한 밥 한 끼를 위해 애쓰는 게 자신의 삶을 지키는 유일한 길임을 한 번도 의심하지 않은 마음. 그게 지금껏 그가 이 자리에 오래도록 남아 있게 한 힘일 것이다.

ⓒ 2011 OhmyNews, ⓒ 이선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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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28 10:22 2011/03/28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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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 건 노동운동 그러나… 떠납니다 (경남도민일보, 2011.02.25  05:01:16  김훤주 기자)
사퇴한 금속노조 경남지부 최은석 부지부장 이야기

경남의 대표적인 노동운동가 가운데 한 사람이 활동을 접었다. 전국금속노동조합 경남지부 부지부장을 맡고 있던 최은석(55·동명모트롤지회 소속) 씨가 지난 14일 금속노조 홈페이지 게시판에 '사퇴' 사실을 알렸다. 그의 사퇴와 활동 중단이 아내의 병환과 생활고 때문임이 알려지면서 많은 이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다.

최씨는 "2009년 12월 부지부장에 당선돼 파견나왔는데 단협이 해지된 상황이라 무급휴직으로 수행해 왔다"며 "최근 아내의 병고로 더 이상 직무를 수행하기 어렵게 됐다"고 밝혔다.

최씨는 고교 중퇴 학력으로 마산수출자유지역 삼양광학에 입해 노조 결성에 나섰다가 1980년 해고된 뒤 같이 마산 양덕성당에 다니던 김명숙(54) 씨와 1981년 11월 25일 결혼했고 1982년 5월 거제 대우조선에 들어갔다.
  
대우조선서도 최씨는 6월 항쟁과 7·8·9월 노동자 대투쟁이 터지기 전인 1987년 4월 노조 결성에 나섰다 해고됐다. 그해 8월 11일 결성된 노조는 89년 해고자 문제에 대해 김우중 대우 회장과 직접 교섭했다. 최씨는 "거제는 떠날 수 없다"고 했고 김 회장은 "대우조선 비서실에 있으면 되겠네" 했다. 최씨는 90년 9월부터 1년간 김 회장의 비서를 지냈다.

최씨는 변하지 않았다. 1992년 11월 13일 대우조선 노조 제5대 위원장으로 취임했다. 앞서 아내 김명숙씨는 도저히 거제서는 못 산다며 창원에 갔다. 최씨는 노동운동은 해야한다며 남아 3년 가까이 주말 부부로 지냈다.

아내의 거제 탈출에는 최씨가 당한 고초가 작용했다. 최씨는 1987년 여러 차례 납치를 당했다. 1989년 임금투쟁 때는 목숨을 잃을 뻔하기도 했다. "쇠파이프에 맞고 여관에 끌려갔는데 (나를) 찾으러 나온 조합원들한테 당한 깡패들이 회칼을 들고 와서 죽이려 했으나 마침 경찰이 들이닥쳤다." 최씨는 구속도 여러 차례 됐다. 1987년 두 차례, 1991년 한 차례.

최씨가 두산모트롤의 전신 동명중공업으로 옮긴 때는 1995년 4월. "(아내가 있는) 창원에 가도 노동운동을 할 수 있겠다 싶어 자영업이라도 하려고 사표를 냈다. 그런데 회사측이 그동안 괴롭힌 데 대한 '일말의 무엇'이라도 있는지 취업을 알선해 당시 대우조선에 51% 지분이 있던 동명중공업 사무직으로 오게 됐다."

최씨는 오자마자 또 노조에 가입했다.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고 최씨가 가입하자 동명중 노조가 민주노총 가입을 하고 96년 노동법 재개정 투쟁에 나섰다. 97년에는 조합원 자격이 없는 과장으로 최씨를 진급시키는 일이 생겼다. 노조는 1998년 과장도 노조 가입을 할 수 있도록 규약을 바꿨다. 노사간 적지 않은 일이 일어났음이 짐작게 하는 대목이다.

최씨는 1999년 교육선전부장을 했다. 집행부를 맡지 않았을 때는 대의원을 했다. 대우조선이라는 대규모 노조 위원장을 했던 이로서는 보기 드문 행보다. "대기업 등에서 뭔가 했다 해도 그 경험을 실무나 현장에서 쓰지 않으면 배신이다. 위원장을 했다면 하면서 얻은 모든 것을 돌려야 한다. 운동은 전체의 자산이다. 위원장 하려고 운동하느냐."

그러던 최씨가 3월 2일자로 공장에 들어간다. 동명모트롤 노조 활동도 하지 않는다고 했다. 노조 활동을 하면 해당 시간 급여가 나오지 않는다. 사용자가 단체협약 해지를 사유로 2009년 4월부터 노조 활동을 거의 인정 않기 때문이다. 아내 김명숙씨가 남편의 노동운동으로 스트레스를 크게 받았다고 여기는 것도 중요한 이유다. "2010년 12월 25일 심하게 아프기 시작했다. 이런저런 병원에서 검사를 했는데도 여태 병명이 나오지 않았다. 2월 14일 부산백병원에서 수술을 했는데 뇌에 있는 주먹 반 개 크기 염증에서 고름을 덜어냈다. 일단 안정이 된 것 같기는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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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23 09:48 2011/03/23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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