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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2월 7일, 한겨레신문을 뒤적이다 반가운 글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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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에서 미주 한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어린 시절 부모를 따라 시카고에 온 민영(가명)이는 음악적 재능을 타고났다. 집안형편이 넉넉지 않았으나, 부모들은 민영이 뒷바라지에 온 정성을 기울였고, 민영이는 줄리아드음대에 합격했다. 그런데 민영이는 그때에야 알게 됐다. 부모님이 불법체류자이고, 민영이도 자동으로 불법체류자이고, 따라서 불법체류자는 대학 입학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민영이와 부모는 시카고 지역 의원과 시민단체 등에 호소하는 등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10년 전 이야기다. 그 후 민영이가 어떻게 됐는지는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시카고의 한 한인단체로부터 전해들은 이야기다. 지금도 ‘제2, 제3의 민영이’는 계속 생겨나고 있다. 이런 아이들은 가게 점원 등의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잇거나 방황을 한다. 현재 미국의 전체 불법체류자 수는 1200만명에 이르고, 이 중 한인 은 23만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1996년 여름 ‘미주한인봉사교육단체협의회’(NAKASEC) 시카고지부를 취재한 적이 있다. 그때 작은 사무실 한쪽에서 이민 1.5세, 2세 대학생들이 이민자에 대한 사회보장 혜택을 요구하는 서명편지 1만여통을 한인들로부터 받아 빌 클린턴 선거사무실로 보내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당시 분위기는 마치 대학가 동아리방 같았다.
13년이 흐른 지난 1일 그곳을 다시 찾았다. ‘한인교육문화마당집’이라는 간판을 단 번듯한 사무실에는 직원만 10명이었다. 지금은 버락 오바마 행정부가 추진중인 의료보험·이민법 개혁안 등에 한인들의 권익이 반영되도록 하는 데 애를 쓰고 있다. 불법체류자에 대해서도 합법 이민 문호 개방이라는 방식의 해결 방안을 요구하고 있다.
사무실 인근 ‘청소년교육센터’에 들렀을 때는 좀더 놀랐다. 13년 전에는 ‘시카고 한국학교’라는 간판 아래 한인 청소년들에게 한글이나 우리 민요 등을 가르치는 곳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가보니, 한 무리의 청소년들이 베트남 모자인 ‘논’을 쓰고 벗으며 베트남 전통무용을 배우고 있었다. 아이들도 한인뿐 아니라 베트남, 라오스, 대만 등 여러 아시아계가 섞여 있었다. 지도간사 둘 중 한 명은 타이 사람이었다. 영문을 물었다. “처음에는 한인 청소년들의 한국 알기 프로그램으로 시작했으나, 아이들이 다른 아시아계나 라틴계 친구들을 데려오면서 다국적화됐다. 자연스럽게 한국 문화만 고집하지 않고 이민자 사회에서 다른 민족과 연대하는 법을 스스로 배워나가고 있다”는 답변을 들었다.
실제로 한인 권익운동은 한인들뿐 아니라 비슷한 처지에 있는 다른 아시아계·중남미계와의 연대를 시도하고 있다. 세력을 키우는 것이다. 그리고 지역 의원을 찾아가 의회에서 이민자 커뮤니티의 권리가 보호될 수 있도록 요구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투표’가 중요하다. 한인교육문화마당집 손식 사무국장은 “의원들은 한인들이 투표를 얼마나 했는가를 먼저 체크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한인들은 이제 미국 외에도 한국의 국회의원과 대통령 선거에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다. 손 국장의 말이다. “한인들이 고국과 네트워크를 맺어야 하지만, 그 방식이 투표권이라고 보진 않는다. 한인들의 권익은 한국 의회가 아닌 미국 의회에서 해결해야 한다. 한인들은 다른 아시아계·흑인·라티노 등 미국내 소수자와 연대해 정치적 목소리를 키워야지, 한국으로 퇴행하는 형태는 곤란하지 않겠는가? 한인 사회가 고국 정치바람을 타고 분열될까봐 걱정하는 이들이 많다.”
권태호 특파원ho@hani.co.kr
머리를 자르다. 2006년 11월 29일.... 한국을 떠나 올 때 비싼 돈 들여 퍼머하고 그 돈이 너무 아까워 속쓰렸는데 LA에 있는 내내 질끈 묶고 지냈다. 이제 떠날 준비를 하며 샴푸도 덜 들고, 손질하기 간편하게 컷트를 했다. LA OLYPIC에 있는 그 이름도 친근한 한국간판 그대로 '우리동네 미용실'에서 20달러 주고 잘랐다.
진,민석,준성,준호,수연과 중국음식을. 2006년 12월 2일... LA를 떠나기 전, 모두 고맙고 그리울 텐데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으랴 싶었다. 그것을 일일히 말로나 금전으로 표현할 수 없었지만 작은 정성은 보이고 싶었다. 특히 내가 LA에 있던 6개월 사이 부쩍 커 버린 나의 한글제자들과 볼수록 너무나 귀여운 수연이, 그리고 그 엄마들과 점심을 같이 했다. 선생님이 한턱 쏜다면 한인타운 만리장성에 자리를 잡았다. 나란히 앉아 맛있게 먹은 모습들이 너무 이쁘고 좋아 한장 찍었다. 요녀석들 크면 나를 알아 보기나 할라나 모르겄다.
배낭을 쌌다. 2006년 12월 2일 ... 배낭을 꾸리니 너무 작아 한국으로 보낼 짐과 다시 한국으로 돌려 보냈다. 황미가 거의 기부하다시피 빌려 준 배낭이었는데 아쉬웠다. 그 배낭을 대신하여 일수 도움으로 North face 매장으로 가 50리터짜리 하나를 새로 샀다. 다행은 가격은 한국과 비슷한것 같다. 그런데 배낭을 챙기니 너무 무겁다, 이 짐들을 어떻게 줄일까 싶다. 다시 한번 생각 하면 큰배낭의 짐들은 굳이 없어도 될 것들 나의 욕심이고 집착이라는 생각이 든다. 언제쯤 나 스스로 가볍게 그 욕심과 집착을 풀어 놓을 수 있을까?
최근 멕시코 상황이 시끄럽다. 지난 대선에 대한 부정선거 의혹이 제기되며 좌파진영은 선거결과에 불복하고 별도 정부를 출범시킨데 이어 얼마 전 멕시코 시티 소깔로 광장에서 대규모 시위를 하기도 했다.
또한 최근 멕시코 오하까 지역을 취재기자가 카메라 촬영 도중 총살을 당해 죽어가는 마지막 순간까지의 동영상이 인터넷에 공개 되기도 했었다. 경원이가 참고로 보라며 그 동영상 주소를 가르쳐 주었다. 동네에서 시위를 하는데 시위를 하는 민간인 쪽은 새총을 들고 쏘는데 저 쪽에서는 탄약이 든 총을 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취재기자에 총탄이 날아왔고 카메라는 그 자리에 동댕이 쳐진 채 황망히 흔들리다 동영상은 끝이 났다. 온몸에 전율이 오는 충격이었다. 또 많은 사람들 인터뷰가 나오는데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스패니쉬를 하는 용호의 도움을 받아 그 동영상을 같이 보며 상황을 이해했지만 왜, 무엇 때문에 그런 일이 생겼는지 전체 상황을 이해 할 수가 없었다.
버스승객조합의 비디오 한편,
LA를 떠나기 며칠 전, 그 동영상을 함께 본 용호가 LA 버스승객조합에서 오하까 상황 관련 비디오 상영을 하니 가보라고 소개했다. 버스승객조합은 대중교통인 버스 서비스와 승객들의 편의를 위해 일하는 조합으로 버스를 타고 다니는 승객들이 조직대상이다. LA교통국과 교섭을 하며 조직적 영향력을 갖고 있는것 같았다. 전부터 그곳엘 가보고 싶었는데 떠날 때에야 가보게 되었다.
그곳의 회원은 3천여명 된다는데 젊은 학생들 부터 백발 성성한 노인들 까지 회원층이 다양하다. 오하까 비디오를 상영하는 날 온 사람들도 절반이었이 흰머리 노인들이었다.
[오하까 비디오 상영] LA지역에는 멕시코 오하까에서 온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그래서 오하까 상황에 대한 공유를 가끔 한다고 그날 통역을 해 준 선영씨가 설명해 주었다. 오하까지역 교사노조의 공교육 사교육화에 맞선 탄압과 투쟁 비디오는 오하까 투쟁을 알리는 홍보용으로 널리 상영되고 있다고 한다.
신자유주의 정권의 공교육 사교육화에 맞선 투쟁
그런데 오하까 투쟁은 어제, 오늘의 투쟁이 아니라 26여년이 된 투쟁이라고 한다. 1900년대 초, 혁명에 성공한 멕시코는 모든 교육을 공교욱화 했다. 그런데 우파정권이 들어서며 1980년대 부터 든가 신자유주의 정책이 들어오고 공교육체계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오하까지역 교사노조는 공교육 사교육화에 맞서 26여년 끈질긴 투쟁하고 있다고 한다. 투쟁은 거의 항쟁 가까운 수준에 이르고 이 투쟁은 다른 지역으로도 확산되고 있다고 한다. 학부모와 학생들의 지지도 받았는데 투쟁이 길어 지다보니 투쟁 동력도 떨어지고 투쟁에 대한 내부 비판도 있다고 한다. 그 비판의 핵심은 교사들의 장외투쟁 중심 전술에 대한 문제제기였는데 교사노조는 현재 이러한 과제를 안고 새로운 모색을 하고 있다고 있다.
[과거 중남미 혁명 전사들] 버스승객조합에 오는 중남미쪽 회원들 가운데 노인들은 한때 니카라과, 에콰도르 혁명전사로 활동했던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비디오 상영이 끝난 뒤, 우리 상황과 공통점이 무엇인가? 그라고 우리는 무엇을 실천할 것인가? 등 몇가지 주제를 갖고 토론을 진행했다. 참가자들은 다소 뻔한 이야기인듯도 했지만 나름대로 소신있게 자기 생각들을 이야기 했고 나는 전교조와 최근 FTA로 멕시코의 실패한 사례에 대한 관심이 높다고 이야기 했다. 또 스스로 무슨 실천을 할것인가? 하는 주제에서는 각자 가능한 일정대로 버스승객조합 각종 활동에 참여하는 것을 결의하고 이날 행사를 마쳤다.
2000년, 일할 때, 미국 출장입네하고 10만원주고 10년짜리 미국 비자를 만들었었다. 그때, 내 다시 미국이라는 나라를 가나 봐라 이를 갈았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5년 5개월여가 지나 나는 내 발로 다시 미국이라는 나라를 찾았다. 행여 입국도장을 못받으면 어쩌나 하는 긴장을 안고 말이다. 일자리도 없고, 결혼도 안했고. 통장에 변변히 가진 돈도 없는 내가 6개월 미국여행을 핑계삼아 입국도장읋 받으려니 그들 눈에도 예사롭지 않게 보였나 보다. 미국에서 불법취업 할거 아니냐는 노골적인 질문에 자존심있지 이 나라에서 불법으로 취직하지 않는다고 받아 치는 별도 인터뷰를 한 다음에야 6개월 입국도장을 받을 수가 있었다.
그렇게 미국 LA에 왔다. 그로부터 6개월여 미주한인봉사교육단체협의회[NAKASEC]에서 일을 하며 그 가입단체인 LA 민족학교와 뉴욕의 청년학교, 시카코 마당집활동을 지켜 보았다. 그곳 활동에 대한 구체적인 평가하는데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무런 정보도 이해도 없이, 설령 이야기를 들었다 해도 부분적이라서 종합적으로 연결하여 이해 할 수 없었던 상태로 NAKASEC에 와 일을 했던 기간 동안, 나는 미국사회와 이민자 운동, 그리고 이민자들의 삶에 새 눈을 뜬것은 분명하다. 또한 역동적이며 다양한 활동과 헌신적이며 능력있는 활동가들을 만난 것이 큰 기쁨이기도 하다.
반면, 일에 대한 사전 이해가 부족해 힘들었고, 구체적인 일이 없어 막막하기도 했으며, 의사소통의 어려움으로 의기소침했던 적도 있었다. 또한 한국에서 부터 끌어 안고 온 무기력증과 긴장감 없는 소극성, 그리고 내 안에 갇힌 채 가벼운 모습을 보이는 나 스스로에 당황하고 부끄러웠던 적도 있었다. 내가 갖고 있는 한국의 운동 경험과 내가 전혀 몰랐던 미국 내 동포운동을 깊이 있고 풍부하게 나누지 못한 아쉬움도 참으로 크다. 그렇게 6개월이 갔다. 이제, 한달여 개인 시간을 포함하여 6일이 부족한 7개월여 LA생활을 마쳤다.
나는 운동적으로 개량화 된 미국의 진보진영을 비웃었었다. 정치적으로 민주당을 지지하는 무능함을 아예 무시하기도 했었던것 같다. 또 미국으로 이민 오는 사람들에 대한 각별한 선입견도 있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얼마나 단순한 비교들이었는지...
그들은 위와 같은 한계를 갖고 있기도 했지만 다양한 풀뿌리 실천을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었으며, 그것이 실제 지도력과 신뢰로 인정받고 있음을 보았다. 또한 제도적으로 이민자 권리를 지키고, 일상 속에서 교육, 건강, 인권을 비롯한 다양한 문제를 가진 이민자들의 삶과 함께하면서 동포들 속에서, 다른 이민자 커뮤니티 속에서, 미국사회 전체 속에서 활동의 입지를 높여 가고 있음도 확인 할 수 있었다.
좀더 미국사회 제도와 환경, 이민자들의 삶과 에환에 가까이 다가가고 싶었는데 그리하지 못했다. 또한 동포운권 사회가 한국운동권에 대해 갖고 있는 여러가지 갈증을 나름대로 채워주고 싶었는데 그리하지 못했다. 큰 투쟁의 역사와 과제에서 부터 사소한 정보와 경험을 나눌 수도 있었으련만 무심하게 시간만 갔다. 더불어 이곳에서의 내 활동이 바탕이 되어 앞으로 한국의 다른 활동가들이 이곳에서 경험을 나누고 새로운 경험을 쌓을 수 있는 토대와 기본정보를 만들고 싶었는데 부끄럽게도 그를 위한 모범을 만들지 못했다.
그리고 그곳 활동을 하면서 채 삭여내지 못한 문제들도 더러 있다. 그러나 그것은 누구의 문제가 아닌, 바로 나 자신이 어디에 있고, 어떤 모습인가를 정면으로 마주보면서 풀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그곳 활동애 대해 떠오르는 생각들을 자연스럽게 받아내고 갈무리하며 천천히 시간을 갖고 되새겨보려고 한다.
미국LA 활동이 가능하게 해 준 이진숙동지, 그리고 미국 내 이민자 운동을 위해 너무나 치열하게 일하면서 내게 강한 동지의식을 갖게 했던 은숙씨와 대중씨, 희주씨, 또한 마음 여리지만 고집스럽게 열심히 일하는 방원, 술,담배 좋하하며 일도 잘하고 성격도 좋은 캐롤라인, 나의 귀가 되고 입이 되어 준 용호, 나를 은근히 챙겨 주며 마음 따뜻했던 부산 사나이 정환씨, 바르고 반듯한, 그리고 내가 사소한 부탁을 해도 기꺼이 해 주던 5.18 인턴 호산, 술좋아 하고 노래방 좋아하고 아이들 좋아하는 5.18 혜진.
NAKASEC의 이민2세들로서 한국말과 정서를 배우며 열심히 이민자 운동을 함께하는 모나, 주형, 재완과 재클린,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과 관심이 많은 5.18인턴 선미,
또한 민족학교 주변에서 항상 함께하는 든든한 버팀목 석재, 주환씨, 풍물사부이자 친구같은 준이씨, 동생같은 마음을 갖게하면서도 늘 나를 챙겨 준 일수씨와 명주, 이민자 운동의 토대가 된 이길주 이사를 비롯한 그 연배 어르신들 또 심인보형님과 동현씨, 영준형님, 성표, 연옥씨, 혜숙과 봉규씨, 채 인사를 못하고 나온 크리스틴, 또 입양의 아픔을 딛고 꿋꿋히 살아가는 사랑하는 윤숙씨와 그의 딸 미숙, 정들어 버린 유학생 부부 윤호씨와 민숙, 그리고 오렌지 친구들.
시민권자 소개 해 줄테니 선보라고 극구 권하시다 떠난다니 쌈지돈 챙겨주시던 최자애 선생님, 자상한 옆집 아저씨 같은 민족학교 자원 봉사자 정선생님과 최선생님, 그리고 나 떠난다는 말 들으시고 시카고에서 오신 다음 날, 피로도 풀리지 않으신 몸으로 메디케어 D 핑계삼아 오셔 점심 차려 주신 대중씨 부모님, 단아한 인상이 좋고 술친구했으면 좋았을 정애언니.
캐롤라인 동생이자 친구들인 미나, 승현 등등 따뜻한 마음의 친구들, 또 날라리 유학생이지만 성격좋고 정이가는 수지, 그리고 너무 너무 예쁘고 똑똑항 준성, 준호, 진, 민석, 수연 모두 모두 고맙고 그리운 얼굴들이다. 그들이 내 가슴이 깊이 남을 것이다.
오전, 몇다리 걸쳐 LA 카운티 보건소를 알아
황열병 예방접종을 알아보니 110달러 란다.
미국서 안맞고 그냥 나가기로 했다.
오후, 미국와서 처음으로 Wilshire 길을 걸어 한미은행엘 갔다.
사람도 만나고 환전도 하고 겸사겸사.
그런데 둘다 못했다.
다시 Westen길을 걸어 Olympic으로 향하던 중
걷다 보니 코리아 타운 프라자가 나온다.
여기는 몇번 왔던 곳인데 이 길에 있는 줄을 몰랐다.
서점에 들러 한글교재와 교구들을 뒤져 보았다.
중간에 공부를 중단해
한글을 완전히 깨지는 못했지만 내게 한글을 배웠던
준성, 준호, 진, 민석에게 알맞은 한글공부 책을 선물하고 싶었다.
또 윤숙씨 딸 미숙에게도 뭔가 선물하고 싶었다.
한글관련 교재는 모두 한국에서 수입(?)해 온 책들이라 붙어 있는 가격보다 배가 비싸다.
똑같은 교재 세권을 샀다.
그리고 쓸데없이 스패니쉬, 영어 관련 손바닥 크기 회화책을 샀는데
집착하고 조급해 하는 내 성격을 발견한다.
Olympic으로 나와 버스를 타기 전, day pass(하루표)를 끊기 위해 3달러를 손에 쥐고 있었다.
그때 바로 옆에 있던 라티노 아줌마가 자기 하루표를 1달러에 주겠다고 한다.
여기서는 자주 있는 일이라고 한다.
버스 요금이 1달러 25센트인데
하루종일 횟수 상관없이 탈 수 있는 표가 3달러 짜리 하루표다.
나는 저녁에도 나갈 일이 있어 다 늦은 저녁에 하루표를 끊으려 하던 참에
누이 좋고 매부 좋고 1달러 주고 그녀의 하루표를 받았다.
민족학교에 잠시 들렀다가 5시 30분 쯤
다시 wilshire로 나와 버스를 타고 버스승객조합엘 갔다.
멕시코 오하카 교사들의 투쟁 관련 비디오를 상영한다고 용호가 가보라고 추천했었다.
할머니 할아버지 흑인 라티노 아시안 등이
편안한 분위기 속애 모여 비디오를 보고 토론도 했다.
진작에 오고 싶었던 곳인데 이제야 오게 돼 서운하다.
9시 가까운 시간 버스를 기다리고 갈아타는 시간이 만만치 않을 듯 하여
다시 걸어서 민족학교로 돌아왔다.
엘에이에서 혼자 길을 걸어 다니는 것은 낮에도 위험하다고 했다.
그래서 혼자 나 다니지 않았었다.
그런데 밤길을 혼자 걸었다.
조금은 긴장도 됐지만 사람 사는 곳이니 걸을 만 하다.
나는 요즈음
이곳을 떠나기 전, 정들고 감사했던 분들에게 작은 마음을 전하며 작별을 준비하고 있다.
(2006. 11. 28)
하와이에 닺을 내린 한인 최초 미국이민자들.
지금으로부터 100여년 전, 1903년 1월 13일 101명의 조선청년을 태운 배가 하와이 호노룰루에 도착했다. 1902년 12월 22일 조선을 떠났던 배가 20여일 만에 태평양 건너 목적지에 닿은 것이다. 101명의 조산청년은 모두 하와이 사탕수수 밭 임금노동자가 되었다. 이로써 한국 이민자들의 미국 이민사가 시작됐다.
그 뒤 1905년 조선이 을사보호조약으로 외교권을 빼앗기게 되면서 일본은 미국으로 이주한 일본인들이 차별대우 받는 것에 맞서 자국민 보호정책의 하나로 조선인들의 이민을 중단시켰다. 그때까지 65차례에 걸쳐 7,226명의 조선인들이 하와이로 건너 와 사탕수수밭 노동자가 되었다. 그럼으로 하와이는 한인들 최초의 이민사를 간직한 미국 땅이 됐다.
오늘날 ‘사랑과 낭만의 섬’으로 불리는 하와이. 따뜻하고 먹을거리 풍부한 태평양 한가운데 섬 하와이, 이 섬은 폴로네시아계 원주민들이 자급자족하며 평화롭게 살던 섬이었다.
그런데 18세기, 이 비옥한 땅을 넘보던 백인들이 사탕수수, 파인애플 농장을 만들기 시작했다. 자급자족하던 원주민들은 농장의 임금노동자가 됐고, 농장에서 발행하는 임시화폐로 필요한 물건을 구입해야만 생활을 할 수 있게 됐다. 새벽4시만 되면 농장 노동자들을 깨우는 싸이렌 소리가 마을에 울려퍼졌고 그들은 하루 종일 뙤약볕 아래 혹독한 노동에 시달려야만 했다.
초기 하와이 사탕수수밭 노동자는 원주민들이었다. 그러나 농장주들은 원주민보다 더 값싼 노동자들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다 싼 맛(?)에 중국노동자들을 고용해보니 기대 이상으로 열심히 일하는 것이었다. 이때부터 중국노동자들을 계속 고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농장주들은 이들이 단결 할 것을 두려워 하여 여러나라에서 노동자들을 데려와 고용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1930년까지 33개국에서 40만명의 노동자를 이주시킴으로 하와이를 여러 인종의 노동자가 모여 사는 다인종 섬으로 바꾸어 놓았다.
세계 여러나라 노동자들을 모아 놓은 농장주들은 다양한 분리정책을 폈다. 서로 경쟁하게 만들어 생산력을 증대시켰고 새 이민자들을 임시직으로 고용해 노동조합 건설을 가로 막았다. 실제로 일본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만들고 파업을 하자 농장주들은 요구를 받아 들이지 않고 필리핀 노동자들을 고용해 버리기도 했다.
차별 속 아시아인들의 이민사
1900년대 초, 샌프란시스코 법은 아시안들은 아시안학교에만 다니도록 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아시아 인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중국인들은 모두 중국인 학교엘 다녔다. 하지만 1백여명에 불과했던 일본인들은 백인부모들의 반대도 없고 하여 백인학교를 다닐 수가 있었다.
그런데 1906년 샌프란시스코 대지진으로 건물들이 무너져 내리고 폐허가 돼 버리자 학생들은 콩나물 교실에서 공부를 하게 됐다. 그러자 백인부모들은 백인학교에 다니는 일본인들에게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냈고 샌프란시스코 교육국은 일본인 학생들을 아시아인 학교에 보낼 것을 명령했다.
그런데 이 문제가 미국과 일본의 외교문제로 확대되었다. 청일전쟁에 승리하여 아시아 최강의 나라로 부상한 일본의 자존심을 건드린 것이다. 결국 당시 대통령이던 루즈벨트는 샌프란시스코 교육위원을 백악관에 불러 사태를 수습하려 했지만 노골적인 반일 감정을 설득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 해결책으로 일본인은 몽골 족인 아닌, 말레이 족으로 분류해 백인학교에 계속 다니도록 하고, 일본인들은 직계가족을 초청할 수 있도록 하는 신사협정을 체결했다. 국제사회에서 다른 열강들과 동등하게 대우받기를 원하는 일본의 자국민 정책이 그대로 녹아 든 사례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미국의 진주만 폭격과 일본의 패전으로 미국내 모든 일본인들은 미국 정부에 의해 강제로 수감당하는 수모를 겪어야만 했다.)
신사협정으로 직계가족을 데려 올 수 있게 된 일본 총각들은 사진신부를 맞아 들이기 시작했다. 사진신부란 미국의 일본총각과 일본에 있는 처녀사진을 교환하여 선을 본 다음 혼인을 결정하면 신부를 미국으로 데려와 결혼을 하는 것이다.
당시 미국에는 백인과 외국인의 결혼을 금지하는 법이 있었다. 그러다 보니 이민선에 실려 온 아시안 청년들의 혼사 길은 막히기 쉽상이었다.
중국인들의 경우, 미국에 와 있는 중국인 여성들과 더러 결혼을 할 수 있었는데 1860년대 미국에 온 중국 여성의 85%가 창녀였다고 한다. 차이나타운에 중국인 창녀촌이 성행했던 것은 미국정부가 중국여성의 이민을 억제함으로 당시 미국내 중국인 남녀 비율이 비정상적으로 15:1이었던데서 비롯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중국인 인구증가를 우려한 미국정부가 의도적으로 중국여성의 이민을 억제시켰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차이나타운은 창녀, 도박, 마약, 조직범죄 등 암흑가로 악명이 높았다.
식민지 조국, 한인 이민자들의 삶과 투쟁
당시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로서 일본인들처럼 사진신부를 맞이 할 수 있었다고 한다. 1910년 11월 28일 최초의 사진신부들이 도착 한 이래 1920년까지 1천여명의 사진신부가 미국 땅을 밟았다. 한국의 사진신부들 가운데는 신교육을 받은 신여성들도 많았는데 전통적인 유교 풍습에 얽매이지 않고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 사진신부로 자청하여 온 경우였다. 또는 일제강점기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기위해 사진신부로 자청한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하와이 사탕수수밭 노동자의 아내가 된 한국의 새댁들은 꿈을 이루지 못한 채 고된 노동에 시달리며 가난과 씨름해야만 했다. 그러면서도 자녀교육에 신경을 써 한국인 이민사회의 변화를 꾀하는 중추역할 했다고 한다.
일제식민지 아래 미국 이민자가 된 조선인들 속에서도 독립운동은 계속됐다. 미국에서의 독립운동은 이승만을 대표로 하는 친미외교론자, 안중근, 윤봉길 같은 개인테러와 왕정복구폭력노선, 박용만의 주도로 군사학교와 군사훈련을 받으며 시작 된 무장항일투쟁 노선 등이 있었다고 한다.
무장항일운동은 만주지역 항일운동이 국내에 널리 알려 진데 반해 호주, 유럽, 일본등의 항일 운동과 함께 거의 알려 있지 않았는데 1910
년 박용만의 주도로 미국 캔자스, 와이오밍, 캘리포니아 등지와 멕시코 메리디 등에서도 무장항일투쟁이 행해졌다고 한다. 그들은 낮에는 농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정치, 군사훈련을 하며 조국의 독립을 위해 투쟁했다. 특히, 이들 중에는 멕시코 혁명에 참가하여 피를 흘린이들도 있다고 한다.그런데 해방 이후 이승만은 국내로 들어와 대통령이 되었고, 그는 자신을 비판했던 모든 사람들의 국내 입국을 불허했으며 미국내 메카시 선풍으로 미주운동은 단절기를 맞이하게 되었다고 한다.
80년대 뿌리내린 미주지역 진보적 동포운동
1980년 5.18 마지막 수배자 윤한봉의 미국 밀입국은 미국내 한인동포운동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그는 온갖 탄압 속에서 한청련, 한겨레라는 회원조직을 만들어 정치사상 학습과 조직활동을 강화함으로 진보적 동포운동의 모태를 만들었다. 이어 주요 도시에 마당집을 만들어 정치적이며 대중적인 운동을 결합시켜 나갔고 그의 귀국 이후에도 이 조직들이 미주 사회 진보적인 동포운동의 중추역할을 지속적으로 담당하고 있다.
그리고 1994년 LA '민족학교', 뉴욕 '청년학교', 시카고 '마당집'이 모여 ' 미주한인봉사교육단체협의회'(NAKASEC)를 만들었는데 NAKASEC은 정치, 사회 참여와 풀뿌리 조직활동을 촉진시키는 한편, 이민자 권익신장과 저소득층, 노인 등을 대상으로 한 각종 봉사활동으로 동포사회 입지를 높여가고 있다. 또한 가입조직들의 활동을 활성화하는 한편, 다른 커뮤니티와의 연대를 강화하고 있다. NAKASEC과 각 마당집은 지난해 말, 상원에서 통과 된 센센브레너에 맞선 투쟁과 올 봄 이민자 투쟁에서 선도적으로 동포들을 조직하고 투쟁에 앞장섬으로 명실공히 미국내 진보적인 아시안 아메리칸 커뮤니티로서 위치를 굳혀 나가고 있다.
그들이 '아시안 아메리칸'으로 일어서고 있다.
미국에는 아시안아메리칸, 코리안아메리칸, 아프리칸아메리칸, 라틴아메리칸 등 여러 인종과 민족을 부르는 이름들이 있다. 짐작하다시피 미국으로 이민 온 아시아인들을 아시안아메리칸, 한국인들을 코리안아메리칸이라 부른다. 그런데 이 이름들이 투쟁의 산물이라는 것도 내게는 새로운 사실이다.
과거 미국에서는 아시아인들을 '오리엔탈'’이라고 불렀다. 19세기 말, 드넓은 식민지를 갖고 있어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 불렸던 영국 제국주의 시각에서 사용했던 말이다. ‘오리엔탈’이라는 말은 사람보다 옷, 가구, 음식 등을 가리키는 말로서 아시아 인을 물건취급한 오만한 식민사관이 그대로 배어 있는 말이라 할 수 있다. 그 영향을 받아 미국에서도 아시아 인들을 ‘오리엔탈’이라 불렀는데 아시아 인들은 자신들이 물건 취급 받으며 차별받는 것을 거부했다. 그 결과 능동적으로 자신들의 위치를 재조명하고 투쟁함으로 1968년 ‘아시안 아메리칸’이라는 이름으로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게 됐다. 오늘도 그들은 미국내 아시안 아메리칸으로 온갖 차별에 맞서 당당히 투쟁하고 있다.
아시안 아메리칸 – 백인도 흑인도 아닌 사람들의 역사 – (장태환 지음) 참조
서로 다른 이민사를 간직한 세 개의 섬
미국에는 이민사와 관련한 세 개의 섬이 있다고 한다.
그 하나가 자유, 평등, 평화, 민주주의를 상징하는 자유의 여신상이 있는 미국 동쪽 뉴욕에 있는 앨리스 섬이다, 과거, 미국으로 이민 오던 유럽이민자들이 거쳐 가던 섬이다. 그들은 이곳에서 스물아홉개의 질문에 답을 한 다음, 간단한 입국절차를 마치고 곧바로 본토에 발을 딛을 수가 있었다.
서쪽에는 에인젤 섬이 있다. 아시아인 이민자들이 머물던 섬이다. 이곳은 앨리스 섬과 달리 수용소였다고 한다. 에일젤 섬에 내린 중국계 이민자들은 미국에 왔다는 합법증명을 얻기 위해 짧게는 3일, 길게는 3년까지 이곳에 갇혀 있어야만 했다. 그리고 2백개에서 1천개에 이르는 질문에 답해야만 본토로 향할 수가 있었다.
또 설리반 섬이 있다, 짐승처럼 실려 온 아프리카 흑인들 가운데 살아남은 흑인들이 첫발을 내딛었던 섬이다. 이곳에서 그들은 노예의 신분으로 본토로 팔려 나갔다.
각각의 역사를 가진 이 세개의 섬 가운데 미국 교과서에 나오는 섬은 앨리스 섬 뿐이라고 한다.
똑같은 이민자이지만 서로 다른 이민자들
이 세 개의 섬을 통해 백인, 아시안, 흑인들이 들어 왔고, 육로를 통해 라티노들이 들어 와 제 각각의 신분을 얻어 미국이라는 나라의 구성원이 되었다. 그들은 모두 이민자들이었다. 그 과정에서 이 땅의 주인이었던 원주민들은 강제로 쫒겨나고 떼 죽음을 당해야만 했다.
그렇다면 각자 꿈과 희망을 안고 찾아 온 이 땅에서 모든 이민자들이 동등한 권리와 기회를 누리면서 평등하게 살아가고 있는가? 그것이 아니라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원주민들을 몰아 낸 미국 땅에서 이민자들은 백인, 황인, 흑인 등 피부색이 나뉘고 시민권자, 영주권자, 서류미비자로 신분이 나뉜 채 살아가고 있다. 그 나뉨은 곧바로 대대손손 정치, 경제, 문화, 교육 등 삶 전반에 온갖 차별로 직용하고 있다.
이 차별은 각각의 인종들이 미국 땅에 정착했던 과정에서부터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 유럽백인들은 원주민들을 몰아 내고 침략자이자 지배자로서 미국에 들어왔다. 그리고 아프리카 흑인들은 백인들에 의해 노예로 팔려 왔는데 19세기 초, 흑인들이 처음으로 미국 땅애 팔려 올 때, 그들은 노예가 아니었다고 한다. 4-7년 계약직 노동자로서 그 기간이 끝나면 자유의 몸이 되고 시민권자가 될 수 있다는 꿈을 가진 이민자들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당시 흑인들에게는 그러한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아시안과 라티노들은 보다 값싼 노동력으로서 미국 땅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백인들은
청교도들이 미국 땅에 첫발을 내딛을 때까지만도 아메리카 대륙은 남의 땅이었다. 이미 오랜 세월 350여 부족의 원주민들이 대륙 곳곳에 흩어져 평화롭게 살던 땅이었다. 원주민들은 자신들의 생활터전을 유지하면서 이방인인 백인들과도 평화롭게 살기를 원했다. 그러나 백인들은 원주민들의 소박한 소망을 절대로 허락하지 않았다. 토속신앙을 가진 원주민들에게 기독교를 강요하며 마귀의 탈을 씌었고, 더 넓은 영토를 얻기 위해 원주민들에게 총을 겨누었다. 그것도 부족하여 백인들은 유럽에서 전염병을 옮겨 와 대다수 원주민들을 죽게 만들었다.
백인들이 원주민 땅을 빼앗을 때, 원주민 몰살정책을 폈다고 한다. 당시 ‘죽은 인디언이 가장 훌륭한 인디언’이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노골적으로 원주민 몰살정책을 폈다.
아메리카 정복에 나선 유럽이민자들 대다수는 북유럽 이민자들이었다. 영토를 넓혀 나가기 시작한 백인들은 북유럽 백인들에게 미국 이민을 권장하는 홍보를 강화했다. 반면 동유럽과 남유럽 이민자들에게는 그들의 이민을 억제하기 위한 정책으로 이민쿼터제를 만들어 적용하기도 했다.
초기, 농장에서는 백인과 흑인 노동자들이 노동의 고통을 함께 나누며 일을 했다. 당시 백인 노동자들은 자신이 백인이라는 의식보다는 노동자라는 인식이 강했다. 열악한 농장에서 일을 하면서 노동자들의 불만이 쌓이고 농장주의 횡포에 맞서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 났다. 그것은 인종을 떠나 계급투쟁의 성격을 띈 흑인, 백인, 원주민들의 연합반란이었다. 그러자 백인 농장주들은 위기의식을 느꼈고 그 해결책으로 노동자들 속에서 백인들을 분리시키기 시작했다. 백인우월주의 정책을 폈고, 시민권을 주었으며, 다른 인종과 달리 백인 노동자는 자유인임을 확인시켰다. 결국 백인 우월주의는 백인자본가와 백인노동자 사이 계급모순을 해결하는 이데올로기가 되었던 것이다.
그 영향으로 1930년에서 1934년까지 캘리포니아 곳곳에서 잇따라 발생했던 필리핀 노동자들의 파업에서 백인노동조합은 그들을 지원하지 않았다. 그로인해 필리핀 노동자들의 투쟁은 모두 실패했고 노동자들 사이 인종장벽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한 인종차별 이데올로기는 오늘날까지도 미국사회 곳곳에, 국제적으로 수많은 악영향을 미치며 고질적인 병으로 작용하고 있다.
1790년 제정 된 미국 최초의 귀화법은 “자유의 몸이 된 백인만이 미국시민이 될 수 있다”고 못박고 있다. 흑인들이 미국시민으로 인정받기 시작한 것은 80년이 더 지난 1868년 남북전쟁을 통해서다. 결국 ‘만인은 법 앞에 평등하다’는 미국 헌법은 그 태생부터 인종차별 의식을 담고 있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유색인종에 대한 미국의 이민정책은 경기가 좋을 때는 이민을 늘리고, 경기가 나쁠때는 강제추방과 단속강화 등으로 이민자를 억압하는 정책을 반복하고 있다.
1924년, 미국시민이 될 자격이 없는 사람에 대한 이민을 전면 금지시켰다. 이것은 아시아 인들의 이민을 법적으로 금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1930년대 말, 금광개발로 서부개척이 시작되면서 아시아 인에 대한 이민의 길이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다. 당시, 골드러시가 한창이던 캘리포니아는 동부나 중서부에서 이주해 오기에는 너무 멀고 험한 길이었다. 중서부에서는 원주민들의 항쟁이 이어지고 있었으며, 동서를 가로막는 로키산맥을 넘어 오는 것도 목숨 건 어려움이었다. 그렇기에 여성들은 그 길을 넘을 엄두를 못내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백인들에게는 자신들을 위해 가사노동을 담당할 대체인력이 필요했다. 그 해결책으로 백인들은 체구가 작고 부지런한 태평양 건너 중국인들을 여성 대체인력으로 고용하기 시작했다.
미국에서는 '피부색 만큼 차별 받는다'는 말이 공공연한 질실로 이야기되고 있다. 백인을 기준으로 황인, 흑인, 그리고 그 사이 혼혈에 이르기까지 가장 우월한 인종은 백인이며 가장 열등한 인종은 흑인이라는 것이다. 믿을 수 없지만 엄연히 존재하는 사실이다. 백인들은 이미 주류사회를 장악하고 있으며, 학구열 높고 부지런한 황인들은 어느 정도 기반을 다질 수 있지만 결코 주류사회에 들어갈 수 없는 벽을 갖고 있다. 그리고 이 나라 최하층에 흑인들이 살고 있다.
2차 세계 대전 때, 독일군 포로들은 백인 막사에서 함께 기거하고 식사를 할 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자국 군인이었던 흑인군인들은 백인군인과 같은 막사를 사용할 수 없었다고 하니 근거 없는 백인우월주의에 기가 찰 지경이다.
넘을 수 없는 인종차별의 벽
미국 군인 가운데 3만 3만 5천명이 영주권을 가진 군인이라고 한다. 지금도 많은 이민자들이 미국에 대한 그들의 충성심을 확인시키기 위해 이라크 전 참전을 자진하고 있다고 한다. 이라크에 참전하여 최초로 사망한 군인이 영주권자였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이렇듯 유색인종이 아무리 백인들에게 자신들의 충성을 확인시켜려 해도 그들은 그 충성을 의심하고 있다.
아시안 아메리칸 – 백인도 흑인도 아닌 사람들의 역사 – (장태환 지음) 참조
11월 12일, 전국노동자대회 날이다.
조합원들은 어제저녁 부터 상경하여
전야제를 진행하고
오늘 도심 곳곳에서 사전대회를 진행하고 본대회로 모여
15일 총파업 투쟁을 결의했을 것이다.
해마다 전태일 열사 정신 계승하고 쟁점이 되는 과제를 부각시키고
투쟁결의를 높였던 전국노동자대회.
1988년부터 시작하여 90년대 초반까지는 경찰의 원천봉쇄를 뚫고
비택을 받아 비장한 결의와 각오로 참석했던 전국노동자대회.
그러다 언제부터였던가 대회는 합법집회로 열렸지만
대회 전술이 중요한 의미로 다가왔던 전국노동자대회.
그리고 다시 언제 부터인가
연중행사답게(?)짜여진 공식 프로그램을 중심으로
안정적으로 진행하고 있는 전국노동자대회다.
나는 88년 부터 전국노동자대회에 참석하여
99년 인천본부에 사직서를 쓰기로 결심했던 해를 빼고
작년까지 줄곧 전야제 부터 함께 했었다.
조합원들과 함께 참석하기도 하고,
사무총국 성원으로 행사 곳곳 진행에 신경 쓰고, 확인하며 진행을 하기도 했었다.
심지어 대회가 끝나고 모든 대오가 해산한 뒤,
늦도록 쓰레기를 치우고 저녁겸 뒷풀이를 위해 식당을 향하던 기억들도 새삼스럽다.
사직서를 내고 한달여 만에 전국노동자대회에 참석 했던 지난해,
왜 그리 낮설고 힘들고 공허했었던지,
사람들을 만나 인사를 나누고 대회에 참석하는데 주책맞고 민망하게 눈물이 자꾸 나왔다.
결국 오래도록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집회 마무리 전, 그 자리를 떠나고 말았었다.
그리고 올해는 총력집중 조직하여
11월 15일 총파업을 결의하고 있을 전국노동자대회를 잊고 있다.
어찌 어찌 태평양 건너 미국 땅까지 날아왔건만
여전히 눈물 흘리며 지향없는 이방인으로 떠돌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이민자 단체들의 선거운동 과정
이번 중간 선거는 미국 이민자들에게 아주 의미 깊은 선거였다. 특히 지난 봄, 잠자던 미국사회를 일깨우고 세계를 놀라게 했던 수백만 이민자들의 이민개혁 열기를 투표라는 명확한 정치적 의사표현으로 이어가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5월 1일 집회 이후 국회의원들에게 편지 보내기. 시민권신청 지원, 사진엽서 보내기를 했으며, 선거관련 구체적인 활동으로는 유권자 등록과 부재자투표 신청 지원, 유권자 안내서 발송, 투표참여 독려 전화걸기, 가가호호 방문하기로 저녁시간과 주말을 보냈다. 뿐만 아니라 한인들이 모이는 곳곳을 찾아 다니면 선거 관련 워크샵을 진행하고 텔레비전, 신문광고와 기사 등을 내보내며 투표참여와 친 이민정책 강화를 위해 전력을 다해 뛰었다.
이러한 활동은 여러 이민자 단체들이 다양하게 곳곳에서 진행했는데 한인들을 대상으로 활동했던 LA 민족학교의 경우, 9월부터 8백여명의 유권자 등록을 도왔고, 1만 9천여부의 선거안내책자를 우편발송했으며, 4천여명의 유권자들에게 7천1백여통(직접전화 4천, 자동메시지 1천5백, 아태법률센터와 공동 1천6백)의 전화를 걸었다. 또한 주말에는 2천여가구를 방문하여 선거참여와 지지 발의안에 대한 찬성을 호소했다. 또 선거 당일에는 곳곳 투표소로 나가 출구조사를 진행하기도 했다.
그 많은 활동 가운데 재미있었던 것은 이번 선거를 위해 많은 한인단체들이 공동으로 선거운동본부를 만들었는데 여기에는 중앙일보, 한국일보, 라디오코리아 등 한인사회 주류 언론사들도 함께했다. 한국 같으면 보수와 진보로 분명히 나뉘어 소 닭보듯 할 관계들이 태평양 건너 미국 땅에서는 이민자 권익과 한인들의 영향력 강화라는 이해관계 속에서 함께 발을 맞춘 것이다. 그러다 보니 선거관련 내용은 한인사회 가장 진보적이면 활동적인 단체라 할 수 있는 민족학교와 NAKASEC에서 제공하고 TV, 신문, 라디오 등 한국언론사들은 무료광고와 보도, 출연 등으로 선거활동을 하는 진풍경을 볼 수 있었다.
지난 봄 거리투쟁 열기를 여름의 시민권 신청, 사진엽서 보내기에 이어 가을 본격적인 선거활동으로 이어졌던 이민개혁 요구는 고스란히 이번 투표결과로 드러났다.
출구조사결과 이번선거에서 처음 투표를 한 유권자 가운데 40%가 이민자인 것으로 나타났고, 이민개혁 시위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대거 투표에 참여했음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합법적인 신분의 이민자들도 이민개혁 시위에 함께 했으며 서류미비자를 범죄시하는 제도정책에 반대하고 있음이 말해주는 결과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선거 결과에서도 확연히 드러났다. 11월 7일 선거에서 공화당이 완패한 것이다. 상원에서 공화당은 민주당에게 6표를 내줌으로 민주당이 51표로 과반수 의석을 확보했다. 또한 하원에서는 무려 28석을 내줘 민주당이 229석으로 공화당 196석을 훨씬 앞질렀고 주지사선거에서도 공화당이 21개 주, 민주당이 28개 주, 무소속이 1개 주에서 당선 됨으로 그야말로 여소야대 정국이 만들어 졌다. (캘리포니아 주에서는 영화배우 출신이자 공화당 후보인 아놀드 슈워 제네거가 재선에 성공했다.)
선거운동 기간 동안 이민개혁에 반대하던 의원들은 반 이민법안 통과를 호시탐탐 노리며 선거전선을 교란시켰고, 부시는 결국 멕시코장벽 강화 법안에 서명을 해버렸다. 그러나 이번 선거에서 이민개혁에 반대했던 100명의 국회의원 가운데 20명이 재선에 실패했다.
이로써 반 이민정책과 세계평화를 위협하는 이라크 전쟁 등 부시의 폭정에 심판이 가해졌다. 이제 2006년 내내 치열하게 투쟁 해 온 이민자 단체들에게는 투표의 힘을 보여 준 이민자들을 힘있게 세워내는 한편, 공화당을 이긴 민주당이 보다 개혁적인 정치를 할 수 있도록 견제하고 지원하는 이중의 과제가 남아 있다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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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권자 등록 유권자인 경우 투표를 행사할 권리를 보유하고 합니다.
유효한 등록 유권자란 미국에 거주하는 미국시민으로서 최소 18세 이상이고 중죄판결로 수감 또
는 집행유예 상태가 아니며 현 거주지 주소로 투표권이 인정 된 유권자를 말합니다.
2. 투표인단 목록에 이름이 없는 경우에는 임시 투표권을 행사할 권리를 보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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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위협이나 협박을 받지 않고 비밀투표를 행사할 권리를 보유합니다.
5. 기표를 하기 전에 실수를 했다고 생각 될 경우에는 새 투표용지를 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투표를 최종적으로 완료하기 전 실수를 했다고 생각 될 경우에는 언제든지 새 투표용지를 교환할 수 있는 권리가 있습니다. 부재가 투표자도 선거일 마감 전 잘못 표기한 투표용자를 반환하여 새 투표용지를 요청하고 수령할 수 있다.
6.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투표할 수 없는 경우, 투표 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권리가 있습니다.
7. 카운티 내 어떤 선거구로든 완료한 부재자 투표용지를 반환할 수 있는 권리가 있습니다.
8. 구역에 충분한 해당 언어 사용 인구가 있을 시, 그 언어로 번역 된 선거자료를 이용할 권리가 있습니다.
9. 선거절차에 대해 질문하고 선거과정을 감시 할 권리가 있습니다.
선거 절차에 대해 구역 위원회 및 선거관리사무소에 질문하고 답변을 얻거나 담당 공무원
과 연결 할 수 있는 권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계속되는 질문이 공무집행에 방해가 될 경우,
이사회나 선거관리사무소는 질문에 대한 응답을 중단 할 수 있습니다.
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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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2> 미국 연방선거
참고로 미 연방정부 구성과 선출방식 등에 간단히 소개하고자 한다.
모두 알다시피 미연방 정부의 최고통수권자는 대통령이다. 그런데 대통령은 직선제가 아닌간선제이다. 538명의 선거인단(상,하원의원을 합친 수에다 워싱턴 DC에서 3명을 합친 수)에 의한 간접선거로 과반수(270표)를 얻어야 당선이 된다. 대통령 선거 과정은 후보지명과정, 전국전당대회, 총선거, 선거인단투표를 거친다.
대통령을 수반하는 부서로는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가 있는데 행정부에는 15개의 부서가 있고 입법부인 국회는 현재 100명의 상원과 435명의 하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상원의 경우 직접선거로 50개 주에서 2명씩 선출하는데 임기가 6년이다, 그런데 2년마다 전체의석을 3등분하여 선거를 하는데 그때마다 1/3씩 상원의원이 바뀐다. 하원은 임기가 2년인데 현재 4백 35석으로 인구조사 수치를 기초로 10년마다 조정된다.
미국에서 인구수가 가장 많은 주가 캘리포니아 주로 하원이 53명이고 그 다음이 플로리다 주로 하원이 25명이다.
머나 먼 유권자의 길
미국으로 오고 지난 6월 예비선거와 11월 7일 중간선거 두 번의 선거를 경험했다. 그런데 이방인인 내가 보기에 미국 선거는 복잡하기만 했다. 만19세가 넘어 자동으로 대한민국 유권자로 투표권을 가질 수 있었던 내가 복잡한 유권자 자격 취득 과정, 다양한 투표방식 등 미국의 선거제도를 이해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했다.
미국에서 수십 년 살았다고 하여 누구에게나 투표권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수많은 서류미비자에서 부터 영주권자, 시민권자 등으로 체류신분이 나뉘는 미국에서 투표권은 미국 시민권자에게만 주어진다. 그러나 시민권자라고 모두 투표권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유권자 등록(voter registration)을 해야만 한다. 시민권자가 유권자 등록을 하는 일은 간단하다.
지난 9월, 11월 7일 중간 선거를 앞두고 마지막 시민권 선서식이 있었다. 그때 많은 이민자단체들이 시민권 선서식장으로 나가 시민권을 취득하자 마자 그 자리에서 유권자 등록을 할 수 있도록 유권자 등록을 지원했다
이처럼 시민권 취득 이후 어디 지원을 받고, 맘먹고 유권자 등록을 하지 않는 한 굳이 유권자 등록을 하지 않고 사는 사람들이 부지기 수다. 그 이유를 따져보면 먹고 살기 위한 생활이 우선이기 때문인 경우도 있고, 언어지원이 된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영어중심 사회 일수 밖에 없는 이 나라에서 언어장벽은 정치적 실천을 주저하게 만드는 경우가 많다. 또 복잡한 선거와 투표방식이 투표장으로 향하는 발길을 주눅들게 만들기도 한다. 게다가 후보나 발의안 등 투표와 관련한 정보를 구하고 판단하기도 쉽지가 않은게 이민자 사회의 현실이기도 하다. 이 모든 장벽들이 당당한 주권 행사의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이다.
유권자 등록을 하면서 영구 부재자 투표(adsentee voting) 를 신청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곳에서는 한국과 달리 누구나 부재자 투표를 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즉 군대엘 가거나 거주지를 떠나 있는 경우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부재자 투표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영구 부재자 투표를 신청하면 선거국에서 투표일 전에 부재자 투표용지를 보내준다. 그러면 굳이 당일 투표소에 가지 않고서도 미리 투표를 하여 우편으로 선거국에 보내면 된다. 만일 선거 당일까지 부재자 투표용지가 선거국에 도착하지 못할 거 같으면 부재자 투표용지를 선거 당일 아무 투표소에나 갖다 주면 된다. 이번 11월 7일에 부재자 투표를 하기 위해서는 선거국에 11월 3일까지 영구부재자투표 신청서를 내야 했다.
이곳에서는 선거날이 휴일이 아니다. 공민권 행사를 위해 법적으로 2시간만 할애 받을 수 있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부재자투표를 하는 사람들이 많고, 노인들의 경우 일일이 투표소에 나가기 힘들기 때문에 부재자 투표를 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번 선거를 앞두고 선거참여 전화를 걸고 집들을 방문하다 보니 선거일이 가까워 질수록 이미 투표를 해서 우편발송 했다는 사람들을 많았다. 그들이 바로 이런 영구부재자 투표를 신청한 사람들인 것이다. 그런데 영구 부재자 투표를 신청하고 두번 연거푸 투표를 하지 않게 되면 부재자 투표 신청이 취소 됨으로 투표소에 직접 나가거나 다시 부재자 투표를 신청해야 한다.
또 조기투표(eaily vote)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부재자 투표를 신청하지 않은 상태에서 선거 당일, 투표가 어려운 사람들이 미리 투표소에 나가 투표를 하는 것이다. 이번 중간선거를 앞두고 LA 카운티에서는 중앙 도서관 등에 조기투표소를 설치하여 사전투표를 진행했다.
마지막으로 임시투표(provisional vote)가 있다. 이것은 유권자등록을 했지만 유권자 명단에서 빠진 사람이나, 선거날 해당 투표소에 나가지 못할 경우 신분증을 제시하고 이용이 편한 다른 투표소에서 임시투표를 하는 방법이다.
복
미국선거가 복잡하다고 한다. 전화를 걸고, 집들을 방문하다 보면 대부분 유권자들이 반갑게반기는 경우가 많았다. 왜냐하면 선거와 투표는 해야겠는데 너무 복잡하고 어디에 찍어야 하는지 정보가 없기 때문이다.
그럴만도 한 것이 미국에서는 연방선거로 대통령, 하원의원, 상원의원을 뽑고, 주(state) 선거로 주 상원, 하원 등을, 지방자치단체인 카운티(county) 정부나 시정부의 단체장과 선출직 공무원 등을 동시에 선출하기 때문이다. 또한 일정한 과정을 거쳐 주민들이 직접 만든 법인 주민발의안((Proposition)에 대한 찬반을 묻는 투표도 있기 때문이다.
이번 선거에서는 연방 상,하의원과 주지사, 부주지사, 주 선출직 공무원, 주 대법관등을 뽑고 주에서 나온 13개 주민발의안와 시에서 나온 3개 주민발의안에 대한 찬반을 물었다.
그러니 선거국에서 나오는 유권자 안내서는 아무리 모국어로 번역되어 나왔다 할지라도 선거에 웬만한 관심을 갖고 있지 않은 한 거들떠 볼 엄무가 나지 않는다. 이번 중간선거를 앞두고 캘리포니아 주에서 나온 유권자 정보 안내서는 16절 192쪽 분량이었다.
그 꼭지를 살펴보면 각 발의안(14쪽-90쪽)이 나온 배경과 그에대한 전문가 의견, 찬반의견과 찬반의견에 대한 반박의견까지 상세히 실려 있다. 또 주정부 공채 채무 개관(96-97쪽), 주 전체 선출직 공무원 후보 명단(98-111쪽), 후보자 성명서(100-111쪽), 카운티별 조세형평위원회 지구(112쪽), 대법원 및 항소법원 판사(113쪽), 법안 전문(114-190쪽), 유권자 인권선언(191쪽)이 나와 있다.
또 이와 별도로 각 커뮤니티에서는 선거관련 다양한 안내책자를 유권자들에게 보내기도 한다. 비영리단체들은 특정후보를 지지할 수 없으나 발의안에 대한 입장을 가질 수가 있고 선거참여를 알리는 선거안내책자를 만들 수가 있다. 이번 선거에서 project Vote Smart라는 단체에서는 114쪽 분량의 ‘The Voter’s Self-Defense Manual’을 냈는데 그 자료에는 연방정부 상하의원들이 의정활동 기간 동안 각 법안에 대해 밝혔던 찬반입장과 후원금 내역 등이 나와 있어 그, 후보들에 대한 정치적 판단을 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11월 7일 미국 중간선거가 끝났다. 나는 곁에서 함께하고 지켜보고 새롭게 알게 된 미국선거와 관련한 글을 쓰고자 한다. 이민자단체들은 올 봄, 이민자들의 뜨거운 이민개혁 열기를 확인한 자신감으로 '오늘은 행진, 내일은 투표'라는 슬로건과 함께 줄기차게 노력해 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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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흑인 가정의 4대에 걸친 가족사
8월, 투표권리를 위한 집회에 참석했었다. 그날 행진을 마치고 교회에서 가진 마무리 행사에서 그 교회의 담임목사는 투표권을 얻기까지 생생한 가족사를 이야기 했다.
그의 증조 할아버지는 아프리카에서 팔려 온 흑인노예였다. 증조 할아버지가 노예였기에 당연히 그의 할아버지도 노예일 수 밖에 없었다. 다행히 그의 아버지 세대에 와서 노예해방이 됐고 60년대 인권운동 영향을 받아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경험 못한 딱 한번 투표를 하고 제 세상으로 갈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목사가 되어 유색인종을 차별하는 미국사회제도에 맞서는 목사가 되어 있다.
단지 피부색이 달라 미국시민일 수 없었던…
나는 그의 말이 절대 과장이 아님을 안다. 왜냐하면 미국에서 선거권 확대과정은 철저히 인종차별에 바탕 한 역사이기 때문이다. 미국 인구비율을 보면 백인이 67%이고 유색인종이 33%이다. 이것은 미국을 백인들의 나라로 만들고자 한 백인중심 정책의 결과인 것이다.
1790년 처음 만들어진 귀화법은 백인(앵글로 색슨)에게만 시민권 자격을 인정했다. 흑인과 아시안 등 유색인종이 개척시대 아메리카의 견인차 역할을 하였어도 그들은 미국시민이 될 수 없었다. 단지 노예이자 값싼 노동력이었을 뿐이다.
그로부터 80여년이 지난 1870년, 남북전쟁 결과 흑인과 중국인들도 시민권을 가질 수 있게됐다. 하지만 그들은 반쪽자리 미국국민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투표권이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국인을 뺀 나머지 아시아인들에게는 다시 80여년의 세월이 흐른 1952년 ‘우터 매칼렌 월터스 법’이 만들어지고서야 시민권자가 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한 표의 주권을 행사하기까지.
그렇지만 선거권을 갖기까지는 그보다 더 먼 길이 필요했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유색인종이 유권자가 되기 위해서는 시험을 통과해야 하는 차별의 벽이 있었다. 그러나 1965년 인권운동을 통해 투표권리법(VOTING RIGHTS ACT)이 만들어짐으로 선거에서 각종 차별을 없앨 수 있게 됐다. 대표적으로 유권자 등록을 시험제도가 사라졌고 누구든 부재자 투표를 할 수 있게 됐으며 언어지원을 받을 수 있는 203조가 만들어졌다.
이번 선거에는 LA카운티는 7개 언어(영어, 중국어, 일본어, 한국어, 스페인어, 타갈로그어, 베트남어)를 지원함으로 선거안내 책자, 투표용지, 투표소에 해당언어 안내자들을 두도록 했다.
눈꼽만큼의 과학성도 없는 백인우월주의
그렇게 백인과 유색인종의 주권을 차별해 온 사회구조 속에서 미국은 백인중심의 정치, 경제, 문화, 이념적으로 백인우월주의를 강요하는 나라가 되었다. 어떠한 과학적 근거도 없이 백인은 미국의 주류사회 주인공이 되었다. 하지만 유색인종을 백인의 문턱을 넘지 못하는 인생을 살도록 강요 받아야만 했다. 그 때문일까? 2004년 대통령선거에서 백인의 투표비율은 81%,로 나타났고 유색인종의 비율은 19%로 나타났다. 이것은 이제 미국도 유색인종이 시민권자 될 수 있고, 투표권을 가질 수 있는 사회가 되었지만 인종차별의 장벽이 곳곳에 뿌리깊이 도사리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내 친구 조혜영은 강화도 섬마을 초등학교 조리사이다. 그 친구가 멀리 떨어져 있는 내게 메일을 보내왔다.
한국을 떠나 오기 전, 잘 풀리는(?) 듯 했던 성추행 사건이 결국 주변 사람들의 온정적 감싸기와 은폐의도, 그 분위기 속에서 반성 못하는 가해자로 인해 피해자인 내 친구와 가족들이 극단적인 고통을 겪고 있다. 친구의 호소문은 성추행 문제를 바라보는 우리 사회 만연한 잘못된 인식과 당사자와 가족의 고통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특히, 그곳이 교육현장이라는데 더욱 섬짓하다.
사회적으로 당당히 자신의 위치를 지키며, 두 아이의 엄마이자 한 사람의 아내이기도 한 내 친구는 성문제에 있어서는 여자이고 약자라는 이유로 진실을 이야기 해도 세상이 이를 가로 막고 있다. 친구는 견디다 못해 결국 인천시 교육청 홈페이지에 글을 올렸다.
http://www.ice.go.kr/parti/opinion/view.asp?seq=13351&s=&q=&gotopage=1&vnum=3151
나는 누구보다도 여고 동창이자 운동 동지인 내 친구 조혜영의 건강성을 잘 알고 있다. 몸과 마음의 상처를 받으면서도 항상 일상의 문제들과 타협하지 않고 힘든 투쟁을 하는 내 친구에게 무한한 신뢰와 지지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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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장님께 드리는 호소문
-겉도는 학교 성교육-관리자의 성의식 초등학생보다 낮다
성추행 사건의 진행 상황
안녕하세요?
저는 인천시 강화군 교동면에 위치한 지석초등학교에 근무하는 조혜영입니다.
저는 지난 2006년 1월 19일 동년 1월 1일자로 부임한 행정실장 김기현으로부터 성추행을 당하고 2006년 9월 18일 강화경찰서에 김기현을 성폭력, 협박범으로 고소해 가해자인 김기현이 강제추행혐의로 불구속입건 되어 현재 사건이 진행 중에 있습니다.
행정실장인 김기현은 학교 회식자리에서 여직원들을 뽀뽀하며 강제로 껴안고 춤추기를 요구하고 자신의 바지를 내리고 몸을 비벼대며 가슴에 손이나 휴지를 넣고 여성 가슴을 흉내 내며 그 상태로 상대방 여성에게 추행을 하였습니다. 그 회식자리에 4명의 여성이 있었고 4명의 여성이 거의 비슷한 추행을 당하고 추태를 보게 되었습니다.
회식을 중단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도중 제 차 옆 좌석에 탄 김기현이 운전을 하는 저의 목을 기습적으로 끌어안고 사랑한다며 볼에 뽀뽀를 하였습니다. 회식자리에서의 추행도 용서할 수 없는데 다시 운전을 하는 상태에서 추행을 하여 차에서 끌어내려 사과할 것을 요구하며 실갱이를 하다 길바닥에서 폭행을 당하였습니다.
그 다음날 학교 측에 김기현의 성추행사실을 알리고 김기현에게 정식적인 사과를 요구하였으나 김기현은 무성의하게 응했고 고소하려면 고소하라고 오히려 당당하게 굴었습니다.
그래도 고소라는 엄청난 일을 쉽게 결정할 수 없어 김기현에게 진정으로 사과하면 용서해주겠다는 약속까지 하며 사정하다시피 사과를 요구했지만 거절했고 오히려 저보다 당당하고 씩씩하게 학교생활을 하였습니다.
사건과 동시에 경찰에 고소하려하였으나 학교라는 조직체계에 속한 한사람이라는 점과 최소한 기관장인 교장선생님과 의논을 하는 게 도리라 생각되어 인천에서 근무하는 저희 남편, 김기현, 교장선생님, 조혜영 4명이 성폭력사건에 대하여 어떻게 할 것인가 의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김기현이 성추행 사실을 인정하고 반성하였고 전 직원 앞에서 사건을 공개하고 다시는 이러한 추행을 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작성하기로 하고 고소를 하지 않기로 합의를 하였습니다.
사건 당시는 학교가 방학 중이어서 개학일에 공개사과와 각서를 작성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개학을 한 후 공개사과와 각서를 받기로 한 합의사항을 학교 측이 제대로 이행하지 않고 직원회의 자리에서 이번 성추행 사건을 불미스러운 일 정도로 치부하며 행정실장 부임인사로 대신하려 하는 것을 제가 사건내용을 작성하여 직원들에게 나눠주었습니다. 교장선생님께 합의사항 불이행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며 재차 이행해줄 것을 요구했지만 다른 선생님들의 무관심과 교장선생님의 무성의로 다시 한번 상처를 입게 되었습니다. “굳이 성폭행 사실을 다른 사람들이 알아서 좋을 게 없을 것 같아 공개하지 않는 게 좋지 않겠는가, 시간이 많이 흘러 다시 드러내면 상처가 덧나지 않겠느냐” 어느 여선생님은 “개인적인 일을 우리가 알아야 할 의무가 없잖아, 난 사건 공개내용을 안 들을래. 내가 왜 그런 사건을 알아야 돼!” 하며 공개를 반대하였습니다. 그래서 결국 사건을 제대로 공개하지 못하였습니다.
그 후 행정실장이 작성하여 공개하기로 한 각서도 이뤄지지 않아 제가 행정실장과 교장선생님한테 요구하여 반강제적으로 사과와 각서를 받게 되었습니다.
성폭력 피해자가 저 혼자만이 아니라 다른 여직원들 대부분이 당했는데도 교장선생님은 사실 확인이나 어떠한 입장 표명도 없었고 행정실장의 피해자들에 대한 사과 한마디 없이 넘어가려는 것에 대해 저는 제 개인이 당한 모욕감을 떠나 이 사실을 공개해야만 다시는 이러한 범죄가 발생하지 못할 것이라 판단했습니다.
직원들을 관리 감독해야 하는 학교장이 성폭력 사건이 당하는 여성들한테 얼마나 치명적이고 굴욕적인 일인가를 제대로 인식하고 있어야만 학교가 제대로 설 수 있다는 판단이 들었지만 고소를 미루고 사건을 마무리 지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반 억지로 공개사과와 각서를 받고 사건을 마무리하며 9개월이 흘렀습니다.
그 9개월 과정에서 행정실장은 여전히 술을 먹고 술주정하고 난동을 부리며 업무적으로 절 괴롭혔습니다. 대화도 하기 전에 언성을 높이고 주먹다짐을 하고 욕을 해댔습니다.
직원들과 다투고 밖에 나가서 술을 먹고 다른 사람들과 싸움을 하고 학교 회식이 있는 날에는 여전히 술주정과 추태를 부렸습니다. 그 모습이 보기 싫어 회식이나 행정실장이 가는 곳에는 가급적 참석하지 않았으나 어쩌다 공식적인 모임에 함께하게 되면 여전히 변하지 않는 행정실장의 모습을 보게 되어 나중에는 절망감을 느꼈습니다.
이러한 행정실장을 학교 측에서는 아무도 제지하지 않고(말로 타이르거나 지적 정도로 행정실장은 자신의 버릇을 고치려고 노력하지 않음) 같이 어울려 술을 마시거나 몇 마디의 훈계로 달래거나 뒤에서 쑥떡거리며 흉을 보거나 거추장스럽게만 생각하였지 실질적으로 아무도 행정실장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가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정기적으로 실시하는 아동에 대한 성교육, 직원에 대한 성교육을 실시하는 모습을 보면서 실망감이 더욱 클 수밖에 없었습니다.
문제가 발생했을 당시 관리자나 전 직원이 올바른 성의식으로 문제를 바라봤다면 그 같은 범죄 사실을 은폐하기에 전전긍긍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더군다나 사건이 발생한지 9개월 후에 다시 고소하는 일이 없었을 것입니다.
행정실장이 어떠한 행동을 하든 제가 이미 용서를 하고 각서까지 받은 상황에서 다시 고소하거나 문제삼을 수가 없다는 판단을 하며 행정실장의 뼈저린 반성과 변화를 기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건 당시 이성을 잃을 정도로 분노했던 남편이나 가족의 감정을 무마하면서까지 김기현을 고소하거나 법적으로 대응하지 않기 위해 참았던 일들이 그동안 상처가 되어 불면에 시달리고 강간당하는 악몽을 여러 차례 꾸고, 심지어 주말부부인 남편을 만나도 부부생활에 대한 두려움과 죄의식, 소화불량, 저의 건강과 정신은 망가질 대로 망가져가고 있었지만 공무원으로서 저의 직분과 사적인 고통으로 학교생활에 누가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업무에 임했고 김기현의 변화를 기다리며 인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한 저의 아픔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더욱 열심이 근무에 매진하고 직원들을 만나면 웃으며 인사하고 아이들을 정성으로 대하며 생활하며 그 일을 잊으려고 숱한 노력을 하였습니다.
침묵과 무관심으로 일관한 성폭력 사건이
또 다른 사건을 부르고......
그러나 그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김기현은 8월 30일 새벽 12시 30분경 만취해 학교로 돌아와 사택주변을 돌아다니며 난동을 부렸습니다.
그동안 학교업무를 하면서 교무선생님과의 마찰이 잦았던 행정실장이 온갖 욕설과 차마 입에 담지 못할 폭언을 하며 술주정과 난동을 부렸습니다.
“XX 같은 년 칼로 찔러 죽이겠다, X 같은 년 니까짓 게 선생이냐! 당장 나와라 이XX년아!” 이런 식으로 사택 앞에서 난동을 부리다가 제가 살고 있는 사택 주변으로 와 다시 저에게 똑같은 욕설과 폭언을 해댔습니다. 더군다나 저한테는 “조혜영 X같은 년 당장 죽여 버리겠다, 내 자존심을 짓밟고 내 인생을 망친 니 년을 반드시 죽여 버리고 말겠다” “니년도 죽여버리고 니년 새끼 00도 칼로 찔러 죽이고 낼 당장 공무원 옷을 벗더라도 반드시 죽여 버리겠다”는 협박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너무 공포스럽고 무서워 교무부장선생님한테 파출소에 신고하자고 요구하였으나 교무부장님은 신고하면 학교가 시끄러워지고 감당할 수 없다며 문 꼭 잠그고 가만히 있으라 하시고 다른 선생님들도 사택에 함께 계셨는데 아무도 김기현의 난동을 제지하지 않았습니다.
한 시간 반 정도 부린 난동을 보며 속수무책으로 공포에 떨어야 했습니다.
사건이 난 후 김기현은 그날의 난동에 대해 아무런 사과도 없고 학교 측에선 공식적으로 주의한마디 주지 않고 그냥 쉬쉬하였습니다. 술 먹고 술주정한 일 정도로 인식하는 듯하였습니다.
사건을 책임지고 이번 사건해결의 주체이신 교장선생님은 9월 1일자로 다른 학교로 전근을 가시게 되어 아무도 이 사건을 주지하지 않은 채 새로운 교장선생님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날 그 난동사건의 당사자인 교무부장선생님께 교장선생님이나 교육청에 건의해 사건을 해결해줄 것을 다시 요구하였으나 저의 요구에 아무도 귀 기울여 주거나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가 없이 지난번 성추행사건처럼 다시 무마시키거나 쉬쉬하며 소극적인 모습으로 일관했습니다.
저는 여러 날을 고민하였습니다. 강제로 당한 성추행 사건을 떠나 아이를 죽여 버리겠다고 협박하는 김기현에 대해 더 이상의 용서와 이해, 이성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판단을 하여 고소를 하였습니다.
다른 여직원들이 당한 성추행과 그 이후 지속적으로 이어진 술주정과 난동, 더 이상 방치하였다간 더 큰 화를 부를 것이고 어떠한 일이 발생할지 예측할 수 없고 대화나 관용으로 이 사건을 해결할 수 없다는 판단에 새로 부임한 교장선생님께 김기현을 고소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습니다. 새로 부임해 오신 교장선생님은 이러한 사실을 전혀 모르고 계셨고 고소하겠다는 저의 의견을 막무가내로 제지하였습니다.
저는 그간의 과정과 저의 고통을 호소하며 법적으로밖에 해결할 수 없다는 점을 재차 제시하며 교장선생님의 허락을 요구했으나 “고소하면 젊은 사람 인생이 어떻게 되겠느냐, 직접적으로 강간당한 것도 아닌데, 고소까지 할 필요가 있겠느냐” 시며 만류하였습니다.
강간당하는 것과 강제추행당한 것은 아마도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는 건지, 아님 강간은 성폭력이고 강제로 끌어안거나 뽀뽀하는 것은 그냥 이해하고 넘어가는 되는 건지, 교장선생님의 그 말씀을 듣는 순간 저는 다시 성추행을 당하는 것보다 더 절망스런 모욕감을 느꼈습니다.
저는 새로 오신 교장선생님도 이 사건을 해결할 수 있는 당사자가 아님을 인식하며 학교 측의 만류를 뿌리치고 강화경찰서에 김기현을 성폭력과 협박범으로 고소를 하게 되었습니다.
고소를 한 지 1달여가 흘렀습니다. 그 한 달 가까운 시간에 저는 너무도 많은 시달림을 당했습니다. 부딪히기만 하면 고소취하를 요구하는 교장선생님과 다른 선생님들의 고소취하 요구를 접할 때마다 그동안 화목하게 지냈던 직원들과의 애정에 금기 가는 절망감을 느꼈습니다. 사택 앞에서 무릎 꿇고 제발 살려 달라 애원하는 김기현과 보는 사람마다 김기현을 살려주라고 요구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성범죄를 저지른 범법자를 저렇게 두둔하고 감싸줘야 하는 진정한 이유가 무엇인지 그 뜻을 헤아리기가 참으로 어려웠습니다. 제가 고소취하를 거부하고 법의 심판에 맡기겠다는 의사를 전달하면 할수록 고소취하 해주라는 압박 또한 더욱 거세져 하루도 편하게 지낼 수가 없을 정도로 정신적 혼란과 아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한목소리로 울려 퍼지는 고소취하 요구!
당신들의 자녀나 아내가 이런 일 당했으면 용서하고 고소취하 하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까?
지난 18일에 김기현이 경찰서에 가서 조사를 받고 온 이후 그 다음날 신문과 언론에 이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학교는 이 사건이 이미 언론에 보도되고 확대되었는데도 사건을 무마하기에 급급합니다.
때론 교육청 담당자의 요구라며, 시교육청 담당자의 요구라며 고소취하를 요구합니다. 사건이 더 확대되기 전에 마무리해야 한다고 합니다. 이번 사건으로 인해 학교 이미지가 추락된다고 합니다. 가해자인 김기현의 요구가 아닌 학교장과 학교 측이 더 앞장서 고소취하를 요구하는 이유가 진정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교육장님!
저는 그 어떠한 범죄행위도 다 나쁘고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여성을 상대로 여성의 성을 이용해 저지르는 성범죄는 그 죄질이 아주 나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김기현을 용서할 수 없는 건 저 개인적인 감정을 떠나 저 혼자가 아닌 학교 전직원이다시피한 여직원들을 강제로 성추행했다는 사실과 한번 용서해주었고 여러 번의 기회를 주었는데도 그 뜻을 받아들이지 않고 변함없이 행동한 김기현이 진정으로 깨닫고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는 길은 대화나 이해가 아닌 법의 판단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사과를 요구하고 새롭게 인생을 살라고 충고했던 제가 너무 어리석었다는 사실에 허탈감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더군다나 학교의 대부분의 여직원들이 한 남성으로부터 성범죄를 당하고 협박을 당하고 술주정과 난동을 자주 보며 지내는데도, 그 일로 고통을 느끼고 있는데도 그러한 사실에 대해 관리책임자들이 침묵하고 사건을 무마하려고 해도 되는 건지 정말 궁금합니다. 오히려 사건의 피해자인 제가 더 시달림을 당해야 하고 언제 재현될지 모르는 난동에 매일 문을 잠그고 자야하는 현실과 마치 제가 고소를 해 젊은 사람 인생을 망가뜨리는 파렴치한 사람으로 몰아가는 현실에 대해 성폭력을 당했을 때보다 더 큰 고통과 심적 압박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이곳은 도시와 외떨어져 있는 섬이고 남편과 떨어져 있어 초등학교 3학년인 아이와 둘이 사택에서 지내는 데 김기현이 언제 다시 어떠한 행동을 유발한지 불안감을 감출수가 없습니다. 신변의 위협으로부터 무방비로 놓여있는 상태에서 사고가 난 후 후회하고 원통해 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두렵기조차 합니다.
교육장님!
이런 저의 소리에 귀 기울여 사건을 올바르게 해결해주셨으면 정말 고맙겠습니다.
더 이상 교육현장에서 이런 일이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하여 주시고, 이러한 일로 인해 고통 받는 사람들이 없었으면 하는 소박한 바람을 가져 봅니다.
일선에서 묵묵히 자기 업무에 충실히 매진하는 많은 사람들께 이번 사건이 누가 되지 않고 학교 내 올바른 성문화가 자리잡을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11월 7일 미국 중간 선거를 앞두고 진보적인 이민자 단체들은 '집집마다 방문하기'(Precince Walk),
전화가 연결 된 대부분 사람들은 민족학교라 하면 대뜸 알아 듣는다. 그러면서 선거자료 보기가 너무 힘들다고 하소연을 하곤 한다. 그럴만도 한 것이 선거국에서 보낸 자료가 한글일라도 캘리포니아 주지사 후보 6명, 부 주지지사 6명, 총무처 장관을 비롯한 주 주요 공직자를 뽑고, 연방 상원 후보도 선출하는데 후보가 6명이다. 그외 주 대법원 판사 승인 투표를 해야하고 전체 16개의 발의안에 대한 입장도 가져야 한다.
주지사 후보로는 민주당 Phill Angelides와 현 주지사이자 영화배우 출신 Arnold Schwarzenegger가 유력하게 경합을 벌인다.
후보 이력을 보니 한국처럼 같지도 않은 명함용 이력을 줄줄이 쓰지 않고 깔끔하다. 주지사 후보들 가운데 평화자유당 후보 Janice Jordan의 약력은 다음과 같다. 직업은 카운셀러, 행동가, 투사 연령 41세 거주지 샌디애고. 그 옆에 지지사항과 중요정책이 나와있다. 군더더기 없어 좋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후보 정보가 약하다는 생각이 든다.
후보들... 캘리포니아 주 주지사 후보. 맨위가 민주당 Phill Angelides이고 두번째가 현 주지사이자 영화배우 출신인 Arnold Schwarzenegger이다.
이처럼 찍을게 많다보니 투표용지는 300개가 넘는 작은 칸이 빽빽하다. 이곳에서는 하나의 투표용지에 주지사부터 발의안 한개의 투표용지에 모두 찍는다. 그러니 눈도 침침한 노인네들이 좀 골치 아프겠는가? 후보정보와 발의안 정보를 구할 곳이 많지 않은 상태에서 민족학교에서 전화를 했다하니 반길만도 한것이다. 또한 그만큼 민족학교가 한인동포사회 신뢰를 얻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투표용지...저 작고 빽빽한 칸에 찍어야 할 것을 찾아 투표를 해야한다. 제대로 투표하려면 한참을 공부해야 할것이다. 그러나 모두 다 하지 않고 주지사 후보와 상원, 또는 지지 발의안 정도만 투표하는 사람들이 많다.
전화를 걸면서 문득, 민주노총이나 민주노동당에서 무작위 시민들에게 어떠한 법안에 대한 설명을 하기 위해 전화를 걸면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생각해 보았다. 무수한 광고 전화에 뒤섞여 짜증을 내거나, 설령, 그렇지 않다해도 신뢰를 갖고 관심있게 통화에 응해주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이곳에서 '집집마다 방문하기'(Precince Walk),'투표 참여 전화하기 (Phone Banking) 전화걸기는 대표적인 조직활동 방식이다. 지난 봄 집회 때도 매일 밤 동포들에게 전화를 걸어 집회 참여를 독려했다고 한다.
한국에서 전화를 걸어 이 정도 반응이 나온다면 운동도 신명이 날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미국 활동가들은 신명나서 운동하고 있는건가? 그건 또 아닌것 같다. ㅎㅎ
11월 7일 중간선거를 앞두고 선거팀은 물론 민족학교, NAKASEC 실무진들이 모두 바쁘다
초기에는 한인 상가 등을 다니면서 유권자 등록을 받고, 자원봉사자를 모집하는 등 선거관련 준비가 주요사업이었는데 9월 말, 10월로 접어 들면서 일들이 많아 졌다.
미국에서는 시민권자만 선거권이 있다. 그러나 시민권자라고 모두 선거권이 있는 것이 아니다.
유권자 등록을 해야만 한다. 유권자 등록은 주소가 바뀌지 않는 한 한번만 하면 된다.
또 부재자 투표는 한국과 달리 자기 거주지에 살고 있는 사람도 부재자 투표를 할 수 있는데 이를 위해서는 부재자투표를 신청해야 한다. 한번 부재자 투표 신청을 하면 두번 이상 연거푸 투표를 하지 않는 한 선거 때마다 자기 집에서 미리 투표를 하여 투표용지를 우편 발송 할 수 있다.
[유권자 등록] 한국의 날 축제에서 유권자 등록을 지원하고 있다.
11월 7일 중간선거에 참여 하기 위해서는 10월 23일까지 유권자 등록을 마쳐야 한다.
그래서 10월 23일까지는 한국 마켓, 교회 등을 방문하여 유권자 등록을 지원하는 일을 집중적으로 하고 있다. 또한 한국계 언론과 종교계를 비롯한 각 단체들이 공동으로 선거캠페인 위원회를 만들었는데 중앙일보, 한국일보, 라디오 코리아 등 LA지역 주요 언론사들이 모두 여기 들어와 있다.
그 덕에 라디오, 신문에서는 민족학교에서 만든 유권자 등록 캠페인 광고가 공짜로 나오고 있다.
태평양을 건너 온 보수언론들이 한인들의 정치력(?)신장을 위해 그렇게 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이번 주말부터는 집집마다 방문하며 선거 참여 캠페인을 벌이게 된다. 집집마다 찾아 다니면서 홍보하고 조직하는 것은 노동조합에서 즐겨 사용하는 조직활동 방식인데 곳곳에서 널리 이용하고 있다고 한다.
또 이번주는 화요일부터 오늘까지 민족학교에서 만든 선거안내 책자을 부치는 작업을 했다.
이번 11월 7일 선거의 의미와 투표방법, 주요쟁점, 우리와 관련있는 발의안 해설, 유권자 권리 등을 영어와 한국말로 소개한 안내서이다. 1만 6천장을 모두 손작업하여 보내다 보니 많은 일손이 필요했다.
낮에는 각자 자기 일을 보고 5-6시부터 10-20여명이 모여 밤 10시 전후까지 집중작업을 하여 간신히 오늘 마칠 수 있었다. 요즘 한국에서도 잘 하지 않는 손작업을 미국 땅에서 하고 있다. 없는 살림에 일을 하다 보니 몸으로 때우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선거국에서는 일정규모의 인원이 되는 언어권 대해서는 반드시 해당 언어지원을 해야만 한다. LA에서 한국말은 당연히 지원되어야 한다.
그래서 선거자료집도 그렇고, 선거날 투표소에도 한국말을 하는 사람이 반드시 배치되어야 한다.
보통 출구조사에서는 누구를 짝었는가를 조사하는데 민족학교에서 하는 출구조사는 다르다.
투표하고 나오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투표소에서 언어지원에서 부터 유권자 권리가 제대로 지켜 졌는가를 조사하는 것이다.
미국에 살고 있는 한인 가운데 시민권자는 33%라고 한다.
그 가운데 한인들의 투표율은 아시안 아메리칸 가운데 5-6위쯤 되는데 그것은 미국내 거의 꼴등 수준이라고 한다. 먹고 살기도 바쁘고, 언어장벽(한국말 지원을 하고 있지만)도 있어 투표하러 가려면 나름대로 용기도 필요할 것이다. 혹시 한국에서의 정치 염증이 미국생활에까지 반영 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
독자적인 정치조직이 없는 상태에서 미국 선거결과는 그 한계가 분명하다. 그러면서도 갈수록 반이민법과 친이민법이 극심하게 격돌하는 상황에서 선거는 역시 중요한 문제이다.
시처럼 오지 않는 건 사랑이 아닌지도 몰라
가슴을 저미며 오지 않는 건
사랑이 아닌지도 몰라
눈물 없이 오지 않는 건 사랑이 아닌지도 몰라
도종환 시인 <사랑은 어떻게 오는가>에서
오랜만에 들른 친구 블러그에서 퍼왔다.
단지 사랑만은 아닐거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살아가는 것 자체가
시 이고, 가슴 저미는 일이고, 눈물일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 형형한 삶을
나는 얼마나 제대로
거울 삼아 비추고 느끼고 새겨 가고 있는지.
정체되어 있는 나와 자주 만나게 된다.
Who are we? SECURITY!!!
What do we want? HEALTH CARE!!!
When do we want it? NOW!
Who's got the power? We've got the power!
What kind power? PEOPLE POWER!!!
행진을 하기로 한 장소에 도착하니 위와 같이 주고 받는 구호가 적힌 종이를 나눠 준다.
9월 19일 월요일, 오늘 연대를 간 곳은 security officers 집회다.
security officers는 집회에 나가면 자주 만나는 보라색 티셔츠 SEIU (미국서비스노조)소속 노동자들로 다운타운을 비롯한 LA에 1,500여명이 있다고 한다. 한국으로 따지면 시설관리 노동자라고 할 수 있겠다.
security officers들이 속한 SEIU는 지난해 AFL-CIO를 탈퇴한 대표적인 노조로서 공공 서비스, 호텔, 보건의료, 건물관리 노동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170만명의 취업노동자와 12만명의 퇴직노동자로 구성 된 미국 최대노조라고도 한다. 특히 라틴, 아시아 등 이주노동자 중심 조직으로 비정규직 노동자 조직에 성공한 조직사례를 갖고 있다고도 한다.
security officers 핵심요구는 생활임금(living wage), 건강관련 사항(health care, sick days), 보다 나은 직업훈련(traning) 차별금지(respect)등이었다.
오늘 공격 목표는 LA westwood에서도 월드서빙빌딩(world serving building).
4시쯤 사전집회 같은 것 없이 1백여명 대오가 westwood 빌딩가를 향해 3차선 가운데 2차선만 잡고 행진을 시작했다. 꽹과리를 앞세운 민족학교 풍물소리가 거리에 울려 퍼졌고, 라티노와 흑인노동자들이 대부분이었던 행진대오는 풍물가락에 맞춰 구호도 외치고 어깨춤도 춘다. 심지어 어떤 여성 라틴노동자는 그 가락에 맞춰 엉덩이 강하게 흔드는 라틴 춤을 추는데 대충 박자가 맞는다.
빌딩가까지는 반마일(약 800m)거리라고 했는데 실제는 그것보다 더 많이 걸었던거 같다. 고층 빌딩이 늘어 선 거리에 들어서자 대오는 더욱 뜨겁게 구호를 외쳤고 손에 든 것들을 흔들어 댔다. 그렇게 두어바퀴를 돈 다음 행진대오는 민족학교 풍물패를 앞세워 월드서빙빌딩 앞 4거리 한복판 도로를 모두 잡아 버렸다.
그러자 주변에 있던 경찰들이 경계의 눈길을 보내며 대책회의를 갖는듯 했다. 그렇지만 가까이 있는 제복경찰은 남녀 포함 10여명 안팎이었고 한국처럼 중무장한 전투경찰도 없고, 방패와 몸둥이도 없다. 뿐만아니라 질서유지 한답시고 노란띠 들고 대오를 에워싸던 파란옷의 남녀경찰도 없다. 지난번 다른 집회에서도 그랬듯 질서유지는 주황색 조끼를 입은 남녀 노동자들이 스스로 했고, 경찰은 절대 노동자들의 행진과 집회를 방해하지 않았다.
갑자기 벌어진 도로점거에 놀랍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여 카메라를 들이대는 사이, 20여분이 지났을까? 대오가 스스로 도로 밖으로 빠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보라색, 빨간색 티셔츠를 입은 열댓명의 남녀 노동자들은 여전히 도로 한복판을 점거한 채 그대로 주저 앉아 있다.
경찰들은 대책회의가 끝난 듯 음직이더니, 어느 순간 주저 앉아 있던 노동자들을 연행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모습이 진풍경이다. 방패와 곤봉, 경찰의 발길질에 채이며 무차별 연행 당하는 한국 노동자들과 달리 그들은 한 사람 한 사람 순서대로 연행을 당하고 있었다. 경찰은 절대 두명 이상 동시에 연행하지 않았다. 또 동지들이 연행 당하면 악을 쓰고 구출투쟁을 벌이는 한국노동자들과 달리 주변에 늘어 선 대오는 함성과 구호만 외칠 뿐 그 누구도 연행동지들을 구출하거나 경찰에 항의하지 않았다.
경찰이 다가가 뭐라하면 주저 앉아 있던 노동자는 일어선다. 그러면 경찰은 수갑이 아닌 오랏줄을 매 길가 경찰차 앞으로 데려갔다. 그럼 그곳에서 여성은 여성 경찰이 남성은 남성 경찰이 간단히 주머니 등 소지품 검사를 한 다음 차에 타게 했다.
알고 보니 이날 투쟁전술은 연행전술이었다.
올 봄에도 어떤 노동자 잡회에서 연행전술을 썼었다고 한다.(그때 구속 된 사람은 없었다는 것 같다.) 그리고 오는 9월 28일에는 300여명이 대거 연행 당하는 투쟁을 벌일 것이라고 한다.
고분 고분 연행 당하고, 연행하고, 순순히 동지들을 내주는 대오 속에서 나는 사진을 찍거나 동영상을 찍기 바쁘다. 나는 무엇을 찍고자 하는 것일까? 문득 이것이 민주주의 인가 싶기도 하다.
인권이고 노동자권리이고 무시한 채 사람이 깨지든 터지든 속옷이 벗겨져 내리든 아랑곳 하지 않고 개잡듯이 잡아가는 한국, 연행을 각오한다는 것은 곧 수개월 또는 수년 동안의 구속을 각오하는 일이라는 것을 이들은 모를 것이다.
같은 날, 한국에서는 도청 점거투쟁을 벌이던 하이닉스 매그나칩 노동자들의 농성장에 경찰이 투입됐다는 기사가 났다. 600일 넘게 투쟁해 온 지부는 이번 점거농성에 앞서 누구를 구속시키기로 결의(?)했을까?

바람이 숲에 깃들어
바람이 숲에 깃들어
새들의 깊은 잠 깨워놓듯이
그대 어이 산에 들어 온 몸으로 우는가
새들이 바람 그치면 다시 고요한 가지로 깃들 듯
그대 이젠 울지 마소
편안히 내 어깨에 기대소
바람이 숲에 깃들어 솔향 가득 머금고 돌아가듯이
그대 산에 들어 푸르러지는가
구름이 산에 들어서 비를 뿌리고 가벼워지듯이
그대 근심 두고 가소
깃털처럼 가벼워지소
판화 / 이철수, 시 / 한보리, 노래 / 허설
~ 이것을 이메일 보내 준 선배, 정말 고마워. ^**^. ~
멀리 떠나와 있으면서 백윤선 위원장 조문을 다녀 왔다는 친구의 이 메일을 받았다.
가슴이 턱 막힌다.
그 나이도 나이려니와 최근 몇년 무심히 들려오던 그의 평탄치 못했던 삶에 대한 결말이 그것이라는 생각에 이르자 잠시 호흡이 멈춰 선다.
그를 처음 안 것은 1995년 이전이었던것 같다.
바닷바람 세차던 인천 항동, 그는 그곳에 우뚝 버티고 섰던 한라중공업노조 위원장이었다.
조선노협 건설이 한창이던 시절, 쟁쟁하던 조선노조 위원장이자 대공장 노조 위원장으로 의지 충천했던 한 시절이 있었던 사람이다.
그렇지만 그보다 내 기억에 더욱 선명한 것은
1995년, 민주노총 건설을 앞두고 인천지역 공동투쟁 전선을 회복해야 한다는 결의 속에 만들었던
선봉노조단 핵심 사업장 위원장으로 선봉노조단 투쟁을 승리로 이끈 핵심 노조 위원장으로서 기억이 더욱 선명하다.
그 투쟁은 대공장 노조가 중소사업장 노조들을 엄호지지하며 전체투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대표적인 사례였다.
그즈음 한라중공업에서는 목포 이전협상이 진행되고 있었다.
결국 인천 한라중공업 자리에는 물류센터가 들어 서고 그 거대하던 공장은 삼호중공업으로 이름을 바꿔 목포로 이전해 버렸다.
그는 임기가 끝났고, 인천 가족과 떨어져 목포에서 살았던 것으로 기억난다.
전직 위원장에 대한 예우로 지도위원의 직책이 있었긴 했지만
목포로 내려 간 뒤 그는, 이빨 빠진 호랑이 처럼 순탄한 생활을 못했던것 같다.
현장은 이미 인천에서 활동할 때의 현장이 아니었다고 한다.
노조를 무력화시키기 위한 탄압이 살기있게 자행되고. 신자유주의 경영이 깊숙히 파고 들어 노동자들의 숨통을 조이고 들어왔다고 한다.
목포로 내려갔던 노조간부들이 인천에라도 올라치면 우리는 무협지에서나 나올 것 같은 노동탄압 이야기를 들어야만 했다.
그러면서 다른 대공장과 달리 한 목소리를 내던 노조 활동가들도 여러 갈래로 나뉘게 되었다.
목포로 공장을 이전한 뒤, 나는 집회에서 한 두번 그를 만났지만 거의 볼 수가 없었다.
대신 그가 술을 많이 마신다는 얘기, 몸이 아프다는 얘기, 스스로 사직서를 냈다는 얘기,
덩치 만큼 호기롭던 그에 대한 안 좋은 소식들이 무심한 바람에 실려 내 귀에도 닿았다.
그런 그가 이 좋은 가을 날, 결국 이승을 떠나 버렸다.
그가 위원장이던 시절. 의식적으로 단련되지 못한 그의 활동에 대한 비판도 많았다.
또한 현실과 타협하려는 그를 노조간부들과 주변사람들은 무던히도 일으켜 세웠었다.
그 속에서 위원장이던 그는 나름대로 큰 길을 걸었었다.
그의 죽음 앞에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속에서 무너지는 노동자의 초상을 본다.
알아 주던 전직 위원장이 현장에 묻혀 살면서 느꼈을 소외도 컸겠지만
침투되는 신자유주의 현장 통제는 그를 더욱 숨막히게 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신자유주의는 그렇게 인간의 꿈과 희망을 앗아가 버리고 있다.
그 결과 인간은 우울해지고 자포자기하고 극단적인 경우에는 삶을 포기하기도 한다.
그 속에서 그도 살아 갔다.
푸르른 가을 하늘 아래 이승을 떠나는 그의 명복을 빈다.
워싱턴 포스트를 비롯한 이곳 언론들은 9월 4일 노동절 집회가 끝나자 이민자 투쟁 열기가 주춤하고 있다고 보도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쟁점이 됐던 대다수 이민법 국회상정이 내년으로 넘어 갈거라는 분위기 속에 노동절 즈음에 열린 곳곳집회에 참가자들이 생각보다 적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LA에서는 노동절에 이어 지난 9월 9일 LA Historic state park에서 문화제 형식의 집회가 있었습니다
그 집회는 라티노 커뮤니티들이 나흘간의 긴 회의를 마치고 마지막 날 행사로 잡은 것이었습니다.
지난 봄, 수백만이 거리를 가득 메웠던 열기 만큼은 아니더라도 이번 집회에 어느 정도 대오는 모이리라 기대했는데 예상인원 5만명에서 실제 참석자는 5백도 안 돼 보였습니다.
집회 전에 있었던 나흘동안의 회의에도 2천여명이 참석할 거라 예상 했다는데 5백여명 밖에 안왔다고 하더군요,
지난 봄에는 집회 때 마다 라티노 방송 유명 DJ가 방송에서 집회홍보를 무진장 했다더군요.
그런데 이번에는 무슨 이유에선지 빠졌답니다.
쟁점이 되는 이민법들에 대한 내년 연기가 거의 확실한 상황에서 조직되지 않은 무작위 이민자 다수를 집회에 참석 시키는 것이 참 어려운 일 일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예상 인원의 1%도 참석하지 않은 집회에 실망도 컸고, 행사 주최측의 준비와 분석이 우유부단 하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아무도 날 건드리는 이 없는 한가한(?)집회에서 순간 순간 한국, 우리들의 집회를 떠올리며 자꾸 비교하는 저 스스로를 발견했습니다. 어쩔수 없나 봅니다.
먼저 그들은 저조한 집회 참여 인원에는 별로 신경쓰지 않듯 각종 진행에서도 서두르지 않았습니다.
집회 전에 뭐 하나라도 준비가 안되어 있으면 난리 치던(당장 나 부터도 그랬는데)우리와 달리 이곳 사람들은 마냥 한가해 보였습니다.
가수가 바뀔 때마다 악기를 설치하고 음을 맞추는데 보통10여분쯤 걸리고, 다음에 나올 사람들이 바로 뒤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즉각 나오는 것도 아니었지만 누구하나 뭐라는이 없더군요. ㅎㅎ
무대를 보고 왼쪽에는 위 사진과 같은 천막 10여동의 있었는데 주최측에서 음식을 팔았다.
그런데 술은 없었다. 한국과 달리 그 용도는 집회 참가자들의 요기와 편의를 위해 설치한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듯 했다. 무대 오른쪽에는 위와 같은 천막이 있어 조직별 부스 역할을 했다.
또 이곳에 와 있으면서 여러 행사에 참석해 보았는데 그때마다 그 조직의 대표가 행사 사회를 보는 것을 자주 봅니다.
그날 집회에서도 첫번째 사회는 AFL-CIO LA노조 사무총장이 봤습니다. 그녀는 연설도 잘하고 이쪽에서 꽤 지명도가 높은 사람입니다.
한국으로 따지면 대회사, 격려사1,2, 연대사1,2 뭐 이런거 할 사람들이 사회를 보는 것이지요. ㅎㅎ
대신 다양한 사람들이 발언자로 나와 자신의 처지와 경험을 이야기 하는데 지루하지도 않고 재미도 있었습니다.
투쟁사업장에서 투쟁보고 하고 싶다는데 자격과 절차, 격식, 하다 못해 시간없다면서 매몰차게 거절해 버리는 우리와 참 달랐습니다.
어스름 해질 무렴, 멀리 시내가 보인다.
이날 행사를 한 장소는 서울 한강둔치 만큼이나 썰렁한 옥수수 없는 '옥수수 농장'
이라는 곳이었다.
또 이곳 가수들은 손에 드는 악기와 탭탠스, 손벽 등으로 박자를 맞추며 노래를 부르기도 하지만 주요 악기는 전자기타, 드럼을 사용했습니다. 요즘은 한국에서도 문화제에 드럼이 가끔 나오지만
문득, 집회에서 드럼연주하는 것에 대해 비판적 논쟁이 오갔던 90년대 초가 생각 나 혼자 웃어 버렸습니다.
이날 아시안 커뮤니티에서는 필리핀 노동자들이 나와 꽃 들고 춤을 추었고, 민족학교 풍물패 한누리도 풍물공연을 했습니다.
밤 늦은 시간 이었지만 민족학교 풍물패는 대오 맨 앞에서 풍물을 치며 대오를 인도했다.
이곳에 와서 일하는 사람들은 가능하면 모두 풍물을 배워야 한다. 그래야 언제든 상비군으로
집회에 나가 풍물을 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대부분 집회에서 사진을 찍고 있기에
풍물을 치지 않는다.
집회(문화제)는 낮 3시에 시작했는데 행진은 밤10시 반 즈음에 끝났습니다. 행진 대오가 도착한 곳은 라플라시타 성당이었습니다. 행진을 마치고 나니 남은 대오는 50여명 정도, 작은 대오의 행진이었지만 다양한 문화를 볼 수 있는 재미있는 행진이었습니다.
맨 앞에 민족학교 풍물패가 신나게 길을 인도하며 풍물을 쳤고, 중간에 촛불을 밝히 라티노대오가 이어지고, 행진 맨 마지막에는 cental farmers에서 온 사람들이 아즈텍문명과 관련 있다는 라틴 아메리카 원주민 춤을 추며 행진에 함께 했습니다. 나이가 가장 어린 사람과 가장 많은 사람이 앞장서 향을 밝히고, 흰옷 입은 사람들이 춤을 추며 행진을 했는데 그 춤은 영적인 느낌을 강하게 주는 춤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행진 시작하기 전에 cental farmers 사람들이 향을 피우고 동서남북, 하늘, 땅에
하는 의식을 치루며 행진준비를 하고 있다.
1시간이 채 안되는 행진을 마치고 라플라시타 성당에 마련 된 무대에서 조촐한 집회가 계속이어 졌습니다. 우리가 대오에서 빠질 즈음 남은 사람들은 스무여명. 그들은 다음날 새벽 6시 새벽미사 까지 보고 집회를 마칠거라고 했습니다.
집회 참가자는 적었으나 사람들은 크게 신경쓰지 않는 듯 했고 라틴노래에 맞춰 계속 몸을
흔들어 댔다. 문제의 본질에 무관심해 보이기 조차 하는 그들의 낙천성이 부럽기 조차 했다.
이날 집회는 문화제 형식의 집회였기에 많은 라틴가수들이 나왔습니다. 그 덕에 저는 신나는 라틴 춤과 음악이 있는 이들의 집회(문화제)를 즐길 수 있었습니다. 그날 행사에 출연한 가수들은 라티노 커뮤니티에서는 꽤 알아주는 사람들이라더군요
이번 주는 adult school이 개학을 한 주라서
교재진도를 나가지 않고 있다.
대신 선생님이나 반친구들, 반에 대해 궁금한 것을 질문을 하거나
주제를 정해 이야기 하는 시간을 갖고 있다.
이야기를 하다 틀리면 그때 그때 선생님이 고쳐 준다.
돌아가면서 모두 이야기를 해야 한다.
어제는 다행히 내 차례가 오지 않았는데 오늘은 오고 말았다.
나는 내가 하고 있는 일을 소개 하겠다고 하고
이민자와 시민들의 권리를 위해 일하는 곳이라고 소개 했다.
그리고 9월 9일 이민자 권리를 위한 집회가 있다고 알리고
준비해 간 홍보물을 나누어 주었다.
몇번 선생님이 틀린 부분을 고쳐 주긴 했지만 무사히 간단한 소개를 마칠 수 있었다.
모두 박수를 쳐 주었다.
수업이 끝나고 나서 현관에서
남은 100여장의 선전물을 다른 반 학생들에게 마저 나누어 주었다.
이민자들인 학생들은 바쁘게 가다가도 멈춰서 그것을 받으면서
내 인사에 답을 하거나 고맙다고 한다.
한국에서 볼 수 없는 풍경이다.
한국에 있을 때, 출 퇴근길 굳은 표정으로 오가는 사람들에게 선전물을 건네면
더러 잘 받는 이들도 있었지만 매몰차게 거절하거나 몇걸음 안가 버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거절하는 이 없이 모두 받으며 고맙다는 인사를 곁들일 때
그것이 입에 배어 습관이 된 인사 일지라도 기분은 좋다.
이곳으로 와서 6월 중순께 부터 고등학교에서 하는 Adult school을 다니고 있다.
고등학생들 수업이 끝난 오후 3시부터 하루 3시간씩 두번, 직업훈련관련 교육이나
영어를 가르치는 학교이다.
주로 라틴노들이 많고 더러 중동, 아시아 지역 학생들도 있는데 서류미비자들도 많다.
나는 그곳에서 저녁 6시 부터 9시까지 영어를 배우는데 한학기 수강료가 1달러이다. ㅎㅎㅎ
그런데 교재비는 20달러인데 그리 비싸다고 할 수는 없다.
한국 어느 사설학원교재로 쓰는 책이 이곳 교재인데 하루에 한장씩 공부하고
짝을 이뤄 서로 읽고 대화하는 반복연습을 주로 한다.
두달 정도 그곳을 다니면서 느낀 것은 그곳에서 일하는 직원들이나 교사들이
문화가 다르고 말이 잘 안통하는 성인들을 상대로 하면서
절대로 서두르지 않고 차분하고 친절하게 인내를 갖고 학생들을 대한다는 것이다.
첫날 받은 인상이 차가운 백인의 모습이 아니라
따뜻한 품성을 가진 교육자들의 모습이었는데 그 느낌은 아직도 여전하다.
오늘은 개학날이었다.
내가 6월 중순부터 그곳을 다닌 뒤로 7월 말과 8월 말에 각각 2주 정도 방학이 있었다.
이번에는 한 레벨 올라가 반도 바뀌고 담임도 바뀌었다.
처음에는 말도 안되고 영어가 들리지도 않아, 또한 내가 이곳에 오래 있을것도 아니기에
전에 공부하던 반에 그대로 있으 려고 했다.
하지만 담임이었던 멘델슨 선생이 한 레벨 올라가도 된다고 하여 새로운 반도 경험 할 겸 반을 바꾸었다.
새로운 담임은 마크 파울린이라는 50이 넘은 25년 경력의 선생이다.
그는 재미있으면서도 침착했던 멘델슨과 달리 좀 시끄럽고 정신없는 것 같은데 매우 열성적이다.
수업시간 내내 들리는 말은 듣고 안 들리는 말들은 흘려 보내면서
영어는 책을 갖고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말을 해 버릇 해야 한다는 그의 경험에서 나온 지론을 반복해 들었다.
수업을 마치고 뉴 올리언즈에 가느라 인사를 못 나누었던 멘델슨을 찾아 갔다.
항상 40대 후반 잘 생기고 인상 좋은 옆집 아저씨 같던 그가 첫수업이라서 그랬는지 넥타이를 매고 나와 있다.
학생들이 스스로 반 규율을 만들고 그 규율에 선생도 같이 참여했던 모습 속에서
말은 잘 안통했지만 교사로서 좋은 품성을 느낄수 있게 했던 선생이다.
처음에 그가 내게 말을 걸면 겁이 나고 한 마디도 안들렸는데 이제 조금씩 들린다. ㅎㅎㅎ
오늘도 역시 나의 영어실력으로 인해 많은 대화는 나눌 수 없었지만
뉴 올리언즈에 갔다 왔다는 것과 감사하다는 말을 전했다.
절대 정답을 주지 않고 학생들이 스스로 할 수 있도록 자상하게 이끌어 주고 훈련시키는
몸에 밴 그들의 교육법은 눈여겨 배울 만 하다.
해마다 5월 1일을 앞두고 세계노동절 교안을 손 보고, 노동절 유래와 의미를 교육을 하곤 했었다. 그 시작은 항상 1886년, 8시간 노동제 쟁취를 위해 투쟁했던 미국 시카고 노동자들의 투쟁과 노동운동 지도자들이 사형장의 이슬로 사라져 간 헤이마킷 사건이었다. 더불어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고 법정에서 외쳤던 노동운동 지도자 스파이즈의 최후 진술과 가슴 때리는 교훈을 이야기하곤 했었다.
그런데 미국노동자들은 5월 1일을 노동절로 기리지 않고 있다. 그들은 9월 첫번째 월요일을 노동절로 기념하고 있다. 그 유래를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헤이마켓 사건 당시, 노동자들이 폭동을 일으킨 날을 노동절로 기념할 수 없다고 생각한 당시 대통령이 9월 첫번째 월요일을 노동절로 정하고 국가 공휴일로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초기에는 5월 1일을 기념하는 노동진영과 미 정부가 정한 노동절을 기념하는 노동진영으로 나뉘기도 했었다지만 현재 미국노총(AFL-CIO)도 미 정부가 정한 날을 노동절로 기념하고 있다.
결국 노동자 투쟁계승을 가로 막으려는 미 정부의 정치적 의도와 개량적 노조운동으로 인해 세계노동자들이 단결하고 투쟁하고 메이데이가 미국에서 사라져 버렸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 LA UNION은 천사들의 성모 가톨릭 성당에서 아침식사를 곁들인 행사와 노동절 미사를 진행했다. 우리는 8시 즈음에 그곳에 도착하여 아침식사를 하며 행사에 함께 했다.
다양한 업종에서 일하는 노동자 대표들이 나와 자신들의 노동현실을 이야기하며
최저임금, 노동기본권의 필요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노동절 행사는 최근 각종 행사에 자주 등장하여 내게도 낮이 익은 미국노총 LA 사무총장 마리아 엘레나 두라스의 사회로 진행됐다. 오늘의 핵심 주제는 'Rebuinding Los Angeles Middle class Jobs!. 저임금과 일자리 부족을 반영한 주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최근에 캘리포니아 주에서는 시간당 7 달러로 최저임금을 합의 했다는 기사를 본 적 있다. 그런데 호텔노동자, 농장노동자 등이 나와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는 저임금과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노동현실을 이야기 했다. 한국 노동자들과 너무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행사가 진행되는 동안 이민개혁은 일관된 주제로 부각되었다.
행사 앞부분에 멕시코 계 이민자인 LA시장이 나와 노동절 축사를 하고 있다.
그가 나오자 참석자들은 열광을 하며 반겼다
그러나 행사 내내 사회자를 비롯해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은 11월 중간선거에서 공화당 후보인 아놀드 슈워 제너거를 떨어뜨리고 민주당 후보를 당선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마치 11월 7일 중간선거를 앞두고 민주당 켈리포니아 주지사 후보 선거운동판 같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다. 아놀드 슈워 제너거와 경합을 벌이고 있는 민주당 주지사 후보는 필 엔젤리데스이다. 그는 현재 주 재정감사인데 노동조합과 이민단체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민주당 주지사 후보 필 엔젤리데스가 나오자 사람들은 미리 나누어 준 피켓을 흔들며 환호를 했고
그의 연설로 행사는 절정이 이르렀다.
행사가 끝나 갈 무렵, 민주당 의원들이 무대에 올라왔는데 앞치마를 두른 사람들이 있었다. 웬일인가 했더니 행사장 입구에서 아침식사를 나누어 준 사람들이었다. 들리는 이야기로는 오늘 아침식사도 의원들이 예산을 댔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들에 이어 필 엔젤리데스가 나와 마지막 연설을 했다.
현대적이며 웅장하고 아름다운 '천사들의 성모' 성당에서 노동절 미사가 열리고 있다.
노동절 행사를 마치고 우리는 맞붙어 있는 '천사들의 성모' 성당으로 이동했다. 오늘 미국에서는 대부분 성당에서 노동절 미사를 본다고 하는데 LA '천사들의 성모' 성당은 나름대로 유서 깊은 성당이라고 한다. 이곳에서는 1,500여명이 참석해 노동절 미사를 진행했는데 갈수록 보수화 되는 한국 종교계와 달리 미국에서는 종교단체에서 노동이나 이민개혁 관련활동에 적극 앞장서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때문에 각종 행사 전 신부나 목사가 나와 기도 하는 모습을 자주 본다.
올 봄, 체류신분을 증명하지 않는 이민자에게 각종 혜택을 제공하는 것을 금지하는 연방법안이 쟁점이 되고 있을 때, LA 대교구 마호니 추기경은 "법 상관없이 불체자를 도우라"는 지침을 내려 파문이 되기도 했었다. 아마도 이민개혁과 노동기본권에 대한 문제가 인도적이며 인권보호 측면이 강하기 때문인듯 하다. 반면 미국 내 한국 종교계는 이민개혁과 불체자 지원활동에 아주 소극적이라는 비판도 높다.
오늘 미국 노동절 행사는 LA만이 아니라 곳곳에서 진행이 됐다. 역사적인 미국 시카고에서는 9월 1일 부터 4일까지 노동자들이 '이민노동자의 정의를 위한 행진'을 벌인다고 한다. 시카고에 있는 마당집은 주도적으로 그 행사에 함께하고 있으며 LA에서도 몇명이 노동자들의 행진에 함께 하기 위해 시카고로 갔다.
워싱턴에서는 9월 7일 '이민자 권리를 위한 동부지역 대규모 집회'를 열 것이라고 한다. 뉴욕 마당집도 버스를 대절하여 참석할 것이라고 한다. LA에서는 오늘 노동절 미사에 이어 9월 9일 저녁 '이민자 정의를 위한 집회'를 갖는다고 한다. 그러나 노동조합들은 오늘 노동절 미사에 많이 참여 했지만 9월 9일에는 적극 참여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9월 4일 오늘, 미국의 노동절 행사를 지켜보면서 머릿 속을 떠나지 않는 생각이 있었다. 왜 노동조합의 독자적인 요구와 투쟁이 없는가 하는 것이었다. 신자유주의 첨병인 나라, 이민자 문제와 인종문제가 심각한 나라, 세계평화를 위협하는 나라에 살고 있는 노동자들이 왜 자신들의 목소리를 당당하게 내지 못하는지 답답하기만 했다. 결국 그것은 개량의 역사가 만들어 놓은 관성화이며 타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운동이 어느 시기, 어떤 길로 가느냐에 따라 역사가 달라진 다는 것을 쓰린 마음으로 느낀 미국의 노동절이었다.
뉴 올리언즈 카트리나 1년이 지났건만 현장에선 아직도 악몽이 계속되고 있었다. 주민들이 하루 빨리 복귀하여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아무런 시설도 갖추지 않은 채 만신창이 그대로 폐허의 땅으로 1년을 맞고 있었다. 전기보급률이 50%이고 학생을 받는 공립학교가 7%, 결국 흑인거주 지역은 전기도 아무런 공공시설도 없다는 얘기다. 그러니 2/3 넘는 인구가 뉴 올리언즈를 떠나 돌아 올 줄 모르고 있는 것이다.
그런 수해 현장에서 인종차별의 모습을 역력히 확인 할 수 있었다. 주민들은 제방을 다시 쌓을 것을 가장 첫번째 요구로 내 걸고 있지만 미 공병대는 똑같은 모양의 제방을 그자리에 다시 쌓고 말았다.
일년전 모습 그대로 주저 앉아 버린 집, 그 집을 지키던 나무 마저 죽어 버렸다.
가장 피해가 심했던 뉴 올리언즈 9번가 흑인 밀집 지역의 현재 모습이다.
나무로 막은 창문에 그려진 붉은 엑스 표시 각 칸에는 각종 숫자가 쓰여 있다.
수해 이후 이 집을 조사한 날짜를 비롯한 각종 기록들을 적은 것이라고 한다.
맨 아래에는 그 집에서 발견 한 사망자 수를 적는데
다행히 이 집에서는 사망자가 나오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카트리나 보다 더 무서웠던 수해의 원인이 된 제방이다. 8,9번가를 사이에 두고 세워진 저 제방이 양쪽 동네를 지켜 주는 유일한 버팀목이다. 그런데 4급태풍을 견딜 수 있게 만들었다는 저 제방은 3급태풍 카트리나를 견디지 못하고 무너졌다. 그리고 강물은 넘치고 넘쳐 8번가와 9번가를 삽시간에 삼켜 버렸다.
미 공병대가 카트리나 이후에 다시 쌓았다는 시멘트 제방이다.
다시 한번 죽음의 도가니로 몰아 넣는 미친짓이라는 생각 밖에 안들었다.
8.9번가를 흐르는 강가에 제방을 쌓은 미 공병대가 9번가 빈집을 포그레인으로 밀어 버리고 있다.
그날 우리는 그들이 공사하는 바로 앞 교회를 Gutting하려 했는데
저들이 방해하는 바람에 몇시간 늦게 gutting를 시작해야 했다.
이것은 중산층들이 사는 동네의 제방이다. 호수와 이어지는 마을에는 1단계로 계단식 제방을 쌓았고
2단계로 잔디밭에 나무를 심어 바람과 물을 막는 장치를 만들었다,
그리고 3단계로 저 안쪽에 흙으로 다시 제방을 쌓은 것이 보인다.
그리 대단해 보이는 공사도 아닐듯 한데 생존기반을 송두리째 위협받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미 정부는 가난한 흑인들이 사는 동네에는 저런 제방을 쌓지 않고 있다.
나무 기둥만 남겨 놓고 집안의 모든 것을 끄집어 내는 작업을 gutting이라고 했다.
그래야 새로 집을 수리하고 사람이 살 수 있도록 허가가 난다는 것이다.우리는 아침 7시에 일어나 각자 아침식사를 하고 차량을 이용해 9번가로 gutting하러 나간다. 그곳에서 보통 2시까지 거딩작업을 한다는데 우리가 가 있는 동안은 들쑥날쑥 했다. gutting은 체력적으로 매우 힘든 일이었고 발암물질 등이 있어 복장을 단단히 하고 들어가 일을 해야 했다.
연방정부는 만1년인 8월 29일까지 복귀하지 않는 집들은 모두 몰수해 버릴거라고 한다. 이에 여러 커뮤니티들이 중심이 되어 gutting작업에 비지땀 흘리고 있다. 우리가 거딩을 한 집은 4월부터 시작한 poc 거딩의 75번째 집이라고 했다.
겉은 멀쩡해 보이지만 집안은 천정과 벽, 살림살이가 주저앉아 버리고 진흙이 쌓여 엉망이다.
엄청난 일을 하는데 일이 참 수공업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 그 많은 집들을 거딩할지.
8월 29일이 지나면 정부는 빈집들을 몰수해 버린다는데 걱정스러웠다.
나무 골조만 남겨 놓고 모두 걷어 낸다. 큰 가구들을 꺼내고 벽지를 모두 뜯어 내고
모든 살림을 밖으로 빼냈다. 집안에 쌓인것들을 삽질을 해 리어카에 실어 나르는데 삽질도 힘들도
바퀴 하나짜리 저 리어카는 운전하기 참 어려웠다.
거딩을 마친 다른 집. 기난한 동네 집들은 통로가 좁고 작은방들이 여러개 있어 거딩 속도가 느리다.
저 집은 거딩이 끝난 집이다. 이제 저 나무 기둥만 남은 집에 새로 사람이 살 수 있는 집을 만들어야 한다.
가지런히 개여 있는 침대보에 이집 주인의 꼼꼼한 손길이 묻어 난다.
물에 잠겼던 이 마을에서는 사람이 많이 죽었고 죽은사람 수만큼이나 많은 나무들도 죽어 있었다.
gutting하던 손을 멈추고 텅빈 마을 인적없는 길을 바라보니 많은 생각이 떠 오른다.
People's Organizing Committee, 즉 POC는 뉴 올리언즈 조직활동가들로 구성 되어 있으며 '밑으로부터 조직'을 활동 원칙으로 삼고 있다. 우리는 POC와 연대하여 뉴 올리언즈로 갈 수 있었다. 그곳에서 과거 10여년 노동조합 조직활동을 했다는 Curtis를 만났다. 그는 맨 먼저 우리에게 poc가 무엇인가 물었고 people's organzing committee는 민중해방의 길을 민중과 함께 찾는 조직이라고 소개했다. 더불어 그 기본정신은 bottom up organizing 이라고 한다. 뉴 올리언즈 땅에서 '밑으로 부터 조직'활동을 하는 사람들을 만나다니.
[오리엔테이션] CULTIS씨는 15명의 우리 일행을 모아 놓고 직접 오리엔테이션을 진행했다. 맨 처음 POC가 무엇인가 하는 질문으로 말 문을 연 그는 3시간여 동안 질문과 어느 정도 이해했는지 중간확인을 곁들이며 매우 정력적으로 오리엔테이션을 이끌어 나갔다. 그는 인종차별과 미국사회 구조적 문제를 오리엔테이션 중심주제로 잡았으며 계급모순보다 인종문제를 더 큰 모순으로 보는 듯 했다. 오리엔테이션 마지막에 내 가족, 주변사람들에게서 보고 들은 휼륭한 삶을 각자 이야기하는 시간이 있었다. 당장 생각이 안 날 경우 통과하고 다음에 다시 한바퀴 돌 때 이야기하는 형식이었는데 그 과정에서 각자의 또 다른 면을 이해 할 수 있었다.
다음 날 오후, 오리엔테이션 실습이 있었는데 그것은 house visits를 중심으로 진행됐다. curtis가 생존자역할을 맡고 두명의 학생이 생존자들을 만나 이야기 하는 것을 실습하는 것이었다. curtis는 호전적 분위기 또는 운동의 풍운아(?) 같은 흑인과 백인의 피를 섞어 받은 운동가다.
[debrefing] poc마당에서는 매일 밤 하루 일과을 마치고 curtis를 포함한 모든 식구들이 둥그렇게 모여 하루를 이야기 한다. 여는 마당을 위한 간단히 의식(노래, 문화 등)을 하고, 각자 하루 소감을 1분씩 이야기 한다.
그리고 15분 동안 주제를 정해 주제토론을 벌인다. 그 다음 다음 날 떠나는 자원봉사자들이 있으면 그들로 부터 활동기간 좋았던 점 나빴던 점을 듣고 작별 인사를 나눈다.
[debrefing] 저 불이 debrefing시간 우리들의 story circle를 지켜 주었다.
[거딩화] 거딩하러 갈 때 신는 신발이다. 녹슨 못도 많고 위험하여
꼭 저 신발을 신고 거딩을 해야 한다.
[점심]poc에서는 자원봉사자들이 각자 식사를 해결한다. 거딩하러 가서 먹을 샌드위치인데
함께 간 학생들이 전날 주문을 받아 저녁에 미리 만들어 놓았다. 호일에 주문자 이름이 쓰여 있다.
[거딩복장] 모두 물에 잠겼던 집안은 겉보기보다 더욱 심각하게 무너져 있다.
발암물질과 각종 병균 때문에 거딩하러 집안에 들어 갈 때는 꼭 저 복장을 해야 한다.
[기념사진] 우리가 떠나 오던 8월26일 토요일 오후엔 block party를 했다.
벽돌을 쌓아 뉴 올리언즈를 재건하자는 의미의 파티인데 오후에 비가 많이 내려 생존자들이
많이 오지 않았다. 뉴 올리언즈를 떠나기 전, 기념촬영을 했다. 지팡이를 들고 있는이가 Curtis이다.
오랜 세월 손때가 묻고 수많은 추억이 배어 있는 그 어떤것도 챙길 겨를 없이 수마는 마을을 삼켜 버렸다. 우리가 Gutting을 한 집은 POC에서 Gutting하는 75번째 집이라고 curtis의 또 다른 아들 무싸는 알려줬다.
가난한 흑인 밀집 지역 9번가를 Gutting 하면서 만나는 카트리나와 수해의 유물들을 보면서 마치 뉴 올리언즈 9번가 주민들을 만나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미국으로 오니 재채기를 하면 주변사람들은 모두 'bress you!"를 외쳐준다. 그러면 재치기 한사람은 'thanks!'라고 답해 준다. 그 이유를 물어보니 과거 영국에 페스트가 유행할 때 병의 증세 중에 하나가 기침을 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기침을 하면 그 사람의 영혼이 나간다고 생각 했는데 그래서 빨리 'bress you!를 외쳐 주면 나온 영혼이 다시 들어 간다고 생각 했다고 한다. 거기서 유래하여 지금까지 재채기를 하면 'bress you!'를 외쳐 준다고 한다.
우리가 거딩을 한 거딩 75번째 집에선 한사람의 시신이 발견됐다고 표시을 되어 있었다. 나는 거딩하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 수없이 'bress you!'를 외치곤 했다. 손때와 추억이 밴 물건들은 물빠진 그대로 남아 있으되 영혼이 빠진 이 집에 하루 빨리 사람의 온기가 가득하길....
[멈춤의 의미] 8시 6분에 시계는 멈춰섰다, 너무도 또렷한 저 시간!
수마는 저 시간에 시계를 멈추어 세웠고 마을을 덮쳤을 것이라 생각에 이 사진을 찍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우리가 거딩했던 집 창가에서 발견한 아래 손목시계도 똑같은 시간에 멈추어 서 있다.
[꼭 같은 멈춤]결혼 예물쯤 됨직한 시계가 9번가 거딩 75번째 집 창가에 나 뒹굴고 있었다.
시계의 시침과 분침은 위 벽시계와 똑같은 시간을 가르키고 있다.
모든 사진은 뭉개져 형체조차 알아 볼 수가 없었다. 나는 이 집에 실았던 사람들의 흔적을 찾고 싶어 쉬는 시간이면 냄새 나는 사진다발들을 뒤지곤 했다. 그 속에서 코팅사진 두장을 찾아냈다. 사진 속 저 멋진 폼을 잡은 여인이 이 집의 주인이었을까?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할까? 이제 gutting을 하니 어딘가에서 집으로 돌아 올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이 집에서는 한명이 시신이 발견됐다고 하는데 혹시 저 여인은 아닐까?
아니면 어린 아기 신발 한켤레와 3-4살 배기 아이의 신발이 나왔는데 혹시 그 아이들은 아닐까?
이런 상처 속에서 뉴 올린언즈 주민 가운데 31.2%가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다고 하니
그 충격과 아픔을 실감할 만 하다.
거딩을 마친 집에 뎅그러니 남아 있던 저 지갑! 그 속에는 각종 카드들이
지갑 주인의 작은 일상을 말해 주는 듯 하다.
물빠진 그대로 여성신발이 나 뒹굴고 있다.
저 빨간 구두를 신고 여인은 어느 곳을 다녔을까 잠시 생각해 본다.
75번째집을 거딩하는데 앨범, 책, 비디오 테이프 등이 있는 방이 나왔다.
그 속에 STAR WARS, 제다이의 귀환 같은 낮익은 비디오 테이프가 나왔다.
gutting을 했던 집 마당에 시디가 통째로 나와 있다.
이 집에 살던 사람들은 어떤 음악을 즐겨 들었을까 궁금하여 몇개를 뒤적여 보았는데
진흙 속에 복잡한 영어들을 알아 먹기 힘들다.
그리 넓지 않은 집은 좁은 통로를 사이에 두고 7-8개의 작은 방들로 나뉘어져 있다.
통로를 따라가니 맨 끝에 주방이 있었다. 찬장에는 끼니마다 꺼내 사용했을 그릇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앨범과 책들이 진흙 속에 뒤엉켜 힘겨웠던 생존을 말해주고 있다.
복구의 의 길이 멀기만 한 올리언즈 곳곳에 카트리나 수해의 유물들이 저렇게 나 뒹굴고 있다.
8월 25일 오전, 유명한 뉴 올리언즈 관광지 프랜치코트를 찾았다. 제방 위에 만들어 진 이 관광지는 불과 몇분 거리에 수마가 할퀴고 간 죽음을 땅을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 스페인 또는 프랑스 풍 건물이 들어 선 이 관광지는 국제적으로 유명하고 그 축제도 유명하다고 한다.
재즈의 고향 뉴 올리언즈 프랜치 코트 거리에서 정작 재즈의 주인공인 흑인들의 모습은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아름다운 관광지에는 관광지 특유의 한가로움과 역사 깊은 낭만이 흐르고 있었다.
뉴 올리언즈 관광 화보에서 본듯한 장면이다. 사람들은 성당 앞에서 말을 타고 과거
스페인과 프랑스 령이었던 그 시절의 뉴 올리언즈를 투어 한다.
기념품가게에는 재즈를 연주하는 흑인들의 인형과 사진이 어김없이 자리잡고 있다.
그들은 단지 백인을 위한 관광상품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뉴 올리언즈 엽서들이 재즈 선율을 안고 기념품 가게에 전시되어 있다.
이고 있는 하늘은 하나건만 불과 몇분거리 생죽음의 현장과 이 거리는 무관하기만 하다.
뉴 올리언즈에 가 있는 동안 하루는 페루, 볼리비아에서 온 이주 노동자들이 기자회견을 한다고 했다.
그리고 그 전날 저녁 Debrefing 시간에 그곳에 가는 것에 대해 전체토론을 했다. 일부 고등학생들은 우리가 왜 이주노동자 기자회견에 가야하는지 이해를 못하기도 했지만 토론을 통해 기자회견팀과 gutting팀으로 나누었다.
기자회견을 하는 노동자는 호텔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라고 했다. 6개월 노동비자(H2B)로 미국에 온 이들에겐 미국으로 오기 전, 장미빛 아메리칸 드림이 있었다. 그러나 그 꿈이 악덕 자본가의 일방적 계약 파기로 깨져 버리고 남은 것은 저임금 노동착취였던 것이다. 그들은 자본가에게 사전경고를 했지만 무시당했고 결국 기자회견까지 왔다고 한다. 강제추방도 서슴없이 자행되는 이 나라에서 노동비자를 가진 노동자들이 기자회견을 함으로 어떤 불이익이 있을 법도 하건만 이들은 전문단체의 지원을 받아 기자회견을 결심했다.
이날 기자회견은 퍼포먼스, 불법행위 서한(?) 전달 등으로 이어졌는데 도로 건너편에서 백인남자가 기자회견을 방해하며 고래고래 악을 써 댔다. 그러자 일부 언론은 그를 취재하러 간다.
미국에서는 그런 백인우월주의자들의 횡포가 잦고 특히 국경지대에서는 더욱 극심하다고 한다.
그런데 노동자들이 호텔측에 서한을 전달하는 사이, 그 백인 남자에 의해 호텔 문이 열렸는데 대오는 굳이 안으로 들어가려 하지 않는다. 나는 행여 그 문이 닫힐까 꼭 붙들고 있었는데 우리 대오 중 누군가 내 손을 풀고 문을 닫는다.
기잔회견을 하는 노동자들의 심정을 생각했다. 찻날 첫 투쟁을 하면서 긴장되고 불안하기는
한국이나 미국이나 마찬가지 아닐까 싶었다. 그래서 더욱 많은 사람들이 기자회견에 함께 했다.
노동자들은 노동비자를 크게 복사하여 들고 나왔다.
미국에는 다양한 종류의 비자가 있는데 H2B는 노동비자를 의미한다.
미국에서는 현금이나 카드 이외에 사진과 같은 개인수표라는 것을 현금이나 카드처럼 사용한다.
2최근 캘리포니아 주 최저임금을 시급 7달러로 합의했는데 이들의 임금은 2주에 18달러 8센트라고 한다.
그들이 임금으로 받은 개인수표를 크게 복사해 나왔다.
기자회견장에 들고 나온 피켓, 알수 없어 물어보니 '노동탄압 중단!'의 의미라고 한다.
노동법위반 사실을 적은 서한을 전달하는데 참으로 맥빠진다. ㅎㅎ
적어도 내가 이해하기에는 문을 열라는 의사표시도 항의표시도 없이 현관 아래쪽으로 서한을 밀어 넣는다.
파란 옷을 입은 저 오만한 백인우월주의자에 의해 현관 문이 열렸건만 아무도 들어가려는시도를
하지 않는다. 이날 전술이 저기까지였을까? 여지가 보이기만 하면 치고 들어가 항의를 하고 분노를
표시해 어떨 때는 대책이 안서기도 하는 우리와 너무 다르다.
2006년 8월 18일 밤 8시쯤 LA를 출발, 그 이틀 뒤인 8월 20일 밤 11시쯤 뉴 올리언즈에 도착했다.
뉴 올리언즈 수해복구를 하러 가고 오면서 미국의 남부대륙 3/4정도를 횡단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캘리포니아-> 애리조나->뉴 멕시코->텍사스->오크라호마->다시 텍사스->루지애니아.
과거 멕시코 땅이었던 위 지역들을 달려 뉴 올리언즈로 향했다.
미국의 서쪽은 산악지대이고 동쪽은 평야지대 이다. 또 서쪽을 사막지대 이고 동쪽은 숲이 우거져 있고 더러 정글도 있다고 한다.LA에 있을 때는 캘리포니아가 사막기후라는 것을 실감 못했었다. 그러나 내륙으로 들어 갈수록 척박하기 그지 없는 사막지대가 끝없이 펼쳐지고 있었다.
서쪽에서 동쪽으로 갈수록 사막은 끝나고 드넓은 옥토가 펼쳐지고 비도 뿌려 줬다. 특히 부시가 태어 난 텍사스를 지날때는 이 지역이 얼마나 드넓고 비옥한 땅인지 금방 알아 볼 수가 있었다.
어쩌면 캘리포니아 지역 농장들은 아시아 시장을 겨냥해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미국 중 동부의 옥토은 광활했다.
뉴 올리언즈 가는 길, 가도 가도 끝없는 지평선 너머 너머 사막이 있었고 사막이 끝나면 황토색 옥토가 펼쳐져 있었다
캘리포니아 주 내륙 사막지대. 더위와 가뭄에 풀잎조차 말라 있다.
참고로 이 지역 사막은 모래사막은 아니다.
장난감 같은 화물열차들이 애리조나 사막지대를 가로 지르고 있다.
대륙을 횡단하면서 사막지대를 달리는 저런 화물열차를 종종 볼 수가 있었다.
서부 영화에서 본듯한 장면. 애리조나 어디쯤 됐던거 같다.
영화에서 본 그대로 뉴 멕시코는 척박했다.
사막의 끝자락, 곡식은 자랄 수 없는 저런 돌산들이 이어졌다.
화물차가 뉴 멕시코를 가르지르고 있다.
그런데 열차에 실은 컨테이너 박스 가운데 HANJIN이라 쓰인것이 많이 보였다.
부산항을 출발해 태평양 건너 미 동부 어디까지 가는 화물이 아닐까 싶다.
뉴 멕시코 어느 마을의 아침, 고속도로 옆 가난한 민가, 평화로운 아침 풍경이다.
텍사스는 달랐다. 황토색 옥토와 대규모 농장이 끝없이 펼쳐져
한 눈에 부자동네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했다.
택사스 농장 지대. 달리는 차창 너머 농장에 말들이 풀을 뜯고 있다.
8월 18일 부터 소형버스를 타고 15명이 LA를 출발,
7일 동안 뉴 올리언즈 수해복구 지원 활동을 하다
오늘 28일, 다시 LA로 돌아 왔습니다.
지난 6월에 이어 이번에 출발한 팀은
고등학생들이 중심이었기 때문에 저는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학생 중에 한 친구가 갑자기 못가게 되면서
이곳에서 활동하는 분들의 배려로 그 빈자리에 제가 끼게 되었습니다.
갑자기 출발했기 때문에 연재하던 글을 마저 못올렸는데
오늘 돌아와 가기 전에 썼던 글을 수정 없이 올립니다.
그리고 곧이어 제가 직접 보고 온
뉴 올리언즈 수해 현장을 다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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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가 지낸 7개월이 내 7년보다 훨씬 바쁘고 알차 보이는 건 왜죠? 살짝 부럽다는 생각도 들고...ㅎㅎ...전화 한 번 주세용.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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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이 탄거야 부은거야? ㅋㅋ모쪼록 닥치는 세상에 양팔과 두 다리를 흠뻑 적시고 돌아오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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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떠나기 전에 살짝 달뜬 분위기 인가? 히히히.이제 인터넷 되는 곳에 도착했나 봐요. 걱정 많이 했는데... 온몸으로 느끼고 싸우고 버리고 챙기고 고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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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첨으로 덧글 단다. 선주씨 모습 보니까 참 좋다. 여행준비 단단히 한 거 같아서 좋고,,, 믿는다, 한선주!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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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네 홧팅!!!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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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나의 의지와 현제의 모습이 넘 존경스럽게 보여요화팅하시고 건강한 웃음 잃치 마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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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숙, 흐린날, 사막은, 황여사, 그리고 계주님 ㅎㅎ, 희영 모두 모두 고마워요. 저는 여행 잘하고 있습니다. 크리스 마스와 연말 연시 건강히 잘 보내시길...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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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싶다.^^